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59)

[2주 전부터 연애하고 있잖아, 너.]

연애라니, 말도 안 된다.

내가 그 자식과?

‘웃기는군.’

현재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은 그저 연극일 뿐이다.

‘단지 호감을 사려는 행위일 뿐이라고.’

상대에게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보여 주기 위해.

친구로 삼기에 무척이나 가치 있다는 것 역시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이 받았던 치욕을 돌려주기 위해, 상대를 완벽하게 제 사람으로 만들려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악셀 씨, 스탠바이 해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안의 발언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스태프의 말에 고개를 까딱이며 무대 위로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

“레, 레온! 크, 큰일 났어!”

공연은 완벽했다.

그가 세운 계획만큼이나.

‘완벽하지 않을 리 없지.’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 악셀이 직접 출연한 공연이니.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관객’도 자리하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컨디션으로 공연에 임할 수 있었다.

‘큰일?’

관객들의 뜨거운 함성에 온 힘을 다해 인사를 하고 커튼콜을 마친 레온하르트는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저를 향해 뛰어오는 마커스 젠슨이 보였다.

“내,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아!”

……뭐?

25화

[잠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백 선수를 네 대기실에 데려다주고 전화를 받으러 갔어.]

헉헉,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마커스 젠슨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그의 상기된 목소리가 막 공연을 끝내고 내려온 레온하르트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빙긋 웃으며 마커스를 반기던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래서?’ 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뱉자 움찔하던 마커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네 대기실 쪽이 시끌시끌한 거야. 스태프들도 가득하고.]

[…….]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갔더니 백 선수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그,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연유를 알아봤거든? 그런데…….]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 가슴의 박동이 멈추질 않는다. 무대 뒤편에서 자신의 대기실이 있는 곳까지는 꽤 거리가 되었기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정신 없이 달렸다.

살짝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온 힘을 다해 대기실로 달려간 레온하르트는 겨우 도착한 제 대기실 쪽에서 마커스가 언급했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울릴 때쯤, 레온하르트는 어떻게든 대기실 안쪽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태프들을 밀쳤다. 레온하르트를 발견하자 움찔하던 스태프들이 뒤로 물러났다. 레온하르트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닫혀 있던 대기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쾅!

“……하아, 하아.”

앞만 보고 달려왔던지라 가쁜 숨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온다. 그러나 차마 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미간만 찌푸리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눈에 무표정한 얼굴의 흑발 사내와 그런 사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베라 펠릭스가 보였다.

잔뜩 흥분한 상태였던 심장이 쿵, 바닥을 내리찧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 베라와 달리 서서히, 지독할 정도로 느릿하게 제게로 눈을 옮기는 요한을 발견하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아, 악셀 씨!”

문을 연 상태로 얼어 버린 레온하르트의 등장에 사색이 되어 있던 베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당혹감과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그렁그렁 눈에 눈물까지 맺은 채로 제게 다가와 쿵, 무릎을 꿇는 베라를 보자니 속이 쓰려 왔다.

레온하르트는 ‘죄송합니다, 악셀 씨…….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손을 비벼 대고 있는 베라를 내려다봤다.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도와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베라 펠릭스는 ‘그날’ 이후 런던을 떠나 영국 북부의 에딘버러로 향하기로 레온하르트와 합의를 보았다. 딱 한 번의 연극으로 인해 제 딸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며, 레온하르트에게 수십 번도 넘게 감사를 표했던 그였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제 바지 자락을 잡은 채 흐느끼고 있는 베라를 내려다보다, 후우 하숨을 내쉬며 그를 일으켜 주었다.

“펠릭스 씨, 무슨 일입니까? 케이트 양에게 변고라도 생겼나요?”

“흐흑, 악셀 씨. 악셀 씨…….”

“진정하십시오. 일단…… 여기 앉으시죠.”

‘누군가’의 눈이 제게 꽂혀 있다는 것을 똑똑히 인지하면서도 레온하르트는 차분하게 베라를 소파로 안내했다. 베라 펠릭스는 닭똥보다 굵은 눈물방울을 쉴 새 없이 떨어트리며 자신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라 펠릭스의 사정이란 이러했다.

그는 레온하르트와의 연극 이후 아픈 아이와 함께 곧장 런던을 떠날 준비를 했는데, 아이의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고 했다. 서둘러 런던 내 병원에 입원시키기는 했으나 곧장 수술에 들어가야 했고, 예의 수술이 워낙 정교하고 세심한 수술이었던지라 비용이 상당했다고 한다. 하여 염치 불구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레온하르트에게 또 한 번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다 요한을 마주친 것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베라 펠릭스를 응시하다 쓴웃음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펠릭스 씨.”

“……!”

“런던 어느 병원이라고 하셨습니까?”

“아, 악셀 씨?”

“제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하겠습니다. 어이, 마키! 거기 있어?”

“어? 어어!”

대기실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마커스 젠슨이 레온하르트의 외침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파 쪽으로 달려온 마커스에게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마키, 여기 계신 펠릭스 씨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케이트 펠릭스 양의 수술비와 입원비를 모두 계산하도록 해.”

“……뭐?”

“부탁해. 펠릭스 씨,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에딘버러에도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런던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쪽도 방법을 찾아 달라고 말이죠.”

“흐흑…… 악셀 씨.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키.”

“아…… 알았어. 펠릭스 씨, 따, 따라오시죠.”

레온하르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격하는 베라 펠릭스를 보며 당황해하던 마커스가 그를 데리고 대기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베라 펠릭스를 부축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던 베라는 문을 닫고 나설 때까지 계속해서 레온하르트에게 고개를 꾸벅였고, 레온하르트는 그와 마커스가 사라질 때까지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닫혀 버린 대기실의 문을 쳐다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숨 막히는 고요에 낮은 욕설을 삼켰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흑발의 남자가 제 등 뒤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 선수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경찰을 부른다고 소동을 일으킨 것을 보면, 틀림없이 상황을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이를 어찌 해명한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베라 펠릭스의 문제가 더 급한 상황 같아 그 일을 먼저 해결하기는 했다만, 제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뜻대로 처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뚜렷한 해결법이 나오지 않아 인상을 쓰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깊은 숨을 내쉬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 요한을 향해 밝은 음성을 내뱉으려 했다.

“하하, 미스터 백. 오늘 공연은 어땠…….”

“그러니까 결국은, 다 거짓이었던 거네요.”

정확하게 핵심을 찔러 버리는 요한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욱 과장된 미소를 짓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요한은 생글거리던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는 레온하르트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 집에 든 도둑부터 시작해서 시큐리티, 그리고 홀로 못 자겠다며 고백한 트라우마까지. 전부, 거짓이었어.”

“미스터 백, 그게…….”

“정말 저질이군.”

……!

레온하르트의 떨리는 녹안을 바라보던 요한의 입술 사이로 차갑고 서늘한 말이 쏟아졌다. 긴장하고 있던 심장이 파스스, 바스러지는 느낌이어서 레온하르트는 그에 대해 반응하지 못했다. 요한은 넋이 나가 버린 레온하르트를 냉랭하게 응시하더니 곧 돌처럼 굳어 버린 그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뒤늦게 그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레온하르트가 제 옆으로 걸어가는 요한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은 1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싸늘한 얼굴을 한 채 대기실을 빠져나가려던 요한이 레온하르트에게 잡힌 왼손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말, 말을 해야…….’

뚝 멈춰 선 요한에게 어떤 식으로든 말해야 한다고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어찌 된 셈인지 덜덜 떨리는 입술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벽안과 허공에서 부딪쳤다.

“요…….”

“손, 놓으십시오.”

하지만 싱긋 웃으며 건네는 요한의 발언에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손목을 꽉 붙들었던 손을 스르륵, 놓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

정확히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엿 먹인 예의 동양인에게 제가 받았던 모멸감과 치욕을 되돌려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 발칙한 연극을 꾸며 타깃이었던 상대를 속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연극으로 인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닌가?

저도 좋고, 연극에 동참해 준 배우에게도 좋은 일이니 일석이조인 상황이지.

물론 연극에 속아 넘어간 대상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흥분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겠지만, 끝까지 잘 속인다면 되는 일이었다.

‘끝까지…… 잘 속였다면, 말이지.’

[다시는 연락하지 마십시오. 당신이란 사람을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심정이니까.]

스르륵 손을 풀어 버린 레온하르트를 향해 칼날이 서린 음성을 뱉어 낸 남자가 떠나간 지 벌써 이틀이 흘렀다.

이미 끝난 일은 되돌릴 수 없기에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 될 것을, 어찌 된 셈인지 그가 뱉어 낸 말들이 머리를 장악해서인지 제대로 된 사고를 이어 나갈 수가 없다.

‘빌어먹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욕설이 목구멍에서 맴돈다.

목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 이후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은 여전히 진정할 줄을 몰랐다. 레온하르트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레온하르트가 세웠던 완벽한 계획은 갑작스러운 베라 펠릭스의 등장으로 인해 처참할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딸아이에게 일이 생겨 절박한 심정으로 저를 찾아온 베라 펠릭스를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 답답하기만 했다.

‘돌아…… 버리겠군.’

레온하르트 악셀이 출연 중인 뮤지컬 공연은 수요일을 제외한 6일 공연 체제였다. 그중에서도 금요일과 일요일은 저녁 공연 외에도 마티네 공연을 추가로 올리게 된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토요일은 두 번의 공연이 열리는 일요일 공연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맞이하기 위해, 마티네 공연만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악셀은 조금 전 끝났던 마티네 공연에서 배우 데뷔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렸다.

[레온! 너 미쳤어? 아까 그 대사는 뭐야! 1막에서도 그러더니, 제정신이야?]

지금까지 무대 위에 오를 때만큼은 사적인 일 따위는 철저히 배제하며 완벽한 공연을 만들어 오던 레온하르트 악셀이 해서는 안 될 대사와 박자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씩이나.

26화

레온하르트 악셀은 가문의 남자라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정·재계로 진출하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여덟, 무작정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악셀가의 가장인 아버지, 이그신 폰 악셀과 무려 4년 동안이나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가 자국에서 조금씩 뮤지컬 배우로 자리를 잡는 과정을 지켜본 이그신은 그의 나이 21세 가을쯤, 겨우 레온하르트를 인정해 주었다.

[이미 시작한 일이니 끝을 보도록 해라. 그리고 절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도록.]

결정을 내리면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버지 이그신의 마음을 돌렸다는 것에 크게 기뻐할 틈도 없이, 레온하르트는 더 큰 세계로 향하기 위해 뮤지컬의 본고장 웨스트엔드 진출을 결심했다. 그것이 그의 나이, 21세 겨울 무렵이었다.

독일에서 이름난 배우는 아니었지만 실력만큼은 대극장에 오르는 배우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관계자들의 평을 들어 온 레온하르트는 22세 봄, 꿈에 그리던 웨스트엔드에 데뷔한 이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뮤지컬의 본고장으로 온 이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래서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시간은 많다고 여겼다.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매력을 표출할 수 있는 연기를 했고 가급적 모든 오디션에 참석했다.

[악셀 씨는 정말 대단하군요! 웨스트엔드 진출 이후로 줄곧 지켜봤는데 악셀 씨만큼 대사 실수가 전무한 배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이번에 올릴 공연에 당신을 주연 배우로 발탁하고 싶습니다. 악셀 씨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소극장의 주조연 배우로 활동했던 독일에서와 달리, 스윙부터 시작하여 앙상블, 조연, 그리고 극의 주연까지 서는 데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레온하르트의 타고난 발성과 가창력, 그리고 연기력이 뛰어났다는 것이 관계자들로 하여금 그를 주목하게 만든 주원인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높이 산 점은 바로, 데뷔 이후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은 그의 완벽함에 있었다.

“그게 사실이야? 악셀 씨가 실수를 했다고?”

“그 악셀 씨가?”

“1막에 한 번, 2막에 한 번. 총 두 번이래.”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밝혀진 거지. 악셀 씨도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쉿, 듣겠어.”

살짝 열린 대기실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던 평소와 다른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커튼콜 당시 그를 향한 박수 소리가 약하게 들린 것 같다면 그의 착각일까.

이미 공연은 끝났고, 무대 위를 내려와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있거늘 저를 바라보던 관객들의 시선이 잊히질 않는다. 쿵쿵, 귀를 먹먹하게 만들 만큼 커다란 심장 박동이 멈추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제길. 제길.

“……제기랄!”

쾅!

결국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앞에 놓여 있던 소파 앞 테이블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대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냉랭하게 굳어졌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대기실 풍경을 바라봤다.

‘어째……서지?’

대체,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납득할 수가 없다.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물론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레온하르트 악셀은 하나의 공연에 들어가기 직전, 수천 번의 연습을 거친 끝에 무대 위에 오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밤을 새워서까지 그 부분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좋게 말하자면 완벽 주의지만, 나쁘게 말하면 결벽증, 혹은 강박증이라고도 불릴 만큼 레온하르트는 무대 위의 실수에 민감했고, 아주 작은 미스도 용납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실수를 저질렀다.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지 6년 만에, 그리고 웨스트엔드 뮤지컬 배우가 된 지 7년 차인 바로 오늘.

“대체…… 왜.”

다른 이들 같았으면 ‘고작 두 번인데, 실수 좀 하면 어때.’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레온하르트에게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얼굴을 구기고 있기는 했으나, 실은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 원인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저질이군.]

파랗게 일렁이는 벽안을 지닌 청년이 저를 향해 뱉어 낸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차갑고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질린다는 눈빛을 지어 보인 것에, 레온하르트는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여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난 토요일 오후, 그토록 자신해 오던 공연까지 망칠 정도로 타격을 입은 것이고.

“빌어……먹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복수극에 가까웠다.

레온하르트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힘든 모욕감을 준 흑발의 청년을 유혹한 후, 자신이 받았던 모멸감을 그대로 돌려줄 앙큼한 계획.

그러나 애석하게도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모두 마무리 짓기도 전에 심혈을 기울여 세웠던 계획이 들통 나고 말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치면 되지 않나?’라고.

하지만 이미 그의 계획이 상대에게 밝혀진 이상,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제 곁을 지나치며 뱉어 낸 ‘타깃’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정말 살짝 떨리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 보자면 그는 틀림없이 이번 일에 대해 상처를 받거나 실망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레온하르트 악셀은 제 목적을, 모두 이룬 것이 아닌가?

이제 더 이상 그 빌어먹을 동양계 축구 선수를 볼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데.

‘…….’

하지만 그럼에도 레온하르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들썩이는 까닭은 대기실을 나서기 직전, 흑발 청년이 뱉어 낸 말이 귓가에 아른거려서일 거다.

[난, 당신을…….]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정확하게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꽉 악문 채 저를 노려보던 요한의 눈빛으로 짐작컨대 대충 무슨 말을 내뱉으려 했는지 예상이 가능했다.

아마도 ‘믿었는데.’ 정도의 말을, 꺼내고 싶었을 테지.

두근.

‘됐어.’

두근.

‘차라리 잊어. 잊는 거다. 어차피 찝찝한 일이었어. 복수고 뭐고, 처음부터 그런 일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날지라도 남을 속이는 일 따위는…….’

두근.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 인정한다. 솔직히 요 몇 주 동안 평소의 자신이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레온하르트 악셀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간절히 매달렸고, 전전긍긍하며 노심초사하는 제 모습이라니. 말도 안 되지.

[남자도 가능합니까?]

그날 밤은 실수였다.

아무리 좋았다 할지언정, 실수로 일어난 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도 깨끗이 잊을 것을 원했건만, 대체 자신이 무엇이 부족하여 계속해서 접근했던 걸까.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게.

‘원래대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야.’

근래 있었던 일을 모두 지워 내고 예전의 레온하르트 악셀을 되찾아야 했다. 여자를 좋아하고, 매너가 넘치며, 공연에도 완벽을 가하는, 공과 사가 완벽하게 분리되는 레온하르트 악셀을 다시 찾아야 했다.

공연에까지 지장을 주는 일 따위를 생각해 내다니.

몇 주간의 자신이 어리석기 그지없어 신물이 날 정도였다.

두근.

‘하지만 왜…….’

두근, 두근-

‘그 자식의 얼굴이, 자꾸만 맴도는 거지.’

빌어먹을!

맴돌다 못해 머릿속을 장악할 지경이다.

무대 위에서도 저를 바라보던 그 푸른 눈동자가 잊히질 않아 공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레온하르트 악셀이 난생처음으로 공연 도중 파트너가 아닌 다른 이를 떠올렸다.

그것도 자신이 임하고 있는 공연과는 전혀 관계없는, 여인도 아닌 사내를…… 말이지.

달칵.

“저…… 레온, 아까는…… 헉! 이, 이게 다 뭐야!”

미간을 찌푸리던 레온하르트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지나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이안 키스트가 엉망진창이 된 대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발견하더니 경악했다.

뒤늦게 상념에서 벗어난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상태가…… 말이 아니군.”

레온하르트는 답하지 않았다.

이안은 차갑다 못해 냉랭하게 얼어붙은 레온하르트의 녹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흠흠, 헛기침을 흘렸다. 그는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말없이 보내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계속해서 머뭇거리더니 곧 결심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과……하려고 온 거다.”

사과?

레온하르트가 미간을 좁히자 이안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 말이야.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서.”

2막의 실수 이후 무대 위의 장치가 교체되는 동안 저를 향해 버럭 외쳤던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전혀, 생각조차 못 했어.

대답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많이 그런 것도 아니고 고작 두 번이잖냐. 그것도 미세하기 짝이 없는. 오는 길에 스티브를 만났는데, 스티브는 이번 실수에 대해 신경도 안 쓰더라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지. 가끔 컨디션이 나쁜 날도 있어야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겠어?”

“…….”

“하하!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관객들도 커튼콜 때 힘내라고 박수 많이 쳐 줬잖아. 안 그래? 기운 내라고, 레온하르트!”

어찌나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는 이안 키스트의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안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답을 기다렸지만,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녹색 눈빛에 움찔하던 이안 키스트가 돌연 벽에 걸린 시계 쪽을 흘긋거렸다.

“그, 그렇지! 레온, 너 지금부터 시간 괜찮아?”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이안의 행동이 몹시 수상쩍다. 레온하르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응시하자 이안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저기압일 땐,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야 다음 날에 지장이 없어. 나가자. 나, 소호에 좋은 레스토랑 알아. 이렇게 처지는 날엔 두꺼운 스테이크와 맛좋은 와인이 최고지.”

“…….”

“……이봐, 레온하르트 악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런 표정 짓고 있을 건가? 조금은 반응을 해 주지그…… 어? 어디 가! 같이 가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저를 쫓아 대기실 밖으로 나오는 이안에게 쓴웃음을 흘렸다.

27화

짹짹.

미리 쳐 둔 암막 커튼 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침이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옆 테이블의 시계를 응시했다. 시계는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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