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59)

이거,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는…….

‘곤란해지겠어.’

요한이 제게 인내를 요구한 스피츠의 말에 공감한 까닭은 크로비스의 생일에서까지 그의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적 발언이 거슬린 것은 사실이나, 저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기에 저 혼자 잠깐 참으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차라리 연회장을 나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거라 여겼다.

그리고 막 요한이 그들에게서 몸을 돌리려 할 때, 요한은 스윽 저를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기척에 깜짝 놀랐다.

‘……!’

미러볼에 반짝여 더욱 빛나는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긴 레온하르트가 요한이 막을 틈도 없이 예의 남자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개고기송이라는 노래를 부르기까지 하며 대놓고 요한을 조롱하고 있는 남자들에게로, 거침없이.

두근두근.

레온하르트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가 싶어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신 요한은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가더니 마침 주변을 지나치던 일일 메이드에게서 물이 잔뜩 든 컵 두 잔을 건네받는 레온하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왜?’

요한은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다 곧 눈을 크게 떴다.

‘빌어먹을!’

곧바로 레온하르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눈치챈 요한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넌 뭐…… 으악!”

“커컥! 컥!”

파티에 초대받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눈높이가 높은 레온하르트의 등장에 예의 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양손에 쥐고 있던 컵을 들어 올리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들은 곧 머리 위에서 콸콸 쏟아지는 액체에 소리를 내질렀다.

“푸합! 뭐, 뭐 하는 짓이야!”

“이봐, 미쳤어!”

갑작스레 쏟아진 물세례에 루크와 켄트가 레온하르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푹 젖은 생쥐 꼴을 한 채 레온하르트를 응시하고 있는 이들은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두 분이 술을 깨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술 깨는 덴 냉수가 최고지.”

흥겹던 파티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DJ가 마침 음악을 끊어 버리자 레온하르트의 음성은 더 크게 연회장을 울렸다.

‘풉.’

요한은 상대에게 물을 뿌려 놓고도 당당하기 그지없는 레온하르트의 뻔뻔함에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미, 미친 자식 아냐!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아?”

“이 자식 뭐야? 장! 이 미친놈 뭐야!”

홀딱 젖은 생쥐들은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광분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크로비스를 불러오라며 소리를 내지르는 그들로 인해 주변 이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레온하르트는 침을 튀겨 대며 흥분한 그들이 주먹을 뻗을 듯 뻗지 않자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 좋은 날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두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군.”

“뭐?”

“DVD라니.”

“……!”

“그 말을 경기장에서 하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알아. 그랬다간 두 사람 지금 내 앞이 아니라 철창 신세를 지고 있을 테니까.”

“뭐, 뭐라고?”

“그리고 이왕이면 시력 검사도 좀 해. 명색이 축구 선수의 친척이라는 자들이, 자기 친척 팀에서 활약하는 스타에 대해서도 모르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군.”

“윽!”

“이, 이 자식이!”

레온하르트 악셀의 일침에 이를 갈던 두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때, 뒤늦게 소란을 인지한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무슨 일입니까!’ 하고 저 멀리에서 세 남자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루크와 켄트가 그런 크로비스를 발견하고선 움찔거렸지만 레온하르트는 오히려 눈을 크게 뜨는 크로비스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로비스 씨.”

“악셀…… 씨?”

“좋은 날 분위기를 망쳐서 죄송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예?”

“아무래도 이쪽 분들은 크로비스 씨가 앞으로 멀리해야 할 분들인 것 같군요. 이 남자들, 인종 차별자들이란 말이지.”

“……!”

“불쾌해. 아주 불쾌하군.”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요한을 흘긋거렸다.

허공에서 마주친 그의 녹색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거려 순간 멈칫한 요한은 이어지는 레온하르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요한뿐 아니라 장내의 모든 이들이 레온하르트 악셀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당황해 있는 크로비스에게 말했다.

“생일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만, 아무래도 먼저 돌아가고 싶군요. 인종 차별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니 참을 수가 없어서.”

“아, 악셀 씨.”

어쩔 줄 몰라 하던 크로비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더니 홱 지나치며 주저 없이 요한에게로 다가갔다.

“…….”

요한은 제 앞에서 멈춰 선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봤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백 선수, 내가 차를 몰고 와서 그런데 운전 좀 부탁합시다.”

그러고는 요한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그를 이끌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51화

#First Half : 전반 41′ ~ 전반 45′

“정말 제가 운전해도 되는 겁니까?”

발렛 요원이 몰고 온 부가티 베이론의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으로 향하는 레온하르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그에게 이끌려 크로비스의 저택 밖으로 나오게 된 요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키를 넘겨주고선 ‘뭐 해?’ 하고 묻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숨을 흘렸다.

결국 운전석에 올라탄 요한은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직전 레온하르트를 향해 물었다.

“문제 될 거 있나?”

“……사고를 낼지도 모르는데요.”

“하하, 그럴 리가. 그쪽은 알코올을 입에 대지도 않았잖아.”

“…….”

“왜, 해 주기 싫어?”

레온하르트가 안전벨트를 매며 유려하게 웃자 요한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내내 참고만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냈다.

“악셀 씨의 명성에 금이 갈 겁니다.”

뜬금없는 요한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리고선 오히려 되물었다.

“그쪽은. 그런 말을 들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나?”

분명 화가 나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운전석의 요한이건만 어찌도 이리 태연한지,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요한은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쁩니다.”

뭐?

‘괜찮습니다.’ 등의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며 입을 삐죽이던 레온하르트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꾸하는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은 묵묵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앞으로 쭉 미끄러져 나가는 레온하르트의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저도 기분 나쁩니다. 면전에서 인종 차별을 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성인(聖人)이게요.”

“그런데 왜…….”

“스피츠 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잖습니까. 그곳은 크로비스 씨의 생일 파티 자리였습니다.”

“…….”

“처음부터 제가 주인공이 아닌 자리였고, 그 사람들이 크로비스 씨의 친인척이라기에 참았던 것뿐입니다. 크로비스 씨와의 관계가 더 곤란해지는 건 사양이니까요.”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솔직히 악셀 씨가 나서 줘서 속은 후련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뭐.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리는 요한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한은 계속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준 건 기쁘지만, 악셀 씨의 행동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왜 신경 안 쓰시는 겁니까.”

“…….”

“제가 대체 뭐라고. 악셀 씨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혹시…… 정말 취하신 거 아닙니까? 아까 보니 너무 빨리 드시는 것 같던데.”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집 쪽으로 차를 몰면서 조수석의 그를 흘긋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요한이 한 번 더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악셀 씨?”

“아니. 안 취했어.”

레온하르트는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묻는 요한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하나도, 안 취했다고.”

그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러자 의아해하던 요한에게서 ‘아.’ 하고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젠장.

레온하르트는 도통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없는 요한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번 파티에 오기 위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금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끝에 의해 흐트러졌다.

“난 그저 기분이 나빴을 뿐이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미간을 찌푸린 그는 여전히 운전 중인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꽤나 복잡해 보였다.

“그쪽을 무시하는 그 작자들의 행태에 그쪽은 참을 수 있었는지 몰라도, 나는 기분이 나빴어.”

요한은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사람들의 시선? 그런 게 중요한가.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 그쪽에게 더러운 말을 내뱉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참지?”

“악셀 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험담하는 놈들은 용서 못 해.”

“……!”

“그쪽이 좋아서 그래. 정말 미친 듯이 좋아서 나도 내 마음을, 내 입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고.”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나아가던 차가 살짝 흔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무심결에 뱉어 낸 말을 들은 요한이 동요했음을 인지했다.

‘이런.’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간, 사고가 나겠어.

냉정하게 운전을 하고 있기는 하나 요한 역시 사람이다. 그의 말대로 면전에서 그러한 모욕을 당했는데 참는 것이 용하지.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안 그래도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는 남자를 자극해 봤자 제게 득이 될 것은 없었다. 그는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요한을 한 번 힐긋거린 뒤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아주 구구절절하군.”

“…….”

“난 눈 좀 붙일 테니, 도착하면 깨워 줘.”

좋아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지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제 중얼거림에 대꾸하지 않는 요한에게 말한 뒤 스르륵 눈을 붙였다.

두근두근.

제 것임이 분명한 심장 박동 소리에 아주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누군가의 미약한 심장 소리가 함께 들렸지만 레온하르트는 모르는 척했다.

* * *

[연락……드리겠습니다.]

사람을 불러 태워다 주겠다는 레온하르트의 제안을 끝내 거절한 요한은 머리 숙여 인사를 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미처 잡을 사이도 없이 택시를 타고 사라져 버리는 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더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요한을 붙잡지 못했다.

“…….”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오늘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벌써 10월.

달이 바뀌었는데도 왜 연락 한 통이 없는 건지.

‘너무 들이댔나.’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에서 엉겁결에 뱉어 낸 고백이 어쩌면 악수(惡手)가 된 것이 분명하다.

“망할.”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의 곁에 다가갈 계획이었다. 친구로서 곁에 있을 수 없다면 섹스 프렌드라도 되어서 그의 몸부터 함락시키려 했다. 그러나 경솔하기 짝이 없는 제 입술은 그러한 계획마저 처참하게 무너트리며 또다시 속내를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어리석은 레온하르트 악셀.

‘대체 왜 그런 말을 해 가지고!’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무덤덤한 척 약간의 거리를 두고 요한이 넘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요한이 당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견디지 못한 스스로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설마…… 이젠 섹스 프렌드도 싫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가 보기에 요한은 갈등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요한의 고뇌는 더 깊어지는 듯했다. 해서 일부러 가벼운 사이로 보이게끔 유혹을 한 것이었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연락 한 통 없는 요한의 속내를 읽기란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겨우 붙잡은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곤란한데. 그렇다고 제가 먼저 요한에게 전화를 하자니, 혹 너무 조급해 보이거나 부담스러울까 봐 염려가 된다.

“젠장할!”

레온하르트는 끝내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막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설마? 레온하르트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인터폰 쪽으로 달려갔다 화면에 나타난 인물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고민 끝에 문을 열어 준 레온하르트를 향해 이안이 툴툴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제집으로 들어와 드넓은 거실의 소파에 착석하는 이안을 아니꼬운 눈으로 응시했다.

“웬일이지?”

“웬일은. 내일 공연 있으니까 겸사겸사해서 들른 거지.”

“이안.”

“왜 그리 기분 나쁜 얼굴이야? 핸드폰은 또 왜 이렇게 전시해 놨고. 누구 연락이라도 기다려?”

싱긋 올라간 입꼬리를 보아하니 자신이 누구의 연락을 기다리는지 이미 짐작하는 표정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가서 커피 좀 타 오지? 여기 손님맞이가 왜 이래?’ 하고 제게 생긋거리는 이안 키스트를 노려보다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실망하지 마, 형제. 내가 네 귀가 쫑긋거릴 만한 소식을 하나 들고 왔으니까.”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커피.”

“…….”

“어서.”

부드럽게 웃는 이안을 보고 숨을 내뱉은 레온하르트는 결국 에스프레소 하나를 내려와 자신의 파트너에게 건넸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댄 이안이 자욱한 커피 향을 맡으며 미소 짓는 게 보인다. 레온하르트는 답을 재촉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

“백 선수 연락 기다리는 거라면 오늘은 무리라고 말해 주려고.”

태연하게 요한을 언급하는 이안을 보고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에 하얀 이를 드러낸 이안이 말을 이었다.

“지금쯤 아주 정신 없을 거야. 백 선수, 오늘 한국 국가 대표 명단에 들었거든!”

……뭐?

진지한 태도를 취하던 이안 키스트가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들고 있던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마치 제 일인 양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축구에 무관심한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한 국가의 대표 선수가 되는 일이야. 내가 알기로 백 선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국가 대표에 든 적이 없다던데…… 그 때문인지, 지금 한국 쪽 기자들이 미라클 스타디움이랑 라이트닝 센터까지 찾아가고 난리도 아니라더군. 특히 LTC 쪽 전화기에 아주 불이 난다고 하더라니까?”

“이안.”

“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52화

가만히 이안 키스트의 말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안을 응시했다. 방심하던 이안이 틈을 파고든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일주일 동안 이안이 로젠버그 FC에 대한 이야기보다 런던 FC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중얼거린 게 떠올랐다.

[그 개자식! 그 미친 개자식! 제기랄, 그 개자식! 그 또라이 새끼!]

그리고 대체 누구를 칭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욕설도, 함께.

‘그날 밤 이후인가?’

레온하르트는 순식간에 사색이 된 이안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이안, 대체 크로비스의 생일 때 무슨 일이 있었…….”

“몇 번을 말해! 내가 그날 일은 꺼내지도 말랬지!”

아.

“젠장! 기껏 생각해서 와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 어쨌든 난 말 전했으니 간다.”

레온하르트는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만 언급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이를 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레온하르트가 붙잡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이안의 행동은 확실히 수상했다.

‘뭔가 있긴 한데…….’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본인도 그걸 원하지 않으니.

레온하르트는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이안 키스트의 걸음걸이가 꽤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축구에 무관심한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축구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국가 대표’라는 타이틀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보통 한번 국가 대표에 발탁되면 다음번엔 자국으로 자주 불려 갈 텐데.

한국과 영국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보던 레온하르트의 입술 밖으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거 나만…… 더 애타게 생겼군.’

* * *

“그게…… 정말입니까?”

정확히 9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요한은 자신의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의 전화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통 믿기 힘든 말을 웃으며 전하는 앨리슨의 말에 당황했던 요한은 아주 조심스레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앨리슨이 호호 미소를 흘리며 재차 말해 주었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전화를 받았는걸? 축하해, 요한! 넌 이제 어엿한 한국 국가 대표야!

“아.”

-마르셀로 감독이 8, 9월에 보인 네 활약에 큰 인상을 받은 모양이야. 우루과이랑 펼칠 이번 친선전에 너를 기용하고 싶다더라. 물론 선발은 어렵겠지만 그게 어디니? 잘하면 꿈꾸던 A매치 데뷔전을 치를 수 있어!

갑작스러운 콜 업이었지만 그에 동요하지 않고 리그컵 데뷔, 그리고 이어진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요한이 펼친 활약을, 한국 축구 국가 대표 팀 감독인 루케인 마르셀로가 감명 깊게 봤다고, 앨리슨은 설명했다.

영국과 한국의 이중 국적에서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을 선택한 이후 요한은 단 한 번도 A팀에 뽑힌 적이 없었다. 유망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런던 FC와의 프로 계약 이후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내에서였고, 그의 이름을 아는 국민들은 극소수였다.

청소년 대표 팀에 불려 간 적도 있었으나 잭콜 감독과의 사건 이후 그조차도 줄어들었던 요한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현 국가 대표 팀 감독을 역임하고 있는 루케인 마르셀로는 브라질 출신의 명장으로서, 내년 초에 있을 아시안컵 우승을 목표로 대표 팀을 담금질하는 중이었다. 훌륭한 스쿼드를 갖추고 있기는 하나 마침 스트라이커 부재를 느끼고 있던 참에 요한의 활약을 본 그가 주저 없이 발탁한 것이라며 앨리슨은 뿌듯해했다.

-공식 발표는 한국 시간으로 10월 1일 오전 10시에 한다고 했으니…… 내일 새벽 1시쯤 나오겠어! 이 사실을 얼른 은진한테도 알려야지!

요한은 흥분하여 전화를 끊는 앨리슨에게 그러라는 말을 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얼마 후 앨리슨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 은진을 비롯하여 아버지 라이언에게도 연락이 왔고, 그의 외가 쪽 식구들과 친가 쪽 식구들이 차례로 전화를 걸어왔다.

정신없는 밤이었다.

끊이지 않는 축하 전화를 끝내고 겨우 정신을 차려 LTC로 출근했더니 소식을 듣고 온 영국 내 한국 특파원들이 요한의 첫 A팀 소집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 있었다. 마침 출근 중이던 다른 동료 선수들이 휘유, 휘파람을 불어 댈 정도로 뜨거운 취재 열풍에 괜히 낯이 뜨거워졌지만 요한은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하하, 요한! 이번이 첫 A팀이라며? 축하해!”

“흥. 긴장해서 실수하지 마라, 꼬맹이. 뭐, 나올 수나 있겠냐만.”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끝낸 후 드레싱룸으로 들어가자 바스티안과 디에고가 각각 말을 내뱉었다.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는 축하 멘트에 고개를 꾸벅 숙인 요한은 뒤늦게 앨리슨의 이야기를 듣고 문자를 보낸 안나마리아에게 답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요한, 알려야 할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기는 한 거지?>

뭐?

<물론 상대방도 네 소식을 접했을 테지만 그래도 네가 직접 말을 해 주면 더 기뻐할지 몰라.>

<그런가?>

<당연하지. 혹시 빼먹은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연락해.>

요한은 상냥한 안나마리아의 메시지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알려야 할…… 사람들.

요한은 눈을 아래로 내려 연락처를 뒤적였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가족들에게선 먼저 연락이 왔고, 친구인 안나마리아도 마찬가지. 연락처에 존재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 요한이었기에 이번 일로 대화를 나누지 않은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

요한은 ‘사기꾼’이라는 호칭에서 ‘친구’라는 미묘한 호칭으로 바뀌어 있는 누군가의 번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험담하는 놈들은 용서 못 해.]

그날 이후 문자를 보내지도, 전화 통화를 하지도 못했다. 기다릴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번호만 보면 기분이 이상해져 섣불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안나마리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요한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내쉰 후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핸드폰 화면의 초록색 전화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약간의 신호음 끝에 통화 연결음 소리가 들렸다.

두근.

고요하던 가슴이 뜀박질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것은 별일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요한은 한 번 더 숨을 고르려 했다.

-어!

……!

하지만 요한이 마음을 가다듬기 전, 상대가 덜컥 전화를 받았다. 심호흡을 하려던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한은 의아해하며 말을 꺼냈다.

“악셀 씨 전화…… 맞습니까?”

-그래, 나야.

너무 빨리 받은 탓에 순간 잘못 누른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요한은 부정하지 않는 그를 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그러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기다린 거 아니야.

요한의 소리를 들었는지 레온하르트 악셀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기다렸군.’

어쩐지 빤히 보이는 그의 감정이 핸드폰 너머로 전해진다. 입꼬리가 멋대로 씰룩였다.

-그런데…… 웬일이야?

“……예?”

웃고 있는 얼굴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방심하던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레온하르트가 그 틈을 파고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요한은 순간적으로 말을 잊었다. 레온하르트가 대신 말을 이어 갔다.

-웬일로 그쪽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었지?

“아…….”

-일주일 동안 연락 한 번 없더니.

마지막으로 뱉어 낸 그의 말에 아쉬움이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요한은 말을 하고 난 뒤에 ‘젠장.’ 하고 스스로를 향해 뱉어 내는 것이 분명한 욕설을 흘리는 레온하르트의 음성을 들었다. 그제야 당혹감이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않는 요한이 화가 난 것이라 여긴 건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한국에 가게 됐습니다.”

-아…… 그건 들었어. 언제쯤 출국하지?

“이번 주 토요일 리그 경기를 치른 후 바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

-…….

“……2주간 섹스는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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