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응?
“네가 다른 놈이랑 웃는 게, 기분 나빠.”
하지만 요한이 레온하르트에게 우산을 쥐여 주기 직전, 가쁜 숨을 흘리며 뱉어 낸 레온하르트의 말이 이어졌다. 요한은 뚝 행동을 멈추었다. 레온하르트의 말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상한 일이지. 그저 세리머니일 뿐인데…… 왜 네가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게 기분 나쁜 걸까.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나고, 어째서…… 불쾌한 거지.”
“…….”
“그래. 처음에는 그쪽한테 화가 난 게 사실이야.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었어. 그쪽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런데…….”
“…….”
“왜 자꾸, 네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지?”
후우.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요한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복수를 하지 못해서, 화가 난 건가.’
본인이 계획했던 자작극을 완벽하게 끝내기 전에 요한이 진상을 알아 버리는 바람에, 그의 계획이 뒤틀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충분했잖아.
요한은 입술을 짓눌렀다. 그러고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쳐다봤다.
“알고 싶어.”
“…….”
“그쪽이랑 바스티안 랄프, 대체 무슨 사이지?”
“…….”
“말해 줘, 제발.”
“중요한가요?”
“……뭐?”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가 당신한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명색이 프로라는 사람이, 이렇게 비를 맞고 서 있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눈앞의 사내를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요한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제게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괜히 더 흥분하게 된다.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묻는 제게 피식, 실소를 터트리는 레온하르트를 발견하고선 멈칫했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응.’ 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더니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중요한 것 같아.”
“왜죠?”
“……글쎄. 그건, 내가 널…….”
슥.
“……!”
하아, 숨을 흘리며 소리를 내뱉던 남자의 몸이 요한의 품으로 쓰러진 것은 그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라는 말을 흘린 순간이었다.
* * *
“헉!”
레온하르트 악셀이 눈을 뜬 것은 쨍쨍한 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지고 있음을 자각했을 때였다. 왠지 모르게 힘겨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레온하르트는 생전 처음 보는 하늘빛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세 번 정도 눈꺼풀을 내렸다 다시 들어 올렸으나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여……긴…….’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건지 모르겠다.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얼른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
혹시나 했는데,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레온하르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삼키며 제 상체를 뒤덮고 있는 이불 속을 응시했다. 그는 다리 위에 속옷 하나만을 걸친 채 모두 벗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빌어먹을.
긴장한 심장이 열심히 뜀박질을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 것은, 과연 우연일까.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는 이유에 대해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와아아!]
인상까지 찌푸려 가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레온하르트는 귀를 울리는 함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도 일요일 저녁 공연이 열리기 직전, 대략 6시 30분쯤 그의 대기실에서였을 거다. TV 너머로 들려오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는 7시 반에 열리는 저녁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심기를 자극했다. 아니, 정확히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경기장 내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흑발 남자와 부둥켜안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었다.
[레온하르트! 어딜 가는 거야!]
이윽고 생각나는 장면은 공연 시작 한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퀸 레베카 시어터를 나서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기겁한 이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레온하르트는 무작정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무작정 도착한 주택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악셀 씨가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레온하르트 악셀이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경기를 마치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요한에게선 어쩐지 향긋한 샤워 코롱 냄새가 났다. 빗속임에도 은은하게 퍼져 가는 그의 체취가 왠지 모르게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적대적으로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지만 레온하르트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그 녀석이랑 무슨 사이지?]
그래, 그랬었지.
퀸 레베카 시어터를 나서 도착한 요한의 집 앞에서, 무작정 그를 기다렸다.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요한을 만나 물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비를 뚫고 나타난 요한을 보자마자 그 말이 터져 나왔다.
불쾌해하는 것이 틀림없는 그의 모습에 괜히 움찔하기는 했으나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젠장.’
곰곰이 자신의 기억을 상기해 보던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멋대로 벌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아 버린 사실에 그는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처음엔 그저 복수심이었다.
신사답게 상대를 대하려던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치욕까지 준 남자에 대한 얄팍한 복수심. 하여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쿵쿵.
눈치 없게도 거침없이 뛰는 심장의 박동이 그의 깨달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TV 화면을 통해 축구 중계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일종의 질투였다.
저 아닌 다른 이와 끌어안은 채 웃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본 순간 온몸의 혈관이 뒤틀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저 자식과 요한의 관계를 알아내야 한다.
당시 퀸 레베카 시어터를 빠져나오던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는 그가 그토록 신성시 여기는 저녁 공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요한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할 뿐.
“빠져 버린 건…… 오히려 내가 된 건가.”
레온하르트는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
그는, 예상치 못했던 늪에 빠져 버렸다.
한번 들어서면 제 의지로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요한 백이라는 신비로운 청년에게.
꼼짝없이.
34화
“하, 하하…….”
내내 부정하던 일을 인정해 버리고 나니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 밖으로 허탈함과 후련함이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좋아하게…… 됐어.’
다름 아닌 남자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레온하르트 악셀은 28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남성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껏 그는 계속 여성들을 만나 왔고, 그녀들과의 관계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단 한 번도 남성에게 끌린 적이 없으므로 자신이 게이, 혹은 바이일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들과 연애를 하면서 부족한 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나는 동안엔 상대에게 충실했던 레온하르트는 연인에게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신경을 쏟아부었지만, 놀랍게도 언제나 이별 선언을 당했다.
[네 연애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부족함이 없는 매너에 넘치는 사랑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별을 당하는 레온하르트를 지켜본 이안 키스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레온하르트는 흥, 콧방귀를 뀌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이별 원인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까.
레온하르트 악셀을 떠났던 여인들은 하나같이 그를 향해 ‘일과 사랑, 둘 중 무엇을 선택할래?’라고 물었고,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레온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일.]
가족들이 있는 독일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영국에 왔을 만큼 레온하르트는 ‘뮤지컬’이라는 일에 미쳐 있었기에 연인이라 할지언정 예외는 없었다.
그는, 제 일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런데…….
“후우.”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을 웃던 레온하르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겨우 안정을 되찾는다.
공과 사, 일과 연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할 때마다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했던 그가 어제 처음으로 후자를 택했다. 이는 그를 잘 알고 있는 이들뿐 아니라 레온하르트 스스로도 당혹감을 느낄 일이었지만,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응시하던 레온하르트는 어제부터 오늘 밤까지 내릴 거라 예보된 비가 멎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런던의 날씨란.
피식 웃으며 환한 햇살이 창틈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다 주위를 살피자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주저하다 손을 뻗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원이 꺼져 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레온.’부터 시작해 ‘너 지금 어디야?’, ‘전화 받아.’, ‘미쳤어? 어디냐고!’ 등등 이안 키스트와 마커스 젠슨이 보낸 문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백 통이 넘는군.’
저 자신도 이렇게 놀라운데 그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레온하르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머리를 벅벅 긁다 익숙한 번호를 꾹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고, ‘이 미친 자식아!’ 하고 다짜고짜 욕설을 흘리는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이었다.
“마키.”
-너 어디야. 너 지금 어디야? 너 어디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악셀, 이 개자식아!
언제나 그의 비위를 맞추어 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마커스 젠슨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요란한 외침이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그의 음성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공연은…… 어떻게 됐어.”
-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공연이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됐겠어! 어? 어떻게 됐겠냐고!
“……마키, 진정해.”
-뭐?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진정하게 생겼냐고!
“…….”
-개자식. 천하의 미친 자식! 펑크를 낼 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든가! 내가 어제 스티브한테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뛰쳐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너 때문에 얼마나 머리를 숙였는지 아냐고! 널 찾아서 온 런던을 다 뒤졌다고!
“…….”
-혹시 네가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닐까 싶어서 경찰한테까지 연락하려고 했어. 알아? 알고 있어?
“미안해. 어제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것보다 마키, 아직 내 질문에 답 안 했어.”
-뭐?
“공연.”
-……!
“공연은, 어떻게 됐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내지르는 마커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던 레온하르트가 다시금 묻자 마커스가 ‘미친 새끼.’ 하고 험악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레온하르트는 듣고도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으으으, 하고 이상한 신음을 흘리던 마커스가 대답 없는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닉포드가 두 탕을 뛰었어.
“닉포드가?”
-그래! 넌 정말 원 캐스트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 빌어먹을. 스티브의 선견지명이 옳았지. 하마터면 공연 자체가 펑크 날 뻔했다고! 너 보러 극장까지 온 팬들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알기나 해? 타블로이드지도 난리야. 병적일 정도로 제 공연을 애지중지하는 천하의 악셀이, 돌연 무대에 나타나지 않은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기나 하냐고!
“알고 있어. 그래서, 확실히 깨닫게 됐지.”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마커스가 ‘뭐?’ 하고 황당한 음성을 흘렸으나 대응하지 않은 채 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당장…… 아니, 지금 당장은 무리일 것 같군. 일단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할게. 닉포드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 스티브와 다른 스태프들, 그리고 어제 날 보러 온 관객들한테는 모두 적절한 보상을 해 줄 거라고도 말해 주고.”
-적절한 보상이라니. 너 설마, 환불이라도 해 주겠다는 말이야?
“그래야 한다면.”
-레온!
“그럼 다시 연락하지.”
-뭐? 인마! 잠깐만, 기다려!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내가 당장……!
할 말을 마친 레온하르트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마커스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전원 버튼을 누르더니 이내 검은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마커스가 계속 전화를 걸어올 것이 분명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짧게 숨을 고른 뒤 침대를 벗어났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그는 느릿하게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가 있는 방을 살폈다.
만일 이곳이 누군가의 ‘침실’이라면 이렇게 단조로울 수는 없을 거다. 심플한 구조에 덩그러니 침대와 테이블 하나만이 떡하니 놓여 있는 방엔 그 흔한 액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의문을 느끼며 어떻게든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론해 보려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포기하고 문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헉!”
막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레온하르트는 문턱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늘한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는 쪽빛의 눈동자를 지닌 요한이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레온하르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쪽이 어떻게 여기에…….”
“당연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여긴 제집입니다.”
“……뭐?”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비스듬하게 서 있던 요한이 바로 서며 레온하르트에게 다가왔다. 레온하르트는 ‘어어.’ 하고 옅은 미소를 흘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제 앞에 다가와 있는 요한을 내려다봤다.
“……!”
레온하르트는 손을 스윽 내밀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마를 뒤덮는 요한의 손길에 깜짝 놀랐다.
‘무, 무슨…….’
차가운 요한의 손이 그의 이마를 감싸자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귓불이 뜨거워져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꽉 악물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열이 남아 있군요.”
아무 말도 못 하고 요한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요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군.’
침착하다 못해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요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뒤늦게 어떻게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떠올랐다.
퀸 레베카 시어터를 벗어난 레온하르트 악셀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요한 백의 집 앞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후에 요한을 만났고, 그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기억을 잃었다.
레온하르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이봐요!’ 하고 저를 부르던 요한의 모습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
“내가 그쪽한테…… 뭔가 실수를 했나?”
그렇다면 곤란한데.
제 감정을 알아차리기 무섭게 호감을 품은 상대에게 실수를 했다면, 앞으로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에 적잖은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 그래도 그가 자신을 좋게 볼 리 없다는 생각에 그것만큼은 막고 싶어 레온하르트는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의외라는 듯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요한이 오히려 되물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망할.
‘또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거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예의 호텔에서 있었던 일 이후 또 기억이 끊어져 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머리인지, 화가 날 지경이다.
더군다나 표정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요한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실수가 아닌 듯했다.
갑자기 눈앞이 막막해졌다.
레온하르트는 욕설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선 흐리게 웃으려 애썼다.
“안…… 나는군.”
“…….”
“젠장할. 전혀 기억이 안 나.”
고개를 숙인 레온하르트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미안……하게 됐어.”
“…….”
“그쪽이 나를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고의는 아니야. 그러니까 어제의 실수는 부디 잊어 줬으면…….”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어?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던 레온하르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떨리는 그의 녹안을 응시하던 요한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 말도, 잊어야 하는 겁니까?”
35화
쿵쿵.
요한을 발견한 시점부터 이미 손아귀를 벗어난 심장이 제멋대로 벌렁거렸다.
무슨 말을…… 했다고?
요한을 바라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입 안이 바짝 말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요한의 모습에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더라니, 하필이면 요한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면 안 되는 말이 들려왔다.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꿀꺽 침을 삼키다 이내 허둥지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랬군.”
“…….”
“아, 그래. 그런 실수는…… 이, 잊어 줘.”
“…….”
“이런. 이 집에 너무 오, 오래 머물렀어. 날도 밝았으니 이만 가 볼게.”
“…….”
“고마웠……!”
뒤늦게 자신이 속옷 바람으로 서 있다는 것이 떠오른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며 요한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바지와 셔츠를 입은 채 얼른 이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레온하르트의 행동은 요한을 스쳐 지나 방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멈추었다. 막 문턱을 넘으려던 순간, 다리의 힘이 쭉 풀려 버린 까닭이다.
“괜찮으십니까?”
“…….”
“악셀 씨.”
“어…… 괜……찮아.”
입 밖으로 내뱉는 목소리가 몹시 떨려 왔지만, 레온하르트는 겨우겨우 답할 수 있었다. 주저앉으려던 레온하르트를 부축한 요한이 입술을 깨무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더니 레온하르트가 일어나자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오십시오. 아침은 준비해 뒀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
이윽고 닫혀 버린 방문이 심장 박동을 더욱 거세게 증폭시킨다. 쿵쿵. 쿵쿵.
“제기랄.”
요한이 제 시야를 벗어나기 무섭게 다시금 털썩 주저앉은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벌써 고백을 해 버렸다고?’
하필이면 기억이 끊어지기 직전, 그런 최악의 실수를 저지를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몇 시간 동안 비를 맞고 서 있던 탓에 예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상대는 이미 저를 경멸에 가까운 눈으로 보고 있거늘, 제 감정도 채 깨닫기 전에 벌써 그 말을 꺼내 버리다니. 이 얼마나 경솔한 일인가. 지금부터 마음을 돌려도 시원찮을 판에 이미 사고를 쳐 버린 레온하르트는 셔츠의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은 그로부터 10여 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
그가 방을 나서기 무섭게 요한이 갑자기 두꺼운 담요 하나를 들고 와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5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다시 들어가려 했습니다.”
요한은 고조가 느껴지지 않는 말을 내뱉은 후 놀라는 레온하르트를 두고 부엌인 듯한 곳으로 걸어갔다. 레온하르트가 멀뚱히 서 있는 사이 요한이 다시 컵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드세요.”
“나?”
“그럼 제 앞에 악셀 씨 말고 또 있습니까?”
“아.”
“생강차입니다. 목 관리는 잘하셔야죠.”
“고……마워.”
요한은 어깨를 으쓱인 후 레온하르트가 컵 안에 든 차를 다 마시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잠시 놀라긴 했지만 얼떨결에 움켜쥔 컵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시선에 꿀꺽꿀꺽, 뜨거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얼마 뒤, 레온하르트가 차를 모두 마시자 빈 컵을 받아 들고 다시 부엌으로 걸어가는 요한의 발걸음은 불과 몇 분 전, 충격적인 말을 내뱉은 사람 같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눈앞이 어지러운 것은 과연 요한이 제게 했던 말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 때문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부엌으로 향했던 요한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잠시 기다리다 이내 근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으.’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니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요한이 덮어 준 담요가 아니었더라면 더욱 추위를 탔을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겁니까?”
“……아, 조금.”
“…….”
“괜……찮아. 조금 쉬면 낫겠지. 그런데…….”
“……?”
“그쪽은 오늘 출근 안 하나?”
[백 선수 있잖아. 너희 런던 FC의 신예. 그 사람은 경기 뒷날에도 훈련장에 나온다더라고.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나. 쳇, 진짜 성실하기까지 하다니 부럽기 그지없군. 우리 팀 선수들은 왜 그런 정신을 안 가지는 거지?]
레온하르트가 런던 FC의 팬이 된 것이라 확신한 이안 키스트가 툴툴거리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어제 경기가 있었던 것까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요한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어?’
레온하르트는 저를 향해 웃는 것이 분명한 요한을 멀뚱히 올려다봤다.
“아.”
스윽 올라가는 요한의 입꼬리를 보며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레온하르트가 의아하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린 요한이 얼른 평상시의 무표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당황한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음을 인지했다. 요한은 흠흠, 헛기침을 흘리며 딱딱한 음성을 내뱉었다.
“보통 경기 뒷날엔 휴식을 취하거나 나머지 훈련을 하는데, 오늘은 쉬겠다고 미리 말해 뒀습니다.”
“그……래?”
대체…… 왜?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한 뒤 잠시 인상을 쓰더니 한숨을 내쉬며 제 옆에 털썩 앉는 요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죠.”
……!
올 것이 왔다.
너무도 상냥한 요한의 행동에 잠시 잊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방심한 사이 핵심을 찔러 버리는 요한의 말에 움찔거렸다.
요한은 딱딱하게 굳어지는 레온하르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잊어도 되는 겁니까?”
아마도 요한 백이 야구를 했다면 직구만 꽉꽉 채워 던지는 투수였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돌려 말하지 않는 요한의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쿵쿵쿵쿵. 안정을 되찾아 가던 심장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면을 응시하던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요한의 곧은 벽안과 부딪쳤다.
떨리는 레온하르트를 직시하던 요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악셀 씨,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