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59)

‘…….’

보통 요한의 기상 시간은 오전 7시. 그러나 그는 이미 눈꺼풀을 올린 상태였다. 요한이 평소보다 이르게 눈을 뜬 것이 벌써 이틀째. 그는 지난 목요일 밤 이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숨도 자지 못하니 피곤이 누적되어 온몸이 뻐근하기 그지없다.

오전부터 있을 훈련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잠을 청했어야 하거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그의 취침을 방해했다. 좋지 않다. 혹시나 경기에 나설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신체 리듬을 최상의 상태로 맞추어 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니.

이렇게까지 요한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이틀 전 목요일 밤, 퀸 레베카 시어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다, 당신은!]

평소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요한이었지만, 레온하르트 악셀의 집에서 마주쳤던 좀도둑을 ‘그’의 대기실에서 발견한 순간 굳어 버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엔 복면을 쓰고 있었으나, 시큐리티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가던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상대 역시 그러한 요한을 기억하고 있었던 건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요한은 그런 남자를 무심하게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서, 설마, 저를 신고하려는 겁니까?]

묵묵히 ‘999’번을 누르려 하던 요한에게 예의 ‘좀도둑’이 다가왔다.

요한은 ‘계속 접근하면 대응할 겁니다.’ 하고 차갑게 일갈했다. 그리고 힘껏 999를 누른 뒤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뻗으려는 순간, 예의 남자가 외쳤다.

[여, 연극이었어요!]

[……?]

[연극…… 연극이었다고요, 그날 있었던 일은!]

다급히 외친 남자의 말을 처음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연극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황당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남자가 덜덜 입술까지 떨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게 됐다. 그동안 제게 벌어졌던 모든 일이…… 전부 누군가의 ‘설계’였다는 것을.

[잠깐, 잠깐만 기다…….]

몇 분 뒤, 자신이 없는 사이 대기실에서 벌어진 소동에 대해 듣고 나타난 금발 사내가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한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요한은 그런 남자에게 차갑게 대꾸하고 그의 곁을 지나쳤다. 그리고 요한이 퀸 레베카 시어터를 나서는 그 순간까지, 남자는 요한을 따라 나오지 않았다.

[우리,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저와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 스스럼없이 다가오던 남자는 솔직히 불편했다. 그러나 불편한 마음이 분명 존재함에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고,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넬 때마다 요한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싫지 않은 게 아니냐는 안나마리아의 말은 결과적으로 현실이 되었다. 자신도 놀랄 만큼 그와 가까워졌고, 그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저 역시 그의 안부를 궁금해할 정도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저를 곤경에 빠트리려던 그 남자의 수작일 줄이야.

‘무슨 의도였지.’

어째서 접근한 걸까.

대체 왜 저와 친구가 되려 했을까?

[친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나 같은 괜찮은 사람이 친구라면 더욱.]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꽤, 아니 조금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목소리로 사람들을 홀리는 배우답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면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

어쩌면 마음을 열어도 좋을지 모르는 사람.

친구가 되어도, 괜찮을 사람.

그래서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람과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 가고, 점점 사사로운 일까지 주고받게 된 걸까.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과 확연히 다른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점점 그의 페이스 안으로 들어가는 자신에 대해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그의 이름이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고,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은근히,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연락을…… 기다린 걸까.

“……귀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요한 너도 그 녀석이랑 잘 지내는 게 앞으로의 팀 활동에도 많은 도움이 될…… 요한.”

“…….”

“요한!”

아.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앨리슨 디어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요한은 뒤늦게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를 응시했다.

“……앨리.”

“뭐야. 너, 내 말 듣고 있었니?”

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힐긋거리는 앨리슨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른 아침부터 요한을 LTC로 데려다주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온 앨리슨은 마침 멈추어 선 신호에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앨리?”

“…….”

“앨리?”

“너, 요 며칠 조금 이상해.”

“……예?”

“답지 않게 얼이 빠져 있잖아.”

“…….”

“요한, 혹시 무슨 일 있어? 동료들이 널 질투라도 하는 거니?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튄다고 너를 괴롭히는 거라면, 주저 말고 언제든 얘기를…….”

“앨리.”

“으응?”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

“정말이에요. 별일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요한.”

“신호 바뀌었는데…….”

아무래도 어두운 요한의 얼굴이 신경 쓰인 모양인지 앨리슨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요한의 활동을 관리해 주는 에이전트이기도 했지만 요한의 어머니인 은진으로부터 홀로 남은 요한을 부탁받기도 했기에, 요한의 사생활 역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려 섞인 기색을 감추지 않는 앨리슨에게 빙긋 웃어 준 요한은 어느새 빨간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뀐 신호등을 가리켰다.

“앗! 어, 어어! 갑니다, 가!”

요한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긴 앨리슨이 깜짝 놀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하자 요한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은…….’

그 남자에게 아주 조금은 흔들렸기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 * *

앨리슨의 차를 탄 요한이 LTC에 도착한 건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점이었다.

관계자 및 선수 전용 출입구에 요한을 내려 준 앨리슨을 배웅한 그는 곧장 드레싱 룸으로 향했다. 10시부터 예정되어 있는 오전 트레이닝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선발 출전할 선수는 오전 트레이닝 세션 직전 팀 토크에서 발표된다. 앨리슨은 A매치 직전에 열린 경기에서 골맛을 본 요한이 무조건 선발 출전할 것이라 확신했지만, 요한은 굳이 그에 응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만 그려 보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요한이 막 드레싱 룸과 이어진 모퉁이로 들어섰을 때,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동료 선수들의 음성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부상은? 다 회복한 거야?”

“물론.”

“이제 살았네! 공격진에 숨통이 좀 트이겠어.”

“환영해, 바티!”

……바티?

쿵, 하고 가슴이 철렁거렸다.

내내 가라앉아 있던 요한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어이, 꼬맹이. 왜 앞에서 길을 막고 서 있…… 윽. 얄미운 녀석이 돌아왔군. ……어이, 랄프!”

드레싱 룸 앞에 멈춰 서 있는 요한의 등을 툭 치며 짜증 섞인 음성을 흘리던 디에고 가르시아가 요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에 큰 소리를 내뱉었다.

두근.

드레싱 룸 안에서 다른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흑발의 남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198센티로 알려져 있는 장신의 축구 선수가 허공에서 디에고와 눈을 마주치더니 빙긋 입꼬리를 올리는 게 보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디에고와 요한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가르시아,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나야 뭐. 그런데 너 분명 5주 진단 아니었나? 지금은 3주째인데.”

“하하. 내 회복력이 보통 사람들보다 좀 빠른 편이긴 하지.”

“하여간…… 특이한 놈.”

“칭찬이지?”

“마음대로 생각해. 그나저나 앞으로 다시는 그런 민폐 끼치지 말도록.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하여간 넌 칭찬도…….”

분명 복귀를 반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뱉어 내는 말들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디에고 가르시아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을 들으면서도 피식 웃고만 있던 흑발 남자가 디에고의 옆에 서 있는 요한을 내려다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한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봐, 꼬맹이. 뭘 그리 입을 벌리고 있어?”

“……네?”

“놀라긴. 랄프, 소개할게. 여긴 비츠 놈이 빠진 사이 그 녀석 대신 내 어시를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는 꼬맹이.”

“…….”

“어이.”

“백……요한…… 아니, 요한 백입니다. 반갑습니다, 랄프 선배님.”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요한의 등을 툭 치며 눈앞의 남자에게 말할 것을 재촉하는 디에고의 행동에 요한이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

그러자 긴장한 요한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흑발 남자가 갑자기 양팔을 번쩍 들더니 그를 와락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요한은 난데없는 상황에 크게 당황하여 그를 밀쳐 내지도 못했다.

남자는, 그런 요한을 안은 채 속삭였다.

“요한 백, 나도 재활하면서 네 활약 지켜봤어. 까탈스러운 디에고와 발을 맞추는 폼이 장난 아니던걸? 정말 만나고 싶었다고, 요한! 아, 요한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지?”

“아…….”

“그런 의미에서 말이야.”

호쾌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가던 남자가 얼떨떨해하는 요한을 놓아주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오늘 저녁 식사는 나랑 하도록.”

“예?”

“아니. 넌 반드시 나랑 식사를 해야 해.”

……뭐?

28화

런던 FC에서 최고로 이름난 선수이자 왼쪽 윙 포워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스티안 랄프’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타고난 ‘스타’였다.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독일 국가 대표에 발탁되어, 열아홉이 되었을 때 대표 팀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독일의 신성에 전 세계는 열광했고, 온갖 빅 클럽의 러브콜을 받았다.

독일 리그인 분데스리가에서 겨우 이름을 알리던 그는 자국의 월드컵 우승 전후로 달라진 위상을 보여 주었는데, 단적인 예로 스페인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두 클럽이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전쟁을 펼친 점에 있었다.

바스티안을 데려가기 위해 막대한 이적 자금을 들이민 두 클럽의 대시가 있었지만 놀랍게도 새로운 도전을 강행하려던 바스티안이 선택한 팀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리그 내에서만 경쟁력이 있던 런던 FC였다.

[런던의 우중충한 날씨가 마음에 들어서요. 게다가 여기서도, 발롱도르는 들 수 있잖아요?]

예의 스페인 클럽으로 이적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면 축구 선수들이 탈 수 있는 궁극의 상, 발롱도르(Ballon d'or)와도 가까워지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선택했냐 묻는 기자들을 향해 바스티안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겨우 열아홉 소년이 뱉어 낸 말이라기에는 오만하다는 평이 없지 않았으나, 바스티안 랄프는 실력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바스티안의 영입 이후로도 스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런던 FC는 상승세를 타 4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세 번째 우승 이후 바스티안은 그토록 꿈꾸던 발롱도르를 수여받았다.

[전 이 팀이 마음에 들어요. 다른 클럽들의 관심도 영광스럽지만, 런던에 남아 팀의 레전드가 되고 싶군요.]

팀이 우승을 할 때도, 우승을 하지 못할 때도 언제나 팀에 남아 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선언한 바스티안 랄프의 모습을 TV 화면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가 바스티안이 런던 FC와 두 번째 재계약을 했을 시기였고, 런던 FC가 승점 1점 차로 준우승에 머물렀던 시기였다.

바스티안이 5연속 우승에 실패한 런던 FC를 떠날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루고 있을 때, 바스티안은 보란 듯이 재계약 사인을 하는 과정을 보여 주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어머니.]

[응?]

[저도, 저곳으로 가고 싶어요.]

[저곳이라니? 아! 런던 FC 말이니?]

해외 유수의 클럽으로부터 유소년 입단 제안을 받고 있던 요한이 런던 FC의 유소년 팀으로 입단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바스티안 랄프라는 특별한 선수와 함께 뛰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서였다.

그래. 이쯤에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바스티안은 요한 또래의 축구 선수들에게는 영원한 우상과도 같았다. 물론 요한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식……사, 말입니까?”

떨렸을까.

그의 발자취를 좇아 런던 FC에 입단했고, 그처럼 되고 싶어 훈련에 매진했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쳤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던 터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래, 저녁 식사.’ 하고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바스티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내일 경기가 있으니 와인은 못 마시겠군. 간단하게 스테이크 정도는 썰어도 될 것 같은데. 어때, 괜찮나?”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바스티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요한에게 내리꽂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식사라니.

런던 FC의 바스티안 랄프는 몹시 특이한 성격을 지닌 사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초면에 식사 제안을 건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우상이자 존경하는 선배인 바스티안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던지라 요한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같이 가도록 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고 가르시아가 요한을 향해 툭 말을 던졌다. 명령과도 가까운 그 말에 요한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 디에고가 쯧쯧 혀를 차며 바스티안을 힐긋거리더니 요한에게 설명해 주었다.

“랄프 녀석은 징크스가 있어.”

“……네?”

“자기랑 호흡을 맞추게 될 것 같은 ‘스트라이커랑’은 첫 경기를 뛰기 전 반드시 식사를 함께 해야 하지. 그걸 하지 않으면 파트너와 호흡이 잘 맞지 않게 된다나, 뭐라나.”

……아.

“귀찮겠지만, 웬만하면 맞춰 줘. 안 그러면 훗날 두고두고 꼬맹이 널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하하. 이봐, 가르시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요한이 날 속 좁은 사람이라고 오해하겠어!”

“흥. 좀생이 맞잖아. 비츠 녀석한테 한 걸 본 게 있는데, 알려 줄 건 알려 줘야지.”

호탕하게 웃는 바스티안의 외침에 디에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을 흔들며 먼저 드레싱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짓던 바스티안은 말없이 서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식사, 같이 하는 거지?”

요한은 그런 바스티안을 향해 얼굴을 아래위로 주억였다.

* * *

런던 남서부 첼시 지역의 킹스 로드에 위치한 ‘MVP 레스토랑’은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식당이었다.

런던에 거주하는 유명 인사들 중 파파라치에게 자주 시달리는 이들이 특별한 미팅을 가지거나, 혹은 일을 처리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으로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는다면 입장 자체가 불가능했다.

연락을 해 두었던 것도 아닌데 ‘MVP 레스토랑’으로 저를 데려가는 이안을 보고 왠지 모를 수상한 느낌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이안과 자신은 도착하기 전 전화 한 통이면 가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경우도 있었기에 큰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며 두 남자를 안내하는 웨이트리스의 뒤를 따라 걷던 레온하르트는 뚝 멈춰 선 웨이트리스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진 까닭은 두 남자가 안내된 테이블에 이미 선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처럼 정열적인 적발을 지닌, 웬 여인이.

“……이안.”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숙이며 사라지는 웨이트리스를 향해 윙크를 보내던 이안의 이름을 부른 건 당연했다. 이안 키스트는 살짝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움찔거렸다. 그러다 적발 여인을 향해 손을 살짝 들어 보이더니, 테이블과 떨어진 곳으로 레온하르트를 이끌었다.

“쉿. 레온, 그렇게 얼굴을 굳힐 필요는 없잖아?”

“이안 키스트.”

“하하. 레온, 사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어휴. 그래, 인마. 소개팅이다, 소개팅!”

뭐?

“아니. 흠흠. 엄밀히 따지면 소개팅이라기보다는 팬미팅에 가까우려나…….”

“무슨 소리야.”

레온하르트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노려봤다. 그러자 이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실은 저 녀석, 올리비아 후안이라고 내 사촌 동생이야.”

사촌 동생?

“오늘 공연장에 왔었거든. 네 팬이더라고. 그래서 나한테 너랑 식사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냐고 묻는 거야. 네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가끔은 분위기 전환도 필요하잖아. 안 그래?”

“…….”

“게다가 인마,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사촌한테 잘 보이고 싶은 이 오빠의 마음도 이해해 달라고.”

“…….”

“게다가 올리비아 저 녀석, 스페인에서 잘나가는 세무사야. 그런 녀석이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는데 한 끼 정도는 괜찮잖아? 그러니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오늘 있었던 불쾌한 일은 잊어버려! 그리고 사랑은, 사랑으로 잊어야 하지 않겠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란 말이지!”

“…….”

“이봐, 레온. 올리비아 녀석, 내 사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은 여자다. 대화 나누다 보면 내가 왜 이 자리에 널 데려왔는지 이해할 거야.”

툭툭.

이안은 할 말을 잃은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손끝으로 두드리더니 빙긋 웃었다.

[잘 생각했어. 좋은 거 먹으면서 기분 푸는 것만큼 후련한 일이 없지!]

어쩐지 저를 차에 태우는 내내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혼란스럽게 만들더라니.

레온하르트는 단호하게 ‘싫어.’ 하고 말하며 뒤돌아서려다 멈칫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어야 하지 않겠어?]

……사랑이라니?

“이안,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응? 뭐가?”

“…….”

“레온?”

“아니, 됐다.”

저를 향해 ‘사랑’ 운운하는 이안의 말이 거슬렸다. 대체 자신의 어떤 면을 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할 수 있었던 건지. 도통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안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레온하르트는 이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적발 여자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젠장.’

요 이틀 동안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날 밤 있었던 일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올리비아라는 이안의 사촌 동생은 그를 발견하고 하얀 두 볼에 발그레 홍조까지 띠고 있는 상태였다.

레이디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용납하지 못했던 레온하르트의 철저한 기사도 정신이 새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자식이 뭐라고.’

확실히 이안 키스트의 말대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찝찝했던 마음을 훌훌 털어 버리고 주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복수할 생각으로 시작했던 그 흑발 청년과의 일은 깔끔하게 지워 내고, 그를 만나기 이전의 자신만만하고 힘이 넘치던 레온하르트 악셀을 되찾아와야만 했다.

그런 첫 번째 과정으로, 소개팅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는 했다.

“……좋아.”

“뭐?”

“만나겠다고.”

레온하르트는 ‘정말?’ 하고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짓는 이안을 무시하고 자신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큰 눈을 일렁이고 있는 적발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가 테이블 앞에 멈춰 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를 향해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려 했다.

“반갑습니다, 미스 후안. 악셀입니다. 이안의 사촌이라고 들었는데…….”

“이쪽입니다, 랄프 씨! 저기 계신 저분들의 옆 테이블이요.”

“들었나? 저쪽이라는군, 요한.”

……어?

‘요한?’

29화

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두근두근.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올리비아 후안을 향해 내민 손끝이 파르르 떨릴 만큼. 아마도 이유는 한 가지일 거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로, 하지 않았나?’

레온하르트 악셀은 코웃음을 쳤다. 반응하지 않기로 한 일에 무의식적으로 귀를 쫑긋거리는 것을 보면 저 역시 그 흑발 청년과의 일이 내내 마음에 남았던 건지도.

하지만 이제 그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렇게 되고자 했던 ‘친구’도 아니었으며, 복수도 무의미했다. 상처받은 그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어쩐지 활활 타오르던 복수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중증이군.’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올리비아 후안은 먼저 손을 내밀었으면서 바로 악수를 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뒤늦게 생긋 웃으며 그녀가 건넨 손을 잡으려 했다.

“예, 선배님.”

……!

그러나 연이어 들려온 귀 익은 음성에 레온하르트의 손끝이 다시 한번 떨렸다. 무대 위에서의 실수로도 모자라, 이제는 ‘요한’이라는 이름 하나하나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타박하던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재빠르게 아래로 내리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커다란 키의 남자와 함께 제가 서 있는 테이블 옆으로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가 시야로 들어온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아.”

상대 역시 레온하르트를 발견했는지 짧은 탄성을 흘렸다.

“왜? 아는 사람이야?”

그와 함께 있던 흑발 남자가 귀신 보듯 그를 응시하는 레온하르트를 흘긋거리더니 물었다. 그, 그러니까 요한은 그런 남자의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뇨.”

뭐?

“모르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창백하게 굳은 레온하르트에게서 눈을 떼더니 안내받은 테이블 의자에 착석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웰비 감독이 처음 너에 대해 알려 줬을 땐, 장난을 치는 줄 알았지. 어쩌면 마이크보다 대성할 녀석이 리저브에 있다는 거야. 한데 웬일인지 근래엔 자주 출전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걱정하더라고. 저번 시즌쯤에는 다른 코치들한테 추천을 받을 거라 여겼는데, 아무 말이 없어서 혹시 시즌 아웃을 당한 게 아닐까 여겼는데 그건 또 아니라 하고. 그래서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리저브 팀으로 가 보라며 웰비 감독한테 말한 사람이, 바로 나야. 아참. 나 역시 1군 데뷔가 빨랐다는 건 알고 있지?”

“……예. 데뷔전까지 직접 봤습니다.”

“어? 내 데뷔전?”

“정확히는 국가대표 데뷔전이네요. 잉글랜드와 독일의 친선전이었죠. 전반 15분쯤, 먼저 출전한 유리히 선수가 갑작스럽게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대신 교체 출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걸 어떻…… 요한.”

“네?”

“너, 내 팬이었어?”

“선배님은…… 제 우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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