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릭의 하루 마침
외전3 헤넨의 겨울
그날은 사흘 동안 주구장창 내리던 눈발이 약해지고, 그에 따라 지치지 않고 지속되던 한파가 주춤하던 날이었다.
“헤넨으로 휴가를 가자고요?”
나는 1시간 내내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던 체스 판에서 시선을 떼 네자르를 응시했다. 그는 한동안 복슬복슬한 토끼털 머플러를 두르고 있던 것과 달리, 날이 갠 오늘은 가볍게 셔츠와 겨울용 베스트만 걸친 상태였다.
흠. 다음에는 토끼가 아닌 여우를 잡아서 머플러를 만들어 줘야지. 흰색도 충분히 어울리지만 분명 갈색도 어울릴 거야.
“그래, 황성에서 헤넨까지는 북쪽으로 쭉 직진하면 되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열흘 정도?”
“열흘이 오래 걸리지 않는 거예요?”
“카마우드라와 네클렌타는 산맥을 둘러 가야 해서 3주 가까이 걸려. 열흘이면 눈 깜짝할 새 도착하는 거리지.”
“그거참 짧네요.”
아무래도 네자르의 눈 깜짝할 새와 나의 눈 깜짝할 새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뚫어져라 체스 판을 살핀 탓에 슬슬 뻐근해지기 시작하는 눈가를 비비고 의자 등에 널브러졌다. 이번 판은 도저히 못 풀겠어. 내 수에서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아!
“그런데 왜 헤넨이에요? 하필이면 이렇게 겨울이 한창인 시기에.”
“이제 곧 봄이야. 해가 떴으니 며칠이면 눈도 다 녹을 테고.”
“저 징글징글한 눈덩이들이 다 사라지려면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작게 웃은 네자르가 읽어 내리던 서신을 곱게 접었다. 뭔가 했더니, 아무래도 저 서신이 네자르가 헤넨행을 마음먹게 한 일등 공신인 것 같았다.
“에자렛이 우리를 꼭 초대하고 싶다는군. 너와 내 여건만 된다면 언제든 좋으니 방문하라고 적혀 있어.”
그 말에 벌떡 일어나 네자르가 접어 둔 서신을 펼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서두에 적힌 「존경하는 황제 폐하께」의 필체가 덜덜 떨린 채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나는 그녀의 서신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에자렛에게서 서신이 도착한 건 헤넨이 페리윈스크 공작령에 복속된 후 처음이네요.”
“그간 바빴겠지. 듣자 하니 겨울은 헤넨에서, 여름은 페리윈스크에서 지낼 예정이라 하더군. 이제 막 헤넨 성이 정리된 모양이야.”
헤넨의 피오라 왕녀는 자신의 혼인 상대방으로 에자렛 오드리네 카발을 지목했다. 이는 가만히 들으면 매우 놀라운 선택처럼 들리나, 순수한 정치적 의도임을 알게 된다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저는 더 확실한 핏줄을 원합니다. 대륙에서 가장 영예롭고 가장 위대한 핏줄을요. 그런 의미에서 에자렛 황녀님의 자손을 제 자손과 혼인시키고 싶습니다.’
이 말은 즉, 헤넨의 새로운 가계도상에서 이촌의 근친혼이 성립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실제 제국에서는 특이 조건하에 근친혼을 허하므로 황법 위반도 아니었다. 하지만 네자르는 다른 방안을 제안했다.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가계도에 근친혼이 기록되는 건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 원하는 게 카발의 핏줄이라 했지?’
‘예.’
‘그렇다면 더 괜찮은 방도가 있지. 일단 페리윈스크 저택으로 가 공작을 만나도록. 공작이라면 내 말의 뜻을 곧장 이해했을 테니까.’
에자렛은 네자르가 즉위한 후 직계가 끊긴 페리윈스크 공작령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 페리윈스크는 북제국에 자리한 넓은 영토로, 특히 몇몇 국가들과 국경을 맞닿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거대한 요새이기도 한 지역이다. 에자렛이 그러한 페리윈스크의 공작이 되다니!
혼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에자렛은 페리윈스크 공작이자 헤넨의 영주가 될 것이다. 그에 따라 풀 네임도 상당히 길어지겠지. 에자렛 오드리네 카발 헤넨 페리윈스크. 황제 폐하조차 상대도 안 될 만큼 화려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네자르, 일전에 말한 더 나은 방도가 대체 뭐예요?”
“그만 물어봐. 내게 체스를 이기면 알려 준대도?”
“아, 정말로! 이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예요!”
나는 홧김에 체스 판 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열심히 도장 찍기에 바쁜 네자르에게로 달려갔다.
“네자르는 어떻게 사람이 그리 냉혈해요? 나 바보인 거 알면서. 알면 좀 쉽게 상대해 줘야지.”
“누가 너보고 바보래?”
“황후인 내게 감히 누가 바보라고 하겠어요? 그런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구요. 당신이 전투적으로 체스에 임하니까 전적이 벌써 20전 20패잖아요!”
“그래서 내가 하루라는 시간을 줬잖아. 천천히 판을 뒤집어 보라니까?”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네자르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른 봄의 초원처럼 더없이 평화로울 뿐이다. 네자르는 내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양, 입을 꾹 닫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가 지친 내가 지레 포기하고 의자로 돌아갈 때쯤 입을 열었다.
“헤넨으로 가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보챌 필요가 없다고, 케이트.”
“됐어요.”
“흐음. 짐도 헤넨은 처음이라 은근히 기대되는군. 내륙이라 네가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 해. 듣기로 오리고기 요리가 그렇게 발달되었다는데…….”
“안 궁금해요.”
“헤넨 성 바로 옆에 달팽이 농장이 있는데, 헤넨 왕가가 관리하는 곳이라 사시사철 달팽이 요리를 남부럽지 않게…….”
“달팽이 싫어요!”
네자르는 내 울부짖음과 고통에서 만족감을 얻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해서 내 옆구리를 찌를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론이 필요해. 론이 짧고 굵게 몇 마디만 하면 제아무리 시끌시끌한 네자르라고 해도 조용히 입을 닫을 텐데!
“달팽이를 왜 그렇게 싫어해?”
네자르가 소리 내 웃으며 내 허리를 잡고 들었다. 내려 달라고 발버둥 쳐도 내려놓기는커녕 싱긋 웃고만 있기에 팔을 주욱 늘어뜨린 채 대답했다.
“별 이유 없어요. 그냥… 미끄럽잖아요.”
“부드러운 게 그렇게 싫나?”
네자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들어 올렸던 내 허리를 천천히 내렸다. 그는 침대 위에 날 눕혀 놓고 바로 옆자리에 몸을 던졌다.
“미끄러운 거랑 부드러운 건 다른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냐니. 뭐 이런 어린애 같은 물음이 다 있담. 한데 막상 설명하려니 오묘한 구석이 있어서 대답하기까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미끄러운 건 축축하잖아요. 하지만 부드러운 건 축축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러니까 황후 폐하의 말씀은 축축한 게 싫으시다?”
고개를 돌려 별것 아닌 일로 파고드는 네자르의 어깨를 콱 물었다. 솜뭉치를 깨물 듯 입에 머금기만 했는데, 입을 떼자마자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부여잡는다.
“이제 막 이빨이 나기 시작한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는 듯한 기분이야.”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그냥 싫다고요. 축축하고 맛없어서.”
“그럼 나는?”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로 눈을 맞춘 그가 씨익 웃었다. 자신도 싫은 거냐고 묻는 걸까?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네자르가 한쪽 팔로 내 가슴 아래를 꽈악 내리눌렀다.
“정말 미끄러운 게 싫은 건지 한번 확인해 보라고.”
시야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윽고 커다라면서 따뜻한 손이 내 눈꺼풀을 닫았다. 네자르의 것이 분명한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에 닿은 건 직후였다. 웃고 있는 게 여실한, 양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술이 가볍게 촉촉 맞닿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 입 안을 열고 부드러운 숨을 떨어뜨렸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자연스레 떨어져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살며시 눈을 뜨자 네자르의 기다란 속눈썹이 보였다. 모든 감각을 온전히 나에게 맡긴, 긴장한 것 같으면서도 안온한 그런 표정으로.
나는 그런 네자르의 얼굴을 잠시 감상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네자르의 저런 얼굴이 좋다.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할 때마다 드러나는 색다른, 혹은 너무나 그다운 분위기가 내게 안도감을 주니까.
입을 맞추기 전까지 무슨 대화를 나눴었더라.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훑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잊은 뒤였다. 네자르의 열기는 서두르지도, 날 보채지도 않았다. 그는 늘 그렇듯 차분하게 날 이끌었다. 나는 우리가 온기를 나눌 때 방을 지배하는 정적을 사랑한다.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내게 집중한 네자르와, 그의 옆에서 입을 맞추는 나만이 존재했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점차 등을 타고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확인해 봤어?”
웃음을 터트리자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며 이마를 맞댔다.
“이래도 미끄러운 게 싫으냐는 소리야.”
“그거랑 이게 같아요?”
“다를 건 없지.”
“그런 소름 끼치는 비교 말아요. 나는 냄새도 맡기 싫은 달팽이 요리랑 네자르 사이에서 고민할 생각 없어요. 설마 내가 진지하게 비교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죠?”
피식 웃은 네자르가 느린 손길로 내 나이트가운을 벗겨 냈다.
“요즘 말을 꽤 한단 말이지. 이러다가 나중에는 말로도 부인을 못 이기겠어.”
“이길 생각도 없는 거 다 알아요.”
웃음기 서린 입술이 내 뺨과 눈가 근처로 반복해서 내려앉았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얇은 입술의 움직임이 간지럼을 유발했다.
“헤넨에 가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케이트.”
“자신만만하네요.”
“일과 론이 없고, 내 부인만 있으니 그럴 만하지.”
어느새 반쯤 헐벗은 내 가슴 위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맨살에 닿아 오는 숨이 간지러워 밀어내자 마찬가지로 드러난 맨 등을 그가 꽈악 당겨 안았다.
“어딜 도망가?”
“하지만 간지러운걸…….”
짓궂었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네자르가 내 위로 올라탔다. 이를 드러낸 그가 마냥 느리지만은 않은 움직임으로 내 목덜미와 가슴골에 끊임없이 키스를 남겼다. 내 허리를 바짝 당기고 있던 팔을 풀어 침구 위에서 헤매던 내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사르륵, 얇은 천이 걷히는 소음이 들렸다. 달아오르는 열기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온 신경이 그의 숨결을 따라간다. 네자르의 손길과 키스의 흔적들이 홧홧하고 점차 뜨거워졌다.
“그리고 론과, 으음… 일이 없는 건, 하아. 폐하에게만 좋은 일이라구요…….”
짧고 나른한 웃음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손을 들어 그가 내게 그러하듯 네자르의 등과 목덜미를 쓸었다. 두텁고 단단한 목덜미를 끌어안았을 때, 손끝에 닿아 오는 울대뼈의 느낌이 너무나 좋아 계속해서 매만질 정도였다. 내 손이 떨어지지 않자 한참 내 옷을 벗기며 키스에 집중하던 그가 목울대를 떨며 웃었다. 그리고 꼼짝도 않고 있던 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로 옮겼다.
“이러면 간지러워서 집중할 수 없잖아.”
네자르는 황위에 오른 후 기사단과 몸을 푸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그의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때때로 네자르가 가진 특유의 자유롭고 거친 분위기를 다신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의 그런 아쉬움은 어느 순간부터 침대 위에서 채워졌다. 웬만한 일에도 평정심과 여유를 잃지 않는 그가 내 위에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능글맞게 나를 이끌고 분위기를 주도하다가도 그 끝에서는 항상 같은 얼굴을 보이곤 한다. 마치 지금처럼. 더는 참을 수 없으니 허락해 달라는 시선으로. 나는 괜히 짓궂은 기분이 들어 단추가 다 풀린 그의 가슴을 툭, 쳤다.
“아직 할 일이 많은 걸로 알아요.”
“괜찮아. 널 가지고 나면 능률이 올라가거든.”
저 말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니 네자르가 날 놀리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게 아닌,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네자르의 손길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급했다. 할 일이 태산 같아서인지, 아니면 한시라도 더 빨리 흥분을 고조시키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내 안에 급작스럽게 들어왔다.
“아…….”
“쉬이.”
버거움에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으나, 네자르는 꼼짝도 안 했다. 여러 번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버티다가 나중에는 밀려 주는 척하던 며칠 전과는 딴판이었다. 아픈, 아픈데……. 싫은 건 단연코 아님에도 어쩐지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아니야.’, ‘좁아, 힘들어.’라는 뜻으로 쉴 새 없이 고개를 젓는 동안 네자르는 기어코 내 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정수리 위로 만족감에 가득 찬 웃음이 느껴졌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버거워도 조금만 움직이면 금방 황홀경에 젖을 수 있단 사실을. 곧 네자르가 내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언제쯤 나를 무리 없이 받을 수 있을까?”
천천히 몸을 뺀 네자르가 다시 내 안을 파고들었다. 빠져나가는 이물감과 차오르는 이물감. 그 반복되는 감각이 내 숨을 턱 막는 느낌이라,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틀었다.
“물론 나는 그런 점도 좋지만.”
내 긴장을 덜기 위해서라는 듯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던 네자르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속절없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또 내려갔다. 어쩌면 아프다고 느낄 수 있었던 불편함과 미약한 고통이 몸을 덜덜 떨 만큼 오묘한 감각으로 뒤바뀌어 갔다.
아, 아. 최대한 참기 위해 노력했던 교성도 점차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빈도가 늘어 갔다. 시트를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열로 뜨거운 그의 손아귀 안에 갇혀 있었다. 누가 흘린 땀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손안이 축축해졌다. 그러다가 돌연 시원한 공기와 맞닿았다고 느꼈을 때는, 네자르가 돌연 거친 손길로 내 턱을 들어 올린 후였다.
“케이트, 나를 봐.”
네자르의 아래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시야 안에 그의 선명한 얼굴선이 담기면서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차오르는 숨에 헐떡이는 네자르의 모습은 조금도 천박하거나 추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가지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열화에 타오르는 시선조차 절제를 잃지 않는다.
종종 보이는, 힘을 조절하지 못해 내 인상을 구기게 하는 행동도 네자르라서 사랑스러웠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내 얼굴을 관통할 때는 짜릿함마저 느꼈다. 그럴 때면 종종 머나먼 해양의 어딘가, 너른 수면 위에 누워 파도에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읏…….”
커다란 움직임이 내 깊은 곳을 찔었다. 네자르가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게 느껴졌고, 이어서 한 번 더 같은 곳을 자극하는 게 느껴졌다.
“아, 으음.”
“하아,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 너는 모르겠지만 날 미치게 해.”
장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보았던 등불의 흔적은 이미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네자르가 완전히 나를 덮을 때, 내 눈에는 오직 그의 나른하면서 포악한 얼굴과 길고 두터운 목 그리고 단단한 어깨와 가슴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네자르가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내 살결을 물어뜯을 때는 포식자 앞의 초식 동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네자르는 내가 진심을 다해 발악하지 않는 이상 거칠게 내 안을 헤집을 것이고, 그를 위해 내 위에서 꼼짝도 안 할 것이며, 내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나는 헐떡이면서 네자르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겠지. 둘만의 공간에서 그에게 정복되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세게 내 허리를 휘어잡은 그가 내 몸을 뒤집었다.
“아, 시, 싫어, 이건…….”
“괜찮아, 케이트. 다 괜찮을 거야. 아프지 않게 할게.”
네자르는 자신이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낮게 내려앉은 음성으로 달래 봤자 이제는 내가 걷잡을 수 없겠구나, 하고 깨달을 뿐 조금도 안심되지 않는다. 네자르가 내 몸을 옮겨 침대의 벽을 짚게 했으나,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세는…….
“자극이 너무 세요. 힘들단 말이야.”
“그게 좋은 거야. 착하지?”
어른스러운 네자르는 어디로 가고, 하고 싶은 일은 기어코 하겠단 아이 같은 네자르만 남았다. 그는 언제 진중한 얼굴이었냐는 듯, 밝고 화사한 웃음으로 내 몸을 돌렸다. 저런 얼굴로 매달리는데 죽어도 싫단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네자르는 벽을 짚고 축 처진 내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너는 네 뒤태가 얼마나 예쁜지 죽어도 모를 거야. 그렇지?”
그가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전과는 달리 더 노골적이고 선연한 감각으로 발끝이 저렸다. 벽을 짚은 손등에 이마를 대자 목덜미에서 허리를 따라 흐르는 그의 입술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짧은 탄성을 기다렸다는 듯 네자르의 숨과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뜨거운 팔이 주르륵 미끄러질 것 같은 몸을 바짝 당겨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가 내 뒤에 있을 때, 나는 그 어떤 시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눈이 먼 상태로 먹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더욱 어지럽고, 머릿속이 흐릿했다.
이 자세일 때 네자르는 평소에 하지 못했던 갖은 방식으로 내게 흔적을 남겼다. 내 살을 강하게 움켜쥐는 건 물론 목덜미, 허리, 등, 골반 할 것 없이 모든 부위에 자국을 남기려 했다. 입술과 혀는 예사고, 고기 씹듯 씹어 먹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아, 젠장…….”
네자르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복욕과 차고 넘치는 흥분을 해소하는 듯했다. 나 또한 흥분에 달아오르는 시점이라 고통보다는 쾌감이 더하기 일쑤였다. 때때로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면 피멍이 들거나 선명한 잇자국이 남아 있곤 했다.
그만큼이나 자극적인 자세였기 때문에 혀 위에 구르는 소리를 참기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자제하기가 힘겨워졌고, 네자르는 그런 나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벌어진 입 안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어차피, 들을 사람, 나밖에, 없어.”
안이 전부 쓸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래도 위도 모두 다. 살이 맞닿는 것만으로도 이리 뜨거운 감각을 선물 받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집중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흩뜨리고 싶은 쾌감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갈려 나가는 기분이라 내 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허리를 잡아당기는 네자르의 악력이 점차 강해졌다. 점멸하는 시야 너머로 가장 선명한 것은 노란 등불도, 화려한 벽지도 아닌, 나의 신음이었다.
“아, 아…….”
절벽 끝에 몰린 쾌락이 내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절로 젖혀진 목을 네자르가 강하게 깨물었다. 내 가슴을 부여잡은 그가 자신의 몸에 내 등을 밀착시켰다. 몸이 젖히면서 내 안의 네자르가 낯선 곳을 더 집요하게 건들고, 파고들었다. 땀에 젖어 미끄러웠음에도 내 몸을 단단하게 고정한 네자르 때문에 우리는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숨결인지 입술인지 모를 것이 내 귀를 핥고 뺨을 건드렸다.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을 삼키고 내 고개를 돌려 입술을 삼켰다. 나의 거친 숨을 삼킨 그가 턱을 타고 내려가 내 어깨를 물었다. 그동안에도 밑을 꿰뚫는 감각은 등이 저릴 만큼 선명했다. 거칠면서 빠르게 밀려드는 쾌감에 몸을 비틀자 가만히 있으라는 듯 이를 세우며 내 목덜미를 깨문다.
“아!”
이대로라면 머릿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허공을 헤매는 손을 네자르가 잡아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거친 숨이 방 안을 달궜다. 그만, 좋아, 제발……. 몇 번인지 모를 교성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눈앞이 새하얘져 있었다. 그렇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네자르의 팔에 매달려 겨우 버틸 즈음, 그와 나는 절정을 맞이했다.
“하아, 하아.”
내 몸을 끌어서 감싸는 힘이 너무나 억셌다. 나는 어느새 무릎을 세운 채로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멀끔한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내 가슴골을 따라 흘렀다. 본능에 흐릿해진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새 맑아진 검붉은 눈동자가 땀을 따라 흘렀다.
그가 내 안에서 몸을 빼자, 따라서 흘러나온 무거운 액체가 허벅지에서 뚝뚝 떨어졌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에 몸서리치자 시트를 잡아끈 네자르가 아래를 훔쳐 주었다.
네자르는 그렇게 날 끌어안은 채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등 뒤에서 거세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점차 차분해져 갔다. 이윽고 그는 내 뺨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허리를 놓았다. 후희는 늘 그렇듯 길고 조용하다.
네자르는 관계가 끝나고도 나를 절대 자신의 품에서 놓지 않는다. 오히려 한창 서로 달아 있을 때보다 더 가깝고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아마 내 몸이 녹진하게 젖은 상태로 꼼짝도 못 하기 때문에 더욱 그리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좁아터진 그의 품에서 겨우겨우 몸을 돌렸다.
“졸려요.”
네자르는 꽉 안고 있던 팔을 풀어 한쪽은 내 머리 아래에 두고, 한쪽으론 내 등을 두들겼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도 눈을 감고 있는 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나른함이었지만, 내가 어렴풋이 잠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서 다시 책상 앞에 앉을 그였다. 그걸 알기에 더 보채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물론 그럴 힘도 없었지만.
***
사흘 후. 휴가를 위해 개처럼 일하던 네자르가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그는 날밤을 꼬박 새워 칙칙해진 낯으로 마차에 올랐다. 나는 퍽 새로운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오르며 멀어지는 겨울 제도의 풍경을 조용히 감상했다.
“에젤로트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긴 시간을 먼 타지로 떠나는 건 처음이에요.”
“헤넨은 제국과 뿌리가 같은 지역이야. 언어도 같고 문화적 교류도 잦았으니 크게 다른 점도 없을 거다.”
“그야 그렇겠죠. 그런데 네자르는 괜찮아요?”
물음과 함께 스르륵 무너진 네자르가 내 허벅지에 쓰러지듯 누웠다. 푹 쉬는 한숨이 마차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파고들 기세다.
“다른 사람들에게 좀 맡기지 그랬어요.”
“맡기고 있기는 해. 다만 중책까지 넘기기에는 믿음직스럽지가 않아.”
“그것도 병이에요, 병. 어떻게 타인을 그 정도로 불신할 수 있어요?”
네자르가 잠이 쏟아지는 흐릿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훑는다. 정확히는 귀 아래에서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귀걸이를 구경하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크고 화려한 액세서리는 오랜만에 착용하는 터라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는 축제와 행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황성에서 그럴싸하게 꾸밀 일이 없었던 탓이다. 이럴 때나 되어야 무거운 보석도 걸치는 거지.
“누가 보면 내가 아무도 믿지 않는 줄 알겠어. 어디 보자, 날 대신해서 업무를 맡는 작자가 론을 제외하고 에젤로트 재상과 백작, 필프론츠 후작, 쿼트로그 공작, 판시온 공작…….”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폐하가 그렇게 소수의 귀족에게만 신뢰를 주면 다른 귀족들은 어떻겠어요?”
“좋겠지. 중앙의 일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영지만 관리하면 될 테니까.”
“저 같으면 서운할 것 같은데요? 폐하의 신임과 관심을 받을 기회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하, 서운?”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네자르가 크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주 배가 불렀군. 대체 그런 개소릴 지껄인 게 어디의 누구야? 얼굴 한번 봐야…….”
“어휴! 됐어요, 됐어! 잠이나 자요.”
하여간 뭐 하나 말하면 그러려니 안 하고 끝까지 파고들려 한다. 나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든 네자르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창문 밖의 하늘을 구경했다.
헤넨은 어떤 곳일까? 에자렛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영지 관리라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무려 두 곳이나 책임지고 있으니.
그렇게 헤넨행 첫날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
과정과 끝도 시작만큼 비대하고 활기차면 좋았으련만. 나흘이 지났을 땐 계속된 이동으로 삭신이 쑤셨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는 소화 불량으로 체하고 말았다.
내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하루 휴식 후 이동을 재개하였고, 결론적으로 제도를 벗어난 지 11일 만에 헤넨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그 드높은 성벽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격과 행복이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찬란한 광휘 그 자체였다.
“헤넨의 성은 마치 요새 같네요.”
거칠고 너른 협곡과 그 위에 자리한 드높은 성벽. 제국 황성처럼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성은 이곳에 없었다. 그 대신 책 안에서나 볼 법한 웅장한 요새 하나가 턱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벌에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됐으니 말 다 했지. 이렇게 다시 보니 기분이 새롭군.”
튼튼한 다리를 지나면 거대한 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한다. 성에는 카발 제국의 국기와 정체 모를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나란히 펄럭이고 있었다.
“폐, 폐하!”
문 너머로 마중 나온 수십 명의 고용인과, 그 한가운데 선 익숙한 외양의 여인. 두꺼운 외투로 몸을 둘둘 만 모습이 어색하기는 해도 내가 알고 있던 그 에자렛이 맞았다.
“그리고 황후 폐하. 세상에, 정말로 오실 줄이야!”
“오랜만이에요, 에자렛.”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처럼 감격적인 낯의 에자렛이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간 어떠셨나요? 잘 지내셨나요? 옥체는 무탈하시죠? 제도에 눈이 많이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큰 문제는 없었나요? 황후 폐하께서도 잘 지내셨어요?”
어째 몸은 날 향해도 내용은 네자르를 향한 것 같은데.
“에자렛, 아무래도 그 질문은 내가 아니라 폐하의 얼굴을 보면서 하는 게 나을 듯싶어요.”
화르륵 타오른 얼굴이 쭈뼛쭈뼛 틀어져 네자르를 향한다. 무덤덤한 표정의 네자르와는 너무나 상반되어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자들은 외사랑으로 여길 정도였다.
“얼굴에 살이 올랐군.”
“예, 예?”
역시 남매답게 인사부터 살벌하네. 나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에자렛과 네자르를 두고 먼저 내성으로 들어갔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시종 한 명이 바짝 따라붙었기에 길을 헤맬 필요도 없었다.
“헤넨은 1년 내내 날씨가 어때?”
“카발과 비슷한 것 같은데. 확실히 겨울이 조금 더 추운 느낌이기도 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어째 말이 좀 짧게 들리는 건 순전히 내 착각이려나. 아무래도 장시간 마차를 타고 이동했더니 기력이 쇠해 어미가 전부 생략된 채 들리는 듯했다. 어째 목소리도 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피오라 왕녀는 어디에 있지? 보이지 않던데.”
“왕녀는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지대한 편이야. 보름 전부터 헤넨 일대를 돌아다니며 영지민들의 겨울나기 법을 배우고 있지. 그 여자도 참 특이해.”
역시 착각이 아니다. 질문에 합당한 내용은 둘째 치고, 황족에 대한 예법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어투에 어이가 없었다.
설마 에자렛도 성에서 이딴 취급을 받아 온 건 아니겠지. 이럴 때는 기강을 확실하게 잡아 줘야 한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등을 돌려 뒤따라오는 시종을 꾸중했다.
“네 이놈!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경칭을……!”
그러나 시종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혀가 굳어 버리고 말았다.
“뭐야. 친우랍시고 말을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황후가 되었으니 대접을 받고 싶다는 건가?”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시종이 아니, 시종인 줄 알았던 남성이 삐죽하게 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에 반사적으로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앤드류?”
행방불명된 지 어언 반년이 되어 가는 앤드류 오드리네 카발 황자가 눈앞에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드류가 비록 행방불명됐으나 신변이 안전하다는 것 정도는 네자르에게 이미 들은 바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아니 당연한 소리로 나와 앤드류의 관계에 퍽 예민한 듯싶었다. 내가 그의 눈치를 봐 묻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자연스레 먼저 입을 열었던 걸 상기하면.
***
‘에자렛과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는 모양이더군. 아마 제국에서 떵떵거리며 잘 지내고 있을 거다. 페리윈스크 공작령의 재화가 적은 것도 아니고.’
‘제 이야기는요? 제 이야기는 없었대요?’
‘별말 없던데.’
그래, 그렇겠지. 솔직히 앤드류와 나 사이에 교류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안면이 조금 있는 정도이려나. 그나마도 네자르가 없었다면 이어지지도 않았을 인연이었다.
‘네자르,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앤드류 황자와는 사이가 어땠어요? 예전에 아카데미를 방문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둘이서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해서요. 대답하기 싫으시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심지어 에젤로트에서조차 둘의 사이는 조용했었지. 늘 시끄러운 삼 형제만 보며 살아서 그런가, 싸늘하고 고요한 형제 관계는 영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앤드류……. 앤드류는 에자렛보다 훨씬 더 내 영향을 많이 받았지.’
기껍게 여기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달리 네자르는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그 애가 반골로 자란 건 내 탓이 커. 내가 그 나이 즈음에 반골이었거든. 아버지에게는 배울 것이 없고 어머니에게는 배우면 안 되니 날 보고 배운 거야.’
‘네자르에게 뭐 배울 게 있다고 배웠대요.’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지. 영향받고 습득하고 배운다는 건 오롯이 본인의 의사로만 결정되지 않으니까.’
술술 뱉어 내는 소리와 달리 네자르의 시선은 여전히 책을 향한 채였다. 제목은 『쇠퇴하였으나 가치 있고 볼품없으나 책임져야 하는 것들』. 역사와 관련된 인문학 서적이었으나 어쩐지 지금의 네자르를 대변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부러 신경 쓰지 않았어. 난 에자렛과 앤드류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거든.’
‘학업이요?’
네자르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들이는 시간이 가장 아깝지.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너무 지겹고 재미없는 이야기야. 그중 가장 흥미 있는 건 고작 케이트 에젤로트밖에 없는 것 같군.’
무거운 손가락이 내 코끝을 툭, 치고 떨어졌다. 나는 반나절 내내 열심히 겨울용 털 머플러를 바느질하던 것도 잊고 되물었다.
‘그건 내게 퍽 신경 썼다는 의미예요?’
‘썼지, 그것도 엄청. 때때로 피곤하고 신경질이 날 정도로.’
‘시, 신경질이 날 정도면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그게 안 됐으니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하여간 굳이 따지자면 앤드류는 내 부정적이고 옹졸한 부분만 보며 자라 온 거야. 그런 것치고는 확실히 잘 자라기는 했지.’
‘그런 소릴 들으니 네자르가 엄청 무신경하고 정 없는 사람처럼 들리네요.’
네자르가 손등으로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나는 그 잘난 얼굴에 대고 말을 이었다.
‘그렇담 네자르의 부정적인 면은 앤드류보다 더 못됐다는 거죠?’
‘그게 그렇게 되나?’
‘앤드류보다 더 싸가지 없고, 더 성격 나쁘고, 더 예민하고, 더 짜증 잘 부리고, 더 부정적이고, 더…….’
‘그걸 내가 인지하고 있어서 그런가 대화 잇기가 쉽지는 않더군.’
서적을 테이블 위로 내던진 네자르가 열심히 움직이던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앤드류보다 성격도 나쁜 주제에 입 닥치라는 의사 표현은 참 차분하단 말이야.
‘오가는 말이라고는 고작 밥을 먹었는지, 공부는 잘되는지, 부족한 건 없는지, 에자렛과 잘 지내는지가 전부야. 그나마도 죄다 단답이지만.’
‘그럼 좀 더 재밌게 물어보지 그랬어요? 애초에 질문 자체부터 성의가 없잖아요.’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내가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면 훨씬 더 불편하게 여길 애야. 지금으로도 충분해.’
충분하다는 말의 의미가 목숨을 살려 줬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라는 뜻일까. 네자르와 앤드류의 관계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에자렛과 다소 다르다는 점도 신기하고.
***
그래, 네자르와 앤드류에 대해서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던 게 고작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는 기품 없이 쩍 벌어진 턱을 애써 다시 닫고 눈앞의 앤드류를 올려다봤다. 네자르의 예측이 정확했나 보다. 날카롭게 마른 인상이었던 얼굴에 어느 정도 살이 붙어 단단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정말 에자렛 옆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었나 봐. 얼마나 잘 먹었으면 그사이 키도 반 뼘은 더 자란 것 같았다.
“기분 나쁘게 왜 자꾸 쳐다봐? 새삼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냐?”
“애, 앤드류…….”
나는 감격과 감동, 기쁨 그 중간의 미묘한 기분이 되어 앤드류의 팔을 붙잡았다.
“재수 없게 말하는 걸 보니까 진짜 너 맞구나!”
“그쪽이야말로 변함없이 재수 없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맞는 것 같군.”
“어쩜 말 한번을 안 지려는 것도 그대로니?”
“본인 이야기 하는 건가?”
어느새 앤드류와 나는 반년 만의 재회라는 것도 잊은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아, 그래. 이럴 땐 연장자인 내가 물러서 줘야지.
“내가 비록 이제 황후이나, 너는 특별히 존칭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 앤드류. 넓은 마음으로 허락해 주지.”
“그거참 가문의 영광이로군.”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특유의 비꼬는 말투도 그렇게 친근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에자렛의 성이라면 앤드류가 뻔뻔하게 돌아다닌다는 점도 그리 놀랍지 않고.
잠깐. 그렇다면 네자르가 말한 더 나은 방도라는 건……?
“앤드류, 너 피오라 왕녀랑 혼인해?”
“아니.”
응? 아, 아니라고? 당연히 그렇다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칼같이 부정할 줄이야.
“그런 소리가 잠깐 오갔던 때는 있었지. 나야 어차피 누님에게 빌붙어 사는 처지이니 상관없었지만, 왕녀가 거절하더군.”
그런 뒷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에자렛과 관련된 일은 모두 네자르가 관리하고 있었기에 자세하게 캐낼 수 없던 사항이었다. 애초에 나는 록허드와 아스테 왕녀의 일로 바빠 네자르가 맡은 헤넨의 일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거절한 거람.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앤드류를 위로하는 일이 먼저였다.
“괜찮아, 앤드류. 너 정도면 어딜 가도 꿀릴 만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 머저… 여자야.”
방금 머저리라고 하려던 거 맞지? 그렇지?
“그럼 왕녀는 왜 널 거부했다니? 카발 제국의 핏줄을 원하면서, 카발 제국의 적자를 거절할 이유가 있나?”
앞서 걷던 앤드류는 곧 커다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와 네자르의 침실이 분명해 보이는, 고풍스럽고 거대한 양문 앞에.
“너 같으면 조국을 말아먹은 적국의 자손과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어?”
아, 그런 의미인가.
“왕녀는 거절했으며 우린 그 의사를 존중했다. 정확히는 누님과 폐하께서 허하신 거지.”
카발의 핏줄을 원하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필요였구나.
복잡한 일은 질색이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저들끼리 해결했다고 하니 더 이상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시종들이 짐을 모두 옮긴 직후 이른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비록 피오라 왕녀가 없는 헤넨에서의 첫 식사였으나 오히려 그 덕에 더 편한 감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감칠맛이 진한 느낌의 음식들도 나쁘지 않았다.
“각하, 헤넨 동서 지방 크루클산맥 눈사태와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헤넨의 영주가 된 첫해라 그런지, 식사 시간에도 에자렛에게 끊임없이 보고가 올라온다. 이 점은 카발 황성과 꼭 닮은 그대로였다. 네자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그에게서 배운 방식인 것 같았다.
“앤드류, 어떻게 할까? 당장 지원할 수 있는 지원금은 부족하지 않아. 한데 지난번 세무 조사에서 동서 지방 탈세가 가장 심각했었잖아. 자금보다 물자 지원이 더 나을까?”
“아뇨. 눈이 전부 녹지 않아 이동에만 수십 일 걸릴 겁니다. 차라리…….”
에자렛은 황족 출신의 공작. 앤드류는 황족 출신의……. 뭐라 해야 할까. 백수? 에자렛의 일을 돕는 대신 그녀의 가문에서 사는 걸까?
“황자님은 아마 에자렛 공작님의 보좌로 계실 겁니다. 이는 대외적인 모습이고, 실질적인 관리는 모두 황자님께서 하고 계실 확률이 높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식사하던 툴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앤드류가 페리윈스크 공작 위를 이으면 되는 일 아니었어?”
“황자님은 황위 쟁탈에서 패하고, 쫓겨났으니까요. 하지만 에자렛 황녀께서는 마지막까지 황성에서 자리를 지키셨죠. 대우가 상반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게 황녀님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고요.”
이놈의 황성은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복잡하다. 정치를 잘 알기는커녕 신문 한 장도 읽지 않는 삶을 살아왔던 내게 카발 황성의 먹이 사슬은 너무나 복잡하고 성가셨다. 그냥 모두가 대충대충 살면 안 되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됐어요. 내일모레부터 이곳에서 봄맞이 축제가 열리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두 분을 안내해 드릴게요.”
잔뜩 신이 난 에자렛의 제안에 네자르가 미간을 좁혔다.
“봄맞이? 아직 눈이 저렇게 쌓여 있는데?”
그의 반문대로 창 너머 보이는 협곡이 여전히 꽁꽁 얼어 있었다. 봄맞이 축제라는 상큼발랄한 이름과는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풍경이다.
“마지막 겨울 축제라고 보면 돼요. 지금은 이렇게 한겨울 같아도 3월이 되자마자 호수랑 강이 금방 녹는다네요.”
“일은요? 공작 앞에 쌓인 서류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엄청 바빠 보이는데요.”
에자렛이 밝디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폐하. 어차피 전부 다 앤드류가 처리하니까요!”
바로 옆에서 그 소리를 듣는 앤드류의 표정은……. 뭐라 묘사해야 하는 걸까. 체념? 순응? 마치 록허드의 난동을 뒤처리하는 릭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군. 이렇게 먼 곳까지 온 김에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기는 게 좋겠지.”
“그럼 제가 내일 일정을 짜서…….”
“하지만 에자렛 너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지 않느냐. 축제는 나와 황후 둘이서 구경할 테니 넌 앤드류를 도와서 일이나 마무리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단칼에 거절하는 네자르의 명에 에자렛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더듬었다.
“겨, 겨우 하루인데요?”
“맞습니다, 폐하. 고작 하루 더 누님이 절 돕는다고 하여 일의 능률이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를 도우느라 속도가 더뎌지지요.”
그런 에자렛의 모양새가 안쓰러웠는지 앤드류가 말을 거들었다.
저 남매도 여러모로 신기하단 말이지. 처음에는 에자렛의 성정이 다소 여리다 싶었어도 확실히 누나답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또 여동생 같은 느낌이다.
“앤드류, 그렇다고 전부 네가 맡아서 할 심산이냐? 황후도 내 일을 돕기 위해 한창 공부하는 중인데, 에자렛이 지금처럼 네 말만 따를 순 없지. 그런 이를 감히 공작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다.”
한기에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매정하다. 옆자리에서 고기를 잘라 먹던 내가 괜히 더 민망해질 정도였다. 근데 꼭 날 걸고넘어지면서 타박해야 하는 걸까? 네자르가 사람 취급해 주는 범주의 최소한이 나인 거야?
에자렛이 시무룩한 낯으로 나이프질을 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했던 식사였다. 그래도 서로가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었으니.
***
헤넨으로 오는 길 자체가 긴 일정이었기에 첫날은 오자마자 잠들었다. 고단했던 터라 둘째 날은 정오가 넘어서 눈을 떴다. 휴가라 칭했으면서 네자르는 둘째 날부터 앤드류와 에자렛에게 헤넨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받느라 바빴다.
나 홀로 남겨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곤 협곡을 감상하기, 협곡에 구경 가기, 툴드와 협곡에서 빙어 낚시하기, 툴드와 협곡 근처 산맥에서 산딸기 따기가 전부였다.
“진짜 재미없어. 아니, 재미있기는 한데 전부 툴드랑만 하려니 지겨워. 겨울이라 할 수 있는 여가도 한정되어 있고……. 여름이라면 물놀이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텐데.”
“듣는 툴드 참 섭섭하게 하는 말씀이십니다, 폐하.”
투덜거리기 바쁜 툴드의 건너편, 용무를 보던 앤드류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지루한 거랑 네가 내 방을 찾아온 거랑 무슨 상관인 거냐?”
만년필을 빙그르르 돌리던 손이 멈췄다. 나는 겨우 한 줌 남은 산딸기를 입 안에 쑤셔 넣으며 답했다.
“그렇다고 회의 분위기나 마찬가지인 에자렛의 집무실을 찾아갈 순 없잖아? 사람이 눈치라는 게 있지.”
“이틀 내내 바깥에서 놀고먹은 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군.”
“그럼 내가 휴가까지 와서 일해야겠니?”
말과 함께 테이블 위로 카드를 펼쳐 놨다.
“그러니까 나랑 카드 게임 한 판만 하자.”
“가서 네 호위 기사랑 실컷 해.”
“안 돼! 이 게임은 최소 세 명이 있어야 한다고.”
“황후께서는 제게 지금 7연패를 당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세 명이면 이길 수 있다는 소릴 다섯 판 연속으로 하시는 중이죠.”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고, 만년필을 내던진 앤드류가 터벅터벅 걸어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카트리나.”
“왜?”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을 하시려고 밑밥을 까는 건지 모르겠다. 보나마나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좀 꺼지라는 소리겠지. 나는 게임에 필요한 카드를 정리하며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어이, 카드에 한눈팔지 말고 잘 들으라고.”
“귀는 정확히 앤드류 황자를 향하고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
짧은 한숨이 반복되어 들린 직후,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앤드류가 말했다.
“솔직히 속이 좀 뒤틀린다, 널 볼 때마다.”
“나도 그래.”
“장난치는 거 아니야.”
무게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카드를 펼치다 말고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기분이 확 상했고, 동시에 민망했다. 나가라고 할 때 재깍 나가야 했던 걸까. 아무래도 눈치 없이 자꾸 놀자고 조른 탓에 앤드류의 심기를 건든 듯했다.
“이 치졸한 마음이 좀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필요해. 더도 말도 덜도 말고 50년 정도.”
“참 나. 그냥 평생 마주치지 말자고 하지?”
“널 보면 자꾸 후회하게 돼. 무의미하게 보냈던 시간과 멍청하게 소비한 기회가.”
“그럼 좀 현명하게 보내지 그랬어?”
“현명하게 보냈으면 네가 그렇게 좋아 죽는 형님 옆에 있을 수 있었을 거 같아?”
정말 의미 없는 대화였다. 그럼에도 이전과 달리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친우의 한탄을 듣는 것처럼 덤덤하면서 약간의 감정 이입이 될 뿐.
“폐하가 안 계시다고 막말하기는.”
“막말? 황후께서는 진짜 막말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너, 내 소문 몰라? 나 한때 사교계에서 싸가지 없기로 유명했었어. 너보다 더 막말 잘할걸?”
어쩐지 성격 더러운 걸 자랑하는 모양새가 됐지만, 사실은 사실. 전생을 기억해 내기 전의 나는 그야말로 발가벗은 오랑우탄이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여우였다.
“안 듣는 게 좋을 텐데. 지금은 네 멋대로 이렇게 내 방까지 찾아오지만……. 글쎄, 들은 후에도 그게 가능할지.”
알고 보니 날 암살하려 했던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뜸을 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카드 섞는 것도 잊고 활활 타오르는 호기심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백수 주제에 무게 잡지 말고 그냥 말해.”
앤드류의 진한 눈썹이 움찔, 위로 솟는다.
“네가 형님 옆에서 하하 호호 즐거운 꼴을 보니 배 아프단 의미다. 됐어?”
“……그게 끝이야?”
“그래.”
뭐야, 나는 또 얼마나 무서운 비밀이기에 숨기는가 했더니. 순전히 네자르 옆에서 호의호식하는 내가 부럽다는 의미였잖아.
“너, 정말 속이 좁구나. 그렇게 형님이 좋니?”
“아니, 그 반대.”
속을 긁는 말에도 앤드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반대라면 내가 아니라 네자르가 부럽다는 의미인가. 내가 네자르와 즐거운 모습을 보면 네자르가 부럽다, 라.
“푸흡…….”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지? 지금 앤드류가 한때 날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거지? 당황스러웠으나 그 감정을 표현할 순 없었다. 일단 대충 웃어넘기고 카드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넘기자.
“이 누님이 좋다면 말을 하지 그랬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
“나가.”
하지만 앤드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줬을 텐…….”
“거기, 너. 당장 폐하를 데리고 나가라.”
툴드에게 쏘아붙임과 동시에 테이블 위 카드를 쓰레기통 안으로 깔끔하게 쓸어 담는다. 아니, 동대륙에서 건너온 귀한 카드를 저렇게 거칠게 다루다니!
“자, 잠깐만. 우리 카드 게임은?”
“저녁에 저택 밖에 버려둘 테니 하나하나 주워서 사용하든가.”
위협적인 눈빛 때문에 의자에 딱정벌레처럼 붙어 있기가 영 버겁다. 나는 앤드류에게 떠돌이 개 취급을 받으며 결국 방에서 쫓겨났다.
쾅! 나는 거칠게 닫힌 문 앞에 서서 음각된 목조의 문양을 처량하게 응시했다.
“내가 너무 놀렸나?”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알 터.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툴드를 쳐다봤다.
“흠. 순정이 짓밟힌 기분이란 게, 즐겁다고 할 수는 없죠.”
“그렇다고 거기서 당황한 티를 낼 수는 없잖아.”
“그래서 황자 전하가 경고하셨잖습니까. 듣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젠장. 뒤로 보고 앞으로 봐도 확실히 내 실수이긴 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난 유부녀고, 상대는 무려 내 남편의 이복동생이 아닌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소재다.
“하여간 이놈의 호기심이 문제야.”
그래도, 앤드류는 용기 내서 말한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단적으로 네자르가 내 마음을 비웃는다고 상상하니 발끝부터 울분이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툴드.”
“네.”
“나는… 마성의 여인이었던 걸까?”
내 물음에 멍하니 눈을 껌뻑이던 툴드가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입매가 꽉 닫힌 것을 보아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죽을힘을 다해서 참아 내는 듯했다.
***
안 그래도 해가 일찍 지는 겨울인데, 헤넨의 해는 카발보다 반 시간은 더 일찍 죽었다. 나는 저녁 후식으로 준비된 산딸기 밀푀유를 잘라 먹으며 며칠 새 볼록 나온 듯한 착각이 이는 뱃살을 살살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옷이 두꺼워서 나온 줄 알았는데 역시 옷이 아니라 살이 문제였다.
“나, 살 좀 찐 것 같지?”
“예.”
에이 씨. 망설임도 없이 즉답하다니.
“하아. 툴드, 넌 다 좋은데 꼭 이런 쪽으로 눈치가 없는 게 문제야.”
“예?”
비척비척 일어서 데이지를 불렀다. 그녀는 나가야겠다는 내 한마디에 곧장 옷장에서 겨울용 승마복과 장갑, 장화를 꺼냈다. 안 그래도 헤넨으로 오기 직전에 네자르가 새로 장만해 준 선물이라 언제 사용할지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나는 툴드와 함께 마구간으로 달려가 가장 튼실한 말을 골랐다. 북쪽의 말이라 그런지 가죽과 털이 유독 더 단단한 느낌이다.
“제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 좀 보세요. 이미 해가 져서 어두컴컴하지 않습니까?”
“괜찮아.”
“헤넨 협곡은 가파르고 거칠기로 유명합니다. 근처 지리도 모르실 텐데, 위험할 게 분명합니다.”
“괜찮아.”
“날이 어둡고 산이 복잡해서 길을 잃어도 찾기 힘들고요.”
“괜찮아.”
“……지금 제 말 제대로 듣고 계신 것 맞죠? 귀찮아서 괜찮다고만 말씀하시는 거 아니죠?”
“괜찮아.”
날 따라 자신의 말에 올라탄 툴드가 울상이 되어 제 가슴을 여러 번 후려쳤다. 나는 그가 더 귀찮게 달라붙기 전에 고삐를 당겨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나마 시야를 밝히던 성의 빛이 등 뒤로 점차 멀어진다. 나는 차가운 겨울의 어둠 속으로 뛰어들며 기이한 안정감을 느꼈다. 어릴 때는 네자르와 록허드를 따라 밤 사냥도 종종 나갔었는데.
다리를 건너 너무 멀지 않은 숲까지 달려간 나는, 계속해서 주변을 맴도는 반딧불이 한 마리를 손에 잡았다.
“툴드! 이것 봐. 헤넨에는 겨울에도 반딧불이가 사나 봐.”
“그건 반딧불이가 아니야, 겨울땅불이지.”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툴드가 아닌, 매우 의외의 인물이었다. 나는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주변을 살피는 툴드와, 느릿하게 등 뒤로 붙어 오는 앤드류를 차례대로 살폈다.
뭐지?
“너… 왜 여기 있어?”
“누님께서 네가 소란스레 나가는 모습을 보신 모양이더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따라 나가라던데.”
“헤넨이 익숙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호위 기사 없이 나온 것도 아니고.”
“황후께서 턱도 없는 소릴 하시는군. 당장 곤충 이름이 반딧불이인지 겨울땅불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전날의 고백이 무색하게 앤드류는 평소처럼 매정하고 사납게 날 대했다. 그만큼 내가 그에게 더는 여자로서 의미가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배려하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었다.
“그럼 저 산등성에서 계속 울고 있는 새는?”
“흰눈초리부엉이.”
“저 귀뚜라미 같은 곤충 소리는?”
“귀뚜라미.”
“저쪽에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잠깐. 뭐지, 이 데자뷰는?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했던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너는 대체 절제라는 걸 모르는 거냐? 눈도 안 녹았는데 한밤중에 말을 타고 숲 안쪽까지 오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 있어?”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에젤로트는 폭우가 내린 밤에도 말을 타.”
“헛소리 말고 성으로 돌아와. 넌 이제 한낱 귀족 영애가 아닌 황후다. 좀 더 생각이란 걸 하고 움직여.”
난 입술을 댓 발 내밀며 앤드류 뒤에서 모르는 체하기 바쁜 툴드를 노려봤다.
“저놈이군. 저놈이 범인이었어.”
앤드류가 워낙 날 철없는 애송이로 취급한 덕에 더 이상 말을 타겠다고 고집부릴 수도 없었다. 난 어깨 부근에 겨울땅불인지 뭔지 한 마리만 초라하게 대동한 채 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니, 내게 마음이 있었다면 나한테 조금이라도 약한 면모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우리 어머니보다 더 쌀쌀맞고 야박할 수 있는 거지.
그나마 운동할 기회도 날려 버린 탓에 우울해진 기분으로 안장에서 내릴 때였다. 날 마중하러 나온 데이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엔테라 공작께서 오셨어요.”
“뭐? 판시온 공작이?”
“네.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황녀님… 아니, 페리윈스크 공작님과 무슨 상권 관련해서 나눌 이야기가 있으신가 봐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앤드류를 쳐다보자, 그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영지의 상황이 전반적으로 바빠. 엔테라 공작 말고도 이미 여러 귀족이 다녀갔으니까.”
“휴가 일정을 잘못 짠 것 같네. 괜히 바쁜 때 방문해서 피해만 주고…….”
“글쎄. 폐하께서는 오히려 도움을 주시려 한 것일 수도.”
어깨를 으쓱이는 앤드류 뒤를 따라서 내성으로 들어섰다. 당연한 과정으로, 실내복으로 환복한 나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헤넨 성의 주인도, 안주인도 아닌 내가 굳이 판시온을 봐야 하나 싶었으나 그래도 이 먼 북쪽에서 얼굴을 본다는 게 날마다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
조심스럽게 끼어든 자리에는 이미 담배 찌든 내와 옅은 술 냄새로 만선이었다. 판시온이야 골초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고, 네자르도 그만큼은 아니어도 종종 흡연을 즐기곤 했다. 앤드류의 손끝에 담배가 걸린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서 비흡연자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에자렛 공작은요?”
“내내 폐하께 괴롭힘을 당해 지치셨는지 금방 침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네자르의 앞이라고, 앤드류의 입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존대가 튀어나온다.
“네자르, 여기까지 와서 사람 괴롭히는 거예요?”
“괴롭히다니? 에자렛이 21년 동안 황성에서 배운 건 공작 위를 물려받는 데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어. 황후처럼 짐이 어릴 적부터 공들여 가르치지 않았지.”
“왜 자꾸 나와 비교하는 거예요?”
“짐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그래.”
그래서 내가 그 기준의 아래라는 건지, 위라는 건지.
나는 시야를 수놓은 매캐한 담배 연기를 흩트리고 남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동서남북으로 한 명씩 자리하니 그 모양새가 재밌어 금방이라도 품에서 게임용 카드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공을 들여 가르치셨다는 건 무슨 소리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인 판시온이 재떨이에 재를 털며 물었다.
“말 그대로지. 대충 열 살 즈음이었나……. 황후는 아마 가정 교사에게 배운 것보다 짐에게 배운 것들이 많을걸.”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셨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 짐의 인내심은 그 시절에 다 길러 놨어.”
배우자 앞에서 배우자의 흉을 보는 것만큼 서운한 게 또 없지. 나는 구두 굽을 이용해 네자르의 발을 강하게 밟았다.
“윽.”
“확실히……. 황후께서 비범한 시각을 가지고 계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군요. 이제야 비밀이 풀린 느낌입니다.”
“내 얼굴에 너무 금칠하지 마세요, 판시온 공작. 저는 제 주제를 너무 잘 알아서 조금 수치스럽기까지 하네요.”
보드카가 출렁이는 세 개의 잔 사이로 유일하게 비어 있는 유리잔을 집어 물을 따랐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판시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굴에 떠오른 옅은 미소까지도.
“황후께서는 지위와 능력에 걸맞지 않게 너무 겸손하십니다. 사냥 실력과 승마 실력도 상당하신 것으로 아는데, 저 같으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을 겁니다. 록허드 경과는 아주 딴판이십니다.”
“그런 말 마시래두요. 지금 옆의 앤드류 황자께서 비웃고 계시는 모습, 안 보이시나요?”
“뜬금없이 날 걸고넘어지시는군.”
내 말에 앤드류가 픽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비웠다.
이 자리, 뭔가 불편하다. 그냥 불편한 것도 아니고 상당히 불편하다. 나는 손안으로 옷의 천을 매만지며 네자르를 힐끔 쳐다봤다. 감흥 없는 얼굴을 봐선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앤드류도 마찬가지였고, 판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지금 나만 불편한 건가.
“겨, 결혼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으신가요?”
판시온은 나와 네자르의 결혼식 직후 약혼식을 끝냈고, 반년 후인 지금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 이왕이면 카론이 출산한 후로 맞추고 싶었는데, 다행히 시기가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카론은 잘 지내고 있나요?”
“출산 예정일까지 고작 두 달 남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예민해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필프론츠 후작이 그리 말했나 보군요.”
“하하. 역시 잘 아시는군요. 얼마나 소란스러우면 후작 본인이 임신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카론의 출산이 겨우 두 달 남았다니! 머릿속으로 카론과 필프론츠 후작, 그리고 열심히 손을 꼬물거리는 차기 오드리네 후작을 떠올렸다. 수십 가지로 구도를 바꿔도 정말 어색한 그림이었다.
“벌써 출산일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나? 놀랍군. 아무리 그래도 잉고르 영애의 경우는 그와 다르겠지, 공작. 그대가 후작처럼 파렴치한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폐하의 기대를 배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유 모를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손안의 천을 빙그르르 꼬고, 앤드류가 무료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판시온이 세 번째 담배를 태운 직후 네자르가 입을 열었다.
“앤드류 너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는 거냐?”
“……너무 갑작스러운 물음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앤드류가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고작 2초 남짓한 사이에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딱히 무언의 감정이 오갔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선에서 끝났다.
잠깐, 서로를 의식한다고 표현하니까 괜히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느낌이잖아?
“별생각 없습니다. 그럴 기회도,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그간 나돌아 다니느라 바쁘지 않았습니까.”
“북벌 전쟁 때는 한창 북쪽으로 정진하던 시기에도 시골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던 놈들이 있었어. 한데 넌 아카데미에서도 사교계에서도 연애 한번 안 해 봤다는 말이냐?”
건조한 웃음을 뱉으며 앤드류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게 제 운명인가 보죠. 어차피 이제 저에겐 후계자를 생산할 의무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제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의무는 남아 있지.”
“그야 그렇죠. 그게 제가 여기서 밤낮 구분 없이 누님을 돕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진심으로 도울 생각이었다면 열과 성의를 다해서 피오라 왕녀를 꼬시려 했을 거야. 몇 달 헤넨에서 지내더니 아주 입만 살았구나, 앤드류.”
“음. 이쯤에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되는 겁니까?”
네자르는 더 이상의 대답 없이 의자 등에 더 깊숙이 기댔다. 빈 술잔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쳐다봤으며, 그다음에는 앤드류와 눈을 마주했다.
설마 그 잠깐 시선이 오간 걸 눈치챈 건가. 맹세컨대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등 뒤에 땀이 나는 착각이 드는 건지.
“이제 보니, 발이 그리 넓지 않은 편에 속하는 황후가 그나마 가깝게 여기는 둘이 이 자리에 함께 있군.”
나는 그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이 불편함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챘다. 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날 마음에 두고, 한때 마음에 두었으며, 어쩌면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을지 모를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공기가 싸늘하다. 단순히 겨울이라는 계절 탓이 아니라 분위기를 아우르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았다. 그 변화를 깨달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느리게 목덜미를 주무르며, 네자르가 말을 이었다.
“둘 다 잘생겼어.”
앤드류가 조용히 나와 시선을 맞췄다.
“신장도 크고. 특히 판시온 공작은 말할 것도 없지.”
굳게 닫힌 판시온의 입매가 그 어느 때보다 난처해 보였다.
“재산… 그래, 재산은 그래도 짐이 가장 독보적이로군. 그나마 체면이 좀 서겠어.”
“아하하, 네자르는 카발 제국의 주인이잖아요? 대륙의 그 누구도 네자르의 지위를 넘볼 수 없을 거예요.”
“황후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얼마나 살 떨리는 기분이면 판시온까지 나서서 내 아부를 도울 정도였다.
그래, 네자르.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난 네자르가 최고란 말이야!
“하지만 키는 판시온 공작이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지. 얼굴도… 앤드류가 다섯 살은 더 젊어.”
그 한마디를 끝으로 네 명이 오도카니 모여 앉은 응접실에는 또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어떻게 하면 이 가시방석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남은 둘에게 구조를 청했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
황제 폐하의 삐침은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사그라들었다. 전날 밤, 나는 내가 왜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종일 그의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네자르의 삐침은 어이없으면서도 픽픽 웃음이 샐 정도로 귀엽기는 했다.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티를 내기에 묵묵히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그의 앞에서 별별 아양을 다 떨었다.
‘나한테는 네자르뿐이에요.’
처음부터 반응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진짜야. 나는 애초에 네자르의 여자가 될 카트리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니까?’
시선도 주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서적과 네자르 사이의 자그마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나는 네자르의 가슴에 뺨을 대고 그를 꼬옥 안았다.
‘나는 백 번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백 번 네자르를 선택할 거예요. 혹시 몰라, 지금이 네자르는 백 번째로 선택한 백 번째의 삶일지.’
그제야 책을 침대 저 멀리 내던진 네자르가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었다.
‘부인의 말은… 부인이 나의 것이니 안심하라는 의미겠지.’
‘바로 그거예요.’
‘그렇다면 그대가 정말 내 것인지 확인해 봐도 되겠지?’
대답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네자르가 나를 덮쳤다. 그는 내 두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내 입술에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그다운 차분하고 신사적인 입맞춤이었으나 입술이 열린 후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나는 그의 몸 위에 앉은 채 얌전히 혀를 받아들였다. 축축한 살이 인사하듯 가볍게 내 혀를 건드렸다. 그와 키스하면 이상하리만큼 심장 안쪽과 발끝이 간지러워진다. 내 혀를 삼키는 그와 마찬가지로 내 입 안을 헤집는 그에게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새 내 상체의 반은 벗겨진 후였다.
닿아 오는 차가운 공기에 몸을 움츠리자 그가 느릿하게 내 등과 허리를 쓸었다. 커다란 손이 가슴을 쥐자 목 안쪽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듣기 좋은지 네자르가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숨결이 차오르면서 그의 입술이 점차 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자르는 자신의 지엄한 위치도 잊고, 의자 위에서 나를 희롱했다. 드레스 자락 아래에 손을 넣은 채 부드럽게 허벅지를 쓸었다. 혀로 나의 입 안쪽을 거둘 때는 다리 사이의 은밀한 곳을 애무했다.
나 역시 그의 대범한 행위가 싫지 않았다. 방문이 갑작스레 열리지 않는 이상 네자르와 나는 황제와 황후가 아닌, 남자와 여자일 뿐이었다. 안쪽을 파고들었던 손이 천천히 빠져나와 다시 허벅지를 건드렸다. 이전에 없던 물기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묻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축축해.’
그리 말하는 네자르는 언제 삐쳤냐는 듯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성격 정말로 나빠. 역시 날 괴롭히고 난처하게 만드는 게 제일 즐거운 걸 거야.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내 몸을 안아 올린 그가 침대로 다가갔다. 네자르는 자신이 풀어 헤쳐 엉망이 된 내 가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와 할 때마다 깨닫는데… 네가 내 것이 아니었다면 난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
네자르는 날 삼켰다. 황성이 아닌, 그의 땅이면서도 머나먼 타지인 헤넨에서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 생각하자 평소 관계할 때보다 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네자르의 아래에서 흔들리는 내내 고취된 흥분이 잠시도 꺼지지 않았다. 낯선 침실의 풍경과 낯선 창 너머의 하늘 때문인지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듯했다. 네자르는 내 귀 뒤쪽과 턱 옆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헤넨이라 그런가? 네 몸에서 네 체취와 함께 낯선 나무 향이 나. 나쁘지 않군.’
네자르는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느렸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흥분과 절정은 그러하지 못했다. 느리게 몸을 집어넣고 빼는 행위가 오히려 안쪽 살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최고의 황홀경을 선사했다.
최대한 소리를 감추려던 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 정도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다시 참고, 밀고 들어오는 느린 움직임에 참지 못하길 여러 번 반복했다. 네자르의 입에서 좋아 미치겠다는 문장이 수십 번은 떨어져 내 귓가를 두들겼다.
참지 못한 내가 자의로 허리를 흔들자 네자르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거친 움직임으로 나를 삼켜 침대 벽까지 몰아세웠다. 우리는 함께 흔들렸다.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버린 듯한 말도 안 되는 흥분이 그에게까지 전염됐는지, 이전보다 조금은 이른 때에 파정했다. 잘 지치지 않는 네자르가 내 안에서 몸을 뺀 즉시 옆자리에 풀썩 누워 버릴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짐승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런 식이 어떤 식인데요?’
‘먹고 자고 너랑 뒹굴기만 하는 거지.’
그리 말하는 네자르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기에 나 또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 그렇듯, 네자르가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뜨거운 내 몸이 안고 자는 베개라도 된 양 두 다리로 감아 가두었다. 우리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시답잖은 대화를 꽤 길게 주고받았다. 그러다 나중에는 네자르가 원해 마지않는 약속 세 개를 들어주기로 하고 바로 잠들었다.
그게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오늘 아침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네자르가 다시 삐친 티를 냈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등에 붙어 평소 떨지도 않던 아양을 떨었고, 뺨에는 입맞춤만 수십 번을 반복했으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는 문장을 백 번 정도 내뱉은 것 같았다.
내가 인기 많은 게 죄야? 예쁘고 잘난 게 죄냐고!
일어나지도 않았던 불륜과 치정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과 나는 이런저런 관계였으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 라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오히려 그렇게 하나하나 짚는 게 더 수상해 보일 터였다.
“황후, 어제 우리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정확히 세 개야. 그대는 어젯밤 내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개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조했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강조하지 마세요.”
어렸을 적 태산보다 단단하고 거대하게 느껴졌던 그 네자르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손을 마주 잡는 것만으로도 큰 안도감을 주던 그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아무래도 진정한 네자르는 날 꼬셔 놓고 홀라당 도망가 버린 게 틀림없었다. 눈앞에서 소원 들어주기 몇 개로 웃음을 되찾은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불편한 티를 풀풀 풍기던 것과 달리, 축제를 즐기러 나서는 네자르의 얼굴은 근심 하나 보이지 않고 환했다. 내가 외투로 꽁꽁 싸맨 팔로 그의 옆에 딱 달라붙자 기다란 팔이 내 어깨를 감싸 왔다.
“케이트, 지금부터는 짐을 폐하라 부르면 안 돼.”
“알아요.”
늘 그래 왔듯, 네자르는 황제로서 행차하는 것보다 사람들 틈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황태자였던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세 명에 불과했던 호위 기사가 두 배로 늘어났다는 것 정도?
“네자르도 안 돼.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니까.”
말끝에 맴도는 목소리가 어쩐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축제를 구경할 생각에 즐거운 건지, 아니면 소원으로 날 골려 먹을 생각에 즐거운 건지 영 파악하기가 힘들다.
“굳이……. 알았어요.”
대충 고개를 주억이고 성의 다리를 건너려던 참이었다.
“잠깐, 케이트.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 둘 다 안 되면 뭐라고 부르게?”
금지한 장본인이면서 어떻게 부를 거냐 묻는 건 또 뭐람.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그를 폐하라고 부르든, 네자르라고 부르든 일절 상관 안 할 게 뻔했다.
“꼭 호칭이 필요해요? 어차피 계속 같이 붙어 있을 건데.”
“붙어 있다고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 건 아니니까.”
“대충 저기라든가 그쪽이라 부르면 되죠.”
“안 돼, 멋없어. 손은커녕 입도 못 맞추는 어색한 사이 같아.”
“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또 시작이다. 이럴 때의 네자르는 아주 뻔하고 의도가 명확하다. 본인이 다 생각한 바가 있으니 넌 별소리 말고 그 의도에 따르라는 뜻이었다. 예상대로 네자르는 뻔뻔한 얼굴로 뻔뻔한 소릴 내뱉었다.
“그대는 지금부터 짐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도록.”
그러고는 내 손에 깍지를 끼고 바짝 잡아당겨 도망치지도 못하게 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올려다봐도 이마에 쪽 입을 맞출 뿐, 네자르는 싱글벙글 미소 짓기에 바빴다.
“황제 폐하가 되고선 주책맞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황제는 주책맞으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하여간 시, 싫어요. 에든 오라버니 외에는 아무도 오라버니라고 불러 본 적 없단 말이에요.”
“왜 싫어? 이번에 처음으로 불러 보면 되지.”
그야… 부끄러우니까 그러지.
“그렇게 듣고 싶으시다면 갖고 계신 소원 중에 하나라도 쓰시든지요.”
네자르의 얼굴이 밤새 서류 승인을 검토할 때처럼 더없이 진지해졌다. 나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웃음에 눈매를 좁힌 네자르가 깍지를 더 강하게 쥐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내 참. 황위에 올라서 이따위 일로 진지하게 고민할 날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싫으면 마시고요.”
“누가 싫댔나? 좋아. 소원 하나 차감이야. 대신 황후는 지금부터 날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해.”
엄숙하게 선언하는 네자르의 어투에 한 번 더 웃음이 터졌다. 잠깐. 이거 좀 쉽잖아? 네자르의 요구란 요구는 전부 거절하고 소원을 사용하길 권장하면 되는 거 아니야?
“별것도 아닌 말이 그렇게 듣고 싶으세요?”
“사람은 종종 별것도 아닌 일에 최선을 다할 때가 있는 법이지.”
“말은 참 그럴싸하게 하시네요. 알았어요, 오라버니. 이 어여쁜 여동생과 함께 오늘 헤넨 봄맞이 축제를 즐겨 봐요.”
처음에는 만족스럽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주억인 네자르였다. 한데 기껏 장단 맞춰 줬더니, 제도 광장의 석고상처럼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얼굴을 팍 구겨 버린다.
“케이트, 꼭 뒤에 여동생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는 걸까?”
“여동생을 여동생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해요. 별것도 아닌 걸로 또 예민하시네.”
“흠. 그야 여동생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으니까. 부인과 나는 서로 결혼도 하고, 밤마다 침대에서 오붓하게…….”
“조용히 해요! 어떻게 된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몰라!”
투닥투닥 다투다 보니 이미 다리를 전부 건넌 후였다. 그렇게 네자르와 나는 적잖은 시간을 걸어 전 헤넨 왕국의 수도이자 현 헤넨 영지의 가장 큰 도시에 도착했다.
대도시의 축제인 만큼 큰 기대를 했으나 봄맞이 축제의 규모가 생각보다 조촐해 내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에젤로트의 여름 축제처럼 크고 시끄럽고 성대할 거라 여겼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북벌 전쟁의 영향인 듯했다.
그래도 새하얀 눈에 덮인 지붕들과 활기찬 거리, 번화가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길거리 공연을 구경하면서 훅 불어왔던 실망감이 서서히 깎여 나갔다.
“와아. 저것 봐요, 네자… 오라버니! 곰 가죽이 하얀색이에요.”
활기찬 거리에서도 내 눈에 띈 건 단연코 다양한 동물 가죽과 모피가 전시된 구석이었다. 카발에서 백색 털을 가진 야생 동물이라고는 겨울 토끼가 전부였는데, 여기는 여우부터 시작해 족제비, 토끼, 곰 모두가 털이 붉거나 하얬다.
“참 취향이 신기해, 케이트. 내 보아 온 여인 중 너처럼 사냥물에 정신 못 차리는 여자는 또 없다.”
“말이 조금 이상한데요? 오라버니 주위에 여자라고는 제가 전부잖아요.”
“음…….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
신기한 건 오히려 네자르 본인이면서. 내가 저 얼굴로 태어났다면 정말, 어휴……! 할 말이 많은데 아낀다!
괜히 네자르를 폭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나란히 선 가판대를 구경했다. 들뜬 마음으로 모피 하나하나를 살피는 나와 달리 네자르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케이트, 이 정도는 나도 산처럼 쌓아 올려서 가져다줄 수 있어.”
아. 시큰둥한 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한 거구나. 난 한 번 더 폭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빠른 걸음으로 가판대를 지나쳤다.
직후 나는 지루해하는 네자르를 이끌고 빙어 낚시에 나섰다. 경험이 없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네자르는 빙어 낚시의 일인자였다. 마치 제야의 장인 낚시꾼처럼 여유롭게 빙어를 끌어 올리는 모습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왜 이렇게 잘해요?”
“난 원래 못하는 게 없어.”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딱히 요리해 먹을 생각도 없었기에 잡은 빙어는 전부 호수 아래로 놓아주었다. 열심히 돌아다닌 뒤에는 역시 꿀 같은 휴식이 필요하지.
나는 네자르를 이끌고 에자렛에게 추천받은 디저트 가게를 방문했다. 축제라 인파가 몰린 탓인지 대기 줄이 길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들은 터라 시간을 들여 기다리기로 했다.
그럼, 그럼. 이런 명소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당연히 기다려야 하지 않겠어? 생크림이 눈처럼 소복이 쌓인 생크림 케이크라니! 죽기 전에 먹어 줘야 한다구!
“저어… 안녕하세요.”
그때였다. 등 바로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게 말을 거는 건가 싶어 등을 돌렸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 설레는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네자르를.
“혹시 혼자 오신 건가요? 아까부터 관심 있게 봤는데 너무 잘생기셔서…….”
설마……? 표정 변화, 분위기 반전 하나 없는 낯으로 네자르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멍청하게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흠칫 정신을 차리고 네자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혼자 아닌데요.”
얼굴이 워낙 희어서 그런가, 뺨에 인 홍조가 눈에 띄게 붉다. 여자는 내가 반박한 후에야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 이쪽 동생분? 그럼 가족끼리 축제를 즐기러 나오셨나 봐요.”
“친남매 아니에요.”
“어머. 아니라구요? 으응, 이상하네. 누가 봐도 연인이 아닌 친남매인데…….”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애초에 그런 의도가 다분한 어투와 표정이었기에 속으로 삼켰다. 그래, 황후가 되어서 제국 신민의 호감쯤이야 우스개로 넘어가 줘야 하지 않겠어? 참자, 케이트. 상대는 너의 사랑스러운 신민이란다.
“친남매?”
좋게 말하고 끝내려는데, 머리 위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넨에는 설마 친남매가 서로 잠자리를 같이하는 획기적인 풍습이 존재하는 건가? 이해하기 힘들군. 그쪽은 피를 나눈 남매와 밤낮을 함께 생활하며 특히 불이 꺼진 한밤에 침실을 거친 숨소리로 물…….”
세상에나. 나는 기겁하며 네자르의 입을 막았다.
“하, 하여간 남매가 아니라 부부예요! 이쪽은 임자 있는 남자니까 다른 곳 알아보세요.”
그러나 여자의 얼굴은 이미 당황과 충격으로 얼룩진 후였다. 나는 황급히 멀어지는 등에 홱 몸을 돌려 네자르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물론 네자르는 꿈쩍도 않는 듯한 눈치였고.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없는 소릴 했어?”
진짜 뻔뻔한 놈들은 자기가 뻔뻔한 줄도 모른다더니!
“하아! 이래서 잘생긴 남자랑 다니면 힘들다니까.”
제아무리 평범한 복장으로 가려 놓은들, 황제 특유의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아우라는 가릴 수가 없나 보다.
저 얼굴에 몰려드는 남자 여자가 적어서… 아니, 많았더라도 네자르가 돌 대하듯 하여 천만다행이었다. 나야 미남을 쟁취하기 위해 싸울 각오가 다분하다지만, 그래도 늘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하는 것보다 편한 게 낫잖아?
남매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옆에 딱 붙어 팔짱을 꼈다. 내 머리를 쓰다듬은 네자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네. 이 몸은 지금 시시각각 넘보는 불청객들을 쫓아내기 위해 신경이 예민하신데.”
갑자기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느릿하게 고개를 저어 옆으로 차분히 흔들리는 흑발이 눈에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는 반쯤 해탈해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이 되어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네가 아무것도 몰라 하니 나름대로 노력한 보람은 있구나. 됐으니까 방금 들은 소리는 없던 것으로 하고 케이크나 고르고 있으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날 위해 부단히 신경 쓴단 소리렷다?
나는 네자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팔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그의 애정은 아무리 받아 내도 부족하지 않으므로.
줄은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었다. 장담컨대 내 생에 그렇게 많은 생크림 케이크는 처음 먹었을 것이다. 나는 빵빵하게 부른 배를 애써 숨기며 네자르와 손을 잡고 협곡을 따라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추웠지만, 네자르의 튼실한 몸 옆에 숨으니 그리 괴롭지만도 않았다.
“얼굴만 보면 여기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인데.”
그새 내 표정은 언제 확인했대?
“엄청 춥긴 해도 사람들은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아요. 북벌 전쟁이 끝난 지 겨우 반년인데 이 정도면, 다음에는 더 즐겁지 않을까요?”
“헤넨이 민가의 피해를 가장 덜 받기는 했지.”
“그리고 흰 털 동물들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어요. 카발과 다르게 침엽수림 투성이인 숲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흠. 그렇담 이 땅, 그냥 네게 줄까?”
그 말에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빼 버릴 뻔했다. 에이, 농담도 참! 이라고 절대 여길 수 없는 게 바로 네자르의 발언이다. 그는 실없는 소릴 할지언정 내게만큼은 침 바른 소릴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손가락 사이사이 마디에 닿아 오는 그의 단단한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고작 한마디에 그의 마음이 여전하다는 걸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이미 영주도 임명된 마당에 어떻게 내가 가져요?”
내려앉은 눈초리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왕녀를 생각하면 부인에게 또 부인이 생긴 격이니. 번복해서 미안하지만 방금 한 말은 취소야.”
“취소 이유가 참 타당하네요.”
“아주 타당하지.”
문득, 네자르의 애정은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에게 나란 존재는 얼마만큼 영향을 끼칠까? 어느 깊이까지 잠겨 있지? 내 마음이 호수라면 그의 심장은 마치 심해처럼 느껴진다. 너무 깊고 어두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심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남은 소원은 어쩔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소원이 남아 있었군.”
골똘히도 아니었다. 물론 잠시의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네자르는 예의상 턱만 한 번 문지르고 내게 말했다.
“두 개 다 네게 줄 테니 잘 고민해서 사용해 봐.”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도 삐쳐 있기에 선심 좀 썼더니만.”
조용히 부상하여 흩어지는 미소와 함께, 네자르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제국까지 바친 소인이 감히 폐하께 무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무엇이든 페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시지요.”
장담컨대 그는 날 평생 괴롭히는 대가로 자신의 제국을 내게 바치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쥐덫을 내가 밟을 것 같아? 절대 아니지!
난 콧방귀를 뀌며 대답 없이 까마득하게 깎인 협곡을 내려다봤다. 귓가로 유유히 흐르는 네자르의 언어와 음률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니, 어느새 산등성에는 노을이 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