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59)

“뭐…….”

레온하르트는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애를 먹인 건가? 내가 얼마나 미스터 악셀을 우리 얼굴로 쓰고 싶었는지 알아?”

투정 부리듯 아쉬운 티를 내는 이반 아드리치는 세 달 전, 처음 레온하르트의 공연을 관람한 이후 그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축구팀의 얼굴로 내세우기 위해 줄곧 접촉을 해 왔다.

축구 사업은 물론 특정 기업의 광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레온하르트는 그러한 제안을 한사코 거절해 왔기에, 이반 아드리치 역시 먼저 접촉을 한 그를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럼 어디, 미스터 악셀의 조건을 들어 볼까?’ 하고 묻는 이반 아드리치를 빤히 응시했다.

‘일단은…….’

레온하르트가 원하는 요구 조건은 단 하나.

만약 자신을 런던 FC의 메인 모델로 삼고 싶다면,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제 얼굴을 알 수 있을 만큼 전폭적인 홍보와 지원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빌어먹을 동양인도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만큼 말이지.’

뻔뻔스럽게도 저를 모른다고 당당히 말한 흑발의 남자를 떠올린 레온하르트는 ‘미스터 악셀?’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 이반 아드리치에게 대답하려 했다.

“제 조건은―”

“와아아!”

응?

바로 그 시점.

내내 고요하던 캠든 FC의 골망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아드리치와 나란히 앉아 직관을 하면서도 줄곧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던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피치 위로 향했다.

‘……!’

쿵,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레온하르트의 녹안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맙소사! 미스터 악셀! 골이야, 골!”

줄곧 지루하던 경기가 갑자기 터져 버린 골로 인해 흥분에 휩싸였다. 점잖은 척 앉아 있던 이반 아드리치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굳어 있는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아드리치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전광판을 가득 채운 오늘의 주인공에게 완벽하게 꽂혀 있었다.

“미스터 악셀?”

경기장을 뒤흔들던 열기가 가라앉고, 재개된 경기를 바라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아드리치가 여전히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는 굳게 다문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았다.”

“뭐?”

“드디어 찾았어!”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예상치 못한 수확으로 인해 환희로 물들었다.

10화

‘정말 피 말리는 날들이었지.’

레온하르트는 훗, 코웃음을 흘리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자신이 버려졌던 ‘그날 아침’ 이후 매일같이, 가슴을 졸여 가며 타블로이드지를 살폈다. 혹 인터넷에 기사가 뜰까 봐 노심초사하기도 했으며, 흑발 남자만 보면 얼굴부터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레온하르트의 의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전광판의 익숙한 얼굴은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내려앉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가 런던 FC의 메인 모델이 되려 했던 일은 매우 적절했다.

[방금 골을 넣은 선수?]

[예! 혹시, 제가 저 선수와 따로 만날 기회를 주실 수 있습니까?]

[뭐 그건 어렵지 않지만…….]

[모델 건에 대해 따로 생각해 둔 계약 조건은 없지만, 일단 저 선수만 만나게 해 주시면 됩니다.]

[정말 그거면 되겠나?]

경기를 관전하는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빛나자 아드리치는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레온하르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기억……납니다.]

런던 FC의 구단주인 이반 아드리치 덕분에 레온하르트는 어렵지 않게 구단 스태프들만 다닐 수 있는 통로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흑발의 동양인을 발견한 순간이란.

저와 함께 밤을 보내고서도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던 예의 사내는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언급하는 레온하르트를 보고 사색이 됐다.

[나랑 이야기 좀 하지? 30분 정도면 될 듯한데.]

[알겠……습니다.]

어째서 저를 찾아왔냐는 듯 서늘한 눈길을 보내는 흑발의 남자에게 레온하르트는 결국 만족스러운 답을 얻어 냈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리고 현재 시각 오후 11시.

내일 오후에 또 공연이 있었기에 진작 침대로 들어가 몸 관리를 해야 할 시점이었건만,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검은 애마에 올라타 있었다. 충분히 샤워를 마치고 나올 시간을 주었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로 인해 ‘설마 튄 거 아니야?’라는 불안감이 싹트던 순간이었다.

똑똑.

“……!”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오자 레온하르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짙게 선팅된 차 문밖에서 웬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씩 웃으며 창문을 내렸다.

‘흐응.’

천천히 내려가는 창문 사이로 최대한 자신의 정체를 감추겠다는 듯 푸른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보인다. 그는 레온하르트가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끝내지 못한 인터뷰가 있어서…….”

레온하르트가 문을 열어 주기가 무섭게 조수석에 올라탄 남자가 후우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불안한 눈으로 혹 자신을 쫓아온 이들이 없는지 살피던 그는 레온하르트의 차가 세워진 곳에 팬들은 물론 파파라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타자마자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차를 몰려던 레온하르트는 ‘가급적 외진 곳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만.’ 하고, 말을 덧붙이는 그를 향해 씩 웃었다.

“그렇게 하지.”

저 역시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들키는 건 사양이다. 레온하르트는 말을 마친 뒤 다시 입을 다무는 남자를 힐긋거리며 핸들을 부여잡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쌩쌩 달리던 레온하르트의 차가 멈춰 섰다.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올린 레온하르트가 시동을 끄고 조수석을 주시하자 서늘한 눈으로 정면만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해 볼까?”

고요한 침묵을 깨는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앞을 바라보던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레온하르트는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빛나는 축구 선수를 향해 소리를 내뱉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경황이 없었어.”

없어도, 아주 없었지.

레온하르트는 하아, 한숨까지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가벼운 말을 들은 남자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쪽…… 그러니까 미스터 백이 나가는 걸,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미스터 백’이라 상대를 언급한 레온하르트의 음성에 남자의 입술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미동 없는 남자를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 백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 분명 전광판에 뜬 그쪽 성은 백이었던 것 같은데. 아시아 중 어느 나라지? 일본? 아니면 중국? 백이라는 이름이 꽤 불편하군. 이름을 불러도 되나, 요한?”

“……한국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쪽에게 제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습니다.”

아드리치로부터 이미 상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이왕이면 본인 입으로 듣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일부러 웃음을 지어 가며 묻자 불쾌하다는 듯 쳇, 잇소리를 낸 요한이 저를 노려봤다.

미묘한 얼굴이군.

레온하르트가 제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불쾌한 건지, 아니면 출신 나라를 헷갈리는 것이 불쾌한 건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이다.

‘설마 내가 한국도 모를까.’

뮤지컬의 본거지인 웨스트엔드의 신성이라 불리는 레온하르트였다. 게다가 독일에 뿌리를 둔 배우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세계 뮤지컬계의 새로운 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코리아’에 대해 모를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얼마 전엔…… 월드컵에서 지기까지 했으니.’

자신은 크게 관심이 없지만, 온 가족이 모여 관전했던 월드컵 조별 경기에서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조국이 패했던 것을 모를 정도로 상식이 없지는 않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싸늘하게 물든 분위기에 살짝 당황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뭐, 미스터 백.”

“네.”

“어떡할 거지?”

“뭘 말입니까?”

모르는 척 되묻는 요한은 레온하르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입술을 씰룩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차 안에서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흑발 남자를 주시하며 그를 만나면 하고자 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나는 그날 밤을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아.”

레온하르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요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얼른 휴식을 취해야 함에도 시간을 내어 말을 들어주고 있는데, 기껏 꺼낸 말이 생각과는 달라서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상대가 짜증스러워한다는 걸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레온하르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 내가 취해 있었던 건 사실이고, 또…….”

“이봐요, 미스터…….”

응?

“레온. 풀 네임은 레온하르트 폰 악셀이지만, 편하게 레온이라고 불러도 돼.”

제 말을 끊어 내고 입술을 달싹이려던 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레온하르트는 선심이라도 쓴다는 표정으로 웃어 주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런 레온을 바라보던 요한은 잠시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악셀 씨.”

……확실히 살가운 성격은 아니군.

애칭을 알려 줬음에도 굳이 성을 부르는 것을 보면 생긴 것처럼 퉁명스럽거나, 혹은 고지식한 모양이다.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친해지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겠다 생각하던 레온하르트의 귀에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요한이 말을 이었다.

“제가 들었던 당신에 대한 정보와는 꽤 거리감이 있는 일을 이어 가고 계시군요.”

“거리감?”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요한은 대답했다.

“예. 그날 제가 들었던 당신은, 틀림없이 같은 남자와 두 번 이상은 자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

“해서 뒤탈이 없을 당신한테 접근했던 건데…… 이런 식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면 매우 난감…….”

“잠깐, 기다려.”

서늘한 말을 내뱉는 요한을 보며 레온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 요한이 제게 꺼내는 말들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제야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정정할 필요성이 있겠군.

갑자기 자신을 막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요한이 미간을 찌푸리자 레온하르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쪽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

“오해……라뇨?”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쓰는 요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 그날, 대체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난 그쪽이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난 말이지, 미스터 백.”

레온하르트는 쯧 혀를 차는 요한을 보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그쪽을 만나기 전까진 이성애자였어.”

11화

“네?”

‘그 밤’ 이후 지금까지.

눈앞의 남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닌 축구 선수가 이토록 목소리를 높일 줄은 몰랐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요한이 몸까지 들썩이며 외치는 바람에 주차되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애마가 흔들렸다.

이봐, 좀 침착하지그래.

레온하르트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가는 상대의 안색을 살피며 코웃음을 쳤다.

설마 당황한 건가?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군.’

무신경함의 극치를 달리는 줄 알았는데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고.

가슴이 콕콕 찔려 와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레온하르트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고 있는 요한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그쪽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여자를 안은 적은 있어도, 남자를 안은 적은 없었다고.”

태연하게 뱉어 내는 제 말에 상대의 눈동자가 거친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흥미로워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단 한 번도 남자한테 동한 적이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밤, 그런 일이 일어나 버린 거지.”

점점 구겨지는 상대의 얼굴은 레온하르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레온하르트는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도, 내가 남자와 섹스를 할 줄은 몰랐다고.”

노골적인 그의 발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상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속으로 코웃음 치던 레온하르트는 싱긋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백은…… 다음 날 본인이 내게 취했던 행동에 대해 뉘우칠 것이 있지 않나?”

부드럽게 휘어지는 레온하르트의 눈꼬리를 보면서도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침묵을 유지할 거라고는 예상했지.

“평범한 이성애자를 그렇게 유혹해서 한 이불까지 써 놓고,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더군. 그럼 곤란하지. 이성애자를 건드렸으면, ‘책임’은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

레온하르트의 말이 적잖은 충격을 준 모양인지 상대는 여전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꽉 짓누르고 있는 요한을 아직 보지 못한 듯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내가 요구하는 건 하나야. 그쪽이 나를……!”

그리고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 가던 레온하르트가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요한에게 본론을 꺼내려 할 때였다.

‘뭐야.’

앞 유리를 바라보던 요한이 레온하르트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이 나 말을 내뱉던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안……합니다.”

요한이라는 런던 FC의 신입 스트라이커는 조금 전까지 레온하르트에게 칼날을 세우던 것과는 달리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당황한 레온하르트가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아니, 난 사과를 받으려던 게 아니…….”

“저는 영락없이 그쪽이 저와 같은 계열인 줄…… 알았습니다.”

뭐?

“변명처럼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곳은…….”

“맞아, 게이 클럽이었지.”

레온하르트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가며 대답했다.

“하지만 미스터 백.”

“…….”

“그쪽도 잘 알다시피, 그 클럽은 소호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곳이야. 게이가 아니라고 해서 클럽에 입장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

“안 그래?”

잘못 걸린다면 몇 가지 문제를 발생시킬 법한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허벅지를 꽉 움켜쥔 요한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씩 웃었다.

‘좋아, 승기를 잡았군.’

한번 부여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은 결코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언제나 직진을 하는 성격이었고, 그 덕분에 많은 것들을 쟁취하며 살아왔다. 눈앞의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던지라 속으로 크게 웃던 레온하르트는 속에 든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지금부터라도…….”

“얼마를 원하십니까?”

‘지금부터라도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건 어때?’라고 말하려던 레온하르트의 계획은 처참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

레온하르트는 침착하게 말을 뱉어 낸 후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흑발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생긋 웃고 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온하르트의 서늘한 얼굴을 발견하지 못한 남자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악셀 씨께서 얼마를 원하시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그날 일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을 하겠습니다.”

“…….”

“예. 비록 그걸로 악셀 씨의 마음이 풀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 악셀 씨, 부디 넓은 마음으로 제 사과를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던 남자가 머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사과했다. 그와 동시에 황당함에 물들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정신적…… 피해 보상?’

누가? 이 빌어먹을 놈이, 내게 보상을 하겠다고?

레온하르트는 ‘보상금 관련 문제는 저보다 에이전트와 상의하는 것이 좋겠군요. 악셀 씨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는 게 편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인 요한이 핸드폰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 자식이 진짜.’

내내 참고 있던 울분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끝내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는 요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깐 기다려 봐!”

레온하르트는 낚아채듯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무슨 짓입니까?”

“이봐, 내가 지금 그쪽한테 섹스 후 위자료라도 달라고 찾아온 줄 알아?”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대체 사고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씩씩거리며 대답한 레온하르트는 좁아지는 요한의 미간을 발견하고선 부드득 이를 갈았다.

‘악셀가의 자존심이 있지, 위자료라니.’

위자료를 준 적은 있어도 받은 적은 결단코 없었다.

아니, 충동적인 원나잇도 눈앞의 상대가 처음이거늘.

레온하르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요한에게 인상을 썼다.

“그럼…… 지금 악셀 씨는, 그날 밤 일에 대해 사과를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아, 몇 번을 말해야 하냐고.

“그딴 게 필요한 게 아니라고!”

레온하르트는 강경하게 외쳤다.

“다시 말하지만 사과 따위는 필요 없어. 남자를 안았다는 사실에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날 밤 나 역시 즐겼으니까!”

“……아, 즐기……셨다.”

윽박지르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전해 듣고선 그의 말을 되짚듯 요한이 중얼거렸다. 잔뜩 흥분한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래! 즐겼어. 젠장할! 좋았다고!”

“…….”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온 거야. 그쪽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일부러…….”

“내 시간은 귀중해. 그런 내가, 그쪽을 일부러 찾아온 이유가 뭐겠어? 앞으로 그쪽이랑 어떻게…….”

“다행입니다.”

투덜거리려던 레온하르트의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씰룩이던 입술을 움직이려 하는 순간, 차분히 말을 듣고 있던 요한이 생긋 웃으며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두근.

좁은 차 안에서, 그것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미소를 발견한 레온하르트의 가슴이 세차게 쿵덕거렸다.

‘뭐……야.’

갑자기 반응하는 심장의 움직임에 레온하르트가 당황하는 사이 요한의 말이 이어졌다.

“영락없이 책임져야 할 상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럼 문제는 해결된 것 같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해결……됐다니?”

이해하지 못하는 레온하르트의 되물음에 눈꼬리를 휘어 가며 웃음을 보내던 요한이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 있었던 일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죠. 악셀 씨도 즐거우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날 일로 저를 귀찮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몹시 바쁘고, 이미 끝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

“그리고 악셀 씨는 이성애자라고 하셨나요? 그렇다면 더 말이 잘 통하겠군요. 그날 일은 완벽하게 잊어 주십시오. 그게 저와 악셀 씨, 서로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저는 내일 훈련이 있어서 이만. 다시 뵙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온하르트가 뭐라 대꾸하지 못하게 폭풍처럼 말을 쏟아 낸 흑발의 남자는 철컥 차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몸을 꺼냈다.

빵― 빵―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날아든 팩트 폭격으로 인해 그 어떤 말도 밖으로 꺼내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전조등을 강하게 비추며 요란한 클랙슨 소리를 울려 대는 웬 차의 등장으로 인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령이 나올 것처럼 텅텅 비어 있던 도로가 레온하르트의 차가 주차된 곳 뒤편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봐! 아까부터 거기 멈춰서 뭐 하는 거야? 갈 생각이 있어, 없어!”

제 뒤의 차주들로부터 거친 욕설을 듣던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비어 버린 조수석을 힐긋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 개자식이…….”

나를, 또 깐 거냐?

12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천하의 레온하르트 폰 악셀이 무려 두 번씩이나 같은 사람에게 퇴짜를 맞은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 망할 동양인을 찾아내 실제로 얼굴을 보고, 이렇게 살을 섞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던 그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빌어먹을 동양인 같으니.”

짙은 검정 머리카락에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동양계 남자를 떠올리며 레온하르트는 부드득부드득 이를 갈았다.

아, 자꾸 동양인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 안 되지.

혹여나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인종 차별자로 보면 곤란했다.

레온하르트는 인종 차별자라기보다는, 전 인류 박애주의자에 가까우니까.

슬쩍 주변을 살핀 레온하르트는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것보다.

‘사진은…… 잘 나왔군.’

쳇.

레온하르트는 정론지의 1면에 대문짝만 하게 찍힌 낯익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어젯밤 이후,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마사 씨, 신문 있습니까?]

[당연하죠. 오늘도 전부 줄까요?]

[……혹시, 스포츠 신문도 있습니까?]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린 신문 구매는 레온하르트로 하여금 타블로이드를 포함한 정론지까지 구매하게 만들었다.

정기적으로 매번 하는 공연이지만, 보다 완벽한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퀸 레베카 시어터로 출근한 레온하르트는 양손에 바리바리 신문을 들고 대기실에 들어섰다.

“어! 이제 왔…… 이봐, 레온. 뭘 그리 많이 들고 와?”

자신의 대기실은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굳이 레온하르트의 대기실에 먼저 들어와 앉아 있던 이안 키스트가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를 황당한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평소 레온하르트가 대본 외에 공연과 관련된 서적이 아니면 시선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이안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이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신문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별, 미라클 스타디움을 파랗게 물들이다!>

거창한 타이틀로 장식된 헤드라인 밑에는 골을 넣고 포효하는 예의 축구 선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던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구겼다.

“이봐, 레온.”

“…….”

“악세엘!”

“시끄러워. 나 귀 안 먹었다, 이안. 목소리 낮춰.”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니까 그렇지.”

“…….”

“뭐야, 무슨 일인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우리 레온하르트의 심기를 건드린 거지?”

레온하르트와 매일 같이 합을 맞추는 동료이자 절친한 친우인 이안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레온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한 백? 아아, 어제 런던 FC에 데뷔한 신동? 안 그래도 그 선수 이야기로 다들 난리더라. 오죽하면 그 점잖은 로빈슨 씨도 날 보자마자 어제 축구 봤냐며 묻더라니까? 참! 너 어제 미라클 스타디움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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