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 어느 기사의 하루 마침
IF 외전
그날은 네자르가 처음으로 황성을 방문한 날이었다.
“필요하시다면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결국 오고 말았군.
시종이 물러가고, 네자르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방 안을 훑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카발도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를 지닌 집안이었다.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 여겼었는데, 확실히 황성은 남다르긴 남다른 모양이었다.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금실로 된 벽지 위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그림들이 즐비했다. 이 모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2~3일은 족히 걸릴 수준이었다. 네자르는 답답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고 창을 가리고 있던 벨벳 커튼을 거두었다.
“넓군.”
황성, 그중에서도 본성의 후원은 고개가 절로 저어질 정도로 무섭게 드넓었다. 죽은 잔디 위로 새하얗게 깔린 눈들이 어쩐지 다른 세계의 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네자르는 그 낯선 분위기를 잠시 음미하다가 넥타이를 길게 빼 내던졌다. 록허드, 그 변덕쟁이 2황자만 아니었다면 황성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다. 제 누이의 생일 선물을 함께 골라 달라는 핑계로 제도까지 데려오더니, 밤새 술을 퍼마시다가 알코올 내 풀풀 풍기며 황성에 입성하게 되지 않았는가. 결국 주목적이었던 누이의 생일 선물은 구경도 못 했다. 어차피 거짓말이었을 게 뻔했지만.
작은 한숨과 함께 방을 나섰다. 찬 기운이 만연한 통로는 수십 개의 등불로 낮처럼 환했다. 밤 9시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네자르는 다소 몽롱해진 기분으로 록허드의 방을 찾아 나섰다. 왼쪽 복도 끝 방이라 했으니 이대로 쭈욱 걸으면 2황자의 침실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아.”
그때,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통로가 쥐 죽은 듯 고요했기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자르는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싶어 주위를 살폈다. 하나 화려한 복도에는 오직 그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야야…….”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봤다. 뒤늦게 네자르는 다람쥐나 낼 법한 자그마한 비명 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벽을 등지고 선 작은 금발 머리의 소녀가 등을 굽히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가녀린 어깨를 봐선 열여섯 정도 된 소녀 같았다. 묶지 않은 구불구불한 금발이 허리를 뒤덮을 만큼 길었다.
시녀인가. 평소의 그였다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내려다볼 수는 없는지라 느리게나마 무릎을 굽혔다. 소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 한쪽 발을 움켜쥐고 있었다. 양쪽 다 맨발이었다.
“너, 누구야?”
까칠한 음성과 함께 홱 올라온 시선이 네자르를 노려봤다. 밝은 등불 아래에서 선명한 침엽수림 색의 눈동자가 빛났다. 착각이 아니라면 찰나의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힌 기분이었다.
“감히 내 발등을 밟아 놓고 사과도 없어?”
네자르는 저도 모르게 그 까칠한 음성에 반응했다.
“……밟은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짓말하지 마. 사람 발을 밟고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소녀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구기에 늦은 밤에 이 성을 돌아다니는 거야?”
“아, 저는 록허드 전하의 초대를 받은 카발 가문의 네자르입니다.”
“록허드? 이런. 그 망나니가 언제 성에…….”
조곤조곤한 말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순간 동그란 눈을 번쩍 뜬 소녀가 네자르의 팔을 부여잡고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달칵.
무엇이 그리도 급한 걸까. 소녀는 네자르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어서 문에 몸을 기댄 채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 네자르는 멍하니 소녀의 말간 얼굴을 마주 봤다.
“무슨…….”
“쉿.”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성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처음에는 록허드나 그의 두 형제를 부르는 것이라 여겼다.
“폐하께서 분명 해가 진 후 승마를 금하셨는데 또 말썽을 부리십니까?”
한데 코앞의 삐죽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본 즉시 생각이 바뀌었다.
“전하 때문에 제 수명이 반으로 줄겠습니다. 이 근처에 숨어 계신 거 다 알아요. 저 앞에 부츠를 버려두셨더군요.”
“저건 눈썰미만 좋아서…….”
“제가 찾을 겁니다. 찾아서 꼭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습을 보이신다면 이번만큼은 넘어가 드리도록 하지요.”
네자르는 오랜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황실 계보를 떠올렸다. 에젤로트 제국에는 세 황자가 존재한다. 황태자인 에든과 그 아래의 두 황자, 록허드와 릭. 한데 한 명이 더 있었다. 황자만 내리 탄생한 후 태어난 막내 황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황제가 워낙 애지중지해 아직 약혼식도 치르지 않았다던 그 황녀.
고개를 숙여 소녀의 발등을 확인했다.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뿐더러, 하얀 살이 짧은 사이에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네자르가 그녀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레 소녀를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우스운 일이었으나 엉겁결에 따라 들어온 이 방은 그의 침실이었다. 다행히 소녀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을 뿐, 발버둥 친다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소 불편한 투로 내뱉었다.
“무슨 짓이야?”
“발등에 연고를 바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돼. 네가 모르는 것 같아 말해 주는데, 나는 이 나라의 황녀라구.”
“저도 바보는 아니라서 그 정도는 눈치로 충분히 압니다.”
알면서도 어찌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황녀를 침대에 앉히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문 너머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들키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전하.”
대답은 없었지만 긍정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했다. 네자르는 황녀를 침대 안쪽 바닥에 앉혀 두고 커튼으로 가렸다. 그 즉시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맞이한 얼굴은 네자르에게 낯설지 않았다. 황실의 가신인 론과는 록허드를 따라 황실 사냥 대회에 참석했을 때 종종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으니까.
“아, 카발 소백작 아니십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설마 손님이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론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네자르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셔츠의 단추를 풀며 대답했다.
“복도가 시끄럽더군.”
“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신 줄 알았다면 조심했을 텐데…….”
“록허드가 나를 갑작스레 데려오기는 했지. 이해하니 계속해서 볼일 보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휴식을 방해해 몹시 죄송합니다, 소백작. 편히 쉬시길.”
조용히 문이 닫혔다.
네자르는 걸어 두었던 재킷의 안쪽을 뒤적여 연고를 찾았다. 그리고 황녀를 가리고 있던 겨울용 푸른 벨벳 커튼을 거두었다.
“제가 전하의 발을 잠시 봐도 괜찮겠습니까?”
“……론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황녀가 안도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옷에 가까운 얇은 실내복 차림이었다. 이 차림으로 이 시간에 승마를 나갔다니, 여러모로 활동적인 성격인 듯했다.
네자르는 다시 한번 허락을 구하는 대신 연고 통을 열고 황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폐하께서 승마를 금하셨습니까?”
황녀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지.”
“어째서 금지까지 당하신 겁니까.”
“위험하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록허드보다 말을 더 잘 타는데.”
황녀는 하얀 이마를 구기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안 믿지? 하지만 사실이야. 나는 활도 록허드보다 더 잘 쏴.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나만 아무것도 못 하게 해. 다른 형제는 무얼 하든 상관 안 하시면서, 나는 무얼 하든 눈치를 봐야 하니까…….”
“다 전하를 걱정하셔서 그런 겁니다.”
부어오른 발등에 연고를 발랐다. 워낙 피부가 얇고 새하얘 부드러운 빵 위에 버터를 덧바르는 느낌이었다. 괜히 머릿속이 울렁이는 기분이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뭘 해. 정작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렇다고 또래의 여자애들을 초대해서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새장에 갇힌 애완조처럼 지내야 해.”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전하신 적 있으십니까?”
“매일.”
침울한 얼굴이 귀여워서 하마터면 뺨에 손을 댈 뻔했다.
황녀는 연고가 다 발리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조금은 어색한 목소리로 네자르와 눈을 마주했다.
“이름이 뭐야?”
“네자르 카발입니다.”
“멋진 이름이네. 네게 어울려.”
“감사합니다.”
이 감각을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네자르가 그럴싸한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황녀가 몸을 일으키는 게 더 빨랐다. 새하얀 발이 카펫 위를 거침없이 누빈다. 그 모습을 보며 네자르는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발바닥에 가시라도 박히면 어쩌나 싶었다.
“전하, 제가 침실까지 모셔다…….”
“아니야.”
달칵. 황녀가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대두?”
멀거니 서 있던 네자르가 등 뒤의 커튼을 거칠게 뜯어냈다. 예상보다 무겁기는 했으나 그런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네자르는 기다란 커튼으로 황녀의 몸을 덮었다. 이어서 그녀를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이러면 괜찮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야…….”
어쩐지 커튼보다 황녀가 더 가벼운 듯했다. 네자르는 황녀를 안은 채로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사, 사 층.”
높군.
계단까지는 멀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4층은 더더욱 멀진대 묘하게도 그 길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벨벳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황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실례인 걸 알면서도 계속 눈이 갔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황녀가 보기 드문 미인이기는 했다. 동그랗고 새하얀 이마라든지 인형처럼 발간 뺨, 그린 듯 선명한 눈매, 굴곡 없이 작고 반듯한 코까지.
그의 이복 여동생도 제국에서 꽤 이름난 미녀였지만 황녀만큼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애지중지한다는 황제의 마음이 가슴 깊숙이 와 닿았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훔쳐보는 귀족 영식들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이다음 방이야.”
황녀를 가장 처음 발견한 사내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다행이라고 느껴질 줄이야.
몸을 비튼 황녀가 그의 품에서 내려갔다. 하얀 달이 뜬 깊은 밤, 황녀는 햇살보다 밝은 얼굴로 그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친절을 베풀어 줘서 고마워, 네자르. 황성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
수줍게 일그러진 눈가가 꿈처럼 사랑스러웠다. 그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던 네자르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아주 중요한 사안을 깨달았다.
“이름을 묻는 걸 잊었군.”
까칠함이 느껴지는 네 글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던 터라 기억나지 않았다. 내일은 반드시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치 더는 못 볼 것처럼 작별 인사를 건넨 부분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다음 날 오전.
며칠간 소강상태였던 눈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어제의 그 말간 하늘은 어디로 가고, 오늘의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침없이 눈송이를 뿌리고 있었다.
네자르는 카발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한숨을 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겼다. 의도된 바는 아니었지만, 황성에서 하루를 더 묵을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여동생의 이름?”
몇 분째 체스판 위의 상황이 그대로였다. 나이트를 쥔 채로 앞머리를 쥐어뜯던 록허드가 반문했다. 그는 미심쩍은 눈길로 네자르를 훑어 내렸다. 짜증으로 점철되었던 얼굴에 옅은 흥미가 되살아났다.
순간 괜히 물었다는 후회가 일었다.
“카트리나. 우리는 보통 케이트라고 부르지. 그 애는 갑자기 왜?”
“어제 얼굴을 뵀는데 이름을 묻지 못해서.”
“얼굴… 아아, 그러고 보니 어젯밤 론이 시끄럽기는 했지. 그때 마주친 건가? 참 대단한 우연이네.”
살살 턱을 쓸던 록허드가 뒤이어 말했다.
“오늘은 보기 힘들 텐데. 케이트는 4층에서 잘 내려오지 않거든.”
“내려오지 않는다고?”
“폐하의 명을 어긴 벌로 외출을 금지당했어. 달에 한 번씩 의례처럼 벌어지는 일이지.”
그래서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인사했던 건가. 가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록허드가 눈썹을 들썩였다.
“흐음… 이상하단 말이야. 그 카발 소백작께서 여자의 이름을 묻는다고? 널 사귄 10년의 시간 동안 처음 있는 일 아닌가?”
“과장하지 마, 록허드. 나는 널 안 지 5년도 안 됐으니까. 사냥감을 만난 하이에나처럼 흥분하지 말고.”
“뭐, 케이트가 예쁘기는 하지. 그래… 그 애는 예쁘기라도 해서 다행이야.”
떨떠름한 음성에 네자르가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의미냐?”
“당연히, 얼굴값을 한다는 의미.”
네자르는 록허드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녀가 얼굴값을 한다고? 그 얼굴로 값을 하려면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함은 물론 네자르의 몸에 생채기가 한둘은 생겼어야 했다.
하나 그들이 나눈 대화는 평범했고, 황녀가 보인 모습은 오히려 네자르의 가슴 한구석을 울렁이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어젯밤은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답답함에 잠을 설치지 않았는가. 그 생각이 얼굴에도 나타난 모양인지 록허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너 같은 놈이 한 명씩은 꼭 있지. 그래 보이지 않아도 그런 녀석이.”
“헛소리하지 마. 닥치고 네 나이트를 움직이기나 해. 뭘 해도 질 테지만.”
“어이, 내가 케이트 이야기를 왜 했겠어? 한 수 물러 달라는 소리잖아!”
네자르는 록허드의 말을 자연스레 무시했다. 그날의 체스는 록허드 통산 전적 39전 0승 39패로 전패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다음 날에도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다. 황녀 역시 만나지 못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그녀의 얼굴이 한 번 생각날 즈음이면 고의로 계단 근처를 서성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등의 상처가 나았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이왕이면 그날 말을 타고 어디를 갔다 왔는지, 방에 갇혀 지낼 때는 무얼 하며 시간을 때우는지도 묻고 싶었다. 더해서 수줍게 보이던 미소도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러다 문득, 지금이 아니면 평생 만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황녀에게 금지된 것은 외출이었지 외부인의 방문이 아니었다. 억지라는 것은 알아도 이대로 애태우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생각됐다.
“……애가 탄다고.”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는데.
네자르는 그의 그럴싸한 방문 목적이 되어 줄 연고를 소유한 채 황녀의 방으로 향했다. 꽉 닫힌 문이 그렇게 견고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똑똑. 방문을 두들긴 후에는 왜 답지 않은 짓을 하는가 싶어 후회했다. 물론 그 후회는 황녀의 얼굴을 마주한 즉시 흔적도 없이 증발했지만.
“네, 네자르?”
좁은 문틈으로 황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로부터 이름이 불린다는 게 이렇게 간지러울 수 있구나 싶었다.
“깜짝 놀랐네. 아직 돌아가지 않았어? 여긴 무슨 일이야?”
“눈보라가 심해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를 찾아뵌 건…….”
힐끔 그녀의 발을 확인했다. 다행히 그날처럼 맨발은 아니었다.
“그때 생기신 상처가 걱정되어서요.”
그제야 황녀가 느릿하게 방문을 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그를 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혹여나 거절당할까 싶어 급하게 뒷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생긴 상처이니 책임지고 싶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약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나도 갈 때까지 갔군.
황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그를 들이고 주변을 살핀 뒤 문을 닫았다.
침실 안에 발을 디딘 후, 네자르는 이 상황이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몹시 실망스러워졌다. 카트리나 황녀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그것도 황제의 엄격한 지시로 온실 속에서만 자란 순수한 소녀이지.
다시 한번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 황녀를 난처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또한 남들의 눈을 피해서 황녀의 침실에 몰래 들어오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네자르, 온 김에 차라도 마실래? 네가 뭘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말하는 황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불편함보다는 설렘이 느껴졌다. 외출하는 일이 드물다고 했으니 저런 반응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 말간 표정이 네자르를 더욱 고역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배운 귀족 영식의 덕목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전하.”
“응?”
“연고를 두고 갈 테니,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수시로 바르셔야 합니다.”
“그렇게 대단한 상처도 아닌데…….”
“제 신장이 이리도 큰데 상처 또한 미약할 리 없지요. 저랑 약속하세요.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바르겠다고.”
“생채기가 조금 생겼을 뿐이야.”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전하께서 지니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보복이 걱정되어 찾아온 것처럼 느껴진 것일까? 황녀가 다소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자르는 그녀의 손에 연고를 쥐여 주고 침실을 나갔다.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황녀의 방에 몰래 들어가다니. 뒤늦게 불온한 소문이 돌아 황녀의 명예가 실추될까 걱정됐다.
“……그때는 내가 데려가면 될 텐데.”
카발 백작가는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네자르는 그런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작위를 이어 풍요로운 영지와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될 예정이었다. 그 정도면 귀한 황녀 전하를 평생 모시기에 썩 괜찮은 조건이지 않은가.
네자르는 딱 거기까지만 상상했다. 고작 두 번 만난 사인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날이 추워 미치기라도 한 걸까. 그녀와의 혼인이 바란다고 하여 성사되는 것도 아니고. 네자르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록허드의 방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몰아치던 눈보라가 마법처럼 멈추었다. 네자르는 해가 뜬 이른 새벽에 마차를 타고 카발로 돌아갔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힐 것들이었으니까.
***
카발로 돌아온 후, 남은 겨울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스물둘이 되자 스치듯 언급되었던 그의 혼인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카발 백작은 그리 깐깐한 성정이 아니었기에 그럴싸한 구색만 갖춘 가문의 여식이라면 상관하지 않겠다고 언급했다.
그때가 되어서 네자르도 제 혼인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걸 인지했다.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그럴싸한’ 가문의 여식 이름을 읊는 동안 황녀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여기서 카트리나 황녀의 이름을 언급하면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하나 네자르는 그 이름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겨울과 봄이 빠르게 흘렀듯, 여름 역시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을이 만연한 시기가 되었을 때 네자르는 황실 사냥 대회에 참여했다. 그의 사냥 실력은 제국에 정평이 나 있어서, 주위 모두가 올해 대회에선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길 바랐다.
“올해 걸린 상품이 예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고작 사냥 대회일 뿐인데 폐하께서 고민이 많으셨다지?”
“듣기로 황자 전하들께서 1등을 놓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더군.”
“그리 말하니까 흥미가 동하는데?”
친우들과 달리 네자르는 약간의 흥미조차 동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의 옆에서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며 바람을 넣을 때, 네자르는 나무둥치에 앉아 황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시야에 너른 본성이 보였다. 황녀가 저 창에 달라붙어 사냥 대회를 구경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네자르는 본성에 가까운 숲으로 사냥을 떠났다. 유력한 우승 후보인 탓에 시종 서너 명이 끈질기게 뒤를 쫓아왔다.
“정말 잘 쏘네. 이 정도면 백발백중이라 표현해도 무방하겠어.”
귀족 여식 몇 명 또한 그의 길을 따라온 듯했다. 그가 사냥에 성공할 때마다 산새 같은 음성의 감탄이 뒤따랐다. 사냥 대회 때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방금은 정말 어려웠을 텐데. 집중력이 대단해.”
화살이 빗나갈 때는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아마 나였다면 아주 멋지게 잡아냈을 거야.”
어느 순간부터 네자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냥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저 여자가 이번에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자신이 단 한 번도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고, 깨달은 즉시 활시위를 당기던 걸 멈추었다.
“……전하?”
그리고 여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네자르는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안녕, 네자르.”
놀랍게도, 몹시 놀랍게도 그를 뒤따르던 여인의 정체는 카트리나 황녀였다. 소녀, 아니 이제는 여인이 된 황녀가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수줍은 웃음을 보였다. 설마 안장에 오른 채 꿈을 꾸는 건 아닐 테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에 네자르는 말을 잃었다.
“언제 고개를 돌리나 했는데… 설마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 돌릴 줄은 몰랐어.”
고작 1년 사이에 황녀의 신장이 훌쩍 자라 있었다. 길쭉한 팔다리에 승마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사냥에 능숙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헛소문은 아니더라. 깜짝 놀랐지 뭐야.”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황녀의 밝은 웃음이 조금 위축되었다.
“혹시… 기분 나빴어?”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간 어찌 지냈느냐 물어봐도 아까울 시간에 바보처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지 상상하니 머리칼이란 머리칼은 모두 쥐어뜯고 싶어졌다.
“오히려?”
순진무구한 얼굴이 답을 재촉했다. 수풀 사이로 그물처럼 내리꽂히는 햇볕에 황녀의 눈이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그들이 선 숲의 색을 그대로 빼다 박은 푸른빛이었다.
이대로면 직전처럼 또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테다. 고개를 저으며 말 머리를 황녀 곁으로 이끌었다.
“전하께서 어찌 여기까지… 폐하께서 외출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허락해 주셨어. 당연히 그러셔야지, 내가 이 대회에 무얼 걸었는데?”
사냥에 걸린 상품이 황녀의 물건이었던 것일까. 현실감이 아직도 흐릿했다. 황녀가 먼 길을 돌아서 그 누구도 아닌 그의 뒤를 따라왔다는 사실이, 네자르를 기이한 감각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황녀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듯 네자르를 재촉했다.
“이럴 시간 없어. 지금부터 한 마리라도 더 사냥해야 해, 네자르. 네가 우승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진단 말이야.”
“일이 복잡해진다니요?”
“그런 게 있어. 중요한 건 다른 이가 아닌 네자르, 네가 우승해야 한다는… 아니, 더 열심히 사냥을 해야 한다는 점이야. 날 위해서.”
관람으로 대리 만족 한다는 의미일까. 그녀의 말에 다시 활을 들었다.
“웃기만 하지 말고.”
내가 웃고 있었나? 활을 쥐지 않은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광대가 올라가 있는 걸 봐선 황녀의 말이 옳은 듯했다.
황녀와 나란히 말을 몰며 그간 열 번은 더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낼 일이 있겠어. 나의 일과야 늘 똑같지.”
“발등은…….”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야? 다 나은 지 오래지. 너는 그간 찾아오지 않았으니 모를 테지만.”
어쩐지 그를 탓하는 투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싶다가도 또 허황된 착각처럼 느껴져 기대를 그만두었다.
“마치 서운하셨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물론 제 착각이 아니라면요.”
그래도 포기가 되지 않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했다. 황녀가 눈매를 세워 그를 노려봤다. 무섭기는커녕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매를 꽉 닫았다.
“아니, 미안하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어. 나는 외로움을 타지 않거든.”
이번에는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겠다. 아무래도 황녀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듯했다. 귀엽기는. 어떻게 저런 소소한 부분까지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싶었다.
“다행입니다, 전하. 저는 앞으로도 전하를 찾아가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계속?”
“예,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찌 사사롭게 찾아뵐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흉을 볼 겁니다.”
황녀가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남들이 흉을 보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굉장히 멋진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 말은 즉, 제가 전하를 사사로이 찾아가도 된다는 뜻입니까?”
황녀의 얼굴은 당황한 티가 여실했다. 설마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지. 거짓말이어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더 쉬운 길을 내주었다.
“물론 저는 사사로운 만남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 전하만 허락하신다면야 못 찾아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제가 록허드를 만나듯 말이지요.”
“……나는 네자르가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계속 인연을 이어 가고 싶어.”
발개진 얼굴이 흡사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대답이었으나 네자르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상상했던 때가 있었다. 혹여나, 아주 혹여나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까 고민하던 때가.
“감사합니다. 전하께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군요.”
하지만 황녀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 본인의 것과는 형태가 다른 듯했다. 아마도 그녀의 친오라비들에게 느끼는 친근함, 혹은 그 친근함과 유사한 무언가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할 수 없었다. 네자르는 황녀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했기 때문이다.
네자르가 씁쓸함을 맛본 만큼 황녀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그의 답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네자르 또한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기에 말을 돌렸다.
“전하께서는 사냥을 즐기지 않으십니까?”
황녀가 축 처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 좋아해도 너무 좋아해서 탈이지. 하지만 오늘은 그저 우승자가 누구일지 구경하러 온 거야.”
“그러고 보니 올해 우승 상품에 대해 다들 말이 많더군요.”
“으응, 그럴 만해. 이번 대회의 우승 상품은 나거든.”
잘못 들은 건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했으니까. 대회의 우승 상품이 황녀라니? 제국은 그런 천박한 유흥을 즐기는 국가도 아닐뿐더러, 황제 또한 하나뿐인 황녀를 물건처럼 부릴 인물이 아니었다. 황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지. 조금 이상하게 말했나? 정확히는 나와의 혼인이야. 사실은 아버지께서 내 약혼자를 정해 주셨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허약하다는 이유로 거부했거든. 이후에도 마찬가지이고.”
둔기로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 더욱 그러했다. 황자들이 앞다투어 우승을 목표로 한다던 말의 의미가 이제야 이해됐다. 그들의 어린 여동생을 누가 될지도 모를 우승자에게 넘길 수 없다는 의미였다.
“……폐하께서 명하신 일입니까?”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야. 내 제안이었어. 나름 좋은 수라고 생각했거든.”
네자르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짐을 인지했다. 억지로 숨겨 두었던 기대가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가 황녀의 혼약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황녀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사실 약혼자로 생, 생각해 둔 사람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싫어할까 봐… 아버지께 말하면 분명 억지로 혼인을 성사시키려 하실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 한데 마침 매해 그 사람의 사냥 기록이 좋았어서… 혹시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약혼자로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니, 대체 누구를?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명의 이름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사냥에 재능이 있는 미혼의 귀족 영식. 당장 생각나는 이름만 다섯을 넘었다.
“괜찮으시다면 그자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감히 그가 물을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으나, 이성이 입을 막기 전에 혀가 먼저 움직였다. 이름을 알아낸다고 해서 무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황녀가 불쾌하게 여긴다면 어찌 변명해야 할까. 다행히 그녀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내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이야.”
그 말에 놀란 네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또 다치셨던 겁니까?”
저도 모르게 버럭 큰 소리가 나갔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랐는지 황녀가 입을 닫았다. 아차, 싶었으나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기랄, 이럴 시간이 없는데. 네자르의 머릿속이 혼돈으로 뒤엉켰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황녀와 나눌 이야기도 많았고, 그런 그녀와 혼인하기 위해서는 사냥 대회의 우승자가 되어야 했다. 둘 모두를 이룰 수는 없으니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한다. 한데 머저리처럼 그녀에게 소리쳐서…….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들어?”
그때, 돌연 황녀가 울먹이는 얼굴로 소리쳤다.
“네자르는 바보야? 아니면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거니? 내가 네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고 있잖아!”
네자르의 사고가 활동을 멈추었다.
“……저는.”
“나와 혼인하기 싫은 거야? 그렇담 여기서 사냥을 멈추면 되겠네. 우승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황녀의 코끝이 빨개졌다. 그 순간에도 네자르는 울긋불긋한 황녀의 얼굴이 미치도록 어여쁘다고 생각했다.
“호, 혹시 나 때문에 우승을 놓치게 된 거라면 사과할게. 그래도 1년 정도는 포기해도 상관없…….”
“아니요.”
우승을 놓친다고? 우승을 놓쳐서 다른 새끼에게 황녀를 넘겨? 가벼운 문장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를 가질 천상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병신처럼 걷어차다니. 절대,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은 없었다.
팔을 뻗어 황녀의 손을 끌었다. 그가 수백 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이대로 물에 담그면 녹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번 대회 우승은 제가 죽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못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일단 제가 우승한 후에 하도록 하죠. 여기서 당신을 놓치면 평생을 후회, 아니 미칠 것 같거든요.”
황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머릿속의 무언가가 강렬하게 폭발하는 느낌이었지만, 네자르에겐 그 쾌락과도 같은 흥분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고삐를 당겨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부터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네자르는 그해 황실 사냥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2등과의 기록 차이가 상당했기에 모두 소리 높여 환호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고대했던 우승 상품이 무엇인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황제는 그저 우승자 본인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될 사항이라 설명할 뿐이었다. 그것도 퍽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그날 저녁. 대회의 참석자들은 황성에서의 만찬을 즐겼다. 물론 네자르의 눈에 지천에 널린 술이나 음식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저 이 시끄러운 연회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고 황녀와 만나길 고대했다.
그리고 늦은 밤, 우울한 낯의 황녀가 그를 찾아왔을 때는…….
“내가 불쌍해서 그런 거지?”
더는, 도저히 참아 낼 자신이 없었다.
“고작 한 번 본 남자에게 반하다니… 나 같아도 우스웠을 거야. 네자르는 사람이 너무 좋아. 작은 상처 하나 때문에 찾아오기까지 했잖아. 물론 나야 그 덕에 너를…….”
사람이 좋다고? 지난 한 해 동안 그녀를 머릿속에 두고 무얼 했는지 알게 된다면, 그의 머릿속을 열어 확인하게 된다면 절대 그런 소린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죽어도 황녀에게 알릴 수 없었다. 네자르는 손에 감기는 가느다랗고 얇은 금발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입술에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황녀의 숨결이 입 안을 헤집자 심해에 잠긴 것처럼 모든 세계가 몽롱했다.
“젠장…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마를 맞대고 한숨 같은 숨을 내쉬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황녀의 얼굴에 붉은 온기와, 예기치 못한 행복과, 옅은 기대가 만연했다. 네자르는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고 싶었다. 아니, 채우다 못해 넘치도록 부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그에게 그러했듯이.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요, 카트리나.”
황녀가 눈꺼풀을 내리깔고 웃었다.
“아니야.”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네자르는 카트리나를 다시 한번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무채색 세상에 색이 깃들기 시작했다. 카트리나의 수줍은 미소가 그림처럼, 아니 각인처럼 시야에 박혀 네자르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숙녀의 입술을 탐하는 내내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져 더욱 붙잡고 매달렸다.
카트리나는 벅찬 듯 거친 숨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그를 밀어내거나 내치지 않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은 오직 환희만을 나타내는 듯했다. 그런 점이 네자르에게 기이한 용기를 심어 주었다. 속내 깊숙한 곳에 꾸역꾸역 감춰 두었던 정복욕을 들끓게 했다. 하지만 카트리나가 제아무리 그의 여인이 될 예정이라고 해도, 그 순간이 지금 당장은 아니지 않은가.
“하아.”
본능으로부터 기인한 뜨거운 숨이 그의 이성을 다시 한번 흔들었다. 네자르는 카트리나의 작고 연약한 몸을 자신과 벽 사이에 가두었다. 한 팔 안에 완전히 가둘 수 있을 만큼 얇은 허리를 쥐었을 때, 붉어진 입술을 씹어 삼킬 뻔한 욕구를 여러 번 참아 냈다.
“제 심장이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한숨처럼 뱉어진 그의 말에 카트리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자르의 심장 소리가 크기는 해.”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가 또 있을까?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짧은 숨조차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자르는 천천히 입술을 내려 사슴처럼 얇고 기다란 목의 체취를 끊임없이 삼켰다. 인정한다. 그는 지금 당장 이 여자를 가지고 싶었다. 맑은 초록색 눈동자 위로는 그의 얼굴만 새기고 싶었으며, 매력적인 목소리에서는 그의 이름만 불렸으면 했다.
“아…….”
그의 입술이 마침내 가슴 위로 머문 순간, 카트리나가 참지 못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몸이 벽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행여나 더러운 바닥에 카트리나의 손이라도 닿을까, 네자르가 우악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허리를 받쳐 당겼다.
셔츠 바깥으로 닿아 오는 온기와 감촉이 충격적일 만큼 부드러웠으며 또 연약했다. 그가 욕구를 못 이기고 그대로 몰아붙인다면 설탕 가루가 되어 부서질 것 같았다. 네자르는 카트리나의 더 은밀하고 황홀한 향을 삼키기 위해 날카로운 이로 여러 번 살을 깨물었다. 뒤로 젖혀진 카트리나의 작고 섬세한 목울대가 거친 숨으로 헐떡였다.
“네자르…….”
빌어먹을. 이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바라건대 지금 당장 그녀의 거추장스러운 레이스 쪼가리를 찢어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견고하게 쌓아 올려 겨우 형태를 유지하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당신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카트리나?”
찰나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가. 그의 시야 안에서 흐트러진 채 숨을 헐떡이던 카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은 네자르의 마지막 고삐를 무자비하게 찢었다.
오직 둘만이 남은 세계에는 신경을 자극하는 카트리나의 말초적인 향만으로 충만했다. 그 속에서 문득, 네자르는 그녀를 탐하는 자신의 모습이 추잡하거나 짐승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다. 성욕에 이성을 잃고 헐떡이는 개가 되기보다는 서로를 사랑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몸을 나누고 싶었다. 무엇보다 카트리나가 그렇게 느꼈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가 은하수를 쏟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눈을 조심히 감았을 때도 서두르지 않았다. 하얀 이마와 붉은 뺨, 동그란 콧등에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팔을 내려 얇은 드레스 천을 거두었다. 손바닥에 달라붙는 기이할 정도로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아, 으음…….”
네자르의 손이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그의 목에 매달리는 얇은 팔 역시 더욱 간절해졌다. 황성이라는 온실에 갇혀 화초처럼 자라 온 황녀는 자신이 느끼는 쾌락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더 농밀한 애무를 원하는 듯했고, 이를 표현하는 데 몹시 솔직했다.
“네 입술이 너무 좋아.”
사랑스러운 속삭임은 거짓 없는 진심만을 담고 있었다. 네자르는 쓰러져 가는 작은 몸을 받치기 위해 한쪽 무릎을 벽에 고정시켰다. 카트리나는 그의 허벅지를 양다리 사이에 두고 앉아 아이처럼 입맞춤을 받아먹었다.
네자르의 손이 반쯤 풀어 헤쳐진 가슴을 훑자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여러 번 움찔거렸다. 그 감각이 근육을 타고 전달될 때마다 네자르는 그대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땀에 젖은 기다란 금발과 번들거리는 새하얀 살결. 쾌감에 젖은 채 그를 올려다보는 몽롱한 시선과 천이 말려 내려간 반나체.
꿈에서나 보아 온, 지극히 도발적인 모습의 카트리나가 네자르의 이성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네자르는 카트리나의 몸을 더 높이 껴안았다. 그리고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한 두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이후의 행위를 예상했는지, 카트리나의 몸이 살짝 굳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네자르를 거부하지 않았다.
“읏!”
그녀의 허락을 기점으로, 네자르는 오롯이 자신만을 허락할 부드럽고 습윤한 카트리나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입에서 곧장 앓는 소리가 났다. 아, 젠장.
네자르는 이를 악물었다. 이보다 더 격렬할 수 없는 감각인 터라 받아들이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에게 매달린 하얀 몸이 잘게 떨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카트리나의 안이 숨이 막힐 정도로 좁았기에, 네자르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힘드시면 제 어깨를 무세요.”
그 말에 카트리나가 작은 머리를 거세게 저었다. 하나 그녀의 거절도 네자르의 것이 완전하게 밀려들어 간 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앓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 미세한 고통이 전달됐다.
하나 그 작은 고통은 점차 선명한 쾌감으로 방향을 달리했다. 처음에는 그의 어깨와 가슴에 고개를 파묻기 바쁘던 카트리나였지만,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고개를 젖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네자르는 가느다란 목에 코를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녹진하고 농밀한 향에 머리가 어질했다.
“카트리나.”
카트리나는 네자르의 부름을 못 들은 듯했다. 아니면 들었어도 대답할 정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교성을 목 안쪽으로 삼키며 벽과 네자르 사이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전율이 일 정도로 황홀한 감각에 치달아도 피가 날 듯 깨문 입술은 여전했다.
네자르는 카트리나의 얇은 금색 속눈썹 사이에 걸린 눈물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짓눌린 입술 사이로 자신의 혀와 숨을 불어 넣었다. 네자르가 위아래로 탐하는 동안 가느다란 신음이 둘의 입 안에서 흩어졌다. 그 모습이 뼈가 시릴 정도로 선정적이라 네자르의 호흡과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아, 읏!”
문밖으로 인기척이 들리거나 신음이 거세질 즈음엔 고개를 숙여 카트리나에게 깊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럴 때면 긴장으로 파랗게 서 있던 목덜미의 핏줄이 서서히 풀렸다.
네자르는 아무리 서로가 원해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카트리나가 원한다면 그녀의 명예를 지켜 주고 싶었다. 달빛이 내리는 어둑한 시간에 그를 찾아온 황녀는 존재하지 않아야만 했다. 이 장소에서 카트리나를 집어삼킨 네자르는 없는 존재여야 했다.
절정에 다다르면서 더 깊은 곳을 탐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네자르는 카트리나를 안아 즉시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몸 아래의 여인을 더 진득하게 탐했다. 카트리나의 손톱이 그의 목덜미에 여러 번 감겼다. 어쩌면 상흔이 남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네자르가 절정의 끝을 맞이한 건 코끝에 맺힌 땀이 카트리나의 뺨 위로 떨어졌을 때였다. 동그랗게 뜨인 초록색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네자르는 그녀의 말간 뺨을 매만지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땀이 고일 만큼 격렬한 움직임이었음에도 육체는 이상하리만치 개운했다. 하나 카트리나는 정반대인 듯,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직전의 시간을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네자르는 벗겨지다시피 흘러내린 카트리나의 의복을 정리하며,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의 작은 아가씨는 나른함에 못 이겨 옅은 잠에 든 것처럼 보였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가 아까와 달리 정적이고 차분했다.
“카트리나.”
대답을 바라고 부른 이름은 아니었다. 하나 착각이 아니라면 기다란 속눈썹이 잠깐이나마 움찔했던 것 같았다. 그녀를 이 방에 잠재울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이 눈을 감고 있는 카트리나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네자르는 잠든 카트리나의 몸을 끌어안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조금은 괜찮겠지. 적어도 지금 당장은 눈앞의 만족감과 충만함을 음미하고 싶었다.
IF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