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헤넨의 겨울 마침
외전4 어느 기사의 하루
겨울이 끝나 가는 어느 날
카론 오드리네 부인이 건강한 남아를 출산했다. 황제의 유일한 외숙이며, 황후의 가장 가까운 친우가 치른 첫 출산이었기에 오드리네로 향할 축하 선물의 양이 꽤 두둑했다.
물론 축하 선물 목록은 론이 작성했다.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는 일도 아니었다. 황성은 기록 보존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역대 출산 선물 목록을 적당히 간추리면 됐으니까. 다만 마차 안에 실리는 값비싼 귀중품들을 확인하며, 론은 약간의 우울을 느껴야 했다.
“메이튼 경? 목록 확인이 모두 끝났습니다.”
“아, 고생하셨습니다.”
“한데 말이지요, 축하 선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큰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는 언제쯤 후계를 보실까요.”
메이튼의 이마 위에 맺힌 식은땀이 턱을 타고 발등으로 떨어진다. 또, 또 시작이다. 그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허허 건조한 웃음만 지었다.
전 황성근위대 2기사단장이 상당히 이른 시기에 퇴직하고, 그 후임이 된 지 고작 일주일이 흘렀다. 전 기사단장인 록허드 에젤로트… 아니, 록허드 에젤로트 네클렌타 백작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어렵고 까다로운 역할이 있었으니, 바로 론 미네르바와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그러했다.
“황성은 잠잠한데, 국혼보다 몇 달은 늦게 결혼식을 치른 오드리네에서 경사를 봤다라…….”
“하하. 곧 황실에서도 좋은 소식이 생길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럽니다, 메이튼 경.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이지……. 하아.”
듣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비밀을 엄수하는 척, 황제의 개인사를 숨기는 척, 론 미네르바가 쉴 새 없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밤이면 밤마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놓아주시지 않으……. 하아.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시달리시다간 언젠가 황후 폐하께서 쓰러지실지도……. 하아. 황후 폐하의 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어서 빨리 후계를 보셔야……. 하아아.”
말을 아끼는 체하며 은근슬쩍 할 말 못 할 말 다 한다. 덕분에 메이튼은 황제의 측근이 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음에도, 수년 동안 황제를 바로 옆에서 모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하아!”
그때였다. 오전 내내 진행되던 국무 회의가 끝났는지, 깍듯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성을 우르르 빠져나왔다. 하나같이 파리한 안색으로 봐선 오늘 회의가 꽤 고된 모양이었다. 메이튼의 경우에도 겨우 한 번 참여한 국무 회의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흠. 흠!”
누군가 등 뒤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매우 부자연스러운 높낮이로. 상대를 확인한 론의 얼굴은 이미 대단한 적수라도 맞이한 듯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저 기세등등한 낯짝 좀 보라지! 속이 쓰리고 배가 아파 상대도 하기 싫었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 마차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 필프론츠 후작님! 방금 회의를 끝마치고 나오셨나 보군요.”
“예, 뭐. 그나저나 이 마차는 어디로……?”
“오드리네 영지로 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축하 선물들입니다. 방금 다 실어서 오후 중으로 떠날 것 같습니다.”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너무 커 힐끔 론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고개를 쭈욱 빼 마차 내부를 살피던 필프론츠 후작이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크흠. 메이튼 경?”
“예?”
“정말 수고가 많군요. 선물은 경이 호위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루이 경의 책임하에 평기사 네 명이 동원될 예정입니다.”
“아암, 그렇고말고. 귀한 기사단장을 귀중품 호위에 사용할 순 없지요! 한데 메이튼 경? 잠시…….”
가까이 다가온 필프론츠 후작이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어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갓난아기가 그려진 초상화였다.
“내 아들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아. 그, 그렇군요. 초상화만 봐도 떡잎부터 남다른 게 느껴집니다.”
메이튼은 일단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쥐어짜 듣기 좋은 말을 해 줬다. 동시에 극심한 혼란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메이튼은 카발 제국 동남부 지방의 자작 가문 출신으로, 죽을 기세로 열심히 공부해 황성근위대에 입단한 소위 ‘개천에서 난 드래곤’이었다. 졸업 당시 희대의 천재로 각광받던 판시온 엔테라와, 직후 나타난 괴짜 록허드 에젤로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왔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인 시점은 고작 일주일 전. 록허드 에젤로트 경이 네클렌타 백작 지위와 영지를 하사받고 제도를 뜬 이후부터였다.
평소 쳐다보기에도 눈부셨던 거물들과 같은 회의장에서 국정을 논하게 되다니! 특히 폐하와 유사한 서늘한 인상의 오드리네 후작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을 때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줄 알았다.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을 황위에 올려놓은 정치가이자 제국 최고의 상단을 운영하는 수완가. 기품 있는 말투와 지식인으로서의 총명함이 느껴지는 눈빛이 그렇게 감명 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사흘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지.
“아드님의 초상이 아주 닳고 닳다 못해 찢어지겠습니다. 보이는 사람마다 아드님의 초상화를 내미는 행위는 자제하는 게 어떨까요? 메이튼 경이 당황하고 있잖습니까.”
론의 악의 넘치는 목소리에도 필프론츠 후작의 표정은 여유 만만했다.
“이런, 론 자네도 있었군! 하도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기에 나는 메이튼 경의 그림자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뭔가?”
“일하는 데 걸리적거리지 말고 빨리 꺼지십시오.”
“어차피 내 집으로 갈 마차 아닌가? 이왕 가는 거 나도 얻어 탈 생각이네만.”
“어디 감히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귀중품에 엉덩이를 걸친단 말입니까? 당장 꺼지세요, 당장!”
“푸흐흐.”
론의 역정에 놀리듯 주변을 맴돌던 필프론츠 후작은 5분 가까이가 흐르고서야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메이튼은 씁쓸해진 기분으로 열려 있던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의 상상 속 제국 최상위 계층의 모습은, 적어도 서로를 못 골려 안달 나거나 권위를 자랑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티를 내거나, 황제 폐하의 사생활을 낱낱이 고하는 그런…….
“론.”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메이튼이 축 처져 있던 몸을 바로 했다. 황성근위대 2기사단 단장으로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선물을 하나 잊었지 뭐야. 며칠 전부터 카론의 선물로 벼르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물건을 빼먹을 뻔했네.”
꿈결처럼 굽이치는 백금발과 냉랭하면서 고아한 눈매. 선명하면서 조화로운 이목구비 사이에도 단연코 눈에 띄는 건 매끄럽게 올라간 콧등과 그 아래에 자리한 입술이다.
하나하나 뜯어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환상적인데, 한데 모여 진득하면서도 냉막한 인물의 태를 만들어 내니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밖에 없었다.
메이튼은 눈앞의 여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긴장으로 굳어 감을 느꼈다.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는 게 딱 이런 기분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카트리나 황후는 메이튼 생에 마주한 모든 여인들 중 단연 최고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제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카론 오드리네, 이블린 블랑카, 카트리나 황후 중에서도 그는 비교할 가치도 없이 카트리나 황후가 독보적이라 생각했다.
후하후하. 이런 분이 그 록허드 전 단장의 핏줄이라니! 유전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건…….”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상자를 연 론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국보 중에서도 가장 황홀한 빛을 가졌다 여겨지는 국보! 모르스타나 오드리네 카발 황후가 국혼에 착용했던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작열하는 태양’이군요.”
론은 입을 떡 벌리며 상자 속에서 황홀하게 번쩍이는 자색 빛 다이아를 홀린 듯 응시했다. 예술가의 혼이 담겨 있다는 가격 측정 불가의 국보. 이 귀한 물건을 친우의 출산 선물로 보낸다는 게 영 믿기지 않았다.
“카론의 제비꽃색 눈과 딱 어울리는 빛깔이지? 이런 색의 다이아몬드는 평생에 한 개도 찾을까 말까래.”
“그런 아까운 물건을 오드리네 부인에게 선물하시는 겁니까?”
“아쉬우면 론도 빨리 결혼이나 해. 내가 좋은 보석으로 하나 골라 줄 테니까.”
역시 황후 폐하께서는 눈부신 얼굴만큼 고운 심성을 지니셨구나. 메이튼은 따사로워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괜히 저 혼자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동안 아주 잠시 정말 결혼이란 걸 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던 론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론, 나랑 오후에 사냥이라도 가지 않겠어? 폐하께서는 오늘 일정이 바쁘시고, 록허드는 이제 황성에 없으니 같이 사냥을 즐길 사람이 없네.”
메이튼이었으면 백번을 동의했을 제안이었다. 그는 부러움이 한가득한 시선으로 론을 쳐다봤지만, 정작 론은 헉! 소리를 내더니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실망으로 축 처진 황후의 어깨를 보려니 가슴이 그리도 아릴 수 없다. 동시에 메이튼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건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도 무려 황후 폐하와 함께 사냥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
“폐, 폐하, 괜찮으시다면 제가 사냥에 동참해도 되겠습니까?”
홱, 하고 돌아간 론과 황후의 얼굴이 메이튼을 향했다. 기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과, 반대로 미쳤냐는 듯 역정을 내는 시선.
“메이튼 경이요? 시간이 있기는 한가요? 요즘 일에 적응하느라 바쁠 텐데.”
“아, 아닙니다! 오늘 오후는 일정이 널널한 편이라 사냥을 즐길 시간 정도는 충분합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생각보다 사냥을 거칠게 하는 편이라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께서 사냥에 일가견이 있으시단 것쯤 작년에 소문으로 들은 바 있다. 당시 지독한 열감기로 대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서러움을 오늘에서야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거칠어 봤자 부서질 듯 여리여리한 어깨의 황후께서 얼마나 거칠까. 메이튼은 열과 성의를 다해 황후의 사냥을 도우리라 마음먹었다.
“큼. 흠……. 메이튼 경?”
당혹감으로 물든 론의 부름에 메이튼이 답했다.
“예?”
“그, 황후 폐하께서는 경의 생각보다 훨씬… 씩씩하신 분이라, 분명 사냥을 못 따라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좌관님. 하지만 최선을 다해 모실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대답이었으나 론은 처연한 눈빛으로 메이튼을 위아래 훑었다. 약간의 안타까움과 약간의 한심함, 그리고 약간의 미안함을 담은 눈으로.
“그렇습니까. 경이 그렇다면야…….”
“고마워요, 메이튼 경. 일주일 만의 사냥이라니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하네요. 오늘이야말로 꼭 곰 사냥에 도전해 봐야지!”
“……예?”
곰? 흠칫 떨며 몸을 틀었지만, 론은 이미 마차를 이끌고 등 뒤로 멀어진 후였다.
음. 역시 잘못 들은 거겠지. 저 기품 넘치시는 황후께서 곰을 사냥하시다니! 하하! 백번을 생각해도 안 어울리는 그림이었던 터라 메이튼은 근심을 덜고 기사단 본부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