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59)

“몸이 안 좋냐, 꼬맹이?”

“예?”

“무리하지는 마.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으니 꽤 긴장한 것 같아서 말이지.”

“아…….”

“듣자 하니 네가 내일 선발 공격수로 나설 예정이라던데. 1군 데뷔 무대라 더욱 긴장하고 있는 거겠군.”

“…….”

“그럴 때일수록 몸 관리를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잔뜩 흥분해서 비츠 녀석처럼 시즌 아웃되면 우리뿐만 아니라 감독님까지 곤란해지니까. 들떠서 폐를 끼치지는 말란 소리다.”

“……!”

“뭐, 데뷔를 앞둔 꼬맹이한테 내 말이 들리기야 하겠냐만.”

툭툭.

발끝으로 볼을 트래핑하며 요한을 내려다보던 디에고가 풋, 실소를 터트리더니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제 막 1군으로 콜 업을 당한 요한과 달리 런던 FC로 온 지 5시즌이 넘어가는 디에고 가르시아의 발언은 그의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백, 며칠 뒤 너는 비츠를 대신해서 선발 공격수로 출장할 거다.]

런던 FC의 주전 공격수이자 저번 시즌의 득점왕이기도 했던 마이크 비츠가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왼쪽 무릎의 십자인대파열로 인해 시즌 아웃을 당한 것은 1군으로 급하게 콜 업을 당한 요한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요한이 속해 있는 런던 FC는 석유 재벌인 이반 아드리치의 든든한 자금으로 스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프리미어리그의 왕좌를 몇 년 동안 차지하고 있었지만, 저번 시즌 영입 과정에서 드러난 일로 인해 1년의 이적시장 금지라는 징계를 먹은 상황이었다.

이미 팀의 최고 스타이자 왼쪽 윙 포워드 자리를 지키던 바스티안 랄프가 허리 통증으로 5주 진단을 받아 아웃된 상황에 팀 득점을 담당하던 마이크 비츠까지 전치 6개월이라는 사고를 겪게 된 것이다. 하여 런던 FC는 선수 수급이 어려운 상황에 어떻게 해서든 득점을 해 줄 스트라이커를 찾다가 리저브 팀으로 급하게 손을 뻗었고, 요한에게까지 기회가 왔다.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진행된 경기 하루 전날의 트레이닝 세션은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1군으로 콜 업이 되고 난 이후 함께 훈련할 1군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힐긋거리는 그들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던 요한은 폐를 끼치지 말라는 디에고의 말에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폐…….’

확실히 내일 있을 경기에서 자신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한다면, 디에고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요한은 제 앞에 놓인 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얼굴을 굳혔다.

“디에고의 말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꼬맹이.”

그때였다.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요한을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제 말만 하고 사라져 버린 디에고 가르시아의 냉랭한 목소리와는 달리,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이었다. 땅을 향했던 시선을 올리니 런던 FC의 주전 수비수이자 주장을 맡고 있는 리케 프랭크 주니어가 미소 짓고 있었다.

“디에고는 원래 생각하는 걸 그대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가끔 당황할 일도 있겠지만 적어도 악의는 없어. 아마 꼬맹이 너에게 한 말도 내일 다른 생각 말고 잘하라는 의미에서 건넨 말일 거야.”

“캡틴.”

“훈련하는 거 지켜보니 꼬맹이 너 꽤 재능 있더라. 하긴, 천하의 조지가 실력 없는 녀석을 콜 업 할 리는 없겠지. 첫 경기이니만큼 반드시 이기고 싶을 테니까. 그러니 꼬맹이, 아니 요한!”

통칭 프랭키라고도 불리는 런던 FC의 캡틴은 요한의 어깨 위로 손을 턱 얹으며 씩 웃었다.

“내일, 잘할 수 있지?”

* * *

“그리고 오늘의 스트라이커, 요한 백!”

고대하던 밤이 밝았다.

승리를 바라며 자리를 잡은 수만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요한은 1군 선수들과 함께 피치 위에 섰다.

단순한 취미가 아닌 구단과 프로 계약을 맺을 때부터 언젠가 이러한 날을 맞을 거라 상상하고 또 상상했지만, 직접 맞이한 1군 데뷔전은 어쩐지 숨이 막혔다.

장내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제 이름이 경기장에 호령되고 와아아 소리를 지르는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이 귀를 울렸다.

요한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경기장을 둘러봤다.

프리미어리그 소속이 아닌 런던 내의 타 축구팀들과 함께 사용하는 리저브 팀의 경기장이 아닌, 런던 FC의 1군 선수들만 뛸 수 있는 미라클 스타디움.

이 넓은 피치 위에 오른 것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가쁜 호흡을 내쉬며 하프라인 근처에 서 있는 요한을 향해 주장 완장을 단 프랭키가 나타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요한은 어색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 꼬맹이. 너 오늘 실수하면 가만 안 둔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기 30초 전.

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떨치지 못하던 요한은 자신과 함께 투톱 자원으로 전방을 책임지게 된 디에고 가르시아의 말에는 웃지 못했다.

삐이익!

디에고의 협박 아닌 협박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심의 휘슬 소리가 들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백, 그간 네 리저브 경기를 돌려 보면서 느낀 게 있어. 잭콜 감독 아래서 넌 줄곧 2선 중앙 자원으로 분류돼서 그 포지션을 위주로 더 많이 뛰었다만, 내가 지켜봐 온 너는 타고난 골게터야. 디에고와 투톱으로 나서긴 할 거지만 디에고는 철저하게 상대 수비수들을 유인할 계획이야. 그러니, 디에고가 수비를 유인할 동안 공이 네게로 오면 무조건 슛을 해. 알았지?]

경기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 가졌던 팀 토크에서 런던 FC의 감독인 조지 웰비는 요한을 따로 불러 말했다. 그의 말대로 요한은 그간 리저브 팀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뛰기도 했지만 2선의 중앙이나 양쪽 윙을 가리지 않고 뛰기도 했다. 웰비 감독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요한의 전력을 잘 알지 못하는 상대 팀의 예측을 완벽하게 깨트릴 심산이었는지, 천하의 디에고 가르시아를 유인책으로 돌리고 요한에게 할 수 있는 공격을 모두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삐이익!

그러나 경기가 시작된 후 처음 15분은 제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제게로 다가오는 롱 볼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터치 라인 밖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고, 계속 볼 컨트롤을 하지 못하자 아예 상대 팀인 캠든 FC의 골대가 있는 최전방에서 제게 공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답답한 공격력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웰비 감독이 아래로 내려와 공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패스를 받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전방으로 드리블을 하며 상대 진영으로 올라가면서 몇 번씩이나 오프사이드 트릭에 걸렸다.

“젠장! 또?”

“어이, 부심! 눈 제대로 뜨고 있는 거 맞아?”

“이봐, 백! 왜 이렇게 자주 걸리는 거야! 수비 라인을 보고 침투하라고!”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깃발을 들어 올리는 주심을 향해 욕설을 내뱉던 홈 관중들은 계속해서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릭에 걸리기만 하는 요한이 답답했는지, 어느 시점부터는 요한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요한의 가슴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자신으로 인해 경기가 끊어지니,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 지경이었다.

[들었어? 오늘 아드리치가 온 모양이야. 첫 리그컵 경기라고 직접 응원 나온 모양이던데?]

피치 위로 오르기 전, 본격적으로 경기장을 나서기 위해 터널에서 대기를 할 때였다.

요한에게 건넨 말은 아니었지만 팀의 동료들끼리 나누던 대화가 도통 잊히질 않았다.

아드리치라면 런던 FC의 구단주인데, 그가 직접 관전을 하러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보여 주어야 해.’

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 딱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을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감독이 자신을 선발로 내세웠고, 무려 구단주까지 이번 경기를 직접 관람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간 갈고닦아 온 제 실력을 드러내야 했다.

리저브 팀 감독에게 찍혀 맥을 못 쓰던 자신을 콜 업 한 웰비 감독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오늘 승리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동료 선수들을 위해.

승리를 염원하며 런던 FC의 홈구장인 미라클 스타디움을 찾은 수많은 관중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8화

삐이익!

“제기랄! 벌써 몇 번째냐고!”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는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45분에, 추가 시간까지 포함하면 1분이 더 있었던 전반전은 0 대 0인 상태로 끝이 났다. 날고 긴다는 런던 FC가 저들보다 한참은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었던 캠든 FC를 상대로 유효 슈팅 하나 날리지 못하자 관중들의 반응은 거세어졌다.

다시 시작된 후반전도 마찬가지였다.

동료의 패스를 받는 건 완벽한데, 하필이면 수비수가 서 있는 라인보다 한 발 앞서거나, 혹은 어깨가 앞선 위치에서 볼을 받았던 요한이 오프사이드 트릭에 당한 횟수만 벌써 다섯 손가락이 넘어갔다.

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패스를 건네던 디에고 가르시아가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을 요한은 똑똑히 목격했다.

“꼬맹이, 잠깐 이리 와 봐.”

헉헉.

머릿속으로 그리는 시뮬레이션은 완벽하건만 웬일인지 리저브 팀 경기와 달리 1군 경기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벽에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저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마침 캠든 FC의 미드필더가 부상을 당해 잠깐 경기가 중단되어 있는 사이,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요한은 저를 부르는 디에고의 음성을 들었다.

답답한 흐름을 이어 가던 경기 내내 욕설을 입에 달고 있던 디에고의 험악한 얼굴이 어찌 된 영문인지 지독하게 차분해 보였다. 요한은 내심 긴장했다.

“너, 골 넣고 싶지?”

“……네?”

“난 넣고 싶어. 우릴 제대로 막고 있다고 득의양양한 저것들, 완전히 깔아뭉개고 싶다고.”

“……!”

“그러니까 너.”

디에고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내가 주는 패스, 이번에는 잘 받아. 반드시 네놈 발에 완벽히 안착시켜 줄 테니까. 그리고 그 패스를 받으면 그간 네가 리저브 리그에서 하던 대로, 거침없이 슛을 날려. 안쪽이건 바깥쪽이건, 너는 어느 쪽으로도 골을 넣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내가 지켜봤던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넣을 수 있으니까. 만약 내 패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헛볼을 차면…….”

요한에게 살벌한 말을 늘어놓던 디에고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만 안 둔다.’라고 자신의 귓가에 속삭인 디에고의 말이 잊히질 않아, 자신의 포지션으로 돌아가는 디에고의 뒷모습을 요한은 한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두근두근.

전반은 이미 끝났고 벌써 후반 10분도 흘렀던지라 앞으로 승부를 확정 지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30여 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지켜봤던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넣을 수 있으니까.]

지켜봤다는 의미는, 제 경기를 디에고 가르시아도 봤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로밖에 들리지 않아 요한은 가빠 오는 호흡을 겨우 진정시켜야 했다.

‘골, 골……이라.’

지금 이 순간, 답답한 흐름을 타파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빌어먹을 오프사이드 트릭에 걸리는 자신을 보며 상대 팀 수비수들이 킬킬거리는 모습을 지켜봐서도 안 되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요한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자, 꼬맹이! 받아!”

디에고 가르시아가 말했던 예의 ‘패스’는 그로부터 약 5분 뒤쯤 터져 나왔다.

요한에게 있어 남은 것은 자신의 발등에 완벽히 안착한 이 볼을, 그대로 골대로 향하게 하는 것뿐.

‘……!’

그 순간, 돌진하는 요한을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대 팀 골키퍼가 제 쪽으로 몸을 날리자 요한의 눈에 비어 있는 골대가 들어왔다. 두근두근! 요한은 골키퍼의 손이 볼을 터치하기 직전, 온 힘을 다해 발끝에 힘을 주었다.

뻐엉!

* * *

“푸하하하. 이 꼬맹이, 할 때는 하는 녀석이잖아!”

퍽퍽!

요한의 등을 힘껏 내리친 디에고 가르시아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졸지에 드레싱룸의 시선이 하나같이 요한에게 향했다.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동료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디에고의 매서운 손길이 닿은 부위가 욱신거렸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요한 역시, 꽤 들떠 있었으니까. 제 목을 와락 끌어안은 디에고는 ‘이 꼬맹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침착하게 움직이는 거 봤어? 봤냐고!’라고 외치며 다른 동료들의 동조를 구하고 있었다.

요한은 신이 난 듯한 디에고를 흘긋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삐이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분 전의 일이다.

온 힘을 다해 뛰었던 피치 위의 승부는 정확히 경기가 시작된 지 94분 만에 끝이 났다.

힘껏 휘슬을 불며 주심이 손을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이를 악물면서까지 버티고 있던 다리의 힘이 풀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털썩 아래로 내려놓고 싶었으나, 제게로 다가오는 동료 선수들이 있었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미쳤구나, 꼬맹이! 사고 쳤어, 너!]

저를 제외한 열 명의 선수들이 요한을 향해 다가왔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을 무시하던 선수들을 비롯하여 간단한 인사 정도만 건네던 선수들이 모두 요한에게 진심 어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유? 간단했다.

추가 시간을 포함하여 진행되었던 피치 위의 혈투가 런던 FC의 승리로 끝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제 막 1군으로 올라와 1군 경기 데뷔를 한 선수의 결승 골에 의해.

손쉽게 대승을 거둘 것이라던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1부 리그 소속인 런던 FC는 3부 리그 소속인 캠든 FC를 만나 고전을 겪었다. 주전 선수들과 후보 선수들이 대거 섞여 있었던지라, 생각보다 합이 잘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게 답답한 행보를 이어 가던 런던 FC의 경기력을 보며 가끔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경기는 지루하게 이어졌고, 아무리 문전을 두드려도 볼은 족족 캠든 FC의 골키퍼 손에 막혔다.

그러나 놀랍게도 후반전이 끝나기 15분 전인 75분경, 천금 같은 골이 터져 나왔다.

리그컵 경기라 휴식을 취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요한과 함께 출격한 디에고 가르시아는 확실히 런던 FC의 공격 축을 담당하는 주전 선수다웠다. 하프 라인부터 공을 끌고 올라온 그는 마침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서 있는 요한을 발견했고, 있는 힘을 다해 요한을 부르며 기가 막힌 패스를 건넸다. 미끄러지며 제게 다가온 공을 얼떨결에 받아 든 요한이 비어 있는 골문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슛을 날렸다.

“와아아아!”

골망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품하던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을 흘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군 경기 데뷔를 하자마자 골을 터트린 소감이 어떻습니까?]

세리머니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멍했다. 정신을 차리니 경기는 끝나 있었고, 취재차 온 기자들이 자신을 뱅그르르 둘러싼 상황이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디에고 가르시아와 함께 경기 후 인터뷰까지 마친 요한은 드레싱룸으로 돌아왔고, 그 후로 지금까지 동료 선수들의 축하와 환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듣자 하니 아드리치가 엄청 기뻐했다더라. 오랜만에 물건 하나 나왔다고, 조지한테 말했다던데?”

요한이 콜 업 된 이후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겨 주던 프랭키가 여전히 얼떨떨해하고 있는 그를 향해 웃으며 속삭였다. 감독을 비롯한 구단주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제 입지를 변화시킬 만큼 커다란 일이었기에, 요한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런 요한이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던 프랭키가 손뼉을 쳤다.

“참!”

“……?”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전화를 하지그래?”

“전화요?”

“한국 말이야. 꼬맹이 너희 가족이 지금 그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늘 위를 붕 뜬 기분이었던지라, 처음 프랭키의 말을 듣고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아, 탄성을 터트린 요한은 얼른 전화하고 오라며 드레싱룸 밖을 고갯짓하는 프랭키에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영국 런던의 시각이 밤 10시를 갓 넘겼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오전 7시 정도일 거다. 오늘 아침, 1군 데뷔전을 치를 거라는 언질을 해 두었기에 아마도 가족들은 이른 아침부터 기상하여 경기를 챙겨 봤을 것이 분명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프랭키를 쳐다보다 몸을 돌린 요한은 드레싱룸 밖 복도로 나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먼저 뱉어 낼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솔직히 요한은, 바로 그 순간까지만 하더라도 며칠 전 있었던 ‘충동적인 일’에 대해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어?”

자신이 전화를 걸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뚜루루,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바로 전화를 받지 않는 가족들에게 의문을 느끼던 요한은 인적이 드문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너, 까만 머리!”

……응?

“백넘버 39번! 그래, 방금 멈춘 너 말이야, 동양인!”

뚜루루루.

여전히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에 요한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질 때 즘, 그는 제 등 뒤에서 들려온 우렁찬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9화

‘뭐지.’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웬 남자가 보였다. 찬란한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요한은 왠지 화가 난 듯한 남자의 발걸음에 의문을 느꼈다.

‘스태프는 아닌 것 같은데.’

비록 1군 콜 업이 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요한은 런던 FC의 리저브 팀 소속 선수였다. 물론 리저브 팀이 미라클 스타디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앞으로 뛰게 될 경기장에 대해서,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스태프들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의 스태프들 중 저렇게 화려한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요한은 아직까지도 뚜루루, 통화 연결음만 지속되고 있는 핸드폰을 힐긋거리다 일단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상대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이 무례한 작자는 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요한은 씩씩거리며 큰 눈을 부라리는 남자를 멀뚱히 올려다봤다.

‘적어도 190센티는 넘겠군.’

182센티의 축구 선수인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키를 지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한은 생각에 잠겼다. 만일 제가 저 정도 키였더라면, 헤딩을 하는 데 조금 더 수월할 거라며 중얼거리던 요한은 ‘이봐!’ 하고 한 번 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깊은 울림이 있는 금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오자 요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금발 남자가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나, 기억나지?”

뭐?

“설마 기억 못 한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쪽이 나를 기억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누구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요한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러자 요한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남자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데…….’

하는 행동은 가관이군.

홈 팀은 물론이고, 미라클 스타디움을 찾은 원정 팀의 선수들과 스태프들만이 이용 가능한 이곳, 드레싱룸 밖의 복도에 겉모습은 그럴듯하나 하는 행동이 수상쩍은 남자가 자신의 앞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마 오늘 경기 이후 널 알아보는 이들이 많이 늘어날 거야. 가끔 스태프로 분장한 파파라치들도 나타날 수 있으니, 몸가짐에 주의하는 것이 좋겠어. 알았지, 요한? 수상한 사람과는 오래 말을 섞지 마. 파파라치 놈들, 진짜 교활하거든!]

요한의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가 수도 없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라 요한은 기함하는 상대를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경비를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낯이 익기는 하지만…….’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어도 이름이 선뜻 기억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요한은 ‘하!’ 분통 섞인 탄성을 내뱉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8월 22일 아침, 퀸스 호텔 31층, 스위트룸.”

그리고 요한이 막 다시 드레싱룸 쪽으로 비튼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

‘……!’

요한은 저를 향해 말을 흘리는 남자의 음성에 거짓말처럼 발을 멈추었다.

두근.

심장의 박동이 거칠게 뛰어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요한의 귓가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설마 그곳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스윽 고개를 돌리자 예의 금발 남자는 짓궂다 못해 얄미운 미소를 흘리며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가끔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원치 않는 일도 행해야 하는 법이다.

레온하르트가 그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에게 ‘그’를 만나겠다는 의사를 전하라고 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놀랍게도 약속이 잡혔다.

[아드리치가 그러더라. 마침 이번 주에 우연히도 런던 FC의 리그컵 경기가 열리니까, 같이 관전하면서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냐고.]

‘괜찮겠어?’라며, 조심스레 묻는 마커스에게 레온하르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악셀이다!”

“악셀?”

“퀸 레베카의 간판스타 말이야!”

“악셀이 축구 팬이었어?”

그리고 다가온 주말.

이반 아드리치와 약속했던 대로 런던 FC의 홈구장인 미라클 스타디움을 찾은 레온하르트는 예정에 없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평소 웬만한 스포츠 경기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레온하르트였기에 그를 발견하고 놀라는 기자들이 많았다. 찰칵거리는 셔터음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린 그는 안내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VIP석으로 향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그렇게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해도 몇 번이나 퇴짜를 놨던 미스터 악셀이 아닌가!”

후반전이 막 시작됐을 때 미라클 스타디움에 도착한 레온하르트는 VIP석에 미리 도착해 저를 기다리고 있던 이반 아드리치를 발견했다. 웃으며 그를 반기는 런던 FC의 구단주를 향해 레온하르트 역시 미소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드리치 씨.”

“그러게. 그동안 잘 지냈나?”

“덕분입니다.”

“인사는 그 정도로 하고, 앉지.”

모델 계약에 대해 제안받을 때 외에도 아드리치와는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그와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아드리치의 옆에 착석하기 전, 레온하르트는 아드리치의 손에 들린 오늘 경기의 프로그램 북을 힐긋거렸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마도 꽉 움켜쥐었을 것이 분명한 프로그램 북이 구겨져 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리던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시작된 후반전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피치 위로 시선을 옮겼다.

“참! 오늘 경기엔 유명 선수들이 나오지는 않을 거야. 우리 팀 간판스타들이 줄지어 부상을 당했거든.”

“그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랄프 선수였던가요? 꽤 오랫동안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던데.”

“맞아. 미스터 랄프는 벌써 3주째 휴식을 취하고 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주축 스트라이커가 또 부상…… 아니, 그것보다 미스터 악셀도 축구에 관심이 있었던가?”

관심?

‘전혀.’

축구 같이 격렬한 스포츠는 관전하는 것도 사양할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미쳤다고.’라고 솔직한 발언을 쏟아 내고 싶었으나, 계획한 일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하,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게로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