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대체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하고.
“후우.”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달은 지고 새로운 태양은 언제나 뜬다.
비록 어제, 아니 오늘 새벽, 그렇게 충격적인 일을 겪었을지언정 레온하르트 악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소리.
자신과 사귀지 않겠다고 말했던 요한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를 보내 주기엔 현재의 레온하르트 악셀이 요한에게 품는 감정이 남다르다.
1초, 2초.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갈수록 커져만 가는 이 마음을 저지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러지 못하니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악셀…… 씨?”
꿈 같은 정사를 곱씹으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쓸쓸하다 못해 황량함을 느끼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눈으로 요한이 하품을 하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깼나?”
“예.”
“몸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는 마치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겁니까?’ 하고 묻는 듯한 요한을 향해 빙긋 웃더니 발코니로 선뜻 나서지 않고 방 안에 서 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눈을 떴으니 새벽에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할 수 있겠군.”
“네?”
“일단 앉아.”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좁히는 요한을 근처 테이블로 데려간 후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새벽에 했던 이야기라뇨? 그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된 거 아닙니까?”
요한 백이라는 청년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거지만, 그는 꽤 직설적인 편이었다. 레온하르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뜸 제 말부터 내뱉는 요한의 쪽빛 눈동자엔 의문이 가득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요한을 보며 밤새도록 생각했던 말을 꺼내기 위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쪽은 그랬겠지만, 난 아냐.”
“무슨 뜻이죠?”
“요한.”
“……?”
“내게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건 어때?”
요한에게는 미안하지만 애석하게도 레온하르트 악셀은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지난 과오(過誤)가 있기에, 지금 당장 요한에게 애인이 되어 달라고 매달릴 순 없다. 그러나 깨어진 신뢰를 완벽히 회복한다면 그런 요구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깨어진 신뢰를 어떻게 회복하느냐인데,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는 요한은 웬만한 일로는 그에게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회복할 기회요?’ 하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 요한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회복할 기회. 그것도 안 된다면 그쪽 곁에 있을 수 있는 여지라도 남겨 줘.”
“…….”
“난 그쪽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
“악셀 씨.”
“일단 들어 봐. 듣고 판단해.”
“…….”
해서 레온하르트는 우회하기로 했다.
직진이 통하지 않는 사내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
그에게 자신의 매력을 선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쓴웃음을 흘린 요한은 냉랭한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제가 던진 미끼에 약간이라도 반응하는 요한을 보며 옅은 미소를 흘린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쪽이 나를 이용해 줬으면 좋겠어.”
“뭘, 이용하라는 거죠?”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일렁였다.
보다 확실하게.
보다 대담하게.
보다 노골적으로.
“섹스 프렌드로 말이야.”
40화
“제정신이…… 아니군요.”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던 요한이 겨우 소리를 냈다. 그럴 거라 예상했지.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그러다 다시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요한을 응시했다. 요한은 차갑고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너무도 제정신이야.”
“악셀 씨.”
“그쪽이 말했던 대로 평범한 사람들은 가끔 참을 수 없는 욕구에 백기를 들 때가 있지. 그럴 때 나를 이용하라고 하는 게,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후우. 이보십시오, 악…….”
제 말을 끊으려는 요한을 손을 들어 저지한 레온하르트가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쪽과 같은 건장한 선수들은 성욕이 넘치다 못해 흐른다고 들었어.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면 같은 업계에 종사하거나 정말 체력이 좋은 상대여야겠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쪽 업계는 꽤 빡빡하다던데……. 그렇다면 체력이 좋은 상대를 만나야 하지 않겠나?”
“…….”
“그러니 내가 나쁜 선택은 아닐 거야. 그쪽은 나 정도 체력이 되는 사람 아니면 함께 어울려 주기도 힘들다고.”
“……하.”
레온하르트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토해 내는 요한에게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를 이용해. 그쪽의 섹스 프렌드로.”
제가 생각해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오늘처럼 얼굴에 철판을 두른 적이 또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헛웃음을 삼키며 요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운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고 있던 요한이 한숨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악셀 씨가 얻는 게 뭡니까?”
“모르겠어?”
요한이 경계를 가득 담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레온하르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네 곁에 있을 수 있잖아.”
“……!”
흔들린다.
요한의 눈동자가, 거칠게.
‘괜찮은 반응인걸.’
동요하는 것이 분명한 그 리액션에 속으로 웃음 지은 레온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한번 무너져 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건 쉽지 않겠지. 그쪽처럼 철벽을 두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쯤에서 안 되겠다 물러나겠지만…… 난 달라.”
레온하르트의 녹안이 푸르게 일렁였다.
“난 그쪽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이미 여기, 들어와 버렸거든.”
콕콕,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레온하르트가 싱긋 웃었다. 요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내게 남은 선택은, 그쪽 곁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밖에.”
레온하르트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흔들리던 요한의 눈동자가 가라앉는다.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흥분하던 요한의 얼굴이 이내 원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하르트는 어느덧 태양이 중천에 뜬 하늘을 힐끔거리더니 요한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진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섹스 프렌드라도 괜찮아. 대신 그쪽 곁에만 있을 수 있게 해 줘.”
“…….”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해.”
견고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든 두드리려 할 때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인즉-
‘몸부터 함락시키는 거지.’
레온하르트 악셀은 제 말을 듣고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요한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는 이내 주저 없이 그의 집을 나섰다.
* * *
“마사 씨.”
“오, 악셀 씨 왔어요? 여기.”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참, 그거 알아요?”
“……?”
“요즘 악셀 씨 덕분에 우리 가게가 아주 발 디딜 틈이 없어.”
“예?”
“레온하르트 악셀의 단골 신문 가게라고 소문났거든. 호호호!”
활짝 웃는 마사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단골……이라.’
그런 말이 나올 정도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요한과 밤을 보낸 그날 이후 며칠이 더 흐른 오늘이 9월 21일이니 매일같이 신문을 구입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을 향해 간다. 그동안 출근을 할 때마다 이곳에 들러 신문을 구입했으니 그러한 소문이 퍼질 만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잘 읽어요!’ 하고 퀸 레베카 시어터 쪽으로 몸을 돌리는 마사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후 다리를 뻗어 나갔다.
“악셀 씨, 출근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악셀 씨!”
“좋은 아침입니다, 악셀 씨!”
신문을 읽을 시간에 공연의 대본을 읽는 게 훨씬 유익하다 여기는 레온하르트는 습관적으로 구매한 예의 정론지를 팔 사이에 끼운 채 퀸 레베카 시어터 안으로 들어섰다.
금요일이니만큼 마티네와 저녁, 두 번의 공연이 펼쳐질 퀸 레베카 시어터는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는 스태프들로 붐볐다.
“스티브는?”
“아, 아직 안 오셨어요.”
“극장주실에 가 있을게.”
“네, 알겠습니다!”
저녁 공연의 주인공임에도 레온하르트가 오전부터 일찍 극장을 찾은 까닭은, 얼마 전 있었던 공연 펑크 사건에 대해 뮤지컬 의 극장주이자 제작자인 스티브 위버와 피해 보상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스티브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던데. 금요일, 어때? 괜찮아?]
하필 오늘로 약속 날짜를 잡은 탓에 늘어지게 늦잠도 못 자고 일찍부터 공연장에 나타난 레온하르트를 보며 뭇 스태프들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아랑곳 않고 유려한 미소를 빛낸 뒤 극장주실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직 스티브 위버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노크 직전 한 번 더 말을 건넨 레온하르트는 닫혀 있는 극장주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웨스트엔드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퀸 레베카 시어터의 오너실답게 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진열대 안에서 수많은 상패들이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걸 본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저 상패들 중 몇 개는 그와 이안의 합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흘린 후 근처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팔에 끼워 두었던 예의 신문을 펼치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어젯밤 마드리드에서 경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공연 이후 뒷정리를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지만, 이안 키스트가 길길이 날뛰던 모습이 생생했다. 레온하르트는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신문의 1면을 살폈다.
<런던의 떠오르는 별, 벌써 Burn-Out?>
그런데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 안으로 들어온 사진은 그의 상상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번 아웃?’
레온하르트의 시야 속, 등 번호 39번의 흑발 청년은 경기의 주심으로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붉은색 카드를 받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힘없이 아래로 처진 그의 어깨가 어찌나 신경 쓰이는지, 레온하르트 악셀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신문을 구길 뻔했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레온하르트는 다음 장을 펼쳤다. 예의 기사를 읽기 위해서였다.
<런던의 떠오르는 신성(新星), 힘없이 무너지다!>
지난밤, 스페인 마드리드 챔피언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드리드 CF와의 유럽축구연맹(UFFA) 챔피언스 리그 B조 1차전 경기에서 시즌 아웃된 마이크 비츠(29)를 대신해 런던 FC의 주전 공격수로 떠오른 요한 백 필립(20)이 무너졌다.
선발 출전한 백-필립은 동료인 바스티안 랄프(28)와 디에고 가르시아(27)의 환상적인 연계 플레이에 이어 전반 07분, 선제골을 기록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알렸다.
그러나 이어진 전반 10분, 무리한 드리블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을 파고들던 백-필립은 마드리드 CF의 골키퍼 마르코 알레에게 태클을 가하면서 주심으로부터 레드카드를 얻었다.
이른 시각 주전 선수를 잃은 런던 FC의 기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경기의 형세는 마드리드 CF 쪽으로 넘어갔다. 백-필립의 퇴장 이후 5분도 채 되지 않아 동점 골을 헌납한 런던 FC는 연이어 터진 연속 골로 인해 결국 2 대 1의 역전패를 당했다.
이에 따라 런던 FC는 다음 달에 열릴 B조 2차전 경기에 팀의 메인 공격수를 또다시 출전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골을 넣어 줄 스트라이커의 부재에 대해 고민해야…….
“퇴장?”
찬찬히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요한에게 ‘섹스 프렌드’ 제안을 한 이후 사흘 정도가 흘렀지만 줄곧 연락하지 않았던 까닭은 단 한 가지였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뭘 그리 기다려?]
[조용히 해.]
[어?]
[그러다 전화 소리 못 들으면 안 되니까.]
[……뭐?]
요한이 결심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선언해 놓고, 매일같이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던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해하는 이안에게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젠장.
마음 같아서는 생각할 시간 따위 주지 않고 어떻게든 들이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지은 죄가 있으니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퇴장당했다는 기사를 보니 정신이 회까닥 뒤집힌다.
레온하르트는 얼른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빌어먹을.”
안 받는군.
하지만 핸드폰 너머에서는 뚜뚜,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만 들릴 뿐 요한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잘근 깨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극장주실을 나서려 몸을 돌리는데,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극장주 스티브 위버가 보였다.
“어? 악셀, 일찍 왔네?”
“스티브, 미안한데 지금 제가……!”
스티브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을 나서려던 레온하르트는 스티브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랜만이지, 미스터 악셀?”
스티브 위버의 뒤로, 런던 FC의 구단주인 이반 아드리치가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41화
“대체 어떻게 구워삶으신 겁니까? 이 녀석을 퀸 레베카로 데려온 건 저지만, 몇 번이나 광고를 찍어 달라고 사정을 해도 귓등으로 흘려듣던 녀석인데 말이죠. 웬만한 거금을 쥐여 준대도 끄떡도 안 하길래 이쪽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메인 모델을 한다고 해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하,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스티브 위버가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렸다. 그 시선에 레온하르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온하르트를 뮤지컬 의 주인공으로 지목한 스티브는 공연을 올리기 직전, 인지도가 미미한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몇 번이나 시계, 혹은 의류 광고의 모델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레온하르트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안 해.]
[뭐?]
[안 한다고요. 배우가 공연으로 말을 해야지, 굳이 광고를 찍을 필요 없잖습니까?]
[아, 악셀!]
[안 합니다. 몇 번을 말씀하셔도 안 해요.]
퀸 레베카 시어터의 오너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스티브 위버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을 회유해 광고를 찍는 것이 작품 흥행에도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고, TV 프로그램에 나가 공연 홍보를 하라는 이야기도 흘렸다. 그래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직접 불러 면전에 대놓고 협박까지 한 전적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죽일 듯이 저를 노려보는 스티브의 시선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 이반 아드리치가 수긍한다는 듯 두어 번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통 분은 아니더군요, 미스터 악셀은. 저 역시 몇 달 동안이나 모델로 섭외하기 위해 매달렸습니다.”
“아, 그러셨나요?”
“예!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오더군요. 미스터 악셀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요.”
“흐음, 그랬……군요.”
“하하! 덕분에 저희 구단에도 일명 ‘소녀 팬’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소녀…… 팬?”
“위버 씨는 모르십니까? 미스터 악셀은 영국 내의 어린 소녀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습니다. 런던에 연고지를 두지 않은 다른 지방의 소녀들까지 시즌권을 끊겠다고 문의를 해 와서, 요즘 저희 직원들이 매우 바쁩니다. 하하하하!”
“……그랬……군요.”
Too Much Information.
굳이 안 해도 될 이야기까지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차갑게 가라앉힌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극장주실이 떠나가도록 웃음을 흘리는 사람은 런던 FC의 구단주뿐이라는 사실이 레온하르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드리치가 떠나면 한 소리 하겠군.’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리.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상사’나 다름없는 극장주와 자신을 고용한 광고주와의 합석으로 인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다.
레온하르트는 아드리치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저를 노려보는 스티브의 눈길이 심상찮아 일부러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아드리치 씨.”
“응?”
“제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부탁? 아아! 그렇지.”
슬슬 화제를 돌려야 스티브의 뜨거운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긴 레온하르트가 빙긋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낮게 탄성을 터트린 아드리치가 스티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례지만 미스터 위버, 혹시 내일 미스터 악셀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뭐?
“내일이요?”
놀라는 스티브와 레온하르트를 향해 아드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미스터 악셀의 공연이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괜찮으시면 일정을 바꾸어 오전에 잠깐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따른 금전 문제는 저희 쪽에서 전부 해결할 테니, 고려 부탁드립니다.”
“……아.”
이미 지난 일요일, 배우 인생 처음으로 펑크를 낸 일로 인해 레온하르트는 스티브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오늘도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극장주실에 온 것이 아닌가. 그런 와중 들려온 아드리치의 말은 레온하르트는 물론 스티브 위버까지 당혹시켰다.
정중하다 못해 고상하기까지 한 아드리치의 제안이 왠지 모르게 걱정스럽다.
‘어째서?’
레온하르트는 이미 런던 FC의 메인 모델이고, 구단주가 원한다면 일정을 조율하여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요구는 무언가 수상쩍은 기분이 들었다.
스티브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아드리치 씨.”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스티브가 천천히 말을 꺼낸 것은 몇 초가 흐른 뒤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스티브의 질문에 이반 아드리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하고 길게 숨을 내뱉은 이반 아드리치가 곧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이틀 전, 런던 FC의 원정 경기가 열리기 전날인 수요일에 벌어진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 * *
[진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섹스 프렌드라도 괜찮아. 대신 그쪽 곁에만 있을 수 있게 해 줘.]
예전 같았다면 코웃음 치며 무시했을 발언이었다.
섹스 프렌드라니.
말도 안 된다.
물론 그 말을 꺼낸 남자와 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또다시 침대 위를 뒹군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요한은 오로지 ‘관계’만을 위해 누군가를 이용할 만큼 약은 성격이 못 됐다.
굳은 얼굴로 대답하지 않는 저를 보며 레온하르트 악셀은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란 말과 함께 사라졌지만, 요한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눈곱만큼도,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난 그쪽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이미 여기, 들어와 버렸거든.]
그럼에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 그 말을 꺼낸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놀라울 만큼 진지해서일까. 콕콕, 제 심장 쪽을 가리키며 말하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얼굴이 도통 사라지지 않아 요한은 입술을 짓눌렀다.
불쾌하군.
더는 그의 생각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은데 계속해서 머릿속을 잠식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더욱 불쾌한 것은 충동적으로 또다시 그와 관계를 맺고 이렇게 그 남자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였다.
‘대체 난, 뭘 하고 싶은 거지.’
요한은 좁혀진 미간을 쉽게 펴지 못했다.
“요한.”
그때였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 괜찮습니다, 바…….”
“어디 봐.”
“……!”
안색에 드리워진 어둠을 눈치챈 누군가가 요한이 저지할 사이도 없이 손을 뻗어 왔다. 요한은 제 이마 위로 손을 얹고선 ‘열 있는 거 아니야?’ 하고 묻는 보라색 눈동자의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설마 감기라도 걸린 거야?”
“…….”
“요한?”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티.”
요한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스티안 랄프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후우 숨을 내뱉은 바스티안이 요한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몇 번을 말하지만, 우리 같은 선수들은 무엇보다 컨디션 관리가 중요해. 체력이 없으면 모두 꽝이란 말이지.”
“어이, 그거 랄프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몸 안 좋으면 팀 닥터한테 바로 말해.’ 하고 친절하게 속삭여 준 바스티안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디에고 가르시아가 툭 말을 건넸다. 요한을 응시하던 눈을 돌린 바스티안이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디에고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뭐?”
“그렇게 컨디션 관리가 중요한 걸 아는 녀석이 허리 통증을 한 달이나 숨겨서 5주 아웃 선언을 받은 건가.”
“하하. 이봐, 가르시아. 그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땐 상황이 별로 안 좋았다니까? 나까지 아웃됐어 봐. 골은 누가 넣었겠어?”
“일주일이면 나을 통증을 5주로 늘린 게 잘못이지.”
“말은 바로 하자. 난 3주 만에 돌아왔다고.”
“그게 그거야. 그것보다 꼬맹이.”
“……예?”
“너, 랄프랑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너무 들러붙어 있지 마.”
레온하르트 악셀이 당혹스러운 제안을 건넨 날 오후, 요한을 비롯한 런던 FC의 1군 선수들은 목요일 저녁에 있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경기를 치르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하는 전용 비행기에 올라탔다.
얼마 전부터 함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파트너’ 바스티안 랄프의 손짓에 그의 옆자리에 착석해 있던 요한은 복도 하나를 건너 자리를 잡은 디에고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디에고는 ‘왜 애한테 겁을 주고 그래.’ 하며 하하 웃는 바스티안과 달리 가까이 오라며 요한에게 손짓하더니 긴장한 요한의 귀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 녀석, 생긴 건 뺀질해 보여도 의외로 동료들한테 인기 많아.”
“…….”
“저기 봐. 지금 네가 이 녀석 옆자리에 앉아 있어서 보내는 눈빛들.”
“……!”
요한은 공석인 그들의 앞자리와 그 앞자리보다 훨씬 더 앞의 좌석에서 자꾸만 저와 바스티안, 그리고 디에고 쪽을 힐긋거리고 있는 다른 동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에 입을 다문 요한을 보며 피식 웃은 디에고가 말을 이었다.
“무시무시하지? 그러니 훈련할 때 말고는 사적으로 어울릴 생각 하지 말도록. 어디까지나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니까.”
“이봐, 가르시아. 정말 요한이 진지하게 듣겠어.”
“신참이니 해 주는 말이라고. 난 귀찮은 소동에 얽히고 싶지 않거든.”
“하하, 요한. 가르시아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디까지나 널 골리고 싶어서 하는 말일 뿐이니까.”
바스티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가며 말했지만, 요한은 어쩐지 디에고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스치듯 보았던 앞 좌석의 동료들 중 누군가의 눈빛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괜찮아, 요한! 정말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하하하!’를 내뱉으며 그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바스티안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