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 동안 열린 리저브 리그에서 다른 선수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경기 출장이 적었고, 그만큼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요한은 어머니의 기대가 담긴 예감을 웃으며 흘려 넘긴 것이다.
안부 전화를 종료한 요한은 어느덧 8시가 가까워진 시계를 흘긋거리다 출근 준비를 했다.
“이봐, 백! 그래, 백! 필립 너 말이야!”
요한이 남런던에 자리 잡은 런던 FC의 훈련장 라이트닝 트레이닝 센터, 통칭 LTC에 도착해 볼을 만지고 있을 때였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오전 훈련을 대비하여 발끝으로 통통, 공을 튀기고 있던 요한은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이리 와 봐.”
요한을 부른 사람은 런던 FC의 리저브 코치로 있는 안드레 한슨이었다.
무슨 일이지?
제게 손짓하는 한슨 코치를 보며 순간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기어코 잭콜 감독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훈련에서까지 저를 제외할 생각인가―에서부터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을지, 또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하는 수많은 고민들이 머리에 가득 차 두통이 일 정도였다.
“얼른 가 봐, 백.”
요한의 곁에서 함께 훈련하고 있던 미카엘이 한슨 코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멈칫하던 요한은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한슨 코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모종의 일’로 인해 잭콜 감독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한슨 코치와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요한은 팀에서 한 명밖에 없는 동양계 선수인지라, 한슨 코치는 요한에게 잘하려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생긋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한슨 코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요한은 무덤덤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으이고’ 하고, 혀를 끌끌 차던 한슨 코치가 돌연 씩 웃더니 요한에게 말했다.
“백, 이제 네 인생은 폈어.”
“……예?”
뜬금없이 그게 무슨?
“잭콜 자식, 오늘 잘렸다.”
하얀 이를 드러내던 한슨 코치의 말에 요한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슨 코치는 주위를 휘휘 살피더니 요한의 귀에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방금 사장이랑 만나고 오는 길이야. 보드진도 너랑 잭콜 감독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에 대해 들은 모양이더라고. 아무래도 보통 큰일이 아니잖냐.”
아.
“언론에 새어 나가면 곤란해지니,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잭콜을 자른 거지. 다행이야. 그 개자식, 알고 보니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아카데미 선수들도 건드렸더라고. 미친 자식!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애들을 건드려?”
“…….”
한슨 코치는 이를 부드득 갈며 불과 어제까지도 자신이 보필하던 잭콜 감독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한슨 코치와 잭콜 감독이 저로 인해 몇 번이나 부딪쳤다는 이야기는 언뜻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쁠 줄은 몰랐던 터라, 요한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흠흠!”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요한의 시선에 멈칫한 한슨 코치가 이내 헛기침을 흘리더니 그를 향해 다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
“백! 아니, 요한! 너 오늘부로 콜 업이다!”
한슨 코치는 조금 전보다 더 놀라는 요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웰비 감독이 그간 너를 주시해 왔던 모양이야! 이번 주 주말에 있는 리그컵 경기에 너를 선발로 내세울 예정이라던데? 내일 열릴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그 의사를 전할 거고……. 어휴, 인마! 좀 웃어라! 너, 1군 경기에 데뷔하게 됐다니까?”
* * *
[요한이, 축구 좋아해?]
[응!]
[얼마만큼?]
[아주 많이!]
처음 축구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요한의 아버지인 라이언 필립은 런던 출생의 영국인으로서, 축구를 정말 사랑했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라이언과 함께 축구장을 다녔던 요한은 그때부터 축구라는 스포츠를 사랑했고, 집 앞뜰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다.
어릴 때 작성한 축구 경기 분석 기록이나 전술 기록 등은 일곱 살 소년이 작성하기에는 너무도 자세해서 그것을 발견한 어른들이 놀라기도 했다.
[요한이 어머님, 요한이는 아무래도 축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테스트를 해 보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유소년 선수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한 건, 영국을 떠나 대한민국에 머물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영국 지부를 정리하고 돌아온 부모님과 함께 한국에서 지내던 요한은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들과 축구를 했는데, 요한의 공 다루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이 직접 그의 부모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2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며, 제게 맡겨 달라는 감독의 간절한 청원에 함박웃음을 짓던 라이언과 달리, 은진은 말없이 서 있는 요한에게 오히려 물었다.
[요한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은진은 당시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요한의 의견에도 항상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요한이 싫다고 하면 하지 않고,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애쓰는 그녀를 향해 요한은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어요.]
[좋아. 그럼 하자.]
[……!]
[대신 네가 축구를 하는 동안엔, 네 능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야. 언제 그만둬도 후회가 없을 만큼. 알았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요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은진의 허락을 받고, 요한은 축구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요한의 외가는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법조계 명문이었고, 요한의 비상한 머리를 눈여겨본 외증조부는 요한을 법조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당연히 머리보단 몸을 쓰는 스포츠 선수로서의 삶을 지지할 리 없었다.
[내버려 두세요, 할아버지. 꼬맹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전적으로 지원해 주는 게 우리 어른들의 역할 아닙니까. 웬만큼 사신 양반께서 아직 새파란 꼬맹이를 또 손 위에 올려 두려 하시나. 그래서 우리나라의 기대되는 새싹들이 제대로 안 자라는 거라고요. 어른들이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만 하니까, 애들이 품고 있는 꿈을 못 펼치는 겁니다. 알고 계세요?]
[뭐, 뭐, 인마! 너 말 다 했냐! 백승진 이노옴!]
[이놈은 무슨. 이봐, 꼬맹이.]
[네.]
[외증조부는 이 외삼촌이 막아 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걸 해.]
[……!]
[대신, 어머니한테 말했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는 거다. 한번 시작한 일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 알았지?]
그런 외증조부를 설득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막내 외삼촌이었다. 한때 그의 집에 잠시 산 적이 있던 요한은 빙긋 웃는 외삼촌에게 고개를 힘껏 끄덕여 주었다. 잘생긴 얼굴의 외삼촌은 그런 요한이 마음에 든다는 듯 와락 끌어안기까지 했고, ‘내 외증손에게서 떨어져라, 이놈아!’ 하는 외증조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시작했던 일이었기에 요한은 외삼촌이 했던 말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축구 선수로서의 요한은 2년 전까지는 탄탄대로의 길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중앙 미드필더로 시작했던 포지션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센터포워드로 바꾸었고, 열다섯이 되던 무렵에는 런던 FC 유소년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까지 했다. 잘 지내던 한국에서 다시 영국으로 넘어온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요한은 축구를 하는 매시간을 소홀히 보내지 않았다. 조금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구단으로부터 프로 계약을 제안받으며 제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동양인들은 유독 어리게 보인다더니…… 넌 다른 녀석들보다 더 어려 보이는군. 의외로 꽤…… 예쁘장하기도 하고.]
그래.
로시 잭콜이 부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요한의 앞길에 먹구름이란 없었다.
6화
쾅!
“요한!”
지난 2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를 성희롱해 왔던 잭콜이 드디어 리저브 팀 감독에서 잘렸다. 한슨 코치의 말을 빌리자면 피해자는 요한 외에도 더 있었던 모양이다. 지독한 인간. 아마도 잘린 후엔 유치장에 갇히게 될 그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히고 있던 요한은 벌컥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사실이야?”
그런 요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눈을 부라리던 사람이 침을 튀겼다. 들었나 보네. 요한은 또각또각 걸어와 제 앞에 선 빨간 머리 여자를 빤히 내려다봤다. 그녀는 요한의 팔을 덥석 잡더니 외쳤다.
“콜 업, 사실이냐고!”
앨리슨 디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현재 요한의 에이전트로 활약 중인 변호사였다. 보통 축구 선수들의 대리인을 맡고 있는 에이전트는 대부분 남성이다. 하지만 앨리슨은 여성도 에이전트가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상당히 유능한 대리인이기도 했다.
‘코치님이 알리셨나.’
요한과 런던 FC 사이의 프로 계약 체결 시, 요한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하도록 유도해 준 앨리슨을 요한은 몹시 믿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붉은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그녀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요한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맙소사! 진짜였어!”
그녀는 요한의 대답이 믿기지 않는 듯 그에게 뻗었던 손을 떼어 내고선 비틀거렸다. 요한은 얼른 앨리슨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앨리?”
“아, 으응. 고마워.”
“…….”
요한은 근처의 소파로 앨리슨을 안내했다. 그곳에 털썩 앉은 엘리슨은 하아, 길게 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런 개자식들. 그렇게 써 달라고 할 때는 콧방귀만 뀌더니 이적 준비를 하니까 콜 업을 하다니. 하여간 구단 윗대가리들은 약아도 너무 약았어!”
앨리슨이 씩씩거렸지만 요한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응?
“1군에서 정말 출장시켜 준대? 웰비 감독이 약속했어? 언제 시켜 준대? 말만 콜 업 하고, 또 예전처럼 출장은 안 시켜 주는 거 아니야?”
미간을 좁히며 의심하는 앨리슨을 향해 요한이 대답했다.
“앨리, 저 한 시간 전에 웰비 감독님을 뵀어요.”
“뭐? 정말? 웰비가 뭐래? 뭐래!”
“일요일에 있을 리그컵 경기에 절 선발로 쓰시겠대요.”
“……!”
“내일 미리 선발 발표도 하실 거라고.”
“하!”
앞으로 닷새 뒤, 그러니까 일요일에 있을 리그컵 경기의 상대는 3부 리그의 팀이었다. 비록 런던 FC의 1군 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실력이 달리는 상대이긴 했지만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듣기로는 선발 명단이 대거 교체될 예정이나, 1군의 유명 선수들도 출전한다고 했다. 요한은 그런 경기의 선발 공격수로 뛸 거란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가쁜 숨만 내쉬고 있는 앨리슨에게 말했다.
“정말…… 1군 데뷔를 할 것 같아요.”
런던 FC에 입단한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꿈의 무대엔 아직 입성하지 못했다. 그토록 원하고 또 원했던 날이 코앞에 닥쳐서인지 평소보다 한껏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두근두근. 한슨 코치에게서, 그리고 웰비 감독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계속 떨리는 가슴의 박동을 막을 도리가 없다.
가족들이 곁에 없는 지금, 요한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 주는 앨리슨은 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요한은 옅은 미소를 그리며 앨리슨에게 말했다. 그러자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흘리던 앨리슨이 돌연 벌떡 일어났다.
“요한!”
앨리슨은 녹색 눈을 부라리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진심을 다해 소리쳤다.
“축하해! 정말 너무 축하해! 잘됐어! 잘됐다고!”
* * *
“요한, 아니 미스터 백. 한슨 코치가 말했던 것처럼 네 인생은 이제 폈어. 너는 대한민국만 주목하는 선수가 아닌, 세계가 주목하는 선수가 될 거라고!”
요한의 정식 데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앨리슨은 파랗게 일렁이는 녹안을 빛내며 외쳤다.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그동안 내가 지켜봐 온 너라면, 1군 선수들과 같이 뛴 그 경기에서 골을 넣을 거야. 멀티 골? 아니, 난 해트트릭을 예상해!”
“앨리, 너무 허황된 거 아닌가요. 전 콜 업이 처음이라고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 게다가 잭콜 놈이 널 제대로 기용하지 못한 거지, 결코 네 실력이 다른 녀석들에게 뒤처져서는 아니야. 너는 반드시 성공해. 일요일 밤의 스타는, 네가 될 거라고. 이건 확실해!”
어찌나 진지한지.
요한은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는 앨리슨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요한.”
“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그게 무슨……?”
앨리슨의 말에 요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생긋 미소 짓던 앨리슨이 요한을 보며 말했다.
“일요일이 지나면, 넌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져 있을 거야. 아마 파파라치도 들러붙을 거고, 네 일거수일투족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겠지. 아직 유명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야?”
하고…… 싶은 일?
‘너희 어머니께 부탁받은 것도 있고, 내가 무엇이든 들어줄게! 1군 콜 업 기념 선물로!’라고 외치는 앨리슨을 요한은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이라.
“그럼 앨리,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 * *
번쩍 눈을 뜬 순간,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런.
그의 서늘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요한은 제 옆에 드러누워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웬 금발 남자를 내려다봤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정말 이거면 되겠어?]
[네.]
[너도 참…… 하여간 특이한 녀석이라니까. 포르쉐를 뽑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내 소유의 클럽에 데려가 달라니. 요한, 여기가 게이 클럽이라는 걸 알기는 해? 안나가 제대로 말해주긴 한 거야?]
[예,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어요. 앨리가 그래서 비밀 유지에 더욱 신경 쓴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어휴, 안나 녀석.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우리한테는 비밀 유지가 기본이니. 그런데 여긴 왜 오자고 한 거니?]
[……궁금해서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 기회? 요한. 대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심하게 놀지는 마. 일요일 경기에 대비해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지!]
[걱정 마세요, 앨리. 전 그냥 구경만 하다가 돌아갈 겁니다. 클럽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어서, 단지 궁금해졌을 뿐이에요. 앞으로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한 번쯤은 와볼까 하고.]
[어머? 기회가 없긴 왜 없어? 일요일 경기 잘 해서 유명해지면 여기보다 훨씬 잘나가는 클럽에서 직접 너를 모시러 올 거라고!]
요한의 에이전트인 앨리슨은 소호에서 이름 있는 게이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이기도 했다. 입장자들의 신분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지라, 더더욱 인기가 있는 이 클럽에 대해 한 번 들어 본 기억이 있던 요한이 그곳에 데려가 줄 것을 요구하자, 앨리슨의 얼굴이 황당으로 물들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자신이 했던 말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자신의 클럽에 데려다준 앨리슨은 마침 마중을 나온 매니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가…….’
[필립 씨, 칵테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칵테일이요?]
[네. 도수가 센 편은 아닙니다. 미스 디어께서도 여기 오시면 자주 마시는 칵테일이에요. 물론 시즌 중 알코올을 꺼린다는 건 알지만, 가끔 이곳에 오시는 다른 선수들도 한 잔 정도는 하곤 하죠.]
[…….]
[싫으시다면 강요하지는 않겠…….]
[주세요.]
[……!]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한 잔 정도는 괜찮겠죠.]
요한에게 클럽 곳곳을 안내해 주던 에디 밀러가 붉은빛 액체가 담긴 칵테일 잔을 건넸다. 좋은 일이 생겼고, 그보다 더 좋은 일도 기다리고 있는지라 한껏 들떠 있던 요한은 평소라면 결코 입에 대지 않았을 칵테일을 받아 들었다.
‘젠장할.’
그래.
그날, 요한이 에디 밀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앨리슨의 게이 클럽은 재미있었다.
조명은 휘황찬란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이 공간의 2층에서 관망자처럼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요한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칵테일로 인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날 요한은 겨우 칵테일 한 잔에 취해 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취한 것이 확실했다.
2층에서 내려다본 클럽 내의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여자들은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며 같은 여자를 유혹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게이 클럽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간혹 이성애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뜨거운 클럽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정신없이 춤을 추거나, 아니면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누구도 사고를 치지 않았지만, 클럽의 열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
축구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요한은 여전히 축구 외의 것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 클럽 내에서 저렇듯 열렬히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이 돌연 궁금해졌다. 서로에게 구애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그들은 행복해 보였고, 그 모습은 요한이 부모님을 통해, 그리고 삼촌들을 통해 본 눈빛과도 같았다.
저를 끈적한 눈으로 보며 소름이 돋게 하던 리저브 팀 감독, 로시 잭콜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
나도 저들과 같은 눈으로, 누군가를 볼 수 있을까.
냉랭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던 요한은 돌연 그런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애석하지만 요한은 스물이 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이성은 단 한 번도.
딱 한 번.
어쩌면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일게 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놀랍게도 이성이 아니었다.
동성.
요한은 자신과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끌린 적이 있었다.
당시의 요한은 자신이 동성에게 끌렸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물론 비교적 자유로운 마인드를 지닌 그의 주변에 동성애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들끓던 그 마음을 봉인시켰다.
하지만 아마도 그때, 어렴풋이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 사람 말이야. 저 사람이 같은 사람이랑 두 번 이상은 안 잔다는 그 사람, 맞지?]
며칠 뒤, 일요일 밤에 있을 리그컵 경기는 앨리슨의 말대로 요한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최고의 빅 클럽 중 하나인 런던 FC의 주전 공격수로 데뷔를 하게 되면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이 있는 대한민국에까지 그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 분명했다. 요한은 한때 영국과 대한민국의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중 국적자였지만, 런던 FC와 프로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선택했다. A매치에 데뷔한 적은 없으나 이번 경기를 계기로 국대의 호출을 받을 수도 있다. 일요일 경기를 잘 뛴다는 전제하에서 벌어지는 일이겠지만.
자신의 계획대로 된다면 그는 유명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내 궁금했던 일들을, 시험해 볼 수는 없겠지.
그래서……였을까.
요한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를 보며 쑥덕거리는 사람들이 향한 시선의 끝에는 웬 금발 남자가 서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의 키는 상당히 컸는데, 그런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남자들이 상당했다.
‘같은 사람이랑 두 번 이상은 안 자는…… 남자.’
훤칠하다 못해 아찔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저 남자와 잘 수 있다면…….’
아마도 나는 정말 게이인 거겠지, 라는 생각.
평소의 요한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 생각은 그가 아주 살짝, 정말 살짝 취해 있어서 떠오른 것이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의문은 곧이어 그의 머리를 잠식했고, 가슴을 쿵쿵 두드리기까지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화장실 쪽을 응시하던 요한은 후우, 길게 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당신, 같은 사람이랑 두 번 이상은 안 잔다는 거 사실입니까?]
요한은 사고를 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아 버렸다.
그는.
요한 백 필립은.
[나랑 섹스할 생각, 있습니까?]
생판 처음 보는 남자에게 다가가, 그를 유혹한 걸로도 모자라―
[당신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움직이는 건 내가 할 테니.]
그 남자와 뜨겁기 그지없는 하룻밤을 보냈다.
“미……쳤군.”
정말 미쳤다.
미쳐도 여간 미친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길고 긴 단잠에 빠진 건지, 파르르 떨리는 남자의 기다란 속눈썹을 내려다보던 요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 일을…… 대체 어떡하면 좋지.
7화
하고 있는 생각들이 얼굴에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날만큼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내내 단점이라 여겨 왔던 일이 장점이 될 줄이야.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에 경악한 것도 잠시, 요한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차피 하룻밤이었어.’
단 하루의 일탈.
대부분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요한이 몸담고 있는 업계의 특성상 그의 성적 취향이 드러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여 요한은 신중하게 자신이 품고 있었던 의문을 해소시켜 줄 상대를 골랐다.
주변인들의 말에 의하면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남자. 특정한 연인을 만들지 않고 한 번 관계를 맺은 사람과는 얽히지 않는다는 남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대였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아마 운명일지도. 그러니 그쪽 이름을 알려 줘.]
때문에 스르륵 눈을 뜬 상대가 저를 향해 건넨 말이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다. 분명 같은 사람과는 두 번 이상 자지 않는, 무신경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나?]
맑은 녹안을 크게 뜨며 묻는 남자를 향해 요한은 코웃음을 치려다 말았다.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인데 상대의 이름을 알아서 뭐하겠는가.
요한은 꼭 알아야 하냐는 제 대답에 황당해하는 것이 분명한 금발의 미남자를 널찍한 룸에 내버려 둔 채, 유유히 호텔을 벗어났다.
간밤의 일로 몸이 꽤 무겁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 해소된 터라, 마음만은 가벼운 상태로.
“윽.”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런던 FC의 트레이닝 센터인 LTC에서 오후 트레이닝 세션에 참가하고 있던 요한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후우.’
‘그날 밤’ 이후로 벌써 며칠이 흘렀건만 가끔 허리 밑에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래도 이 통증의 원인은 처음 관계를 맺었던 사내와의 거칠었던 정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이봐. 그러니까…… 요한, 이랬던가?”
내일 있을 캠든 FC와 리그컵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진행 중이던 요한은 제게로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건네는 남자의 음성에 행동을 멈추었다. 런던 FC에서 오른쪽 윙 포워드로 뛰고 있는 디에고 가르시아가 요한에게 다가와 있었다. 놀란 요한이 디에고를 쳐다보자 짙은 갈색 눈으로 요한을 내려다보던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