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59)

“……!”

“아, 혹시 내 요리 실력이 걱정되는 거라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사정상 어릴 때부터 요리 교육을 받고 자라서 런던 내의 웬만한 수쉐프급 실력은 되니까. 그러니까 그만 튕기고 들어가는 게 어때?”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요한을 보며 레온하르트가 부드럽게 회유했다.

요리라.

의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직접 요리를 해 준다는 사람을 단호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요한은 녹색 눈을 빛내며 제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레온하르트에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식사만 합니다.”

그러고는 몇 분의 망설임 끝에 조수석을 벗어났다.

레온하르트가 그런 요한을 보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을, 당시의 요한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예기치 못한 방문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요한은 벽면에 가득 장식되어 있는 여러 악보집을 발견하고선 눈을 크게 일렁였다. 현관뿐 아니라 거실로 향하는 복도, 그리고 거실까지. 비교적 심플한 구조였지만 벽면에 걸린 수많은 액자 속의 악보집은 집주인의 직업을 짐작 가능하게 만들었다.

“식사 준비할 동안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

요한은 거실의 소파까지 안내해 준 그가 말을 마친 뒤 부엌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거실의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지만, 그의 테이블 위에 잔뜩 놓여 있는 악보집과 대본집이 그가 출연 중인 뮤지컬에 사용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추론 가능했다.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의 거실 장식장을 살폈다.

재즈에서부터 클래식, 대중음악과 오페라 등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 앨범들이 거실 선반과 수납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타고난 천재인 듯하나, 실은 엄청난 노력가. 이는 레온하르트 폰 악셀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언젠가, 기사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주변을 다 둘러본 요한은 마침 시야로 들어온 뮤지컬 대본으로 손을 뻗었다. 라는 글자가 대본 한가운데에 붙어 있는 두툼한 책자는 너덜너덜했다. 얼마나 보고 또 보았는지 종이가 잔뜩 해져 있었다.

보기보다는 성실하네.

요한은 흥 코웃음을 치며 들고 있던 대본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끼이익. 쿵!

‘……?’

그때였다.

레온하르트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요한의 귀에 덜커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19화

덜컹! 쿵!

‘…….’

요한은 귀가 밝았다.

선천적으로 신체 능력 하나만큼은 타고났기에 그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리는 분명, 저와 레온하르트가 있는 거실과 부엌 쪽이 아닌 발코니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선객이…… 있었나?

의문을 표하던 요한의 눈가에 그림자가 졌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집이 좀 외진 곳에 있지? 내가 워낙 유명해서, 일부러 런던 외곽에 집을 얻었거든. 여기까지 쫓아오는 팬들이나 파파라치는 없으니까.]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될 정보까지 언급하며 레온하르트는 저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느낌이 좋지 않군.’

요한은 감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나 좋지 않은 쪽의 일이 발생할 때면, 귀신같이 그 일을 미리 알아차리고는 했다.

[우리 요한이, 정말 대단하다!]

지금 요한이 살고 있는 런던의 집에 처음 이사했을 때도 그랬다. 하필이면 그날 본가에 들이닥친 좀도둑을 먼저 발견하고 어머니에게 고하자 그의 어머니 은진이 경찰에 신고하여 침입자를 잡았다. 그 후, 은진은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요한의 머리를 쓸며 환하게 웃었다.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불길한 일을 먼저 알아차린 요한을 보고도 어머니는 그저 미소 짓기만 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충분히 두려워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

온몸의 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보면, 좋은 쪽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선객은 아닐 테니, 그럼 파파라치……인가.’

스슥, 슥.

덜컹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발을 끄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발코니 뒤쪽의 커튼에서.

침착해야 한다.

요한은 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척,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런 요한의 행동에 커튼 뒤편이 살짝 흔들렸지만, 요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과거 몇 번이나 겪은 경험이 있었기에 꽤나 침착한 표정을 한 채 부엌으로 몸을 비틀었다.

“왜, 조금 더 앉아 있지 않고?”

독일의 전통 요리인 아인토프, 그중에서도 렌틸 공을 사용한 ‘린젠 아인토프’를 만들어 주겠다며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요한은 난데없이 다가온 자신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는 레온하르트를 빤히 주시하다 입을 열었다.

“악셀 씨.”

“……?”

“혹시 오늘, 저 말고 또 초대한 분이 계십니까?”

레온하르트는 난데없이 다가온 요한의 질문을 받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럴 리가. 나야 말할 것도 없는 유명 인사고, 그쪽 역시 요즘 런던에서 제일 핫한 축구 스타인데 굳이 다른 사람까지 초대해서 시선을 끌 필요 없잖아?”

“…….”

“게다가 그쪽과 단둘이 있지 않으면 호감을 살 기회조차 없을 텐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겠어.”

생긋 웃는 레온하르트의 대답에 요한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군.”

“뭐가?”

“…….”

“미스터 백?”

레온하르트의 말은 매우 일리 있었기에 요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자마자 더욱 차갑게 눈을 내리까는 요한을 향해 레온하르트가 왜 그러냐며 작게 속삭였다. 요한은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공 같은 거 있습니까?”

“……공?”

“예.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발로 건드릴 수만 있다면.

“공이라면 거실 왼쪽 선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축구공은 아니고, 윔블던 대회에서 받은 테니스공이…… 어? 어디 가? 이봐, 미스터 백!”

요한은 저를 부르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고선 그가 언급했던 거실의 왼쪽 선반을 향해 다가갔다. 감자를 썰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는 요한의 뒷모습을 주시하다 칼을 내려놓고 그의 뒤를 따랐다.

달칵.

“…….”

“이봐, 미스터 백. 그걸로 대체 뭘 하려는…… 미스터 백?”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거실 왼쪽 선반에 누군가의 사인이 담겨 있는 테니스공이 있었다. 요한은 거치대에 올라와 있는 그 테니스공을 움켜쥐더니 홱 몸을 돌렸다. 무려 사인 볼을 함부로 다루는 요한을 보고 기겁하던 레온하르트가 안절부절못하며 어디론가 움직이는 그의 뒤를 따랐다. 계속해서 묻는 레온하르트의 질문에도 반응하지 않던 요한은, 몇 분 전 소리가 들려왔던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차륵!

계속해서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던 발코니 쪽의 커튼을 과감하게 열어젖혔다.

“헉!”

요한과 레온하르트의 눈에 검은 복면을 꾹 눌러쓴 사람이 들어왔다.

“제, 젠장!”

이렇게 허술하게 들킬 줄 몰랐던 건지, 갑자기 몸이 드러나자 당황한 복면인이 욕설을 흘렸다.

비단 놀란 사람은 복면인뿐만이 아닌 듯 레온하르트가 크게 놀라 쿵, 뒤로 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뒤를 흘긋거렸다.

‘…….’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털썩 주저앉은 레온하르트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사람에게 꽂혀 있었는데,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도둑과 맞닥뜨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걸까.

“비, 빌어먹을!”

차분하게 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요한과 달리, 어쩔 줄 모르는 레온하르트와 그런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복면인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다, 당장…… 돈이 될 만한 걸 다 가져와!”

“…….”

“어서!”

어쩐지 어설퍼 보이는 도둑이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긴장한 것이 분명한 음성을 흘리며 품 안에서 날카로운 나이프를 꺼내 드는 복면인의 행동에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내려 보니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하지 않는다기보다…….

‘하지 못하는 건가.’

돌처럼 굳어 버린 레온하르트는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한 요한은 씩씩거리며 공중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는 복면인과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응시했다.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진 걸 내놓으라니까!”

복면인은 여전히 성난 음성을 내뱉으며 위협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제 손에 들린 테니스공을 더욱더 세게 움켜쥐었다.

“이봐, 너!”

기다려야 한다.

휘휙!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조금만 더.

틈을 노려서.

요한은 휙휙, 날카로운 나이프를 자꾸만 휘두르며 저와 레온하르트 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복면인을 노려봤다. 꽤 흥분한 상태였던 복면인은 이를 부드득 갈기까지 하며 주춤주춤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소리쳤다.

“야! 내 말이 안 들리는…….”

그리고, 지금!

툭!

“너, 너 뭐 하…… 컥!”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접근하던 복면인이 팔을 살짝 내린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시점을 완벽하게 포착한 요한이 손에 쥐고 있던 테니스공을 공중으로 던지더니 놀라는 복면인을 향해 제 발등으로 떨어지는 공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쾅!

이윽고 근접 거리에서 예의 테니스공을 맞은 복면인이 발코니 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 * *

정말 우연히도, 마침 레온하르트의 집 근처를 순찰하고 있던 전담 시큐리티들이 연락을 받고 들이닥쳤다.

[경찰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찰? 아…… 런던 경찰? 후우, 미스터 백. 그쪽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경찰을 불렀다간 언론에까지 들어가게 돼.]

[아.]

[괜찮아. 저 사람들이 경찰한테 저 자식을 데려갈 테니까. 알아서 처리해 줄 거야.]

[…….]

[그나저나 미안한데, 물 좀…… 줄 수 있을까? 너무 놀라서인지 진정이 안 되는군.]

자신의 저택에 도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택의 보안요원들에게 대신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한 뒤 호흡을 고르고 있는 레온하르트와 달리, 요한은 사건의 경위에 대해 묻는 시큐리티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일러 주었다.

“그럼 또 여쭤 볼 것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 잠깐만요.”

“네?”

“더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발버둥 치는 도둑을 제압한 시큐리티들이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을 지켜보던 요한은 제 외침에 의아해하는 그들을 바라보다 거실 쪽을 힐긋거렸다. 거실의 소파에는 음식을 하다 말고 길게 호흡만 내뱉고 있는 레온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요한은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걱정 마십시오.”

“예?”

“저희가 하는 일은 악셀 씨의 저택과 안위를 보장하는 겁니다. 정보 유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요한은 빙긋 웃으며 대답한 시큐리티들이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벌써 시간이…….’

잠깐 식사를 하러 왔을 뿐인데, 어느덧 시간이 오후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큐리티도 좀도둑도 나가 버린 지금, 이 커다란 집에는 저와 레온하르트밖에 없었다.

결국 레온하르트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예의 식사 대접도 받지 못한 요한은 현관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후 집주인이 있는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

그러나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레온하르트를 본 순간 생각해 둔 말이 입술 밖으로 곧장 흘러나오지 않았다.

줄곧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유지해 온 레온하르트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한 채 소파에 착석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어찌나 새하얀지 평소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요한도 은근한 걱정을 할 정도였다.

예의 도둑이 품 안에 넣고 있던 총을 꺼내기 전, 요한이 제압을 해서 다행이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더 큰 사고가 레온하르트의 저택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경비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에 레온하르트는 몹시나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요한은 풀이 죽은 것이 분명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악셀 씨.”

“…….”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넋을 놓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그는 입술 한 번 벙끗거리지 않았다. 요한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다 다시 큰 소리를 내뱉었다.

“레온하르트 악셀 씨!”

“아…… 미스터 백.”

레온하르트가 흐릿했던 초점을 되찾아 요한을 바라봤다.

“정신이 듭니까?”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닫힌 현관문 쪽을 힐긋거리며 요한이 말했다.

“시큐리티는 조금 전에 나갔습니다. 그 좀도둑도요. 이제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연락처 좀 주십시오.”

“연락……처? 무슨……?”

다짜고짜 번호를 요구하는 요한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장신의 남자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요한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는 이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악셀 씨를 홀로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 두려고요. 가족이나 친구들의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대신 연락을 해 두겠습니다.”

“…….”

“악셀 씨?”

“아, 친구. 친구…… 말이지.”

요한은 당황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레온하르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먼저 언급했는데, 친구를 읊조리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친구보다 가족이 곁에 있는 편이 좋겠네요. 전화번호를 주시면…….”

“없……어.”

뭐?

예기치 못한 레온하르트의 대답에 요한이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가족들은 다 독일에 있어. 영국엔…… 나 혼자야.”

레온하르트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친구들은…… 글쎄. 지금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 줄지 모르겠군. 녀석들 역시 바쁜 몸들이라.”

“…….”

“뭐, 나는 괜찮아. 혼자서도……. 그것보다 미스터 백, 집으로 돌아간다고?”

“…….”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 놓고…… 괜한 일에 얽히게 만들어서.”

쓴웃음을 흘리며 제 시선을 피하는 레온하르트는 그간 요한이 보아 온 모습과는 무척이나 달라 보였다.

‘…….’

축 늘어진 금색 머리카락이 시야로 들어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받은 사슴처럼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린다. 뭘까, 이 기분은.

“택시를 잡는 곳까지는 너무 머니 내가 데, 데려다줄게. 그래, 그러면 되겠다.”

용케도 데려다주겠군.

흐리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온하르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자동차 키를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서늘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흥, 코웃음 치다 제 곁을 지나쳐 현관 쪽으로 나가려는 레온하르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미스터…… 백?”

저를 붙잡는 요한의 행동에 레온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응시했다. 요한은 복잡한 얼굴로 의아해하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더니 길게 숨을 내뱉었다.

“빈방, 있습니까?”

“……뭐?”

요한은 제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단순한 사건도 아니고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는데, 가족도 없고 지인들도 오지 못한다는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가기에는 마음에 걸려서요.”

“……!”

“뭐 동정은 아니니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런 상황에 홀로 있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니까요. 그러니까……!”

“미스터 백!”

요한의 말을 들은 레온하르트의 녹안이 거칠게 요동쳤다. 처음에는 당혹에 젖어 있던 그 눈동자가 점점 안도감에 물들더니 이제는 감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단번에 보였다. 속으로 실소를 터트린 요한은 갑자기 양팔을 크게 벌리더니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레온하르트를 보고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가오면 걷어찰 겁니다.”

어쩐지 살벌하게 느껴지는 요한의 발언에 레온하르트가 그를 껴안으려던 손을 주저 없이 아래로 내렸다.

20화

-뭐? 네가 다른 사람 집에서 잠을 잔다고?

안나마리아가 깜짝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어찌나 크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는지, 핸드폰을 쥐고 있던 요한의 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하긴, 그녀가 놀랄 만도 했다.

요한은 잠자리에 민감했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한 적이 허다했고, 합숙이나 원정 경기, 혹은 훈련을 떠날 때는 항상 전용 베개를 들고 가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물론 놀랍게도 얼마 전 호텔에서는 쿨쿨 잠이 들기는 했지만, 그날은 조금 특별했다. 일단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다가오는 일요일에 있을 첫 1군 데뷔전을 생각하니 정신적 긴장감이 강했다. 그래서 더, 쉽게, 취약해졌던 건지도.

-요한.

“응.”

-너…… 잘 수 있겠어?

요한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를 흘리는 안나마리아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안나. 잘 생각은 없거든.”

-잘 생각이 없다니! 설마 밤샐 생각인 거야?

“그래야 할 것 같아.”

-요한.

“응.”

-무슨 일…… 있었어?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아서 한번 봐 달라고 전화한 거였는데,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네. 괜찮아.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요한…….

“내 문제가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생겨서 그래.”

-뭐?

“왠지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혹시, 저번에 말한 그 사람 때문이야?

“뭐?”

-왜, 네가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이랑 식사한다고 했잖아. 어머! 그러고 보니 그날이 오늘이네?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걱정을 가득 담고 있던 안나마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됐다.

요한에게 식사를 권한 사람이 본인인지라, 아무래도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다.

“큰일은 아닌데,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흐응, 그래? 신기하네!

신기?

-넌 다른 사람을 특별히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그런데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을 신경 쓰는 거 보면, 너 그 사람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치?

“……!”

밝은 목소리로 내뱉는 안나마리아의 말에 요한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왠지 찔리는 기분인지라 그녀에게 ‘집 좀 봐줘.’ 하고 한 번 더 당부한 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마음에…… 들었다고?

‘그 남자가?’

통화를 종료한 뒤에도 귓속을 맴도는 안나마리아의 말이 미간을 좁히게 만들었다. 요한은 흥,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마음에 들 리, 없잖아.’

요한은 비록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무신경하지도 않았다. 그저 좋지 않은 일을 직접 겪고, 또 파리하게 질린 사람을 외면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런 단순한 이유일 뿐이야.’

이미 대기 화면 상태로 돌아가 버린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요한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 통화는…… 끝났어?”

요한의 인기척을 들은 건지 한숨만 푹푹 내쉬며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맑게 일렁이는 녹안을 빛냈다. 요한은 환하다 못해 눈부신 레온하르트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 * *

“이봐, 미스터 백.”

고요를 깨트리는 소리는 정확히 요한이 누워 있는 오른편에서 들려왔다.

“자?”

무시하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을 뜨고 있던 요한은 스르륵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며 옆에서 들려온 말을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아깐…… 미안했어.”

……!

그러나 이윽고 들려온 레온하르트의 잔잔한 음성은 그를 무시하려던 요한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게 만든다. 요한이 눈을 떴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온하르트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상황에서…… 그쪽보다 체격도 큰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

“면목이 없군.”

씁쓸한 음성을 흘리는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못 들은 척, 귀가 막힌 척, 안 들리는 척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지.

요한은 결국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레온하르트의 말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셀 씨.]

[…….]

[악셀 씨.]

[아…… 으응.]

[왜 안 들어가십니까?]

[……어?]

[침실은 저쪽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계속 여길 서성이시는 거죠?]

[…….]

[악셀 씨?]

[미안. 잠깐만 있다 갈게.]

[네?]

[진정이…… 안 돼서 그래. 신경 쓰였다면 미안. 여기 잠깐 앉아 있을 테니, 없는 사람 취급해도 돼.]

[…….]

이미 상황이 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실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계속 구겨져 있었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홀로 남는 걸, 두려워하는 건가?’

그럴 만도 하지.

다른 일도 아니고 안전하다 생각했던 제집에 도둑이 들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태연하게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잠을 청해야 할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저보다 한참은 큰 키에 커다란 덩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도둑의 침입을 두려워하는 그가 어딘가 안쓰럽게 느껴졌으니까.

[……어?]

[들어가시죠.]

[뭐?]

[그쪽이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드리겠습니다.]

대체 어찌하여 자신이 타인의 침대 위에 이렇게 누워, 타인과 함께 이불을 공유하고 있는 건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간절하기 그지없는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가쁘게 숨을 고르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외면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일지도. 게다가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이 꼭 한국의 외할아버지께서 기르시는 골든 리트리버를 연상케 했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요한은 제 말에 놀라 벌떡 일어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잠들 때까지만입니다.’ 하고 한 번 더 소리를 내뱉었다.

‘미쳤었지.’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던 레온하르트는 쉽게 눈을 내리감지 않고 있었다. 요한은 미간을 좁혔다. 만일 시간을 돌리는 시계가 있다면 잠이 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겠다고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다.

“보답이라 생각하십시오.”

“……어?”

“그날, 악셀 씨도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날이라니……. 아.”

의아해하던 레온하르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요한은 담담하게 소리를 흘렸다.

“저로 인해 곤란해질 뻔한 촬영이, 악셀 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일은 제가 보답한 걸로 치죠.”

“하하, 보답치곤 너무 크군. 목숨을 빚졌는데.”

“보답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

“그리고 악셀 씨의 불안감도 이해는 합니다만, 이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까 경비 업체와의 통화에서도 인원을 세 배로 늘린다고 합의 보셨고, 또 이곳으로 오기 전 문단속도 수십 번이나 하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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