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59)

왜 이렇게 그 흑발 청년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저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날리던 그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이를 악물게 되는 건지. 아주 작았지만 저를 향해 보여 주던 옅은 미소가 여전히 아른거리고, 퉁명스럽지만 가끔은 부드럽기도 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걸까.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고오오오오오올! 골입니다! 또다시, 골입니다! 백넘버 39번, 백! 저 멀리 한국에서 온 신예가 또다시 골을 터트렸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고 알려진 런던의 날씨와는 거리가 먼, 화창한 일요일.

총 두 번의 공연이 열리는 일요일 공연 중 마티네가 아닌 밤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귀가 쫑긋거렸다.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든 레온하르트의 눈에 누군가의 품에 와락 안겨 미소 짓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레온, 있어? 오늘 스티브가 마티네 애들이랑 같이…….”

『정말이지 놀라운 활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콜 업 된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리저브 선수가, 1군 데뷔 이후 세 경기 연속 골이라니요! 루카스 씨, 저희가 어쩌면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하! 물론 성급한 판단은 이릅니다만 요한 백이 예비 스타라고 칭할 만큼 눈부신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저기 좀 보세요. 오늘 복귀한 바스티안 랄프의 힐패스를 유연하게 받아 주저 없이 바로 골로 연결시키다니! 아직 몇 경기를 더 지켜봐야겠지만, 요한 백이 런던 FC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선수단 분위기도 매우 좋은 것 같네요. 특히 랄프 선수, 백 선수를 놓아줄 생각을 않는군요! 자신이 부재한 사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준 어린 선수를 챙기는 선배의 마음이 저런 걸까요? 아주 보기 좋습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요한 백의 기가 막힌 골이 나온 과정을 되짚어 보겠…….』

“뭐? 또 골을 넣었다고?”

똑똑, 대기실의 문을 두드리고 나타난 이안이 어느새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서는 레온하르트가 주시하고 있는 TV를 향해 중얼거렸다. ‘백 선수, 정말 대단한걸?’ 하고 팽팽한 균형을 깨는 골이 나타난 순간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하는 이안과 달리,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기만 했다.

[특히 랄프 선수, 백 선수를 놓아줄 생각을 않는군요!]

오늘 런던 FC의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열린다는 것은 출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결코 중계를 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될 밤 공연을 준비해야 했고, 그로 인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 따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TV를 틀어 놓은 데다 ‘골’이라는 소리와 ‘백’이라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고개를 든 자신이 존재했다. 그리고 TV 화면 속에서 요한을 와락 끌어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바스티안 랄프와 그의 품에 안겨 제게는 보여 주지 않던 미소를 짓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 역시, 레온하르트는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바스티안 랄프의 옆에 철썩 붙어서 세리머니를 이어 가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 그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란.

몹시…….

‘불쾌하군.’

레온하르트는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레온 너, 메인 모델이 되더니 이젠 아예 런던 FC의 팬이라도 된 거냐?”

그의 녹색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은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이안이 ‘승점 차가 벌어지겠네.’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레온하르트에게 툴툴거렸다.

“복귀하자마자 어시스트라니. 랄프도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

“그런데 올리비아의 말대로 정말 랄프가 게이일까.”

“…….”

“뭐, 랄프가 제정신이라면 같은 업계 사람을 건드릴 리 없겠지만…… 의외로 백 선수가 랄프의 마수에 걸려들 수도 있겠군. 흠, 이거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데? 둘이 만난 지 얼마 안 됐다는데, 저렇게 친한 걸 보…….”

“레, 레온? 야! 너 어디 가!”

쾅!

“이봐! 곧 공연 시작이라고! 이 미친 자식아!”

머리가 하얗게 물든 건 순식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를 완벽하게 무시하고선 대기실을 박차고 나섰다.

* * *

1군 콜 업 이후 세 경기 만에 요한은 처음으로 ‘리그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토요일 오전에 있었던 트레이닝 세션에서 주전 선수들과 같은 조끼를 입고 훈련을 했던지라 살짝 예상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선발 팀 시트에 올라간 이름을 봤을 때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긴장해서는 안 돼.

평소대로, 정말 평소대로 행동해야 해.

킥오프 시간이 다가올수록 제멋대로 뛰는 심장 박동을 멈출 수 없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경기 한 시간 전 피치 위로 올라가 훈련을 할 때도, 이후 본게임이 시작되기 직전 터널 안에서 피치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할 때도 가슴의 떨림은 도통 가라앉질 않았다.

[좋아, 요한. 내가 널 위해 주문을 외워 주지.]

그런 요한의 뒤편에 서 있던 바스티안 랄프는 주심의 휘슬 소리만을 기다리며 킥오프를 하기 위해 볼 앞에 서 있던 요한에게 다가와 빙긋 웃어 주었다.

[주문……이요?]

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응시하자 바스티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속삭였다.

[그래. 요한 넌, 오늘 반드시 골을 넣을 거야.]

[……!]

[나하고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스트라이커 중 함께 식사를 했던 녀석들은 첫 경기 때 무조건 골을 넣었어. 그러니 너도 골을 넣을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요한 네가 내 복귀전을, 화려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바스티안의 말은 어디까지나 인사치레일 뿐이라 생각했건만. TV 화면에서, 그리고 머나먼 관중석에서 지켜봤던 그와 함께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우상과 함께 뛰는 경기는, 이런 거구나.

평소라면 그에게 달려들었을 수비수들이 바스티안을 집중 마크했고, 그 틈을 노려 보다 수월한 오프 더 볼 플레이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경기가 지속될수록 바스티안이 경기 전 했던 말처럼 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지금이야!’ 하고 저를 향해 외친 바스티안의 음성을 듣자마자 발끝에 볼이 닿는 것을 인지했다.

이윽고 요한은 두근두근 일렁이는 가슴 박동을 느끼며 있는 힘껏 골문을 향해 슈팅을 날렸다.

[어때. 내 말, 맞지?]

그것은 일종의 환희였다.

요 며칠 음울하기 짝이 없던 기분이 골망을 흔드는 축구공을 발견한 순간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콜 업 이후 세 경기 연속 골을 터트렸다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우상의 어시스트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경기 직후 수고했다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는 바스티안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일요일 경기를 마친 그가 몹시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쏴아아.

화창하기만 하던 날씨가 급격하게 흐려져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올라간 요한의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던 리그 경기가 끝난 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그가 미라클 스타디움을 빠져나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리고 비 오는 제집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

요한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32화

쏴아아.

때마침 굵어진 빗방울이 금색 머리카락을 적셨다.

물기를 머금어 은은한 빛이 나오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두근, 미약하게 가슴이 뜀박질한 까닭은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뒷모습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정체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런던 내에서 저 정도 키와 체격, 저리도 찬란한 금발을 지닌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가 자신의 집을 아는 건지 모르겠다. 의문이 이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던 요한은 지난 목요일 밤 이전에 그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집에 대해 묘사했던 걸 떠올렸다.

[그럼 거기에 혼자 살고 있다고?]

[……예.]

[다른 가족들은? 런던에, 아니 영국에 없나?]

[……뭐, 그렇습니다.]

[흐응.]

[왜…… 그러십니까?]

[아니. 동질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

[혼자 지내기 적적해진다면 말해. 언제든, 찾아가 줄 테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외로움 따위는 느끼지 않으니까요.]

[하하. 그것참 단호하군.]

[…….]

……제기랄.

안나마리아나 동료들을 제외하고, 관계자가 아닌 이와 그렇게 자주 통화를 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내뱉고 말았다. 그 탓에 지금 이 순간, 가장 부딪치고 싶지 않은 남자를 하필 제집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요한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그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지나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우산도 없이 대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저를 스쳐 지나가려는 요한을 발견하자마자 작은 탄성을 흘렸다. 요한은 그런 그의 반응을 무시하며 대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깐만. 잠깐만!”

금발 남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요한의 손은 쥐고 있던 열쇠가 문고리에 닿기 직전 멈추었다. 다급하게 외치는 남자의 음성을 완벽하게 외면하며 문을 열 수도 있었지만, 요한의 고개는 어쩐지 옆으로 스윽 돌아갔다.

툭.

그의 기다란 속눈썹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지만 요한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들고 있던 우산을 태연하게 접은 요한이 굳게 다문 입술을 달싹였다.

“악셀 씨가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어?”

“분명, 다시는 부딪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자꾸만 퉁명스러운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도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 같아서.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일은 좋지 않았다. 쓸데없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요한은 차갑게 말한 후 다시 몸을 돌려 문을 열려 했다.

“그 녀석이랑 무슨 사이지?”

하지만 이어진 말에 요한은 반쯤 돌렸던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뭐?’

그 녀석?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던진 금발 남자, 레온하르트 악셀이 뱉어 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요한은 결국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레온하르트가 ‘젠장!’ 하고 요한에게 뱉어 내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건네는 건지 모를 욕설을 흘린 뒤 다급히 물었다.

“그쪽, 그 녀석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예?”

“바스티안 랄프 말이야! 그 녀석, 아니 그놈이랑 친해? 정말 좋아하는 거야?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대체 이게 무슨…….

난데없이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다짜고짜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는 저의를 모르겠다. 요한은 횡설수설하는 레온하르트를 어이없는 눈으로 응시하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자 ‘망할!’ 하고 한 번 더 욕지거리를 흘린 그가 다급하게 요한의 팔을 덥석 잡더니 푸르게 일렁이는 녹안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말해.”

“…….”

“그쪽, 랄프 놈이랑 무슨 사이야? 정말로 사귀는 사이인 건…… 아니지?”

마지막 단어를 뱉어 낼 때 자신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끝이 파르르 떨린 것은 과연 착각일까. 요한은 어쩌면 간절해 보이기도 하는 눈빛을 제게 쏘아 대는 레온하르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두근두근두근.

제 것은 아닌 게 틀림없는 심장 박동 소리가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와 어울려 요한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만일 조금 더 힘을 주지 않았다면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으로 떨어트렸을 것이다.

후우.

요한은 거칠게 요동치는 레온하르트의 눈을 말없이 응시하다, 제 양팔을 세게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

레온하르트는 분명 강한 힘을 주고 있었지만, 요한 역시 무력으로는 누군가에게 지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을 쉽게 떨쳐 낼 수 있었다.

쏴아아.

한층 더 굵어진 빗방울이 두 남자의 머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바닥을 적셨다.

요한의 행동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던 레온하르트는 서늘한 얼굴의 그를 발견하고선 몸을 움찔거렸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왜 그걸 제가 당신에게 알려 드려야 합니까?”

“뭐?”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전 당신에게 해 드릴 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품은 의문도, 당신 스스로 결론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봐, 요…….”

“돌아가세요.”

“……!”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는데, 더 이상 당신 얼굴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당신이 불편합니다. 당신 역시 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그리 좋지만은 않을 거 아닙니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요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의 녹색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주시하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게 화가 나 복수하려 했던 남자치고는 별것도 아닌 말에 반응하는군.

괜히 속이 따끔거린다. 짧게 심호흡한 요한은 말 없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선 겨우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그러고는 주저 없이 몸을 움직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쾅!

* * *

[그 녀석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요한이 바스티안 랄프를 좋아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스티안은 요한이 어릴 적부터 이름을 날리던 대스타였고, 그런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바스티안을 쫓아 한국에서 런던으로 건너왔고, 런던 FC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이후 요한의 유일한 꿈은 바스티안과 같은 팀에서 뛰고 싶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상’을 따르는 팬의 마음에 가까웠다.

바스티안을 존경하긴 하나, 그와 한 침대에서 살을 섞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사귀는 사이인 건…… 아니지?]

의심을 가득 담아 뱉어 낸 그 말이 못내 불쾌하다.

점점 작아지는 말이었지만 돌이켜 봐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요한의 고운 미간이 좁아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요한이 1군 데뷔를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을 저지르기로 결심한 까닭은, 앞으로 자신이 지내야 할 세계의 특수성에 대해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성적 취향을 지니고 있다 할지언정, 요한과 같은 축구 선수들은 그 사실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아니, 절대로 그 사실이 드러나서는 안 됐다.

만일 요한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동료들로부터 비난의 눈초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는 것 또한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특히나 개인 스포츠가 아닌 팀 스포츠인 축구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제 막 팀에 녹아들기 시작한 요한과 같은 스트라이커는 동료들의 도움 없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 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레온하르트 악셀의 외침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불쾌했고, 기분이 나빴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자신과 바스티안 랄프를 의심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당신이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자신의 팔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달싹이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눈빛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연극…… 연극이었다고요, 그날 있었던 일은!]

베라 펠릭스가 외쳤던 것처럼 레온하르트가 제게 접근했던 모든 일은 전부, 연극이 아니었던가. 아직까지 자신에게 요구할 것이 남아 있는 건가.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신은 그에게 열려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충분히 배신감을 느꼈는데 그것으로는 불충분했던 걸까.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투득. 투득.

하루에도 몇 번씩, 런던 시내를 적시는 소나기라 여겼던 비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부터 시작한 비는, 내일 밤까지 내릴 예정입니다.>

구름에 가려 있던 해는 완벽하게 뒤로 넘어갔고, 밝은 빛을 뿜어내야 할 달은 비를 몰고 온 새카만 구름들에 가려진 상태.

어느덧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벽시계를 흘긋거리던 요한은 반사적으로 켜 두었던 TV 속에서 들려온 나이트 뉴스의 기상 캐스터가 뱉어 낸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일…… 밤까지?’

[이봐요.]

[…….]

[이보십시오, 악셀 씨.]

[…….]

[대체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겁니까?]

[…….]

[악셀 씨!]

[답을, 들을 때까지.]

[……!]

[그쪽이랑 그놈, 무슨 사이지?]

[……하. 그건 당신이랑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래?]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얼른요.]

[싫어.]

[예?]

[대답을 들을 때까지, 서 있을게.]

[……!]

[…….]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리그 경기를 마치고 요한이 집에 도착하여 예의 금발 남자를 발견한 시각은 오후 9시쯤. 현재 시각이 11시 50분이었으니, 레온하르트 악셀이 요한의 집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은 지 대략 두 시간이 지나 세 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그가 사라질 생각을 않자, 보다 못해 밖으로 나가 축객령을 건네기도 했지만 레온하르트 악셀은 도통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경찰을 불러 그를 쫓아낼까도 고민해 보았으나, 그랬다가는 일이 더욱 시끄러워질 것 같아 그저 무시했다.

제 풀에 지쳐 떠날 것이라 여겼던 거다.

하지만…….

‘아.’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요한은 구겨져 있던 얼굴을 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안나마리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요한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창밖을 한 번 더 힐긋거린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33화

“응, 안나.”

-요한! 너 지금 집이야?

당연한 것을 묻는다.

요한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선 대답했다.

“응.”

-아까 오후 경기 봤어! 오늘도 한 골 넣었던데? 축하해! 이러다 득점왕 되는 거 아니야?

잔뜩 기대에 부푼 안나마리아의 목소리 톤이 높다. 요한은 ‘고마워.’ 하고 짧게 답한 후 옅은 미소를 흘렸다.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잔뜩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분명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은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실실거리기도 하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안, 그렇게 됐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냐, 별일은. 그런데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전화를 건 것을 보면 틀림없이 급한 일일 것이다.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는 요한을 보고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린 안나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우리 집에 좀 가 줄 수 있어?

“너희 집?”

-응! 교수님이 부탁하신 일이 아직 안 끝나서 못 갈 것 같아.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발코니의 빨래 좀 걷어 줄 수 있니? 급하게 나오느라 걷지 못했어.

발을 동동 구르는 안나마리아의 모습이 연상되어 피식 웃던 요한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안나마리아가 은혜를 갚겠다는 것을 괜찮다고 사양하려던 요한은, 순간 스치는 생각에 그녀를 급히 불렀다.

“안나.”

-응?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여전히 창밖의 비는 가열하게 내리고 있었고, ‘그 남자’는 계속해서 그의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수상한 사람이라며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르는 일. 요한은 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그러더니 창밖으로 보이는 금발 남자를 내려다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가수들은…… 비를 오랫동안 맞으면 곤란하겠지?”

-……뭐?

“아무래도…… 노래를 해야 하니까.”

도의적인 걱정이었다. 결코 저 사람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낮게 깔리는 요한의 음성을 들은 안나마리아가 이내 깔깔 웃었다.

-호호, 요한.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 비를 오래 맞으면 곤란한 건 가수뿐만이 아니잖아. 안 그래?

“그건…….”

-일반인도 비를 조심해야 하지만, 가수들은 특히 더 조심해야지. 아무래도 목을 쓰는 직업이니까. 너랑은 많이 다르다. 그치? 너희는 가끔 비나 눈이 내릴 때도 경기를 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

-요한?

“아무것도 아니야. 빨래는 내가 걷을 테니, 너무 걱정 마.”

요한은 어리둥절해하는 안나마리아에게 짧게 대답한 후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다시 창밖을 응시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젠장.’

슬쩍 벽시계를 다시 흘긋거리니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요한은 잠시 망설이다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쏴아아.

내일 밤까지 내린다는 비는 아직도 굵은 줄기를 형성하고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남자는 돌처럼 굳은 채 그의 집 앞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입술을 잘근 악문 요한은 들고 있던 우산을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

후드득,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멈추자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요한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남자를 향해 차갑게 말을 건넸다.

“악셀 씨,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한때 잠시나마 그를 친구라 여겼다. 그러나 그가 복수를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의 상처를 입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제게 왜 복수를 하려는 건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애자였던 그가 자신과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겠지. 그래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접근을 하고, 그에게 마음을 열자마자 냉정하게 돌아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당신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입술을 짓누른 요한은 넋이 나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그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금발 남자가 갑자기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굵은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퉁퉁 부은 입술을 움직이던 레온하르트가 쉰 소리를 냈다.

“나도……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악셀 씨.”

“그쪽을…… 널 보고 있으면, 화가 나.”

빗소리와 어우러져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요한은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서려 했다. 그래, 이 남자가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제게 호의라고는 없는 사람이거늘.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억지로 우산을 쥐여 준 뒤, 요한은 안나마리아의 집으로 건너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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