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59)

‘……뭐?’

이대로라면, 팀에 내 자리가 없을 거라고?

프로의 세계가 냉정하다는 것은 모르지 않으나, 이적 시장 징계까지 받았던 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징계 기간 전 미리 방출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 했다. 그간 자신의 활약이 미미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공로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장, 기다…… 헉!”

뒤늦게 장의 발걸음을 따라잡은 에릭이 꽉 움켜쥔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내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장이 부드득 이를 갈며 온몸을 부르르 떨자 에릭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왔다.

“거, 걱정 마, 장. 아직 한참 뒤의 일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네가 더 잘한다면…….”

“잘할 기회나 주겠어?”

“어?”

“들었잖아! 팀에 내 자리가 없다고! 그건 벌써 웰비 자식이랑 얘기 끝났다는 거야!”

장은 고성을 내질렀다.

“스피츠 씨도 알잖아. 한번 웰비 자식의 눈 밖에 나면, 기어코 방출된다는 거! 이제부터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고!”

“자, 장…….”

“어떻게 나를 이따위로 취급할 수 있지? 감히 나를! 이 장 크로비스를!”

세 시즌째 런던 FC에서 뛰고 있고, 불과 1년 전 4년 재계약까지 체결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지난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골 한 번 터트리지 못해 공격수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저…… 장, 내가 어떻게든…….”

“됐어!”

장은 당황하는 에릭 스피츠에게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외친 뒤 홱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젠장. 젠장. 젠장할!’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저를 대하는 보드진의 태도에 이가 부드득 갈렸고, 치가 떨려 울분이 차오른다. 장은 신경질적으로 주차장의 차에 올라탄 뒤 빠앙, 클랙슨을 울렸다. 지나가던 경기장 내의 미화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차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당하고만 있을 줄 알고?’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입술을 꽉 악물고 있던 장은 일렁거리는 눈동자를 가라앉힌 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 크, 크로비스 씨.

“어떻게 됐습니까.”

장이 대뜸 묻자 상대가 하하,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직도인가? 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라고요?”

-그게, 쉽지가…….

“쉽지 않은 일을 해내라고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 겁니다, 테임즈 씨! 알고 있습니까?”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에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렇게까지 쏘아붙일 생각은 없었지만 장은 자신의 사주를 받은 테임즈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소리를 내질렀다.

-노력…… 노,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아! 저, 그런데 크로비스 씨.

“뭡니까!”

-제가 어제, 조금 놀라운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장은 인상을 썼다. 뭐냐고 묻지 않아도 잠깐 호흡을 고른 상대가 말을 이었다.

-미스터 백, 아니 요한 백 말입니다. 지지난 달 말에, 소호의 한 클럽을 찾았다고 합니다. 워낙 바른생활 이미지라 그런 곳은 찾은 적이 없었기에 꽤 놀랐습죠.

소호?

“흥. 런던 소호에 클럽이 한두 갭니까?”

런던에서도 핫한 소호에 있는 클럽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장은 냉소를 흘렸다. 그러자 ‘아뇨, 아뇨!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고 서둘러 말을 덧붙인 테임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그 클럽의 출입 대상이 의외여서요. 제가 알아본 바로 그 클럽은…….

이어지는 테임즈의 말을 듣던 장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 * *

[요한…… 음.]

훈련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홀로 지내던 요한이 오랜만에 타인과 함께 여가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해서 일부러 시끄러운 자리를 피하곤 했던 요한이었기에 식탁 위에 머리를 댄 채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 시간이 꽤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적어도 레온하르트 악셀을 바라보고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사실은 즐거웠다. 잠든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었고,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괜히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살을 섞지 않아도, 온기를 나누지 않아도,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같은 공간에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가슴에 듣기 좋은 울림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그런 말을 꺼낸 것이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이었으니까.

레온하르트 악셀과 정식으로 만나기로 한 뒤 거의 몇 주 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진 것은 자신을 발견하고 활짝 웃는 레온하르트가 반가웠기 때문이다.

‘진짜 좋아……하는 걸까?’

본능적으로 끌렸고, 그와의 속궁합도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이 먼저 그의 위로 올라타고 싶을 정도로 원한 적도 있으며, 제 위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희열을 느낄 때도 있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자신이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 그가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건지도.’

그래, 지금껏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어쩌면 자신은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레온하르트 악셀의 전화를 기다릴 리도, 그와 오랜 시간 통화를 할 리도, 또 먼저 전화를 걸고 싶어 할 리도, 그의 집으로 대뜸 찾아가겠다는 말을 할 리도 없으니까.

-……고 있어? 요한아? 백요한?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던 요한은 자신이 현재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자 ‘잠깐 한눈팔았나 보네?’ 하고 웃으며 말을 건네는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요한은 멋쩍게 미소 지었다.

-별말은 아니고, 내가 느끼기에 한국인 에이전트로는 조금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요즘 에이전트 관련 문제도 많이 터지고.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네가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괜찮은 에이전트 말이야. 프리미어리그 쪽이랑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인 것 같거든.

오후 트레이닝이 끝난 뒤,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지난번 A매치 때 같은 방을 사용하며 국가 대표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준오였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주장이자 최고로 인기 많은 수비수이기도 한 준오는 이번 겨울 EPL로의 이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주에서부터 지금까지, 가끔 안부 전화를 통해 준오의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요한은 그를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해외 생활이나 진출 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준오를 돕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준오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저 역시 오래전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

62화

아버지의 나라이기도 한 영국이었기에 ‘유학’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영국으로 건너온 요한은 1군 콜 업 전까지 적지 않은 문제에 부딪혔다.

혼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했던 적잖은 인종 차별부터 이중 국적에 대한 문제, 그리고 양 국가의 국민들이 보내오는 은근한 관심까지.

그러한 과정에서 흔들리며 무너질 수도 있었으나 끝끝내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꿈을 지지해 준 부모님과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축구 선수라면, 그것도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보다 넓은 세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다는 것을 요한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저 역시 그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지 않았던가.

비록 준오보다 프로 데뷔는 늦었지만, 해외 생활이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의 경험은 더 많은 요한이기에 A팀에서 알게 된 좋은 선배를 돕고 싶었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기도 했고, 또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도움을 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선배님, 괜찮으시면 제 에이전트와 연락을 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에이전트?

“예. 사람 자체도 좋지만, 일도 몹시 잘하시는 분입니다. PL에 대해서도 정통하시고요. 선배님께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이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게 분명해요.”

앨리슨 디어와 준오를 연결해 주기로 결심한 것은, 이준오라는 사람 역시 괜찮다는 것을 지난 A매치 기간 동안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하고, 에이전트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준오에게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어디 쓸 만한 인재가 없을까…….]

그러고 보니 앨리슨 역시 새로 관리할 선수들을 물색하며 요한에게 은근슬쩍 말을 던졌던 것이 떠올라 요한은 피식 웃으며 앨리슨에게 연락 달라는 문자를 남긴 후 몸을 돌렸다.

‘……!’

오후 트레이닝 직후 걸려 온 전화에 응답하기 위해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땀으로 흠뻑 젖었던 몸이 식어 으슬거리는 것을 느끼던 요한은 샤워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장 크로비스 주니어를 발견했다.

어제와 그제 훈련에 모두 불참하여 벌금 징계를 받았던 크로비스는 오늘 오후 트레이닝 세션에는 모습을 드러냈는데, 훈련에 참가한 모두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며 음울한 기운을 쏟아 내고 있었다.

[어이, 꼬맹이. 신경 쓰지 말고 네 플레이에 집중해. 크로비스 저 녀석, 요즘 좀 이상해.]

하고, 크로비스의 시선이 향할 때마다 멈칫하는 요한을 보며 디에고 가르시아가 살짝 속삭였지만 그래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 요한! 여기 있었군!”

그때였을까.

샤워실 입구 근처의 벽면에 기대 저를 노려보는 크로비스의 눈빛에 괜히 걸음을 멈추었던 요한은 등 뒤에서 들리는 외침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편에서 손을 휘휘 흔들며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스티안 랄프가 보였다.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다시금 얼굴을 돌려 샤워실 입구 쪽을 응시했지만,

“…….”

크로비스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사라진 뒤였다.

“요한!”

아.

“바, 바티.”

“뭘 그리 놀라? 누가 있었어?”

잔잔한 보석 같은 바스티안 랄프의 보라색 눈동자가 요한을 향했다. 빙긋 눈웃음을 그린 바티는 요한의 시선 끝으로 함께 고개를 돌리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를 찾으셨습니까?”

“어? 어어. 찾았지.”

“왜요?”

A매치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와 가진 친선 경기에서 무려 해트트릭을 선보인 바스티안 랄프는 지난 그리스 원정에 불참한 인원 중 한 사람이었다. 만일 바스티안과 자신이 그리스 원정에 동참했더라면 FC 아테나와 무승부라는 결과를 얻지는 않았을 거라는 언론 기사를 본 것이 불현듯 떠오른 요한은 ‘어, 그게 말이지.’ 하고 왠지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는 바스티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흠흠.”

“……바티?”

“요한, 너 내일 할로윈인 거 알고 있나?”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기에 바스티안이 이렇게 뜸을 들일까.

의아한 얼굴로 바스티안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요한이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할로윈이라면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요한은 새삼 빠르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에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시간 참 빠르지? 네가 콜 업 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군.”

“그렇군요.”

“…….”

“…….”

“저, 그래서 말인데.”

바스티안은 다시금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자꾸 머뭇거리자 시간이 필요해 보여 요한은 말없이 기다렸다.

흠흠, 한 번 더 헛기침을 하고 숨을 고른 바스티안이 빙긋 웃으며 요한에게 물었다.

“할로윈 때 뭐 할 계획이지?”

“계획이요?”

“파티라든가, 아니면 파티라든가…….”

똑같은 말, 아닌가?

요한은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미묘한 표정을 짓는 바스티안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전 분장을 할 정도로 할로윈을 챙기는 편은 아니어서요.”

“뭐? 그럼 곤란…… 흠흠, 지인들은?”

“지인……이요?”

“그래! 그…… 왜…… 요한 너, 레온하르트 악셀과 친하지 않나?”

……!

“악셀 씨는 할로윈 파티 계획이 없나? 내가 알기로 퀸 레베카 시어터는 그날 휴무라고 하던데.”

요한은 오늘따라 유독 수다스러운 바스티안 랄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수상하군.’

계속해서 할로윈 파티를 언급하는 것도 그렇고, 레온하르트까지 언급하며 퀸 레베카 시어터의 휴무일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숨겨 둔 의도가 있어 보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말없이 저를 올려다보는 요한의 눈빛에 바스티안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뒷걸음질쳤다. 요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스티안에게 물었다.

“바티.”

“어?”

“바티는, 할로윈 파티에 참석하고 싶으신 겁니까?”

“뭐?”

요한의 직설적인 질문에 바스티안 랄프가 몸을 움찔거렸다. 요한은 ‘하하.’ 하고 어색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31일에는 할로윈 파티가 있을 예정이야. 놀기 좋아하는 이안 녀석이 직접 주최하는 파티지. 분장을 해야 한다고 난리도 아닌데, 정말 귀찮아 죽겠다고. 참! 요한, 너도 올래?]

레온하르트로부터 할로윈 파티의 참석을 종용받기는 했지만 ‘전 흥미가 없어서요.’라고 딱 잘라 대답했던 과거의 일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당시 눈에 띄게 실망하던 레온하르트의 모습과 현재 눈앞에 서 있는 바스티안의 모습이 어쩐지 겹쳐 보여 잠시 입을 다물었던 요한은 이내 결심한 듯 대답했다.

“잠깐 전화 한 통만 해도 되겠습니까?”

* * *

“어서 와요, 백 선수! 레온한테 온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환영해요!”

길었던 정원을 지나 대문 앞에 도착한 요한은 대표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입가에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언맨 분장을 한 이안 키스트가 활짝 웃으며 요한을 반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키스트 씨.”

“하하하.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어서 들어…… 어?”

“안녕하십니까, 키스트 씨. 저도 왔습니다.”

“또 뵙는군요, 키스트 씨.”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요한을 반기던 이안은 요한의 뒤편에서 불쑥 나타나 손을 흔드는 초록 얼굴의 헐크로 분장한 디에고 가르시아와 방패를 들고 나타난 캡틴 아메리카 분장의 바스티안을 발견하고선 흠칫 놀랐다.

“어서 오세요, 가르시아 선수. 어서…… 오십시오. 라, 랄프 선수.”

디에고를 볼 때까지만 하더라도 밝은 미소로 고개를 까딱이던 이안 키스트의 말끔한 얼굴이 바스티안 랄프를 보며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요한은 똑똑히 목격하고 말았다.

[랄프는 꼭 데려와야 하나?]

[네?]

[아니. 내가 듣기로 이안이랑 랄프 사이가 별로 안 좋다고 하던데.]

[안 좋다고요?]

[이안이 랄프 얘기만 나오면 아주 방방 뛰는 게……. 뭐, 괜찮겠지. 하지만 너무 붙어 있지는 말라고.]

[악셀 씨, 몇 번을…….]

[알아. 아는데,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도 못 말리는 걸 그쪽이 어떻게 말리겠어? 그러니 붙어 있지만 마. 도착하면 바로 나한테 오라고.]

정말 악셀 씨 말대로 싸우기라도 한 건가?

디에고가 자신의 딸과 아들이라며 데려온 귀여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이안 키스트는 바스티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슬쩍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요한은 파티가 열리고 있는 안쪽으로 안내해 주는 이안의 뒤를 따르며 바스티안을 흘긋거렸다.

“그런데 백 선수.”

요한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7시쯤이었으니, 이안 키스트의 저택에서는 이미 할로윈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퀸 레베카 시어터의 식구들이 좀비부터 시작하여 각종 유령, 혹은 할리우드의 유명 캐릭터 등으로 분장한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 쏠쏠한 재미였다.

그 모습들을 구경하며 빙긋 웃고 있던 요한은 제게로 슥 다가온 이안의 음성에 그를 바라봤다. 요한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묻자 이안이 작게 속삭였다.

“지금 하고 있는 분장, 그거 레온 녀석이 추천한 겁니까?”

아.

“이상……한가요?”

솔직히 말해 할로윈 파티에 참석한 건 난생처음이다.

분장도 해 본 적이 없기에 이곳으로 오기 전 안나마리아의 도움을 받았건만,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미국의 유명 만화영화 중 <미녀와 야수>라는 영화 캐릭터의 하나인 ‘야수’ 분장을 하고 있던 요한은 피식 웃는 이안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그럴 리가!”

얼른 손을 내저은 이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요한의 귓가에만 들릴 만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 녀석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것 같아서.”

“……예?”

“2층 오른쪽 복도 맨 끝 방에 있어요, 레온은.”

“……!”

“호스트로서 손님을 접대할 시간이군!”

의미심장한 이안의 발언에 놀란 요한이 그에게 물을 틈도 없이 아이언맨 마스크를 뒤집어쓴 이안이 손을 흔들며 다른 게스트 무리로 다가갔다.

‘알고…… 있는 건가?’

은근한 미소로 말하던 이안의 말이 귓가에 남아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본 요한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이안이 일러준 곳으로 가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악셀 씨.”

이윽고 도착한 오른쪽 복도의 맨 끝 방.

모든 게스트들이 1층의 연회장에서 할로윈 파티를 즐기고 있었던지라, 요한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레온하르트가 있다는 방 앞에 설 수 있었다.

똑똑.

“계십니까?”

몇 번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요한은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악셀 씨, 키스트 씨 말씀으로는 여기 계시다고……!”

이윽고 방 안의 레온하르트를 발견한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63화

본디 유명 할리우드 만화영화의 ‘공주님’이라고 한다면 조막만 한 얼굴에 큰 눈, 그리고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을 소유하고 있다. 비단결과 같은 머리카락은 덤이고 외면뿐 아니라 내면 역시 당당하고 굴하지 않아 많은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미녀와 야수의 히로인 ‘벨’도 그러했다.

별처럼 빛나는 큰 눈에 하얀 얼굴, 오뚝한 코에 붉은 입술, 그리고 탐스럽기 그지없는 갈색 머리카락은 그녀가 작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고, 실제로 작품 내의 설명 역시 비슷했다.

본인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작중의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미녀’가 바로 ‘벨’이었다. 하여 작품의 명 역시 ‘미녀’와 야수가 아니었던가.

그래.

그랬는데 말이지.

“풉.”

야수 분장을 하고 있던 요한의 입술 밖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손등을 뒤덮고 있던 갈색 장갑을 입에 가져다 대며 급히 소리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그 소리를 들은 상대가 반응한 뒤였다.

요한은 제 반응에 레온하르트 악셀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흡.”

젠장.

웃으면…… 안 되는데.

옆모습을 볼 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화장까지 한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날도 아닌 ‘할로윈’이니, 분장 정도야 기본이겠지.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머릿속은 외치고 있었지만 자꾸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요한은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한 손이 아닌 두 손까지 사용하여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깨가 부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또각또각.

큭큭거리며 아예 레온하르트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린 요한은 청명하기 그지없는 구두 소리를 들었다.

스륵.

세상에, 이렇게 큰 ‘공주님’이 있을까.

190센티를 훌쩍 넘는 레온하르트의 키는 ‘공주님용’ 구두를 신어 더욱 크게 보인다. 이토록 위압감을 주는 공주라니. 할로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외면하지 못한 요한은 결국 포기한 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

그러자 긴 갈색 머리카락의 레온하르트 악셀이 저를 보며 빙긋 웃는 것이 보였다.

“어때?”

레온하르트는 붙인 건지, 아니면 가발인지 윤기가 좔좔 흘러내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면서 요한을 향해 윙크했다. 그러고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었다.

“왜, 잘 어울리나?”

“푸풉!”

거의 2미터가 되어 가는 키로, 드레스까지 입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요한은 끝내 백기를 들어 올렸다.

한계다.

아무리 멘탈이 남다른 자신이라지만 이건 너무 큰 반칙이다.

‘레드카드감이라고.’

요한은 ‘왜 웃지? 내가 너무 예뻐서?’ 하고 공주님 분장을 한 채 허리를 숙이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큭큭거렸다.

“크크큭.”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군.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는데?”

눈가에 눈물방울까지 맺힐 정도로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요한을 향해 레온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준비?

아, 그러고 보니 레온하르트 악셀이 저를 향해 건넸던 말이 기억났다.

[할로윈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분장해야 한다고. 그쪽은 그런 센스가 없을 것 같으니 내가 지정해 주지.]

[분장이요?]

[그래, 분장. 미녀와 야수 이야기 알고 있나? 거기 야수 분장을 하고 오도록. 반드시 야수여야 해.]

레온하르트가 반드시라는 단어를 강조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요한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웃음을 끝내기 위해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푸흡!”

하지만 그런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레온하르트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쳐 버려 겨우 진정했던 호흡이 다시 가빠졌다.

요한은 이젠 아예 눈물을 흘릴 기세로 폭소를 터트렸다.

“그쪽이 웃는 게 예뻐서 보기 좋기는 한데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날 없는 사람 취급하지는 말아 줘. 이 분장을 하느라 무려 세 시간이 걸렸다고.”

요한은 살짝 꼬인 머리카락을 다시 풀며 투덜거리는 레온하르트를 힐끔거렸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숨을 고른 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움직이며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악셀…… 씨, 정말 그 모습을 하고 밖으로 나가실 생각입니까?”

겨우 진정을 한 요한은 2미터의 공주님이 ‘물론.’ 하고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레온하르트는 제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입을 꾹 다물고선 큭큭거리는 요한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어디서 났는지 손거울을 하나 들어 제 얼굴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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