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저 빌어먹을 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난 어떻게 돌아가라고!”
레온하르트 악셀과 요한 백이 예의 인종차별 소동 이후 먼저 나가 버린 뒤의 일이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은 자신을 챙기지도 않고 요한만 데리고 나가 버린 레온하르트 악셀의 행동에 버럭 소리쳤다.
특히나 레온하르트의 차를 얻어타고 온 이안이었기에 런던 외곽 지역인 햄스테드에서 중심부까지 돌아갈 것을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를 때였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응?
“걱정 마십시오, 키스트 씨. 저도 차를 가져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키스트 씨를 내려 드릴 테니, 함께 가시죠.”
레온하르트의 사주를 받아 요한에게서 떼어 냈던 바스티안 랄프가 놀랍게도 친절한 제안을 건넸고, 이안은 그 다정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저를 보며 빙긋 웃던 바스티안 랄프의 자색 눈동자가 꽤 오묘하게 일렁이긴 했지만, 햄스테드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는 생각에 당시의 이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하, 역시 세계 최고의 윙어답습니다. 차도 아주 좋은데요? 페라리라니. 어? 이거 F12 TDF 아닙니까? 이야, 내가 이런 차도 다 타 보네!”
799대 한정으로 풀렸다던 스포츠카 위에 올라타면서 이안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이상하게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바스티안 랄프와 한 자동차를 탄 것도 그 원인이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흘긋거리자니 어쩐지 가슴의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꽤, 위험한걸.’
바스티안 랄프는 이안이 응원하는 경쟁 팀의 선수이긴 했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공격수였고, 순수한 축구 팬으로서 그런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 심장이 뛰는 일이었다.
‘올리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제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을 보면, 바스티안 랄프에게 들이대는 남자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안은 만일 바스티안이 유혹하면 넘어갈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쿡쿡 웃었다.
끼익.
‘응?’
그렇게 홀로 생각에 잠겨 쿡쿡 웃고 있던 이안은 갑자기 차를 세우는 바스티안을 보며 흠칫거렸다.
“랄프…… 선수?”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그때였다.
이안은 갓길에 주차한 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바스티안의 눈빛에 움찔거렸다. 바스티안 랄프는 보라색 눈동자를 이안에게 고정시키며 툭 말을 던졌다.
“키스트 씨가 아까부터 제 얼굴을 흘긋거리는 게, 운전에 방해가 됩니다.”
“그게…… 무슨?”
이해되지 않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하자 바스티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전 키스트 씨의 말대로, 게이거든요.”
“……예?”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인 말을 뱉어 내는 바스티안에 이안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그에게 짙은 미소를 그려 보인 바스티안은 천천히 다가왔다. 이안은 바스티안이 제 코앞에서 진한 숨결을 뱉어 내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면서도, 그를 뿌리칠 생각을 못 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바스티안 랄프의 숨결에 현기증을 느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그 후, 벌어진 일은 순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마력에 얽히듯 두 남자의 입술이 닿았고, 혀끝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키스였다. 마지막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을 모두 놓쳐 버릴 만큼.
“……빌어먹을.”
그래.
그러니까 간략하게 이 상황에 대해 말하자면, 이안 키스트는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가 있었던 다음 날 낯선 남자의 집에서 눈을 떴다는 것. 그리고 이안이 눈을 뜬 낯선 남자의 집이 바스티안 랄프라는 엄청난 거물이었다는 것, 정도가 되겠지.
당시의 분위기에 취해 이안은 제집이 아닌 바스티안의 집으로 귀가를 했고, 정신없이 키스를 나눈 후 옷까지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스티안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것이다.
그와 관계를 맺은 사실을 상기해 낸 이안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일어났습니까.”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기억을 더듬고 있던 이안은 문 근처의 벽에 몸을 기대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흑발 남자를 발견했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외치고 싶었으나 엉덩이 쪽이 욱신거려 말을 내뱉지 못한 이안은 ‘몸은 좀 괜찮습니까?’라고 물으며 미소 짓는 흑발의 축구 선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랄프랑 잤다는…… 이야기지?’
이안 키스트는 자유연애 지향자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
뜻이 맞다면 그래, 섹스 정도는 할 수도 있지.
그런 잠자리 상대가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는 것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을 나누는 데 있어 성별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그러나.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안 키스트는 제게 통증약 하나를 건네는 남자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보라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드시면 엉덩이 욱신거림이 좀 나을 겁니다.”
런던 FC의 간판선수인 바스티안 랄프는 뭇 여성 팬들을 비롯하여 남성 팬들까지 홀린 눈빛으로 이안을 내려다보더니 알약과 함께 물잔을 건넸다.
이안은 그의 손에 들린 잔과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
“키스트 씨?”
“그,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
“내, 내가…… 이 내가…… 내, 내가 그쪽한테…… 머, 먹혔다는 겁니까?”
먹히다니.
먹은 것도 아니고, 먹히다니!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안은 확실히 어젯밤 있었던 상황에 대해 똑똑히 떠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정했던 까닭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사실이 되면 곤란했다. 자신이 깔리다니. 그런 황당한 일이 현실이 되면 아니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로 내가 깔린 게 맞다니. 그게 꿈이 아니라니. 그 일이 정말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니! 내 망상이, 아니라니!
현실 부정에 실패한 이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는 것을 지켜보던 세계 최고의 왼쪽 윙어가 빙긋 웃었다.
“먹혔다는 표현은 상스럽군요, 키스트 씨. 이왕이면 사랑을 나눴다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너무나도 뻔뻔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대꾸하는 바스티안 랄프를 보며 이안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남자와 섹스를 한 것은 둘째치고, ‘먹혔다’라는 사실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다니.
이안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먹혔다는 거잖아, 지금! 그쪽한테! 내 엉덩이가 아픈 이유가 그쪽 때문이라고!”
“동성끼리의 섹스니, 뭐 아플 만도 하죠.”
“그, 그럼 그쪽 거시기가 나한테 들어왔다 나간 게 맞다는 소립니까?”
“뭐…… 기어코 따지려 든다면, 그렇겠죠. 그런데 키스트 씨.”
“왜!”
“어째서 화를 내는 겁니까?”
“……뭐요?”
이안은 갑자기 낮아진 바스티안의 질문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바스티안이 냉정하게 물었다.
“합의한 거 아니었습니까?”
이안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합의했다는 게 문제야. 바로 그게 문제라고!’
당시의 분위기에 취해 그만 깔리는 걸 허락해 버렸다는 사실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어디 가서 체격이 작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거구의 이안 키스트가, 눈앞의 남자보다는 작다고 해도, 그렇다고 바텀 역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했다.
‘빌어먹을!’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하는 욕설이 입 안을 배회한다.
이안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다 돌연 후우, 길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이안은 여전히 제게 알약과 물컵을 내밀고 있는 바스티안 랄프를 올려다봤다.
‘일단, 침착해지는 게 좋겠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천천히 침대를 벗어나 바스티안에게서 예의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
제게서 낚아채듯 알약과 물을 가져간 이안이 꿀꺽꿀꺽, 그것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본 바스티안은 흥미로운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안은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 모두 입 안으로 털어 낸 뒤 생긋 웃으며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랄프 선수.”
“……?”
“오늘 일은 후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후일이요?”
바스티안이 순식간에 냉정을 찾은 이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안은 ‘예, 후일!’ 하고 힘차게 외친 후 바닥에 널브러진 제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그 후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은 이안은 언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냐는 듯 ‘또 봅시다.’ 하고 상큼한 미소를 지은 뒤 손까지 흔들며 바스티안의 집을 나섰다.
“당하고는 못 살지.”
바스티안 랄프의 저택에서 나와 택시가 있는 거리로 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 긴 거리를 절뚝이며 걷던 이안은 생각을 정리한 뒤였다.
불끈 주먹을 움켜쥔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 * *
‘미쳐 버리겠군!’
이안 키스트, 올해 나이 스물여덟.
190센티에 80킬로그램의 신체 건장한 뮤지컬 배우인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턴 출생으로, 이튼 칼리지를 거쳐 왕립연극학교(RADA)에서 연기 수업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기 시작한 연기 실력은 곧 그의 장기가 되었고, 수년이 지난 지금은 웨스트엔드를 주무르는 다섯 명의 배우 중 한 사람으로 발돋움하게 해 주었다.
특히나 레온하르트 악셀과 투톱을 이루는 뮤지컬 의 주연을 맡으면서 배우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그에게 두려운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연기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었으며, 사생활 역시 즐겁기 그지없었으니까.
물론 그가 응원하는 로젠버그 FC의 형편없는 축구 실력이 이안 키스트의 부아를 돋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니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젠장할!’
지금으로부터 엿새 전날 밤, 어떤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래, 틀림없이 이안 키스트는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90퍼센트는 만족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거다.
“이보세요, 내가 공연 있는 날엔 전화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다음 날에 지장이 있다니까요?”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이안은 입술을 꽉 깨문 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상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외치고는 씩씩거리며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무대 위에서 연기와 함께 노래까지 하는 뮤지컬 배우로 활약하는 중이었기에 폐활량 하나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그였지만, 지금 현재 자신의 전화 상대에게는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부드득 이까지 갈며 소리쳤다.
그러자 이안의 말을 들은 상대가 잠시 말을 하지 않더니 곧 입술을 움직였다.
-오전에 내게 오늘 훈련 끝나면 전화하라고 한 건 키스트 씨였던 것 같은데.
“윽!”
확실히 그건 사실이었다.
이안이 대답하지 못하자 바스티안은 심드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곧 차에 탈 겁니다.
“뭐?”
-아드리앙 호텔 2107호. 관심 있다면, 오든가.
“어이! 잠깐, 잠깐만 기다…… 빌어먹을! 이 자식이 또 끊었어!”
그날 이후 몇 번씩이나 제 할 말만 하고 끊어져 버리는 전화에 부글부글 끓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이안은 한참 동안 멋대로 끊어진 핸드폰을 죽일 듯 노려보더니 이내 대기실을 박차고 나가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아, 키스트 씨! 오늘 공연도 수고 많으…… 어? 어딜 그리 급하게 가세요? 키스트 씨!”
지나가던 스태프들의 인사까지 무시하며 어딘가로 향한 이안은 예의 장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부드득 이를 갈았다. 바들바들 떨며 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밀어 초인종을 누르자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 올 것 같더니.”
끼이익 열리는 문 안에서 저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 남자가 보였다.
[내가 그쪽이랑 또 섹스를 하면 성을 간다, 갈아!]
물론 어젯밤, 이안 키스트는 그에게 그러한 외침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오늘 아침, 간밤의 일에 분개하며 다시 훈련이 끝나면 연락하라는 문자를 보내기는 했다.
이안 키스트는 저보다 키가 큰 그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성을 가는 건 둘째치고, 아무리 생각해도 ‘먹히고’ 끝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가?”
툴툴거리는 이안을 보며 바스티안이 피식 웃었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그쪽을 확실히 ‘먹고’ 끝내는 게 맞는 거지.”
“자신 있으신가 보군.”
“없으면 왔겠습니까? 비키시죠. 바로 샤워하러 들어갈 거니까. 랄프 선수는 준비 끝났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 덤비시죠.”
“쳇!”
이안은 퉁명스러운 제 말에 그러라는 듯 슬쩍 비켜나는 여유까지 보이는 상대를 보며 흥 입술을 삐죽이더니 곧장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이안 키스트.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 프리섹스 지향 주의이기는 하나 누구에게 먹힌 채로 관계를 끝내고 싶지는 않다.
‘키가 좀 더 크다는 이유로 날 눕히는 건 말이 안 되지!’
따지고 보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경쟁이지만, 오랜만에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욕실의 문을 세게 닫았다. 그리고 바득바득 몸을 씻으며 곧 제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릴 바스티안 랄프의 처절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흥, 코웃음을 흘렸다.
“으읏…… 이…… 개자식!”
왜 이렇게 잘하냐고!
하지만 그런 상상과 달리 30분 후 뜨거운 숨을 토해 내고 있는 게 애석하게도 본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당시의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무려 엿새 동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안 키스트는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56화
“형! 들었어요?”
3년 연속 K리그 MVP에 뽑힌 국가 대표 센터백인 준오는 똑똑 문을 두드리더니 냉큼 문을 열고 들어와 툭 말을 던지는 현서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었냐니?
마침 신문을 읽고 있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서를 응시하자 기다란 검지로 좌우를 몇 번 저은 현서가 준오에게 다가왔다.
“하여간 우리 준오 형, 정보가 너무 늦다니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째 더 느려지시는 것 같다고요!”
준오는 투덜대는 현서에게 피식 웃으며 ‘인마.’ 하고 눈치를 줬다. 그러자 배시시 웃던 현서가 말을 이었다.
“요한 백이란 이름은 들어 보셨죠? 백요한 말이에요!”
아.
준오는 씩씩거리는 현서를 보며 머리를 아래위로 주억였다.
그 이름을 모를 리 있나.
현재, 대한민국 축구인이 아니라 해도 대한민국에서 백요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잉글랜드의 빅 클럽에 입단, 정식 프로 계약을 맺어 화제를 모은 유망주였다. 그러나 프로 계약 이후 1군 무대에 데뷔하지 못하고 감감무소식이어서 그저 그런 유망주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런던 FC의 1군 팀에 데뷔하면서 온갖 종류의 대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흑발에 파란 눈, 그리고 축구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햇빛을 받아 타지 않은 것처럼 하얀 얼굴은 소녀 팬들을 열광하게 했고, 그가 몰아치는 골들을 보며 남성 팬들은 대한민국에 새로운 스타가 나타났다며 환호를 내질렀다.
요 몇 달간,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백요한’을 선택할 만큼 대한민국 내에서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준오의 반응에 흥, 콧방귀를 뀌던 현서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녀석, 조금 이따 NFC에 도착한대요. 백요한, 이번 A팀 명단에 든 건 아시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한국 축구 국가 대표 팀의 전용 훈련 시설인 NFC(National Football Center)는 국가 대표에 뽑히지 않는 한 오지 못한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현서를 지그시 응시하자 현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이름난 녀석치고 소속 팀 경기에도 잘 못 나오길래 솔직히 망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고작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그에 챔스까지 데뷔할 줄이야……. 인생 역전은 그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네요. 쳇. 이러다 정말 자리 뺏기는 건 아닌지, 원.”
현서는 준오와 같은 팀인 FC 부산의 선수로 K리그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젊은 스트라이커였고, 국가 대표 팀 내에서도 부동의 주전이었지만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준오는 ‘이러다 감독님이 그 녀석 위주로 라인업을 짜면 어떡하죠?’ 하고 염려하는 현서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서, 안주하기만 하고 경쟁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예?”
“네가 그랬잖아, 한국은 좁다고. 너보다 나은 녀석들이랑 뛰고 싶다고. 아니면 너만큼 잘 뛰는 녀석들이랑 뛰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
“가서 운동이나 더 해.”
“하하. 네! 알겠습니다, 형! 제가 더 노력해야죠!”
준오의 부드러운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하하 웃은 현서는 몸을 돌려 그의 방을 빠져나갔다. 준오는 쾅 닫히는 문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다시 신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런던 FC의 새로운 별, 요한 백! 드디어 국가 대표 데뷔?!>
준오의 시선 끝에는 조금 전 현서와 나누었던 대화 상대에 대한 기사가 떡하니 나와 있었다.
요한…….
백요한이라.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긴 하네.’
* * *
새로운 신성의 등장으로 파주 NFC가 소란스러워지기 한 시간 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조한성 수석 코치의 호출에 준오가 사무실로 가자 조 코치와 마르셀로 감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불렀냐는 준오의 질문에 잠시 주저하던 조 코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룸메이트요?”
“그래, 룸메이트. 너랑 요한 백을 같은 방에 넣을까 하는데, 괜찮지?”
보통 파주 NFC에서 국가 대표 선수들은 1인 1실을 사용한다. 숙소 수급이 어려운 해외 원정을 떠날 때나, 훈련을 떠날 때는 어쩔 수 없이 룸메이트가 생기지만, NFC는 선수들의 편의와 보다 좋은 훈련 환경을 위해 조성된 트레이닝 센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조 코치와 마르셀로 감독의 제안은 준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준오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조한성 코치가 쉽게 대답하지 않는 준오를 설득했다.
“요한 말이야, 어릴 때부터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한국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야. 듣자 하니 청대 호출도 두어 번 정도밖에 못 받았다던데, 아무래도 국대는 처음이니 모든 게 낯설겠지. 그러니 준오 네가 도움 좀 줘. 명색이 국대 주장이잖아. 안 그래?”
열심히 준오를 설득하던 조한성 코치는 ‘그렇게 해 줄 수 있지?’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슬쩍 조 코치의 옆에 있는 마르셀로 감독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이번 아이디어는 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준오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었지만, 국가 대표 팀의 주장을 맡으며 확실히 흔들리기 쉬운 선수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일찍이 국가 대표로 데뷔하여 지금껏 주장직을 역임했던 선배들의 모습을 지켜봐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려울 건 없지만…….”
“하하, 잘 생각했어! 고맙다, 이준오! 요한 백이 팀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잘 지도해 줘. 감독님! 파서블하답니다, 파서블!”
“오우, 그뤠잇! 주노! 베리 굿!”
준오의 대답을 듣자마자 엄지손가락을 힘껏 치켜드며 웃는 마르셀로 감독의 면전에서 이제 와 ‘어렵겠는데요.’라는 말을 뱉어 내지는 못했다. 준오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도착한다는 요한 백이라는 스타를 마중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오픈 트레이닝도 없는 NFC의 정문 쪽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많은 기자들이 줄지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런던의 신예 선수 때문일 것이다.
“저 녀석이지?”
“아마도.”
“얼마나 잘났는지 볼까?”
“혹시 저 녀석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없어?”
2층 사무실에서 나와 정문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준오는 창문에 철썩 들러붙어 있는 몇몇 대표 팀 선수들을 발견했다. 대다수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몇몇은 부러움의 눈으로, 그리고 몇몇은 경계의 눈빛으로 차에서 내리는 요한을 응시하기도 했다.
각 선수들의 성격이 드러나는 행동에 피식 웃던 준오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열띤 인터뷰를 나눈 뒤 캐리어를 끌고 제게로 다가오는 흑발 청년에게 다가갔다.
“……?”
준오가 그의 앞을 막자 거침없이 걷던 요한이 행동을 뚝 멈췄다. 준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요한 백이지? 백요한. 뭐라고 부르면 되려나. 그냥 요한이라고 하면 될까?”
“…….”
“맞다, 오랜 유학 생활로 한국 생활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나? 그럼 여, 영어를 사용해야 할까?”
준오는 악수를 청하는 제 손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흑발 청년에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흠흠, 헛기침을 흘리며 몇 번 숨을 고르더니 이 상황에서 가장 어울릴 만한 영어 문구를 내뱉으려 했다.
“하, 하이! 나이스 투 밋…….”
“반갑습니다, 선배님.”
……어?
“백요한입니다. 이준오 선배님 맞으시죠?”
“어? 어어.”
준오는 유창한 한국어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준오를 바라보던 요한이 붉고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님의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선배님의 경기를 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선배님과 같은 팀에서 뛸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 그래. 고마워.”
“코치님께 선배님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될 거라고 들었는데…….”
“어어! 그렇지.”
“저와 같은 방을 사용해도 괜찮으십니까?”
“하하, 물론이지! 어려울 거 없어!”
“다행입니다.”
“……!”
딱딱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남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준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준오는 ‘몇 층으로 가면 될까요?’ 하고 제게 묻는 푸른 눈동자의 요한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준오 선배님?”
“…….”
“선배님?”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
“우리 숙소는 3층이야. 따라와, 안내해 줄게.”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잠시 넋을 잃었던 준오는 얼른 제정신을 되찾았다. 휘휘 고개를 내저으며 빙긋 웃은 준오가 돌연 몸을 돌려 앞장서자 그를 빤히 보던 요한이 ‘예.’라고 짧게 대답하며 뒤를 따르는 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숙소로 안내하기 위해 본관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준오는 미약하게 뛰는 심박 소리를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착각, 인가.
조금 전 보았던 장면이 이상하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 미묘한 감각에 완벽히 사로잡히기 전, 준오는 얼른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제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요한의 인기척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에 신경을 썼다.
57화
[이제 당신을 섹스 프렌드라 부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