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인지 어쩌면 첫 번째 정식 데이트가 될지 모르는 목요일 저녁의 만남은 최상의 상태로 맞이하고 싶었다.
“뭔가…… 공통점이 있으면 좋을 텐데.”
다행히 목요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므로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하면 요한과 어색하게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의 관심사를 더욱 파고들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대망의 목요일이 밝았다.
『와아아!』
‘…….’
레온하르트 악셀은 거실에 놓인 대형 TV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함성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게임기와 연결된 TV에서는 골 장면이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린 레온하르트의 눈에 컨트롤러를 꽉 움켜쥔 채 무표정한 얼굴로 TV 화면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요한이 보였다.
‘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레온하르트 악셀은 땅이 꺼져라 내뱉으려던 한숨을 꾹 삼킨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마도 시작은 이 방정맞은 입 때문이겠지.
눈을 질끈 감은 레온하르트는 주차장에서 내리는 요한에게 생긋 웃으며 말을 걸었던 세 시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게임……이요?]
[그래, 게임! 플레이스테이션이라고 들어 봤나? 피파라는 게임은?]
[……예, 뭐…….]
[가지고 있어? 자주 해?]
[……네. 가끔 쉴 때, 조금.]
[하하, 그래? 그럼 잘됐군!]
[네?]
[내가 얼마 전에 그 게임기를 샀는데 도통 뭐가 뭔지 몰라서. 아무래도 게임을 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적응이 잘 안 되더라고. 나 좀 도와줘. 그쪽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배우는 거지!]
[아.]
[어때, 요한?]
만약 그 말이 제 발등을 찧을 줄 알았더라면 레온하르트 악셀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미묘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요한을 보고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겠지.
[정말…… 다 끝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럼! 다 끝내 줘!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너무 궁금하거든. 하하!]
요한과의 공통 관심사를 위해 일부러 구매한 게임기가, 플레이 한 번에 몇 시간이나 걸릴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간 게임기를 사 본 적도 없고, 게임이라는 것을 가까이해 본 적도 없던 레온하르트 악셀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과도 같은 게임의 악랄함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악셀 씨의 뜻대로 해 드리죠.]
레온하르트가 의도한 대로 철저히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컨트롤러를 들고 있는 요한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그 모습이 무려 두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던 터라, 멀뚱히 앉아 있는 레온하르트의 속은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빌어먹을 TV까지 부숴 버리고 싶군.’
레온하르트 악셀은 그저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제집으로 다시 찾아와 준 요한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깊게 고민했고, ‘게임이라도 같이 해 보는 건 어때?’라는 이안 키스트의 조언에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는 게임기까지 구매해 요한을 맞았다.
어쩌면 긴장해 있을지도 모르는 요한에게 게임기를 쥐여 주며 자신의 집을 보다 편하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것이 독이 될 줄이야.
‘곧…… 세 시간째군.’
붉었던 하늘은 어느새 칠흑으로 물들었고, 벽에 걸린 시계는 오후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 남자의 첫 데이트, 그것도 집에서 하는 첫 데이트가 게임으로 시작하여 게임으로 끝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레온하르트 악셀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처음 컨트롤러를 받아 들었을 땐 자신을 힐끔거리며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라는 말을 내뱉었던 요한은 수십 분이 흐른 지금, 온 정신을 자신이 아닌 TV 화면에 꽂고 있었다.
‘누가 축구 선수 아니랄까 봐.’
하필이면 축구 게임을 추천해 준 이안 키스트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이다. 레온하르트는 째깍거리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다 결국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요한.”
“네, 악셀 씨.”
대답은 빠르지.
여전히 눈은 TV 화면을 향해 있으면서도 요한은 즉각적인 답변을 들려주었다. 약간의 희망을 느낀 레온하르트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그거 말이야, 언제…… 끝날 것 같아?”
그러자 ‘아.’ 하고 짧게 탄성을 터트린 요한이 그제야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흔들리는 요한의 벽안을 마주하며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쏘아 대던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미간을 좁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쎄요. 몇 시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뭐?
“커리어 모드로 진행 중이라 아무래도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
제기랄!
지금까지 몇 시간이 걸렸는데, 그것보다 더 걸린다고?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혹시 지루하십니까?”
그런 레온하르트의 반응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요한이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건넸다. 순간 움찔한 레온하르트는 하하,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내가 먼저 부탁한 일인걸. 지루……할 리가.”
지루하다.
엄청 지루하다.
“…….”
하지만 꺼낸 말이 있는데 이제 와 돌릴 수도 없는 노릇.
레온하르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요한에게 말했다.
“얼른 마저 해. 난 옆에서 지켜볼 테…….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출출하군. 아무래도 요깃거리를 가져오는 게 좋겠어.”
아까부터 저려 오던 엉덩이 근육도 풀 겸,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부엌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TV 화면 쪽으로 눈을 돌리며 예의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돌아 버리겠군.’
일단 요한의 곁을 슬그머니 벗어난 레온하르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 쪽을 꾹꾹 눌렀다.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긴장을 풀기 위한 ‘미끼’ 정도로 생각했던 게임기가 악수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기에 눈앞이 캄캄했다.
확실히 그 망할 게임기가 요한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눈길 한 번 안 주다니.’
정식으로 사귀게 된 이후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매번 TV 화면이나 인터넷, 그리고 신문 등을 통해 보았던 요한을 실물로 보고 미친 듯이 요동쳤던 제 심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를 보자마자 슬쩍 머리를 꾸벅이며 인사만 하던 요한이 조금은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설마 이 내가…… 게임기 따위에게 진 건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레온하르트 악셀의 의도는 좋았다. 몇 분 동안 게임을 즐긴 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저녁 식사로 넘어가 분위기를 탄 뒤 사랑을 속삭이려던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래, 실로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말이지.
맑게 일렁이던 요한의 푸른 눈동자는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레온하르트 악셀이 아닌 젠장맞을 TV 화면에 고정되어 있고, 슬쩍 제 손끝을 스쳤어야 할 요한의 기다란 손가락은 딱딱한 컨트롤러를 벗어날 줄을 몰랐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세웠던 완벽한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게임기를 준비한 것도 자신이고, 클리어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도 자신이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 됐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라면 요한과 뜬눈으로 TV 앞에서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주머니를 뒤적였다. 다행히 그의 주머니에는 핸드폰이 들어 있었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액정의 시간을 살핀 뒤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읏…… 자식, 잠깐만! 어. 그, 그래. 레, 레온이냐.
60화
빌어먹을 게임기를 추천한 사람이니 그것을 요한의 손에서 떼어 내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요즘 그 나이 대 녀석들은 그런 게임을 아주 좋아하지. 특히나 축구 선수라면 더욱!’ 하고 생글거리며 제게 게임기를 추천해 준 이안 키스트에게 욕설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레온하르트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지?’
레온하르트는 전화를 걸자마자 들려오는 기분 나쁜 신음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아, 짙은 숨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움직였다.
“이봐, 이안. 사우나라도 갔나?”
-어? 아, 아니. 그, 그럴 리가.
그런데 이 소리는 대체 뭐야.
이안 키스트가 뱉어 내는 것이 틀림없는 신음이 레온하르트의 신경을 벅벅 긁고 있었다.
[나 먼저 간다! 다들 수고해!]
오늘 마티네 공연이 끝난 후, 저보다도 빠르게 퀸 레베카 시어터를 벗어나던 이안의 모습은 확실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괜히 전화를 건 것은 아닌가 싶어 머뭇거리던 레온하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안, 혹시 전화 받기 곤란한 상황인가?”
-……뭐? 아, 아니, 그런 건 아닌…… 큭!
“……이안?”
-젠장! 미안한데 레, 레온. 아무래도 지금은 좀 곤란…… 곤란해. 일단 끊어!
“뭐? 잠깐만, 이……!”
레온하르트는 제 말만 내뱉은 후 끊어 버린 전화를 황당하게 응시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녀석 같으니.
결국 또렷한 해법도 찾지 못한 채 부엌의 식탁 앞에 앉은 레온하르트는 거실 쪽에서 게임에 매진하고 있는 요한을 흘긋거리다 턱을 괴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지켜봐 온 요한의 행동 패턴으로 보아 저 빌어먹을 게임이 끝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렵군.’
여자의 마음도 그렇지만 남자의 마음은 더욱 알기 어렵다.
그 상대가 특히 요한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냉랭한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애인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또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제 입으로는 도통 말하지 않기에 스스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렇게 번번이 실패를 하니.
대체 어떻게 해야…….
“헉!”
조금씩 눈이 감기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고심에 잠겨 있던 레온하르트는 화들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스르륵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낮게 탄성을 흘리며 일어난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요한?”
몇 초 전까지 식탁 위에 머리를 대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저를 응시하고 있는 요한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언제…….”
“연애는 처음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조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 분명한 요한의 말에 멈칫했다. 요한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와 정식으로 만나는 것도 처음이고, 데이트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요한.”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라서…… 악셀 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기분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뭇 진지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말을 꺼내는 요한의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대꾸하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요한은 흔들리는 레온하르트의 눈에 시선을 꽂은 채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청명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하지만, 노력하겠습니다.”
빙긋 올라가는 요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과 같은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맞춰 가겠습니다. 그러니 바로 따라가지 못하고 헤매도, 서툴러도 이해해 주십시오.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거니까요.”
“…….”
“그리고……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합니다, 악셀 씨. 설마 악셀 씨가 정말로 지루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게임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보여서 노력한 건데…….”
눈을, 뗄 수가 없다.
옅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요한의 음성이 부드럽게 귓가로 내려앉아 심장이 쿵쿵 뛴다. 몇 시간 전과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런.’
어쩌면 좋지.
정말 어쩌면, 좋을까.
기분 좋게 울리는 가슴의 뜀박질 소리가 그의 속을 간질거리게 만들고 있다.
레온하르트는 ‘따분해하시는 줄 알았다면 같이 하는 게임을 할 걸 그랬습니다.’ 하고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요한을 보며 결국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악셀…… 씨?”
요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앞까지 다가온 레온하르트의 그림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근두근.
돌발적인 제 행동에 긴장을 했는지 요한의 어깨가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고 있는 요한을 묵묵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두 팔을 뻗었다.
“……!”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포옹에 크게 당황한 요한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몸을 밀치지 않은 채 묵묵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요한의 것인지 제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아마도 조금 더 크게 울리는 것이 제 것이려나. 스윽 입꼬리를 올리며 요한을 끌어안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툭 던지는 요한의 말에 그제야 그에게서 벗어났다.
“요한.”
레온하르트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그쪽은 공격수이면서, 이리 잦은 반칙을 해도 되는 건가?”
“……네?”
레온하르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요한이 고운 미간을 좁히려 하자 레온하르트는 살짝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자연스러운 레온하르트의 스킨십에 흠칫 놀란 요한이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는 그를 향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할…… 생각입니까?”
레온하르트는 음흉한 눈빛을 쏘아 대며 대꾸했다.
“첫 데이트라 진도를 빼는 건 웬만해선 참으려고 했는데.”
“…….”
“그쪽이 너무 귀여운 소리를 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하.”
“싫어?”
은근한 기대를 담은 말을 던지자 피식 웃은 요한이 레온하르트의 두 눈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두 남자가 있는 식탁 주변이 곧 화끈한 열기에 휩싸였다.
* * *
‘하읏.’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레온하르트의 페니스에 요한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신음이 입 안을 감돌았다. 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세게 부여잡았다. 우뚝 솟은 제 것이 아래위를 오가는 레온하르트의 아랫배와 사타구니에 닿자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요한은 절정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구슬땀을 흘렸다.
“이봐, 요한.”
식탁에서 소파, 소파에서 욕실, 욕실에서 침대까지.
혼을 쏙 빼 버릴 만큼 거친 정사를 치른 뒤 레온하르트 악셀은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등을 기댄 채 누워 있었다.
몇 시간 동안 하아, 하아, 뜨거운 신음을 연신 내뱉으며 땀을 뺀 터라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상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위에서 눈을 끔뻑이는 것밖에 없어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제 옆에 누워 있는 요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저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요한이 ‘네.’ 하고 짧게 대답하는 게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쭉 뻗은 손가락 끝이 요한의 손가락과 닿자 싱긋 웃으며 홱 몸을 돌렸다.
“그쪽은 연애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나?”
그의 살을 쓸고 깊숙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묻고 싶었던 말이 끝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요한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요한과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무슨 뜻입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가 귀엽기 짝이 없어 속으로 쿡쿡 웃던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데이트 같은 것을 하면 꼭 해 보고 싶었던 거 말이야.”
“아.”
“그런 건…… 없어?”
홀로 고심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상대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고, 또 어떤 것에 흥미를 가지며,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혼자 생각하고 정리하다 몇 시간 전과 같은 결과를 냈으니 차라리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모습뿐 아니라 속내까지 모두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해서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너에 대해, 알고 싶다고.
그러자 제 말이 놀라웠는지 순간적으로 말을 하지 않던 요한이 이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럴 리가. 보통 그쪽 나이 때는 뭐든 상상할 시기, 아닌가? 나만 해도…….”
“예?”
“……흠흠. 어쨌든 말이야, 혈기 왕성한 나이잖아. 그러니 꿈꿔 왔던 데이트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
무의식적으로 실수를 저지를 뻔한 레온하르트는 언제 그런 말을 흘렸냐는 듯 뻔뻔하게 웃었다. 그러자 눈을 가늘게 뜨던 요한이 오히려 되물었다.
“악셀 씨는 어떻습니까?”
“나?”
“악셀 씨는 어떤 연애를 추구합니까? 뭘 좋아하시죠? 게임을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나, 나야 뭐…….”
몸으로 하는 연애가 최고지, 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하하, 어색하게 웃는 레온하르트를 보고 픽 실소를 터트린 요한이 이내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딱히 로망 같은 건 없습니다. 애초에 연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낮게 웃던 요한이 꽤 냉철한 대답을 하자 레온하르트의 얼굴 역시 어두워졌다.
[저는 단순히 제가 게이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쪽과 잤고, 답을 얻었습니다.]
이거…… 애초에 질문부터가 잘못됐군.
자신의 정체성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던 사람이 추구하는 연애가 있을 리 없지. 레온하르트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그쪽이 좋아하는 건 뭐지?”
“…….”
“좋아하는 건 있을 거 아니야. 뭐 사물이라든가, 아니면…….”
“눈.”
“눈?”
작은 울림이었기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레온하르트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요한이 보기 드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걸 좋아합니다.”
아.
“좋은 기억들이 많아서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항상 눈이 내려서…… 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눈이 오는 날…… 소중한 사람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것 정도는 해 보고 싶네요. 좋은 기억은 쌓일수록 기쁜 법이니까.”
“그래?”
눈.
눈이라.
요한의 말을 되새기던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살짝 일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악셀 씨. 저는 지금도 충분히 좋습니다.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어떻게 하면 요한과 함께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레온하르트가 잔잔한 요한의 음성에 그를 바라봤다. 요한의 딱딱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 갔고, 그의 곧은 벽안이 레온하르트를 향했다.
요한이 레온을 정확히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61화
“별일 아닐 거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리스 원정에서 돌아온 장은 자신의 에이전트인 에릭 스피츠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트레이닝이 없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런던 FC의 보드진이 긴히 자신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미간을 찌푸리던 장은 보드진의 사무실이 있는 미라클 스타디움에서 미리 저를 기다리고 있던 에릭 스피츠와 만나 회의실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회의실의 유리문 사이로 런던 FC 이사회의 인물들과 경영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굳어지는 장의 얼굴을 힐긋거린 에릭이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지만 어쩐지 구겨진 안면을 펼 수 없던 장은 이내 달칵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크로비스 씨, 스피츠 씨,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단장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회의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을 향해 미소 지은 비서관이 그들에게 말한 뒤 슬쩍 비껴나자 장은 에릭을 힐끔거렸다.
에릭이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고개를 두어 번 주억였다. 장은 잠시 망설이다 몇몇 임원들이 앉아 있는 회의실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집을 나설 때부터 시작되었던 불안감은 애석하게도 사실이 되었다.
장이 에릭과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에릭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고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쓴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던 런던 FC의 최고 경영자, 마리오 클락 단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앉으시죠, 스피츠 씨.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뭐요?’ 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린 에릭이 침을 튀겨 가며 소리쳤다.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은, 우리 장을 이적 금지가 끝나는 내년 여름에 내보내겠다고 말하는 거 아닙니까!”
버럭 소리치는 에릭 스피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장은 회의실에 들어온 뒤 무슨 일로 저를 불렀냐는 질문에 담담한 목소리를 흘리던 클락 단장의 말을 떠올렸다.
[미안하지만, 크로비스 선수. 이대로라면 런던 FC에 크로비스 선수의 자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팀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1년간 이적 금지. 즉, 이미 지나간 여름과 다가오는 겨울 이적 기간에 영입과 방출 모두 금지라는 징계를 받았던 런던 FC의 보드진이 내년 여름을 대비하여 미리부터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부터 슬슬 들려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정리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은 ‘아직 계약이 3년 더 남았다고요!’를 외치고 있는 에릭을 무표정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한 에릭과 장의 반응에 한숨을 내쉰 클락 단장이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가 크로비스 선수의 재능을 높이 보고 이적을 권유했던 것은 사실이나…… 크로비스 선수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봐요, 클락 단장!”
“흥분하지 마십시오, 스피츠 씨. 두 번의 이적 시장 금지가 구단의 성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내년 여름을 위해 미리 대비를 해 놔야 합니다.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고주급자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크로비스 선수, 이런 말을 하기까지…… 우리 역시 적잖은 고민을 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내년 여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크로비스 선수가 이적할 만한 좋은 팀을 물색하는 데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두 분을 모신 겁니다.”
건조하다 못해 딱딱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장은 그 말을 내뱉은 뒤 이적을 추천할 만한 클럽의 이름들을 언급하고 있는 클락 단장을 노려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섰다.
“장! 기다려, 장!”
갑작스러운 장의 행동에 놀란 에릭이 그런 그의 뒤를 쫓아 나왔지만 장은 멈추지 않았다.
두근두근, 기분 나쁜 심장의 울림이 그의 미간을 좁아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