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만일 이 자리에 그와 자신, 둘만 있었더라면 버럭 화를 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요한이 앉아 있는 테이블 맞은편엔 구단주가 착석하고 있었고, 자꾸만 그들 쪽을 힐끔거리는 주변의 눈길 역시 자제해야 할 이유였다. 요한은 ‘네.’ 하고 짧게 대답한 이후 테이블 위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어? 구면이라니? 아! 그래서 어제 필립 군에 대해 물어봤던 건가?”
“그럼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속들이 다 알 만큼 아주 친한 사이거든요. 그렇지, 요한?”
말끝마다 이름을 불러 대는 레온하르트로 인해 요한의 미간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라니.’
일부러 그런 표현을 사용한 건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요한은 날카로운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연기 하나만큼은 뛰어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요한은 솔직히 감탄했다.
“친한 사이라고? 그게 정말인가, 필립?”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아드리치가 요한을 바라봤다. 순간 눈앞이 컴컴해졌지만 대답을 하는 것보다 그저 미소를 짓는 것이 낫겠다 싶어 요한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요한의 얼굴이 굳어지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아드리치와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요한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서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아드리치 씨도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스포츠 스타들과는 별로 친분이 없어서요. 아는 얼굴이 있다면 작업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죠.”
“하하, 그런 거였군! 난 미스터 악셀이 랄프나 비츠가 아닌 필립 군을 정확히 지목해서 무언가 수상한 꿍꿍이가 있는 줄 알았다고.”
“수상한 꿍꿍이라뇨, 아드리치 씨? 저를 어떻게 보시고.”
“미안하네. 하하. 오, 음식이 나왔군! 어서 들지! 필립, 자네도 많이 먹게. 앞으로 우리 런던 FC를 위해 해 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네.”
웃음꽃이 피는 분위기를 굳이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요한은 제게 음식을 권하는 아드리치에게 옅은 눈웃음을 그린 후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프와 포크를 든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렸다.
‘……!’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그는 요한과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밉고 황당한지 요한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 위로 툭 떨어트릴 뻔했다.
“필립, 집이 어느 방향이랬지?”
“아드리치 씨, 요한의 귀가는 제게 맡기십시오.”
“어?”
“저희 집 근처에 살거든요. 촬영 날짜도 맞춰 봐야 하니 제가 데려다주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내가 눈치가 없었군.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필립, 그리고 미스터 악셀. 앞으로 잘 부탁하네! 나는 먼저 가 보겠네.”
정신없이 진행되었던 식사는 밤 11시를 넘겨서야 끝이 났다. 일찍 문을 닫는 레스토랑도 그들 세 사람을 위해 열어 둘 만큼 배려를 받았던지라, 요한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요한을 데려다주겠다는 아드리치의 접근을 원천 봉쇄한 레온하르트는 멀어지는 아드리치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 준 다음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요한은 서늘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아드리치를 비롯한 그의 수행요원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무슨 짓입니까.”
살벌한 요한의 음성에 레온하르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뭐가?”
“미스터 악셀.”
“편하게 레온이라고 불러 줘. 앞으로 같이 촬영도 해야 하잖아? 그런데 왜 그리 미간을 좁히지? 그러다 고운 얼굴에 주름 생겨.”
레온하르트는 아드리치 앞에선 단 한 번도 구기지 않았던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트리는 요한에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얼굴을 펴지 않던 요한은 레온하르트를 노려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분명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앞으로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그래, 그쪽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글쎄.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 고민을 좀 해 봤거든?”
“미스터 악셀.”
“어제, 드디어 결론을 내렸어!”
결론?
요한은 화사하게 웃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봤다.
“……!”
대답을 기다리던 요한에게로 한 걸음, 성큼 다가온 레온하르트가 깜짝 놀라 뒤로 주춤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요한은 제 귀에 바람을 불어넣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봤다. 레온하르트는 무슨 짓이냐는 표정을 짓는 요한에게 붉고 탐스러운 입술로 말했다.
“간단해. 나, 그쪽한테 관심이 생겨 버렸어.”
……뭐?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 이 관심이 단순한 흥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그쪽이 화요일 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15화
<‘레온하르트 악셀’, 반짝이는 혜성(彗星)처럼 나타난 웨스트엔드의 왕자!>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21세기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고작 검색창에 이름을 두드렸을 뿐인데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요한은 푸르게 일렁이는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응시하다 제일 상단을 장식한 기사 하나를 클릭했다.
‘웨스트엔드의 왕자…….’
앨리슨 디어가 언급했던 그 별명이 떠오르자 요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동요하던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기사의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새로운 배우들의 등장이 드문 웨스트엔드 뮤지컬계에 악셀이라는 신성이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일이다. 22세의 나이에 런던으로 건너온 독일 출신의 신예 배우는 차근차근 제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앙상블부터 시작해 조연, 그리고 주연을 맡기까지는 비록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현재 악셀이 웨스트엔드의 ‘왕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얼굴이면 얼굴, 체격이면 체격.
감히 단언컨대, 레온하르트 폰 악셀은 그간 웨스트엔드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타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다니.
요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뮤지컬 팬인 안나마리아를 친구로 두고서도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여태껏 제 관심은 오로지 축구에만 국한되어 있었다는 생각에, 요한은 쓰게 웃었다.
<오늘은 ‘배우’ 레온하르트 폰 악셀이 아닌, ‘사람’ 레온하르트 폰 악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 서는 악셀을 두고 뭇 사람들은 상상한다. 지금까지 그가 맡았던 배역과 현재 맡고 있는 배역 역시 상대를 지배하는 역할이자 관객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것이기에, 실제 성격 역시 그에 가까울 거라고.
하나, 그것은 착각 중의 착각이다.
오만방자하며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고 수많은 여인들을 울리고 다닐 거라 예상되는 겉모습과 달리, 본 기자가 취재한 레온하르트 폰 악셀은 무척이나 순진한 소년에 가깝다.>
‘순진한 소년?’
요한은 코웃음 쳤다.
이쯤에서 핸드폰을 내릴까 하다, 이왕 읽기 시작한 거 마저 읽어 보기로 했다. 요한의 벽안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웨스트엔드의 떠오르는 별이 자신의 여가 시간에 가장 즐겨 하는 일은 클럽에서 잠자리 상대를 찾는 일도 아니고, 휴양지에서 헌팅을 하는 일도 아닌, 자가(自家)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 강렬한 퍼포먼스를 즐기는 그에게 이성의 대시가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업계의 다른 배우들과 달리 레온하르트 폰 악셀이 지저분한 염문설에 얽힌 경우는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연이 있는 날엔 오로지 집과 공연장, 그리고 공연이 없는 날엔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에게는 연인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지독한 일벌레에 가깝다.
물론 악셀 또한 건장한 20대 사내인 만큼 연애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에만 매진하는 그의 모습에 의심 많은 뭇 사람들이 한때 그를 동성애자로 의심한 적도 있으나, 그로부터 얼마 뒤 여인과 데이트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그 의문을 종식시키기도 했다.
연애를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나, 연애를 할 때에도 자신의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레온하르트 폰 악셀의 존재는 연이어 터져 나온 뮤지컬 배우들의 지저분한 사생활에 질려 있던 웨스트엔드의 팬들에게는 단비나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참고로 말하자면, 현재 레온하르트 악셀은 ‘솔로’다.>
마지막 구절은 일부러 단 것이 분명해 보여 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마음에 걸리는 구절에 얼굴을 구겼다.
‘여인과 데이트…….’
[나, 그쪽한테 관심이 생겨 버렸어.]
스스로를 이성애자라 선언했던 레온하르트는 요한에게 주저 않고 말했다. 그 말에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귀가 얼얼했다. 만약 농담처럼 들렸다면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해 주었을 텐데,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꽤 진지해 보였기에 그저 멀뚱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 이 관심이, 단순한 흥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레온하르트는 짙은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 화요일 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모습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날 밤 일어났던 충동적인 일이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요한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의 오해로 인해 발생한 일이 이쪽과는 관계없는 사람까지 자극해 버린 것이다.
레온하르트가 굳어 있는 요한에게 차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요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그 후로 며칠이 흘렀지만 다행히도 레온하르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요한은 그에게 따로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단순한 흥미일 뿐이야.’
기사를 내려다보며 흔들리던 마음은 잠깐의 명상 끝에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요한은 냉소에 가까운 실소를 터트린 후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이성애자가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무언가 특별하다 느낀 걸지도 모른다.
저와는 철저하게 다른 종자.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이 대부분 그러는 것처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향한 관심은 수그러들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정리한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냉정하게 빛났다.
‘반응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래야만 쓸데없는 구설수에 얽히지 않을 테니.
현재의 요한은 제 커리어를 뒤흔들 만한 일을 벌일 생각 따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도, 불안한 거지.
* * *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있을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앞두고 11시부터 오전 트레이닝 세션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두 시간 정도 앞서 남런던의 트레이닝 센터인 LTC에 도착했던 요한은 코치들의 허락하에 실내 트레이닝을 마친 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어째서 그 동양인 녀석이지?”
아직 오전 트레이닝이 진행되기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는 탓에 피치 위에는 잠시 뒤부터 사용할 훈련 도구들을 미리 운반하고 있는 스태프들만이 존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훈련 시간이 되면 들어갈까 싶어 다시 드레싱룸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 요한의 귀에 저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한 단어가 들려왔다.
요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
적의(敵意)가 느껴지는 예의 단어는 요한이 몇 걸음을 더 가면 꺾이는 모퉁이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특히나 런던 FC 내에서 동양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1군 팀과 리저브 팀을 모두 포함해서 요한이 유일했다.
“뭐가.”
“프로모션 북 촬영 말이야! 젠장! 왜 하필 그 동양인이지? 아무것도 아닌 리그컵 경기에서 고작 한 골 넣은 게 무슨 큰 대수라고? 하여간 윗대가리들은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아. 반짝 스타를 전면에 내세우면 앞으로는 뭐 어쩌겠다는 거야? 그 동양인이 계속해서 골을 넣어 줄 것 같아?”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심드렁한 반응에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치고 있는 이는, 아마도 1군 팀에 소속되어 있는 프랑스 출신의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분명했다.
[네가 ‘그’ 동양인이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한 요한이 1군의 선수들과 각각 인사를 나눌 때였다. 요한은 저를 서늘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크로비스의 모습에 곧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요한이 알고 있기로 크로비스는 2선의 모든 포지션은 물론, 최전방 스트라이커까지도 가능했기에 주전 선수들의 백업 요원으로서 쏠쏠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팀의 메인 스트라이커인 마이크 비츠가 시즌 아웃이 된 후 자신이 리그컵 경기에 선발로 나갈 것이라 확신했던 건지, 경기 하루 전 있었던 트레이닝 세션 이후 요한을 선발로 내세울 거라는 조지 웰비 감독을 향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긴 했지만.’
뒷담화를 할 정도였나.
[동양인 주제에.]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로비스와 악수를 나눈 뒤 다른 선수에게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반응하지는 않았다. 홱 시선을 옮겨 그를 쳐다보기도 전 크로비스가 흥 콧방귀를 뀌더니 드레싱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 요한이 처음으로 1군 데뷔 무대를 치르고 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을 때, 팀의 다른 동료들과 달리 냉담하게 몸을 돌리는 모습도 목격했다.
“멍청한 아드리치 같으니. 그보다 더 멍청한 웰비 자식! 비츠가 아웃이 됐다면 당연히 그 자리는 다음 순서인 내가 차지해야 하는 거잖아! 한데 어째서 그런 동양인을…….”
“아, 진짜 못 들어주겠네. 말끝마다 동양인, 동양인. 이봐, 크로비스. 너 인종 차별자냐?”
“……뭐?”
“아니면 그 입 좀 닥치지그래? 너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지려고 하니까.”
“가, 가르시아, 나는…….”
요한을 ‘동양인’이라 지칭하며 부드득 이까지 가는 크로비스의 투정을 들어주던 이는 다름 아닌 디에고 가르시아였다. 디에고는 짜증 섞인 음성으로 크로비스에게 말한 뒤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막 프로 세계에 발을 내디딘 스무 살짜리 애를 밟고 싶어 환장한 놈의 말은 정말 못 들어주겠군. 그리고, 웰비한테 불만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털어놔. 나한테 징징거리지 말고.”
“……!”
“그 동양인이 계속 골을 넣어 줄 것 같냐고? 글쎄. 적어도 지금껏 네가 넣은 골보다 앞으로 그 녀석이 더 많은 골을 넣을 거라는 데 내 전 재산을 걸지.”
“가르시아! 너 말 다 했어?”
“왜, 부족한가?”
“이 자……!”
디에고에게 달려들 것처럼 그의 멱살을 향해 손을 뻗던 크로비스가 행동을 멈추었다. 모퉁이 쪽으로 돌아 나온 요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부딪친 요한의 푸른 눈동자를 발견하고 움찔하던 장 크로비스 주니어는 ‘젠장.’ 하고 욕설을 날린 뒤 디에고와 요한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요한은 밖으로 나가 버리는 크로비스의 뒷모습을 냉랭하게 응시했다.
“엿듣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분별한 인종 차별을 참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저와 함께 한국에서 영국으로 축구 유학을 건너온 친구들이 실제로 인종 차별을 당해 꿈을 포기하는 경우를 수두룩하게 보아 왔으니까.
특히나 요한은 완벽한 한국인이 아니라 영국인 아버지의 피도 섞여 있었기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파란 눈을 지닌 친구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라지만, 정작 받아들이는 사람은 힘겨울 수 있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지금은 상대적으로 많이 무덤덤한 상태라고는 하나, 근래의 요한은 대놓고 인종 차별을 하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편이었다.
대화를 엿들었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디에고를 향해 요한이 닫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디에고로 인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됐으니까. 적어도 감사의 인사는 전해야겠지.
“고맙습니다.”
“뭐가?”
“……예?”
“조금 전 크로비스가 한 말에 대응한 것 때문이라면, 딱히 네 편을 들어주려고 그런 건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
디에고는 냉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
“지금 우리 팀에서 너보다 나은 스트라이커는 없어. 뭐, 이것도 저번 경기에서 네가 내 패스를 잘 받아먹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앞으로 꼬맹이 네 녀석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평가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직설적인 성격답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던 디에고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요한을 응시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디에고의 모습에 요한이 미간을 꿈틀거리자 디에고가 수상쩍은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꼬맹이 너, ‘악셀’이랑 촬영한다는 거 사실이냐?”
16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리그 경기를 대비한 오전 트레이닝 세션이 치러지기 전에, 요한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예기치 못한 부탁을 받았다. 무언가 잘못 들었을 거라 여겨 되물었으나 요한의 질문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뻔뻔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사인.”
“……!”
“악셀의 사인 하나만 받아 달라고.”
디에고는 팀 내에서도 자신만 알기로 유명했다. 그는 독불장군이었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컸으며, 또 자존심이 몹시 세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동료들의 신뢰를 받은 것은, 그만큼 뛰어난 그의 축구 실력 덕분이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
그만큼 능력이 따른다면 조금 특이한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축구계는, 오히려 그것을 선수 개인의 특징으로 여기기도 했으니까.
지금껏 요한은 그런 디에고가 특정한 누군가의 ‘팬’이라는 사실은 귓등으로도, 매체로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모를까.
“왜 그런 표정이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않나? 이봐, 꼬맹이. 나는 너한테 어시까지 해 준 동료라고. 네 1군 데뷔 첫 골을 도와준 동료란 말이야. 그런 대단한 동료를 위해 사인 하나 받아 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안 그래?”
디에고는 의심쩍은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요한을 향해 퉁명스러운 말을 쏟아 냈다. 특히 리그컵 어시스트까지 언급하는 그를 보며 요한의 눈이 더욱 가늘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디에고는 제 말에 반응하지 않는 요한을 향해 ‘젠장!’ 하고 욕설을 내뱉더니 이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와이프가 팬이라서 그래! 내가 아니라!”
“아.”
“빌어먹을. 내가 왜 관심도 없는 사내 놈 사인까지 받아다 줘야 하는지. 하필 그놈이 너랑 촬영을 한단 소문이 와이프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하여간 사인! 꼭 받아 와. 알았냐?”
결국은 사실대로 해명한 디에고가 멱살을 잡을 기세로 저를 노려보자 요한은 풋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미소를 짓는 요한을 내려다보던 디에고는 칫 잇소리를 내고선 그에게서 몸을 돌린 후 피치 위로 나섰다. 요한 역시 그런 디에고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그를 따라갔다.
리그컵 경기 전 열렸던 팀 훈련에서 선발용 조끼를 입었던 요한은 이번엔 교체용 조끼를 부여받았다. 그 말인즉, 토요일로 예정되어 있는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는 웰비 감독이 요한을 선발로 기용하는 모험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실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기회가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에 요한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선발팀과 교체 팀으로 나뉘었던 미니 게임에서 골을 넣은 것은 그 희망에 대한 증거이기도 했다.
“잊지 마! 사인, 꼭 받아 와!”
오늘은 총 두 타임으로 나뉘어 트레이닝 세션이 진행되는데, 요한은 오전에만 참가하기로 코치진들과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오후에는 프로모션 북 촬영을 위한 시간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드레싱룸을 나서는 요한을 향해 디에고가 외치고 또 외쳤다.
‘애처가라고 하던데.’
자기애가 넘치는 인물이기는 하나 그만큼 소꿉친구인 와이프 역시 몹시 사랑한다고 알려진 디에고의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한은 강렬한 눈을 빛내는 디에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야, 여기 스튜디오까지 있었네?”
요한이 슬슬 상념에서 벗어날 시점이었다.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울리는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요한의 얼굴이 더욱 경직됐다. 요한이 후우 숨을 내뱉는 것과 달리 스태프들의 안내를 받아 등장한 레온하르트를 발견한 누군가가 후다닥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악셀 씨!”
“응? 누구……?”
“이번 촬영 진행을 맡은 루퍼트 콜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하, 감독님이시군요.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참, 감독님.”
“네?”
“부디 그 카메라에 제 미모를 있는 그대로 실어 주십시오. 제가 평소 화보보다 실물이 더 낫다는 평가를 듣는데, 이번에야말로 팬들에게 제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하하! 악셀 씨와 함께 작업했던 분들에게 악셀 씨 성격이 몹시 좋다고 들었는데 이야기대로군요! 그럼요. 실물 그대로 찍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어찌나 화기애애한지, 두 사람이 스튜디오의 출입구 쪽에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요한의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어디 불편한 곳 있으세요, 필립 선수?”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요한의 메이크업을 도와주던 담당자, 샐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제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한 요한은 당혹감을 얼굴에서 지워 낸 후 대답했다.
“……아닙니다.”
“혹 수정하고 싶으신 곳 있으면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요한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샐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요한은 조명이 달려 있는 화장대 앞 거울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다 입을 다물었다.
‘사인이라.’
디에고의 부탁을 받았고, 승낙까지 해 버렸으니 이제 와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하필 자신이 사인을 받아야 할 상대가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 악셀이라는 사실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요한은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사인을 해 달라고 한다면 의미심장한 눈으로 볼 텐데,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낫나, 아니면 상황을 꾸미는 편이 나으려…….
“……!”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라 고개를 드니 레온하르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이 일어날 필요는 없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이런.
친절히 대해도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 말까인데, 무의식적으로 퉁명스러운 음성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경직된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며칠 전, 레온하르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 장소를 뜬 이후 처음으로 그를 만났기 때문에 괜히 경계하게 되었다. 요한은 자신의 냉랭한 질문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노려봤다.
“무슨 일이긴, 오늘 같이 촬영할 거니까 인사라도 하려고.”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대답하는 레온하르트의 속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