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59)

어째서 그 말이 튀어나온 걸까.

소식을 전하려 전화를 했던 것인데. 요한은 ‘하하, 그건 그렇겠……지. 아무래도 힘들겠지.’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레온하르트의 반응에 미간을 좁혔다.

그와 저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이 신경 쓰인다.

요한은 이렇게도 그에게 할 말이 없었던가, 하고 잠깐 생각했다.

-저…… 요한.

“네?”

-리그 경기까지 치르고 간다는 말은, 당장은 출국하지 않는다는 소리지?

“예, 뭐.”

요한이 대답하자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온하르트가 결의를 다진 듯 말했다.

-괜찮다면 잠시 만났으면 하는데.

* * *

일주일 만에 만나자고 청한 레온하르트와의 갑작스러운 미팅은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하지만 그와 저는 단순한 섹스 프렌드였고, 보통 만날 때마다 침대 위를 뒹구는 것이 일상이었던지라 당연히 호텔에서 만남을 가질 줄 알았다.

[호텔이…… 아니라요?]

[매번 호텔에서 만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리고 오늘은 그쪽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많다던데, 호텔로 가는 건 위험할 거야.]

확실히 레온하르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미 코치진으로부터 배려를 받아 오후 트레이닝을 생략한 요한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레온하르트 악셀과 호텔에서 발견된다면 아직 LTC에 남아 어떻게든 기삿거리를 만들려는 취재진이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나지.]

탁.

택시에서 내려 레온하르트가 일러 준 가게에 도착한 요한은 은은한 불빛이 보이는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잠깐 동안 머뭇거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런던 내에서도 부촌이라 알려진 사우스 켄싱턴. 이 넓은 런던 안에 이러한 분위기를 풍기는 레스토랑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건만, 그 외엔 모두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이 더욱 그의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마치 예의 가게가 자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53화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레온하르트 악셀의 제안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일주일 만에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요한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요한이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은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도무지 그냥 흘려 넘길 수 없는 레온하르트 악셀의 마음이 깊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쪽이 좋아서 그래. 정말 미친 듯이 좋아서 나도 내 마음을, 내 입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고.]

제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섹스 프렌드든 뭐든 좋다고 하는 그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겨우 하룻밤을 보낸 사이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아직도 제게 해야 할 복수가 남아 있나, 그것도 아니면 그만큼 저와의 섹스가 마음에 들었던 건가.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숱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뒤덮었지만 크로비스의 생일 파티 때만큼 레온하르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던 날은 없었다.

마음껏 이용하라던 그의 마음을 마냥 이용할 순 없어 연락을 망설이게 되었고, 결국 일주일이 지나 버린 것이다.

“악셀 님은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저하던 요한이 걸음을 옮겨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양장 차림의 여인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넓은 레스토랑 안엔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외엔 다른 손님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 더 들어간 요한은 전용 룸으로 보이는 곳에서 레온하르트를 발견했다.

레온하르트가 요한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요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그에게 다가갔다.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더군요.”

“빌렸어.”

“네?”

“그쪽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해서.”

“……!”

“메뉴는 내가 임의로 정했어. 여기 셰프가 요리를 잘해서 아마 그쪽 입맛에도 맞을 거야.”

요한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은 후 빙긋 웃는 레온하르트를 빤히 바라봤다.

레온하르트가 자신한 셰프의 코스 요리는 훌륭했다. 요한이 런던에서 먹었던 요리들 중 손에 꼽을 만큼.

식사가 끝난 후, 요한은 제가 먹는 모습을 그저 응시만 하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런 곳으로 저를 부른 거냐고. 그러자 옅게 웃은 그가 대답했다.

“아무리 섹스 프렌드라도, 가끔은 분위기 내고 싶을 때 있잖아.”

“…….”

“오늘이 그럴 때인 것 같아서.”

“그리고 오늘 만나지 못하면 보름은 더 못 볼 테니 얼굴도 기억해 둘 겸. 사실…… 후자의 이유가 더 크군.”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요한에게 일부러 더욱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섹스 프렌드치고는 너무 과한 요구였나?”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던 요한이 내내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악셀 씨.”

요한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

“이제 당신을 섹스 프렌드라 부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자, 잘못했나? 실수라도…… 한 건가, 내가?”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공을 헤집던 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그로 인해 쾅 소리가 났다.

요한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정식으로 만날 거니까요.”

“이봐…… 요한. 혹시 저번에 내가 꺼낸 말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거라면 그냥 잊어 줘. 그땐 내가 제정…… 뭐, 뭐라고?”

요한은 ‘지금 뭐라고 그랬어?’ 하고 굳이 제가 꺼낸 말을 한 번 더 해 주길 바라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악셀 씨랑 정식으로 만나 볼 생각입니다.”

여전히 믿을 수 없고,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진심을 표하는 당신에게 나는…….

‘끌리고 있으니까.’

#Injury Time (+1′)

“크로비스 씨, 여기 부탁하신 사진들입니다.”

남런던에 위치한 LTC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가정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부탁까지 했어? 그냥 시간 나면 인화해 두라고 했었지.”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크로비스 씨께서 혹시 빨리 원하실까 봐…….”

“변명은 됐으니 사진은 저기 두고 가!”

“……예.”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군.

장은 이를 부드득 갈며 인화된 사진들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가정부를 노려봤다.

‘젠장할.’

하나부터 열까지.

집 안에서고 밖에서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투성이다.

[들었어, 크로비스? 백이 한국 국가 대표로 뽑혔다는군.]

그깟 국가 대표가 뭐라고.

기껏해야 축구 실력 따위는 바닥을 기고 있는 허접한 나라의 대표가 되는 것뿐이다. 적어도 프랑스 국가 대표에 뽑혔던 저 정도는 되어야 취재라는 것을 해도 낯 뜨겁지 않지.

물론 현재는 같은 국적의 다른 선수들에게 밀려 국가 대표에 뽑히지 않은 지 2년째지만, 프랑스와 한국의 선수 풀이 다르니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그 녀석이 국가 대표가 된 것 가지고 LTC의 일원들이 한마음으로 축하해 주는 분위기는 또 뭔지.

LTC로 몰려든 한국 기자들로 인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장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여기, 부탁하신 사진들입니다.]

사진.

‘사진이라.’

제 눈치를 보던 가정부가 자리를 피한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디로 갔는지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주변에 미간을 꿈틀거리고 있던 장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봉투를 지그시 응시했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개최되었던 그의 생일 파티는 기쁨이 아닌 분노와 모욕감으로 물들었다. 제 인생에서 그토록 최악의 생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 이건 네가 했던 말이랑 다르잖아? 아까 그 녀석은 대체 뭐야!]

[그 미친놈의 일도 계획에 있었던 거냐?]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요한 백에게 망신을 주려 했던 장은 오히려 제 발등을 찍은 셈이 됐다. 자신이 직접 초대한 레온하르트 악셀에게 물세례를 맞은 루크와 켄트가 그러고 사라져 버린 레온하르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화를 내는 모습은 확실히 그의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훈련을 하고 있는 요한을 볼 때도, 드레싱룸에서 그와 마주칠 때도, 몇 번씩 들끓는 분노를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저 눈엣가시 같은 놈이 사라지면 좋으련만 팀의 보드진은 물론이거니와 코치진까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동양인 놈을 감싸고도는 모습이라니.

“누가 사진 인화를 부탁했다고!”

제 생일 파티가 그렇게 처참하게 끝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장이 예의 가정부에게 그날 밤 저택에 초대된 사람들을 카메라로 찍어 달라고 부탁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일 파티가 열리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대체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여전히 제집에서 일하고 있는 가정부였기에 그녀는 레온하르트 악셀이 요한 백을 데리고 나간 이후 엉망이 되어 버린 생일 파티를 직접 목격했다.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생일 파티를 기억하고 싶은 주인공이 있을까.

장은 굳이 그날의 사진을 인화해 온 가정부를 아무래도 해고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봉투를 소각하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

거침없이 예의 봉투를 들고 움직이려던 장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안에 들려 있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고민에 빠져 있다 곧 봉투의 입구를 지직, 찢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안에 든 사진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장의 저택에서 일하는 가정부들 중 가장 오랫동안 일한 미사 잭슨이 카메라를 들고 연회장을 누비며 찍어 댄 사진들엔 그의 파티에 초대받은 수많은 손님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잘 찍은 것도 아니지만, 또 그리 못 찍은 것도 아닌.

자신의 생일 파티가 아니었다면 한 번 훑어보고 끝났을 예의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장은 몇 개의 사진을 발견하고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상……하군.’

그의 손안에 들린 예의 사진들엔 레온하르트 악셀과 요한 백이 다른 손님들과 달리 연회장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사는 그들에게 꽤 눈길이 갔던 모양인지 한 장씩만 찍은 다른 손님들과 달리 그들의 사진은 서너 장 정도 더 찍어 두었다.

장은 유독 가까운 두 남자의 모습에 인상을 썼다.

그가 알기로 레온하르트 악셀은 요한 백과 큰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모션 북 촬영 도중에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까.

[백 선수도 참가하는 겁니까?]

[생일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만, 아무래도 먼저 돌아가고 싶군요. 인종 차별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니 참을 수가 없어서.]

[백 선수, 내가 차를 몰고 와서 그런데 운전 좀 부탁합시다.]

그러기에는…… 확실히 보통 이상의 사이로 보이기는 했지.

[그거 들었어? 리저브의 잭콜 감독, 잘렸대. 선수들을 희롱하는 걸 들켰다나. 그런데 말이야…….]

몇 달 전 있었던 리저브 팀의 감독 잭콜의 경질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장 역시 귀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리 리저브 팀에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팀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을 행한 이에 대한 정보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잭콜 감독이 가장 아끼면서도 가장 외면했던 요한 백과 얽힌 미묘한 소문 역시, 장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그 자식이 미묘하기는 하지.’

짙은 흑발에 푸른 눈이라니.

동양계라는 것만 해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거늘, 그 깊고 푸른 눈을 보면 저도 모르게 화부터 치밀어 오른다.

장은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무시한 채 입술을 짓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사진 속으로 시선을 돌린 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흐응.’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갈 수도 있겠는데?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54화

#Half-Time (1)

바스티안은 크로비스의 생일 파티에서 어쩐지 굳어 있는 요한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특히나 진한 흑발에 푸른 눈동자가 매력적인 동양계 신예 선수는 마치 막 데뷔한 직후의 제 모습을 보는 듯하여 더욱 눈이 가던 차였다. 저 나이의 선수들은 아주 작은 문제로도 흔들릴 수 있기에 옳은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선배 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어? 랄프 선수 아닙니까!”

워낙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없는 선수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긴장했는지 입술을 짓누르고 있던 요한에게 일부러 미소를 지어 가며 말을 걸고 있을 때였다. 바스티안은 정확히 제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하 웃으며 저와 요한에게로 다가오는 큰 키의 적발 남자가 보였다.

“기억하십니까, 랄프 선수? 이안 키스트입니다!”

이안 키스트, 그 이름을 모르지는 않는다.

얼마 전 요한과 찾았던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나기도 했었고, 또 알음알음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으니.

순간 미간을 찌푸리려던 바스티안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으며 이안 키스트의 손을 맞잡았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키스트 씨. 오랜만에 뵙는군요.”

본디 바스티안 랄프는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거는 이 적발의 미남자만큼은 이상하게 불편했다.

[아주 화려하게 노는 걸로 유명하지, 키스트는. 쉬지 않고 루머를 만드는 녀석이야.]

아마도 그 원인은 언젠가 시즌이 끝난 뒤 찾아갔던 스페인의 이비사섬 휴가 때 들은 얘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이비사섬을 찾았던 바스티안은 섬 내의 유명 클럽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이안 키스트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배우인 그는 자신의 수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 친구 중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 것이 아마도 예의 선입견이 자리 잡는 데 큰 몫을 한 게 틀림없었다.

[너도 조심해, 바티. 저 시끄러운 녀석이랑 얽혔다간 우리의 ‘비밀’이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

당시, 아니 지금까지도 바스티안에게는 세간에 드러나서는 안 될 ‘비밀’이 한 가지 있었고, 그것은 그의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반드시 비밀로 부쳐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해서 더더욱 눈앞의 적발 남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참! 그런 의미에서 말입니다, 제가 요즘 궁금한 것이 있는데 잠깐 답변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제 어깨 위로 손을 얹는 남자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왠지 모르게 의심스러운 레온하르트 악셀과 요한을 단둘이 남겨 두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한번 식사 자리를 함께했을 뿐인 사이에 유독 친한 척하는 키스트의 유들유들한 태도가 그의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불편하군.

푸르게 일렁이는 이안 키스트의 벽안이 몹시 거슬린다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어 바스티안은 냉정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아,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시즌권을 사 놨었는데,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경기장을 찾지 못했다는 거 아닙니까! 일이 바빠도 너무 바빠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죠? 게다가, 로젠버그 이놈들은 어찌 된 셈인지 한번 연패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도 못해요! 정말 빌어먹을 놈들! 시즌권을 쥔 팬들이 한번 들고일어나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요!”

저를 요한에게서 떼어 낸 이안 키스트에게 분명 숨겨진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처럼 많은 루머를 몰고 다니는 자는 틀림없이 꿍꿍이가 있기에 제게 접근을 했을 거라 여겼다. 하여 서늘한 눈을 거두지 않던 바스티안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대화 내용에 살짝 당황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처럼 정열적인 난봉꾼이라 알려진 것과 달리 이안 키스트는 순수하게 축구를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축구광이었고, 공연이 끝난 후 그가 런던 내의 클럽이나 펍을 자주 찾는 이유도 하나뿐이었다.

[거기 가면 축구 팬들이 많거든요! 하하! 같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 아니겠습니까?]

바스티안은 ‘내 아까운 시즌권…….’ 하고 한탄하고 있는 이안 키스트를 바라보다 빙긋 웃으며 말했다.

“키스트 씨는 정말…… 축구를, 아니 로젠버그를 좋아하시는군요.”

“당연하죠! 축구와 로젠버그는 제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는 얘기지만, 지금은 런던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 로젠버그가 그 자리를 빼앗을 예정이니 각오하십시오!”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은 아닌가.

바스티안 랄프가 이안 키스트에 대한 경계를 스르륵 풀려 할 때였다.

“왜…… 그러십니까?”

바스티안은 말을 잇다 말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이안 키스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안은 흐응, 하고 그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악의 없는 말을 뱉어 냈다.

“올리의 말이 헛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모양이군요.”

“예?”

“별건 아니고, 어디서 랄프 선수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의아해하던 바스티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안 키스트는 연신 웃어 가며 말을 이었다.

“뭐, 그런 소문이 흘러나올 만합니다. 어째…… 랄프 선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저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이죠. 이러다 나도 게이가 되겠어. 하하하!”

“…….”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방금 말은 잊어 주십쇼! 하하. 어? 그것보다 저기 오늘의 주인공이 오고 있…… 뭐지? 무슨 일이 있나?”

태연하게 바스티안을 경악시키는 말을 내뱉은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다 갑자기 시작된 소동에 당황하는 듯했다. 바스티안 역시 그런 이안의 발언에 스윽 고개를 돌려 소동이 벌어진 곳으로 눈을 옮겼지만 이내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제 옆에서 어리둥절해하는 이안 키스트 쪽이었다.

[어디서 랄프 선수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바스티안 랄프의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거, 그냥 보내면 꽤 곤란해지겠어.

* * *

“……음?”

천 근같이 무겁게 느껴지던 눈꺼풀을 스르륵 들어 올린 이안 키스트는 시야로 들어온 낯선 천장을 발견하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늦게까지 놀더라도 잠자는 곳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던 그였기에,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일까.

이안 키스트는 꽤 높은 천장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천천히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부탁 하나만 하지, 이안.]

아, 그랬다.

‘부탁…….’

부탁을 받았었지.

다시 생각해도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안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동양인을 아직도 찾아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 동양인이 바로, 런던의 떠오르는 신성일 줄이야.

요즘따라 몹시 수상한 기색을 풍겨 대던 레온하르트 악셀이 제게 무언가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설마하니 남자에게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거라곤, 이안은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 악셀은 이성애자였고, 결코 동성에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스트엔드 진출 이후 정식 주연 코스를 밟기 시작한 레온하르트 악셀은 주로 화려하게 빛나거나, 혹은 상대를 사로잡는 역할을 맡아 왔다. 하여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사생활 역시 무대 위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레온하르트는 공연 일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클럽에 가기보다는 자가(自家)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며 독서를, 그리고 파티보다는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이안 키스트가 레온하르트와 파트너가 된 뒤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저와는 영 딴판인 그가 재미있어서일 것이다. 왜, 사람은 반대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끌린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렇게 레온하르트와 무대 위의 파트너이자 친구가 된 이안 키스트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레온하르트로부터 ‘부탁’이라는 것을 받았다. 웬 동양인을 찾겠다고 저를 닦달하며 난동을 부릴 때도 예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리고 이어진 레온하르트의 사랑 고백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어서 이안은 얼떨결에 그 부탁을 승낙했다.

[레온 넌 인마, 날 파트너로 둔 걸 고맙게 여겨야 해.]

대체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바스티안 랄프를 요한 백에게서 떨어트려 달라는 레온하르트의 부탁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안 키스트는 못 말리는 축구 팬이었기에 축구 선수인 바스티안 랄프를 붙잡아 둘 만한 언변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설사 축구 팬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의 사교성이라면 랄프를 잡아 두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이안은 확신했다.

레온하르트의 촉이 맞았던 건지, 아니면 흑발의 동양계 신성이 사교성이 부족한 건지.

‘그래,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찬찬히 간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음에도 자신이 이러한 낯선 곳에서 눈을 뜰 이유는 확연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안은 흠, 하고 한 번 더 미간을 꿈틀거리며 조금 더 깊게 사고 회로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 겁니, 읏!]

읏? 지금 읏이라고 했나?

‘그런 민망한 신음을, 내가 흘렸다고?’

이안은 계속해서 지난밤을 떠올렸다.

[뭐 하는 거긴요. 키스트 씨의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아, 아니, 왜 그쪽이 내 안으로…… 헉!]

[싫어하는 건가요? 이상하군요. 내게 먼저 입을 맞춘 건 키스트 씨 아니었습니까? 전 거기에 응한 기억밖에 없는데.]

[내, 내가 언제……. 잠깐! 무, 물론 입을 맞춘 기억은 있지만…… 그, 그렇다고 해서 왜 그쪽이 나한테 넣으려는 겁니까! 난 게이가 아니라고요!]

[키스트 씨가 저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주로 깔기만 합니다. 받아들인 적은 없으니 그쪽이 저를 받아들여야겠죠. 음, 이쪽이 특별히 민감한 것 같군요.]

[이봐요, 누가 거길 마음대로 만…… 하으!]

[느꼈습니까?]

[비, 빌어먹을! 지금 그쪽이 내 예민한 부위를 만지고 있으니 당연히 느끼, 하으, 조, 좋아!]

[좋다니 다행입니다.]

[좋기는 한데…… 왜 내가 밑…… 헉!]

[싫지 않다면 계속 갑시다. 마침, 나도 서 버렸거든.]

[뭐? 아니, 잠깐, 허윽! 으윽! 하으윽……!]

쿵.

“…….”

쿵.

“…….”

쿵-

“……!”

지난밤의 일에 대해 곰곰이 상기해 보던 이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Holly…… Shit!”

55화

#Half-Time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