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59)

크로비스는 웨스트엔드의 잘나가는 왕자가 자신의 초대에 전제를 걸었다는 사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한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크로비스가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것을 눈치챘다.

‘난처하군.’

크로비스의 의도를 파악하고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요한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제 대답을 기다리는 레온하르트와 똥 씹은 얼굴의 크로비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이 막 무어라 대답하기 직전이었다.

“악셀 씨가 우리 팀의 신예와 몹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신 모양입니다.”

부드득 이 갈리는 소리를 가까스로 감춘 크로비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레온하르트에게 말을 건넸다. 레온하르트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크로비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요한을 힐긋거렸다.

“그런데 이거 어쩝니까.”

“예?”

“제가 알기로 요한은 매우 바빠서, 한낱 저의 생일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안 그래, 요한?”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답을 하라는 식으로 말을 꺼낸 크로비스에게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어?”

“아무리 제가 바쁘다 한들, 선배님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

요한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크로비스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여기는 보통 수평적인 관계를 중요시하지만 제 고국인 한국에서는, 특히 스포츠계는 위계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지냈지만, 저 역시 한국인이죠. 그 피를 이어받았으니 하늘과 같은 선배님의 말씀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

헛웃음을 흘리는 크로비스를 향해 요한이 빙긋 웃었다.

“선배님께서 초대만 해 주신다면 생일 파티에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선배님.”

“…….”

“초대, 해 주시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한 요한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개자식!”

더 대화를 주고받았다가는 복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억지 미소를 지어 준 뒤 겨우 답을 하고 홱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서 귀가 더욱 붉어졌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젠장할!’

동양에서 온 선수들은 비슷한 또래건 나이가 많건 그놈의 선후배 위계질서를 중시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요한 백으로부터 듣는 말은 하나같이 귀에 거슬렸다.

[선배님께서 초대만 해 주신다면 생일 파티에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런던에서 제일가는 셀럽 중 하나인 레온하르트 악셀을 생일 파티에 끌어들이려다 원치 않은 혹까지 달려오게 생겼다. 부드득 이를 간 장은 마침 복도에 놓여 있던 청소 바구니를 걷어찼다.

쾅!

“아!”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드레싱 룸으로 가는 길까지 슥슥, 밀대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던 청소 요원 한 명이 엎질러진 걸레물을 발견하고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장은 원망 섞인 눈빛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뭘 봐!”

버럭 소리치는 장을 보고 청소 요원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장은 그런 그녀를 향해 짜증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망할, 망할, 망할!

어찌 된 셈인지 근래 들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미칠 지경이다.

윙포워드와 스트라이커, 두 개의 포지션이 가능했지만 후자에 더욱 치중하고 있었던 장은 런던 FC로 이적한 이후 줄곧 부동의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이크 비츠로 인해 원하던 출전 횟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마이크 비츠가 시즌 아웃이 됐고,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가 싶었다.

자신이 활약할 차례라며 입꼬리를 올리던 것이 불과 한 달 전의 일이거늘.

[그 동양인을…… 기용하겠다고요?]

들쭉날쭉한 그의 경기력을 핑계 대며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던 조지 웰비 감독의 말이 잊히질 않는다.

[그 꼬맹이 말이야, 무뚝뚝하긴 하지만 꽤 괜찮은 녀석인 것 같아.]

[깍듯하고 말이지.]

[우연히 대화를 해 봤는데, 전술 이해 능력이 상당하더라고.]

[마드리드 놈들과의 일전에서 퇴장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이번 시즌 비츠를 대신해서 그 녀석이 팀의 메인 골게터가 되는 거 아니야?]

[하하, 비츠 녀석 돌아와도 자리가 꽤 위태롭겠는걸?]

그 이후의 상황은 어떠한가.

런던 FC의 유스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코치진과 보드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근래엔 그의 실력을 반신반의하던 동료들에게서까지 은근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하필 그 빌어먹을 동양인 대신 출전했던 선발 경기에서 무엇 하나 보여 주지 못한 채 녀석과 교체되어 나오는 수모를 겪었던 터라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의외로…… 멘탈은 약했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흑발의 동양계 혼혈을 떠올리며 손톱을 물어뜯던 장은 마드리드 원정 때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의 사소한 도발에 경기에서 퇴장을 당할 만큼 흔들렸던 것을 보면, 조금만 더 자극을 줘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장은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자식을 자극하는 방법이라…….’

* * *

팀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다는 이반 아드리치의 계획은 성공으로 돌아갔다. 레온하르트의 등장으로 인해 뒤숭숭하던 분위기가 화끈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레온하르트 악셀이 런던 FC의 선수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성별’이기는 했지만, 그는 런던에 거주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찾아서 관람할 정도로 인기 있는 공연의 주인공이었다. 특히나 값비싼 오페라석은 아무리 유명인이라도 구하기 쉽지 않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해서, 더욱더 그랬다.

게다가 여가 시간에 자주 노래를 듣는 선수들이 가끔 레온하르트가 발매한 음반을 틀어 놓기도 했던지라 직접 LTC까지 찾아온 그의 응원에 몹시 기뻐했다.

단적인 예로, 디에고 가르시아는 그토록 바라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사인을 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기를 펴겠어! 잠깐! 와이프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

레온하르트의 사인이 선명하게 적힌 종이를 받아 들고 환호성을 부르짖는 그의 모습이란. 그간 요한이 보아 온 퉁명스러운 태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레온하르트 악셀의 갑작스러운 LTC 방문은 오후 트레이닝 세션이 진행되기 전에 끝났다. 관계자들과 함께 레온하르트가 LTC를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정확히 30분쯤 뒤, 제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불쑥 말을 던졌다.

전화를 받자마자 서늘한 말을 건네는 요한에 풉 웃은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내가 실수한 건가?

장난기를 가득 담은 그의 음성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은 요한은 잠시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레온하르트로 인해 크로비스에게 예기치 못한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제 말을 듣고 입술을 잘근 깨물던 크로비스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자 요한이 중얼거렸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요한의 말에 ‘그렇지?’ 하고 되물은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적의가 느껴졌지.

“…….”

-나까지 기분 나빠질 정도였어.

요한은 답하지 않았다.

팀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제3자가 보고도 이런 말을 꺼낼 정도라면, 자신에 대한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불만은 꽤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요한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상대가 그쪽이라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 동료끼리 사이가 불편하면 그쪽이 곤란하잖아?

요한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불편한 사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 어…… 뭐,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그가 설마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을 리 없다. 저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고, 코치진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으니.

[누구랑 시비가 붙은 거야? 그 크로비스라는 녀석, 아냐?]

아.

그러다 문득, 과거 레온하르트 악셀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그와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조금…… 달라졌나.’

당시엔 자칭 ‘친구’였던 레온하르트가 살짝 귀찮게 느껴졌다면 현재는 다르다. 레온하르트 악셀의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을 정도이니, 아무래도. 요한은 레온하르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웃었다.

-오지랖……이었나?

대답 없는 요한의 반응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피던 레온하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고마웠습니다, 악셀 씨.”

-……!

“가끔 악셀 씨도 쓸모가 있군요.”

농담 섞인 요한의 말에 ‘……어?’ 하고 얼떨떨해하던 레온하르트가 이내 하하 크게 웃었다.

-그렇지? 나 꽤 유용한 사람이라고. 그쪽에게만 허락할 테니, 앞으로 나를 자주 이용하도록 해.

“뭐, 그러죠. 내킨다면.”

-이봐, 이용권을 주겠다는데도 그런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면 어떡하나.

“제가 그랬습니까?”

-……후우, 정말 귀여운 맛이라곤 없군.

요한은 투덜거리는 것이 분명한 레온하르트의 음성에 쿡쿡 웃었다. 이윽고 전화는 끊어졌고 요한은 대기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

두근.

그러다 문득, 가슴의 떨림을 인지하며 새삼 생각에 잠긴다.

두근두근.

이상하게 일렁이는 이 마음에 대한 의문이 차오른다.

‘모르……겠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려는 수상쩍은 남자를 믿어도 될까.

하지만 이미 한 번, 나를 속인 사람인데.

‘나는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능청스럽게 제게로 다가오는 남자와의 대화가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그와 몸을 섞는 행위 역시,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분명 예전 같았다면 ‘좋아하는 건지도.’라고 정의 내렸을 요한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쉽게 확답하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복수를 핑계로 그를 속였던 레온하르트의 전적도 한 이유였고, 어쩌면 첫 상대인 그에게 애착이 생겨 좋아한다는 착각을 하는 것 역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개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역시, 그 일이다.

[설마 내가 남자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 그것도 너를? 하하,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그때처럼 들떴다가, 다시 상처받기 싫었다.

47화

“뭐?”

일요일 밤 공연을 대비해 대본을 읽고 있던 이안 키스트의 푸른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향했다. 웬일로 휴일인 내일 시간이 있냐고 묻는가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자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싫어! 안 가!”

“이안.”

“너, 내가 런던 FC 놈들 질색하는 거 몰라? 난 돈이랑 우승을 바꾸는 명예 없는 놈들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고! 아…… 뭐, 그 백이라는 선수는 꽤 좋은 사람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싫어! 절대 안 가!”

그의 대기실을 찾아 똑똑 문을 두드린 레온하르트가 ‘흥미로운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갈래?’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이안 키스트는 틀림없이 스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파티가 런던 FC의 선수인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안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레온하르트라고 왜 모를까.

런던 FC에 대한 험담을 귀가 빠지도록 늘어놓던 이안 키스트의 과거를.

[잘 봐둬, 레온. 저 긍지 없는 런던 FC 놈들의 면상을 말이야. 난 저놈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축구를 돈으로 하려 들다니. 그렇게라도 축구 종주국에서 뛰고 싶은 건가.]

벌써 3년째 이안과 함께 같은 공연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던 터라, 레온하르트는 그와 같이 휴가를 즐기거나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가끔 런던 FC의 구장인 미라클 스타디움을 지나칠 때면 이안 키스트는 런던 FC에 걸린 대형 포스터들을 가리키며 신랄한 말들을 쏟아 냈다.

축구에 환장한 영국인답게 이안 키스트는 지나칠 정도로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연고 팀이자 오랜 전통을 자랑해 온 로젠버그 FC를 열렬히 응원했고, 새로운 구단주의 등장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신흥 강호 런던 FC를 지독하리만큼 싫어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그의 행동은 지난 시즌, 로젠버그 FC의 구단주가 미국의 스포츠 재벌로 바뀌면서 줄어들기는 했지만.

[슈가 대디라는 거 말이야…… 흠, 생각보다 나, 나쁘진 않더군.]

축구에, 아니 스포츠 자체에 그닥 관심이 없던 레온하르트였기에 신문을 내려다보며 중얼중얼거리는 이안의 말을 그때 당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헛소리를 할 거면 당장 꺼져!’라고 축객령을 내리는 이안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안.”

“내 이름 부르지 마.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해.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사실 난 네가 런던 FC의 메인 모델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너와 다시는 상종을 안 하려다 어쩔 수 없이…….”

“네가 필요해.”

“……뭐?”

흥, 콧방귀를 뀌던 적발의 사내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털썩 앉더니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를 내뱉는 레온하르트를 깜짝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이안의 손까지 덥석 잡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 날 도와줄 사람은 너뿐이야.”

“…….”

“방해자를 치워 줄 사람도, 너뿐이고.”

생긋 웃으며 녹색 눈동자를 빛내는 레온하르트를 이안 키스트는 수상한 눈으로 응시했다.

“징그럽게 왜 이래. 게다가 방해자라니. ……너, 그런 곳에서 헌팅이라도 할 생각이냐?”

‘웬만한 유명인들은 다 모일 텐데!’를 외쳐 대는 이안 키스트의 말에 쓴웃음을 흘린 레온하르트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안이 그런 레온하르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봐, 무슨 말을 하려고…….”

“기억나, 이안?”

“응?”

“저번 달 이맘때쯤, 내가 웬 동양인을 찾은 적이 있지.”

미묘한 표정을 짓던 레온하르트가 대뜸 동양인을 언급하자 이안이 큭큭 실소를 흘렸다.

“알지. 감히 천하의 악셀을 먹고 튀어 버린, 용기 있는 동양인.”

“…….”

“그 잘난 낯짝을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될 지경이야.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말 기억 안 나? 끝내 못 찾았지, 아마?”

런던의 온갖 클럽을 다 뒤지며 예의 흑발 동양인을 찾아다니던 레온하르트가 떠올랐는지 이안은 계속해서 웃어 댔다.

이안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레온하르트는 살짝 웃더니 이내 다음 말을 이었다.

“……요한이야.”

“이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뭐?”

이안 키스트의 벽안이 큼지막해졌다. 레온하르트는 클클거리던 이안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를 비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이안은 곧 제 귀를 의심했고, 이윽고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레온하르트를 직시했다.

레온하르트는 이안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설마…… 너, 요한 백을 말하는 건 아니지?”

이안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와 몇 년째 호흡을 맞춘 파트너가 아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작은 변화였다. 레온하르트는 흔들리는 이안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대답했다.

“맞아.”

“헉!”

“그 녀석이 좋아.”

“콜록콜록! 콜록콜록!”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돌연 기침을 흘렸다. 레온하르트는 순식간에 제 머리 색만큼이나 새빨개진 이안을 향해 괜찮냐고 물었지만 이안은 손만 휘휘 저을 뿐 답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근처의 컵에 물을 따라 건네주자 꿀꺽꿀꺽 잘도 마셔 댔다.

“하아.”

한참이나 심호흡을 한 이안 키스트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

“응.”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들었다.”

“……제대로라고?”

“…….”

“지금,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나보고 믿으라고?”

레온하르트는 황망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이안에게 단호히 대꾸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요한 백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무슨 헛소리야, 인마! 그게 그거야!”

이안 키스트는 제 말을 정정하는 레온하르트에게 버럭 외치더니 갑자기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레온하르트가 그러한 이안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며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안의 의문은 멈추지 않았다.

“너 설마…… 나도 좋아하는 거냐? 다, 다른 의미로?”

이안이 제 가슴팍을 가리며 레온하르트에게 외치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 소리 마.”

“젠장! 난 네 앞에서 수도 없이 옷을 훌러덩 벗었다고!”

“……돌았군. 네가 뭐 볼 게 있다고. 난 남자 안 좋아해.”

“백 선수는 좋다며!”

“요한은 다르다니까. 사람으로 좋아하는 거야.”

“백 선수한테는 볼 게 있어?”

“그 녀석은…… 볼 게 넘치지.”

“솔직히 말해, 레온하르트 악셀.”

“……?”

“너, 그간 날 이상한 눈으로 본 건 아니지?”

“이봐, 이안 키스트. 죽고 싶나?”

“크크큭!”

……!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저를 경계하던 이안이 돌연 어깨까지 들썩이며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자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그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배를 잡고 웃던 이안은 말을 잃은 레온하르트를 가리키며 입술을 움직였다.

“크크크큭, 크하하하! 진짜 웃겨 죽겠네. 푸흐흡. 천하의 레온하르트 악셀이 코가 꿰어도 남자한테 꿰다니! 그것도 그렇게 혐오하던 원나잇 상대한테! 푸하하!”

왜 제 몸까지 감싸며 과장된 말을 늘어놓나 했더니, 자신을 놀리기 위함이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레온하르트는 왠지 모르게 허탈한 감정까지 느끼며 이안을 응시하더니 후우, 숨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레온하르트는 소파 헤드 뒤로 고개를 젖히며 대기실 천장을 응시했다. 눈부신 조명이 시야로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거든.

요즘엔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예의 흑발 청년을 떠올리는 데 사용한다. 눈을 감고 꿈이라도 꾸는 날엔 달라지는 게 없었다. 물론 그렇게 요한의 꿈을 꾸고 나면 저도 모르게 실실 웃게 되는 변화가 있긴 하지만.

“그래서 그때 네가 백 선수를 초대한 거였어.”

“……뭐.”

“그 뒤로 백 선수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린 거고. 런던 놈들 경기 중계만 하면 TV를 틀어 놓은 것도.”

“흠흠.”

“하아, 이런 제길.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내 소중한 사촌 누이를 네놈 따위에게 소개해 주겠다 날뛰었으니…….”

“참! 미스 후안은, 잘 있지?”

레온하르트는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에게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안이 흥 콧방귀를 뀌며 그를 노려보다 ‘대체 어떻게 넘어간 건데?’ 하고 돌연 질문을 던졌다.

‘넘어가?’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그 녀석? 글쎄. 귀여워서 그런가.”

“이봐, 레온. 너 지금 180센티가 넘는 장신 선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야?”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이안의 태클에도 레온하르트는 아랑곳 않았다.

“귀여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하!”

“귀엽지 않은 구석이 없지. 날 보면 흠칫 놀라는 그 눈빛도, 언제나 찡그리는 눈빛도, 퉁명스러운 말투도, 날 버려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단호함도.”

“……귀여운 거 맞아?”

레온하르트는 저를 의심하는 이안 키스트를 향해 계속해서 요한 백이라는 청년에 대한 귀여움을 어필했다. 처음엔 ‘호오.’ 하고 나름 흥미롭게 들으려 노력하던 이안은 쉬지 않고 말을 잇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이 20분가량 이어지자 ‘흠흠.’ 헛기침을 흘리기 시작했고, 30분 정도가 되자 ‘저, 언제 끝나?’라는 말을 내뱉었으며, 정확히 한 시간이 되었을 때 ‘젠장! 이제 그만해!’를 외쳐 댔다.

침이 마를 사이도 없이 이야기하던 레온하르트는 어느덧 공연 시간이 가까워진 벽시계를 흘긋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 파티에 대체 내가 왜 필요한 건데?”

마침 도착한 스태프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들고 부착하던 중 이안이 의문을 견디지 못한 채 말을 건넸다. 레온하르트는 입을 열었다.

“방해자가 있댔잖아.”

“무슨 방해자? 어? 잠깐, 설마 너?”

무언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크게 뜨는 이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바스티안 랄프가 신경 쓰여.”

분명 같은 소속 팀의 간판선수인 만큼 바스티안 랄프 역시 크로비스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을 거다. 요한은 바스티안과 자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요한과 그가 가까이 지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흐응.”

그제야 레온하르트가 왜 제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깨달은 이안이 묘한 콧소리를 흘렸다.

레온하르트는 못 말리는 축구 팬인 이안이 일부러라도 바스티안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과 요한의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다물어 버린 레온하르트를 보며 피식 웃은 이안 키스트는 곧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뭐…… 어쩔 수 없지. 가끔 친구다운 일도 해 줘야 좋은 인연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 레온 넌 인마, 날 파트너로 둔 걸 고맙게 여겨야 해. 알아?”

바스티안 랄프 따위는 걱정 말라는, 꽤나 자신만만한 대답이었다.

48화

-키스트…… 씨도요?

레온하르트의 이야기를 들은 요한은 생각 이상으로 놀라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지. 자신만 오는 줄 알았더니 이안 키스트까지 동행을 할지도 모른다니. 파티에 가기 직전 미리 전화를 건 것이 다행이었다.

검은 면 티에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던 레온하르트는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안 녀석이 눈치가 빠르거든. 내가 파티에 간다니 따라가겠다고 워낙 졸라 대서.”

사실은 그 반대였지만, 요한을 속이기 위해서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레온하르트는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린 요한이 갑자기 입을 다물며 말을 하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한?”

-그럼 악셀 씨는 키스트 씨와 함께 계시면 되겠군요.

……뭐?

-이제라도 저는 가지 않겠다고…….

“그럴 수는 없지.”

레온하르트는 하하, 웃으며 요한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리고 겨우 머리단장을 마친 후에야 스피커로 돌려진 핸드폰을 다시 귀에 대며 말을 이어 갔다.

“이미 그쪽은 크로비스한테 참석하겠다고 선언했잖아. 이제 와 그 선언을 뒤엎을 셈인가?”

-…….

“게다가 난 그쪽이 간다는 전제하에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한 거야. 이안이 참석하는 건 논외의 일이지. 그러니 내가 참석하면 그쪽도 참석해야 해. 그리고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내 옆에 있어 줘야 한다고.”

-…….

“왜 말이 없지? 내 말이 틀렸나?”

얼굴을 보고 있어도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요한이 핸드폰 너머에서 입까지 다물고 있자 그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레온하르트는 답변하지 않는 요한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자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요한이 ‘알겠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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