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리고 여기 앉으세요.”
뭐?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애무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행동으로 레온하르트를 자극한 요한은, 그에게 명령했다. 레온하르트는 난데없는 그 말에 눈을 꿈뻑거렸다. 요한은 후우, 길게 숨을 내뱉은 후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브리프를 벗으려는 요한을 바라보다 떨리는 음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뭘 말입니까?”
요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자 레온하르트의 음성에 쇳소리가 섞였다.
“아니. 어째서 그쪽이…… 이, 일어나는 거냐고.”
설마, 일어서서 할 생각인 건가?
순간 끔찍한 기분이 들어 머뭇거렸다.
물론 안기기로 한 것은 자신이었다. 굳은 각오도 다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아직 요한이 제 손에서, 그리고 제 혀끝에서, 제 입 안에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것도 못 보게 할 생각은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피식 웃은 요한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어째서라뇨? 섹스하려고요.”
“……아!”
태연하게 노골적인 단어를 뱉어 낸 요한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탄식을 흘렸다. 요한은 한번 나간 영혼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억지로 폭신한 소파 위에 앉히더니, 차분하게 입고 있던 브리프를 벗기 시작했다.
‘헉.’
탄탄한 그의 허벅지 사이로 크고 굵은 요한의 것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내지르려다 가까스로 참아 냈다. 퀸스 호텔에서의 일은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아래에서 거친 신음을 흘렸던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흥분에 젖은 표정이라든가, 고통을 참기 위해 눈물을 글썽이는 요한의 모습은 선명한데 그의 아랫도리 부분은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람하기 그지없는 요한의 페니스에 긴장을 하게 된다.
내 입에 들어가기는…… 하려나.
‘내 안에는…….’
저보다 키가 작다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요한 백 필립은 꽤 좋은 체격의 사나이였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큰 거라고. 그리고 저 크고 우람한 것이 제 안으로 들어온다면 분명…….
‘찢어질…… 거야.’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어쩐지 호흡이 가빠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순간을 회피한다면 요한이 저를 두 번 다시는 봐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동요하던 레온하르트의 마음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처음 한 번이 어렵다.
언제나, 무엇이든,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한 번만 참고 받아들인다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할 거다.
레온하르트는 크게 심호흡한 뒤 소파에서 일어나 뒤로 앉으려 했다.
“뭐 하십니까, 악셀 씨?”
요한이 움직이려는 레온하르트에게 툭 말을 던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뒤로 도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왜요?”
왜긴.
“받아……들여야 하니까.”
꽉 악문 입술 사이로 한숨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요한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 잠깐. 지금 악셀 씨가 절, 받아들이시겠단 겁니까?”
“어?”
아니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던 레온하르트가 움찔거리며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의 반응에 풉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를 향해 다가왔다.
“헉!”
엉덩이를 들려던 레온하르트의 몸이 요한의 손길에 의해 다시금 소파로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거침없는 요한의 손이 레온하르트의 브리프 안으로 들어가 그의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탄성을 내뱉을 사이도 없었다. 그저 두 눈을 큼지막하게 뜨며 브리프 안에서 그것을 꺼내 드는 요한의 행동에 기겁하자 요한 백 필립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전 안는 법을 모릅니다. 이런 제가 당신을 안았다간 당신의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
“뭐, 당신이 괘씸해서 겁을 좀 주긴 했지만…… 안는 법을 모르니 일단 안기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요한은 넋을 놓은 레온하르트를 향해 명령했다.
“그러니 안으십시오.”
저를.
봐주지 말고.
어느덧 레온하르트의 허벅지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떼어 낸 요한이 우뚝 솟은 그의 페니스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큭!”
요한의 젖은 입구에 레온하르트의 기둥 끝이 닿자 온몸을 부르르 떨던 두 사람에게서 뜨거운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38화
“으읏!”
벌어진 구멍 안으로 페니스가 밀려 들어가자 그 위에 올라타 있던 남자의 입술 사이로 진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상을 쓰고 있는 요한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섹스는 분명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 만큼 즐겁고 환상적인 행위이거늘, 어째서인지 지금의 레온하르트는 상대의 얼굴을 주시하는 데 급급했다. 맨정신으로 여자 아닌 남자를 안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이제 막 귀두 끝이 들어갔을 뿐인데, 눈을 질끈 내리감는 요한을 보자니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현재 요한은 앉아 있는 레온하르트를 마주 본 채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요한의 딱딱한 물건이 아랫배를 꾹꾹 찔러 대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엉덩이를 살짝 든 요한이 자신의 페니스를 위에서 아래로 받아들이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많이 아, 아픈 건가?
거친 숨을 흘리는 그가 힘겨워 보여 걱정이 됐다. 특히나 제 것을 머금고, 제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는 것으로 보아 더더욱. 요한의 반응에 움찔하던 레온하르트는 그의 안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더욱 깊게 밀어 넣으려다 행동을 멈추었다.
“뭐 하는 겁니까, 악셀 씨.”
후우우, 숨을 내뱉으며 레온하르트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던 요한의 감은 눈이 번쩍 떠진 건 그즈음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위에 앉은 사람은 요한이었고, 빳빳하게 선 그의 페니스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요한이었지만 레온하르트가 어쩐지 행동을 멈추며 제 것을 그에게서 빼려 하자 요한이 인상을 썼다.
“어?”
레온하르트는 서늘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눈빛에 눈을 크게 떴다. 요한이 차갑게 물었다.
“대체 왜 빼려고 하는 겁니까.”
하얗고 반질반질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띄워진 모습이란, 실로 짜릿하기 그지없어 순간 깜짝 놀랐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저를 타박하는 것이 분명한 요한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게…….”
그쪽이 왠지 아파 보여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쉽게 나오지는 않는다. 레온하르트는 점점 가라앉는 요한의 눈빛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요한이 기다란 손끝으로 레온하르트의 턱을 툭 건드리더니 싸늘하게 명령했다.
“빼지 마십시오.”
“……!”
숨이 가빠 올 만큼 힘겨운 신음을 흘리던 사내답지 않게 요한의 푸른 눈동자는 매우 확고한 의지를 표하고 있었다. 그의 허리를 잡은 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처럼 노심초사하던 레온하르트가 당황할 정도로.
움직이라는 그 말에 머뭇거리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던 요한이 피식 웃었다.
“절 배려해 주시는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들어오세요. 다시는 저랑 섹스를 안 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럴 리가 있나!”
“…….”
“젠장. 자극한 건, 그쪽이야.”
난 이제 몰라. 내 몸이 감기로 인해 보통 때보다 훨씬 달아오른 상태라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어디 상대가 평범한 일반인의 체격이어야 말이지.
요한이 아무리 체력 좋은 운동선수라 해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다.
하여 배려를 해 주고 싶었던 건데, 본인이 그것을 거부한다면야…… 레온하르트 역시 주저할 생각 따위는 없다.
“흣!”
뒤로 빼려던 몸을 다시금 요한에게 밀착시키며 그의 허리를 잡은 레온하르트는 그간의 애무로 인해 촉촉하게 젖은 그의 입구를 향해 제 것을 밀어 넣었다. 끝에만 걸쳐져 있던 레온하르트의 것이 뿌리까지 들어차자 요한의 입술 밖으로 뜨거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욕설이 귀를 맴돈다. 그저 안으로 전부 넣었을 뿐인데, 금세 터질 듯 부풀어 오를 건 또 뭐람. 강약 조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페니스를 휘감아 버리는 요한의 안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레온하르트는 쿵쿵, 정신 없이 뛰는 가슴의 뜀박질 소리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런 그의 눈에 어떻게 해서든 통증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흑발 사내가 보였다.
‘아.’
땀에 흠뻑 젖어 뭉쳐진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뚝, 뚝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과도 같아서 숨이 막혔다. 가쁘게 내쉬는 숨결은 레온하르트의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고, 부르르 떨면서 제게로 천천히 쓰러지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만일 지금 이 순간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이미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게 된 레온하르트는 결코 눈을 돌리지 못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었다.
“흐읍!”
자신이 내뱉는 호흡이 감기 기운으로 인해 발생한 뜨거운 입김인 건지, 아니면 요한의 안으로 들어가서 흥분했기 때문인 건지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사실 하나만은 확실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매료됐다.
제 위에서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몸을 튕기고 있는 이 청년에게.
* * *
“읏, 흐으, 흐윽, 으으!”
신음을 내쉬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요한은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야릇한 소리를 냈다. 그로 인해 레온하르트는 흥분했고, 멈추지 않았다.
“하아, 또…… 하는 겁니까?”
“미안. 못 참겠어.”
“…….”
“힘든가?”
“아뇨, 또 할 수는 있…… 큭!”
요한이 허리를 튕기면 튕길수록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파에서 그를 붙잡고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욕실로 향하려는 요한을 다시금 붙잡았다. 욕실에서 2차전을 벌일 당시의 레온하르트는 그래,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벽면으로 요한을 밀어붙인 그는 끊임없이 요한을 갈구했고, 요한이 헉헉 거친 신음을 흘리며 스르륵 주저앉을 때까지 탐하고 또 탐했다.
“또……요?”
힘이 쭉 빠진 요한의 뒤처리를 해 준 후 그와 함께 침실로 장소를 바꾼 레온하르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무렇지 않게 레온하르트의 키스를 받아들인 요한은 슬그머니 손을 아래로 내리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를 향해 레온하르트는 극장의 높으신 분들에게나 사용하던 간절한 눈빛 공격을 시전했다.
“안…… 되나?”
“……하! 지치지도 않는군요, 악셀 씨는.”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
“그런 사람치고는 지금 몸이 많이 뜨겁습니다.”
“그래? 그래도…….”
“뭐, 하는 수 없죠.”
“……!”
“그러다 진짜로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 체온이라도 섞어야…… 하읏, 아직 말이 안 끝, 읍!”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훌륭했어.’
레온하르트 악셀이 침대 위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은 지 얼마나 됐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약 30분 정도는 흘렀을 것이다. 세 번의 섹스를 끝낸 후 매트리스 위로 털썩 늘어진 뒤 계속 초침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
[저 역시 체력은 뒤지지 않습니다.]
도발하는 자신을 향해 발갛게 얼굴을 붉힌 채 말하는 요한의 모습은 너무도 귀여워서 제 입술을 멋대로 씰룩거릴 정도였다.
레온하르트는 후후,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요하기 그지없는 새벽녘의 침묵을 즐겼다.
분명 오전에 자신이 눈을 떴던 침실을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계속 남아 있던 감기 기운은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뒤 사라진 지 오래.
감기에는 역시 운동이 제격이지.
피식 입꼬리를 올린 레온하르트의 요동치던 녹안이 돌연 차분해졌다.
그나저나.
‘이제…… 괜찮군.’
지난 며칠 동안 레온하르트 악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중요시하던 공연마저 소홀히 할 만큼 요한 백이라는 청년에게 완벽하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정신을 빼앗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그가 다른 사람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상황이 유독 더 만족스럽다.
레온하르트는 몇 분 전부터 조용히 말이 없는 요한 쪽을 힐긋거리며 빙긋 웃었다.
“악셀 씨.”
“이런. 안 잤나?”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안 주무십니까?”
사방이 칠흑으로 물든 새벽.
아직 동이 트지 않아 밖이 컴컴한 탓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는 침실 안엔 은은한 무드 등이 켜져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저를 바라보지도 않고 툭 말을 던지는 요한 쪽을 향해 낮게 말했다.
“잠이 오질 않는군.”
또다시 그를 안고 보니 확신이 든다.
시작은 황당했지만 앞으로 그를 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러세요?’ 하고 심드렁하게 말한 뒤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으려는 요한을 향해 돌아누웠다. 두근두근두근. 옅은 조명 사이로 비치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탐스러워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크게 하품을 한 뒤 다시금 잠을 청하려는 요한의 이불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악셀 씨.”
“응.”
“답답하니 좀 떨어지십시오.”
그를 껴안고 자면 왠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요한을 안으려 들자 요한이 허리를 휘감은 레온하르트의 손을 떼어 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깜짝 놀라면서도 이내 수긍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나도 잠결에 치근덕거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레온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요한에게 뻗었던 팔을 거두어들이고선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이, 오질 않았다.
슥.
‘응?’
“후우.”
몇 분이 지났을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있던 요한이 갑자기 홱, 그것을 내리더니 벌떡 일어나며 긴 숨을 흘렸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천장을 바라보며 실실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요한 쪽을 응시했다.
“안 자?”
“잘 수 있겠습니까?”
“뭐?”
“소리가 너무 큽니다.”
“무슨……!”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정확히 제 가슴을 가리키는 요한의 손가락질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쿵쿵. 쿵쿵.
확실히 요한의 신경에 거슬릴 만큼 레온하르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들썩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젠장.’ 하고 나지막하게 욕설까지 흘리는 요한의 음성에 긴장했다.
“미안.”
“뭐가 말입니까.”
“근래 내 심장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뛰고 있어서.”
온종일 레온하르트에게 안겨 뜨거운 땀방울을 흘린 요한이었기에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저 역시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하지는 않을 터였다. 괜히 머쓱해져 한마디 건넸더니 요한이 낮게 실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런 것 같았습니다.”
“…….”
“…….”
“저기…… 이봐.”
“예.”
“요한.”
“듣고 있습니다.”
쿵쿵쿵.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 말을 대체 어떻게 건네야 할지,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슬슬 꺼낼 때도 됐지.’
이런 새벽에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확답을 받고 싶었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에게 주의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며 조심스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 건가?”
그 말을 내뱉은 직후, 레온하르트 악셀이 예상한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요한의 성격이라면 ‘네.’라고 짧게 답변하거나 혹은 ‘그럴지도.’라고 의뭉스럽게 답변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당연한 거 아닙니까.’라는 되물음 정도겠지.
‘정식 데이트는 어디서 해야 하지?’
아무래도 두 사람의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사람들이 많이 없는 곳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스위스 여행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것도 아니라면 독일 내에 위치한 우리 가문의 별장을 빌리는 것도 괜찮고.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갔다.
그때였다.
“사귀다뇨?”
‘그럼요.’ 정도의 답변이 나온다면 왠지 기쁠 것 같다고 생각하던 레온하르트의 귀에 차분하고 냉정한 요한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악셀 씨와 사귀겠다고, 했습니까?”
39화
콩콩, 기분 좋게 울리던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뭐?’
레온하르트는 희미한 빛을 등지고 침대에 앉아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요한의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리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요한이 피식 실소를 터트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악셀 씨는 키스하고 섹스하면 다 사귀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군요. 의외입니다.”
낮고 부드러운 요한의 음성이 귀를 울렸다. 레온하르트는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요한은 하암, 길게 하품을 하더니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레온하르트는 나른해 보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한은 말문이 막힌 듯한 그를 힐긋거리더니 앉아 있던 몸을 다시 침대로 뉘이며 중얼거렸다.
“악셀 씨가 키스를 원해서 받아 준 것뿐입니다.”
“…….”
“솔직히 말해 조금, 흥분하기도 했고.”
“…….”
“참을 수 없는 인간의 욕망에 져 버린 결과군요, 지금 이 상황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와 악셀 씨 사이가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여전히 당신을 믿을 수 없거든요.”
요한은 계속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레온하르트는 ‘대답이 됐습니까?’ 하고 말한 뒤 아래로 내려갔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다시 끌어 올리려는 요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뭡니까.”
요한이 짜증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요란하게 떨렸다.
“싫다고…… 하지 않았잖아.”
[싫지는 않다고요, 당신이.]
그래, 분명 레온하르트 악셀의 기억대로라면 요한은 그렇게 말했었다. 싫지는 않았기에 레온하르트의 키스를 허락했고, 싫지는 않았기에 섹스까지 한 사이. 그럼 당연히, 정식으로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요한의 반응에 레온하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요한이 빙긋 웃었다.
“그랬었죠.”
“그런데 왜!”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좋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뱉어 낸 요한의 말에 그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요한은 멈칫거리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제게서 떼어 낸 후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었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확실히 레온하르트가 싫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싫지는 않다.’고 했을 뿐.
‘착각이라고?’
요한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온 그의 손가락이 매트리스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쪽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도 잘 수 있나?”
최후의 일격이라도 가하듯 묻는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악셀 씨와 이렇게 누워 있지 않습니까.”
“……가.”
“예?”
“내가, 깔려, 준다고도…… 했어.”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레온하르트가 요한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어깨를 으쓱인 요한이 대답했다.
“뭐, 그러셨죠. 깔리진 않으셨지만.”
“우린 두 번이나 같이 잤다고!”
“굳이 횟수를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 맞네요. 두 번.”
“그런데…….”
스슥!
“……!”
“그런데도 아직은, 아니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을 견디다 못한 레온하르트가 몸을 비틀어 요한의 위를 덮쳤다. 순식간에 그의 아래에 놓이게 된 요한이 무슨 짓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거칠게 일렁이는 레온하르트의 눈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젠장할.’
가슴의 박동이 기분 나쁜 울림을 전해 준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요한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에게 양손이 붙잡힌 요한은 조금의 동요조차 없이 오히려 담담하게 레온하르트의 흔들리는 녹안을 직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눈이 멀 것 같다. 레온하르트는 속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짓눌렀다.
“악셀 씨.”
“…….”
“당신의 마음은, 충분히 제게 전달됐습니다. 좋아한다는 그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니겠죠. 그래서 당신의 키스를 받아들인 거고, 한 번 더 관계를 맺은 겁니다. 하지만 교제는 엄연히 다른 문제예요.”
요한의 차분한 음성도 그의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그 상태로 요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한이 쓴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저는,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뜬금없이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요한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요한이 계속 말을 이었다.
“꽤 오래전에 경험한 일 때문이죠. 난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보통 때와 달리, 당신과는 빨리 친구가 됐어요. 그렇지만 그런 저를 속인 건 악셀 씨, 당신입니다.”
말 한마디에 호흡이 컥 막히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레온하르트는 멍이 들 정도로 꽉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이윽고 지독하고 담담한 음성이 그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제가 생각하는 교제란, 서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
“하지만 전 당신에게 그런 신뢰가 없어요.”
“…….”
“아마도 ‘흥미’로는 당신과 잘 수 있겠지만, 이런 상태로 사귀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
“후우.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내일을 위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버텼다가는, 악셀 씨한테 감기가 옮을 것 같아서요. 일단 한숨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죠.”
레온하르트는 대화의 끝을 알리는 요한의 발언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옆으로 돌렸다.
곧 털썩, 레온하르트의 등이 매트리스 위에 닿았지만 냉정하게 말한 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는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요한과 달리, 그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레온하르트 악셀은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 *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信賴)’가 중요하다는 것을, 레온하르트 악셀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먼저 저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가 그의 앞에 놓여 있다.
‘벌……이군.’
이건, 지독한 벌이다.
이토록 갈망하던 것이 있었나 싶을 만큼 간절히 원했던 것이 이제야 손에 들어왔다 여겼는데, 또다시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잠든 그를 깨워 다시 생각해 줄 수 없냐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고고한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천사처럼 잠든 그와는 달리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