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59)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보던 콜린 감독이 두 남자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어라? 두 분 서로 친분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뇨, 전…….”

“그럼요!”

차갑게 대꾸하려던 요한과 달리, 레온하르트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그리고는 눈썹을 꿈틀거리는 요한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아주 친한 사이인걸요. 안 그래, 요한?”

뭐?

“두 분이 절친한 사이라니, 생각보다 촬영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네요. 안 그렇습니까, 필립 선수? 하하하!”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요한과 달리 밝아진 티를 팍팍 내던 콜린 감독이 두 남자를 향해 외쳤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말을 끊어 내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곧바로 촬영이 시작되었기에 요한은 그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럼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필립 선수, 긴장 풀고 편하게 임해 주세요! 참! 악셀 씨, 잠깐 저랑 얘기 좀…….”

예정되었던 촬영 시간이 찾아오고 준비를 도와주던 스태프들이 주변에서 물러나자 요한의 얼굴은 점점 딱딱해졌다.

정말 미칠 노릇이군.

조금 전부터 심장이 잠시도 안정을 되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기회다 싶어도 아드리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숱하게 카메라 앞에 서 왔던 ‘배우’ 레온하르트와 달리 자신은 굳어진 얼굴을 도통 펴지 못한 채 스튜디오 바닥만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적응이 되지 않는 카메라 앞에 서서 긴장한 것도 분명 하나의 이유였지만, 또 다른 이유는…….

요한은 어느새 ‘악셀’이라는 단어가 표기된 런던 FC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레온하르트 쪽을 응시했다.

저와 재회한 이래 매번 보이던 능글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콜린 감독과 함께 촬영 동선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꽤나 여유롭……!’

나름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는 그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피식 웃으려던 요한은 허공에서 무언가와 마주친 후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랐다. 맑게 일렁이는 녹색 눈동자가 콜린 감독에게서 제게로 옮겨 왔기 때문이다.

젠장.

자신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켜 버린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 요한은 생긋 웃으며 제게로 다가오는 레온하르트를 피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앗!”

“……!”

툭!

그때였다.

지금 저 남자의 접근을 피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트집을 잡힐 것이 분명했기에 그에게서 등을 돌리던 순간, 요한은 무언가를 가득 들고 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던 스태프 한 명과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차륵, 소리와 함께 스태프가 들고 있던 대야에서 검은 액체가 쏟아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요한에게 튀어 올랐다. 피할 곳이 없던 요한이 정체 모를 검은 액체를 뒤집어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그 액체를 뒤집어쓰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던 요한은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운 액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슬그머니 눈꺼풀을 올렸다.

“……!”

이윽고 요한의 푸른 눈동자에 저를 막고 서 있는 웬 남자의 등이 보였다.

요한은 결코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상대는 저보다 10센티는 더 커 보였다. 마치 자신을 가리려는 것처럼 스태프와 요한 사이를 막고 있는 남자의 몸에서 뚝, 뚝 검은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왁자지껄하던 스튜디오 내부가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미스터 악셀, 괜찮아요?”

“이걸 어쩌면 좋아! 다 젖었어!”

아마도 이번 촬영의 소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건지, 스태프의 손을 벗어난 대야가 스튜디오 바닥을 데구르르 뒹굴고 있었다. 그 대야 속에 들어 있던 검은 액체를 모두 뒤집어쓴 레온하르트를 보며 한동안 말을 잊고 있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소리친 것은 정확히 10초 뒤였다.

아직 제대로 된 스냅 사진 한 장도 찍지 않았건만, 벌써 입고 있던 푸른 유니폼이 검게 물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찬란하던 금발은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액체를 뒤집어쓴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놀라 굳어 버린 요한을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

“그쪽은 어때? 괜찮아?”

“…….”

“이봐, 내 말 들려?”

아.

“……예, 저는…….”

“맙소사! 악셀 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요한이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조금 전까지 레온하르트와 대화를 나누던 콜린 감독이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17화

그는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을 도통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지.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레온하르트가 잠시 숨을 돌린 사이 검은 괴물이 되어 버렸으니. 요한은 레온하르트에게 묻고선 당황한 얼굴로 스태프와 제 쪽을 번갈아 응시하는 콜린 감독의 시선에 머뭇거렸다.

“이거 큰일이군요. 악셀 씨의 유니폼은 특별 제작한 거라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촬영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콜린 감독은 제대로 된 촬영에 들어가기도 전에 일어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사고 회로가 돌아가지 않는 눈치였다.

확실히 주의를 소홀히 한 내 잘못이 크니, 아무래도…….

“감독님, 이건…….”

“이 액체, 인체에 무해한 거 맞습니까?”

요한이 제 실수에 대해 언급하기도 전에 레온하르트가 웃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콜린 감독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레온하르트는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턱 끝을 매만졌다.

그러다 툭, 손바닥을 제 주먹으로 내리친 레온하르트가 여전히 뚝뚝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를 닦지도 않고 콜린 감독을 불렀다.

“감독님, 어차피 촬영할 때 저걸 사용할 예정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뒤집어쓰는 건 어떻습니까?”

“……네?”

“오늘 촬영은 요한…… 아니, 백 선수가 중심이라면서요? 그러니 저는 가급적 그를 서포트할 수 있는 기둥 역할을 하고, 중심은 백 선수가 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유니폼을 입는 건 백 선수 한 명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페인트를 다 뒤집어쓰는 것도 꽤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럼 상대적으로 악셀 씨가…….”

“제가 메인으로 나서는 촬영은 이틀 뒤에 따로 잡혀 있으니 괜찮습니다. 런던 FC의 팬분들도 제가 아닌 팀의 선수가 더 부각되는 그림을 원할 것 같은데, 감독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짙은 미소를 짓는 레온하르트의 제안에 콜린 감독의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저기요.”

터벅터벅 앞서 가는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외쳤지만 상대는 제 말에도 멈추지 않았다. 살짝 미간을 일그러트린 요한은 한 번 더 크게 외쳤다.

“저기,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나 그의 말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요한이 한 번 더 그를 부르려던 순간, 여전히 걷는 걸 멈추지 않은 남자가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이름을 부르면 설 텐데 말이야.”

……뭐?

겨우 멈췄나 싶더니 그 말만 남긴 채 다시금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요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있는 힘껏 다시 입을 열었다.

“멈추세요, 악셀 씨.”

요한이 소리를 내자마자 뚝 걸음이 멈추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몸짓이었기에 어쩐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자신을 향해 생긋 웃으며 몸을 돌리는 레온하르트를 직시했다.

“이름도 좋지만, 성이 불리는 것도 나쁘진 않군. 그나저나 왜 그러십니까, 백 선수?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프로모션 북 촬영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정신을 빼놓고 있었기에 ‘이제 끝났습니다!’라는 외침을 듣고 나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요한은 입가에 미소를 단 채 제 대답을 기다리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뭐가?”

“……조금 전에.”

[긴장할 거 없어.]

[……네?]

[미스터 백은 5만 명이 넘는 관중들 앞에서 골도 넣은 남자인데, 고작 스태프 몇 명이 지켜보는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하는 거야?]

[……!]

[그건 별로 폼이 안 나는데. 그러니까 간단하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여기가, 필드 위라고 생각하는 거지.]

[……!]

[지금 미스터 백을 비추고 있는 저 카메라는 그쪽한테 날아오는 볼이라고 생각해. 그럼 대하기 쉬워질걸?]

[…….]

[내 노하우 중 하나지. 긴장할 때, 다른 것에 대입하는 것 말이야.]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도 얼어 있던 요한을 향해 작게 속삭여 준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의 촬영엔 수많은 NG가 발생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레온하르트 악셀 덕분에 예정되었던 것보다 빨리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런 충고만 있었던 게 아니지 않은가. 요한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눈앞의 남자가 고안해 낸 기지로 인해 그는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움을 받고도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면 예의가 없는 거다. 요한은 생긋 웃는 남자에게 대답한 뒤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자 레온하르트가 눈꼬리를 호선으로 휘더니 오히려 되물었다.

“말로만?”

“예?”

“아니, 그렇지 않나?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도움을 받았는데, 도움만 덥석 받고 고맙다는 말로 그냥 내빼는 것 같아서.”

“……!”

“아니면, 그쪽 한국인들은…… 빚을 져도 말만 내뱉고 넘어가는 편인가?”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레온하르트의 말이 자신을 자극하기 위함임은 이미 눈치챘다. 그 말을 내뱉은 후 인상을 쓰는 요한을 보고 레온하르트가 더욱 짓궂게 웃었으니. 요한은 생글거리며 제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덩달아 미소 지었다. 슬쩍 올라간 요한의 입꼬리를 발견한 레온하르트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라는 게 있으시군요.”

“없다고는 할 수 없지.”

“뭡니까?”

“왜, 들어줄 건가?”

“글쎄요. 상황에 따라서.”

“정말?”

“섹스는 안 됩니다.”

요한은 차갑고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예기치 못한 요한의 공격에 ‘뭐?’ 하고 눈을 크게 뜨던 레온하르트가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요한에게 말했다.

“이봐, 미스터 백. 내가 섹스에 환장한 놈처럼 보여?”

“네.”

아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끈질길 리 없으니까.’

이번 촬영에서 의외의 면을 보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도통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일부러 틈을 주고 싶지는 않다. 요한은 차갑고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더욱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인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중얼거렸다.

“대답이 아주 칼 같네.”

“…….”

“하지만 그건 그쪽의 선입견이야.”

뭐?

“차근차근 하고 싶다고.”

레온하르트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는 요한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요한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잡혔다.

‘몸이 목적이 아니라고?’

시작은 몸이 아니었던가. 물론 흥미가 인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줄곧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이 고작 섹스 한 번에 취향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수상하군.’

레온하르트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요한에게 계속해서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요구하는 것이 있지만, 몸은 아니다.

‘그렇다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요구할 일이 생각나지 않아 요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굵고 낮은 음성을 흘렸다.

“식사는 어때?”

“……네?”

잠시 생각하던 요한은 아주 약간 벌어진 틈을 파고든 레온하르트의 일격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한 끼 정도는, 괜찮지 않나?”

* * *

“요한! 여기야, 요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향해 누군가가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팔을 위로 힘껏 들어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다. 요한은 픽 웃으며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서 와, 요한! 차는 많이 안 막혔어?”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고 요한을 향해 말을 쏟아 내는 여자는 안나마리아 디어. 요한의 이웃사촌이자 오랜 친구였다.

[요한, 오늘 시간 괜찮으면 커피 한 잔 마시러 올래?]

[커피?]

[응! 나 얼마 전에 아르바이트 시작했어! 게다가 여기 사장, 저번 주말 경기 이후 네 광팬이 됐거든! 너 온다는 거 알면 정말 좋아할 거야. 올 거지? 응?]

안나마리아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마침 오늘 오후 트레이닝이 없기도 했고, 또 그녀를 못 본 지 벌써 한 달이 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안나마리아와 대화를 나누던 요한이었기에, 오전 세션이 끝나자마자 가겠다는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요한은 ‘여기 앉아!’ 하고, 카페 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자신을 안내하는 안나마리아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바빠 보이는데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다른 손님도 아니고 너인데! 참, 요한.”

“……?”

“너 가기 전에 저기 저 종이에 사인 좀 해 주고 가.”

“……뭐?”

“말했잖아. 우리 사장, 네 광팬이 됐다고. 근무 시간에 너한테 시간 내주는 거, 사인이랑 교환해서거든.”

“하하.”

“웃지 말고! 해 줄 거지?”

눈을 빛내는 안나마리아에게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요한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서 펜을 건네 받았다.

안나마리아가 일하는 카페의 사장이라는 브래드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원래 런던 FC의 열혈 팬이었던 건지, 아니면 요한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건지 런던 FC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던 브래드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멀어지자 안나마리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너 정말 대단하더라. 설마 데뷔전에 골을 넣을 줄은 몰랐어. 아저씨랑 아주머니도 좋아하시지?”

“뭐, 그렇지.”

“명색이 네 첫 데뷔전에 데뷔 골인데, 직접 가서 볼 걸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괜찮아. 응원해 준 거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대화를 주고받던 안나마리아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는 안나마리아의 시선에 의아해하던 요한은 ‘그건 어떻게 됐어?’ 하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미간을 좁혔다.

“그거라니?”

“왜.”

“안나?”

“그때. 네가 저번에 ‘어디에’ 가겠다고 했었잖아.”

“어디라니? 대체 거기가 어디인…….”

아.

안나마리아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 인상을 쓰려던 요한이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요한의 눈치를 살피던 안나마리아는 그의 반응에 눈을 빛냈다. 은근한 기대가 깔린 눈빛. 요한은 마치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 듯한 그녀를 보며 쓰게 웃었다.

“갔어?”

“응.”

“갔……구나.”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어.”

“어머, 정말?”

요한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진지한 상담을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안나마리아였다. 그녀는 요한이 그날 클럽에 갈 거라 선언했던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궁금해한 것이다. 요한은 처음 질문과는 달리 제 대답에 약간 실망하는 듯했던 안나마리아가 이어진 저의 중얼거림을 듣고 왠지 기뻐하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물론 의심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안나마리아는 정말로 심각하게 그의 미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녀의 응원 덕분에 그 클럽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요한은 ‘어떻게 달랐는데?’ 하고 묻는 안나마리아의 녹색 눈동자를 빤히 직시했다.

‘녹안…….’

그는 안나마리아와 똑같은 눈동자 색을 지닌 남자를 알고 있었다.

18화

안나마리아가 옅은 녹색이라면, 그 남자는 안나마리아보다 짙은 녹안의 소유자였다. 요한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의문을 품는 안나마리아를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안나,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안나마리아는 요한과 달리 매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보다 친구가 많았다. 훨씬. 상대적으로 친구가 적었던 요한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쓸쓸하지 않았던 것은 안나마리아가 그의 곁에 있어 주면서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물론 애석하게도, 안나마리아의 노력에도 요한은 그녀의 친구들과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는 없었지만.

요한은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하다는 눈빛을 쏘아 대는 안나마리아에게 중얼거렸다.

“식사를 하자는 말은, 보통 언제 사용하는 거지?”

“……어?”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더 의심이 돼.”

[식사는 어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식사 제안을 한 레온하르트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힘들다. 정말로 이성애자가 제게 흥미라도 생긴 건지. 저 역시 이런 호의는 처음인지라, 그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제대로 기준이 잡히질 않았다. 안나마리아라면 어떨까. 그녀는 지금껏 요한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손을 뻗어 준 사람이었으므로 그녀의 의견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요한은 ‘식사?’ 하고 큰 눈을 깜빡이는 안나마리아에게 말을 이었다.

“어쩌다 알고 지낸 사람이 있어.”

“어쩌……다?”

“악연에 가까워.”

“아.”

“그런데 그 사람이 친하게 지내보자고, 식사를 제안하더군.”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어.”

“흐음, 공적인 만남인 거야?”

“아니.”

“사적인 만남에, 친하게 지내보자고 제안한 식사라.”

“…….”

“요한, 너는 그 사람이랑 함께 있는 게 불편해?”

어디 불편하다뿐인가.

그와 대화를 나누기만 해도 긴장이 된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 만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 여긴 사람과 계속해서 부딪치는 우연이, 요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몹시 불편해.’

분명 머리는 잘 알고 있다. 그가 불편하다고. 그러나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뭐지?

“만약 말도 안 섞고 싶은 게 아니라면, 식사 한 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입을 꾹 다물며 얼굴을 굳히는 요한을 향해 안나마리아가 생긋 웃었다. 요한이 흔들리는 벽안으로 그녀를 응시하자 안나마리아가 옆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너도 그 사람이 싫지는 않은 것 같은데.”

뭐?

놀라는 요한의 모습에 안나마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요한,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 거부감을 가지면 안 돼! 물론 네가 경험한 일 때문에 낯선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게 어려울지 모르지만,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사교성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

“그런 의미에서 난 네가 새로운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환영이야!”

안나마리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요한을 부추겼다.

* * *

안나마리아의 말을 들은 뒤, 요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교성이라.’

확실히 요한은 그간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며 지내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릴 적, 혼혈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놀리고 또 박대했던 친구들과의 몇 가지 일화로 인해 사람을 사귀는 데 그리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처음부터 무뚝뚝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벽을 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딱딱해졌고, 살가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 거부감을 가지면 안 돼!]

진심을 담은 안나마리아의 충고는 쉽게 들리기도 했지만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다가오는 사람을 무조건 내친다면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겠지. 요한은 힘내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안나마리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카페를 나섰다.

[이건 내 번호.]

[…….]

[연락 기다릴게.]

억지로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해 둔 레온하르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든 요한은 통화 연결음 소리가 들린 지 1초도 되지 않아 전화를 받는 상대로 인해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곧 무뚝뚝하게 식사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건넸다.

레온하르트 악셀과의 식사는 리그 경기 사흘 전으로 잡혔다. 그날이 그의 휴식날이기도 했고, 요한 역시 오후 트레이닝 세션이 없었기 때문이다.

LTC로 저를 데리러 오겠다는 레온하르트에게 철저히 거부 의사를 전한 뒤, 미리 약속된 장소에서 그의 차에 올라탄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간 것을 인지했다.

저리 좋을까.

고작 식사 한 끼 함께하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즐거워 보이는 그와 달리 자신은 꽤 무덤덤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을 태운 차는 곧 런던 외곽 지역을 향해 달려갔다.

“다 왔어.”

얼마나 있었을까.

분명 런던 중심가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거라 여겼던 요한의 생각과 달리, 레온하르트의 차가 멈추어 선 곳은 웬 저택 앞이었다.

회색과 검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급 저택을 빤히 응시하던 요한이 저택에 달린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힐긋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어떤 표정을 짓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만 내리지.”

“…….”

“요한?”

“이보세요, 악셀 씨. 대체…… 무슨 꿍꿍이입니까.”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연 레온하르트가 직접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빤히 올려다보던 요한은 얼굴을 구기며 서늘한 음성을 뱉어 냈다. 그러자 레온하르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한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전 분명 똑똑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제가 악셀 씨와 다시 섹스를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미안하지만 틀렸어. 난 오늘 그쪽이랑 침대에서 뒹굴 생각이 없거든.”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보기보다 의심이 많군.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내 커리어를 걸고 맹세하지.”

“…….”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다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대체 왜 이곳까지 데려온 거죠?”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다니.

이 작자는 대체 얼마나 가벼운 거지.

요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차 밖에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요한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주고 싶었어.”

“예?”

제대로 듣지 못한 요한이 미간을 꿈틀거리자 흠흠, 헛기침을 흘린 레온하르트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쪽한테, 요리를 해 주고 싶었다고.”

요……리?

섹스가 목적이 아니라면 둘러댈 핑계는 얼마든지 많았다. 과연 이 사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의심하던 요한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자 멈칫했다. 레온하르트는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명색이 운동 선수한테 식사 제안을 했는데, 아무거나 먹일 수는 없잖아.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녀석은 아니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