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언제 할 계획이지? 내가 데리러 갈까?”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파티에 같이 갈 동료들이 있어서요. 동료들과 함께 출발하게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동료?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쳇.’
요한이 언급한 다른 동료라면, 생각나는 이들이 몇몇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중 가장 번지르르하게 생긴 바스티안 랄프의 얼굴이 둥둥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꼴이 말이 아니군.
레온하르트는 ‘도착하면 연락 주십시오.’ 하고 말한 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전화를 끊어 버리는 요한에 입맛을 쩝 다셨다.
‘틈을 안 주는군.’
여차저차해서 과거의 일은 묻어 두고 섹스 프렌드 단계까지 왔는데, 그 이상의 단계로 치고 올라가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게 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가.’
머쓱한 표정으로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응시하던 레온하르트 악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동 없는 핸드폰을 들고 있다 집을 나섰다.
“아주…… 쫙 빼입었군.”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저택이 있는 런던 북서부의 햄스테드로 향하기 전, 이안 키스트를 픽업하러 그의 집으로 향한 레온하르트는 차 안의 자신을 보자마자 툭 말을 던지는 이안에게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온다니까.”
“지고 싶지는 않다?”
“어디 가서 꿀릴 만한 사람은 아니지, 내가.”
당당하기 짝이 없는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이안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안이 안전벨트를 매기가 무섭게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이야, 크로비스는 출장만 하면 욕부터 먹더니…… 돈은 꽤 번 모양이군?”
런던에서도 유명 연예인이나 문학가들, 그리고 부유층이 주로 산다고 알려진 햄스테드 지역에서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 앞에 차를 세운 레온하르트는 내리자마자 탄성을 내뱉는 이안을 흘긋거렸다.
“이안.”
“……알겠어. 주의할게.”
이안 키스트는 런던 FC에서도 장 크로비스 주니어를 제일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로젠버그의 선수를 시즌 아웃시킨 전적이 있어서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레온하르트의 주의를 받은 이안은 툴툴거리며 발레 요원이 레온하르트의 자동차 키를 들고 가는 것을 바라보다 중얼댔다.
“레온.”
“어.”
“저 남자, 에디슨 루프 아냐?”
“……뭐?”
“스칼렛 크리브도 있군. 저 여잔 웬만큼 화려한 파티가 아니면 얼씬도 안 하는 여잔데……. 헉, 카미유 블랙도 왔네? 빌어먹을! 게티 존스도 있어!”
저 역시 웨스트엔드의 제일가는 배우면서, 저택으로 들어가는 유명 셀럽들을 보고 감탄을 흘리는 모습이라니. 확실히 가십에 관심이 많은 이안 키스트다웠다.
일일 메이드로 보이는 여자들의 안내를 받아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빛을 뿜어내고 있는 저택 안으로 들어선 레온하르트는 유명 연예인부터 시작해 정치인, 그리고 심지어 영국 왕실의 관계자들까지 방문한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 연회장의 광경에 얼굴을 굳혔다.
“크로비스가 프랑스 출신이라더니 확실히 프랑스 쪽 사람들이 많군. 방금 나, 프랑스 문학가인 에당 블랑을 봤어.”
“…….”
“어이, 레온. 내 말 듣고 있…… 후우.”
보기만 해도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에 혀를 내두르던 이안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굳어진 레온하르트를 발견했다. 그는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긴 숨을 내뱉더니 ‘이봐, 레온.’ 하고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레온!”
아.
“미간 펴. 그러다 들켜.”
“…….”
“레온하르트.”
“……젠장.”
틀림없이 별 사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레온하르트는 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는 이안의 음성에 겨우 이성을 찾고선 호흡을 골랐다.
“일단 가 보자고.”
레온하르트의 시선 끝에 서 있는 두 남자를 힐긋거리며 이안이 작게 속삭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 랄프 선수 아닙니까!”
이안 키스트는 괜히 배우가 아니다. 그는 뮤지컬의 본고장인 웨스트엔드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명 배우였다. 조금 전까지 레온하르트를 달래며 그들을 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행동할 만큼 연기 실력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했다.
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인지, 파티에 초대를 받은 손님들이 각기 떨어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레온하르트가 예의 주시하는 요한 백과 그가 ‘방해자’라 칭했던 바스티안 랄프가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었다.
이안 키스트가 그런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밝은 음성을 내뱉자 마침 요한과 말을 주고받고 있던 바스티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이안을 향했다.
“아.”
“기억하십니까, 랄프 선수? 이안 키스트입니다!”
190센티의 장신임에도 저보다 더 큰 키를 자랑하는 바스티안 랄프에게 손을 뻗은 이안 키스트가 넉살 좋은 눈웃음을 그렸다. 그러자 잠시 요한을 흘끔거리던 바스티안이 이내 빙긋 웃으며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키스트 씨.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안은 바스티안과 인사를 나눈 후 레온하르트를 힐끔 돌아봤다. 그리고 레온하르트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는 다시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바스티안에게 말했다.
“요즘 활약이 아주 대단하시더군요. 랄프 선수, 좀 살살 해 주십시오. 복귀 이후 만나는 팀마다 박살을 내시니 런던 밑에 있는 팀의 팬들은 벌벌 떨린단 말입니다.”
“……키스트 씨는 제 경기를 지켜보시는 겁니까?”
“예? 아, 네, 뭐. 가끔이요!”
“일전엔 로젠버그의 경기만 본다고 하시더니…….”
“하하, 가끔 시간이 날 때는 다른 팀의 경기도 봅니다.”
“……그렇군요.”
“물론, 다른 팀 중에서는 런던 FC의 경기를 가장 많이 보기는 하네요. 그러다 보니 랄프 선수의 활약도 접하게 된 거고요.”
“아…….”
“참! 그런 의미에서 말입니다, 제가 요즘 궁금한 것이 있는데 잠깐 답변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에게……요?”
“예! 별건 아니고, 랄프 선수가 보기에 우리 로젠버그의 문제점이 대체 뭐라고…….”
레온하르트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스티안의 어깨 위로 손을 얹고선 사라지며 등 뒤로 엄지를 치켜드는 이안을 보고 싱긋 웃었다.
‘이안 녀석.’
생각 이상으로 제대로 된 도움을 주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이안과 바스티안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레온하르트는 입꼬리를 올리려다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흠칫 놀랐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요한이 자신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마치 제 속을 꿰고 있는 듯한 요한의 눈빛에 심장이 철렁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생긋 웃었다.
“왜?”
“키스트 씨는 일부러 데려오신 겁니까?”
헉.
정곡을 찔러 버린 요한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생글거리던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급속도로 나빠지자 쯧, 혀를 찬 요한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바티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래, 바스티안 랄프와 무슨 사이냐고 물었던 그날, 저를 집에 들였던 요한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러한 대답을 들려주었었다.
[악셀 씨의 말도 안 되는 상상과는 다릅니다.]
[다르다니?]
[바티는…… 바스티안 랄프 선수는 제가 몹시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제 우상이에요.]
[뭐? 우, 우상?]
[예. 어릴 적부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우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니. 지금은 함께 뛰고 있는 게 믿어지지 않는 꿈의 동료이기도 하군요.]
[꾸, 꿈의 동……료…….]
[솔직히 말해 바티와 함께 뛰는 지금이 매우 즐겁습니다. 그러니 그런 오해는 자중해 주십시오. 조금 불쾌해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새파란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을, 하필이면 바스티안 랄프를 언급할 때 보게 되다니.
그날만 생각하면 이가 부득부득 갈려 참을 수가 없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요한을 힐끔 쳐다보다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또 뭘 말입니까.”
요한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레온하르트는 은근한 시선을 담아 요한을 내려다봤다.
“랄프보단 내가 더 잘생겼지?”
“……예?”
뜬금없는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요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더 그쪽 취향인 거지? 외적으로 보나 성적으로 보나. 그래서 나랑 잔 거고. 그렇지?”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한 레온하르트의 짓궂은 질문에 요한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49화
“아직도 답을 안 해 준 것 같은데.”
하아.
요한은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말을 걸고 있는 레온하르트로 인해 걸음을 뚝 멈추었다. 뒤를 돌아본 요한의 두 눈에 생긋 웃으며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온하르트 악셀이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눈웃음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요한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웨스트엔드의 고결한 왕자라 불리는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써 10분째.
툭 질문을 던진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요한의 답변을 요구했다. 황망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질문부터가 난해했다. 바스티안과 레온하르트 중 누가 잘생겼냐니. 그런 질문을 제게 해 봤자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요한이 알고 있는 바스티안 랄프는, 비단 런던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톱클래스의 축구 선수였고, 속옷이나 의류, 시계 등의 수많은 광고를 찍을 만큼 훌륭한 마스크의 주인공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미라클 스타디움을 찾는 여성 팬들도 많다고 들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또 어떠한가.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이 몰려드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큰 대극장의 주연을 맡고 있는 그를 따르는 관객은 한둘이 아니다. 심금을 자극하는 연기도 연기지만, 그의 외모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인지라 안나마리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간혹 무대 위에서의 그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려 기절을 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물결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에 푸르른 녹색 눈동자까지. 전형적인 왕자님의 모습이라 하여 웨스트엔드의 왕자라 불리는 그는 확실히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미치겠군.’
요한은 은근한 기대를 담은 레온하르트를 가만히 직시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정말 끈질기군요, 악셀 씨. 그 대답이 그리 중요합니까?”
“중요해, 나한테는.”
“…….”
왠지 간절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표정에 요한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바스티안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우상에 가깝다. 바스티안의 외모보다는 축구를 할 때의 스타일을 동경했고, 정확히는 바스티안의 오프 더 볼 플레이(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를 닮고 싶어 하는 편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바스티안에게 다른 감정을 품은 적은 없기에 레온하르트의 질문은 난처하기만 했다.
요한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로비스의 생일 파티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손님들이 가득한 연회장은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아무도 요한과 레온하르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는 않았다.
요한은 레온하르트를 흘긋거렸다. 만약 답을 해 주지 않는다면 온종일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저를 귀찮게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요한은 짧게 숨을 흘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악셀 씨요.”
“……어?”
간결하고도 낮은 대답이었기에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놀란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요한에게 한 번 더 말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요한은 ‘못 들었으면 그만입니다.’ 하고 퉁명스레 대답한 후 마침 소란스러워지고 있는 연회장 중앙 쪽을 응시했다.
오늘의 주인공인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많은 손님들의 박수를 받으며 연회장 안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뭐야, 정말 왔네?”
마치 오지 않아도 될 사람을 대하듯 크로비스가 요한을 흘긋거리며 구시렁거렸다.
유명 DJ까지 불러 연회장을 하나의 클럽으로 만들어 버린 크로비스의 말은, 아마도 제게 직접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요한의 귀에 꽂힐 만큼 또렷했다. 살짝 눈썹을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요한은 이내 그런 크로비스를 향해 머리를 꾸벅였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여기 선물…….”
“아, 뭐, 선물은 나중에 풀어 볼게.”
“…….”
“어쨌든 고마워. 잘 왔어. 이왕 왔으니 재미있게 보내.”
“……네.”
“이야, 악셀 씨! 정말 와 주셨군요!”
레온하르트가 잠시 그에게 다가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하필 크로비스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외면하기도 뭐해서 크로비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더니 인상을 잔뜩 쓴 크로비스가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은 말을 내뱉은 후 곧장 레온하르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어느새 홀로 남게 된 상황에 쓰게 웃으며 왁자지껄한 연회장을 보기 위해 벽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왜 여기 있어?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크로비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 레온하르트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파티를 지켜보고 있던 요한에게 다가온 것은 10여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요한은 빙긋 웃으며 다가온 레온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 레온하르트가 요한의 옆에 서선 벽면에 등을 붙였다.
“그쪽은 이런 곳이 처음인가?”
“……예?”
“왠지 불편해 보여서.”
단순히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평소 이상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는 것을 레온하르트 악셀이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피식 웃은 요한은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입술을 뗐다.
“처음은 아니지만, 꽤…… 오랜만이네요.”
열여덟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 이후로 요한은 누군가의 생일 파티에 자의로는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안나마리아나 가족들의 생일 파티는 예외였지만, 이런 규모의 화려한 파티에는 전혀.
“그래?”
요한은 제 대답에 수긍하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봤다.
“더는 묻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아, 탄성을 터트린 레온하르트가 빙긋 웃었다.
“굳이 물어서 뭐해.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
“내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돼. 하기 싫은 말까지 할 필요는 없어.”
요한은 ‘가식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 이거지.’ 하고 중얼대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왜?”
“악셀 씨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내가?”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며 되묻는 레온하르트에게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셀 씨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리 대하기 쉬운 사람은 아닙니다.”
“뭐, 알고 있지. 그간 충분히 느꼈어.”
“살가운 태도를 보이지도 못합니다. 악셀 씨처럼 제게 다가오는 사람도…… 많이 없습니다.”
레온하르트는 그에 동의한다는 듯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은 다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는 법이야. 그러니 간혹 그쪽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난 전혀 안 그래서. 아, 고마워요.”
요한은 제게 말을 한 뒤 아주 자연스럽게 트레이를 들고 있는 스태프에게서 맥주 하나를 건네받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입술에 그것을 가져다 대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문득 차오른 의문을 바로 내뱉었다.
“악셀 씨.”
“응?”
“차 가지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요한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휘었다.
“물론 가져왔지. 그런데 그쪽은 오늘 술 안 마실 거잖아. 안 그래?”
“……네?”
“나 대신 운전 좀 해 줘. 그래 줄 수 있지?”
요한은 당연하게 제게 운전을 부탁하는 레온하르트의 뻔뻔함에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던 맥주병을 좌우로 두어 번 정도 흔들며 ‘음주운전은 곤란하잖아.’ 하고 속삭였다. 그 모습에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요한이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요한을 보며 짙은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조금 웃네. 내내 찌푸리고 있더니.”
레온하르트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기에 요한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뭐…… 크로비스와 그쪽이 불편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야. 그런데 대놓고 그쪽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 같아.”
요한은 한숨을 내쉬는 레온하르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요한이 저를 응시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슬쩍, 요한을 흘긋거린 레온하르트가 돌연 히죽 웃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었어.”
보람?
“그쪽한테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으니까.”
“그게 무…… 하.”
요한은 레온하르트가 꺼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고선 헛웃음을 흘렸다. 레온하르트는 어이없어하는 요한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한 잘생김 하지.’라 중얼거리고는 턱 밑을 슥슥 매만졌다.
요한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흐음, 오늘 파티는 장의 생일 파티 아니었나? 내가 알기로 장은 아무나 초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이었다.
아직은 단순한 섹스 프렌드 사이일 뿐인 요한과 레온하르트가 자신들의 관계를 속인 채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를 즐기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온 말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아무……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설마 하여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누군가가 자신을 가리키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째서 DVD를 팔 것 같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50화
간혹 중년의 나이를 넘긴 이들도 있었지만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이들은 대부분이 2, 30대의 젊은 청년층이었다. 크로비스가 오늘을 위해 준비했다던, 현란하게 돌아가는 미러볼은 클럽을 연상케 하는 음악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고, 연회장 안의 이들은 한껏 달아올라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한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맥주병을 양손에 쥔 채 웃던 두 남자는 초대받은 손님들에 비해 유독 검은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요한을 발견하고선 눈길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요한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질적으로 보였고, 곧 그가 아시아계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짐작하자마자 ‘DVD’라는 표현까지 사용하여 말을 던진 것이다.
특히나 예의 표현은 동양인들이 DVD를 불법으로 복제하여 판매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인종 차별적 발언이었기에, 그들의 대화 대상인 요한의 얼굴을 굳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장 자식, 아무한테나 초대장을 뿌리니 이런 일이 일어난 거 아니야.”
“그러게. 하여간 장은 너무 너그럽다니까.”
물론 쯧쯧, 혀를 차며 요한을 흘긋거리는 그들은 이미 진탕 취해 있었다. 병 안의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기까지 하며 클클 웃으면서도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백 선수, 참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소란스러운 분위기 와중에도 그들의 말을 들은 몇몇 이들이 딱딱해진 요한의 얼굴을 발견하고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요한에게 빙긋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저 녀석들, 그러니까 켄트와 루크는 장의 친척입니다. 비시즌 때는 장과 함께 휴가를 보낼 만큼 친한 녀석들이지만, 확실히 그 때문이랄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편이죠. 하하.”
한마디로 예의가 없다는 소리를 꽤 거창하게 말한다. 요한은 푸르게 일렁이는 서늘한 눈을 그에게 꽂았다.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화는 좀 나시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장의 생일이니만큼 쓸데없는 분쟁은 없었으면 합니다. 일전의 일도…… 있고 해서요.”
“…….”
“그러니 부디 참아 주십시오. 하하. 저 녀석들은…… 제가 말리겠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요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는 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요한은 그가 장 크로비스 주니어를 비롯해 런던 FC에서도 몇몇 이들을 맡고 있는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크로비스가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온 건 에릭 스피츠가 보드진을 확실히 속여서지. 스피츠가 명성대로, 이게 좋거든.]
리저브 팀에 있을 때, 동료들과 함께 1군 경기를 시청한 적이 있다. 그때, 매번 공격 기회만 되면 헛발질을 하는 크로비스를 보며 다른 동료들이 이를 갈고 있을 때, 누군가가 툭 던진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전의…… 일이라.’
크로비스의 에이전트를 맡고 있는 이인 만큼, 그 역시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일부러 그 이야기를 언급한 것이 분명한 에릭 스피츠를 쳐다보던 요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곳은 크로비스의 저택이었고, 하필이면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괜한 소동은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말없이 얼굴을 주억이는 요한을 보고 에릭 스피츠가 고맙다며 미소 짓더니 몸을 돌려 두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요한은 길게 숨을 내뱉고선 시선을 돌렸다.
‘……!’
요한이 인종 차별적 발언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곁에 있었지만 에릭 스피츠와 대화를 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레온하르트가 그제야 보였다. 자신이 아닌 에릭 스피츠 쪽을 흘긋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악셀…… 씨?”
레온하르트 악셀의 녹색 눈동자가 이다지도 가라앉은 모습은 처음 봤다. 요한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서늘하게 일렁이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정함을 머금더니 요한에게 돌아왔다.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왜 불렀어?”
요한은 언제 싸늘한 얼굴을 했냐는 듯 금세 생글거리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저는…….”
“이거 못 놔?”
요한은 두 남자에게 뭐라 말하고 있던 에릭 스피츠 쪽이 시끄러워지자 말을 끊고선 그들 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스피츠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우리보고 자중하라니? 그쪽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내 입도 제대로 못 놀려?”
“켄트 말이 맞아. 이봐, 스피츠. 이렇게 좋은 날까지 우리보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마. 우리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지? 게다가 사실이지 않나? DVD를 팔게 생긴 놈을 뭐하러 저택까지 들인 거야? 냄새나게!”
“맞아. 냄새나는 동양인은 파티에 오지 말았어야지!”
루크의 말에 큭큭 웃으며 동의한 켄트의 발언은 춤을 추고 있던 주변인들까지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또 켄트와 루크군.”
“싸움이라도 난 건가?”
마침 새로운 음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인트로 상황이었기에, 연회장 내의 사람들은 켄트의 발언을 똑똑히 들은 모양이었다.
요한은 스피츠 쪽에서 시작된 소란이 점점 저와 레온하르트 쪽으로 커져 가고 있다는 걸 인지해 내고선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