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59)

레온하르트가 움켜쥐고 있던 신문 위로 시선을 던진 이안이 흐음,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신문에 꽂혀 있던 녹색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아드리치가 뭐래? 너 진짜 모델 계약할 거냐?’라는 질문을 쏟아 내는 이안을 빤히 바라봤다.

“왜?”

말없이 저를 주시하는 레온하르트의 부담스러운 눈길에 이안이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며 움찔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달싹였다.

“키스트.”

“갑자기 징그럽게 왜 성을 부르고…….”

“솔직히 말해 봐.”

“뭘?”

“내가, 성적 매력이 떨어지나?”

“……뭐?”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던져 버리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이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온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날 보면 섹스하고 싶지 않아?”

“쿨럭쿨럭!”

“한때 섹시 페로몬이라 불린 나라고. 아니, 한때가 아니지. 지금도 그런 별명이 통한단 말이다.”

“하, 하하.”

“게다가 나와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단 한 번도 나에 대해 불만을 쏟아 낸 적이 없었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이안 너도 보지 않았나?”

“어, 뭐…… 네가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순정남이기는 하지.”

서늘하게 눈을 빛내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이안이 어색하게 구레나룻 쪽을 긁적였다.

레온하르트는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나를, 깠다 이거지.

[다시 뵙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던 요한이라는 녀석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래서인지 화가 더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저를 엿 먹인 상대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신문마저 구겨 버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이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봐, 레온. 너, 미라클 스타디움에서 무슨 일 있었어?”

분명 모델 계약을 하러 간다고 했던 레온하르트가 잔뜩 뿔난 상태로 이를 갈자 이안이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레온하르트는 ‘거기서 그 빌어먹을 자식을 만났어.’라고 말하려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별일 아니라면 다행이다만.”

“…….”

“어쨌든 수고해라. 곧 연습 시작할 거니까 흥분 가라앉히고.”

“……그래.”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쯧쯧, 혀를 차더니 그의 대기실을 벗어났다.

드디어 홀로 남게 된 레온하르트는 의자에 앉은 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빤히 들여다 봤다.

‘누구한테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어.’

무려 함께 밤을 보낸 상대였다.

비록 술기운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상대 역시 제 아래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렸고,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매달린 건 그쪽이었잖아.’

침대 위에서 몸을 부딪칠수록 더욱더 갈구하는 눈빛을 보냈던 자는 분명 제 아래에 있던 그였다.

그럼에도 그렇게 치를 떠는 모습이라니.

확실히 상대가 자신을 하룻밤의 불장난 정도로 여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체 누구와 혼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날, 예의 클럽에서 사냥감을 찾았던 거겠지.

‘그래서 기분이 나쁜 건가?’

만약 그날, 그의 레이더에 자신이 걸려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찝찝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관계를 맺은 상대가 사라져 버린 호텔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그 불쾌감과는 분명 멀어졌겠지.

천하의 레온하르트를 기억하지 못하고 쌀쌀맞은 말만 쏟아 내던 남자 앞에 일부러 나타나 자극을 한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다시 되짚어 봤다.

아무리 한 침대에서 뒹굴었다 할지라도, 싫다는 사람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것은 평소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 이건 레온하르트 악셀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흣! 흐으. 하…… 읍.]

[이봐, 괜……찮은 거야?]

[…….]

[이봐?]

[괜, 찮습니다. 그러니…… 멈추지 마세요. 계속, 계속……해 주세요.]

거울에 비친 그의 눈 밑이 퀭하다.

레온하르트는 요 며칠간, 아니 그날 밤 이후 줄곧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의 내용은 똑같았다.

레온하르트는 평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정말이지 끝내주는 섹스를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다름 아닌 흑발 남자였다. 현실의 저를 볼 때마다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바로 그 남자. 런던 FC의 신입 스트라이커, 요한 백.

‘꿈에서 매달리는 건 언제나 그 녀석이면서!’

어째서 현실은, 자신이 그를 찾고 싶어 안달을 하는 거냔 말이지.

두근두근두근두근.

불현듯 떠오른 꿈결의 장면 때문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순간 거울을 발견한 레온하르트가 헉,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흥, 코웃음을 쳤다.

“단순한 호기심이야.”

이건 경험해 보지 못한 상대를 만났기 때문에 발생한 지극히 자연적인 반응이다.

“인간은 본디 호기심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자문자답하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주억이며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은, 그 녀석이 내 신경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군.”

꽤 좋지 않은 쪽으로.

“우리 악셀가(家)는 치욕을 당하면, 반드시 갚아 주지.”

독일의 유서 깊은 공작가인 악셀 가문이 21세기인 현재까지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공격을 받으면 그에 따른 보복을 철저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천하의 레온하르트가 의뭉스러운 동양인 축구 선수에게 받은 치욕을 도통 머릿속에서 지워 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얼굴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한참을 반복하던 행위를 툭 멈춘 그는 이내 씩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 녀석을 계속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

어디 그저 만나고 싶은 것뿐인가?

‘그날 밤처럼…….’

반드시 내 아래서 그날 밤처럼 뜨거운 숨을 토해 내게 만들겠어.

레온하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악셀가의 일원이니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레온하르트는 몇 번이고 수긍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거울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지닌 미남자가 ‘옳은 결정이야.’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생겼군.’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13화

#전반 11′ ~ 전반 20′

[난 말이지, 미스터 백. 그쪽을 만나기 전까진 이성애자였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성……애자?’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대화가 약간씩 어긋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그 역시 조금은 흥분한 상태였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실수였다. 젠장.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이봐, 내 말 듣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꽉 악문 저를 향해 녹안을 지닌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요한은 태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시야에 들어가지 않은 손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팔목의 핏줄이 불끈 튀어나올 정도로.

-레온하르트 악셀?

“예. 혹시 그런 이름을 지닌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그 남자는 허가되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기 힘든 미라클 스타디움을 자유자재로 누볐다. 특히나 홈 팀의 드레싱룸이 있는 복도까지 내려온 것을 보면 단순한 파파라치, 혹은 잡상인은 분명 아닐 거다.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눈 요한이 몸을 돌려 드레싱룸으로 돌아가기 전, 평소 인사를 주고받던 안전 요원이 예의 금발 남자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날 밤 꿈을 꾸는 것처럼 즐거웠던 기분이 곤두박질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환희를 만끽할 사이도 없이 마주한 금발 남자로 인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혹 누군가 저를 보고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집으로 들어온 요한은 축하를 해 주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는 제 핸드폰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무시하고선 집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그 남자의 이름을 뱉어 냈던 것이다.

-레온하르트 악셀…… 악셀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어어?

요한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질문을 받게 된 앨리슨은 끙끙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러던 와중 들려온 깨달음의 탄성에 요한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들은 적 있는 이름입니까, 앨리?”

요한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앨리슨이 호호 웃으며 대꾸했다.

-어휴, 어디 듣다뿐이겠어? 그 사람이잖아! 웨스트엔드의 왕자!

“네?”

웨스트엔드의…… 왕자?

-그렇지. 요한! 너, 퀸 레베카 시어터라고 들어 본 적 있지?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요한은 익숙한 단어를 언급하는 앨리슨에게 대답했다.

“예. 몇 달 전에 안나마리아가 뮤지컬을 보여 주겠다며 레스터 스퀘어까지 가서 뮤지컬 티켓을 구매하려고 했었는데 하필 그날따라 전부 매진이라 티켓을 구하지 못했던 공연이…… 아마 퀸 레베카 시어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앨리슨 디어의 친조카인 안나마리아와는 비슷한 또래이기도 하고, 또 근처에 살아서 자주 어울리곤 했다. 특히 안나마리아는 요한에게 큰 의미를 지닌 친구였다. 그를 가장 잘 알려 주는 단적인 일화를 들자면, 요한이 가족을 따라 귀국하지 않고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며 런던에 남기로 했을 때 보다 빠르게 런던에서의 자취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안나마리아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안나마리아가 뮤지컬 관람을 즐긴다는 것은 축구에 미쳐 있는 요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휴식 시간에 집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는 요한과 달리 그가 집에 있을 때마다 나타나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낸 안나마리아는 언제나 웨스트엔드로 요한을 데려갔다.

[어째서 표가 없는 거야! 어째서!]

몇 달 전, 제게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끌고 간 레스터 스퀘어의 티켓 부스에서 원하던 티켓을 얻지 못하자 버럭 소리치던 안나마리아의 모습이 생각나자 요한은 피식 웃었다.

-그래, 바로 그 공연!

“예?”

-아마 안나마리아가 보여 주려 했던 공연이, 악셀이 주연으로 나오는 공연이었을 거야!

……뭐?

-그러니까…… 라는 이름의 공연이었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앨리슨이 확신에 가득 찬 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갑자기 악셀은 왜? 요한, 너도 뮤지컬에 관심 있니?

“……앨리, 한 가지 더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앨리슨에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요한은 겨우 입술을 뗐다.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웃는 앨리슨은 요한의 음성이 떨리고 있음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요한은 예의 화요일 밤, 자신이 갔던 클럽에 레온하르트 악셀이 왔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앨리슨은 잠깐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그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불렀다.

“…….”

두근두근.

앨리슨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설마.

그래서 제게 그런 말을 던졌던 걸까.

‘아니. 이름만 같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

벌렁거리는 가슴의 박동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려 애쓰며, 요한은 초조하게 앨리슨의 대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맞네! 에디가 그러는데 그날 악셀도 클럽에 왔었대!

“……!”

-그나저나 이상하네. 악셀이 어째서 클럽에 온 거지? 내가 알기로 악셀은 게이가 아닌데. 그 사람, 얼마 전에 유명 모델이랑 사귀고 있지 않았나?

“……젠장.”

-뭐라고? 요한,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닙니다, 앨리. 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

“죄송합니다만 전화를 끊어야겠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잠깐만, 요한! 나 아직 너한테 축하 인사도 못했…….

앨리슨 디어의 말은 답변을 듣자마자 멋대로 통화를 종료해 버린 요한에 의해 뚝 끊어졌다.

두근두근.

앨리슨과의 통화를 끝낸 이후로도 요한은 계속해서 쏟아지는 축하 문자 폭탄의 진동을 느끼며 입술을 꽉 악물고 있어야 했다.

<웨스트엔드의 왕자, 미라클 스타디움에 강림! 아드리치와 친분이 있었나?>

다음 날, 어제 있었던 경기로 신문의 1면을 장식한 요한은 자신의 얼굴이 찍힌 신문을 내려다보다 작은 기사 하나에 움찔거렸다.

요한의 시선 끝에는 닷새 전, 아니 이제는 엿새 전이 되어 버린 그날 밤 요한과 함께 침대 위를 뒹굴었던 남자가 런던 FC의 아드리치 구단주와 함께 경기를 관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이 있었다.

빌어먹을.

이제야 레온하르트가 어떻게 그렇게 수월하게 복도를 드나들 수 있었는지 납득이 됐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얽힐 일이 없을 테니.’

그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집요하게 저를 찾아 헤맸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들고 있던 신문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레온하르트 악셀’이라는 단어를 뇌리에서 지우려 애썼다.

“그렇지, 백.”

경기 일정이 빡빡할 때를 제외하고 게임을 치른 뒷날은 오후 훈련만 소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실내 트레이닝을 진행하고 있던 요한에게 런던 FC의 감독인 조지 웰비가 다가왔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요한이 ‘예, 감독님.’ 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웰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아드리치한테서 연락이 왔어. 어제 승리도 축하할 겸 부탁할 것도 있다고 너와 일대일 면담을 요청했는데, 시간 괜찮나?”

“아드리치 씨가…… 저를요?”

요한은 프로 데뷔 이후 불합리한 이유로 감독의 외면을 받아 왔다.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2군 감독인 로시 잭콜과의 트러블로 인해 제 가치를 부정당했으니까.

당연히 구단주와의 일대일 면담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은 축구 선수를 그만두는 것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매번 스타 선수들을 데려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가, 갑자기 유소년 출신의 깜짝 스타가 등장하니 아드리치도 기뻤던 모양이지. 어쩌면 너를 유스턴 FC의 란슬롯처럼 키워 보고 싶은 계획일지도? 허심탄회하게 대화 나눠 보게.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팀의 구단주가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저를 부른 것이 맞느냐 물어도 웰비 감독은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필립 씨, 준비되셨습니까?”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웰비 감독이 말했던 구단의 수뇌부가 제게 다가왔다. 먼발치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던 이반 아드리치의 수행비서였다. 은색 안경을 껴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남자가 근육 트레이닝에 매진하던 요한을 불렀다.

런던 FC의 일원들이 요한을 부르는 호칭은 보통 세 가지였는데, 먼저 그의 이름인 ‘요한’, 한국 성인 ‘백’,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성인 ‘필립’ 이렇게 나뉘었다.

보통 요한과 어릴 적부터 호흡을 맞추어 온 유소년 출신 2군 선수들이 이름을 불렀고, 이제 막 요한과 함께 뛰기 시작한 선배 선수들이나 감독 및 코치진은 ‘백’이라는 한국 성을 사용했다. 그를 ‘필립’이라 부르는 이들은 구단의 행정을 책임지는 보드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네빌이라는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인 요한은 훈련복 위에 간단히 재킷을 걸친 후 그의 뒤를 따랐다.

‘후우.’

이반 아드리치의 수행비서인 네빌은 런던 FC의 훈련장인 LTC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구단주실로 향하는 동안 내내 아드리치 앞에서 가려야 할 말에 대해 언급해 주었는데, 그의 말들은 솔직히 말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TV나 신문, 또는 멀리서만 보던 예의 구단주를 실제로 볼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던 터라 더더욱 그랬다.

네빌이 구단주실 앞에 서서 똑똑 문을 두드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은 잔뜩 얼어 있었다.

“오, 드디어 어제의 별을 만나게 되는군!”

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쉽게 떼지 못하는 요한에게 네빌은 ‘얼른 들어가시죠.’ 라고 웃으며 속삭여 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요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단주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던 이반 아드리치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컹거려 요한은 아드리치가 제게 다가오는 동안 꿈쩍도 하지 못했다.

14화

“모델……이요?”

처음 대면한 이반 아드리치는 그간 요한이 생각했던 팀의 구단주 이미지와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정한 수완가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제 경기에서 보여 준 요한의 실력에 대해 줄줄이 나열하며 웃고 있는 모습은 옆집 아저씨와도 같았다.

어떤 점이 아쉬웠지만 어떤 점은 완벽해서 박수가 나오더라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그로 인해 괜히 귀가 붉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초반엔 그저 ‘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던 요한도 시간이 흐르자 런던 FC에서의 생활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만큼 편해졌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와중 들려온 아드리치의 말에 요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모델. 구단 자체에서 계획하고 있는 몇 가지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 필립이 나와 줬으면 해.”

“하지만 저는 이제 막…….”

“하하! 물론 자네는 갓 1군에 데뷔한 신인 선수지. 아직 리그 경기도 치른 적이 없고. 그렇지만 나는 어젯밤 경기에서 가능성을 봤어! 필립 군, 자네는 틀림없이 우리 팀의 간판스타가 될 거야. 과장된 소리가 아니라 자네 스스로 그걸 증명할 거라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열변을 토하는 구단주의 말에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한은 저를 한껏 띄워 준 뒤 예의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 이반 아드리치의 음성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모델, 모델이라……. 하긴, 구단도 선수의 초상권에 대한 권리는 없으니까. 너를 팀의 모델로 쓰려면 돈을 지불해야 하니, 아직 값이 쌀 때를 노리는 거겠지. 네가 잭팟을 터트릴 거라 확신하고 말이야. 이야, 아드리치 자식.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돈 냄새를 잘 맡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제 겨우 발을 뗀 너한테 접근을 해? 약았어.

“아…….”

-그래서? 아드리치가 말한 모델 건이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는 들었니?

예의 ‘모델 건’에 대해 에이전트와 상의를 하겠다며 잠시 구단주실 밖으로 나온 요한은 곧바로 앨리슨 디어에게 전화를 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자 흥, 콧방귀를 뀐 앨리슨이 요한에게 되물었다.

“예. 아직 시즌 초반이라 티켓 구매를 결정하지 못한 팬들한테 돌릴 프로모션 북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어요.”

-흐응, 그래? 몇 컷이나 찍으면 된대?

“시즌 돌입도 했으니 길게 시간을 낼 필요는 없고, 하루에서 이틀 정도면 된다고…….”

-…….

“어떻게 생각하세요, 앨리?”

요한은 대답 없는 앨리슨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한참 뒤, 고뇌하던 앨리슨이 입을 열었다.

-뭐 사진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렇겠죠?”

-천하의 아드리치가 직접 움직이는 덴 꽤 의미가 있어. 내가 듣기론 런던 FC에서도 스타 선수들 몇몇에게만 직접 이야기를 했다더라고.

“그런가요.”

-응. 오늘 오후에 내가 LTC에 들른다고 전해 줘.

“예.”

-그나저나 축하해, 요한!

“네?”

-이제야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구나!

호호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앨리슨의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요한은 괜히 쑥스러워져 ‘고맙습니다, 앨리.’ 하고 짧게 대답한 후 통화를 종료했다.

다시 구단주실로 들어간 요한은 아드리치에게 에이전트가 트레이닝 센터로 올 거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거 기다리던 대답이군! 참, 필립.”

“네, 아드리치 씨.”

“식사는 했나?”

“예?”

“괜찮다면 함께 저녁이라도 먹는 게 어때? 마침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소개……요?”

“응. 필립 군과 함께 촬영할 사람이기도 하지. 이봐, 네빌! 거기 있나?”

요한은 제게 간단한 설명을 마친 뒤 비서를 부르는 아드리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일이 정신없이 진행되는 느낌인지라 몇 시간 뒤 레스토랑을 예약하라며 네빌에게 지시하는 아드리치를 그냥 소파에 앉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독 촬영 아니었나?’

프로모션 북을 촬영하는 데 다른 사람도 함께하나 생각하던 요한은 이내 생각을 떨쳐 냈다. 그러고 보니 시즌 시작 전인 프리 시즌에, 팀의 유명 선수들이 모여 촬영하는 것을 구경 간 기억이 났다. 한창 시즌 중인 지금에 와서 프로모션 북을 돌리는 것이 왠지 수상쩍기는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팀의 윗선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뭐, 별수 있나.

요한은 피식 웃으며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쉬고 있으라는 아드리치의 방을 나섰다.

‘한동안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겠군.’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명에 불과했던 자신이 단번에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었다. 놓친다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 기회의 끈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요한은 트레이닝 룸으로 돌아가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때로 그런 각오는, 필연적으로 다가온 운명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여기야, 미스터 악셀!”

요한은 제 머릿속에서 완벽히 지워 내려 했던 사람과 또다시 마주하고 말았다.

* * *

[저 악셀이라는 배우가 우리 팀의 얼굴이 되어 주기로 했어.]

구단주와의 저녁 식사.

그것도 꽤 늦은 시간에 진행되어서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틈도 없이 이반 아드리치는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선 손을 마구 흔들었다. 요한이 당당하게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자 아드리치가 요한에게 속삭여 주었다.

팀의 얼굴이라니.

차마 그게 사실이냐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기에 요한은 아드리치와 레온하르트가 악수를 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치 아냐?]

[저 사람은 어제 캠든 상대로 골을 넣은 그 선수 같은데?]

[그 옆에는 악셀? 뭐야, 저게 대체 무슨 조합이야?]

요한과 아드리치, 그리고 레온하르트.

한데 모여 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세 사람이 각각 자리를 잡자 주변이 술렁였다. 아드리치와 레온하르트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고 있었지만 요한은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굴을 굳혔다.

“그나저나 오늘도 공연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맙네, 미스터 악셀.”

“당연히 와야 하는 일인걸요. 오히려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리치 씨.”

“감사는. 참! 필립, 자네도 인사해야지? 여기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아드리치 씨.”

“응?”

“우리, 구면이거든요.”

……!

“안 그래요, 요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던 요한은 자연스럽게 제게로 화제를 돌리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움찔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녹안을 보자니 입꼬리가 멋대로 뒤틀리려 했다. 최대한 행동을 자제하며 이를 악문 요한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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