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공연 정리가 덜 끝났나 보군.
비록 뮤지컬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나마리아에 의해 뮤지컬 공연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던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부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공연을 마친 지금 즘, 샤워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오늘 있었던 공연에 대해 다른 스태프들과 복기를 하고 있겠지.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보지도 않고 돌아가는 것은 결코 예의가 아니었기에 요한은 대기실 문고리를 잡고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받아 와! 반드시!]
물론 디에고의 신신당부 또한, 요한이 레온하르트를 기다리는 주 원인이기도 했다.
[레온 녀석, 아무한테나 쉽게 마음을 주는 녀석이 아닌데 아무래도 백 선수가 몹시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공연 전이나 도중, 그리고 후까지.
레온하르트의 대본으로 보이는 것들과 수건, 개인 물품 등 그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는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요한은 가만히 오늘 공연을 떠올려 보다 문득 생각난 마커스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친구로는…… 나쁘지 않나.’
비록 오해로 인해 알게 된 인연이기는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호감을 드러내며 관심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치?]
저 역시, 그를 완전히 꺼리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똑똑.
‘……?’
어쩌면 하룻밤의 인연이라는 어긋난 관계를 완벽히 지워 내고, ‘친구’로서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요한은 대기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마도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임이 틀림없는 레온하르트를 반기려 꾹 닫고 있던 입술을 움직이려 했다.
“악…….”
“악셀 씨! 런던을 떠나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로 했지만, 제가 사정이 너무 급해서요. 혹시 지난번에 주셨던 그 연극의 보수, 조금 더 받을 수는 없겠습니까? 실은 저희 아이가…… 헉! 다, 당신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 가던 한 남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다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저를 귀신 보듯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낯익다 여기던 요한은,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일화에 얼굴을 굳혔다.
[다, 당장…… 돈이 될 만한 걸 다 가져와!]
놀랍게도 레온하르트의 대기실에 서서 두 손을 비벼 대는 남자는, 레온하르트의 집에서 마주쳤던 예의 좀도둑과 같은 목소리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23화
#First Half : 전반 21′ ~ 전반 30′
[하도록…… 하죠. 그 ‘친구’라는 거.]
무척이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 남자의 대답을 들은 순간, 레온하르트는 이 ‘게임’의 승기를 자신이 잡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곤혹스러움과 난처함, 그리고 체념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끝내 그가 제 앞에서 여태껏 짓지 않았던 희미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자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일단 친구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함락하기 힘들어 보이는 상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바꾸어 버린 것은 조금, 아니 매우 효력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세워 둔 ‘계획’의 첫 단계를 무척이나 잘 밟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여태껏 알고 있던 ‘친구’라는 관계가 이런 것이었나.
레온하르트는 도통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설마 문자를 보지 못한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지난 이틀 동안 레온하르트가 그를 향해 보낸 문자는 고작 한 통이 아니었으니까.
‘좀 너무한 것 같군.’
다른 사람도 아닌 제 문자에, 하루도 아닌 이틀씩이나 답장조차 하지 않는 것은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봐.”
“…….”
“어이, 레온!”
아.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핸드폰? 누구 연락이라도 기다리는 거야?”
이제 몇 시간 뒤 시작될 공연 준비를 위해 메이크업을 마친 레온하르트가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있을 때였다. 레온하르트는 언제 들어온 건지 제 코앞에 서선 툭 말을 던지는 이안의 등장에 순간 깜짝 놀랐다.
뮤지컬 에서 ‘클라우스 아들러’ 역을 맡고 있는 이안은 핸드폰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레온하르트를 수상쩍게 응시하며 싱긋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제 속을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이안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서늘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리 한가한 줄 알아? 기다리는 연락 따위 없어.”
“하하. 그런 녀석이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핸드폰만 보고 있어? 평소에는, 대기실 문만 열려도 고개를 홱 돌리는 녀석이?”
……윽.
태연하게 대답하자 이안이 정곡을 파고들며 되받아쳤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가는 말려 버릴 것 같은 느낌인지라, 레온하르트는 이안의 시선을 피했다.
이안은 제게서 눈을 돌리고 시선을 내리까는 레온하르트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핸드폰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중얼거렸다.
“천하의 레온하르트 악셀이 대체 누구의 연락을 이리도 간절히 기다리는 걸까.”
“…….”
“혹시, 이거?”
다섯 개의 손가락 중 새끼손가락을 까딱이며 묻는 이안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레온하르트는 제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내려 애쓰는 이안을 향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당장 꺼져.’ 하고 싸늘한 말을 던졌다. 그러자 피식 웃은 이안이 성큼성큼 걸어와 레온하르트 옆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궁금해서 그러지. 고고하신 악셀 님이 누군가의 연락을 이리도 간절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
레온하르트는 일부러 제 신경을 긁는 것이 분명한 이안을 노려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현재 레온하르트의 ‘타깃’인 그와는 그제인 지난 30일쯤 친구가 되었다. 내내 답보만 하고 있던 상황이 겨우 풀린 듯하여 어제도 문자를 보냈고, 한가로운 주말인 오늘까지 문자를 보냈지만 기다리던 상대에게서는 도통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간단한 아침 인사부터 시작하여 식사는 했냐는 식의 질문과 시간이 언제쯤 나느냐는 질문을 건네도 묵묵부답이니, 환장할 수밖에.
솔직한 심정으로는 ‘타깃’에게 다가가 우리가 정말 친구가 된 것이 맞냐며 화를 내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를 먼저 찾아가기에는 레온하르트의 고결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하여 그나마 자존심이 덜 상하는 문자로 연락을 취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대면하여 상처를 받는 것보다, 문자가 씹히거나 연락을 받지 않는 편이 나으니까.
“하긴, 어차피 ‘이거’라면 네가 숨기려 해도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 타블로이드지로 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이안은 여전히 대꾸 없는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레온하르트가 말릴 사이도 없이 대기실 내에 위치한 TV 전원을 켰다.
레온하르트는 안 그래도 정신없는 머리가 TV 소리로 인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안, 난 지금 이 고요를 유지하고 싶으니 TV를 볼 거면…….”
『고오오오오오올! 골입니다, 골! 동북아시아에서 온 혜성! 리저브 팀에서 콜업된 요한 백이 또다시 런던 FC를 위한 환상 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뭐?
자신의 대기실에도 TV가 달려 있으면서, 왜 꼭 여기에서 TV를 본단 말인가.
홀로 요한의 답장을 기다리고 싶었던 레온하르트는 짜증 섞인 말을 내뱉으려다 멈칫했다. TV 화면 속에서 들려온 익숙한 이름이 그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에게 화를 내려던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환호로 가득한 TV 화면으로 향했다.
『보셨습니까, 루카스 씨? 이번에도 요한 백이 결정을 지어 줬군요! 후반 75분에 교체된 후 15분도 채 되지 않아 골이라니. 아무래도 런던 FC의 콜 업 결정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야, 제가 봐도 너무 완벽한 과정이었습니다. 가르시아 선수가 넘겨준 크로스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골포스트 안으로 밀어 넣다니. 게다가 오늘이 프리미어리그 첫 데뷔에, 첫 데뷔골 아닙니까? 만약 백 선수가 이 이후로도 경기에 출전하여 골을 터트려 준다면, 마이크 비츠 선수의 시즌 아웃이 아쉽지만은 않겠습니다! 런던 FC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거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리플레이해 보면서…….』
“흐응, 또 골이군. 저 동양계 선수,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은가 본데?”
예의 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리플레이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목소리를 들은 이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이안은 현재 런던 FC와 경기를 하고 있는 상대 팀, 로젠버그 FC의 열렬한 팬이었다. 오늘 경기는 저녁이 아닌 오후에 열리는 것이었으므로, 공연 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로젠버그 FC의 스코어를 볼 생각이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TV를 켰던 이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림과 동시에 런던 FC의 팀 동료들과 함께 골 세리머니를 즐기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두근.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작게 일렁였다.
“빌어먹을 런던 FC 놈들. 어찌 저리 운도 좋은지 몰라. 이적 시장 징계로 인해 좀 내려오는가 싶더니, 이번엔 리저브에서 물건을 건져? 대체 우리는 왜 그런 운도 안 따라 주는 거야? 하여간 보드진이 멍청하면 답이 없다니……. 아, 미안, 미안. 결과가 궁금해서 틀었는데, 괜한 모습을 보였군. 레온, 너는 축구엔 관심 없지?”
“……괜찮아.”
“어?”
“틀어 놔도, 된다고.”
얼른 끄겠다고 들고 있던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이안을 서둘러 저지한 레온하르트는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원정 팬들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는 누군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게 중얼거리는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이안이 묘한 숨소리를 흘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가뿐히 무시한 채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체 왜 그리 연락이 없나 했더니, 이제야 조금은 납득이 간다.
‘경기 준비를 하느라 그랬군.’
하긴, 저 역시 프로이기에 공연이 있는 날엔 상대적으로 사생활을 멀리하게 된다. 물론 오늘은 예외였지만.
‘잘…… 웃네.’
골맛을 보고 세리머니를 즐긴 후 관중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요한은 제 앞에 서 있을 때보다 확실히 밝은 모습이었다. 어쩐지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한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씰룩이고 있을 때였다.
“뭘 그리 실실거려. 호감이라도 생긴 거냐?”
레온하르트는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을 가늘게 뜬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안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귀 따갑게.”
당황한 레온하르트가 버럭 외치자 이안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안은 말을 잇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수상한 눈으로 응시하다 투덜댔다.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이봐.”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런던 FC의 메인 모델이 됐으니 아무리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너라도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
“그런…… 뜻이었군.”
“그럼 그런 뜻이지, 뭐 다른 의도가 있을까 봐!”
“…….”
“가끔 보면 진짜 예민한 구석이 있다니까.”
기겁하는 제 반응에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끌끌 찬 이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뒤늦게 이안의 뜻을 알아차린 레온하르트가 헛기침을 흘렸다. 이안은 수상쩍은 기색이 역력한 레온하르트를 한동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한데 저 애송이 말이야. 흑발에, 푸른 눈이다. 그렇지?”
두근.
“흠…… 외양은 꼭, 얼마 전까지 네가 찾던 그 동양인이랑 흡사한…….”
“이안.”
“어?”
“스티브가 공연 시작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널 찾는 것 같던데. 차기 계약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되나?”
“……뭐?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젠장!”
두 남자가 출연 중인 뮤지컬 의 프로듀서를 언급하며 툭 말을 꺼내자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레온하르트에게 소리쳤다.
레온하르트는 이안이 서둘러 제 대기실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금 피치 위를 보여 주고 있는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리 실실거려. 호감이라도 생긴 거냐?]
호감?
레온하르트는 귀를 웽웽 울리는 이안의 말에 낮게 코웃음을 쳤다.
‘호감은 무슨.’
이건 호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가 실행해야 할 계획의 일부분일 뿐이다.
TV 화면 속의 흑발 축구 선수를 응시하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냉랭하게 빛났다.
24화
[제가 들었던 당신에 대한 정보와는 꽤 거리감이 있는 일을 이어 가고 계시군요. 그날 제가 들었던 당신은, 틀림없이 같은 남자와 두 번 이상은 자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태연한 척 굴었지만, 상대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혼동했던 것이 틀림없으니까.
대체 이 세상에 저처럼 잘나고 대단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오인할 걸 오인해야지, 꽤 황당한 변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온하르트는 동요하지 않은 척 행동했다.
발단이야 어찌 되었든 한 침대에 누워 신음을 흘리며 같이 잠까지 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같은 성별이라는, 전에 없던 리스크까지 끌어안으면서 제 실수에 대한 일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려 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얼얼해졌다.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관계자들에게까지 인정받던 레온하르트의 뛰어난 연기 실력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다시 자신이 느꼈던 분노와 모욕감을 얼굴 밖으로 표출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기도 전에 예의 축구 선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떠나 버렸지만.
‘…….’
신사처럼 행동하고 싶었건만, 저를 한낱 잠자리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남자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단 한 번도 이따위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은근히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타격을 받으면 그 배로 돌려준다는 가문의 신조를 철저하게 지켜 온 레온하르트는 상대에게 자신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철저히 보여 주고 싶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자신을 톡 건드려 놓고, 일말의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는 남자에게 제가 받은 치욕과 분노에 상응하는 대가를 선사해야 했다.
‘방법을 바꿔야겠군.’
이후, 레온하르트가 세운 계획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먼저 접근했던 이는 본인이면서, 어찌 된 셈인지 다가가기 너무도 힘든 벽을 치고 있는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친구부터 시작’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그리고 레온하르트가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특별한 연출을 강행한 것은 일종의 수단과 같았다.
“정말…… 그렇게만 하면 되는 겁니까?”
이 연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빨간 머리카락의 사내는 레온하르트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고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레온하르트가 활약하고 있는 이 뮤지컬 업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이 극장의 문을 두드린다. 저 역시 그들처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왔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가끔 전도유망한 배우 지망생들을 자신이 알고 지내는 관계자와 연결해 주는 선의를 베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돈이 급하거나, 혹은 더 이상 배우 생활을 이어 가지 못할 만한 사정이 생기는 이들이 간혹 발생했는데, 베라 펠릭스는 전후자 모두에 속했다.
‘그’와 가까워지기 위한 특별한 연출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베라와 손을 잡은 레온하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예, 펠릭스 씨. 건네드린 대본대로만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펠릭스 씨가 출연했던 연극의 연장선이라 생각해 주시면 좋겠군요.”
“아…….”
“시큐리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거든요.”
“그, 그렇습니까?”
“따님에 대해서도 염려 놓으십시오. 에딘버러 왕립 병원에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아마 에딘버러에 도착하시면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겁니다.”
“아, 악셀 씨! 감사합니다! 정말…… 크흡, 정말 감사합니다! 저 베라 펠릭스, 악셀 씨가 베풀어 주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하하, 뭘요. 그러니 너무 긴장 마시고, 평소 무대 위에서 하시는 것처럼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아셨죠?”
“물론이죠! 제가 도둑 연기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위협적인 도둑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격에 젖어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이는 베라를 향해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완벽하군.’
레온하르트는 웨스트엔드의 소극장 공연에서 도둑 역할을 몇 번이나 맡았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어 배우 생활 은퇴를 고려 중이던 단역 배우, 베라 펠릭스를 섭외하여 제집에서 작은 연극을 펼쳤다.
물론, 단둘밖에 없는 관중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베라의 도둑 연기는 혀를 찰 정도로 형편없었다.
[빈방, 있습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레온하르트의 ‘타깃’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고, 그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타깃과 친구가 된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요한과 문자만 나누던 사이에서 사사로운 잡담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물론,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자신이었지만.
“내가 듣기로 오늘 트레이닝 세션 때 사건이 있었다던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름의 방법이 있지.”
-……아.
“누구랑 시비가 붙은 거야? 그 크로비스라는 녀석, 아냐?”
-……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무슨 일인데.”
-…….
“요한?”
-후우, 정말 별일 아닙니다. 작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크로비스 씨가 제가 태클을 하는 과정에 스터드를 들었다고 생각해서…….
“스터드? 아아, 그 축구화 밑의 뾰족한 걸 말하는 거지?”
-예.
“정말 들었어?”
-그럴 리가요. 얼른 발을 뺐는데…….
“그럼 됐어. 이봐, 요한. 크로비스라는 그놈, 너무 신경 쓰지 마. 스물일곱이나 된 녀석이 유치하게 너를 질투하고 있는 거니까.”
-악셀 씨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래. 그러니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어.”
-…….
“요한?”
-고맙습니다, 악셀 씨.
“뭘. 친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나 같은 괜찮은 사람이 친구라면 더욱.”
-……!
“왜 말이 없지?”
-아뇨.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에 대해 자랑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잠시 말을 잊었습니다.
“뭐?”
-예전부터 느꼈지만 악셀 씨는 자존감이 강하군요.
“그게 싫은가?”
-……딱히.
보통 요한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접근하기는 쉽지 않지만 한번 친해지면 마음을 활짝 여는 편이었다.
하여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그와 친분을 나누는 편이 자신의 계획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레온하르트는 요한과 친구가 된 이후 매일같이 연락을 취했다.
처음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던 요한은 기죽지 않고 문자를 보내는 레온하르트에게 하루에 한 번꼴로 답을 하기 시작했고, 2주가 지나자 레온하르트와 요한은 어느새 문자만 겨우 주고받는 사이에서 가끔 전화 통화도 주고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조금만 더 두드리면 되겠어.’
오전 트레이닝이 끝난 이후 안부도 물을 겸 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던 레온하르트는 통화를 끝낸 후 입꼬리를 슥 올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지난 몇 주 동안, 상대의 신뢰를 사면서 쳐 놓은 거미줄에 먹잇감이 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 노력이 결코 허사가 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요한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천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아니었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는 돌연 든 생각에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레온! 무슨 일이야?
레온하르트는 전화를 받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를 흘리는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말을 이었다.
* * *
“이봐, 레온하르트 악셀. 너 대체 무슨 꿍꿍이야?”
레온하르트가 저녁 공연을 위해 무대 뒤에서 마이크를 체크하고 있을 때였다. 마커스로부터 ‘그’가 퀸 레베카 시어터에 입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상황이었기에 한껏 달아오른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와 툭 말을 던지는 이안 키스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뭘?”
“마키한테 들었어. 너, 누굴 초대했다며?”
……마키, 쓸데없는 소리를.
흥미롭다는 눈빛을 쏘아 대고 있는 이안의 표정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된다. 레온하르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누구냐?”
“…….”
“일에 방해가 된다고 데이트하는 상대도 공연장에 한 번 안 데리고 오던 네가, 주연 맡게 된 첫 공연에도 가족한테 연락도 안 한 네가, 사람을 초대해?”
이야, 하고 탄성까지 흘리며 저를 주시하는 이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레온하르트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공연에나 집중해.”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마키한테 물어볼걸. 누굴 초대했는지!”
“…….”
“어? 혹시 저번에 말했던 ‘이거’냐?”
“이안.”
“하하. 알겠어, 알겠어. 더 건드렸다간 폭발할 기세군.”
“…….”
“어쨌든 잘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무슨 소리야.”
“2주 전부터 연애하고 있잖아, 너.”
……뭐?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숨기지 않아도 돼.’ 하고 속삭이는 이안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이안은 기다란 검지를 들어 좌우로 까딱이더니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걱정 마. 입 닫고 있을게.”
“이봐, 이안. 뭔가 오해를…….”
“오해는 무슨.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난 네 파트너라고, 친구. 네가 연애를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구별한다니까?”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긴, 수상해도 보통 수상한 게 아니었지. 지난 2주 동안 핸드폰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네 모습이 마치 사막의 미어캣 같아서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아? 천하의 레온하르트 악셀 님을 그렇게 기다리게 만든 여성분이 어떤 레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긴 해.”
“이봐.”
“알았어, 알았어. 그만할게. 난 그저 좋아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너 먹고 튄 그 동양인을 찾는다고 난리였……. 하하, 알았어. 간다, 가!”
레온하르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던 이안이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고 제게 달려들려는 그의 행동에 뒤로 물러나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쳇, 하고 제 앞에서 도망쳐 버린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잇소리를 흘리던 레온하르트는 이내 귀를 울리는 이안의 음성에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