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59)

축구 경기 도중 경기를 뛰는 선수들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일어나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보통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하나는 말로써 상대의 신경을 긁는 경우고 또 하나는 끈질긴 접촉으로 상대의 멘탈리티를 자극하는 경우였다.

요한은 사우스 찰튼과의 풋볼 리그컵 16강전 경기에서 그를 전담 마크하던 상대 팀 수비수의 발언을 경기가 시작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삐익!

“돕슨, 방금 태클은 너무 깊었어.”

“하하,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주의하죠.”

“한 번 더 그러면 옐로우야.”

사우스 찰튼이 몸싸움을 즐기는 팀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저를 향한 태클의 강도가 셌다. 보다 못한 심판이 휘슬을 불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

요한은 필드 위에 넘어진 자신을 힐긋거리는 상대 팀 선수 로버트 돕슨을 발견했다.

“뭐야. 그렇게도 내 손을 잡고 싶었던 거야, 이 게이 자식아?”

태클을 피하기 위해 넘어진 요한에게 손을 내밀던 로버트 돕슨이 웃는 얼굴과 다르게 날이 선 발언을 흘리자 그의 손을 잡아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특히나 그의 두꺼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게이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니 온몸의 피가 들끓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당해 온 차별에는 익숙해졌다지만 저를 멸시하는 것이 분명한 상대의 반응에 더는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견……뎌야 해.’

그러나 당시의 요한으로서는 제게로 쏟아지는 모욕을 견디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돕슨의 얼굴로 주먹을 날리고 싶었으나 팀의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승리가 우선이었다. 요한은,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는 것이 분명한 로버트 돕슨의 발언을 한 귀로 흘리려 노력했다.

‘그랬……었는데.’

질리지도 않았는지 로버트 돕슨은 계속해서 요한을 밀착 마크하며 그에게 시비를 걸었고, 요한은 대응하지 않았다. 또다시 거친 파울로 옐로우 카드를 받은 돕슨이 조금은 몸을 사릴 거라 안도한 것은 요한의 실수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요한은 날아오는 공을 향해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그보다 늦은 타이밍에 뛴 돕슨이 ‘역겨운 새끼!’ 하고 외치는 것도 들렸지만, 요한의 시선은 오로지 날아오는 공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저 공을 받으면 반드시 헤딩 골을 넣겠어.

요한의 눈은 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요한의 의지와 다르게, 제게로 다가오는 공으로 향하던 머리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었다. 공이 요한의 머리에 닿기 직전, 그의 등을 손으로 슬쩍 밀어 버린 돕슨에 의해 그만 균형을 잃은 까닭이다.

쿵!

요한의 머리는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커다란 소리가 났고, 엄청난 고통이 요한을 급습해 왔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며 요한은 움직이지 못했다.

“백!”

“요한!”

누군가 그의 이름을 있는 힘껏 불렀지만, 요한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

후유증 때문인지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쪽을 짓누르던 요한은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을 상기하다 미간을 좁혔다.

‘의식을…… 잃었던 건가.’

분명 피치 위에서 경기를 치르던 자신이 침대 위, 그것도 그의 집 침실임이 분명한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경기는…….’

놀랍게도 바닥으로의 충돌 이후 상황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쿵쿵. 고요하던 가슴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인지한 요한은 마냥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요한!”

생각을 정리한 요한이 막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요한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나?”

“괜찮아, 요한? 몸은 좀 괜찮니?”

아마도 제게 줄 것이었는지 작은 트레이 위에 물을 들고 들어오던 안나마리아가 큰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안나마리아는 트레이를 근처 테이블 위에 놓은 후 반쯤 일어난 요한이 완벽하게 앉을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요한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안나마리아를 응시했다.

“안나.”

“응, 요한!”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언제나 밝은 안나마리아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그녀의 표정에 심장이 덜컹거려 멈칫하던 요한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뭐?’ 하고 되묻는 안나마리아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요한은 살짝 당황했다.

“아, 안…….”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잖아!”

요한은 저를 와락 끌어안으며 흐어엉, 울음을 터트려 버리는 안나마리아의 외침에 멈칫했다. 안나마리아가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계속 안 깨어나서, 정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고. 흐흑…….”

“…….”

“요한, 정말 기억 안 나니?”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던 안나마리아가 흡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뒤로 물러나며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후드득,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린 안나마리아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돕슨 그 개자식이 널 밀쳐 버리는 바람에 네 머리가 땅에 닿았던 건 기억나?”

“……응.”

“그 후로 넌 기절했어. 경기는 당연히 중단됐고, 메디컬 팀이 들어가서 너를 들것에 데리고 나왔어. 다행히 금방 의식을 찾았지만…… 눈이 텅 비어 보였다고 앨리가 그러더라. 나는 그때 학교에 있어서 뒤늦게 네 소식을 들었고.”

“…….”

“넌 그 길로 교체가 돼서 바로 병원에 갔고, 가벼운 뇌진탕 판정을 받았어. 진찰을 받고 난 후 앨리하고 내가 널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정말 기억, 안 나니?”

요한은 쓰게 웃었다.

“전혀.”

안나마리아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충돌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어째서 그 뒤의 일이 가물가물한 건지. 어떻게 들것에 실려 나갔는지, 어떤 병원에 가서 누구에게 진찰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전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쓰게 웃는 요한을 보며 하아아, 길게 한숨을 내쉰 안나마리아가 이어 말했다.

“크리스 선생님이, 최악의 경우 약간의 기억상실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어.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검사 결과 큰 부상은 아니라고 했거든. 물론 한동안 경위는…… 지켜봐야겠지만.”

요한은 안나마리아에게 뭐라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표정이었군.

제 침실로 들어오던 안나마리아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것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언제 울었냐는 듯 그에게 어두운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안나마리아를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안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것이 미안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안나마리아를 응시하던 요한이 말을 건네자 번쩍 고개를 든 안나마리아가 입술을 꽉 악물고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안 해. 널 믿으니까. 그렇지만 요한, 오늘 저녁엔 나랑 같이 병원에 가야 해.”

“어?”

“가벼운 뇌진탕이라도 후유증이 길어질 수 있으니까. 이건 네 친구로서가 아니라 의대생으로서 하는 말이야.”

흠흠, 헛기침까지 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안나마리아의 말을 무시했다가는 아무래도 계속해서 핀잔을 들을 것 같았다. 요한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돕슨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은 널 밀친 이후 퇴장당했어. 언론에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인터뷰를 한 모양인데, 흥! 그 자식 말을 어떻게 믿어! 마침 너한테 욕설을 하는 장면도 중계 화면에 잡혀 버려서 지금 인터넷이 난리도 아니야.”

“…….”

“앨리도 화가 많이 났어. 돕슨 그 자식이 마침 한 말이 인종 차별적 발언이라서 고소하겠다며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야. 그래서 내가 널 간호하고 있는 거고.”

요한이 묻지 않아도 그가 궁금해할 일들에 대해 안나마리아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던 요한은 ‘랄프 씨나 가르시아 씨도 네가 괜찮은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어.’ 하고 말해 주는 안나마리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요한은 자신이 시선을 마주하자 흠칫 놀라는 안나마리아를 확인하고선 그녀를 불렀다.

“안나.”

“응?”

“하고 싶은 말 있지?”

“어?”

“해. 눈치 볼 필요 없어.”

“…….”

“어서.”

요한이 재촉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안나마리아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기사, 봤어. 혹시 그날 일을…… 들켜 버린 거야?”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내내 참고 있는 것 같아 물었더니, 예상했던 질문이 들려왔다.

“요한, 말을 해야 도와주지. 혼자 안고 있으면…….”

“클럽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어.”

순간 안나마리아의 말이 멈췄다. 요한은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누구하고 나왔는지는 모르는 것 같더군.”

“요, 요한.”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안나. 소문은 금세 가라앉을 거야.”

“…….”

“안나?”

“금방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어.”

뭐?

요한은 제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안나마리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나마리아는 후우, 숨을 길게 내뱉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저번 경기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언론에서 이번 일을 주목하게 된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은 조금이라도 주목받을 만한 일들을 놓치지 않잖아. 어떻게든…… 네가 ‘그쪽 성향’이라는 걸 입증하려 할 거야. 그러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조작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말끝을 흐린 안나마리아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요한은 제 일처럼 심각하게 고민하는 안나마리아에게 정말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해 주려 했다.

“요한.”

하지만 요한이 말을 꺼내기 전,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안나마리아가 돌연 생각을 정리했는지 먼저 그를 불렀다.

허공에서 마주친 안나마리아의 초록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요한은 안나마리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는 것을 똑똑히 발견했다.

“요한.”

어리둥절해하는 요한을 보던 안나마리아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

71화

“그건 안 돼.”

요한은 눈을 빛내며 말을 꺼낸 안나마리아에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안나마리아가 인상을 썼다. 한참이나 고민해서 꺼낸 제 이디어가 단번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왜!’ 하고 버럭 외치는 안나마리아를 보며 쓰게 웃고는 말했다.

“내 일에 너를 이용할 수는 없어.”

“뭐?”

“이번 일은 내가 대처를 잘 못 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야.”

요한이 푸른 눈동자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나를 알아볼 리 없다고 여겼어. 안일한 생각이었지. 그러다 그런 사진이 찍혔고, 나뿐 아니라 앨리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게 됐어. 그러니 그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가 져야지, 너한테까지 피해를 끼치고 싶진 않아.”

“…….”

“게다가 그날 그곳에 간 건 전적으로 내 의지였어. 내가 결정한 일이었으니 마땅히 내가 짊어져야 해.”

요한은 콜 업의 기쁨과 차오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앨리슨 디어의 클럽을 찾았다. 딱 한 번의 일탈이었지만 그날 있었던 일로 인해 레온하르트를 만났고, 그와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황당한 인연이기는 했지만 요한은 그날 있었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때문에 안나마리아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구설수에 올랐으면 올랐지, 저를 위해 안나마리아를 이용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짊어질 건데?”

차분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안나마리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되묻는 안나마리아의 말에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나마리아는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었지, 너에 대한 여론이 반반이라고.”

“…….”

“의심을 거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더 의심하는 사람도 많아졌어. 아마 너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병원을 나오는 길에 파파라치도 붙었더라. 그거, 몰랐지?”

파파……라치?

요한은 깜짝 놀라 안나마리아를 응시했다. 요한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은 안나마리아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요한, 나는 네 친구야. 그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지 아니?”

“안나…….”

생긋 웃던 안나마리아가 결심한 듯 말했다.

“요한, 나는 네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로 날 여겨 줬으면 좋겠어. 네가 힘들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 네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친구.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나, 네가 축구 아닌 다른 일로 곤경에 빠지는 거 싫어.”

안나마리아가 요한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 * *

쿵!

‘아.’

하늘 높이 날아오른 요한의 작은 머리가 초록빛 잔디 위로 수직 낙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큰 눈을 TV에서 떼지 못했다.

『세상에! 백이…… 요한 백이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삐이익!

경기가 시작된 이후 이상할 정도로 가열돼 있던 경기가 갑자기 펼쳐진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심이 크게 휘슬을 불었고, 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하지 못하는 시청자들을 위해 중계를 하던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설마 백이 기절한 걸까요?’ 하고 의문 섞인 멘트를 날렸다.

카메라는 푸른 그라운드 위에 쓰러진 요한을 클로즈업했다. 화면에 비친 요한은 미동조차 않은 채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두근두근.

반사적으로 일어난 레온하르트가 TV 화면을 뚫어질 듯 응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요한이 쓰러지기가 무섭게 피치 위로 달려오는 런던 FC 메디컬 팀의 모습을 응시하다, 대기실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해.

요한을, 보러 가야…….

“……온!”

“…….”

“레온, 멈춰!”

녹안을 크게 일렁이며 덥석 문고리를 잡던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와 힘껏 외치는 이안의 음성에 겨우 이성을 찾았다. 슬쩍 고개를 내리자 이안이 ‘정신 차리라고!’ 외치며 그를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레온하르트가 인상을 쓰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가면 안 돼.”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걱정되는 거 알아. 아는데, 지금 네가 간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이안.”

“각자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이란 게 있어. 백 선수는 메디컬 팀이 보살필 거라고. 넌 지금 공연을 앞두고 있는 몸이라는 거, 잊은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정곡을 찌르는 이안의 발언에 멈칫했다. 이안은 ‘어!’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저, 저기 봐! 백 선수, 방금 깨어난 것 같아!”

뭐?

“하,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의식을 찾은 모양이네.”

“…….”

“이봐, 레온. 그렇게 울상 지을 필요 없어. 의식을 찾았으니 이제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까 일단 연락을 기다려 보자. 앉아. 내가 따로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아볼 테니.”

“…….”

“레온?”

레온하르트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빙긋 웃는 이안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나가 있던 몸을 다시 대기실 안으로 들인 그는 TV를 한 번 힐끔거린 후 핸드폰을 집어 드는 이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TV 화면으로 옮겨 갔다.

쿵쿵.

심장은 여전히 들썩이고 있었다.

요한의 충돌과 부상으로 인해 새롭게 피치 위로 들어온 선수가 클로즈업되는 것이 보인다. 레온하르트는 중단되었던 경기를 다시 재개한다는 듯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공의 모습을 지켜보다 갑자기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어?”

TV 화면이 갑자기 검게 물들자 당황한 이안이 핸드폰을 든 와중 놀란 음성을 흘렸으나 레온하르트는 대응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가슴이 기분 나쁘게 뛰고 있었다. 꽉 움켜쥔 주먹에 서서히 땀이 차오른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백 선수, 경기장에서 바로 병원으로 갔대.”

레온하르트가 이안으로부터 요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정확히 예의 16강 경기의 하프타임 때였다. 대체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 밖으로 나가서까지 통화를 하고 돌아온 이안은 레온하르트에게 걱정할 것 없다고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런 이안에게 내가 직접 전화를 해 보겠다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자신이 연락을 한다면 요한이 더욱 부담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에게 무거운 마음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던지라 레온하르트는 곧 찾아올 저녁 공연에 매진하기로 했다.

“레온, 오늘 컨디션 괜찮은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로지 자신이 설 무대와 공연에만 신경을 쏟아붓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막이 내린 후 커튼콜에서 관객들과 마주한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했던 레온하르트의 상태를 보고 놀란 음악 감독 크리스토프가 하하 웃으며 말을 걸어왔지만 레온하르트는 대꾸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기에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안이 충고한 대로 또 한 번 관객들을 실망시킨다면 그들의의 약속을 저버리는 꼴이 되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제대로 대사를 내뱉고 또 연기를 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공연에만 집중을 했다. 그 때문인지 금요일 저녁 공연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도 레온하르트는 섣불리 요한에게 연락을 넣을 수 없었다. 오전의 기사도 기사였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다고 들었어.’라며 저를 생각해서 해 준 이안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레온하르트는 이안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해 주지 못할 정도로 얼굴을 굳혔고, 계속해서 미동 없는 핸드폰만 응시했다.

“악셀 씨!”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이틀.

레온하르트 악셀은 지난 이틀 동안 요한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도, 그렇다고 그를 찾아가지도 못했다.

이틀 전 일어난 일로 인해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염려가 첫 번째 이유였고, ‘한동안은 네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며 어렵게 말을 건넨 이안의 충고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래도 기다리면, 계속해서 기다리면 요한으로부터 연락이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참고 또 참던 레온하르트는 우연히 신문 가게를 지나치다 저를 부르는 마사를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마사 씨.”

“오늘 오후 공연이시죠? 일찍 나오셨네요?”

방금 비가 그쳤던 터라 유독 화창한 일요일 오전, 레온하르트는 ‘마티네 공연도 아닌데.’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웃는 마사를 향해 옅게 웃었다.

“체크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몇 달 동안 해 왔던 공연이고, 또 대사나 동선 정도는 항상 암기하고 있었지만 지난 이틀은 이상할 정도로 불안했다. 무대 위의 제 모습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굳은 얼굴을 한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오히려 만족스럽다며 외쳐 댔지만, 그는 그들을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제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어서인가. 레온하르트는 낮게 탄성을 터트리더니 다시 말을 거는 마사를 응시했다.

“오늘은 신문 안 필요하세요?”

“……네?”

놀라는 레온하르트에게 마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번에 못 드린 게 마음에 걸려서 악셀 씨를 위해 매번 빼 두고 있거든요!”

“아.”

“아! 강매는 아닙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아닙니다. 하나, 주십시오.”

레온하르트의 당황한 표정에 양손을 휘휘 젓던 마사는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분명한 신문을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마사에게 고개를 까딱인 후 신문을 받아 쥐고 퀸 레베카 시어터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신문……이라.’

이틀 전, 런던 전역을 들끓게 했던 요한의 기사가 터진 이후 레온하르트 악셀은 무의식적으로 신문 구매를 꺼려 왔다. 보도 이후 TV 중계 화면에 비치던 요한의 얼굴이 너무도 어두웠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미간을 찌푸린 레온하르트는 술렁이는 주변의 음성에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아마도 마사에게 구매한 것이 틀림없는 신문을 들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마사에게 신문을 받자마자 1면도 보지 않고 접어 두었던 레온하르트는 손에 쥔 신문을 펼치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

그러한 레온하르트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런던의 별, 게이 의혹 종식?!>

굵게 강조한 헤드라인 밑으로, 요한으로 짐작되는 남자가 웬 갈색 머리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나오는 사진이 신문의 1면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72화

#Second Half : 후반 11′ ~ 후반 20′

“위장…… 연애?”

안나마리아가 며칠 전 요한에게 건넸던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당황하여 되묻는 그를 향해 안나마리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위장 연애.”

“안나.”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 요한.”

놀란 요한이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두 손으로 그의 행동을 저지한 안나마리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이번 기사를 보고 고민을 좀 해 봤는데, 요한 네가 근거도 없이 그런 루머에 시달리는 건 그간 단 한 번도 사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일 거야.”

“……뭐?”

“단조로웠잖아, 네 삶은. 훈련장과 집, 아니면 경기장과 집. 루트가 두 개뿐이니 코를 킁킁거리는 하이에나들한테는 지루하게만 보였겠지.”

안나마리아의 말대로였다. 프로 계약을 체결한 이후 지금까지 요한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왔다. 보다 못한 안나마리아가 간혹 그를 강제로 집에서 데리고 나와 문화생활을 시켜 주거나 혹은 쇼핑 활동을 하러 간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1년에 열 번을 꼽을 정도였다.

안나마리아는 대답 없는 요한에게 말했다.

“그런 네게 말도 안 되는 의혹의 꼬리표가 붙었어. 그 빌어먹을 잭콜 개자식 때문에!”

바드득 이를 가는 안나마리아는 로시 잭콜이 눈앞에 있었다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달려들 기세였다.

“물론 잭콜 그 개자식이 언론을 통해 헛소리를 늘어놓은 영향도 있지. 하지만 이번 루머는 꽤 심각해서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아. 듣자 하니 네게 차별적 발언을 한 그 선수도 징계에 붙여지는 것 같던데……. 어쨌든 한동안 시끄러울 건 분명해. 그러니 차라리 대놓고 네 사생활을 언론에 드러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사생활?”

의아해하며 반문하는 요한에게 안나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네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는 거지.”

“안나, 대체 무슨 소리…….”

“내가 네 가짜 여자 친구가 되어 줄게, 요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