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59)

두근두근!

눈앞이 아찔해졌다. 차오르는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요한은 입술을 잘근 짓눌렀다.

[두 분께서도 보셨다시피 이 사진은 누가 봐도 기사에서 주장한 내용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합니다. 필립 선수가 단순히 ‘Dawnlight’ 안으로 ‘들어갔을’ 뿐이지 않습니까?]

클락 단장의 말대로 예의 사진은 자신이 클럽 안으로 입장하는 모습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몇 배율로 확대를 한 상태였기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자신만이 그 사진을 보고 놀랐을 뿐이다.

천만다행인 일. 분명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러운 일이건만, 쿵쿵 가슴이 일렁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만약.’

정말 만약,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해 누군가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레온하르트 악셀과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라도 누군가 목격했다면…… 이 일은 자신의 손을 벗어날 만큼 심각해지지 않을까.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고 그런 모습을 찍은 것인지, 또 어떻게 그 사진이 언론사에까지 유출된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아 요한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68화

“……한. 요한!”

앨리슨의 외침에 요한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하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앨리슨이 미간을 좁히는 게 보였다. 요한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앨리슨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여하튼 기사는 너무 신경 쓰지 마. 금방 수그러들 테니까. 너는, 오늘 있을 경기에만 집중하면 돼. 알았지? 참, 너 오늘 선발이니?”

요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 그리스 원정 경기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 요한은 화요일에 있었던 리그 경기와 오늘 리그컵 경기에 선발 출전 예정이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다시 리그 경기가 있어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축구 선수에게 출전은 하나의 기회였다. 근래 들어 메디컬 팀에서 그의 체력 관리도 해 주고 있었으므로 잦은 경기 출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기 끝나고 보자!”

리그컵을 대비하여 LTC에서 미라클 스타디움으로 동료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됐다. 앨리슨과 함께 몇 마디를 더 나눈 요한은 클락 단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전 제게 끊임없이 당부하던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앨리슨은 힘을 내라며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더니 곧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요한은 멀어지는 앨리슨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은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의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런던 내에서 요한이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옆집의 이웃이자 유일한 친구인 안나마리아뿐이었다. 그의 오랜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마저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할 만큼 요한은 철저하게 제 감정을 숨겨 왔다.

[좋아져…… 버렸어, 그쪽이.]

내내 억누르기만 했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생각했고, 표현해서도 안 된다고 여기며 꾹꾹 눌러 왔다. 그러다 스스럼없이 감정을 쏟아 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물론 첫 만남부터 그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하룻밤 상대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그와 얽히고 엮이면서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요한은 난생처음으로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으며, 잔뜩 들떠 있었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닫혀 있던 제 마음이 그를 향해 스르륵 열리는 것을 자각할 만큼, 요한은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기뻤다. 들켜 버릴까 꼭꼭 감춰 두기만 하던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보내는 매 순간들이.

설렌다. 그를 보면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이 가슴이.

[네가 게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고작 내 클럽에 발을 디뎠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게이로 몰아간단 말이야? 그럼 ‘Dawnlight’를 방문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성애자인 거냐고!]

속이 따끔거린다. 그녀가 뱉어 낸 말이 귓가를 맴돌아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요한은 쓴웃음을 흘렸다.

‘앨리한테…… 말했어야 하나.’

그동안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황당할 지경이다. 실감이 났다. 어쩌면 제가 겪을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이 이제야 와 닿았다.

‘이번 일은 이대로 끝났지만…….’

오늘과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때로부터 세 달이 더 지난 지금, 요한은 이전보다 훨씬 유명해졌다.

경기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리저브 팀 소속 선수에서 1군의 내로라하는 동료들과 함께 패스를 주고받으며 피치 위를 누비는 선수가 됐다.

집 근처 길을 걷고 있으면 작은 아이들부터 청년들, 중장년들, 그리고 심지어 노인들까지 나타나 사인을 요구할 만큼, 적어도 런던에서는 인지도를 높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세는 비단 요한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요한의 상대는 그가 유명해지기도 전에 이미 웨스트엔드를 사로잡고 있던 ‘왕자’였다. 그가 런던 FC의 메인 모델로 활약한 덕에 친해졌다는 명분이 없었더라면 현 상황에서 가장 의심을 받을 사람은 어쩌면 레온하르트 악셀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저는 물론 레온하르트 악셀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젠장.’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요한은 짙은 한숨을 뱉어 내며 드레싱 룸으로 향하는 복도 앞에 멈추어 섰다.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진 상황은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언론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까운 기사를 냈을 뿐 명확한 증거를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자중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며 숨을 고른 요한은 다른 동료들이 도착한 것이 틀림없는 드레싱 룸으로 천천히 걸음했다.

“……이라고? 그것참.”

“아닐 수도 있는 거지. ‘The Moon’이잖아.”

“에런, 그래도 ‘The Moon’이야. 적어도 사생활에서만큼은……. 아!”

두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한 척 요한이 드레싱 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뭔가를 들고 웅성거리던 런던 FC의 선수들이 요한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보였다.

“흠.”

“어, 저기 뷔거! 혹시 팀 시트 나왔대?”

“잠깐만, 나 버스에 시계를 두고 내린 것 같아.”

“이봐, 같이 가!”

입구 쪽에 서 있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란 동료들이 하나둘씩 드레싱 룸을 빠져나갔다. 요한의 눈동자가 의자 위에 놓여 있는 무언가에 꽂혔다. 아마도 오늘 자 신문임이 분명한 것이 시야로 들어왔다.

‘…….’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각하게 술렁이던 동료들의 화제 대상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안 순간 요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아직 바스티안과 디에고는 도착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물건과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경멸 어린 시선으로 저를 흘긋거리거나, 혹은 없는 사람 취급하며 제 할 일에 집중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가슴이 저릿한 것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백.”

요한은 비릿한 실소를 흘리며 제게 다가온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손을 뻗어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크로비스는 멈칫한 요한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게 주의 좀 하지 그랬어.”

결코 걱정을 담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 * *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하르트가 벌떡 일어난 것은 정확히 오후 2시 반을 갓 넘긴 시점이었다.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될 저녁 공연에 대비하여 일찍이 퀸 레베카 시어터에 출근한 레온하르트였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콩밭에 가 있었다. 정오 때쯤 핸드폰으로 접한 기사가 그의 모든 신경을 사로잡았던 까닭이다.

현재 런던 전역을 비롯한 영국 인터넷계를 들끓게 하고 있는 화제의 소식은 모 구단의 축구 선수에 대해 아우팅을 한 J 씨의 정체와 그가 언급한 구단, 축구 선수에 대한 일이었다.

J 씨는 익명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웬만한 축구 팬들은 그의 정체가 런던 FC의 전 리저브 팀 감독인 ‘로시 잭콜’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그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구단과 예의 축구 선수의 정체에 대해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로시 잭콜이 경질되기까지 그와 몹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진 요한 백이 예의 축구 선수로 지목된 것은 당연한 일.

<뭐야, 그 자식. 영 수상하다 했더니 게이였어?>

<허여멀건하게 생겨서는 생긴 대로 노는군.>

<역겨워! 동성애자라니!>

<윽. 그럼 다른 동료들이 샤워할 때마다 발기하는 거 아냐?>

그 때문인지 인터넷 댓글이나 SNS에는 요한 백에 대한 욕설과 입에 담기 민망한 성희롱들이 가득했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떻게 대기실로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곳에 앉아 있는 건지 도통 떠오르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누군가’로 인해 가득 찼다. 공연 시작 전, 잠깐이라도 요한을 만나 말이라도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각오를 다진 얼굴로 대기실의 문고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어딜 가.”

그런 그가 달칵 문고리를 돌려 밖으로 막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오래전부터 문 앞에 있었던 사람처럼 저를 빤히 응시하는 이안 키스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안은 대기실을 나가려는 레온하르트를 책망하듯 응시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어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좁아졌다.

“비켜.”

“안 돼.”

“이안!”

“네가 간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아?”

레온하르트가 목적지를 발설하지 않았음에도 이안은 그의 발이 향할 곳을 예상하고 있었다. 소리치는 제게 냉정하게 되묻는 이안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답하지 못했다.

말없이 인상만 쓰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이안이 말을 덧붙였다.

“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할 생각 마. 넌, 네 자리에서 네 일에나 충실해.”

“이안.”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아니, 네가 나섰다가는 더 난리가 난다고. 섣불리 나섰다가 백 선수한테까지 피해를 끼치고 싶은 건가?”

이안의 냉철한 답변이 속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하아, 젠장.’ 하고 어두워지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보며 이안이 긴 숨을 흘렸다.

이안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레온,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프로답게 네 자리를 유지하는 거야. 이번에도 저번처럼 뛰쳐나가서 관객들을 실망시킨다면, 만약 사실로 드러났을 때 관객들이 손가락질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

“…….”

“알아들었으면 이리 와서 앉도록 하지?”

이토록 강하게 심장으로 와 박히는 비수가 또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제 말을 끝낸 뒤 먼저 대기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리는 이안을 쳐다보다 미간을 좁혔다. 이내 그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세게 짓누르고는 어느새 자리를 잡은 이안 키스트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안이 숨을 고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

무언가 도착했는지 꽤 놀란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던 이안의 행동에 레온하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 하고 저를 부른 이안이 말했다.

“백 선수…… 오늘 선발인데?”

69화

“뭐?”

레온하르트는 놀라는 이안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선발이라니.

‘오늘 같은 날?’

오늘 런던 FC가 경기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전부터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 요한이기에 당연히 제외될 줄 알았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만큼이나 흐응 콧소리를 흘리던 이안이 중얼거렸다.

“의외인걸. 당연히 명단에서 제외할 줄 알았는데……. 컵 경기 상대가 강한 것도 아니고.”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온하르트의 안색 역시 어두워졌다.

“혹시 모르니 중계라도 볼까?”

이안은 대답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힐끔거리더니 은근슬쩍 일어나 대기실 안의 TV를 틀었다. 레온하르트는 저와 TV를 번갈아 응시하는 이안의 행동이 자신을 염려하는 것과 달리 왠지 모르게 수상쩍다 여기며 인상을 썼다.

“왜?”

저를 빤히 주시하는 레온하르트의 따가운 시선에 제 발이 저린 이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요한의 선발은 둘째 치고.”

“어?”

“이안 네가 어떻게 런던 FC의 소식을 그렇게 자세히 알지? 알림이라도 받았나?”

이안 덕분에 요한에 대한 소식을 보다 빨리 접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다.

축구에는 관심이 없는 자신과 달리, 열광적인 축구 팬인 이안 덕분에 모르고 있던 정보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니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간 지켜봐 온 이안 키스트는 오로지 제 팀인 로젠버그 FC의 정보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요한에게 듣기로, 오늘 열리는 리그컵은 로젠버그 FC 또한 동시간대에 경기를 치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런던 FC의 경기를 틀자 의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레온하르트가 의문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안이 저를 위해 요한이 소속된 축구팀의 경기를 틀어 준 것은 감사한 일이나, 아무리 그래도 저 광적인 로젠버그의 팬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포기할 리 없었다.

“다른 이유는 무슨!”

저를 수상쩍어하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불쾌하다는 듯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던 이안은 ‘잔말 말고 TV나 봐!’라고 버럭 외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의심스럽군.’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TV를 올려다보는 이안을 바라보다 고개를 위로 들었다.

『……풋볼 리그컵 16강전 경기를 중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와 함께 수고해 주실 칼 루카스 씨를 모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루카스 씨!』

『안녕하십니까.』

『런던 FC의 홈, 미라클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이번 16강전은 같은 1부 리그 팀의 경기이지만 리그 순위 2위인 런던 FC와 최하위인 사우스 찰튼 사이의 대전이기에 런던 FC가 비교적 수월하게 승기를 잡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거기다 사우스 찰튼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대거 빠진 상황에 런던이 오늘 스쿼드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는데요. 루카스 씨.』

『예.』

『오늘 라인업을 보고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백과 랄프, 그리고 가르시아가 모두 출격했더군요!』

『그렇습니다. 저 역시 선발 명단을 보고 꽤 놀랐는데…… 아무래도 런던 FC의 조지 웰비 감독이 이번 경기를 잡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열렸던 FC 아테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주축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다가 일격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랬죠!』

『그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군요.』

『아! 루카스 씨가 답변하시는 순간 터널 밖으로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TV 화면에서 들려오는 캐스터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던 레온하르트는 대기하던 경기장 내 터널에서 푸른 잔디가 가득 깔린 그라운드 위로 하나둘씩 올라오는 선수들을 응시했다.

‘요한은…….’

온 관심이 요한에게 쏠려 있던 레온하르트는 카메라가 그를 잡기만을 기다렸다. 무의식적으로 꽉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물론 레온하르트 악셀이 알고 있는 요한이라면 이런 일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생각 이상으로 강인한 사람이고, 그 어떤 상황에도 무덤덤하지 않았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제게도 처음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

거기다, 이안의 말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수긍한 레온하르트는 그저 요한이 오전의 일로 인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특히나 오늘 경기를 치르기 전 구설수에 오른 요한 백 선수가 출전할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말이죠. 이는 웰비 감독이 백 선수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또 골을 넣어 줄 수 있는 스트라이커에 대한 런던의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 저기 백 선수를 마침 비춰…… 아!』

『우우우우!』

천천히 피치 위로 오르는 선수들을 카메라맨이 차례로 비추고 있을 때였다. 마침 요한이 화면에 잡히자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요란한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너무들 하는군.”

런던 FC와 사우스 찰튼은 모두 런던을 소재로 하고 있는 프리미어리그 팀들이었다. 미라클 스타디움을 찾은 팬들은 대부분 오늘 조간신문을 통해서, 혹은 인터넷을 통해 예의 기사를 접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경기 시작 두 시간 전, 런던 FC가 공식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여론은 정확히 둘로 나뉘어진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유 소리가 경기장을 뒤덮자 이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는 그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군.

레온하르트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요한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모습을 보자니 왠지 자신이 더 긴장이 됐다. 그는 킥오프 전 악수를 나누기 위해 일렬로 서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

탁!

그때였을까.

레온하르트는 사우스 찰튼 팀의 한 선수가 요한이 내민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는 모습을 발견하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흠흠! 곧 경기가 시작될 모양이군요. 각 팀의 선발 라인업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헨리 씨.』

그 모습에 놀란 사람은 비단 레온하르트만이 아니었는지 중계를 하던 캐스터가 하마터면 방송 사고를 낼 뻔했다.

다행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다듬은 해설자가 서둘러 화제를 돌려 버렸기에 캐스터는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이야기를 돌릴 수 있었다.

“레온.”

“…….”

“내가 방금 잘못 본 거 아니지?”

이안 역시 그 모습이 황당했던 모양이다. 딱딱하게 경직된 레온하르트에게 말을 건네는 이안에게 그는 답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불쾌한 심장 박동 소리가 레온하르트의 귀를 울렸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주먹에 온 힘이 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들썩이는 심장과 달리 지독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TV 화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풋볼 리그컵 경기 16강전이 시작되었다.

‘느낌이 안 좋아.’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볼을 잡을 때마다 쏟아지는 야유와 이상할 정도로 집중되는 요한의 마크가 신경 쓰여 미간을 좁혔다.

“사우스 찰튼 놈들, 왜 저렇게 거칠어?”

그것은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만 느낀 것이 아니었는지, 뚫어져라 TV를 올려다보던 이안 역시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화면에 요한이 잡힐 때마다 눈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삐이익!

“저 미친 새끼가!”

양발을 들고 요한에게 태클을 가하는 선수를 보며 이안이 소리를 내질렀다.

『사우스 찰튼의 28번, 로버트 돕슨 선수가 옐로우 카드를 받습니다. 아주 위험한 태클이었군요. 태클 도중 스터드를 들고 들어가는 건 다이렉트 퇴장을 줄 만한 일입니다. 돕슨 선수는 운이 좋았네요.』

『시작한 지 이제 5분도 안 됐는데 경기가 과열되고 있는 것 같군요. 주심의 현명한 판단이 경기의 분위기를 좌우하게 되겠습니다.』

캐스터와 해설자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사우스 찰튼의 수비에 대해 언급하며 미묘하게 달아오른 경기 분위기에 지적을 가했다.

두근.

레온하르트의 심장은 좀처럼 안정을 못 찾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답답한 건지. 요한을 믿는 것은 둘째치고 주변 환경들이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레온하르트의 근심이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다.

런던 FC와 사우스 찰튼의 16강전 경기가 시작되고 약 15분가량이 지났을 무렵, 결국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삐이이이익!

『마, 맙소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레…… 레온.”

TV 화면 속의 캐스터와 해설자는 물론이거니와 옆에서 비슷한 표정으로 중계를 지켜보던 이안이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불렀다.

쿵쿵. 쿵쿵쿵!

레온하르트의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게 뛰었다.

그러한 레온하르트 악셀의 녹안은 초록빛의 그라운드 위에서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요한에게 꽂혀 떨어질 줄 몰랐다.

* * *

“사람들 반응은 신경 안 써도 돼. 네가 필요하니 넣는 거고, 네가 잘해 줄 거라 믿는다. 그러니 부탁해, 백.”

진작 선발에 들 것이라 여기기는 했으나, 팀 시트 위에 이름을 올린 게 확정이 된 상황에서 들은 조지 웰비 감독의 말은 요한의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었다.

필요하니 넣는다.

경기를 앞둔 축구 선수에게 감독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힘이 되는 말.

‘감독님 말씀대로다. 난, 내 일을 하면 돼.’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개의치 않고 골을 넣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눈빛이 경계와 의심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골을 넣는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게다가 잭콜의 성추행 혐의에 대해 알고 있는 1군 선수들도 있었기에 경기 직후 필요하다면 해명의 시간도 가질 생각이었다.

“런던이 그리 애지중지하던 꼬맹이가, 게이 자식이었어?”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문제를 먼저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 여기던 요한은 경기 시작 전 들려온 날이 선 반응에 흠칫 놀랐다. 어디서 들려온 말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상대팀인 사우스 찰튼의 선수들은 그런 요한의 시선을 피했으므로 음성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골, 반드시 넣기를 바라.”

경기 시작 전, 경직된 요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한 번 더 말을 한 뒤 먼저 터널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볼 때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은 의지를 다잡았다.

저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경기에서 반드시 골을 넣거나 어시스트와 같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겠노라고 주먹을 움켜쥐기도 했다.

“비켜, 이 게이 자식아!”

그러나 그런 요한의 기억은 공중에서 날아온 볼을 헤딩하기 위해 뛰어오른 그를 향해 누군가 외쳤던 소리를 끝으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짹짹.

‘아.’

짹짹짹.

번쩍, 눈앞에 섬광이 스침과 동시에 천 근같이 무겁게 느껴지던 눈꺼풀을 스르륵 들어 올린 요한은 극심한 두통에 미간을 좁혔다.

분명 조금 전까지 필드 위를 누비고 있던 요한은 어찌 된 셈인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70화

“역겹군, 정말. 얼마나 다리를 벌려 댔으면 리저브에서 뛰던 녀석이 1군 경기를 뛰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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