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59)

뭐?

우상?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슥슥 나이프를 움직이던 손이 뚝 멈춘다. 충격을 받은 건 그 말을 접한 요한의 맞은편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곧, 하하 유쾌한 소리가 레온하르트의 옆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그럼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진작 알았다면 여기보다 더 좋은 데로 데려갔을 텐데! 게다가 가르시아가 그 얘기는 하지 않던……. 잠깐. 그런데 요한, 선배님이라니? 그런 낯 뜨거운 단어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예?”

“편하게 랄프라고 불러. 아님 바티라고 하든가. 앞으로 같이 피치를 누빌 ‘동료’인데, 선배 소리 듣는 것도 부끄러워.”

“아…….”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

“요한?”

“네. 알겠……습니다, 바티.”

“훨씬 듣기 좋군. 아, 고마워요, 미스.”

물을 리필해 주기 위해 나타난 웨이트리스에게 고개를 까딱이는 흑발 남자의 목소리는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 좋다는 것이 역력하게 드러날 만큼, 밝은 음성이다.

‘빌어먹을.’

그에 반해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버려진 휴지 조각만큼이나 처참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이봐, 레온. 웬만하면 얼굴 좀 펴지그래.’ 하고,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이안이 쿡, 허리를 찌를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

[예.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앉으시죠, 선배님.]

[어? 어어.]

노골적으로 저를 응시하는 레온하르트에게서 눈을 돌린 요한은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 그 단호한 대처에 당황한 사람은 레온하르트뿐만이 아니었다. 상황을 주시하던 이안이 어느새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너, 저 축구 선수랑 촬영도 하지 않았어?]

그렇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레온하르트는 입도 벙끗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여 분.

레온하르트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눈앞에는 이안 키스트가 데려온 이안의 사촌 동생이 앉아 그를 향해 선망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그의 왼쪽 대각선에는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 그와 한 이불을 덮었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물론 예의 남자는 레온하르트가 있는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향해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하고 낮게 이를 악물던 레온하르트는 어떻게든 왼쪽 테이블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역시 소문대로네요.”

그때였다.

요한 일행이 앉은 테이블에 주문한 음식이 차려지면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시야를 가로막는 바람에 레온하르트는 겨우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여전히 두근두근, 심장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기는 했으나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애쓰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옆 테이블을 힐긋거리며 낮게 웃는 여자에게 꽂혔다.

“소문이라니?”

올리비아 후안의 말이 의아하게 느껴진 것은 비단 레온하르트뿐만이 아닌지, 이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살짝 미소 짓던 올리비아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며 두 남자를 불렀다. 레온하르트와 이안이 고개 숙여 올리비아 쪽으로 얼굴을 붙이자 올리비아의 붉은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 중 키 큰 남자 있잖아요.”

“어어. 사실 아까부터 좀 신경 쓰였어.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 어디서 봤지?”

“오빠, 몰라요? 저 남자, 바스티안 랄프잖아요. 현재 EPL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남자.”

“헉. 뭐? 랄프가 여기 왜 있…… 잠깐만! 랄프는 부상 중 아니었어?”

깜짝 놀란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크게 외치려 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붙잡은 레온하르트로 인해 이안의 목소리는 다행히 옆 테이블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익숙한 이름의 선수가 제 입으로 흘러나오자 흥분하는 이안에게 옅은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제 친구 중에 랄프의 개인 메디컬 팀에 소속된 애가 있는데, 랄프의 회복력이 빨라서 이번 주에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복귀를 했나 보네요. 스페인에서 재활한다고 들었는데, 런던에 있는 걸 보면.”

“젠장! 런던 새끼들은 운도 좋지. 신성을 발견한 걸로도 모자라 간판스타까지 복귀를 하다니.”

“……소문이라는 건, 무슨 소립니까?”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툴툴거리는 이안과 달리,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빙긋 웃는 올리비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묘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올리비아가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직시하며 속삭였다.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지만 바스티안 랄프가 어쩌면 게이일지도 모른대요.”

* * *

[아는 사람이야?]

존경하는 팀의 선배이자 동료인 바스티안과 식사를 하러 나온 레스토랑에서 설마하니 ‘그’와 마주칠 줄은 몰랐다.

‘런던도 참 좁군.’

인생의 절반을 런던에서 지냈지만 ‘그’와 부딪치기 시작한 건 고작 몇 주 전부터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 이렇게 자주, 대면하게 될 줄이야. 안 그래도 바스티안의 뒤를 따르느라 긴장하고 있던 요한의 얼굴은 ‘그’를 발견한 순간 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갔다.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남자를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발견했기에.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거짓으로 점철된 사람에게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어서 앉지.’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바스티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착석했다. 그가 앉은 자리의 대각선 쪽에서 뜨거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쿵쿵.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오늘 공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지켜봐 온 악셀 씨는 실수라곤 하지 않는 분이셨거든요. 물론, 사람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해서, 드디어 실수를 한 악셀 씨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졌지만요!”

유쾌해야 할 저녁 식사는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컥 막힌 느낌이 들었다. 바스티안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자꾸만 옆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지라,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천천히 눈앞의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던 요한의 손은 옆에서 들려오는 하이 톤의 음성에 뚝 멈추었다.

‘실수?’

공연에서…… 실수라도 한 건가.

이틀 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요한이 레온하르트 악셀을 좋은 쪽으로 응시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적어도 무대 위에 서 있는 그는 눈부실 정도로 반짝였고, 완벽했으니까.

대기실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의외네요. 솔직히 감명받았습니다.’라는 말 정도는 내뱉을 생각이었기에 이어진 사건의 진상을 접하고 난 뒤 더 큰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알 게 뭔가.’

기사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무대 위의 완벽 주의자 레온하르트 악셀이 실수 없는 자신의 공연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요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었기에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요한은 냉정한 눈으로 돌아가 다시 손을 슥슥, 움직이며 식사를 이어 가려 했다.

“그럼 듣던 대로 악셀 씨한테 지금, 여자 친구는 없는 거네요?”

“네?”

“그렇다면 제가 입후보하고 싶은데. 악셀 씨 생각은 어떠세요?”

쨍그랑―

30화

‘빌어먹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욕지거리가 목구멍을 감돈다. 한창 움직이던 나이프를 쥔 손에서 하필이면 힘이 훅 빠져나갔다. 요한은 자신의 허벅지를 찧고 하필 옆 테이블 근처 바닥으로 떨어진 나이프로 인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 요한?”

기분 좋게 식사를 이어 가던 바스티안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선 다급하게 물었다. 요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티.”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요한은 당황한 바스티안이 슬쩍 일어나려는 저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 들자 얼른 손을 내밀며 얼굴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그의 자색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방긋 미소 지었다.

바스티안을 저지한 요한은 다시 몸을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집으려 했다.

“여기.”

그런 요한의 손이 나이프에 닿기 직전, 누군가 의자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더니 재빨리 나이프를 집었다. 요한은 손끝을 파르르 떨고 있는 남자가 건넨 나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조명을 받아 더욱더 빛나는 그의 금색 머리카락이 시야로 들어온다. 자신의 냉랭한 눈을 마주하고도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는, 뜨거운 시선에 괜히 불편해졌다.

무시할까.

‘아니.’

그러한 행동을 취한다면 오히려 주변이 그를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미간을 꿈틀거리던 요한은 순식간에 숨을 고르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고맙습니다.”

“……저기.”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은, 식사를 얼른 끝낸 후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유연한 대처뿐이다. 결론을 내린 요한이 나이프를 주워 준 상대에게 싱긋 웃어 주자 그의 녹색 눈동자가 요동쳤다. 요한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주는 것처럼 웃음을 흘린 뒤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랄프 선수, 백 선수, 맞죠?”

그때 들려온 상기된 목소리가 요한의 걸음을 뚝 멈추게 만든다. 나이프를 들고 착석하려던 요한은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계속해서 요한 일행 쪽을 흘긋거리던 레온하르트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붉은 머리카락의 그는 어쩐지 눈에 익었다.

“이안 키스트입니다. 웨스트엔드에서 일하고 있어요.”

웨스트엔드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가 레온하르트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파트너라는 것이 떠올랐다. 왠지 친해 보이더니, 그래서였나. 속으로 놀라는 요한과 달리 바스티안은 이안의 인사를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 키스트? ……아! 혹시 라헤의 클라우스?”

“어? 제 공연, 보신 적 있습니까? 하하, 이거 영광인데요!”

“바스티안 랄프입니다. 어디 한 번뿐이겠습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연인걸요. 그럼 이쪽 분은…….”

“예, 맞습니다. 제 파트너인 레온하르트 악셀이죠.”

“역시. 많이 뵌 분 같았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악셀 씨.”

이안 키스트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악수를 나눈 바스티안이 레온하르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요한을 흘긋거리던 레온하르트가 이내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바스티안의 손을 맞잡았다.

“악셀입니다.”

바스티안은 레온하르트와 두어 번 정도 손 인사를 나누다 낮게 중얼거렸다.

“무대 위에서만 위압감을 풍기는 분인 줄 알았는데, 악셀 씨는 실제로도 체격이 상당하시군요. 혹시 운동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따로 운동을 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랄프 씨.”

“예?”

“이런 곳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합석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뭐?

모르는 척 두 남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요한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레온하르트는 당황한 요한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하고선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바스티안에게 말을 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는, 더 즐거운 법이잖습니까.”

“아무리 봐도…… 회복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휴, 우리 로젠버그 선수들이 랄프 선수의 반이라도 따라갔다면, 유로파가 아니라 챔스 경쟁을 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하하. 과찬이십니다, 키스트 씨. 주변에서 잘 챙겨 주신 덕분이죠. 그것보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로젠버그 팀도 올해는 많이 준비했다던데,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좋긴요! 당장 저번 경기도 런던한테 지지 않았습니까.”

“어? 그랬나요?”

“그랬죠! 저기 앉아 계시는 신성한테 일격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안 키스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목을 당한 요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은 바스티안을 흘긋거렸다. 바스티안이 풉 웃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긴. 그날 저도 TV로 경기를 봤는데 우리 팀의 새로운 별이 그런 벼락 골을 터트릴 줄은 몰랐죠.”

“어휴, 런던은 어찌 그리 운이 좋은지. 이적 시장 금지를 당해도 인재가 넘쳐나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라고요!”

“그럼 이참에 팀을 갈아타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어? 영업하시는 겁니까, 지금? 안 됩니다! 이래 봬도 저, 의리 있습니다. 로젠버그가 우승할 때까지, 팀을 갈아탈 순 없어요!”

“하하하. 영업 실패네요. 아쉬워라.”

검지를 치켜들고 좌우로 까딱이는 이안의 행동에 바스티안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하지 못한 합석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행과 식사를 하게 된 요한의 얼굴은 처음 이 레스토랑에 발을 디뎠을 때보다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

썰고 있던 스테이크 조각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불편한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하늘 같은 선배이자 존경하는 우상이 즐거워 보이기에 먼저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한은 굳은 얼굴을 한 채 대화를 이어 가는 이안 키스트와 바스티안 랄프를 흘끔거렸다.

“그런데, 여기 있는 레온과 백 선수는 초면이 아니라 구면이라 들었는데…… 아닙니까?”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며 타이밍을 잡고 있던 요한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안 키스트의 발언에 움찔했다.

“구면……이라고요?”

옆자리의 바스티안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이안 키스트가 제 옆의 레온하르트를 고갯짓하더니 말을 이었다.

“예. 이 녀석이 얼마 전 런던 FC의 메인 모델이 되었거든요. 소식 들으셨습니까?”

“아, 그건 몰랐군요. 축하드립니다, 악셀 씨.”

“뭐 어쨌든 그 모델 일의 첫 스타트로 백 선수와 함께 촬영을 했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어?”

두근.

요한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그날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안 역시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의 눈빛을 보면 순수하게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먼저 합석을 제안해 놓고 입을 다물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묻는 이안과 ‘아깐 모르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라며 제게 속삭이는 바스티안을 보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졌다.

결국 요한은 제게 쏠리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

“죄송합니다만, 아까 묻은 자국이 신경 쓰여서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어어.”

바스티안에게 말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도 양해를 구한 요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예? 소개팅이요? 그런 자리인데 저희가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일 만한 자리가 아니니 괜찮습니다. 단순히 이 녀석에게 사촌 동생을 소개받는 자리일 뿐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미스 후안?]

[아…… 네. 그, 그래요.]

[어서 앉으시죠. 백 선수도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합석 제안을 한 레온하르트의 앞에 앉은 여자는 짐작대로였다. 그런 여자를 앞에 두고도, 자신들에게 합석을 제안한 이유가 뭔지.

‘철저하게, 깨달으라 이건가.’

쏴아아,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부러 합석을 제안한 그의 의도가 뻔히 드러나서 코웃음이 흘러나온다. 한때 저와 잠을 자고, 친구가 되려고 했던 남자는 보란 듯이 여자와 소개팅을 하며 요한을 자극했다.

분명 그 남자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절대로. 그럼에도 이토록 기분이 바닥을 기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마치 동성애자는 절대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

진정하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뛰는 심장 박동 역시, 요한의 기분을 저기압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늘한 얼굴로 거울 속의 제 모습을 응시하던 요한은 얼어붙은 표정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 실패하고선 화장실을 나왔다.

“……!”

자리로 가면 바스티안에게 먼저 돌아가겠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조금이라도 함께 식사를 하기는 했으니, 그의 징크스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일 있을 경기도 신경 쓰이고, 이런 기분으로는 더 이상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화장실 앞 복도를 지나 식당 쪽으로 들어서려 할 때, 요한은 제 앞을 막아서는 어두운 그림자에 걸음을 멈추었다.

스윽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앞엔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서 있었다.

요한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실소를 터트리려다 말고, 말없이 그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잠깐.”

하지만 그런 요한의 팔을 덥석 잡으며 레온하르트가 그를 저지했다. 요한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손 놓으시죠.”

“이야기 좀 할 수 없을까.”

“전 할 이야기가 없는데요.”

“꼭 해야 할 이야기야.”

……이 남자와 나 사이에, 할 이야기가 남았던가.

요한은 고요하기 짝이 없는 주변을 무심하게 흘긋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뭡니까.”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금발 남자가 멈칫거렸다. 마치 제 반응에 상처라도 받은 모습이라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상처를 받은 건 오히려 자신이 아닌가. 요한은 그를 향한 싸늘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주춤하던 레온하르트가 주위를 살피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조……심해.”

……뭐?

뜬금없이 무슨 말이지. 요한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뱉어 내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레온하르트 악셀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쪽이랑 같이 온 남자. 바스티안 랄프. 그 남자…… 조심하라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

“그 남자, 게이라더군.”

“……!”

요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이없어하는 요한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레온하르트가 염려를 가득 담은 음성을 내뱉었다.

“계속 지켜봤는데 역시 신경 쓰여.”

“…….”

“복귀하자마자 그쪽을 이 프라이빗 레스토랑으로 데려온 것도 그렇고…… 그쪽을 바라보는 눈길도, 심상찮고.”

“하…….”

“아무래도 그쪽이 순진해서 아직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왠지…….”

“주제넘군요.”

“……뭐?”

얼음장같이 차가운 요한의 말에 한숨을 푹푹 내쉬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요한은 빙긋 웃었다.

“저를 향한 ‘복수’는, 이틀 전 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

“이제 제 동료의 험담까지 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화가 나신 모양인데.”

“이봐, 난 그게 아니라…….”

“저와 아무 사이도 아닌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습니다.”

선을 긋는 요한의 발언에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코웃음까지 치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면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레온하르트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제가 누구와 무엇을 하든, 이성애자인 그쪽한테는 간섭받고 싶지 않습니다.”

“…….”

“당신은 당신이 원래 가던 길을 가십시오.”

나는 내 길을, 갈 테니.

31화

[그럴 리가 있나. 랄프가 게이라니, 말도 안 돼. 네가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야?]

올리비아의 말에 심장이 철렁거렸다. 하여 레온하르트가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인상을 쓰며 이안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빙긋 웃던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소문’이라는 거죠. 그 말을 꺼낸 사람이 랄프의 개인 메디컬 팀에서 일하는 친구라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거고.]

[…….]

[하긴. 아무래도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겠죠. 업계 특성상, 게이 선수라는 낙인이 찍히면 동료 선수들한테도 좋게 보일 리 없으니. 스포츠계는 게이들한테 야박하지 않나요?]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말한 뒤, 저를 응시하는 올리비아의 말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바스티안 랄프가 게이라니.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지만 그 말은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서 크게 부풀어 올랐다. 환하게 웃고 있는 요한의 모습과 그런 그의 손을 맞잡은 바스티안 랄프의 모습이란.

‘빌어먹을.’

그 뒤로 화제를 바꾸어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올리비아나 이안이 뱉어 내는 말이 어디로 들어오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요한의 눈앞에 앉은 흑발 남자가 어쩌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두근두근.

가슴이 불쾌할 만큼 빠르게 뜀박질했다.

[합석…… 말입니까?]

결국 요한이 나이프를 떨어트린 틈을 노려 레온하르트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올리비아가 꺼낸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해하는 바스티안을 향해 특유의 미소를 건네며 그의 허락을 구했다.

[레온! 너 미쳤어? 갑자기 합석은 무슨 합석!]

레온하르트의 뜬금없는 제안에 기겁한 이안 키스트가 빙긋 웃는 그를 잡아끌며 불같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곧 저보다 더 즐겁게 바스티안 랄프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에 더는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당시의 레온하르트에게 있어 중요했던 건, 오직 싸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흑발 청년이었으니까.

그래도 말이지.

[제가 누구와 무엇을 하든, 이성애자인 그쪽한테는 간섭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매정하게 굴 건, 없지 않나.’

차디찬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한 뒤 돌아서던 요한을 잡지 못했다. 웬일인지 가슴 한구석이 콕콕, 따끔거려서인지 더욱.

‘간섭이라니.’

레온하르트 악셀은, 그저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제게 처음이었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이 처음이었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더욱더 그랬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나. 그래도 한때 그와 ‘친구’가 되려고 했던 사이인데. 게다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순진한 소년을 노릴지도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비록 그와 ‘친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원래 가던 길을 가십시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자작극의 진상이 밝혀진 이상, 레온하르트는 더 이상 그와 얽힐 이유도 없고, 가급적 얽히지 않는 편이 신상에 좋았다. 혹여나 요한이 악심을 품고 레온하르트와의 일을 타블로이드지에 흘리기라도 한다면,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랬다가는 그쪽의 타격이 더 클 테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알려진다는 가정하에, 더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 쪽이었기에 그가 그들 사이의 일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 가던…… 길이라…….’

어쩜 이리 찝찝한 걸까.

어째서 가슴 위에 돌을 얹어 놓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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