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59)

요한으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레온하르트는 다급함을 느꼈다. 무언가 제대로 시도해 보지도 못한 채 요한과의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냉정하게 말을 마치고는 저를 보고 있는 요한을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악셀 씨랑 정식으로 만나 볼 생각입니다.]

담담하게 이어진 요한의 음성은 레온하르트를 또 다른 충격으로 빠트렸다. 1차 충격에 이어 2차 충격을 받은 레온하르트 악셀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요한에게 말을 잇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한 번 더 묻기 위해 요한을 바라보았지만 요한은 이미 말을 마치고 돌아선 후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요한의 뒤를 따르며 ‘방금 한 말, 다시 해 줄 수 없을까? 한 번만 더 해 주면 좋겠는데!’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풉.”

몇 번을 떠올리고 또 떠올려 봐도 그날 일이 도저히 잊히질 않는다.

레온하르트는 멋대로 씰룩거리는 입꼬리의 움직임을 막지 못한 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기다란 다리를 쭉쭉 뻗어 힘껏 커튼을 연 뒤 웃으며 중얼거렸다.

“날씨가 매우 맑…….”

쏴아아-

지독할 만큼 기분이 좋은 아침이었지만 그런 그의 마음과 달리 창밖에서는 눈치 없는 비가 주르륵주르륵 내리고 있었다.

콰쾅! 콰콰쾅!

“…….”

게다가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한 비바람이 창 안으로 들어오자 그의 부스스했던 머리카락이 습기를 머금고 내려앉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레온하르트는 언제 창문을 열었냐는 듯 힘껏 닫고선 이내 다시 생긋 웃었다.

“마음이 맑으면 됐지, 마음이.”

근래의 그는 몹시 긍정적이었다.

[이봐, 레온. 너…… 뭐 잘못 먹었냐?]

시도 때도 없이 실실거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모양인지, 이안 키스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지만 그마저도 빙긋 미소 지으며 넘길 만큼 레온하르트 악셀은 기분이 좋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정식으로 만난다는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알고 하는 건가?]

[제가 그것도 모르고 그 말을 꺼냈을 것 같습니까.]

[……!]

[진담이니 걱정 마십시오. 악셀 씨와 진지하게 만나 볼 생각입니다. 물론, 악셀 씨만 좋다면요.]

푸른 눈의 요한은 그의 손목을 잡고 다급히 묻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 동안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정식…… 교제라.’

후후, 올라간 입꼬리가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요한의 허락을 받은 이후 각자의 일로 정식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했지만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완전, 바보가 된 기분이군.’

그간의 연애에도 한 번도 진실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요한 백을 상대로는 평소 이상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의 사소한 말투와 몸짓, 그리고 눈빛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집중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싶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가 제게 감정을 토로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빠져도 제대로 빠진 것이 틀림없다 여기면서도 요한 백이라는 늪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침실을 빠져나온 레온하르트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의 녹안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진 핸드폰으로 향했다.

[첫…… A팀 호출입니다.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백요한이라는 축구 선수를 제대로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빌어먹을 A매치 기간이라고 탓을 할 틈도 없었다.

정식 교제를 하기로 결정한 날, 한동안은 자주 만나지 못할 거라며 머리를 꾸벅 숙이는 요한의 모습은 너무도 예의 발랐다.

섹스도 하지 못하고 얼굴도 보지 못하겠지만 대신 틈틈이 연락하자던 요한은 지난 7일에 열린 리그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출국했다. 마음 같아서는 배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못 한 레온하르트는 벌써 며칠째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한국과의 시차가 9시간 정도니…….

‘오후 5시 정도 됐겠군.’

A팀 데뷔 경기가 될 수도 있는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요한을 떠올린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해외로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받지 않으면 곤란한데.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는 동안,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 뒤에 서 있는 것만큼이나 크게.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던 레온하르트는 몇 초 뒤, ‘네.’ 하고 들려온 건조한 음성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요한?”

-네.

“통화…… 할 수 있나?”

요한이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트레이닝 센터라는 파주 NFC에 도착한 이후로 제대로 된 통화 한 번 하지 못했다. 물론 몇 번 시도는 해 보았지만 그제는 훈련량이 많아서, 그리고 어제는 누군가와 상담을 하느라 전화 받기 곤란한 상황이라는 대답만 들려준 요한이었기에 어떠한 답변을 할지 긴장이 됐다.

침을 꼴깍 삼키며 상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레온하르트는 풉, 하고 낮게 웃는 요한의 음성을 듣고 몸을 움찔거렸다.

-예.

“……!”

-잘 지내셨습니까, 악셀 씨?

예전과 달리 딱딱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꽤 부드러운 어조. 요한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것도 아니건만 감격이 차올랐다.

‘아니, 앞에 있었다면 곤란했을지도.’

만일 그의 얼굴을 마주했더라면 팔을 뻗어 요한을 와락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생각에 생긋 웃은 레온하르트는 ‘악셀 씨?’ 하고, 저를 부르는 요한의 음성을 듣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훈련은 끝났나?”

-네.

“한국 날씨는 어때? 여긴 비가, 꽤 오는데.”

-한국은 맑습니다. 경기 당일에도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 그래?”

-예.

“…….”

-…….

젠장!

몇 번이고 시도를 했을 때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제대로 통화가 연결되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에 미간을 좁혔다.

‘초짜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고수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의 경험이 있건만 이상하게 요한을 대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악셀 씨.’ 하고, 요한이 저를 부르자 얼른 대답했다.

“어?”

-악셀 씨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사소한 질문이었다. 일상적인 안부와도 같은. 그러나 요한이 물으니 어쩐지 가슴이 컥 막혔다.

‘아니. 하나도 못 지내.’

네가 보고 싶어 미치겠어, 라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그쪽의 눈빛이 그립고, 그쪽의 얼굴이 그립고, 그쪽이 뱉어 내는 말이 그리워 미치겠어, 라는 말도.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뒤에야 후우, 숨을 고른 뒤 차분히 대답했다.

“물론. 하지만 그쪽이 빨리 돌아와 준다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안 된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래서 응원하려고.”

-예?

“어차피 A매치가 끝날 때까지 실물을 보기는 글렀으니, 중계에서라도 볼 수 있게 그쪽의 A매치 데뷔를 기원할 생각이야.”

-……!

“아, 그런데 한국이랑 우루과이 매치, 중계는 있는 건가? 해외 중계를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우루과이가 축구 강국이기는 하나 아시아 국가와의 매치를 TV에서 중계해 줄 리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때, 요한이 ‘그거 몹시 고맙군요.’ 하고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린다. 레온하르트는 스윽 올라가는 입꼬리의 움직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어제 상담은 잘했나? 같은 방을 쓰는 녀석이 정말 프리미어 리그로 올 것 같아?”

원래 요한과는 어제 오후나 밤쯤 제대로 다시 전화 통화를 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요한의 사정으로 인해 그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해서 오늘 요한에게 전화를 걸 때 살짝 긴장했던 레온하르트는 어제의 일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한 번쯤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 말을 건넸다.

그러한 레온하르트의 발언을 듣고 탄성을 흘린 요한은 곧 상기된 음성을 내뱉었다.

-예!

담담한 대꾸가 들려올 것이라 여기던 레온하르트는 왠지 즐거워하는 듯한 요한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당황했다.

요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마도 겨울에 이적을 하실 것 같습니다. 로젠버그나 옥스퍼드 등의 빅 클럽에서 러브콜이 온 모양이에요. 물론 그 외에 다른 구단들도 더 있고.

로젠버그라면 이안 키스트가 광적으로 열을 올리는 팀이었으며, 옥스퍼드는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도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흐응, 꽤 실력 있는 선수인가 보군.”

-네!

“…….”

-함께 지내보니 중계를 통해 본 것보다 훨씬 좋은 분이에요. 그런 분을 알게 돼서 많이 기쁩니다.

“그, 그래?”

-선배님이 정말 이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도 의지할…….

-[요한아, 아직 통화 중이니?]

이상하게 들떠 있는 요한의 말투가 괜히 신경 쓰였다.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요한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목소리와 함께 낯선 남자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인지하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어?

-[난 다 씻었어. 이제 너 씻으면 될 것 같아. 참, 샴푸 없다.]

-[샴푸가 없습니까?]

-[어. 호석이 형한테 말해 놨으니 곧 가져올 거야. 그런데 전화 중이었어?]

-[네? 아…… 네.]

-[곧 식사하러 가야 하니까 대충 끊고 얼른 샤워해. 오늘 네 환영회 한다고 다들 들떠 있으니 늦으면 안 되잖아?]

-[환영……회요?]

-[첫 소집인데, 환영회 정도는 해야지! 저, 미안하지만 우리 요한이 좀 빌려 갈게요~]

“…….”

-저, 악셀 씨, 듣고 계십니까?

자신과 통화를 나누는 상태라는 것을 잊었는지 핸드폰 너머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 가던 요한이 난처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는 ‘응.’ 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죄송하지만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예. 그럼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잠깐만, 요…….”

레온하르트가 붙잡을 틈도 없이 뚝 전화를 끊어 버린 요한은 냉정하고 또 냉정했다.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끊어져 버린 전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귀를 맴돌던 단어를 떠올렸다.

‘샴푸랑…… 샤워, 라.’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의 향연들 중 유일하게 들렸던 것은 샴푸라는 단어와 샤워, 그리고 요한을 친근하게 부르는 상대의 음성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이제 막 요한과 친해진 같은 팀의 룸메이트일 뿐이다. 그런 사람까지 의심하게 될 줄이야.

‘중증이군, 정말.’

요한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 제 욕심에 헛웃음을 삼키던 레온하르트는 진한 아쉬움을 남긴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크게 기지개를 펴고선 말을 내뱉었다.

“자, 그럼 요한이 돌아올 때까지 나도 내 일에 최선을 다해 볼까.”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 1부 마침 -

58화

#Second Half : 후반 1′ ~ 후반 10′

지난 2주 동안 각 대륙에서 열린 A매치 기간이 끝났다.

자국을 위해 뛰다 다시 소속 팀으로 돌아온 런던 FC의 선수들은 20일 토요일에 있었던 리그 경기 이후, 곧바로 그리스 아테네로 향했다. 다가오는 목요일에 있을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2차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차전 상대였던 마드리드 CF에 이은 두 번째 유럽 원정길이었지만, 2차전 상대인 FC 아테나는 런던 FC보다 상대적 약팀이었다. 하여 A매치를 치르고 온 몇몇 선수들이 빠졌다고 한들, 런던 FC가 수월하게 승리를 챙길 것이라는 언론의 예측이 주를 이루었다.

삐삑―

하지만 그러한 여유가 독이 됐던 것일까.

심판의 휘슬이 불린 후 비쳐진 전광판의 스코어는 0:0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3위라고? 그것도 조별 예선에서? 우리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봐! 제정신이야? 미쳤어? 너희가 그러고도 런던 선수야?”

총 네 팀이 예선을 치르는 각 조의 조별 예선에서 1무 1패라는 최악의 스타트를 하게 된 런던 FC 선수들은 터널을 지나 드레싱 룸으로 향하는 내내 그리스까지 응원을 온 원정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만 했다.

전후반, 그리고 추가 시간까지 합쳐서 총 93분의 경기 동안 유효 슈팅을 세 개밖에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은 원정 팬들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물론 런던 FC에도 속사정은 존재했다.

팀의 주축 스트라이커인 마이크 비츠가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 신예, 요한 백이 지난 1차전 때 다이렉트 퇴장을 당해 1경기 추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없다.

하여 세 번째 옵션이었던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대신 선발에 나섰다. 과거 톱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던 터라 그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저번 리그 경기에서 보여 준 경기력으로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바닥을 기었다.

대부분이 예상했던 대로 장은 선발 출전한 70분 동안 유효 슈팅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조지 웰비 감독이 결국 그를 교체 아웃하는 강수를 뒀지만 끝내 팀은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젠장할!’

자칫 머뭇거렸다가는 분노한 팬들이 관중석에서 물병을 던질 기세였던지라, 장은 휘슬이 불리자마자 드레싱 룸으로 들어왔다. 씩씩거리는 그의 모습을 흘긋거리는 다른 선수들의 시선 따위는 깨끗하게 무시한 장은 제자리에 털썩 앉은 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평소 자주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켠 그는 천천히 오늘 경기에 대한 소감을 올린 팬들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늘 크로비스 경기력에 대해 토론 좀 해 보자. 다들 어떻게 생각해?

┗Shit!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x이었어, �x!

┗형편없었지. 그 녀석이 어떻게 런던의 자존심일 수 있겠어.

┗우리 엄마도 그놈보단 잘하겠다! 빌어먹을!

┗크로비스가 날린 기회가 몇 갠지 모르겠군. 저 자식의 눈은 제대로 달려 있기는 한 건가?>

후우.

화가 난 팬들의 욕설과 분노가 가득한 표현들은, 그래, 천 번쯤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기분은 나쁘지만 그들 역시 런던 FC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일 테니.

하지만―

<┗그런데 백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우리가 언제까지 크로비스의 똥볼을 봐야 해?>

‘……뭐?’

<┗┗다음 경기.

┗┗┗오케이, 살았군.

┗┗┗다행이야, 백이 돌아온다면 크로비스 자식을 보지 않아도 돼!

┗┗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들 지난 A매치 때 소식 들었어? 백이 한국이 치른 친선 2경기에서 3AS랑 1GOAL을 기록했다더라!

┗┗┗대단하군. 마드리드전의 여파가 오래가지 않았어. 우린 대체 왜 그런 선수를 썩히고 있었던 거지?

┗┗┗┗왜긴. 당시 리저브 팀 감독이 멍청해서지! 잭콜 그 자식은 정말 잘 잘렸어!>

쾅!

쉬지 않고 달리는 답글들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장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야로 들어온 물통을 걷어찼다.

“뭐, 뭐야?”

마침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오던 런던 FC의 중앙 미드필더 브래들리 찬이 갑자기 날아온 물통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인상을 썼지만, 장은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드레싱 룸을 나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딜 가나 들리는 그 이름이 계속해서 장의 신경을 자극했다. 장은 부드득부드득 이를 갈며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디질 못하겠다.

분노에 가득 차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장은 서늘한 눈을 빛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크로비스 씨!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직도 아무 성과가 없는 겁니까?”

신경질적인 음성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크로비스, 무슨 일 있어?’ 하고, 복도를 지나던 동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장은 손을 휘휘 저으며 가라는 표시를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동료가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노려보던 장은 ‘그게…….’ 하고 짧게 숨을 내쉬는 핸드폰 너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하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결과물을 내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쉽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요청 주신 대로 미스터 백의 뒤를 쫓고 있기는 한데, 그분이 워낙 한결같아서요.

한결같다니?

-런던으로 돌아온 이후 계속 미행을 했는데 생활 패턴이 너무 똑같습니다. 집이랑 LTC. 그 외의 곳은 일절 가지를 않아요. 하아. 꽤 많은 선수들의 뒤를 밟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솔직히 저도 좀 난처합니다.

일을 잘한다고 해서 거금을 주고 사주를 했더니 일이 어렵다고 제게 한탄하는 꼴이라니. 장은 황당함을 애써 감춘 뒤 짧게 호흡을 골랐다. 그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만 내쉬고 있는 상대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은 없습니까?”

-……접촉이요?

“스캔들이 될 만한 사람들이라든가.”

-아, 하나…… 있긴 한데. 그냥 옆집 사는 친구 같아요.

“남자입니까?”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

그래야 스토리가 맞아떨어지지.

장은 기대 가득한 얼굴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아뇨.’ 하고 그의 기대를 무너트리는 답변이 들려왔다. 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자라면 소용이 없다. 장은 젠장, 하고 욕지거리를 흘렸다.

-연인 사이는 아니고, 단순한 친구인 것 같습니다.

“후우, 그럼 그 외의 사람들은요? 주목할 만한 교우 관계는 없습니까?”

-…….

“이보세요, 테임즈 씨!”

-죄송합니다. 미스터 백 자체가…… 꼬투리를 잡힐 만한 행동 자체를 하지 않았요. 한번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 기자와 대화를 나눠 봤는데, 제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루한 분 같았습니……. 아! 그러고 보니 그 옆집 친구 말고 자주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합니다.

“그게 누굽니까!”

일말의 희망이 보이자 그만 흥분을 해 버렸다. 장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전화 상대, 테임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테임즈가 말했다.

-혹시, 레온하르트 악셀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자주는 아니고, 오늘 처음 목격했습니다. 악셀 씨가 미스터 백을 집까지 태우러 왔더라고요. 아무래도 악셀이 런던 FC의 메인 모델이니 첫 촬영을 함께한 계기로 친해진 걸까요? 응? 듣고 계십니까, 크로비스 씨?

장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두근두근, 심장이 뛸 정도였다. 이제야 원하는 대답이 나왔군. 희미하게 웃던 장은 ‘테임즈 씨.’ 하고 수신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전화 상대를 불렀다.

“앞으로 테임즈 씨가 해야 할 일을 알려 드리죠.”

-……예?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 테임즈에게 장은 말을 이었다.

“백이 악셀과 만나는 날, 두 사람이 스킨십하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그 사진을 찍어 바로 내게 보내십시오.”

-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 설마, 크로비스 씨!

“네, 그 설마입니다.”

-하, 하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 악셀은…….

“알죠. 이성애자라는 거. 하지만 루머라는 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장의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테임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은 낮게 내리깐 눈으로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포토샵 같은 걸로 조작한 건 안 됩니다. 허접한 조작을 했다가 들키면 오히려 이쪽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으니. 하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구도로 사진 찍는 것 정도는, 테임즈 씨 같은 능력자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장면이든 좋습니다. 누구나 의심을 할 법한 ‘작품’을 만들어 내세요.”

-…….

“어차피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가치를 떨어트릴 수 있는 ‘무언가’니까.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테임즈 씨.”

장의 웃음이 핸드폰 너머로 번져 갔다.

59화

“그리스에 가지 않는다고?”

레온하르트 악셀이 요한으로부터 소속 팀의 그리스 원정길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정확히 월요일인 22일쯤이었다.

-예.

출근하던 도중 습관적으로 들른 신문 가게에서 기사를 본 레온하르트가 ‘이제 곧 비행기에 타겠네?’라며 요한에게 안부차 전화를 걸었다. 때문에 이어서 들려온 요한의 발언은 그를 큰 충격에 빠트렸다.

고백하자면,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빡빡한 일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특히 요한이 지난 17일, 머나먼 한국에서 영국까지 긴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리그 경기에 출전했다는 소식마저 접한 상황이었다. 이제 막 사귀게 된 애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상대의 피로도를 생각해 그리움을 참고 있었는데.

‘어째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야?’라는 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대답 없는 제게 이어 말하는 요한의 음성을 듣고 레온하르트는 입 밖으로 뱉어 내려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목요일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

-예. 그날, 마티네 공연이죠?

“어어, 뭐…….”

-저녁 공연이 아니라 다행이군요. 혹 괜찮으시다면 공연이 끝난 후 저를 데리러 오실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는 안이 나을 것 같습니다. 호텔보다는 집이 낫고요.

“……!”

-저희 집보다는 악셀 씨 집이 조금 더 편할 것 같은데, 악셀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악셀 씨? 듣고 계십니까?

너무도 의외인 요한의 말에 가슴이 철렁거릴 만큼 설레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처음……이지?’

특히나 ‘그 사건’ 이후 요한은 제집에 오겠다고 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더 입꼬리가 멋대로 씰룩였다. ‘알겠어. 그렇게 하지.’라는 대답이 한참의 시간 끝에 흘러나왔다.

“후후.”

얼떨결에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은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핸드폰을 붙든 채 웃음소리를 흘렸다. 빌어먹을 A매치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더니 이제야 보상을 받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고, 요한이 스스로 제집에 오겠다는 말을 꺼낼 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그와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진 것이 이제야 실감 났기 때문이다.

요한에게서 정식 만남 제안을 받은 지 어느새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물론 사귀게 된 이후 요한이 바로 한국으로 떠나 버리는 바람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데이트하지 못했고 심지어 섹스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주 잠깐씩 나누는 통화가 즐거운 레온하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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