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같은 일이 있었으니 한동안 침입자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얼른 주무십시오. 악셀 씨도 내일 출근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쪽이 잠들어야 내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요한은 레온하르트에게 낮게 말한 뒤 몸을 돌리려 했다.
“저기.”
또 뭐야.
“악셀 씨.”
“이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예?”
“오늘, 고마워.”
도통 잠들지 않는 남자에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던 요한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장정 세 명이 누워도 공간이 남는 널찍한 침대이긴 하나, 커다란 이불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제 오른편에서 뛰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생각지 못한 시점에, 생각지 못한 발언을 들어 버린 요한은 그에게서 돌아서려던 등을 다시 매트리스 위로 눕히며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
그러자 아마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멈칫한 요한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솔직히 남아 줄지 몰랐어.”
요한은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인상을 썼다. 요한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아직 포착하지 못한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만일 나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거야. 저를 노리는 수상한 남자의 집에 남다니. 그랬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본인에게 수상한 꿍꿍이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뭐,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미스터 백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지. 그간 내가 좀 이상하게 굴었나.”
“……알고 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미스터 백, 되게 직설적인 거 알아?”
요한은 흥, 코웃음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남아 줘서, 고마워.”
“…….”
“덕분에 많이 안정이 됐어. 못 볼 꼴도 함께 보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한숨을 길게 내쉬던 레온하르트가 ‘매력 포인트를 어필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라고 중얼거리자 요한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런데 미스터 백.”
“……예.”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나?”
조심스러운 질문이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요한은 왠지 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레온하르트 쪽을 빤히 주시했다.
“또 뭡니까.”
약간은 퉁명스럽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말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대답에 흠흠, 하고 헛기침을 고르던 레온하르트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질문을 쏟아 냈다.
“미스터 백은…… 언제부터 남자한테 끌린다는 걸 깨달았지?”
21화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몹시도 무례한 질문이다, 라고 생각했다.
상대에 대한 조금의 예의도 없다는 기분마저 들어 그가 무서워하든 말든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이해하고 싶어.”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요한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뜻을 쉬이 이해하지 못해 멈칫한 요한과 달리 하아, 깊은숨을 토해 내던 레온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아니, 왠지 이해해야 할 것 같아.”
뭐?
“믿어지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도, 꽤 비슷한 처지거든.”
“……!”
“동성한테 끌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적응이 안 되는데. 젠장,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군.”
으으, 고뇌 가득한 신음을 흘리는 레온하르트에게서 머리를 벅벅 긁는 소리가 났다. 요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그의 실소에 투덜거리던 레온하르트가 의아한 숨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저 역시 확실히 깨달은 적은 없어요. 고민하던…… 상황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동성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단지 어렴풋하게 이성보다는 동성에게 끌린다는 것을 직감했을 뿐.
이유는 간단했다.
제게 접근한 이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에게 동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딱 한 번.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스물이 될 때까지 딱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던 상대가 다름 아닌 동성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남들과는 달리 특별한 성적 취향을 지닌 것은 아닐까, 라는 근본적인 고뇌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또 시험해 보기 위해 소호의 클럽을 찾았던 거고.
“뭐?”
담담한 요한의 대답에 깜짝 놀란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레온하르트가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쩌렁쩌렁한 음성을 내뱉은 것이다. 나지막하게 침실을 울리는 말을 뱉어 낸 저와 달리, 침대 옆의 무드등까지 켜 버리는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럼 그쪽도 확실한 게이가 아니라는 건가?”
요한은 레이저라도 쏘아 댈 기세로 저를 응시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 셈이죠.”
“그런데도 나랑 잠을 잔 거고?”
“그건…….”
실수였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요한은 ‘어이없군.’ 하고 중얼대는 레온하르트를 힐끔거렸다.
그날 있었던 일은 확실히 충동적이었다.
‘호기심이었고, 오기이기도 했지.’
과연 자신이 동성애자가 맞는 건지, 꾹꾹 눌러 오기만 했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그 탓에 이 귀찮은 남자와 얽히게 되었고 현재는 한 침대에 같이 드러누워 있기까지 했다.
쓰게 웃던 요한은 ‘맙소사.’라는 단어를 구시렁대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말을 이어 갔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있어 성별이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요한아,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단지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였을 뿐이야.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어이없어하던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가로저을 때, 요한이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헛웃음을 흘리던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요한은 모르는 척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걸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요.”
“…….”
단호하기 그지없는 요한의 발언은 상대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 성별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야.
그저 본능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거고, 그러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될 테니까.
“운명……이라.”
하필 자신이 겨우 정립한 해답을 건넨 상대가 레온하르트라는 점이 꽤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요한이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내리감고 있을 때였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조금 전과는 달라 의아해하던 요한은 ‘미스터 백.’ 하고 저를 부르는 그를 주시했다. 환해진 침실의 조명이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를 더욱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뭘 말입니까.”
“우리,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네?”
레온하르트의 발언은 뜬금없다 못해 황당했다. 요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생긋 웃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타고 요한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과 내가 그날 그곳에서 만난 건 운명인 것 같아.”
“……!”
“미스터 백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운명이란 걸 믿거든. 하지만 그쪽이 여전히 나를 의심하고 있고, 나는 그쪽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 우리의 첫 만남은 완벽하게 잊고, 친구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
“……그쪽 생각은 어때?”
* * *
“친구……요?”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한 요한의 대답에 레온하르트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슬금슬금 제 곁으로 접근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요한이 인상을 쓰자 그가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내가 ‘친구’로는 부족해 보이나?”
크게 일렁이는 눈을 요한에게 고정시키는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쪽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랑 친구가 되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을 거야.”
“흐응.”
“왜 그런 표정이지? 다들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난린데.”
흥,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대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왠지 더 필사적으로 보여서 웃음이 났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저는…… 친구를 잘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어릴 적 겪었던 몇 가지 일들로 인해 요한은 친구를 만드는 데 극히 신중을 가해 왔다.
그때의 일들은 성장하고 난 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래서인지 안나마리아는 스스로를 배척하는 요한을 안타까워하곤 했다.
갑자기 어두워진 요한의 낯빛을 읽은 걸까. 레온하르트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요한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안 지 얼마 안 된 내가 보기에도 미스터 백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야.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어. 미스터 백에게 부족한 건, 내가 채워 줄 수 있으니까.”
“…….”
“상대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 주는 게 바로 친구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데?”
흥분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는 분명 꼬리가 달려 있지 않건만, 왠지 모르게 커다란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요한은 그만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그에게 ‘싫습니다.’라는 말을 뱉어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염려했던 그 어느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동이 트자마자 귀가하기 위해 레온하르트의 침실을 나서려던 요한은 잠든 레온하르트를 한동안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 어느덧 9월 중순이 되었다.
2주간의 A매치(정식 국가 대표 팀 간의 경기) 기간 동안 대표 팀에 불려 가지 않았던 선수들은 LTC에 남아 훈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요한 역시 마찬가지.
그는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 대표 팀에 불려 갈 만큼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는 않았기에, 경기가 잡히지 않은 2주 동안 LTC에 머물면서 다른 동료들과 미니 게임을 하거나 트레이닝을 받는 중이었다.
“……봐.”
“…….”
“이봐, 꼬맹이.”
“예?”
“전화 오는데?”
실력이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대표 팀 코치진과의 불화로 훈련장에 남아 있던 디에고가 지이잉 울려 대는 요한의 핸드폰이 신경 쓰였는지 말을 걸어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스터드를 닦고 있던 요한은 제 어깨까지 톡톡 두드리는 디에고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전화, 온다고.”
아.
요한은 직접 핸드폰을 집어 들어 제게 건네는 디에고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인 후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전화 상대를 확인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
-요한!
“……악셀 씨?”
전화를 받자마자 반가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한은 하필 이 시점에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레온하르트라는 사실에 움찔했다.
-오늘 뭐 해? 많이 바쁜가?
왠지 모를 기대감까지 가득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난처해진다. 특히나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 여긴 하룻밤 상대 레온하르트와 놀랍게도 ‘친구’라는 관계가 되어 버린 지금 이 순간은.
지난 2주 동안 레온하르트는 쉬지 않고 요한에게 만나자고 해 왔지만, 요한은 갖은 핑계를 대며 그와의 만남을 미루고 있었다. 간혹 전화를 받기는 했으나 언제나 말을 하는 이는 레온하르트였고, 요한은 아주 가끔씩 그의 말에 어울려 주었다.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예. 죄송하지만 오늘도 바쁠……!”
레온하르트가 비록 자신을 눕힐 의도는 아니라고 하나, 아직까지 수상쩍은 것은 분명하다. 요한은 ‘오늘도 안 되는 거야?’ 하고, 핸드폰 너머에서 제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향해 대답하려 했다.
‘이런.’
그러나 차마 ‘바쁠 예정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요한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직접 핸드폰을 건넸던 사람이 생긋 웃으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흐응, 누군가 했더니…… 악셀인가 보군.”
디에고는 일부러 그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요한은 이젠 대놓고 엿듣겠다는 시늉을 하는 디에고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멈칫했다.
[이봐, 꼬맹이. 너 진짜 이러기냐? 내 어시스트를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두 개씩이나 받아먹었으면서, 부탁 하나 못 들어주는 게 어디 말이나 돼?]
그러니까 사건은 A매치 기간으로 들어가기 직전 리그 경기 후에 일어났다.
놀랍게도 9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열렸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요한은 선발이 아닌 후반 교체 명단으로 첫 리그 경기 데뷔전을 가졌다.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스코어는 1 : 1로 같았는데 요한의 등장으로 인해 후반 86분경, 천금과 같은 극장 역전 골이 터져 나왔다.
요한은 두 경기 연속 골은 물론이거니와, 프리미어리그 데뷔전과 데뷔 골의 영광을 동시에 맛봤다.
그런 요한에게 놀라운 패스를 건네준 사람은 다름 아닌 디에고였고, 두 사람의 합작 플레이는 영국 내 신문은 물론이거니와 저 먼 대한민국 스포츠 신문지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한턱 쏴야 하는 거 아니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디에고에게 골 찬스를 넘겨받은 요한은 자신을 향해 은근한 압박감을 주는 그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사인 하나만 받아 달라고.]
디에고의 요구인즉, 간단했다. 레온하르트의 사인을 받아 주는 것. 특히 두 번째 어시스트를 하고 난 뒤의 디에고는 대놓고 요한에게 눈치를 줬는데, 요한은 그와 가깝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런데 젠장. 하필이면 레온하르트에게 전화가 걸려 오는 장면을 디에고에게 들켜 버리다니.
‘미치겠군.’
요한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생긋 웃고 있는 디에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요한?
핸드폰 너머의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요한을 부르고 있었다.
“납니다.”
-……어?
결국 요한은, 말해 버리고 말았다.
“시간, 난다고요. 그러니 몇 시, 어디로 나가면 될지 문자 보내 주십시오.”
옆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한 채, 그만 백기를 들어 올린 요한의 대답에 레온하르트는 물론이거니와 디에고의 입꼬리 역시 위로 올라갔다.
22화
화려한 불빛과 조명이 가득한 뮤지컬계의 본고장, 런던 웨스트엔드.
한 해에도 수많은 공연이 오르내리는 열정 가득한 이 거리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퀸 레베카 시어터’는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많은 관객들이 찾기로 유명했다.
특히나 퀸 레베카 시어터는 국내 팬은 물론이거니와 해외에서도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런던을 필수 여행 코스로 넣는 이들이 있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명성을 떨치고 있는 뮤지컬 전용 극장이기도 했다.
“…….”
바로 그 극장 앞에서 요한은 잠시도 꺼질 줄 모르는 불빛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검정 캡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쓴 차림으로.
[뮤지……컬이요?]
[그래, 뮤지컬! 내 공연 본 적 없지?]
[아뇨. 없습……니다.]
[잘됐군!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보는 게 어때?]
[예?]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이제 알아야 할 거 아냐. 우린, 친구니까.]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공연에 요한을 초대하는 레온하르트는 꽤 들떠 있었다. 시간이 난다고 했던 것은 분명 요한 자신이었고, 이제 와 ‘우린 친구 아닌데요.’라는 말을 하기에는 늦어 버렸다. 잘됐다며, 공연장에 간 김에 다른 배우들의 사인까지 받아 오라고 지시하는 디에고의 부추김을 받으며 일단 레온하르트가 일러 준 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표도 없는데.’
요한은 ‘SOLD OUT’ 표시가 뜬 매표소의 창구 쪽을 힐긋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를 대체 몇 번째 보는 건지 모르겠어.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학 와서 더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아.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서 더 좋고.”
응?
“뮤지컬 공연이라는 게 그렇지.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같은 배역이라도 다르게 다가올 수 있으니. 게다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말이야.”
“난 한국 ‘얀’도 좋지만 영국 ‘얀’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아. 오늘의 ‘얀’은 레온하르트였나?”
“아무래도 독일계라 그런지 ‘얀’을 더 잘 해석하는 것 같지 않아? 난 레온하르트가 샤우팅 할 때가 제일 좋더라고! 생긴 것도 너무 멋지고 말이야!”
영국 런던의 길거리에서 듣기 힘든 한국말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홱 고개를 돌리니 잔뜩 들뜬 얼굴을 한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 두 명이 공연의 티켓으로 보이는 것을 손에 들고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많이 보는 건가.’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히 들어 버린 정보에 의하면,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퀸 레베카 시어터를 자주 찾았던 모양이다. 요한은 팔짱을 낀 두 여인이 레온하르트에 대해 찬양에 찬양을 거듭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멋지다……라.’
적어도 현재의 요한이 레온하르트를 보며 가지는 느낌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요한이 지켜본 레온하르트는 몹시 황당하고, 조금 어이없기도 하며, 약간 안쓰러운 면이 있는 남자인데 말이지.
물론 그와 사적으로 얽히지 않은 제삼자가 보기에 레온하르트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훌륭한 외모의 소유자이기는 했다.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금발에, 숲을 형상해 놓은 것 같은 녹색 눈동자. 오뚝한 코에 붉고 탐스러운 입술, 그리고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 한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오히려 그를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는 요한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얽히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저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도.’
요한은 이미 들어간 한국 여성들뿐 아니라, 티켓을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빤히 들여다봤다.
곧 있으면 열리게 될 공연을 앞두고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레온하르트가 분한 ‘얀 훈트’의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팬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혹시, 미스터 백 되십니까?”
……!
자신이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와는 조금 다른 면을 본 것 같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온은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누군가의 손길에 홱 몸을 돌렸다.
“맞으시군요! 안녕하십니까, 마커스 젠슨입니다. 악셀 씨의 에이전트예요.”
“아.”
“지금 악셀 씨는 공연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으셔서 대신 제가 왔습니다. 악셀 씨께서 미리 마련해 두신 자리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 * *
[잘 들어, 요한. 여기 있는 네 명의 남녀가 현 웨스트엔드를 휘어잡고 있는 배우들이야. 먼저 왼쪽 상단부터 레온하르트 악셀, 이안 키스트, 에드워드 쇼운, 그리고 미레나 아이너지! 특히 악셀과 키스트의 인기가 엄청난데, 두 사람이 같이 호흡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내는 셈이야. 쇼운은 얼마 전 내가 봤던…….]
언젠가 안나마리아가 웬 잡지 하나를 들고 오더니 요한을 향해 쉬지 않고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못 말리는 뮤지컬광인 그녀의 눈빛이 매우 반짝이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요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는데, 사실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안나마리아가 그토록 열광했던 그 네 명의 배우 중 한 사람과 얽히게 될 줄이야. 그 당시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인터 미션을 포함하여 장장 세 시간이나 이어진 공연은 레온하르트와 그의 동료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레온하르트가 마련해 준 오페라석에 앉아 환희에 찬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던 요한 역시 어느덧 레온하르트와 그의 동료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레온하르트는 대사를 내뱉을 때마다 관객들로부터 각각 다른 반응을 이끌어 냈지만, 대부분 자신만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요한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어서인지, 무대 위의 레온하르트와 자신이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매칭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연기자란 확실히 다르군.
공연을 보고 온 안나마리아의 두 눈이 어째서 그토록 반짝인 건지 이제야 납득이 갈 것 같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책자 속에서 새삼 달라 보이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백 선수!”
초청석으로 향하기 전, 레온하르트의 에이전트라는 사람에게서 공연이 끝난 뒤 주변 관객들이 나가도 자리에 남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요한은 차분하게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웠던 공연이 막을 내린 지 20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극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물밀 듯 나가 버리고 멀뚱히 의자에 앉아 있던 요한은 저를 부르는 것이 분명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생긋 웃으며 마커스 젠슨이 다가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오늘따라 만석이어서인지, 관객분들이 나가시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무대 뒤편으로 안내할 테니, 이리로 오시죠!”
마커스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한 요한을 무대 뒤편으로 향하는 통로로 데려갔다.
“그런데…… 우리 레온이랑은 어떤 사입니까?”
“네?”
마커스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걷던 요한은 자꾸만 저를 힐끔거리는 그의 시선에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요한이 슬슬 한계를 느낄 때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마커스가 재차 물음을 던졌다.
“레온 녀석, 아무리 중요한 사람이라도 웬만하면 자기 손님들은 초청석에 앉히지 않거든요. 한번 초대를 하기 시작하면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며.”
“……!”
“그런 녀석이 웨스트엔드로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초대한 분이, 다름 아닌 백 선수입니다.”
“…….”
“그러고 보니 백 선수는 우리 레온이랑 촬영 때 만났었죠? 아마 그 인연 때문일까요? 레온 녀석, 아무한테나 쉽게 마음을 주는 녀석이 아닌데 아무래도 백 선수가 몹시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참! 저도 런던 FC 팬이에요! 비츠 선수가 시즌 아웃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햇살처럼 나타난 우리 백 선수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하하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하얀 이를 드러내는 마커스의 말을 듣고 있던 요한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마커스는 마침 도착한 어떤 방을 가리키며 요한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여깁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레온이 곧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제가 같이 있…… 어?”
“……?”
“이, 이 전화는…….”
“받으세요.”
“네?”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네, 그럼 그래도 될까요?”
갑자기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보고 움찔거리는 마커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요한은 저를 빤히 응시하는 마커스에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마커스는 ‘잠깐만 기다리시면 곧 레온이 올 겁니다!’ 하고 외치며 전화를 받기 위해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던 요한은 정신없이 공연에 사용했던 도구들을 들고 다니는 스태프들을 힐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