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여기까지 정말 화풀이를 하러 온 거였어? 나는 어이가 없어 멍청하게 웃다가 데이지를 방으로 돌려보내고 응접실 안으로 돌아왔다. 잠시간 오고 갔던 고성에 놀랐는지, 쭈뼛쭈뼛 들어온 시녀가 내 뺨에 연고를 발라 주고 사라졌다. 다행히 황태후의 근력 자체가 약해서 이틀이면 금방 가라앉을 것 같았다.
“툴드 경, 언제부터 내 성에 있었던 거예요?”
날 따라오자마자 식은 크루아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툴드가 곧장 대답했다.
“방금 왔습니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 갑자기 제 소속을 영애의 성으로 바꾸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마땅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이유요?”
크루아상을 건네자 좋다고 받아 든다. 여름 축제에서 닭꼬치를 좋아했던 것도 그렇고, 든든한 덩치답게 식욕도 왕성했다.
“황태후 성에서 근 몇 년간 폭행 사건이 잦았습니다. 해마다 못 버티고 황성을 나가는 하녀와 시종 들이 늘고 있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영애께 이런 실수를 할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요.”
몰랐어도 나만큼이나 몰랐겠어. 나는 여태 따뜻한 티포트를 들어 찻잔에 부었다.
“뭐, 그런 이야기는 둘째 치고… 그 말은 즉 오늘부로 내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소리예요?”
“어디까지나 임시입니다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벌써 잊으신 걸까요? 제 호위 기사는 무려 열 명이나 된다구요. 경까지 합세하면 이제 도합 열한 명이 되겠네요.”
물론 황태후에게 대들 수 없는 호위 기사와 대들 수 있는 호위 기사는 엄연히 가치가 다르다. 켈 로망드 사건 때문일까. 그 일을 기점으로 네자르의 우려와 걱정이 갈수록 심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백 명이었어도 절 보내셨을 겁니다. 제 1년 치 급여를 걸고 장담하지요.”
“걸려면 10년을 걸어야지, 1년은 또 뭐예요?”
손님이 없는 이른 오전의 응접실 내부. 덩치와 달리 소심한 툴드의 작태에 코웃음을 치며 진하게 우린 홍차를 들이켰다.
아, 갑자기 힘이 쭉 빠지네.
네자르를 절벽까지 내몰았던 여자가 고작 저런 꼴이 되어 있다니. 폐하라는 호칭을 들은 즉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던 황태후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황성에서의 실권을 잃으며 자연스레 자멸한 걸까? 아니면 독기를 품은 네자르가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힌 탓일까.
그날의 늦은 저녁. 툴드가 내 침실을 지키고, 내심 안도를 느낀 내가 등불에 의지하며 연회 케이크 레시피 서적을 훑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어와.”
이윽고 아주 조심스레 침실의 문이 열린다. 아닌 밤중에 방문한 손님은 네자르도, 데이지도, 하다못해 툴드도 아닌 성의 하녀였다.
“드, 드, 드릴 말씀이 이, 있어서 늦은 밤 무례를 무릅쓰고 차,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큰 각오를 했기에 에자렛 황녀가 된 양 말을 더듬으며 들어오는 건지. 레시피가 적힌 서적에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말해.”
쿵. 그러다 둔탁한 소음에 고개를 들자 무릎 꿇은 하녀가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
관심이 절로 가는 방문 사항이었기에, 서적을 덮고 하녀의 까만 정수리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 순간, 오늘 내내 까맣게 잊고 있던 개밥의 미끼가 떠올랐다. 드디어 걸린 건가?
“화, 황태후께서 제게 영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 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대고 맹세코 저는 영애를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믿어 주십시오!”
그냥 걸린 것도 아니라 월척이구나!
움찔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빡 준 탓에 괴상한 표정이 된 채 되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니?”
“즈,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 대신 영애께서 명하신다면 그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사냥개만큼은…….”
“일어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게 버텼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내 성에 남은 고용인은 데이지를 제외하고 여섯 명이 전부였으니까. 땅에 고개를 박은 채 덜덜 떠는 하녀에게 되물었다.
“그동안 황태후에게 무엇을 보고했지?”
“벼, 별거 없었습니다. 정말이에요! 영애께서 성에 오신 이튿날까지는 대체로 일과를 정리해 보냈습니다. 하지만 식사에서 유리 조각이 발견된 이후로는… 단 하루도 성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자백하게 된 이유는?”
“제 잘못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믿음직스러운 대답이라 감탄은커녕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나 최근 고작 며칠간 황성 생활을 하며 절실히 깨달은 바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권력을 이용한 협박이 최고라는 점이었다.
“그래?”
때로는 입을 닫고 있는 게 상대방을 뒤흔드는 데 더 효율적일 때가 있다. 네자르가 종종 사용했던 방식이지. 같은 잘못을 세 번 반복했을 때 묻는 말에만 단답하면서 내 눈을 올곧이 쳐다보는데, 그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백을 하러 올 정도면 이미 겁을 먹을 대로 먹지 않았을까? 예상대로 하녀는 거친 숨을 내쉬다가 뒤늦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전에 제가 황태후 성의 시녀와 만났었다는 걸 아는 하녀가 한 명 있습니다. 그, 그 아이가 영애께 사실을 고하기 전에 먼저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너 말고 또 누가 있지?”
“없습니다! 맹세코 저밖에 없습니다. 애, 애초에 황성에는 황태후를 꺼려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그럼 너는?”
남들 다 기피하는 일에, 홀로 의연히 나서서 내 성에 침입하다니. 내 물음에 하녀가 침실로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네가 꺼려 하지 않은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야?”
머뭇머뭇 열리던 입술이 힘들게 움직인다.
“저희 집은 대대로 카플레카의 소작농인데… 아버지가 노름빚을 갚지 못해 행방불명되신 후 집안이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네 명의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거금이 필요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생각이 많아지기는 많아졌나 보다. 닭똥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봐도 가증스러운 연기인가 아닌가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황태후가 네게 얼마를 주었지?”
“저, 정확히 40금입니다.”
“내일 네게 80금을 줄 거야.”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하녀가 코를 먹다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80금이면 네자르에게 받은 목걸이 중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 하나만 팔아도 쉬이 얻을 수 있는 금액이다. 적어도 지금 내 상황에서는.
“대신 앞으로 황태후에게 전할 말은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할 거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 아, 이름이 뭐니?”
“미, 미르티 오르젠입니다.”
미르티는 하룻밤 사이에 내 충신이라도 된 것처럼 허리를 깊게 숙이고 얌전히 대답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구나. 네자르의 선물이 없었다면 가지고 있는 귀중품을 처분해야 할 뻔했다.
“그래, 이만 돌아가도 좋아. 좋은 꿈 꾸길, 미르티.”
“예,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영애.”
***
얼마 후 황태후 성 고용인들의 파직 소식이 들려왔다. 황태후가 직접 황제 앞에 나서서 감정으로 호소하였으나, 황제는 함부로 혀를 놀리고 다니는 불경한 것들 때문에 어머니께서 간청하실 필요 없다며 거액의 위로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폐하께서 황태후의 약점을 아주 제대로 파악하신 거죠. 황태후는 폐하의 제안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고, 이제 풍족한 재정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영애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할 겁니다.”
“돈 때문에 자존심을 굽힌다고? 황태후씩이나 되는 사람이?”
초콜릿을 우물거리던 툴드가 하하 웃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게 뭡니까? 황위를 위협하는 자랑스러운 아들? 제도와 귀족을 쥐고 흔들 실권? 아, 한 떨기 꽃처럼 가련한 황녀 한 분은 남아 계시는군요. 받아 줄 가문이 있을지 의문이기는 합니다만.”
그런 취급을 참지 못한 에자렛이 날 찾아온 거니까.
창가에서 몸을 뗀 툴드가 이어서 말했다.
“방금 데보라 가문의 마차가 성 앞으로 도착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세피아 부인이 헐레벌떡 응접실로 찾아왔다. 마침 혼자서 차를 마시기 심심한 참이었기에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며 옆자리에 앉혔다.
“케이트 영애,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건가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부인이 내 양손을 이끌어 잡으며 물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기에 황태후 성의 시녀, 시종, 하녀, 정원사, 마부 할 것 없이 전부 쫓겨난 겁니까?”
황태후의 바닥을 알게 된 후 그간 별생각이 없었는데, 잘 생각해 보면 대단한 사건이기는 했다.
이, 이거, 잘못 말했다가는 잔소리 폭탄을 맞을 수도 있겠는걸. 나는 그녀의 찻잔에 커피를 따라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에 들어갔다.
“황태후가 제 뺨을 쳤어요.”
“……예?”
“보통 그 정도 세기로 치면 치는 사람의 손도 아파야 합니다만, 눈 깜짝하지 않으신 걸 봐선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신 것 같았어요. 힘이 좋은 여자였다면 아직도 제 볼이 퉁퉁 부어 있었겠죠.”
툴드가 옆에서 지나가듯 말했다.
“오드리네는 대대로 뼈가 얇고 몸이 작습니다. 후작님만 생각해도 대강 견적이 나오지 않습니까?”
“지금 황제 폐하의 육체가 허약하다고 비웃는 거예요?”
뾰족한 어투로 대답하자 당황한 툴드의 고개가 급히 양옆으로 흔들리며 부정을 나타냈다.
“황가 핏줄은 전부 예외입니다. 워낙 강골에 힘이 좋아서요.”
하긴, 앤드류와 네자르의 몸이 단단한 것에 비해 필프론츠 후작은 다소 왜소한 면이 있지. 그건 그것대로의 이야기고, 일단 세피아 부인에게 전달하려던 경위를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황태후 성 후원에서 황태후 시녀의 뺨을 쳤던 적이 있어요. 네 번 정도? 아니, 다섯 번?”
“예?”
“음음. 역시! 연속으로 네다섯 번이나 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대단하십니다.”
비꼬는 건가? 툴드의 추임새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발단은 내가 우리 성 고용인들을 개밥으로 던져 주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맞아, 바로 그게 시발점이었어요.”
“예?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개밥이라고요?”
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같은 반문만 반복하기에, 그간 있었던 일을 간추려서 세피아 부인에게 세세히 설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피아 부인의 턱이 점점 내려가다가, 마지막 ‘그리고 지금 마시는 커피의 콩은 에든 오라버니께서 선물해 주신 콩이에요. 이번에 남부 아틀란스 왕국과 무역을 시작하면서…’ 부분에서 처음으로 닫혔다.
“케이트 영애.”
“네.”
“입성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고작 일주일 동안 그 일들이 다 일어났다는 겁니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않아요? 예로부터 정치 싸움 중 황성의 정치 싸움이 가장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다고 들었어요. 이 정도면 평범하죠.”
“아무리 그래도 보름 동안 황태후 성의 고용인들을 전부 갈아엎을 순 없어요.”
저렇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 나도 할 말이 없어진다. 깊게 한숨을 내쉰 세피아 부인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이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잘하셨다고 칭찬을 드려야 할지, 아니면 겁 없이 행동 말고 자중하라 충고를 드려야 할지.”
“그래도 충고를 드려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옳기는 무슨, 저게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툴드 경의 팔을 툭, 툭 치며 역정을 냈다.
“왜 자꾸 끼어드는 거야, 툴드 경? 낄 데 안 낄 데도 구분 못 해?”
내 불같은 화에 할머니의 재미난 우화를 듣다가 침대로 쫓겨난 아이처럼 툴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크흠. 죄송합니다. 폐하의 곁에서 지내던 게 습관이 되어서…….”
그 말은 즉 네자르 앞에서도 저렇게 까불댄다는 소리렷다? 눈에 힘을 줘 노려보자 툴드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나가 있을까요?”
“당장 나가.”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최소한 손님이 있는 테이블에서 간식을 집어 가지는 않았다. 나는 세피아 부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정해요. 내가 조금… 거칠게 행동하기는 했죠. 여기는 에젤로트도 아닌데 말이에요. 늘 자중하려 하는데 불쑥불쑥 본성이 튀어나와요. 그래도 점차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예요.”
아마도.
“뉘우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성공은 성공이니, 우리 입장에선 호재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물론 운도 좋았고요.”
전부 캐롤라인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세피아 부인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함께 뒤늦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인맥이 중요한 겁니다. 엔테라 영애, 아마스라 영애와 친분이 깊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토르 백작과도 인연이 있으실 줄이야. 그간 에젤로트에서만 지내시는 것으로 알아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놨습니다.”
“맞아요. 실제로 내가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백작과 폐하의 덕을 본 게 크죠.”
“그런데 굳이 시녀를 찾아가 벌을 내리신 데는 따로 이유가 있나요?”
“네. 건방져서 혼쭐을 내고 싶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부인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크흠. 이러면 안 돼. 이러다간 세피아 부인에게서도 신뢰를 잃고 말 거야!
“설마 의심 한번 없이 납득하실 줄이야……. 노, 농담이었어요. 실제로 화가 난 것은 아니고, 마침 악토르 백작이 옆에 있었기에 이용…이 아니라 도움을 좀 받으려 했던 거죠. 일이 잘 풀려서 참 다행이에요.”
열심히 입을 놀렸으나 어쩐지 부인은 내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찌 되었든, 황태후의 성이 텅 빈 덕분에 제가 구해 놓은 사람들로 채울 수 있게 됐군요. 조금 모자라기는 해도 열 명 중 일곱이 우리 사람이면 충분할 겁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이 걱정이에요. 어떤 방법으로 채워 넣어야 할지…….”
“걱정하지 마세요. 인사권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영애께서는 이후로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여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소리인지! 곧바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예의상 괜찮겠냐고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부인 혼자서 가능할까요?”
의문 섞인 물음에 세피아 부인이 살짝 미간을 구기며 답했다.
“혼자서…는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느 정도도 아니고 충분히 가능하다는데 더 물을 이유가 없지. 나는 커피 향이 알싸하게 퍼지는 입 안으로 초콜릿을 밀어 넣으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
“허억, 허억.”
숨을 내쉴 때마다 내리쬐는 뙤약볕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기어 나온다. 눈꺼풀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려 했지만 이미 손등 전체가 땀범벅이라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젠장.
“예, 예절 수업도 안 듣는데 검술 수업은 들어야 하다니!”
황성으로 거처가 바뀌면 더는 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전적으로 나의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투정 부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시죠.”
나이는 중년을 훌쩍 넘어가고 있는 주제에 귀는 또 얼마나 밝은지. 옷에 손바닥을 닦아 내고 자꾸 미끄러지려는 목검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 그때 연무장 한 번 돈 게 전부인데 벌써 목검을 휘둘러도 되는 거예요?”
“제가 첫 수업 때 분명히 하루도 잊지 말고 꼬박꼬박 체력을 기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기억 안 나요!”
“아무렴 그러시겠지요.”
하하. 멀끔한 얼굴로 얼마나 얄밉게 웃던지, 하마터면 검을 브레이트 경 얼굴에 내던질 뻔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몸이 약한 귀족 영애라고 그늘에서의 훈련을 허용해 줬다는 점이다.
나는 훅훅 숨을 가다듬으며 아려 오는 팔을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몸을 쉼 없이 움직이니 복잡했던 머릿속도 비워지고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 저 둘만 있지 않았더라면 더없이 완벽했을 텐데.
“이건 어때, 폐하? 이왕 하는 국혼, 무서울 정도로 화려하게 하는 거야. 반지에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버리는 거지. 보기만 해도 눈이 번쩍 뜨이게!”
“듣기만 해도 최악이니까 거기까지만 말해라.”
록허드가 들이민 카탈로그를 확인했는지, 대번 얼굴을 구긴 네자르가 카탈로그를 저만치 밀어냈다.
“최악? 대체 어디가?”
“굳이 사족까지 붙여 줘야 알아? 네놈 안목이지 뭐겠어?”
네자르가 나보고 정하라 맡긴 결혼반지를 왜 지가 정하려고 난리야? 록허드는 기사단장이라면서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나. 하여간 에젤로트에서도 황성에서도 꾸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팔 각도가 자꾸 내려가는군요. 다시 위로 올리십시오, 영애.”
“네.”
내가 열심히 훈련하는 와중에도 록허드의 참견은 멈추지 않았다.
“흠. 그럼 이건? 남부 사막 지하 유물에서 발견되었다는 루비, 카푸스의 눈물. 주먹만큼은 아니더라도 눈알만큼은 되는 크기네.”
“방금의 그 흉측한 반지와 어느 부분이 다른 건데? 색깔?”
뭐어? 지금 눈알만 한 크기의 보석을 내 손에 끼우라고? 손가락뼈 굽어질 일 있나!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습니다.”
브레이트 경은 계속해서 네자르와 록허드가 앉은 정원 테이블로 돌아가는 내 고개를 잡아 돌렸다. 고개를 돌려 봤자 귀가 열려 있으니 관심을 돌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까다롭기는. 그럼 간단하게 가장 값비싼 반지로 결정해!”
“아까부터 우리 반지를 두고 왜 네가 멋대로 이러쿵저러쿵하냐? 심지어 추천하는 물건들도 하나같이 최악이라니……. 이러니 네가 여태 여자가 없지.”
“허리 펴십시오. 새우입니까?”
콧김을 뿜으며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천천히 브레이트 경의 조언을 되새겼다.
허리 펴기, 허리 펴기…….
“폐하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제발 저 둘 좀 제 눈앞에서 치워 주세요!”
속절없이 터져 버린 인내심과 함께 목검을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안 그러면 훈련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도망갈 거예요.”
브레이트 경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원 테이블로 달려가 록허드에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반지를 어떻게 할지는 이미 다 정해 놨거든? 옆에서 듣자 듣자 하니까 남의 결혼식 망칠 일 있나.”
“자꾸 열 내지 마라, 케이트. 너야말로 땡볕 아래에서 화내면 안 피곤하냐?”
팔을 뻗은 그가 내 이마를 뒤로 쭈욱 밀어내곤 성안으로 사라졌다. 기다란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어 편한 자세로 관망하던 네자르가 내 손을 잡아 제 앞으로 당겼다. 덥고 힘들고 짜증스러운 것도 모자라 화딱지가 날 것 같은 기분이 그의 미소를 보자 눈 녹듯 사라진다.
“케이트, 모레 양측 가문의 일원이 모두 모여 저녁 식사 자리를 갖게 될 거야. 네가 서신을 보낼래?”
아, 서신.
황후 측 가문과 황가의 모든 구성원이 공식적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저녁 만찬은 국혼이 치러지기 정확히 사흘 전에 이뤄진다. 그와 나의 결혼 일자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번거롭다면 내가 보내도록 하지.”
땀과 먼지로 엉망진창이 된 머리칼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네자르는 내 금발을 쉴 틈 없이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나는 오묘해진 기분으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초대장 정도는 내가 보낼 수 있어요. 어차피 에든 오라버니께 부탁해야 할 일도 있고요.”
더는 내 성의 고용인들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고, 결혼식 후 본성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에젤로트로 보낸 고용인들을 데려와야 했다.
“그러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나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의 부탁과 제의에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그렇다면……?
“나, 검술 수업 그만하면 안 돼요?”
“그 부분은 록허드와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인간적으로 황후가 검술 수업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에요? 응?”
“전혀. 나는 네가 땀 흘리는 모습도 홀릴 정도로 예뻐서.”
윽! 하마터면 손이 더러운 것도 잊고 부끄러움에 뺨을 가릴 뻔했다. 이런 건 건강에 좋지 않아.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도 가빠지고, 얼굴에 열이 뭉치고, 하여간 이런 식으로 자꾸 날 괴롭히는 건 좋지 않다고!
성격 나쁜 네자르는 꼭 이런 말을 하고서 내 반응을 살피곤 한다. 저것 봐, 지금도 술에 취한 것처럼 실실 웃으면서 음흉한 눈길로 날 보고 있잖아?
“그리고… 관례상 국혼 직전의 식사는 선황제 성에서 하게 돼. 이번 경우는 선황제께서 돌아가셨으니 황태후 성에서 하게 되겠지. 그러나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좋아요.”
이건 운동 때문에 오르는 열이야, 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유리 온실에 정말 가 보고 싶었거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도 많이 궁금해하실 거예요. 원체 유명하니까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대신 초대장에 이상한 소리는 적지 말아라. 아니, 보내기 전에 내가 한번 확인해야겠군.”
“서신 정도는 나도 잘 보낼 수 있거든요? 그나저나 이제 가 봐야 할 시간 아니에요? 회의가 있다면서요.”
“안 그래도 슬슬 일어나려고 했어.”
느릿하게 일어선 그가 화장과 땀으로 범벅인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정원 너머로 사라졌다.
만찬 초대장이라. 황태후와 에자렛 황녀에게도 보내야 할 텐데, 어쩐담. 시종을 보낼까? 아니면…….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휴.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렸다.
“드디어 방해꾼이 모두 사라졌군요. 그럼 우리도 마지막을 불태워 봅시다.”
그곳에 자리한 브레이트 경의 미소가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
카발 황제의 호위 기사인 키올은 근래 근심 없이 편안한 삶이란 것을 제대로 누리는 중이다. 무엇 덕택에 근심이 사그라졌냐고 묻는다면, 잠깐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키올은 언제든 거리낌 없이 ‘툴드가 없기 때문에.’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발의 황제, 네자르는 총 세 명의 호위 기사를 두고 있다. 키올 자신과 툴드, 인피르노가 그 셋이었는데 이들 중 인피르노는 말만 호위 기사이지 대개 황제의 비밀스러운 어명을 수행하느라 바빴으므로 두 명이라 말하는 게 더 옳기는 했다.
‘그래, 폐하의 진정한 호위 기사는 셋이 아니라 둘이지.’
절대로 폐하와 은밀한 시간을 나누는 인피르노가 부러워서 제외한 것은 아니다. 황제의 ‘진정한’ 호위 기사 중 키올의 경우는 황제의 후방에서 그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툴드는 근방에서 호위 겸 보좌를 맡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로 키올이 툴드에 비해 황제의 바로 옆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현저히 적었다. 물론 키올은 멀리서 건장한 풍채와 독보적인 미모를 지닌 황제를 지키는 것도 더없이 행복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라 여겨 왔다. 그럼에도 툴드를 시기해 왔던 점 역시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뿌득. 심지어 내가 반년 더 일찍 들어왔는데!’
인정한다. 툴드의 실력은 그들 중 단연코 최고라 할 만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최고라 하여도 부러운 일은 부러운 일이다. 키올은 지난 몇 년간 툴드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보름달이 뜬 새벽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두 손 모아 기도해 왔다.
제발 툴드가 페하의 미움을 사 쫓겨나게 해 주세요!
한데 하늘이 돕기라도 했는지, 이틀 전 툴드의 소속이 본성에서 에젤로트 영애의 성으로 변경된 것 아닌가?
“후후후…….”
아무리 임시라지만 너의 시대는 이걸로 끝이다, 툴드!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겠어! 이제부터는 나의 시대인 거야!
“자네, 뜬금없이 왜 그리도 음흉하게 웃는 건가?”
퍼뜩 정신을 차린 키올이 행복과 희망이 가득한 자의식 속에서 깨어났다. 눈앞에는 이제 막 회의의 끝물인지, 다소 어수선한 모습의 탁자가 보였다.
카발 제국 황성근위대 총사령관 브레이트 탈리야, 황성근위대 1기사단 단장 쿼트로그 반 공작, 2기사단 단장 록허드 에젤로트 남작, 3기사단 단장 밀 베로파 백작까지. 키올은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쟁쟁한 인사들이 탁자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어허. 폐하의 호위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되나? 그런데 툴드 경은 어디 가고 자네가 이곳에 있는 건가? 내 기억에 의하면 항상 문밖에 있었던 것 같은데.”
1기사단 단장, 쿼트로그 경이 미심쩍은 얼굴로 키올의 위아래를 훑었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에 벌써 상의가 축축해지는 기분이다. 툴드야 워낙 넉살 좋고 말 많은 놈이라 상대가 누구든 쉬이 맞장구를 친다지만, 키올은 아니었다. 마침 구원자처럼 나타난 록허드 경이 키올의 어깨를 두들기며 대신 답했다.
“툴드 경은 제 여동생의 성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허어. 이렇게 급작스레 소속이 바뀌었다고? 폐하께 밉보일 짓이라도 한 거요?”
작게 어깨를 으쓱인 록허드 경이 키올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밉보일 짓이라면 매일같이 하니 그 탓이라 할 수는 없죠. 폐하께서 케이트의 안위가 퍽 신경 쓰이는 모양이십니다.”
록허드의 친절한 설명에 수염을 매만지던 쿼트로그 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흠! 얼마나 걱정되시면 호위 중 제일인 툴드 경을 보내시는 건지… 에젤로트 영애에게도 따로 호위가 있지 않소?”
호위 중 제일이라니!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으나, 표출할 수 없어 곤혹이었다.
“열 명이나 있었지요. 이제는 열한 명이 되었지만.”
그 말에 남자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보호로군.”
압박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키올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동시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에젤로트 영애의 거처를 열 명의 기사가 지키든, 백 명의 기사가 지키든 반드시 그들 중 한 명이 근접 호위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란 사실을. 그만큼이나 황제는 에젤로트 영애를 귀하게 여겼고 또 그만큼이나 그들을 굳건히 신뢰했다.
“음? 지금 보니 평소와 다르게 툴드 경이 아닌 키올 경이 와 있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회의 내내 황제 몰래 꾸벅꾸벅 졸던 브레이트 총사령관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드러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께 고자질하고 싶어서 얼마나 몸이 근질거렸는지.’
물론 브레이트 경의 보복이 무서워 고자질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보복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록허드 경이 그의 어깨에서 팔을 내리고 후두둑 말을 쏘았다.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툴드 경은 케이트의 호위로 가 있지 않습니까. 어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셨으면… 켁!”
정확히 목젖을 강타한 손짓에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브레이트 경의 폭력에 록허드 경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건 회의가 있는 날마다 꼭 한 번씩 있는 관례였다.
“이 싸가지가 말하는 본새하고는. 네놈이 내 나이 되어 봐라! 깜빡깜빡 잊는 게 일상이지.”
비슷한 나이대의 쿼트로그 경이 의자에 앉아 껄껄 웃으며 브레이트 경의 말을 거들었다.
“타당한 말씀입니다. 저도 요즘 우리 손녀가 아카데미 몇 학년인지 자꾸 깜빡하더이다. 하하! 다시 물을 때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브레이트 경이 이내 고개를 홱 돌려 키올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런데 키올 경, 자네…….”
‘뭐, 뭐지?’
꿀꺽. 긴장으로 침 삼키는 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다.
“그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어 몰랐는데, 꽤 몸이 좋군?”
눈을 얇게 뜬 브레이트 경이 그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허헉. 키올이 딱딱하게 굳은 몸을 가누지 못할 때쯤, 록허드 경이 그의 반대쪽 팔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쓸 만하군요.”
으악! 키올은 공포에 찬 비명을 삼키기 위해 입을 꽉 다물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의 안전에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이 둘은… 비범한 능력과 지위, 재력,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아직 혼인 전적이 없는 남성이다. 그리고 세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가 아닌 남자에 취미가 있다고!
“이 사람들아, 그럼 황제 폐하의 호위인데 어디서 호리호리한 서생을 데려와 검 자루를 줬겠어? 뜬금없는 소리 하기는.”
쿼트로그 경의 타박에도 그들은 한참을 더 팔뚝을 주물럭거리다가 떨어졌다.
‘후우. 하마터면… 장가를 가지 못할 뻔했군!’
키올이 숨을 고를 동안 회의실 문이 열리고 론이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 내부를 단 한 번도 둘러보지 않고 곧장 밀 경과 담소 중인 황제에게로 걸어갔다. 무언가를 전해 들은 황제는 이윽고 탁자를 크게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회의는 이만 여기서 파하지. 모두 수고하셨소. 제발 늦장 부리지 말고 재깍재깍 나가 주시오.”
황제의 요구에 말 잘 듣는 아이가 된 기사단장들이 우르르 앞다퉈 회의실을 나갔다. 그렇게 텅 빈 회의실을 채운 인물은 다름 아닌 데보라 부인이었다. 그녀가 황제 맞은편 의자에 착좌하는 모습을 확인한 론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알현을 요청한 시기가 영 안 좋았나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앉지.”
세피아 데보라는 황제의 오랜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이제껏 키올이 봐 온 귀부인 중 가장 똑똑하고 행동력 높은 인물이었다.
아마 에젤로트 영애가 없었다면 캐롤라인 악토르와 세피아 데보라 둘 중 한 명이 황후가 되었을 것이다. 데보라 부인은 그 정도로 현명한 여자였다.
‘나이가 조금 걸리기는 해도, 사랑 없는 혼인이라는 가정하에 폐하께선 상대방의 능력과 배경을 더 중요시하셨을 테니까.’
상상과 별개로 그다지 좋은 그림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황제의 성정이 유들유들해진 것은 전적으로 에젤로트 남매 덕분이라, 둘 중 한 명이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황궁의 공기는 살이 에일 만큼 차가웠을 수도 있었다.
“황태후 성이 비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성의 인사권을 빌려도 될까요?”
“좋아.”
“감사합니다.”
데보라 부인과 황제의 대화는 늘 그렇듯 속전속결이다.
‘툴드가 이런 기분이었군.’
무언가 대단한 것이 오고 가는 느낌인데, 그 대단한 것이 이상하리만치 쉬이 오고 간다. 카발 황성의 인사권이라는 게 저리도 쉬이 옮겨지는 것이었나?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을 터이니, 키올은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숫자가 부족하지는 않나? 저번에 듣기로는 다섯 명까지 구했다고 했었는데.”
“일곱 명까지 구했습니다. 나머지 셋은 폐하의 허락을 받는 즉시 구인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낮게 한숨을 쉰 황제가 마른세수를 했다.
“케이트가 생각지도 못한 짓을 한 탓에 예상보다 일이 빨리 치러지게 됐어. 썩 괜찮은 결과야. 그간 알게 모르게 그 성의 시녀들이 눈에 밟혔는데 말이지. 황족 기만죄라면 꽤 그럴싸한 명분이기도 했고.”
“폐하라면 명분 없이도 가능한 일 아닙니까.”
피식 웃음을 뱉은 황제가 탁자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
“짐이 신은 아니야. 건국 황제가 된 양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자력으로 황위에 오른 건 아니지 않나?”
“적어도 제국 내에선 폐하가 신입니다.”
“아첨인가? 듣기에 나쁘지는 않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시녀가 황제와 데보라 부인 앞으로 차를 준비했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 창가에 서 있던 키올은 자신이 선 방향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찻잔을 묵묵히 쳐다봤다.
“새로운 인사를 정하는 일 말입니다. 케이트 영애에게 제의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황제는 향이 강한 차를 즐기지 않는다. 그를 방증하듯, 탁자에 오른 티포트는 맹물이 든 것과 차를 우려낼 것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대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군.”
황제는 그중 맹물이 든 티포트를 찻잔에 기울였다.
“짐이 케이트를 계속해서 주시하는 이유는… 짐이 바라는 방향으로 그녀의 행동이나 사상을 유도하거나, 통제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대로 쭈욱 한 잔을 비워 낸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고난 없이 얻길 바라고, 또한 그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길 바라나… 케이트의 성격상 그러기 힘들지. 짐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할 테니까.”
“귀여운 아가씨네요.”
가벼운 첨언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 케이트가 너만은 나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고 인지할 수 있는 선이면 족해. 사실 짐을 이용하라는 말도 오래전부터 해 왔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더군.”
“그러니 스물이 되기까지 큰 사건 사고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었던 것일 테죠. 저만 해도 황태자비에 대해서 아는 건 고작 이름과 나이, 그리고 미색이 뛰어나다는 것과 괴팍하다는 소문이 전부였는걸요. 아, 물론 폐하께 전해 들었던 부분은 제외하고요.”
찻잔을 들어 그윽한 향을 느끼던 데보라 부인이 가볍게 목을 축였다.
“케이트 영애는 전반적으로 과하고 필요 이상으로 저돌적인 면이 있지만, 분명한 건 시야가 편협하지 않고 상당히 넓다는 점이에요. 또 시기를 기다릴 줄 알고, 상황마다 기지를 발휘할 줄도 알죠.”
키올은 데보라 부인에게서 나온 묘사가 카트리나 에젤로트라는 사실에 반만 동의하고 나머지 반은 동의할 수 없었다.
에젤로트 영애가 저돌적인 여인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 여름 축제에서 절실히 느낀 바 있었으나, 기다릴 줄 안다는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측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인물이었다면 호수에 직접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지 않았겠지.
“어쩐지 입성 전의 평가와 상이한 것 같은데.”
“확실히 그때는 잘 봐줘 봤자 황태자의 어여쁜 약혼녀가 전부였으니까요.”
“신랄하군.”
“그렇기에 폐하, 저는 영애가 황성 예절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케이트 영애에게 절제와 인내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황후가 될 수 있습니다.”
확신컨대 황제는 그녀의 제의를 걷어찰 것이다. 키올은 본인의 1년 치 봉급을 걸고 확언할 수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황제는 턱을 괴던 손을 거두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세피아. 그녀는 완벽할 필요가 없어.”
창 너머 노을을 등지고 뱉어진 황제의 목소리는 진중하고도 당연하다는 듯 차분한 어투였다.
“폐하의 사랑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애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틀린 선택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대는 모르겠지만, 황후라는 자리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덕목은 이미 예전부터 가르쳐 왔어. 흠…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지. 아무리 나라 해도 두 번은 못 버틸 경험이야.”
황제 폐하조차 못 버틸 경험이라니,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지! 키올이 몸을 떠는 동안 황제가 자신의 의사에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나는 지금으로 족하다는 의미다.”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데보라 부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제가 감히 무어라 더 입을 열 수는 없지요. 따로 부탁하실 일은 더 없습니까?”
“황태후의 동태. 그것으로도 지금은 충분할 것 같군.”
“예. 인사 추천인 목록은 제가 바로 행정실에 전해 놓고 가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선 데보라 부인이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찾아온 이유는 분명 인사권 청탁일 텐데, 어째 키올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황제 폐하는 에젤로트 영애를 이해하기 어려울 만치 사랑하신다’가 전부였다.
***
“선택했어. 나와 네자르의 결혼반지는 이거야.”
드디어 방황의 끝이 도래했도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팔을 곧게 뻗어 카탈로그 정중앙에 그려진 반지를 가리켰다. 네자르의 눈동자처럼 영롱한 붉은빛을 띠는 루비. 크기가 내 새끼손톱의 절반이라 걸리적거릴 염려도 없다. 반지의 테두리는 보편적인 반지들에 비해 얇으나 쉬이 휘어지지 않을 적당한 두께였다.
좋아, 이만하면 잘 고른 것 같아. 네자르를 닮은 홍색 보석이 달린 반지는 대체로 촌스러워 보였는데, 이 반지가 그중 가장 세련되고 깔끔했다. 그러나 목을 길게 뻗어 내가 가리킨 반지를 본 록허드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진심이냐? 국혼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밋밋하다 못해 초라한 거 아니야? 누가 보면 어디 소작농의 반지인 줄 알겠네.”
“그게 바로 절제의 미라는 거야, 록허드. 애인도 없으니 뭘 알 리가 있겠니.”
보석상에 가 보길 했어야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촌스러운지 구분하기라도 하지. 록허드에게 있어 결혼반지의 구분은 보석이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뉠 뿐이다. 보석이 큰 반지는 좋은 반지, 작은 반지는 불쌍한 반지. 어린아이도 비웃을 처참한 수준의 이분법이 아닐 수 없다.
“네가 이 오라비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록허드가 욱한 목소리로 반문했으나, 저런 반응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누가 보면 모함을 당한 줄 알겠네. 하지만 장담컨대 록허드는 백이면 백 애인이 없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이라곤 검과 말, 그리고 체스가 전부다. 얼마나 애절한 사랑이냐면, 어머니께서 다 포기하실 정도였다.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충고하는데, 애인이 있든 없든 여자 있는 티를 내는 게 이로울 거야. 요즘 너, 남자와 만난다는 소문이 있거든.”
“……농담이지?”
농담이냐고?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툴드를 응시했다. 그는 평소의 여유로움을 잃고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그를 따라서 록허드의 얼굴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들였던 록허드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설마 진짜냐?”
“정신 건강을 위해 소문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입 다물고 있을게. 그러니까 내 혼인에 참견할 시간에 빨리 가서 소문이 거짓이란 걸 증명하는 게 좋을걸.”
근거 없는 소문도 아니었다. 나 같아도 여자는 멀리하는 주제에 틈만 나면 붙어 다니는 브레이트 경과 록허드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심지어 한 명도 아닌 두 명 다 애인이 없단 말이지…….
“그게 아니면 맞다는 걸 증명하거나?”
내내 결혼반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기 바빴던 록허드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혼돈과 공포에 빠진 그의 표정을 만족스럽게 응시하며 성 밖으로 내쫓았다. 이제부터는 저 멍청한 록허드를 상대하는 데 힘을 쓰면 안 된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한 거사가 있기 때문이지.
경건한 마음으로 종을 울리자, 곧장 데이지가 침실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세요?”
“화장을 수정해 줘. 아주 중요한 만남이 있으니,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강력해 보이게!”
“이렇게 갑자기요? 당장 연습하던 목검을 들고 어디 싸우러 가실 분위기네요.”
“싸움이라면 싸움이지. 지금부터 황태후에게 만찬 초대장을 건네러 갈 거거든.”
그 한마디에 흐릿했던 데이지의 얼굴로 시뻘건 생기가 솟았다.
“직접 가시려고요? 똑같이 제3 행정실을 통해서 전달하는 건 어떠세요? 어휴, 저는 황태후의 서신이 도착했던 그날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난 당한 건 배로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그러려면 당연히 다른 방식을 써야겠지.”
“다른 방식이요?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구요? 폐하께 혼나셔도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누가 들으면 매일같이 사고만 치는 줄 알겠네.
황태후에게 초대장을 주는 걸 거사라 표현하기도 우습지만, 중대한 일은 입에 담으면 허사가 되어 버리는 법. 입을 꾸욱 닫고 마차에 올라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황태후가 나오기 직전까지 드레스와 머리를 가다듬었다. 나와 황태후의 기 싸움 사이에서 고용인들만 어찌할 줄 모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예상대로 황태후가 한나절은 걸려서 내려온 덕에 내 외양은 모자람 없이 다듬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날이 좋죠? 그날 성으로 돌아가 잘 쉬셨나요?”
날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데는 얼마나 걸린 거지. 10분 정도 걸렸나?
“그래요……. 영애도 다행히 붓기가 가라앉았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나요?”
붓게 한 원인인 주제에 뻔뻔하기는.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만찬 초대장을 전해 드리기 위해 왔어요. 국혼에 앞서 에젤로트 가문을 초대해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질 예정이라, 부디 황태후께서도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선황께서 일찍이 돌아가셨으니 그분을 대신하여 내가 만찬을 준비해야 한다… 이 말을 하려는 거죠?”
“네.”
내 대답에 황태후가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입과 코를 가렸다. 순수하게 웃음을 보였을 뿐인데, 뭐가 이리 기분 나쁘지?
“미안한데 내가 지금 몸이 너무 무거워서. 머리부터 발까지 어디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네.”
그래, 그렇게 순순히 내 초대장을 받을 리 없지.
“대답은… 저녁에 해 줄까?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시 찾아와 줘요. 답은 그때 줄 터이니.”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과 함께 황태후가 등을 돌렸다.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나는 그녀가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태후께서.”
동시에 물처럼 흐르던 황태후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리 갑작스레 몸이 아프시다니, 모시는 자들이 일을 방만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곧 황후가 될 여인으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로군요.”
나는 황태후 뒤에 선 시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 중 누가 황태후의 전속 시녀지?”
“저입니다.”
“너는 오늘부터 해고다. 당장 들어가서 짐을 싸 나갈 준비를 해라.”
시녀는 당황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내게 허리를 숙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황태후가 아니라 나의 사람이라도 된 양 초연한 얼굴로.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하얀 얼굴에 대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은요.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들을 내쫓으려는 겁니다. 황제 폐하의 어머니 되시는 분께서 저런 멍청한 것의 시중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걱정 어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필이면 고용인이 전부 바뀐 시점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필히 시녀 한 명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하녀와 시종 들도 모두 갈아 치워야겠어요.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로요.”
말이 끝난 즉시 나를 맞이하러 나온 시종들을 향해서 손가락질했다.
“그러니까 너희도 해고란다. 들어가서 짐 싸렴.”
세피아 부인이 추천한 인사들은 내 말에 거역 않고 그대로 복종했다. 그 모습에 속이 터지는 쪽은 물론 황태후였다.
“멈춰라. 너희의 주인은 나 황태후인데, 감히 누구의 말을 듣는 게냐?”
음. 여기서 완전히 못을 박아 줘야 황태후의 속이 더 뒤집어지겠지?
“들어가.”
나의 반복된 명령에 잠시 걸음을 멈췄던 고용인들이 성안으로 차례차례 사라졌다.
“하.”
시종들이 모두 들어갔으니, 이제 성 앞에 남은 인물은 나와 황태후, 그리고 멀찍이 선 툴드가 전부다. 고운 미간을 엉망으로 구긴 황태후가 날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기고만장하다 못해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아직 귀족 영애에 불과한 네가 무엇을 변명 삼아 내 시종과 하녀 들을 갈아 치운다는 거지?”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와 함께 황태후와 나의 거리가 좁혀진다. 확실히 내 성을 방문했던 날과 다르게 이성적이고 높낮이가 고른 목소리였다.
“폐하께서 널 총애하신다 하여 네 그 방만한 행동이 허용될 것 같으냐?”
고작 이런 일로 네자르에게 밉상 보일 필요 있나. 나는 보란 듯이 커다란 목청으로 웃었다.
“아하하, 물론 농담이었죠! 귀족 여식에 불과한 제가 감히 황태후의 고용인들을 멋대로 해고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요?”
얼마나 커다란 웃음이었으면 마차 옆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툴드의 커다래진 눈이 여기서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편하시다기에 대화조차 힘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굉장히 건강해 보이셔요.”
그러게 누가 뻔히 보이는 거짓말 하래? 곱게 초대장을 받아 갔으면 이런 치욕도 없었을 거 아니야?
“제가 워낙 바쁜 몸이라… 안타깝게도 귀한 저녁 시간을 황태후께 바칠 수 없음을 용서해 주세요. 하나 시간이 저녁밖에 나지 않는다 하셨으니, 초대장을 이 앞에 두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시간 나는 저녁에 읽어 보시기를.”
할 말을 거침없이 술술 뱉어 내고 창백해진 얼굴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왕 작별 인사를 남기는 김에 땅 위로 황태후에게 전할 초대장을 고이 올려 두었다. 해가 지면 알아서 가져가라는 의미로.
“그럼, 이만.”
등을 돌린 즉시 날카로운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부러 자세히 듣지 않았다. 다만 깜빡하고 놓친 전언이 있어 급히 되돌아가 마지막 한마디를 남겨야 했다.
“아! 고용인들의 해고 건은 모두 취소라고 전해 주세요. 아까처럼 무시당할 걱정은 마세요. 제가 말했다고 덧붙이면 모두 수긍할 겁니다.”
만찬을 앞둔 늦은 밤. 내게는 이제 에자렛 황녀에게 전달해야 할 초대장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미르티를 불러 쪽지를 건넸다.
“황녀께 전해 드려라. 하지만 황태후가 알아서는 안 돼.”
“예.”
그리고 쪽지에 적어 두었던 장소인 유령 성으로 먼저 이동했다. 보름달이 떠서 그런가, 이제껏 이곳을 방문했던 날 중 성내의 모습이 가장 환하고 밝은 분위기이다.
쪽지가 전달되자마자 움직였는지 에자렛 황녀는 내가 도착하고서 고작 10분 남짓이 흐른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애!”
며칠 만에 만난 에자렛 황녀는 밝아진 성만큼이나 밝은 느낌이었다.
“황녀 전하, 짧아진 머리칼로 황태후께 한 소리 듣지는 않으셨나요?”
“사, 사실 한 달간 출성금지령이 내려졌었어요. 예상은 했었지만, 고용인들과 호위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탓에 나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에자렛 황녀는 있는 힘껏 뛰어온 티를 풀풀 내며 급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고용인들이 대거 바뀌고 움직이기가 한결 쉬워졌지 뭐예요! 그, 그래서 오늘 절 부르신 이유는?”
나는 품속 깊숙이 숨겨 두었던 만찬 초대장을 에자렛 황녀 손에 쥐여 주었다.
“여기요.”
“이건…….”
“만찬 초대장이에요. 내일 아침 서신으로 도착할 테지만, 제 손으로 직접 전해 드리고 싶어서요.”
내일 시종을 통해 전달될 초대장은 황태후에게 던지고 온 초대장과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건넨 초대장은 조금 다르다. 황태후에게 비밀로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사항이 적혀 있었으니까.
“모레면 황태후가 마음 편히 성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 될 거예요.”
에자렛 황녀의 고운 손가락이 초대장을 꽉 쥐었다. 빳빳했던 종이가 서서히 구겨질 정도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요, 황녀. 정말 나를 도…….”
“네, 도울 거예요. 저는 상관없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으나, 그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미세한 떨림이 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알고 있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입니다. 지금의 황태후는 제 어머니가 아니에요. 껍질만 남아 추해진 망령이지요.”
감정이 들끓는지, 에자렛 황녀의 숨이 눈에 띄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초대장을 쥔 손으로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 그러니 제발 저에게 영애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앤드류를 대신하여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요!”
“그 초대장 뒤편에 전하께서 맡아 주셔야 할 역할이 상세히 적혀 있을 겁니다.”
나는 마지막 구원 줄이라도 잡은 양 꽉 쥔 에자렛 황녀의 손을 내 어깨로부터 천천히 떼어 놨다. 그리고 또박또박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읽으시면 태워 없애시고, 황태후께서 초대장을 받았냐 물으면 내일 도착할 초대장을 보여 드리도록 하세요.”
며칠간 머리를 싸매며 만든 계책이 저 안에 적혀 있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세피아 부인에게도 밝히지 않은 계략이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성공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등을 돌려 유령 성을 벗어나려 했으나, 비명과도 같은 에자렛 황녀의 외침이 들려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 잠시만요, 영애.”
등을 돌려 보이는 커다랗게 뜨인 눈이 오후에 보았던 황태후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뒤늦게 말을 바꾸려는 건가? 하지만 천천히 다가온 그녀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에자렛 황녀를 만나고 헤어진 다음 날. 자고 일어나 침실의 암막을 거두자 성 앞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수십 명의 시종이 대기해 있었다.
음. 설마 지금 내가 꿈을 꾸나?
일단 종을 울려 내가 기상했음을 알리고 데이지를 불렀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는 몇 초 되지도 않아 곧장 방문을 열었다.
“오늘 무슨 날이니? 아니면 저 사람들, 지금 내 앞에서 시위라도 하는 거야?”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데이지가 가져온 아침 식사를 내 앞으로 내려놨다.
“어머, 아가씨. 벌써 잊으셨어요? 오늘은 아가씨의 거처를 본성으로 옮기는 날이잖아요! 본성의 시종들이 이른 오전에 도착해서 입성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본성!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꾸물꾸물 다시 들어가려던 이불을 거두었다. 맞아. 엊그제 론을 통해서 본성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전했었지.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앗!”
그 탓에 데이지가 준비해 놓은 식기들이 쏟아질 뻔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간이 테이블을 붙잡은 손이 있어 번거로운 후처리를 피할 수 있었다. 다만 테이블과 식기를 번쩍 든 손은 가녀린 시녀의 일부라고 하기엔 유독 선이 굵고 핏줄이 울긋불긋 솟은 모습이다.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군. 너는 어쩜 이런 날에도 그리 무신경할 수 있는 거냐?”
서운한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 그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폐하?”
“본성으로 옮겨 달라 뭐다 응석이란 응석은 다 부린 주제에… 세상모르고 온종일 잘 기세더군.”
네자르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여름 이불을 들어 다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하필 보여도 하루 중 가장 추하고 민망한 얼굴을 보이다니!
“저, 저, 화장…….”
“네가 화장을 하든 안 하든, 드레스를 입든 벗든 상관 안 하니 일단 고용인들 입성 허락이나 해. 네가 일어나질 않으니 뙤약볕에서 저리 고생 중이잖아.”
드레스를 탈의해도 상관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내 거처가 본성으로 옮겨진다고 벌써부터 티 내는 거야, 뭐야?
“이, 일단 입성을 허락할게요. 그런데 폐하는 오전부터 제 성에 무슨 일이에요? 황제가 되어서는 그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거예요?”
내 짐을 옮길 시종들만 오는 줄 알았더니, 설마 네자르까지 덤으로 딸려 올 줄이야.
“이것 봐. 예전에는 언제 시간이 나냐며 투정 부렸으면서. 어떻게 하루걸러 말이 바뀌어? 여자들은 원래 그렇게 갈대 같나?”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끌어오는 그의 뒤로 하녀들과 함께 방을 정리하던 데이지가 소리 높여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나, 우리 아가씨께서는 유독 더 그런 면이 있으시죠. 일단 저는 내려가서 아가씨의 말을 전하고 일을 감독해야겠습니다.”
“내 목욕은?”
급한 손짓으로 암막 커튼을 정리한 하녀가 침실을 나간다. 데이지는 그녀의 등을 멀찍이 밀어내며 대답했다.
“온수는 욕실에 준비되어 있으니 편하실 때 들어가시면 돼요. 혹시 목욕에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다른 시녀를 불러 놓도록 할게요.”
“그래, 한 명만 보내 줘.”
말과 함께 욕실로 향하려 했지만, 내 앞을 가로막은 네자르가 다시 침대에 앉혔다. 멀뚱멀뚱 쳐다볼 동안 아침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을 침대 위로 올린 그가 의자에 앉아서 포크를 집었다.
“먹어. 먹고 가.”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서 거르고 가도…….”
거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구 하나 죽일 기세로 포크를 든 네자르가 푹! 샐러드를 찍었다.
“파프리카 나와서 도망치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네 입욕제로 파프리카를 넣기 전에 어서 입 벌려.”
나는 알고 있다. 파프리카가 대화의 주제로 떠오른 이 시점, 그 어떤 변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현실에 승복하고 얌전히 입을 벌려 밀려오는 채소와 과일, 그리고 개 같은 파프리카를 꾸역꾸역 씹었다. 내 나이 스물에 파프리카 하나로 고역을 치러야 한다니.
겨우 접시를 비워 내고 욕실로 향하려는데, 어째 등 뒤로 계속해서 쫓아오는 발걸음이 하나 있었다.
“폐하.”
“응.”
심지어 당당하게 대답하기까지! 나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틀어 그를 째려봤다.
“설마 이대로 욕실까지 따라오실 생각은 아니겠죠?”
이윽고 들려온 것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우면서도 상냥한 목소리였다.
“케이트, 너와 나는 곧 결혼할 사이이니 욕실까지 따라가도…….”
“됐으니 따라오지 마세요.”
욕실 문을 열며 내 옆자리를 지키던 툴드에게 당부하는 것 역시 잊지 않고.
“툴드, 폐하께서 내 욕실에 무단 침입하는지 안 하는지 잘 지켜보도록 해.”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앞길을 막겠습니까? 절 무시하신 폐하께서 멋대로 침입하시면 어쩌지요?”
이 얄미운 자식. 누가 네자르의 끄나풀 아니랄까 봐!
“울 거야.”
나는 네자르의 눈을 쳐다보며 한 번 더 강조했다.
“들으셨죠? 엉엉 울 거라구요. 그러니까 들어오지 마세요.”
다행히도 네자르에게는 황제로서의 마지막 체면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기감 속에서 허겁지겁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갔다. 네자르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양 뻔뻔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하필 고른 서적도 연회 케이크 레시피가 적힌 요리책이라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어느새 감독을 마치고 돌아온 데이지가 내 준비를 도왔다.
“오늘은 챙이 긴 모자가 어떨까요?”
가림막 뒤에서 드레스를 걸치고 뚱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을 동안 야무진 손길이 머리칼을 틀어 올렸다. 나는 머리 사이사이를 훑는 기분 좋은 느낌에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흠칫 눈을 떠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네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폐하.”
“응.”
“혹시 저 감시하세요?”
“아니.”
휴. 침이 흐르지 않아 천만다행이네. 나는 거의 완성된 머리를 이리저리 훑으며 뾰로통하게 물었다.
“그럼 대체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자꾸 뚫어져라 쳐다보시니 부담스러워요.”
“그런 것 같네. 너는 생각이 얼굴에 다 나타나거든.”
그 사실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즐기는 사람이 바로 소파에 앉아 계시는 황제 폐하이시고.
“준비 다 됐어?”
데이지가 침실을 나간 직후, 등 뒤로 다가온 네자르가 화장대 거울 너머로 날 훑었다. 왜인지 몰라도 직접 마주하는 시선보다 더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얼굴이 좀 부은 것 같은데. 어디서 맞고 오기라도 한 거야?”
“어젯밤에 음식을 좀…….”
차가운 손가락이 귓바퀴 아래에서 튀어나와 내 뺨을 툭, 건드리고 사라졌다.
“뭐, 귀여우니 됐어. 부어서 그런가 옛날 얼굴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는 하녀가 준비해 둔 내 모자를 챙기고, 빈손으로는 손목을 끌어 자신의 팔에 걸쳤다.
“이제 가 볼까? 아, 곧 비가 내릴 것 같으니 아끼는 구두는 신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비가 내리는데 모자는 왜 챙겨 가요?”
“딱히 이유랄 건 없는데. ……흠. 모자를 쓴 모습이 보고 싶어서라고 해 두지.”
그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 성을 나섰다. 며칠 전 네자르가 한 아름 보낸 혼인 선물 때문인지 짐마차 주변이 상당히 시끌시끌했다.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요? 저는 폐하께 아무런 말씀도 전해 듣지 못했단 말이에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후덥지근한 날씨에 유리창을 밀어내며 물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은 네자르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어젯밤이 되어서야 생각난 일이라서. 한 달 전에 극장 티켓을 구매했다는 걸 이제야 기억했지 뭐냐.”
“극장?”
“유명한 연극이라던데, 필프론츠 후작이 엔테라 여식과 반드시 관람할 거라며 자랑하기에 미리 티켓을 구해 뒀어. 전부.”
전부라면 남아 있던 자리를 전부 샀다는 뜻일까.
“왜 그렇게 사람이 못됐어요? 폐하 때문에 카론도 연극을 못 보게 되었잖아요.”
“엔테라 영애의 취미가 연극 관람이었나? 나는 후작이 연극이 끝난 후 프러포즈할 거라 벼르기에 골려 주려던 것뿐이야. 마음이 급해졌는지, 오늘이 오기 전에 일을 치러 버렸지만.”
원래는 오늘 밤 후작이 고백할 예정이었구나. 나의 결혼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치러질 카론의 결혼식을 생각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재밌네요. 제 친우가 폐하의 외숙모가 된다는 게.”
내 말에 그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후작과 엔테라 여식의 나이 차가 적은 편은 아니지.”
후작은 그 나이 먹도록 왜 혼인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려는 낭만적인 연유 때문은 아닐 테고, 역시 네자르 때문이겠지.
황성에서 극장까지는 금방이었다. 제도에는 커다란 극장이 무려 셋이나 존재하는데, 도착한 극장은 일전에 판시온 소공작과 방문했던 장소와 다른 장소였다.
“안녕하십니까, 미네르바 백작님. 그리고 에젤로트 영애. 저는 칼오즈의 지배인인 잭 데벨바움입니다. 저희 칼오즈 극장을 찾아 주셔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차에 황가 문장을 달아 놓지 않은 걸 보면 신분을 숨기려는 의도일 텐데, 설마 지배인까지 나와 환영할 줄이야. 나는 기다랗게 줄 선 직원들을 지나 극장 내부에 들어서며 속삭였다.
“미네르바 백작은 누구예요?”
“바깥에서 사용하는 가짜 직위야. 내가 직접 행차할 수는 없으니, 론의 성을 잠시 빌렸지. 그래 봤자 내 신분은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으음, 그렇구나.”
우리의 자리는 극장 3층 내 위치한 귀빈석이었다. 문제는 관객이 귀빈석에 앉은 나와 네자르가 전부였다는 점이지만.
“유명한 극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밖에 없는 거죠?”
“내가 극장을 통째로 빌렸으니까.”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티켓을 전부 샀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그, 그게 가능해요?”
“그럼? 황제의 땅에서 돈 벌어먹고 사는데, 짐이 까라면 곱게 까야지. 감히 거절할 수 있는 놈이 어디 있겠어?”
예약은 미네르바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했다며? 어이가 없었으나 동시에 상당히 그럴듯한 궤변이었다. 하긴, 돈과 권력으로 이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러나 내심 뿌듯했던 기분도 연극이 끝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나는 자꾸 미묘해지려는 표정을 관리하며 네자르의 팔을 꽉 잡았다.
“어때, 케이트. 연극에 대한 감상은?”
“솔직한 평을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폐하의 성의를 고려한 평을 남겨 드릴까요?”
“이왕 말하는 김에 내 성의를 고려하는 편이 좋겠군…….”
그리 말하는 네자르의 얼굴에선 만족감과 충만함이 한가득이었다. 저 행복을 내 입으로 깨뜨리기가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또다시 관람하게 되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별로였어요.”
예상과 다르게 네자르는 그리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내 성의를 고려한 게 그거라니. 전자는 무엇이기에?”
“폐하를 위해서 제 마음속에만 담아 둘게요.”
하지만 보기에 괜찮았을 뿐, 실제 그는 지배인의 안내를 따라 마차에 오를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폐하, 삐쳤어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묻는데, 네자르는 대충 고개만 젓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내, 내가 실수를 한 건가. 네자르도 황제라는 그럴싸한 지위만 가졌지, 연인의 매정한 말에는 상처를 받는구나.
“마음 풀어요, 폐하. 제가 연극을 잘 몰라서 그래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승마랑 사냥밖에 없는 제가 이런 고상한 취미를 어떻게 알겠어요?”
“고상한 취미? 누가 들으면 승마와 사냥은 소작농이나 즐기는 천박한 놀음인 줄 알겠군.”
겨우 들은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옅게 배어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한쪽 팔을 꼬옥 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생각이 짧기는 했어. 확실히 네가 연극을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괜히 또 멍청한 놈들의 구슬림에 넘어갔네.”
나는 웃음을 숨기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다음도 있어요?”
“나온 김에 식사도 하고 들어가야지.”
“전 달팽이 싫어요.”
“그건 나도 싫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음으로 도착한 장소는 제도 외곽 가까운 곳에 덩그러니 놓인 레스토랑이었다. 주방장이 황성 출신이기도 하고, 특히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 내게도 퍽 익숙한 장소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디저트도 함께 판매하는 곳이라 그런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다만 걸리는 건… 이곳도 극장과 마찬가지로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설마 이곳도 통째로 빌린 건 아니죠?”
고개를 들어 표정을 확인한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빌렸네.
“왜 그러셨어요? 이러려면 차라리 성에서 먹고 말지, 바깥으로 나올 이유가 없잖아요.”
“으음.”
“또 멍청한 놈의 구슬림에 넘어간 거예요? 대체 누가 이렇게 허술한 조언을 하는 건가요? 론? 록허드?”
죄다 연애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인물이다. 나의 끊이지 않는 질문 공세에 팔을 더 가까이 당긴 네자르가 작게 속삭였다.
“툴드.”
뭐어? 툴드라면 한밤에 여자와 밀회를 즐길 정도로 꽤 놀아 본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따위 조언을 한다고?
“다음부턴 주변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는 그중에서 폐하가 가장 멋있으니까요.”
마땅한 대답을 뱉지 않는 것으로 보아 퍽 민망한 눈치였으나, 표정이 부드러운 걸 봐선 내 조언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리는 2층 테라스로 올라가 빗소리를 음악 삼아서 이른 저녁 식사를 즐겼다. 다행히 정체 모를 코스 요리는 나오지 않은 터라 익숙한 맛의 고기류와 해산물, 채소를 행복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해가 너무 길어서 그런가, 느긋하게 식사를 했는데도 밖이 아직 환하네요.”
“한창 여름이니까. 그래도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이겠어.”
“그래서 이다음은 어디예요?”
“귀성.”
네자르는 황성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이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미하듯 감긴 속눈썹이 고요했다.
“있잖아요. 나도 본성으로 들어가면 우리 침실도 같이 써요?”
한쪽 눈을 살짝 뜬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눈꺼풀을 닫았다.
“황실 법도상 혼인 후에나 가능한 일이지.”
“저는 황성 예절 안 지켜도 된다면서요?”
알고 보니 저 좋을 대로 골라서 예절 지키는 거 아니야? 아스파라거스만 초라하게 남은 식기가 치워진 후, 나는 티 세트가 준비된 테이블 너머 네자르에게 보챘다.
“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기다란 팔을 뻗어 내 이마를 툭, 건드렸다.
“중요한 사항 아니잖아.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는 걸로.”
아쉬운 마음을 가다듬고 찻잎을 우려내려는 종업원을 내보냈다. 네자르는 냉수에 레몬만 넣고, 나는… 비가 오니까 따뜻한 밀크티나 마셔야겠다.
내가 열심히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동안 테라스 밖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종종 내게로 틀어졌다. 그렇게 첫 번째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우유를 따를 때는 주룩주룩 내리던 빗줄기 위 하늘까지 번쩍거리기를 반복했다.
“요즘 비가 많이 오네요. 작년에는 원체 안 내려 가뭄이 들 뻔했는데 말이죠.”
“매해 가뭄 아니면 홍수야. 이맘때쯤이면 재난지원금 분배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지. 아주 피곤해 죽겠어.”
얼마나 피곤하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일 이야기를 한담.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없을까?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고민이 많을 때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 만한 일……. 아.
“폐하, 방금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생각났어요.”
물이 든 잔을 내려놓은 네자르가 내 급작스러운 말에 당황하지 않고 웃었다.
“우연인가? 나도 생각났는데.”
***
‘그 광경’에 처음으로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열두 살 무렵, 네자르와 록허드가 에젤로트로 돌아온 여름 방학의 끝자락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건대, 그해 여름은 일주일 가까이 성에 갇혀야 할 만큼 유독 장마가 길었다.
‘안 돼.’
역시. 매정하리만치 단호한 대답에 상처받은 난 눈알이 빠질 기세로 그를 노려봤다. 물론 네자르는 코웃음을 치며 천둥이 몰아치는 창밖을 보란 듯이 손가락질했다.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지금 바깥 날씨 안 보여? 이런 날에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겠다니, 저번처럼 독한 감기에 한번 걸려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정신을 차릴 애였으면 진작 차렸겠지. 그 고생을 해 놓고 아직도 저러는 걸 보면 갱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네자르.’
방학 과제를 미루고 미루다 부랴부랴 네자르의 보고서를 훔쳐보던 록허드가 끼어들었다. 으으!
‘벌써 5일 동안 비가 내리고 있잖아. 이제 성에서 나가고 싶어! 짜증 나는 록허드랑 같은 방에 그만 있을래!’
‘하여간 저 성질머리하고는…….’
쯧쯧 혀를 차는 록허드의 모양새는 입으로만 날 괴롭힐 뿐, 눈과 손은 과제를 베끼느라 바쁘다. 그 꼴을 한심하게 보던 네자르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래서 정원으로 나가자고 했잖아.’
‘꽃잎이 바닥에 다 떨어져서 볼 것도 없어. 비가 오래 내려서 고양이도 안 오고, 그냥 젖기만 하는 거라구.’
정원으로는 턱도 없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전달하며 네자르의 옆으로 다가가 다시 서적의 한 면을 펼쳤다. 그에게 보여 준 삽화는 다름 아닌 홍수로 범람한 강물이 주변 마을을 뒤덮은 그림이었다.
‘여길 봐, 네자르. 비가 많이 오면 강이 커지고 물살도 강해진다고 했어. 집이 다 쓸려 나갈 정도로! 그러니까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면 더 재밌을 거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대답은 늘 그래 왔듯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이봐, 케이트. 호수는 불어나 봤자 물살이 더 강해지거나 하지 않아. 물이 고여 있는데 어떻게…….’
‘아, 정말! 친구라고는 네자르밖에 없는 이 왕따야! 옆에서 그만 초 쳐!’
미친놈이면 미친놈답게 장대비 맞으며 말이나 탈 것이지. 버럭 낸 성질에 뻔뻔하기로는 제일가는 록허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왕따는 내가 아니라 너지, 어리석은 동생아. 이 오라버니는 아카데미에 가면 좋다고 따라다니는 학우들이 줄을… 억!’
주먹을 쥐고 정수리에 내다 꽂자 그제야 서재가 조용해진다. 나는 씩씩거리며 다시 네자르의 옆으로 다가가 책상 위에 엎어졌다.
‘나갈래! 나, 밖으로 나갈 거야!’
‘……하아. 그러면 차라리 강을 구경하러 가자. 종일 찡얼거리는 소리만 들었더니 머리가 터져 버리겠네.’
역시 찡얼거리길 잘했어! 고개를 번쩍 들고 환하게 웃으며 네자르의 등을 껴안았다. 그의 키가 워낙 커 고목나무의 매미 꼴이 되었지만,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네자르가 움직임을 멈춘 그대로 내게 말했다.
‘대신 구경만이야. 에젤로트의 성벽에서 외곽을 따라 흐르고 있는 강을 내려다보는 거야. 어때?’
‘그런데 과연 재밌을까? 강이 커져 봤자 막, 손바닥 한 뼘 정도밖에 안 커질 텐데.’
‘5일 내내 쉬지 않고 내렸으니… 지금쯤 주변 지대가 다 범람하고 다리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거다. 강폭이 적어도 두 배는 늘어났겠지.’
‘진짜 두 배야? 그럼 꼭 갈래! 아니, 지금 당장 가자!’
종을 울려 데이지를 부른 네자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두꺼운 외투를 건네받았다. 네자르가 입기에는 너무 작지 않나 싶었더니만, 자세히 살피니 내 옷이었다.
베스트를 대충 걸친 네자르가 내게 다가와 외투의 단추를 열 동안 나는 꽥꽥 울어 대던 아기 오리를 품에 안았다.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 호숫가 근처에서 상처를 입은 채 발견돼 주워 온 아기 오리였다. 음음, 좋아! 열심히 간호한 덕분인지, 배 아래로 곪아 있던 상처의 상태가 꽤 괜찮았다.
‘얘도 데려갈까? 그렇게 큰 강에서 수영하면 훨씬 재밌어할 것 같은데.’
‘안 돼. 기껏 살려 둔 오리 수장시키기 싫으면 여기 놔두고 가.’
‘……어쩔 수 없지. 대신 록허드도 같이 두고 가자.’
‘야, 다 들리거든?’
오리를 내려놓은 네자르가 내 팔 사이로 외투를 껴입혔다. 한여름에 늦가을 의복이 웬 말이래. 나는 턱 바로 아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히 잠그는 네자르의 얼굴을 보며 발버둥 쳤다.
‘아휴! 답답해. 겉옷은 그냥 벗으면 안 돼? 여름인데 이렇게 꽉꽉 조이고 다니는 애는 나밖에 없을 텐데!’
‘감기 나은 지 얼마 안 됐으니 조심해야지. 방정맞게 굴다가 재발하면 이번에는 제도로 가 버릴 거야.’
요즘 그는 자꾸 자신의 신변을 인질 삼아 날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들려 한다. 대체 내가 감기 걸리는 일로 왜 네자르가 떠나야 하는 건데? 열불이 터졌으나 그의 화를 북돋을 자신은 없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대답만 하지 말고. 넌 말이랑 행동이 늘 다르잖아.’
‘응!’
부러 밝게 웃는 얼굴로 활기차게 대답했으나 네자르의 곤한 안색은 짙어져 가기만 했다. 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여기서는 더 시무룩하게 대답해야 했던 거야?
‘하아.’
‘내가 말했지? 애 갱생시키려다 네가 갱생당한다고.’
‘넌 좀 닥쳐.’
잘한다! 하나 네자르의 폭언에도 록허드의 깝죽거림은 멈출 줄 몰랐다.
‘그 점잖은 에든 형님도 어릴 땐 케이트 못지않게 천방지축이었대.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걸 보면… 혹시 알아? 케이트도 언젠가는 사람이 될지.’
‘저거 지금 나 욕하는 거지? 그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몸을 네자르가 꽉 붙잡았다. 다소 긴 소매를 한 번 접고, 외투에 달린 후드 단추를 잠그고, 마지막으로 가죽 장화까지 완벽하게 신긴 후에야 몸을 일으킨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다 됐다. 이제 나가자.’
비 오는 날 강가로 나가기가 이렇게 버거운 일이었다니. 나는 꽉 끼는 외투 안에서 힘겹게 다리를 움직이며 네자르를 따라 서재를 벗어났다.
***
그게 벌써 8년이나 흐른 일이라니.
성벽 위 탑 아래에서 내다보는 강물의 풍경은 그때의 그 기억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제도의 강은 에젤로트의 강보다 폭도 훨씬 넓고 물살도 강한데 말이지. 그만큼 내 시야와 세상이 넓어졌다는 의미일까.
이곳에 서니 판시온과 함께 강을 구경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성벽 위가 아닌 아래였지만……. 네자르 앞에서 별일 아닌 양 꺼내면 안 되겠지? 안 될 거야. 혹시 모르니까 말조심하자.
“뭘 그렇게 생각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떠 있던 눈을 네자르에게로 틀었다.
“그냥, 놀라서요. 설마 폐하도 나랑 같은 장소를 생각했을 줄이야.”
“별걸 다 놀라워하네. 확실히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 같기는 해.”
아래에 있었으면 강물이 튀었을 텐데, 탑이 너무 높아서 그런지 근처 분위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또 뭐예요?”
“그동안 널 헛키운 건 아니라는 거지. 너 어릴 때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데리고 다닌 줄 알아?”
또 저런다, 또! 귀가 닳을 정도로 오랫동안 들어 온 말이라 경기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아, 정말! 안 지겨워요? 그 말 좀 더 이상 하지 마요. 그래서 뭐, 아버지라고 불러 드리면 되는 거야?”
그의 미간이 기묘하게 좁혀진다.
“……그래?”
네자르는 빗물이 튄 성벽에 등을 기대고, 여유로워진 두 손으로 팔짱을 꼈다.
“그럼 불러 봐.”
“……네?”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고.”
저건 대체 무슨 의도지. 나를 놀리려는 건가? 아니면 진심으로 내가 아버지라 불러 주길 바라는 거야? 점점 가중된 혼란이 비대하게 자라나 내 숨구멍까지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여, 여기서 거절하면 네자르의 성정상 삐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는 내 부모가 아닌 연인인데!
“제,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폐하를 어떻게 아버지라고 불러요.”
얇게 좁혀진 눈가에 언뜻 웃음이 그려진다.
“그럼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하자. 네가 이렇게 건강하고 경우 있는 귀족 여식으로 자라는 데 에젤로트 백작이 더 기여했어, 아니면 내가 더 기여했어?”
“세상에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헛웃음을 터트려도 네자르의 얼굴은 더없이 진중했다. 얼마나 진중하냐면, 너무나 진중해서 국정 회의의 한순간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한 줌의 거짓말도 없이 솔직하게 말해, 케이트. 나는 혹시나 네가 에젤로트 백작이라 대답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마음에 담아 둘 그런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그래, 이건 애초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던 거야.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가뿐해졌다. 죄송해요, 아버지.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네자르가 저를 더 열심히 키운 것 같기는 해요.
“……폐하요.”
“왜?”
“폐하께서 제 소양 수업을 돕지 않으셨으면… 저는 달마다 가정 교사를 바꿔 가며 곤혹을 치러야 했을 거예요.”
날카로운 눈빛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점점 풀어지는 얼굴 근육은 그조차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그리고요?”
정말 칭찬이라도 받길 원하는 건가. 나는 즐거운 데이트에 한창 풀어지려던 머리를 열심히 가동했다. 생각해 내, 케이트! 뭐든 좋으니 네자르의 덕을 봤던 기억을 떠올려!
“으음. 방학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 이곳저곳을 데리고 가 주셨고, 또 제가 승마와 사냥을 배우게 된 것도 전부 폐하 덕이고…….”
그의 표정은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상태였다. 심지어 내 팔을 잡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나를 끼워 넣으니 몸이 바짝 굳어 입을 열 수 없었다.
“또, 또…….”
“또?”
또 없어. 이제 한계야. 네자르의 만족감을 충족시키지 못함에 한탄하며 넓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제가 이렇게 예쁘게 태어난 것도 전부 폐하 덕이에요.”
카론에 비할 바는 절대 못 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잖아?
네자르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게 왜 내 덕이냐? 네가 예쁘게 자란 것을.”
“제가 예뻐요?”
“적어도 너보다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으니까. 한데 똑똑한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성격도 얌전하면 좀 좋아? 너 때문에 내가 열 번은 죽다 살아났다, 케이트.”
이러다가는 죽을 때까지 네자르에게 혼쭐만 나다 눈 감겠는데? 나는 네자르의 어깨를 밀어내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폐하, 제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요.”
들썩이는 잘생긴 눈썹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그의 답을 대신한다.
“저요, 사실 엄청 똑똑해요.”
어쩌면 엄청이 아닐 수도 있어. 실제로는 엄청 엄청인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훌륭하게 내 성을 장악하고, 적응할 수 없었다.
“안 믿는 표정이시네? 요즘 황성에 들어온 후부터 확실하게 느끼고 있다구요. 저, 사실 천재인 것 같아요. 계략과 모략의 천재 말이에요.”
마음먹고 깊이 숨겨 두었던 비밀을 밝혔으나, 정작 네자르의 표정은 가소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얄미운 표정은 언제 떠올랐냐는 듯 금세 자취를 감췄다.
“믿을 수 없군. 무슨 계략을 또 그렇게 꾸미셨을까…….”
“제가 나중에 폐하 괴롭히는 놈들 다 혼쭐을 내 줄게요. 이런 걸 뭐라 하죠? 책사?”
얼마나 우스웠으면 내 어깨로 얼굴을 묻은 그의 상체가 크게 흔들렸다.
“네가 내 책사라도 되겠다는 소리냐? 일주일에 책 한 권도 겨우 읽는 주제에, 책사는 무슨.”
한 권이라니, 레시피까지 합하면 다섯 권도 거뜬히 넘는데. 억울함에 네자르의 양 뺨을 잡고 면전으로 끌어왔다.
“전 타고난 천재니까 괜찮아요. 속는 셈치고 한 번만 써 보세요. 아주 깜짝 놀랄걸요?”
대답 대신에 날 붙잡은 건 그의 그림 같은 미소였다. 그의 등 뒤 배경으로 추락하는 빗줄기는 내 관심 영역 밖으로 나가떨어진 지 오래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네자르의 콧등과 나의 콧등이 맞닿아 있었다.
“케이트.”
“……네?”
“이럴 때는 눈을 감아야 하는 거야.”
아아, 그런 거였어? 눈꺼풀을 꾸욱 닫으려던 나는 직전에 살짝 눈을 떠 그에게 속삭였다.
“그냥 폐하가 감으시면 안 돼요?”
이내 네자르의 팔이 내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안개로 흐릿한 세상 속에서 네자르의 검붉은 눈동자만 또렷이 빛났다.
“안 될 게 뭐 있겠어.”
황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붉게 물든 노을이 산등성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짐은 이미 본성으로 모두 옮겨진 터라, 고용인들과 마차 역시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
가볍게 입을 맞춘 네자르가 자신의 집무실로 사라진다. 나는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발자취 그대로를 따라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2층은 폐하께서 집무를 보시는 곳이라, 방문자도 많고 사건도 많아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침실이 있는 3층은 대체로 조용하고 아늑하니 무리 없이 지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시녀장의 부연 설명을 듣던 나는 창가로 목을 쭉 빼고 하늘을 가리고 있는 건축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 별관은?”
멀리서만 봐도 버려진 성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풀풀 풍기는 건물이었다.
“아, 저 성은 공녀들이 지내는 곳입니다. 장시간 비워진 상태였으나 북벌 전쟁 이후 공녀를 들이면서 다시 사용되고 있지요. 그들 신분으로는 허락 없이 본성에 출입할 수 없으니, 아마 마주치실 일도 없을 겁니다.”
“황위가 바뀌었는데도 계속 저 건물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거야?”
“안 그래도 공녀들의 처분에 대하여 국정에서 논의 중에 있습니다. 며칠 안으로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황제인 네자르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다. 이제 조금 여유로워졌다던 말도 사실은 나를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그럼 편히 쉬시고, 도움이 필요하시면 종을 울려 주세요.”
새로운 침실은 이전 성의 방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보석함, 책, 잡다한 물건 할 것 없이 전부 그대로 옮겨진 터라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고요해진 성의 싸늘함이 불편했을 뿐.
끼익. 그리하여 네자르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상반되게, 몸은 이미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집무실의 오래된 나무문이 닫히고 환하게 일렁이는 등불에 네자르의 그림자가 크고 작아지길 반복한다. 그는 안경을 낀 상태로 책상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서 그렇게 눈치 보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고개도 들지 않고 나임을 어떻게 아는 거람. 안경을 벗은 네자르가 피곤한 낯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괜히 찾아와서 번거롭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안 오기라도 해?”
“네.”
“이리 와.”
거절하지 않고 걸어 들어간 나는 네자르의 한쪽 무릎에 걸터앉아 그가 줄곧 확인하고 있었을 서류를 함께 들여다봤다.
“데보라 영지 파라모베르 극장 증축… 뭐라는 거예요?”
“간단하게 말해서 데보라 가문이 관리하던 극장을 두 배로 키우고 싶다는 거지.”
책과 만년필의 본고장인 데보라는 그 영향을 받아 유명한 극단이 많기로도 유명했다.
“이런 건 영주 소관 아니에요?”
“파라모베르 극장의 최대 투자자가 나거든. 그래서 내 허락을 받으려는 거야.”
“그래서 통과시켜 줄 거예요?”
내 등에 머리를 기댄 네자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음. 이 느낌은 분명히 위아래가 아니라 좌우야.
“그렇게 되면 주마다 진행 보고가 올라올 텐데, 결혼식도 그렇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 미룰 생각이야.”
결론적으로 말해서 데보라 가문이 세워 둔 일정에 차질이 생길 거란 의미였다. 그의 말에 문득 세피아 부인이 떠올랐다. 나의 뜬금없는 요구와 부탁을 어렵지 않다는 듯 수락해 준 그녀의 얼굴이.
“……이거, 지금 통과시켜 주면 안 돼요? 폐하만 허락해 준다면 혼자서 공부해서라도 내가 맡아 보고 싶어서요.”
“갑자기 왜?”
세상은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데, 이제껏 받기만 했으니 이런 부분에서라도 돕고 싶었다.
“그…냥?”
“그러지.”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네자르는 곧장 허락을 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등을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물었다.
“저,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그럴싸한 이유는 고사하고 단순하게 그냥인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내가 만들어 주면 되지. ……음, 뭐가 좋으려나. 일하는 동안 떨어져 있기 싫으니 내 옆에 앉아서 날 돕도록 해.”
그리 말한 네자르는 무릎 위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날 다시 안아 자신의 다리 위로 앉혔다. 거절하면 어떡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직접 이유까지 만들어 주다니.
“가능하겠죠?”
가, 가능하니까 나에게도 해 보라고 말한 거겠지? 기대와 달리 네자르는 어깨만 슬쩍 으쓱였다.
“글쎄다. 솔직히 그리 기대는… 말이 나온 김에 가져가서 정독이나 해 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물어보고.”
자신이 읽던 서류를 내게 건네는데, 솔직히 말해서 살짝만 훑어도 온통 전문 용어라 무슨 내용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음. 무릎에 계속 앉아서 읽어도 돼요?”
네자르는 나의 물음에 대답을 대신해 뺨 위로 가볍게 입맞춤했다. 참 나. 요즘 너무 뽀뽀가 잦은 거 아니야? 사람 기분 좋게!
***
만찬 당일, 먹구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만큼 해가 높게 떴다. 바깥의 매미 소리가 성안까지 들려오는 걸 봐선 무더위가 제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비가 한바탕 내려 한풀 꺾일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유리 온실 안에서 쪄 죽는 건 아닌가 몰라.
“하아.”
머리를 비우고 창밖 풍경을 구경하려 해도 답답한 속은 가시질 않는다. 에자렛 황녀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일까.
황태후를 내쫓을 묘수를 마련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에 넘쳐 있었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황태후가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수차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황태후는커녕 오히려 내가 쫓겨나게 되는 거 아니야?
“하아.”
그렇게 내쉰 한숨이 벌써 두 자릿수가 되어 가던 때. 창 너머 저 멀리 본성을 향해 달려오는 에젤로트 가문의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 에젤로트 재상님께서 오셨어요.”
나는 밖으로 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아버지 품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어이쿠.”
저, 오늘 쫓겨날지도 몰라요. 그냥 돌아가시면 안 될까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아버지의 등을 더 꽈악 안았다.
“안녕하십니까, 황제 폐하.”
그사이 네자르가 내려왔는지, 날 품에서 떼어 낸 아버지가 그에게 몸을 숙였다.
“와 주어서 고맙소, 에젤로트 백… 아, 지금은 아니로군. 이제는 단순히 재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하하! 뭐, 원하신다면 예전처럼 백작이라 부르셔도 무방합니다. 에젤로트 백작이 둘씩이나 되면 저희야 나쁠 것 하나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네자르가 작게 웃었다.
“식사는 온실에서 예정되어 있으니, 그동안 이곳에서 편히 쉬시오.”
“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차례로 인사를 나눈 네자르가 날 위해서 자리를 비워 준 덕분에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응접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매사에 여유롭던 어머니도 본성은 처음인지 이곳저곳 둘러보기 바쁘셨다.
“나는 네가 황후가 되는 날 하늘이 무너져 내릴 줄 알았다. 한데 이리도 날이 쾌청한 걸 보니 네가 결혼식을 올린다 하여 하늘이 무너질 것 같지는 않구나.”
“어흠. 아무리 그래도 황성 안인데, 그런 말을 하면 어쩌오. 목소리를 낮추든가, 말을 조심하든가 둘 중 하나는 해 주시오, 부인.”
아버지가 땀을 찔찔 흘리든 말든, 어머니는 특유의 당당한 기세로 가슴속에 담아 둔 말을 다 뱉으셨다.
“저는 폐하가 카발 제국에 한이라도 품으신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봐 줄 거라곤 얼굴에 가문이 전부인 이 아이를 황후에 앉히다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뒤따라오던 에든과 릭이 어깨를 흔들고 웃었다.
“어머니께서 뭘 모르시네요.”
나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제가 요즘 황성에서 얼마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요?”
“그 돌머리를 어디에 사용하고 있기에 자신만만한 게냐? 정원에 심을 꽃 종자의 수라도 세고 있든?”
“어휴, 그런 곳에 사용하면 제가 굳이 머리를 굴린다고 표현하겠어요?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지만, 제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황성의 기강을…….”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마를 일그러뜨린 어머니가 노성을 터트리셨다.
“네가 하기는 뭘 했겠니? 겁도 없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니, 폐하께서 신경 써 주셨겠지!”
“아, 아니에요. 제가 뭘 그리 쑤시고 다녔다고… 어머니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걱정하실까 싶어 황태후와 뺨 때리기를 교환한 부분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못하겠고, 우울하게 입매를 늘어뜨린 채로 에든 옆자리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네가 날마다 추천인이랍시고 하녀와 시종을 보내는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느냐?”
그, 그렇기는 하지.
릭과 아버지가 응접실 밖으로 피신을 갈 동안 어머니는 지치지 않고 역정을 내셨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워 에든의 팔 뒤에 이마를 기대어 얼굴을 숨겨야 했다.
“겁도 없는 것. 그나마 황제 폐하께서 널 예쁘게 봐 주셨기에 다행이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넌 평생 에젤로트에 갇혀서 살아야 했을 거다.”
이윽고 어머니는 데이지를 따라 내 침실로 향하셨다. 얼마나 막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러 가시는 거겠지.
으으!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촌철살인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들은 탓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심지어는 타당한 소리라 변명할 기회도 없었어. 이런 우울한 심정으로 황태후까지 만나야 하다니… 최악의 최악이었다.
“어머니께서 다 널 걱정하는 마음에 타박하시는 거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렴.”
땅을 파고드는 여동생의 모습이 여간 불쌍했는지, 차와 함께 신문을 읽던 에든의 손바닥이 내 등을 살살 쓸었다.
“머릿속이 복잡하신 거야. 가장 말 많고 탈 많던 막내딸이 사 남매 중 먼저 결혼을 하는데, 복잡하지 않으실 수가 없지.”
“그럼 오라버니가 결혼 좀 빨리 하지 그랬어?”
“하하. 조금 더 일찍 돌아올 것을 그랬나?”
에든이야 유학을 갔다 왔으므로 넘어간다 치지만, 록허드와 릭은 여태껏 혼인은 물론 연애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네가 최근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 어머니께서 며칠 내리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 한데도 네게 안 좋은 영향이라도 갈까 싶어 서신을 보내 묻지도 못하셨단다.”
안 좋은 영향이라면… 어머니도 황태후를 의식하고 계셨던 걸까. 에든의 말을 들으니 어머니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갔다. 릭도 아니고, 종일 성에 처박혀서 놀고먹기 바빴던 내가 대뜸 안 하던 짓을 하니 걱정이 앞서셨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릭과 아버지가 응접실로 돌아오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그것도 내 침실에서 빼 온 드레스를 손에 쥐신 채.
“이것 보렴, 케이트! 이 어미가 드레스 천이 뜯어지면 그때그때 데이지에게 알리라 했더니만, 네 방정맞은 행동으로 찢긴 드레스가 옷장에 한가득…….”
무어라 잔소리를 하시던 난 그대로 내달려 가 어머니를 꼬옥 안았다. 엉거주춤 뒤로 기울어지던 몸이 재빨리 균형을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어머니는 드레스를 놓고 내 등을 감싸 안으셨다.
“갑자기 무슨… 너희 또 케이트에게 겁이라도 준 거니? 어떻게 된 게 네 명 모두 어릴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어머니께서 하도 뭐라 하셔서 애한테 할 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괜한 사람 잡지 마세요.”
릭의 무덤덤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어머니를 더 꽉 껴안았다.
“어머니, 사랑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리 싫어하시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후 록허드가 본성에 합류하고 마차에 올라 만찬이 시작될 황태후 성의 백장미 유리 온실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쨍쨍했던 뙤약볕이 조금은 흐릿해졌으나, 그래도 밖은 여전히 환했다.
“내가 저곳에, 그것도 심지어 황후의 어미 자격으로 가게 될 줄이야. 케이트 너 때문에 별걸 다 경험해 보는구나.”
어머니께서 입에 담은 유리 온실은, 단순히 황태후의 성을 의미하는 것 그 이상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젊었을 적 황태후가 어떤 여자였는지 아니?”
“네.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아요.”
“알았는데도 그렇게 겁 없이 지냈다는 소리인 게냐?”
어휴. 무슨 대화를 해도 전부 다 잔소리로 귀결되네!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쉰 어머니가 마차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으셨다.
“하긴, 지금 네가 방자하게 군다 하더라도 황태후가 널 어쩌겠느냐. 이미 황제 폐하의 눈 밖으로 나다 못해, 황성에 붙어 기생하듯 목숨을 부지하는 게 전부인데.”
대다수 귀족 역시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 말을 들으니 팍 죽었던 자신감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제는 기생해서 목숨을 연명하는 황태후가 더는 황성에 발도 못 붙이게 하는 거야. 네자르와 앤드류, 그리고 에자렛 황녀를 위해서라도.
도착한 유리 온실은 져 가는 태양의 뜨거운 하늘빛을 받아 환하고 밝다. 아버지와 같은 마차를 타고 이동한 네자르가 내 옆으로 나란히 서 눈을 마주했다. 걱정과 우려가 너무 짙어 차마 미소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주한 베딜라 황태후가 그 어느 때보다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며칠 전의 일은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 버린 듯,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귀한 분들과 함께하다니. 이보다 더 기분 좋을 수가 없군요.”
“친히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폐하. 선황께서 타계하신 지금 만찬의 준비는 당연히 이 어미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니, 에자렛?”
“네, 물론이죠.”
네자르와 에자렛, 그리고 황태후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가족으로 보였다. 서로를 위하며,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배려하는 하나뿐인 가족. 물론 전부 허울일 테지만.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안으로 들어갈까요.”
유리 온실로 이동하는 내내 짧은 대화들이 오갔다. 준비를 많이 했는지 에자렛이 말을 더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내 신경은 온통 황태후의 언사와 분위기, 표정에 향해 있었고 그 덕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온실 한가운데 마련된 식탁에 도착한 뒤였다.
“오늘 만찬의 메뉴는 토마토퓌레와 연어 카르파치오, 샐러드를 곁들인 마리네,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이며 디저트로 밀크 초콜릿 마들렌과 밀푀유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꽃향기 가득한 정원 속에서의 식사라. 내부가 생각만큼 그리 덥지도 않았다. 마주 앉은 에자렛이 힐끔 고개를 틀어 날 향해 어색하게 웃는다.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보니 긴장되어 있던 기분이 점차 차분해졌다.
“황태후께서 관리하시니, 폭풍우가 지나간 바깥과 달리 이곳은 여전히 꽃이 만발한 여름이로군요.”
어머니의 말에 자연스레 맞장구를 쳤다.
“저는 유리 온실이라기에 바깥보다 더 더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그리 답답하지 않네요.”
역시 서신 한 통을 전부 온실 자랑으로 채웠던 사람답게 황태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 날씨가 흐릿한 것도 있지만, 해가 가장 높게 뜨는 낮 시간대에는 주기적으로 온실 벽에 지하수를 뿌리고 있어요.”
역시 아름다운 만큼 손이 많이 가는 건가.
“또 여름에는 일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부에도 인공적으로 물이 흐르게 만들어 놨지요. 내부가 시원한 건 그 때문이랍니다.”
“굉장하네요. 전부 황태후께서 관리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소리 없이 걸어온 시종들이 유리잔에 물을 부었다. 유리 아래로 떨어진 햇빛이 회오리치는 물속에서 산란되어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리고 그 잔을 집어 드는 황태후의 손은 도자기 인형처럼 주름 하나 없이 고왔다.
“이 온실의 그 어느 곳도…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죽으면 꼬옥 이 땅 아래에 묻어 달라 폐하께 요청드릴 생각이에요. 으음. 저의 부탁을 들어주실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이 예쁜 온실에 당신을 왜 묻어, 이 상도덕도 없는 여자야. 앞으로 이 온실을 가꾸게 될 사람들보고 무덤지기 노릇을 하라는 거야?
나는 온실 내부를 차분하게 훑으며 물었다.
“정말 온실의 모든 일은 황태후께서 직접 하시는 건가요?”
“물론이랍니다. 후후, 믿기 어려우신가요? 설계도, 건축도… 선황께서 모두 제게 맡기셨던 일이지요.”
단기간 황태후를 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녀의 대화법에서 선황이라는 존재가 매우 큰 영역을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오랜 예전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황태후의 얼굴은 순간적이라지만 소녀처럼 상냥한 빛을 띤다. 마치 선황의 베딜라 황후였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렇담 온실을 둘러싸고 도는 물길도 황태후께서 직접 삽으로 땅을 파신 건가요?”
“그런 일은 보통 정원사가 하지요. 황태후인 제가 한낱 땅 파는 일을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역시 그럴 리 없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 손으로 했다는 듯 표현하기에 땀이라도 흘린 줄 알았다.
“아아. 그렇지요……. 황태후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으시다기에, 정말 일일이 신경 쓰시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렇담 저 인공 물길에는 황태후의 손길이 안 닿아 있겠어요.”
딱히 이죽거릴 의도는 아니었으나, 상대가 황태후이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말투가 비집고 나왔다. 포크를 들어 접시를 헤집고 있음에도 바로 옆에서 어머니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이를테면… 카트리나. 아, 카트리나라 불러도 괜찮아요? 어차피 곧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함께할 사이인데.”
죽을 때까지는 무슨.
“물론이에요.”
느리게 져 가는 노을빛 아래에서, 옅게 굽어지는 황태후의 눈가가 붉게 반짝인다.
“카트리나? 오늘의 만찬은 내 성의 요리사인 파틀로크 씨가 준비한 메뉴예요. 그는 아마 식사가 끝나고 이곳으로 달려와 음식의 간은 적당했는지, 맛은 괜찮았는지 물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 저의 요리를 드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물 흐르듯 굽이쳐 흔들리는 목소리.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한다더니, 역시 내 뺨을 치러 왔던 그날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마주한 황태후가 네자르를 몰아넣었던 그 베딜라 오드리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요리를 과연 그가 만든 요리라 말할 수 있을까요? 송아지는 누가 도축했고 허브는 누가 수확했으며 토마토는 누가 키웠을까요. 그들의 허락이 없이도 요리사가 감히 ‘내가 만든 요리’라 말할 수 있을까요?”
헛소리하지 말란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여서 설명할 줄이야. 충분히 수치심을 느낄 만한 일임에도, 감정의 동요 같은 건 없었다. 이쯤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그럴 테지.
“이게 지금 카트리나 영애의 주장이에요. 너무나… 논리적이고… 또 젊네요.”
“논리적이기는요. 방금 황태후께 설교까지 들었는걸요. 지금도 충분히 부끄러우니, 괜히 놀리지 마셔요. 생각이 짧다는 게 너무나 부끄럽네요.”
이 정도면 퍽 부끄러워 보이려나? 옆에서 활활 타오르고 계시는 어머니의 눈치를 봐서라도 반성하는 척해야만 했다.
“놀리다니요? 저는 젊고 아름다운 것을 매우 사랑하고 아낀답니다. 백옥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피부에, 장미꽃처럼 붉은 활기가 도는 뺨을 가진 숙녀는 특히 더.”
시야 끄트머리로 보이는 에자렛의 안색이 어쩐지 창백하다.
“내가… 어린 귀족 여식들을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에젤로트 부인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순간, 식탁의 분위기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게 싸늘해진다. 나는 휘적휘적 포크를 저어 향신료만 남은 접시 안을 흩뜨렸다. 이윽고 네자르의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꿰뚫고 온실의 천장을 울렸다.
“역겹군.”
동시에 만찬에 참석한 모든 인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 연어 말입니다. 아주 역겹군요. 미끌미끌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향신료 향이 아주 진하게 나는데… 아마 요리사는 짐의 이런 반응을 기대하면서 아주 열심히 성의껏 만들었겠지요.”
힐끔 내려다본 네자르의 접시는 말 그대로 반만 비워진 상태였다.
“이 앞으로 끌고 와 맛의 정체가 무어냐 묻는다면… 듣지도 않았는데 뭐라 대답할지 벌써부터 뻔하군요. 이 썩은 풀 맛 나는 향신료는 사실 북쪽 산맥 늪지대에서 건져 온 잡초입니다, 라고 말할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만큼이나 입에 맞지 않으신 건가요? 이거 참… 지금 당장 요리사를 불러 경을 쳐야겠어요.”
정중히 손을 든 네자르가 종을 손에 쥐려는 황태후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오해 마십시오, 어머니. 설마 진심으로 그리 말하겠습니까? 짐의 말은 그만큼이나 최악이라는 의미입니다.”
향이 독특하기는 해도 저만치 악평을 할 정도는 아닌데……. 불평을 표현한 자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다들 숨을 죽인 채 네자르의 말을 기다렸다. 오직 록허드만 접시를 싹싹 비워 내며 특유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소신을 지킬 뿐이었다.
“또한 그런 답이 들려온다 하더라도, 짐은 어찌 이런 쓰레기를 내놓았느냐 언성 높이지 않고 삼킬 겁니다. 어머니께서 내오신 요리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폐하께서는 답지 않게 말씀이 많으십니다. 이 어미의 귀가 오늘 호강을 하는군요.”
분위기, 목소리, 표정 그 모든 것이 평소의 네자르 그대로다. 그러나 분명 중대한 무언가가 비틀어진 느낌이 확연하게 다가왔다. 네자르가 역겨움을 느낀 것이 정녕 연어 카르파치오가 맞을까?
“그래도 다음에는 뱉어야겠습니다. 악취가 너무 심해 더는 참기가 힘들군요. 그래도 이 정도 참으면 참 오래 참은 거지요. ……정말 오래요.”
가볍게 손을 닦은 그가 이어서 물잔을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말에 미소를 짓는 자는 식탁을 둘러싼 인물 중 오직 황태후가 유일했다.
“이 어미는 몰랐습니다. 폐하께서 저와의 인의를 그리 중히 여기실 줄은.”
“어머니요? 저는 에자렛과의 인의를 말씀드린 겁니다.”
대답과 함께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자렛 황녀를 향했다.
“그런데 에자렛, 아까부터 계속 안색이 좋지 않구나. 체하기라도 한 거냐?”
“아, 아니요.”
순식간에 본인에게 집중된 시선 때문인지, 당황한 에자렛 황녀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황녀 전하, 실내에서 모자를 계속 쓰고 계시는데, 덥지는 않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문제없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었으나, 덥지 않을 리 없었다. 머리가 짧아진 꼴을 두고 보지 못한 황태후가 억지로 씌웠겠지. 그렇지 않으면 안 그래도 짧아진 머리칼을 굳이 모자 안으로 쑤셔 넣을 이유가 없었다.
“전 카트리나 영애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네요. 괜찮다면 폐하와는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들려줄 수 있을까요?”
에자렛에게로 모인 시선이 불편하기라도 했던 걸까? 황태후가 포도주를 넘기며 날 향해 물었다. 그런 귀한 이야기를 내가 왜 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네. 말을 아끼자 황태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아, 혹시 부끄럽나요? 그렇다면… 흐음. 어떤 이야기를 해야 식사 시간이 조금 더 재밌어지려나. 아, 폐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지는 않아요? 다시 생각해도 얼마나 귀여운 소년이었…….”
“어린 시절의 황제 폐하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하아, 다행이야. 황태후의 혀가 네자르의 이름을 담기 전에 록허드가 보란 듯 입을 놀렸다.
“솔직히 당시 폐하는 본인 잘난 맛에 사는 잘생기고 재수 없는 황태자 전하셨지요. 저 아니었으면 친구도 못 만드셨을 겁니다.”
친근하면서도 시건방진 어투에 네자르가 토마토를 씹다 말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벌써 잊었나 본데, 록허드 경. 올해 나에게 도착한 아카데미 선후배의 엽서가 무려 구백 장이야. 그런데 경은 고작 몇 장이지? 음… 백 장은 되나?”
“저라도 기사단장 따위보다는 황태자 전하께 알랑방귀를 뀌겠습니다.”
“경은 좀 뀌어 보고 나서 그런 소릴 해.”
나는 익숙한 다툼을 들으며 새로 준비된 마리네를 찍어 먹었다. 우리의 계획이 바뀌지 않았다면, 곧 에자렛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거다. 끼익. 그래, 지금처럼.
“……무슨 일이니, 에자렛?”
황태후의 물음에 에자렛이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케, 케이트 영애의 식기는 으, 은식기가 아니어요. 새로 바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에자렛? 사랑스러운 아이.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니 그만 앉거라.”
“아, 아니요. 으, 은식기로 바꾸셔야 해요. 제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영애의 마리네에는 독망초가 섞여 있을 거예요. 확인해 보시는 게 좋아요.”
그 말과 함께 유리 온실 내부의 시간이 멈추었다. 바짝 굳은 공기에서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얼어 버린 시간은 에든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움직였다.
“……독망초? 지금 독망초라고 했습니까?”
네자르의 까만 그림자 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상한 일이지, 이렇게 밝은 유리 온실 아래로 그림자가 지다니.
서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에든이 종을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식기가 도착했다. 접시 아래로 가라앉은 물에 은식기를 담그면… 당연한 결과로, 은식기가 변색될 수밖에 없다. 하녀에게 그리하도록 시켰으니까.
“이… 무슨! 케이트, 아가!”
아버지의 의자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진정하십시오, 아버지. 케이트? 천천히 일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일단 최대한 빨리 속을 게워 내야 해.”
그럴 수 없었다. 나와 에자렛의 계획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혼란스러워진 상황 속에서 은식기를 천천히 식탁 위에 놓으며 에자렛 황녀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눈을 꾸욱 감은 에자렛 황녀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며칠 전에 하녀가 땅을 파 숨겨 놓는 모습을 목격했어요. 몰래 확인해 보니 유리병에 독망초라고 쓰여 있더군요. 혹시 몰라 만찬 전에 확인해 봤는데… 병이 들어 있던 구덩이가 텅 비어 있었어요.”
열심히 외웠는지, 눈에 띌 정도로 말 더듬는 일이 줄었다.
“그리고 영애가 사용하던 식기에만 여기서 사용하는 은식기 제조사의 엠블럼이 그려져 있지 않았어요. 다른 분들의 것과 다르게요.”
에든과 릭이 급히 자리를 벗어나고, 그사이에 황태후의 반응은 곧장 일어났다.
“모함입니다, 폐하. 최근 제 성의 아이들이 전부 바뀌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것도 하필 이렇게 많은 손님이 모인 자리에서 무작정 카트리나 영애를 노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마치 다른 사람이 황태후께 죄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노기를 가득 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셨다. 죄송해요, 어머니. 사실 제가 꾸민 짓 맞아요. 솔직하게 뱉지 못해 입 안으로만 흩뿌렸다.
“황태후께서 말씀하신 바는 순전히 심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녀가 제 입으로 뱉어 낸 말은 증언이지요. 너무 뻔하다는 말로는… 증언을 묵살할 수 없습니다.”
황태후는 모함을 받은 사람치곤 놀라우리만치 침착한 자세로 어머니의 말을 받아쳤다.
“제가 카트리나 영애를 살해하여 얻는 이득이 뭘까요? 오히려 저는 카트리나 영애와 가까워지기 위해 온실로 찾아와 달라는 초대장도 보냈는데 말이지요. ……아, 물론 영애는 보란 듯이 무시하였지만.”
그런 식으로 떠들면 이쪽도 할 말이 있지. 나는 독기가 올라 조금씩 답답해져 가는 숨을 참아 내며 말문을 텄다.
“무시하기는 했지요. 시종도 아닌 행정 직원을 보내셨기에 미움이라도 샀나 싶어, 겁이 나 그랬습니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물을 한입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한데 이곳의 시녀가 저에 대한 악담을 풀고 다니더군요. 얼마나 우습던지. 가서 혼쭐을 좀 내 줬더니 제 성으로 와 제 뺨을 치지 않으셨습니까?”
“뭐? 지금 얼굴을 맞았다는 말이니?”
깜짝 놀란 어머니가 고개를 길게 빼내어 내 얼굴을 살피셨다.
“말하고 보니 황태후께서는 증거뿐만이 아니라 심증까지 갖고 계시는군요. 차라리 독살이라 다행입니다. 적어도 다른 영애들처럼 유리 조각으로 얼굴이 긁히는 일보다는 낫네요.”
드디어 빈정거리기가 먹혀들었나 보다. 여유를 잃지 않던 황태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면.
“카트리나, 귀족 영애라고 하기에는 언사가 상당히 거친 것 같은데… 훌륭한 황후가 되시려면 조금 더 신경 쓰셔야겠어요.”
“충고 감사드립니다. 할 말은 그것뿐이신가요?”
날카롭게 좁혀진 황태후의 시선이 곧 네자르에게로 돌아갔다.
“저는 결백합니다, 폐하. 할 말은 이것으로 전부입니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돌아온 에든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부여잡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날 유리를 다루듯.
“케이트? 마차가 도착했단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독이 언제 어떻게 퍼질지 모르니…….”
“에자렛 황녀.”
내 부름에 백지장이 된 얼굴이 번뜩 고개를 든다. 확실히 눈가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봐선 독의 효과가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소량의 독망초는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지만, 그래도 독은 독. 완전하게 해독하기 전까지는 꽤 고생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삼킨 독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자렛이야말로 오랜 기간 천천히 삼켜 낸 독으로 인해 고통에 몸부림쳐야 하는 당사자였다.
“당신도 할 말이 있는 것으로 알아요.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나요?”
아직도 기억한다. 내게는 에자렛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대화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만찬 초대장을 건네고 본성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내 발목을 잡아채던 그녀의 부름이.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덜덜 떠는 손으로 자신의 외투와 드레스를 벗는 낯에는 수치보다 울분이 가득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마른 등을 빈틈없이 메운 새까만 피멍이었다.
‘……설마, 그 상처?’
‘맞아요. 어머니예요.’
나는 입술을 깨물고 뛰어가 벌어진 드레스의 단추를 다시 하나하나 채웠다.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에자렛 황녀가 작게 등을 흔들며 웃었다.
‘폐, 폐하께서는 계속 저의 알현 요청을 거절해 오셨어요. 사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반은 제대로 요청조차 못 했지만…….’
‘이건 심지어 아직 피멍조차 빠지지 않았네요.’
‘엊그제 새로 생긴 멍이라서요.’
굽은 등을 편 그녀의 얼굴은 이미 결단을 내린 듯 담담하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폐하께 알려야만 해요. 이 불우한 동생을 위해서 어머니의 죄를 눈감아 줄 필요가 없음을.’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오늘.
“폐하.”
자리에서 일어서 나지막하게 네자르를 부른 에자렛 황녀가 거친 손길로 자신의 드레스를 뜯어냈다. 누군가 말릴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장미보다 더 붉은 꽃이 핀 그녀의 등이 식탁 너머로 훤히 드러났다.
“귀한 식사 시간을 방해해 죄송하나… 부디 제 몸을 봐 주세요.”
네자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건 예사였고, 누군가의 숨넘어가는 소리 역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세상에…….”
“선황 폐, 폐하께서 북벌 종전 선언을 하시기 석 달 전부터 주기적으로 폭행에 시달려 왔습니다. 어, 어머니로부터 주로 등과 다리, 복부를 구타당했고… 앤드류 황자는 저보다 더 심한 상처를 달고 다녔어요.”
덜커덩. 황태후의 의자가 커다란 소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경악, 분노, 그리고 공포. 그간 봐 왔던 여인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황태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너… 이 무슨…….”
“어머니께서는 제가 고작 여, 열 살이었을 적부터 귀부인과 여식 들을 초대해 가학적인 취미를 즐기셨어요. 이, 이 자리를 빌려 폐하께 반드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에자렛 황녀의 눈동자는 단 한 번도 황태후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절하며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간곡히 청합니다, 황제 폐하! 부디 황태후에게 황족 시해에 대한 죄와 그간 귀족 여식들을 불합리적으로 폭행해 왔던 죄를 물어 주십시오!”
온기로 충만했던 유리 온실에 한기가 내려앉는다. 시간이 멈춘 것과 같던 얼어붙음도 잠시, 비틀거리며 일어선 황태후의 입에서 비명이라 해도 무방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폐, 폐하!”
“조용.”
“부디 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머니. 짐이 이성적으로 대처하길 바라신다면요.”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틀어 버린 네자르가 손을 들어 이마를 덮었다. 일분일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한참 후 고개를 든 그가 날 향해 말했다.
“……케이트, 너는 일단 이곳을 나가 치료에 전념하도록 해라.”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당혹과 분노가 아닌 깊은 실망, 그리고 슬픔이었다.
“짐은 여기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조금 많은 듯싶구나.”
거역할 구실이 없는 황명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곧장 내 어깨를 잡은 록허드가 누구보다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온실을 벗어났다.
“이번에는 심했어.”
워낙 빠른 걸음 탓에 안 그래도 어지러웠던 머리가 아찔했으나, 입 다물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걸었다.
“네자르가 겁대가리 없이 행동하는 널 이해하고 지켜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케이트. 거창한 건 아니야. 단순히 네가 그걸 바라 왔기 때문이지.”
그가 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네자르는 어릴 적부터 나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너 스스로를 소모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이다니. 네자르가 네 희생에 감읍하기라도 할 것 같아? 전혀. 그 성질머리에 그럴 수 없지.”
“네자르 성질머리가 뭐 어때서?”
록허드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낫지. 불만 가득한 어투였으나 록허드는 코웃음 한번 치지 않았다.
“너는 조금 더 세심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적어도 에자렛 황녀의 입에서 케이트가 아닌 카트리나가 나왔어야 하지 않겠냐.”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어떻게 신경 쓰라는 거야? 역시 머리 굴리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와 록허드가 올라탄 마차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곧바로 출발했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로 빨간 노을빛에 물든 유리 온실이 눈에 담겼다.
“황태후가 제대로 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얽힌 이야기가 하나둘 풀어질수록 그 바람이 짙어짐을 느낀다. 나름대로 그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의도가 무색하게 무례한 행동이 된 걸까.
“누구보다 네자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뒤늦게 대답한 록허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지친 기색이었다.
***
세피아 데보라가 제도에 도착한 시점은 자정이 막 넘은 시간대였다. 그나마도 황명이 데보라에 도착한 직후 쉴 새 없이 말을 달린 덕이었다. 세피아의 입장에서 늦은 밤 급파가 도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마음만 앞선 계책인 줄 알았는데, 설마 시행한 건가.’
며칠 전, 독망초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놀라워만 했지 크게 개의치 않아 했던 세피아였다.
독망초는 세간에서 입수가 가장 쉬운 독약 중 하나다. 켈 로망드가 자멸한 후에도 공급이 끊이지 않고 있는 소수의 독약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독망초의 과다 복용은 귀부인들 사이에서 흔한 자결 방법으로도 쓰이니, 케이트 영애의 부탁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제 겨우 스무 살에 불과한 여인이 겁도 없어.’
이후 사용처를 알게 되었을 때는 쉬이 포기할 거라 여겼었다. 타인을 속이는 일은 둘째 치고 본인 스스로가 독을 섭취하려 하다니. 웬만한 배포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피아 데보라 부인 되십니까?”
황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마차를 알아본 기사가 곧장 본성으로 안내했다. 늦은 새벽인 탓일까? 평소 그녀가 느껴 온 성의 분위기와 그 공기부터 다르다. 마치 상어의 아가리 위에서 걷는 느낌이었다.
“폐하, 데보라 부인께서 도착하였습니다.”
거대한 문이 열림과 동시에, 세피아는 경매에 팔려 가는 기분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드넓은 공간에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흔들리는 불빛이 그녀의 발끝으로 닿아 온다.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정확히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세피아는 조심히 걸음을 옮겨 책상 가까운 데 마련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틀림없어. 케이트 영애가 일을 치른 거야.’
대체 어떻게?
제아무리 현 황제로부터 외면당한다 하여도, 또 정신 상태가 그리 온전치 못하다 하여도 황태후는 황태후다. 그녀는 무려 20년 동안 황성에서 살아남은 여인. 단순히 만찬 음식에 독약을 탔다는 정황 하나만으로 궁지에 몰아넣을 수 없는 인물이란 의미다.
“폐하께서는 제가 도운 일이라 보시나요?”
긍정도, 부정도 없었기에 세피아는 나머지 말을 천천히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독망초는 단기간에 과다 섭취해야 효과가 나타나는 독입니다. 평생 배출되지 않고 쌓인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두 번 떠 마신 정도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혹여 후유증이 생기더라도 금방 회복되겠지요.”
황제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어, 마치 한 폭의 인물화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세피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반응이… 얼마 만이더라. 너무 오랜만이라서 기억도 안 나네.’
“굳이 그 방식을 선택하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살벌한 분위기를 중화하기 위해 세피아는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선택은 케이트 영애께서 하신 일이죠. 저는 그저 곧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 중 가장 덜 치명적인 독을 골라 드린 게 전부예요.”
“세피아, 짐이 물은 건 네가 무얼 했느냐가 아니라, 왜 말리기는커녕 보란 듯이 도왔냐는 뜻이야. 제발 언성을 높일 일이 없도록 해 줘.”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상냥하신 분. 세간의 평이 제아무리 그를 예민하고 사납다 표현하더라도, 세피아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에 황제만큼 자비롭고 상냥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머나먼 가시밭길을 헤쳐 오면서도 인간적인 성정을 버리지 못한 남자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저는 가진 능력은 쥐꼬리만큼도 없으면서, 가문의 권력을 등에 업은 채 멋모르고 날뛰는 젊은 귀족들을 혐오해요. 그들은 마치 선조와 부모가 일군 명예와 금은보화를 당연하고 마땅한 자산이라 생각하죠. 본인 스스로 일군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케이트는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가?”
황제의 반문에 세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그녀야말로 제가 혐오하는 족속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에요. 귀족으로서의 권위는 누릴 대로 누리면서 귀족 사회의 암묵적인 질서는 죄다 무시하고, 가문의 힘에 기대어 멋대로 행동하며, 심지어는 황가의 이름까지 더럽히려 하고 있으니까요. 체신을 챙길 줄도 모르고 알게 모르게… 아니, 대놓고 바보 같은 면도 있지요.”
말하고 보니 케이트 영애가 말괄량이를 훌쩍 뛰어넘어 망나니가 된 느낌이었다. 다소 과장된 감이 있나 싶다가도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은 분명한 일이다. 네자르의 감정이 짙게 밴 한숨 소리가 들려온 후, 세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꽤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요. 바보치고는 자기 의사가 명확하다는 점도, 바보치고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려 한다는 점도. 날뛰는 것과 별개로 무엇이라도 시도해 보려는 사람은 늘 매력적이거든요. 바로 케이트 영애 같은 사람 말이에요.”
그마저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미움만 살 성격이었으나, 하늘이 도운 것인지 혹은 스스로의 능력인지 케이트 영애가 제 무덤을 파는 일은 없었다.
“파라모베르 극장 증축 건을 일주일 만에 허락을 받은 것도 그녀 덕분 아닌가요? 데보라가 황성으로부터 홍수 피해 지원금을 워낙 많이 받은 탓에, 올해 안에는 분명 허가받지 못할 일이라 여겼는데 말이죠…….”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 기분이야, 세피아.”
한숨 섞인 목소리에 세피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답지 않게 채근하는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물론 가슴 한구석에 안쓰러움도 피어오를 정도였다.
“예전과 달리 저와 그녀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지금의 세피아 데보라는 단순히 폐하의 눈이 아니라, 케이트 영애의 조력자라는 역할 역시 지니고 있어요. 제가 그녀를 돕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닌 아주 당연한 현상이라는 거지요.”
“뻔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빙 돌려서 이야기하는군. 그냥 네 선택이었다는 뜻이잖나?”
참다못했는지, 황제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다그쳤다. 무어라 덧붙이려던 세피아는 그마저도 황제의 신경을 건드릴까, 말을 줄이기로 했다.
“음. 뭐, 제 의도가 너무 비약된 감은 있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네요.”
말과 함께 세피아는 가방에서 다수의 종이 뭉치를 꺼내어 들었다. 오래된 것들과 새것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으나, 조금도 구겨지지 않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건… 말씀하셨던 피해 귀족 여식들의 청원서입니다.”
황제의 눈빛이 한층 더 진중해짐을, 세피아는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시간을 조금 들여서 천천히 준비하려 했는데… 케이트 영애가 일을 치른 덕에 이리도 빨리 사용하게 됐네요.”
황태후로부터 정신적, 신체적으로 위협받아 온 귀족 여식들을 설득해 힘겹게 모아 온 청원서. 이 안에는 황태후의 처벌을 원하는 여인들의 바람과 억울함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보복을 두려워한 여인들에게 수차례 거절당한 적도 있으며, 이미 작성한 청원서의 폐기를 요청하는 여인도 더러 존재했으니까.
‘그래도 벌써 열 장을 훌쩍 넘게 모았구나.’
그녀와 황제가 긴 시간과 공을 들여 천천히 준비해 온 일이다. 새삼 감격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받아 드는 황제의 표정이 오묘하게 구겨진다.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눈치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곱게 접힌 열 장 남짓의 서신을 하나하나 펴 들었다.
“……이 청원서를 모으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지?”
“글쎄요. 8년이 조금 안 되었지요.”
“그렇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건가. 이것들을 실제 사용하게 될 날이 오다니.”
감개무량한 기분은 그녀만의 감정이 아닌 듯싶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어낸 황제가 다소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감히 예상할 수 없다. 다만 세피아는 지금 자신의 생각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동안 수고해 줘서 고맙다, 세피아.”
황제의 격려에 옅게 피어오르는 웃음을, 그녀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 제가 마땅히 나서서 한 일인 것을요.”
이제야 진정으로 사죄할 수 있을 테다.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배 속에서 허무하게 눈을 감은 그녀의 아이에게.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
이제는 수년이 흘러 버린 그날의 악몽. 시간이 흘러도 후회는 여전하기만 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황태후의 초대를 거절해야만 했다. 그 여자가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던 그 붉은빛의 홍차를 거절해야만 했다.
‘그랬다면 내 아이는…….’
적어도 울음소리 한 번은 낼 수 있었을 텐데.
세피아는 무거워지려는 숨을 힘겹게 참아 냈다.
***
독망초 섭취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저녁 만찬 날로부터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다지만, 모레가 곧바로 결혼식임을 상기하면 내가 침대에 누운 일로 혼인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그와 관련해 론이 오전, 낮, 늦은 오후마다 꼬박꼬박 방문하여 결혼식을 늦추는 게 어떠냐 물었으나, 나는 극구 거절하며 꼬박꼬박 그를 돌려보냈다.
“미루지 않는 이유라도 있어요? 그러다 당일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안쓰러운 얼굴로 내 손을 부여잡은 카론의 말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거야 충분히 이해한다. 나 같아도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지 그 연유가 답답할 거야. 이유야 많지만, 그중 굳이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살이 빠져서 코르셋이 딱 맞아. 정말 완벽하게 딱. 숨을 참으려고 무리할 필요도 없어.”
“……설마, 그게 다는 아니죠?”
“안색이 안 좋아졌기는 해도 화장으로 커버하면 돼. 그러니까 지금처럼 살이 빠졌을 때 결혼식을 해야 해. 건강이 호전돼서 입맛을 되찾으면 금세 포동포동해질 거란 말이야.”
이건 객기가 아닌 아주,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인생에 딱 한 번 있을 결혼식이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결혼식이 하필이면 카발 제국의 국혼이다. 이는 대륙 모든 국가의 사신들이 눈을 시퍼렇게 뜬 자리에서 반지를 교환하고 입을 맞춰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제는 속도 그리 쓰리지 않고, 고기 들어간 수프도 잘 들어가.”
“폐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가요?”
론과 달리 카론은 애초부터 날 설득하길 포기한 모양이었다. 5년을 질기도록 붙어 있던 사이라 그런지, 황소개구리인 내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폐하는 어제부터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으셨어.”
“어머나, 한 번도요? 여기서 같이 지내고 계시는 거 아닌가요?”
“으응. 내 얼굴이 보고 싶지 않나 봐. 듣기에는 황태후 관련 일로 바쁘다 했지만…….”
입이 열 개라도 네자르에게 변명할 구석은 없을 거다. 그는 이미 내가 꾸민 짓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마 우리 둘의 상황이 반대였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만약 네자르가 독망초를 자의로 섭취했다면… 음. 상상도 하기 싫네.
“미안, 카론. 바쁠 텐데 괜히 나 때문에 황성까지 오게 하고…….”
“전혀요. 하지만 스스로 몸을 해하다니, 그 부분은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저랑 릴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한숨을 푹 내쉰 카론이 그제야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등을 의자에 편히 기댔다. 그래도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황성에 발걸음을 해 주다니. 나, 인생 헛산 게 아니었나 봐!
“안 그래요, 릴리?”
카론의 물음에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릴리가 황급히 입가의 침을 훔치며 일어났다.
“어, 어… 네! 결혼식이 얼마나 화려할지 벌써 기대되네요.”
그럼 그렇지. 아카데미를 방문했던 날에 비해 외양이 멀쩡해졌다 싶었는데, 황성을 방문한다고 겉만 신경 쓴 게 분명했다. 대학원 공부가 얼마나 힘들면 여길 와서까지 존담.
“케이트, 그래도 모레면 결혼식인데, 폐하의 화를 풀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머, 폐하께서 화가 나셨나요? 두 분이서 다투기라도 하셨어요?”
처음부터 아주 완벽하게 졸았네.
“릴리, 차라리 내 옆에 누워서 그냥 자는 게 어때요?”
“앗, 그래도 되나…….”
“입 닥쳐요, 릴리.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도록 하세요.”
날이 바짝 선 카론의 말에 안 그래도 까맣던 릴리의 안색이 흙색으로 변했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뭔가 놓친 거라도 있어요?”
“닥치래도요?”
둘 사이를 중재하기도 귀찮았던 나는 침대 헤드에 천천히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네자르, 분명 나한테 실망했겠지. 어떻게 풀어 줘야 할까?
***
국혼이 있기 하루 전, 황태후의 처분이 결정 났다. 국가 중대사를 코앞에 둔 결정이었기에 유야무야 처리될 거란 반응이 지배적이었으나, 정작 황제의 결단은 이와 정반대였다.
다수의 황족 시해죄와 더불어 귀족 여식들의 청원서를 비롯, 관련 사항의 증거가 충분하다고 여긴 바, 황태후 베딜라 오드리네 카발을 카발 계보에서 제외하고 이에 따라 황성 거주권을 박탈한다. 하나 전 황태후라는 지위를 고하여 오드리네 가문에 몸을 의탁할 수 있음을 허락한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이 황태후 직위로부터 완벽한 폐위였다. 황명이 내려진 직후 불복한 황태후가 자해를 시도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황태후의 성은 곧바로 비워졌고 그녀의 신변은 곧장 오드리네 가문이 떠맡았다.
네자르 곁에서 떨어뜨린 건 좋은데… 하필 떨어져도 카론의 옆자리에 떨어질 줄이야. 그 미친 여자가 카론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그런 쓸데없는 걱정에 기운 쓰지 마시고 계량이나 제대로 하시죠. 제가 볼 때는 우유의 양이 교수가 가르친 적정량의 두 배인데요.”
필프론츠 후작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우유가 든 유리병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윽. 그의 말대로 우유의 양이 컵의 반이 아니라 한가득 채워진 뒤였다.
“황태후…… 아니, 누님께는 오드리네 영지 내 따로 거처를 마련해 드릴 생각입니다. 표현은 비록 황족 시해죄로 국한되어 있지만… 저희 가문 사람을 해한 것과도 마찬가지니까요. 같은 성에서 지낼 생각은 단연코 없습니다.”
누님이라니, 듣기에 이리도 거북할 수가 있나. 그리 말한 필프론츠 후작은 아주 능숙한 손길로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아, 방금 한 말은 폐하께 전달하시면 안 됩니다. 황법상 황족은 카발 가문 외의 어느 가문의 사람도 아니라서요. 영애도 조심하십시오. 황족이 타 가문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건 반역 사상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전 아직 에젤로트 사람이라 괜찮아요.”
“물론 저도 앞으로의 일을 말씀드린 겁니다.”
반 컵이나 더 부어 버린 이 우유를 어쩐담. 버리기 아까워 다른 학생에게 줄까, 했으나 분위기상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입 안으로 꿀꺽 삼켰다.
제국 아카데미의 교양 수업에는 생활비 부족으로 기숙사 내에서 요리해 끼니를 때우는 평민 학생들을 위해 ‘요리 수업’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오늘 수업은 바로 출출함을 때우기에 그만인 ‘초콜릿 비스킷’ 만들기였다.
릴리에게서 우연찮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데이지와 론이 뜯어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허겁지겁 청강생 자격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몸이 완전하게 호전된 게 아니었음에도, 지금 당장 나에게는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네자르와의 화해가!
실제 청강생은 요리 실습이 불가능했지만, 내 열정을 높이 산 교수가 기꺼이 허락해 준 덕에 맨 뒷자리에서 열심히 따라 배울 수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명예 청강생이라는 필프론츠 후작과 함께.
“후작님.”
“말씀하십시오.”
“반죽을 참 잘하시네요. 종종 주방을 들락날락거렸던 저보다 훨씬 더.”
거만하게 코웃음을 친 그가 값비싼 셔츠의 소매를 한 번 더 걷으며 대답했다.
“카론 영애가 오드리네에 방문할 때마다 주방장의 디저트 요리 솜씨를 혹평하기에, 보다 못한 제가 팔 걷고 배웠습니다. 벌써 3년째 듣고 있는 수업인데 케이트 영애보다 못하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카론 때문에 배운 거였어? 그것도 무려 3년이나? 아카데미 요리 수업을 3년이나 들었다는 점도 놀라운데, 그게 카론을 위한 일이었다니 더 놀라웠다.
“영애도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빨리빨리 진행하시죠. 그래서야 폐하께서 드시고 만족스러워하시겠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요즘 식사를 제대로 못 했더니 팔에 힘이 없어서요.”
“식사? 설마 코르셋 때문에…….”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이던 필프론츠 후작이 돌연 멈칫, 몸을 굳혔다.
“아, 그렇군. 만찬에서 불경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 아니, 몸이 안 좋은데도 여기까지 온 겁니까? 폐하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하도 쏘아 대는 통에 속삭이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귀가 다 따가운 기분이었다.
“만찬이 끝난 후로 마주치기는커녕 털끝 한 번을 못 봤어요.”
“싸웠습니까? 아하, 그래서 비스킷을 선물해 드리려는 거군요. 그런 중대한 일이라면 제가 기꺼이 도와 드려야지요. 크흠. 사실 저도 비슷한 처지라서 말입니다.”
카론이랑 싸운 게 참 자랑이다. 나는 필프론츠에게 저만치 밀려나 그가 능숙하게 내 밀가루를 털어 내는 모습을 구경했다.
“후작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아카데미 특유의 활기차고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일까, 평소라면 감히 묻지도 못했을 물음이 입 밖으로 훅 튀어나온다. 껄끄럽게 여길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필프론츠 후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요. 꽤 놀랐습니다. 설마 제 조카분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을 줄이야.”
“제가 물은 건 다른 쪽이에요.”
“다른 쪽이요? 아, 누님에 대해 여쭈시는 겁니까?”
하도 여상하게 말하기에 대화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까 주변을 살펴야 했다. 다행히 수업이 꽤 경과한 시점이라 학생들은 각자의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미 백 번은 더 상상해 온 그림이라 그런지 별 느낌 없습니다. 조금 이르게 일어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저는 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요.”
“결혼이요?”
“네. 아주, 매우, 상당히, 엄청나게 중요하지요. 다름 아닌 카론 영애와의 결혼 말입니다.”
진심일까? 아니면 굳이 내게 느낀 바를 알리고 싶지 않은 걸까. 아무래도 후자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하게 되지만, 꼬박꼬박 요리 수업에 참석하는 걸 보면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내 몫의 반죽까지 열심히 도와주는 필프론츠 후작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의미로 중요 사항을 귀띔해 주었다.
“후작님, 사실 카론은 단 음식을 싫어해요. 특히 생크림이 가득 올라간 케이크 쪽으로는 시선도 안 둬요.”
“……그게 사실입니까?”
필프론츠 후작의 얼굴이 본 적 없는 당혹감과 충격으로 물들어 갔다. 한평생 능글맞은 표정만 지으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저런 반응도 보일 줄 아는구나.
“당신의 요리를 별소리 없이 먹어 준 건 아마 그만큼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앞으로는 만들더라도 생크림과 베리류는 제외하고 만드세요. 아, 무화과도요.”
“정말입니까? 이때까지 제가 선물로 드리면 군말 없이 잘 받으셨는데요?”
경악 어렸던 그의 표정이 점점 미심쩍은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 나는 완성된 반죽이 잘 숙성되기를 바라며 남은 우유병의 우유를 컵에 따라 내곤 대답했다.
“당연하겠죠. 다 제 입 안으로 들어갔거든요.”
미안하지만, 카론의 마음속 우선순위는 아직 내가 앞서는 것 같네. 나는 경쟁의식이 활활 불타오르는 필프론츠 후작의 째림을 느끼며 여유롭게 웃었다.
완성된 초콜릿 비스킷은 내가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맛이었다. 이 불후의 역작을 어서 빨리 네자르에게 전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서둘러 마차에 올랐지만, 막상 황성에 도착하니 다시 우울한 기분으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네자르가 과연 이따위 초콜릿 비스킷 하나로 마음을 풀어 줄까? 얼마나 화가 났으면 아프다고 골골거리는데 병문안 한번을 안 왔겠어. 차라리 집무실 앞에서 석고대죄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것 봐요, 제가 성에서 안정을 취하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안색이 더 안 좋아지셨잖아요?”
“몸이 나빠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드는 거 모르세요? 당장 침실로 돌아가셔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데이지의 잔소리까지 날 괴롭혔다. 하도 화를 내는 탓에 내 역작인 비스킷마저 주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나는 손수 만든 초콜릿 비스킷을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귀성하자마자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가야 했다.
결혼을 앞둔 탓일까? 다들 필요 이상으로 너무 예민하단 말이지. 자꾸 누워 있으라 하지 말고 나도 좀 신경 써 달란 말이야!
똑똑. 눈물을 찔끔 흘리며 외로움에 탄복하던 때, 침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데이지의 방문이 분명했다. 화를 내서 미안하다며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날 달래려는 거야…….
“음. 입맛은 없지만 마음이 가상하니 좀 먹어 줄까…….”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등장한 인물은 예상했던 바와 달리 데이지가 아니었다.
“……폐하?”
“받아.”
열린 틈으로 보이는 네자르의 얼굴은 나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좋지 않은 빛이다. 나는 그가 불쑥 건넨 금색 인장이 박힌 서신을 얌전히 받았다. 두껍지는 않았으나 봉투 안에는 한 장 이상의 종이가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서, 설마 파혼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얼굴이 좋지 않군. 데이지와 론을 걷어차고 아카데미로 갔다지? 아픈 주제에 힘도 좋아.”
“거, 걷어차지는 않았어요. 그냥 좀 밀어낸 거죠.”
불같이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네자르의 반응은 매우 차분했다. 황태후의 일로 심신이 지쳐 화낼 기운도 없는 걸까. 내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린 그가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다 좋은데 몸을 좀 아낄 필요가 있어. 그 편지는 내가 너에게 주는 거니 심심하면 펼쳐서 읽어 봐.”
“지금 읽어도 돼요?”
내 물음에 그가 곤란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었다.
“그럼 나는 지금 당장 가 봐야겠군. ……오늘 오전부터 식사를 걸렀다고 들었어. 그러지 말도록 해. 결혼식 도중에 쓰러져서 머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문이 닫힌 후 그의 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분명 나에게 화가 난 줄 알았는데… 단순히 내 착각에 불과했다는 듯, 이리도 아무렇지 않게 날 찾아올 줄이야.
“아, 참. 너무 놀라서 비스킷 주는 것도 깜빡했네.”
화가 안 났다는 걸 알았으니 저녁에 선물하지, 뭐.
나는 침대로 돌아가 네자르가 건넨 서신을 뜯었다. 새하얀 편지지를 펼치자마자 적힌 유려하고도 화려한 필체가 눈길을 잡아끈다. 우려와 달리 파혼을 요구하는 글은 아닌 듯했다.
그럼 무슨 말을 이리도 길게 적은 걸까. 나는 암막을 거두고 눈에 힘을 바짝 주어 그의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카트리나 에젤로트.
이 서신은 오직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를 위해 준비된 서신이며, 그대 외의 그 어떤 인물에게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황명이니 코웃음 치면서 카론 엔테라에게 보일 생각 말도록.」
내 생 처음으로 받아 본 네자르의 서신. 황제가 손수 채운 글이라 그런지, 첫 줄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근 이틀 동안 열다섯 번째 작성되고 있는 글이다. 방금도 론 미네르바가 혀를 차며 내 발아래에 버려진 편지지들을 가져갔지.
몰래 훔쳐 가서 읽을까 싶어 갈가리 찢어 놨더니 바닥이 엉망이라며 성토를 하는구나. 10년 전까지만 해도 눈만 마주치면 벌벌 떨던 놈이 이제는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읽기만 해도 하녀의 일을 굳이 도맡아 가며 번거로워하는 론의 얼굴이 상상됐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황제의 잡일까지 본인이 처리하려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나 보다.
「대화가 아닌 굳이 서면으로 작성하는 이유는 내 진심이 오해 없이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예로부터 말과 달리 글에는 거짓을 담기 어렵다고 했으니까.
만찬이 있던 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와 나 사이에 서신이 오간 적이 한 번도 없더구나. 네게 서신 작성법을 알려 주었던 시기에도 말이다.
그래서 혹여나 네가 내 진심을 오해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타 영식들처럼 상냥한 자는 아니니.」
그의 말이 맞았다. 네자르가 에젤로트를 떠나 황성으로 돌아가 있던 시기에도 나는 그에게, 그도 나에게 서신 한 통을 전달한 적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불쑥 서운함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베딜라 오드리네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려 했음을 알고 있으므로.
「인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만, 북벌 전쟁이 끝나고 내가 귀국한 지 벌써 석 달이 훌쩍 흘렀더구나.
돌이켜 보면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훌쩍 자란 네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놀란 마음에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는 걸 네가 알까 싶다. 그날 고백을 거절당하고 정말 눈이 내리는 계절에 결혼식을 치러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
아무렴 기억하지. 네자르가 돌아온 때는 한창 만발하던 봄이 서서히 끝나 가던 시기였다.
“놀라서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고?”
하긴, 내가 누구인지도 못 알아봤으니까.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구르며 다음 장을 펼쳤다.
「열다섯의 카트리나와 지금의 카트리나는… 글쎄, 많은 부분이 달라졌고 또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구나. 다만 명확한 점은 더는 마냥 돌봐 줘야 하고 신경 써 줘야 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거야.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너에게도 너만의 신념이 있고 철칙이 있었겠지.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그러한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아. 나는 그 사실들을 간과했던 것 같다.」
그 문장을 시작으로 네자르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게 네게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있어 카트리나 에젤로트라는 존재는 열다섯의 그해에서 영원히 멈춰 있던 것 같아.
그랬기에 네가 바라는 방향이 아닌 내 방향대로 널 제어하려 했고, 통제하려 했으며, 가두려 했다. 스스로는 아니라 여겼으나 그 생각 자체가 틀렸던 거야.
나는 내가 태산이 되면 남들이 그러하듯 너 역시 내게 기대려 할 줄 알았다. 한데 너는 기대기는커녕 덩달아 산이 되려 하더구나. 처음에는 그저 길길이 날뛴다 싶었지. 철없는 아이의 철없는 마음이라 여기면서.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걸 몸소 보여 준 후에야 나는 또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박과도 같았던 그 관념에서 더 일찍 벗어났다면, 너 홀로 무리하려는 마음도 없었을 텐데.
그래, 내가 굳이 서신을 작성한 건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어. 고맙다는 인사말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케이트. 날 위해 줘서 고맙고 또 마음 놓고 기댈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믿으라 장담해 놓고 정작 나는 널 믿지 못했구나.」
나는 서신 위로 떨어진 눈물을 황급히 지웠다. 잉크가 번졌으나 다행히 못 알아볼 만큼 글자가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적은 글에도 분명 억측은 존재할 거야. 하지만 그런 것쯤 한둘 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함께할 사이에 오해 정도는 있어 줘야 지루할 틈이 없을 거 아니냐?
다만 이 아래로도 써야 할, 쓰고 싶은 말들이 많으나 나머지는 너와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고 싶구나.
네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있을 즈음이면 나는 집무실에서 벌벌 떨며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꼴 보기 싫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문을 두들겨 주길. 혹은 조금 늦더라도 꼭 두들겨 주길. 짐은 그대를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거든.
케이트의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로부터 전달.」
***
딸랑딸랑!
장대 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종이 힘차게 요동친다. 20개에 가까운 종이 거세게 흔들리니 맑고 고운 음악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성 내부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창문 너머로의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린 나는 이내 코앞에 놓인 화려한 목조 문을 응시했다. 카발 제국 건국 설화가 양각된 거대한 양문. 높이는 어림잡아도 무려 2층에 다다른다. 크기만큼 문의 무게도 엄청난지, 양쪽으로 각각 두 명의 장정이 긴장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뭐랬니, 케이트. 네 혼인날에는 하늘이 무너질 거라 했지?”
“그, 그런 소리 마시오, 부인. 이러다 비까지 내리면 어쩌려고!”
“어쩌기는요? 쫄딱 맞으면서 결혼식을 치르는 거죠. 평생 기억에 남고 딱 좋네요.”
어머니가 여유롭게 날씨를 감상하시는 동안 내 반대편에 선 아버지는 발을 동동 구르기 바쁘시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멍하니 서서 이 긴장과 떨림으로 얼룩진 순간이 어서 끝나기를 기도했다.
앞으로 1분. 1분 뒤 문이 열리면 먹구름 아래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결혼식장이 나타날 것이다.
“어제까지는 분명 날씨가 좋았는데 말이오. 왜 하필 오늘 오전부터 바람이 이리도 거세게 부는 건지…….”
“하늘도 아는 거죠. 케이트에게 황후는 당치도 않은 지위란 걸.”
이쯤이면 고개를 들고 어머니 말에 반박해야 할 시기이다. 하지만 긴장으로 몸이 굳었는지 입술은커녕 혀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잡은 양손에 힘을 꽉 주는 일이 전부였다.
“필프론츠 후작 저 인간은 아직 미혼남인 주제에 뭐가 저리 할 말이 많은 거예요? 후작의 결혼식은 누가 맡는다고 했죠?”
“나 아니면 반 공작이…….”
“됐으니 당신이 맡는다고 우겨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시간만 단상에서 떠들면 후작도 정신을 차릴…….”
어머니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아버지를 채근하던 그 시점이었다.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 이제 준비해 주십시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기다랗게 놓인 은색 카펫과 그 옆에 앉은 수백의 하객들, 그리고 떨어질 기세로 펄럭이는 국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네자르는 모든 것 한가운데 오롯이 서 있었다. 그를 인지하자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카펫 위로 걸음을 옮겼다.
얌전하게 가라앉아 있던 티아라가 깃처럼 요동쳤으나 단단히 틀어 올린 머리칼이 엉망으로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케이트.”
그렇게 네자르 앞에 도착해 양손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앞머리가 바람을 이기지 못해 뒤집혔지만, 왜인지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팔을 뻗은 아버지가 나를 품에 안으셨다.
“사랑스러운 내 아가, 네 인생에 평안이 깃들길.”
이어서 아버지와 떨어진 나를 어머니가 품에 안으셨다.
“케이트, 우리가 사랑한다는 걸 부디 잊지 말렴.”
눈꺼풀의 떨림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방심해도 눈물이 줄줄 흐를 낌새라 절대 힘을 풀고 굴복하지 않았다. 여기서 울게 되면 정말 추할 거야. 그에 더해 화장까지 지워지면 세상 사람들에게 내 추함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길거리 음악가들은 좋다고 내가 눈물을 질질 흘린 사연에 대해 노래를 만들며 떠들겠지. 악, 끔찍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절대 허용할 수 없었다.
“케이트,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네자르의 웃음 섞인 물음에 이를 악물며 답했다.
“울음 참느라 그런 거예요. 눈물이 떨어질 것 같으니 말 시키지 마세요.”
팔꿈치로 몰래 밀어내며 필프론츠 후작이 선 단상 위로 걸어갔다. 그러나 네자르는 더 바짝 내 옆으로 붙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미 에젤로트를 떠날 때 한 번 울지 않았어?”
“그,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네 마차를 몰던 마부한테.”
그 마부는 뭐 그리 입이 가벼워!
수치심에 눈물이 쏙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걸음이 거칠어졌다. 씩씩 숨을 삼키며 단상 앞에 서니 다소 한심하다는 표정을 한 필프론츠 후작이 내게 말했다.
“잡담은 이제 그만하시지요. 건국 이래 국혼에서 이리 마음 놓고 떠드시는 분들은 폐하와 영애밖에 없을 겁니다.”
하객석에서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국혼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거야? 힐끔 네자르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불만 없이 날 향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카발 제국은 17대에 국교를 파하였으므로 이후 국혼 절차는 전적으로 당대 황제와 장로회가 제안한 원칙을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그럼… 흠흠. 에젤로트 영애와 황제 폐하께서는 서로 마주 보십시오.”
기분이 묘했다. 고대하던 결혼식 당일, 결혼식 단상 앞에 섰음에도 크게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격했던 떨림도 네자르와 마주하니 놀라우리만치 차분해졌다.
“반지를 교환하십시오.”
화려하게 장식된 보석함 속의 반지가 내 약지에 끼워진다. 나 역시 내가 낀 것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반지를 네자르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서로 손을 잡고 몸을 가까이 하십시오.”
필프론츠의 말대로 그와 손을 잡고 몸을 가까이 했다.
수백 명 앞이라 그런가, 부끄러움에 자꾸 웃음이 나려 한다. 심지어 눈앞의 네자르는 종일 웃는 낯이라 나 역시 입꼬리가 계속 움찔움찔했다.
“서로를 더없이 따뜻하게 안아 주십시오.”
그냥 한꺼번에 다 시키면 안 되는 거야?
안긴 김에 네자르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숨겼다. 태풍이 일 듯 강한 바람과 그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 역시 여태 시끄러웠다.
“서로에게 사랑이 담긴 한마디를 해 주십시오.”
정말 별걸 다 시키네! 이러다 아예 여기서 첫날밤까지 치르라고 하지 그래! 응?
나는 숨겼던 얼굴을 쏙 빼내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폐하.”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내 등을 가득 담은 팔이 더 안쪽으로 굽는다.
“장담하는데 내가 더 사랑할걸.”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도록 입맞춤을 해 주십시오.”
이왕 시키는 대로 하는 김에, 어서 끝이 나라는 의미로 내가 먼저 네자르의 목을 잡아끌었다.
오오! 감탄과 웃음, 그리고 환호 속에서 그와 닿은 입술이 유독 따스하다. 분명 입을 맞추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에 흔들리기를 여러 번. 얼마 지나지 않아 필프론츠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절차가… 흠. 에젤로트 영애께서는 눈을 감아 주십시오.”
그 마지막 문장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절차, 전부 네자르가 바라는 결혼식이었구나!
네자르의 바람대로 눈을 감고 입맞춤을 이어 갔다. 슬슬 입술을 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내 허리를 온전히 감싸 안은 그의 존재감에 쉬이 몸을 밀어낼 수 없었다.
“이것으로 카발 제국의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황제 폐하와 카트리나 에젤로트 황후의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필프론츠 오드리네의 이름을 걸고 엄숙히 선포합니다.”
마지막 선언과 함께 강한 바람이 우리를 밀었고, 깜짝 놀란 네자르가 휘청하는 내 몸을 붙잡았다.
딸랑딸랑!
그 거대한 흐름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하객석 또한 훑고 지나쳤는지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종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케이트, 괜찮아? 발은 어때? 안 다쳤어?”
나는 깜짝 놀라 커다랗게 뜨인 검홍색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의 말은 틀렸다. 나와 네자르의 결혼식 날에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니, 좋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가 정말 나의 네자르인 것이다.
내 약혼자의 애인을 찾습니다 마침
외전1 제도의 겨울
북벌은 역대 카발 제국 황제들에게 숙원과 마찬가지로, 선황대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카발 제국 역사에 지대한 발자취로 남았다.
다만 이런 점은 어디까지나 제국 신민의 시점이고, 정벌당한 국가 입장에선 조국을 멸망시킨 극악무도한 계책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별관에 갇혀 살아 있는 황제의 전리품이 된 공녀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감히 짐작하건대 살아도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니지 않을까.
그랬기에 나는 그녀들을 어떤 방식으로 황성에서 내보내야 할지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11대 황제 같은 경우에는 전부 참수를 했습니다.”
“참수?”
아니, 그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대번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는 황법상 전리품이라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수십 년 전에 존재했던 노예보다도 못한 위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다못해 하녀로 쓰면 되는 거 아니야?”
“공녀는 제국 신민이 아니니까요. 제국에서는 전리품이라지만, 어떻게 보면 멸망한 망국의 유일한 후계자 아니겠습니까? 황성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으음. 맞는 말이네. 그럼 경의 말대로 황성의 하녀로 사용할 수도 없을 테고…….”
역시 툴드도 아카데미 졸업생이라 그런지 박식하다. 나는 종이 위에 적어 둔 「공녀 처리 예시 법안」 중 세 번째로 적혀 있던 문장에 엑스표를 했다. 그 위를 힐끔 훔쳐보던 툴드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황후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목록을 한 번만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목록? 아, 이거?”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며칠 전 네자르에게 하렘 처분과 관련된 모든 일을 위임받았다. 안 그래도 데보라의 극장 증축 건 이후, 그가 내게 처음으로 맡긴 일이라 열과 성의를 다해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잘 들어 봐. 우선… 제국 귀족과 혼인시키기. 이건 황법상 공녀가 오직 황제만의 소유품이라 불가능해. 네자르가 법을 바꾸면 된다고 했지만, 황제의 위엄을 깎는 일이라 내가 반대했어.”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툴드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마치 몇 년을 공들여 가르친 자신의 학생이 만학한 모습을 보는 듯, 자부심이 가득했다. 내 판단에 왜 자기가 뿌듯해한담.
“그다음은 황성의 노동력으로 쓰기, 황성 소유의 극단을 만들어 배우로 쓰기, 제국에서 내보내기, 작위를 내려 제국 신민으로 받아들이기, 생각나지 않으니까 계속 별관에 가둬 두기, 개밥으로 주기.”
“개, 개밥이요?”
커다래진 눈이 공포에 물든 채 나를 향한다.
“아, 물론 이건 농담이야.”
“정말 농담 맞으십니까……?”
그럼 진담이랴? 헛소리 말라며 쏘아보고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어때, 툴드. 좀 쓸 만한 방식이 있는 거 같아?”
내 물음에 그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시 답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머리를 굴려 봤자 좋은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에 사용하라고 아카데미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건데 말이죠.”
“책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난 그런 귀찮은 건…….”
아니, 아니지.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도 세피아 부인이라는 인맥이 존재하지 않는가. 역시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 것이 최고다. 툴드에게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어 낸 난 앞으로의 일정을 대강 정리했다.
황후가 감수해야 하는 가장 귀찮은 일과가 바로 이 일정 정리다. 귀족 여식이었을 때는 어머니의 허락만 받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었으나, 황후는 황제의 허락은 물론 방문할 영지의 지명과 숙식을 해결할 호텔, 일정을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밤.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침실에서조차 일에 치여 바쁜 네자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허벅지를 베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왜 일어났어?”
머리칼 사이로 파고드는 네자르의 부드러운 손끝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왜긴, 옆에 없으니까죠.”
“오전에는 내가 없어도 잘만 자는 주제에.”
“그럼 나보고 새벽 5시에 일어나라구요? 힘들어요. 절대, 절대로 불가능이야.”
“카발 제국 역사상 너처럼 게으른 황후는 또 없었을 거다.”
“나한테 제국을 주겠다면서요? 좋아, ‘앞으로 카발의 모든 황후는 반드시 게을러야 함’을 황법으로 지정해 주세요. 그래야 네자르의 타박을 덜 받을 것 같네.”
“그건 다시 생각해 주시지요, 폐하. 제가 케이트 폐하의 게으름은 이해해도 제 후손의 게으름은 이해하지 못하여서 말입니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예를 갖춘 네자르가 이어서 내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나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졸음이 살짝 쏟아지려는 눈으로 그의 턱과 기다란 속눈썹을 올려다봤다. 누구 남편인지는 몰라도 정말 헉 소리 나게 잘생겼단 말이야.
“네자르.”
“응.”
“공녀와 관련된 사항을 나한테 맡긴 이유가 뭐예요?”
“내게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한 건 너잖아.”
“빈말인 줄 알았어요.”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너에게 빈말을 한 적이 있었나?”
분명 없는데, 없더라도 그런 생각쯤 하게 되지 않겠는가. 팔뚝만 한 두께의 서적과 서류를 대조해 보던 네자르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소파로 몸을 기댔다.
“무리해서 해결할 필요는 없어. 귀찮으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딱히 그런 의도도 아니었고, 그런 의도였다 해도 지금의 네자르를 보면 말이 쏘옥 들어갔을 테다. 이렇게 바쁜데 뭘 또 맡기라는 건지.
“네자르는 몸도 하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전부 맡아서 해요?”
“다는 아니고… 이번에 네게 준 일이 조금 특별할 뿐이야. 중요 사안 외에는 전부 밑으로 떠넘기기 바쁘지.”
“그래도 돼요?”
“그럼. 이러려고 황제를 한 건데.”
그런 것치고는 그리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자신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뒤흔든 네자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짐이 하라면 해야지, 저들이 뭘 어쩔 거야? 나에게 대들기라도 하게?”
마치 오늘 하루 대들던 자들과 한바탕한 듯이.
“네자르도 참 성격이 나빠요. 툴드가 내게로 오고 나서 신수가 훤해진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건방진 놈이군. 네게 가자마자 대놓고 신수가 훤해지다니. 다시 내 옆으로 불러오든 해야지.”
말과 달리 관심 하나 없다는 티를 여실히 내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툴드를 믿는다는 의미이리라.
혼인 후 알게 된 네자르의 특징, 하나. 그는 능력 있는 자들에게 상당히 자비로운 편이다. 반대로 무능한 인물에게는 매정하다 못해 다소 못되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날 대할 때는 어찌 저리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으로.
“폐하는 공녀들의 얼굴 다 본 적 있어요? 네 명이나 된다던데.”
“당연히 있지.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최근이었어.”
그래도 아예 방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꽤 놀라웠다. 하긴, 네자르는 늘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으니 내가 걱정할 만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누가 더 예뻐요?”
아주 살짝 열려 있던 그의 입술이, 착각이 아니라면 아주 살짝 굳은 듯했다. 이것 봐라. 나는 눈을 얇게 떠 그의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폈다.
“네 명 중? 나는 세세하게 본 적이 없어서 모르나 들리는 말로는…….”
“그거 말고요.”
그게 아니면 뭐냐는 표정이기에 눕혔던 몸을 일으키고 대답했다.
“솔직하게요.”
“솔직하게? 흠. 상대적으로 조금 못난 편이기는 하지.”
눈이 번쩍 떠지는 말이었다. 저, 절대 기대해서가 아니야. 나는 이미 알고 있다구. 이건 분명 네자르가 내게 장난칠 때 흔히 나오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잘 알면서도 당하게 될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한두 번이 아닌 일상 자체가 그랬지만.
“고, 공녀들이요?”
“아니, 네가.”
“내가 뭘요?”
“네가 못난 편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말에 혹시나가 역시나로 되어 버린다. 아니야, 나는 이런 답이 나올 줄 진작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실망하거나 충격받을 일은 전혀 없다고.
지금이야 제 기능을 잃었다고 해도 무려 황제의 하렘이었다. 나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미녀가 한가득이라 하더라도 이상할 것 전혀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옆에서 자꾸 술술 말을 쏟아 내는 네자르의 입이 그렇게 얄밉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참고로 나는 미학에 꽤 일가견 있는 교수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어. 너만 괜찮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나 잘래. 갑자기 좀 피곤해졌어요. 안 하던 일을 해서 그런가?”
말을 가로막고 소파에서 비척비척 일어서자, 네자르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웃음 만발한 얼굴이 안 그래도 짜증이 이는 내 기분을 더 후벼 팠다.
“피곤하기는. 못생긴 눈이 이렇게 반짝반짝한데? 응?”
“잘못 보신 거예요. 이것 봐, 밑이 까맣게 죽은 거.”
“케이트, 못생긴 게 죄는 아니잖아. 그렇게 시무룩해 있을 필요 없어.”
“누가 못생겼어, 누가? 제국 방방곡곡을 뒤져도 나보다 예쁜 애는 찾기 힘든데!”
어깨와 팔뚝을 맞는 와중에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소리 내어 웃기 바쁘다. 감정을 담아 주먹질을 했으나 철근처럼 단단한 네자르의 몸에 통할 리 없었다. 쓸데없이 튼튼하고 난리야!
“흠. 우리 황후께서 자꾸 왜 이러실까. 못생겼다고 해서 화났어?”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지는 거다. 나는 양팔이 결박된 채 네자르의 무릎 위에 오른 상태에서 열심히 몸부림쳤다. 내 양팔과 허리를 꽈악 안은 그가 등에 턱을 올린 채 웅얼웅얼 말을 이었다.
“흠……. 좋아. 화가 나셨다면 풀어 드려야지. 미학에 일가견이 있는 짐,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황제는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발이 별관의 공녀들보다 훨씬 어여쁨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노라.”
엄숙한 목소리로 내 화를 한층 더 돋우고, 네자르가 나를 놓았다.
“됐지?”
“되기는 무슨. 이거 놔, 자러 갈 거니까!”
“윽.”
쇄골을 맞았으니 이번에는 좀 아플 거다. 나는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몸을 내던졌다. 베개에 코를 박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풀려는데, 따뜻한 네자르의 손끝이 툭툭 뺨을 건드렸다.
“케이트, 너무 침울해 있지 마. 그대가 대륙 제일의 못난이여도 짐에게는 오직 그대뿐이라오.”
“폐하가 못생겼으면 난 다른 남자한테 갔었을 거예요.”
좀 가라며 있는 힘을 다해 손을 휘두르자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뒷걸음쳤다.
“허. 잘난 얼굴을 주신 어머니께 평생 감읍하며 살아야겠군.”
알면 잘 좀 하란 말이야!
***
카발 제국의 국무 회의는 한 달에 총 여덟 번 이뤄지며, 그중 국방 회의는 매달 첫째 주와 셋째 주에 열린다.
첫째 주에 열리는 국방 회의는 국경의 영주 및 황성근위대의 단장급이 모두 참여하게 되는데, 셋째 주의 국방 회의는 황성근위대 단장과 제도 근방 영지의 영주들이 참여하여 제도와 황성의 수성을 논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은 셋째 주 국방 회의가 열린 날.
록허드는 회의가 완만하게 끝났음에도 여태 나갈 생각을 않는 자신의 주군이자 카발의 지배자, 네자르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안 나가셔도 됩니까? 평소에는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셨으면서.”
황제가 어서 회의장을 뜨길 기다리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자리를 지킨다. 왜냐하면 셋째 주 국무 회의가 열리는 오늘 같은 날은 회의 직후 황제와 황후가 함께 사냥을 나가기 때문이다.
함께 북벌 전쟁에 참전했던 기사들은 모두 공감할 사안으로, 네자르 황제는 보기보다 상당히 호전적이고 거칠며 잔인한 성정이었다.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네자르는 황실 사냥 대회에서 케이트의 사냥 실력을 보고 매우 들떠 있었다. 아마 함께 취미 생활을 공유할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했겠지. 정작 당일은 다투느라 시도도 못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신이 나 케이트를 만나러 가야 할 네자르가 여기서 시간을 죽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뻔했다.
“또 싸우셨습니까? 두 분 다 징하십니다, 정말.”
턱을 괸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황제가 그에게로 눈동자를 굴렸다.
“록허드.”
“왜요.”
“케이트는 뭘 먹고 자랐기에 그렇게 귀여운 걸까.”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좀 짜증이 난다는 점 하나는 분명하다.
“쓸데없이 귀여우니까 자꾸 괴롭히고 싶어져. 짐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지.”
“저야말로 비위라는 게 있으니 자제 좀 해 주시지요.”
“고작 4년 일찍 태어난 록허드는 이렇게 징그럽고 귀염성 없는데…….”
“그 록허드 덕분에 두 분의 인연이 생겼다는 점 좀 고려해 주시죠.”
아무래도 황제의 눈에 쓰인 건 콩깍지가 아니라 철판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뻔뻔한 소릴 회의장에서 대놓고 뱉을 수 없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들어왔고,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본래는 단장들과 영주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조촐하게 먹곤 했는데, 오늘은 황제도 함께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식단이 화려했다.
“케이트는?”
“황후께서는 일찍이 식사를 마치시고 외출을 나가셨습니다.”
“외출이라… 아카데미? 데보라?”
“데보라로 가셨습니다.”
어째 시종을 뒤따라 들어와 황후의 일정을 보고하는 론의 표정이 딱딱하다.
“분위기로 봐선 하룻밤 지내고 오실 기세였습니다.”
“짐에게 말도 없이?”
“폐하 같으시면 말하고 싶겠습니까? 허구한 날 애처럼 괴롭히는데!”
저거였군. 저거 때문에 표정이 썩어 있었던 거야. 록허드가 혀를 쯧쯧 차는 동안 론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나이를 대체 어디로 드신 겁니까? 열 살 난 꼬맹이도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그렇게 괴롭히진 않을 겁니다.”
“비약이 심하군. 론 자네는 일과 결혼한 자라 잘 모르겠지만, 남자란 좋아하는 여인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계속 건드리게 되는 법이야. 안 그런가, 필프론츠 후작?”
졸지에 이름이 불린 후작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던 초췌한 낯을 들었다. 그는 눈 밑이 까맣게 그을린 상태로 얌전히 대답했다.
“전 안 그럽니다.”
그래도 황제의 부름에 잠이 깨기라도 한 듯, 한참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던 후작이 론과 말다툼하기 바쁜 황제에게 물었다.
“흐음. 저는 오히려 두 분의 관계가 참 신기하게 느껴지는군요. 감히 이런 질문을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관계는 다시 어떤 식으로 회복하십니까?”
“회복이랄 것까지야 있나. 황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화를 풀어.”
“그게 무슨 자연스럽게입니까? 황후께서 화를 푸실 때까지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찾아가 귀찮게 하시잖습니까.”
론의 뾰족한 목소리에도 황제의 뻔뻔한 표정은 변할 줄 모른다.
“그랬나? 내 기억에는 없군.”
뭐가 그리 미심쩍은지, 샐러드를 집으며 후작이 눈썹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황후께서 폐하의 그런 행동을 별말 없이 받아 주신다고요?”
“별말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니? 바로 옆자리에 앉은 록허드가 아몬드를 골라 입에 넣으며 물었다.
“후작님이야말로 대체 카론 영애와 어떤 만남을 가지시기에…….”
“개.”
하나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해답이 들려왔다. 개! 단호하다 못해 옅은 조롱이 깃든 단어였다. 이 흔들림 없고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은… 한 명밖에 없다. 판시온 엔테라 공작이었다.
“후작은 카론 앞에서 말 잘 듣는 개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 두 분을 이해하기 힘드시겠지요.”
개라니, 그 필프론츠 오드리네 후작이? 한때 제도의 소문난 선수였던 필프론츠 후작이? 충격적인 발언을 한 주제에, 평온한 얼굴로 연어를 썰어 먹는 판시온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후작이 이를 갈며 판시온을 노려봤다.
“개……. 아무리 그래도 개라니? 표현이 좀 거친 거 아닙니까, 공작.”
“개가 아니면 뭡니까? 개 새끼라고 해 드릴까요?”
“개 새끼도 좀……. 큼.”
후작은 엔테라 출신에 약한 걸까. 그 낯짝 두껍고 자기의 이득은 절대 포기하지 않던 남자가 이리도 구차해지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폐하,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후작이 개 취급을 받든 말든 론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스튜를 떠 마시기에 바쁜 황제 옆에서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개는 달려들기라도 하지. 폐하께서는 달려들지도 못하시지 않습니까!”
“큼, 큼.”
식사하던 후작이 다시 헛기침을 뱉었다.
“두 분께서 다투시는 게 일상다반사여도 좋다, 이 말입니다. 서로 냉랭한 것보다야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한데 이왕 괴롭히실 거, 제발 침실에서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쳤군.”
황제의 말이 옳다. 그의 보좌관인 론이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후계자에 대한 고민으로 결국 미쳐 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귀하신 황제 폐하의 사생활을 회의장에서 낱낱이 고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 여동생의 침대 사정까지 듣게 될 줄이야. 귀엽다니 뭐니 끔찍한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애정 전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테다.
곰곰이 고민하던 필프론츠 후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신하가 아닌 폐하의 외가 혈연으로서 여쭙겠습니다.”
“짐이 말한다. 그냥 여쭙지 마.”
“첫날밤은 치르셨겠지요?”
대답이 없다. 록허드는 돌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럴 수가 있나? 첫날밤을 치르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
“이건… 안 됩니다!”
조용히 식사하다 말고, 반 공작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에 신경질적인 얼굴이 된 황제가 되물었다.
“뭐가?”
“오직 적자만이 황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카발 제국에서, 후계 준비를 소홀히 하시다니요!”
“소홀히 한 적 없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진정하십시오, 공작. 폐하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니요.”
보다 못한 판시온이 제재에 나섰으나, 이미 한 차례 흥분한 멧돼지가 쉬이 성정을 가라앉힐 리 없었다. 후계자 문제와는 별개로 록허드 역시 황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두고, 넉 달 가까이 현자처럼 살아왔다고? 그것도 무려 대륙을 호령하는 카발 제국의 지고하신 황제 페하께서!
“설마 침실도 따로 사용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안 그래.”
“그렇다면 폐하, 설마… 동정이십니까?”
순간, 회의장이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향한다. 록허드는 그의 미동 없는 입매에서 엄청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정!”
국혼이 벌써 5개월 전의 일이었는데, 아직까지 황제가 동정이었던 것이다!
“폐하께서 동정이시라니!”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동정……!”
“닥쳐. 지금부터 입 여는 놈은 남은 평생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해 주마.”
살벌한 협박에 발을 동동 구르던 자들이 차례대로 입을 닫는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혼란과 충격에 빠진 시선들까지 막지는 못했다. 록허드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자신의 오랜 친우가 지닌 비범한 인내심에 말없이 찬사를 보냈다.
***
“이미 말해 두었겠지?”
“네. 아마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새벽 사이에 눈이 펑펑 내렸는지, 정원수의 푸른 잎 위로 쌓인 눈이 새하얗다.
나는 별관 앞에 걸음을 멈춰 기사들 뒤편에 오도카니 서 있는 여인들을 응시했다. 워낙 각양각색의 분위기였기에 구분하기도 쉬웠다. 왼쪽부터 카마우드라 왕국의 테레시아 왕녀, 에델베크 왕국의 오즈 왕녀, 그 옆으로는 차례대로 네클렌타의 아스테 왕녀, 헤넨의 피오라 왕녀였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음에도 나름 잘 정돈된 분위기다.
세피아 부인은 내가 공녀들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길 추천했다. 당사자의 요구에 맞춰 처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조언이었다.
마침 시간도 비어 있던 터라 흔쾌히 세피아 부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공녀들은 내 방문에 불편한 티를 여실히 드러냈지만, 거기까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관리가 꽤 잘되어 있네요.”
“예. 네자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갈 곳 없어진 불쌍한 공녀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기에…….”
아스테 왕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잘 정돈된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정말 저희 모두가 여기서 나가는 건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공녀들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는 장미향이 가득한 찻잔을 입 가까이 올리며 말했다.
“이름만 남아 있던 하렘도 이미 폐관이 정해졌고, 이제 당신들의 처우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어요.”
“제국은 패전국의 왕녀들까지 신경 쓸 수 있을 정도로 재정이 남아도나 보네요.”
생각지 못한 공격적인 어투였다. 나는 찻잔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날 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구불구불한 적발이 허리춤에서 맴도는 고양이상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아스테 왕녀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여인의 팔을 잡았다.
“테레시아 왕녀.”
“바라는 걸 말씀드리면, 들어주시나요?”
전생의 가치관에 따르면 제국은 엄연히 가해자며 이곳의 네 왕녀는 피해자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런 사상은 통하지 않는다. 대륙에서 전쟁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다만 승자와 패자로 구분될 뿐. 그러므로 목숨 줄을 쥔 나에게 테레시아 왕녀가 순순하지 못한 반응을 표하는 건 현명하다 보기 힘들었다.
카마우드라의 테레시아, 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었지?
“고려는 할 수 있으나 장담은 못 해요.”
테레시아 왕녀는 전리품이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놀랍도록 당당한 자세로 내게 말했다.
“평생을 바치고 싶은 분이 계세요. 그분을 뵙지 못한 몇 달의 시간을 눈물과 함께 보냈습니다.”
평생을 바치고 싶은 분?
나는 그녀의 요구에 어이가 없다기보다 궁금증이 먼저 일었다. 대체 얼마나 절절한 사랑이기에 북벌 전쟁으로부터 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걸까.
“판시온 엔테라 경……. 아니, 지금은 공작이 되셨으려나요? 공작 부인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분의 곁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공작 부인은 바라지도 않는다니, 당연한 소릴 마치 선심 쓰듯 뱉는다. 하지만 그 덕에 나는 꽤 오랜 시간 기억에 묵혀 두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카마우드라의 테레시아. 판시온에게 구애의 장미를 선물했다는 그 공녀가 바로 이 공녀였구나.
“공교롭게도 판시온 공작은 이미 약혼이 예정되어 있어요.”
기억을 떠올리니 더 황당했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고민하는 것도 번거로울 만큼.
“첩도 좋습니다.”
“공작의 성격에 따로 첩을 둘 리 없어요.”
“아니요, 그분은 절 받아 주실 거예요.”
글쎄, 아니라니까?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거야? 사람 대 사람으로 예의를 차리려 해도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건너편에 앉은 테레시아 왕녀의 얼굴이 꿈꾸듯 몽롱해졌다.
“제도로 오는 긴 여정에서, 우리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 오고 갔어요. 확신해요. 그분도 절 잊지 못하고 계실 거예요.”
그니까 내 말은 뭘 믿고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거지!
벽에 대고 대화를 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아스테 왕녀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내게 사죄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테레시아 왕녀가 워낙, 저희들 사이에서도 독선적이라…….”
테레시아 왕녀를 제외한 셋은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 오즈 왕녀가 수차례 입을 열려 했으나 바로 옆에 앉은 피오라 왕녀에게 모두 저지를 당했다.
한마디로 둘은 원하는 바가 있고 나머지 둘은 내 눈치를 본다는 말이지? 그리고 전자 중 한 명은 엔테라 공작의 첩… 정부 자리를 원하는 거고.
“잊지 못해? 판시온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군. 아주 망상에 제대로 빠진 여자야.”
내 말을 듣자마자 네자르는 대놓고 들으라는 양 크게 코웃음을 쳤다. 한동안 창밖으로 쏟아지는 옅은 눈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가 다소 불만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귀성하자마자 이제는 엔테라로 가겠다고?”
“왕녀가 간절하게 부탁하기도 했고……. 마침 카론의 결혼식 날짜와도 겹치니까요.”
황가를 제외한 카발 제국 대부분의 귀족은 신부 측 가문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나는 카론의 가장 가까운 친우로서 그녀가 오드리네로 떠나기 전 나흘의 시간을 함께하기로 했다. 테레시아 왕녀의 건방진 표정과 어투가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어찌 되었든 뱉은 말은 지켜야 하니까.
“겹친다니? 카론 엔테라와 필프론츠의 결혼은 무려 나흘이나 남았어. 설마 나흘 동안 엔테라에서 지내겠단 소리는 아니겠지?”
“맞는데요.”
“절대 안 돼. 결사반대야. 엔테라에서 나흘 동안 지내겠다니, 꿈도 꾸지 마.”
얼굴만 보면 내가 각방 선언이라도 한 줄 알겠네. 낑낑 우는 소리만 안 냈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된 채로 네자르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읽고 있던 황법 서적을 덮은 후 나란히 앉은 그의 허벅지로 손을 올렸다.
“그럼 네자르도 같이 가요.”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제국 신민의 앞날을 책임지기 위해 밤낮을 개처럼 일한다고.”
“가서 하면 되죠.”
“황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면 효율이 떨어져.”
“좀 떨어지면 어때요? 고작 나흘이면 되는데.”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네자르는 입매를 단단히 했다. 이윽고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그래, 케이트.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차피 황성이나 엔테라나 다를 바 없으면서. 어디든 내가 먼저 잠들고, 한참 일을 하다 지친 네자르가 뒤늦게 옆자리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늘 그랬듯이!
괜히 또 우울한 기분이 들었으나 부러 그 기색을 숨겼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카발 제국 황제에게 우선순위는 제국일 수밖에 없다는 걸, 나도 이해하고 있었다.
***
“곧 도착하겠군.”
네자르의 말에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벨벳 위로 고풍스레 장식된 황금색 사자가 펄럭인다. 그 옆에 거세게 정진하는 제국의 국기가 보였다. 당당한 걸음으로 성문 안에 들어서는 기사단. 그리고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나란히 선 구경꾼들.
새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흩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황제의 방문을 알아챈 문지기가 허겁지겁 마차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후 마차의 문이 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엔테라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어째 그대 표정은 그리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네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잘못 보신 게 분명합니다.”
네자르의 대관식이 끝난 직후, 그의 측근 다수가 직위를 하사받았다. 판시온 엔테라의 공작 위 계승 역시 당시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 중 하나였다.
나야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으나, 예전부터 엔테라의 장남인 터너 엔테라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오랫동안 다퉈 왔다고 했다. 결국 아우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대단한 엔테라 가문까지 물려받았으니 여러 말이 나온 모양이었다. 일면에는 터너 엔테라의 죽음이 의도된 죽음이라 했으나,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헛소문으로 여겨질 뿐이다.
“황후 폐하께서도 편히 쉬다 가십시오. 카론이 오늘을 많이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황후라는 명칭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판시온에게 들으려니 어색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선 카론을 쳐다봤다. 그녀는 늘 그래 왔듯 작약처럼 풍성한 웃음으로 날 맞이했다. 다만 옆에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함께였으니…….
“후작은 왜 여기 있나요?”
“제가 제 부인의 저택에 있는 게 뭐 잘못됐습니까?”
까탈스러운 대답에 두 눈을 부릅뜬 카론이 팔뚝으로 남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에 윽 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부여잡은 남자, 필프론츠 후작이 카론을 쳐다본다.
“황후 폐하께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필프론츠.”
“부인이야말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친우라 한들, 어찌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주지를…….”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부인이라 부르지 마세요, 필프론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앞에서 언성을 높이지도 마시고요.”
고작 카론의 두 마디에 후작이 금방 꼬리를 말았다.
“아하, 이래서 개라 표현하신 거군요! 역시 촌철살인다우십니다.”
“개?”
록허드의 감탄사에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판시온과 네자르가 날 이끌고 성내에 들어섰다. 뭐야? 뭔데? 뭐가 그리 급한지,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침실까지 안내받아야 했다.
“데이지, 폐하는 그새 또 어디로 가셨어?”
“록허드 경과 함께 엔테라 공작 각하와 담소를 나누시는 것 같았어요.”
지겹게 보는 얼굴이면서 무슨 할 말이 또 있다고. 남자나 여자나 모이면 모일수록 말이 많아지는 건 똑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 터라,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카론을 따로 불러 테레시아 왕녀의 이야기를 논의할 수 있었다.
“어머나, 왕녀가 그런 말을? 으음, 오라버니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신데……. 제게 딱히 아무런 말도 없으셨고요.”
“나와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그래도 둘 사이에 정말 뭔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
크흠. 믿기 힘들겠지만, 카론. 나도 한때 네 오라버니와……. 그럴싸한 예시를 내밀려다 얌전히 입을 닫았다. 지금 와서 이런 걸 말해 봤자 뭐 하겠어.
어깨를 으쓱하며 화병에 장식된 꽃잎의 향을 맡았다. 내가 직접 황성 온실에서 가꿔 카론에게 선물한 꽃이었다.
“하긴,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는 따로 만나 넌지시 묻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약혼 문제도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둘은 어때?”
카론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잉고르 영애가 오라버니를… 뭐랄까, 아주… 잘 따른다고 해야 할까. 좋아하는 건 확실해요. 오라버니도 약혼녀인 만큼 최선을 다하시는 눈치이시고. 저도 곧 사흘 후면 엔테라를 떠날 테니, 곧 결혼식 날짜가 잡힐 거예요.”
그녀의 고운 얼굴이 빼빼 마른 겨울의 나뭇가지로 수북한 후원을 향한다.
“모든 게 참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마치 우리가 만났던 그 시절이 신기루처럼 느껴질 만큼…….”
본래라면 낮 즈음 엔테라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눈길이 여태 녹지 않은 만큼 천천히 이동한 탓에 저녁이 다 되어서 도착했다.
아주 잠깐의 여유가 끝나자마자 만찬을 위해 엔테라에 방문한 모두가 식탁 앞으로 모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익숙한 얼굴들뿐이다. 엔테라의 판시온과 카론, 특별 호위 임무를 맡은 록허드, 카론의 거머리 필프론츠, 그리고 나와 네자르까지.
“정말… 새로운 것 하나 없군.”
포도주로 가볍게 목을 축여 식사의 시작을 알린 네자르가 무감각한 어투로 한마디 했다.
“황성에서 매일 보는 얼굴들이 그대로 엔테라에 옮겨 왔어. 카론 영애를 제외하고는 전부 똑같은 얼굴이야. 혹시 내가 아직도 황성에 있는 건가?”
“그런 말 하실 거면 왜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부인과 함께 있을 시간도 별로 없는… 윽.”
말을 하다 말고 필프론츠 후작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카론에게 발을 밟힌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네자르가 심드렁한 얼굴로 혀를 찼다.
“쯧. 황제가 미리 와서 축하를 해 주면 가문 대대로 영광이라 여기며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후작 그대는 엔테라 공작의 반이라도 닮아 봐. 사람이 늙으면 늙을수록 체면을 차릴 줄 몰라.”
“제 체면은 유년기의 폐하께서 이미 다 까 잡숴 남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건 돈과 명예와 얼굴과 부인이 전부입니다만.”
“나이에 맞지 않게 징그러운 말을 아주 서슴없이 하는군.”
“폐하만 하겠습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유치한 건 네자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다툰담.
“후작, 폐하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분위기를 환기하려 짧은 물음을 건네자, 후작이 홀짝이던 와인잔을 내려놨다.
“어린 시절 말씀이십니까?”
살살 턱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그리운 과거를 추억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곰곰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폐하의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이라. 할 말이 참 많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헷갈리는군요.”
“그럼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줘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한 사이 아닌가요?”
샹들리에 때문일까. 말이 없어진 후작의 얼굴이 조금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스치는 말로 술에 약하다는 소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 까놓고 말해도 됩니까?”
그 물음에 힐끔, 네자르를 훔쳐봤다. 네자르의 표정은 ‘저거 또 저러네’에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마음 놓고 고개를 주억일 수 있었다.
“저는 제가 요절할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당시의 누님… 그러니까, 폐태후를 거스르는 행위는 자살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실제로 짐 싸서 도망칠까 고민도 몇 번 했었습니다. 폐하께서 절 협박하지만 않으셨다면 말이죠.”
“협박이요?”
“호오, 역시 폐하는 될성부른 떡잎이셨군요.”
토마토를 씹으며 록허드가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었다.
“음. 이건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고……. 예전의 폐하는 지금과 상당히 다르셨습니다. 더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에 속은 시꺼멓기까지……. 귀여운 맛 같은 건 하나도 없었죠.”
지금과 정반대의 네자르라니,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지금의 그도 충분히 제멋대로이긴 하다.
“저는 지금도 종종 꿈을 꾸나 싶습니다. 이미 죽어서 이루지 못한 꿈 속을 유영하고 있는 건가, 싶지요. 폐하께서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아니.”
“하하.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습니다. 폐하 옆에서 보낸 삶이 벌써 20년인데, 이제 눈 감고도 폐하의 표정이 상상될 정돕니다.”
“끔찍하군. 후작은 당분간 내 옆으로 올 생각일랑 마. 내외할 필요가 있겠어.”
오늘의 필프론츠 후작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늘 어물쩍 넘어가고, 능구렁이 같던 모습과 달리 술기운이 오른 채 제 속 이야기를 술술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심드렁한 얼굴의 네자르와 흐리멍덩한 얼굴의 후작을 번갈아 쳐다보며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네자르와 가장 가까운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인연을 빌미로 추월당한 이 느낌. 이 찝찝하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을 뭐라 하지? 설마… 이게 바로 질투라는 건가! 지금 나, 필프론츠 후작에게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폐하께서는 기껏 황위에 오르셔서는, 후계를 이어 카발 제국을 존속…….”
“허, 그만 좀 하라니까 그러네. 나와 황후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쪽 일이나 신경 쓰래도.”
“두 분의 일이 곧 제국의 일인데,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와 부인은 이미 서로 끝을 본 사이로서 후계의 일은… 윽!”
이번에는 내가 봐도 좀 셌다. 당황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카론이 온 힘을 다해 팔뚝으로 후작의 명치를 후려쳤으니.
“케이트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얼마나 당황했으면 날 케이트라고 부를 정도였다.
“쿨럭, 쿨럭! 하, 하여간 두 분은 반드시 후계자를, 제 조카를 뵙게 해 주셔야 합니다!”
여기서 갑자기 왜 조카가 나오는 건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네자르를 쳐다봤으나 그는 끝끝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식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네자르와 후작이 다투는 주제에 대해서는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 하루빨리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합방. 다른 말로는 첫날밤.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뒹굴었다. 역시 후작도 알고 있었던 거야. 우리의 관계가 아직 때 없이 순수하단 사실을!
“이런, 하도 미뤘더니 벌써 한 달이나 지나 버린 건가. 이건 내일 바로 처리해야겠군.”
네자르는 정말 엔테라에 와서까지 서류를 붙들며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 말없이 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실내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도 내게 있어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결혼한 이래 우리의 밤은 늘 이래 왔으니까.
“네자르, 여기까지 와서 안 피곤해요? 좀 쉬는 게 어때요. 이동하느라 지쳤을 텐데.”
“지치기는. 왜, 심심해? 내일 놀아 줄 테니 오늘은 일찍 자. 나도 이것만 정리하고 누울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레 껴안아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푸근한 거위 털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어 준 뒤에야 네자르는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상냥한데 불만족스러워. 불만족스러운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일로 바쁘다는데 어떻게 나랑 어울려 달라고 투정을 부리겠는가?
“네자르, 너무해.”
“……음?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 잘게요.”
그에게서 등을 돌려 눕자, 멈췄던 만년필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렇듯 네자르는 단 한 번도 나와 함께 바로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늘 마무리 못 한 일을 하거나, 미리 업무를 봐 내가 깊은 잠에 들고 나서야 옆자리에 누웠다. 신혼부부의 두근두근한 밤을 보낼 낌새 하나도 없이!
세상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단 한 번도 없을 수 있는 거지? 이러니까 후계자는커녕 그 근처도 못 가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되면 내가 네자르와 파혼하려 했던 이유와 다를 바 없잖아!
아직 결혼식도 치르지 않은 카론과 필프론츠 후작도 불타는 밤을 보낸 눈치였다.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개인사였으나 확실했다. 남자는 보통 사랑하는 여자와 손잡는 것으로 부족하다던데, 네자르는 아니기라도 한 걸까.
설마… 불구라든가. 에헤이, 사지 멀쩡한 네자르가 불구라니? 이건 너무 멀리 간 추측이야. 차라리 잠자리를 즐기는 정부가 있다는 게 더 사실적일 테다. 이를테면 하렘의 왕녀들과 말이지.
“……아닐 거야.”
절대 아닐 거다. 내가 아는 네자르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와 아무런 일도 없을 수가 있지? 정말 뭔가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하다 새벽이 훌쩍 지나갔다.
***
짹짹. 땅이 얼어붙은 겨울의 아침에도 새는 운다. 멍하니 상체를 일으키고 옆자리에 미동도 없이 잠든 네자르를 내려다봤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긴장이 다 풀린 채 잠들어 있을 정도다. 나는 네자르의 온기를 더 느끼고 싶은 마음에 그의 팔 위로 머리를 베고 눈을 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살짝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데이지를 불러 준비를 마치는 와중에도 네자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실을 나서서 응접실로 내려갔다. 당장 모레가 카론의 결혼식이 예정된 탓인지 이른 새벽부터 저택이 시끌시끌했다.
“판시온 공작.”
“아, 황후 폐하. 잠자리는 안 불편하셨습니까?”
내가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판시온과 록허드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좋았어요.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자리 좀 뜨라며 열심히 눈치를 줘도, 록허드는 의자에 말뚝이라도 박은 양 널브러져 움직이질 않는다. 음. 그래도 록허드가 입이 가볍지는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카마우드라 왕국의 테레시아 왕녀를 기억하시나요?”
“물론 기억합니다.”
“기억하다 뿐입니까, 이름만 들어도 아주 넌더리가 나는데.”
판시온에게 물었는데 반응은 엄한 곳에서 온다.
“이번에 하렘을 폐쇄하기로 했어요. 한데 테레시아 왕녀의 공작을 향한 마음이 참 애달프더군요.”
“그 정도면 애달픈 게 아니라 범죄입니다, 범죄. 단장이 신사여서 망정이지…….”
“록허드 너, 공작의 대변인으로 취직했어? 뭐 그리 말이 많아?”
아직도 판시온을 단장이라고 부르는 건가. 투덜투덜 입 열기 바쁜 록허드를 향해 빽 소리치자 나란히 앉은 판시온이 작게 웃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제가 왕녀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제 약혼자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불안하군요.”
“폐? 그 정도예요?”
“전쟁터 한복판에서 자살하겠다고 발광하면서까지 단장을 불러내던 여자입니다. 만만해서 들러붙는 건지 정말 좋아서 반쯤 미쳐 버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당사자가 록허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없는 소리는 아닌 듯싶었다.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로 기겁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거부 의사를 전달했을 때 테레시아 왕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기 시작한다.
“한데 우리 황후께서 전리품 복지에 꽤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몸을 일으킨 록허드가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부지깽이를 던져 넣었다.
“설마 그런 시시껄렁한 요구까지 친히 전달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배려하지 마십시오.”
“딱히 그런 건 아니야. 해 줄 수 있는 부분을 해 줄 뿐.”
“폐하께서는 그리 생각하십니까? 과연 공녀들도 그리 생각할지 의문이군요.”
짧은 물음과 함께 판시온이 커피잔을 입으로 끌어왔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의 눈치를 살피다 접시 위의 산딸기를 집어 먹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록허드가 손을 탁탁 털며 남은 산딸기를 싹 쓸어 간다. 그는 입 안에 가득한 과일을 경박하게 씹으며 말했다.
“전문 용어로 호구 잡혔다고 표현하는데……. 상대는 패전국의 왕녀들입니다. 북벌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국경에서 수십 번 소규모 전투를 일으켰고, 아군 역시 포로로 잡혀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가 목이 잘렸지요. 애초에 인접한 국가들끼리는 관계가 원만할 수 없습니다. 황후께서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푸는 건 인의적인 측면에서 더없이 자비로운 행동이나, 전사한 동료들에게도 그러할까요?”
이들은 내가 왕녀들을 위해 몸소 나서는 행위를 비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자르가 내게 이 일을 맡겼는걸, 이라 반박하기에는 너무 변명 같지 않은가. 그가 내게 일을 위임했어도 직접 발로 뛰란 소리는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그 어떤 행동을 하든 묵인하고 위해 줄 뿐.
“목숨을 보장해 준 상태에서 먹고살 길을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 황후께서 할 일은 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괜한 책임감 같은 건 느끼지 마세요. 황후께서는 폐하도 한 수 물러 주시는 카발 제국 최고 권력자 아니십니까. 좀 더 권력을 휘두르시는 게 어떨까요.”
그날 오전. 생각을 정리하고 곧장 사람을 시켜 황성에 서신을 보냈다. 발신자는 하렘에 거주하는 모든 왕녀. 하렘 폐쇄 이후 원하는 바를 실현 가능한 선에서 요구하라 명했고, 테레시아 왕녀에게는 판시온 엔테라 공작이 청을 거절했단 소식을 전했다.
답장은 겨울 해가 산등성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도착했다.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얼마나 구구절절하게 적었는지 서신만 10장을 훌쩍 넘었다.
나는 야외 결혼식 준비로 바쁜 후원 옆에서, 소복한 눈 위에 주저앉아 서신을 차례로 읽어 내렸다. 흰 눈 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더니, 기어코 달성하고 만 카론의 실행력도 대단했다.
카드 게임에서 진 벌칙으로 장갑 없이 눈사람을 만들던 네자르가 넌지시 말했다.
“짐도 궁금한데 소리 내서 읽어 보지그래?”
“으음. 대충 보니까 네자르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내 심기는 맨손으로 눈을 만지던 시점부터 충분히 피곤해진 상태니까 마음 놓고 말해.”
하여간 황제란 지위에 걸맞지 않게 속 하나는 특출하게 좁다. 옆으로 다가가자 네자르가 새빨갛게 변해 버린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어휴, 차가워라.
“일단… 테레시아 왕녀는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며 직접 엔테라를 방문하고 싶다 적어 놨네요.”
“건방지군.”
“오즈 왕녀는 향수병이 낫질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대요. 제국에 평생토록 충성할 테니 에델베크 왕국이었던 땅을 다스릴 지위를 달라고 적혀 있어요.”
“미쳤군.”
얼어 버린 손만큼이나 네자르의 목소리 역시 딱딱하고 차가웠다.
“아스테 왕녀는 황성의 시녀로 일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면 제 의사를 따르겠대요. 피오라 왕녀도… 비슷한 의사고.”
이제 보니 앞의 두 명이 작성한 서신만 10장이잖아? 나머지 둘은 합쳐서 겨우 두 장도 될까 말까다. 말하는 내내 내 얼굴 위로 손등과 손바닥을 비비던 네자르가 팔을 거두었다.
“의외네요. 저는 사실 네 명 다 기가 찬 요구를 할 줄 알았거든요.”
“그들 입장에선 결국 두뇌 싸움인 거지. 네 제안을 마지막 기회라 받아들인 자도 있을 테고, 신중하게 대처한 자도 있을 테고. 당장 왕녀들이 내민 대안만 봐도 극과 극으로 나뉘니까 말이야. 귀찮으면 그냥 죽여 줄까?”
마치 양철통 속의 쿠키를 집고는 내게 먹을 거냐 말 거냐 묻는 말투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내 의사를 따르겠단 물음. 나는 네자르의 무덤덤하고 초연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아니요.”
“동정심 때문인가? 원한다면 방금 한 질문은 취소하고 몰래 처리할 수도 있어.”
“둘이 대체 뭐가 달라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타박에 어깨를 으쓱이며 네자르가 내 등 위로 눕듯이 기댔다.
“오랜만에 어린 부인과 놀아 주었더니 짐이 좀 힘들구나. 이제 실내로 들어가서 불을 쬐고 따뜻한 우유나 마시자꾸나.”
“누가 들으면 우리가 열 살은 차이 나는 줄 알겠어요.”
“몸은 몰라도 정신은 그 정도 차이 나는 것 같아.”
나는 쏟아지는 네자르의 무게를 버텨 내며 성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흠. 어쩐담. 툴드가 했던 말이, 그리고 록허드와 판시온이 했던 조언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인다. 호의를 베푼 후 권력을 휘두른다라…….
“폐하.”
“응.”
“저 내일 오전 즈음에 잠깐 황성에 갔다 올게요.”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킨 네자르가 팔을 구부려 내 어깨를 품에 안았다. 걸을 때는 그만 좀 들이대라니까, 정말.
“천천히 하지? 의욕이 높은 건 이해한다만,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고.”
“바로 대답을 들려주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 같아서요. 늦게 도착할지도 모르니 폐하는 미리 주무시고 계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한숨이 내 어깨에 닿았다.
“신혼의 행복은 채 꺼지지도 않았는데, 황후께서는 바깥나들이에 바쁘시니. 이거 서러워서 황제 노릇 하겠나.”
평소라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며 달래 줬을 텐데, 오늘은 왠지 그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
뭐? 지금 누구 앞에서 서럽다고?
“참 나. 어차피 같이 자 봤자 침대 나눠 쓰는 게 전부면서.”
어깨를 누르던 턱이 사라졌다.
“뭐?”
“내 말 틀렸어? 신혼은 무슨, 옆자리 채워 줄 사람이 필요한 거면 록허드라도 불러와 눕히든가. 그러면 안 서러워서 황제 노릇은 잘하겠네.”
찰싹 달라붙은 그를 떠밀어 내고 있는 힘껏 서신을 구겨 종이봉투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네자르가 목에 두른 머플러를 빼앗아 내 목에 둘둘 감았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오늘 황성에 갔다가 하룻밤 자고 돌아올게요. 엔테라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세요.”
“잠깐, 케이트?”
여기서 감정이 더 격해졌다간 남의 집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뛰듯이 걸어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마차를 준비시켰다. 지금 이 감정을 잘 다스렸다가 황성에서 풀어 버리자. 다짐과 함께 머플러를 더 강하게 묶었다.
타앙! 추락하는 새를 때맞춰 물어 오는 까만 짐승이 있었으니, 내가 기르는 사냥개 중 한 마리다. 네 마리의 사냥개 중에서도 워낙 활기차고 활동성이 높아 이렇게 데리고 나오면 가장 먼저 달려 나가 사냥감을 주워 오곤 하는 귀여운 우리 딸기.
컹, 컹!
“옳지. 잘했어요, 딸기야.”
칭찬해 달라는 듯 열심히 꼬리를 젓던 검은 개, 딸기가 내게 쓰다듬을 받자마자 즐거움을 주체 못 하고 주변을 쏘다닌다. 나는 그 귀여운 모습을 구경하며 사냥총의 탄알을 교체했다.
“드, 듣던 대로 사냥 솜씨가 대단하시네요.”
날 따라서 줄줄 딸려 나온 왕녀 중 한 명, 아스테 왕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안색이 저리 파리할까? 사실 어느 정도는 추측하고 있는 바. 국혼 전, 고용인들을 겁주기 위해 뿌려 놓았던 다수의 흉악한 소문들이 그 주역일 테다.
“한데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저렇게 사나워 보이는 개들이 어떻게 주인의 사냥감을 알아보고 곱게도 가져오네요.”
“그, 그러게요.”
나는 빛나는 눈으로 숲으로 뛰어 들어가길 조르는 네 마리의 사냥개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우리 애들은 사람 고기를 더 좋아해서요.”
왼쪽부터 차례대로 딸기, 키위, 머랭, 크림. 절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이름을 지은 게 아니다.
“그래서 다른 고기는 쳐다도 안 봐요. 특히 테레시아 왕녀?”
“네, 네?”
움찔, 몸을 떤 테레시아 왕녀가 안장에서 떨어질 뻔한 몸을 힘겹게 바로잡았다.
“우리 애들은 빨간색을 좋아해요. 그러니까 적발인 왕녀는 더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겁먹은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주억이며, 테레시아 왕녀가 다른 왕녀 뒤로 숨는다. 나는 다소 착잡하면서도 가학적인 즐거움이 드는 미묘한 기분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나도 점차 질 나쁜 변태가 되어 가고 있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남을 괴롭히는 데서 이런 쾌감을 느낄 수 없었다.
붉게 물든 겨울 노을의 빛이 점차 하늘을 뒤덮는 늦은 오후. 서신을 받자마자 마차를 타고 달려와 황성에 도착한 지 이제 겨우 3시간가량이 흐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째 저만 사냥을 즐기고 있는 기분이네요. 다른 분들은 사냥에 취미가 없으셨나요?”
친절한 물음에도 서로 답을 미룰 뿐, 호기롭게 대답하는 이가 없다. 물론 없겠지. 애초에 전리품 처지인 왕녀들에게 사냥총이 주어질 리 만무했으니까.
“어릴 적부터 사냥을 즐겨 왔으나… 아무리 손에 익어도 두어 번씩은 꼭 실수하게 돼요. 황성에 입성한 시기에도 작은 사건들이 여럿 있었죠.”
물론 내가 개밥으로 던졌던 고용인들은 황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태 에젤로트에서 좋은 대우 아래에 일하는 중이다. 원래 계획이라면 도로 데려왔어야 했지만, 에젤로트에서의 생활을 상당히 만족스러워한다기에 그냥 두었다. 이곳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사냥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워요. 황법이란 게 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 왕녀들은 함께 승마를 즐긴다는 명목으로 나와 함께 별관을 나왔으나, 사냥총은커녕 승마복만 겨우 갖춘 상태다. 도주를 막기 위한 열 명 남짓의 기사들이 주변을 늘 감시하고 있었으며 내 바로 옆에도 툴드와 황성근위대 3기사단의 단장이 무장을 한 채 날 호위하고 있었다.
심지어 엔테라로 떠난 황후가 서신을 받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위협 아닌 위협을 하고 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왕녀들도 내 의사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혼자 노는 따분한 사냥은 그만두고, 해가 지기 전에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까요?”
컹, 컹!
내 손짓에 뒤에서 열심히 새의 깃털과 여우의 털가죽을 고르던 시종이 생고기를 던졌다. 얌전히 앉아 있던 사냥개들이 벌떡 일어서 뼈를 뜯기 시작했다.
적절한 분위기 조성이 얼마나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느냐에 대해서는 이미 몸으로 깨달은 바, 나는 악당이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하며 입을 열었다.
“테레시아 왕녀, 판시온 공작의 의사를 직접 듣기 위해 엔테라로 가시겠다고요?”
“아, 물론 모든 건 황후께서 허락하신다는 전제하에…….”
“잠깐, 여러분의 의견을 듣기 전에 짧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는 안장에서 내려와 사냥총을 손에 쥐고 고기 뜯기에 바쁜 아이들 옆에 섰다. 그리고 겨울용 장갑을 벗어 데이지에게 건넸다.
“제가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곱게 자란 탓에 앞뒤 분간할 줄도 모르고, 특히 화가 나면 주체를 못 한답니다. 이 점, 명심해 주세요.”
철컥. 나는 하늘을 향해 있던 총구를 아주 천천히 내렸다.
“그래서… 테레시아 왕녀? 뭐라고 말씀하려 하셨죠?”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잠시의 정적 후, 허겁지겁 말에서 내린 테레시아 왕녀가 날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엔테라행은… 아무래도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주,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가타부타 할 것 없이 그녀의 말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오즈 왕녀?”
“오늘 폐하를 다시 봤습니다.”
얘는 또 무슨 이상한 소릴 하려고 이래?
해가 진 저녁, 반나절 내내 날 태운 말이 나름대로 마음껏 달렸는지 만족스럽게 머리를 뒤흔들며 멀어진다. 승마복을 입은 김에 왕녀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마음껏 황성을 누빈 후였다. 열심히 따라 달려오던 딸기, 키위, 머랭, 크림 역시 헥헥대며 물 마시느라 바빴다.
“황후께서 워낙 마음이 여리시기에, 왕녀들의 부탁을 하나하나 전부 다 들어줄 거라 생각했지 말입니다.”
“내가 호구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리할 것처럼 행동하셨으면서 말이죠.”
크흠. 툴드의 저 말은 반박하지 못하겠네. 나는 겨울용 모자와 장갑을 벗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다소 불안한 얼굴로 말문을 튼 툴드가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냥개들이 사람 고기를 좋아한단 말도 사실입니까? 하하! 물론 전에 농담이라고 답해 주셨으나… 제가 겁이 나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좀 궁금해서…….”
“사실이야.”
“헉.”
안색이 창백해진 툴드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그를 밖에 놔둔 채 침실로 돌아왔다. 데이지가 미리 벽난로에 불을 지펴 놓은 덕에 실내 공기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털 부츠를 저만치 벗어 두고 카디건만 걸친 채 침대 위로 곤한 몸을 내던졌다.
“……그냥 좀 적당히 할 걸 그랬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사지로 몰아넣고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는데 나쁠 수가 없지. 내 선택에 맡긴다던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황성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엔테라를 방문하겠다는 둥, 귀족 지위를 받고 싶다는 둥 헛소리는 사라졌지만, 결론적으로 왕녀들의 처분이 해결된 건 아니다.
“괜히 맡는다고 했어. 역시 나는 바보라서 이런 작은 것 하나 해결 못 하나 봐…….”
“이게 왜 작은 거냐?”
“……응?”
“네게 맡긴 일은 엄연히 황법을 바꾸는 대업이야. 이번 처분을 전례 삼아 제국에서 전리품의 위치가 뒤바뀔 거다. 하렘 역시 마찬가지지.”
이불에 코 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봤다. 그림자가 짙게 진 장식대 앞 의자에서 장신의 남자가 차를 들이켜는 모습이 보인다.
“나였다면 이제껏 선황들이 그러했듯, 뒤탈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전부 죽였을 거야. 편한 방법이나 최선의 수라고 할 수는 없지. 고민하는 만큼 좋은 방도가 나올 테니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는 말도록.”
“……언제 온 거예요?”
“네가 열심히 사냥하던 즈음.”
몸을 일으킨 네자르가 의자와 테이블을 크게 돌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온기가 느껴지는 몸이 침대 위로 올라서자 시야가 위아래로 작게 출렁였다.
나는, 뭐라 해야 할까. 살짝이나마 감동했던 것 같다. 그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니 오전의 짜증은 눈 녹듯 사라지고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구쳤다.
“아주 살벌하게 협박하더군. 내가 그 옆에 있었다면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났을 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요.”
“케이트 너는 사냥할 때 네 얼굴을 몰라서 그래. 툴드도 겉으로만 당당한 척했지, 속으로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걸.”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숨기며 마주 누운 네자르의 가슴팍으로 안겼다. 아주 살짝만 눈을 감아도 금방 잠들어 버릴 만큼 모든 것이 포근하고 따스했다. 네자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이리 기분이 간지러워질 수 있다니. 카발 제국의 황제는 대단한 마법사이기라도 한 걸까.
“왜 왔어요? 새벽에 내린 눈으로 위험한데.”
“글쎄다. 삐친 얼굴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뒤쫓아 왔나.”
“요즘 왜 그렇게 능글맞아요?”
“다 네가 귀여운 탓이야. 귀엽지 않으면 내가 여기까지 쫓아올 일도, 괴상망측한 소릴 할 일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짐을 위해서 귀엽지 말도록 해.”
말도 안 되는 주장과 함께 네자르가 내 몸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안았다. 악 소리를 내며 어깨를 치고 깨물어도 팔의 힘은 여전히 그대로다.
“진짜, 그만 좀 괴롭혀요!”
“알겠다고 대답하면 놔줄게. 자, 따라 해. 저는 더 이상 귀엽게 굴지 않겠습니다.”
“미쳤어? 그걸 어떻게 따라서 말해!”
“어허. 빨리. 저는 더 이상 귀엽게 굴지 않겠습니다.”
그의 패악은 내가 온 힘을 다해 목젖 근처를 깨물고 나서야 멈췄다. 얼마나 강하게 물었으면 잇자국이 선명하다. 또 괴롭힘당할세라, 상체를 일으켜 침대 끝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그가 날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어디 가? 하여간 강아지도 아니고, 턱 힘 하나는 세다니까. 자꾸 그렇게 물어 버릇하면 혼날 줄 알아.”
“오지 마! 오면 발로 찰 거야.”
“발로 차기는. 안 만져 준다며 삐친 게 누군데 그래?”
말과 함께 옆으로 눕고는 직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자리를 툭툭 친다.
“빨리 이쪽으로 와. 아주 질릴 만큼 만져 줄 테니까.”
“누, 누가 삐쳤대? 안 만져 줘서 삐친 거 아니야. 그냥 왕녀들 일 생각하느라…….”
“그럼 오늘은 왜 혼자 잔다는 건데?”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 일단 자리를 피하자. 하지만 몸을 일으킨 즉시 내 허리를 잡아챈 네자르 때문에 또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세상에, 질겨도 이렇게 질길 수가 있나! 나는 부끄러움과 수치와 짜증과 간지러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속절없이 떠밀려 다녔다.
“그렇게 서운했어?”
“안 서운해.”
“근데 왜 얼굴을 가려?”
“내 마음이야.”
“입 맞춰도 돼?”
안 돼, 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 위로 올라탄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응?”
그런 얼굴로 쳐다보면 반칙이잖아…….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내려오는 입술과 뜨거운 숨을 교환하자, 손이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숨이 점차 거칠어진다. 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어째서인지 이 순간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케이트, 이건 네가 허락한 거야. 나는 최대한 널 기다리고, 배려하려 했다고. 한데 그런 발칙한 소릴 툭 뱉고 가 버리면 어쩌라는 거지? 뒤쫓아 오라는 말밖에 더 되나?”
나는 멍청하게 눈만 껌뻑이며 네자르가 커프스를 푸는 움직임을 좇았다. 소매와 더불어 흰 셔츠의 단추가 하나둘 사라지고, 정신을 차렸을 땐 코앞으로 내려온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내 시야를 온통 잡아먹은 뒤였다.
“혹시 참지 못할 정도로 부끄럽다면… 모든 것이 짐의 탓이라 생각해도 돼.”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두렵고 긴장됐으나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묘한 떨림을 느꼈다.
실로 꿰매기라도 한 듯, 열리지 않는 입을 대신해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았다. 네자르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옅은 나른함이 밴 그림 같은 얼굴 위로 갈등을 비롯한 수십 가지의 감정이 뒤섞이는 게 보였다. 네자르가 손목을 비틀어 소매를 쥐고 있던 내 손을 꽈악 쥐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출렁이는 머리칼이 내 시야를 가렸고, 이전과 확연하게 다른 조심스러운 숨결이 입술에 내려앉았다.
우리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긴장으로 실없는 소릴 뱉을 법도 한데 혀가 꿈쩍도 안 한 탓이다. 네자르 또한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면서 등 뒤의 드레스 끈을 푸는 손길도 빨라졌다.
하아. 숨을 들이켜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축축한 혀가 목덜미를 핥았다. 천이 거칠게 찢기는 소리와 함께 등의 감각이 헐렁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뜨거운 손이 천 아래를 파고들어 내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다가도 멈칫하더니 내 허리와 가슴 옆 부근을 느리게 토닥였다. 맨 살갗을 뚫고 여실히 건너오는 감각에 네자르의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네자르와 함께 있으면 종종 높게 밀려온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젖고 만다. 사랑받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신뢰를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와 감정을 교류한다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 네자르는 내게 세상을 알려 주고, 보여 주고, 느끼도록 돕는다. 그가 알려 준 세상은 어둡기보다 밝았으며, 습하기보다는 반짝였고, 동이 틀 시간 동안 기대감에 잠 못 들게 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는 순간순간들이 너무 소중했다. 낯선 감각에 몸이 달아오르는 와중에도 그러한 생각만큼은 더없이 선명하기만 하다. 그의 숨이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 위를 맴돌았다. 천이 벗겨지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맨살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너무 이상해. 어깨를 움츠리자 네자르가 목울대를 울렁이며 작게 웃었다.
“괜찮아, 착하지?”
타이르는 어투와 달리 옷을 벗겨 내는 손길은 몹시 급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서 겹겹이 싸여 있던 내 드레스 천이 반 이상 찢겨 나가고 있었다.
“처, 천천히 해…….”
준비가 되긴 했지만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서서히 드러나는 몸에 더는 참을 수 없음을 깨닫고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몸을 비틀자 그가 내 맨 어깨와 가슴에 입을 맞추며 다시 웃었다. 어느새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내 전신을 훑는 네자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 떠 봐, 케이트.”
정적인 음성이었으나 그 속에는 숨겨지지 않는 격렬한 흥분이 배어 있었다. 눈을 가린 채 끝까지 버티자 그가 내 몸을 간지럽혔다. 아, 정말! 나는 바보처럼 웃음을 흘리며 두 팔을 내렸다. 흔들리는 시야에 네자르의 낯이 보였다. 그의 상체는 어느새 맨몸이었다.
그가 북벌 전쟁을 위해 떠나기 전까지 매년 한두 번씩은 봐 온 몸이었다. 특히나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이면 종종 웃통을 벗고 검을 휘두른 네자르였기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한데 오늘은 정면으로 마주하려니 숨이 턱 막혔다. 여느 기사 못지않게 완벽한 형태를 그리고 있는 어깨,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단단한 가슴과 복부가 마치 네자르의 것이 아닌,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기분이야. 굴곡진 너른 어깨를 올려다보다가 침구 안으로 몸을 숨겼다. 가능하다면 가장 구석진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자꾸 숨는 거야? 앞으로 지겹게 볼 몸인데.”
침구를 걷어 낼까 싶어 양손으로 꽉 붙들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네자르는 억지로 날 끄집어내지 않고 천 아래로 비집고 들어와 내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먼 곳에서 맴돌기만 했던 그의 체취가 꽃망울 터지듯 갑작스럽게 풍겨 나와 나를 집어삼켰다. 시린 가을바람과 산뜻한 종이 그리고 그윽한 커피의 향이 한데 뒤섞인 특별한 체취였다.
나는 어쩐지 그에게 완전히 벗겨졌을 때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자르는 내 목덜미를 살짝 깨물며 배 위쪽과 옆구리를 살살 건드렸다.
“그만해, 간지러워…….”
말하기 무섭게 네자르가 날 뒤집고는 깊게 끌어안았다. 가슴에 닿아 오는 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해 몸이 움츠러들었다.
“너에게서 좋은 향이 나, 케이트.”
그리 말하고도 네자르는 내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여러 번 숨을 들이켰다. 아닌데. 향이 좋은 건 내가 아니라 네자르인데. 이것만큼은 꼭 말해야겠다 싶어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네, 네자르도.”
홱 고개를 뺀 네자르가 물끄러미 내 이목구비를 살피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아, 젠장. 빌어먹게 귀여워.”
세 번째 입맞춤은 이전보다 더욱 거칠었다. 그는 더 이상 제 욕구를 억누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드레스 위로 가볍게 쓸리던 그의 손과 맨몸 위를 거리낌 없이 누비는 그의 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의 열기가 내 살갗으로 옮겨져 버틸 기세도 없이 머릿속과 육체 모두 빠르게 뜨거워졌다. 험하면서 자상한 손길이 가슴을 쥐었을 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맞이하는 모든 순간들이 꿈같아서 머릿속이 어질했다.
그 와중에 밑으로 손이 닿았을 때는 몽롱해져 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오면서 단연코 이런 쾌감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목 아래에서 울릴 뻔한 신음을 몇 번이나 참아 냈는지 모르겠다. 황홀하면서 생경한 감각에 덜컥 겁이 나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에 코를 비볐다.
“쉬이. 괜찮아.”
“아, 안 괜찮아.”
몸이 덜덜 떨리는 쾌감의 틈으로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섰다. 느낀 적 없는 거부감이 처음으로 격렬하게 날 자극했다.
“하아. 저기, 네자르… 손…….”
네자르에게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반응한 건 내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가락이었다. 그건 평생을 살면서 처음 느낀, 낯설면서도 기이한 쾌락이었다. 그 쾌락이 무서웠으나 네자르의 손을 내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젖혀지는 목과, 그 아래에서 기어 나오려는 신음을 끊임없이 참아야 했다.
“아.”
그러다 참지 못하고 숨을 터트리면, 네자르는 집요하게 그 부분만 지분거렸다. 머릿속이 흔들리고, 그의 팔을 잡은 내 손이 덜덜 떨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상할 정도로 좋기만 했다. 허벅지에 닿아 오는 그의 팔, 힘줄 그리고 묻어 나오는 액체까지. 우리의 모든 게 내 전신에 열이 깃들게 만들었다. 이대로 활활 타오르는 열에 몸과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 돌연 손의 움직임을 멈춘 네자르가 침구를 밀어내고 내 위에 올라탔다.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네자르는 내 손을 끌어 그 뜨거운 무언가를 꽉 쥐게 했다. 지금의 나는 필시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다. 네자르의 것은 단단하고 부드러웠으나, 내 예상보다 훨씬 컸다.
이게 내 안에……. 네자르는 이 이상 인내할 수 없다는 일그러진 낯으로 둔부를 내 다리 사이에 밀착했다. 이어서 나직한 음성이 내 귓가에 닿았다.
“아프면 말해, 케이트. 나도 네가 처음이라 서툴 테니까…….”
절로 고개가 저어지며 덜컥 겁이 났다. 그러니까, 저걸 내 밑에 넣는다고? 거, 거짓말. 그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저 커다란 물체가 내 안을 뚫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안 들어갈 거야. 진짜야. 절대 안 들어가.”
네자르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날 내려다봤다. 단언컨대 그의 귀에는 내 애절한 목소리가 안 들리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다물려진 살에 네자르의 것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자 그가 내 허벅지를 살살 만지며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몸 안쪽이 양쪽으로 갈리는 느낌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끔찍했다. 시, 싫어. 그의 턱을 밀어내며 열심히 고개를 저었지만, 네자르의 몸은 꿈쩍도 안 했다.
“읏.”
아파. 아파, 네자르. 내가 보챌 때마다 그는 ‘그렇게 아파? 뺄까?’ 하고 물으면서도 절대 몸을 빼지 않았다. 그는 매우 느리게 내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또한 고통의 시간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다 들어왔겠지, 싶다가도 그는 연신 내 몸을 매만지면서 더, 더 깊숙이 자신을 밀어 넣었다.
“이제 괜찮아. 다 들어갔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자르는 거짓말쟁이였다. 커다란 이물감이 배 안쪽으로 말도 안 되게 꽉 찬 것이다. 더는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의 턱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내 손끝을 네자르가 가볍게 깨물었다.
“하아…….”
그의 기다란 숨이 내 이마 위로 떨어졌다. 뜨겁고, 습윤하며, 무겁고, 간지러운 숨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건지, 천천히 내려온 입술이 뺨 위를 가르던 눈물을 핥았다.
네자르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좁아.”
네자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려 제가 느낀 바를 알리면서도, 금세 다시 미소 짓고 내 얼굴에 촉촉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가 미세하게나마 몸을 틀 때마다 기겁하며 외쳤다.
“우, 움직이지 마!”
아프단 말이야. 그러자 네자르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미리 사죄할게, 케이트. 이대로 가만히 있기는 힘들어.”
그때부터 네자르는 연신 나를 타이르며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가 탄성을 뱉을 때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왜 나만 아파? 가만가만 뺨을 쓸어 주던 네자르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숨만 거칠게 내쉬며 날 내려다보기 바빴다. 종종 ‘그 표정 예뻐.’ 같은 알 수 없는 소릴 해 대며 날 놀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마냥 뻐근했던 고통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남사스러운 신음이 내 귀까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땐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한데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아마 이대로 녹아내려 뜨겁게 끓는 물이 되지 않을까. 머릿속이 하얗고 까맣게 점멸하며 내 모든 신경을 갉아먹었다. 네자르의 물렁해진 입술이 내 가슴과 배, 어깨, 목덜미 전부를 샅샅이 집어삼켰다.
어떤 감각이 진짜이고, 어떤 감각이 허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허벅지를 쥐는 악력에 고개를 비틀다가도 네자르의 손이 턱을 끌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덜덜 떠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통할 리 만무했다. 그는 굳게 닫힌 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교성을 지르길 종용했다.
“아!”
어떤 고통은 아렸고, 어떤 고통은 황홀했다. 나중에는 땀에 젖어 미끄러운 그의 등에 매달리며 내 스스로 몸을 흔들었던 것 같다. 머리끝까지 도달한 이름 모를 쾌감에 수치심도 잊고, 그의 이름만 반복해 불렀다. 그럴 때마다 네자르는 깊은 입맞춤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절정에 치달은 그가 내 전신을 내리눌렀을 때는 그야말로 새까만 늪의 바닥까지 추락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내 위에 올라탄 그의 몸이 긴 후희를 즐기며 거칠게 오르내렸다. 내가 그를 밀어내기 전에 네자르가 먼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단단한 몸이 날 강하게 껴안았다. 네자르는 엉망으로 구겨진 침구를 끌어와 내 몸을 덮고 침대를 벗어났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코앞에서 네자르의 맨 등이 천천히 근육을 푼다. 저 커다란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움직였는데,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네자르랑 그걸 하고, 심지어 나중에는 좋아서 내내…….
“케이트.”
입술로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시선을 내려 확인하기 전에 미지근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찻잔에 담긴 물이었다.
“시녀는, 부르지 말까?”
“……응.”
“괜찮겠어? 찝찝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찝찝한 건 둘째 치고 몸이 나른했다. 언덕에서 몇십 분을 내리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특히 허벅지 사이는 뼈가 벌어지기라도 한 양 얼얼하면서 무언가 한없이 어색한 느낌이었다.
다시 침대 위로 올라온 네자르가 침구로 꼼꼼히 싼 내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얼굴만 봐도 내게 할 말이 무척이나 많은 눈치였다.
“아팠어?”
“응.”
처음에만. 나중에는, 뭐…….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내 대답에 네자르가 어색한 낯으로 미소 지었다.
“미안해, 케이트. 나도 처음이라 어쩔 수 없었어. 계속 연습하면 좋아지겠지.”
계속? 연습? 얼마나 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얼굴을 활짝 펴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번에는 용기 내서 붙들길 백번 잘했네.”
“네자르는 사실 엄청 겁쟁이야. 내 말이 맞죠?”
“아니야.”
“맞잖아요? 숨기려고 해도 다 알아요. 내 손바닥 안에 들어온 지 오래라고.”
진실을 요구해도 네자르는 내 어깨에 턱을 괴곤 바보처럼 실실 웃기만 했다.
“아, 젠장… 역시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는 좋아질 구석밖에 남질 않았어.”
침구로 몸만 감쌌을 뿐, 우리는 나체 상태 그대로 침대 위를 오랫동안 굴렀다. 네자르가 날 놓지 않은 탓에 잠들기 전까지 꼼짝없이 침실 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다. 그는 내 시중을 들며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답지 않게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네자르는 ‘이제 정말로 네가 내 것이 된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
다음 날. 이른 오전의 기상부터 시작해 엔테라에 도착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걷기가 힘들어요.”
간밤에 일을 치른 여파로 몸이 힘들 거라 예상은 했건만, 설마 정말로 그럴 줄이야. 심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일어서기가 힘든 건 둘째 치고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앓는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뜬 네자르가 내 팔다리를 주물러 왔다.
“마, 많이 힘들어?”
“그건 아닌데…….”
습관처럼 일어나는 시간대인데도 평소보다 몸이 백배는 더 무거웠다. 내가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들다 깨기를 반복하자, 보다 못한 네자르가 날 몸소 안아 욕실로 나를 정도였으니까.
“물이 너무 뜨거워요.”
“잠깐만 기다려.”
“목말라요.”
“응, 가져올게.”
“졸려요.”
“엔테라로 향하는 길에 자자.”
자꾸 받아 주니 더, 더 투정을 부리게 된다. 나는 온수가 채워진 욕조 안으로 들어가 네자르가 머리를 감겨 주는 동안 꾸벅꾸벅 졸았다. 그가 물을 가져오면 천천히 받아 마시다가 다시 잠들었고, 머리가 다 마를 때쯤 일어서면 어느새 대충 옷까지 걸쳐져 있었다.
심지어 데이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상태. 나… 카발의 황제를 이렇게 노예처럼 부려도 되는 걸까.
“네자르,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요? 간 쓸개 다 빼 줄 것처럼.”
픽 웃은 그가 내 뺨을 쓸었다.
“누가 들으면 언제는 안 그랬는 줄 알겠어.”
“……음.”
하긴, 네자르는 늘 간 쓸개 다 빼 줄 것처럼 굴었지.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덜컹거리는 마차가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후였다. 소정의 목표를 달성한 후라 그런지, 내 성이 아님에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다만 어제오늘 사이 잊은 것이 있다면…….
“폐, 폐하!”
내일이 바로 카론의 결혼식 날이라는 사실.
“일은 잘 마무리됐나요? 여, 연락이 없으시기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이 돼서…….”
“이제 겨우 하루 지났는데 일은 무슨 일? 너야말로 괜찮아, 카론? 일단 들어가자.”
평소와 달리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카론을 데리고 실내로 들어갔다. 눈 밑이 새까만 걸 봐선 날밤을 새운 듯싶었다. 분명 내일 결혼식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거겠지.
“죄송해요, 폐하. 황제 폐하도 계신데 제가 채신머리없이…….”
“그런 말 하지 마, 카론.”
늘 이성적이고 당당했던 친우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나도 퍽 당혹스러웠다. 그런 내 마음과 카론의 상태를 이해했는지, 다가온 네자르가 짧게 등을 두들기고 앞서 걸어갔다.
“후작은?”
카론의 얼굴이 다소 언짢아졌다.
“날 너무 신경 쓰기에 일부러 얼굴 안 보려고 나온 거예요.”
“그 정도야?”
“마음은 고마운데, 예민해져서 그런가, 자꾸 내 눈치를 보는 필프론츠가 짜증이 나서요……. 괜히 신경질 부리게 될까 봐 나왔어요.”
우울한 목소리로 카론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최근 필프론츠 후작과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던 일부터 어릴 적 처음 만났던 그날까지 긴 시간을 유영했다.
불안감을 토로하는 카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우리는 엔테라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필프론츠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뭐, 어쩌겠어? 카론이 아직도 날 더 생각한다는 뜻이지!
“케이트, 저는 평생을 케이트에게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자정에 가까운 밤. 바로 옆자리에서 천장을 바라본 채, 카론이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나의 애칭 때문인지 오래전 우리가 처음 만난 열다섯 무렵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케이트 덕분에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변했어요. 부족한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때때로는 주제에 맞지 않게 행복한 시간들이라 느낄 정도예요. 그날 용기 내서 황성까지 찾아간 카론 엔테라와 제 이름을 물어봐 준 케이트를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찔끔 눈물이 흘렀다. 엔테라도 오드리네도 제도에서 충분히 가까운 거리의 영지인데, 왜 앞으로 못 볼 것처럼 말한담.
그날 밤 살짝 고였던 눈물은 다음 날 오전, 결혼식이 시작되자마자 폭포수로 바뀌었다. 나는 양손 가득 꽃을 쥔 카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거두어야 했다.
“누가 보면 평생 키운 자식이 결혼하는 줄 알겠어, 케이트.”
“흑. 틀린 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처음 카론을 만났을 때만 해도 삐쩍 마른 소심한 여자아이였는데…….”
“하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네자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안겨 화장이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눈을 닦았다. 물론, 그 감격적인 눈물도 카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쏙 들어가 버렸다.
***
“콜록, 콜록.”
내가 그 소음을 제대로 인식한 건, 돌연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번쩍 뜬 시점이었다.
“콜록…….”
온몸이 아리고 뻐근했다. 카론의 결혼식이 끝난 이후로 밤마다 네자르가 괴롭히는 일이 잦아졌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몸이 단련된 덕인지 그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 억지로 떼어 놓고 잠들기가 일쑤다. 꼬옥 붙어 있는 건 좋은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정도껏 붙어 있을 때의 일이지, 밤마다 이러니 체력적으로 금방 지쳤다.
“콜록.”
그런데, 아무리 지쳐도 감기에 걸릴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거위 털로 채워져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황성의 이불은 한겨울에도 더우면 더웠지, 절대 추위를 느끼게 하지 않았다.
“네자르.”
그런데 왜 네자르는 새벽 내내 기침을 하는 것일까?
그는 날 등지고 누워 다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땀으로 등이 축축한 게 느껴진다. 눈을 뜨면 보이는 여유로운 모습의 네자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네자르, 많이 아파요?”
“아니.”
“방금 아니라고 한 거죠? 목이 많이 상했나 봐. 목소리가 영 아니네.”
“안 아파.”
“그래요.”
일단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곧 함께 들어온 의원이 이불 안으로 얼굴만 쏙 빼 놓은 네자르의 상태를 살폈다. 증상은 당연히…….
“감기입니다. 심하지는 않으나 몸이 많이 약해지신 상태라 독감으로 번질 우려가 있습니다.”
“짐은 아무렇지 않다만.”
“아무래도 과로가 문제인 것 같군요. 최근 몇 달간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하셨다 들었습니다. 아무리 폐하께서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지고 계신다 한들, 지금처럼 계속 무리하시면 나중에 큰 병이 생기실 수도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군.”
감기라는데도 입만 산 네자르는 기어코 한마디씩 내뱉는다. 그러나 그가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꾸준히 보살펴 온 의원답게, 노인은 냉랭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며 서류에 글을 기록했다.
“오늘 회의가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불참을 권고드립니다. 이왕이면 내일까지는 아무런 일도 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안 돼. 오늘 회의를 안 하면 밀려서…….”
“절대 안정.”
“밀려서 나중 일이 피곤…….”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네자르가 뭐라 하던 자신의 의무를 다한 의원이 론과 진지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사라졌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네자르의 일정 조율에 대해서 의논한 것이겠지. 그만큼 네자르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테다.
세상에, 그 튼튼한 네자르가 감기라니!
“의원의 말을 들어요, 네자르. 오늘은 쉬는 게 좋겠어요.”
침대에 기대고 있던 네자르가 내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런 건 밤잠을 조금만 늘리면 금방 나을 거야. 이렇게 호들갑 떨 필요가… 콜록, 콜록!”
“일을 하루 더 미룬다고 제국이 망하지는 않아요.”
“황후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 아무래도 제가 근래 너무 빠듯하게 일정을 짰던 것 같습니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조율해 볼 테니, 오늘내일은 쉬심이 어떨까요?”
“자꾸 귀찮게들 하는군.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쉴 생각 없어. 론, 너는 나가서 회의 준비나 마치도록.”
제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네자르의 의지에,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 고집불통!”
화들짝 놀란 얼굴들이 일시에 날 향한다. 네자르는 왜 자기 몸 소중한 걸 모를까? 난 황제의 권위고 뭐고 화를 잠재우지 못한 채 열이 북돋는 목소리로 말했다.
“쉬라면 좀 얌전히 쉬란 말이야. 자꾸 그렇게 제멋대로 굴 거예요? 대체 뭐가 문제예요. 회의 때문에 그런 거야?”
“콜록… 응.”
역시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내야 한다. 언성을 높이니 멋대로 구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지잖아.
“그깟 회의, 내가 대신 참석할게요. 그래도 되죠? 나는 황후니까 폐하의 대리가 될 자격이 충분하잖아요.”
“저는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론도 동의를 표했으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회의까지 이제 겨우 2시간 남짓 남았으나 나는 의제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론, 서류를.”
“여기 있습니다.”
회의에서 논의할 주제를 훑어보니 딱히 대단찮은 일은 없었다. 우울해진 낯의 네자르가 걱정 어린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마침 오늘은 하렘 처분 건도 회의 목록에 올라와 있네요. 잘됐어요. 내가 폐하 대신 참석할 테니 당신은 잔말 말고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어요.”
“그래도 그건…….”
“설마 날 못 믿는 건 아니죠? 여기서 날 붙잡으면 못 믿는 거라 생각할 거예요. 그럼 난 삐칠 거고, 네자르가 아파도 일주일 동안은 내다도 보지 않을 거고, 이 방에서 혼자 외롭게 잠들어도 모른 척할 거예요. 알겠어요?”
목소리는 나름 상냥하게 뱉기 위해 애썼으나 본심은 어쩔 수 없어 활활 불타오르는 눈으로 쳐다보게 된다. 무언가 말하려던 네자르는 내가 허리에 손까지 올리자 결국 별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픈 적이 별로 없어서 그 위험성을 모르는 듯하니, 이렇게 억지로라도 쉬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좋아요, 이제 좀 착하네. 론?”
“네.”
“별관에 가서 아스테 왕녀를 데려와. 오늘 나와 함께 회의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전해 주는 것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네자르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죄책감이라도 느꼈는지, 안색이 까맣게 죽어 있던 론이 환해진 얼굴로 방을 벗어난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네자르에게서 짤막한 조언을 들으며 화장과 복장 준비를 마쳤다.
이럴 때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점.
“어때요, 폐하? 이 정도면 마음에 드시나요?”
“아주 마음에 들어. 고마워, 데이지. 입술도 새빨간 게 어디서 쥐라도 잡아먹고 온 것 같네.”
처음 나서는 자리에는 기죽지 않고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나는 평소보다 진하고 강렬한 눈매를 부릅떴다. 그리고 화려한 드레스를 펄럭이며 당당한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국무 회의가 열리는 성은 본성에서 마차로 고작 4분가량이 소요되는 곳에 자리한다. 본래라면 바깥 공기라도 마시며 걸어갔겠으나, 오늘은 황후의 지위를 마음껏 이용해야 하는 날이기에 황성의 마차 중 가장 화려한 사륜마차를 끌고 갔다.
대회의장답게 성내에 위치한 양문의 크기가 상당했다. 내 뒤를 따라온 론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옆에서 도와 드릴 테니 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 론. 그보다 나 지금 어때?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 보여?”
내 걱정 가득한 물음에 돌아온 론의 대답은 차분하고 따뜻했다.
“솔직히 제 눈에 황후께서는 늘 어리고 아름다우십니다만, 최근 제도 밖으로 도는 소문을 생각하면…….”
“소문?”
주위를 살핀 론이 고개를 살짝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눈 밖에 난 사람을 개밥으로 던져 버린다는 소문 말입니다.”
아니, 그게 성 밖까지 나갔다고?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소문이 퍼지는 거야? 황성에서 황족의 사생활을 입에 담는 건 엄연한 범법 행위이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지 못하던 차에 밖으로 새어 나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할 테다.
“꽤 유용하겠네.”
근데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나면 네자르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나?
“황제 폐하께서 입회하십니다.”
문이 열리고, 웅장한 회의장의 내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 달에 단 한 번 열리는 전체 국무 회의. 카발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과 세 명의 황실 기사단장, 재상, 장로회 등 총 육십 명가량이 참석하는 회의이다.
그들 사이로 부는 서늘한 공기가 내 살갗으로 닿아 왔다. 턱을 들고 입장하자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회의장을 메웠다. 아마 네자르가 아닌 묘령의 여인이 입회하여 혼란이 야기된 듯싶었다.
내가 황좌에 자리를 잡자 시끄러웠던 내부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마땅한 반응이었다. 황좌에 앉을 수 있는 인물은 당대에 딱 둘뿐이었으니까. 황제와…….
“오늘 회의에는 황후께서 황제 폐하의 대리 자격으로 참석하셨습니다.”
황제의 대리인이 황후 또는 황태후일 경우. 그나마도 황태후는 진작에 제도에서 쫓겨났으니 네자르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은 나밖에 없었다.
말없이 앉아 정면을 응시하자 내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이 하나둘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 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떨리네. 네자르는 이렇게 많은 귀족 앞에서 어떻게 위엄 있는 모습을 유지했던 거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손끝이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폐하, 떨리시면 천천히 심호흡하십시오.”
역시 날 오래 봐 온 론은 내 상태를 금방 파악했다. 그의 조언대로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러자 황좌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인물들의 얼굴이 점차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코앞에 앉은 필프론츠 후작과 아버지, 그 뒤로 나란히 보이는 판시온 공작과 반 공작, 캐롤라인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익숙한 얼굴이었고, 동시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긴장감이 확 죽는 기분이다. 겁먹을 필요가 없구나.
“폐하의 건강 악화로, 보시다시피 오늘은 황후인 내가 대리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유로운 티를 내려 했으나 여유는 무슨, 목소리는 물론 입꼬리까지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내가 왔다고 허투루 회의를 진행할 생각은 마세요. 나의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오늘 회의는 모든 전문 용어를 쉽게 풀어서 말해야 할 겁니다. 혹여 날 업신여긴다거나 능멸하려 한다면 그 대가 역시 상응하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기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요?”
이런 말은 네자르처럼 자신감 넘치는 기세로 뱉어 줘야 하는데, 아무리 아는 얼굴이 많다 한들 윗자리에서 한가락 하는 귀족들을 내려다보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회의장 내부의 분위기가 더없이 서늘해졌다. 아니, 서늘하다 못해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다. 눈을 얇게 뜨고 회의장을 살피니 어째 아버지를 제외하곤 나와 눈을 마주치려는 자가 전무했다.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으음. 이거, 잘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바로 첫 번째 안건을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론이 별말 하지 않는 것을 보면 큰 문제는 없는 듯싶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벽 한쪽에 둘둘 말려 있던 카발 제국 지도를 풀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며칠 전 폐하께서 별관 전리품 처분 건을 내게로 위임하셨습니다. 하나 앞서 말했듯이 내 역량이 부족하여 그대들의 조언을 듣고 싶으니, 지금부터 나의 말을 경청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물론입니다, 폐하. 열과 성의를 다해 보조할 터이니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시지요!”
가장 앞자리에 앉아 계신 아버지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날 응시하니, 이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린 딸의 장기 자랑을 보는 듯한 표정 그 자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바로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벌 전쟁 후 제국에 복속된 국가들은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습니다. 서쪽의 카마우드라 왕국과 동쪽의 헤넨 왕국이 네클렌타와 에델베크를 감싸고 있는 형태이지요.”
론이 나의 설명에 맞춰 카발 제국의 상단 부분을 가리켰다.
“속국이 된 카마우드라 왕국을 제외한 세 영토는 현재 황성이 직접 인사를 파견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지요. 이 영토에 대해선 근래 여러 문제로 처리가 미뤄졌으나, 폐하께서 곧 새로운 영주를 임명하거나 승전에 기여한 일부 가문에게 하사하는 방식으로 처리할 겁니다.”
회의장이 내가 황좌에 앉았을 때처럼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영토를 하사할 수 있다는 말에 다들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혹시 그 영주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단 헛된 희망은 거두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폐하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으니까요.”
떠들썩했던 회의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서쪽부터 차례로 네클렌타, 에델베크, 헤넨이 위치합니다. 나는 저 망국의 땅으로 공녀들을 돌려보낼 생각이에요. 정확히는 네클렌타와 헤넨에만 영주를 임명하고, 그 가문에 공녀들을 보낼 겁니다. 사이에 낀 에델베크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을 거예요.”
한마디로 오즈 왕녀를 제외한 공녀 전부를 본래의 땅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의미였다.
“폐하, 그것은 무척 위험한…….”
“여기에는 세 가지의 명분이 존재합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되어 끼어들려는 필프론츠 후작을 막고, 보란 듯이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첫 번째, 정통성의 문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직 제국에 굴복하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다수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왕녀를 내세워 정통성을 주장할 겁니다. 유일하게 남은 망국의 후계자를 제국의 가문과 결합해 당장의 시위를 잠재우고, 장기적으로 완전한 복속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당연한 말이나, 왕녀는 영주가 될 수 없습니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던 필프론츠 후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두 번째는 영토 간의 불순분자 감시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즈 왕녀를 에델베크로 돌려보내지 않는 중요 요인이기도 합니다. 내부 고발로 에델베크의 잔당과 오즈 왕녀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허어.”
어디선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마땅한 반응인 이유가, 이는 황성의 안보와 직결되는 중대한 사건이었던 탓이다.
향수병을 빌미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더니, 전부 꾸며 낸 수였다. 내통을 고발한 인물이 다른 공녀들임을 상기하면 별관 내에서 그들의 관계가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자세한 경위는 조사 중에 있고, 곧 경로와 방식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네클렌타와 헤넨에만 공녀들을 보내는 건 에델베크의 잔당들을 감시하기 위함이에요. 물론 이 둘 또한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요.”
“혹시 내부 고발자가 그 두 공녀입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답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정 궁금하시다면 폐하께 직접 여쭈어보세요.”
회피했으나 정작 질문한 판시온은 이미 답을 내놓은 듯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귀족이라 그런가? 고작 몇 마디로 모든 상황을 유추해 내는구나.
“그리고 세 번째.”
좌중의 시선이 오롯이 나만을 향해 있음이 느껴진다. 반 공작과 캐롤라인 역시 진지한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이거, 말하기 좀 민망한데. 난 괜히 낯 뜨거워지는 기분을 감추기 위해 부러 얼굴을 더 딱딱하게 굳혔다.
“세 번째 명분은… 보다 나은 방안을 더 생각하기 지쳤으니 그냥 이 방안을 채택했으면 하는 나의 개인적인 바람에 있습니다.”
귀족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나는 그 차분한 분위기 속으로 괜히 한마디를 더 던졌다.
“불만 있으면 말하세요.”
공격적인 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니, 원래 회의란 게 이렇게 밋밋한 거야? 내 제안이 통과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
“이의가 없는 것 같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조용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론의 말에 따르는 것이 가장 맞는 방도처럼 보였다.
“없으면 바로 실행하도록 하겠어요. 론, 아스테 왕녀를 안으로.”
이윽고 회의장을 벗어난 론이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아스테 왕녀를 데리고 왔다. 그녀의 등장을 기점으로 실내가 다시 부산스러워진다. 나는 왕녀에게 손짓해 옆에 세우고 좌중을 향해 말했다.
“일단 이 자리에서 네클렌타의 영주를 선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는 왕녀의 배필이기도 하지요. 중요한 사안인 만큼 그간 꽤 신중하게 후보를 골랐습니다.”
“지, 지금 이 자리에서 선별한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허어!”
내가 생각해도 청천벽력 같은 제안인데, 귀족들은 어찌 당혹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난 뻔뻔함을 얼굴에 깔고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내일 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잠시의 고요가 회의장을 뒤덮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노귀족이 말했다.
“황후께서 언급하신 대로 중요 사안인 만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린 이미 오래 시간 토벌한 영토를 방치해 왔습니다. 제국 최고의 가문들이 한데 모인 이 자리만큼, 왕녀의 배필을 논의할 최선의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불만이면 그대가 직접 제국 내 그 수가 육십에 이르는 가문을 호구 조사하여 내게 보고하도록 하세요.”
“크흠!”
오랫동안 꼬투리 잡을 거라 여긴 것에 비해 꼬리 마는 속도가 빨랐다. 침묵은 이의가 없다는 뜻. 나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선 아스테 왕녀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네클렌타의 영주가 될 자격은 간단합니다. 네클렌타 왕족에 뒤지지 않을 수준으로 유서 깊은 가문일 것. 귀족 지위가 존재할 것. 명예로울 것. 풍족할 것.”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이 외에 서른을 넘지 않은 미혼남, 미남, 체격은 큰 편, 웃을 때 보조개가 파이는 남자 등등…….”
차분히 늘어놓는 조건에 아스테 왕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동시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시선들이 점차 한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나 역시 같은 인물을 바라봤으나, 정작 그 중심에 선 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할 뿐이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남자는 아무래도 이 자리에 한 명밖에 없는 것 같군요.”
얼씨구, 이렇게 말해도 못 들은 척해? 나는 이제껏 낸 목소리 중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습니다, 록허드 에젤로트 경. 당신 이야기니까.”
록허드의 반응은 매우 다채로웠다. 날 응시하는 눈이 혼이라도 빠진 듯 허망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색이 가을 하늘처럼 새파래졌고, 나중에는 흙빛이 되어 대뜸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농담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어느 자리라고 내가 농담을 하겠어요. 안 그래, 론?”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 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폐하께서도 허하신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면식도 없는… 아니, 말 한번 섞어 보지 않은 여인과 제가……!”
저렇게 횡설수설하는 록허드는 내 생에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다. 아마 내가 그였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정은 오로지 제국의 안녕을 위한 일. 록허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니, 솔직히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폐하께서 허하셨다는 말 못 들었어요, 경? 이는 황명이라는 의미예요.”
“그럼 제가 폐하께 대화를 청하겠습니다. 저는 절대로 인정 못 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다. 당연했다. 애초에 록허드는 의무보다 자유를 원했기에 가문을 뒤로하고 네자르를 선택했던 것이니까. 아마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그건 네자르와 록허드 사이의 일이지, 나와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잠자코 듣던 아스테 왕녀가 날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황후 폐하, 감히 제가 록허드 에젤로트 경에게 한마디 해도 되겠는지요?”
“아, 그러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록허드와 눈을 마주친 아스테 왕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록허드 경. 전쟁이 끝난 후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나요?”
“아, 예. 무, 물론입니다.”
보기 드문 록허드의 말 더듬는 모습! 방긋 웃는 아스테 왕녀의 얼굴을 보니 이쪽도 보통 철판은 아닌 것 같았다.
“저와의 혼인을 거절하시는 이유가 혹시 제 지위 때문이신가요? 폐하께서는 나흘 후 제게 백작 위를 하사해 주시기로 약조하셨습니다. 또한 네클렌타는 4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핏줄. 에젤로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왕녀. 저는 절대 그런 이유로…….”
“지위가 아니라면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계신지요? 성에 그분을 위한 거처를 따로 마련해 두겠습니다. 함께 네클렌타로 올라오셔요.”
“하아, 마음에 둔 여인 같은 건 없습니다.”
“없으시다구요? 그렇다면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아스테 왕녀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럴싸한 프러포즈 없이 결정되어 마음에 차지 않으신 거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경. 지금은 제가 가진 것이 없어 화려한 프러포즈를 해 드릴 수 없으나, 나흘 후 네클렌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면…….”
답답해 미치겠는지, 제복의 위 단추까지 풀어헤친 록허드가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전혀, 아닙니다. 전혀!”
아주 잠깐 그의 고통스러운 눈빛이 아버지를 향했지만, 아버지는 이 상황의 중재는커녕 흥미진진한 얼굴로 록허드를 쳐다보고 계셨다.
“저는 평생 혼인이란 것을 고려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폐하께서는 제게 강제로 혼인을 요구하지 않겠다 약조하신 적이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왕녀의 데릴사위가 되는 일은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담 황명이란 발언은 취소하죠. 폐하가 아닌 내 명령으로 여기세요.”
내 말에 록허드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계속 같은 대화만 반복되는 것 같군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페하께 대면을 요청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약조는 약조니까요.”
록허드의 발버둥이 거칠다. 이런 식이면 일말의 수준이었던 내 죄책감도 점차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어쩐담.
록허드가 아닌 다른 상대는 아스테 왕녀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억지로라도 혼인은 하겠지. 하지만 록허드와 그녀를 이어 주려는 것은 명분도 명분이지만, 아스테 왕녀의 환심을 가장 확실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북제국을 감시하는 일이 더 수월해질 테니.
록허드를 제외하면 쟁쟁한 가문 중 남는 이라곤 대머리 노귀족 한 명과 이혼 경력 다섯 번의 청년 귀족 한 명, 그리고 능력이 부족해 저택에서 노는 백수가 소수. 누굴 네클렌타 백작으로 고르겠냐는 물음에 잠깐의 고민도 않고 록허드라 대답한 아스테 왕녀다. 그러니 나머지가 성에 찰 리 만무해.
그때, 곁으로 다가온 론이 고개를 숙여 내게 속삭였다.
“역시 그 소문이 맞나 봅니다, 폐하.”
그런데 이런 걸 속삭인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목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모든 귀족이 다 듣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소문?”
“그 소문 말입니다, 그 소문. 록허드 에젤로트 경이…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그 소문!”
……아! 론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한껏 올려 대답했다.
“론, 너무 뭐라 하지 마. 황법에 동성애가 죄라는 항목은 없어.”
“저도 록허드 경의 취향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여태 수많은 혼담을 거절해 오신 연유가 따로 있었다 여기니. 하아,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이죠.”
“연유라면 역시……?”
내 진지한 눈빛에 론이 고개를 주억였다.
“브레이트 탈리야 총사령관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젠장!”
그때였다. 창백하다 못해 새하얘진 얼굴로, 록허드가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한 게.
“절대,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간곡히 청하건대 폐하, 그 헛소문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저 작자와 그렇고 그런… 제기랄,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양 난리를 치는 록허드와 다르게 브레이트 경은 평온했다. 오히려 록허드의 고통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감격이라도 한 듯, 고개를 저은 론이 눈가를 닦았다.
“역시 록허드 경!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기사답습니다. 연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거짓을 입에 담다니!”
으음. 론의 저 표정과 말, 연기 맞겠지? 설마 진심으로 브레이트 경과 록허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총사령관님!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좀 해 주십쇼! 사령관님은 화도 안 납니까? 예?”
“흠.”
브레이트 경은 솔직히 현 분위기에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방관자라도 되는 것처럼 가만히 팔짱을 낀 그가 나, 그리고 론과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전 록허드 경이 마음에 듭니다. 딱히 동성 결혼에 거부감도 없고요.”
“헉!”
“그럴 수가!”
놀리는 거네. 확실해. 저건 분명 록허드를 골리려는 심산이야. 지상 최대 록허드의 적수답게 브레이트 경의 한 방은 곧장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하겠습니다.”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록허드가 황명을 받아들였으니까.
“아스테 왕녀와 결혼하겠습니다.”
죽음보다 결혼을 택한 건가. 아스테 왕녀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이게 바로 경험자의 노련함이라는 것일 테다. 정말 놀라워! 나는 론의 계책에 자리에서 일어나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크흑. 브레이트 경의 고백에 저리 침통한 얼굴로 결혼을 받아들이시다니! 다시 봤습니다, 록허드 경!”
론, 진심이 아니라 록허드를 꼬셔 내려는 계책이었던 거, 정말 맞지?
이후에 이어진 주제에 대한 논의도 짧지는 않았다. 체력에 꽤 자신 있다 자부하던 내가 끝자락에 흐물흐물 녹초가 될 정도였으니.
회의가 마무리된 건 한낮이 한참 지난 시간대였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귀족들 틈새에서 빠져나온 필프론츠 후작이 내게로 다가왔다.
“첫 번째 회의 주제 말입니다.”
첫 번째라면 하렘과 소속 왕녀 처분에 관한 건이다.
“정말 폐하께서 생각해 내신 방책입니까?”
“네. 왜요, 너무 터무니없었어요?”
“아니요. 오히려…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간 폐하께서 해 오신 말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정도로.”
그래서 지금 욕하는 거야, 칭찬하는 거야?
서류를 살피던 그가 천천히 턱을 쓸며 말했다.
“황법상 걸리는 요소가 몇 가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대충 편법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제대로 된 일정은 재상과 상의한 후 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주일 내로 보고서를 작성해 황후 폐하께 올리면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그럼 전 이만.”
멀어져 가는 후작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필프론츠의 보고서를 검토할 날이 오다니. 기뻐해도 되는 거겠지?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참고 쏜살같이 마차에 올라탔다. 록허드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땅이 꺼지겠군.”
한기가 느껴지는 늦은 밤이었다. 호밀 빵에 바른 버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절로 눈이 떠졌다. 활활 타오르던 벽난로의 불길이 잔잔하게 사그라든다. 잠결이었음에도 그 조그마한 불꽃의 형상을 인지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날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네자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남은 장작을 전부 소진한 뒤였다.
“땅이 꺼지다뇨?”
“잠결에도 한숨을 쉬기에.”
그랬나. 그랬구나.
네자르는 두터운 담요를 다리에 두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코 위에 걸쳐진 안경과 한쪽 손에 든 서적으로 그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회의가 많이 떨렸나? 보기와 다르게 은근히 간이 작단 말이지.”
“보기에는 어떻기에 그래요.”
“적어도 부정적인 뜻은 아니야.”
끙끙 앓던 네자르의 옆에서 그를 돌보는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네자르가 잠든 나를 침대에 눕혀 놨던 모양이다. 잦았던 기침이 사라짐에 안도를 느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저, 아무래도 보통 천재가 아닌 것 같아요, 네자르.”
자화자찬에도 네자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너무 우울한 목소리로 말해서 그런 걸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날 칭찬하기는커녕 차분하게 위로하고 있었다.
“잘했냐고 안 물어봐요?”
“얼굴이 이미 대답하고 있는데 뭘 물어? 물어보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세로군.”
“그냥,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워서…….”
“어느 부분이?”
네자르가 날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평소라면 남 욕할 짓 좀 말라며 타박했겠으나, 오늘은 그런 기분도 나지 않았기에 얌전히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전반적으로요. 처음에는 마냥 기뻤는데, 시간이 흐르고 내 판단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 썩 현명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내가 더 똑똑했으면 록허드를 이용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왕녀들 전부 죽여 버릴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잠들기 전까지 백 번쯤 한 것 같았다.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회의장에서 열심히 토론했던 기억이 존재했다. 별일 아니라 여긴 것에 비해,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를 봐, 케이트.”
네자르가 내 양 뺨을 잡아 제 앞으로 끌었다. 하루아침 만에 다소 수척해지기는 했어도, 익숙한 네자르의 이목구비가 오롯이 날 향한 게 느껴졌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것도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이상으로. 표면상으로는 하렘을 처분한 게 전부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북제국의 반란을 잠재우고 서로를 견제할 구실까지 만들어 낸 거지. 장담컨대 나도 못 해냈을 일이라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록허드에게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그놈은 좀 정신을 차려 봐야 해. 책임감이란 것도 키워 봐야 하고. 애초에 브레이트 경이 그리 대응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거다. 물론 반쯤은 놀리려는 심산이었겠지만.”
론에게 회의 전반의 상황을 전해 들은 걸까. 마치 내 머릿속에서 기억을 꺼낸 듯 여기는 바가 일치했다. 나는 야단법석이었던 회의장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전혀 안 미안해요. 오히려 멀리 보내 버려서 속이 다 시원하다구요.”
“그래그래, 우리 황후의 말이 다 맞습니다.”
애 어르는 투와 함께 네자르가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들겼다. 누가 보면 한참 앓았던 게 내 쪽인 줄 알겠네. 아무렴, 다른 이가 착각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나는 네자르의 규칙적인 고동과 상냥한 손길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