소설리스트

34화 (34/59)

“……!”

“나하고 위장 연애를 하는 거야. 네 루머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때까지만. 아, 혹시 내 얼굴이 알려질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진짜도 아니고 사람들한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을 하는 건데, 뭐. 친구 뒀다 뭐하겠어? 어려울 때 돕는 게 진정한 친구지.”

“안나.”

“게다가 네 덕분에 나도 유명 인사가 되는 거니 일석이조 아니야? 카메라 앞에 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생각하며 거절하려 했다.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안나마리아에게 적잖은 민폐를 끼치는 것이니까.

게이 의혹설이 떠도는 자신의 루머를 잠식시키기 위해 친구를 팔 순 없다는 태도를 취하던 요한은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인데?’라며, 안나마리아의 말을 듣고 나타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며 저를 설득하는 앨리슨을 마주했다.

“안나 말대로 다들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우리도 대응은 해야지.”

“하지만 앨리!”

“요한, 너 설마 게이 축구 선수로 완전히 낙인찍히고 싶은 거니?”

“……!”

“그런 건 아니지?”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순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요한은 앨리슨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게이 축구 선수.

[비켜, 이 게이 자식아!]

16강전 경기가 열리던 날, 저를 향해 야유를 퍼붓던 수많은 관중과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로버트 돕슨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그날 벌어진 일로 인해 로버트 돕슨이 중징계를 받을 예정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상대 팀 선수뿐 아니라 동료 선수들의 냉혹한 시선까지 마주했던 터라 저도 모르게 멈칫하게 됐다.

요한이 얼굴을 굳히고 있는 사이 앨리슨이 말했다.

“다행히 마침 병원도 다녀야 하니 안나마리아를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네.”

“…….”

“나 대신 안나와 함께 병원에 다녀. 파파라치들이 계속 널 살피고 있을 테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아마 좋은 먹잇감이 될 거야.”

대외적인 일은 제게 맡기라며 가슴을 탕탕 두드리던 앨리슨은 입을 다물어 버린 요한에게 제 할 말만 남긴 뒤 안나마리아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하겠다며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번 A매치에는 차출이 안 돼서 정말 다행이야. 그 기간 동안에는 푹 쉴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리그컵 경기가 치러진 이후 며칠 뒤.

한국 시간으로 11월 5일 오전 10시, 그리고 영국 런던 시간으로는 오전 1시쯤에 11월 A매치에 참여할 국가 대표 선수들의 명단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리그컵 경기에서 얻은 뇌진탕 증상을 비롯하여 여러 구설수에 휘말려 있던 요한은 한국 국가 대표 팀 감독인 루케인 마르셀로로부터 이번 달은 휴식을 취하라는 전언을 받았다. 다가오는 신년에 있을 아시안컵에 차출될 요한이 최상의 컨디션을 발휘해 주길 바라는 마르셀로 감독의 배려 덕분이었다.

안나마리아는 당연히 요한이 11월 A매치 원정에 뽑힐 것이라 생각해 연신 걱정하고 있었다. 아침에 그 소식을 접한 그녀는 그와 함께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방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요한은 안도하는 안나마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말없이 쓴웃음을 흘렸다.

“어머, 요한. 왜 그런 표정이야?”

안나마리아는 그녀의 물음에 어리둥절해하는 요한을 힐긋거리더니 곧 기다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설마 휴식이 반갑지 않은 거야?”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래, 딱히 반갑지는 않다.

‘다시는 못 나갈 수도 있는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현실이 될까 싶어 입을 다무는 그와 달리 흥, 콧방귀를 뀐 안나마리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몇 번을 말하지만 요한, 뛰고 싶은 욕심보다는 네 몸 상태가 우선이야.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뛰고 싶어도 못 뛰는 상황이 발생한다니까? 그러니까 휴식을 얻으면 얼씨구나, 하고 좋아해야 한다고!”

안나마리아는 언젠가 요한의 전담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다는 농담을 건넬 만큼 요한의 건강 상태에 관심이 많았다. 가끔은 그 농담이 진담처럼 들릴 때가 있을 정도라, 안나마리아의 말은 어쩐지 흘려들을 수가 없다. 요한은 ‘이 기회에 푹 쉬어!’라고 말하며 제 등을 툭툭 두드리는 안나마리아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찰칵!

그때였다.

찰칵, 찰칵!

‘……!’

요한은 어디선가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놀라 제 옆에서 걷고 있던 안나마리아를 멈춰 세웠다.

“응? 왜 그래, 요…… 꺅!”

갑자기 제 손목을 붙잡고선 그의 등 뒤로 끌어당기는 요한의 행동에 안나마리아가 짧게 비명을 흘렸다. 요한은 안나마리아를 제 뒤로 숨기고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정확히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윽, 젠장!”

셔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고 서 있자 그의 시선 끝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슥 움직였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요한을 향해 짧게 욕설을 흘리더니 갑자기 튀어나와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간을 좁히고 있던 요한은 남자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서 있는 안나마리아를 바라봤다.

“안나.”

“어?”

“괜찮아?”

걱정을 가득 담은 요한의 질문에 안나마리아가 ‘으응. 괘, 괜찮아!’ 하고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한은 굳은 얼굴로 안나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내 얼굴이 알려질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진짜도 아니고 사람들한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을 하는 건데, 뭐.]

안나마리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했지만, 벌써 몇 번씩이나 그녀와 움직이던 중에 사진을 찍혔다.

지난 며칠 동안 이미 자신과 그녀 사이를 의심하는 기사가 수십 개나 올라왔고, 각종 인터넷 사이트 및 SNS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앨리슨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요한은 ‘사진 찍힐 줄 알았으면 더 붙어 있을 걸 그랬어.’ 하고 배시시 웃는 안나마리아를 가만히 응시하다 쓴웃음을 흘렸다.

‘이대로는 안 돼.’

게이 의혹을 종식시키기 위해 안나마리아를 이용하는 것은 무척이나 비겁한 짓이다.

비록 안나마리아가 먼저 제안한 일이긴 하지만, 이 일은 비단 안나마리아만이 엮인 것이 아니니.

‘그 사람에게도 틀림없이…….’

민폐인 거겠지.

잠시 생각하던 요한은 얼른 가자며 제 팔을 잡아끄는 안나마리아를 내려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안나마리아 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요한 백 필립의 곁을 지켜 왔다.

어릴 적엔 요한이 영국을 떠나 한국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엉엉 운 전적도 있었다. 그런 요한이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신비로운 이 이웃 소년을 안나마리아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꼬꼬마 시절부터 함께했고, 잠시 헤어져 있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온 친구를 정말이지 아꼈다.

그녀는 런던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요한을 온 힘을 다해 돕고 또 도왔다. 선천적으로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성심은 고운 요한은 가끔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받으며 홀로 괴로워했다. 그럼 그 모습을 지켜본 안나마리아가 그들을 혼쭐내 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친구였다.

왠지 모르게 신경을 써서 보살펴 주어야 할 것 같은 연약한 친구. 이상하게 시선이 가고 이상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소중한 친구.

그런 그가 천천히 마음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요한의 키가 자신의 키를 훌쩍 넘겼을 무렵이었다.

“뭐? 프로? 정말 네가 프로 계약을 했다고?”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괴롭히는 이들을 노려보기만 하던 요한이 하나둘씩 그들에게 반격을 하기 시작할 때쯤, 뿌듯함을 느끼던 안나마리아는 갑작스러운 요한의 발언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이들에게는 지어 주지 않는 미소를 제게 지어 주며 ‘응.’ 하고 대답했을 땐 어찌나 심장이 떨렸는지.

안나마리아는 그때, 자신이 요한을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음을 완벽하게 자각했다.

73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나마리아가 요한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간 그녀가 지켜봐 온 요한은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요한이 겪었던 딱 한 번의 커다란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안나마리아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요한이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 역시, 안나마리아가 제 마음을 숨기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밖에 없는 여자 사람 친구.

요한이 의지할 만한 친구이자 사소한 비밀도 나눌 수 있는 친구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안나마리아가 요한의 변화를 느낀 것은 정확히 몇 달 전부터였다.

“요한!”

“아.”

“왜 그렇게 놀라? 어딜 그렇게 가? 훈련 가는 거니?”

매번 집과 훈련장, 그리고 경기장을 오가던 요한의 외출이 잦아졌다. 그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요한을 지켜 주기로 약속한 안나마리아는 방긋 웃으며 요한에게 다가갔다.

‘어?’

그러자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꼭 부모님에게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자 하는 아이와도 같아 보여 안나마리아는 적잖이 당황했다.

“요한?”

“미안, 안나. 약속……에 늦어서.”

“뭐?”

“먼저 가 볼게.”

바쁘지 않다면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라는 제안을 건네려던 안나마리아는 자신이 붙잡을 틈도 없이 사라지는 요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요한이 저를 두고 먼저 사라진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기에 안나마리아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후로도 그러한 일들은 자주 반복됐다.

[정말 미안해, 안나. 오늘은 선약이 있어.]

[주말에는 일이…….]

[요즘 계속 거절만 하게 되네. 미안…….]

요한답지 않은 행동을 반복하기에 처음에는 자신을 피하는 줄 알았는데, 듣자 하니 앨리슨의 약속까지 피한다고 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고민하던 중, 요한이 문득 새로운 친구로 인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 떠올랐다.

그 친구와 그새 친해지기라도 한 건가, 의하해하던 안나마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The Moon’에 실린 기사를 접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요한.”

그리고 이어진 리그컵 경기 직후.

자신과 연극을 하는 걸로 겨우겨우 요한을 설득했던 안나마리아는 앨리슨이 언론을 다루겠다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를 불렀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요한이 자신을 응시하자 안나마리아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내내 잠잠하던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제대로 직격탄을 날린 것이 틀림없었다. 안나마리아는 속이 쓰려 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소중한 사람이기에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크게 상처를 받았던 요한이 또다시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때, 요한이 좌절하는 모습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녀인지라 더욱더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말을 뱉어 내고 난 후 긴장하고 있는 안나마리아를 보며 흐린 미소를 흘렸다. 안나마리아는 왠지 모르게 대답을 망설이는 요한을 보다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 외쳤다.

“설마 그 사람, 네가 곤란에 빠져도 모른 척하는 거 아니니? 예전의 그 쓰레기 같은 자식처럼……!”

“아냐, 안나.”

“어?”

“그런 사람, 아니야.”

근래 들어 요한을 둘러싸고 있던 벽이 약간은 얇아진 느낌이었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그를 보자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의심과 경계로 단단하게 쳐져 있던 그의 벽이 눈에 띌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다.

요한의 단호한 대답에 안나마리아가 당황한 사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의심을 한 적도 있었어. 믿지 못한 적도…… 있었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멀리했어.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니까.”

“요……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져 버렸어.”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정을 안나마리아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은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어쩌면 각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

“…….”

“그 사람을 믿어. 아주…… 좋아하고 있어.”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뱉어 내는 요한이 아니었기에 안나마리아는 순간적으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면, 그래서 요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질 정도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 이름 모를 남자가 요한의 마음속에 깊게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프네.’

자신의 행복보다 요한의 행복을 더 바라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깊게 쓰려 온다. 안나마리아는 털어놓으니 편하다는 표정으로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요한을 바라보다 물었다.

“누구인지 말 못 하는 걸 보니…… 유명한 사람이구나.”

그 말에 요한의 눈동자가 다시 안나마리아를 향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의 푸른 눈을 보며 안나마리아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

“동료니?”

“안나.”

“그렇다면 더더욱 주의해야 해.”

“……뭐?”

“생각해 봐, 요한. 안 그래도 네 기삿거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하이에나들이 길거리에 가득한데, 네가 유명인과 만나고 있다는 게 드러나기라도 해 봐. 그럼 어떻게 되겠어? 너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까지 피해가 가게 될 거야.”

제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는 요한을 보고 냉정한 말을 쏟아 낸 것은 아주 약간, 그래, 약간이 아니라 조금 많이 화가 나서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녀는 저에게 알리지도 않고 누군가를 마음에 들여 버린 요한에게 서운함을 느꼈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름 모를 남자가 미웠다. 그래서 더더욱 그렇게 모진 말을 꺼낸 건지도.

놀라는 요한을 보고 서늘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안나마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한동안 그 사람에게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어. 당연히 만나서도 안 돼. 적어도 이번 루머가 수그러들 때까지는.”

“하지만 안나, 적어도 연락은…….”

“안 돼. 그랬다가 우리 계획에 협조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안나마리아는 얼굴을 굳히는 요한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요한, 마음 강하게 먹어야 해.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도 게이 의혹은 네 커리어에 좋지 않아. 이번 연극으로 그런 루머를 완벽하게 떨쳐 내는 게 앞으로의 네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내 말에 따라 줘. 응?”

그렇게 요한과 안나마리아의 연극이 시작됐다.

* * *

<오늘 새로운 사진이 떴어. 백과 백의 WAGs(Wives And Girlfriends)!

┗오, 나도 이 사진 봤어. 빌어먹을 파파라치가 병원까지 잠입한 모양이던데. 백도 괴롭겠어.

┗백은 휴가 중인가?

┗┗휴가라기보다는 요양이라는 표현이 옳겠지. 일주일 휴식을 부여받았다더군.

┗이야, 정말 가까워 보이는데? 여자 친구가 맞나 봐!

┗┗허리를 감싸고 있다고 다 여자 친구는 아니지.

┗┗┗뭐야, 넌 정말 백이 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 백이 명확하게 해명을 하진 않았잖아? 그러니 의심하는 건 당연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어느 누가 헛소리에 일일이 해명을 해? 따지고 보면 잭콜 그 개자식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잖아.

┗┗┗┗┗┗이봐, 흥분하지 마. 나는 그저 의혹을 뿌리 뽑지 않은 백을 보고 느낀 바를 말한 것뿐이라고.>

안나마리아는 요한이 받고 있는 의혹을 없애기 위해 더 밀착 스킨십을 한 채 밖으로 나섰다. 앨리슨이 일러 준 파파라치들이 있는 방향 쪽으로 몸을 틀어 일부러 사진을 찍히기도 했고, 이전보다 훨씬 다정한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사진과 그 못지 않게 나서 준 앨리슨 덕분에 슬슬 요한이 게이가 아니라 엄연히 여자 친구가 존재하는 이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의 의견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었다.

요한이 연극을 하는 것이라는 의견과 저렇게 가까운 사이가 연인이 아니면 무슨 사이냐, 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래도 이 정도 반응이면 나쁘지 않아. 계속 악성 댓글을 달고 있는 녀석들은 아무래도 런던 FC의 안티들 같으니까.”

“정말이에요, 앨리? 그럼 이제 요한 안심해도 되는 거예요?”

팬포럼의 반응을 살펴보던 앨리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안나마리아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조카의 말에 피식 웃은 앨리슨 디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해 주었다.

“그래. 처음엔 요한이 게이 자식이냐며 흥분하던 로얄블루스도 지금은 흥분을 가라앉힌 기세야. 수고했어, 안나. 요한뿐 아니라 나까지 너한테 신세를 졌네.”

부드러운 눈웃음을 그리던 앨리슨은 안나마리아를 보며 말한 뒤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먼저 요한의 집을 나섰다. 안나마리아는 앨리슨이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어 준 뒤 소파에 묵묵히 앉아 있는 요한에게 다가갔다.

“잘됐다, 요한! 그렇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곧 휴식기도 끝나 가는데, 더 바빠지기 전에 간단하게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나, 얼마 전에 끝내주는 레스토랑을 알게 됐어!”

“…….”

“요한?”

“미안, 안나.”

안나마리아와 앨리슨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요한은 도통 속을 읽을 수 없는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안나마리아의 들뜬 음성에도 불구하고 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던 요한은 의아해하는 그녀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 집에서 쉬고 싶어.”

“아, 그, 그러네. 내일부터는 훈련에 나가야 하니까!”

“응.”

빙긋 웃는 요한의 얼굴이 어쩐지 아파 보여 잠시 머뭇거리던 안나는 알겠다고 말한 뒤 그의 집을 나섰다.

“나왔다!”

“어제 오후에 들어갔다가 오늘 아침에 나오는 거 맞지?”

“그럼 계속 백의 집에 있었던 건가?”

오늘도 변함이 없네.

요한의 집 오른편에 위치한 제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한의 집 대문을 닫으려던 안나마리아는 저를 두고 구시렁거리는 것이 분명한 파파라치들의 말을 똑똑히 들으며 쓰게 웃었다.

“어? 이쪽으로 온다!”

“젠장! 저 여자 성격 진짜 안 좋아! 얼마 전 멘디 녀석 카메라도 부쉈다고!”

“피해!”

안나마리아가 계속해서 저와 요한의 뒤를 캐려 노력하는 파파라치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릴 무렵이었다. 요 며칠 동안 안나마리아와 적잖은 마찰을 겪었던지라 그녀의 접근에 소스라치게 놀란 파파라치들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품 안에 넣고선 얼른 몸을 돌려 도망쳤다.

안나마리아는 순식간에 달아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 제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어?’

자신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기만 하는 웬 멀대 같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나마리아는 지난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보라색 캡 모자를 쓴 남자의 외형이 이상할 정도로 낯익다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 저, 저기, 나는…… 그러니까 그게…….”

다른 파파라치들과 달리, 누가 봐도 어색한 포즈로 카메라를 쥐고 있던 남자가 어느 순간 다가온 안나마리아를 보며 낮은 탄성을 흘리더니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검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안나마리아는 불시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이 목소리……!”

74화

“기사 봤어? 백,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혈기왕성하던걸?”

새벽 조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따라 발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며 집 근처 카페를 지나던 레온하르트는 카페의 문을 열고 나오며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음성에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러게 말이야. 어젯밤에도 찍힌 모양이던데. 하여간 파파라치들이란.”

“이렇게 자주 여자랑 찍히는 걸 보면 그 소문이 사실은 아닌 모양이군.”

“그건 모르는 일이지. 보여 주기식으로 일부러 여자와 다니는 걸 수도.”

“흐응, 그런가?”

벌써 며칠째, 런던을 비롯한 영국 전역은 런던 FC의 새로운 별과 그 별을 둘러싼 각종 루머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기사가 터진 이후 구단 측에서 세간에 알려진 바는 사실무근이라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그럼에도 사건의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지라 오히려 의심이 더욱 확산되고 있었다.

물론 예의 의혹 이후 다시 터진 요한 백과 그의 ‘여자 친구’ 기사로 인해 ‘백이 게이일 것이다’라는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심은 가시질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신문을 손에 쥐고서 대화를 이어 나가던 두 남자가 제 앞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우뚝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요한이 부상을 당했던 그날 이후, 벌써 일주일째.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이야기를 당사자의 입이 아닌 타인의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재킷 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응시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음악만이 재생되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핸드폰에는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는다.

[듣자 하니 백 선수가 스캔들이 터졌던 그날부로 핸드폰을 바꾼 모양이더라고. 워낙 전화가 많이 걸려 와서 말이지. 자기네들도 연락이 안 돼서 미치겠다고 하던데……. 아! 드, 들은 얘기야.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 흠흠!]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저보다 요한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는 이안으로부터 그의 근황에 대해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리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답답하군.’

각종 신문 매체를 통해 요한이 일주일간의 휴식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집에서 지내며 한 번 정도는 제게 연락을 넣을 만도 한데, 도통 핸드폰이 울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미쳐 버릴 지경이다.

어디 그뿐인가.

웬 여자와 같이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과 함께 요한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기사를 봤을 때의 충격이란. 처음 그 기사를 마주한 레온하르트는 말 못 할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작전일 수도 있지.]

[……뭐?]

[너도 알다시피 예술계와 달리 체육계는 이런 일에 민감하잖아.]

[…….]

[좀 지켜보자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네 ‘사랑’한테 직접 들어야 하지 않겠어? 백 선수한테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당장이라도 요한의 집으로 달려가겠다 외치는 레온하르트를 말린 사람은 이안이었다. 잔뜩 흥분했던 레온하르트는 차분하게 저를 붙잡는 이안을 쳐다보다 돌리려던 발걸음을 겨우 멈추었다. 이안의 말이 구구절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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