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59)

“문자…… 하아, 보자마자 왔어. 그런데 갑자기 여기는 왜…….”

요한은 룸 밖에 서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쾅!

요한에게 잡힌 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끌려오자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요한, 대체 무슨…….”

“벗어요.”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저를 붙잡고 있는 요한에게 묻자 요한은 고조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뭐?”

그, 레온하르트 악셀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며 요한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옷, 벗어요.”

지금 당장.

어서.

44화

“흐읏……!”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강렬한 열기에 요한은 입술을 짓눌렀다. 강한 통증이 안쪽은 물론 머리까지 얼얼하게 만든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져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아.

좁은 입구 안으로 들어선 그를 받아 내기가 쉽지 않아 거친 숨을 토해 내던 요한은 제 반응에 움찔거리는 상대의 움직임을 인지했다. 안 돼. 요한은 짧게 호흡을 고른 뒤 벽에 대고 있던 두 손 중 하나를 내려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목을 감쌌다. 그러자 상대의 떨림이 느껴졌다.

“계속, 들어오십시오.”

소리를 내뱉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 했다. 요한은 정면을 향하던 시선을 살짝 뒤로 돌리며 그를 향해 속삭였다. 그러자 그런 요한의 의도를 파악한 듯 그가 대답 대신 제 페니스를 더욱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크읍!”

굵고 묵직한 그의 기둥이 제 속을 파고들수록 안쪽의 전립선이 찌르르, 자극을 받았다. 요한은 가빠 오는 숨결을 자꾸만 내쉬며 딱딱한 벽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윽, 흣, 하아, 윽!”

살갗과 살갗이 맞닿아 숨이 가빠 왔다. 내벽에 닿을 정도로 빳빳하고 굵은 페니스가 계속해서 그의 안을 찔러 댄다. 살과 살이 맞닿아 퍽퍽,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요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댄 채 뒤에서 침입하는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얼굴을 보고 할 때보다 거리감이 느껴졌으나 왠지 모르게 더욱 짜릿했다.

젠장.

자신이 내뱉는 건지, 아니면 그가 내뱉는 건지 알 수 없는 거친 숨결이 룸 안을 가득 채운다. 요한은 이를 꽉 악물며 반동을 주는 그를 힘껏 받아들이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윽, 으으, 읍!”

이것이 제 음성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야릇한 신음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허리를 튕기고 있던 요한은 점점 더 다리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흐으.”

멈추지 않고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피스톤질이 이어졌다. 요한의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것은 상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벽을 짚고 있던 손과 바닥을 누르고 있던 다리의 힘이 쭉 풀리는 게 느껴졌다.

“갈 것 같나?”

절정에 이른 요한의 귓가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요한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럼 가도 돼.’ 하고 다시 말을 건네주었다. 그 답변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부푼 요한의 페니스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요한은 경련을 일으키며 사정했다.

“하아, 하아…….”

쌓여 있던 애액을 분출하고 나자 힘이 풀렸다.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요한은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녹색 눈동자의 남자는 그런 요한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요한은 손에 묻은 애액을 말없이 닦고 있는 그를 주시했다.

아직 안정을 되찾지 못한 터라 거칠어진 호흡을 입 밖으로 내뱉던 요한이 인상을 쓰며 그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벗으라고 명령한 뒤 망설이는 그를 향해 곧장 입을 맞춘 사람은 요한이었다. 살짝 당황한 듯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남자는 이윽고 열렬히 요한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고, 그들은 현관에서 스위트룸의 거실 쪽으로 자리를 옮겨 관계를 맺었다.

처음 시작은 거실의 넓은 소파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물 다루듯 발가락 끝에서부터 애무해 주는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요한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제게로 끌어당겼고, 귀를 뜯어 낼 것처럼 물었다. 자신의 자극적인 행동에 요동치는 그의 눈두덩에 입술을 맞춘 요한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옷깃을 잡았고, 그 역시 마력에 이끌리듯 요한을 따라 움직였다.

쿵!

장식이나 가구가 아무것도 없는 벽에 등을 댄 요한은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셔츠를 북북 뜯기 시작했고, 그 역시 요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 있는 상태에서 그를 받아들이던 요한이 주저앉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자 금발의 남자가 빙긋 웃는 게 보인다. 요한은 한번 찌푸린 미간을 다시 펴지 않은 채 그를 향해 물었다.

“어째서…… 묻지 않는 겁니까.”

그가 들어서자마자 키스를 하고 섹스를 했기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퉁명스러운 말에도 옅은 미소를 짓기만 하는 그의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다. 남자는, 레온하르트 악셀은 대답을 듣기 위해 입을 꾹 다문 요한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물어야 하나?”

“…….”

“말했잖아. 언제든 나를 이용하라고. 그쪽이 날 부른 이유가 섹스 때문이라면, 어울려 줄 수밖에 없지.”

웃음을 머금은 그의 발언에 가슴이 살짝 일렁였다. 요한은 제 말을 마친 뒤 입꼬리를 올리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생각나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요한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이런 일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 위에 뜬 수많은 번호들 중 유독 레온하르트의 번호에 눈길이 갔다. 고민 끝에 ‘지금 당장 퀸스 호텔로 와 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정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요한을 보며 레온하르트가 짙은 미소를 그렸다.

“그거 영광인걸.”

그는 요한의 답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콕콕, 심장 한편이 다시금 아려 와 말을 잇지 못하던 요한이 결심한 듯 그를 바라보다 길게 숨을 흘리며 말했다.

“해요.”

“뭘?”

“섹스 프렌드.”

“……!”

“친구는 어렵지만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요한의 딱딱한 발언에 잠시 벙찐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이내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은 웃는 그를 묵묵히 응시하다 물었다.

“왜 웃는 거죠?”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아서.”

“…….”

“그런 의미에서 요한.”

“네.”

“그쪽은 한 번 갔지만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정식 섹스 프렌드가 되었으니 나도 뭔가 요구해도 되겠지?”

요한은 금세 눈빛을 바꿔 야성을 드러내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헛웃음을 삼켰다.

“어디 가?”

동이 트는 것을 확인한 요한은 간단한 샤워를 마친 뒤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요한의 인기척에 스르륵 눈을 뜬 금발의 레온하르트가 침대에 누워 요한에게 불쑥 말을 던졌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했던 요한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려 제게 묻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다.

“네. 돌아가려고요.”

“돌아……가?”

“오전에 훈련이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요한의 대답에 레온하르트가 ‘아!’ 하고 잠시 탄성을 터트렸다.

“저기, 오늘 훈련엔…….”

“예?”

“……아냐, 아무것도.”

요한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마는 레온하르트를 의아하게 응시하다 근처 의자에 던져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요한.”

룸을 나설 준비를 마친 요한이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여전히 침대 헤드에 기대어 그를 주시하던 레온하르트가 요한을 불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면 나한테 털어놔도 돼.”

“…….”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악셀 씨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요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나가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놀란 레온하르트에게 인사를 한 뒤 냉정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달칵, 문을 열고 스위트룸을 나설 때까지 그를 붙잡지 않았다.

호텔을 나서 미리 세워 둔 차에 올라탄 요한은 이제 서서히 밝아지는 창밖을 흘긋거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줄 수…… 있습니까?]

어째서 그 순간, 레온하르트 악셀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한 달 전 레온하르트와 몸을 섞었던 퀸스 호텔 31층 스위트룸에 들어서 있었고, 뒤이어 들이닥친 레온하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혼자 있을 때는 그토록 숨이 막혔던 생각들이 ‘그’와 몸을 섞는 그 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성의 끈을 놓고,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서로를 탐했다.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라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스위트룸을 나서면서 앞으로 발을 뗄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무거웠던 발은 생각 이상으로 가벼웠다. 컴컴한 어둠이 내리듯 흐려지던 정신 역시 또렷하게 맑아진 상태.

핸들을 잡고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직전 창문을 연 요한의 콧속으로 새벽의 상쾌한 바람이 스며들어 온다. 요한은 길게 호흡을 골랐다.

재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약간의 충동과 지난 이틀 동안의 일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만일 제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여지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겠지.

‘큰일이군.’

그와의 만남, 대화, 시선의 교환에 이상한 기분이 느껴진다. 적응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전화를 걸 만큼 레온하르트 악셀이 익숙해진 걸까.

지금껏 훌륭히 스스로를 다스려 온 자신이, 한번 고삐가 풀려 버리자 연속적으로 감정이 없는 남자와 관계를 맺는 꼴이라니.

‘감정이…… 없어?’

훈련장으로 가기 직전 옷이라도 갈아입을 생각으로 집을 향해 차를 몰고 가던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레온하르트 악셀.

그는 그저 단순한 섹스 프렌드일 뿐, 결코 믿어서도 안 되며 마음을 줘서도 안 되는 자다.

그런데 왜…… 계속, 생각이 나는 거지.

45화

요한이 남런던에 위치한 런던 FC의 훈련장인 라이트닝 트레이닝 센터, 통칭 LTC에 출근한 시각은 오전 9시를 갓 넘긴 무렵이었다.

런던 FC는 지난 20일 목요일, 스페인에서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경기를 치렀지만 일요일 저녁에 또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결코 오늘 훈련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특히나 오늘은 무슨 연유에선지 평소보다 빠른 10시부터 트레이닝 세션을 진행할 계획이라 들었던지라, 요한은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드레싱 룸으로 향했다.

“윽.”

그리고 하필이면 드레싱 룸에 들어선 직후 바로 부딪친 사람이 다름 아닌 장 크로비스 주니어라는 사실은 무표정한 요한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나마 당혹감이 스쳐 지나가게 만들었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려던 크로비스 역시 요한을 마주하고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날 이후 요한과 크로비스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기에 정면으로 부딪친 그들의 얼굴엔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가득했다.

“어이, 꼬맹이. 왜 길은 막고……. 뭐야, 니들. 또 싸우려는 거냐?”

그런 요한의 뒤를 이어 출근하던 디에고 가르시아가 요한과 서늘한 눈길을 주고받는 크로비스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봐, 크로비스 주니어. 듣자 하니 별것도 아닌 걸로 치고받고 한 것 같은데. 꼬맹이한테 흥분하지 말고 연장자로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가르시아! 말은 바로 해야지! 치고받다니? 난 일방적으로 맞은 피해자라고!”

“흐응, 한 대도 못 때리고 맞기만 했다? 그런데 왜 CCTV 확인은 극구 반대할까?”

“……윽.”

억울하다는 듯 외치던 크로비스가 주워들은 것이 있는지 돌연 CCTV를 언급하는 디에고의 말에 몸을 움찔거렸다. 크로비스는 마치 ‘네가 말한 거냐?’라는 눈으로 요한을 응시했지만 요한은 그런 크로비스의 시선에도 평상시와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싸울 거 아니면 이 녀석 데려간다.”

“뭐? 잠깐…… 젠장!”

크로비스가 움찔하는 사이, 요한의 어깨에 팔을 걸친 디에고가 그를 데리고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섰다. 요한이 당황하는 것도 아랑곳 않은 디에고는 요한을 그의 자리에 앉힌 뒤 옆자리에 착석했다.

“대체 저 녀석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네?”

“딱히 도와주려는 건 아니야. 난 귀찮은 일은 질색이거든. 하지만 두 사람 때문에 팀 분위기가 거지 같잖아. 꼬맹이 너, 그 일 때문에 경기에서까지 실수 저지른 거 아니야?”

정곡을 찌르는 디에고의 말에 요한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찰나의 변화였음에도 그것을 놓치지 않은 디에고가 ‘맞네.’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다.

“가르시아.”

“랄프,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꼬맹이, 너 진짜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거냐?”

“…….”

“……가르시아.”

“조용히 하래도. 꼬맹이, 나 이런 거지 같은 분위기에서 훈련 못 하거든? 그러니까 저 못 믿을 녀석 말고 네가 직접 말해 봐. 수요일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크로비스 녀석을 팼어? CCTV 얘기도 나오던데, 그건 또 뭐고?”

“그만해, 가르시아.”

요한과 디에고가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스티안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요한에게 윽박지르는 디에고를 말렸다. 디에고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았지만 바스티안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요한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던 디에고가 욕설을 흘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의 등이 요한의 옆자리 조나단 리드의 락커와 부딪치며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디에고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을 쓰더니 ‘그럼 이 분위기는 대체 어쩔 건데!’ 하고 오히려 바스티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

요한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하나둘씩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오던 동료들 역시 자신과 디에고, 그리고 바스티안이 앉아 있는 쪽을 흘긋거리는 것을 인지하고선 긴 숨을 내뱉었다.

“뭐야. 저 녀석 어디 가?”

갑자기 요한이 벌떡 일어나 드레싱 룸 입구 쪽으로 움직이자 바스티안과 성난 멘트를 주고받던 디에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야!”

요한은 드레싱 룸 입구에서 저와 다른 동료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장 크로비스 주니어를 발견하고는 멈추어 섰다. 크로비스는 갑자기 제 앞에 우뚝 서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한을 보고 움찔거리더니 뒤로 주춤 물러나며 버럭 소리쳤다.

요한이 그런 크로비스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번 일은 이대로 넘어가지만, 다음번엔 한 대로 안 끝날 겁니다.”

“……뭐?”

“눈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차갑고 냉랭하게 말을 마친 요한은 아직 새파랗기 그지없는 크로비스의 왼쪽 눈두덩 쪽을 흘긋거리더니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바스티안과 디에고의 옆으로 돌아왔다.

“……꼬맹이 너, 보통 아니다?”

“장이 아직 제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

요한은 자신이 말없이 착석하자마자 풉 웃으며 속삭이는 디에고와 바스티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며 묵묵히 축구화를 닦기 시작했다.

“저, 저 미친 새끼가! 야! 너 말 다 했냐? 다 했…… 헉!”

요한의 사과 아닌 사과를 받고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크로비스가 요한의 말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길길이 날뛰며 요한에게 삿대질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미스터 크로비스.’ 하고 크로비스의 뒤편에서 나타난 재색 머리의 남자를 발견하고선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아드리치 씨! 어? 뒤의 분은……?”

요한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을 내뱉다 돌연 고개를 갸웃거리는 크로비스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런 요한의 시야로 이반 아드리치의 등 뒤에서 천천히 나타나는 금발 남자가 들어왔다.

* * *

“내 평생 레온하르트 악셀의 사인은 꿈도 못 꾸는 줄 알았지. 여기 계신 누군가가, 그렇게 부탁해도 무시하길래 말이야.”

퉁-

발끝으로 공을 튕기던 디에고가 요한을 힐긋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요한이 들으라는 듯, 크게.

그에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디에고는 묵묵히 바스티안과 함께 볼을 주고받고 있는 요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LTC에서! 드디어 사인을 받겠군.”

“…….”

의외로 속이 좁군.

요한은 툴툴거리는 디에고를 힐긋거리더니 속으로 피식 웃었다. 너무도 직설적인 사람이고 보기보다 쿨해서 레온하르트 악셀의 사인 건은 그냥 넘어간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툭.

“저기 가르시아, 아까부터 무슨 말이야? 대체 누구한테 하는 말인데? 나한테 하는 건 아니지? 사인은 또 뭐고? 악셀 씨의 사인?”

요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내뱉는 디에고가 답답했는지, 결국 바스티안이 요한으로부터 온 공을 멈추어 세우고는 인상을 썼다. 디에고는 ‘그런 게 있어.’ 하고 흥, 콧방귀를 뀌더니 훈련장 구석 쪽을 흘긋거렸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지?”

디에고는 자신의 시선 끝에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런던 FC의 구단주인 이반 아드리치와 그런 아드리치에게 무언가 설명을 듣는 레온하르트 악셀,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조지 웰비 감독 등의 코치진이 나란히 서 있었다.

“뭐가.”

바스티안이 눈을 가늘게 뜨는 디에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에고가 수상하다는 듯 턱 끝을 만지작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드리치가 셀럽을 데려오는 일이 흔치는 않잖아. 게다가 내일 경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보통 유명인도 아닌 웨스트엔드의 왕자를 데려오다니…… 왠지 냄새가 나는군.”

“아마도 이유는 하나겠지.”

“하나?”

코를 킁킁거리며 입술을 삐죽이던 디에고는 바스티안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스티안은 그런 디에고를 향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팀 분위기 쇄신.”

……!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낸 바스티안의 말이었지만 왠지 가슴이 철렁거린다.

확실히 지난 수요일 이후 팀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생성한 중심에 요한 자신이 있다는 것 역시.

바스티안의 짐작대로라면, 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듣는 열혈 구단주 이반 아드리치가 다가올 리그 경기를 위해 나름의 강수를 둔 것이 분명했다.

보통 엉망인 팀의 분위기를 바꿀 때는 감독을 교체하거나, 아니면 선수를 방출하는 수를 두기는 하나 이번 원정 때 일어난 일은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난 별거 아닌 다툼이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요한이 경기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것이 팀의 패배로 이어졌기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걸 테지만.

런던 FC의 메인 모델이긴 하지만 요한과의 프로모션 북 촬영 이후로 딱히 이렇다 할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레온하르트 악셀은 아마도 이반 아드리치에게 있어 이용하기 좋은 존재였을 것이다.

[저기, 오늘 훈련엔……. 아냐, 아무것도.]

자신이 훈련장을 찾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가.

요한은 오늘 새벽, 룸을 나서려던 저를 멈추어 세운 레온하르트의 행동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드리치와 레온하르트의 등장 때문인지 생각보다 오전 훈련은 빠르게 끝났다.

“악셀 씨!”

“아.”

“우리 구면이죠?”

런던 FC의 코치진과 인사를 나눈 레온하르트는 아드리치의 안내로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를 향해 알은척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스티안이었다. 바스티안이 넉살 좋게 생긋 웃으며 말하자 왠지 움찔한 레온하르트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인걸요.”

“오랜만이군요, 백 선수.”

바스티안과 대화를 나누던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순간 속이 찌르르 울렸다. 킹스 로드의 레스토랑에서처럼 제게 그 어떤 추파도 던지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보자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올 뻔했다.

요한은 가까스로 그것을 참아 내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악셀 씨!”

요한의 뒤편에 서 있던 디에고가 계속해서 그의 허리를 쿡쿡 찔러 대며 ‘사인. 사인!’을 외쳐 대고 있었기에 요한은 살짝 정신이 없었다. 스스로 말하면 될걸, ‘디에고 가르시아의 명성이 있지, 내 스스로 어떻게 사인을 요구하나.’라며 요한에게 일부러 사인 요구를 맡긴 디에고를 위해 요한이 막 레온하르트를 부르려 할 때였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요한 등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온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생긋 웃으며 ‘아, 크로비스 씨.’라며 그를 반기는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혹시 다음 주 월요일에 시간 되십니까?”

월요일?

요한은 다짜고짜 말을 꺼내는 크로비스를 수상하게 바라봤다. 사인 요구를 지시하려다 묵살당한 디에고 역시 마찬가지. 크로비스는 그들의 눈빛에 전혀 개의치 않고 레온하르트를 향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실은 다음 주 월요일이 제 생일이라 팀 동료들과 함께 파티를 할까 하는데, 오늘 훈련장에 들러 주신 기념으로 악셀 씨도 초대를 할까 합니다.”

“저를…… 말씀이십니까?”

“네. 악셀 씨는 월요일 공연에는 출연 안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생일 파티에 대해 들은 기억 따위는 없었다. 요한은 그 말을 내뱉은 후 저를 힐긋거리는 크로비스의 눈길에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흠흠, 헛기침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주변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도 저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초대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유치하군.’

요한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크로비스의 졸렬함에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다.

어찌나 저를 싫어하는지.

요한의 앞에서, 생판 처음 보는 레온하르트까지 생일 초대를 할 만큼 그를 무시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요한은 괜히 시비가 생기기 전에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백 선수도 참가하는 겁니까?”

그리고 막 요한이 발을 떼려던 순간 들린 레온하르트의 음성이 요한의 발목을 잡았다.

46화

“네?”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낸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당황한 사람은 비단 요한뿐만이 아니었다. 요한을 흘긋거리며 작게 코웃음 치던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하하, 유려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굳어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성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아서 말입니다. 은근히, 낯을 가리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함께 촬영을 하면서 여기 있는 백 선수와 친해졌지 뭡니까. 해서 백 선수가 참석한다면 저도 크로비스 씨의 생일 파티에 가서 축하를 해 드리고 싶은데…….”

“…….”

“어때요, 백 선수?”

무슨 꿍꿍이인지.

레온하르트 악셀은 요한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크로비스의 미간을 꿈틀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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