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제도의 겨울 마침
외전2 릭의 하루
국무 회의가 있기 전 어느 날
눈을 뜨니 바깥은 이미 대낮처럼 환했다. 이제는 그리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릭이 황립 아카데미 교수직에 오른 지도 어언 1년. 이제는 집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것쯤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소파에 푹 박혀 있던 몸을 비척거리며 일으킨 릭이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달력을 손에 쥐었다. 오늘이 1월… 19일. 1월 19일, 1월 19일. 분명 눈과 입에 익은 날짜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더라?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을 확인한 릭이 머리를 부여잡고 앉았다. 중요한 미팅이나 실험이 예고된 날이라면 분명히 적어 뒀을 터였다. 그렇다면 1월 19일은 대체……. 벌컥.
“릭! 태어난 날 축하해!”
아, 그래. 생일이었지.
짙은 한숨을 뒤로하고 그의 고개가 활짝 열린 문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보이는 풍경에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어이, 릭. 너, 잠은 잤냐? 한 3일쯤 밤을 새운 얼굴인데?”
“릭, 이것 봐. 내가 뭘 가져왔는지. 이게 이번에 데보라에서 새로 나온 신상 만년필인데…….”
방문자는 다름 아닌 그의 친형제 카트리나와 록허드였던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어지럽다. 그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늑대 두 마리가 날아와 양옆으로 날아다녔다. 릭은 짜증으로 가빠지려는 호흡을 조절하며 티포트를 기울였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이게 세상에 딱 세 자루만 있다는 그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발 에디션이라는 거야! 내가 원래는 릴리에게 주려고 했는데, 릭 생일도 다가오고 해서 고심 끝에 가져왔어.”
“감사합니다. 기대되는군요.”
알란가 모르겠지만, 케이트는 자신의 감정 표현에 꽤 노골적인 편이다. 지금도 한정판 만년필 상자를 내밀며 칭찬해 달라는 의지가 강렬하게 담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잘했다는 말로도 부족해 보이는 것 같아 일단 머리도 한 번 쓰다듬어 줬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인 케이트가 자리에 일어나 집무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바뀐 것도 없는데 꼭 방문할 때마다 구경한다.
“크흠. 릭, 놀라지 마. 내 생일 선물은 무려…….”
“마구겠군요.”
“마구… 응?”
“필요 없습니다만, 일단 받아 두겠습니다. 필요 없지만요.”
이 형님은 필요 없다고 굳이 강조한 이유를 알긴 할까. 릭은 록허드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거대한 상자를 집무실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그리고 케이트의 선물은 포장해 둔 상태 그대로 서랍 안에 고이 모셔 두었다. 세상에 단 셋뿐인 물건이라는데, 아껴 써야지.
“에든 오라버니는 오늘 바빠. 귀가하면 함께 술이나 한잔 하자던데?”
“황후께서는 그런 소릴 또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록허드가 해 줬어.”
“형님은 기사단장인 주제에 뭘 그리 열심히 돌아다니십니까?”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케이트가 이 소릴 들으면 분명 기겁하겠지만, 릭이 느끼기에 저 둘은 성별과 덩치만 다를 뿐, 똑같은 종자였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록허드가 소유하지 못한 눈치와 센스를 케이트는 가지고 있다는 것. 이는 릭이 록허드의 부탁은 무시해도 케이트의 부탁은 절대 무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잘 들어 봐, 릭. 이곳으로 오면서 황후 폐하와 내가 내기를 하나 했어.”
“궁금하지 않은데요.”
“황제 폐하와 관련된 내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길 내기거든? 한데 황후께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밀어붙이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케이트가 크게 혀를 차며 록허드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록허드 경, 괜히 릭 교수 앞이라고 센 척하지 마세요.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아니까요.”
그에 록허드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릭은 쓸모없을 게 분명해 보이는 내기로 대체 왜 저리 난리법석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 폐하와 저는 무려 10년을 함께한 십년지기입니다만?”
“누구는 십년지기 아닌 줄 아나 보네. 그렇게 따지면 여기 옆에 있는 릭도 십년지기거든?”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다. 현명한 말대꾸에 록허드가 낭패인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 또한 릭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 아무튼 황제 폐하께선 황후 폐하를 찾아 여기까지 오지 않으실 겁니다. 자신의 감정보다 폐하의 말을 더 우선시 여기는 분이시니까요.”
“아니래도? 말은 항상 그럴싸하게 하지만 다 핑계야, 핑계. 두고 봐. 분명 내 말을 자기 좋을 대로 비비 꽈서 여기까지 올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참다못한 릭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내기이기에 그렇게 싸우는 겁니까?”
그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설렁설렁 테이블 위 신문을 넘기던 록허드가 대답했다.
“황후께서 황제 폐하와 다투셨거든. 홧김에 메모지 한 장만 달랑 두고 나오셨다는데……. 폐하께서 그 메모지의 내용을 잘 지키실까, 아니실까에 대한 거지.”
“이혼이라도 요구하셨습니까?”
“릭도 참. 그냥 가볍게 싸운 거야, 이혼을 입에 담을 정도는 아니라고.”
“그럼 외박이라도 선언하셨는지요.”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록허드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크, 역시 릭 에젤로트다워. 황후께서 무려 2박 3일의 무단 외박을 감행하시겠댄다.”
“무단 아니거든? 메모지에 적어 두고 왔다니까.”
투덜투덜 뒷말을 덧붙일 뿐, 케이트는 딱히 록허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외박이 에젤로트에서 지낼 외박이라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달래기 위해 에젤로트를 방문하느냐, 마느냐가 내기의 주제라는 거죠?”
록허드 건너편에 자리 잡은 케이트는 테이블 근처에 있는 무엇이라도 집으려는 듯 가볍게 손짓하다, 이윽고 텅 비었다는 걸 확인하고 어색하게 두 손을 그러쥐었다.
릭은 습관적으로 찻잔을 찾는 케이트를 위해 장식장을 뒤져 찻잎을 찾았다. 좀 오래된 잎이긴 해도 꽤 비싼 물건이라 먹을 만할 테다.
“비슷하긴 한데 조금 틀려. 에젤로트가 아니라 릭의 집무실에서 외박하기로 한 거라.”
누구 맘대로?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찻물을 우리려던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불길이 다 죽어 가는 벽난로 앞에 티포트를 올려놓고, 서너 개밖에 남지 않은 나무토막을 죄다 쑤셔 넣었다.
“내기는 간단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바람 한 가지를 들어주는 거지.”
“무슨 바람이요?”
팔짱을 낀 채 테이블 위로 발을 얹은 록허드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일주일 동안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지. 무려 황후 폐하께 빌 소원이니.”
“누가 들으면 이미 이기신 줄 알겠습니다, 형님.”
록허드의 행세를 본 케이트가 이죽거리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록허드, 네 처지는 내기하자고 겁 없이 덤빈 시점부터 이미 정해졌어. 내 소원은 록허드 에젤로트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거야.”
“허, 많고 많은 소원 중 왜 하필 그딴 걸 소원으로 하는 겁니까?”
“황성에서 그만 좀 보고 싶으니까! 퇴근할 시간에도 자꾸 성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꼴이 지겨워 죽겠어.”
똑똑. 그때, 닫혀 있던 집무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순간 자신에게로 몰린 시선에 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아마 릴리 학생일 겁니다. 요 며칠 논문 심사 건으로 바빠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집무실을…….”
벌컥. 하지만 집무실의 주인이 문을 열기도 전에 손잡이가 절로 당겨졌으니.
“오랜만이군, 릭 교수.”
“……폐하?”
심지어 망토를 펄럭이며 당당하게 들어선 인물은 바로 제국의 등불이자 지배자, 황제 아닌가?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퀭해진 느낌이야. 하긴, 이제 대륙 물리학회가 얼마 남지 않았지? 거장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써야 할 테니까.”
릭은 멍하니 서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여는 황제를 응시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폐하께서는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크시구나였으며,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케이트가 내기의 승자가 되었구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건강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나? 교수는 아직 미혼이라 챙겨 줄 부인도 없을 테고, 여러모로 불편하겠군.”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짐이 이틀 안으로 아카데미에 황성 명예 주방장 셋을 보내도록 하지. 일주일 동안 빌려줄 테니 건강식이란 건강식은 모두 얻어 드시게.”
“가,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하다 여겼으나 그조차도 황제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자신을 찾으러 온 황제에 신이 나 만세를 하려던 케이트가 아차, 하는 얼굴로 몸을 굳혔다.
“케이트.”
힐끔 살펴본 황제의 낯은 화나 짜증이 아닌 우려가 담겨 있었다.
“하아. 남겨진 쪽지를 확인하자마자 달려왔다. 너는…….”
“잠깐만요! 저는 아무 말도 듣지 않을 거예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려고 온 게 아니라면 그냥 황성으로 돌아가세요.”
“케이트, 네가 자꾸 이렇게 나오면 짐도 서운할 수밖에 없어. 신혼이면 신혼답게 지내야지.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익숙해질 테니 조금만 참아 보는 게 어때?”
신혼이면 신혼답게 지낸다? 어쩐지 불청객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버거운 문장이다. 그러나 황제의 한마디에 케이트의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봐선 그리 큰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이, 이 뻔뻔한……!”
감정에 북받쳐 한 소리 내지르려던 건지 몰라도, 입을 커다랗게 연 케이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입술을 오므렸다. 눈치를 보는군. 그런데 황제가 아닌 릭의 눈치를 본다는 점이 이상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케이트는 눈을 꽉 감아 버린 채 소리쳤다.
“폐, 폐하가 자꾸 내가 잠도 못 자게 괴롭히니까 그렇지!”
아. 설마 이게 그 사랑싸움이라는 건가?
“폐하 때문에 내가 요즘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자요.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또야. 그다음 날 또고, 그다음의 다음 날 또 괴롭혀. 이러니 내가 네자르랑 한 침대를 쓰고 싶겠어요?”
“정말……. 지켜보고 싶지 않은 싸움이군.”
홀로 중얼거린 록허드가 황제를 지나쳐 집무실을 벗어났다. 순간 릭 역시 자리를 비켜 줘야 하나 혼란이 일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기에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근래에 전신이 쑤시고 기운이 없어요. 네자르는 늘 상쾌한 기분으로 자고 일어나니 모르겠죠.”
“더 잘 먹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그게 이해 못 한다는 거예요!”
“흠. 짐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데? 처음부터 왜 안 건드냐며 대차게 삐친 게 누구…….”
“시끄럽대두요!”
부글부글. 살짝 열어 두었던 티포트의 뚜껑 옆으로 하얀 김이 흘러나온다. 릭은 티포트를 테이블 위로 옮기고 찻잎을 준비했다.
흠. 케이트가 보란 듯이 내기를 이겼으니, 곧 록허드의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렇게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상상에 빠지려던 때, 복도 쪽에서 다급한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릭 교수님? 지금 자리에 계세요? 저 스물여덟 번째 수정본 완성해서 드리려는데…….”
릴리 아마스라. 릭의 첫 번째 제자이자 말 많고 탈 많은 만큼 장래성과 실력, 노력, 이 셋은 알아주는 학생이 자신을 방문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최악의 시점에.
집무실 내 환경을 눈에 담은 릴리가 혼돈에 발을 담근 얼굴로 입술을 덜덜 떨었다.
“어, 그러니까……. 케이트 폐하?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하지만 역시 아카데미 최고의 강심장답게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적응한다. 역시 내 제자답군. 릭이 이상한 부분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때, 그의 제자는 황제와 황후 사이에 낀 새우가 되어야 했다.
“릴리 방에서 잘 거예요. 2박 3일 동안.”
“안 돼.”
“돼요.”
“안 된대도? 원한다면 오늘 하룻밤만 조용히 보내…….”
“필요 없으니까 적어 뒀던 대로 2박 3일간은 절대 찾아오지도, 건들지도 마요. 어기면 각방이야!”
황제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충격과 공포가 감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을 숨기지 못하고 축 처진 어깨가 그의 집무실을 인기척 없이 빠져나갔다.
황제 폐하께서 원래 저런 분이셨나?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분이 된 채로, 릭은 출가한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폐하의 감수성이 저리 예민해지신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인류의 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