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인가.’
그래.
그때 느꼈던 ‘눈빛’이 착각이었다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바티하고 디에고가 어울려 주니까 지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나?”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다.
“스타는 무슨.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어. 다리 벌려서 그 자리 차지한 주제에, 기세가 아주 좋단 말이지.”
마드리드에 도착한 다음 날이자 경기가 열리기 전날인 수요일 오후.
요한은 저를 향해 뱉어 낸 누군가의 말을,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42화
“그럼 지금부터 ‘조끼 팀’을 발표하겠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영국 런던의 날씨와 달리, 화창하기 그지없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9월.
드디어 목요일인 내일 저녁,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마드리드 CF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경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마드리드 CF의 홈구장인 챔피언 스타디움에서 훈련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런던 FC의 팀원들을 향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런던 FC의 수석 코치를 맡고 있는 도미닉 코비였다.
비록 비공개 훈련이긴 하지만, 이곳은 적진(敵陣)인 마드리드 CF의 홈구장이었다.
자칫하다간 전력 유출이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조끼와 비조끼로 나누어 팀 훈련을 시행하는 까닭은, 그만큼 조지 웰비 감독이 현 런던 FC의 스쿼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
하나둘씩 조끼 팀의 이름을 부르는 코비 코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는 웰비 감독과 시선을 마주친 요한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마 내일은 백이 후보이지 않을까?]
[그렇겠지. 언론들도 예상 라인업에 백이 아닌 크로비스를 제로 톱으로 기용할 거라고 했으니까.]
[크로비스 자식, 오랜만에 선발이라 좋아하겠군.]
[좋아하다 못해 날뛰는 거 아니야? 큭큭.]
챔피언 스타디움으로 오기 직전, 호텔에서 동료 선수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아른거린다.
요한은 쓴웃음을 흘렸다.
1군 콜 업 이후 기적적으로 연속 골을 터트리고 있기는 했지만, 요한은 이제 막 1군에 데뷔한 어린 신예였다. 비록 조별 예선이라곤 하나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인 마드리드 CF와의 원정 경기에서의 패배는 뼈아픈 일. 경험이 부족하다 못해 전무한 요한을 선발로 기용하지 않을 거라는 언론의 예상이 주를 이룬 가운데, 팀 내 분위기 역시 비슷했다.
‘후보……일까.’
물론 요한 역시 한 번 오기도 힘든 챔피언 스타디움에서 선발로 나서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후보 선수여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면 되니까.
요한은 모두의 예상대로 조끼 팀에 디에고와 바스티안을 언급하며 마지막 공격진만을 남겨 둔 코비 코치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
……뭐?
“이상이 조끼 팀이고, 나머지가 비조끼 팀이다. 그럼 조끼 팀은 좌측으로 모여!”
코비 코치는 열한 번째 선수를 알려 준 뒤 좌측으로 몸을 틀었다.
요한은 스물다섯 명의 원정 소집 인원 중 저를 제외한 열 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발을 떼는 것을 지켜보다 무의식적으로 남은 열네 명의 선수 쪽을 흘긋거렸다.
‘……!’
그런 요한의 시선 끝에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지만 ‘이봐, 뭐 해? 안 와?’ 하고, 그를 부르는 디에고의 외침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내일 있을 경기에서 요한의 선발 가능성을 두고 그들은 총 세 가지 반응을 보였는데, 먼저 첫 번째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요한이 빅 경기를 제대로 치러 낼 것인가에 대한 염려였다.
“연속 골을 터트린 건 사실이지만 챔스 같은 큰 경기에, 그것도 마드리드 놈들을 상대로 이제 막 콜 업 된 신예를 기용하다니. 조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꼬맹이, 긴장해서 제대로 뛰긴 할까?”
“설마 잘해야 비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원정에서 이겨야 유리한데…….”
두 번째는 요한을 옹호하며 웰비 감독의 선택을 지지하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의외로 잘할 수도 있지.”
“프랭키 말이 맞아. 축구는 나이가 아닌 실력으로 하는 거니까.”
“백보다 많은 골을 넣는 녀석이 현재 우리 팀에 없지 않나?”
그들은 주로 리케 프랭크 주니어와 바스티안 랄프, 그리고 디에고 가르시아 등의 주전급 선수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디에고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백보다 잘나든가, 아니면 조지한테 직접 말을 하든가.’라며 걱정과 불만을 토로하는 동료들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뱉어 냈다.
그리고 다른 세 번째 반응은―
“…….”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다.
요한은 훈련을 마친 뒤 챔피언 스타디움 경기장 내에 위치한 샤워실로 들어온 이후 죽일 듯이 저를 노려보고 있는 몇몇 이들의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요한에게 불편함을 안겨 주는 이들은 주로 장 크로비스 주니어와 그의 절친한 동료들이었다.
전날인 화요일 새벽까지 레온하르트 악셀과 침대 위를 뒹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번째 경험인 데다 레온이 뒤처리를 완벽하게 해 준 덕에 후유증이 덜했다. 하여 어렵지 않게 트레이닝도 소화할 수 있었고, 내일 있을 경기에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딱 한 가지가 신경 쓰인다.
그것인즉, 다름 아닌 그의 오른쪽 사타구니 주변에 새겨진 작은 키스 마크였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집요하게 그 부위에 입술을 맞추었던지라 옆에서 샤워를 하는 다른 동료들이 꼭 그 부위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대충 씻고 나가야겠군.’
요한은 간단하게 샤워를 마무리 지은 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야, 애인이 엄청 정열적인가 봐?”
그때였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밖으로 나가려던 요한을 향해 옆자리에서 몸을 씻고 있던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말을 건넸다. 크로비스의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커서 주변 동료들이 ‘애인?’이라든가, ‘누구 애인?’ 하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요한은 제 사타구니 쪽을 주시하며 씩 웃는 크로비스를 무심하게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섰다.
“이봐, 내 말 씹는 거야?”
그런 그의 등 뒤로 불만에 찬 크로비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요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장 크로비스 주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편하기 짝이 없던 프랑스 출신의 크로비스와는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자신을 보는 눈길이 노골적인 ‘적의(敵意)’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들로 인해 요한은 타인에게 이유 없는 애정을 베풀지 않았다. 상대가 저를 좋아한다면 저 역시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가차 없었던 것이다.
하여 크로비스와는 콜 업 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날 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텔을 전세 냈다고? 어쩐지 숙박객이 없더라.”
“올해 첫 해외 원정 경기인데 당연하지. 게다가 구단주님 호텔이잖아. 우리의 위대하신 구단주님께선 선수들의 편의를 매우 잘 봐주시지!”
“식사는? 이번 원정엔 전담 셰프들도 같이 왔다던데?”
“난 패스. 마드리드 음식은 딱 내 입맛이어서, 나가서 먹으려고.”
마드리드 CF의 홈구장에서 런던 FC 팀이 머무는 호텔까지는 불과 30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반 아드리치 소유의 호텔인 ‘인터내셔널 폴라리스 마드리드’에 들어서자마자 선수들은 저녁 식사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런 그들의 뒤를 따르며 생각에 잠겼다.
‘안에서 해결해야겠군.’
보통 경기 전날의 선수들은 세계에서도 인정받은 팀의 전담 요리사가 만들어 주는 영양 가득한 식사를 하곤 하는데, 새로운 나라에 들를 땐 가끔 허락을 받고 외출을 하기도 했다.
마드리드에 자주 온 편이 아니기에 이곳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요한은 실내파들과 함께 호텔 내에서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요한, 우리도 시내로 나갈까?”
그런 요한의 생각을 바꾼 사람은 그의 옆에서 발을 맞추며 걷고 있던 바스티안 랄프였다.
“시내……요?”
호텔 15층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요한은 빙긋 웃는 바스티안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바스티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드리드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 있지. 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이야. 코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라고, 새끼돼지 통구이가 정말 맛있어.”
“아.”
“아마 디에고는 권해도 욕부터 뱉어 낼 테니, 우리 둘만 가는 게 어때?”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제게 묻는 바스티안을 보자니 왠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 런던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안나마리아가 떠올랐다. 요한은 잠시 고민하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는 거다?”
“……예.”
“그럼 잠깐 로비에서 기다려. 난 잠시 위에 올라갔다 내려올 테니.”
요한은 그런 바스티안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인 후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런던 FC가 전세 낸 호텔의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숙박객이 팀의 관계자들이나 선수들밖에 없으므로 비교적 한산한 로비 소파에 털썩 앉은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쪽이 나를 이용해 줬으면 좋겠어. 섹스 프렌드로 말이야.]
어제 아침에 들었던 말이 아직까지 잊히질 않는 걸 보면 그 말에 꽤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훈련에 매진하느라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훈련을 하지 않을 때는 이렇게 드문드문, 그가 뱉어 낸 음성들이 귀를 점령하곤 했다.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를 이용해도 된다니.
‘……이상한 남자.’
황당해하는 자신을 보고도 제 태도를 고수하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말이 불현듯 떠올라 요한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어이가 없군.”
……?
자신이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리는 건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한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요한은 소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감독도 모자라 이젠 동료한테까지 손을 뻗는 건가.”
그러자 제 뒤편에서 그를 노려보고 서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한 명은 장 크로비스 주니어,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와 유독 붙어 다니는 에런 레이스였다.
요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치지도 않는군.
“무슨 일이십니까?”
“너 말이야, 동양인!”
“…….”
요한은 일부러 저를 ‘동양인’으로 불러 대는 크로비스를 내려다봤다.
크로비스는 182센티인 요한보다 약 5센티 정도 작았는데,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는지 인상을 쓰고 있는 요한을 죽일 듯 응시했다.
“바티하고 디에고가 어울려 주니까 네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나?”
“예?”
“스타는 무슨.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어. 다리 벌려서 그 자리 차지한 주제에, 기세가 아주 좋단 말이지.”
요한은 신랄한 크로비스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의 경험상,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오는 상황에서는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계속 함께 지내야 하는 동료였기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으려 했다.
“크로비스 선배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다 들었어. 네가 리저브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들.”
리저브?
“너, 잭콜한테 외면당한 게 그 자식을 더 이상 빨아 주지 않아서였다며?”
……뭐?
“다리를 벌리다 안 벌리면 당연히 기용을 안 하지. 내가 잭콜이라도 그러겠어. 잘 먹던 사탕이 갑자기 사라지면 기분이 나쁘잖아? 아, 그러고 보니 네 에이전트가 그 유명한 앨리슨 디어랬나?”
두근.
“이봐, 그렇게 잭콜한테 다리 벌려서 네 자리를 요구하기 싫었으면, 디어라도 바치지 그랬어? 그럼 잭콜도 2년씩이나 널 썩히진 않았…….”
퍽!
“악!”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 나가던 크로비스는 갑자기 날아온 주먹을 피하지 못한 채 쾅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43화
“이 개자식! 내가 널 가만둘 줄 알아? 가만히 둘 것 같냐고!”
부드득 이를 갈며 소리치는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외침이 귓가로 흘러들어 왔지만 요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크로비스의 왼쪽 눈두덩엔 짙다 못해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는데, 꼭 주먹 자국 같아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자. 진정해, 진정.”
“진정? 코치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어허, 알 만한 사람이 대체 왜 그래. 잠깐 이리 와 봐.”
“이거 놓으…… 젠장, 놓으라고요!”
크로비스는 방에 들어온 이후 입도 벙끗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요한에게 달려들려는 듯 도미닉 코비 코치의 팔을 뿌리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코비 코치에 의해 방을 나서게 된 크로비스는 여전히 호텔 복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지만, 요한의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
20분 전, 호텔 로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전해 들은 조지 웰비 감독이 긴 숨을 내쉬며 요한을 불렀다. 그제야 바닥을 응시하며 가라앉아 있던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웰비 감독을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길래…… 크로비스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어?”
웰비 감독은 여전히 멈출 줄 모르는 고함을 내뱉고 있는 룸 밖을 흘긋거리며 요한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으로 불려 온 이후 내내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요한의 눈동자가 살짝 일렁였지만 곧 제자리를 찾았다.
“이봐, 백. 그렇게 입만 다물고 있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야. 말을 해야 도와주지.”
“…….”
“크로비스가 또 시비를 걸었나? 그래서 그런 거야?”
“…….”
“하아, 진짜. 전세를 안 냈으면 어쩔 뻔했어. 기자들이 네가 크로비스를 가격하는 걸 목격이라도 했다면……. 어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
“백, 뭐라고 말 좀…….”
“감독님.”
“어? 어!”
“로비에서 있었던 일은, 크로비스 씨에게 직접 여쭤 보십시오.”
“……뭐?”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컨디션이, 별로 안 좋네요.”
“……!”
놀라는 웰비 감독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요한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문고리를 잡았다.
“너, 너!”
그러고는 막 밖으로 나오는 제게 씩씩거리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크로비스를 노려봤다.
“윽!”
장 크로비스 주니어는 서늘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요한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몸을 움찔거리며 인상을 썼다. 요한은 그런 그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이봐, 장. 너 백한테 무슨 실수라도 한 거 아니야?”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코비 코치가 묵묵부답인 요한에게서 시선을 돌려 크로비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크로비스가 팔짝 뛰었다.
“실수라뇨! 코치님, 제가 대체 무슨 실수를 했다는 겁니까? 에런한테 물어보십시오! 저 녀석이 다짜고짜 제 얼굴을 가격했다니까요?”
“……하아, 백이 그럴 리가 있나.”
“코치님!”
“계속 시끄럽게 굴면 CCTV 확인해 보는 수가 있어.”
“……!”
“이쯤에서 그만해. 백, 너도 그만하고.”
“…….”
“내일 경기 있는 거 알지? 감독님한테는 내가 알아서 잘 얘기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예.”
“코치님!”
“그만. 빈말이 아니라 정말 CCTV 확인해 본다? 그러길 원하나? 그러길 원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는 코비 코치의 말에 일언반구조차 못 한 크로비스는 ‘제기랄!’ 하고 거친 욕설을 흘리더니 홱 몸을 돌렸다.
만일 코비 코치의 말대로 CCTV를 확인해 본다면 조금 전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런던 FC의 코치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선수들 간의 사소한 마찰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요한이 입을 다무는 것을 묵과하는 것도, 크로비스가 길길이 날뛰다가도 더는 요한에게 달려들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코치진은 자신들의 짐작이 현실이 되었을 때를 걱정하는 것이다.
혹시나 이번 일이 언론의 귀에까지 흘러들어 가게 된다면 귀찮아질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 그것을 염려하는 거겠지.
한없이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냉정하기 그지없는 프로의 세계에 코웃음이 흘러나온다.
한편으론, 저 역시 이번 사건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크로비스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코비 코치에게 묵례를 한 뒤 크로비스가 걸어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참지 못했다.
웬만해서는 참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제 방으로 돌아온 요한은 입술을 짓눌렀다.
[그렇게 잭콜한테 다리 벌려서 네 자리를 요구하기 싫었다면, 디어라도 바치지 그랬어?]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적지 않은 인종 차별을 당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을 쉽게 믿는 편이 아니었으나 한번 제 사람이라 생각하면, 끝까지 믿는 편이었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일들은 자주 있어 왔기에 이제 조금 무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로비스가 가족들을 제외하고 가장 믿는 사람 중 하나인 앨리슨 디어를 언급하는 순간 요한은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저도 모르게 크로비스를 향해 주먹을 날린 것이다.
물론 호텔 로비에서 일어난 사건은 요한의 이미지를 생각한 구단 관계자들의 입막음 덕분에 밖으로 퍼지지 않았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지탄받아 마땅하나, 실은 요한이 크로비스를 가격한 것도 고작 한 대뿐이었다. 하필이면 요한의 주먹이 크로비스의 눈에 정통으로 꽂히는 바람에 과장되게 보인 것이다.
요한과 크로비스가 직접적으로 화해하지는 않았지만 크로비스가 더 이상 로비에서의 일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다음 날인 목요일.
요한은 예정대로 오후에 치러진 마드리드 CF와의 조별 리그 1차전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팀 분위기가 뒤숭숭하기는 했으나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요한은 가급적 제 기분을 플레이에 동화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전반 초반까지는 런던 FC의 흐름이었다.
골키퍼인 조나단 리드의 롱 패스를 하프라인 근처에서 받은 디에고 가르시아가 앞서 나가던 바스티안 랄프에게 패스했고, 바스티안은 페널티 에어리어 쪽으로 쇄도하는 요한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요한이 넘어지듯 점프하며 달려오는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댄 순간 공이 골망을 갈랐고, 런던 FC는 전반 10분도 채 되지 않아 선제골을 터트렸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완벽했다.
삐이익!
“……!”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하고 난 후 다시 재개된 경기에서 요한은 상대팀 골키퍼에게 무리한 태클을 가했고, 그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본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주심의 손에서 나온 카드는 놀랍게도 새빨간 레드카드.
‘그 뒤부터였군.’
어떻게 경기장을 나서서, 어떻게 런던행 비행기를 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저를 향해 들던 주심의 레드카드와 사색이 된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동료들, 그리고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원정 팬들이 보내는 비난의 눈빛들뿐이었다.
쾅쾅쾅! 쾅쾅쾅!
“요한! 요한 거기 있지? 안에 있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인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요한을 비롯한 런던 FC의 선수들은 하루의 휴식을 부여받았다.
요한은 히드로 공항에 밤 비행기로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씻지도 않고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조금도 제자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쾅쾅쾅! 쾅쾅쾅―
“요한! 요한!”
어젯밤 경기를 TV로 지켜봤을 것이 분명한 안나마리아가 줄곧 그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요한은 지이잉,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녀가 어떤 말을 꺼낼지 알기에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안나마리아는 전화를 받지 않는 요한이 걱정됐는지 아예 집으로 찾아와 문까지 두드리며 계속해서 ‘퇴장 한 번 정도는 괜찮아!’ 하고 그를 위로하기 위한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요한은 쓰게 웃었다.
‘한 번이라.’
축구 선수가 경기를 치르다 경고를 받는 일은 허다했다. 상황이 거칠어지거나 흥분했을 때 바로 레드카드가 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요한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상대팀 골키퍼였던 마르코 알레에게 취했던 행동이다.
드리블을 하며 마르코 알레에게 달려가던 요한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숨이 컥 막혔다. 마르코 알레의 눈이 마치 장 크로비스 주니어를 연상시킬 만큼 짙은 갈색이었던 탓에,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어 버렸다.
제가 생각해도 무리한 태클이었다. 스터드를 든 채 돌진했던 터라, 곧장 레드카드가 나온 것에 대해 항의할 수도 없었다.
주장인 프랭키가 요한의 등을 두드리며 걱정 말라는 말을 해 주기는 했지만, 밤 비행기에 올라타 있던 내내 동료들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사심을, 경기에 녹여 버린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에 불쾌감이 치밀어 오른다.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뱉어 낸 그 말이 이렇게도 크게 남아 있을 줄이야. 경기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 알았다면, 한 대가 아니라 흠씬 더 두들겨 패 줄 걸 그랬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던 안나마리아가 지쳤는지, 더 이상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을 시작했다. 그는 눈을 아래로 내려 액정을 살폈다.
‘…….’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인물이 전화를 걸어 대고 있었다. 요한은 ‘사기꾼’이라 적힌 핸드폰 문구를 무심하게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다시 흘렀을까.
하늘 위에 떠 있던 태양이 지고 달이 서서히 차오르려 할 때, 요한은 누워 있던 소파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들었다. 안나마리아가 보낸 수십 통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 외에도 그를 염려한 수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보내 온 게 보였다.
요한은 그중에서 안나마리아에게 ‘난 괜찮아.’라는 문자 한 통을 보낸 뒤 외투 하나를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스위트룸이요?”
“네. 있습니까?”
“아…… 예!”
평소 운전을 잘 하지 않는 요한은 앨리슨 디어의 차를 얻어 타거나, 혹은 안나마리아가 대학교를 갈 때 그녀의 차를 같이 이용했다.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직접 차를 몰고 예의 장소에 들렀다.
큰 키의 요한이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나타나 불쑥 카드 하나를 내밀자 의아한 표정을 짓던 호텔의 리셉셔니스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빙긋 웃으며 카드 키를 내미는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그것을 받아 들고 31층으로 올라갔다.
룸 안에 들어선 요한은 침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째깍째깍.
그가 앉아 있는 사이,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 것은 정확히 자정을 10여 분 남겨 둔 시점이었다.
요한은 테이블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흘긋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천천히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칵!
“하아, 하아.”
문을 열자마자 거친 숨을 터트리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뛰어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는 제 앞에 서 있는 요한을 바라보기 위해 몇 번이나 침을 삼키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