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태풍이 불어오던 지역은 에젤로트까지였다는 점이었다.
차기 황후로 예정된 여인, 즉 나를 태운 황성 마차는 이를 데 없이 화려한 행렬과 함께 여럿 영지를 지나 제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바깥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는데, 제도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냥 부끄러운 게 아니라 죽을 만큼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만세!”
혼자 에젤로트를 떠나는 고뇌에 빠져 있느라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도가 황성으로 통하는 거대한 길목이란 사실을.
“황제 폐하 만세!”
기다란 행렬의 양옆으로 수많은 제도의 신민들이 황제 폐하 만세를 연호했다. 황후는커녕 황태자비도 되지 못한 나 역시 이미 황후로 떠받들리고 있었다. 신민들을 배려한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수치사 하길 바라는 것인지 마차의 속도는 느려질 대로 느려진 후였다.
괜찮아, 케이트. 이게 바로 카발 제국의 황후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시련인 거야. 이 시련만 버티면 넌 황후라 불리는 자격을 얻을 수 있어!
똑똑.
“잠시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드디어 황성 앞에 도착한 모양인지, 문이 열리고 훤칠한 키의 기사가 내 얼굴을 확인했다.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붓고 화장이 번진 걸 보면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확실하군.”
그런데 하필 내 신분을 확인하는 기사가 록허드라니. 얄미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2시간 만에 느끼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록허드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뒤따라오는 마차에서 데이지를 데려와. 빨리!”
“왜?”
“화장 수정해야지! 이 꼴로 들어가면 기선 제압을 못 한단 말이야!”
“……기선 제압? 누굴 제압해야 하길래 그래?”
“누구든. 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록허드가 곧 데이지를 데려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는지, 데이지는 가져온 가방에서 화장품과 머리핀을 허겁지겁 꺼냈다.
“검문관이 록허드 도련님이어서 천만다행이었네요!”
지친 몸을 기댄 채 데이지에게 얼굴을 맡기는 동안,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록허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입성을 환영합니다,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 영애에게 무궁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마차가 다시 출발하자 데이지의 손길이 더 급해졌다. 눈에 불을 켜고 집중하던 그녀는 내 입술을 붉게 칠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젤로트를 나오면서 울기라도 하셨어요? 눈이 아주 탱탱 부었네! 황제 폐하께서 보시면 기겁하시겠어요.”
“그 사람은 고작 눈 부은 것 하나로 놀라지 않아. 이것보다 심한 장면도 많이 봐 왔거든.”
“별걸 다 자랑하시네요.”
그리 말하는 데이지의 표정은 나보다 더 긴장되어 보였다. 마치 혼인 예정자와 첫 만남을 가지기 일보 직전의 여인처럼 숨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모습이 그렇게 우스울 수 없었다.
“왜 자꾸 웃으셔요, 아가씨?”
“네가 나보다 훨씬 더 긴장한 게 웃겨서. 이것 봐, 속눈썹이 덜덜 떨려.”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돌연 비장해진 얼굴이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당장 아가씨의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다구요. 제가 시녀들의 기선을 제압해야 아가씨의 생활이 더 편해지지 않겠어요?”
찡한 마음에 데이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타지에 와도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물론 네자르와 록허드가 있다고는 해도, 내 사생활까지 깊이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고마워, 데이지! 역시 나는 너밖에 없어.”
“저만 믿으세요. 제가 아가씨의 황성 생활도 에젤로트 못지않게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벌컥. 감격에 겨워 서로 깊은 포옹을 나누는 순간, 마차 내에 밝은 햇살이 떨어져 내렸다.
“케이트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그쪽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 아닌가?”
헉. 데이지의 숨 삼키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온다. 나는 그녀를 밀어내고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잘생긴 눈매, 잘생긴 콧등, 잘생긴 입술, 잘생긴 턱 모두가 그대로에 편안한 셔츠 차림의 옷차림 또한 여전했다.
한여름 태양에 달아오른 손끝이 내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에 나는 환하게 피어나는 웃음을 주체 못 하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네자르!”
그가 내 몸을 안아 마차에서 내리자 수십 명의 기사와 가신이 기립해 선 모습이 보였다.
시, 실수했다. 이제 네자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어색함을 꾸욱 참아 내며 그의 팔 안에서 벗어나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안녕하세요, 폐하. 에젤로트의 카트리나가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풉.”
풉? 나는 황제 앞에서 지켜야 할 채신과 예절도 잊고 고개를 들어 네자르를 쳐다봤다. 자신의 광대가 움찔거리고 있는 모습을 그는 굳이 손을 들어 가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날 내려다봤다.
“케이트, 너…….”
“잠시, 잠시만요, 폐하. 일단 고정하시지요.”
네자르가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론이 허겁지겁 우리 사이로 걸어 나왔다.
“아직 일주일도 안 됐습니다. 한 달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만, 적어도 보름은 체통을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케이트 영애를 성까지 모시고…….”
“이봐, 론 미네르바.”
영문 모를 론의 호들갑을 가로막은 네자르가 팔짱을 끼고 그를 응시했다. 목소리는 엄했으나 표정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였으며, 그 탓인지 황제의 위엄 따위는 쥐꼬리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감히 누가 짐의 앞을 가로막는가? 오늘도 업무에 치여 밤을 새우기 싫으면 어서 썩 비켜라.”
얼마나 잔혹한 경고였으면 론이 어깨를 떨며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네자르의 뒤편에 선 그의 이마에는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둘이서 뭘 하는 거지. 내 입성 기념으로 콩트를 보여 주는 걸까.
“일단 네 성으로 가자, 케이트.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는 본성에서 지낼 수 없어. 그러니 네 성에 짐을 내리고 내 성에서 지내면 돼.”
“저, 폐하, 제가 방금 드렸던 말씀을 벌써 잊으신…….”
급히 끼어드는 론을 무시하고 네자르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세상에나. 내가 무려 황제 폐하와 손을 잡고 있어!
“그리고 괜히 입에 맞지 않는 폐하 같은 호칭은 사용하지 않아도 돼. 난 신경 쓰지 않으니 편히 네자르라 부르는 게 어때? 마차에서 내릴 때 네가 바짝 언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기껏 격식을 차리고 허리까지 숙였는데 얼마나 웃겼으면 네자르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환영하는 건지, 아니면 원체 황제를 졸졸 쫓아다니는 건지, 우리 뒤로 길게 줄 선 가신과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 입성한 거잖아요. 전 여기서 2주 가까이 예절 수업을 받고 폐하와 혼인할 예정이라구요.”
“음? 예절 수업을 받기 싫다며 수년 내내 징징대던 건 어디의 누구였지?”
잡은 손에 깍지를 낀 네자르가 제 몸 가까이 나를 당겼다. 자신도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얌체 같은 표정이 뺨 가까이 다가온다. 사람 많은 데서 정말! 기분 좋게! 나는 수줍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다 어릴 때 이야기잖아요. 이제는 아니에요. 네자…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노력해야죠.”
“그거야말로 전혀 달갑지 않은 노력이야.”
달갑지 않다니, 네자르의 말에 충격을 받고 고개를 들었다. 계속해서 날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시선을 틀자마자 곧바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시간 쓰지 않아도 되니 노력은 네가 하고 싶은 데 쏟아. 부지를 줄 테니 정원을 가꾸든가, 온실을 세우든가, 혹은 네가 사냥한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도 되고. 싫은 일 억지로 해 가며 괜히 우울해하지 말라는 소리야.”
“멋대로 지내라고요? 그건 황후가 아니라 말 많고 탈 많은 귀족 영애잖아요. 지금의 저랑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요.”
“내 말이 그 소리지. 바꾸려 하지 마. 내가 황위에 올라 있는 한 너만은 그럴 필요 없어.”
그 말과 함께 부드럽게 퍼져 가는 네자르의 웃음이 설탕처럼 달콤했다. 이런 네자르의 사랑을 의심하라니, 머리가 달렸고 귀가 달렸고 눈이 달렸다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망언이었다. 그의 눈은 보는 내가 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깊고 애틋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던 남자였다.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데, 그동안 부정하고 있었다고? 이쯤 되면 부러 내 고백을 받기 위해 모르는 척했다는 가설이 더 알맞았다.
“그럼 바로 본성에 들어가고 싶어요. 수업은 받을 테니, 내 침실과 짐을 폐하의 성으로 옮겨 주세요.”
그의 주장에 걸맞은 정당한 요구라 여겼건만, 네자르의 표정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음, 그건…….”
“안 돼요? 그것만 안 될 건 또 뭐예요?”
심지어 가장 중요한 거잖아! 계속해서 따지고 들자 그가 난감한 웃음으로 걸음을 더 빨리했다.
“다른 문제는 없고, 단지 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무슨 마음의 준비요? 나랑 같은 침실을 쓸 준비 말이에요? 그럼 지금 여기서 기다려 줄 테니 어서 하세요, 그 준비.”
제국을 다 주겠다 호언장담을 했으면 제국 속의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도 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내가 우뚝 멈춰 서자 열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걷던 자들 역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더불어 네자르의 흔들리는 시선이 내게로 틀어박힌다. 으음. 역시 그런 거구나?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가 이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정확히 한 경우였다. 앞뒤 없이 몸부터 들이댔을 때. 예를 들어 호수에 빠진 채 흠뻑 젖은 상태로 안기려 한다거나, 어디 만져 보기라도 하라며 바짝 몸을 들이대거나… 흠흠. 뭐, 이런 유?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앞으로 1분만 더 기다려 줄 테니 어서 알겠다는 확답을… 엄마야!”
황제의 약점을 잡은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올려다보는데, 돌연 내 다리가 허공으로 붕 떴다. 뭐, 뭐야?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날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자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갑자기 이 무슨… 그렇구나!
“지금 내빼려는 거죠? 맞죠? 이런 치사한 남자 같으니라고! 황제씩이나 됐으면서 같은 방을 쓰겠다는 확답도 못 줘요?”
“그건 천천히 하자, 케이트. 넌 어찌 된 애가 부끄러움도 없어?”
반박하기도 전에 걸음을 멈춘 네자르가 나를 내려놨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포기했다 싶었는데 이미 우리는 퍽 화려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멀고 요란스러운 길 오느라 고단했을 텐데, 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 내일 저녁까지는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함께하지 못할 거야.”
“그놈의 바쁜 스케줄은 대체 언제 끝나요?”
“모레.”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춘 네자르가 기다란 행렬을 이끌고 멀어졌다. 멀찍이서 따라오던 데이지가 쭈뼛쭈뼛 내 뒤에 섰다. 으레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마다 그러하듯, 내 새로운 거처 앞에 시녀와 시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젤로트 영애.”
시녀장이 허리를 굽히는 것을 시작으로 열 명에 가까운 인원이 뒤따라 내게 예를 차렸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흐음. 좋아, 그럼 가장 먼저…….”
세피아 부인의 조언, 그 첫 번째.
“사냥을 해 볼까?”
둥지에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말라.
타앙!
“이런. 새 한 마리를 잡느라 세 발이나 낭비하다니.”
옆에 선 시종이 바짝 굳은 채로 내게서 총을 받아 간다. 자신의 새로운 주인이 사냥을 취미로 삼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받은 총을 어찌할 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시종을 향해 아주 야비한 웃음을 그렸다.
“잘 들고 있도록 해. 귀족이 아니거나 총기 사용권을 갖지 않은 자가 총기를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사망자가 없으면 매질로 끝나겠지만, 사망자가 있을 시 곧바로 사형이야.”
“예.”
“그리고 다들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말에 올라탄 상태에서 내 사냥을 보좌하러 온 열 명의 고용인을 응시했다. 실제 사냥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나, 순전히 겁주기 위해 데려온 자들이었다.
“내가 시력이 원체 안 좋아서, 먼 곳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동물로 착각하고 쏜 적도 많거든.”
헉, 하고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내 경고와 동시에 멀찍이 흩어져 있던 시녀와 시종이 부랴부랴 가까이 뛰어왔다.
“에젤로트에 있었을 때도 사고가 잦았어. 실제 다섯 명 정도가 머리통이 날아가서 뒷수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
물론 거짓말이다.
“이건 너희에게만 말하는 비밀인데… 사실 그때 죽인 놈들은 전부 평소에 눈엣가시였던 것들이야. 음료를 가져오라 시켜 놓고 실수인 척 빵!”
총구를 뺏어 가까이 선 시종의 이마로 들이댔다. 잔뜩 겁먹은 시종이 기겁하며 넘어졌으나, 탄창은 이미 텅 빈 상태였다.
“……뭐, 전부 에젤로트에서 있었던 일이고. 황성에서는 조금 다르지 않겠어?”
빈손을 뻗자 멍하니 서 있던 시종이 허겁지겁 총탄을 건넸다. 나는 땀에 기울어진 모자를 다시 쓰고 부러 중얼중얼 읊었다.
“폐하께서 부지를 하나 새로 준다고 하셨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몰아넣어서 사냥개 훈련용으로 쓸까.”
어둡게 가라앉은 고용인들을 뒤로하고 다시 말의 옆구리를 찼다.
“더 안쪽으로 가야겠으니 서둘러 따라와. 난 느리고 눈치 없는 애들이 딱 질색이야. 가장 늦은 사람은… 얼굴 기억해 둘 테니까, 알아서 조심해야 할걸? 이랴!”
말이 앞으로 뛰쳐나가기 무섭게 등 뒤로 허겁지겁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좀 심했나. 오늘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으니 이를 잘 닦고 자야 할 것 같았다.
겁주려는 의도가 잘 통했는지,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정원을 둘러보던 내 옆으로 데이지가 다가왔다.
“아가씨,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 왔다. 뭘 물어보려나. 고용인들에게 겁을 줬냐고? 무서운 소문이 돌고 있다고?
“사냥하실 때 너무 신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셨나요?”
“……응?”
“아가씨께서 아실까 모르겠는데, 사냥에 집중하실 때 표정이 워낙 살벌하시거든요. 점심을 준비하는 내내 하녀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어요.”
그야 당연히 좋지 않겠지, 내가 그리도 겁을 줬는데.
“무슨 일이냐 물으니 계속 숨기려고만 하고. 아무래도 아가씨를 보고 많이 놀란 것 같더라고요. 하긴, 그 누가 아가씨처럼 천방지축에 말괄량이 괴짜를 황후 예정자라 여기겠어요?”
“너, 지금 나 욕하니?”
“그럴 리가요! 제 말은… 아주 잘하셨다는 거예요!”
함박웃음을 지은 데이지가 정원에 곱게 핀 이름 모를 꽃을 꺾어 내 귓가에 꽂았다. 함부로 황성 물건을 훼손하면 잡혀간다는 걸 모르는 걸까.
“사냥에 따라나설 때까지만 해도 콧대만 높던 것들이 지금은 겁에 질려 얼마나 벌벌 떨던지! 아주 제 속이 다 후련하네요!”
“다른 건 없었어? 흠흠. 알고 보니 살인마였다든지…….”
“살인마요? 아하하! 그런 수위 높은 헛소문은 잘못 입 밖에 꺼냈다간 큰일 나요. 아가씨는 제국에서 황제 폐하와 황태후 다음으로 귀하신 몸이잖아요. 여기서는 입에 담기만 해도 황족 기만죄로 잡혀 들어갈걸요?”
“나도 모르는 걸 너는 어디서 들은 거야?”
“당연히 공부했죠. 제가 실수해서 아가씨가 곤란해지시면 안 되니까요.”
아하, 그렇구나. 그것참, 흥미로운 정보였다. 연루되기만 해도 기만죄가 생긴다는 거지?
“데이지, 이 성의 고용인들은 전부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거야. 그러니 굳이 눈치 볼 필요 없어.”
“어머, 그래요?”
“대신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내가 데이지를 황성에 데려온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부터 아주 나태해져야만 해.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왔다는 티를 풀풀 풍기면서.”
“제가요?”
“응. 대신 네 대단한 눈썰미로 열 명 중 가장 수상해 보이는 두 명을 찾아. 가장 외출이 잦거나, 개인 시간을 꾸준히 갖고, 특히 서신을 자주 쓰는 사람을 눈여겨봐. 난 네가 선택한 두 사람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성에서 내쫓을 거니까.”
말없이 눈만 감았다 뜨던 데이지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그녀는 이제껏 보아 온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경계를 무너뜨려서 허점을 보이게 만들라는 거죠? 아주 잘 이해했어요! 저만 믿으세요. 건방지게 다른 사람과 내통하는 자는 아주 싹을 잘라 버릴게요.”
그 이유는 말하지도 않았건만, 데이지의 지레짐작은 거의 예언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사람 살펴보는 일 하나는 정말 잘해요. 아가씨께서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지만, 아아주 옛날에 에젤로트의 불순자들을 처리하는 데 앞장선 것도 바로 저였다구요. 그러니 절 믿고 맡겨 주세요! 말한 김에 어서 가서 확인해 봐야지.”
그리 말한 데이지는 새로 생긴 일거리에 그리도 신이 나는지 펄쩍펄쩍 뛰며 사라졌다. 서른 살이라는 사실에 의심이 갈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뭐, 열심히 한다잖아?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홀로 정원을 쭈욱 둘러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여럿 찾아냈으나, 애초에 나는 네자르의 본성에서 함께 지낼 생각이었기에 건들지 않기로 했다.
“황성에서 외부로 나가는 물건은 어떻게 처리하니?”
“제3 행정실에서 포괄적으로 처리합니다. 영애께서는 필요시 저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너희가 제3 행정실로 간다는 거지?”
“예.”
내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시녀는 아직도 나와 눈을 마주치기 두려운지 바짝 마른 입술을 수십 번 핥았다.
“이번에는 성을 좀 살필 겸, 내가 다녀올게.”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세피아 부인에게 방문 일자를 알리는 서신 때문이었다. 제3 행정실에서 바로 보낸다고 황태후가 눈치채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 황성을 누비며 행정 건물로 가는 길에 그녀가 떠올랐다. 에자렛 황녀. 그렇게 자존심 높은 앤드류가 챙겨 주길 바랐던 인물.
만약 그녀가 황태후를 감싼다고 제 몸 하나 불사르면 어떻게 해야 하지. 늦은 밤에 납치라도 해 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앤드류의 부탁을 무시해?
“다녀오셨습니까. 저녁 식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30분 후에 내려올게.”
“예.”
그 걱정은 성으로 돌아와 황성에서의 두 번째 식사를 입에 넣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에젤로트에서는 고민을 나눌 에든도 있었고, 심술궂지만 기분을 환기하게 하는 록허드도 있었는데. 황성에는 정말 철저하게 나 혼자다.
일정에 큰 변동이 없다면 내일부터 예절 수업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필요 없다고 거절하면 받지 않아도 될 그 수업.
“입맛이 없어. 다 치우도록 해.”
결국 나는 평소 식사량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침실로 올라왔다.
며칠 내내 우울함을 주체 못 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밤늦게 찾아온 데이지가 내게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아직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걸 거예요. 며칠 지내면 편안해질 테니, 너무 우울해하지 마셔요.”
“알아.”
그녀의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따뜻한 우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날은 나름대로 푹 잠들 수 있었다.
***
머리가 개운해진 나는 일단 예정된 예절 수업을 모두 취소하고 오전 사냥을 떠났다. 이제는 열 명 다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 세 명씩 나누어서.
“어제 저녁 식사는 정말 최악이었어.”
내 첫인상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하루가 흘렀음에도 곧장 반응을 보인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창백해진 시녀들의 안색을 내려다보면서 총구를 쓰다듬었다. 최대한 상종 못 할 미친년처럼 보이게 얄미운 웃음을 걸친 채로.
“난 폐하께서 보내 주신 너희를 함부로 내쫓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식사, 청소, 태도 할 것 없이 내 눈에 자꾸 거슬리면 나도 조치를 취해야만 해. 이해하지?”
“예, 예.”
이럴 때 한 번씩 눈을 얇게 뜨며 턱을 쓸어 줘야 한다. 그리고 한 명, 한 명과 확실히 시선을 맞추어서 공포를 심어 줘야 하지. 전부 카론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사고사로 꾸미고 갈아 치우는 게 가장 빠르겠군.”
헙. 가장 오른쪽의 시녀가 공포에 질린 숨을 들이켰다. 제 소리가 크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는지, 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즐거운 거지?
“아무튼… 조심하도록 해. 폐하께서는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 어떤 죄도 용서해 주시거든.”
황태후와 아무런 상관 없는 무고한 자들일 수도 있다. 오히려 네자르의 위세가 하늘을 뚫고 있는 걸 상기하면 그럴 확률이 더 높지. 하지만 돌다리를 두들겨 건너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미안해, 무고한 친구들. 며칠만 버텨 줘!
사냥과 점심 식사가 끝난 후에는 다시 성을 나서기로 했다.
“오늘은 번화가로 나갈 거야. 너희 중 제도에 가장 밝은 사람이 누구지?”
그새 또 협박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고용인들이 하나둘 손을 든다. 절대 손을 들고 싶지 않았으나 살아남기 위해 타협한 움직임처럼 보였다.
“뒤쪽의 금발 시녀? 네가 나를 따라와. 그리고 마차 대기시켜 줘. 지금 당장 나갈 거니까.”
그렇게 나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된 시녀와 제도의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드레스와 디저트에 돈을 펑펑 사용했다. 내가 잔인하고 사치스러운 희대의 악녀로 각인되길 바라며!
***
까만 망토로 전신을 가린 데이지가 성을 나선 건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늦은 새벽이었다. 그녀는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황제의 호위 기사, 키올을 따라 본성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길 중간중간 마주친 기사들은 수상한 움직임의 주인이 키올임을 알고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본성에 도착하기까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던 둘은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끼익. 열린 문틈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등불에 흔들리는 그림자와 흐릿한 담배 연기다. 이윽고 데이지가 망토를 벗자,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네자르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불을 껐다.
“이렇게 황성에서 뵙는 건 또 처음이네요.”
먼저 입을 연 쪽은 데이지였다. 네자르는 그녀의 인사치레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앉도록.”
황제의 명에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 데이지가 록허드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간 못 했던 이야기를 계속해 보지. ……아, 그 전에.”
유리잔을 바닥까지 털어 목을 축인 네자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케이트는 어때. 황성에서 별다른 사고 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나?”
“그게… 애매해요.”
데이지의 답에 반쯤 감겨 있던 네자르의 눈이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평소라면 좋다 나쁘다 확실하게 알리던 그녀였기에 이번과 같은 대답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에젤로트를 떠나셔서 그런가, 분명 온종일 우울하시거든요. 가끔씩 아가씨 스스로 힘내야겠다고 생각하시는지, 급작스레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어요. 물론 이 부분은 어릴 적부터 항상 보아 온 모습이지만…….”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푹 내쉬자 네자르가 잔에 물을 담아 건넸다. 데이지는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가만히 유리잔을 들고만 있었다. 그간 신경 쓸 일이 많았는지 안색이 영 어두웠다.
“제게 고용인들 행동을 살피라 하신 걸 보면 분명 생각이 많으신 거예요. 다행히 최근에는 사냥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계세요. 특히 시녀와 시종 들 겁을 준다고 사냥개 밥으로 던지네, 제대로 일을 안 하면 총상을 입을 수도 있네 등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시는데…….”
할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쉴 틈 없이 뱉다 지쳐 물을 꿀떡꿀떡 삼킨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네자르는 피곤함도 잊고 빈 잔 위로 다시 물을 담아 주었다.
둘이서 다른 의미로 참 잘 어울리네. 록허드는 어머니보다 더 극성인 둘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가씨는 자각 못 하신 것 같지만, 고용인들을 괴롭힐 때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웃음을 지으셔요. 최근 들어 뵌 모습 중 가장 즐거워 보이시는 것 같아요. 이러다 이상한 데 취미를 들이실까 너무 걱정되네요.”
참으로 그녀다운 걱정이었다.
케이트가 카론과 막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사생아로부터 나쁜 물이 들지는 않을까 걱정, 제도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낼 때는 못된 놈들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었으니. 그쯤이면 데이지가 충분히 마음을 졸일 만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군. 케이트도 이제 스물이야. 옳고 그른 일은 혼자서도 충분히 구분하고도 남는 시기지.”
“확실히 폐하께서 귀환하신 후부터는 많이 조심스러워지셨어요. 예전에는 연회나 다과회 참석도 손에 꼽았는데, 참석하실 때마다 꼭 마찰이 있으셔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데이지가 한 번 더 물잔을 비웠다. 주전자 안의 물을 전부 거덜 낼 기세였다.
“아마 카론 영애께서 고생을 좀 하셨을 거예요. 그분은 또 아가씨에게 이상한 집착을 보이시잖아요. 혼인하신다니 한시름 놨어요.”
“집착이여 봤자 친우 사이의 정이겠지. 소공작이 말하길 케이트 덕에 엔테라 영애가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했다더군. 아무도 본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때 유일하게 손을 건네는 인물이라면, 소중하게 여길 만해.”
“폐하와 아가씨처럼 말이죠?”
크흠. 록허드는 본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헛기침을 했다. 딱히 네자르와 데이지가 그에게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십여 년 전 이야기만 나오면 록허드는 이렇듯 할 말이 없어진다. 진심이 어찌 되었든 케이트에게 무관심했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그래. 엔테라 영애도 그렇고, 그대는 필요 이상으로 걱정이 많은 편이야. 케이트를 너무 애처럼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본인부터가 케이트를 걱정해서 데이지와 합심하고 있는 주제에, 대단한 신사 납셨다. 하긴, 데이지도 아무렇지 않게 일일이 고하는 모습을 보면 서로에게 유리한 관계임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황태후의 일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황태후가 언급되자마자 그나마 총기가 되살아났던 네자르의 눈빛이 썩은 생선처럼 죽어 버렸다. 예전에는 그나마 아닌 티라도 냈지, 이제는 지고한 황제 폐하가 되셨다고 척조차 하지 않는다.
“……설마 케이트가 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일 줄이야.”
어투는 걱정이 서려 있는데, 표정은 또 다르다. 열대야를 참지 못한 록허드는 일단 제복을 벗어 던지고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엎어졌다.
“어머, 도련님. 그렇게 더우세요? 제가 지하로 내려가서 차가운 물이라도 퍼 올까요?”
“여기가 에젤로트인 줄 알아? 멋대로 황성의 지하에 내려갔다간 평생 지하에서 못 나올걸.”
고개를 저으며 나온 록허드의 대답을 집무 책상에 앉아 있던 네자르가 거들었다.
“그래, 필요한 게 있다면 짐에게 부탁하도록 해, 데이지 양. 여기서는 그대 역시 황제의 손님이니까.”
저게 다 데이지에게 잘 보이려는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의 속셈이다. 어찌 되었든 케이트에게 가장 가까운 여인은 카론 엔테라도, 릴리 아마스라도 아닌 시녀 데이지였으니까.
“어머, 말씀만이라도 고마우셔요.”
“당연한 일을.”
데이지가 저의 생활을 꼬박꼬박 네자르에게 고해 바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케이트는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다른 이라면 배신감에 몸부림칠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케이트다. 평소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수치심에 터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게 될 감정과 별개로, 데이지는 숨겨진 케이트의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데이지가 네자르에게 꼬박꼬박 케이트의 일화를 전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겨울밤, 숲지기의 통나무집에 홀로 남게 된 케이트가 시녀장의 방만으로 지독한 열감기에 걸린 날이 그 기점이었다. 순전히 록허드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데이지는 그날부터 에젤로트의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아니지. 오직 네자르만 믿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어릴 적 나무에 올라가 추락해서 밤늦게 발견된 일도, 호숫가에서 놀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후 발견된 일도, 켈 로망드에게 납치됐다는 소식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었던 일도… 전부 데이지가 사전에 케이트의 경로를 네자르에게 알렸던 덕분에 가능했던 대처다.
생각하면 할수록 케이트에게 데이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보라 부인에게서도 전언이 있었지. 황태후를 황성에서 내쫓을 생각인 것 같다더군.”
“이전까지만 해도 전혀 그런 의사를 보이지 않으셨어요. 데보라에 가신다는 이야길 듣고 정말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 괴상한 살롱에 참석하겠다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데이지의 솔직 담백한 말에 네자르가 크게 웃었다. 졸린 기운이 완전히 가신 것 같았다.
“살롱은 애초에 내가 데보라 부인에게 부탁하고 지원했던 일이야. 황태후가 허튼짓을 할 수 없게 대비책을 세워 둔 거지.”
깜짝 놀란 데이지가 눈을 크게 떴다.
“허튼짓이요?”
그쪽에는 무지한 록허드마저 알 정도로 꽤 유명한 일화였는데 그녀가 모른다는 사실이 퍽 놀라웠다. 케이트를 위해 여기저기서 정보를 모은다지만, 아무래도 주인 자체가 사교계에 관심이 없다 보니 한계가 있었나 보다.
“황태후가 소문난 미모를 가진 여식들을 데려가 엉망으로 만든다는 소문, 모르나?”
이번 이야기 역시 충격적이었는지, 록허드의 한마디에 데이지가 입을 크게 벌렸다.
“어, 엉망이라니요?”
“조각난 도자기로 뺨을 긁거나 한쪽 눈을 실명시키는 일은 부지기수였어. 황태후가 연 다과회에 참석하고 귀성하는 길에 행방불명된 적도 있고, 뭐… 꽤 시끌시끌했지.”
황태후의 패악질은 케이트의 나이가 열셋이 될 때까지 지속됐다. 보다 못한 황제가 중재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 동안 미혼의 귀족 여식들은 영지에서 숨을 죽인 채 살았다. 연회가 열려도 갖가지의 이유를 들어 참석을 거부했으며 참석한 여인들은 대개가 시녀 못지않게 초라한 행색을 해야 했다.
“아… 그렇다면 백작님께서 유독 아가씨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이유도…….”
“완전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의식하셨지. 아무리 에젤로트가 선황 폐하와 밀접한 관계였다 하더라도 당시 황태후는 눈에 뵈는 게 없었으니까.”
데보라 부인의 살롱은 이후 다가올 케이트의 데뷔탕트에서 황태후의 방만을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만든 네자르의 방비책이었다.
“전 데보라 부인이 굉장히 이해타산적인 여자라 생각했는데……. 여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군요.”
“그래, 데보라 백작과 오드리네 후작은 아주 오래전부터 짐을 도와 온 가문이라, 미치지 않고서야 황태후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어.”
그 시점부터 주춤주춤했던 황태후의 힘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황제가 미련처럼 들고 있던 애정마저 완전히 거두어 버린 후, 네자르 황태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목덜미를 주무르며 네자르가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피아에게 케이트가 손을 벌렸다, 라…….”
그들이 보아 왔던 케이트의 행보 중 가장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사실상 파격적이지 않은 행동이 언제 있었냐만, 대체로 자신의 만족 선에서 그치고 마는 케이트다. 록허드는 그녀를 자극하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현시점에서 케이트가 큰마음을 먹게 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지금 록허드의 눈앞에 존재했다.
“누군가 너와 황태후의 관계에 대해 혀를 놀린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작스레 움직일 리 없지.”
답이 없는 걸 보면 네자르도 비슷한 방향으로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네자르와 황태후 사이의 악연을 모를 데이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록허드에게 되물었다.
“그자가 아가씨께 데보라 부인을 언급한 걸까요?”
“그건 아닐 확률이 더 높아. 케이트가 제멋대로에 바보처럼 말하기는 해도, 보기보다 상당히 똑똑한 아이야.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나은 수를 찾은 거겠지.”
언뜻 들으면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케이트가 보기보다 똑똑하다는 점은 록허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 시절의 황성을 알고, 케이트에게 쉬이 입을 열 만큼 배짱을 가진 놈.”
쉬이 결론이 나지 않는지, 눈을 감은 네자르가 느릿하게 턱을 쓸던 시점. 똑똑. 그들이 모여 있는 집무실로 예기치 않은 방문자가 찾아왔다.
“폐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자르는 대답도 안 했건만 문이 활짝 열렸다. 황제의 집무실에 허락도 없이 문을 열 수 있는 자는 몇 없다. 록허드가 이 자리에 있으니 예상할 수 있는 인물은 론이 유일했다.
역시, 록허드의 생각대로 집무실의 방문자는 황제의 보좌관인 론이었다. 론 미네르바, 황제의 가장 오래된 최측근 중 한 명이자 종종 화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근거 없는 배짱을 가진 인물.
……흠?
“맡기셨던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습니다. 국혼 준비는 대부분 완료된 상태이며 이제 각 영지에…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네자르가 더없이 차가운 얼굴로 미간을 구겼고, 그건 그 앞에 앉아 있던 데이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록허드는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론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뭡니까. ……아, 데이지 양께서 방문하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한데 왜 세 분 다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제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습니까?”
***
황태후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아무리 황성의 부지가 제도에 비견된다지만, 마차에 오르면 5분도 겨우 걸릴 거리인데 서신을 보내다니.
한동안 봉투를 뜯지 않고 그 위에 박힌 황성의 문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원래 이런 건가? 원래 황성에서는 가까운 거리에도 사람을 보내지 않고 서신을 전달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역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세피아 부인이 장갑을 벗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찬 땀을 말렸다.
“보통은 시종을 보내 의사를 전달해요. 시종이 아니라 행정 직원을 보냈다는 건 영애를 아랫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죠. 물론 아랫사람이란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아니니까요.”
아무리 들은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이런 식의 첫 만남은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황태후의 인상을 지하로 처박게 만든다.
탕!
“어머, 또 적중하셨어요. 들었던 대로 사냥 실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 정도면 반 공작 각하께서 영애를 경계하시겠는데요?”
“그분에 비하면 전 새 발의 피죠.”
이렇게 며칠 내내 즐기는 사냥은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쏘다가는 근방에 있는 동물의 씨가 마를 수 있으니 내일부터는 자제함이 옳을 것 같았다.
나를 따라 사냥을 여러 번 시도하던 세피아 부인은 결국 포기했는지 고삐를 쥔 채 바람을 즐겼다. 오늘 사냥을 나온 곳은 황성에서도 지대가 가장 높은 언덕으로, 날이 좀 흐릿한 덕에 공기가 꽤 시원했다.
“그래서 안에는 무어라 적혀 있던가요?”
나는 멀찍이 선 시종들과 그 위의 그늘진 커다란 느릅나무를 훑으며 대답했다.
“입성을 축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자신을 찾아오라더군요. 형식적인 서너 문장 외에는 전부 자신 소유의 온실 자랑이었어요.”
과장이 아니라 세 장의 편지지 중 무려 두 장 반이 자신의 성 옆에 위치한 온실 이야기였다.
“꼭 보여 주고 싶다면서 이미 글로 설명을 다 해 놨더라고요. 이미 한 번 가 본 듯한 기분이에요.”
“황태후는 자기 과시욕이 큰 사람이에요. 그녀가 가진 재물 중 가장 자랑스레 여기는 것이 그 백장미 온실과 에자렛 황녀일 겁니다. 특히 에자렛 황녀를 향한…….”
흩날리는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긴 부인이 적절한 단어를 고르듯 인상을 구겼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요? 모성애 혹은 집착이 아주 대단해요. 종종 황녀가 황태후의 가장 값비싼 보석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앤드류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렇게 되니 정작 황태후보다는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네자르가 나와 그녀를 두고 퍽 비슷하다 말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뭐라고 했었더라.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황태후의 서신에 답장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안 보냈어요.”
“아, 아직 안 보내신 모양이군요. 잘하셨어요. 이제 막 황성에 들어오셨으니 무엇이든 신중하게 행동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니요. 답장 안 할 거예요.”
“……음.”
나를 응시하는 세피아 부인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깃들었다. 나는 그녀가 답답함에 다시 낀 장갑을 집어 던질까 싶어 급히 뒷말을 이었다.
“에자렛 황녀를 먼저 만날 예정이에요. 앤드류 황자로부터 부탁받은 일도 있고… 나는 황태후의 기분에 억지로 맞춰 줄 생각 없어요.”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들 사이에 떠돌게 될 이야기를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 옳은 말이었으나, 내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사람은 겁을 먹었을 때 가장 조심스러워지고, 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힘들어지죠.”
세피아 부인은 갑작스레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이다.
나는 사냥총을 다시 들며 마주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롯이 경험으로 느낀 바를 입에 담았다.
“공포는 사람을 절벽으로 몰아쳐 헛된 생각을 끊을 수 없게 해요. 더 무서운 상황을 상상하게 되고, 더 부정적인 고민에 빠지도록 만들죠. 종국에는 자신의 발로 최악의 상황에 다다르게 되는 거예요.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폭정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인가요? 아무리 저라도 그건 도와 드릴 수 없어요. 설마 황태후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그녀의 진지한 얼굴은 더없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폭정?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나름대로 늠름하게 유지하려 했던 표정이 힘없이 풀렸다.
“부인, 절 너무 높게 쳐주시는 거 아닌가요? 저는 그런 대단한 인물이 못 돼요. 권력과 명예에 엄청난 뜻을 가진 것도 아니고요.”
가볍게 손짓을 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을 불렀다. 내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는지, 곧장 언덕 위로 달려왔다.
“제가 조언을 구했을 때, 황태후의 사람을 성안에 두지 말라 대답하셨던 것 기억하세요?”
“물론입니다.”
“어제오늘 고민을 조금 해 봤어요. 태어나서 뭔가를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본 건 정말 손에 꼽는데 말이죠. 제 결론은… 오히려 황태후의 사람을 남겨 두는 편이 좋다는 거예요.”
걸음이 빠른 시종들은 순식간에 나와 부인이 노닥거리고 있는 언덕 위로 도착했다. 그들이 등진 풍경은 비를 한가득 품은 태풍의 전조처럼 먹구름이 가득하다. 또 태풍이 오려나? 더위가 한풀 꺾이겠어.
나는 시종들과의 거리가 더 좁혀지기 전에 세피아 부인에게로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제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요. 그들이 공포를 느낄 만한 씨앗을 하나 심어 두는 거죠. 그럼 알아서 무럭무럭 잎이 자라 꽃을 피울 거예요. 장담컨대, 피어난 꽃을 꺾는 데까지 보름도 안 걸릴걸요?”
세피아 부인은 워낙 여기저기서 부르는 사람이 많았기에 점심 식사도 함께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황성에 온 후로 벌써 나흘째 혼자 하는 식사였다. 전보다 분명 몸도 가까워졌는데, 네자르와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오늘은 본성을 쳐들어가서라도 얼굴을 봐야겠어. 외로움을 곁에 두고 홀로 잠드는 밤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담 본성에 가기 전에 황태후의 온실이나 방문해 볼까.”
황태후가 관리한다지만 애초에 황성 소유의 온실이었기에 신분이 보장된 자라면 누구든 출입할 수 있다고 들었다. 마침 시간도 비었겠다, 가서 황태후와 마주치면 모르는 척 도망 나오고, 에자렛 황녀를 만나면 말이라도 섞어 보는 거야.
그렇게 더위에 땀범벅이 된 몸을 식은 물로 적시고 외출 준비를 할 때였다.
“저, 저… 카트리나 영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 며칠간 말 한번을 제대로 못 붙이던 하녀 중 한 명이 쭈뼛쭈뼛 다가와서 내게 입을 열었다. 흠흠. 이럴 때 역시 잊지 않고 차갑게 대해야 한다.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눈을 맞추며 고개만 주억였다. 차갑고 도도한 제도의 여자처럼.
“오, 오늘 아침부터 리즈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리, 리즈는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저희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던 하녀입니다.”
“안 보인다고?”
“예. 오전 내내 찾아봐도 어,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길래… 아무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고민이 많았는지 하얗게 튼 입술이 여기저기 뜯겨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네. 오후 내내 눈치를 보다가 저녁쯤 되어서 내게 말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는 짐짓 하녀의 이름을 처음 들은 척, 뒤늦게 아는 체했다.
“아아, 그 아이의 이름이 리즈였구나. 마침 잘되었어. 성의 고용인들을 전부 모으도록 해. 할 말이 있으니까.”
아직 그 말이 무엇인지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하녀의 안색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창백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겁을 줬나. 하긴, 사흘 내내 총을 쏴 죽이니 뭐니 협박을 해 댔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 리즈를 제외한 아홉 명의 고용인들 전부가 응접실에 모였다. 다시 겁줄 생각에 신이 난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이러다가 정말 제대로 재미 들리겠는데?
“어제저녁에 식사를 내 침실에서 혼자 들었던 걸 기억하지?”
“예.”
아홉 명이 한꺼번에 답하니 성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찼다.
“그때 먹은 수프에서 자잘한 유리 조각들이 발견됐다. 하아. 멍청하게 그냥 삼켰으면 큰일 날 뻔했어.”
당당한 거짓말이었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고용인들은 깜짝 놀란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다행히 미리 그 사실을 알린 자가 있었기에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어. 범인은 리즈로 밝혀졌고, 본인 역시 혐의를 인정했기에…….”
물론 이 부분도 거짓말이었다. 다만 식사를 남기려고 통 안의 비스킷만 집어 먹은 탓에 허기로 고생해야 했다.
“괘씸해서 사냥개 먹이로 던져 줬지. 그러니까 내일은 개 먹이를 챙겨 주지 않아도 좋아. 아마 포식했을 거야. 사람 고기가 생각보다 양이 많거든.”
이쯤 되면 당연한 소리였지만,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리즈는 새벽에 마차에 태워 에젤로트로 보냈다. 소개장도 함께 보냈으니 보름 동안 그곳에서 일한 후 황성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흑.”
말하면서도 등에 소름이 이는 기분인데 듣는 고용인들은 얼마나 충격적일까. 아니나 다를까, 친분이 있었을 거라 예상되는 하녀가 눈물을 삼켰다. 그 와중에도 내 비위를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여겼는지 입을 꽉 틀어막은 채.
“사실… 나는 이번 일로 너희에게 굉장히 실망했어.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오히려 비웃듯 이렇게 나오다니.”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한숨을 뱉었다.
“내가 비록 아직 폐하와 혼인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황족 시해에 버금가는 중대한 사건이야. 너희 역시 그 사건의 동조자나 마찬가지지.”
눈을 부릅뜬 하녀장이 황급히 나의 억지를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영애. 저희는 아무것도 모르…….”
“그럼 증명하렴.”
말과 함께 활짝 웃으며 검지를 슬쩍 들어 올렸다.
“이틀에 한 명이야.”
참고로 여기서 한 명은 개밥의 탈을 쓸 에젤로트행을 의미한다.
“이틀에 한 명이면 보름이 조금 넘어서 내 성이 텅 비겠구나. 그렇지? 부디 그럴 일이 없길 바라. 사냥개도 꼬박꼬박 배를 채우는 마당에, 주인인 내가 식사를 굶을 수는 없잖니?”
고용인들의 분위기가 어떤가에 대해서는 더는 묘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반쯤 처형장에서 목을 들이밀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공포와 슬픔, 억울함이 한데 모여 복잡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결백하다면 동조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너희가 알아서, 내게 말이야. 혹시 알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지!”
짝!
“내 말은 여기서 끝. 해산.”
아홉 명의 인물이 흩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몰래 훔쳐보고 있던 데이지에게 뛰어갔다.
“어, 어때? 나, 잘했어?”
2층 응접실에서 얌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데이지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오묘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아가씨,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묻는데, 즐기시는 건 아니죠? 연기 맞죠? 그렇죠?”
“데이지도 참. 솔직히 재밌게 느껴지기는 해. 그래도 연기하면 할수록 황태후가 떠올라서 즐길 수가 없어.”
그래서 더 빨리 네자르의 곁에서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황태후로 인해 고통받았을 과거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테다. 그녀의 성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의 존재를 인식할 때마다 바라지 않아도 당시의 기억들이 습관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겠지.
불쌍한 나의 네자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오늘 밤은 꼭 우울한 네자르의 마음을 달래 주러 가야겠어. 오랜만에 직접 초콜릿 비스킷도 구워서 선물해야지!”
“아가씨가 우울한 건 아니고요?”
나를 따라서 웃던 데이지가 이내 표정을 굳히고 계단을 내려간다.
좋아, 나쁘지 않았어. 이제 고용인들 사이로 내부 분열이 일어날 테고, 황태후의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결과를 확인할 일만…….
“아가씨?”
“아, 응.”
“손님이 오셨어요.”
그리 말하는 데이지의 표정이 악역을 즐기는 거냐 타박했던 순간만큼 기이했다. 무슨 일이지? 그에 대한 궁금증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금발의 미인을 확인하는 순간 모두 풀렸다.
“안녕하세요, 에젤로트 영애.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는 황제 폐하의 누이, 에자렛 오드리네 카발입니다.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찾아왔어요.”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