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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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회

춥다.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척이며 가장 따뜻한 온도를 찾았다. 다행히 쭉 뻗은 손바닥 아래로 만족스러운 온기와 감촉의 무언가가 닿았다.

아아, 따뜻하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나는 따스한 온기 옆에 몸을 바짝 붙이고 다시 스르륵 잠들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다시 서늘한 추위가 맨살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왜 자꾸 추운 거지? 어느 순간부터 코를 훌쩍이며 다시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오른쪽은 보나마나 침대의 끄트머리일 테니 왼쪽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곧이어 기대에 부응하는 따뜻한 온기가 등에 맞닿았다. 이번에는 절대 떨어지지 말아야지. 일어날 때까지 찰거머리처럼 꼭 붙어 있을 거야. 그렇게 숨이 차분해지면서 조용히 잠들려 할 때 즈음이었다.

무언가가 목 아래를 파고들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분명 등에 닿은 것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몇 번을 뒤척이다가 잠들려던 시점이었기에 한없이 귀찮게 느껴졌다.

“으응, 저리 가…….”

열심히 밀어내려 해도 어깨를 당겨 뒤집는 악력이 너무 강해 버티기가 영 버거웠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척이며 날 껴안으려는 일련의 행동들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미 딱딱하고 뜨거운 누군가의 품 안에 묶인 뒤였다.

“저리 가요. 나 이거 싫어.”

너무 답답해. 그리고 딱딱하단 말이야.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온기 속에 갇혀 웅얼거렸다. 하지만 나의 단호한 거절에도 목 아래의 팔베개와 등을 천천히 두들기는 손짓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 진짜… 이거 빼 줘. 네자르 팔보다 베개가 더 편하단 말이에요.”

울상을 짓는 얼굴로 넓은 가슴팍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리 쳤지만, 발버둥 치면 칠수록 상체를 압박하는 팔의 힘이 더 강해졌다.

불편해. 불편한 것으로 모자라 너무 더워!

네자르의 몸은 손과 발이 차가운 나와 달리 늘 높은 온기를 가졌다. 한겨울이 되면 난로를 끌어안고 잠드는 기분이라 행복했지만, 이렇게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찰싹 붙어 있으면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오늘도 또야. 오늘도 또 괴롭혀.

어젯밤 내내 그의 욕구를 채워 주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편히 쉬게 놔두지 못할망정, 왜 자꾸 하지 말란 짓을 해?

나는 가슴 안에서 울컥 솟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콱 깨물었다.

“윽.”

몸을 크게 떤 네자르가 내 어깨를 떼어 냈다. 그제야 나 역시 고집스럽게 감고 있던 눈을 치켜떴다. 까만 머리칼이 품위 없게 헝클어진 채로, 실실 웃는 낯의 네자르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허. 요즘 들어 자꾸 날 물려고 해, 케이트. 말 안 듣는 강아지도 아니고. 짐의 옥체를 상하게 하는 건 중범죄란 걸 몰라?”

“진짜, 좀, 놓으라구!”

이 정도면 이제는 오기에 가까웠다. 하나 온 힘을 다해 밀어내도 뺨에 닿은 단단한 맨가슴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개 다루듯 우쭈쭈 소릴 내며 나를 타일렀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시간이 더 남았으니 내 품에서 잠들도록 해.”

“이걸 놔야 잠든다구요!”

“자자, 착하지? 조금만 더 자자. 오늘은 일정이 바쁘니까 잠깐이라도 더 자는 게 좋아.”

“진짜 싫어요. 너무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래그래.”

결국 벗어나길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목 뒤도 불편하고, 네자르의 커다란 몸 사이에 갇힌 팔도, 다리도, 허리도, 전부 불편했지만… 어쩌겠는가. 내일부터는 멀찍이 떨어져서 잘 거야. 아, 젠장. 보름 전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잠결에 계속 추위를 못 참아서… 아니야. 그래도 내일은 꼭 떨어져서 잘 거야.

굳은 다짐을 끝으로, 그의 맨가슴에 짓눌린 채 마지막 선잠을 청했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침실에 들어왔던 것 같다. 커튼을 거두는 소리와 함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내 머리 아래에서 조심스레 팔을 빼낸 네자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너무 피곤해.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어제의 네자르는 평소보다 더 얄궂고 거칠었다. 다시 의복을 챙겨 입고 누울 여력도 없어 맨몸 그대로 잠들 정도였으니까.

“론은?”

“에메랄드 성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일정은?”

“서면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시녀와 네자르의 대화를 듣고서야 오늘의 일정이 생각났다. 오늘은 신년회 전날이었다. 카발 제국의 황성 신년회는 매년 1월 6일에 열린다. 따라서 외부 손님이 도착하는 1월 4일과 5일은 황성이 가장 시끄럽고 바쁜 날 중 하나였다.

“황후는 오늘 따로 일정이 있나?”

“아니요.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황후 폐하의 오늘 일정은 전부 비워 두었습니다.”

“좋아.”

다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침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네자르는 오늘 내 일정을 왜 비워 둔 걸까. 내일이 신년회인 만큼, 찾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천장을 올려다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새하얀 팔 위로 울긋불긋한 반점들이 보였다. 팔도 이런데 다른 곳은 어쩌려나. 예전에는 시녀들 앞에 내보이는 것이 죽을 만큼 부끄러웠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네자르가 남 눈치 안 보고 애정 표현을 하는 탓에 나 역시 갈수록 수치라는 감정에 무뎌지고 있었다.

1월의 이른 오전은 밤의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까맣다. 나는 창 너머로 떨어지는 파리한 새벽의 빛을 응시하다가 네자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트.”

예의 론이 건넨 일정표를 들여다보던 네자르가 천천히 내 위로 등을 굽혔다. 그에 나는 허리 근처까지 밀어 뒀던 이불을 말없이 끌어 올렸다. 어깨 위로 바짝.

“흠.”

정신없이 잠든 터라 알아채지 못했는데, 네자르는 상채만 맨몸이었고, 아래로는 얇은 하의를 걸치고 있었다. 신장이 워낙 큰 탓에 눈앞으로 드넓은 그림자가 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직 잠기운이 다 달아나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목 근처를.

“어제는 괜찮았던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자국이 꽤 크군.”

무슨 자국이 크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야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포만감을 느끼는 짐승처럼 만족스레 피어나는 표정을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나는 계속해서 목과 어깨 근처를 훑는 손을 툭, 쳐 냈다.

“내가 어제 말했죠. 오늘 같은 날은 누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그걸 어떻게 조심히 해? 절대 못 해. 나는 아마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조심하지 못할 거야.”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말해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네자르가 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오늘은 굳이 누굴 만날 필요 없어. 그러니 목과 어깨가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어도 아무런 문제 없을 거야. 아니, 차라리 안 입는 게 어때?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인데.”

“어쩜 사람이 그렇게 날이 갈수록 뻔뻔해져요?”

“나도 몰라. 정말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네자르는 정말 내 몸을 이불로 칭칭 감고 자신의 다리 사이에 끼웠다. 나는 불편함과 편함을 동시에 느끼며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음식을 조용히 씹었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턱을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훌쩍 흘러 어스름한 오전의 빛이 반쯤 밝아 온 후였다.

“정신 차렸어, 케이트? 이제 슬슬 준비했으면 하는데.”

“네자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내가 한번 맞혀 볼까요? 당신이 왜 오늘 나의 일정을 전부 비워 놨는지, 네자르가 오전 9시까지 내내 내 옆에 붙어 있는지.”

처음에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싶었는데,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뻔하디뻔한 일이었다.

나는 몸을 기댄 채로 고개를 들어 네자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가슴 한쪽 구석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웃음이 참아지질 않았다. 실실 웃으며 이불을 거둬 내고 품 안으로 파고들자 그가 다소 뾰로통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아, 아무리 지적해도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 너는 무드가 부족해, 케이트. 아니지,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텅 비었어. 바닥을 보인다고. 어디 가서 귀부인이라고 하지 마. 세상에 로맨틱의 ‘로’ 자도 모르는 귀부인은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발밖에 없을 거다.”

“흥. 좋아, 나라고 나쁠 것 없지. 나가면 귀부인 행세 말고 순진한 아가씨 행세를 해야겠네. 옷도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서 이 남자 저 남자 다 꼬셔야… 아얏!”

나는 욱신거리는 귀를 부여잡고 몸을 돌렸다. 네자르가 얄궂은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이것 좀 봐요, 세상 사람들. 황제가 사람 귀를 문다니까?

네자르는 제 부인이 얼마나 아파하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 없겠지. 날 괴롭히는 일에 가장 열심인 사람이니까! 양손으로 내 팔목을 잡아챈 네자르가 얼굴을 들이대며 들들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케이트. 건실한 남편으로서 부인의 아가씨 노릇을 막는 수밖에.”

그의 숨이 내 입술에 닿았다. 이어서 버텨 내기 힘든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어쩔 수 없는 건 네자르가 아니라 나 같은데. 이런 식으로 전부 받아 주다가는 언젠가 앓아눕고 말 거라고.

물론 그렇다 하여 네자르의 애정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네자르가 나와 본인의 일정을 모두 비워 둔 이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면 겨울 초까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1월은 연말인 만큼 황성이 무척 바쁜 시기였다. 황성이 바쁘면 그 주인인 황제 역시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11월은 네자르와 함께 잠들지 못한 날이 함께 잠든 날보다 더 많았다.

그날의 네자르 역시 해가 뜨기 직전에 집무실에서 침실로 돌아왔었다.

‘네자르…….’

촉.

흔들리는 침대에서 허공으로 팔을 뻗자, 익숙한 온기가 날 안으며 입을 맞춰 왔다. 지금 자면 한 시간도 못 잘 텐데. 내일 일정을 어쩌려고 이렇게 무리하는 걸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다시 잠들려던 도중, 캐노피 너머에서 조심스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폐하.’

이어서 피곤함에 찌든 론의 목소리가 들리자 스르륵 잠들려던 정신에 불이 켜졌다. 취침 시간에는 황후를 제외한 그 누구도 황제의 침실에 드나들 수 없다. 이제 보니 네자르는 기상 직전이 아니라 기상 시간에 침실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봐, 론. 부탁인데 제발 좀 꺼져 줄 수 없나? 안 그래도 종일 얼굴 보느라 지겨워 죽겠어. 양심이 있다면 짐이 쉴 틈이라도 주지?’

‘누군 안 그런 줄 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결재된 서류를 정리하다가 영 이상한 게 하나 껴 있어서 말입니다. 이것만 확인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잘못된 건 없어. 모두 확실하게 확인했으니 더는 묻지 마라.’

‘「외출 보장」 건에 대해서 여쭙는 겁니다.’

외출 보장?

침실에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이윽고 두 팔로 껴안고 있던 네자르의 상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내 어깨와 얼굴을 덮었다.

‘말해 봐.’

‘황성만으로도 충분히 넓습니다. 「외출 보장」 건에 적힌 외출 범위를 제도 근방에서 황성으로 바꾸어 주셨으면 합니다.’

‘황성으로 외출하면 그걸 외출이라 부를 수 있나? 너는 방 안에서 어슬렁이는 행위를 외출이라 부르나 보지? 기각.’

‘하아… 좋습니다, 거절이야 예상한 바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최소한 「보름에 한 번씩 외출」을 「한 달에 한 번씩 외출」로 수정해 주십시오. 보름이면 기사단 일정은 물론, 황성 일정까지 복잡해집니다.’

듣자 하니 문제의 요점은 네자르의 외출인 것 같았다.

「보름마다 1회 외출」을 황제 정기 일정에 포함시키려는 모양인데, 론의 목소리가 영 탐탁지 않았다. 불쌍한 네자르. 그까짓 외출이 뭐라고 보좌관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람.

‘그 부분은 나도 절대 양보 못 한다.’

‘하나 폐…….’

‘폐하, 폐하 좀 그만 불러. 됐으니 짐이 양보 못 한다면 못 하는 줄 알아. 내 부인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 산책을 보내 줘야 한단 말이다.’

……잠깐, 네자르가 아니라 내 외출이었어?

‘안 그러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병든 고양이처럼 우울해지고 늘어져. 잘 생각해, 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을 꼭 품격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할까?’

네자르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문하자, 론이 누그러진 기세로 대답했다.

‘제가… 지금 다소 혼란스러워서 다시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황후 폐하 맞으시지요? 혹시 황후 폐하께서 기르시는 사냥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건 아닌지……?’

어이없다는 감정이 얼마나 짙게 깔려 있었냐면, 듣는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둘의 다툼 아닌 다툼을 듣게 된 탓인지 흐릿해지려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뭘 저리 진지하게 대화하는 거야! 물론 생각지도 못한 자유가 주어지는 거니 좋긴 좋은데… 이 찝찝함을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이봐, 론. 지금 내 부인을 개 새끼 취급하는 건가?’

네자르의 짧은 한마디에 찝찝함의 근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마치 소중한 애완견의 산책 일정을 짜는 것 같잖아. 음… 그래도 이왕이면 애완견이 아닌 애완 고양이로 하자. 황제 폐하의 사랑을 마음껏 받는 터키시 앙고라로.

‘하아,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 잘 이해했으니, 추가 설명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외출 예정일 보름 전까지는 제게 언질을 주십시오. 일정을 조율해야 하니까요.’

황제 폐하께서는 참 상냥하시지. 친히 애완 고양이의 자유까지 챙겨 주시다니!

그로부터 두 달이 흘러 이제 슬슬 첫 일정이 실행될 시기였다. 네자르는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잠귀가 상당히 옅은 편이었다. 산책 나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 온 탓에 눈이 반짝 떠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한데 막상 준비를 마치고 성을 나왔을 땐, 나의 기대와 너무나도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네자르.”

“응.”

“호위 기사들이 참 많네요. 혹시 오늘 제도를 순회하는 공식 일정이 있었나요?”

데이지에게서 빌린 간소한 외출 복장에, 머리 장신구는 일체 하지 않았다. 네자르도 평소의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하거나 맨가슴에 셔츠만 달랑 걸쳤던 것과 달리 평범한 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상태였다. 그 모습도 너무나 멋있어 한동안 실실 웃은 채 쳐다봐야 했다.

“열 명. 그 이하는 안 됩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몽글몽글 꿈꿔 온 기대가 파사삭 식은 기분으로 론을 응시했다. 그의 뒤편에 차례로 정렬한 열다섯 명의 기사들은 중무장한 상태였다.

“아니, 열한 명! 그 이하는 안 됩니다.”

“짐의 눈이 잘못된 건가? 말은 열한 명이라면서 보이는 건 열다섯이군.”

“이게 다 두 분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니, 양해해 주십시오.”

장담하건대 툴드와 키올, 인피르노를 데려가는 것보다 저 열다섯 명의 기사를 대동하는 게 더 위험할 것이다. 누가 봐도 고귀하신 몸의 행차처럼 느껴질 테니까.

입술을 삐죽 내밀며 네자르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좀 해 봐요, 폐하. 저러다 론도 우리 뒤를 따라오려고 하겠어.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황후 폐하, 떠돌이 개는 데려오시면 안 됩니다.”

무시하고 데려오면 길길이 날뛸 기세였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딱 한 번 데려온 게 전부였다. 다리를 다쳤기에 잠깐 돌봐 줬을 뿐인데, 누가 보면 중죄라도 저지른 줄 알겠다.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를 안고 오셔도 안 됩니다. 그게 얼마나 더러운데요!”

그래 놓고서 제 방에 데려가 키우는 게 누구더라. 나는 론의 셔츠 칼라에 묻은 하얀 털을 모르는 척해 주었다.

“알았으니 잔소리 좀 그만해, 론. 누가 보면 나와 폐하가 전장에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

“그리고 몸에 안 좋은 싸구려 길거리 쓰레기도 적당히 드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절대 시야에서 놓치지 마실 것! 황후 폐하께서는 제발, 제발 큰 사고 없이 귀성하실 것! 특히 후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큰일을 벌이실 때마다 제 수명이 턱, 턱 깎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루하루 수명이 깎여, 론.”

내 대답에 그가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두 배, 아니 열 배로 깎여서 문제이지요!”

론이 나이를 먹으면 꼬장꼬장한 백발의 늙은이가 될 게 분명했다. 20년 후에는 돈다발을 쥐여 주고 황성에서 멀리 내쫓아야겠다. 거기서 백 마리의 고양이나 기르며 행복하게 살라고 해.

“큼, 흠. 제가 분위기를 너무 굳혔나요? 지겨우실 테니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를.”

분위기는 이미 굳을 만큼 굳었다. 나는 론이 또 잔소리를 쏟아 낼라, 네자르의 팔을 붙들고 본성 정원을 벗어났다. 가는 도중 힐끔 고개를 돌리니 툴드와 론이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아마 호위 인원수를 줄이려는 거겠지.

“론의 과보호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요.”

“너 때문이잖아, 케이트.”

“응? 아… 이해해요. 내가 미덥지 않겠지. 나름대로 노력하고는 있는데 아직 부족하네.”

고개를 저은 네자르가 걸음을 멈추고 헐렁하게 맨 내 머플러를 다시 묶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내 말은 황성의 모든 이들이 네 안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단 뜻이다. 황후 폐하께서 언제 내 아이를 밸지가 초유의 관심사라던데?”

“……아이요?”

멍하니 눈을 깜빡일 동안 그가 내 목을 토끼털 머플러로 칭칭 감았다.

“밤이 새도록 붙어 있으니 다들 기대하는 거지. 황성 사람들이라고 눈과 귀가 안 달려 있지는 않으니.”

“그…….”

“네 입맛이 조금만 바뀌어도 부엌에서 난리가 난다더군. 기억나? 이틀 전에 갑자기 안 먹던 달팽이 요리가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말이야. 론이 의원을 불러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난리를 쳤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꼴은 처음이었지.”

“그냥 생각이 났던 것뿐이지, 딱히 먹고 싶었던 건 아닌데요. 세상에… 그런 분위기였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다들 행동을 조심하니까.”

황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카발의 후계를 잇는 것. 특히나 카발 제국은 대대로 황손이 적으면서 일부일처제를 고집해 온 국가였다. 그러니 황성의 식구들은 물론, 제국민이 내게 갖는 기대감이 얼마나 클지는 충분히 짐작되는 바였다.

“흠. 그렇게 붙어 있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이상하긴 해. 역시 더 노력해야 하는 건가.”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저런 소릴 들으면 얼굴이 딸기보다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지난 몇 달간 네자르와 함께하며 나 역시 많은 부분이 변했다. 일단 가장 먼저, 사생활을 서슴없이 떠드는 데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

“노력하기는 뭘 더 노력해요? 이게 다 네자르가 짐승이어서 그런 거예요.”

황성을 벗어난 나와 네자르는 인적이 드문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눈만 마주치면 침대로 향하는데, 나 같아도 그런 기대를 하겠네요.”

“부부가 한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죄인가?”

“누가 죄래요? 뭐든지 적당히 하라는 거지!”

하나 네자르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저 할 말만 이었다.

“황성도 벗어난 김에 편히 말하는 게 어때? 마침 또 둘밖에 없군.”

내 말을 듣기는 한 걸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양 능글맞게 웃는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또 못 들은 척하는 거 봐. 이게 다 네자르 탓이래도?”

그때였다. 투덜거리기 바쁜 내 입술을 무언가가 거칠게 틀어막았다. 내 팔을 쥔 손아귀보다 더 급하고 성급한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부드러운 숨이 느릿하게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떨어지라고 어깨를 밀치는 것도 이쯤이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단단한 양팔에 몸을 맡긴 채 그가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틀었다.

“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여운 가득한 숨을 남기며, 네자르가 천천히 몸을 뗐다. 두툼한 코트 너머로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몸이 느껴진다.

사람 없는 곳만 오면 꼭 이런다니까. 아니지, 반대로 생각하면 적어도 사람 많은 곳에서는 얌전한 게 천만다행인 건가. 시선을 마주한 네자르가 작게 웃으며 입술을 핥는다. 괜히 민망한 기분에 툭, 밀자 너른 가슴으로 내 상체를 꽉 안아 왔다.

“사람이 어떻게 부끄러운 줄을 몰라? 하아, 이제는 뭐라 말하기도 지치네.”

“이제 그만 포기해. 짐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오, 부인. 그것도 살아가면서 가장 활기 넘치는 시기지.”

“내가 볼 때 네자르는 평생 동안 활기 넘칠 거야.”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괜찮겠군. 후계 걱정할 일은 없겠어.”

거짓 하나 없이 진심인 얼굴이라서 보는 내가 다 질릴 정도였다.

“정말 한 마디를 안 져!”

이후로는 네자르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며 걸었다. 황성에서도 유독 스킨십이 많은 그는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몸을 사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인 사이임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양, 손에 깍지를 낀 채 찰싹 붙어 왔다. 그럼 나는 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 좀 떨어져!”

네자르의 대답은 뻔했다.

“쳐다보라고 붙어 있는 거야. 넌 네가 얼마나 예쁜지 자각할 필요가 있어, 케이트.”

“이미 알 만큼 알거든?”

“아니야, 하나도 몰라. 모르니까 바짝 붙어서 내 여자라는 걸 알려야지.”

소유욕이 느껴지는 단호한 한마디에, 모든 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성벽을 따라 걷다가 번화가를 지나쳐 자연스레 펠츠의 골동품 가게로 향했다. 이렇게 단둘이서 나오니까 옛날에 손잡고 나와 놀던 때가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과 옛날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모를 정도로 살짝 잡고 있던 손이, 지금은 땀이 날 정도로 붙어 있다는 것 정도.

“닫았군.”

“으음. 하필이면 오늘 닫다니.”

한데 제도로 나오자마자 시작이 좋지 않았다. 펠츠의 가게 앞에 <휴일>이라는 카드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펠츠의 마들렌이 먹고 싶었는데… 아아, 아쉬워라. 딱 내가 원하는 만큼 달고 부드러워서 한번 생각나면 잊히지가 않더라고.”

“해결법은 아주 간단해, 케이트. 펠츠라는 노인을 황성 주방장으로 고용하면 되니까.”

“됐거든요? 그 나이면 이제 마음 편히 쉬어야지. 나 때문에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다시 부르지도 못해.”

“제아무리 고생해 봤자 나만큼 하지는 않았을 텐데.”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 고생시킬걸, 하고 후회되더라.”

종일 돌아다닐 생각으로 들떠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러면 정해 놓은 계획이 틀어지게 되는데.

나는 태생이 즉흥적인 성격이었지만, 황성에 들어온 이후로는 네자르를 따라 여러 방면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는 점.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지 않을 때마다 스트레스가 미친 듯이 샘솟았다. 예전이었다면 금방 새 일정을 찾거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록허드 에젤로트에서 에든 에젤로트가 되어 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부인.”

“응.”

“옛 집사를 못 만나는 건 아쉽지만, 가게가 비었으니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차선책이 있으니 너무 상심하진 마. 일전에 네게 프러포즈했던 레스토랑 기억해?”

아무렇지 않은 어조였으나, 말하는 음성에서 미세한 부끄럼이 느껴졌다. 네자르도 참 특이하단 말이야. 남부끄러운 행동과 말은 잘도 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할 때가 있다.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그 백 송이의 꽃은 잊으라고 해도 못 잊을걸? 그 레스토랑 2층의 실내 벽지 무늬도 기억나. 연두색 과일 바구니 무늬였잖아.”

“부인만 괜찮다면 오랜만에 그 레스토랑이나 갈까.”

“유명한 레스토랑 아니야? 점심시간인데 자리가 있으려나 몰라.”

“내가 이 나라를 위해 노예처럼 일만 하고 있는데, 없는 자리도 생기도록 해야지.”

보름을 또 어떻게 기다린담. 아쉬움을 뒤로하고 안 떨어지는 걸음을 뗐다.

그렇게 골목길을 나서며, 한창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지 이야기하던 때였다. 돌연 텅 빈 옆자리에 의아한 기분으로 등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항상 내 속도에 발맞춰 걷던 네자르가 두어 발자국 느리게 걷고 있었다. 도둑고양이라도 지나간 건가. 그는 멀어지는 안쪽 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을 깜빡 잊고 있었군.”

이후 이어진 말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부분에서 그리 생각했느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 함께해 왔기에 느낄 수 있는 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고개를 틀어 날 바라보는 움직임, 오직 나에게만 보여 주는 평온한 눈 깜빡임, 장난스러우면서도 상냥한 어투까지. 그 모든 과정이 평소의 네자르와 어긋나 있었다.

“케이트 너는 툴드와 함께 먼저 가 있도록 해. 나는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볼 일?”

“별 것 아니야. 아주 잠깐이면 돼.”

처음에는 착각일까, 역시 착각이겠지 싶었다. 하나 나는 안다. 론과 지겹도록 언쟁해 얻어 낸 오늘 같은 날을, 그는 이런 식으로 소비하지 않을 거란 걸.

“네자르.”

“툴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을 거다. 금방 뒤따라갈 테니 가서 메뉴 고르고 있…….”

“그날 기억나? 나 혼자 제도를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켈 로망드에 끌려갔던 날.”

좋지 않은 과거를 입에 담은 탓인지, 네자르의 얼굴에서 꾸며 낸 자연스러움이 자취를 감췄다. 그의 죄책감은 1년 반이 훌쩍 흐른 지금도 여전한 듯했다. 잘못한 건 나인데 왜 네자르가 미안해하는 걸까. 반갑지 않은 기억을 들춰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난 할 말을 해야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케이트.”

“그날, 네자르에게 구해지고 나서 속으로 수백 번 생각했어. 다시는 네자르랑 안 떨어질 거라고. 죽어도 같이 죽고 말지, 혼자 남아서 험한 꼴 보고 싶지 않다고. 꼭 네자르 옆에서 눈을 감을 거라고. 혹시 나, 너무 이기적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멍청한 애들은 꼭 당해 봐야 안다던데, 나 또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못 볼 꼴을 보고 난 후, 내 세상은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에도 반드시 툴드와 동행했으며, 먼 지역으로 이동하는 때는 밤이고 낮이고 네자르 옆에 찰싹 붙어 다녔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켈 로망드의 잔당이 두렵고 무서웠으니까.

그때로 공포는 그때로 충분했다. 그날 난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네자르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으리라 다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누가 들어도 갑작스러운 시기의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지만, 네자르는 특유의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여자라면 첫눈에 반할 멋진 미소를 지었다.

“꽤 듣기 좋은 고백이었어. 꽤가 아니지, 아주 상당히. 한데 너무 갑작스러운 고백 아닌가? 다른 놈들과 나눠 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상하는데.”

다른 놈들. 말끝에 감도는 서늘함이 그늘진 길목에 퍼져 간다.

“괜히 서운한데요, 부인. 결국은 제 호위가 못 미덥다는 소리잖습니까.”

언제 나타난 거야? 구시렁거리며 제 불만을 표한 툴드가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뒤이어 그늘진 골목 사이로 인기척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사냥할 때처럼 숨죽이고 오감을 집중하니, 좁은 골목길 틈새로 긴장감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네자르가 날 자신으로부터 멀리 떼어 낼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를 노리는 제국 밖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침묵은 짧았다. 툴드가 내 몸을 감싸 안듯 보호하는 동안, 지척에서 거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젠장, 주인님! 본인이 어떤 몸인지 잊으신 겁니까? 이곳은 부디 저와 단원들에게 맡기시고…….”

키올의 외침으로 추측하건대, 네자르는 신분을 망각하고 앞서 달려가 검을 휘두른 모양이었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너무 무서웠다. 혹여나 네자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위협이 넘치는 바깥으로 나온 내가 바보 같았다.

“부인께 점수를 따려는 겁니다.”

내 시야를 가리고 선 툴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수선한 와중에 정신을 집중해야 들릴 정도로 낮고 작은 음성이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숨겨 둔 고백은 주인님을 춤추게 하지요. 소싯적 실력을 발휘하셔서 부인께 잘 보이고 싶으신가 봅니다. 아카데미 시절, 황제 폐하는 록허드 경… 아니, 록허드 각하와 유일하게 대련이 가능했던 분이셨습니다. 아마 습격한 놈들도 폐하의 무력에 깜짝 놀라 나자빠질 겁니다.”

제도로 온 후에는 폐하라는 소리만 들어 와서 그런지, 부인과 주인님이라는 명칭이 한없이 어색하게 들렸다.

네자르가 몸을 쓸 줄 안다는 건 무쇠만큼 단단한 그의 팔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적은 단숨에 끝장낼 의도로 덤벼든 다수이지 않은가.

“네자르가 강한 건 나도 어릴 때부터 봐 와서 알고 있어. 됐으니, 지금 네자르는 어때? 키올은? 인피르노는? 다른 기사들은?”

“부인을 보호하느라 한 번에 확인할 여력은 없습니다만, 괜찮을 겁니다. 즉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급습은 주인님에게 일상이나 다름없었어요. 아카데미에서는 그나마 마음 놓고 지내셨지만… 주인님께서는 부인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은 오히려 저 멍청한 놈들이 받아야지요.”

“컥!”

툴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복면을 쓴 남자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툴드를 쳐다보자, 잠시 놀란 듯 눈을 껌뻑이던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 말 맞죠? 별것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표정은 별것 아닌 게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현재 주인님이 얼마나 안전한지 읊어 드릴게요. 흠. 인피르노와 키올 둘이서 주인님이 검을 휘두르기 전에 놈들을 처리하고 있군요. 특히 인피르노는 미친개가 되어서 주인님 등 뒤에 아주 딱 붙어 있습니다. 제가 부인을 보호하는 모양새보다 더 남사스럽네요.”

“남사스럽기는? 시녀들 말을 들어 보니 툴드 경의 여자 꼬시는 솜씨가 장난 아니라던데. 그때 하녀와 밀회를 했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어.”

“다 과장된 소문이니 귀담아듣지 마세요. 별개로 그때 제 약점을 후벼 파셨던 부인의 패기는 참으로 대단하셨습니다. 아, 이분이 황후 폐하가 되실 분이구나 싶었지요.”

“경은 아부를 시도 때도 없이 하는구나?”

끊임없이 입을 움직여서 그런 걸까, 비명과 거친 소음이 멀어지고 쿵쿵 뛰는 심장 소리 역시 점차 잦아들었다. 주변이 슬슬 정리되어 가는지, 석벽처럼 날 단단히 보호하고 있던 팔이 느슨하게 풀렸다.

“전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만.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이곳에 남겠다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를 포함한 호위의 칠 할이 부인을 따라갔을 겁니다. 주인님께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부인 머리 위에만 우산을 씌워 드릴 분이니까요. 그리고 주인님께서는… 무사하실지언정 옥체를 보전하셨으리라 장담하지 못했겠죠.”

비좁았던 시야가 환해지면서, 골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끼리릭. 길가로 튀어나와 있던 골동품 가게의 간판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아간다. 그 끝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쓰러진 복면인의 발치로 떨어져 땅을 적시고 있었다. 나뒹구는 상자, 깨진 화분으로 골목길은 엉망이었다.

미안, 펠츠. 부서진 물건은 내가 전부 보상할게.

내가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땅 위로 검을 내던진 네자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만을 노렸다면 아주 깔끔하게 보내 줬을 텐데 말이지. 들이닥친 머릿수부터 의도가 불순해도 너무 불순해. 안 그런가?”

“대낮에 이리도 대놓고 따라붙은 걸 보면 내부에서 새어 나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미친놈이 이런 짓을 벌이겠습니까.”

키올은 여느 때처럼 흐트러진 모습 하나 없이 단정한 상태였다.

“자세한 건 론을 통해서 확인해 봐. 오늘 돌아가서 한 소리 해야겠군. 그리고 살아 있는 놈들은… 어쩔까? 인피르노에게 맡겨야 하나. 인피르노!”

저 멀리서 주변을 정리하던 인피르노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폐…, 주인님, 이쪽은 제가 맡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주인님은 어쩌실 겁니까?”

“복귀는 하지 않는다. 케이트와 일정대로 움직일 테니 구멍이 난 호위는 알아서 채워. 아, 그리고.”

어깨를 돌리던 네자르가 등 뒤 펠츠의 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가게의 주인을 찾아서 나 대신 사죄를 전했으면 좋겠군. 근시일 내로 피해를 보상해 주겠다는 말도. 이름은 펠츠, 성이?”

나를 향한 시선에 황급히 덧붙여 대답했다.

“벤트리오, 펠츠 벤트리오. 60대 후반의 노인이고, 아마 이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을 거야.”

“그렇다는군.”

“알겠습니다.”

칼같이 허리를 숙인 인피르노가 키올과 함께 사라졌다. 고작 몇 분이 흘렀을 뿐인데, 골목길은 이전처럼 한산해졌다. 이런 곳에서 암살당할 뻔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소 어수선해진 길목 위에 나와 네자르, 그리고 툴드만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목숨이 노려진다는 게, 이렇게 별것 아닌 일이었나. 안도감과 함께 마음속 안쪽이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네자르는 이런 불안감을 대체 어떻게 버텨 온 거지.

“뭐야, 케이트. 표정이 왜 그래?”

왜 그렇기는? 안 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네자르의 무덤덤한 얼굴을 마주하자 바닥까지 떨어졌다.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 바깥은 너무 위험해. 좋다고 쫓아 나오면 안 됐는데…….”

“안 어울리게 약한 소리 하지 마. 이런 일은 항상 있어 왔어. 널 만나기 전에도, 널 만난 후에도, 전쟁터에서도, 바람이 태풍처럼 몰아치던 날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도.”

내 팔을 끌어당기고, 네자르의 몸이 그림자 진 골목길에서 등을 돌린다. 그를 따라 양지로 나서는 걸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나는 항상 널 지켜 냈지.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봐, 지금처럼.”

“고마워요.”

“전혀 고마운 목소리가 아닌데. 이거, 목숨 바쳐 지킨 보람이 없잖아?”

인정한다.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고마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실컷 울다가 뒤늦게 정신 차린 목소리라면 모를까.

“고마우면 좀 웃어 보는 게 어때? 안 그래도 쬐그만 얼굴 그만 구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네자르와 수년을 함께해 온 나이다. 그가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몇 마디 음성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얼굴을 폈는데, 펴고 싶어 한다고 펴질 리가 있나.

“나,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입꼬리가 안 올라가는 걸 어떻게 해.”

“네가 좋아 죽는 닭꼬치를 먹으면 올라갈 거다. 안 되겠어, 레스토랑은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좀 더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곳으로 나가자.”

“왜? 나는 곧장 레스토랑으로 가도 상관없어.”

“못생긴 놈들 사이에서 빛나는 내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테니까.”

네자르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넓은 길가의 한복판으로 날 이끌었다. 그렇게 손을 꽉 잡아 오는 온기에 서서히 안정을 찾을 때쯤, 그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하아, 이게 아니지.”

무슨 문제인가 싶어 올려다보니, 멀쩡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 케이트. 네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할 리 없는데……. 젠장, 나도 모르게 다른 놈들 대하듯 대해 버렸군. 어떻게 생각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남은 시간은 성에서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말에서 그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네자르의 태도와 마음씨가 그저 신기했다. 어떻게 된 사람이 온종일 내 생각만 할 수 있는 거지. 왜 항상 당연하다는 듯 날 배려하는 걸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닭꼬치를 못 먹었는걸. 여기서 귀성하면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하잖아.”

“고작 닭을 꼬치에 꽂아서 구운 음식이야. 성에서도 실컷 먹을 수 있단 걸 잊은 거냐? 그것도 주방장의 취향인 금가루를 듬뿍 뿌려서.”

“맛이 다르잖아, 맛이. 나는 좀 더 건강에 해롭고 자극적인 닭꼬치가 필요해!”

이 자유를 위해서 네자르와 론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실랑이해 왔던가. 내가 아닌 그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선.”

“그 선생이 네자르였던 거 잊었어?”

“흠. 뭐, 어쩔 수 없지. 부인께서 원하시는 건강에 해로운 닭꼬치를 먹기 위해 가 볼까나.”

그의 단단한 손이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예전에 비해 훨씬 더 크고, 거칠고, 남자다워졌어도 감겨 오는 온기는 그대로였다.

먼저 레스토랑에 가지 않길 잘했어. 얌전히 그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좋다고 음식만 씹었을 테지. 상상만으로도 한심 그 자체인 모습이었다.

이른 낮의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맑았다. 나는 어릴 적 그를 따라 거닐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번화가로 들어섰다.

네자르와의 휴식은 짧은 만큼 달콤했다. 신년의 분위기로 북적하고 시끄러운 길을 걷는 동안 네자르는 나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그래 봤자 평소에 비해 한두 마디 더 많은 것뿐이었지만, 차이는 확실했다. 일정을 왜 굳이 신년회 전날로 정했나 했더니 그간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장담하건대 황성을 지키는 개도 짐만큼 불철주야로 일하지는 않을 거다.”

“연초라서 그런 겁니다. 보름만 지나도 편히 쉴 수 있으실 거예요.”

“그 변명을 들은 지가 벌써 1년째군. 빌어먹을, 업무 때문에 부인과 놀이도 못 간다니.”

“그래서 오늘 나가셨잖습니까? 내일이 바로 신년회입니다. 지금부터 자정까지는 폐하 역할에 충실해 주십시오.”

“짐의 역할? 불철주야 일하는 개 말인가 보군.”

네자르는 황성에 돌아온 즉시 론에게 끌려갔다. 그는 내 손을 여러 번 움켜쥐며 헤어짐의 아쉬움을 나타냈다. 누가 보면 장거리 연애 하는 연인으로 알겠어.

그렇게 홀로 마른 풀과 가지가 가득한 겨울 정원을 지날 때였다. 저 멀리서 날 알아본 데이지가 치마를 움켜쥐며 뛰듯이 걸어왔다.

“데이지? 뭐가 그리 급해?”

“들으셨나요?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한 시간 즈음 전에, 오드리네 부인께서 입성하셨대요!”

오드리네 부인!

그야말로 눈이 번쩍 떠지는 이름이라, 머플러를 끌어 내리다 말고 데이지를 쳐다봤다.

카론을 만나지 못한 지 최소 두 달은 훌쩍 넘었던 것 같다. 두 달이면 그녀를 안 이래 가장 긴 시간을 못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신으로 배가 눈에 띄게 부른 이후부터는 만날 기회가 적었다. 그래도 종종 서신을 주고받은 덕에 그녀가 늦게까지도 입덧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장 본성 밖으로 몸을 틀었다.

“폐하? 설마 그 상태로 오드리네 부인을 만나러 가시려고요?”

“그럼 어느 세월에 드레스로 갈아입어? 잠깐 얼굴만 보고 오는 거니까 카론도 이해할 거야.”

“그, 그곳에는 오드리네 후작 내외만 계시는 것도 아닌 걸요.”

“귀족들이 날 만나 봤자 뭘 어쩌겠어? 설마 내 면전에 대고 왜 그리 천박한 복장을 입고 있느냐 타박하진 않겠지.”

“어… 음. 그렇겠죠, 목숨이 아깝다면.”

이미 다수의 외부인을 통해 내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전해 들은 바였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성 고용인들을 사냥개의 먹이로 던져 줬다는 둥, 피를 보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성정이라 사냥에 미친 거라는 둥. 귀부인들 사이에서 각양각색의 헛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니까.

“금방 돌아올 테니까 목욕물 준비해 줘.”

“네.”

나는 툴드가 건넨 두꺼운 겨울용 망토를 걸치고 정원을 벗어났다.

“이렇게 급히 가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정 뵙고 싶다면 마차를 보내셔도 될 텐데요.”

거리를 바짝 좁힌 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매정하기는. 그건 임산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카론은 신년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첫 번째 임신 때도 잔병으로 고생이 많았거든. 하아, 겉으로는 튼튼해 보이는데 속이 영 엉망이니.”

카론은 작년 봄에 아들을 낳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를 임신했다. 그게 작년 초여름에 있던 일이니 지금은 배가 꽤 부른 상태였다.

“폐하.”

“응?”

“외람된 일인 건 알고 있지만, 솔직한 제 속마음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뜬금없어도 너무나 뜬금없는 요구에 걸음을 멈추었다.

속마음? 갑자기 저런 소릴 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툴드는 현재 내 전담 호위 기사를 맡은 상태이지만, 네자르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부터 함께했던 최측근이다. 따라서 황자인 앤드류보다 더 친형제 같은 사이라 편하게 이 소리 저 소리 다 했던 것쯤 나도 알고 있었다.

나와도 편하게 의견을 교류한 지 꽤 되었지. 하나 세피아 부인이 말하기를, 주인과 신하의 관계는 신뢰의 긴장이 항상 필요하다고 했다.

좋아, 툴드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주제넘다고 생각되면 한마디 해 줘야겠어. 최근 날 너무 편하게 대하는 감이 있기는… 했나? 뭐, 하여간.

“말해 봐.”

“황성에는 아직 후사가 없습니다. 한데 폐하의 친우인 오드리네 부인은 식을 올린 지 2년도 안 되어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죠.”

그리 말하는 툴드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좀 더 진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제도는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후사 문제에 더 예민하고, 고약합니다. 국혼이 성사된 지 1년이 지난 상태에서 황손 소식이 없는 탓에 별별 괴팍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그 괴팍한 소문에 일일이 반응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는 괴팍한 소문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나와 카론을 둘러싼 그 어처구니없는 소문을 가리키는 것일 테지. 이런 식이면 건방지다고 혼낼 수도 없겠네. 툴드의 음성에는 나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어.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소문은 카론이 내게서 좋은 기운을 전부 빼앗아 간다는 소문이지?”

툴드가 난처해진 얼굴로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네.”

「카론 오드리네가 황후의 좋은 기운을 빼앗아 아이를 둘이나 얻게 되었다.」라는 그 기상천외한 소문.

황제와 내가 서로 죽고 못 산다는 말이 지천에 소문난 탓인지, 소문이 지닌 악의성은 더욱 짙었다. 론과 데이지가 그 소문이 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하나 황후의 체면이 걸린 일을 세피아 부인이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녀는 소문에 움츠러들어 카론을 멀리한다면 더 악질의 소문이 퍼질 것이라 조언했다. 나야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일일이 반응한다는 건, 그 소문 때문에 내가 부러 카론을 찾아간다는 거야?”

“폐하는 그러실 분이니까요.”

“경은 나를 되게 좋은 사람으로 보고 있구나?”

“주제넘은 소리였다면 죄송합니다.”

이 같은 소문이 퍼진 까닭은, 단순히 내가 후계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세피아는 내가 한 여인만을 지독하게 총애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총애라니? 누가 들으면 카론이 내 정부라도 되는 줄 알겠으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귀족들도 참 웃기지. 나를 그렇게 무서워하고, 까다로운 인물로 여기면서 또 관심 받기를 바라다니. 제국의 황후란 여러모로 피곤한 자리였다.

“마음은 고마운데, 틀렸어. 내가 지금 카론을 찾아가는 건 그 소문과 전혀 관련 없으니 걱정하지 마.”

“예? 그 말씀은…….”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 건 아니었으나, 이후 툴드는 군말 없이 나를 잘 따라왔다.

황성 남쪽에 자리 잡은 커다란 세 채의 성은 신년회와 같은 성대한 연회가 열릴 때만 열린다.

첫 번째 성에는 국외 축하사절단이 머물며 나머지 두 채의 성에는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이 머문다. 고귀한 혈통의 귀족들이 한데 모이는 건 1년에 몇 없는 일이라,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유독 많이 생기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남몰래 조용히 이동하려고 했다. 툴드가 옆에 있는 이상,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다 하더라도 황성 시녀들은 내가 누군지 알 터였다. 그러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카론의 방까지 찾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고용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통로를 빌리면 될 테니까.

“거기, 너. 황성의 시녀이냐?”

한데 내가 간과한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귀족들 중엔 시녀들에게 추근거리는 행위가 취미인 자도 있다는 점을.

“흠, 뭐. 얼굴은 그럭저럭 쓸 만하군. 어딜 가는 중이었지?”

뭐야, 이건?

어디서 기름 낀 목소리가 날 붙잡나 했더니 앞머리가 훤히 벗겨진 장성한 귀족이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 됐을까? 처음 보는 낯의 남성은 이런 일이야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툴드는 열 발자국 뒤에서 날 따라오던 중이었다. 내가 조용히 움직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는 만큼, 곧장 곁으로 달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 이 몸은 콘탄츠 백작 가문의 소백작, 밀레안 콘탄츠이시다. 콘탄츠의 장남이자 후계자. 너도 들어 봐서 알겠지? 콘탄츠의 대단하신 장남이 3년의 유학을 끝내고 올해 귀국했다는 소문 말이야.”

이 건방진 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유세를 떨어? 콘탄츠 가문이야 귀에 익은 가문이라지만, 밀레안 콘탄츠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카론을 만나기에도 아쉬운 시간인데 이런 모자란 놈을 상대해 줄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괜히 맞대응하다 일이 커지기 전에 남자를 지나치려 했다.

하나 콘탄츠 뭐시기는 내 망토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허, 아직 이 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딜 그리 급히 가? 연회 준비로 바쁜 게냐?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라.”

탁.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에 잡힌 망토를 털어 냈다. 성의 뒤쪽이기도 하고, 귀족들의 시중을 들기 바쁜 시간인 터라 인적은 뜸했다. 아니면 성의 고용인들이 진작 이 찰거머리에게서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크흠. 내가 황성을 방문하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라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니 얌전히…….”

“툴드.”

황성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으로 모자라, 눈이 마주쳤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다니. 확실히 타지 생활이 길었나 보네. 내 부름에 쏜살같이 달려온 툴드가 나와 남자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소백작, 예를 갖추고 물러서십시오.”

그의 난입에 남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역정을 냈다.

“뭐? 이 시건방진 놈. 감히 누구에게 명령질이냐! 내가 누군지 알아? 이 몸은 콘탄츠의 소백작이시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소백작의 앞을 가로막아?”

이걸 어쩐담.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여러모로 불편했다. 추후 내가 황후라는 걸 알게 되면 저 멍청한 머리로 어떤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닐지 모른다. 그리 생각하자 벌써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조심해지는 게 아니지. 차라리 협박이라도 해서 입을 다물게 할까.

그때였다.

“아아, 불편해라.”

“불편할 만합니다.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우리의 길을 막고 있군요, 부인.”

“그러게 말이에요. 날도 좋은데 짜증 나게.”

귀에 익어도 너무 익은 목소리가 남자의 등 뒤에서 들려온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툴드의 옆자리에 섰다. 그곳에는 오드리네 후작 내외, 그러니까 카론과 필프론츠 후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찌 그 더러운 입을 우리 사랑스러운 폐하 앞에서 나불거리는지.”

모피에 파묻힌 카론의 음성이 그렇게 표독스러울 수가 없었다. 카론은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를 부릅뜨며 남자를 노려봤다.

“어찌 그 더러운 손으로 우리 아름다운 폐하의 옷을 붙잡는지.”

“……부인.”

“가까이에서 보니 눈에 눈곱도 껴 있군요. 그런 더러운 얼굴로 우리 여리신 황후 폐하 앞에 선 건가요? 하!”

눈곱이 껴 있었나? 나도 못 본 걸 카론은 잘도 보네. 거침없이 소리치는 카론이 걱정되었는지, 필프론츠 후작이 안절부절못하며 작은 어깨를 토닥였다.

“부인, 너무 흥분하지 맙시다. 배 속 아이가…….”

“황제 폐하가 아닌 우리에게 걸린 걸 천만다행으로 아세요! 어느 가문의 누구라고 했죠? 콘스탄의 몰리안? 아니, 몰상식이었나? 어딜 감히 폐하께 손을 대고 하대합니까?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면 황후 폐하께 실례한 당신의 이름과 가문을 절대 잊지 않겠어요. 그 눈곱 낀 더러운 얼굴까지!”

창백해진 남자의 낯을 보니, 내 얼굴은 몰라도 필프론츠 후작의 얼굴은 알고 있었나 보다. 남자는 곧장 등을 돌려서 내게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눈치는 빨라서 다행이었다.

“죄,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필프론츠 후작이 이런 식으로 쓸모 있을 줄이야.

말은 최대한 안 섞는 편이 좋으므로, 툴드의 허리를 툭툭 쳤다. 툴드는 곧장 내 의도를 알아채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경고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언급을 금하셔야 할 겁니다.”

“무, 물론이오. 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귀족이 자신의 이름을 걸어도 신뢰가 가지 않을 수가 있구나.

“그 말이 거짓이라면 차후 큰 화를 입게 될 테니, 약속을 반드시 지켜 주십시오, 소백작.”

“그리하겠대도!”

“폐하의 심기를 더 어지럽히지 말고 어서 자리를 뜨십시오.”

수십 번 허리를 숙인 남자가 몸을 추스르고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카론의 활활 타오르는 시선은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툴드에게서 정황을 전해 들은 필프론츠 후작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콘스탄의 몰상식이 아니라 콘탄츠의 밀레안 소백작입니다. 기억하려면 제대로 기억해야지요.”

“알 게 뭐예요? 그건 그렇고 폐하, 몸은 괜찮으세요? 저놈이 쓸모없는 소리 하기 전에 뺨을 후려치지 그러셨어요.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그러쥐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카론이 말했다.

“그거야 다 철없던 때의 일이지. 황후씩이나 돼서 어떻게 함부로 손을 놀리겠어? 그런데 카론,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데이지가 말해 줬어요. 황후 폐하께서는 성미가 급하시니 소식을 들으면 곧장 찾아오실 거라고. 그래서 제 방 시녀에게 툴드 경이 보이면 바로 말해 달라 부탁했거든요.”

데이지가 나 없는 사이에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너흰 정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구나. 됐으니 일단 들어가자. 네게 부탁했던 물건을 빨리 확인하고 싶어.”

내 재촉에 카론이 이미 준비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는 내 팔에 팔짱을 끼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귀부인다운 그녀의 복장과 달리 내 꼴이 워낙 엉망이라 망토로 열심히 몸을 가려야 했다.

나의 부탁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네클렌타의 새로운 영주가 된 록허드와 그의 부인인 아스테를 위해 결혼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카론이 대신 해 준 것이다.

작년 여름 치러진 록허드의 혼인은 그 중요도로 치자면 국혼 다음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네클렌타를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혼인 절차는 대거 생략된 채 진행되었다.

록허드는 황후인 나의 형제이기도 하지만 황제의 최측근이기도 하다. 네자르가 황급히 진행된 혼인에 대한 미안함을 황금을 가득 실은 마차 다섯 대로 대신 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바쁜 네자르를 대신해 내가 나서기로 했다. 네클렌타 양식의 가구 및 복식은 물론이요, 성의 수리와 건축 역시 모두 황성에서 떠맡기로 한 것이다.

도움받을 귀족 부인을 고르려던 차에 카론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북제국 국경 쪽 외교를 책임지던 이가 엔테라 공작 가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해 거절하려 했으나, 카론이 한사코 자기가 하겠다며 주장했기에 일은 속행되었다.

“좋아. 고마워, 카론.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 그건 그렇고… 임신하기 전에 네클렌타를 방문했었잖아. 어땠어?”

내 물음에 하사품 목록을 훑던 카론이 대답했다.

“피신해 있던 전 왕자… 그러니까, 아스테 부인의 동생이 귀화했잖아요.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신 덕에 굉장히 감사해하고 있어요.”

아, 맞아. 그간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게렌?”

“네, 게렌 네클렌타. 공녀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들었어요.”

게렌 네클렌타. 네클렌타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국경을 수비하던 8왕자. 내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몇 없는 적장 중 한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록허드와 네자르가 가장 피곤한 전투였다고 여러 번 언급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들을 때마다 의외야.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다고 들었는데, 순순하게 돌아오다니.”

“아스테 부인의 친모가 네클렌타 하렘 출신이라고 해요. 게렌 네클렌타가 유일하게 전쟁터로 보내진 왕족이기도 하고…….”

본래 패전국의 왕족은 모두 참수당하기 마련이다. 하나 네자르는 게렌 네클렌타에게 자비를 베풀고, 록허드를 도와 네클렌타의 재건을 도우라 명했다. 아버지와 에든의 반대가 꽤 심했었지. 두 사람의 우려 섞인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카론 너는 실제 만나 봤지? 어떻든?”

옆에서 말없이 차를 홀짝이던 필프론츠의 눈이 얇게 좁혀졌다. 그는 카론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앞서 입을 열었다.

“판시온 공작과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많은 자였습니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분위기가 유독 더 그러했지요.”

“아아, 맞아요. 네클렌타 억양도 굉장히 약했어요. 적의 역시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대화할 때 오라버니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남편이 제가 한눈에 반한 줄 알고 어찌나 칭얼거리던지.”

세상천지에 판시온 같은 남자가 또 있다니. 전해 들은 표현을 통해서 반 공작과 비슷하리라 유추했었는데, 정반대의 인물인 듯했다.

이후 카론과 나는 한참 동안 잡담을 나눴던 것 같다.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본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목이 약간 쉬어 있을 정도였다. 바로 이 맛에 오랜 친구를 만나는 거지. 그날은 네자르와 외출했다는 만족감과 카론을 만났다는 만족감으로 편히 잠들 수 있었다.

***

황성 신년회의 첫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활기에 몸을 벌떡 일으켜야 했다. 늘 차분하고 고요한 황성이 이렇게 들썩거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녀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얼굴로 나의 환복을 도왔다.

“폐하, 시간이 촉박하니, 목욕을 도우며 오늘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준비된 의상은 총 다섯 벌로, 이 중 폐하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황금색은 점심 만찬에, 검붉은 벨벳 원단의 드레스는 저녁 만찬에…….”

“목걸이와 귀걸이 역시 데보라 부인과 함께 복장에 맞춰 준비하였습니다. 뒤에서부터 차례로 루비로 장식된 ‘새벽의 탄생’은 자정 만찬에, 흑진주의 결이 일품인 ‘밤이 내리는 바다’는 저녁 만찬에…….”

“명하신 대로 오늘 조식에는 고기를 제외하여 올렸습니다.”

느긋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와 표정이라, 나 역시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국혼 이후 열리는 가장 큰 국가 행사였다. 보통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후 당해의 행사가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나, 북벌 전쟁 참전 유공자를 기린다는 이유로 모든 행사의 규모를 축소했었다. 당연히 외국 사절단의 방문 또한 모두 거절했었다.

즉, 올해 신년회가 새로운 카발 제국의 번성과 네자르가 얼마나 강력한 황권을 지녔는지 공표할 첫 공식 행사라는 의미였다.

“폐하, 지금 그 표정 아주 좋아요.”

데이지의 만족감 가득한 칭찬에 흐릿했던 시야의 초점을 다시 잡았다. 아주 좋다고? 무슨 의미인가 싶어 거울 너머를 낱낱이 살폈지만, 눈앞에는 멍하니 앉은 여성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 이게?”

“아아주 완벽해요. 입을 함부로 놀리면 다 잡아먹겠단 얼굴 그 자체인걸요.”

말도 안 된다 싶어 다시 거울을 봤지만, 역시나 멍한 얼굴의 여인만 앉아 있었다.

“데보라 부인이 말하길, 외국 사절단이 초대되는 첫 행사인 만큼 기세를 잡으셔야 한다고 했어요. 황후께서는 워낙 전 세계에 강인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으니, 표정 관리만 잘하신다면 완벽할 거라 덧붙였습니다.”

이제는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황성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와전되었으면 표정 하나로 기세를 잡을 수 있단 건지. 네자르는 아직도 날 어린 시절처럼 귀여워하던데.

“오늘은 황제 폐하와 에젤로트 백작님 그리고 오드리네 후작 부인 앞에서만 조금 조심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셋은 왜?”

“세 분 앞에서 보이는 표정은 평소 때와 많이 다르시거든요. 혹시 모르셨어요?”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다. 손거울을 들고 다니며 종일 표정을 확인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나 어떤 느낌인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좋아, 머릿속으로 저 세 명만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이거지?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벌컥 열린 문 밖에서 눈에 띄게 큰 신장을 지닌 남성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신년회인 만큼 황제의 복장 역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마저도 네자르의 외모와 함께하니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한 눈에 반한 얼굴인데?”

지금 내 옆에 나란히 백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면, 백 명의 여인 모두 네자르에게 반했을 것이다. 그의 어둡고 무거운 검홍색 눈동자는 사람을 잡아끄는 황홀한 매력을 지녔다. 단단한 콧대와 턱 선, 그와 반대되는 유려한 결의 눈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앗, 이게 아니지.

“폐하, 혹시라도 내가 또 이런 표정을 짓는다면 꼭 말해 주세요.”

나의 당부에 손을 잡고 방을 나서던 네자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왜?

“카발 제국의 황후인 만큼 고고하게 앉아 있어야 하잖아요.”

“쉽군. 나와 눈을 마주치지만 않으면 될 테니까.”

그의 대답은 내게 안도감보다 옅은 충격을 선사했다. 설마 내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한다는 사실, 나만 알아채지 못하고 있던 것일까.

“나, 나 말이에요. 정말 폐하를 볼 때는 그렇게 다른 얼굴이 돼요?”

“뭐, 꽤 다른 편이기는 하지.”

“어떻게요?”

정면을 응시한 채 곰곰이 고민하던 네자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따뜻한 밀크티에 초콜릿이 빠져 버린 표정.”

따뜻한 밀크티에 초콜릿이 빠져 버리면 어떻게 되더라. 녹았던가? 아, 아니, 녹던가가 아니지. 아주 확실히 녹잖아.

“너무 애매한 설명이려나.”

“아니요, 어떤 느낌인지 충분히 알겠어요. 정말 충분히요.”

한마디로 헤벌레하다는 의미 아닌가. 그렇다는 건, 네자르가 이제껏 내 헤벌레한 표정만 봐 왔다는 소리였다. 그런 표정만 봐 왔으니 날 애 취급하는 거겠지. 이제야 그의 변치 않는 애 취급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확실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신년회장은 각국의 대사로 꽉 찬 상태였다. 차례로 옷을 갈무리하며 허리를 굽히는 소음이 한데 뭉쳐 크게 울려 퍼질 정도였다.

“오늘 날이 아주 좋군.”

짧은 한마디를 시작으로, 카발 제국의 신년회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신년 축하 진상품을 바칠 대사들이 차례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황제에게 처음으로 바치는 물건인 만큼 그 기세가 다들 상당했다.

“저희 보나트 왕국은 왕실이 보증하는 보나트 최고의 명마 스무 필과 남부 산맥 백호의 모피…….”

한창 겨울을 보내고 있는 제국과 달리, 진상된 물품에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모든 것이 존재했다. 제국에 도착하기까지 어찌 저리 완벽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군. 선물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보나트 왕께 감사 인사를 전해 주시게.”

“영광이옵니다.”

필프론츠 후작이 말하기를, 북벌의 여파로 대륙의 모든 왕국이 바짝 긴장한 상태라고 했다. 심지어 그 선봉장이었던 네자르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했기 때문에 신년회에 참석한 대사들 모두가 선물에 특히 신경 썼을 것이라 예측했다. 후작이 추측했던 대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선물의 자태가 보통 곱고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질 거예요. 백호 모피 말이에요.”

작게 속삭이자 옆에 앉은 네자르가 픽 웃음을 흘렸다. 호랑이라니, 제국 근방에선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동물 아닌가. 내게는 미묘한 향수를 일으키는 물건이라 선수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받은 것들 중 황후가 욕심내지 않던 선물이 있던가?”

“있었어요. 정력에 좋다는 전통 찻잎.”

“그건 줄 생각 없어. 짐이 다 마실 테니까.”

“억지로 넘겨도 받을 마음 없으니 걱정 마세요.”

네자르는 부러 날 의식해 시시콜콜한 말에도 세심히 반응해 주었다. 나중에는 긴장한 티가 역력한 대사를 위해 내가 먼저 말을 끊을 정도였다.

“마허트로군.”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앞으로 나선 남성의 복장은 남부 대사막 주변 국가와 상당히 유사했다. 구릿빛 피부에 짙은 눈썹, 크고 단단한 체구까지.

마허트라면 세계학을 배울 때 아주 짧게 공부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제국에서 아주 머나먼 땅에 있는 패쇄적인 사막 위의 나라. 게다가 언제 망할지 모르는 국가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대사는 한참 동안 마허트 국왕의 축언을 읊었다. 그리고 막 입을 닫던 때, 두 다리를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폐하, 저희 마허트 왕국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은혜를 갚는 전통이 있습니다. 왕께서 바치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흔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목청이었다. 덕분에 잠기운이 확 달아나 버렸다. 네자르의 반응이 궁금해 슬쩍 고개를 돌리니, 위로 씰룩이며 올라가는 눈썹이 보였다.

“가장 아름다운 것? 흐음. 준다는데 짐이 거절할 이유도 없지. 그 아름다운 물건이 대체 무엇이기에 호들갑이냐. 고국의 왕성을 통째로 빼 오기라도 한 모양이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였으나, 대사의 정수리에선 왜인지 모를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풍겼다.

“마허트에서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선물입니다.”

이어서 묘령의 여인이 유려한 걸음걸이로 대사 옆에 자리 잡았다.

“마허트에서 가장 어리고 아름다운 공녀, 데모나입니다.”

동시에 대관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지금 마허트의 여인을 선물이랍시고 바친다는 소리인가. 분위기를 망쳤다는 데 신경질이 이는 건 둘째 치고, 너무나 당당한 발언이라 더욱 황당했다. 곧 나를 향한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주변을 훑으니 하나같이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내리기에 급급했다.

“황제 폐하, 마허트 왕국의 데모나가 인사드리옵니다.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네요. 폐하를 곁에서 모시게 되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데모나는 공작의 깃처럼 화려하고 선명한 파란색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외국인이 외교를 목적으로 황성에 입성할 때는 당국의 복식을 걸쳐야 한다. 하나 공녀의 드레스는 제국 복식이었고, 이는 공녀에게 대사 자격이 없음을 시사했다. 즉, 사람이 아닌 물건이란 소리였다.

여인을 선물로 바치다니. 그것도 황제가 직접 하렘까지 폐쇄한 이 시점에. 간만에 느끼는 선연한 불쾌함 때문인지,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네자르가 입을 열었다.

“짐을 능멸하는군.”

이럴 때마다 느끼는데… 네자르와 혼인한 건 내 생에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용암처럼 솟구치는 나의 화도 네자르의 차분하고 냉랭한 목소리를 들으면 곧장 차분해지니까.

“신이 무지하여 폐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이온지.”

마허트 대사의 되물음에 네자르가 다소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란히 앉은 데모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짐을 능멸하는 것으로 모자라 황후까지 능멸하다니. 짐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칭찬해 주마. 아주 확실하게 성공했으니.”

낮고 작은 한숨 그리고 불쾌함에 일그러진 얼굴까지. 네자르는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을 지니고,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카발 제국의 지배자이다. 그의 일그러진 미간 하나로 신년회장은 만년설에 뒤덮인 듯 꽁꽁 얼었다.

“마허트 대사, 그대는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건가?”

“아, 아니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군. 아닌데 짐과 황후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라.”

작년 황제의 탄생 연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초대되지도 않았던 모국의 외교관이 부득불 찾아와 공녀를 바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온갖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쫓겨났었지.

일부일처제의 국가에서, 심지어 하렘이 폐쇄된 지 이제 막 1년이 흐른 시기에 공녀를 바친다는 것은 황제와 황후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황제가 공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똑같은 일이 또 생기다니.

만인지상의 황제인 만큼 반드시 여색을 즐기리라 여겼던 걸까. 내가 곧장 후계자를 낳지 못해 생기는 일일 수도.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이 모든 건 아이를 낳지 못한 내 잘못… 일 리가 없지.

암.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폐하,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저 건방진 대사의 목을 치고 싶군요.”

이럴 때는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나서서 한마디 해야 한다. 내 커다란 외침에 장내에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잠시 턱을 괸 채 고민하던 네자르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저렇게 들끓는 얼굴은 참 오랜만에 보네.

“대사.”

“폐, 폐하! 제가…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 주신다면…….”

“무지한 그대를 위해 알려 주건대, 카발 황성에는 하렘이 없다. 또한 황족이 아닌 인물이 장시간 숙박할 수 있는 거처도 없지. 황후에게 사냥개를 선물한다면 성 밖 개집에 묶어 둘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여인을 개집에 묶어 둘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네자르의 체면을 고려해 대사를 향해 삿대질하려던 손가락을 거두고 모욕을 주려던 입술을 꾸욱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후는 인내와 인내의 인내를 위한 자리인 것 같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마허트 대사 역시 무언가 잘못됐단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주,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끝까지 멍청하군. 사죄는 내가 아닌 황후에게 해야 하지 않나?”

“화, 황후 폐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네자르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영 마음에 차질 않아. 황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황후만 원한다면 지금 당장 사지를 잘라 개밥으로 던지도록 하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눈을 얇게 뜨고 마허트 대사를 살폈다. 네자르의 명령으로 내게 사죄를 하기는 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네자르를 향한 채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단 의미였다.

“흐음.”

그래, 맞아. 이제야 기억났어. 남쪽 사막의 폐쇄적인 왕국에는 여인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렘의 유무와 별개로 그들이 공녀를 진상하는 건 당연한 행위였다. 귀한 보석을 줄줄이 매단 아름다운 여인이야말로 마허트 입장에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니겠는가.

당장 내가 아닌 네자르에게 사죄하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할 테다. 그들에게 여자는 사람이 아닌 장식품에 불과하니까.

긴 시간 유지되는 침묵. 나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답을 도출해 냈다.

“당장은 조용히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연회장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싸늘해졌네요.”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턱을 들어서 네자르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자, 그가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미간을 더 깊게 구겼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 말은 괴롭혀도 내가 괴롭힌다는 의미예요.”

“어떻게?”

“생각 중이에요. 그러니까 폐하, 이번 일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괜히 잘생긴 이마 찡그리지 마시구요.”

손을 들어 그의 일그러진 눈썹 사이를 부드럽게 밀었다. 네자르는 내 결정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얼굴로 여러 번 입을 열고 닫았다. 하지만 곧 짧은 한숨을 쉬고 마허트 대사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마허트 대사, 그대는 황후가 대양처럼 넓은 마음과 인자함을 가진 것에 평생 감사해야 할 것이다.”

“화, 황송하옵니다!”

그렇게 땅에 이마를 다섯 번 정도 박았을까. 마허트 대사는 공녀를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안도하도록 해. 내가 아주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괴롭혀 줄 테니까.

그렇게 연회의 참석자들이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때였다. 내내 굳어 있던 네자르의 표정이 잠깐이나마 스르륵 풀렸다.

“아아, 그렇지. 멍청한 대사가 분위기를 망친 덕에 하마터면 아주 중요한 일을 잊을 뻔했군.”

네자르의 손가락이 제국 귀족들 사이를 가리켰다.

“거기 서 있는 자네. 아니, 자네 오른쪽에 선 갈색 머리 남성. 그래, 자네 말이야. 밀레안 콘탄츠 소백작 아닌가?”

무언가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양, 네자르의 두 눈이 환하게 빛났다. 밀레안 콘탄츠라, 어디서 분명 들어 본 이름인데…….

“예, 예!”

이어서 콘탄츠 소백작이 근처 귀족들에 의해 앞으로 밀려 나왔다. 바짝 굳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이 묘하게 낯익었다. 누군가 했더니, 어제 날 황성의 하녀인 줄 알고 희롱하던 그 소백작이었다.

“4년 만의 황성이겠군. 안 그런가? 그간 잘 지냈는지 신수가 아주 훤해진 느낌이야.”

“가, 감사합니다.”

너무나 친근한 물음이라 하마터면 그와 네자르가 십년지기인 줄 알았다.

“부친을 대신해 이곳에 왔다 하였지? 그렇다면 황성에 익숙한 이도 없으니 길에 어둡겠어.”

“예, 예.”

“그렇담 그대의 옆에 딱 붙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 그렇지?”

“화, 황송하옵니다.”

“황송할 것 있나. 인피르노, 이리로.”

“예.”

네자르의 부름에 인피르노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인피르노 경은 짐의 호위 기사이다. 짐만큼이나 오래 황성에서 살아왔으니 아주 완벽하고, 친절하게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아, 듣자 하니 황성 시녀에게도 관심이 많다지?”

전해 들었구나. 그래, 그 얄미운 후작이 혀를 가만히 뒀을 리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것, 입 닫고 앉아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예, 예? 아니옵니다, 폐하. 시녀라니, 어찌 그런…….”

뭘 봐? 벌벌 떠는 시선으로 날 응시하는 콘탄츠 소백작의 얼굴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그러게 누가 감히 황실에서 시녀를 꼬시래?

“귀국한 그대를 위해 짐이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별거 아니니 고마워 할 필요 없어. 자세한 설명은 인피르노 경에게 전해 들어라. 인피르노?”

“예, 폐하.”

“밀레안 콘탄츠 소백작에게 황성 구경을 시켜 주게. 연회가 열리는 5일 내내, 단 하루도 빼먹지 말고. 아, 내 성의 시녀를 그토록 좋아한다니, 체험도 시켜 줘야겠군. 시녀 체험.”

“카산드라 부인께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카산드라 부인은 황성을 총괄하는 부인이었다. 황제의 명에 깜짝 놀란 콘탄츠 소백작이 휘둥그레진 눈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먹일 얼굴이 되어서.

“폐, 폐…….”

“쉿. 폐하께서는 거절을 미덕이라 여기지 않으십니다. 토를 다는 것 역시 싫어하시지요. 그러니 조용히 절 따라오십시오.”

하나 황제에 죽고 황제에 사는 인피르노가 그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인피르노는 도축하기 위해 돼지를 끌고 가듯, 콘탄츠 소백작을 질질 끌고 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 차례 소란이 인 후, 제대로 된 연회가 시작되었다. 귀부인들 사이의 뜨거운 감자는 공녀에서 콘탄츠 소백작으로 옮겨 간 뒤였다.

“미움을 샀나 보군.”

“시녀 체험이라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벌을 받게 되었네요. 대체 무얼 하다 밉보인 걸까나.”

“폐하께서는 내치면 내쳤지 이런 식으로 망신을 주는 분은 아니신데…….”

“후후. 뭘 모르시네. 저런 건 미움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오히려 장난에 가깝죠. 방만한 이를 가볍게 꾸짖는 정도라 해야 할까.”

그렇게 귀부인들이 내 비위에 맞춰 콘탄츠 소백작의 흉을 보는 동안, 네자르는 네자르 나름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 저… 폐, 폐하.”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한마디를 제대로 붙이지 못해 안달하는 여인.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길게 흩날리는 머리칼이 누가 봐도 공녀였으니까.

“폐하, 소녀 드릴 말씀이…….”

마허트 대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여인을 연회장에 풀어놓은 걸까. 죽고 싶다고 시위하는 것인가. 네자를 화를 참는 얼굴이었다. 허나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고 언질해둔 탓인지, 공녀에게 역정을 부리지는 않았다.

저 정도면 보는 사람이 불쌍할 정도다. 네자르도, 공녀도.

“저어, 한 번만 이쪽을 쳐다봐 주시면…….”

공녀의 태도가 진심일 리는 없다. 조국에서 돌아올 생각은 말란 선언을 들었을 수도 있겠지. 하나 가엽다는 이유 하나로 여인을 거둘 네자르가 아니었다. 그는 의외로, 아니 상당히 내 눈치를 본다. 내가 딱히 눈길을 주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건 비단 네자르만이 아니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과 대사 들 모두 공녀를 마치 공기처럼 취급했다.

특히나 황제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그녀를 카발의 귀족들이 곱게 볼 리 없었다. 그래서일까. 휘황찬란한 보석들 사이에서 혼자 처량하게 남은 모습이 옅은 동정심을 자극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그때, 살며시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여인이 있었다. 캐롤라인이었다.

“대단하다는 생각.”

“공녀 말씀이신가요?”

“아니, 황제 폐하요. 나라면 신경질이 나서라도 한 번쯤 쳐다봤을 텐데.”

“이제 더는 놀라운 일도 아니죠……. 그래서, 허락하실 건가요?”

뭐를? 공녀를? 미쳤어?

물론 말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곱게 표현했다.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에 제 허락이란 게 필요할까요.”

역대 황제들 중 정부가 없었던 황제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네자르는 다르지. 내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한 다른 여자는 절대, 죽어도 허락 못 해.

“그렇담 공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안타까워라, 멍청한 국왕과 대사 때문에 엄한 여인만 희생되고. 기껏해야 열아홉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인데.”

“희생?”

“황제 폐하께서 거절하셨으니, 마허트로 돌아가자마자 목이 잘릴 게 뻔해요. 황제를 제대로 유혹하지 못해 마허트를 망신시킨 죄로요. 그 땅은 그런 곳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탓일까? 공녀의 얼굴이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끌어 올린 입꼬리 끝이 덜덜 떨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바닥에 떨어지는 시선에는 체념이 담긴 것 같기도 했다. 황제의 관심이 고픈 게 아니라 단지 살아남고 싶어서였나. 결국 그 둘이 같은 말이기는 해도.

타 국가의 사정에는 관심 없다. 하지만 마허트 왕국이 구긴 나의 체면까지 관심 없던 것은 아니었다. 놈들에게서 내 체면 값을 받아 내야 하지만, 역시 공녀보다는 대사에게서 받아 내는 게 더 확실할 것 같았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여인에게 화풀이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괴롭혀 줘야 하나.”

마허트 대사를 어떻게 괴롭혀 줘야 내 스트레스가 풀릴까.

***

신년회라고 해서 그 일정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따지자면 오히려 뻔한 것에 가깝다. 평소처럼 다과회를 열어 손님을 초대하고 함께 담소를 나누거나 지식을 교류한다. 단지 그 손님의 범위가 국내에서 국외로 넓어질 뿐.

오전의 다과회도 끝났겠다, 오후에는 가볍게 사냥을 나가기로 했다. 복장을 점검하는 와중에 방으로 들어온 네자르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신년회 기간 동안 네 호위 기사 수를 늘릴 거야. 키올을 줄 테니 두 명 모두 양쪽에 끼고 다니도록.”

키올?

네자르를 뒤따라온 키올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호위 기사 수를 늘리면 늘렸지, 굳이 키올을 내게 줄 이유가 있을까.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객이 마허트 출신으로 밝혀졌어.”

아, 자객이라면, 며칠 전 제도에서 우리를 습격했던 그 복면들인가.

“마허트는 국경에서 가장 먼 국가잖아. 그런데 제도까지?”

동시에 신년회 첫날, 생각 없이 공녀를 바친 왕국이기도 했다.

“그래서 겁이 없던 거겠지. 공교롭게도 자객의 충성심이 키우는 개만도 못한 덕에 쉬이 밝혀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허술해 보이기는 했어.”

“다른 국가에 오명을 씌우고 전쟁을 일으키게 할 생각이야.”

“괘씸하네.”

작게 한숨을 내쉰 네자르가 내 반대편 뺨에도 입을 맞췄다. 그는 데이지가 묶고 있던 부츠의 끈을 대신 묶어 준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부인도 당분간 조심해. 마허트든 어디든 외국 사절단이면 경계부터 하고 봐. 대사들의 부인도.”

“부인들? 죄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던데. 생긴 것도 요정처럼 예뻐서 유리로 만든 인형 같더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하여간, 짐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고.”

그 말 하나를 전하러 왔던 건지, 네자르는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방을 나갔다.

마허트 왕국. 뒤로는 황제 암살을 위해 자객을 보냈으면서 어제는 그렇게 공녀까지 진상했다 이거지. 이곳이 황성인 만큼 그의 안위가 걱정되지는 않았으나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네자르의 조언은 옳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사들의 부인 쪽이 아니라 대사 쪽이었지만.

“훈련받은 자입니다.”

“훈련?”

이제 막 사냥을 나서기 직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마허트 대사가 데모나를 데리고 사냥터를 방문했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선 툴드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마허트 대사를 노려봤다. 그리고 내게만 들릴 만큼 작고 느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완벽하게 소리를 죽인 채 걷고 있습니다. 예법이 아니라 무인들이 사용하는 기술이지요. 하나 티 내는 것을 봐선 주의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말 무서운 자들은 어리숙한 모습만 보이려 하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못 해도, 찝찝하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예컨대 마허트 대사가 무인들의 걸음걸이를 왜 따라 하느냐는 뜻이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습격자의 출신이 마허트라는 걸 고작 십여 분 전에 전해 듣지 않았는가. 심지어는 툴드조차 영 수상하다고 귀띔을 한 상태다. 대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폐하.”

“내 집에서 못 잘 이유는 없지.”

“어젯밤 저의 무지한 실수를 다시 한번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대양과 같은 마음으로 자애롭게 넘어가 주셔서 더없이 감사드리옵니다.”

“알면 됐다.”

어디서 조언이라도 듣고 왔는지, 어제와 달리 퍽 누그러진 태도였다. 그래 봤자 이미 마차는 떠나고 없는데. 내 눈치를 살피던 마허트 대사가 사냥에 참석한 귀인들을 훑으며 말했다.

“하하, 오늘 사냥에 황후 폐하께서 참석하신단 소릴 듣고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비록 저는 사냥 실력이 많이 어리숙하지만, 소문의 실체를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따라왔습니다.”

“소문?”

“황후 폐하의 사냥 솜씨가 대단하시다는 소문이 마허트에까지 퍼졌답니다.”

호탕하게 웃은 마허트 대사의 얼굴에는 옅은 존경심이 깔려 있었다. 연기를 꽤 하는데?

“사냥이라.”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는, 솔직히 말해 관심 없었다. 나라를 위해 한 몸 던지는 애국자? 지레 겁을 먹고 내 비위를 맞추려는 대사?

공교롭게도 내 눈에 비친 마허트 대사는 그저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에 불과했다. 대사랍시고 내 앞에 나선 것으로 모자라 목숨을 앗아 가려 했던 자들과 같은 출신. 거기에 수상한 행태까지.

마침 잘됐다. 언제부터 움직일까 했는데, 지금 당장 움직이면 되겠네.

“사냥이란 참 좋은 취미지. ……툴드?”

“네.”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위해 특별한 사냥을 준비해야겠구나.”

내 갑작스러운 말에 툴드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짐짓 여유로운 얼굴로 허리에 꽂아 두었던 장갑을 천천히 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의 저의를 깨달은 눈치 빠른 툴드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 말이십니까?”

“그래, 그것.”

이렇게 표현하니까 좀 있어 보이네. 나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허트 대사에게 물었다.

“나에 대한 다른 소문은 없었나?”

“다른 소문이라면…….”

“예를 들어, 사냥감이 네 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걷는 동물이라든지.”

“예?”

대사뿐만이 아니라 툴드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키올 또한 놀란 표정으로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장난은 데이지와 툴드, 그리고 론이 아니면 즉흥적으로 맞추기 힘들거든.

“본성의 하녀와 시종 들을 전부 데려와. 근래 붉은 것을 못 봐 좀이 쑤시던 차인데, 아주 잘됐어.”

“예에. 크큭… 아주 실한 놈들로 데려오겠습니다.”

크큭은 또 뭐야. 배정된 배역에 과하게 몰입했는지, 야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툴드가 자리를 벗어났다.

저 표정 꽤 괜찮은데? 괜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 역시 야비한 악당의 웃음을 만들어 냈다.

“인간 사냥을 시작하자, 키올. 마허트 대사에게 아주 즐거운 구경을 시켜 드려야지.”

헉. 대사가 거친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속절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내게까지 보였다.

“폐, 폐하.”

아, 그러고 보니 키올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 잘 모르지.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린 키올에게 사죄의 의미로 작게 웃어 주었다. 설마 이 미소도 야비하게 보이지는 않겠지.

내가 툴드에게 지시한 인간 사냥은 모의 사냥을 뜻했다. 본래 이 모의 사냥은 기사단에서만 실시하는 것으로, 소수의 적을 쫓을 때의 몰이법과 활을 익히는 훈련이다.

반 공작이 내 사냥 실력에 감탄한 뒤로는 종종 하급 훈련에 함께 참여하고는 했다. 그래 봤자 다들 내 안위를 챙기느라 훈련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그리고 기사들의 모의 사냥에서 파생된 것이 바로 고용인들과의 모의 사냥, 다른 말로는 술래잡기였다. 그래, 고용인들과의 모의 사냥은 확실히 술래잡기지. 잡으면 빨간 물감을 터트리는 부분부터 사냥보다는 놀이에 가깝지 않은가.

황성 지리에 어두운 귀부인과 고용인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그렇게 탄생한 여러 짝이 서로를 사냥하며 도망친다. 귀부인은 체면 차리지 않으며 놀 수 있고, 고용인은 적잖은 보상을 챙길 수 있는, 서로 간의 만족도가 꽤 상당한 놀이였다.

“오늘따라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케이트.”

내 곁에 나가온 네자르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코를 열심히 움직였다. 냄새를 맡던 그는 곧 목에 힘을 쭈욱 빼고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외교관들과 술을 마셨는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돌아온 그였다. 피곤할 때마다 보이는 어리광이었기에 나는 네자르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응. 오늘 모의 사냥을 하느라.”

“굳이?”

“생각보다 귀부인들이 굉장히 좋아해. 타국 손님들은 질색하며 도망갔지만…….”

빨간 물감을 이용한 술래잡기는 귀부인들에게 퍽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그저 잔인한 비인륜적 행위라 여겼는지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음. 확실히 인간 사냥이라는 어감이 건전하게 들리지는 않으니까.

네자르의 환복을 천천히 도우며 말했다.

“정말 사람을 사냥하는 줄 알더라고. 툴드가 얼마나 비장한 얼굴을 하던지.”

“왜 그렇게 겁을 줬어?”

왜 그랬냐고? 짧은 고민 끝에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래야 건방 떨며 멋대로 못 굴 거 아니야? 여기는 무려 제국의 아성인 황성인데. 아아, 몰라. 다리 주물러 줘. 너무 아파.”

그것 외에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싶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어여쁘게 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침대에 몸을 던진 후 날 끌어당긴 네자르가 픽 웃었다. 그는 팔을 뻗어 퉁퉁 부은 내 다리를 꾹꾹 눌렀다.

“짓궂기는. 이제 또 대륙 곳곳에 카발 제국 황후의 악명이 퍼지겠군.”

“요즘 들어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편한 거 같아.”

그 악명을 믿는 몇몇 귀족들이 네자르보다 내 말에 더 순종적인 건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 나는 발끝에서 올라오는 시원함을 느끼며 네자르의 등에 코를 박았다.

“그렇게 힘들었어? 사냥에도 단련된 부인이 이토록 피곤해하는 건 처음이로군.”

“으음. 그 정도는 아니고…….”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럼 어느 정도인데?”

몸을 돌린 네자르가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대단한 이유랄 것도 없었다. 제국의 황후로서 그리고 네자르의 부인으로서 하나라도 더 신경 쓰고 싶은 마음에 잡생각을 했더니 몸이 일찍 지친 듯했다.

“입 맞춰 줘.”

팔을 뻗자 네자르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들 때 애처럼 구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단 말이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네자르는 순순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아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보인 네자르의 얼굴이 가슴이 시릴 만큼 멋졌다. 최고의 미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나라가 존재한다면, 그 나라의 왕은 오직 네자르만 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입만 맞추는데도 마음이 이렇게 울렁거릴 수 없었다.

그의 부드러운 혀가 내 입술과 입 안쪽을 훑었다. 위로받는 기분에 온몸의 노곤함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네자르가 내 목덜미를 더 가깝게 끌어당겼다. 고개를 틀어 더 깊숙한 안쪽으로 자신의 숨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한참 키스를 나누다가, 잠시 입을 뗀 네자르가 이마를 맞댔다.

“기분은?”

“괜찮아졌어.”

“그럼 어떻게 할까. 이대로 부인께 입만 맞출까?”

“……아니.”

대답과 동시에 그의 몸이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때부터 네자르의 움직임은 거침없어졌다. 입술 위만 배회하던 그의 숨이 목과 가슴골을 타고 내려가 흔적을 남겼다. 허리를 더 가까이 끌어 자신의 몸에 밀착시키고 나를 잡아먹을 듯 삼켰다. 전희의 끝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내 허벅지 안쪽에 잇자국을 내며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아아. 너무 좋아. 네자르는 자신의 머리칼을 헤집는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서 웃으면 왜 웃느냐는 듯 더 빨리 치고 올랐다. 나의 몸은 오직 그에게만 맞춰진 듯 날이 갈수록 더 쉽게 황홀함에 젖어 가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내면의 모든 진심을 얼굴 위로 내보일 때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네자르가 작게 속삭이곤 했다.

“그 얼굴은 짐에게만 허락된 표정이야.”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면 그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지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흐트러져 가는 머리칼과 의복을 뒤로한 채 그의 목에 매달려 쾌락에 젖었다.

아무도 모르는 우리 둘만의 이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를 괴롭히는 잡념과 사념에서 벗어나 오롯이 네자르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사랑해. 절정에 다다라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을 때 보인 네자르의 웃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

다음 날 낮에는 모처럼 날이 덜 추웠다.

전날의 ‘인간 사냥’에 대해 꽤나 많은 뒷말이 오간 모양이었지만, 다과회는 손님들로 상당히 시끌시끌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건 다과회가 아니지. 차라리 연회라고 칭하는 게 낫겠어.

아직 경계를 풀지 못한 외국 손님들은 멀찍이 앉아 날 살피기에 바빠 보였다. 덕분에 내 주위는 늘 봐 오던 제국 귀부인들로만 가득했다. 이들은 간밤의 소문을 흥미로운 거짓 논란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아, 정말 재밌지 않았어요?”

“너어무 즐거웠어요. 저는 배를 잡고 웃다가 울 뻔했지 뭐예요.”

깔깔! 소리 높여 웃은 귀부인이 카론의 물음에 손뼉을 쳤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나와 함께 술래잡기를 즐기는 귀부인들이란 점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속칭 황후 패거리라고 해야 하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카론과 세피아 부인을 통해 하나둘 가까워지면서 연회가 열릴 때면 늘 내 곁을 지켰다.

너무 시끄러운 게 흠이기는 해도, 항상 즐거우니까.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참, 오늘 아침에 콘탄츠 소백작 보셨어요? 폐하의 명대로 정말 시녀 노릇을 하고 있던데.”

“참으로 우스운 꼴이었죠. 역시 말과 행동이 바르지 않은 자들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해요.”

“나이도 어린 소백작이 얼마나 건방지면은! 콘탄츠 백작이 속 좀 썩겠어요.”

“흥. 자식 농사 잘못한 죄죠.”

내 옆에 앉은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콘탄츠 소백작을 물어뜯기에 바빴다. 어제 술래잡기의 사냥감 중 하나로 소백작이 끌려왔었기 때문이다. 여인들의 미움을 산 죄로, 콘탄츠 소백작은 물감을 무려 일곱 번이나 맞아야 했다. 나도 꽤 지독한 편인데 다른 귀부인들이라고 다를 거 없었다.

“저어, 실례가 아니라면 폐하, 저 영식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한창 웃음꽃이 필 무렵, 우리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여인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억양이 어색한 것으로 보아 타국 손님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뺄 것 없이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밀레안 콘탄츠는 나와 내 성의 여인들을 업신여겼답니다.”

“그것도 보통 업신여긴 게 아니죠. 황족 능욕의 죄는 황법상 중죄예요.”

“어머, 그런 일이…….”

고개를 돌리니 고작 몇 걸음 거리에 앉아 있는 마허트 대사가 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아주 작게 어깨를 떨었다.

한 번 더 겁을 줄까.

나는 대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모두에게 들릴 법한 크기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자야말로 사지를 나눠서 사냥개들에게 던져 줬어야 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다과실의 분위기는 눈보라라도 몰아친 듯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마허트 대사 역시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내게서 시선을 뗐다. 숨소리조차 생생하게 들릴 만큼 고요한 다과실에서, 내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카론이 유일했다.

“타당하신 말씀이에요. 시녀 노릇을 하는 동안 인. 간. 사. 냥.에도 불렀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러지 못해 참 안타까워요.”

“그리하면 콘탄츠 백작이 슬퍼할 테니, 어쩔 수 없지.”

“황후 폐하께서는 너무 인자하셔서 문제예요. 그리도 인자하시니까 그런 자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기어오르죠.”

역시 카론이야. 예쁜 것으로 모자라 눈치까지 빠르다니까.

카론은 오전에 나눴던 짧은 대화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인지한 듯했다. 고작해야 ‘마허트 대사가 수상하다. 경계 대상 1순위니 카론도 조심해라.’ 정도로 저런 답안을 내놓다니… 역시 카론은 카론이야.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시녀장에게 물어 콘탄츠 소백작이 시녀 노릇을 하는 동안 인. 간. 사. 냥.을 한 번 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줄곧 내 뒤에 서 있던 툴드 역시 비장한 얼굴로 거들었다. 가만 보면 나보다 더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말해 주니,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할게.”

내 말에 양옆으로 나란히 앉은 귀부인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장점이 존재한다. 내가 대뜸 맥락 없는 소리나 거짓말을 입에 담아도, 되묻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닫는다는 점. 그러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를 홀짝인다.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이 왜 사기를 당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여러분들도 참여하셨다면 굉장히 즐거웠을 텐데 말이죠.”

내가 아쉬움을 토로하자, 사냥에 불참했던 대사들과 여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 아닙니다. 사냥 솜씨가 비루하여…….”

“저는 허약해 피, 피를 보면 까무룩 기절하옵니다.”

겁은 마허트 대사에게만 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손님들 모두에게 준 꼴이 되었다. 이러다 카발 황실이 대륙에서 가장 흉흉한 소문의 온상지가 되겠어.

“신년회가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열 테니까, 꼭 참석해 줬음 해요. 다음에는 시녀 대신 불법 침입자를 사냥할 거거든.”

억지로 훈훈함을 되찾은 다과실이 다시 한번 침묵을 맞이했다.

“겁도 없이 황실로 기어들어 왔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 신년회가 지나기 전에 깡그리 잡아 사냥감으로 사용할 생각이에요. 하아… 상상만으로도 너무너무 즐겁네요.”

행복감에 웃음을 짓는 내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해도 참 답 없는 변태처럼 느껴졌다. 내가 봐도 변태 같은데 과연 남들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요, 마허트 대사?”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고, 마허트 대사는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침착하게 숨을 들이켰다.

“예, 폐하.”

“나는 검은 털의 사냥감을 유독 더 선호해요.”

대사의 그늘진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길게 늘어진 제 머리칼을 향했다. 밤처럼 까맣고 짙은 검은색 머리칼을.

“아무리 흉측하게 시신을 훼손해도 티가 덜 나거든.”

“그…….”

“아, 물론 대사를 가리키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겁먹은 토끼처럼 덜덜 떨지 말아요.”

한 차례 손사래를 쳐 줬으나, 순순히 믿을 리 만무하다. 마허트 대사 곁에 앉아 있던 자들이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그렇게 마허트 대사의 존재는 주위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다.

설마, 내 압박을 못 참고 오히려 일을 치른다거나.

그 부분을 생각 못 한 건 아니지만 조금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마허트 대사가 지내는 층의 경비를 더 신경 쓰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날 이른 저녁.

조용하던 본성이 왜 이렇게 시끄럽나 했더니, 시종 여러 명이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신년회도 안 끝난 마당에 이게 다 무슨 물건이람. 마침 네자르가 보여 재빨리 달려가 물었다.

“네자르, 이게 다 뭐예요?”

“키올이 네가 검은 털을 좋아한다고 말하더군.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 사실도 모르고 디자이너들이 죄다 흰색 아니면 밀색으로 맞췄으니.”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검은 털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다고? 키올에게 그런 말을 한 기억도 없을뿐더러, 실제 나는 검은색 털을 선호하지…….

‘나는 검은 털의 사냥감을 유독 더 선호해요.’

……설마 그 발언 때문인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폐하.”

“응.”

“내 생각에, 키올은… 실력에 비해서 눈치가 좀 없는 거 같아.”

등 뒤 멀찍이 서 있던 키올이 ‘예? 제가 말입니까?’ 하며 반문해 왔다. 보이지 않아도 보였다. 얼마나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

세상에, 네자르. 내 호위 기사로 인피르노나 키올이 아닌 툴드를 임명한 건 정말 중대한 결정이었구나!

“기사들이 대개 그렇지. 록허드와 툴드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손에 꼽기는 해. 한데 그건 왜?”

나는 차마 네자르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대고 ‘아무래도 키올이 내 말을 오해를 한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없었다. 순수한 애정으로 이 물건들을 준비했을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특히 더.

까짓거, 오늘부터 검은 털을 취향으로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네자르의 머리칼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가까워지자. 나는 고급스러운 상자 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모피와 가죽을 응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오전 시 낭송회 때는 날이 밝더니, 승마복을 입고 밖을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이슬비가 내렸다.

이파리라고는 언뜻 검게 보이는 침엽수가 다인 평지에서 우리는 가만히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저 멀리, 비 때문에 뒤따라 나오지 못한 사냥개들이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내가 직접 키우는 딸기, 키위, 머랭, 크림은 금방이라도 울타리를 넘을 기세로 갖은 힘을 다해 뒷발을 놀렸다.

“폐하.”

이대로 사냥을 접어야 하나 싶던 차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귀부인의 부름에 사냥개들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저기를 보셔요. 마허트 대사가 왔어요. 그것도 뒤꽁무니에 아주 대단한 것을 달고 왔네요.”

그 말이 기점이라도 된 듯, 뿔뿔이 흩어져 있던 귀부인들이 말 머리를 돌려 내 곁으로 모였다. 그들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시종이 종종 따라와 내 주변은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허, 뻔뻔하기는 대륙 최고예요.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사막 너머의 족속들은 기본 예의도 모르고 천박하다더니.”

우리가 향한 시선은 오롯이 한곳을 향했다. 사냥 일정에 맞춰 부랴부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두 명의 남녀. 고삐를 쥔 자는 마허트 대사였고, 그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오는 여자는…….

“공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름이 데모나였나.”

“예.”

키올이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일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스산했다.

“쫓아내겠습니다.”

제국에는 하렘이 없다. 하렘이 없는 제국에 공녀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데 공녀의 신분을 지닌 여인이 내가 주최한 사냥에 참석한다? 이는 날 업신여기는 태도였다.

어제는 내가 무서워서 입도 제대로 못 열더니.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싶었다.

“아니, 내버려 둬.”

이쯤 되니 마허트 대사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툴드와 키올이 말 머리를 돌려 내 앞을 막아섰다. 달려온 마허트 대사가 휘날리는 머리를 정돈하고 말에서 내려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황급히 뒤따라 내린 데모나 공녀도 예를 표했다.

“폐하.”

둘의 긴장된 시선이 나와 내 등 뒤의 귀부인들을 훑는다. 단연코 좋은 분위기일 리 없었다. 공녀의 덜덜 떠는 어깨는 다소 거리를 둔 내 시야에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마허트 대사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물론 툴드와 키올이 막아선 탓에 가까이 다가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대여섯 발자국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중한 비밀을 알리기라도 하듯 손으로 입을 모은 채 속삭였다.

“제가 아주 좋은 사냥감을 데려왔습니다. 검은 털의 사냥감 말입니다.”

아.

“첫날 페하께 보인 무례에 대해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이것을 폐하의 여흥거리로 사용해 주십시오.”

마허트 대사의 눈이 기대와 떨림으로 빛났다. 하나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아니, 부응은커녕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미세한 잠열이 끓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허트 대사를 괴롭히는 일은 내게 퍽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도 모를 그의 멍청함이 짜증 났다. 공녀가 자신의 역할도 모르는 채 끌려왔을 리는 없다. 그녀의 입술은 유령 성의 푸른 커튼처럼 퍼석하고 창백했다.

“정 필요 없으시다면, 하하… 여기 뛰어난 두 기사분들께 넘기셔도…….”

“닥치시오!”

툴드가 외쳤다. 그는 키올과 마찬가지로 보기 드물게 노한 낌새였다. 깜짝 놀란 마허트 대사가 뒷걸음질 쳤다.

안 그래도 대놓고 마허트 대사를 배척하던 분위기에 얼음물까지 끼얹어졌다. 조롱하기 바빴던 귀부인들도 하나둘 입을 닫았다. 꼭 일을 치르고서야 굳었던 머리가 풀리는지, 마허트 대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지를 무기 삼아 내 즐거운 사냥 시간을 망치다니. 작게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총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는…….”

대사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보통, 예정된 사냥 시간보다 반 시간 이르게 도착하지. 그리고 아무도 없는 너른 초원에서 새를 쏴. 단체 사냥을 시작하기 전의 그 고요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느끼고 싶거든.”

총은 평소와 달리 가벼웠다. 말했듯 손님들이 모이기에 앞서 짧게 맛보기 사냥을 즐겼기 때문이다.

“오늘은 두 마리를 잡았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단 한 발만으로 새를 명중시키는 나름의… 명사수라서.”

마허트 대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위가 얼마나 조용한지, 그의 침 삼키가 내 귓등을 울렸다.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두 마리를 잡았으면, 내 총에 탄환이 몇 발 남아 있을까?”

보통 제국산 수렵 총 탄창에는 최대 세 발이 들어간다. 그는 대답 없이 내 눈치만 봤다.

“응?”

한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대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폐, 페하께선 이름난 며, 명사수이시니 분명 한 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확신해?”

“무, 물론입니다.”

“경솔하구나.”

말을 끝내며 총구를 그의 이마로 향했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마른 모래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허억.”

비명은 없었다. 탄창이 텅 비었음을 증명하는 소음과 누군가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이 들렸다.

찰칵. 찰칵.

첫 번째 사냥에는 두 발을 쏘고 두 번째 사냥에는 한 발을 쐈기에 탄창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정도는 확인하지 않아도 손에 감겨 오는 무게로 느낄 수 있다.

하나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날 호위하던 툴드와 키올이 전부일 테다. 나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총을 거두었다. 마허트 대사는 밀랍 인형처럼 굳어서 꼼짝도 못 했다.

“틀렸네, 대사. 탄창은 텅 비었어. 제아무리 명사수라 해도, 그대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한 터라.”

비틀거리던 그의 몸이 땅 위에 엎어졌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들이켰으나 나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운이 아주 좋아. 내일도 그 명줄이 유지될지 궁금하네.”

엉거주춤 엎어진 그의 둔부가 축축하게 젖어 가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이 머리 쓸 줄 모르는 멍청한 여우보다는 문제 일으키지 않고 열심히 하녀 노릇 하는 밀레안 콘탄츠가 백배 나았다.

“공녀는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사냥감이 아니거든. 하나 그대는 다음 사냥에도 반드시 참석하도록 해. 이건 제안이 아닌 명령이야.”

다가온 시종이 내게서 총을 받아 갔다. 탄창을 채우기 위함이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시종에게 조롱이 만연한 투로 말했다.

“누가 이 가엾은 마허트 대사를 데려가 따뜻한 물로 좀 씻겨 주련?”

얼음같이 굳어 있던 분위기가 깨지고, 귀부인들이 깔깔대며 말 머리를 돌렸다. 마침 포슬포슬 내리던 이슬비가 거의 다 그쳐 가고 있었다. 나는 비가 완전히 멈춰 시종이 우산을 거둘 때까지 말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 가요, 황후 폐하! 저희 모두 폐하께 보여 드리려고 그간 사냥 연습을 열심히 했답니다!”

멀찍이 선 귀부인 중 누군가가 나를 향해 외쳤다. 나는 다시 묵직해진 총을 들고서 마허트 대사를 지나쳤다. 덜덜 떠는 공녀를 그 자리 그대로 둔 건 그녀에 대한 내 마지막 배려였다.

“울겠는데?”

“이미 울고 있어.”

“마허트 왕국의 망신이로군.”

울든 말든 나는 툴드와 키올의 사담을 들으며 초원을 내달렸다. 내일도 멍청한 짓거리를 하면 아예 후려갈겨야겠어.

***

신년회 기간 동안 열리는 오전 다과회는 황후의 의무 중 하나이다. 황후는 신년회 동안 외교관 및 타국 귀부인들과 사교를 쌓아 제국 국외 활동에 기여해야 한다.

그렇게 신년회의 막바지로 달려가는 5일째 다과회.

“오늘은 왜인지 너무나 뻔한 얼굴들만 보이는데.”

향긋한 꽃향기로 꽉 차 있던 다과실이 오늘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눈에 보이는 자들이라곤 이제 손님이라 칭하기에도 뭐한 제도의 귀부인들 그리고 극소수의 타국 손님이 전부였다. 불참하는 자들의 이유는 참 각양각색이었다. 음식이 입에 맞아 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탈이 났다, 장시간 여행을 한 탓에 몸살감기가 도졌다 등등.

“다들 그렇게 오기 싫었나?”

“저라도 안 올 것 같습니다만.”

가만히 서 있던 툴드가 작게 웅얼거렸다. 아쉽네. 보여 주려고 검은 털 모피까지 걸치고 왔는데.

“카론도 돌아가고 말이야. 황성에 사람은 많은데 나는 지루하기만 하구나.”

“제가 노래라도 불러 드릴까요?”

“무슨 소리를… 안 됩니다, 폐하. 툴드의 노래 솜씨는 돼지 멱따는 소리보다 듣기 흉합니다.”

오늘 내 장단을 맞춰 줄 사람은 툴드와 키올 둘뿐인 것 같았다. 다른 자들이야 내 관심 밖이라지만, 마허트 대사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한번 찾아가 볼까 고민도 했으나 그것도 그날뿐이었다.

남은 신년회 일정은 사건 사고 없이 아주 평화롭게 흘러갔다. 괴팍한 소문이 퍼진 탓인지 연이은 이틀 내내 본성은 고요하기만 했다.

귀부인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황제와 황후의 위엄에 눌려 몸을 낮추는 것이라 말했다. 카발 황실의 힘을 보였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기뻐하면서도, 종종 지루한 신년회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내가 너무 겁을 준 걸까.

그래, 생각해 보면 심하기는 했어. 가해자인 내 입장에서는 인간 사냥을 하자며 깔깔 웃어 댔지만, 듣는 이는 어떻겠는가. 아마 내가 살아 있는 악몽쯤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신년회의 마지막 밤.

소식조차 없던 마허트의 근황은 네자르의 입을 통해서 확인됐다.

“사실, 어제 마허트의 대사와 공녀가 귀화를 요청했었어.”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귀화? 이렇게 갑자기?”

나 때문에? 아니면… 애초부터 귀화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괜히 겁을 준 건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었기에 어리둥절했다.

그간 왜 이리 조용한가 했더니 마땅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한데 그 이유가 귀화였을 줄이야.

“왜인지는 몰라도 겁을 많이 먹은 상태야. 예상대로 황실에 접근한 데는 그만한 속셈이 있었고, 왕국 내부 사정까지 전부 밝히며 사정사정했어. 마허트 왕국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달라더군.”

“왜 바로 말 안 했어?”

네자르가 작게 웃으며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안 그래도 오전마다 다과회를 열기에 바쁘잖아.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아휴. 그렇게 말해 봤자 손님이라곤 맨날 함께 놀던 그 무리가 전부였는데. 괜한 민망함에 목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네자르가 응접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며칠 내내 외교관들과 술을 퍼마신 탓인지 눈 밑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미안해, 네자르. 네자르가 열심히 국익을 위해 일하는 동안 나는 황실의 악명만 퍼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악령이라도 깃든 줄 알았지 뭡니까.”

마찬가지로 퀭해 보이는 론이 중얼중얼 느낀 바를 읊었다. 그 학대는 아무래도 내가 준 듯싶었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학대.

“여러모로 예상외였습니다. 물론 겁먹은 상태로 찾아온 탓에 마허트의 왕실 상황을 파헤치기는 쉬웠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신뢰가 가지는 않아. 당분간 지켜봐야겠지.”

과연 갑작스러운 행동일까.

그간 내가 마허트 대사에게 보였던 일련의 행동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가 공녀를 이끌고 참석했던 며칠 전의 사냥도.

“오늘 밤은 중요한 일이 오갈 거라, 새벽에나 들어갈 거야.”

“아, 응. 너무 무리하지는 마.”

나를 가볍게 껴안은 네자르가 툴드와 키올을 향해 말했다.

“혹시 모르니 오늘 밤은 확실히 지켜라.”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후, 네자르는 나와 몇 가지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론에게 끌려 사라졌다. 대강의 분위기만 봐도, 사건 사고 없이 잘 마무리되는 신년회에 안심을 한 모양이었다.

“저는 대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말입니다.”

꼭 한마디씩 덧붙이지. 네자르를 배웅하고 돌아온 툴드가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황후 폐하. 제국 평화에 크나큰 공헌을 하셨군요! 처음에는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했지만… 그 모든 게 국가 보안을 위한 일이었다니! 과연 황제 폐하의 선택을 받은 분다우십니다.”

이게 공헌한 거야? 나는 더없이 찝찝한 얼굴로 키올을 흘겨봤다. 얼굴은 진지한데 말하는 게 꼭 비꼬는 것 같았다.

“그럼 내일로 잡아 놓은 인간 사냥은 취소할까요? 콘탄츠 소백작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이미 한 번 당해 봐서 그런지 사형 일자라도 정해진 표정이더군요.”

툴드는 인간 사냥이란 별칭이 퍽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며칠 내내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인간 사냥 타령을 하는 걸 보면.

나는 등불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천장을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니, 취소하지 마.”

마허트 대사 덕분에 깨달았거든. 바보들은 제대로 겁을 줘야 정신 차린다는 걸.

그래, 뭐. 네자르도 안전하고 나도 안전하고 황실도 안녕하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도 마허트 대사를 정말 찾아가 봐야 하나. 아니지, 대사를 찾아갈 필요는 없을 테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건 대사와 공녀 중에서 공녀밖에 없을 테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내일 일정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신년회 마침

열아홉의 그대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물병자리, 아이가 없는 몸, 귀한 신분, 눈에 띄는 미인.”

드세던 추위가 지나가고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나는 요상하게 구겨지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필프론츠 후작을 노려봤다.

겨울이 끝물을 보이는 시기. 날씨도 좋다 싶어 가까운 이들과 담소를 나누다 사냥을 나선 지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오늘 내내 눈에 띄게 진지한 얼굴이었던 필프론츠는, 만난 지 다섯 시간 만에 고작 저 소릴 내뱉었다.

평소 되도 않는 소릴 잘하는 작자라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카론은 남편이 요즘 이상한 취미에 빠진 것 같다며 편지를 통해 우려를 표했었지. 설마 사이비 종교에 귀의라도 한 것일까.

“오드리네 남쪽 성벽에 아주 유명한 점쟁이가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종종 찾아가 조언을 구하던 아주 괴팍한 노인네죠.”

그래서 어쩌라는 시선으로 후작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노인네가 제게 말하더이다. 물병자리, 아이가 없는 귀한 몸, 눈에 띄는 미인. 주위를 조심하지 않으면 오늘 아주 큰 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래서, 지금 그 큰일이 날까 봐 다섯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단 거예요?”

“제가 물병자리의 미인이기는 합니다. 한데 아이가 없지는 않지요.”

그래서 지금 사기당했다며 시위라도 하는 걸까. 필프론츠 후작은 전쟁이라도 선포하는 양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는 물병자리이시고, 귀한 신분이며, 제 부인만큼은 아니지만 제국에서 유명하지 않으십니까.”

무섭기는커녕 어이가 없었다.

“나 참… 경고를 할 거면 좀 일찍 해 주든가. 지금 해 다 넘어갔거든요?”

“원래 점이란 건 입에 담는 순간 예정에서 운명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입 닫고 노심초사하며 뒤를 봐드렸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지금은요?”

“전 이제 오드리네로 돌아갈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더 이상 지켜 드릴 수 없으니 조심하시라 말씀드리는 거지요.”

“입 밖으로 내뱉으면 예정이 아니라 운명이 된다면서요?”

“폐하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카발 황실의 안주인이시잖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카발 황성이니, 최악을 차악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은 참 청산유수야.”

되도 않는 소릴 진지하게 하니 웃겼다. 나름의 경고를 마친 필프론츠 후작은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고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탁탁탁. 무슨 짓거리인가 싶어서 말리지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어깨를 세 번 두들기는 건 액운을 물리치는 데 꽤 유용합니다. 특히 별자리가 같은 사람이 두들기면 효과가 두 배로…….”

“입 닫고 빨리 오드리네로 사라져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저렇게 호들갑이니, 없는 액운도 몰려올 느낌이었다. 괜스레 몸이 무거워진 듯한 착각이 들어 그가 두들긴 어깨를 털어 내고 말 머리를 돌렸다.

날씨와 더불어 근래에 가장 화창한 기분이었는데, 까만 잉크를 뒤집어쓴 기분이 든다. 아닌 척해도 나는 나름 이성보다 감에 의존하는 사람이었다.

내 불행의 징조를 되새기면 마냥 우연이라 여기기에는 꽤 그럴싸한 일들이 잦았다. 돌연 고양이가 죽는 꿈을 꾼다거나, 아껴 사용하는 찻잔에 금이 간다거나, 한창 물놀이를 하다 호수 바닥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거나.

항상 기분 탓이라 여기다가도 결국 일이 터지고 나서는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어.’라며 혼자 자책하곤 했다.

점쟁이의 점 따위는 큰일이 아니다. 다만 그 헛소리를 들은 더없이 찝찝해진 내 머릿속이 문제였다. 그래도 찻잔이 깨진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니겠지.

한데 아무래도 별거가 맞았던 모양이다.

“역시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과도한 물리적 충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죠, 인피르노 경?”

“예, 폐하는 평소와 똑같으셨습니다.”

의원의 물음에 대답하는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 침울하고 절망스럽다. 덩치도 산만 하면서 건드리면 눈물을 투둑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에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어떻게 똑같았어?”

내 귀로 들리는 내 목소리는 내 심경만큼이나 착잡했다.

“새벽에 일어나 업무를 보시고, 황후 폐하와 아침을 드신 후 업무를 보시고, 황후 폐하와 점심을 드신 후 업무를 보셨습니다.”

“며칠 동안?”

자책이 내려앉은 눈꺼풀을 깜빡이며, 인피르노가 대답했다.

“신년회 이후로 계속 그러셨습니다.”

“흑, 흐흑… 다 제 탓입니다. 제가 그렇게 폐하를 닦달하지만 않았어도…….”

그 누구도 다그치지 않았는데 론이 앓는 소리를 내며 벽에 머리를 찧었다. 아무래도 네자르의 상태가 온전히 자신의 탓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 다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해. 머리 아프니까.”

그렇다고 해서 네 탓이 아니라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좋게 생각하려 해도 론의 닦달이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틀림없었으니까. 네자르가 제아무리 일중독이라 하여도 쉴 때는 쉰다. 다만 그의 책임감이 휴식을 향한 욕구보다 큰지라, 금붕어 똥처럼 쫓아다니며 이것 봐 달라, 저것 확인해 달라 요구하는 론을 내치지는 못한다.

물론 론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늘 그렇듯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니까.

“크흡. 흑, 흑… 죄송합니다!”

“그만 울고 진정하십시오, 론 님.”

아니, 여기서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론이 아니라 나인데.

“일단… 모두 나가.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어. 내일 예정된 회의도 모두 취소하고, 연유를 물으면 알아서 대충 둘러대. 오늘 일은 절대 입에 올리지 말도록.”

“예…….”

론과 인피르노가 어깨가 축 처진 채로 응접실을 나갔다. 가정사로 잠시 자리를 비운 키올이 돌아오면 저런 반응을 보이겠지. 나는 멍하니 소파에 기대어 침실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을 네자르를 떠올렸다.

“어떡하지.”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만, 네자르가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뭐?’

‘업무 도중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셨는데, 평소와 너무 다르셨습니다. 처음에는 폐하께서 절 놀리시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란다.

인피르노와 눈이 마주쳤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한데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며 방을 훑는 네자르의 시선이, 마치 딴 세상에 떨어진 양 선명한 의문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며칠간 검토하던 서류를 말없이 한참 동안 뒤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켜 집무실을 나갔고, 정원을 돌보던 하녀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지?

황제 폐하이십니다.

이곳은 어디지?

황성의 본성입니다.

황태후는 어디 있지?

오드리네에 계십니다.

턱을 쓸며 고민하던 네자르는 곧 지체 않고 침실로 안내받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이불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더럽게 현실 같은 꿈이네. 전쟁으로 떠날 때가 되니 정신머리가 약해진 건가. 라는 감상과 함께.

그게 인피르노가 내게 고한, 무려 20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의사가 나와 함께 증상을 전해 들었고, 최악은 아니라는 듯 묘한 얼굴을 보였다.

‘옥체에는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 앞으로의 일은 저도 예측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기억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니까요. 지난 7년의 기억을 평생 잃은 채 사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래 그것으로 됐다’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널뛰거나 불안한 마음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는커녕 심장 박동이 차분해졌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죽을병은 아니라고 하지 않은가? 내 어깨를 두들기고 간 필프론츠 후작에게 넙죽 엎드려 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나 마냥 안도했던 것도 아주 잠시의 일.

“열아홉의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그때의 네자르는 어떤 인물이었더라? 머릿속이 복잡해서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내 눈빛을 읽은 툴드가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단하셨죠.”

첫 번째, 대단했다.

“저는 곧 죽어도 황제 폐하처럼 못 살았을 겁니다. 몸이 세 개여도 부족했을 거예요. 나이답지 않은 통찰력과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재능, 노력… 정말 모두가 그분을 좋아했습니다. 그분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전 황태후가 유일했을 정도니까요.”

듣는 내가 낯부끄러워지는 묘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또래와 달리 무척 성숙한 분이시라 여겼습니다. 폐하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돌이켜 보니 마냥 그러하지도 않으셨던 것 같네요. 지금보다 훨씬 더 장난기도 많고 감정적이셨으니.”

“나는…….”

툴드가 운을 떼 준 덕분일까. 흐릿했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사실 기억이라 해도 별것 없다.

외국어를 5년간 배워도 어떻게 회화의 기본조차 못 떼냐며 혼났었고, 내가 이딴 공부 안 해 먹는다며 빼액 소리치는 날 밤에는 어디서 무서운 이야기를 알아 와 밤새 이불 밖으로 못 나가게 만들었었다.

과제를 다 해 놓지 않으면 자길 평생 못 볼 거라며 으르렁거리기도 일상이었다. 나 역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꾸역꾸역 하라는 대로 맞춰 가기는 했었다. 그때 억지로 삼킨 파프리카 수만 헤아려도 욕조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였으니. 어릴 때는 파프리카를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나는 괴롭힘당한 기억밖에 없어.”

툴드가 메마른 음성으로 허허 웃었다. 웃기겠지. 내가 혼나는 모습을 나 모르는 곳에서 몰래몰래 봐 왔을 테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저희, 너무 진지한 거 아닙니까? 일에 너무 지쳐서 잠깐 혼동이 오셨던 걸 수도 있잖습니까. 잠에서 깨어나시면 보란 듯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실 겁니다. 전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다면야 더없이 좋을 거야.”

일단 증인이 인피르노라는 점에서 타당한 추측이라 볼 수 있었다. 네자르와 관련된 일에서 유독 흥분하는 일이 잦으니까.

끼익.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소음에 몸이 절로 움직였다. 근방에서 열릴 문이라곤 황제의 침실이 전부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복도에는 이제 막 문을 닫고 돌아선 네자르가 서 있었다.

“폐하.”

누구의 부름이었을까. 나? 아니면 툴드?

우릴 돌아본 네자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롭고 평온한 자태였다. 다만 신년회 이후 늘 반듯했던 차림이 다소 흐트러진 상태였다. 복도에는 겨울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침묵이 이렇게나 길게 느껴질 수 있다니.

다가온 네자르가 미간을 미세하게 구긴다. 그의 눈빛에 떠오른 감정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에젤로트 부인?”

그리고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마, 지금 날 어머니로 착각한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한 것 같군요. 어이, 툴드, 이 숙녀분은?”

바로 옆에 선 툴드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엄한 황제 폐하의 물음임에도 그는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로 살며시 허리를 숙이며, 그 어느 때보다 작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께서는 7년 전에도 충분히 영민하셨으니, 만인지상 황제라는 지위에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때인가.

“넌 눈치를 좀 키워야 해, 툴드.”

인피르노의 말이 맞았다. 카발 제국의 황제,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서.

***

네자르가 날 못 알아봤다.

아니, 못 알아본 것으로 모자라 어머니로 착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에젤로트 부인은 너무한 거 아닌가? 내 나이 열다섯 때 우리 어머니는 마흔이 조금 안 되는 나이셨는데. 아직 애도 안 가진 상태에서 서른 후반의 유부녀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그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파란만장한 추억들이 잊힌 것도 서러운데…….

“……해서, 폐하. 지금 당장 믿기는 힘드실 테지만, 지금은 제국력 584년이며, 폐하께서는 카발 제국 스물세 번째 제위에 오르셨습니다. 현재 폐하의 연세는 열아홉이 아닌 스물여섯입니다.”

네자르가 일어난 후, 기다렸다는 듯 론, 의원, 브레이트 경, 아버지가 들이닥쳤다. 특히 아버지는 고작 하루 동안 황제의 부재를 대신했을 뿐인데도 눈 밑이 푸르렀다.

의원이 차분한 어조로 네자르에게 현 상황을 설명했고, 우리의 시선은 모두 그를 향한 채였다. 다들 눈앞의 네자르가 스물여섯의 그와 무엇이 다른지 알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웃기는군. 내 눈에는 그리 변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리하여 무엇이 다른지 찾아냈냐면, 그래, 솔직히 말해서 무시하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 만큼 많은 부분이 달랐다. 당장 귓등을 강타하는 목소리부터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조각배를 흔드는 얕고 섬세한 파도는 어디로 가고, 차갑게 얼어 잘 벼려진 얼음 파도만이 남아 있었다.

널따란 응접실의 유리창 앞에 선 네자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저 분수 정원의 분수와 운하를 전부 부숴 버리고 싶었거든. 폐하께서 배 위에 올라 어린 여자들과 추잡한 짓거리를 할 땐 특히 더. 한데 내 치세가 2년에 다다르는데도 멀쩡하다니.”

네자르가 살짝 이를 보이며 웃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낯설고도 어려운 웃음이었다.

“나한테 꽤 실망스러운데?”

“……물론, 현 상황에 적응하시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리라 생각됩니다. 폐하의 상태는 현재 극비에 부쳐 둔 상태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원과 필프론츠 후작, 엔테라 공작 등 극소수에게만…….”

“알겠다. 일단 전부 나가 봐.”

열심히 네자르를 안심시키던 론의 얼굴이 멍하니 풀렸다.

“예?”

“나가라고. 큰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오순도순 모여 있으니 머리만 더 복잡하잖아. 아, 내 부인 되시는 분은 제외하고.”

큰일 맞다. 황제가 기억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일이 얼마나 있다고.

말과 함께 네자르의 시선이 짧게 내 낯에 머물렀다. 여유보다는 선명한 적색의 생동감이 넘치는 표정. 늘 보는 얼굴임에도 이상하게 심장이 울렁이는 기분이다.

“론.”

“예, 예?”

“……아니야. 나중에 물을 테니까 빨리 나가.”

네자르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비척비척 일어서 응접실을 벗어났다. 마지막까지 내 눈치를 살피던 툴드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응접실에는 적막감이 맴돌았다.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네자르는 선 자세 그대로 팔짱을 낀 채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말 그대로 샅샅이 살피는 통에 나는 시선을 돌리기도,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어려웠다. 더불어 옅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 날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라는.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너무 서운함을 느끼지 말아 줬으면 싶은데. 알다시피 내가 지금, 정상인 상태는 아니잖아?”

“정상이 아닐 건 또 뭐예요? 그냥 기억을 조금 잃었을 뿐인데.”

네자르는 대답하지 않고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눈에 힘을 꽉 주고 정면에 앉은 그를 응시했다. 승전을 축하하던 연회에서 네자르가 날 알아보지 못했던 그 순간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름이 뭡니까, 황후?”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기왕이면 성과 미들 네임까지 합쳐서… 솔직히 나도 지금 꽤, 아니 많이 당황한 상태라서.”

“네?”

“하아. 다른 여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설마, 심지어 안면도 없는 여인일 줄은 몰랐는데……. 앞서 말했듯 서운해하지는 말아 줬으면 싶군요.”

생각해 보니 너무 당황한 상태로 앉아 있느라, 의원이 오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왜냐고? 당연히 알아보리라 생각했으니까!

서러움과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고작 그깟 7년이 사라졌다고 날 못 알아보는 네자르때문에 서러웠고, 정말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현실감에 슬펐다.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겨우 참고 따지듯 되물었다.

“어떻게 안 서운할 수 있겠어요? 그런 말을 하고도 폐하가 사람이야?”

그의 표정이 조금 오묘해졌다. 나는 시큰해지려는 코를 삼켰다.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발이요. 설마 카트리나도 모르는 건 아니겠죠?”

풀어진 표정은 눈속임이었다는 듯, 네자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놀라서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턱을 쥐어 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일체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이냐?”

손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나워진 검붉은색 눈동자가 날 노려본다. 열아홉의 네자르는 이렇지 않았는데. 낯선 그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케이트였다면 지금 상황에 놀라서 울고불고 난리 났을 거야. 일곱 살 더 먹는다고 변할 성정이 아니지.”

저 생각해서 꾹 참았던 직전의 선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스물여섯의 난 사람 가리지 않고 물렀던 모양이야. 별 시답지 않은 거짓말로 날 안심시키려 하는군. 아니면, 혹시 지금의 카발에는 황후가 없나? 본성에 황후가 아닌 여인이 들어왔다라.”

내 턱을 천천히 놓으며 그가 물었다.

“혹시 내 정부냐?”

정부? 저엉부? 순간 제어 못 할 화가 눈앞으로 확 쏠렸다.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런 게 있으면 지금 여기에 멀쩡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아?”

네자르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그는 턱을 괸 채로 다시 한번 나를 살폈다.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봐?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상태라 보란 듯이 고개를 틀어 주었다.

“확실히… 세세히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많기는 해.”

그야 본인이니까 그렇지!

심신이 급격히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점은 확실했다.

열아홉의 네자르는, 지금의 네자르보다 훨씬 더 거칠고 의심이 많았다. 그것도 보통 많은 게 아니라 굉장히 많이. 온 힘을 다해서 무어라 열변을 토해도 의미 없는 쓰레기만 쌓여 가는 기분이다.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인정하고, 신뢰하는 건가.

네자르의 감상이 옳아. 예전에 비해 지금의 그는, 확실히 물러졌다. 적어도 지금의 네자르는 눈앞의 네자르처럼 본인 할 말만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됐어. 누구인지는 가계도를 살피면 알게 될 테니까. 그래야 이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감도 되돌아올 테고.”

물론 그가 이리도 공격적인 데는 급변한 환경의 탓도 더러 있을 테다. 불안감이 겉도는 나지막한 음성이었고, 동시에 흥분 상태였던 내 머릿속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네자르는 기억을 잃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그의 머릿속에서 지난 수년의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제국이 황제를 잃어버렸다는 점이지.

말과 달리 네자르는 곧장 황실 서재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응접실을 크게 한 번 살피다가 실내를 벗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따라가야 하나. 따라가야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네자르 따위와는 같이 있기 싫은데.

“뭐야.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어서 안 따라와?”

예상하지 못한 역정에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뛰어 까만 뒤통수에 착 달라붙었다. 하긴, 익숙하고도 낯선 황성에서 안내자 한 명쯤은 필요하겠지. 그리 생각하자 가슴속 화가 더 펄펄 끓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네자르는 걷는 내내 딴짓하기에 바빴다. 밖으로 향하는 동안 통로에 걸린 그림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폈으며, 심지어는 커튼의 패턴마저 유심히 확인했다.

“확실히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는 변했어.”

설마 7년 전 본성의 모습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건가. 믿기 어려웠지만 네자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예민한 성격 자체가 그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니까.

그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운하 옆의 분수 정원을 걸었다. 겨울이라 볼 것이라고는 동백나무와 시클라멘처럼 붉은 꽃들 천지였다.

“이걸 얻으려고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결국 얻긴 얻었나 보군.”

표현하기 힘든 긴 여운이 담긴 음성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면만 응시하며 걷던 그가 돌연 뒤돌아 내게 물었다.

“선황 폐하는 어디 계시냐.”

역시. 왜 안 물어보나 했지.

“타계하셨어.”

“그런가.”

다시 앞서 걷던 네자르가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전쟁은?”

“승전했으니 폐하가 폐하일 수 있는 거잖아.”

“뭐, 그것도 그렇지. 생긴 거랑 달리 똑똑하네.”

그야 생긴 대로 살 뻔한 머리를 네가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잘 생각해 보면 칭찬이기는 칭찬이었는데, 내가 왜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 네자르 탓인가. 굳이 탓하자면 죽자고 네자르를 괴롭힌 론 탓이지.

안 그래도 적응하기 힘들 텐데, 그에게 신경질 부리고 싶지 않았다. 화, 울분, 서운함, 슬픔 등 갖가지 감정이 날뛰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메마른 흙바닥을 내려다봤다. 한데 너무 긴 시간 가다듬고 있었던 걸까. 정신을 차리니 저 앞으로 훌쩍 가 있던 네자르가 코앞에 서 있었다.

“뭐 하냐?”

눈물이 핑 돌았다. 네자르를 알고 나서 그에게 이런 냉대를 받는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론의 말대로 정말 내게만 상냥했던 거구나. 그럼 뭐 해? 쓸데없이 의심만 많아서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대체 나는 왜 자꾸 끌고 다니는 거야? 어차피 카트리나인 걸 믿지도 않으면서.”

우습게도 열아홉이 된 네자르를 따라 나 역시 열다섯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감정을 담아 노려보자 그가 싸늘한 낯으로 되물었다.

“끌고 다녀?”

어이없어도 한참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끌. 고. 다. 녀?”

내가 반말했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왜 끄, 끌고 다니세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눈치 봐 가며 높임말을 해 주니 굳혔던 표정을 푼다. 역시 반말이 문제였구나. 이렇게 보니 사춘기 소년이 따로 없었다. 말 몇 마디에 기분이 오락가락한 걸 보면 그냥 사춘기도 아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직격으로 맞은 사춘기인 듯했다.

“황실 서재로 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런 데에 기죽으면 카트리나 에젤로트란 이름이 아깝지. 나의 물음에 네자르가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그건 급한 일이 아니야. 가계도는 언제든 확인할 수 있지만, 이 기분은 지금이 아니면 못 누리니까.”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무덤덤해 보인다. 몇 분 전까지 표정, 어투, 행동 모두가 예민함의 극치를 달리던 네자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로 드넓은 호수를 감상하고 있다.

이게 아닌가.

“허무하세요?”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잠시간 묵묵히 서 있던 네자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보이나?”

“사실 반쯤 찍었어요.”

“반은 그리 보인다는 말이로군.”

“폐하라면 충분히 그러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원래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길치인 경우가 더 많아요. 정해 둔 이정표가 사라지면… 망망대해에 떨어진 것처럼 갈피를 못 잡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가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는 수면 위로부터 시선을 뗐다. 힐끔 내 얼굴을 향하려던 그의 시선이 채 시선이 맞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증발했다.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아는구나.”

“그러니까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폐하가 조금 더 멍청해지는 건 제가 감당할게요. 제가 그만큼 더 똑똑해졌거든요.”

“음. 신뢰가 가지 않는 발언인데.”

“그래 봤자 폐하에게는 선택 사항이 없어요. 장담하는데 당장은 제가 폐하보다 아는 게 더 많을걸요?”

“입이 뚫려 있으니 정말 아무 말이나 편하게 지껄이는구나. 이 운하에 빠뜨리면 입술만 둥둥 뜨겠어.”

방금은 진짜 네자르와 대화하는 기분이라, 그의 너른 등을 꽉 껴안을 뻔했다. 실제 지금도 못 껴안을 이유는 없지만… 그냥, 좀. 마구 들이대다가 거부당하면 또 마음이 상할 것 같으니까.

그는 이후에도 한참을 호수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안 그래도 추운데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나온 네자르가 걱정됐다. 마침 무료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에 본성으로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기 보이세요? 필프론츠 후작이 왔어요. 폐하의 상황을 듣고 오드리네에서 급히 입성했나 보네요.”

“급하긴 급하겠지. 제 밥줄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는데.”

드디어 그가 호수에서 몸을 틀어 본성으로 향했다. 아우, 추워 죽는 줄 알았네.

분수 공원을 지나올 때와 달리 네자르는 내 걸음 폭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날 배려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감명받다가도 면식 없는 여자에게 이 정도는 해 주는구나, 싶어 괜히 질투심이 일었다.

설마… 나한테 반해서 잘해 주는 건 아니겠지? 한데 지금의 네자르가 나에게 홀라당 넘어온다면 기뻐해야 하는 걸까, 서운하게 여겨야 하는 걸까.

“폐, 폐하!”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지, 성 내부로 들어가려던 필프론츠 후작이 후다닥 달려왔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네자르의 전신을 살피던 그는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폐하, 이런 식으로 나이 먹은 사람한테 장난치면 안 됩니다.

“장난?”

“아무리 제가 오드리네에 처박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이런 거짓말로 불러내시면 어찌합니까? 그래도 어제는 황후 폐하의 티파티에도 참석했는데!”

“황후의 티파티에 후작이 왜 참석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후작에서 후작 부인이라도 된 건가?”

“또 물어보십니까? 그야 임신으로 쉬이 못 움직이는 제 부인이 살롱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좋아라 하기 때문이죠.”

“아주 좋아 죽는군그래. 한때 여자 다섯을 동시에 꼬시던 그 필프론츠 오드리네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언제 적 이야깁니까? 폐하도 참 너무하십니다. 자그마치 7년이나 된 이야기를 아직도…….”

필프론츠는 제가 말하고도 뭔가 이상했는지, 하던 말을 멈추고 곧장 입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힘겹게 닫은 입을 쩌억 벌렸다.

“정말 기억을 잃으신 겁니까? 폐하, 아니 네자르 전하……?”

“폐하라고 불러. 역시 그쪽이 더 듣기 좋아.”

네자르가 딱히 잘못한 것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보다 더 뻔뻔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하긴, 스물여섯의 네자르가 그렇게 능글맞은데 열아홉의 네자르라고 안 그러겠어?

“아, 안 됩니다!”

대륙의 종말을 관측하듯 과장되게 표정을 구긴 후작이 네자르의 팔을 잡아챘다.

“이거 놔. 무거워.”

무정한 반응이었으나 필프론츠가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안 된대도요!”

“아 글쎄, 뭐가?”

“기, 기억을 잃으신 것 말입니다.”

이거, 약간 어릴 때 나랑 네자르가 나눈 대화 같은 느낌인데. 바보 같은 내 화법을 인내심 있게 들어 주는 네자르, 이런 느낌? 아니나 다를까, 네자르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거두었다.

“기억을 잃어도 괜찮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폐하는 더, 더 안 됩니다! 북벌전의 폐하는 나뭇잎 구르는 것만 봐도 버럭 역정을 낼 만큼 성정이 어마무시하셨단 말입니다. 세상에, 신이시여. 제국에 평화가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시련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물론 우리 네자르가 좋게 말해도 성격이 천사 같은 편은 아니지. 그래도 아카데미에 가면 좋다고 반기는 후배가 한 무리였고, 평생의 업적이라며 자랑스러워하던 스승들도 태반이었는데! 그래도 부인이라고, 울컥 화가 났다.

“어딜 폐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요? 확, 황족 기만죄로 법정에 세울까 보다. 성정이 어마무시하기는 무슨. 열아홉 때도 우리 네자르 좋다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크흠.”

스무 살 때 네자르를 따라 아카데미를 방문했던 때도 어미 새를 따라다니는 새끼 새처럼 재학생들이 졸졸 쫓아다니지 않았는가.

“폐하,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때 필프론츠의 등 뒤로 익숙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본 네자르가 하나도 새로울 것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야. 아주 판박이 수준이네. 짐이 뭐라고 부르면 되지?”

“……아, 그냥 판시온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공작 각하가 되었나 보군. 축하해. 아니, 한참 전에 이루었을 테니 축하할 것까진 없나.”

“모두 폐하의 은덕입니다.”

“그렇겠지.”

어쩜 평소 대화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하나 없을까. 여느 때와 같은 둘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러웠다. 정작 일생의 반려인 나는 못 알아봐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런 네자르의 모습이 불안했던 걸까, 판시온의 표정은 외줄 타기 하는 갓난아이를 보는 양 썩 좋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미풍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성정이긴 해도 냉철할 땐 그 누구보다 냉정한 그이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기에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는 아주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 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보시다시피 폐하께서는 기억을 잃으셔도 폐하라서.”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안도한 얼굴을 했다.

“당장 닥친 회의야 미룬다고 해도, 그다음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내가 대신해도 되지만,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하게 냅두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충분히 이해 갑니다.”

백번 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는 판시온과 달리, 네자르는 무언가 찜찜한 기색이었다. 깊이 생각하는 눈으로 판시온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는 시선.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이상하지. 착각이 아니라면 어째 나보다 너를 더 신뢰하는 것 같은데.”

그럼 당장 기억을 잃고 열아홉 살 때처럼 구는 그쪽을 신뢰할까.

“함께 죽고 함께 살자고 했을 짐을 두고?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굳이 마음에 안 들 이유도 없는데 왜… 도통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안 드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의심의 네자르 아니랄까 봐. 얼마나 정도가 심하면 본인이 의심하는 이유도 헷갈려 한담.

그런 네자르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하던 판시온이 거리낌 없는 투로 되물었다.

“질투하십니까?”

장담하는데 네자르보다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질투? 나는 절로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하고 판시온을 올려다봤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네자르의 음성은 한밤에 태양이라도 본 양 어이없음의 극치를 달렸다.

“재미없다 못해 당혹스러운 농담을 하는군. 그새 유머가 많이 는 모양이야.”

예상한 반응임에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예전의 그였다면 능글맞게 받아쳤을 텐데. ‘알면서 그런 식으로 군단 말이지?’라는 투로.

“전 이미 정식 혼인을 앞두고 있는 몸입니다. 괜한 걱정 마십시오.”

“1절만 해. 난 카발 제국의 국가도 1절만 불러. 아마 대관식에서도 1절만 불렀을걸.”

그런 점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긴 하다. 일단 대관식에서 국가를 1절만 부르기는 했으니까. 네자르의 정색에 판시온이 진중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부끄러우시다면야.”

그렇게 평소처럼 가벼운 대화가 마무리되려는데, 네자르의 표정은 여전히 애매했다. 끝까지 한마디 덧붙이려는 건가. 설마 판시온이 농담처럼 붙인 저 ‘부끄러우시다면야’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건가.

“뭔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늘 그렇듯 설마는 역시였다.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앞머리를 넘기며, 네자르가 내게로 시선을 홱 돌린 것이다. 저 떨떠름한 얼굴을 봐선 가만히 있던 판시온이 아니라 내 쪽이 봉변당할 분위기였다.

“얘, 내 취향 아니야.”

그리고 그 한마디는 내 인내의 마지노선을 무참히 부서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까.

흥분으로 심장이 쿵쿵 뛰거나 울분에 얼굴이 뜨거워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시야가 맑고 머리는 차가웠으며 가슴은 평온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미안하지만, 이 자리에 1초라도 더 서 있으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황제 폐하. 그리고 판시온 공작.”

이 한마디를 열기까지의 정적이 길었는지, 아니면 찰나처럼 짧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부정적인 감정이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릴 숨기기 위해 재빨리 입을 닫았다. 네자르가 선 방향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으면서.

“황후 폐하.”

그런 날 붙잡은 건 네자르가 아닌 판시온이었다. 이처럼 당황하는 얼굴의 그는 꽤 오랜만이었다.

“그,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하나 판시온이 내 짜증을 감당할 이유는 없다. 네자르라면 모를까. 본능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심정을 억제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누군 눈이 없는 줄 알아요? 그 정도는 나도 보여요. 아아, 됐고……. 난 들어갈 테니 두 분이서 옛이야기를 나누든 칼질을 하든 알아서 하세요.”

“……잠깐.”

얼마나 악력이 세면 몸이 뒤로 확 젖혀질 정도였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네자르 본인도 놀란 듯 급히 손을 놓았다. 하나 자유가 된 몸은 몸을 돌리려던 차에 다시 잡히고 말았다. 나는 힘 조절도 못 한 채 손목을 꽉 잡아당겼다.

“놔요. 손가락 부러뜨리기 전에.”

그리고 보란 듯이 손을 털었다. 어느 때보다 매정하고, 차갑고, 난폭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악감정이란 악감정은 모두 다 담아서.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속이 시원해질 리 없었다. 나는 평생의 원수를 대하듯 원망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네자르를 노려봤다.

“아니면 다른 쪽을 부러뜨려 줄까?”

이건 좀 낫네. 나는 애먼 타인 앞에서 추태를 보였단 것도 잊고 계단에 올랐다. 사뿐사뿐 걷고 싶었는데 구두 소리가 왜 그리 퍽퍽 울리던지. 침실에 도착했을 때는 직전의 속 시원한 기분이 착각이었다는 듯 빠른 속도로 우울해졌다. 동시에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순식간에 7년을 잃어버린 네자르인데. 기댈 사람이라곤 나 하나가 전부일 수도 있는데.

“열아홉의 네자르, 재수 없어.”

그래, 이제야 기억이 선명해졌다. 당시의 네자르는 자기 마음도 제대로 파악 못 하는 멍청이 중의 멍청이였다는 걸.

***

작년 가을. 제도에서 한창 유행하던 극이 막 끝물을 달리던 시기. 나는 매일같이 극단주의 정성 어린 편지를 생각해, 네자르와 함께 황성을 나섰다.

극을 관람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줄거리는 크게 특별할 것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손수건을 쥔 채 훌쩍이는 여인들 사이에서 오직 우리만 아무렇지 않았을 뿐.

‘어땠어?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는 정말 별로였거든. 어쩜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게 뻔할 수가 있지?’

나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감상을 쏟아 냈다. 사람들 앞에선 그놈의 고고한 황족 노릇을 하느라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데, 마차 안은 적어도 네자르와 나 둘뿐이라 자유로웠다. 아니나 다를까,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던 그가 내 어깨에 뺨을 비비며 불평했다.

‘하품이 나올 정도의 지루함 그 자체였지. 참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사실 반쯤 존 거 같아. 네가 실망할까 봐 진짜 졸지는 못했지만.’

내 핑계란 핑계는 다 대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터진다. 네가 바라는 대로 시간 내서 나왔으니 이 정도 투정은 받아 줘라, 이건가. 미안해서라도 안 받아 줄 수 없지. 그의 정수리에 편히 머리를 기댔다. 종일 붙어 있어서 그런가, 그에게서 내가 사용하는 향수의 향이 났다.

‘실망이 아니라 본인 이야기가 나와서 못 잔 거 아니야?’

‘……본인 이야기?’

되묻는 음성에는 의문보다 당혹감이 짙었다.

‘설마 저 각본 작가가…….’

‘나일 리 없지. 저런 건 이 근처를 이 잡듯 뒤지면 스무 번은 나올 흔한 이야기야. 우리만 느꼈던 은밀한 경험 같은 게 아니라구.’

우리가 관람한 극의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이 가능했다.

「운명의 연인, 시련을 딛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다.」

문제는 그 시련들 중에서 눈에 익숙한 장면이 참 많았다는 점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끝까지 서로의 마음을 부인한다든지, 죽어도 먼저 고백하지 않는다든지.

‘부인 안 해? 양심에 털은 안 난 모양이네.’

흠흠.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른기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본래 운명적 사랑에는 장애와 시련이 많은 법이지.’

‘그 장애와 시련을 본인이 쌓아 올린 게 문제잖아.’

모르는 척 눈을 감는 얼굴에 낭패가 서려 있었다. 그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평정심을 잃고 조용히 흔들린다. 열심히 잠든 척하던 네자르는 한참이 지나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만하시오, 황후. 구질구질하게 우리 이러지 맙시다.’

‘왜 그랬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그 낯이 아니꼬워서 더 열심히 캐물었다.

‘왜 그랬어요? 네? 네에?’

‘왜랄 게 뭐 있어. 그냥… 그냥, 뭐. 그때는 어리숙했으니까. 여러모로.’

스물네 살이 퍽이나 어리다.

‘난 더 어렸었는데?’

‘원래 여자의 정신적 성숙은 남자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루어져.’

‘정말 혼신을 다해서 변명하네. 어쩜 그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니?’

‘알아줄 줄 알았어.’

네자르의 목소리는 과거를 회상하듯 파문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때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진심이 통할 줄 알았어. 내가 숨기고, 입을 닫아도 결국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지.’

그 정도야 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요컨대 나는 네게 어리광을 피우고 있던 거야. 알면서 왜 자꾸 확인하려는 거지, 하는 생각으로.’

그건 오히려 내 이야기 같은데. 나야말로 알고 있었으면서 애처럼 굴었으니까.

‘자존심인지 뭔지 내 자아에 갇힐수록 더 입을 닫게 되고… 며칠 밤을 새우며 골머리를 앓다가 조금씩 정신을 차렸고.’

‘골머리 앓았어?’

‘그럼, 앓았지. 평생 나만 따르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나, 당연히 내 옆에 있어야 할 애가 왜 자꾸 벗어나려고 하나…….’

그 부분에서는 코끝에 간질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즐거워 보인다?’

‘그렇게 충격이었어?’

‘나름 인생에선 두 번째로 큰 충격이기는 했네.’

‘첫 번째는 뭔데?’

‘……때.’

‘응?’

‘……봤을 때.’

‘안 들린대두.’

‘승전 기념 연회에서 스무 살이 된 너를 처음 봤을 때.’

***

기억은 흐릿하면서도 선명하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에 그려 낼 수 있을 만큼 생생하고 또렷했다. 그때의 네자르가 더는 없는 네자르라 여기니 더욱 그러했다.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안 우울해.”

“입매도 너무 내리지 마시구요. 주름 생겨요.”

“안 내렸어.”

“어깨 쭈욱 펴셔요. 황후의 위엄을 지키셔야죠.”

“펴고 있어.”

끝끝내 데이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후 폐하도 황제 폐하를 따라 7년 전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중심을 잘 잡으셔야죠.”

데이지의 잔소리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는데, 또 생각해 보니 타박을 들어야 한다는 게 참 억울했다. 나도 황후이기 전에 여자야. 그리고 여자이기 전에 네자르의 부인이라고.

“폐하가 그랬어. 내가 자기 취향이 아니래.”

“네에?”

데이지가 보석함을 정리하다 말고 내 고자질에 눈을 크게 떴다. 놀랍지? 내가 기분 나쁜 티를 못 숨기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구.

“황제 폐하는 절대 그런 발언을 하실 분이 아닌데…….”

“나도 처음 알았어.”

“어머나, 우리 폐하께서 우울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늦게 알아차려 미안하다는 듯 데이지가 내 어깨를 감싸고 등을 토닥였다. 위로 받으려고 꺼낸 소리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누구 한 명은 알아준다 생각하니 우울했던 마음이 진정됐다.

“황제 폐하를 나무랄 순 없으니, 제가 가서 론 님께 한마디 할게요! 어딜 우리 케이트 아가씨에게!”

“아니야. 론이 무슨 잘못… 물론, 잘못은 있긴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곤혹스러울 테니 냅둬. 이럴 때일수록 나도 이성적으로 행동해야지.”

서운한 것과 황성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건 별개다. 나는 더 이상 열다섯의 케이트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 이게 다 카발 제국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야.

꼴 보기 싫은 얼굴이어도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랬기에 준비를 마친 즉시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오전의 빛이 새어 나오는 방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네자르는 황금색으로 일렁이는 태양 빛 아래에서 안경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 그대로.

이상하지. 그 자연스러운 장면에 내심 들끓었던 네자르를 향한 거부감이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조용히 걸음을 옮겨 가까운 의자에 자리 잡자, 그가 힐긋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나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준비해 놨던 말을 읊었다.

“정오까지는 제가 폐하의 업무 이해를 도와드릴 거예요. 즉위 직후부터 착수된 일이 너무 많아서 서류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보단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는 게 나으리라고 봐요.”

가만히 내 말을 듣던 내자르가 지친 한숨과 함께 목을 뒤로 젖혔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는지 목덜미를 주무르는 손길이 느릿느릿했다. 그다음은 마른세수, 그다음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두는 것. 저 습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몸을 돌린 네자르가 내 얼굴을 응시했다.

“명을 내리시면 폐하를 대신해 제가 국무 회의를 진행할 수 있어요. 외부에는 폐하께서 낙마하셨다고 알렸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제가…….”

“짐이 바보인 줄 알아?”

무슨 의미인지 몰라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한참을 대답 않고 조용히 앉아 있자, 고민하던 그가 뒷말을 이었다.

“밀린 검토까지 전부 마쳤으니 그럴 필요 없단 소리야.”

“네?”

그건 바보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의 말에 따르면 세상 모든 사람 중 열의 아홉은 바보일 텐데.

“내 머리에서 나온 개정과 사업인데, 며칠 내리 걸리면 그게 멍청한 거지. 다음 주부터는 회의도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론에게는 이미 말해 뒀으니 너도 그렇게 알아.”

무어라 토를 달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어투였다. 새삼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을 터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폐하. 귀족들이 폐하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성정상 억지로 도우려 하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야. 안도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차에, 네자르가 황급히 날 붙잡았다.

“어딜?”

어디냐니.

“어디든 가겠죠.”

이 너른 황성에서 내가 못 갈 곳, 못 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네자르는 내 대답이 퍽 마음에 안 차는 듯했다.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귀 아래를 쓸었는데, 내게는 마치 불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려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하세요.”

한마디 하자 네자르가 재빨리 눈에 힘을 풀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오늘은 어제와 판이하게 고분고분하다.

“노려본 적 없고… 괜찮다면 짐과 잠깐 나가지? 아니, 나가는 게 어때?”

“낙마하신 분이 어떻게 산책을 한다고 그래요?”

“하룻밤 사이에 잘 붙었다고 하면 돼.”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걸 어떻게 받아쳐야 하나.

“열 살 때의 저도 안 믿을 소리예요.”

“방금 그 발언 확언할 수 있어?”

음. 확언까지는, 조금…….

대답을 주춤하는 사이 네자르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그는 품이 큰 자신의 겉옷으로 내 몸을 꽁꽁 싸맨 후 본성 밖으로 이끌었다. 하얀 입김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지만,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몸의 떨림을 막아 주었다.

끼이익.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내게 낯설지 않았다.

“여기는…….”

느릅나무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풍기는 고성. 청색의 낡은 벨벳 커튼이 얼어붙은 실내를 감싸 안은 곳. 앤드류의 유령 성이었다.

“제국에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독특하고 쓸모없는 황법이 존재해. 특히나 이 아칼루체 성이 대표적이지.”

내 손을 놓은 그가 천천히 홀 계단을 올랐다.

“어떤 법인지 알고 있어?”

“아니요. 처음 들어요.”

“간단해. 아칼루체 성의 주인에게는 특별한 권리가 주어지는 거야. 그 어떤 중죄라도 단 한 번 용서받을 수 있는 권리.”

그 말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앤드류의 음성이 떠올랐다.

‘폐하께선 내게 이 성을 하사하셨다.’

‘포기하고 보니 그게 훨씬 편하더군. 아무것도 아닌 위치가 말이야.’

앤드류는 그 사실을 몰랐구나. 선황이 자신에게 ‘그 어떤 중죄라도 단 한 번 용서받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렸단 것을. 별개로 머릿속이 한없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당시는 네자르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국한 시기였다. 한데 유일한 경쟁자였던 앤드류에게 이 성을 내리다니.

“아칼루체 성의 주인이 건국 황제가 아끼는 애첩 중의 애첩이었거든. 뭐, 쉬쉬하며 숨겨 온 탓에 아는 이가 거의 없지만.”

네자르는 마치 아침에 먹은 스튜의 감상을 읊듯 담담하고 평온했다. 그는 2층의 너른 창 밖, 끝없이 펼쳐진 눈의 정원을 응시했다.

지금의 네자르는 북벌을 떠나기 전까지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지닌 상태다. 이 성의 전 주인이 앤드류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모를 수가 없었다.

“화나지 않으세요?”

“내가? 왜?”

“그분은 폐하의 공을 인정하지 않으셨던 거잖아요.”

무덤덤한 그의 옆얼굴을 보면 내가 더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구나. 선황의 총애는 오롯이 앤드류만을 향해 있었구나. 아무런 죄도 없는 앤드류가 괜히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야. 당시의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나도 모르지. 확인해 보니 이 우습지도 않은 황법 모두가 재작년에 개정되었더군. 어쩌면 이를 갈고 있었을지도.”

앤드류는 버림받은 아칼루체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선황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 여겼다. 정돈되지 않아 먼지가 휘날리는 실내를 응시하며 더없이 허무한 표정을 지었었다. 나 역시 그런 그에게 잠시나마 동정을 느꼈었는데.

“이봐,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나는 지금 네 앞에서 자랑하고 있는 거야. 편애와 편법 들 사이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냈잖아? 짐처럼 멋진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대뜸 어두워진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과장된 몸짓으로 내 턱을 툭, 건드린다. 확실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 날씨에 날 여기까지 끌고 올 이유가 없지. 하나 네자르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은 여전했다.

“저는요, 한 종류의 사랑으로는 마음이 충만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창틀에 걸터앉은 채, 네자르가 계속해 보라는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특히 가족의 경우는 더 그래요. 가족에게서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은 시간이 흘러도 늘 텅 빈 채 남아 있어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못해요. 그땐 그랬지, 하면서 웃지도 못하고, 차라리 얻지 못해 후련하다고 말하지도 못해요.”

“왜인지 좀 섭섭하게 느껴지는 말인데.”

“그래도 제가 노력할게요.”

목소리가 볼품없게 덜덜 떨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내 감정이 동화되어서일까. 나는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네자르의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에 검홍색 눈동자가 화롯가의 불처럼 따스하게 빛났다.

“제가 노력해서 그 빈자리를 꼭 채울게요. 문득 뒤돌아봐도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게 끝까지 곁에 있을게요. 차라리 얻지 못해 다행이라고 여길 때까지, 계속이요.”

얇게 접힌 눈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공존했다. 내 허리를 잡아 이끈 그가 바로 옆자리에 나를 앉혔다. 겉옷이 워낙 두꺼운 덕에 찬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평생 다행이라 느끼면 안 되겠네. 미련 없이 떠나 버릴 테니까.”

그런 의미가 아닌데. 눈을 맞추는 네자르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어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이제는 내가 카트리나인 걸 인정하죠?”

네자르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고는 모르는 척 엄한 천장으로 향한다.

“알면서도 왜 아무런 말이 없어요? 정말 지금의 나는 네자르 취향이 아니에요?”

그는 미간을 모은 채 긴 시간 천장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해 봐, 케이트.”

한참 만에 나온 소리는 누가 들으면 날 다시없을 냉혈한으로 오해할 발언이었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내 허리춤에 오던 애가 훌쩍 커 있는 거야. 그것도 온몸으로 나는 이제 어른이다! 표현하면서. 더 이상 어린애 취급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무슨 소리예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

“게다가, 심지어, 이럴 수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그의 어투와 높낮이, 목소리 모두가 이를 데 없이 절절한 감정에 젖어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인정할 수 없다는 감정에.

“열다섯이었던 꼬마애가 스물둘?”

그러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게 분명해. 아니면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거나.”

“꿈 아니에요.”

“알아.”

“왜 웃어?”

드디어 그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이전과 조금 달라진 분위기의 눈빛이 내 얼굴 곳곳을 훑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럼 이게 안 웃기냐? 지금 우리 상황을 봐. 하루아침 만에 네가 내 누님이 되어 버렸잖아, 케이트.”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소름 돋아.”

“나는 네가 카트리나 에젤로트라는 게 더 소름 돋아.”

말과 함께 시선을 스윽 피한다. 아, 정말! 왜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는 거야? 답답함에 네자르의 양 뺨을 잡아 내 쪽으로 돌렸다.

“자꾸 어딜 봐? 내 얼굴 보기 싫어? 왜? 내가 취향이 아니라서?”

“아니야. 그건 그냥…….”

당황하는 와중에도 눈동자는 여전히 내 뺨과 턱 근처를 맴돌았다.

“인정하지. 그때는 내가 잠깐 미쳤었어.”

“그럼 왜 못 보는 거야?”

“내가 널 왜 못 봐?”

말과 동시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정확히 날 향했다. 이거, 반은 오기 같은데. 잘 생각해 보면 어제 하루 동안에도 그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한 적이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던 것 같다. 부부 사이에 서로 피할 이유가 있나?

설마.

“내가 너무 예뻐서?”

딱딱했던 그의 얼굴 근육이 속절없이 풀렸다.

역시 그랬구나. 내가 눈에 띄는 미인이 된 바람에 눈 둘 곳을 못 찾는 거야.

“나도 알아, 네자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태어나길 예쁘게 태어나고, 나이 먹을수록 더 예뻐지는 걸 내가 어쩌겠어? 미인을 얻었으면 감수해야지.”

“말솜씨가 는 건지, 아니면 뻔뻔해진 건지.”

헛웃음을 지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왜?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정곡을 찌른 건가.

우리는 그 이후에도 ‘왜 네자르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한참 토론했다. 물론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네자르가 저 혼자 본성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자르로부터 카트리나라 인정받아 무엇이 변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눈에 띄게 대단한 부분이 변한 건 아니다. 물론 변한 것 없이 여전한 것도 아니지. 그래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네자르가 귀여워졌다.

“이제 그만 자자. 어제도 밤새웠다며? 아직 실감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네자르는 제국에서 가장 귀한 몸이야.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구.”

또 시작이네, 혹은 지겹지도 않나. 들리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일그러진 네자르의 표정이 내게 그리 말했으니까.

늦은 밤이 되었어도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집무실에서 잠들려던 그를 억지로 끌어왔지만,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도 의자에 앉아 일을 놓지 않았다. 평소처럼 책을 읽다 누우려는 내가 나태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쩌면 네자르가 말한 바보란 노력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잘 시간이니까 자자.”

“알았어.”

“잘 시간이래도?”

이어지는 긴 한숨. 그러나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네자르는 아직도 자기가 열아홉인 줄 아는가 본데, 지금 그의 몸은 스물여섯이다. 나흘 밤을 새우며 아카데미 과제를 하던 그 시절이 아니란 소리다.

날 향한 네자르는 눈에 띄게 착잡한 얼굴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아무 옷이라도 좀 걸쳐.”

“무슨 소리야? 걸치고 있잖아.”

“그게?”

그의 반문은 나의 차림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평소와 다름없이 얇은 나이트가운이었지만.

“코르셋이라도 끼고 잘까? 평소랑 똑같은 차림인데 뭐가 문제야?”

또 이상한 변명하기 전에 급히 뒷말을 이었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둘게, 네자르. 우리는 부부야. 그러니까 같은 침대를 사용해야 해. 물론, 이런 차림으로.”

“지금 다섯 살 꼬마 가르치냐, 케이트.”

“이다음이 더 중요해. 우리는 아직 후계가 없어.”

안 그래도 미묘했던 네자르의 얼굴이 이제는 대놓고 당황과 혼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에게서 기대할 수 없던 반응이었기에 나 역시 당황하고 말았다.

“오, 오해하지 마.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를 내외한 건 아니니까. 우린 최선을 다해 노력했어. 어엄청 열렬하고 뜨겁게 노력했다구.”

“그래서 오늘도 노력하자?”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내 끈질긴 시선을 이기지 못한 네자르가 결국 손에서 종이를 놓았다. 나는 침대 위로 천천히 쓰러지는 네자르 앞에서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깨물기라도 했는지 그의 아랫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표정도 직전과 달리 눈에 띄게 부자연스럽다. 그 네자르가, 지금 내 앞에서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자르.”

“응.”

“나, 지금 약간 외도하는 느낌이야.”

“외도조차 남편이랑 하다니. 칭찬해 줘야 하나?”

“걱정하지 마. 오늘은 처음이니까 손만 잡고 잘게.”

그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착잡해졌다. 난 아쉬움을 거두지 못하는 얼굴에 웃음을 터트리곤 짧게 입을 맞추었다.

“왜? 싫어?”

네자르는 대답 없이 날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이렇게 보니 껍질은 같아도 알맹이는 다르단 사실이 확실하게 와 닿았다. 그의 어투와 태도는 둘째 치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부터가 확실하게 달랐다.

좋게 말하면 열정과 힘이 느껴졌고, 나쁘게 말하면… 아니지. 나쁘게 볼 건 없지. 오전에 눈을 뜰 때마다 어항 옆에 떨어져 팔짝팔짝 뛰는 금붕어를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확실하게 다른 점이 존재하는데, 어항의 입구를 막아 버려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 얼굴의 네자르도 좋았다. 입술이 마를 정도로 입맞춤을 쏟아 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네자르도 나를 이런 눈으로 봤을까?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나 또한 치기 어린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폐하.”

“아아, 뭐… 내가 아는 케이트 같지 않아서.”

이건 또 무슨 귀여운 소리람. 집중하기 위해 그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댔다. 네자르는 답지 않게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너는 그런 말을 할 위인이 아닌데…….”

“그럼 어떤 말을 할 위인이었을까. 농담도 못 하고 얌전히 누워서 자야 했나?”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네자르의 반응에 우리의 첫날밤을 곰곰이 상기했다. 내가 ‘우리 한번 해요!’ 하면서 달려든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뺀 기억도 없었다. 오히려 미루지 말라고 손까지 잡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무섭다고 거절해서 혼인 후 1년은 고생해야 할 줄 알았지.”

혼인 후 1년? 그랬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걸 말해 줄까, 말까. 문득 지금의 그라면 충격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자르는 이상한 데서 삐치고 이상한 데서 뒤끝이 길지 않은가. 마땅히 우려할 만한 부분이었다.

“으음, 조오금 비슷해. 1년까지는 아니지만… 네자르가 날 꼬셔 내느라 고생 좀 했지.”

그가 힐끔 시선을 내려 날 응시하곤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했다. 어라라. 어쩐지 잔뜩 골려 주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했다.

네자르가 뭘 모르는 거 같은데, 나의 첫 경험은 네자르의 첫 경험이기도 했다구. 이는 무슨 뜻이냐? 네자르의 몸은 처음이 아니더라도 마음만큼은 처음일 거란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안으로 푹 꺼진 네자르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애 같던 표정은 어디로 사라지고, 네자르는 보기 드문 당황한 얼굴이 되어 내 허리를 잡았다.

“갑자기? 왜? 뭐 하려고?”

그가 이토록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딱히 뭘 할 생각은 아닌데… 네자르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도 자주 올라탔어. 혹시 무거워서 그래?”

물론 거짓말이었다.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잠시 의구심을 품은 시선으로 응시하던 네자르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전혀. 말도 안 되게 가벼워서 살은 없고 뼈만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들 정도야. 설마 내가 널 굶기기라도 한 거냐? 어떻게 신장만 크고 무게는 그대로인 거지?”

“근래에 좀 쪘어.”

“찐 게 이 정도란 소리야?”

말이 길어질수록 멀끔한 이마가 불만스레 구겨진다. 네자르는 목을 쭉 빼고 내 몸을 살피다가 팔을 뻗어 어깨, 팔목, 뺨, 목덜미를 살짝살짝 건드렸다. 말 그대로 쥐지 않고 들춰 보듯 손가락으로 슬쩍 흔드는 게 다였다. 심지어 가슴과 허리 부근은 눈길도 주지 않고서.

내가 몸은 말랐어도 가슴은 좀 자신 있는데. 이 환상적인 몸매를 완성시키기 위해 어머니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던가? 가진 나도 좋지만, 보는 네자르도 좋으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내 가슴에 눈도 못 두는 네자르가 불쌍했다. 경험에 따르면 처음이 어렵고 두 번째부터는 쉬웠으니 그도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나는 연신 신기해하는 네자르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그의 손을 잡고 가슴 위로 올렸다.

멍하니 굳어 있던 그는 이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짓이냐며 입을 열 것 같았는데 금붕어처럼 소리 없이 뻐끔거리다가 금세 닫힌다. 나는 그런 네자르의 상체를 다시 침대 위로 밀어 주었다.

“맨날 어른인 척하더니 왜 그래? 부인 가슴 만지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너는…….”

“정말 내가 처음이구나, 네자르.”

이상하게 가슴 깊숙한 곳 안쪽이 찡했다. 처음이라던 그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만 네자르와 다툰 날이라던가, 우울과 예민의 극치에 다다르는 날에는 종종 의심이 들곤 했었다.

정말 내가 처음이 맞을까? 마음이 처음이라고 해서 몸이 처음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그는 다년간 전장에서 굴러온 남자였고, 그 끔찍한 장소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네자르는 여자 경험이 있어야 했다. 또한 나는 감수할 마음이 충분히 존재했다.

그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다른 건 바라지 않고 오롯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도했었다. 그래서 네자르가 처음으로 나를 안았던 날, 티는 내지 않았어도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가 처음이라니. 그 정도로 나를 끔찍하게 사랑했다니.

안쓰럽고, 미안하고, 행복했다. 그래서 그대로 엎어져 네자르를 꽈악 껴안았다. 그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별거에 다 기뻐하는군. 앓는 소리까지 내다니.”

“너무 귀여워서 깨물고 싶은 걸 어떡해?”

말과 함께 네자르의 어깨를 앙 물었다. 단단해서 잘 물리지도 않았다.

“귀여우면 책임져야지.”

“이미 지고 있어.”

“나는 지금 당장을 말하는 거야, 케이트.”

네자르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당황해하던 이전과 다르게 허벅지를 살살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물론 나이트가운 아래로 매만지지는 못했지만. 살짝 상체를 들어 그를 내려다봤다. 네자르와의 첫날밤에서 느꼈던 열화와 옅은 기대감 그리고 억눌러지지 않는 본성이 날 끌어당기듯 일렁이고 있었다. 네자르는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끌며 말했다.

“입 맞춰 줘.”

세상에, 네자르. 내가 네 앞에서 입맞춤을 조를 때 이런 기분이었던 거야? 장난으로라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입을 맞춘 즉시 그가 입술을 벌렸다. 네자르는 처음이라는 말이 우습게도 능숙하게 내 입 안을 훑었다. 목 뒤에 살짝 닿아 있기만 하던 손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더 가까이 내리눌렀다.

“하아.”

길고 짧은 호흡이 여러 번 터졌다 사그라졌다. 네자르의 혀는 부드럽고 느리기보다 날 집어삼키려는 듯 거칠고 거리낌 없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뭉글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의 혀가 너무 깊게 들어와 어쩌면 네자르의 목울대마저 내 목구멍 안으로 넘어올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었다.

흥분에 젖은 탓인지 네자르의 손도 더는 나이트가운 겉에만 맴돌지 않았다. 뜨거운 지문이 맨 허벅지와 그 사이를 유영하다가 스치듯 아래에 닿아 왔다. 아주 짧은 찰나였음에도 몸이 흔들릴 정도의 쾌감이 내 허리를 저리게 했다. 작게 신음을 뱉자 네자르가 숨을 뱉으며 속삭였다.

“축축해.”

“……입술이?”

“아니.”

더 짓궂은 소리를 하기 전에 그의 입을 입술로 다시 막았다. 거친 날숨으로 내 귀 아래와 목선을 핥는 네자르에게선 조금의 인내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의 손과 입은 내게 어떻게 쾌감을 선사해야 할지 알고 있는 듯했다.

“젠장.”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일으킨 네자르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지탱한 채 침대 머리맡으로 이동했다. 나무 덩굴과 장미꽃이 세공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그는 내 가슴을 느리게 핥다가 입에 담았다.

“읏…….”

잘근잘근 씹히는 살에 아픔과 쾌락이 동시에 찾아왔다. 위로는 가슴을 깨무는 그의 입술에, 아래로는 금방이라도 꿰뚫을 듯 부푼 그의 물건이 닿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발끝이 오므려졌다 펴지길 수십 번.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내 얇은 나이트가운과 네자르의 셔츠가 침대 아래쪽에 멀찍이 던져져 있었다.

네자르는 흡사 짐승과도 같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그가 나의 유희와 자신의 유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할 정도로 능숙했다면, 지금의 네자르는 오롯이 쾌감만을 바라고 쾌감만을 향해서 움직이는 동물처럼 느껴졌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정신없이 흐트러진 머리칼과 뜨거운 숨이 나를 더욱 고양시켰다. 나는 네자르의 허벅지 위에서 반쯤 무너져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아래를 지분거리다 부드럽게 밀고 들어왔을 때는 목이 턱 막혔다.

안쪽을 지그시 누르는 감각에, 나도 모르는 사이 절로 몸이 흔들렸다. 네자르는 그런 내 어깨와 목덜미, 가슴 위로 진득한 표식을 여러 번 남겼다. 살을 파고드는 따끔함에 밀어내려 하면 더 가까이 당겨 내 허리를 옭아맸다. 고통이 쾌락으로 승화될 때까지 깊게 껴안고 놓지 않았다.

여기서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한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넣어 줘. 작게 말하자 네자르는 늦장을 부리지 않았다. 내 몸을 뒤집고 위로 올라가려는 그를 막았다. 열이 오른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허벅지 위에 쓰러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두 다리를 벌려 네자르의 것 위로 느릿하게 앉았다.

“아, 으음…….”

그 순간부터는 무엇 하나 선명한 기억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감각과 장면이 뭉뚱그려진 양 흐릿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각인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뜻이다. 새하얀 눈이 땅 위를 가린 한겨울임에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계절 감각은 완전히 잊은 채 우리만의 공간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네자르는 이성을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가려 두다가도 종종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 장면, 어쩐지 눈에 익어…….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야 네자르가 좋아하는 자세니까. 하지만 딱히 내 대답을 바라며 뱉은 소리는 아닌 듯했다. 이상하지. 우리의 수많은 시간을 잃었으면서, 그의 몸은 여전히 나를 기억했다. 나보다도 어린 주제에 나를 보듬으려 했고, 좋으냐는 물음보다는 아프냐고 묻는 물음이 많았다. 그런 것치고 계속해서 깨물며 앓는 소리를 내게 하는 점도 여전했다.

“소리 내 줘.”

네자르가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소리를 참아 내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깨물고 있던 내 입술을 살살 매만졌다. 나는 슬쩍 웃다가 습관처럼 다시 입술을 깨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 풀고 깨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어쩐지 열아홉의 네자르가 아닌, 지금의 네자르가 내 옆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땀에 옅게 젖어 축축한 이마와 그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머리칼, 투정과도 같은 목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듯했다. 또 그러한 부분이 네자르는 역시 네자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아.”

어느 순간부터 움직임이 거세졌다. 그의 것이 뜨겁게 팽창해 내 안쪽을 더 강하게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내 몸이 녹초가 되었어도 네자르는 지치지 않았다. 어느새 몸의 힘이 속절없이 풀려 있는 상태였음에도 그의 단단한 두 팔이 나를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나는 네자르에게 매달려 꾸준히 흔들렸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 때문에 허리를 꽉 부여잡은 그의 손이 여러 번 미끄러졌다.

나중에는 그가 바라는 대로 더는 소리를 참지 않았는데, 반은 울음이 기어 나왔다. 더는 힘들다고 밀어내도 그의 딱딱한 상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자르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허리를 비틀 때면 뒤통수를 부여잡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내 정신을 흩트려 놓으려는 듯, 숨조차 쉬기 버겁게 내 안을 탐했다.

“네가 가장 예뻐, 케이트…….”

사지를 가누지 못해 목을 젖히고 벅찬 숨만 내뱉자 드러난 목선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었다. 침과 땀으로 끈적거리지 않는 부위가 없었다. 그리고 돌연, 내 가슴 위로 이마를 기댄 네자르가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파정했다. 내 몸이 쾌락과 동시에 안도감을 찾으며 자신의 몸 위로 쓰러져도 더는 억지로 일으키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모를 입술이 정수리와 어깨 위로 떨어졌다.

“케이트.”

네자르가 멈추지 않고 내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미지근한 온기의 천이 내 몸을 닦아 냈다. 입 안으로는 시원한 물이 흘러들어 왔다. 나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거부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따랐다.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전해 주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육체와 정신은 이미 깊고 깊은 심해를 유영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침대가 출렁였다. 따스한 온기의 침구가 몸을 덮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처럼 네자르를 찾아 그의 품을 파고들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의 축축한 입술이 마지막으로 내 이마를 적셨다. 나 역시 저녁 인사를 하려다가 포기하고 네자르의 팔 위에 머리를 올렸다. 이 이상은 손끝조차 꼼짝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

잠결에 닿은 옆자리의 온기가 서늘하다. 어렴풋이 그의 부재를 느꼈고, 자연스레 굳어 있던 전신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한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정면으로 시야를 가리는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하얀 셔츠에 가려 있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근육이 네자르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야.”

몸이 늪 아래에 처박힌 것처럼 무거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한숨 깊게 잠든 덕에 불편할 정도로 뻐근한 구석은 없었다.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나 싶어 몸을 살며시 기울였고, 뒤늦게나마 네자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액자. 천천히 일어서 그림을 바라보는 네자르 옆에 섰다. 양팔로 겨우 가릴 만큼 커다란 액자 속에는 익숙한 인물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행복해 보이네. 내 평생에 본 너의 모습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여.”

“음. 행복했지.”

아직도 선명하다. 네자르로부터 품 한가득 장미 꽃다발을 받았던 날이니까.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저건 왜 보고 있담.

“내가 그리라고 명했나? 왠지 그랬을 것 같은데.”

“맞아.”

네자르는 품평이라도 하듯 눈을 얇게 뜨며 턱을 쓸었다.

“대충 그려지네. 기억을 읊으며 화가에게 이것저것 세심히 묘사했을 거야. 네가 서 있던 풍경과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밤하늘, 장미의 색이 흐릿한 걸 봐선 내 눈엔 온통 네 얼굴만 보였던 게 분명해. 뭐, 그럴 수밖에 없는 미소이긴 하군.”

이쯤 되면 놀라운 게 아니라 무서울 정도다.

“네자르.”

“어.”

“솔직하게 말해. 사실은 일하기 싫어서 기억을 상실한 척하는 거지?”

“그랬다면 좀 좋았겠어. 실체화된 저 장면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텐데.”

순순하게 넘어가면 될 소리였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실체화된 장면이라.

“그 정도야 쉽지.”

이제 막 정오가 되어 가는 시간. 내가 네자르를 이끌고 간 장소는 혼인 직전 장미 꽃다발을 선물 받았던 레스토랑…….

“좋아, 딱 저 자리였어. 그때와 복장도, 머리도 비슷해. 지금이 겨울이고 밤이라는 것과 내가 나이를 조금 더 먹은 것 빼곤.”

건너편에 위치한 잡화 상점의 2층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손님으로 가득한 식당으로 들어가서 썩 비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때?”

창문을 툭툭, 건들며 물었다.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하고 싶다면서, 한밤중에 날 저곳으로 데려가 장미꽃 백 송이를 선물했어. ……아닌가, 이백 송이였나?”

“그렇다고 데려오고 나면 끝이야? 재현을 해 주려면 제대로 해야지. 혼신을 다해 웃기라도 해 봐. 내가 보고 싶은 건 풍경이 아니라 그거니까.”

아니, 지금 웃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안 그래도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데. 물밀듯 밀려오는 짜증을 한 번 참았다. 나는 스물둘이다, 나는 스물둘이다. 네자르보다 연상이다, 어른처럼 행동해야 한다.

“방금 그 표정, 정말 어른 같았어, 케이트. 칭찬해 줄게.”

“그것참 고맙네.”

그때, 한산한 내부 안으로 선명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폐하?”

나름 신분을 숨긴 상태였기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틀었다. 다행히 상대를 확인하고는 가슴 깊이 안도할 수 있었다.

“안녕, 악토르 백작.”

“아아, 혹시 조용히 나오신 건가요? 제가 실수했네요. 아래에 툴드 경이 있길래…….”

“괜찮아요. 제도에는 무슨 일로?”

오늘도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꾸민 캐롤라인이 천천히 걸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아, 건너편 레스토랑에 예약한 시간이 되어 가서요.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저곳 음식이 괜찮기는 하지. 주방장이 황실 요리사 출신이거든.”

네자르가 아주 자연스럽게 캐롤라인의 말을 받았다. 기억을 잃은 후 처음 보는 것일 텐데 평소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긴, 캐롤라인 역시 어릴 적부터 네자르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한데 나는 왜 첫눈에 못 알아보고 캐롤라인은 한 번에 알아봤대.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서운했다.

“한데, 폐하. 듣기로는 낙마를 하셨다고…….”

“어깨만 좀 부었을 뿐 아무런 이상 없어. 그건 그렇고, 백작.”

“예.”

“아마스라 소백작은 어찌할 생각인가?”

뜬금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여기서 릴리의 남동생이 왜 나오는 거지. 캐롤라인 역시 갑작스러운 이름에 당황한 눈치였다.

“네, 네?”

그런데 보통 당황한 모습이 아니다.

“못 들었나? 아마스라 소백작 말이야.”

“무슨 말씀이온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네자르가 눈썹을 까딱였다.

“소백작이 그대에게 반하여 졸졸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 가문은 누이에게 주고, 저는 악토르 백작에게 장가보내 달라며 시위를 한다더군.”

“뭐? 세상에…….”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어머나, 대체 언제? 나는 왜 모르고 있던 거야?

“……제, 제가.”

울긋불긋 꽃망울이 물든 것처럼 혈색이 돌던 얼굴이었다. 그런 캐롤라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 걸 보면, 근본 없이 떠돌아다니는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다.

“제가 속이 좋지 못하여, 황송하오나 자리를…….”

“아아, 물론이야, 백작. 안색이 좋지 않군. 어서 식사를 마치고 악토르로 돌아가 푹 쉬도록.”

누가 그를 열아홉으로 돌아간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로 알겠는가. 네자르는 마치 대단한 아량이라도 베푸는 양, 상냥한 미소와 함께 캐롤라인을 내려보냈다.

아아, 아쉬워라. 더 캐물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눈치가 있다면 데이트하고 있을 땐 적당히 모르는 척해야지.”

이제 누구를 통해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는 나와 달리 네자르의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을 꺼낸 거야?”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네자르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스물여섯의 네자르였다면 좋게 타일러서 내보냈을 게 분명했다. 네자르가 기억을 잃으니 이런 차이도 보이는구나. 어쩐지 새로운 느낌이었다.

***

다음 날 이른 오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황성에서 한 번쯤 마주쳐야 할 네자르가 반나절 내내 보이질 않았다. 현 상황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고, 일간에 퍼트린 낙마했다는 소문을 위해서라도 본성에만 머물던 그였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무슨 말씀 없으셨어?”

내 어깨를 주무르며, 데이지가 곧장 답했다.

“네, 요즘은 특히… 아시잖아요, 황제 폐하께서 예전에 비해 굉장히 즉흥적으로 변하신 거.”

“황태자 시절의 비교적 자유로웠던 생활 습관을 못 버리신 거지.”

이렇게 갑작스레 네자르가 향할 곳은 어디가 있을까. 떠올려 보자, 케이트. 네가 비록 어릴 때 황성을 자주 오가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잖아. 기억을 잃어도 걱정 없이 떠날 수 있는 곳. 어쩌면 작은 일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위.

“아.”

기사단이 있구나.

“……그런데 어느 기사단이지?”

그냥 내버려 둘까, 싶었으나 딱히 일정이란 것도 없었기에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함께 지내 온 오랜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네자르가 제2 기사단 연병장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메이튼 경.”

나의 부름에 열을 다해 검을 닦고 있던 제2 기사단 단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황후 폐하!”

“폐하께서는 언제부터……?”

나의 물음에 메이튼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쭈욱 뺐다. 한겨울의 메마른 연병장 위에서 네자르와 이름 모를 기사가 열심히 합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 막 두 시간 즈음 됐습니다. 꽤 오래 움직이셨는데도 기사들보다 더 멀쩡하신 것 같네요. 하하!”

메이튼은 고향을 떠난 첫사랑을 10년 만에 다시 만난 양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보다 체력이 안 좋은 게 자랑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네자르가 다가왔다. 기사들 모두가 슬금슬금 눈치 봐 가며 피하는 걸 보니 스트레스를 아주 거칠게 해소한 모양이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케이트. 내 나이, 스물여섯이 아니라 서른여섯인 거지?”

땅에 주저앉아 내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신기하게도 내게는 예전 그 시절처럼 보였다. 나는 작게 웃으며 네자르 옆에 등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황제가 되어서 어찌 기사들의 연병장을 수시로 드나들겠어. 시간도 없고, 위엄도 없는 행위인데. 체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

“이러니 애를 못 만드는 거야.”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케이트.”

“응.”

“나 어떻게 하냐.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진 7년이 억울하게 느껴져.”

말처럼 정말 억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눅눅하고 뜨거워진 뺨을 쓸었다. 가만히 날 올려다보던 네자르가 손을 잡아채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이 센스 없는 반지도 마음에 안 들고. 내가 미적 감각을 북쪽에 두고 돌아왔나.”

“왜 그런 말을 해?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다시 기회가 온다면 더 나은 반지를 찾을 거야. 관에 들어갈 때도 끼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그 말을 듣고 반지를 보니 좀 투박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내 귀가 너무 얇은 건가.

아칼루체 성을 들렀던 날부터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더 많은 생각과 사고를 공유했다. 그의 텅 빈 7년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우기 위해서.

조금 익숙해지려고 할 즈음에는 네자르가 기억을 잃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다. 그때부터는 혹시라도 네자르가 기억을 되찾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점차 접게 되었다. 이유는 단출하다. 모든 것이 괜찮았으니까. 못 찾으면 어때? 첫날의 우려와 달리 우리 사이의, 혹은 네자르라는 황제에 대한 걱정거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다만 조금 곤란한 순간이 종종 생기고는 한다.

“씁. 눈 피하지 마.”

지금처럼 난감한 주제를 다시 입에 담아야 할 때.

네자르가 반대쪽으로 돌아가려는 내 고개를 잡아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커다란 덩치로 날 내리누르는 탓에 꼼짝없이 안겨 있어야 했다.

“사랑 고백은 몇 번 받아 봤어.”

아, 정말.

“몇 번?”

“……두 번.”

잠시 후 네자르가 바짝 붙여 놨던 몸을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그것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센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본인이 물어봐 놓고 그런 얼굴을 하면 어쩌자는 거지.

“뭐 하는 놈이야. 누가 고백했어? 나보다 대단해? 나보다 잘생겼어?”

진심으로 묻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한 투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무조건 네 말이 맞다, 네가 최고다 옹호해 주는 게 제격이다.

“저언혀. 그랬으면 진작 떠났지.”

잘생긴 남자야 속속들이 뒤지면 나올 수도 있지만, 네자르보다 대단한 남자가 세상천지에 존재하려나 싶다.

“현명해, 부인. 앞으로도 그렇게 속물처럼 살도록.”

귀여워.

어쩜 의심 한번 안 하고 저리 만족스러운 얼굴을 할까? 나는 올라가는 입을 주체 못 하며 네자르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지칠 때까지 숨 쉬는 것도 잊고 입을 맞췄다. 귀여운 네자르가 세상에서 최고야!

그리고 귀여운 네자르가 뼈를 깎으며 노력한 덕에, 황성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 갔다. 그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뻔뻔하게 웃으며 7년이나 훌쩍 늙어 버린 귀족들을 대했다. 넉살 좋게 실없는 농담도 건넸다. ‘황제가 된 네자르는 이렇고 이런 사람이었어요.’라는 단출한 묘사 몇 가지로 네자르는 완벽하게 황제를 연기했다. 물론, 내 앞에서는 제외하고.

때로는 깊고 때로는 얕은 대화가 우리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언어로 만든 기억이 쌓일수록 그에 대한 내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기억을 잃었어도 네자르는 여전히 네자르라는 걸.

서로의 관계를 다시 쌓아 가는 시간 사이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네자르는 화가 나면 귀가 빨갛게 물드는구나.”

하아. 감정을 억누르는 짙은 한숨이 집무실을 메운다. 그는 옅게 졸다가 서류에 밀크티를 엎어 버린 것 때문에 화를 식히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며칠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의제라 소파 위에 무너지는 몸이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종을 울리자 조용히 들어온 시녀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사라졌다. 서류는… 그래도 잘 말리면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네자르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러게, 왜 이제 알았지. 고민해 보면 답은 간단했다. 그가 내 앞에서 진심으로 열을 올렸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열을 내더라도 귓바퀴만은 능숙하게 숨겼다거나.

“네자르, 이렇게 보니 정말 애 같아.”

“애?”

붉었던 귀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걸 보면 화가 좀 풀린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정말 투명하도록 솔직하구나.

“귀여우니까 칭찬해 줄게요, 폐하. 엄청 귀여워요. 내일도 오늘만큼이나 귀여워 주세요.”

그게 요즘 내 삶의 낙이거든.

“하.”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네자르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다가온 그는 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고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나긋한 숨이 내 턱 지척까지 올라올 정도로, 가까이.

“어린애 같다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누님.”

맞닿은 입술의 온기가 뜨거웠다. 설마 귀뿐만이 아니라 입술도 뜨거워지는 걸까. 나는 꽉 조여져 있던 등의 단추가 헐렁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깜빡 잊고 있었는데, 네자르는 뒤끝이 길다. 뒤끝이 긴 것으로 모자라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악어 같은 습성까지 있다. 한마디로 한번 놀릴 구실을 찾으면 사람 질릴 때까지 놀린다는 의미였다.

“역시 내 누님. 이제는 파프리카까지 싹싹 비우시는군. 아주 훌륭하셔.”

그리고 열아홉의 네자르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원래도 심한데 더 심하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새로운 놀이입니까?”

대꾸 없이 파프리카만 씹자, 식사 도중 업무 보고를 하러 온 론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축 처진 어깨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냥 놀리는 거야.”

귀엽다고 한 게 죄야? 귀여워서 귀엽다고 했는데 끝까지 누님이란 소릴 입에서 놓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니 이제는 그러려니 여길 정도였다. 그렇게 버틴 날이 벌써 사흘이었다.

“잘못된 호칭은 아니군요.”

그래, 틀린 건 아니지. 딱히 신경을 건드는 소리도 아니므로 크게 기분 나쁠 것 또한 없다. 단지 듣는 사람이 나와 네자르밖에 없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하나 네자르는 대낮부터 단체 사냥을 나가는 날도 꾸준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누님이 나보다 잘 쏘는 것 같아.”

“사람 많은 곳에선 그 입 좀 닥쳐요.”

그렇게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또 좋다고 웃는다. 몰래 웃다가 측근이 뭐가 그리 즐거우시냐 묻는 게 부지기수며, 참다가 나중에 혼자 자지러지는 일도 흔했다. 다만 오늘은 다행히도, 네자르의 관심을 돌릴 만한 인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흐음. 슬금슬금 피하는데?”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턱짓하는 방향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캐롤라인이 멀찍이서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폐하가 놀릴까 봐 그러는 거죠. 우리가 찰싹 붙어 있는 탓에 내 옆으로도 못 도망치니까 마치 독 안에 든 생쥐 같네요.”

“가서 골려 줄까?”

“안 돼요. 남의 연애에는 참견하는 거 아니야.”

며칠 전 릴리로부터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 도도하고 콧대 높은 악토르 백작이 자신의 동생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한다고. 심지어 캐롤라인도 싫지는 않은 눈치라고 했다. 그 꼴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자기는 뒤에서 몰래 응원해 주고 있단다.

“나중에 불똥이 튈지 몰라요. 사랑에 미친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켈 로망드만 해도 제정신이 아니지 않았는가. 나의 조언에 네자르는 다소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뭐, 누님이 그러시다면야.”

그러고 보니 네자르는 그때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극소수만 알고 쉬쉬하던 사건이니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확률도 컸다.

“폐하.”

말의 갈기를 훑던 그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물으려던 말을 다시 목 안으로 삼켰다.

“아니에요.”

“왜?”

“그냥, 저보다 못 잡으면 각오하시라고요.”

“살벌하군.”

좋은 분위기에 괜히 찬물을 쏟을 필요는 없지. 그리 즐거운 주제도 아니지 않은가.

조금 답답하네. 예전의 기억을 어디까지 공유할 수 있는지, 그 선의 위치가 다소 난해한 감이 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네자르가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나 또한 불필요한 언급이나 말실수를 줄일 수 있을 테니.

하나 그 필요성도 생각만큼 오래가지는 못했다.

만남이 갑작스러웠듯, 이별 역시 갑작스러웠던 탓에.

***

오늘은 유독 해가 일찍 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건 암막 사이로 떨어진 아침 햇살이 눈가에 닿았기 때문이다. 나는 푸른빛이 도는 태양 빛 아래에서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늘 확실하게 덮고 자는 암막인데, 어제는 꼼꼼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나 보다.

아직 시녀가 올라오지 않았으니 더 잘까.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네자르의 허리를 잡으려던 차였다. 밝아진 시야 너머로 검홍색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언제 일어났어?”

꽉 막힌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소음을 내며 나왔다. 헛기침을 하며 닫힌 목을 열 동안에도 네자르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뭐야.”

그 이유를 물어도 그저 묵묵하고 담담하게 나와 눈을 맞출 뿐이다.

“왜 그래, 네자르. 해도 안 뜬 아침부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손가락만 한 폭의 햇빛이 닿는 눈동자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내가 아는 네자르였다면 날 품 안에 당겨 잠이 완전히 깰 때까지 발을 올려 두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이미 오전 업무 준비를 마친 상태여야 했다.

“돌아왔어?”

물론 항상 그리하지는 못하지. 어느 날은 네자르도 조금 더 늦게 일어나고 싶을 테고, 어느 날은 침대에 가만히 누운 채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싶을 테니까.

“돌아왔구나.”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돌아왔느냐고 묻는 이유는.

“돌아왔구나, 네자르.”

모르겠다.

역시 나는 바보인가 봐. 지금 당장 느껴지는 이 감각과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워. 내 눈에는 그저 그렇게 보였다. 네자르의 눈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게 더 좋다고 온갖 감정을 담아서 내게 표현했다.

“잘 돌아왔어요. 금방 왔네요.”

“응.”

네자르가 나에게 돌아왔다.

“보고 싶었어, 케이트. 네가 내 옆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야.”

네자르의 커다란 손이 내 눈가를 내리눌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은 눈물이 뺨 한쪽을 적시고 있었다.

***

몇 주간 잠잠하던 하늘에서 폭우가 떨어졌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하늘은 푸른빛보다 잿빛 스산함이 더 강했다. 폭설로 이동이 시원찮은 탓에 예정되어 있었던 티파티와 살롱 모두가 뒤로 밀려났다. 일정이 뒤로 밀렸으니 당장은 여유로워야 하는 게 당연한데… 오히려 나는 방 한쪽에 박혀 꼼짝도 못 한 채 서 있어야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보다 훨씬 귀여웠어.”

자유로운 것이라곤 입과 혀가 전부여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래 봤자 눈앞의 두 인물은 더없이 진중한 얼굴을 유지할 뿐이다. 그것도 심지어 내가 아닌 캔버스를 응시하면서.

“나를 더 자주 괴롭히고, 쓸데없이 솔직하고, 짓궂기는 했어도 확실히 귀여웠어.”

참 나. 널 잊어서 미안하고 보고 싶었다며 한참 껴안고 있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기억을 되찾은 지 이틀째라 이거지.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이거지?

“내 말 듣고 있어요, 폐하? 왜 대답이 없어요?”

“머리가 좀 달라.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차분했던 것 같군.”

“예.”

황실 화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캔버스 위로 손을 놀렸다.

“눈매도 더 바짝 굳어 있게. 옅은 불만을 담은 분위기로.”

“예.”

나는 지금 초상화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중이다. 일정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네자르가 대뜸 날 끌고 와 이곳에 가두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드레스를 환복하고, 머리와 화장을 다시 해야 했다. 곰곰이 돌이켜 보니 그가 내게 입힌 드레스는 내가 네자르에게 꽃다발을 받았던 순간을 재현하겠다며 제도로 나간 그날의 복장이었다.

“네자르!”

신경질적인 외침에 네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니, 그 많은 말을 했는데 돌아온 답이 고작 왜?

“됐어요.”

“됐기는? 양쪽 귀 열고 제대로 들어 줄게. 다시 말해 봐.”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캔버스에 향한 채다. 사랑이 식은 게 분명해. 이틀 전의 그 절절하던 네자르가 이렇게 변하다니.

“폐하.”

“응.”

“열아홉의 폐하는 어디로 간 거예요?”

“글쎄… 열아홉은 열아홉 시절에 남아 있겠지.”

예전의 귀여운 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다. 당연한 일이었다, 열아홉에서 스물여섯으로 돌아왔으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능숙하게 맞받아치는 그를 노려봤다.

“다시 돌려줘요.”

그때의 나를 다시 그려 봤자 뭐 해. 그때의 네자르는 사라지고 없는데!

“돌려줘요. 나랑 같이 아카데미 명예 졸업자 전시실을 방문하기로 했단 말이에요.”

나름대로 진심 어린 불만을 내뱉었으나, 네자르는 기가 차다는 어투로 고개를 저었다.

“쯧,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그새 다른 놈한테 아주 홀라당 넘어가 버렸어.”

그러고선 폭 넓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내 턱을 툭, 건든다.

“어린놈 만나니까 좋든?”

“그래 봤자 본인이면서.”

“외도하는 기분이었다며?”

“본인도 그랬으면서.”

픽 웃은 네자르가 허리를 숙여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것도 아주 능글맞고 얄미운 얼굴로.

“어쩔 수 없어, 부인. 다신 볼 일 없을 놈이니까 알아서 마음 정리해. 걱정은 덜어.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

잡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제자리로 성큼성큼 돌아간 네자르는 한참을 황실 화가 옆자리에 서서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두었다. 새벽부터 내린 폭우가 늦은 오후에 사그라질 때까지!

열아홉의 그대 마침

네클렌타

헤넨의 겨울이 혹독한 추위라면, 네클렌타의 추위는 고요한 추위다. 헤넨의 성에서 며칠을 한파와 보내야 했던 것과 달리 네클렌타는 햇빛도 밝고, 하늘도 맑았다. 다만 눈이 녹으려 하면 새벽 즈음 다시 눈이 내렸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이동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케이틀린.”

이름은 달라도 분명 날 부르는 소리였다. 케이틀린은 네자르를 따라간 아카데미에서 아주 잠시 사용했던 가명이었으니.

“응.”

고개를 돌리며 답하자, 책을 읽던 자세 그대로 네자르가 말했다.

“혹시 몰라 다시 말해 둘게. 우리는 지금 네클렌타 백작의 먼 외가 방계 출신으로서 록허드를 만나러 간다는 걸 잊지 마. 너와 나의 진짜 신분을 아는 자는 네클렌타 백작인 록허드와 그 부인인 아스테가 전부야.”

“넬 오라버니, 같은 말 계속하면 안 지겨워? 네클렌타로 오는 내내 그 말만 열 번은 들은 것 같거든.”

“알다시피, 케이틀린. 너한테는 백 번 말해도 부족해서.”

그래, 백 번 말해서 잊지 않는다면 차라리 백 번 듣고 말아야지.

넬은 네자르의 친모가 살아 계실 때 불리던 아명이라고 하는데, 본인과 너무 안 어울려 이제 조금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도시에 들어오면서 느꼈는데… 확실히 경비가 굉장히 삼엄하네. 헤넨은 네클렌타에 비하면 아주 평화로운 거였어.”

“신분을 위장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성벽에 상주하는 무장한 경비병들을 보며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구나. 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네클렌타 성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좋아, 넬 오라버니. 황성의 체면이 걸린 일인 만큼 나도 하나만 당부할게.”

“뭐든지.”

“사람들 보는 앞에서 남사스럽게 굴지 마.”

잠시간 입을 닫고 있던 네자르가 천천히 미간을 구기며 반문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대뜸 남사스럽게 굴지 말라?”

네자르가 남들 앞에서 왜 그리 뻔뻔하게 구는가 했더니, 애초부터 뻔뻔한 짓이란 걸 모르기 때문이었다.

“남들 앞에서 뺨 비비지 말고, 손등에 입 맞추지 말고, 허리 껴안지 말라는 소리야.”

“왜?”

“남사스러운 행위를 일삼는 남매가 세상에 어디 있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네자르와 나는 부부가 아닌 친남매로 위장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완벽주의자인 네자르를 생각해 묻지는 않았다.

“케이틀린, 내 사랑스러운 동생. 그런 단정은 쉽게 짓는 게 아니야. 세상은 넓고 혈육도 많다는 걸 잊지 마.”

“에자렛 공작을 생각해 봐, 넬. 내게 하는 짓을 에자렛 공작에게 했을 때의 기분을!”

미간을 찡그린 상태로 한참 고민하던 네자르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였다.

“있을 수 없군. 좋아, 노력하도록 하지.”

때마침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성 앞에는 멀끔하게 차려입은 집사와 서너 명의 식솔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네클렌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넬 에이젤 님, 케이틀린 에이젤 님. 성내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에이젤은 네자르와 아카데미를 방문했을 때 사용했던 성으로, 외가의 먼 방계 집안이다. 대가 끊긴 지 오래라 이제는 가계도에 성만 올라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네자르의 팔에 끼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을 잡아끌려 했던 네자르도 잠시 얼굴을 구기다가 천천히 정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실내로 들어서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뜻한 차를 준비해 줄 수 있나? 긴 시간 여행한 탓인지 내 여동생의 몸이 많이 얼었군.”

“물론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여동생 소리가 어색해도 그리 어색할 수가 없다. 내 생의 첫 네클렌타 방문을 위장 신분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는 현재 외성에서 돌아오시는 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응접실이 아닌 침실로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기는 했지. 어떻게 할래, 케이틀린?”

카발 제국과는 확실히 다르다. 나는 화려한 그림으로 수놓인 천장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몸을 좀 녹이고 백작께서 오시기 전까지 성을 잠깐 구경하고 싶어. 생각했던 것보다 성이 훨씬 더 아름다워서.”

“그렇다면 시녀와 기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고맙지만 내 호위 기사로 충분해. 근처만 잠깐 구경할 테니까.”

네자르가 얼마나 세심하냐면, 툴드가 아닌 키올을 내 호위 기사로 배치시켰다. 키올은 툴드와 달리 과묵한 성격이라 곁에 두어도 혼자 있는 느낌을 들게 하는 기사다.

개인적으로 네클렌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게 목적인 만큼, 이 여자 저 여자 쑤시고 다니는 툴드보다 훨씬 안정적인 조합일 테다.

마음 같아선 네자르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는 록허드와 만나기 전에 생각할 일이 많아 보였다. 나는 응접실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은 네자르의 옆에서 몸을 녹이다가 방을 나왔다.

“이곳에 도서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방문할 수 있을까?”

“왕실 도… 아니, 네클렌타 도서관은 현재 출입 금지 상태입니다. 대신 3층에 서재가 있으니,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인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제약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나 시녀에게 안내받은 장소도 말만 서재였을 뿐, 에젤로트의 서재에 비하면 도서관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서할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 그냥 구경 온 거야.”

괜히 민망한 기분이네. 툴드였다면 ‘휴우, 다행입니다. 저는 또 황후 폐하께서 요리를 한다며 레시피를 찾으러 오신 줄 알았지 뭡니까?’라고 놀렸을 게 뻔했다.

“조금 떨어져 있겠습니다. 편하게 구경하십시오.”

하나 키올은 된 사람이라 그런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서재에는 보통 등불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응접실에 비해 훨씬 추웠다. 얼마나 추운지 창가 깊숙이 놓인 책장의 책은 잘 뽑히지도 않을 정도였다.

『네클렌타 왕실을 뒤흔든 농염한 스캔들,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친다!』

하필이면 꿈쩍도 안 하는 책 제목이 이렇게 자극적일 수가 없다.

“으음…….”

무슨 스캔들이었기에 왕실을 뒤흔든 거야? 표지가 찢길까 봐 조심조심 떼어 내도 책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기척도 없이 나타난 하얗고 커다란 손이 내 손등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꺼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돌연 등장한 하얀 손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책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책을 떼어 냈다. 쩌억.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표지의 책, 『네클렌타 왕실을 뒤흔든 농염한 스캔들,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친다!』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하하, 용케 재미있는 서적을 찾으셨군요.”

부드럽게 소리 내어 웃는 목소리가 남자치고는 맑고 청아했다. 가볍게 내용을 훑던 그가 내 손에 책을 쥐여 주었다.

“제목만큼 흥미로운 내용은 아닐 겁니다. 너무 자극적으로 꾸며 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거든요. 그래도 시간 죽이기로는 쓸 만합니다.”

말할 때마다 짙게 그림자 지는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햇빛 아래에 서면 언뜻 금발로 착각할 만큼 옅은 갈색 머리칼. 긴 턱 선에 네클렌타인 특유의 큰 신장. 피부가 워낙 밝고 그 못지않게 환한 인상 탓인지, 소년처럼 느껴지는 남자였다.

“고마워요.”

아스테 부인을 떠올리게 하는 외향. 그렇다면 이 사람이 부인의 동생이라는 게렌 네클렌타일까. 하나 어디에서도 판시온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신분을 위장하는 상태에서는 타인을 가까이해 좋을 것이 없다. 한걸음에 달려와 이곳을 주시하는 키올이 보였기에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백작님의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일찍 도착하셨군요.”

“네.”

“눈이 계속 쌓여서 이동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운이 좋았네요.”

“지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이제 막 도착해서요.”

“생긴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감사해요.”

일부러 냉정하게 뚝뚝 끊는 어투로 답하는데 남자는 변함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처음과 다르게 다소 민망하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음. 아무래도 제가 실수한 것 같죠?”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남자는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았다.

“혹시 제가 눈치 없게 혼자 계신 시간을 방해한 거라면 죄송합니다. 이 성에 외부인이 찾아온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서 말입니다.”

미안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사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상냥한 질문 하나하나에 살벌하게 대답했으니까.

하지만 나, 카트리나 에젤로트. 성격 때문인지 신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껏 숱한 일들을 경험해 왔다고 자부한다. 이 시점에 ‘아니에요. 저도 마침 혼자 구경하고 다니던 참이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아, 네.”

관심 없으니 갈 길 가라는 말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싶으나 아직 내게 그 수준까지는 무리인 듯싶었다.

남자의 미풍처럼 선선한 미소는 여전했다. 부끄럽다는 표정이긴 해도 안색이 변하질 않은 탓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얇은 입술 사이로 입김이 새어 나와도 그의 뺨보다 하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백작님의 손님이니 책을 서재 밖에서 읽으셔도 될 겁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말자. 다짐과 함께 남자가 채 몸을 틀기 전, 서재를 빠져나왔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키올에게 건넸다.

“누구일까?”

“네클렌타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렌 네클렌타가 귀성한 이후, 피난에서 돌아온 귀족이 소수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한 귀족들이지요.”

“이곳에서 오래 지내 온 것처럼 보였어.”

“그렇다면 귀족일 확률이 더욱 높습니다. 처세가 빠른 자일수록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있겠지요.”

“록허드 때문인가.”

한마디로 새로운 네클렌타 영주에게 아부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소리였다.

“키올.”

“예.”

“내가 그 책 가져왔던 책장,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예, 다시 가져다 놓을까요?”

“아니.”

그게 아니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키올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옆에 2권도 있을 거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2권도 가져다줘.”

툴드였다면 백이면 백 김샌다는 얼굴로 꿍얼꿍얼했을 텐데 키올은 고개만 짧게 주억인 후 서재로 향했다. 내가 나온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칼같이 인사하고 나왔는데, 또 들어가서 만나면 민망하잖아.

마침 키올에게 별 볼 일 없는 명을 내린 장소가 3층의 중앙 홀이었다. 나는 키올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홀을 화려하게 빛내는 백색 석상들을 구경했다. 그중 눈에 들어온 석상은 홀 한가운데 위치한 여인 석상이었다. 허벅지를 따라 흐르는 드레스의 천 주름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표현된, 말 그대로 걸작 그 자체였다.

“……꽃?”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니 내 머리보다 한 뼘 높은 위치에 수선화가 고이 꽂혀 있었다. 두 손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마치 여인이 꽃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화 맞지? 설마 누가 봐도 생화 같은 이 수선화가 조각이겠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팔을 올렸다. 아주 살짝만 만져 보는 거야.

뚝.

“아.”

그런데 맙소사. 손끝이 막 닿으려던 찰나에 여인의 검지가 부러진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하며 떨어지는 조각과 꽃을 손으로 받았다. 세상에, 이걸 어쩐담. 그 순간, 기다란 그림자가 내 손바닥과 바닥을 가렸다. 키올의 그림자인가 싶었지만, 키올의 것이라 여기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

나는 긴장한 몸을 천천히 돌렸다. 이어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얼음으로 빚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시린 시선이었다. 내 얼굴을 짧게 응시하던 푸른 파도색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 쥐고 있던 손가락 조각으로 향했다.

“아, 이건…….”

이, 이건 제가 부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려던 입술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열리지 않았다. 내가 부순 게 맞으면 어쩌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국가의 귀한 문화재를…….

“잠시.”

지하를 기는 것처럼 무겁고 진득한 목소리였다. 내게서 대리석 조각을 앗아 간 손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허공을 향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손가락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원래 깨져 있던 부위입니다.”

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여인상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래서 이음새를 만들어 놨었죠. 한데 너무 약하게 만든 탓인지 종종 작은 접촉에도 떨어집니다.”

천만다행이야. 마음이 놓여서일까, 뒤늦게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움푹 파인 깊은 눈매가 인상적이라, 다른 부위는 마치 그 눈매를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처럼 느껴졌다.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에 생긴 음영 때문에 푸른 눈동자가 언뜻 검게 보였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의도한 일은 아니었으나 두 명의 남성을 마주하니 네클렌타인의 특징을 좀 알 것 같았다. 이 북쪽 지방의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피부가 창백하도록 희었다. 짙고 선명한 색을 지닌 제도인과 달리 눈동자의 채도도 희미하고.

밝은 잿빛 머리칼의 남성이 흑색 제복을 걸친 채로 대리석상 사이에 서 있어서 그런가, 세상이 흑백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손에 든 노란 수선화. 왜인지는 몰라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윽고 내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남자는 쥐고 있던 꽃을 가져가 여인상에게 돌려주었다.

“이틀이 지나 시든 꽃보다는 이게 나을 겁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남자는 이제 막 꺾었는지 선명한 향과 꽃잎을 지닌 수선화를 내게 건넸다. 엉겁결에 받아 들자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한 키올이 두툼한 책을 양손에 든 채로 내게 물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고작 몇 초 내지로 짧게 나눈 대화였지만 난 확신할 수 있었다.

‘판시온 공작과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많은 자였습니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분위기가 유독 더 그러했지요.’

저 남자가 아스테 부인의 유일한 혈육, 게렌 네클렌타라는 것을.

***

판시온을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싶었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봐 오면서, 단연코 판시온만큼 충격적인 첫인상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자 잊고 있던 옛 감정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때의 네자르, 나한테 굉장히 짓궂었는데.

록허드와 아스테 부인은 해가 넘어갈 무렵 늦은 오후에 만날 수 있었다.

“키가 컸군.”

그것이 반년이 훌쩍 넘어 재회한 그의 첫마디였다.

“게다가 살도 쪘어. 호의호식하며 살더니 포동포동한 돼지가 되어 가고 있구나.”

“호의호식은 결혼 전… 아니, 예전부터 꾸준히 해 왔거든? 요?”

“네 어머니께서는 드레스를 입혔을 때 모양새를 고려해 조절이라도 해 주셨지.”

네자르를 힐긋 쳐다본 록허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출가해 살더니 친오라비가 가둬 놓고 음식만 먹인 모양이네.”

“짜증 나게 만나자마자 살 이야기야. 얼굴도 시꺼메져서는. 요.”

“눈치 보면서 되도 않는 높임말 쓰지 말고, 그냥 평소대로 말해. 그리고 원래 북쪽은 햇빛이 세서 바깥 활동이 많으면 금방 타기 마련이야.”

상석에 앉아 눕듯이 앉은 록허드를 이를 갈며 쳐다봤다.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대화였으나 이상하게 자꾸 화가 났다. 나도 나름대로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록허드를 만나자마자 봉인이라도 풀린 듯 애처럼 굴게 된다.

“백작님.”

“아아, 그래. 우리 귀여운 넬 사촌! 어때, 그간 잘 지냈나? 여동생과 달리 예전보다 몸이 더 좋아진 느낌이야. 웬만한 기사보다 더하군.”

황제 폐하를 방계 사촌 취급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랴. 티는 내지 않았어도 록허드의 음성에는 활기가 넘쳤다. 네자르는 그런 록허드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황성으로부터 대단한 선물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가 어떤 소릴 해도 난 내 할 말만 한다는 투였다.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어. 이 커다란 성에서 가장 넓다는 응접실 곳곳에 익숙한 가구들이 놓여 있기는 했다.

“저어기 샹들리에.”

턱을 들어 올린 록허드가 드높은 천장에 걸린 간소한 응접실용 샹들리에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곳에는 없지만 내 침대, 내 의자, 내 식탁, 내 장식장. 아스테의 화장대, 보석함, 겨울용 벨벳 커튼.”

술술 나오는 선물 리스트에 그의 곁에 앉은 아스테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 화장대에 가장 공들이기를 잘했다. 안주인 물건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던 듯했다.

“그리고 내 지위까지. 전부 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주신 선물이지.”

“굉장히 만족스럽겠네, 오라버니. 오라버니만큼 황제 폐하의 신뢰와 총애를 받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어.”

내 입으로 말했지만 정말 한 줌의 감탄도 담기지 않은 겉치레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네자르가 작은 목소리로 딴지를 걸었다.

“황후 폐하께서 계시잖니, 케이틀린.”

“그분은 당연히 예외지.”

하하. 다소 딱딱하고 건조한 음성으로 웃음을 내뱉은 록허드가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만족스러워.”

누가 듣더라도 진심이라 여기지 않을 만큼 갖가지 애매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었다. 그림처럼 옅은 미소만 짓고 있던 아스테 부인이 나긋한 어조로 거들었다.

“정말 만족스럽다면 웃으면서 말하는 게 어때요, 록허드.”

“만족스러워.”

순식간에 대낮에 핀 꽃처럼 환하게 바뀐 록허드의 얼굴이 이번에는 꽤 그럴싸해 보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는 듯한 기분인데.

하하.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한 번 더 너털웃음을 뱉은 록허드가 내게 물었다.

“조카는?”

“……조카?”

안 그래도 어색한 공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황후의 덕목은 바로 황위 후계자를 품는 일입니다.’

워낙 자주 듣던 소리였고, 그에 맞춰 수많은 대답을 준비해 왔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대답하면 할수록 꾸역꾸역 변명을 늘어놓는 기분이라 나중에는 일부러 눈치를 줘 입을 닫게 만들기까지 했었다.

내게는 신경질을 일게 하는 주제이지만, 반년 만에 만난 록허드는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으니까. 하나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네자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카라면 에젤로트 가문의 후계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카트리나가 아닌 케이틀린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네자르의 반문에 슬쩍 눈썹을 까딱이던 록허드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괜한 걱정에 응접실 문 앞에 선 집사를 훔쳐봐야 했다.

“……내가 너무 갑작스레 말했나? 일단 내가 물은 것이 에든 형님의 소식인 건 맞아. 에젤로트 부인께서 출산이 코앞이시라기에. 마지막 소식을 들은 게 벌써 한 달 전이군. 어디 이야기 들은 게 없나 해서 말이지.”

“아마 예정일까지 조금 더 남았을 겁니다. 이곳까지 올라온 시간을 고려하면 이미 출산을 했을 수도 있겠군요.”

네자르의 목소리는 가문의 힘으로 고위 공직에 오른 망나니 귀족 영식을 대할 때와 똑같았다. 그래서일까,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표정이 보였다. 원수라도 마주한 양 싸늘하겠지. 근래에는 비슷한 언급이 나왔을 때 나보다 네자르가 더 날카롭게 반응한다. 그래 봤자 내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지만.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록허드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티를 냈다.

“그러니까, 시간은 충분하니 가문의 후계를 갖는 일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것.”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오라버니.”

“곧 혼인할 나이잖느냐, 케이틀린. 미래에 대한 조언이라고 생각해. 너는 그 어떤 풍파에도 끄떡없는 뻔뻔함을 지녔지만… 의외로 속이 여리니까. 설탕으로 빚은 요새 같다고 할까.”

“너무 뜬금없어서 할 말이 없네.”

“늘 그랬듯 케이틀린, 못 들은 것처럼 흘려 넘겨도 돼. 네가 언제 내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이제 또 언제 볼지 모르니 미리 말해 두는 거니까.”

록허드의 얼굴 위로 희미한 씁쓸함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단순히 급조한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말을 들으니 내 기분 또한 이상해졌다. 평생을 부딪치며 함께 자라 온 남매. 그런데 이제는 1년은 고사하고 5년에 한 번 보면 다행일 테다. 아직 어지러운 네클렌타의 정세에서 영주인 록허드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일 점심은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할 예정이에요. 혹시 자리가 불편하시다면 따로 준비해 드릴게요.”

아스테 부인의 제안에 네자르가 굳어 있던 얼굴을 스르륵 풀었다.

“아닙니다. 손님이 되어서 마련된 자리에 불참하다니, 그것만큼 예의 없는 행위도 없죠.”

이제야 깨닫는데, 네자르의 높임말을 듣는 건 혼인 후 처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무려 카발 제국의 황제이니까.

괜히 뭔가 아쉬웠다. 남매가 아니라 생판 남으로 올 걸 그랬나. 그랬다면 나도 존댓말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스테 부인.”

“네, 케이틀린 양.”

“별건 아니고 성에서 저희와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궁금해서요.”

“아아. 현재 총 여덟 분이 네클렌타 성에서 함께 지내고 있어요. 제 동생 게렌과 황제 폐하께 작위를 받지 못한 귀족들, 그리고 소수의 예술가들……. 내일 점심 식사는 꽤 오랜만에 함께하는 자리라, 장담컨대 모두 참석할 거예요. 괜찮으시다면 식사 시간에 소개해 드릴게요.”

어차피 같이 안 어울려 지낼 텐데 뭐 하러 그런 자릴 갖느냐 말하고 싶었지만, 손님인 만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여러 정치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록허드의 명으로 자리를 뜬 집사를 따라서 응접실을 벗어났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려는 도중 록허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손잡이를 잡아챘다.

“어이, 동생.”

그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애매한 얼굴로 나를 한참 쳐다봤다.

“지금 성에 손님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그중에는 네게 무례하게 구는 자도 있을 거다.”

그 정도야 네클렌타로 오는 길 내내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다. 황후가 아니니 황후 대접을 받지는 못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일이 생기면 혼자서 해결하지 않고, 오라버니나 아스테 부인에게 고하도록 할게. 원했던 말이 이거지?”

“항상 입만 살아서는.”

록허드는 잘 대답해 줘도 불만이다.

“이제 가도 돼?”

그의 큰 손이 내 머리를 한 번 헤집고 멀어졌다. 징그럽게 왜 머리를 쓰다듬고 난리야.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등을 돌렸다.

그날 밤은 악몽을 꿨다. 눈을 떴을 땐 등 뒤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침대 위에 놓인 두 손이 한겨울 소나기라도 맞은 양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야, 기억해 내지 마.

고작 꿈 따위가 이리도 선명하다니. 나는 어둠과 정적, 그리고 외로움이 주는 공포를 참지 못하고 침실을 나섰다. 깜깜한 복도 아래에서 더듬더듬 벽을 짚고 네자르가 잠든 옆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문을 열면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이 네자르의 침대를 휘감고 있었다. 숨 쉬는 동안 모든 감각을 예리하게 깨워 두는 그이다. 따라서 두 걸음 옮기자마자 그가 알은체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케이트.”

흐릿한 세상에서 네자르가 내게로 팔을 뻗었다. 다가서지도 않았는데 그의 온기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불안감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괜찮아, 이리로 와. 그건 전부 가짜야.”

내 느릿한 걸음을 그는 한참이나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나를 자신의 두 팔 안으로 꼭꼭 숨겼다.

“너도 알고 있지? 아이는 중요하지 않아. 여차하면 에자렛에게 모든 걸 떠넘기면 돼. 우리 둘은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거지.”

네자르에게서 이 말을 듣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거짓말, 어떻게 쟁취한 자리인데 에자렛에게 주다니.

가만히 눈을 감으니 귓가로 그의 심장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숨을 거두는 환상과, 그로 인해 비참해지는 꿈이 저 멀리 사그라졌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는 듣지 마. 그들은 네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어. 지금도 이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잖아.”

내가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가 벌써 반년이었다.

“잘 자, 케이트.”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

어스름한 빛에 눈을 떴을 땐 괘종시계의 시침이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내내 날 재우다 잠이 들었는지, 내 뒤척임에도 네자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짠한 마음도 들고,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이불을 끌어모아 그의 몸을 꼼꼼하게 덮었다.

“아, 쪽팔려…….”

애도 아니고 악몽 때문에 늦은 밤 찾아갈 건 뭐람. 이러려고 침실까지 분리한 게 아닌데.

밤새 느꼈던 공포와 외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언제까지 네자르에게만 의지할 순 없는 노릇일 테다. 나는 정신 차리자는 의미에서 모피로 머리와 전신을 둘둘 감고 성을 나섰다.

휘이이이잉.

“으으.”

너무 추워. 미치도록 추워서 정신이 정말 바짝 드네.

나는 성 뒤편의 너른 평지를 응시하다가 마구간에서 말 한 필을 빌렸다. 나도 참 변한 게 없다. 추워서 두꺼운 옷을 껴입은 주제에, 말에 올라 뛰어다니다니.

휘이익! 이번에는 바람이 아닌 휘파람 소리였다. 멀지 않은 곳에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작은 점들이 보였다. 사냥개인가? 그것도 이 시간에? 사냥개를 이끌며 잿빛 머리칼을 펄럭이는 남성은 눈에 익은 인물이었다. 게렌 네클렌타. 본인은 이름을 밝힌 적 없지만, 틀림없이 그 이름을 가지고 있을 남자.

“워, 워.”

개들이 쫓고 있는 야생 동물은 순록이었다. 나는 활을 조준하고 있는 남자, 게렌의 뒤쪽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록허드가 극찬해 마지않던 네클렌타 후예의 사냥 실력은 과연 어떨…….

휘익!

컹컹!

휘익!

컹컹컹!

“음.”

혹시 순록이 아니라 개를 맞히는 게 목적인 건가. 화살은 쏘는 족족 근처는커녕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게렌의 표정은 아쉬운 기색 없이 내내 무뚝뚝했다. 남자는 텅 빈 화살통을 매만지다 등을 돌렸고, 공교롭게도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어진 길고 무거운 정적.

이 성 사람들과는 되도록 교류하지 않으려 했지만, 적어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진짜 못 쏘시네요.”

살다 살다 못 쏴도 저리 못 쏘는 기사는 처음이다. 평생 나 활 쏘는 모습만 구경했던 데이지도 저보다는 잘할 것 같았다. 내가 자신 있는 분야라 그런 걸까. 쓸데없이 자꾸 한 소리 하고 싶어진다.

“화살을 놓을 때 자꾸 팔이 내려가는데, 그러면 화살도…….”

“저도 못 쏘는 거 압니다.”

그리고 게렌은 내 본능적인 오지랖을 칼같이 잘라 냈다. 심지어 기분 나쁜 티도 내지 않으면서.

나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손을 저었다.

“어, 미안해요. 기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래, 못 쏘는 사람한테 못 쏜다고 말하는 건 실례지. 황성에서야 내키는 대로 입 밖에 꺼내며 산다지만 이곳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때깔 좋은 거짓말을 했다.

“굉장히 잘 쏘시네요.”

“지금 저 놀리십니까?”

차라리 화를 내 줬으면 싶었다. 저렇게 무덤덤한 얼굴로 빈정거리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의 머리를 돌려 성으로 향했다. 애초부터 네클렌타 성의 사람과는 거리를 둘 생각이었으나, 그런 생각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한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신지.”

세상 무관심해 보이는 게렌에게도 한계가 온 걸까. 억지로 쥐어짜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좀… 바람 쐬러 나왔어요.”

“특이하시군요.”

“이른 아침부터 사냥하는 분만 하겠어요.”

이제 막 시작된 대화가 무색하게도, 우리의 교류는 그것이 끝이었다. 시종에게 말과 개를 맡긴 후 게렌은 반듯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성격은 앤드류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막 성안으로 들어가던 때, 새하얗게 퍼지는 입김 너머로 멀쑥한 무언가가 보였다. 창문에 기대어 우수 어린 눈빛으로 밖을 살피는 밝은 갈색 머리칼의 남자. 어제 서재에서 만났던 멀건 낯의 남자였다.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기에 앞으로 연도 없을 작자들과 계속 마주하는 거지. 최대한 멀리 돌아가려 했건만, 남자가 타이밍 좋게 고개를 돌린 탓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 느끼한 미소는 뭐람.

“아, 이런 우연이!”

가극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목소리로 탄성을 터트린 그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오늘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남자의 말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날 놀리는 걸까, 아니면 네클렌타에서 이 정도 날씨면 좋은 편에 속하는 걸까.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네클렌타 특유의 우중충한 청회색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보니 그리 좋지는 않군요. 너무 반가운 마음에……. 혹시, 제 이름 기억하십니까, 아가씨.”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지만 남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누구…….”

아, 젠장. 안 돼! 당황해서 이름을 묻고 말았잖아!

하나 내 속마음과 달리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환한 미소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마르첼 덴입니다.”

심지어 기억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알려 준 적도 없으면서 날 떠봤구나. 이걸 깜찍하다고 해야 할지, 가소롭다고 해야 할지. 소년처럼 맑은 분위기의 미남이 호의를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례가 아니라면 아리따운 아가씨의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그리 말하며, 마르첼은 내 손등 위로 짧게 입맞춤했다. 겨우 세 걸음 다가왔을 뿐인데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렬한 과일 향이 풍겼다. 대체 향수를 얼마나 뿌린 거야? 하지만 이렇게까지 행동한다면 어쩔 수 없네. 나는 알리기 싫은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까탈스럽게 대답했다.

“에이젤 영애라고 불러 주세요. 제가 이래 보여도 나름대로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라서요.”

그래도 풀 네임은 알려 주기 싫었다.

“에이젤, 에이젤……. 아가씨의 분위기만큼이나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로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들어도 터무니없이 진지한, 사교성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마르첼은 뙤약볕 아래, 초원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고양이처럼 무해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띠는 것이 아닌가. 원래부터 저런 성격인 것인지, 내게 긍정적인 감정을 지닌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침부터 돌아다녔더니 몸이 노곤하네요. 먼저 올라갈게요.”

어느 쪽이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좋아해 봤자 어쩌겠는가, 난 유부녀인데. 그것도 심지어는 황제의 여자.

“벌써 가십니까? 하하, 이거 괜히 아쉬운데요. 기껏해야 두 번째 만남인데…….”

“전혀.”

날이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의도치 않게 말과 생각이 반대로 나오고 말았다. 나는 멍하니 깜빡이는 마르첼의 얼굴에 대고 속사포로 변명을 쏟아 냈다.

“전혀, 아니에요. 두 번째 만남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마치 세 번째 만남처럼 친근한걸요. 점심 식사에 참여하시죠? 그때 봬요.”

그리고 미친 듯이 뛰어 침실로 돌아왔다.

이상하단 말이야. 게렌도 마르첼도 똑같은 네클렌타 출신이고, 똑같은 남인데 다가오는 느낌이 저렇게 다를 수 있나. 그렇다고 해서 게렌이 생각했던 것만큼 판시온과 닮았던 것도 아니다. 첫인상만 조금 비슷할 뿐, 성격은 오히려 앤드류가 생각난다고 해야 할까.

“케이틀린.”

소란스러운 인기척을 들었는지, 열린 문 밖에서 네자르가 나타났다. 그는 문에 기댄 채 내 위아래를 훑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는… 언제 어디서든 늘 한결같구나.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야. 그 짧은 사이에 말을 타고 오다니.”

“칭찬이지?”

“설마 내가 널 헐뜯기라도 하겠어.”

“어머나,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시네요, 넬 오라버니. 나 같은 애는 사교계에 데뷔하면 안 된다며 혼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까이 다가온 네자르가 툭, 툭 자연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정리했다. 기다란 금발이 정전기를 못 이겨 주인 없는 정원의 잡초처럼 이리저리 뻗친 상태였다. 제아무리 잡아당겨도 허공으로 비상하는 머리칼. 가라앉히길 수십 번 시도하던 네자르는 쯧, 혀를 차며 내 어깨를 껴안았다. 무게감을 이기지 못한 몸이 침대 위로 무너졌다. 목 근처를 배회하는 입술에서 간지러운 웃음이 퍼진다.

“그렇게 기분 좋아?”

내 물음에 말 잘 듣는 개가 된 양, 네자르가 고개를 주억였다.

“너무. 하루 종일 서류 들고 쫓아다니는 스토커도 없고, 하나라도 더 떼먹으려 발악하는 놈들도 없고, 숨만 쉬면서 누릴 거 다 누리는 돼지 새끼들도 없어.”

당사자도 아닌 내가 절로 즐거워지는 목소리였다. 하긴, 그에게 이처럼 자유로운 때가 또 오긴 할까. 어찌 보면 지금의 네자르는 내게 있어 가장 낯선 네자르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옷과 귀한 음식과 귀한 향수를 사용하던 그다. 태생의 위엄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지금은 그저 남들처럼 적당히 손본 머리에 남들처럼 적당히 질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네자르가 황실 핏줄이 아니고 내가 백작 영애가 아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래 봤자 이곳도 백작 성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네클렌타의 중심답게 성에 미녀가 많더라.”

색다른 기분에 빠져 있기도 잠시, 나는 젖 먹던 힘을 끌어 올려 네자르의 복부를 발로 찼다.

“꺼져. 아니, 나가!”

“윽,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묻는 것치곤 얼굴 곳곳에 자리한 미소가 눈에 거슬렸다.

“옷 갈아입을 거야. 저리 비켜. 빨리 나가.”

“고삐가 풀려서 그런가. 말투가 다시 거칠어졌네, 내 동생.”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내 동생 소리가 그렇게 소름 끼칠 수 없었다. 내 목덜미를 가볍게 깨문 그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남매 사이에선 이런 짓 안 하는데.

“흠. 내가 일주일간은 봐주겠어. 여기서는 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어차피 록허드야 내 알 바 아니니까. 나는 이제 슬슬 네클렌타의 아리따운 여인들을 구경하러 가야겠군. 곧 다시 보자고, 동생.”

괜히 록허드의 친구가 아니지.

네자르가 나가 텅 빈 방에서 두꺼운 모피 코트와 모자를 벗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록허드와 네클렌타 부인에게로 가 영지 업무를 빼앗아 볼 게 뻔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네자르는 누가 봐도 일중독증이다. 가만히 누워 헛짓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녹인 후 『네클렌타 왕실을 뒤흔든 농염한 스캔들,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친다!』를 정독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정오를 가리켰다.

나와 네자르는 누가 보더라도 친남매를 연상할 만큼 익숙하고 친근하지만 약간의 거리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기며 만찬장으로 향했다. 네자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만 열심히 친남매인 척을 했단 의미였다.

에젤로트에서 본 것보다 훨씬 크고 긴 식탁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작 가문의 사람들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열서너 명이 조금 넘으려나.

“아,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마침 모두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정오의 만찬답게 분위기는 차분하고 진중하기보단 가벼운 여유가 흘렀다. 동쪽 상석에는 성주를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의 인물이 앉고, 그 반대편에 성주와 그의 가족이 앉는 게 카발 제국식 식사 예절이다.

나와 네자르는 설정상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록허드의 방계였으므로 아스테 부인 옆자리에 차례로 앉았다.

예법을 따르다 보니 의도치 않게 게렌과 마르첼의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하게 되었다. 이거, 밥 먹다 체하는 건 아닌가 몰라.

땡땡.

곧 맑은 금잔의 울림이 식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네클렌타 성에 거주하고 계시는 모든 손님들, 오늘 만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잔을 울린 것도, 먼저 입을 연 것도 성주인 록허드가 할 일이다. 으으, 뭔가 이상한 기분이야. 그럴싸한 모습으로 성주 노릇 하는 모습을 보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이쪽은… 내 사촌인 에이젤 가문의 넬 에이젤과 케이틀린 에이젤입니다. 오늘부터 약 일주일간 성에서 함께 지낼 예정이니, 모두 반갑게 맞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자르가 가볍게 목례를 했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건너편에 앉은 마르첼의 시선이 너무나 따가워 뺨이 익어 버릴 것 같았다.

이어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열 명 남짓한 인원이 참여했고, 내 자리가 또 애매한 가운데였기 때문에 오른쪽 왼쪽 모두 신경 써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케이틀린 에이젤 영애? 저는 몰 베돔입니다. 케이틀린 영애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몰 씨.”

내 바로 오른편에 앉은 중년 남성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즐거워 웃는단 느낌보다는 약간 수완 좋은 미소처럼 느껴졌다.

“케이틀린 영애, 네클렌타 백작님의 사촌이라면……?”

나는 애피타이저를 열심히 씹으며 그를 쳐다봤다.

“하하. 그러니까, 에젤로트 쪽인가, 셸버른 쪽인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아. 아버지 쪽인지, 어머니 쪽인지 궁금하다는 건가.

“셸버른이에요.”

초면에 출신을 묻는 행위는 딱히 실례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 인상이라는 게 옳고 그름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저 한마디로 내 머릿속에 몰 베돔의 인상은 ‘가까이할 필요 없는 인물’로 각인되었다.

“그것도 어어엄청 먼 방계죠.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서 친척이라 표현하는 거지,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예요.”

몰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아주 작은 무언가지만 확실하게 아쉬운’ 티를 여실히 냈다. 내 앞에선 그런 티조차 숨길 필요 없다는 의미겠지.

“또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괜찮다면… 제가 여쭈어도 될까요?”

몰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마음에도 없던 물음의 대답은 몰의 건너편 자리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나만큼이나 소박하고 단정한 차림을 한 묘령의 여인이었다.

“두 분의 관계는 어찌 되시는지 궁금해요. 워낙 아름다우셔서 제 눈이 다 호강하네요.”

여인은 나와 네자르를 번갈아 응시했다.

“저와 넬 오라버니는 친남매 사이예요. 관계는 뭐, 으레 남매들이 그렇듯 딱히 좋지는 않아요.”

“우리가?”

다른 이와 대화하기 바빠 보였는데, 어떻게 들은 건지 네자르가 고개를 홱 돌리며 되물었다.

“우리 정도면 남부럽지 않게 좋지.”

“어머, 오라버니가 방금 말실수를 했네요. 남부럽지 않게 안 좋다는 뜻이랍니다.”

진짜 눈치 없네. 아니면 날 놀리려고 일부러 눈치 없게 행동하는 건가? 상대가 네자르임을 감안하면 후자일 확률이 더 높았다.

이후에는 다분히 형식적인 질문들이 오갔다. 고향은 어떤 곳인지, 부모님은 어떤 분이신지, 네클렌타를 방문한 소감은 어떤지. 이미 마음먹었듯 딱히 친해질 생각이 없었기에, 나 역시 형식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물론 비슷한 나이대의 여인이 친절하게 웃어 준 탓에 마냥 그러지는 못했어도.

“그럼 혼인은 하셨나요? 혹은 약혼자가 있다든가…….”

대답하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르첼이 앉은 방향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그의 푸른 코발트색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한 채였다. 저 얼굴에 대고 또박또박 말하고 싶다. 나, 남편 있는 여자라고.

“아니요, 없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약혼자가 정해질 것 같아요.”

그냥 약혼자가 있다고 할 걸 그랬나. 아니야, 너무 많은 거짓말을 쌓아 놓으면 추후 곤란해지는 일이 생길 것이다. 차라리 귀찮음을 조금 더 감수하는 게 나았다. 아직까지는 실수 없이 괜찮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에이젤 영애, 오전에는 잘 쉬셨습니까?”

그리고 대뜸 마르첼이 내게 물었다. 생선을 썰고 있던 탓에 얼굴은 못 봤지만, 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목소리도 그렇고, 여기서 내게 저런 질문을 할 존재는 그밖에 없었으니까.

잘 쉬셨습니까. 별거 아닌 그 문장 하나가 왜 갑자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다행히 네자르는 마르첼에게 털끝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칼부림할 사람인 것도 아닌데, 괜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소한 사건으로 서로를 의심하는 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니까.

“서재에 또 오실까 싶었는데 안 오시더군요. 하하, 기다리라는 말씀도 없으셨는데 괜히 기다리게 되지 뭡니까.”

겨우 네 시간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면서 안부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모르겠다. 그것도 어서어서 아는 척해 줬으면 싶다는 표정으로.

“네, 잘 쉬었어요. 서재는 나중에 찾아가려고요.”

“식사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본인이 성주인 줄 알겠네.

아, 아니야. 자꾸 이렇게 아니꼽게 생각하지 말자.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로 까다롭게 구는 게 얼마나 철없는 행동인가.

“나쁘지 않아요. 네, 맛있어요.”

“순록 고기 좋아하십니까? 네클렌타에서만 즐길 수 있는 별미이지요.”

“처음 먹는데 괜찮네요. 네, 좋아요.”

“네클렌타의 딸기 샴페인도 맛있기로 유명합니다.”

“아아, 딸기 샴페인. 네, 좋죠.”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케이트. 이 정도면 너무 매정하지도 않고, 너무 친근하지도 않아. 딱 적당해.

“빌려 가신 책은 잘 읽으셨습니까?”

“책이요? 네, 잘 읽고 있어요. 재밌어요.”

“보니까 두 권 모두 빌려 가신 모양입니다. 전 1권만 읽었는데… 2권은 어떻습니까?”

“아, 저도 1권을 아직 다 못 읽어서.”

“그럼 읽으신 후 감상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하, 괜히 저도 궁금해지더라고요.”

“네, 그러세요.”

“풉, 흠.”

열면 돌아가는 오르골처럼 착실히 대답하던 와중에, 돌연 네자르가 물을 마시다 말고 크게 기침을 했다.

“크흠. 여기, 물 좀.”

네자르가 식사하다 사레들리는 건 또 처음 보네. 나는 시종이 새로운 물을 따를 동안 네자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날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옅은 만족감이 맴돌았다.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구나? 그래도 덕분에 이 지겨운 기계적 대화의 연쇄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에이젤이면… 제국 어느 지역에 있는 영지입니까?”

가만히 앉아 조용히 식사만 하던 몰이 내게 물었다. 물어도 꼭 본인 같은 것만 묻네.

애초에 사라진 가문이니, 에이젤이라는 명칭의 영지가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므로.

“우리 가문은 영지가 없어요.”

“그럼 마르첼 경께서 영애라 부르신 것은…….”

“아버지께서 작위가 있으니 귀족은 맞죠.”

“아아. 그렇군. 뭐, 케이틀린 영애의 말이 틀린 건 없구려.”

카발 제국 사교계에서 가장 거칠다는 제도 사교계. 그리고 그 사교계에 발을 들인 지가 벌써 수년째였다. 사교 생활의 몇 없는 장점 중 하나가 눈치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몰이 날 업신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쯤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사교계 데뷔는 하셨소? 아아, 백작님과 가깝다고 하였으니 데뷔탕트 덕 좀 봤겠군. 분명 그럴 테지.”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뭐랄까. 퍽 새로웠다. 내가 어딜 가서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있겠는가. 유서 깊기로는 카발 제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에젤로트 가문 출신 적녀에, 태어날 때부터 황위 계승권을 지니고 있던 내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황태자와 약혼하였으며, 그 흔한 치정 싸움 하나 없이 황후에 올랐다. 아버지는 제국의 재상이시고, 어머니는 동쪽 국경 지대를 지키는 셸버른 후작 가문의 장녀이시며, 둘째 오라버니는 북벌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네클렌타 왕족의 후예와 혼인했다.

어쩌다 보니 내 출신을 자랑하는 꼴이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잘난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걸. 그러니 지금은 새로운 경험 한다고 치부하는 거지.

“우리 집안은 제국 북부에선 나름 알아주는 상인 집안인데, 들어 봤을 거요. 분명 들어 봤을걸? 베돔 상단이라고. 우리 집안은 넘치는 부와 넘치는 인맥이 있지만, 딱 하나 명예가 없어. 귀족 집안이 아니라, 이거지.”

“아하.”

무시할까 말까 하다가 마지막 남은 인류애를 끌어 올려 감탄사를 뱉어 주었다.

“내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지. 보아하니 이름과 작위만 남은 형식상 귀족 집안 같은데, 원한다면 내 아우를 소개해 줄 수 있소. 그 아이가 가진 저택만 북대륙에 스무 채야, 스무 채. 제도의 귀부인들 못지않게 좋은 원단, 좋은 보석을 평생 옆에 두고 살 수 있다, 이 말씀이야.”

열다섯의 나였다면 진작 폭언부터 나왔을 텐데. 사람이 너무 잘났는데 철까지 들면 세상만사 별것 아닌 일은 웃어넘길 수 있게 되나 보다.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

……아니, 방금 한 말은 취소. 겸손은 무슨. 내가 이렇듯 무덤덤할 수 있는 건 저 중년의 발언을 한껏 비웃을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 웃기시네. 이딴 경험은 굳이 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사실 입 좀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서너 번쯤 참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참는 이유는 간단했다.

“몰 베돔 씨,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여기서 괜히 싸움을 일으키면 어떤 피곤한 일이… 응?

“혼인을 마치 매매하듯 제안하다니요? 숙녀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과하십시오.”

마르첼, 정말 꾸준한 마르첼.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마치 나의 기사라도 된 양 정의롭게 나서는 마르첼.

“……크흠. 뭐어,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젤 영애. 사과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베돔은 말 잘 듣는 양처럼 곧바로 내게 용서를 구했다. 상대가 바뀌자마자 미련 없이 태도를 바꾸는 걸 보니 역시 뼛속까지 상인이다 싶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뿌듯함이 묻어 나오는 마르첼의 낯을 마주하자 짜증이 확 올라온다.

“그러시든가요.”

네자르는 아까부터 한창 아스테 부인과 대화하고 있었고, 록허드는 날 주시하고 있었는지 대놓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잘 지내네. 왜 나만 자꾸 이상한 것들이 꼬이는 걸까.

그렇게 마르첼로부터 고통받으며, 만찬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던 시점이었다.

“……응?”

굳이 살펴보려던 건 아니었으나 고개를 들다가 우연히 게렌의 표정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데 마치 전생의 원수라도 만난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뭘까.

나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그 끝은 내가 앉은 자리 옆으로 가장 맨 끝 좌석으로 향했다. 머리가 희끗한 장년의 남성.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다소 차분하게 느껴지는, 아니 언뜻 긴장되어 보이는 안색.

자리가 자리인지라, 남성의 재킷 안쪽이 매우 잘 보였다. 그림자에 가려 은색으로 번뜩이는 저 물건은…….

“어라.”

이럴 수가. 대범하게 만찬장에서 식기를 훔쳐 가다니! 게렌이 딱딱한 표정으로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집안의 재물이 남의 호주머니로 쏙 들어가게 생겼는데 웃으며 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식기 하나 훔친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이 성에서 더한 물건을 훔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록 손님인 신분이지만, 저런 놈과 같은 성에서 숙식할 순 없지. 나는 몸을 뒤로 빼고 아스테 부인의 어깨를 살짝 두들겼다. 곧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 자리에서 오른쪽 가장 끝에 앉은 분이 누구신가요?”

잠시 목을 쭈욱 뺀 아스테 부인이 나와 마찬가지로 작게 속삭였다.

“제 외숙부세요.”

“외숙부?”

그렇다면 내가 잘못 본 건가. 아스테 부인의 외숙부라는 작자가 물건을 훔칠 일은 없으니.

“케이틀린, 무슨 일 있으…….”

“으, 으아아아!”

그때였다. 뒤통수 너머에서 녹슨 괴성이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터져 나왔다.

쨍그랑!

식탁 위로 올라선, 기름칠된 까만 구두 굽. 이어서 먼저 식기가 무참히 짓밟히고 깨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인지하기도 전에 두 번째 괴성이 터졌다.

“네클렌타에 영광을! 죽음으로 용서를 빌어라, 이 나라 팔아먹은 배신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본 물건이 식기가 아니라 검의 날이었다는 것을. 식탁 위에서 발악하며 날아오는 모습이, 신기하게도 춤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장면이 영사기에 찍혀 나열되는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고, 공주님!”

“꺄악!”

네클렌타 귀족 출신들에게서 본능적으로 익숙한 호칭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일의 주범은 아스테 부인의 지척으로도 다가가지 못하고 식탁 위에 엎어졌다.

“컥!”

퍽, 하는 소음과 함께 스테이크 소스가 내 뺨으로 튀었다. 나는 손을 들어 턱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스를 천천히 닦았다. 향신료로 범벅이 된 소스였지만 고기 비린내가 역했다.

“잡아!”

무너진 남자의 무릎 바로 아래에는 은색 나이프가 박혀 있었다. 나는 저 나이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네자르의 식기 중에 오직 나이프만 보이지 않은 상태였으니.

“이거 놔라, 이 배신자 놈들! 왕국을 팔아 치운 배신자 연놈들!”

아스테 부인의 외숙부라는 자는 질질 끌려가는 내내 목청껏 소리쳤다. 하나 턱과 시선은 오직 바닥을 향한 채였다. 고작 1분 만에 벌어지고 마무리된 일이었으나, 만찬장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헛헛하고 엉망이었다.

“케이틀린.”

침묵이 내려앉은 와중, 가장 먼저 입을 연 인물은 네자르였다. 손수건을 손에 쥔 그가 부드럽게 내 뺨을 쓸었다.

“머리와 옷 모두에 소스가 튀었군. 방으로 돌아가서 갈아입는 게 낫겠어.”

이후에는 빠르게 자리가 정리됐다. 양해를 구한 록허드가 아스테 부인과 함께 만찬장을 벗어났으며, 게렌이 그 뒤를 따랐다. 나 역시 네자르의 품 안에 갇혀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야 했다.

“네자르.”

“응.”

“나이프를 던졌는데 사람 몸을 관통할 정도면 얼마나 힘이 세야 하는 거야?”

방으로 돌아와 내 환복을 돕던 네자르가 기묘한 얼굴을 했다.

“그런 건 왜 물어봐?”

“궁금해서.”

“누구든 노력만 하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지. 너도 총사령관을 따라서 꾸준히 연습하면 가능했을 텐데.”

“아, 또!”

검술 연습은 몇 주 내내 농땡이만 까다가 결국 취소됐다. 그게 벌써 작년 초의 일인데 아직도 언급하길 포기하지 않다니. 역시 네자르의 뒤끝은 감탄할 만하다.

“많이 놀랐을 줄 알고 따라 들어온 건데…….”

등 뒤의 단추를 채우며, 네자르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익숙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네.”

낮은 음성에는 한 귀로 흘리기 다소 어려운, 옅은 불안과 후회가 배어 있었다. 네자르는 내게 일어나는 불운의 원인과 결과 모두를 자신에게 귀결시키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런 생각 말라는 이유를 백 개쯤 들어 구구절절 설명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등 뒤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쓸어내렸다.

“별거 아니잖아. 이 정도 담도 없으면 어디 가서 카발의 자존심이라 하겠어?”

네자르가 제 팔을 더듬는 내 손을 붙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딱히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그래, 사람이 긍정적이어서 나쁠 건 없지.”

말은 그렇게 하고도 부엌에서 주전자를 얻어 와 젖은 수건으로 내 얼굴과 머리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처럼 하나하나 챙겨 줬던 건 기억하는 모양이야.”

“몇 년 흐르지도 않았는데, 뭘.”

“금붕어가 되더라도 차라리 검술을 배우도록 할 걸 그랬나.”

네자르의 죄책감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깊이를 지녔을 테다. 전혀 그럴 필요 없음에도. 심지어 피해자는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인데.

“아스테 부인이랑은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한 거야?”

젖은 머리칼 사이사이를 닦는 그의 손이 약간이나마 느려졌다.

“그냥, 대화라고 할 게 있나. 귀찮게 구는 사람이 있을 거라 귀띔하기에…….”

네자르가 말끝을 흐리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대체 누가?”

덜컥. 하나 돌연 거칠게 열린 문으로 인해 내 물음은 허공으로 증발하고 말았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남자, 록허드가 내 얼굴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몸은?”

“어딜 유부녀 방에 함부로 들어와?”

“멀쩡해? 아니면 머리가 다쳤다거나.”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라곤 쥐뿔도 안 되는 록허드. 난 록허드를 밀어내고 물에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난 괜찮아. 그런데 록허드, 성안에서 문제가 생길 정도면…….”

“일부러 내버려 두고 있었던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마. 설마 오늘 일을 치를 줄은 몰랐지만. 젠장, 안일했군.”

단호하게 말을 자른 그가 네자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만약이란 건 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곧 호위할 사람을 보낼게.”

“난 필요 없어. 네 몸이나 잘 지켜.”

“그럼 케이틀린에게만 보내도록 하지.”

똑똑. 뒤이어 문을 두들기는 남자가 있었으니, 성문 앞에서 우릴 맞이한 집사였다.

“백작님, 마르첼 백작님께서…….”

“지금 간다고 전해라.”

한숨과 함께 어깨를 돌리던 그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호위 건일 거야. 젊은 놈이 겁은 또 엄청 많거든.”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나라도 겁나겠다.”

“결혼했다고 벌써부터 남의 편 드는 거냐? 매정하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난 오라버니 편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말하는 꼴을 보니 확실히 멀쩡한 것 같네.”

아, 맞아. 나는 이제 막 방을 나서려던 록허드를 불렀다.

“오라버니, 여기 소고기 말이야, 냄새가 너무 심한 것 같아.”

문고리를 잡고 선 록허드의 표정은 동의할 수 없다는 의사를 풍기고 있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난 이곳에서 지낸 몇 개월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록허드는 우리 남매 중 가장 입맛이 까다로워서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까다로운 만큼 게을러서 비리면 비린 대로 먹는 줄 알았지.

“하여간 좀 그래. 다음부터 내 식사에는 소고기 빼 줘.”

“깐깐한 손님이시군.”

문이 닫히고, 네자르가 저 구석에 밀어 두었던 난로를 끌어왔다.

“웬 비린내?”

“설마 못 느꼈어?”

네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뭐람, 괜히 나만 예민해진 기분이네.

“비린내가 아니면… 내 음식에만 다른 뭐가 들어간 건가.”

열심히 불을 붙이던 네자르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 부분은 내가 록허드에게 말해 둘게. 넌 가끔 이상한 데서 감이 좋으니까.”

그런 소릴 들으니 머릿속에서 음험하고 괴팍한 상상이 거침없이 부풀어 갔다. 설마 내 정체를 알고 독약을 넣었다거나…….

설마 그렇겠어.

근데 왜 비리게 느껴졌담.

***

해가 진 후에는 소란스러웠던 성의 분위기도 조금 잠잠해졌다. 한창이어야 할 오후에 해가 져서 그런 걸까. 하루가 반 토막 난 느낌이었다.

“죄송해요, 케이틀린. 만찬 자리에서 그런 추태를 보이게 될 줄은…….”

다시 만난 아스테 부인의 안색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기야 그녀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가 어디 흔하겠는가.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네클렌타 왕실을 뒤흔든 농염한 스캔들,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친다!』 1, 2권을 등 뒤에 숨겼다.

“외숙부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이제는 사라진 네클렌타 왕국의 전 백작이자, 1차 방어선이 무너진 직후 가문의 모든 재산을 훔쳐서 달아난 사람이죠.”

그리 말하는 아스테 부인의 표정은 마치 남 일 말하듯 평온했다. 그녀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최근 반란… 의 무리와 접점이 보여서 주시하던 차였어요. 영지민을 버려두고 도망친 사람이 설마 그러리라 생각하기 힘들었거든요. 돈 때문에 가족도 죽일 남자인데.”

어쩌면 그녀에겐 게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일 수도 있다. 하나 뱉어 내는 단어 하나하나에 뼈가 시릴 정도로 냉랭한 감정이 느껴졌다.

“한데 맞았던 거죠. 막상 절 죽이려니 마음이 복잡했나 봐요. 그렇게 커다란 괴성을 지르며 식탁에 올라섰던 걸 보면. 적어도 한 명쯤은 절 막아설 테니까.”

그래서 그 남자의 시선이 계속 바닥을 향해 있었던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테 부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감정이 격해져서 묻지도 않은 소릴 해 버리고 말았네요.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전혀 그런 낌새가 아니었는데.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표정 관리의 기준을 무참히 깨 버렸을 정도로.

“아니요. 오히려 가깝지 않은 관계에서 편히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스테 부인이 짓는 미소는 더없이 어색했다. 함부로 입을 연 행위를 조금 후회하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네클렌타의 정세가 워낙 흉흉해서 아이를 마음 놓고 키우기 부담스럽겠어요. 주변에서 언제 소식이 오느냐고 괴롭히지는 않나요?”

사심을 담았을 뿐, 별 의미 없이 던진 소리였는데 아스테 부인이 돌연 얼굴을 붉혔다. 특유의 눈처럼 새하얀 낯이 딸기즙이라도 떨어진 듯 빨개진다.

“아, 사실 지금 세 달째라…….”

“네?”

세 달?

“아직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어요. 말씀하신 대로 시기가 시기잖아요.”

“아… 그, 그렇죠. 축하해요.”

하늘도 무정하시지. 누구는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기고, 누구는 결혼 1년이 넘어가도 감감무소식이네.

기뻐할 일이고 축하할 일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충격적이기도 했다. 정말 나한테 문제가 있나? 아니면 네자르에게? 어느 쪽이든 문제가 있다면, 그럼…….

“서재로 가시나요?”

“아, 네.”

나는 서적의 제목이 부끄러워 등 뒤로 숨겨 뒀던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추천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몸 상태도 상태인지라 하는 일이라곤 독서가 전부거든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언제 외숙부가 암살을 노렸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아스테 부인이 몸을 돌렸다. 나는 이유 없이 패자가 된 기분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나는 모든 걸 다 가졌는데. 그리고 딱 하나가 없을 뿐인데.

“그런데도 이렇게 우울할 수 있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이런 데서 체감하게 되다니.

서재에 도착해 빈 책장에 책을 꽂은 후, 나는 걷는 법을 잊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람들은 1년 반이나 흘렀는데도 아이를 못 가졌다고 날 조롱하며, 반대로 이제 겨우 1년이 넘었다는 말로 날 옹호한다.

지금 내 기분이 그러했다. 괜찮을 때는 겨우 1년 반이잖아 했는데, 가끔 이런 식으로 남과 비교하게 되면…….

“당신, 누굽니까?”

고요함을 침범하는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등불 옆에 선 잿빛 머리칼이 마치 백발처럼 환했다. 언뜻 아스테 부인이 떠오르는 얼굴선. 게렌이었다.

“외숙부의 낌새는 어떻게 알아차린 겁니까. 설마 했는데 역시 황성의 암살자 출신인 건가.”

“……네?”

황성의 뭐요?

“모르는 척할 필요 없습니다. 넬이라는 남성의 정체가 카발의 황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대뜸 와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건 정말 심해를 파고들었던 정신이 확 깨어나는 발언이었다. 아니지, 조금만 생각하면 헛소리가 아니야. 네클렌타의 기사였던 게렌이 네자르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지. 무려 전장에서 얼굴을 마주한 사이 아닌가.

“새벽에 성 밖을 돌아다닐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웬만한 여성들은 사냥에 그리 전문적이지도 못한데 말입니다. 분명 황제의 안위를 위해 성 주변을 시찰하고 있었겠지요. 외숙부의 암살을 알아차린 점이라든가, 그 사실을 누님께 알리면서도 소란의 한가운데서 대담하게 자리를 지켰던 것을 보면… 황제의 호위로 온 겁니까?”

세상에. 어쩜 추측을 해도 저렇게 하나같이 틀릴 수 있을까?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부여잡고 긴 한숨을 쉬었다.

“게렌 경.”

그렇게 무뚝뚝하던 남자가 이렇게 길게도 입을 열다니.

“생각이 있다면 함부로 그분의 호칭을 입에 담지 마세요.”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 비록 새벽에는 기분 전환으로 말을 탔고, 내가 괴짜라 사냥에 취미가 있던 거고, 암살은 정말 천운으로 알아차렸으며, 아스테 부인에게 알린 적 또한 일절 없었고,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굳어 있던 것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내가 내 입으로 암살자라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지금 서재에는 저희뿐입니다. 그러니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죠. 오늘 점심의 사건을 겪으니 누구도 믿기가 힘드네요.”

게렌이 잠시간 입을 닫았다.

“그러실 수 있겠군요.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만난 김에 책 하나만 추천해 주실래요?”

“일전에 빌려 가는 모습을 봤던 것 같습니다만.”

“이 책이었어요.”

말과 함께 책장에 꽂아 두었던 『네클렌타 왕실을 뒤흔든 농염한 스캔들, 지금 그 진실을 파헤친다!』를 가리켰다. 물끄러미 책의 표지를 응시하던 게렌이 조금 늦게 답했다.

“……그냥 아무 책이나 고르신 겁니까?”

“그렇기도 했고, 일단 제목이 눈에 확 튀잖아요? 마르첼 씨가 적극 추천하시더라고요.”

“그 작자답군요.”

이어서 게렌은 나란히 꽂힌 책들 중 하나를 어려움 없이 골라 나에게 건넸다. 서적의 제목은 『네클렌타의 문화와 서정』.

“……정말 흥미진진해 보이네요.”

왜인지는 몰라도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지루함이 몰려왔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그자를 너무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마르첼 말인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저야말로 그러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멀리할 수 있는지 도움 좀 주실래요?”

“왜인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저한테 왜 멀리하려 하는지 물어봐 주시면 저도 물어봐 드릴게요.”

그는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제 보니 마뜩잖은 티를 내면서 해 달라는 건 꼬박꼬박 다 한다.

“이유가 뭡니까.”

“이러다가 곧 꽃다발 들고 와서 나한테 청혼할 것 같거든요.”

“제가 드리려던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군요. 그자는 제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자입니다. 당신을 꾀여서 무엇 하나 얻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 알아 두시는 게 좋습니다.”

“상냥하시네요.”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두 번째 만남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마치 다른 이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클렌타가 처음이시라면 그 책이 꽤 유용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쓸모없는 잡지식이지만 그 나라를 가장 잘 즐기려면 무엇보다 그 나라에 대해 잘 알아야 하니까요.”

조언과 함께 게렌이 고개를 까딱이고 사라졌다. 나는 두께만 한 뼘이 되는 엄청난 무게의 추천 서적을 들고 서재를 나왔다. 고작해야 이번이 겨우 세 번째였지만, 게렌과의 대화는 이런 점이 좋다. 서로 질질 끌 것 없이 산뜻하게 할 말만 하고 헤어지거든.

그렇게 새까만 복도를 따라 걷던 와중, 낯선 움직임이 시야에 잡혔다. 저 유려한 선의 주인은 여인이 분명했다.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여인이 들어간 방향은 네자르의 침실과 가까웠다. 설마 네자르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다른 방문자의 방인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쪽 복도의 방은 나와 네자르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유령을 본 건 아니겠지.”

뭐,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을 테다.

***

그다음 날에도 아스테 부인은 평소와 똑같았다.

하루 사이에 성내 경비가 눈에 띄게 강화된 덕인지 손님들 사이의 어수선했던 분위기 역시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특히 마르첼 놈은 저가 네클렌타 백작이라도 된 양 옆에 착 붙어서 우리를 안심시키려 갖은 노력을 다했다. 얼마나 들이대면 이제는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 마르첼. 그자만큼 욕구에 솔직한 인물도 적지. 기회가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으려는 자야. 이 성에도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거든.”

장갑을 벗으며 록허드가 내게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말을 타고 성 밖을 돌다 온 탓인지 거친 바람 내음이 났다.

“너희가 평범한 방계가 아니란 걸 눈치챈 모양이야.”

“어떻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냐. 케이틀린, 너는 타고난 핏줄의 기품을 쉬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해?”

록허드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를 뒤따라 성 외곽을 확인하고 온 게렌과 마르첼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게 기품이랄 게 있나.”

“너는 황후가 되기 전에도 카발 제국에서 가장 혈통 좋은 귀족 여식이었어. 제아무리 망아지처럼 굴어도 귀족은 귀족이다, 이거야. 넬은 더하지.”

“그럼 이제 어떡해?”

“어떡하기는. 그냥 지금처럼 계속 지내면 돼. 그렇다고 황성에서 온 자라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게렌과 마르첼이 가까이 오자, 록허드는 곧장 입을 닫고 입가에 대외용 미소를 띠었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즐겁게 하십니까?”

전혀 즐겁지 않았다만. 마르첼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으나, 대답은 내 대신 록허드에게서 나왔다.

“아아. 케이틀린의 혼담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혼담? 나는 깜짝 놀란 티를 숨기지 못하며 커다란 눈으로 록허드를 쳐다봤다. 아니, 대충 둘러대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뜬금없는 주제로?

“이야기가 오가는 가문이 있는데, 그곳 영식이 마음에 차지 않나 봅니다.”

“혼담? 저번 식사 자리에서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심지어는 내가 일전에 했던 발언과 정반대되는 거짓말이었다. 역시 일생에 도움이라곤 쥐뿔도 되지 않는 록허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하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없는 셈치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하나 중간에 끼어든 록허드로 인해 말이 가로막혔다.

“이런. 평생을 함께할 연인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슬픈 일도 없지요. 원래 교류하던 남성분이신가 봅니다.”

말문이 막힌 록허드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가 둘러대 놓고 나한테 넘길 건 뭐야? 눈치를 보니 게렌은 당연히 거짓이라 믿는 분위기였다. 관심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장갑 벗기에 여념인 것을 보면.

“아, 네.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예요.”

“워낙 가까운 사이라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누가?”

갑작스레 나타나 시야를 가로막는 얼굴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까,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와.”

“하나뿐인 여동생이 남자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안 와 볼 수 없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네자르가 내 뺨을 슬슬 쓰다듬었다.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방금까지 케이틀린 양의 약혼자분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케이틀린의 약혼자라…….”

네자르의 검붉은 눈동자가 말끝을 흐리는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날 강하게 옥죄었다. 대충 끼워 맞춘 거짓말임에도 괜히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냥 서로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 걸 그랬나.

“썩 괜찮은 놈이긴 하지요.”

대답하는 네자르의 어조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어떤 분입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할 남자라니, 궁금해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군요.”

“괜찮아 봤자 무엇 하겠습니까. 정작 내 동생은 남자로 느끼지 않는다는데.”

날 놀리고 있다. 네자르는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턱을 슬슬 쓸어내리며 네자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 케이틀린. 지금이라도 약혼을 무를까?”

“무르기는 뭘 물러? 약혼이 무슨 저녁 식단 정하는 일인 줄 알아?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내 결혼이야.”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괜히 졸아서 그런 걸까. 목소리가 대양을 가로지를 기세로 커졌다. 네자르는 늘 그랬듯 내가 반응하면 할수록 더욱 즐거워하며 떠들었다.

“그놈도 자기를 남자라 여겨 주는 여자와 만나고 싶을 거야, 케이틀린.”

“글쎄, 내 맘이래도? 오라버니라는 명목으로 내 결혼에 왈가왈부 말고 가서 체스나 두지그래.”

까칠한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려 보란 듯이 큰 폭으로 멀어졌다.

그런데 방금 정말로 친남매 싸움 같았어. 대화만 되새기면 릭이나 록허드와 다퉜다고 봐도 무방했다. 흐음, 괜찮은데? 나름 내 역할에 충실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가벼워졌다.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두 발자국 뒤에서 함께 걷는 게렌의 존재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성내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근처를 크게 돌고 있음에도 게렌은 마치 일행이라도 된 양 자연스레 내 뒤를 쫓아왔다.

결국 참다못해 걸음을 멈췄다.

꽤 솔직한 사람이네. 궁금하다는 표정을 못 숨기는 걸 보면. 어차피 어느 정도 알 만큼 알겠다,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로 했다.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그제야 게렌이 속 시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데서 애 같구나.

“연기인 건 알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도 상당히 가까워 보이더군요.”

“누가요? 설마 마르첼 백작?”

“황제… 아니, 넬 씨 말입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으니까요.”

게다가 결혼까지 한 사이 아닌가. 멀게 느껴진다면 그게 더 문제일 테다.

“정말 오랫동안 그분을 모신 모양입니다.”

“그렇죠.”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이었다. 게렌은 이제 내 뒤가 아니라 옆으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짧지 않은 고요가 흐른 뒤였다. 문득 머나먼 기억 저편에서 할 말이 떠오르기라도 한 양 새삼스럽고 어색한 어투였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까?”

정확히 무엇을 묻는 건지 알 수 없어 그를 힐끔 쳐다봤다.

“의무에서 벗어나 평범한 여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의무라. 내가 버거워하는 의무가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막연히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는데, 메마른 초원을 가로지르면서 머리를 굴리니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뭐, 가끔 하죠.”

일단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부터 고역이야. 정말 힘들다고.

내 긍정을 게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갔다.

그리고 그날 밤도 그 여자를 봤다. 어젯밤, 복도를 유령처럼 떠돌던 새하얀 피부의 여인.

초가 뚝 부러져 새것을 가지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네자르의 방 쪽으로 움직였던 게 떠올라 벽으로 바짝 붙은 채 가까이 다가갔다. 또각또각. 구두 굽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반나체에 가까운 새하얀 여인의 몸이 문틈으로 사라졌다.

잘못 본 게 아니야. 네자르의 침실이 정말 맞았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저 문 손잡이를 돌려 내부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야, 네자르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기는. 대체 뭘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나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침실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굳게 닫힌 네자르의 침실 문을 열 용기가…….

“없을 리 없지. 이번까지만이야. 다음에도 눈에 띈다면 그때는 당장 쳐들어가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어.”

오늘 참는 건 내가 네자르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내가 모르는 대업을 계획하는 것이라면, 모르는 척해 주는 게 옳으니까.

“그래도 궁금하다…….”

대체 저 반나체의 여인은 왜 네자르를 찾아간 걸까.

네자르를 향한 신뢰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옅은 불안감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심장 구석에 머물렀다.

***

그리고 그 불안감은 다음 날 해가 뜨고서도 계속됐다.

“네클렌타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으며 아들이 없는 가문에서는 촌수를 따져 가장 가까운 남성에게 가문을 물려준다. 이 같은 제도에 따라 네클렌타는 순종적인 여인상을 선호하며…….”

상념을 떨치기 위해 쉼 없이 『네클렌타 문화와 서정』을 읽어도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었다.

“네클렌타의 귀족 여인들은 환희초를 이용해 임신 여부를 확인한다. 환희초는 북대륙에 자생하는 희귀한 약초로, 꽃잎이 옅은 자홍색을 띠고…….”

혹시 내게 질린 건 아닌지. 질렸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아니, 솔직히 질린 게 맞는다면 그 이유가 뻔하기는 했다. 가진 거라곤 얼굴이랑 집안이 다인데 질려도 금방 질리겠지.

“약 8시간 후 소변을 봤을 때 주홍빛을 띠면 임신이라 판단한다. 환희초의 가장 큰 장점은 섭취 시 부작용이 없다는 점이며… 정말? 나도 아스테 부인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물론 임신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일이니까. 혹시 모르지, 아이가 생기면 네자르도…….

생각난 김에 곧장 아스테 부인에게 찾아가 환희초를 부탁했다. 아스테 부인은 별다른 물음 없이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단 점이 고마우면서도 참 씁쓸하게 느껴졌다.

휘익!

대단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고작 하루 만에 스트레스가 턱 끝까지 차오른 기분이었다. 나는 우울함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활과 과녁을 들고 성을 나섰다. 과녁은 새빨간 사과들. 서너 번에 폭죽처럼 터지는 모습을 보니 우울함이 조금은 밀려 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 하나 죽일 기세입니다.”

그렇게 세 개의 사과가 터져 나갈 때쯤, 뒤통수 너머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는 꽤 낯익은 목소리였다.

“그게 당신일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간밤에 아무도 모르는 큰일이라도 터졌답니까.”

“황실 기밀이라 말씀 못 드려요.”

“그런 것치고는 기분 상한 티를 너무 내시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성격이 좀 나빠서 그런 티를 못 숨겨요.”

과녁 쪽으로 다가가 부서진 사과로 엉망이 된 땅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남자, 게렌이 팔짱을 낀 채 가까운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면 비웃으실 것 같지만.”

비웃을 것 같으면 말을 아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동질감이 좀 느껴지는군요.”

그리고 이어진 말은 곧장 납득하기에 다소 난해한 발언이었다. 나는 활을 잡다 말고 아리송한 기분으로 팔을 내렸다.

“어디에서요? 성격 나쁜 점에서요?”

“아니요. 그런 걸 말씀드린 게 절대 아닙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인이기에 겪는 심리…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무인이 아닌데.

혹시 지금의 내가 대단한 사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열심히 단련하고 있다 생각하는 걸까. 간밤에 네자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실의에 빠졌다고?

그래, 뭐. 게렌이 내게서 동질감을 느낀다는데 굳이 찬물을 부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한번 쏴 보실래요?”

나는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그에게 들고 있던 활을 내밀었다. 말없이 날 응시하던 그가 팔짱을 풀고 다가와 활을 쥐었다. 걱정 마세요, 열 살 난 애보다 못 쏴도 입 닫고 있을 테니까. 충고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저번에 충분히 배웠거든.

“아.”

활을 잡은 게렌이 살짝 인상을 구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하니 그의 손끝이 미처 닦지 못한 사과즙으로 끈적끈적해져 있었다.

“죄송해요. 사과를 만지고 닦는 걸 깜빡했네요.”

“아닙니다.”

“여기요.”

내게서 손수건을 받아 든 게렌이 천천히 손바닥을 닦아 냈다.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제게 주시는 겁니까?”

“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어차피 손수건이야 황성이든 여기든 넘치는 물건이고, 번거롭게 오고 갈 필요를 덜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가 추천한 책은 읽어 보셨습니까?”

그런데 게렌의 표정은, 정말, 상당히 묘했다.

황당한 감정, 어처구니없다는 감정, 당혹스러움과 그 아래에 미세하게 깔린 수줍음까지. 수줍음? 왜 이 남자가 내게 수줍음을 느끼고 있는 걸까. 어색해도 너무나 어색한 조합으로 보이는데.

“지금 검사하세요? 오늘 아침에 서른 쪽 읽었어요.”

물론 생각 없이 줄줄 읊었던 수준이라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네클렌타의 가부장 제도, 환희초가 지닌 효과가 전부였다.

내 대답에 게렌은 깊은 상념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뭘?

“생각해 보겠습니다. 금방 답을 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니까 대체 뭘 생각해 보겠다는 건가요.

혹시 내가 그에게 손수건을 건넨 게 결투 신청쯤 되는 걸까. 별일 아니라 여기기에는 게렌의 반응이 이상하리만치 참신했다. 어제오늘 이해하기 힘든 일만 일어나네. 나는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며 자리를 정리했다.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녀가 차를 준비했다. 아스테 부인에게 부탁했던 환희초를 우려낸 차였다.

“맛은, 음.”

구려도 너무 구려.

그래도 부탁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임신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시점부터 생리 불순이 심각해진 지 오래였다. 임신 여부를 판단하기가 여러모로 복잡해진 상황에서 환희초만큼 고마운 존재도 없을 테다. 아예 다발로 부탁해서 제도로 가져갈까.

해가 지고 나서는 빌렸던 서적을 서재에 반납했다. 꿋꿋하게 읽으려고 했는데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탓이다.

“원래 이쯤이면 둘 중 한 명은 꼭 만나야 하는데.”

게렌과 마르첼. 특히 마르첼은 요즘 들어 저녁에 조용한 감이 있었다. 나와 억지로 대화하기 위해 서재 근처에서 죽치고 있던 남자인데 약혼자가 있다는 발언을 한 후로 유독 잠잠하다. 빠르게 포기한 건가.

그렇게 바위처럼 무거운 책을 처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또야.”

복도에 그 여자가 또 나타났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간 꽤 규칙적인 시간에 서재를 왔다 갔다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자의 발길은 여전히 같은 곳을 향했다.

네자르의 침실.

불현듯 그를 향한 내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지금 당장 저 여자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평생 네자르를 의심하며 살아갈 것 같았다. 정확한 사실도 모르는 채, 단순한 추측에 근거하여.

“이번에는 절대 안 돼.”

나도 모르게 두 발이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 멀지도 않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수십 가지 걱정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내 걱정이 사실이면 어쩌지? 저 여자가 네자르 앞에 보란 듯 서 있으면 어쩌지? 네자르에게 다른 여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끼익.

망설일 틈도 없이 문을 밀었다. 어두운 방 내부의 노란 등불이 가장 먼저 시야로 들어왔다. 사그락, 얇은 천의 마찰음과 방 안을 데우는 뜨거운 공기.

“……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절망감이었다. 너른 침대 앞에서 새까만 머리의 여자가 허리끈을 푸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놀란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얇은 허리를 감싼 비밀스러운 손동작이 흠칫 제자리에서 굳었다. 여유를 잃은 것은 비단 그 손뿐만이 아니었다. 내 표정 역시 평정심을 잃고 무너졌다. 저 곱게 자란 영식처럼 하얗고 곧은 손가락의 주인이…….

“죄, 죄송해요. 제가 방을 잘못 찾아왔네요.”

다름 아닌 마르첼이었던 것이다.

타악.

“……맙소사.”

정말 맙소사.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니지. 이 방은 분명 네자르의 침실이 맞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복도 끝부터 다시 살폈지만, 역시나 네자르의 침실이 맞았다.

설마 네자르, 내 걸음 소리를 알아채고 침대 밑에 몰래 숨은 거 아니야?

달칵.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자르의 침실 바로 건너편 방이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남자는 손에 작은 등불을 들고 있었다. 눈에 띄게 크고 단단한 신장과 어둠에 녹아들듯 검은 머리칼. 우아하게 쭉 뻗은 두 다리.

“케이틀린? 거기서 뭐 해?”

바로 네자르였다.

“마침 따뜻한 차를 가지러 가던 차였는데. 따라올래?”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엉겁결에 그의 뒤를 따랐다. 힐끔 내가 선 방의 위치를 살피던 그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틀 전에 방을 바꿨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나 보군.”

그랬었나. 뒤따라 걸으며 멍하니 기억을 뒤적이니 그런 말을 했던 때가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또 여자가 들어갔나 보지?”

“아, 응.”

“아스테 부인의 조언이 정확했어. 네클렌타산 얌체가 계속 수작을 걸기에 몰래 방을 바꿨지. 그딴 일로 귀찮아지기 싫었거든. 한데 그저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군. 머저리처럼 계속해서 같은 방에 보내는 걸 보면.”

네클렌타산 얌체라면 이 성에 아주 대표적인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직전에…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네자르가 방에 없다는 걸 아는 것 같던데. 그럼 모르는 척 본인이 그 방을 찾아가 일을 치르는 건가? 왜? 설마 스릴을 즐겨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난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마르첼의 사생활을 이 이상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투명해도 저리 투명할 수가 없어. 정부라도 만들어서 간섭하고 싶었던 모양이더군. 일단은 내가 미혼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니까.”

나한테만 찝쩍거리는 줄 알았는데 네자르한테도 귀찮게 굴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오자 굳어 있던 입가가 절로 풀어졌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며 네자르에게 팔짱을 꼈다.

“잘했어, 케이틀린. 널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아꼈는데 내가 괜히 오해를 살 뻔했구나.”

다 이해한다. 이해하기에 네자르를 다그칠 수 없었다. 내가 그였어도 일일이 보고하지 않고 내 선에서 끝내려 했을 거야. 그렇기에 마르첼의 수작을 굳이 입에 안 담았던 거니까.

그날은 오랜만에 네자르의 품에 안겨서 잤다. 마르첼의 사생활을 엿본 점에 대해선 조금 미안했지만, 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까.

“나는 내가 아이를 못 가져서 그런 줄 알았어.”

“참 너다운 걱정이네. 누가 들어도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발이 할 법한 걱정이야.”

정수리 위에서 들려오는 네자르의 목소리는 반쯤 졸음에 젖은 상태였다. 나는 머리를 움직여 좀 더 열심히 편안한 자세를 찾았다. 네자르의 팔은 근육이 워낙 딱딱해서 베고 자기에 불편한 감이 있다.

“모른 척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어. 후계는 황실의 대업이니까.”

“그 작은 머리로 별생각을 다 했군. 열이 올라서 터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고민은 그만두고 무작정 쳐들어갔잖아. 못 볼 꼴을 보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미안해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 방의 주인은 네자르였고, 아닌 걸 알았다 하더라도 주인이 있는 성의 텅 빈 방에서 그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일삼다니!

이마와 닿아 있던 그의 가슴이 옅은 웃음과 함께 흔들렸다.

“귀족들이 너 정도의 행동력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의 제국보다 몇 배는 더 평화로웠을 거다.”

“그 말 하니까 떠올랐는데, 예전에 록허드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 제국의 귀족들이 나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왜?”

“나 같았으면 야만인의 땅이 되었을 거래.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피의 제국이 되었을 거라나.”

“언제 한 소리인데?”

“글쎄, 언제였지… 열한 살이었나.”

“흐음. 그때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지.”

시답잖은 이야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이에 일렁이는 침실의 등불도 소리 없이 꺼졌다. 어둠은 깊었고, 스산한 기운에 서너 번 잠을 깬 것을 제외하곤 평온한 밤이었다.

***

다음 날.

네클렌타에서 보낸 시간을 계산해 보니 벌써 5일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제 사흘이면 제도로 귀성해야 하는 날이 돌아올 테다.

나는 남은 시간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 일정을 계획하기로 했다. 네자르는 바쁘니까 함께하기 힘들 테고. 아스테 부인에게 조언을 받아서 간단한 네클렌타 여행 계획을 수립하는 게 좋아 보였다.

하나 그런 생각은 기상한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허.”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하.”

아스테 부인에게 부탁했던 환희초가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꾸, 꿈이지?”

그래, 꿈일 거야.

꿈이 아닐 수가 없어. 내가 잠이 덜 깼나… 임신이라고?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면서 옷을 정리했고, 시녀를 불러 목욕을 준비했다.

분명히 주황색이었어. 하혈인가 싶었지만 냄새와 생김새가 전혀 아니었다. 환희초의 존재가 급작스레 떠올라 확인해 봤는데, 설마가 현실이 되었을 줄이야!

“그런데 혹시 책에 적힌 효능이 거짓이라면…….”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무려 전 네클렌타 왕국의 왕손이 추천한 서적이지 않은가? 헛소리가 줄줄 담긴 책을 내게 안겨 줬을 리 없다.

임신.

내가 임신을 했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

“엄마, 나 임신했어. 세상에… 네자르, 내가 임신을 했대! 아빠, 에든, 록허드, 릭, 카론, 데이지, 릴리, 캐롤라인, 론, 툴드, 성 앞에 핀 매화님, 종종 찾아와 나랑 놀아 주는 황성 고양이님, 환희초를 구해 주신 아스테 부인, 너무너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저, 열심히 살게요! 평생 좋은 일만 하면서 살게요!”

나는 수분 만에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고 거울 앞에 섰다.

이, 이제 어쩌지? 임신하면 뭐부터 해야 하는 걸까. 임산부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행동을 하지?

“아니야, 케이트. 진정하자. 일단 심신의 안정이 필요해. 당황하면 안 돼. 배 속의 아이도 너만큼이나 놀랐을 거야.”

이럴 수가. 내 배 속에 아이가 있다니.

침을 꿀꺽 삼키며 배를 매만졌다. 뱃살이 살짝 나와 있긴 했으나 이건 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순수한 내 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가야, 미안해.”

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어젯밤 그 파렴치한 꼴을 눈에 담았구나. 나는 정말 나쁜 엄마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아가. 오늘부터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먹을 테니까.

호들갑스럽게 겉옷을 챙기고 방을 나왔다. 곧바로 네자르에게 향하려 했으나 침실이 텅 비어 있었기에 백작 집무실로 달려갔다. 열려 있는 문 틈새로 나직한 목소리가 여럿 오가는 게 들렸다.

“케이틀린.”

네자르는 록허드의 집무실에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게렌까지.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아, 그게…….”

당장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데, 게렌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다. 차라리 눈치를 줄까. 눈치 빠른 게렌이라면 중요한 일임을 직감하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 줄 텐데.

“마침 잘됐군요.”

하나 게렌은 자리를 비켜 주기는커녕 대단한 무언가라도 발표할 기세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처남. 케이틀린과 관련해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케이틀린 양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네?

“네?”

약간이나마 근엄함이 풍겼던 록허드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케이틀린 양이 황제 폐하의 비밀 호위 임무 중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폐하의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리 말한 게렌은 몸을 돌려 의자에 앉은 네자르와 눈을 마주쳤다. 황당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는 록허드와 달리 네자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그런데 너무 웃기잖아. 이렇게 뜬금없이 결혼하자는 건 또 뭐람. 내 허락은 필요 없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따지려는 입술도 잘 안 열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게렌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암살자의 신분은 기사와 달리 대대로 황실에 종속된 노예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평생 함께하며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시간의 정적. 곧이어 네자르가 두 번째 헛웃음을 내뱉었다.

“건방지긴.”

눈을 얇게 뜬 그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한데 케이틀린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만.”

게렌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최대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냐?’라는 의미를 담아서 그를 노려봤다. 내 뜨거운 시선의 의미를 잘 파악했는지, 게렌의 얼굴이 살짝 무너졌다.

“그녀가 저에게 손수건을 주었습니다.”

“좋았겠군. 아주 부러워 미치겠어. 그 손수건에 ‘사랑해요. 결혼해요.’라고 적혀 있기라도 했나?”

맹세코 그런 괴상망측한 글귀 같은 건 적은 적 없었다. 때마침 정신이 혼미한 표정으로 머리를 휘저은 록허드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네클렌타에서는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으로 프러포즈를 대신해.”

그야말로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뛸 만한 발언이었다. 아니, 네클렌타에 그런 문화가 있었단 말이야? 록허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게렌에게 청혼했다는 주장은 옳은 주장이 되지 않은가.

“그리고 케이트는 그 의미를 전혀, 절대 몰랐을 거다. 그러니 처남, 케이트가 처남에게 프러포즈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록허드는 제가 날 케이트라 부른 것도 모르는 모양새였다. 물론 게렌 역시 케이트가 내 본명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태풍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밭 위에 쓸쓸히 선 농부처럼 허망해 보였다.

“케이틀린 양.”

“네.”

여기서는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게 옳다. 아무리 몰랐다고 하더라도 게렌에게 범한 무례가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죄송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아서 실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당신처럼 편안한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음. 장담컨대 게렌은 자신의 말을 무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와 결혼하시겠습니까?”

게렌이 갑자기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경위가 무엇일까. 대강의 추측이야 가능했다. 짧은 언급이었지만, 나를 ‘편안한 여자’라 지칭한 것을 봐선 괄괄하며 활을 쏴 대고 까칠하게 굴었던 점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날 특별한 여자라고 여긴 거겠지. 자라 오면서 마주해 온 여인들과 한참 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꼈을 테다. 네클렌타의 여인들과 다르게 순종적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본인이 좋아하는 사냥에도 능숙하니까.

하지만 나 같은 여자는 카발 제국 지천에 깔리고 널렸다. 캐롤라인은 나보다 더 주도적이고, 릴리는 나보다 더 전문적이며, 카론은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야무지다.

그러니 내가 아닌 다른 제도의 여인이 이곳을 방문했어도 게렌은 그 여인에게 눈길이 갔을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그의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방법에 대해 저 신중을 가하게 된다.

일단 거절부터 하자. 그리고 그다음은…….

“뭐?”

하나 내가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보다 한 박자 더 빠르게 터져 나온 목소리가 있었다. 사자후는 네자르가 아닌 록허드의 것이었다. 헛웃음을 뱉으며 이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네자르와 다르게 록허드는 목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이봐, 처남. 내가 어이가 없어서… 처남이 왜 내 여동생에게 고백하는 건가?”

“사촌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만.”

“누가 들으면 사촌은 여동생 아닌 줄 알겠어? 처남도 참 웃기는군. 그렇게 대뜸 고백하기 전에 적어도 나의 허락은 맡았어야지?”

“백작님의 허락을 말입니까?”

“그럼 여기서 내가 아닌 누구의 허락을 맡겠다는 건가!”

“당연히 황제 폐하의 허락을 맡으려 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케이틀린 양의 허락이 필요하겠지요.”

그렇게 록허드와 게렌의 기나긴 토론이 시작되었다. 나의 신분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채 죽어도 자신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록허드. 그리고 그런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렌 두 명이서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선 양 꾸준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케이틀린, 거기 그만 서 있고 이리로 와서 앉아.”

날 잡아당겨 앉힌 네자르가 벽난로로 다가가 달구어진 주전자를 들고 왔다. 그는 자신의 찻잔과 새로운 찻잔에 뜨거운 우유를 부어 그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저 둘이서 내가 카발의 황제라고 아주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있어. 이제는 스쳐 지나가던 철새도 내가 누구인지 다 알 기세로군……. 그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하도 황당한 일을 당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맞아,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

“나.”

그냥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어찌나 긴장되던지 손끝이 덜덜 떨려 찻잔을 받아 들지 못했다.

우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 이, 임신한 거 같아.”

쨍그랑.

그의 얼굴을 살피기도 전에 물건 깨지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앗, 뜨거워!”

손가락 사이로 튄 뜨거운 우유. 바닥을 내려다보니 네자르가 들고 있던 찻잔이 산산조각 나 흩어져 있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소음에 놀란 록허드와 게렌의 시선 역시 네자르를 향한 채였다.

내 옆에 나란히 앉은 네자르는, 뭐라고 묘사해야 할까. 마치 세상의 멸망을 전해 들은 사람 같았다. 시간을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그가 깜빡이는 눈꺼풀 역시 느리게 열리고 닫혔다. 이윽고 그는 내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에 묻은 우유를 조심스레 닦아 냈다.

“록허드.”

개전을 선포하는 황제의 음성도 이보다 더 무겁고 진중할 수 없을 테다. 그 변화를 감지한 록허드가 진지해진 얼굴로 답했다.

“왜.”

“당장 제도로 향하는 마차를 준비해. 임산부의 편의를 고려해서 아주 안전하고 편안한 마차로. 또 임산부를 도와줄 시녀와 임산부를 지켜 줄 기사와 임산부의 식사를 만들어 줄 요리사도 필요해. 임산부의 체온을 유지시켜 줄 옷과 담요, 임산부의 여가를 담당해 줄 수준 높은 서적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준비시켜 놔.”

“……임산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은 록허드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하다.

그,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레? 물론 당장 황성으로 돌아가는 게 맞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임신 초기인 것 같기도 하고, 네자르도 볼일을 다 못 끝냈을 텐데. 이렇게 하루아침 만에 네클렌타를 떠나도 괜찮은 걸까.

“잠깐, 임산부라니… 임산부?”

멍하니 서 있던 록허드가 내게로 달려왔다. 그는 네자르가 그러하듯 반대쪽 의자에 앉아 내 팔을 부여잡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축하를 하려면 하든가. 같이 기뻐해 주려면 기뻐해 주든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런 말 없이 날 붙잡은 두 명과, 그런 두 명을 혼란스럽게 응시하는 게렌. 그 침묵이 환희로 깨지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

준비 시간과 해가 일찍 지는 점을 고려해 네클렌타를 떠나는 날은 다음 날 오전으로 정해졌다. 일련의 사건으로 나의 정체를 어느 정도 눈치챘는지, 다음 날 귀성으로 바쁜 와중에 게렌이 찾아와 짧은 사과와 인사를 건넸다.

“불쾌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간밤에 고민을 해 봤는데 역시 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여성을 대하는 게 상당히 서툰 편이라서 말입니다.”

“이해해요. 생각이 짧았던 건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고작 변방 귀족 가문의 영애인 제가 왕족의 피가 흐르는 분께 말을 놓을 순 없죠.”

“그렇긴 하군요. 아쉽습니다, 저라도 편하게 말을 놓을 것을.”

다소 어색하기는 했지만 게렌이 옅게 웃었다. 이렇게 보니 그와 판시온을 비교했던 며칠 전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판시온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경 덕분에 네클렌타에서의 생활이 지루하지 않았어요.”

“영광입니다.”

그와 인사를 나눈 후, 준비를 마치고 성 밖으로 나서는 길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마르첼이 나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급작스레 떠나시는 겁니까? 아직 함께 나눌 술잔이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양심이란 게 존재는 하나 보다. 마르첼은 이전처럼 내게 억지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네자르에게 찝쩍대는 건 여전했기에…….

“이봐, 백작. 나는 야망 있는 자를 싫어하지 않아. 그러니 네클렌타를 떠나는 기념으로 조언 하나 하지.”

결국에는 네자르가 한마디 하게 만들었다.

“예?”

“카발 제국의 귀족을 만났을 때는, 밤마다 향유로 범벅 된 여인을 보내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거야. 고위 귀족이라면 더더욱. 선황제와 달리 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인성도 중시하거든.”

확실히 네자르가 즉위한 이후 사교계의 분위기 또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정부 없는 귀부인을 매력 없는 여자로 치부했는데, 근래에는 그런 분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따라서 내 시대의 귀족들은 전부 내 눈치를 봐. 사생활에 오점을 남기는 걸 꺼려 한단 소리지. 알아들었으면 앞으로는 방식을 좀 바꿔 보는 게 어떨까 싶군. 너무 구닥다리잖나.”

마르첼의 어깨를 작게 두들긴 후 네자르가 날 이끌고 성을 나갔다. 방문했을 때와 달리 돌아가는 길의 마차는 그 수부터 달랐다. 짐마차까지 합쳐서 총 일곱 대인 건가. 심지어는 따라나서는 호위 기사도 두 자릿수였다.

“케이틀린, 불상사를 대비해 제 시녀 둘이 따라갈 거예요. 고심 끝에 선별한 시녀들이니 실수 없이 잘 도울 겁니다.”

“고마워요, 아스테 부인.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네요.”

“당연한 일인걸요.”

부드럽게 웃는 아스테 부인 옆에서 록허드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애가 애를 낳네. 다음에 볼 때는 나도 조카라는 게 생기는 건가?”

“황손을 조카라 취급하는 건 반역죄에 해당된다는 걸 잊은 거냐, 록허드.”

“마음에 안 들면 팽하시든가요, 폐하.”

자신만만한 맞대응에 네자르가 입을 닫았다.

북쪽 끝 네클렌타 백작에 봉해졌으니 아마 차후 50년은 네자르 앞에서 멋대로 굴 수 있을 거다. 실제 봉한 건 그가 아닌 나인데도 말이지.

“몸 꼭 챙기셔요.”

“고마워요.”

아스테 부인이 조심스럽게 날 껴안았다. 록허드는 작별 인사 없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우, 기분 이상해. 나는 웃는 낯에 어깨를 떨어 주고는 마차에 올랐다.

물론 내 발로 오르지는 않았다. 네자르가 내 행동 하나하나를 불안하게 여기는 탓에 반쯤 안겨서 올라야 했다.

“꿈에서 봤는데 너랑 똑같은 눈동자 색을 지닌 여자아이였어.”

“누가?”

“내 아이.”

네자르는 의자 구석에 쌓여 있던 담요와 쿠션을 차례대로 내 몸에 얹었다. 안 그래도 외투 때문에 불편해 죽겠는데 꼼짝도 못 하게 생겼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임신 사실을 어제 알았는걸.”

“작년부터 종종 꿨어, 너에게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확실해. 첫째는 딸이야.”

그리 말한 네자르는 마지막 다섯 번째 담요를 내 어깨에 두르곤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대뜸 꿈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얼굴도 모두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네자르. 그건 안 돼. 첫째가 딸이면 조금… 위험하다구.”

“뭐가?”

“날 닮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제국의 안녕을 위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

“걱정하지 마. 딸은 원래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닮아.”

어쩜 빈말이라도 날 닮아서 더 좋을 거란 소리는 안 해 준담. 심통이 나서 그의 말을 긍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아들 낳을 거야.”

“딸이래도.”

“내 배 속에 있으니 내가 알아. 분명 아들이야.”

“그럼 아들도 낳고 딸도 낳으면 되겠군.”

그건…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괜히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무슨 상관이랴. 딸도 좋고 아들도 좋으니 부디 내 머리만 닮지 않았으면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네자르를 닮아야 제국의 경사이면서 내 경사이지. 나의 어린 시절과 똑 닮은 아이를 낳는다는 건… 어휴, 상상만으로도 버거웠다.

네클렌타 마침

휴식

정말, 모처럼의 휴식이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얼마 만에 갖는 건지.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만끽하는 끝 봄의 바람이란 이토록 행복한 것이었다.

물론, 그도 가능하다면 모든 일을 적당한 선에서 적당히 해치우고 싶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그에게 가장 절실한 바람일 테다. 하나 세상에는 성격상 죽어도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의 유독 꼼꼼하고 세심한 성정으로 인해 귀족들과 행정관들이 11년 동안 죽어 가고 있었다. 5년이면 나아지겠지, 10년이면 살 만하겠지 여겼던 그들도 지금쯤 포기할 대로 포기한 상태일 터다.

벌써 11년인가.

“흐음.”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시간이란 화살촉이 놀랍도록 빠르다는 것을 조금씩 인정해 가고 있었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하렘에서 날밤을 까는 것과 혈통을 보전하는 일이 전부였던 친부도 그런 말을 했었다. 황좌는 뼈와 살을 갈아서 지키는 자리라고. 눈 깜빡하면 10년이, 뒤돌아보면 30년이 흘러가는 그런 자리라고. 업적이라고는 북벌 토벌과 자신을 탄생시킨 것이 다인 남자에게서 나올 소린 아니었다.

“아버지!”

네자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럽게 뛰어오는 자그마한 몸뚱이가 보인다. 네자르는 아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곧이어 아이의 몸이 튀어 오르듯 날아 그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 그거 보셨어요?”

“무얼?”

“그거요.”

굽힌 허리를 펴면서 아이의 몸을 들어 올렸다. 이제 겨우 일곱 살에 불과한 황자가 그의 품에서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기 바쁘다.

“제가 열심히 했는데…….”

“그러니까 무얼 열심히 해?”

“그림이요.”

아아. 대충 짐작이 갔다. 어젯밤 케이트가 하루 종일 붙잡고 열변을 토하던 그 그림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워 종알종알 주절대던 목소리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게 나고, 이게 네자르. 어쩜 머리색도 똑같이 칠했담! 롤랑의 예술 감각은 천재적인 게 틀림없어.’

‘케이트, 그 정도는 다섯 살 난 아이도…….’

‘메리벨을 가장 크게 그린 것 좀 봐. 악마처럼 뿔이 솟고 검을 들고 있는 것도. 롤랑의 세계에서는 메리벨이 가장 무서운 사람인가 봐.’

‘첫째가 똘똘하긴 하지.’

10여 분 가까이 그림을 설명하던 케이트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랍 안에 그림을 보관했었다. 그 안에 쌓여 있는 롤랑의 그림만 백 장 가까이 될 텐데.

“봤지. 아주 똑같이 그렸더구나.”

“저, 정말요?”

그의 두 번째 자식이자 제국의 황자, 롤랑이 단풍잎 같은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에 네자르는 지쳐 있던 마음에 무궁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가만히 돌이켜 보면 어제의 그 앙증맞은 그림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했지. 당시에는 워낙 피곤해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일곱 살 아이의 손에서 탄생했다고는 추호도 믿을 수 없는 비범한 작품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케이트의 말마따나 롤랑은 예술에 천재적인 기질이 있는 듯했다. 아니,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있었다.

“오늘도 또 그릴 거예요. 오늘은 아버지만…….”

“롤랑!”

그때, 앙칼지고 또렷한 음성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꽤 먼 거리였다. 하지만 네자르는 그 외침 하나만으로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펑퍼짐한 호박 치마를 두른 소녀가 포장된 도로 위를 질주하는 사륜마차처럼 거칠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네자르의 품에 안긴 롤랑을 향해 외쳤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된댔지? 너, 모지리야? 왜 누나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

안색이 푸르죽죽해진 롤랑이 네자르의 옷을 꼬옥 쥐며 대답했다.

“그, 그런 적 없거든!”

“없긴 뭘 없어? 방금도 아버지라고 불렀잖아!”

“거, 거짓말하지 마. 저어기 먼 곳에선 들리지도 않잖아!”

“나는 다 들려. 시끄럽구 당장 이리로 내려와. 감히 누님이랑 대화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봐?”

황실의 핏줄임을 입증하는 어두운 검홍색 눈동자가 네자르를 향했다.

“폐하, 롤랑을 내려 주세요. 누나 된 도리로서 시건방진 동생을 가르쳐야겠어요.”

입술을 쭈욱 내민 롤랑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네자르가 팔을 내리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다.

“롤랑! 너는 사내가 뭐 그리 눈물이 많니? 당장 입술 못 집어넣어?”

오늘도군. 오늘도 귀여운 강아지들은 그를 난처하게 만든다. 물론 문제랄 건 없었다. 한 아이는 기개가 높으며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다른 한 아이는 여리고 섬세할 뿐이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여아고, 후자가 남아라는 것 정도.

“롤랑, 거기서 진짜 울면 나 화낼 거야. 폐하를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내려오렴. 누나 말을 잘 들으면 혼내지 않을게.”

누굴 닮았는지, 메리벨은 저보다 겨우 세 살 어린 동생을 아이 보듯 했다. 그런 메리벨도 고작해야 열 살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외모도 성격도 그를 쏙 빼닮았다고 하지만, 네자르는 동의할 수 없었다. 메리벨은 동생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을 뿐,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떠한가?

“쯧.”

천사 같은 아이와 자신을 비교하려니 괜한 죄책감이 든다. 네자르는 사과의 의미로 메리벨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저, 내, 내려 주세요, 폐하.”

그리고 늘 그렇듯, 이즈음이면 롤랑이 제 누이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시점이었다. 아버지라는 소릴 듣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이쪽이 듣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메리벨의 의지가 워낙 강경하니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메리벨은 무려 다섯 살 때부터 그를 아버지가 아닌 폐하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때 느낀 서운함을 롤랑을 통해 풀 수 있을까 싶었으나, 헛된 꿈이었던 듯싶다.

“이리로 와. 폐하의 휴식을 방해하면 못써.”

두 눈을 추욱 늘어뜨린 롤랑이 메리벨에게 안겼다. 메리벨은 제 동생의 손을 잡고 후원을 벗어났다.

네자르는 겨우 웃음을 참아 냈다. 조그마한 두 아이가 의젓한 태도를 보이려는 모습이 그리 귀여울 수 없었다. 몇 초 만에 시무룩한 기분이 풀렸는지, 롤랑이 폴짝폴짝 뛰며 메리벨과 나란히 걸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카발 역사상 가장 유능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제기랄.

봄 향기의 따스함이 감도는 행복도 잠시, 듣기만 해도 짜증이 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네자르는 절로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꾸욱 누르곤 말했다.

“저리 꺼져.”

겨우 좋아진 기분이 론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잡쳐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늘 그렇듯 론은 뻔뻔하게 제 할 말만 늘어놨다.

“귀족들 사이에서 메리벨 전하의 즉위식과 관련해 말이 많습니다. 올해 초로 예정되었던 후계자 즉위식이 가을로 밀리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그럴 만하지요.”

“올해 안에는 정해질 거다.”

“황후 폐하께서 아직도 반대하시는 겁니까?”

네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간 가만히 서 있던 론은 주인의 답이 들리지 않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눈치가 매우 빠르십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미 제게 한 번 즉위식이 취소된 연유를 물었었죠.”

“메리벨이?”

“예, 이런저런 이야기로 둘러대긴 했으나… 본인의 자질이 부족해서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애라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런 뜻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는 그들만이 아니라 제도의 모든 귀족이 알고 있을 테다. 즉위식이 연기되는 이유는 그저…….

‘1~2년 정도는 늦어도 되잖아. 황제의 총애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 나는 그저 메리벨이 하루라도 도 의무에서 자유로웠으면 할 뿐이야.’

카발 제국의 후계자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의무를, 허락되는 한 조금이라도 더 늦게 맡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랬기에 네자르는 그날처럼 수차례 케이트와 대화를 반복해 왔다. 그도 케이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기 때문이다.

‘너의 배려가 오히려 메리벨을 더 불안하게 할 수 있어, 케이트.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예민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걸 잊지 마.’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거야?’

싱긋 입꼬리를 끌어 올린 케이트가 네자르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다운 그만의 여인이지만,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이후로 눈에 띄게 차분해진 그녀였다. 케이트는 네자르의 손을 잡고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불안해하지 않도록 돕는 게 부모의 역할이잖아, 네자르. 메리벨은 똑똑해. 1년쯤 늦는다고 해서 후계자 수업에 뒤처지지 않을 거야.’

네자르는 아이들을 향한 케이트의 애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평온과 사랑을 아이들 또한 오롯이 느끼도록 하는 마음이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둘은 메리벨의 황태녀 즉위식을 내년 초로 정해 둔 상태였다. 케이트의 말마따나 자질의 문제가 아님을 메리벨에게 언질 해 줄 때가 온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메리벨에게 직접 설명하도록 하지.”

“그러신다니 제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요. 그렇다면 다음 안건으로…….”

“미치겠군. 지금 쉬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이러다가는 아주 자는 도중에도 귓가에 속삭이겠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론은 이제 네자르가 어떤 욕설을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위인이 되어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언급된 김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황녀 전하의 약혼자 건에 대해서요.”

“하.”

더없이 불쾌한 얼굴이 된 네자르가 손을 저었다.

“그 애는 겨우 열 살이야. 파렴치한 소리 말고 꺼지기나 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가문의 후계자, 그것도 심지어 카발 황실의 후계자가 즉위식이 다가오도록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단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야 당시 황성의 분위기가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이봐, 론. 귀가 막혔나? 닥치라는 말 안 들려?”

“황녀 전하의 수준에 맞는 가문의 영식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제국의 황권이 안정되고…….”

“그 애는 안 돼!”

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또 시작이로군.’이란 감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차후 황후 폐하와 의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케이트가 허락하더라도 짐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마침 황후 폐하께서 저어기 오시는군요. 지금 당장 여쭈면 되겠습니다.”

론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저만치에서 양산을 쓴 케이트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히 올려 묶은 머리 때문에 길고 하얀 목이 훤히 드러난 상태다. 네자르는 그 모습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구겼다. 저 말간 얼굴에 반해 매일같이 훔쳐보는 귀족 나부랭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잘생긴 얼굴이 왜 이런담. 설마 둘이 싸웠어? 이번에는 또 무엇이 문제인데 그래?”

네자르는 케이트의 팔을 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그마한 손에서 양산을 가져가 햇볕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네 의견이 필요해, 케이트. 메리벨과 관련된 일이야.”

론이 입을 열기 전에 네자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생각을 읊었다. 길게 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메리벨과 롤랑에 관련된 일이라면 지금처럼 이상하게 말이 길어지곤 했다. 케이트는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눈을 응시하며. 신뢰와 행복이 충만한 시선으로.

목이 꽉 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케이트의 저 완벽한 눈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꿈처럼 느껴졌다.

고작 20년 만에 그의 세계가 변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색을 달리했다. 네자르는 자신을 둘러싼 안온하고도 황홀한 세상을 둘러봤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그는 이 완벽한 순간을 위해 버텨 온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고통과 외로움은 오늘의 평온하고 따스한 순간을 위해 바쳐진 시련이었던 것이지.

“네자르? 왜 자꾸 말하다 말고 웃어?”

“……내가?”

손을 들어 입가를 스윽 매만졌다. 케이트의 말대로 입술 끝이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아. 부인을 비웃은 건 아니야.”

“그만 좀 웃어. 난 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줄 알았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케이트가 제 뺨을 만졌다.

케이트는 론의 주장에 분개했다. 네자르 같은 후보를 찾아 올 게 아니면 입도 달싹 말라며 론을 혼쭐냈다. 그에 론은 ‘황제 폐하같이 예민하고 성격 더러운 분을 한 분 더 모시느니 차라리 입 닥치고 있겠다’는 표정이 되어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네자르는 론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휴식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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