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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순간 나의 머릿속은 엄청난 난관에 봉착했다. 눈앞의 여인, 자신을 에자렛이라 주장하는 여자는 한눈에 봐도 강렬한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순박한 인상과는 정반대의 고양이처럼 솟은 날카로운 눈매, 매화처럼 붉은 입술에 자신감이 가득 밴 쨍한 목소리까지.
기억 속 흐릿한 황태후의 분위기가 나른한 백합이라면 눈앞의 에자렛 황녀는 그야말로 가시 돋친 장미였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나 역시 고용인을 대했을 때처럼 권위적인 여자가 되어야 할지, 아니면 평소의 내가 되어야 할지 급격한 고민이 들게 된 것이다.
“……일단 들어오세요.”
사람은 첫인상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 황태후의 딸이므로 낳아 기른 황태후와 다를 바 없을 테다. 그러니까 저렇게 기세 좋게 마치 제집 들어오는 듯한 얼굴을 한 거겠지.
“갑자기 찾아왔는데, 안으로 들여보내 주셔서 감사해요.”
맞은편에 앉은 에자렛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무뚝뚝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뭘요.”
기세에서 지지 않기 위해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쳐다봤으나 어째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뒤처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사람을 전부 물렀으니 편하게 하세요.”
“아, 그래요.”
시녀가 차를 내올 때까지 말 한마디 없던 에자렛 황녀는 내가 먼저 입을 열고서야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편히 하세요.”
“……아, 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뭐가 문제이기에 찻잔만 내려다보고 아무런 말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게 바로 황족의 대화법이란 건가? 역시 예절 수업을 받았어야 했던 거야?
“황녀 전하, 대체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이기에…….”
“흐흑.”
아무래도 정말 제대로 된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히 당당하게 앉아 있던 에자렛 황녀가 뜬금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질질 흘릴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문제가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흑, 흐흑…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어, 음. 아니요.”
황급히 손수건을 건네려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가방을 뒤지던 에자렛 황녀의 손에서 평균 크기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손수건이 튀어나왔던 탓이다. 설마 내가 너무 무섭게 째려봐서 겁먹은 건 아니겠지.
“놀라셨죠? 제, 제가 사실 사,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해요. 열심히 쓴 대본대로 말하면 그나마 괘, 괜찮은데… 오늘은 긴장을 너무 해서…….”
대본? 긴장?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역시 첫인상은 그 사람의 성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나는 괜찮으니까 천천히 진정하고 말해요. 기다려 줄게요.”
어쩐지 동질감이 들어 매정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연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감정을 제어 못 하는 모습을 보니 사교성이 부족해 한창 친구가 없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던 탓이다.
“그, 금방 괜찮아져요.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기다란 손가락과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거둔 에자렛 황녀가 힘겹게 뒷말을 이었다.
“혹시 에젤로트 영애께서… 앤드류의 소식을 아시려나 싶어서요.”
아. 아주 잠깐의 눈물에도 붉게 물든 눈매를 보자 입이 꾹 닫혔다. 그래, 앤드류도 황태후의 소생이었다. 그럼에도 제 친모에게 경계를 보인 게 바로 앤드류였고, 그의 친누이인 에자렛 또한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폐, 폐하의 대관식 전까지만 해도 정말 자주 찾아왔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연락도 안 되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없고…….”
아마 죽지 않았을까요. 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저 절망에 물든 얼굴을 마주하면 입이 안 열릴 것이다. 내가 마땅한 대답 없이 침만 삼키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짙어졌다.
“흑… 흐흑. 사, 사실 알아요. 충분히 알고 있는데, 그래도 혹시 대, 대답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죄송해요. 저도 알고 있는 게 없어 마땅한 대답을 드릴 수가 없네요.”
“아, 아니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첫 만남에 이렇게 추태를 보이다니…….”
그 이후 에자렛 황녀는 한참이 흐른 후에야 울음을 멈췄다. 이제는 눈가로도 모자라 뺨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곧 이전과 달리 비장해진 어조로 말했다.
“제가 진정으로 드리려 했던 말은 지금부터예요. 앤드류는……. 그래요,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죠.”
“음. 앤드류 전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해요.”
조용히 웃던 에자렛 황녀의 웃음이 뚝 멈췄다. 설마 건너 건너 들었던 그 황녀와 초면에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영애께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그랬는데, 에자렛 황녀가 날 찾아온 목적은 상상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예?”
“어머니는 평생을 저와 앤드류를 이용하면서 살아오셨고, 저와 앤드류의 인생을 망쳐 왔지만, 전혀 상관 안 하세요. 저는 긴 시간을 참다가 이제 정말 한계에 부딪혀서…….”
손수건을 쥔 새하얀 손등에 파란 핏줄이 솟았다.
“앤드류가 어찌 되는지는 상관도 안 하셨어요. 그 애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것보다 재정을 더 효율적으로 굴려서 사치를 부리는 데 더 적극적이셨죠. 곰팡이가 번져 가듯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내게 대신 복수를 해 달라고요?”
“영애, 저, 너무 억울해요. 어머니의 명에 20년을 황성에 갇혀 살았던 것보다, 앤드류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너무, 너무 억울해요!”
잘 참는 듯해 보였던 에자렛 황녀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천장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쳤다. 아니, 조심스럽게 찾아온 거 아니었어? 나는 황급히 그녀의 기행을 말렸다.
“자, 잠깐만요. 우선 진정하세요, 전하. 진정하고 천천히…….”
“도와주세요, 영애! 제가 할 줄 아는 건 고작 얼마나 더 정숙하게 걷는지, 어찌해야 고혹하게 웃을 수 있는지가 전부예요.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알았으니 조용히…….”
“그동안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앤드류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그 애에게 너무 미안해요!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어도 그렇게…….”
“조용히 하라고요!”
에자렛 황녀의 절규가 뚝 멈추었다.
“하나만 물을게요. 왜 하필 날 찾아온 거죠?”
크게 한 번 더 코를 푼 여인이 곧장 답했다.
“무, 무작정 찾아온 건 아니에요. 앤드류가 종종 영애의 이야기를 했어서…….”
“그게 끝이에요? 내 이야기를 해서 날 찾아왔다고요?”
“네. 뭐, 뭐가 잘못됐나요?”
뭐가 잘못됐냐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사교계에 나가면 너보다 더한 영애들이 천지라는, 에든의 명언이 한 번 더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좋아요. 일단. 일단은…….”
예기치 못한 일에 말을 못 잇는단 말은 바로 이럴 때 사용하는 거였다.
“일단 나도 생각을 정리해 볼게요. 그러니까 우리,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해요.”
“내, 내일요? 저는 아직 드릴 말이 너무 많은데요. 그냥 오늘 계속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를 보니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에자렛 황녀는 정말 내내 자기 이야기만 하고 떠났다.
무슨 생각으로 초콜릿 비스킷을 구웠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일단 구워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굽기는 했다. 에자렛 황녀와의 대화에서 도출해 낸 결과는 길고 길었던 고통에 비해 너무나도 단출했다.
일단, 나는 황녀의 복수를 돕기로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두루뭉술한 그림만 그리고 있었던 황녀라 정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런 와중에도 단 하나의 목적만은 동일했는데, 바로 황태후가 황성에서 쫓겨나길 바란다는 부분이었다.
“이제 데이지 너는 내가 본성에서 쫓겨나지 않기를 빌어 줘.”
비스킷이 담긴 상자를 소중히 껴안으며 말하자, 데이지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맛이 없어서요? 그렇담 아가씨는 황성이 아니라 제도에서 쫓겨나야 해요.”
“너는 거짓말이라도 좀 좋게 말해 주면 안 돼?”
“알았어요. 돌아오시기 전까지 아가씨가 폐하께 쫓겨나지 않도록 빌어 드릴게요. 온 마음을 다해서요.”
데이지의 거짓말보다 못한 빈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비는 내릴 듯하더니 결국 내리지 않았다. 대신 쌩하니 부는 바람 소리와 호위 기사가 탄 말의 발굽 소리, 그리고 마차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어우러져 본성으로 가는 내내 분위기가 퍽 괜찮았다.
내내 흐리던 하늘은 마차가 본성에 도착하자마자 뻥 뚫리기라도 한 양 비를 쏟았다. 우산을 준비해 오지 않은 터라 비에 젖은 채 성내로 들어가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깜짝 놀란 얼굴의 론이 뛰어 내려왔다.
“케이트 영애? 마차를 보고 설마 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물음이었음에도 괜히 심통이 나 삐죽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폐하를 보는 데 이유가 필요해?”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예전에는 황성에도 잘 안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이제는 하루걸러 한 번 찾아올 거야. 아니, 여기에 아주 자리를 잡을 테니까 어서 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그거야말로 제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식입니다. 제발 본성에 들어오셔서 폐하와 평생을 함께해 주십시오. 제발.”
눈 밑이 새까매진 채 웅얼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다. 가져온 비스킷 좀 나눠 주는 게 좋을까? 그래도 론의 입맛에는 잘 맞을지 모르잖아.
“아! 가져오신 상자의 상태를 보니 예전의 그 손수 만드신 비스킷 같은데, 제 것은 따로 챙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 나, 누가 준다니?”
어이가 없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데, 2층 난간에서 며칠간 그립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정작 당사자는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 멋대로 헛물만 들이켜는군.”
“네자… 폐하!”
“그래, 케이트.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내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어?”
나는 그렇다는 긍정도, 아니라는 부정도 못 하고 쪼르륵 그가 선 난간으로 뛰어 올라갔다. 내가 제 곁으로 다가올 동안 실실 웃고 있던 네자르는 팔을 뻗어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가려 했어. 어째 나는 항상 한 박자씩 늦는 느낌인데.”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여기서 뭐라 변명하든 없어 보일 것 같으니 일단 접어 둬야겠군.”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 품에 안긴 상자로 향했다.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건, 그러니까… 음. 만들어 왔어요.”
“뭐를?”
“알면서 왜 모르는 척해요? 초콜릿 비스킷.”
네자르의 얼굴이 상당히 미묘해졌다. 재주껏 밝은 미소를 품고 있었으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알고 있지. 맞아,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군. 네가 구운 비스킷을 먹은 기억 말이야. 두 번… 두 번 맞나?”
“네 번이이에요.”
“중요한 건 횟수가 아니야. 요점은 내가 이제껏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는 거지.”
이게, 죽어도 맛있다는 말은 안 하네. 하지만 나는 오늘 반드시 그 말을 들어야겠어. 눈 깜짝 않고 말없이 눈만 마주치자, 네자르가 뒤늦게 사태를 수습했다.
“맛있었어.”
“거짓말.”
“거짓말이면 어떻게 다 먹었겠어? 됐으니 어서 이리 줘, 케이트. 행여나 떨어지기 전에 이 귀한 음식을 침대 위에 모셔 둬야겠으니까.”
뭘까, 이 오묘하고도 기묘한 화법은. 네자르의 품에서 비스킷 상자를 다시 빼앗고 줄곧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론을 향해 말했다.
“론? 잠깐만 올라와서 내가 만든 비스킷 좀 먹어 봐.”
짧고 간결한 요구였을 뿐인데, 성의 메인 홀이 서늘해졌다. 네자르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으므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 게 분명했다. 이를테면 얼굴이 새까맣게 죽어 버린 론이라든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찌 제가 감히 폐하께 드릴 선물을…….”
“폐하, 론에게 하나만 줘도 괜찮지요? 분명 제 입맛에도 괜찮았고 데이지도 나쁘지 않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 입에는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케이트 영애, 설마 제게 먹여서 실험하시려는 겁니까?”
고작 음식 하나 씹어 삼키는 일에 허겁지겁 달라붙는 론을 쏘아보았다.
“실험이라니? 예전에 내 비스킷을 먹고 제과 장인이 만든 줄 알았다고 호평했던 거 기억 안 나? 눈앞에 100개가 있으면 99개는 다 먹고 나머지 한 개를 죽을 때 관 안에 같이 넣고 싶다며?”
그의 과거 행적을 낱낱이 고했으나, 양심을 내다 판 론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억 안 납니다. 아무래도 영애께서 꿈을 꾸신 모양이군요.”
록허드만큼 얄미운 인물이 또 있다면 그자는 분명 론 미네르바일 것이다. 억울한 심정으로 네자르를 쳐다봤지만, 그 역시 론의 과거 만행이 기억나지 않는지 애매모호한 얼굴로 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음.”
참 나!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비스킷을 구워서 선물해야 해?
“됐어요. 선물은 무슨, 아무에게도 안 줄 거니까 내놔요. 성에 가져가서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빼앗으려 손을 뻗자마자 곱게 장식된 선물 상자가 허공 저 위로 솟구쳐 버린다. 네자르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내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놨다.
“흠? 누가 가져가라고 했어? 한번 주면 끝이지 어딜 다시 가져가려고 해?”
귀환 선물이랍시고 준 문진을 인정사정없이 깨 버린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나는 상자를 가로채기 위해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미식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론조차 기피한단 말이에요. 맛없는 비스킷 먹어서 뭐 해요!”
“론이고 뭐고 짐이 다 먹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자꾸 네 멋대로 판단해?”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대충 저의를 파악할 수 있는 눈치와 감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억지로 먹으면 체할 거예요.”
“이상한 걱정 하지 말고 표정 풀어. 지금 너는 내 약속을 의심하며 비스킷 가지고 실랑이할 때가 아니야.”
“그럼 뭘 할 때인데요? 가서 발이라도 닦고 잘까요?”
허리에 손을 얹고 또박또박 말대답했으나, 네자르는 전혀 싫어하거나 질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손짓하며 론이 선 방향으로 몸을 숙였다.
“마침 잘됐군. 네가 본성을 찾아온 김에 내일 일정을 지금 당장 앞당기도록 하지. 론?”
“예.”
“준비가 끝나면 보고하러 오도록.”
“알겠습니다.”
가장 작은 비스킷을 하나 쏘옥 빼낸 네자르가 선물 상자를 시종에게 건넨다. 왜 하필 가장 작은 크기를 골랐을까. 조금 더 큰 걸 먹어도 되잖아.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
“무슨 일정을 말하는 거예요? 아무런 말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런 말도 없었기는. 내가 분명 사람을 보내서 내일 오전에 본성으로 찾아오라고 했잖느냐.”
코웃음을 친 네자르가 비스킷을 한입 베어 물며 내 어깨를 계단 위로 끌었다.
“잘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오물오물 열심히 씹기는 하는데, 뭔가 비스킷을 씹는다기보다는 육포를 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미를 향한 욕구가 아닌 생존을 위한 행위. 아무리 봐줘도 네자르의 비스킷 씹는 모양새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자르가 말한 준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와 함께 응접실에서 론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낯선 장소였기에 굳이 시간을 보낼 구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황성, 그것도 황제의 거처답게 2층 작은 응접실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짐에도 세공 하나하나가 여전히 섬세한 오르골이라든지, 한쪽 벽면의 반을 차지할 만큼 커다랗고 아름다운 풍경화를 구경할 땐 감탄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응접실을 둘러볼 동안 지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시선이 있었으니…….
“나 좀 그만 보면 안 돼요? 이러다가 얼굴이 다 닳겠어요. 아직 살날이 창창하단 말이에요.”
바로 이 모든 것의 주인인 네자르였다. 기다란 몸을 소파에 잘도 누인 그는 오가는 대화 한번 없는 고요함 속에서 내내 나를 쳐다보고, 아니 훔쳐보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자제를 요청했으나 그는 지고의 황제 폐하답게 코웃음으로 내 의견을 묵살했다.
“닳는다고? 내가 아니면 누가 감히 네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봐? 죽을 때까지 평생 나만 볼 테니까 닳을 일은 절대 없을 거다.”
그런 주제에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만큼 바빠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나는 살피고 있던 오르골을 다시 내려놓고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폐하, 우리 오늘 보면 언제 또 봐요? 다음 만남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기다릴 필요 없어. 제위에 오른 직후 처리해야 했던 큰일들은 어젯밤에 완전히 다 처리했거든. 만나고 싶다면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언제든 나에게로 와.”
이런 확답이면 기쁜 티를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새벽? 새벽에 와도 된다는 건, 잠든 폐하를 깨워서 같이 산책 가도 된다는 거죠?”
“아마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저 애매한 답은 뭐람. 푸시식 식은 내 표정을 의식했는지, 작게 헛기침을 한 네자르가 나의 뺨을 톡톡 두들겼다.
“짐도 사람이라 쉬고 싶을 때는 쉬고 싶다오. 부디 그대가 이해해 주시게.”
이제 보니 발을 빼고 싶을 때만 묘하게 권위를 과시하네? 아니, 새벽에 산책하기 싫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하지. 굳이 돌려 말해야 해?
바쁘신 몸이니 늦은 밤 피곤한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표현하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이 괜히 빈말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확 빼자, 뺀 손을 다시 잡아챈 네자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기 팔 위로 얹어 놨다.
“네가 자꾸 그런 표정을 지으니 괴롭히고 싶어지지. 새벽 4시도 괜찮아. 일단 오기만 해.”
“그냥 날 데리고 살래도요? 그럼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까 굳이 새벽에 만나러 올 필요도 없잖아요.”
아주 잠깐 고민의 흔적이 지나간 후, 네자르가 대답했다.
“좋아. 여기서 또 안 된다고 말하면 앞으로 어지간히 조르겠군.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도록 하지.”
“자꾸 미룰 생각 말고 언제까지 고민할지 딱 말해요!”
“내일모레까지. 됐어?”
그때까지라면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그럼 그날부터 나도 본성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지?
“폐하.”
마침 론이 응접실에 들어서며 네자르를 불렀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위층으로 모실까요?”
“지금 가지. 이리 와, 케이트. 네가 해결해야만 하는 아주 중대한 일이 있거든.”
주, 중대한 일이라니. 내가 아니면 안 될 중대한 일이 황성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하나로 귀결됐다. 황성 예절 교육. 아무리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네자르라지만, 제국의 명예와 존속이 달린 일이라면 예절 같은 건 배울 필요 없다던 호언장담을 무를 수도 있었다.
……그래, 뭐. 까짓것 배우라고 하면 제대로 배우면 되지!
그러나 정작 론이 안내한 장소는 예절과 상당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여기, 황성 맞아요? 아니면 우리 혹시 비밀 통로를 통해서 제도로 나온 건가?”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십, 수백 가지의 보석들. 3층에 마련된 거대한 방 안에는 제도 보석상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숫자의 보석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앞서 방으로 들어선 네자르가 날 향해 등을 돌리며 웃음 지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아직 내 성이고, 네가 보고 있는 것들은 준비된 물량의 반에 불과해.”
“바, 반? 이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들어가 가장 맨 앞 장식대에 놓인 티아라를 살폈다. 이 영롱한 분홍빛 다이아와 그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진주들. 보석에 큰 관심이 없는 나에게도 충분히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이 티아라… 설마 오팔 황후 폐하의 초상화에 그려진 것과 같은 물건이에요?”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곳에 전시된 26개의 티아라 모두 과거 실제 국혼에 사용되었던 티아라입니다. 모두 당대 제국 최고의 장인들이 제작한 물건들로, 어마어마한 값어치와 명성을 지니고 있죠.”
국혼에서 황후가 사용했던 티아라는 모두 국보로 지정이 된다. 즉, 이 방 안에 보관된 26개의 보석을 팔면 영지 하나, 아니 둘은 가뿐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건 갑자기 왜 보여 주는 거야?”
내게 주려는 건 절대 아닐 테고, 단순히 보여 주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그게 중대한 일은 아니잖아?
“네게 주려고.”
티아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다시 네자르를 응시했다. 방금의 짧은 한마디는 농담이었나,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하하. 역시 잘못 들은 거겠지?
“……잘못 들은 것 같아요. 다시 말씀해 주실래요?”
“네게 선물로 줄 물건들이라 했다. 정확히는 혼인 선물이지.”
그니까 국보로 지정된 26개의 티아라를 내 혼인 선물로 주겠다고?
“예, 예물은 이미 받았잖아요.”
“그건 에젤로트의 예물이지 네 것이 아니잖아. 넌 이제 에젤로트가 아닌 내 사람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주는 것은 다른 이와 나누는 게 아니라 온전히 너의 것이 되는 거지.”
온전히 내 소유인 선물을 주는 것과 그 선물이 국보여야 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혹시 미치셨어요?”
설마 제국을 주겠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을까. 나중에는 이 본성까지 주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미치지 않았고, 문제는 이다음이야. 우리 혼인식에 사용하게 될 반지와 네 목걸이, 귀걸이, 팔찌, 티아라 모두 새로 제작해야 하거든. 론?”
론이 그의 뒤편에 선 시종에게서 수십 권의 책을 넘겨받았다.
“읏차.”
딱 봐도 두께가 엄청나 보이는 서적들은 문 옆 테이블에 차근차근 쌓아 올려졌다. 꽤 무거운지, 헉헉 숨을 내쉬던 론이 날 쳐다보며 말했다.
“총 스무 권입니다. 제국 전역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보석상들이 자신들의 작품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선별해 보낸 작품을 정리한 카탈로그지요.”
과장이 아니라 카탈로그가 아니라 역사책이라고 해도 믿을 양이었다.
“이 카탈로그 안에 있는 작품들의 실물 모두 이 방 안쪽에 전시되어 있으니 편하게 둘러보시면 됩니다. 개수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고르시면 장인들이 디자인을 종합하여 영애의 맞춤 보석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이, 이걸 다 보면 열흘이 흐르지 않을까?”
맨 위의 책을 대충 훑던 네자르가 표지를 덮었다.
“열흘이 부족할 수도 있지. 역시 예절 수업을 제외하길 잘했어. 그 시간에 내 성으로 와서 보석이나 고르도록 해. 마음에 드는 건 가져가도 되고.”
이어서 네자르는 다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럼 이 부분은 이제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고… 옆방으로 가자.”
이제 여기서 느긋하게 구경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만, 남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여기서 더 해야 하는 게 있는 건 아니죠?”
“말했잖아. 네가 해결해 줘야만 하는 아주 중대한 일이 있다고.”
확실히 혼인 선물을 받는 게 중대한 일은 아니지. 그런데 진심으로 저 국보들을 나에게 주려는 거야? 내가 다 팔아먹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상관없다는 걸까.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에게 질질 끌려가 옆방에 도착했다. 대단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여겼으나, 커다란 거울과 이곳저곳에 펼쳐진 물건들을 제외하면 응접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곧 바짝 굳은 자세로 서 있던 여성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몸을 숙인다. 황성 입구에서 이곳까지 허겁지겁 뛰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에젤로트 영애.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영애의 웨딩드레스 제작 작업을 책임지게 된 디자이너, 마르코 블랑슈입니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네자르가 소파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웨딩드레스 정도면 내게 맡겨야 하는 중대한 일이기는 하지. 마치 큰일이라도 발생한 양 진중한 표정이었던 네자르가 떠올라 숨을 죽이고 웃었다.
“영애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할 수 있다니, 제 평생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겁니다. 간단하게 천과 무늬, 그리고 디자인을 비교해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러도록 하세요.”
그런데 여기서?
네자르는 그러려니 한다고 해도, 대충 둘러봐도 론과 네자르의 호위 기사인 툴드를 비롯해 외간 남자가 너무 많았다.
“자, 여기 거울 앞에 똑바로 서세요. 턱은 내리시고 정면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결혼식장에 입장할 때처럼요.”
하긴, 치수를 재는 건데 네자르가 있건 없건 상관없나.
뻣뻣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는 인형이 된 동안, 거울 너머로 차분하게 깜빡이는 네자르의 검홍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눈은 아주 잠깐의 쉴 틈도 없이 오롯이 나만을 향했다. 디자이너인 마르코 역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에 부담감이 가득했다. 이 일이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중요한 건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좋은 건지.
나는 거울 속의 네자르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때요?”
자신을 불렀음을 깨닫고 네자르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뭐가.”
“내 가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지 않아요?”
강조해 주기 위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몸을 살짝 틀었다. 흠. 확실히 가슴에서 허리로 떨어지는 선은 봐 줄 만해.
“크흠.”
크게 헛기침을 한 론과 툴드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난 그들을 상관 않고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떠들었다.
“카론 옆에서도 유일하게 주눅 들지 않는 부분이라구요. 내가 또래 다른 영애들보다 몸매가 좀, 아니 꽤 많이 발달한 편이라서요. 그중에서도 가슴이랑 엉덩이가…….”
“하아, 케이트?”
그래, 엉덩이 부분은 말하면서도 너무 갔다 싶었지. 디자이너가 내 말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상체를 훑어볼 동안, 소파에 앉아 있던 네자르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천장을 노려봤다.
“나도 아직 못 본 걸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어?”
고개를 내려 마주치는 눈빛이 그렇게 살벌할 수 없었다. 화가 난 이유가 내가 부끄러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먼저 보고 싶어서였다니.
“아니면 나도 여기서 옷을 벗을까?”
디자이너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동시에 나는 네자르가 했던 말의 저의를 알아채고 단번에 공감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나도 제대로 못 본 걸 어디 디자이너가!
“아니요! 절대 안 돼.”
“그렇담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입술을 다물고 있어. 알겠지?”
그의 충고대로 이후에는 말 한마디 없이 얌전히 서서 디자이너의 일을 도왔다.
……잠깐, 옷을 맞추려면 디자이너가 네자르의 벗은 몸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욕구를 참았다. 어차피 말로는 못 이길 게 분명했으므로.
***
다음 날 오전에는 작위 수여식이 있었다. 집안에 큰 변고가 있지 않은 이상 카발 제국은 매달 마지막 주에 작위 수여식을 거행하는데, 가문을 잇기 위한 후계자들이 전국에서 모여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제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제국의 실권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이번 달은 유독 많은 귀족이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에젤로트 가문의 에든과 엔테라 가문의 판시온, 악토르 가문의 캐롤라인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축하해, 오라버니. 이건 내 자그마한 선물인데… 오라버니에게 주는 건 아니고, 헤이즐 영애에게 전해 줘.”
에든이 내가 건넨 선물을 받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많은 아버지께서 날 돕기 위해 이른 시기에 백작 위를 넘기셨다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보였다. 네자르로부터 제국의 국보 26개를 선물 받은 내가, 네자르의 사랑을 잃고 비참하게 나가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별걸 다 준비했구나.”
“폐하께 받은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이곳저곳에 선물할 생각이야. 그렇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전해 줘.”
“그래도 되는 거니?”
“응. 폐하께서 당신의 눈치는 보지 말고 원하는 곳에 편히 사용하라 하셨어.”
그러니까 날 신경 쓰는 데 시간 허비하지 말고 에젤로트에서 행복하게 잘 살란 말이야!
“고맙다. 헤이즐이 좋아하겠군.”
“정말 차 한 잔도 안 하고 바로 가게?”
“상단도 방문해야 하고… 작위를 물려받은 만큼 해야 할 일이 워낙 많구나. 애초에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온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렴.”
내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마차에 오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차에 몸을 실으려는 순간, 멈칫하고 뒤를 돌아 내게로 다시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케이트, 요즘 기행이 잦던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고용인들을 차례대로 에젤로트에 보내는 일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손짓으로 시종을 무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의 불순분자를 고르고 있어. 아마 서너 명 정도 더 도착할 거야. 혼인을 치르기 전에 다시 황성으로 부를 생각이니까… 잠깐만 부탁할게.”
조용히 내 말을 듣던 에든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거, 놀라운 일이구나. 케이트 네가 그런 일을… 혹여 돕고 있는 자가 있는 게냐? 위험한 건 아니고?”
“폐하께서 보내신 내 호위 기사의 수만 두 자리야. 이런 상황에서는 위험하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대신 나나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말해야 한다. 혼자서 절대로 무모한 짓을 해선 안 돼.”
“물론이지.”
한 발자국 물러서 다시 시종을 불렀다. 문을 연 시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 에든은 이어서 성 앞에 기립한 고용인들을 살폈다.
“착각인가? 네 성의 시녀와 시종 들은 유독 표정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냐?”
“이유?”
이유야 있지. 이틀에 한 번씩 직장 동료들이 죽어 가는 줄 알거든.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들에게 친절한 어투로 물었다.
“오라버니께서 너희 표정이 안 좋은데 이유가 있냐고 물으시네. 무슨 일이라도 있니?”
가장 맨 앞에서 내 시선을 받은 시녀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답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렇대, 오라버니. 내 성의 고용인들까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에든은 곧 별말 없이 마차에 올라 성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다시 성으로 돌아가 카탈로그를 확인하려는 때, 급히 뒤따라온 데이지가 커다란 목소리로 날 붙잡았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또?”
돌아온 길 그대로 따라가 다시 성을 나가니,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민 캐롤라인이 부채를 펄럭이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일전에 말씀드렸었죠? 한 번은 꼭 찾아오겠다고.”
그런 말을 했었나. 잊었다고 하면 마음속에 담아 둘까 싶어, 자연스레 기억하는 체했다.
“잊어 주길 바랐는데 기어코 오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오늘 백작 위에 오르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축하해요.”
“모두 폐하의 은총 덕분이지요.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은혜입니다.”
활짝 웃는 캐롤라인의 얼굴은 일전에 그 정신 나간 소릴 하는 여인이었다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성숙하고 품위 있어 보였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제가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서요. 이제는 혼자도 좀 지겨운 감이 있어요.”
“지겹다니, 배부른 소리 하시기는. 폐하께서 영애를 그리 감싸고도신다던데… 지금이야말로 한창 좋을 시기 아닌가요.”
“내 말은 여자들끼리의 담소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카론은 혼인 준비, 릴리는 학업에 바빠 얼굴 보는 건 꿈도 못 꾸거든요.”
“그 두 분이 안 계시면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 말씀하십니다.”
변명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요. 그 둘, 그리고 백작 당신까지 더해서 셋이 제가 친우라 표현할 수 있는 전부거든요.”
“친구 없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도 이야기하시네요.”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내 말에 토를 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저를 친우라 표현한 게 그리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곧장 악토르로 돌아가야 해서 말입니다. 오늘은 잠깐 인사차 들른 거예요. ……사람들을 잠깐 물러 주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따라 나온 데이지와 시종을 보냈다.
“들어가 봐.”
고용인들의 뒷모습에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캐롤라인은 이내 큰 키를 살짝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본성에 갔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요. 케이트 영애의 성에서 사람이 행방불명된다는 소문을요.”
그건 이상한 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실에 기반을 둔 소문인데.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물었다.
“누구에게서요?”
“시녀로 보였는데, 론 미네르바 보좌에게 거듭 황제 알현을 요청하더군요. 재정 쪽 이야기를 반복하는 걸 봐선 황태후의 사람인 것 같았어요. 듣기로는 선황께서 타계하신 후 황태후 성의 재정이 반 토막 났다고 하더라고요.”
황태후. 역시 그쪽과 연결된 인물이 있었던 건가.
“몰래 들은 거라 확실치 않아요. 그래도 영애에게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온 겁니다. 황태후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인물이라.”
“고마워요.”
“고마울 것까지야.”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캐롤라인이 직접 마차 문을 열고 그 위에 올라탔다. 내가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겁 없이 소문을 내? 이걸 어떻게 괴롭혀 준담.
부랴부랴 뛰어온 시종이 열린 마차의 문을 닫으려는 때, 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 잠깐만요!”
다시 문을 당기고 캐롤라인에게 물었다.
“영애… 아니, 백작님. 혹시 그 시녀의 생김새를 알 수 있을까요?”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동색 머리칼에 키가 상당히 큰 중년의 여인이었어요. 눈썹이 매우 짙은 험악한 인상이었고, 아. 들창코였던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시녀의 얼굴이 그림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준이다.
“백작님, 혹시 나한테 20분만 더 할애할 생각 없어요?”
“없어요. 바빠서 안 돼요.”
캐롤라인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나는 절대 손에서 놓지 않을 기세로 마차 문을 부여잡았다.
“데이지! 내 침실로 가서 은박이 장식된 붉은 정사각형 상자를 가져와!”
“영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캐롤라인이 떠나지 못하도록 버티는 동안, 데이지가 거친 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던 상자를 가져왔다.
아, 젠장. 어머니께 주려고 했던 물건인데…….
나는 상자를 열어 캐롤라인의 앞으로 내밀었다.
“카사블랑카 쉐도우. 제국력 203년, 코튼 황후가 국혼에 사용했던 티아라예요.”
깜짝 놀란 캐롤라인이 고개를 길게 빼 상자 안을 살폈다.
“이게 그 유명한 카사블랑카 쉐도우? 세상에, 명성대로 굉장히 화려하네요.”
“백작, 괜찮다면 이 티아라로 당신의 20분을 살게요.”
개구리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캐롤라인이 티아라가 든 상자를 밀어냈다.
“미쳤어요? 이건 국보예요. 애초에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감히 팔고 자시고 할 물건이 아니라고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혼인 선물이랍시고 국보를 받았던 어제 낮, 아무리 그래도 이 선물은 아닌 것 같다며 극구 사절했었다. 하지만 네자르는 마음에 안 들면 팔아서 용돈으로라도 쓰라며 내게 억지로 떠넘겼다.
이 귀한 걸 팔라니? 차마 그럴 순 없었기에 몇 가지 골라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해 주려던 참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주셨으니 제 물건이죠. 원한다면 그분께 보증서도 받아 올게요.”
캐롤라인이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날 훑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겠지요?”
“물론.”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과 별개로 표정을 보니 이 티아라가 탐나기는 탐나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래서, 저랑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나와 어딜 좀 가 줘야겠어요. 일단 내 성의 마차로 갈아타죠.”
악토르 가문의 문양이 걸린 마차로 이동하면 괜히 그녀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새로운 마차에 밀어 넣고 고용인들이 모여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인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황성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 누구지?”
이제 조금 눈치가 생겼는지, 잠깐의 정적 후 시녀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 저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야. 내가 지금 당장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아마 황태후 성의 시녀일 텐데, 고동색 머리칼, 장신, 짙은 눈썹, 들창코를 가진 험악한 인상이야. 누군지 알고 있어?”
부려 먹으려면 그에 맞는 보상을 주어야 한다. 가만히 고민하던 나는 시녀가 가장 절실히 바라고 있을 선물을 주기로 했다.
“정확히 맞힌다면 개밥 신세에서 제외해 주도록 하지.”
대답은 곧장 나왔다.
“아, 아마… 아니, 분명 에린 시녀일 겁니다. 입성한 지 2년 정도 된 시녀인데, 빨래할 때 몇 번 대화해 본 적 있습니다.”
“가서 부르면 만날 수 있겠지?”
“제가요? 예, 그리 나빴던 사이도 아니니까…….”
“좋아. 그럼 만나러 가자. 지금 당장!”
시녀를 이끌고 캐롤라인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두 여인은 마차가 출발한 이후에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이제 15분 남았어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마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내게도 생소한 장소였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 햇빛에 반짝이는 유리 온실과 그 옆에 한 몸처럼 자리한 고성.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 아래로 보이는 자태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황태후의 성이었다.
“저 유리 온실은… 황태후께서 관리하시는 백장미 온실 아닌가요?”
“맞아요. 일단 이곳에서 내려야 해요. 빨리요!”
길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도망갈지도 모른다. 나는 캐롤라인과 시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 온실로부터 제법 먼 거리에서 내려 빠르게 걸어갔다. 시간이 조금 소요되었으나 성 뒤편으로 돌아가니 오순도순 모인 시녀와 하녀 들이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설마 내가 생각한 그건 아니겠지요. 그렇죠?”
“백작이 생각한 게 무엇인지 몰라서 대답을 못 해 주겠네요.”
나는 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시녀를 향해 명했다.
“내 이름을 사용해도 좋으니,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에린 시녀를 이리로 데려와. 대신 반드시 그녀만 데려와야 해. 잘만 데려온다면 개밥에서 제외해 주겠다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 줄 테니까. 가능하겠지?”
“예.”
작게 고개를 숙인 시녀가 후원 쪽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 뒷모습을 보던 캐롤라인이 내게 물었다.
“개밥이요?”
“우리 성 사람들이 개밥을 무서워하거든요.”
“흠. 그건 좀 특이한 일이네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딘가로 사라졌던 시녀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뒤에는 에린 시녀로 보이는 여인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캐롤라인 못지않은 큰 키, 언뜻 보이는 얼굴은 윤곽만 보임에도 굉장히 사나운 인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고동색 머리칼.
“저 시녀, 작위 수여식에서 봤던 그 시녀네요.”
그야 내가 데려오라고 시켰으니까. 가까이 다가온 에린은 캐롤라인이 말했던 외양과 정확히 일치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온 시녀가 에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영애, 이쪽이 에린 시…….”
짜악!
“꺄악!”
나는 에린이 고개를 숙이기 전에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강하게 팔을 휘둘렀던 탓인지, 커다란 덩치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지 않은 것을 봐선 꽤 강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참고 넘어가려다 하도 괘씸해서 찾아왔다. 너, 내가 누구인지는 알지?”
걸리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땅으로 향했다.
“영애?”
의문이 담긴 캐롤라인의 부름이 작게 들려왔다. 이를 악무는 듯한 에린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
“내가 누군데?”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이십니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이지?”
“황후가 되실 분입니다.”
문득 오래전, 엔테라 성의 카론을 홀대하던 시녀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강단 있게 굴 수 있는 데는 네자르 덕이 가장 큰 것 같다.
“내가 비록 아직은 황족이 아니나, 이후 네게 다시 물었을 때 말이 달라진다면 그건 황족 기만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해야 할 거야.”
“저, 저는…….”
“네가 감히 나에 대한 불경한 소문을 입에 담았느냐?”
시녀의 호흡이 급속도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될 예정이며, 이번에는 단순히 화풀이 선에서 그칠 생각이야. 그러니 괜히 화 돋우지 말고 어서 대답해.”
“예, 예. 제가 감히 영애의 거짓된 소문을 입에 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귀가 다 아플 정도로 엄청난 목청이었다. 인상을 찡그리고 확언을 듣기 위해 되물었다.
“정말 내 거짓된 소문을 입에 담은 거, 맞지?”
“예!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요오!”
덩치가 커서 그런가,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큰지. 설마 황태후를 불러 모면하려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캐롤라인이 황급히 옆으로 다가왔다.
“케이트, 대체 무슨 생각이죠? 물론 억울한 마음은 십분 이해해요. 하지만 이렇게 요란스러우면 황태후께서 오실 수도…….”
“여, 영애.”
창백한 얼굴의 시녀가 다급하게 나를 불러 턱을 들어 올리니, 성 후원에서 새하얀 얼굴의 미녀가 화려한 자수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오고 계시는군요. 젠장. 역시 그 티아라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캐롤라인이 뱉은 욕설에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필요한 건 얻어야 했기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었다.
“백작님, 들으셨죠? 에린 시녀의 자백이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이 사달이 황태후에게 알려지면 분명 귀찮아질 수 있단 말이에요!”
“제가 그런 것도 생각 않고 무작정 왔겠어요? 걱정 말고 대답이나 해요. 확실히 들었죠?”
네가 확언을 줘야 내가 나중에 황족 기만죄로 이용해 먹지! 계속해서 붙들고 늘어지자 캐롤라인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들었어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
짜악! 들었다니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겁이 얼마나 없으면 내 앞에서 황태후를 불러?
“너.”
짜악!
“내가 귀싸대기를 얼마나 잘 날리는데.”
짜악!
“감히 진위 여부도 모르는 막말을 입에 담아?”
겁을 상실한 에린의 뺨을 날릴 때마다 황태후와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게 보인다. 여기서 더 괴롭히다간 꼬리가 잡힐 수도 있겠어. 황급히 등을 돌려 시녀와 캐롤라인의 등을 밀었다.
“이제 달려요.”
“예?”
시녀는 얼떨결에 나를 따라 뛰었지만, 캐롤라인이 계속 멍청하게 서 있는 탓에 손목을 붙잡아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달리라고! 이왕이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어, 어디로요?”
“그야 당연히 우리가 타고 온 마차죠!”
에린의 죄를 확실히 하고 벌을 주는 장면까지는 머릿속에 그려 놓고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그 이후는 순전히 내 기지에 달린 일이었다.
이미 시녀가 자신의 입으로 죄를 불었으니 도망치는 게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닐 테다. 다만, 여기서 황태후와 신경전을 벌이게 되면 시녀의 죄가 희석될 수도 있었다. 크흠. 물론! 말싸움할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역시 난 구제 불능의 바보인가 봐. 그렇게 우리는 허겁지겁 내달려 황태후의 성을 벗어났다.
***
황태후 시녀의 뺨을 괴롭히고 돌아온 그날 밤.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가 힘겹게 잠을 청했던 것 같은데… 눈 한 번 깜빡이니 다음 날이 도래해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인 것으로도 모자라, 순식간에 거둬진 암막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야 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아가씨! 오늘 폐하께서 성을 찾아오시기로 한 날이잖아요!”
“……네자르가?”
“네, 어서 일어나셔요.”
아, 젠장. 그러고 보니 오늘 내 성으로 오기로 했었지. 꾸역꾸역 일어나 데이지를 따라서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로 돌아왔을 땐 간단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렇게 일찍? 네자르가 나를 찾아온 건 입성 후 처음 있는 일이라, 고용인들 모두 허둥지둥하느라 바쁜 눈치였다.
“데이지, 고용인들 분위기는 어때?”
“굉장히 안 좋아요. 예전에는 주방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도 자주 했는데 요즘은 친한 사이끼리만 붙어 다니는 것 같아요. 거하게 싸웠는지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하녀들도 있고…….”
“그랬어? 나는 전혀 몰랐네.”
“정신머리가 있으면 아가씨에게만큼은 숨기고 싶겠지요.”
여태 수면욕이 가시지 않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데이지를 향해 물었다.
“이제 정확히 몇 명 남았지?”
“일곱 명이요. 언제쯤 멈추실 생각이신가요?”
“이 성에 너랑 나만 남을 때까지?”
“어머, 그것참 낭만적이네요. 저는 혼자서도 아가씨를 잘 모실 자신이 있어요.”
“정말 신뢰가 안 가는 말이구나.”
잠을 못 잔 탓에 몸이 피곤하기는 해도 아침부터 부드러운 생크림 케이크를 먹어서 그런가, 기분이 썩 괜찮았다.
“아가씨!”
입 안으로 포크를 구겨 넣는 와중, 시녀가 급히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화,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벌써? 아직…….”
케이크 하나 천천히 먹었다고 1시간이 훌쩍 흐른 건가? 깜짝 놀라며 시계를 쳐다봤지만, 약속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아직 오전 9시밖에 안 됐는데? 설마 내 침실의 시계가 고장 난 거니?”
“아니요. 9시 맞습니다. 폐, 폐하를 안으로 모실까요?”
시녀의 말에 몸을 일으켜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음. 아직 화장 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상태가 영 안 좋네.
날 따라 옆에 선 데이지가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빗질했다. 세상 급해 보이는 시녀와 달리 여유롭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냥 나가시는 건 어떠세요? 솔직히 말해서 폐하는 아가씨가 무슨 꼴이든 상관 안 하실 텐데.”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해? ……그래도 일단은 내려가자. 약속 시간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 보란 듯이 이른 시간에 찾아오다니. 따져야겠어!”
나는 부러 쾅쾅 발소리를 내면서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 불만을 온몸으로 느끼라는 의미에서.
“네자… 아니, 폐하!”
네자르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 의자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무더위를 의식한 가벼운 정장 차림의 그는 마치 록허드와 이곳저곳을 누비던 시절처럼 산뜻하고 쾌활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잘생긴 네자르의 이마를 노려보며 한 소리 뱉었다.
“이렇게 아침부터 찾아오면 어떡해요! 나 아직 화장도 다 못 했는데!”
그 정도야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게 손짓한다. 역시 쿵쿵 소리를 내며 네자르 옆에 섰다. 그는 작게 웃음을 흘리곤 내 머리칼을 당겨 제 코에 묻었다.
“나쁘지 않은데? 보고 싶은 마음에 좀 일찍 나왔다고 타박할 줄이야.”
“3시간이 조금이에요?”
“조금이지. 자주 안 봤을 때는 익숙해서 그러려니 여겼었는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생각하니 조급함이 더 커졌어.”
“그건 폐하 사정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화장도 못 한 꼴로 폐하를 뵈어야겠어요?”
“매정하기는. 옛날에는 무슨 말만 하면 좋아서 까르르 웃었던 주제에…….”
혀를 찬 그가 나를 지나쳐 다시 성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네자르가 가져온 것으로 예상되는 고풍스러운 외양의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종에게서 무언가 전해 들은 네자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옮겨라.”
나는 무표정으로 상자가 옮겨지는 모습을 살피는 네자르 옆에 섰다.
“어째 눈에 익숙한 상자들이네요.”
“남은 카탈로그와 네가 받아 가기로 한 티아라, 목걸이, 귀걸이… 하여간 그 비슷한 것들이야. 네가 늦장을 부려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 것 같아 전부 이 성으로 옮길 생각이다.”
“이, 이걸 다요?”
티아라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 픽 웃은 네자르가 손수 손을 들어 내 턱을 닫았다.
“그래, 어차피 네 물건이기도 하니까. 누구에게 선물하든지, 개밥에 섞어 사냥개에게 먹이든지 네 편한 대로 해라.”
네자르에게는 아무래도 상식이란 것이 부족한 것 같았다. 저 수많은 귀중품을 내가 편한 대로 할 수 있겠어?
“너무… 과해요. 평생 다 써 보기는커녕 선물도 못 할걸요? 그리고 혼인하면 본성으로 들어갈 거잖아요.”
“그렇담 후에 이 성을 네 보석함으로 쓰면 되겠군. 그렇지?”
에젤로트에서도 귀족 중에서는 상당히 호화롭게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황성으로 오니 그간의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복잡한 심정으로 상자가 줄어드는 모습을 쳐다볼 동안 네자르가 묶어 두었던 자신의 말을 끌고 왔다.
“일은 시종들에게 맡기고, 너는 이제 나와 황성 구경이나 가자. 돌이켜 보니 제대로 구경시켜 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꽃보다 아름다운 네자르 황제.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입을 벌리며 웃고 있는 정체불명의 눈썹 없는 괴물. 으으, 상상만 해도 최악이야! 나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이 꼴로는 절대 못 나가요. 내가 제대로 준비하고 나올 때까지… 엄마야!”
허공으로 번쩍 들리기 무섭게 내 엉덩이가 안장에 안착했다.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나는 제국을 탈탈 털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 주는데, 어째 부인께서는 종일 불평이군.”
“뭐든지 과하니까 그렇죠!”
“그렇다면 앞으로 과한 것에 익숙해지도록. 멀리서 따라와라, 툴드. 이랴!”
이럴 때 사용하는 진리의 명언이 있다. 포기하면 편해. 그래, 여기서 굳이 더 이해하려 하지 말자. 하늘 아래 나와 네자르가 있고, 나와 네자르가 서로를 좋아하는데 과한 것이 무슨 소용이랴?
우리 둘을 태운 말은 후원을 넘어 사냥터로 쓰이는 언덕을 향해 뛰어갔다. 나는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빛을 손등으로 막으며 투덜거렸다.
“왜 하필 지금 나가는 거예요? 너무 더워서 얼굴이 다 탈 것 같은데.”
“정오가 되면 햇볕이 더 강해져서 밖에 있기가 더 힘들어.”
“그럼 마차를 이용하면 되죠.”
“마차는 너무 느리잖아, 바보야.”
바보라니. 그에게서 참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었다.
말은 언덕을 크게 돌아 뒤쪽으로 나아갔다. 이쪽 길은 당장 어제도 사용했던 길이라 눈에 아주 익숙했다. 서, 설마 황태후의 성으로 가는 건 아니지? 다행히 네자르의 말은 황태후의 성에서 한참 모자란 곳에 멈춰 섰다.
“이곳이 네 성에서 가장 가까운 성이야. 예전에 내 어머니가 사용하셨던 성이지. 지금은 비워진 상태지만.”
본성이 웅장하고 내 성이 고아하다면 지금 우리 앞에 자리한 성은 투박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황성 내 자리 잡은 성만 두 자리일 텐데, 하나하나가 이리도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걸 보면 역시 제국의 심장은 심장인 듯싶었다.
“지금의 내 성은 누구의 성이었어요?”
“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다. 내가 지내고 있는 성이 네자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공간이라니.
“지금은 순전히 황제 멋대로 정하는 추세지만, 백 년 전 공녀들이 득실거렸을 때까지만 해도 황성에서 보유한 성의 개수가 황제의 총애를 나타내는 척도였지. 역사상 가장 많은 황성을 가진 공녀는 바벨케루크 왕국의 이올레타 공녀였어. 무려 여섯 채를 소유했다더군.”
황제의 유희를 위하여 속국의 공녀를 본성에 채워 넣는 하렘은 백 년 전에 폐지된 제도이다. 그 제도가 여태 남아 있었다면 나 역시 공녀들과 네자르의 총애를 다투며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버텨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성은 왜 나한테 준 거예요?”
“왜겠어? 본성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답하며 네자르가 말의 머리를 돌렸다. 나는 나풀거리는 머리칼을 부여잡으며 그의 애정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나밖에 없음에 안도했다. 이윽고 그의 말은 크게 돌아온 언덕 위로 올라섰다.
“여기는 알아요. 매해 사냥 대회가 열리는 장소죠? 요즘 내 취미가 여기서 총 쏘는 거예요.”
얇게 뜬 눈으로 주변을 훑자, 정수리 위에서 네자르의 웃음이 들려왔다.
“어쩐지 여우의 씨가 다 말랐더라니.”
그는 조금 느긋이 말을 움직였다. 우리는 황성 내 태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대를 천천히 유영했다. 더우니 그늘로 가자며 짜증을 내도 네자르는 햇볕을 좀 쬐어야 건강하다며 내 제안을 다 걷어차 버렸다.
“케이트.”
“네?”
“얌전히 있지는 못할망정, 사고는 또 왜 친 거냐?”
그러다 무심코 나온 한마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어, 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사고라는 단어 한 마디에 어제 황태후의 성에서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 다 들었어요?”
“이곳 전체가 내 손바닥 안인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그럼 나에 대해 불쾌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요?”
다른 문제를 수면으로 끌고 와 그의 물음을 얼버무리려 했으나, 네자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파문 없이 잔잔했다.
“그 불쾌한 소문이 거짓도 아니면서, 누가 보면 정말 억울한 양 얼굴이 아주 새빨갛구나. 조그만 게 여우 같기는.”
헉. 고개를 돌릴 자신이 없었기에 말갈기 위로 머리를 푹 숙였다.
“거, 거짓말이 아니라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했지, 케이트. 이곳 전체가 내 손바닥 안이라고.”
“……으음.”
이럴 땐 역시 못 들은 척하는 게 최고지. 나는 네자르의 의문을 전부 무시하고 하고 싶었던 말만 줄줄 뱉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 시녀가 함부로 내 이야기를 입에 담는 걸 보고 정말 불쾌했단 말이에요. 아직 혼인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제대로 혼쭐을 내 줬을 거예요.”
어제 혼쭐을 내 줄 만큼 내 줬으나, 황태후를 불러온 행위는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내가 멧돼지처럼 씩씩 콧김을 내뿜는 게 느껴졌는지, 네자르가 고삐를 쥐던 손을 풀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황성에 들어와 나와의 혼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네가 현재 황족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 네 말대로 요점은 내 황후가 될 여인이 불쾌감을 느꼈다는 부분이지.”
잠깐의 침묵이 그와 나 사이를 맴돌았다. 이윽고 손을 거둔 그가 내 정수리 위로 무게를 실었다. 무게를 봐선 팔이 아닌 턱을 기댄 것 같았다.
“케이트.”
“말하세요.”
“황태후 성의 사람들, 전부 참수형이라도 시킬까?”
“……네?”
나는 당혹감에 젖어 고개를 홱 돌렸다. 황성으로 들어온 이래 티아라를 혼인 선물로 주겠다는 발언 다음으로 어이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돌려도 네자르의 시선은 먼 곳 어딘가를 향해 조용히 깜빡이기만 했다.
“참수형은 심했나? 그렇다면 황성에서 쫓아내는 정도로 적당하겠어?”
“그건…….”
솔직히 매우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내 심신이 편한 것과 별개로 네자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라면 네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겠지만, 이왕 쫓아내는 김에 조금 더 확실히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이를테면 주변인의 증언이라든지.”
가볍게 흘린 말이었으나, 증인이라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캐, 캐롤라인 악토르 백작이 그 자리에 저와 함께 있었어요. 시녀가 잘못을 시인했던 순간에요.”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쥐고 네자르를 쳐다봤다. 다행히 그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겠어. 운이 좋으면 내일 안으로 끝낼 수 있을 거다. 애초에 황후를 욕보이는 건 내 체면과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기도 하니, 이 김에 싹부터 잘라 내는 편이 좋겠군.”
값비싼 국보 티아라를 재물 삼아 캐롤라인을 끌고 가길 잘한 것 같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 이럴 때 쓸모 있구나! 구제 불능의 바보란 말은 취소야. 난 역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네자르가 체면을 차리는 일까지 도왔으니 이건 그야말로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
나는 말하려던 입술을 다시 닫고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며 네자르가 채근했지만, 고민되는 만큼 입에 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지금의 네자르는 황태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가 진 후, 자정에 가까워진 늦은 밤. 데이지를 통해서 자그마한 쪽지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자는 에자렛 황녀로, 황성 서쪽 느릅나무 숲 옆의 고성에서 만나자는 글이 쓰여 있었다.
“황녀가 직접 전해 줬어?”
“아니요, 황태후 성의 시녀처럼 보였어요. 듣기에 성에서 쫓겨나는 게 이미 기정사실화되어서 한탕 크게 얻고 가려는 것 같았어요.”
금화라도 한 자루 쥐여 주었다는 건가.
말을 타면 근위대에 걸려 번거로워질 수 있었기에 까만 망토를 몸에 두르고 호위 기사 둘과 함께 성을 나왔다. 서쪽 느릅나무 숲 옆이라니, 설명만 들었을 때는 낯설었으나 실제 도착한 후에는 익숙하게 고성의 문을 밀 수 있었다. 에자렛 황녀가 만남을 요청했던 장소가 앤드류를 만났던 유령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에자렛은 홀 왼편의 나선 계단 아래에서 등불과 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꽤 먼 곳까지 부르셨네요.”
“죄송해요. 처음으로 찾아갔던 날은 적당히 변명해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아서요.”
“여기는 괜찮다는 건가요?”
“앤드류의 연락이 끊긴 후 종종 찾아왔던 장소예요. 의심하지는 않으실 거라 확신해요.”
처음 만났던 날에는 말더듬이에 감정 제어도 제대로 못 하는 여자였는데, 오늘은 어째 무언가 조금 달라 보인다. 대본을 써 놓고 외운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건가.
“혹시 방금 그거, 생각해 둔 말이에요?”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에자렛 황녀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마, 맞아요.”
“방금 질문에 대한 답은 준비해 오지 않았나 보네요.”
“어, 엄청 깜짝 놀랐어요! 다음에는 조금 더 치밀하게 준비해야겠어요.”
여기서 치밀해 봤자 뭔가 더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저는 왜 부르신 거죠?”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얼굴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이번에는 내가 대본에 있던 질문을 건넨 모양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기에, 제가 먼저 움직였어요. 보통 악을 몰아내려면 작전 회의 같은 걸 하지 않나요? 하다못해 암살자를 고용한다거나!”
네자르가 나를 상대할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었는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기분. 갈피를 잡기 어려우니 솔직하게 내 심정을 말하기로 했다.
“내가 황녀 전하를 어떻게 믿죠? 전하는 이제 황태후의 유일한 혈연이에요. 동시에 가장 가까이 지내는 인물이기도 하죠. 아무리 그럴듯한 복수심을 품고 있다 해도 나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확신컨대 이 대답도 대본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자렛 황녀의 성정상 의심스럽다는 말에 저리 초연할 수가 없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이윽고 들고 있던 등불을 바닥에 내려놨다. 본래에도 황족답게 고아한 움직임을 가진 여성이었으나, 이번에는 왠지 더 절도 있고 경직된 행동처럼 보였다.
“제가 비록 사교 생활이 부족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저의 진심을 전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한데 동양 철학 고서에 이런 말이 적혀 있더군요.”
이어서 에자렛 황녀는 자신의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 피를 보여서라도 증명하라!”
등불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은색 단도였다. 아, 아니, 그 전에 피를 보여서 증명한다는 건 뭐야? 대체 무슨 고서를 보면 저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거지?
“잠깐, 잠깐만요. 일단 진정하고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을 꽉 감고 단도를 치켜들 수 없었다.
“부디 이것으로 제 진심이 전달되기를!”
“화, 황녀!”
자려던 사람 불러서 이 무슨 기행이야, 미친 여자야!
나는 기겁하며 몸을 던져 팔을 뻗었다. 설마 처음부터 날 곤경에 빠뜨리려 계획한 일이었을까? 이 멍청이 케이트! 너는 그런 불상사 하나도 생각 못 하고…….
“저의 머리카락을 받아 주셔요!”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중에는 새빨간 피 한 방울도 없다. 대신 금실 같은 머리칼이 쓸모를 다한 커튼처럼 먼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라고?
하도 어이가 없어 황당무계한 얼굴로 쳐다봤으나, 에자렛 황녀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어머니와 시녀들이 대륙에 소문난 향유란 향유는 모두 가져와 비단처럼 곱게 빚어낸 머리칼이에요. 제가 비록 겁이 많아 피를 볼 용기는 없으나… 워, 원하신다면 눈썹도 밀 수 있어요!”
“돼, 됐으니까 제발 멈춰요! 눈썹까지는 필요 없어요!”
이 여자는 가만두면 뭘 할지 모르는 여자다.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 이럴까? 나는 황당함 다음으로 솟구치려는 분노를 잠재우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황태후께서 그렇게 귀이 여겼다는 머리칼을 잘라 내도 되는 건가요?”
“이, 이건 핏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저의 다짐이니까요.”
말 하나는 참 그럴싸했다. 동양의 고서에도 그런 식으로 적혀 있었나 보지?
“제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요? 사실 전 제가 잘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황녀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구요.”
“불똥은 이미 튈 만큼 튀었어요. 명색이 황족이면서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고, 어머니의 명에 따라 온실 속 화초처럼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황성에서 쫓겨나는 게 더 낫다고 여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솔직한 심정으로 이제껏 내게 보인 그녀의 모습들이 거짓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황태후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근거부터가 그럴싸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 앤드류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알았어요. 당신을 믿어 볼게요.”
“야, 야호!”
환호성도 눈치를 봐 가며 지른 에자렛 황녀가 불쑥 몸을 숙여 바닥에 널브러진 제 머리칼을 모았다. 이렇게 보니 볼품없이 잘려 나가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금발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머리카락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져가기 편하시게 종이도 들고 왔어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준비해 두었던 종이 위로 머리칼을 올려놓는다. 지금 나보고 저걸 가져가라고? ……그래,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 가져가서 벽난로 속 장작 사이로 쑤셔 넣든 하자.
“그, 그럼 전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어머니의 서신을 몰래 빼서 훔쳐볼까요? 아, 아니면 일과를 세세히 적어 보내 드릴까요?”
나는 그녀의 품에서 머리칼이 든 종이 뭉치를 빼앗아 간 후 고개를 저었다.
“일단 가서 그 엉망이 된 머리부터 다듬으세요. 지금 당장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 그럴까요?”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소리 나게 손뼉을 친 에자렛 황녀가 등불을 다시 손에 쥐었다. 머리는 분명 개가 풀을 뜯어 먹은 것처럼 중구난방인데, 워낙 단아하고 고운 얼굴이다 보니 그런 머리마저 신비롭게 느껴졌다.
“아마 내일 혹은 모레 영애를 찾아가실 거예요.”
누구인지는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황태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으로 변하시니까 부디 상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셨으면 해요.”
나는 에자렛 황녀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잠시 벗어 두었던 망토를 다시 뒤집어썼다. 착각이 아니라면 방금 살벌한 단어를 들었던 것 같은데.
“상해…를 입힐 정도로 화를 주체 못 하시는 건가요?”
“지금은, 요.”
끼익. 문이 열리고 밤하늘에 식은 열기가 바람이 되어 불어왔다. 앞서 밖으로 나선 에자렛 황녀의 머리칼이 크게 나부끼다 가라앉는다.
“예전에는 그 어느 때든 냉철함을 잃지 않으셨는데 말이죠. 바뀐 자신의 처지를 인정 못 하시는 거예요.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그녀의 얼굴은 오랜 옛이야기를 더듬는 것처럼 흐릿하게 울렁였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인 에자렛 황녀는 유령 성 뒤편 후원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에자렛 황녀의 예측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황태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다음 날 해가 뜨기 무섭게 황태후가 내 성의 문을 두들겼으니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그리 여기자 도망치는 방법에 대해 모색하려 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내가 바로 나가마.”
서신을 무시한 것으로 모자라 제 성의 시녀 뺨에 손자국을 만들어 놨으니 화날 만했다. 어쩌면 에자렛 황녀와 밀회를 나누고 있다는 것 역시 이미 파악했을 수도 있지. 으음. 그런데 밀회라는 단어를 이럴 때 사용하는 게 맞나? 어째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불건전한 느낌인데.
“티 세트가 왜 이렇게 화려해?”
“데이지가 첫 만남인 만큼 영애의 체면을 살려야 한다며…….”
응접실에 차려진 빵과 치즈, 꿀, 과일의 숫자만 해도 고기만 없지 저녁 식사를 방불케 하는 양이었다.
“하긴, 내가 아직 점심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까.”
티 세트라 표현하기 애매모호한 티 세트를 확인하고 성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저, 화, 황태후…….”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황족도 되지 못한 여인의 시녀가 어딜 졸졸 따라오느냐? 저리 썩 꺼지지 못해?”
황태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너무 크고 거칠어, 한때 론이 그녀를 묘사할 때 사용하던 ‘우아하고, 황족스럽고, 위압을 풍기는’과 같은 묘사가 다른 이의 것처럼 느껴졌다.
“한가하게 티 세트를 확인할 때가 아니었구나. 어서 나가자.”
“예.”
나는 황태후를 맞이하기 위해 황급히 데이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홀로 뛰듯이 나갔다. 그리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코앞에 마주한 여자의 눈동자는 그림자에 잠긴 불꽃처럼 선명하게 번쩍이는 검홍색이었다. 한여름의 장미처럼 풍성하게 피어나는 화려함을 간직한.
곧 악에 받친 얼굴이 내 뺨을 내리쳤다.
“건방진 년!”
짜악!
“아, 아가씨!”
이 여자가 미쳤나? 국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황후 예정자의 뺨을 후려쳐? 심지어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 얼마나 감정을 실어서 쳤으면 몸이 다 휘청거릴 정도다.
“내 서신을 무시한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지. 네자르… 아니,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은 방만이야 기꺼이 넘어갈 수 있었어. 그런데… 방만하기를 얼마나 방만하면 감히 내 시녀의 뺨에 피멍을 만들어 놓느냐? 네가 정녕 황태후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그 대단한 베딜라 오드리네라고 하기에는 마주하는 데 공포가 아닌 짜증이 밀려온다. 황태후가 내 뺨을 후려친 직후의 찰나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사고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대응해야 속이 시원하면서도 엘리제 로망드가 그러했듯, 사람을 시켜 날 해치려 하지 않을까. 어떻게 행동해야 네자르와 에젤로트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어떻게 말해야…….
“지금 저 때리신 거예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일단 나도 똑같이 손을 내리쳤다. 짜악! 내 손짓 한 번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즉시 황태후의 얼굴이 멍해진다. 고귀한 후작 가문 태생이 뺨을 때려는 봤어도 맞아 봤을 리는 만무할 테다.
“이, 이…….”
얼굴을 붙잡고 말을 못 잇는 황태후를 대신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제 손이 너무 매우셨어요? 저 나름대로 정도껏 손찌검했는데 말이죠. 그래도 황태후께서 손목에 힘을 주신 것보다는 덜 주었어요. 제가 어른 공경은 할 줄 아는 여인이라.”
“이 미친 것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아, 아가씨!”
붉은 눈동자 못지않게 빨갛게 달아오른 황태후가 나를 덮치려 했으나, 급히 다가온 데이지가 그 앞을 막아섰다.
“네가 감히 황태후인 내 앞을 막아? ……오호라. 그래, 네가 이 미친 계집애의 시녀인 모양이구나. 내 시녀와 똑같은 꼴로 만들어 줄 테니 당장 이리로 와!”
억척스레 팔을 뻗은 황태후가 데이지의 머리칼을 쥐고 흔들었다.
“꺄악!”
여기서 나는 다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데는 다 생각한 바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이건 그야말로 전형적인 악당의 표본인데…….
황태후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기사가 뚜벅뚜벅 걸어와 황태후의 손아귀 안에서 데이지를 빼앗아 갔다.
“고정하십시오, 황태후.”
어라. 툴드 경이 왜 여기에 있지?
“이년이고 저놈이고 겁 없이 내 앞을 가리는구나!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황태후다! 돌아가신 선황의 하나뿐인 비란 말이다!”
“황태후 성 후원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문제라면, 화를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시녀에게 책임이 있던 것으로 결론 나지 않았습니까.”
“캐롤라인 악토르와 이 영악한 에젤로트 여우의 계략임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이상 에젤로트 영애께 손을 대신다면, 같은 공간에 계실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네가 감히 무어라고…….”
“폐하의 명입니다.”
옆에 선 내가 한겨울의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데이지가 화를 삭이지 못하는 얼굴로 반쯤 풀어 헤쳐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내가,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구나.”
황태후의 어투와 목소리는 놀라우리만치 안정을 되찾았다.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부여잡은 황태후가 비틀거리며 등을 돌렸다.
“결례를 사죄할게요, 에젤로트 영애. 방금은… 확실히 나의 실수였어. 부디 잊어 줬으면 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태후는 나타났던 것과 같이 폭풍처럼 사라졌다. 옅게 부어 욱신거리는 내 뺨만 남겨 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