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9)

파도 같네.

고요한 바다처럼 푸르게 일렁이는 상대의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상대의 반응을 빤히 살피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운명일지도.”

“……운명이요?”

“그래. 그러니 그쪽 이름을 알려 줘. 이제 자주…… 볼 사이인데.”

일단 섹스를 했고, 어떤 식으로는 ‘책임’을 져야 한다면 상대를 가까이 두는 것이 유리했다. 레온하르트는 상대가 과연 제게 어떻게 나올 것인지 걱정하면서도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풉.”

긴장한 기색을 전부 떨치지 못한 채, 상대의 대답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레온하르트는 제 말을 듣고 있다 실소를 터트리는 상대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왜 웃지?

“제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남자의 옅은 미소에 쿵, 가슴이 내려앉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던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듣기 좋게 울려 퍼지는 남자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아, 아예 안 나는 건 아닌데…….”

“차라리 안 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군요. 저는 그쪽을 다시 볼 생각이 없으니까요.”

……뭐?

3화

상대가 뱉어 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레온하르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다시 볼 생각이 없다고?

무심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레온하르트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제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는 베드 트레이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말을 끝내고 몸을 돌리려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나와의 밤이, 별로였나?”

“네?”

“어째서 다시 보지 않겠다는 거지?”

섹스를 한 뒤, 다시는 볼일이 없을 거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언제나 자신과 정식으로 교제했던 여성들에게 진심을 다했다.

누군가와 밤을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니까.

특히나 레온하르트는 자신과 밤을 보낸 상대에겐 항상 끝내주는 밤을 선사했기에 더욱더.

“글쎄요.”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자 남자는 흐음, 콧소리를 흘리더니 놀랍게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뭐?

“비교 대상이 그쪽뿐인지라, 테크닉이 좋은지 안 좋은지 가늠할 수가 없군요.”

그, 그게 무슨……!

“어쨌든 고마웠습니다. 그쪽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궁금했던 일이 해결됐습니다. 호텔비는 제가 지불했으니, 그쪽은 체크아웃 시간이 되면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자, 잠깐!”

참다못한 레온하르트는 결국 침대를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탓에 마침 시야로 들어온 바닥 위의 수건을 하반신에 두른 그는 ‘또 무슨 일이죠?’ 하고, 이젠 아예 저를 귀찮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이름은 말해 주고 가야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소리치는 레온하르트를 남자가 황당한 눈으로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호텔비를 그쪽이 낸 거지?”

“네?”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나와 밤을 보낸 사람에게 호텔비를 내라고 한 적이 없어!”

“아.”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러니 호텔비도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답지 않게 허둥지둥 말하던 레온하르트는 제 말을 뚝 끊고선 싸늘하게 말하는 흑발의 남자를 내려다봤다.

푸른 눈을 빛내던 흑발 남자가 말했다.

“어젯밤, 그 클럽에서 유혹을 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어?

“유혹한 장본인이 호텔비를 내고 아침을 제공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남자가 유려하게 웃었다.

“게다가 저는 당신에게 제 이름을 알려 주고 싶지 않군요.”

“어, 어째서!”

남자가 슬쩍 미소 지었다.

“제가 당신과 잔 것은 단순한 흥미라서요.”

흥……미?

‘흥미’라는 단어에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레온하르트가 멈칫한 사이 상대방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쪽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혹 후일의 불상사를 걱정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딱히 당신과 다시 만날 생각이 없고, 어젯밤의 일로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

“저는 단순히 제가 게이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쪽과 잤고, 답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돈은 제가 내야지 그쪽이 낼 필요 없어요.”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귀가 얼얼하다.

저보다 적어도 10센티는 작아 보이는 남자의 발언에 레온하르트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 아니, 너.”

“……?”

“내가 누군지…… 모르나?”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픽, 실소를 터트린 남자가 대답했다.

“꼭 알아야 합니까?”

레온하르트는 그 당당한 답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랑 두 번 이상은 안 잔다는 거 사실입니까?]

그날 밤의 일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갑자기 나타난 동양계 남성이 레온하르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레온하르트는 언제 어디에서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요구받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다른 악셀가(家) 자손들과 달리 비교적 자유분방한 연애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온하르트가 생판 처음 본 상대와 원나잇을 즐길 만큼 문란한 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레온하르트는 사랑하지 않는 이와는 함께 밤을 보내지 않았다.

[남자도 가능합니까?]

흑발의 남자는 조금 당혹스러운 질문에 대답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남자?

신인 때 말고는 타인과 같은 방을 써 본 적이 없던 레온하르트였기에 그 질문의 의미를 몇 번이나 되새김해야 했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레온하르트는 곧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저보다는 작지만, 평범한 남성들과 비교했을 때는 커 보이는 키와 널찍한 어깨.

군살 없는 몸과 튼실해 보이는 허벅지까지.

만약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희지 않고 빠져들고 싶을 만큼 큰 눈을 부라리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레온하르트는 그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는 아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글쎄.]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꽤 마신 상태였기에 그런 말을 내뱉은 건지도 모른다.

[아마 너라면…… 가능할지도.]

남자를 안는 건 여태껏 시도해 본 적이 없지만, 눈앞의 상대라면 왠지 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뱉어 냈는지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게이도 아니고.’

어쩌면 눈앞의 상대가 저를 늪에 빠트리기 위해 꺼낸 말일지도.

그게 아니라면 유명인을 보고 다가온 팬의 단순한 농담이려나?

Just kidding.

대답하고 난 뒤, 스스로 뱉어 낸 말에 속으로 쿡쿡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친구인 이안 키스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나가죠.]

그러나 움직이려던 제 손을 덥석 잡고 말을 꺼낸 남자의 행동이 너무도 박력 넘쳐서, 그만 그 손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레온하르트는 남자를 안았다.

그를 안으며 땀을 흘리고, 남자가 내뱉는 신음에 자극받아 더욱 허리를 흔들었다.

[조금 전 말했던 대로 체크아웃 전에는 나가셔야 할 겁니다. 그럼.]

레온하르트는 끝내 남자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남자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쾅 닫히는 문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는 멍한 얼굴을 한 채 텅 빈 호텔 룸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체크아웃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룸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온 하우스키퍼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 까인 건가?”

그렇다.

그는 생판 처음 보는 이름 모를 남자와 잠을 잔 것으로도 모자라, 무려 까여 버린 것이다.

처절하게.

* * *

레온하르트 폰 악셀은 유명인이었다.

그것도 보통 유명인이 아닌,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유명한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는 팬임을 자처한 수많은 이들의 대시를 받았고, 그걸 피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라이프를 즐기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프리섹스 지향자는 아니었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웬 처음 보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웨스트엔드 뮤지컬계에 커다란 사달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특히나 예의 흑발 사내가, 레온하르트의 유명세를 앞세워 유명 타블로이드지에 침대 위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해 버린다면 더더욱 곤란해지겠지.

[뭘 그리 찾아?]

[……없어.]

[뭐?]

[없다고, 단 한 글자도!]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끝내 밤을 보낸 남자를 잡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극장의 보수 기간 동안 내내 가슴을 졸였다. 자신이 생판 처음 보는 남자에게 따먹혔다는 이야기가 영국 내의 타블로이드지에 혹 실릴까 싶어서.

그러나 놀랍게도, 영국에서 사생활 관련 기사를 내기로 정평이 나 있는 신문사 ‘The Moon’에서조차 간밤의 일에 대한 기사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레온하르트와 관련된 기사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인즉 뮤지컬 의 공연이 끝난 이후 이안 키스트와 함께 소호의 한 유명 클럽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조용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뿐이었다.

“푸흡!”

신문만 보면, 특히 연예계의 가십이 실리는 타블로이드지만 보면 눈에 불을 켜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던 이안 키스트가 심각한 얼굴로 신문을 움켜쥐고 있는 그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 너 그거 병 되겠어.”

신문을 쥐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짜증 섞인 눈으로 이안을 노려봤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음료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정말로 너와의 하룻밤에 대해 발설할 생각이 없었나 보지.”

“…….”

“그것보다,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까인 느낌이 어때?”

“뭐?”

“난 좀 이해가 안 되네. 한 번도 까여 보질 않아서. 그 사람, 네가 어지간히 별로였나 봐. 아니면 그렇게 치를 떨고 피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봐, 이안. 말이 심하군. 결코 치를 떨지는 않았어!”

“널 호텔에 내버려 두고 떠난 건 사실이잖아.”

젠장할!

레온하르트의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이안은 제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큭큭 웃어 댔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

이건 치욕이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레온하르트 폰 악셀 님을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아니, 치욕을 넘어, 그날 밤의 일이 세간에 퍼져 나가기라도 한다면 집안 망신을 시켰다는 소리를 본가에서 들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책임지겠다는 말도 못 했어.’

난생처음 원나잇을 한 상대를, 정말로 하룻밤만 보낸 후 잡지 못했다.

그뿐인가.

‘감히 나를 차 버리기까지 했지.’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천하의 레온하르트를 그토록 황당하게 까 버린 사람은 처음 봤다. 자신이 받은 이 치욕을, 이 분노를, 이 모욕감을 갚아 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4화

“이야, 이거 천하의 악셀이 단단히 화가 났는데? 원나잇 하고 버려진 게, 그렇게 자존심 상했어?”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저를 보며 피식 웃더니 근처 소파에 앉는 이안을 노려봤다.

“이안.”

“어?”

“그 자식에 대해 알아낸 거 없나?”

“응?”

“애초에 그날 날 그곳으로 데려간 건 너였잖아.”

그리고 그 빌어먹을 칵테일을 마시게 한 것도, 정확히 이 얄미운 파트너였다.

평소의 그라면 가지 않았을 클럽으로 안내하고, 술에 진탕 취하게 만들어 처음 본 사람과, 그것도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만든 사람 역시 틀림없이 눈앞의 파트너였다.

자신이 자주 가는 곳이라며 클럽의 매니저와 인사까지 시켜 주지 않았던가.

레온하르트가 ‘CCTV 같은 게 있었을 거 아니야.’ 하고 으르렁거리자 이안은 쿡쿡 웃었다.

“하필 네가 헌팅을 당한 곳이 CCTV가 없던 구역이었지. 화장실 앞이었잖아.”

“빌어먹을.”

“게다가 일주일 전부터 뒷문 CCTV가 고장 나 수리를 하던 중이라, 널 데리고 간 사람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어.”

“동양계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놈이라니까!”

“하하. 레온, 이 넓은 런던에 동양인이 어디 한둘이야?”

“망할!”

“그나저나 다들 왜 저리 분주해?”

곧 있을 저녁 공연을 위해 스태프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 세팅된 소파에 앉아 레온하르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안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부산스러워 보이는 관계자들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알 게 뭐야.”

지금 자신의 최대 관심사는, 그 개자식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뿐인데.

레온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를 갈았다.

“수고했어, 레온!”

꿀 같은 사흘의 휴식 후 열린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에 참여한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고, 관객들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냈다.

진을 빼는 공연 이후, 대기실에 와 숨을 고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레온하르트가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오게 된 22세 봄부터 28세 여름이 된 지금까지, 줄곧 그의 에이전트로 활약하고 있는 마커스 젠슨이 활짝 웃으며 그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후우, 긴 호흡을 내쉬더니 쓰고 있던 가발을 벗으며 마커스를 응시했다.

“웬일이지?”

“웬일은! 내가 꼭 일이 있어서 여기 들어오나, 우리 잘난 배우님 보러 왔지! 하하하!”

“…….”

“레온, 오늘 공연 정말 좋았어. 좋았다고! 관객들 호응 엄청났던 거 알지?”

짝짝 박수까지 치는 마커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키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꼭 귀찮은 일이 일어나던데.’

생글생글 웃는 마커스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레온하르트는 쳇, 잇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마키, 돌려 말할 생각 마. 요즘 기분 별로라 어울려 줄 생각 없어.”

“어?”

“무슨 일인데. 나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나?”

냉정한 레온하르트의 발언에 어색한 눈웃음을 흘리던 마커스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부르며 용건을 꺼냈다.

“너, 몇 달 전 제안 들어온 거 기억하고 있어?”

“무슨 제안?”

“왜, 런던 FC에서 메인 모델로 활약해 줄 수 없냐고 했잖아.”

아, 그거.

런던 FC라고 한다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된 축구팀 중 하나로, 런던을 연고지로 두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구단이었다. 현재 다른 지역의 팀들과 치열한 우승 다툼을 하고 있다던 그곳에서 레온하르트에게 팀의 메인 모델 제안을 해 왔다.

[안 해.]

[왜!]

[축구에는 관심 없어.]

[인마, 너 그러고도 독일계 맞냐? 독일인들은 축구라면 환장하는 거 아니었어?]

[땀 흘리는 스포츠는 별로야. 뭐, 크리켓 정도는 괜찮지만.]

[……누가 귀족 출신 아니랄까 봐.]

[귀족 출신이 아니라 난 어엿한 귀족이야, 마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던 것이 석 달 전이거늘, 또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쓰며 마커스를 올려다봤다. 마커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쪽 구단주가 오늘 공연을 보러 왔어.”

“구단주? 아아, 그 석유 재벌.”

런던 FC의 구단주는 러시아의 유명 석유 재벌로서, 런던 FC를 인수해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은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공연장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그 사람이 널 만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할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연히 거…….”

[꼭 알아야 합니까?]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절하려고 했다. 레온하르트는 현재 상황에 만족했고 모델로 활약하는 건 비시즌일 때나, 혹은 정말 끌리는 일일 때뿐이었다. 축구팀의 메인 모델이라니. 축구라면 딱 질색이었다.

흥, 콧방귀까지 뀌며 대답하던 레온하르트는 문득 떠오른 누군가의 음성에 멈칫했다.

“레온?”

역시 거절인가 싶어 한숨을 푹 내쉬려던 마커스 젠슨이 갑자기 말을 멈추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생각했다.

‘런던 FC는…… 현재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단이지.’

그의 출생지인 독일보다 훨씬 더 축구에 미친 나라, 영국.

그 영국의 중심지인 런던의 잉글랜드인들은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런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팀인 런던 FC는 잉글랜드 축구 팬 절반의 지지를 받는 팀이기도 했다.

‘그런 구단의 메인 모델이 된다면…… 뭐, 인지도는 더 올라가겠지.’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레온, 무슨 생각을 그리…….”

“알겠어.”

“어?”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나자고 해.”

“……!”

“모델 제안, 받아들이겠다고도 하고.”

“너 진심이야?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다가 마지막에…….”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불러.”

“어?”

“마키,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어어, 알겠어! 기, 기다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지 어언 7년 차.

그 기간 동안 죽어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일하고 또 일했건만, 자신과 밤을 보낸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껏 지켜 온 철칙을 와르르 무너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내버려 둔 채 유유히 떠나가기까지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레온하르트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고, 두 번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치욕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왜 그 자식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느냐는 거야!’

잊으려고도 해 봤다.

그의 신조를 짓밟은 사람이기는 하나, 상대의 말처럼 다시 보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없었던 일로 치면 되니까.

아주 잠깐이나마 그런 사람을 ‘책임지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자신이 짜증스러울 만큼, 그 사람을, 그 남자를 지워 내려 했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공중으로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별처럼 반짝이던 푸른 눈동자가 지난 며칠 동안 그의 밤을 괴롭혔다.

제 위에서 오르내리며 가쁘게 숨을 흘리던 그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서늘한 눈으로 말을 한 뒤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 역시 도무지 레온하르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드시, 다시 찾아내야 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식을 다시 만나야겠어.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그날 아침 있었던 일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면…….

고뇌와 번민을 이어 가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참을 수 없는 충동과 오기를 느끼며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사고까지 치고 말았다.

만일 이제까지의 그였다면 어째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하지 않은 건지 스스로를 타박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귀찮은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음에도 할 필요 없는 일까지 승낙한 건지.

그러나 그다음 날인 일요일.

레온하르트는 제게 티끌만큼 남아 있던 바로 그 후회를 한 줌의 먼지처럼 훌훌 털어 버렸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냈다.

왜냐하면 그는…….

[이봐, 거기 서!]

[…….]

[거기 서라고, 너! 까만 머리! 백넘버 39번! 그래. 방금 멈춘 너 말이야, 동양인!]

[저…… 말입니까?]

[그래, 너!]

[…….]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메인 모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갔던 런던 FC의 미라클 스타디움에서,

[나, 기억나지?]

자신을 엿 먹인 예의 그 남자를, 다시 만났으니까.

5화

#First Half : 전반 1′ ~ 전반 10′

그날 대체 자신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직도 자신이 벌인 일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뭐에 씌었던 건지도.’

돌이켜 보면 그날, ‘그’는 꽤 흥분한 상태였다.

아니, ‘꽤’가 아니다. 몹시 흥분했다.

그래,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세상에, 그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평소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훈련만 수행해 왔던 그에게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서 들떴다.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을 느꼈으며, 현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로 인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을 저지른 건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벌였기에 이런 말까지 하느냐고?

그날 밤 벌어진 일의 경위인즉, 이러하다.

-왠지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네.

사건이 발생했던, 그날 아침 6시.

‘그’, 요한은 눈을 뜨자마자 현재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한이 있는 런던과 대한민국 서울의 시차는 무려 아홉 시간. 그러나 다행히 서울 시간으로 오후 3시쯤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좋은 아침입니다, 어머니.’ 하고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 요한의 말을 듣자마자 저렇게 말했다.

한국의 글로벌 로펌 기업인 P&K의 영국 지부장으로 있던 요한의 어머니, 은진은 현재 요한의 동생인 노아의 학업 문제로 인해 잠시 한국에 입국한 상태였다. 게다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요한의 아버지, 라이언은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홀로 먼 한국까지 보낼 수 없다며 기어코 그녀를 따라가기까지 했다. 하여 결국 런던에 남은 사람은 요한뿐인 상황.

그렇다고 해서 요한도 부모님을 따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소속의 런던 FC와 3년 전 프로 계약을 맺은 프로 축구 선수였고, 축구장이 곧 직장이었으니.

‘좋은 일이라.’

전화를 받자마자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뱉는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겁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애석하게도 현재 요한은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몸담고 있던 구단에서 정식 프로 계약을 맺은 것이 벌써 3년 전이거늘, 스물이 된 지금까지 1군으로 콜 업 받지 못한 상태였다. 1부 리그 경기는 물론이거니와 상대적 약팀들과 붙는 리그컵, FA컵 경기에서도 마찬가지.

물론 날고 긴다는 선수들이 즐비한 런던 FC의 2군이라 불리는 리저브 팀(U-23팀) 소속이기는 하나, 요한이 딱히 팀에서 센터포워드로서의 입지를 다지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센터포워드로서 눈에 띌 활약을 펼친 적도 있을 만큼 촉망받는 선수였다.

[백, 내가 감독으로 있는 한 너를 경기에 자주 기용하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리저브 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로시 잭콜과의 불화로 요한의 축구 선수 인생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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