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11/19)

제8장

‘덥군.’

완연한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창 너머로 내리쬐는 태양이 뜨겁다. 이 정도 더위면 창을 열어 환기할 법도 한데, 어쩐지 성내 인기척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고용인과 고용주의 생활 공간이 다르다지만 이건 그야말로 텅 빈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오늘만 특별히 이런 것인지, 아니면 늘 이러한 분위기인지는 첫 방문인 론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본래 전용 시종장은 고용인들과 함께 1층 서쪽 건물에 머물러.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성에서는 방식이 조금 다르지. 아마 바로 옆 침실에서 모시게 될 거다.”

“모든 고용인들이 말입니까?”

“아, 말에 어폐가 있었군. 론 미네르바 자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야.”

론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맨 타이를 살짝 풀었다.이 성의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무려 제국의 후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를 몸소 주인에게로 안내하고 있던 것이다.

“주의할 점은 크게 세 가지로 보면 돼. 전하의 안전을 책임질 것. 전하의 행동반경을 성으로 국한할 것. 특이 사항은 전부 나에게 보고할 것.”

남자, 필프론츠 오드리네 후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훤칠한 귀족이었다. 전 황후였던 오드리네 가문의 장녀가 출산 직후 목숨을 잃고, 차녀인 베딜라 오드리네가 두 번째 황후가 된 지 어언 5년. 전 후작 내외가 사고사로 목숨을 잃고 장녀와 차녀 또한 출가를 한 탓에 필프론츠 오드리네는 고작 16세라는 나이에 후작 위에 올랐다고 들었다.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을 넘어 그런 걸까. 귀족 특유의 고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 겉은 유연해 보일지라도 이 남자는 현 황후의 남동생이자 황태자의 외숙부인 인물.

론은 필프론츠의 뒤를 따라 걸으며 진중하게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들의 걸음은 2층 안쪽의 커다란 목조 양문 앞에서 멈췄다. 이제껏 보아 온 성의 문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음각의 문이었다.

“이 모든 사항을 필히 명심해야겠지만, 가장 명심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어.”

부드럽게 웃은 필프론츠가 땅속을 기는 듯한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특이 사항을 전부 나에게 보고하라는 걸세. 황후 폐하가 아닌 바로 나, 필프론츠 오드리네에게. 이해했나?”

이해는 했으나 납득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설마 황후와 후작 사이에 정치 알력이라도 있는 건가.

‘젠장. 이래서 내가 황성만큼은 추천받고 싶지 않았던 건데.’

산골짜기의 볼품없는 귀족 가문이라 해도 그곳에서 생각 없이 지내던 시절이 가장 편했다. 출세시켜 주겠단 백작의 말에 혹해서 제도까지 날아오게 된 것부터 문제였지.

론은 다급히 머리를 굴렸다. 베딜라 황후가 황자를 순산한 시점부터 네자르 황태자는 이미 황위 최고 후계자라는 지위를 위협받고 있는 실태였다.

황태자의 성이 황후의 손에 넘어갔으리란 부분은 이미 예상한 바 있었다. 한데 황후가 아닌 필프론츠 후작의 인형이 되어야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한데 황후께서 여쭈신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내게 이미 전달한 사항이라면 때를 봐 적절한 지시를 내려 줄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항이라면 적절히 상황을 봐 판단해야 해.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황태자 전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에 대해서.”

“제가 황태자 전하께 도움을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 물음에 필프론츠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론의 태도가 마땅찮은 기색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깊이 고민하는 눈치임은 분명했다.

“나는 그러길 바라네. 하나 누구에게나 그리 보인다면 안 되겠지.”

황후의 눈을 피해 황태자를 도우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같은 오드리네 가문이 서로 대치를 한다고?’

역시 납득할 수 없었으나, 납득해야만 하는 위치였기에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대는 하지 않아. 다만 이곳에서 일하게 된 이상 내 눈치를 살폈으면 좋겠다는 의미야.”

무슨 의미일까. 이윽고 론의 어깨를 툭, 툭 턴 필프론츠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들어가 보는 게 좋겠군. 일주일 후 다시 만날 수 있을 걸세.”

필프론츠의 등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론은 짧게 노크 후 문을 밀어낼 수 있었다.

분명 태양이 머리 위로 환하게 뜬 대낮이었으나, 황태자의 침실은 시간대에 맞지 않게 어둡고 고요한 감이 있었다.

오도카니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와 테이블, 의자, 책이 한가득인 책장에 관리가 엉망인 책상까지. 더불어 암막 커튼은 반만 정리되어 있었고 나머지 반은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상태였다.

‘엉망이군.’

이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복도를 따라 거닐었던 때와 똑같은 분위기였다. 정적이며, 유령 성과 같은 분위기. 착각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황후의 의도임이 틀림없을 테다.

침실의 주인으로 보이는 소년은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다. 론은 문 옆에 서서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네자르 전하. 오늘부터 전하를 모시게 된 론…….”

“나가.”

“……미네르바입니다. 편하게 론이라 불러 주십시오.”

작은 주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오직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침실을 울린다. 뻘쭘한 기분으로 서 있던 론은 곧 조용히 문을 닫았다. 환대받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반응이 차가울 줄이야.

일단 그는 어지럽혀진 방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손대지 마! 네가 아니라 하녀가 해야 할 일이니까.”

하나 커튼을 부여잡자마자 들려오는 외침에 몸을 굳혀야 했다. 론은 고개를 틀어 황태자와 시선을 맞췄다. 까만 흑발에 악이 가득한 적색 눈동자. 이제 겨우 열한 살이 되었다고 들었다. 누구 하나 죽일 듯한 눈빛을 가지고선.

“지금은 하녀가 없으니, 제가 치우겠습니다.”

“없으면 불러. 너, 종은 장식으로 있는 줄 알아?”

어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기분이다.

‘하긴, 황후의 입맛대로 시종장이 수십 번은 바뀌었을 테니. 본능적으로 반감을 보이는 건가? 피곤해지겠군.’

황태자의 요구도 틀린 구석은 없었기에 일단 종을 울렸다. 하지만 1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심지어는 황태자조차 이 상황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론은 성의 이상한 낌새를 금방 알아챘다.

‘무려 황가의 적장자인 황태자를 방치한다, 이건가.’

겁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처벌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의미겠지. 어차피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부터 정치 싸움의 피해자, 혹은 당사자가 되었다고 해도 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그저 필프론츠 후작의 눈이 되어 주고, 그에 합당한 봉급을 받으면 된다. 마음을 다잡은 론은 황태자를 남겨 두고 조용히 침실을 벗어났다.

***

관망자로 사흘을 보낸 결과, 황태자의 성이 꽤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지위에 걸맞게 이 성의 하녀는 무려 스물이나 되었다. 요리사도, 정원사도, 마구간지기도 없이 오직 하녀만 스물. 그들은 하루에 정확히 네 시간씩 번갈아 가며 성을 관리했다. 하루에 네 시간이라니, 코웃음도 나지 않는 노동이었다.

근무 외 시간에는 황태자의 시중을 들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황후의 성으로 교육을 나갔다. 그곳에서 진정 교육을 받고 있는지는 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려니 여길 수밖에.

그나마도 황태자의 시중을 들어야 할 하녀는 일을 핑계로 늘 성을 나가 있었다. 성이 조용한 이유는 다 그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관리 인원을 빼곤 전부 나가 있으니, 쥐 죽은 듯 조용한 게 당연했다.

“전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싫어. 안 먹어.”

“그리 대답하실 줄 알고 제가 이렇게 식사를 가져…….”

자랑스레 주방에서 손수 차려 온 식사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으나, 황태자의 반응은 싸늘했다.

“안 먹는다고! 당장 들고 밖으로 꺼져!”

쨍그랑!

바닥에 엎질러진 접시와 빵 조각이 나뒹군다. 론은 우선 짜증을 참기 위해 속으로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이 꼬맹이는 내 돈줄이다. 돈줄이다, 돈줄이다.’

벌어 왔던 급여의 배는 될 봉급을 생각하면 펄펄 날뛰던 화도 금방 가라앉았다. 론은 걸레와 물이 담긴 통을 들고 와 카펫을 벅벅 닦았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고기 수프 특유의 향은 지워질 생각을 안 했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외출할 때 카펫을 갈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주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종을 울려 주십시오.”

시종장 일을 하러 왔는데, 졸지에 하녀 일까지 하게 될 줄이야. 황태자의 침실을 나선 론은 한숨을 푹 쉬며 텅 빈 고용인 식탁에 주저앉았다.

카발 제국의 황태자,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또래의 소년들처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항상 불만이 가득했다.

론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순전히 편히 일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상상하는 그 이상의 고집불통이었다. 동정심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그 못된 성정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재가 되어 먼 하늘로 사라질 정도였으니까.

“저어…….”

신세 한탄을 하는 와중 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눈에 익은 하녀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전하의 식사는 앞으로 하녀들 음식을 가져가세요. 따뜻하지 않고 식은 음식으로요. 그래야 드실 거예요.”

하녀의 식은 음식. 그 말을 듣는 순간 단번에 감이 왔다. 황태자가 식사 한 번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이유가 이거였다.

‘음식의 상태를 경계하고 있는 건가. 이미 당해 봤다거나.’

론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하녀를 쳐다봤다.

“조언, 감사합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하녀는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허겁지겁 주방을 벗어났다.

“의외네. 그래도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니.”

1시간이 흐른 후 하녀의 말대로 차갑게 식은 수프와 건조해진 빵, 그리고 드레싱 없는 샐러드를 준비해 황태자에게로 대령했다.

놀랍게도 황태자는 군말 없이 음식을 삼켰다. 맛을 느낀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먹는 느낌이 강했다. 제국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보이기에는 참 격식 없는 모습이었다.

그날부로 론은 식사 준비 시간에 꼬박꼬박 주방을 찾아갔다.

“전하께서 오늘은 소고기 로스를 드시고 싶다더군요.”

“소고기요? 오늘은 소고기가 없는데…….”

“돼지고기라도 상관없습니다. 고기 로스면 됩니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녀가 론에게 눈치를 준다. 그 얄미운 얼굴에 대고 론은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주는 대로 먹으면 될 것을, 뭐 그리 바라는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던 하녀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메뉴가 바뀌는 일은 시종장님이 오시고 처음 있는 일이에요.”

“그야 제가 비위를 잘 맞춰 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 아래로 동생이 많아 말 안 듣는 어린아이는 아주 잘 다루거든요.”

론의 말에 하녀가 깔깔 웃었다.

“호호! 그 망아지처럼 제멋대로인 전하를 다루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주인의 뒤 담화로 가까워지는 고용인들이라니, 경우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덕분에 그 이후로는 주방에 출입하는 일도, 하녀들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듣는 일도 퍽 순조로웠다. 황성에 취업한 지 5일이 흐른 뒤에는 아무도 론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황태자의 식사에 정체 모를 까만 액체를 한 방울씩 넣는 순간마저도.

‘이런 걸 알아 둬서 뭐 하려고 열심히 캐낸 거지. 봉급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불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론은 액체가 든 식사를 황태자에게 가져갔고, 황태자가 거절하면 그제야 하녀들의 음식을 몰래 퍼 침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식사를 먹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몰래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주인이 죽으면 내 일자리도 잃으니까.’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 황후와 필프론츠 후작이 성을 방문했다. 전날부터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했더니만, 황후의 방문 때문인 듯싶었다.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나는 또 개과천선이라도 했나 했더니.’

좋게 봐 줘도 사람 사는 구석 수준에서 끝났던 황태자의 성은 하루 만에 번쩍번쩍한 황족의 거처로 변모했다. 먼지만 겨우 자취를 감추던 조각상에는 윤기가 흘렀고, 누르스름했던 카펫도 선명한 제 색을 되찾았다. 한데 아무리 황후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조금 심한 느낌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결벽증이 있으세요.”

“어머, 그게 단순히 있는 수준이니? 어엄청 심하시지. 그 정도면 솔직히 병이야, 병.”

등을 구부리고 앉아 열심히 바닥을 닦던 하녀가 인상을 구겼다.

“한 번 사용한 식기도 절대로 다시 사용 안 하시구요. 글쎄, 그분 성에서 일하는 아이 말을 들어 보면 침실 청소만 하루에 네 번을 한대요.”

“청소 네 번에 빨래는 아침 점심 저녁 온종일. 아무리 하녀라지만, 어린 여자애 손에 습진이 한가득이더라구요.”

말만 들어도 정신이 아득하고 어질하다. 동생인 필프론츠 후작과는 영 다른 성향의 인물인 듯싶었다.

창 너머 멀리서 마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론은 다 죽어 가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열려 있는 침실의 문 사이로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이제 내려가셔야 합니다. 황후 폐하를 맞이하셔야죠.”

다 알고 있을 텐데도 황태자는 창에 기댄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전하?”

“싫어.”

천천히 걸어온 황태자가 론의 상의를 붙잡았다. 늘 삐죽삐죽하거나 짜증만 가득했는데 오늘은 짙은 우울에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 만나기 싫어, 론. 만날 때마다 늘 화만 내신단 말이야…….”

장차 황제가 될 인물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갈구하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애정밖에 없다.

‘그래, 전하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시지.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계실 리 없어.’

이 어린 소년을 몰아내려는 계모의 짓거리들이 참 치졸하다. 황제는 이제 황태자가 어찌 되든 관심도 없는 것일까.

“에자렛과 앤드류에게는 잘 웃어 주시면서 내게는 엄하기만 하셔. 내가 뭘 잘못한 거야? 말도 잘 듣고 성에서 나간 적도 없는데.”

“다 전하를 위해 좋은 말만 하시는 겁니다.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저 순진한 얼굴에 대고 ‘잘못한 건 없습니다. 굳이 만들자면 당신이 황태자로 태어났다는 사실뿐이지요.’라 말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다행히 황태자는 순순히 1층으로 따라 내려왔다. 론은 어두운 낯으로 황태자 옆에 서 있다가 도착한 마차의 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살아생전 황족의 수발을 다 들게 될 줄이야. 가문의 영광이라면 영광이다.

“처음 보는 얼굴… 인가?”

황후는 막연하게 상상했던 분위기보다 훨씬 더 수채화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숲의 냇물처럼 흐르는 금발과 게슴츠레 뜬 눈꺼풀 아래로 반짝이는 검홍색 눈동자.

‘자매가 차례로 황후에 오른 데는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론은 생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극상의 미인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고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눈앞의 여인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고고했다.

“예, 론 미네르바입니다.”

“깔끔하구나. 머리도… 말끔하게 잘 넘겼고. 구두도… 아주 깨끗해. 마음에 들어. 꽤 괜찮은 시종장을 데려왔네, 필프론츠. 차라리 내 성에 주련?”

황후의 언어는 그윽하지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 필요 이상으로 신경 썼건만, 어째 반대로 독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내 그녀의 뒤를 따라서 내린 필프론츠가 힐끔 론을 훔쳐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누님은 욕심이 너무 많으십니다. 사람이 버릴 줄도 알아야 얻음으로써 기쁨을 얻는 것 아니겠어요? 다 가지려 말고 몇 개는 그냥 내버려 두시지요.”

“얄미운 아이. 누가 보면 내가 세상 전부를 가진 줄 알겠구나.”

“누님이라면 못 가질 것 없지요.”

공감이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는 최상위 계층의 대화. 론은 힐끔 황태자의 얼굴을 살피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지만, 둘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뛴다.

“우리 귀여운 네자르, 하루가 다르게 몰라볼 정도로 쑥쑥 크고 계시네요. 다리는 아프지 않나요? 이 어머니가 보내 준 책은… 잘 읽고 있나요?”

허리를 굽힌 황후가 팔을 뻗어 황태자를 가슴에 안았다. 론은 행복감에 밝게 물든 소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황태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였다. 근 일주일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도.

“네, 어머니. 보내 주신 책은 재밌게 읽고 있어요!”

“착한 네자르, 웃는 얼굴을 보니 나도 행복해요. 앞으로 계속 어머니의 말 잘 들을 거죠?”

론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하녀들 맨 앞줄에 섰다. 사르르 웃는 하얀 얼굴이 황태자의 뺨에 입맞춤을 남겼다.

“네, 잘 들을게요.”

“왜요?”

“전 어머니의 착한 아이니까요.”

가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모자간의 모습이다.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을 포옹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마음씨 착한 아들.

‘역겹군.’

아무렇지 않게 웃는 하녀들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데 네자르… 이 어머니가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하나 들었어요.”

단 한 마디였을 뿐이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론은 돌연 분위기가 급변함을 눈치챘다.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안 좋은 소식이요?”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온전하며, 평화로워야 할 네자르의 성에… 더러운 쥐가 한 마리 기어 다니는 행태를 봤어요.”

“제, 제 성에 쥐가 나온다니요?”

상냥한 미소의 황후가 느긋하게 허리를 편다. 론은 그 말간 웃음에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이 어머니가 쥐 잡는 법을 알려 줄 거예요. 아주 쉽고, 또 간단하죠. 마리아?”

누구를 부른 건지, 마리아라는 이름은 허공으로 허무하게 흩어지고 만다. 황후는 고용인 사이를 거닐며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에 마리아 없니?”

“예, 제, 제가 마리아입니다.”

이윽고 네 번째 줄에 서 있던 하녀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한 발자국 나섰다. 그 여자였다.

‘설마, 아니겠지.’

며칠 전 론에게 식사 챙기는 법을 조언해 주었던 그 여자. 짧은 대화에도 수줍게 웃던 하녀.

“그래, 네가 얼마 전에 새로 왔다던 그 마리아구나. 어서 주방으로 가 식칼을 가져오렴, 마리아. 날이 가장 잘 든 것으로 가져와야 한단다. 알았지?”

나란히 선 하녀들의 안색이 파리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눈치를 살피던 마리아는 성안으로 급히 들어가 황후의 명대로 식칼을 쥐어 왔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부엌에서 가장 날이 잘…….”

팔을 뻗은 황후가 투박한 형상의 식칼을 손에 쥐는 순간, 론은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착각을 경험해야 했다.

‘젠장!’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황태자의 작은 몸을 껴안았다. 품에 안은 귀한 옥체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아.”

등 뒤에서 짧은 단말마가 터져 나온 건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공포에 찬 비명이 들릴 법도 한데,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건가. 론은 제 가슴팍에 황태자를 꽉 누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은 이미 핏물이 커다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현명해, 론 미네르바. 그것도 아주. 아무렴 내 사랑스러운 네자르에게… 더러운 구정물이 튀게 할 수는 없지. 이번 시종장은 참 잘 골랐구나, 필프론츠. 네 하나뿐인 누이에게 선물해 주련?”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어린 하녀가 황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점.

“더 나은 시종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온 제국을 뒤져서라도 마땅한 인재를 찾아 드릴 테니 이제 성으로 들어가시지요. 아까부터 목이 타 죽겠습니다.”

황후의 목소리에는 아주 작은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고, 필프론츠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론은 손의 속절없는 떨림을 멈추기 위해 온 신경을 다했다.

“으음. 아무렴, 네 목이 타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우리, 어서 들어가도록 하죠, 네자르.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하도록 해요.”

황후의 자기처럼 하얀 손가락이 황태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가의 그림자와 멈춰 버린 숨. 언뜻 마주친 황태자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뒤다.

“본래 조용히 처리될 일이었으나, 네게 본보기를 보여 준 거다. 모든 걸 제 손안에 두길 원하는 여자라.”

천천히 일어서는 론의 귓가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멀어지는 필프론츠 후작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쾅. 문이 닫힌 뒤에도 고용인들은 제자리에 얼음처럼 멈춰 있었다.

황태자와 그의 계모가 응접실에 모여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론도 알 길이 없었다.

론은 뒤늦게 걸음을 옮기는 하녀들을 따라 짧은 사이 차갑게 식어 버린 시체를 옮기고, 핏물이 선연한 흙길을 치워야 했다.

‘사람 죽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심지어 장소도 카발 제국에서 가장 고결하다는 황성이라니.’

개미 밟듯 사람의 목숨을 거둔다는 건 그만큼 황후의 권위가 하늘을 뚫을 기세란 의미일 테다.

“이번이 네 번째예요. 이곳에 배정받은 지 한 달도 채 안 된 아이인데… 솔직한 심정으로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는 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론이 묻자 마리아의 유품을 부지깽이로 하나둘 불에 밀어 넣던 하녀가 짧게 숨을 돌렸다.

“애가 눈치 없게 자꾸 혼자 행동했거든요. 동정심이라도 들었는지 주제 파악 못 하고 전하를 도우려 하지 않나. 누군가 황후께 말을 흘렸을 거예요. 그분은 아주 가차 없으시거든요.”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낡은 일기장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든다. 잠시간 말이 없던 하녀의 몸이 천천히 일어섰다.

“당신도 조심해요, 론. 불편한 마음 이해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당신도 간당간당해.”

하녀가 사라지고 론만 남은 주방은 식지 않은 열기로 꽤 오랫동안 높은 기온을 유지했다. 아무리 돈과 명예를 좇아 제도까지 왔다 해도,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야 하다니.

‘빠른 시일 내에 그만두는 게 신상에 이롭겠어.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지.’

마리아가 쓰러져 있던 피 웅덩이의 비린내가 여태 남아 있는 기분이라, 론은 성 뒤편을 크게 돌아 담배를 태웠다.

그렇게 멍하니 피워 낸 담배가 벌써 셋이었다. 대충 손을 털고 성으로 돌아가려던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론은 인상을 거칠게 구기고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었다. 양 갈래 머리를 한 새하얀 얼굴의 소녀.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채 얼굴만 빼꼼 내민 자그마한 소년.

“저기, 네자르 오라버니는?”

론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황성에서 저리도 고급스러운 옷감을 걸칠 수 있는 어린아이는 황태자를 포함해 단 셋밖에 없다. 황녀 에자렛과 황자 앤드류.

“우리 오라버니 만날래. 벌써 못 만난 지 아흔 번째 밤이 지났어. 분명 서른 번째 밤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단 말이야. 그렇지, 앤드류?”

“으응.”

크게 한숨을 쉰 론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버림받은 황태자와 그런 황태자를 어미 새처럼 따르는 정적의 자식들이라니. 역시 한시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황성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네자르 전하는 지금 황후 폐하와 대…….”

“앤드류 님! 에자렛 님!”

안 그래도 불안에 안절부절못하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어린 황족의 시녀임이 분명해 보였다.

“앗! 마녀다!”

“누, 누나, 빨리 도망가자!”

에자렛의 팔에 매달린 앤드류가 온 힘을 다해 누이를 밀어냈다. 제자리에서 펄쩍 뛴 황녀는 자그마한 손으로 론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이, 있잖아. 오라버니에게 대신 물어봐 주면 안 될까? 왜 우리 만나러 안 오시냐구.”

또박또박 제 할 말 다 하는 에자렛 황녀는 기껏해야 여덟 살이 겨우 되어 보였다.

“분명히 저저번 달 앤드류의 후계 수업이 끝나면 오신다구 했단 말이야…….”

후계자 수업. 그간 무언가가 부자연스럽다 싶었더니, 바로 이 부분이었다. 황태자는 황위 수업을 받아 마땅한 나이임에도 전속 황실 교사가 없었다. 황실 교사가 없으므로 후계 수업은 고사하고 교양 수업조차 받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오직 황태자에게 허락된 교육을, 이 땅딸막한 황자가 받고 있다니.

“알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여쭈어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어서 이리 오셔요, 황녀 전하!”

훌쩍 가까워진 시녀의 외침에 앤드류의 손을 꽈악 쥔 에자렛이 저 멀리 튀어 나갔다.

“부, 부탁해!”

이어서 성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온 시녀가 론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마음은 애틋하군. 하긴, 저 나이에 뭘 알겠어.’

론은 황녀를 향해서 마음속 깊숙이 사과를 남겼다. 매정한 건 거짓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아닌 현실이었다.

황후는 고작 2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 금방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선물을 받았는지 황후를 배웅하는 황태자의 품에는 붉은 양장의 서적이 안겨 있었다.

『페델레프 마을의 나무꾼 삼 형제』.

일곱 살 남짓의 애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

‘황자는 후계자 수업. 그리고 황태자는 줘도 안 읽을 동화라.’

환멸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난생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의 귀여운 네자르……. 이 어머니가 다시 올 동안 잘 있어야 해요. 날마다 열심히 책을 읽어야 장차 훌륭한 황제 폐하가 될 수 있답니다. 알았나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론은 애써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고 황후를 배웅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으니, 시종장을 다시 교육한단 명목으로 남은 필프론츠 후작이었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열아홉 명의 하녀를 쭉 훑은 후 론과 함께 성을 나섰다. 졸지에 화려한 장미 정원 사이를 미혼의 후작과 사이좋게 누벼야 했다. 그리 산뜻한 느낌은 아니었다.

“자네는 거기서 네자르 전하를 보호하지 말았어야 했어.”

론은 감히 후작의 말에 대꾸할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얌전히 입을 닫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후는 유독 예민하고 급한 성정을 가진 분이시지. 감 또한 명검에 비견될 만큼 날카로워. 괜히 눈에 들어 좋을 것 하나 없다는 소리야.”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자 필프론츠 후작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다른 하녀들이 어찌 행동하나 보고 따라 배워. 배우되 몸을 너무 사리지는 말고. 일거수일투족이 황후 폐하의 귀에 들어가고 있을 테니.”

그렇게 계속 입을 닫으려 했건만, 불쑥 튀어나온 호기심이 론의 다짐을 그르쳤다.

“전하의 식사에 불순물을 섞고 있었습니다. 살펴본 바로는 까맣고 점성이 커 보이는 액체였습니다.”

괜한 참견이 아닐까 싶었지만, 황태자를 도와 달라 부탁한 건 후작이었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었지만……. 괜히 불구덩이로 발을 들이민 건가.’

론의 말이 의외였는지, 우뚝 멈춘 후작의 눈썹이 살짝 치솟았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확실한 반응에 론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알고 있다. 켈 로망드가 자랑하는 가장 값비싼 독약이야. 시신경을 죽이고 심장 박동을 점차 늦추게 하지. 장시간 복용하면 편안하면서도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더군. 황후 폐하의 잔혹성과 참으로 어울리는 약이지 않나?”

말과 함께 필프론츠 후작은 킬킬 소리 내어 웃었다.

“이틀에 한 번씩은 반드시 복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놔둬도 되는 겁니까?”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니,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필프론츠 후작은 론의 말이 우습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놔두지 않으면 자네가 뭘 어쩌려고? 그 앞에 당당히 가 약이라도 빼앗아 올 텐가? 코앞에서 살인을 마주한 주제에 간도 참 크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도 아니고, 론이 생각하기에 여기서 간이 가장 비대한 자는 필프론츠 후작으로 보였다. 황후의 최측근인 동시에 그녀의 정적이라니. 망설임 없이 심장 위로 식칼을 꽂는 여자가 무섭지도 않은 걸까.

“황후께서는 후작님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어.”

론의 의문을 쉬이 알아챈 필프론츠 후작이 앞질러 입을 열었다.

“꽤 오래된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황후가 날 어쩌지는 못해. 내가 없다면 그 악마 같은 성정을 폐하로부터 숨기지 못할 테니까. 서로 어느 정도 타협을 보는 거다. 일정 선을 유지하면서 말이지.”

사이좋은 남매지간으로 보였던 그 일련의 대화들이 전부 외줄 타기였다는 의미다.

“감히 묻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후작님께 더 유용한 것 아닙니까? 황자 전하는 후작님의 외조카이지 않습니까.”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반응은 가벼운 코웃음이었다.

“누가 들으면 황태자 전하는 생판 남인 줄 알겠네. 이봐, 론.”

그를 응시하는 후작의 시선이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함을 담고 있다. 황태자와 똑같은 색채, 똑같은 명암을 지닌 검홍빛의 눈동자. 그 속에 비치는 감정을 외부인에 불과한 론이 파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자네가 나라면 그 잔혹한 악마를 가족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나?”

***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에 긴 사념이 깨진다. 퍼뜩 정신을 차린 론이 급히 몸을 돌려 황태자에게로 뛰어갔다. 해가 중천에 뜬 여름의 이른 오전, 엉거주춤 일어선 소년의 발아래로 유리잔이 어질러져 있었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조심히 침대 위로…….”

“론.”

이질감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론은 유리 조각을 줍기 위해 굽혔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늘 불만, 불신, 짜증, 화, 징글징글한 어리광을 지니고 있던 황태자의 얼굴이 오늘만큼은 낯설었다. 마치 마리아의 죽음을 목격한 그 찰나의 순간이 되돌아온 것처럼.

“지금 혹시 낮이야?”

처음에는 그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으나, 그건 아주 잠시의 일이었다.

‘켈 로망드가 자랑하는 가장 값비싼 독약이야. 시신경을 죽이고 심장 박동을 점차 늦추게 하지. 장시간 복용하면 편안하면서도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더군.’

론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침대 위에 황태자를 앉혔다. 멍하니 허공만 향해 있는 양쪽 눈을 번갈아 가려 봤으나, 당사자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요즘 열심히 독서를 하시더니, 눈이 많이 피로해진 모양입니다. 식사하신 후 다시 주무시는 건 어떠신지요. 눈에 휴식을 줘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그 때문에 론의 가슴은 더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멍청히 앉아 있기만 하던 황태자가 그를 향했다. 흐릿했던 검홍색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맞춰진 채로.

“아! 다시 보여. 하마터면 장님이 된 줄 알 뻔했네.”

평소처럼 신경질적으로 침대를 걷어찬 황태자가 론을 째려봤다.

“뭐 해? 바닥 치우고 식사 다시 가져와!”

짜증과 투정이 가득이었지만, 론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아는 황태자는 저 모습이 맞았다.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건가. 후작님께 말씀드려야겠군.’

발 벗고 나서서 황태자를 도우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뿐이니까.

무슨 우연인지, 필프론츠 후작은 당일 낮에 성을 찾아왔다. 후작의 시종은 『바다 섬의 어부 이야기』, 『시클린드의 새』 따위와 같은 동화책 수십 권을 침실 책장에 꽂아 넣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어. 금방 나갈 거다.”

필프론츠 후작의 명에 시종이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저 수많은 서적은 아무래도 성을 방문하기 위한 구실인 듯싶었다. 좋다며 펄쩍펄쩍 뛰던 황태자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동화책에 푹 빠졌다. 필프론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론을 향해 손짓했다.

“내일 아침까지 성에서 나갈 준비를 해라.”

“……예?”

“네자르 전하의 아카데미 입학이 결정됐다. 황후가 초강수를 뒀어. 전하께서 성을 비우면 남은 흔적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전부 소탕될 거야. 물건이든, 사람이든.”

예기치 못한 놀라운 소식이었으나, 론에게는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네자르 전하께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일전에 말씀하신 독약의 효과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후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조금 더 작게 말할 걸 그랬나. 괜찮겠지, 전하는 책에 푹 빠진 상태이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대비책이 없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동안 론이 봐 온 후작은 꼼꼼하고 세밀한 것으로 모자라 상당히 용의주도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증상이 발현되기까지는 회복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막느냐지.”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필프론츠 후작의 표정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풀어짐을, 론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기이한 생물을 보듯 론을 위아래로 훑다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옳은 소리였다. 그가 내일 아침 황태자의 성에서 나가게 된다면.

‘……나가게 된다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착각에 론의 양손이 얼굴을 뒤덮는다. 뒤덮은 손등은 이내 이마를 타고 올랐고, 정수리를 뒤덮어 온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래, 나가는 게 맞아. 여기서 더 버텨 봤자 말년은 개죽음이라고.’

그럼 황태자는? 이제껏 그래 왔듯 독약은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고용인의 천대 속에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이대로 자라는 건가? 아무리 오드리네의 가주라 하여도 고작 필프론츠 후작 혼자일 뿐이다. 이 남자 말고는 아무도, 그 누구도 네자르 황태자를 돕지 않을 것이다.

“안 나갈 겁니다.”

필프론츠 후작이 관망하듯 팔짱을 끼고 론을 바라봤다.

“제가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카데미를 따라가 황태자 전하를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전하를 돕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건…….”

분명히 동정심이기는 하다. 하지만 고작 그 동정심 하나로 목숨을 걸면서까지 벼랑 끝에 몰린 황태자를 돕는다고? 론이 생각해도 그리 설득력 있는 사유는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 사유가 진짜라는 점이었다.

“돕는다, 라.”

목소리는 한창 동화책을 내려다보던 황태자에게서 나왔다.

“어디 집 밖 개 새끼의 밥이라도 챙겨 주려는 투인데.”

착각인가? 그도 아니면 내가 서서 꿈을 꾸나? 고민할 겨를도 없이 황태자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내가 개인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필프론츠, 내게 론 미네르바라는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가?”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이윽고 황태자의 시선이 그림 가득한 서적을 떠나 론을 오롯이 담았다. 그때의 그 심정이란.

환희와 불안감, 그리고 외로움만이 비치던 소년이 사라지고, 숨죽여 뛰던 심장 깊숙한 곳의 본성을 마주한 그 심정이란…….

“잠시 시력을 잃었다 하여 미약했던 동정심이 부풀기라도 한 모양이군. 눈? 팔? 다리? 다 내주라 해. 내게는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이야.”

담담한 어조에는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 천둥이 몰아치고 태풍이 일기 전의 수면처럼 잔잔히 흘러갈 뿐이었다.

“황제만 될 수 있다면.”

마지막의 딱 한 문장만을 제외하고는.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 한 문장으로 론은 스스로도 난해하다 느꼈던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절 이용하십시오.”

이거다. 이거라면 그의 동정심은 당위성을 가질 수 있다.

“제위에 오르시는 데 절 이용하십시오. 제가 전하의 눈이 되고, 팔이 되고, 다리가 되겠습니다.”

무슨 용기가 솟았기에 겁 없이 떠들었던 건지. 저들이 눈물을 뽑으며 비웃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를 비웃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다음 날 해가 뜨고, 그다음의 다음 날 해가 떴어도 론이 황태자의 성에서 나가는 일은 없었다.

***

수치.

네자르가 숨기길 바랐던 수치는 숨죽인 채 참아야 했던 그의 과거였던 것일까. 마냥 기대려 했던 등에 그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사연 없는 무덤 없다지만, 그 사연이 네자르의 것이라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많은 생각이 한데 뒤섞여 복잡하게 꼬인다.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좋아. 앞으로는 내가 네자르를 지키자! 네자르가 누리지 못한 평생 치의 애정을 내가 질리도록 퍼부어 주는 거야!

역시 론을 설득하길 백번 잘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냥 멍청히 있어선 안 된다는 다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어린 시절의 전하는 확실히 지금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셨죠. 그렇다고 당시의 전하가 그리운 건 절대 아닙니다. 지금이 훨씬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시거든요. 특히 케이트 영애와 함께 계실 때 말입니다.”

아이참, 부끄러움에 뺨을 가리고 웃었다.

“흠흠. 뭐, 날 괴롭힐 때마다 즐거워 보이기는 했지.”

“그 정도는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애께선 진정한 괴롭힘이 뭔지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이래서 사랑이 위대한가 봅니다.”

별것 아닌 일로 자꾸 날 띄워 주는 것 같아서 영 민망한데. 여러 번 헛기침을 하며 대화 주제를 급히 돌렸다.

“그나저나 놀랐어. 필프론츠 후작과 네자르가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아는 필프론츠 오드리네는 능글맞기로는 최고로 능글맞고, 록허드만큼 제멋대로에 든든함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

나 혼자만의 생각만은 아니었는지 론이 턱을 슬슬 쓸며 말했다.

“맞습니다. 필프론츠 후작님도 전하 못지않게 많이 달라지셨지요. 한데 그분은 오히려 지금 모습이 진짜 같기도… 워낙 속을 알기 힘든 분이라.”

뭐가 그리 재밌는지, 홀로 웃음을 삼키는 모습이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 없었다. 이윽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돌연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깊게 숙였던 탓이다.

“감사합니다, 영애.”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끔뻑끔뻑 뜨길 반복했다.

“언젠가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게 되네요. 영애와 록허드 경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전하도 없으셨을 겁니다.”

내가 수치심을 못 참고 마차에서 뛰어내리기를 바라는 걸까.

그가 내게 노고를 치하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냥 없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하등 없다는 말이 가장 알맞았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 과연 나에게도 목숨을 걸고서까지 누군가를 지키려 할 용기가 있을까.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옛이야기를 듣게 된 나한테 감히 무어라 떠들 자격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그 말, 록허드가 들으면 굉장히 좋아하겠어.”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안 합니다. 뺀질거리며 거들먹거리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 말하는 론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

네자르가 보고 싶다. 나라면 그를 세상에서 가장 너르고, 따뜻하고, 온전한 품에 안아 줄 수 있는데. 그의 크고 작은 일이 어서 해결되길 바라며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

에젤로트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세피아 부인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열 문장을 가까스로 넘는 서신이었음에도 나의 방문을 바라는 마음이 아주 진하게 느껴졌다. 와 달라는데 가야지. 거절할 필요 있나?

나는 곧장 데보라로 향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살롱에 참석하기 위해 억지로 방문했던 시기와는 상당히 다른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젤로트 영애.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양옆으로 길게 선 데보라의 고용인들이 내게 허리를 숙인다. 각도가 최소 직각으로 보이는 것으로 봐선 내 방문을 각별히 신경 쓰라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놀라울 일 하나 없는 당연한 대우였다. 카발의 황태자인 네자르의 혼인이 발표된 지 이제 겨우 이틀. 세간에 나의 위치는 이미 황태자비였다.

“새벽에 이슬비가 내려 빗줄기가 굵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요.”

백작 부인의 태도는 단 며칠 사이 많은 부분이 변해 있었다. 마치 귀족 여식이 아닌 윗사람을 대하는 투와 자세. 내가 기대한 모습이기도 했다.

“에젤로트는 내내 쨍쨍하기만 했어요. 아마 데보라에 소나기가 온 모양이죠. ……아, 데보라 백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에젤로트 가문의 카트리나입니다.”

건강한 체격을 지닌 데보라 백작이 나의 인사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에젤로트 영애. 데보라에서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백작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치 부인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듯,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이곳의 마들렌이 일품이라 다시 방문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응접실은 살롱 때와 달리 차분하고 조용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던 동양의 도자기와 조각품은 자취를 감추고 고아한 꽃병과 그림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마치 내 방문을 염두에 두기라도 한 양.

“주방장이 그 소리를 들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겁니다. 마침 오늘 오전에도 마들렌을 구웠는데, 다행이군요.”

나는 내 앞으로 마련된 고운 빛깔의 밀크티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역시 불편해. 이런 고아한 귀부인들의 대화 방식은 가슴이 꽉 끼는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하다.

“부인, 괜찮다면 데보라의 번화가로 나가지 않겠어요? 이곳의 만년필이 그리 명품이라던데, 그중 최고인 가게를 소개받고 싶어요.”

“어머, 저야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이지요. 한데 마들렌은……?”

“음.”

짧게 고민하다 개나리처럼 노란 마들렌을 집어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으음, 맛있어!

“어서 나가져. 나리 조네여.”

몸을 일으키고 세피아 부인이 앞서 이동하길 기다렸다. 하나 부인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조심스레 내 앞에 섰다.

“에젤로트 영애, 제 말을 부디 기분 나쁘지 않게 들어 주셨으면 해요.”

이런 식으로 말문을 트고 나온 소리치고 기분 나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괜히 사람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입 닫으라 할 수는 없지.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께서는 장차 황후가 되실 몸으로, 카발 모든 귀부인의 귀감이 되셔야 합니다. 몸가짐에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야 다른 이들이 영애를 업신여기지 않을 겁니다.”

이 정도면 세피아 부인답게 아주 무난하고 친절한 충고 아닌가? 굳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어찌 생각하면 록허드가 내게 검술 수업을 강요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였으니. 다만 조금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도 있었기에 마들렌을 급히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 아닌가요?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감히 날 업신여기지 못하는 거죠.”

솔직하게 느끼는 바 그대로 떠들었을 뿐인데, 정작 말하고 보니 베딜라 황후가 떠올랐다. 찍어 누른다는 표현은 그 미친 여자나 뱉을 법한 소리지. 아무래도 정정하는 게 좋겠어.

“……라는 건 역시 제 객기에 불과하겠죠. 부인 말씀이 옳아요. 앞으로는 몸가짐에 더 신경 써야겠어요.”

아하하. 처음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던 억지웃음도 이제는 내 것처럼 편안하다.

“아, 그리고 앞으로 절 부를 때는 케이트라 불러 주셔요. 에젤로트는 영 딱딱하게 느껴져서.”

세피아 부인의 얼떨떨한 표정이 천천히 사그라든다. 나는 그녀의 하얗고 고운 뺨을 응시하며 접시 위의 마들렌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음음. 여씨 아무리 머거도 마싰네요.”

부인은 여타 귀부인과 달리 마차를 통한 이동을 선호하지 않았다. 나 역시 덜컹거리기만 하는 승차감 최악의 마차보다야 도보 이동을 훨씬 좋아했기에 이전처럼 자유롭게 번화가를 누빌 수 있었다.

“데보라의 자랑이라면 역시 인쇄술과 만년필이죠.”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제 친우가 데보라로 만년필을 구입하러 왔었어요.”

“뭘 좀 아는 친우를 두셨군요.”

입을 가린 채 밝게 웃던 세피아 부인은 곧 낯선 건물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킨 쿼발라우>

가볍게 훑기만 해도 주위 다른 가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흐르는 건물이었다. 더 낡고, 오래되었으나 그보다 더한 고풍스러움이 머무는 분위기.

“데보라에서 가장 오래된 만년필 가게예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영지의 만년필만 사용하셨는데, 이곳의 만년필이 가장 특출하다고 하셨지요. 펜촉의 마모가 아주 적다더군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장식대에는 단 두 종류의 만년필이 조촐하게 놓여 있었다. 그중 왼쪽 물건에는 몸통 우측에 금빛으로 새겨진 필기체가 아주 고아했다.

“……베딜라.”

황후의 이름이었다. 내 옆으로 다가와 창 너머를 들여다본 세피아 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딜라는 이 가게의 이름난 명품이에요. 킨 쿼발라우는 오래전부터 당대 황제와 황후의 이름을 딴 만년필을 판매해 왔어요. 매해 최대 열 개만 주문 제작하죠.”

밝은 루비색의 뚜껑과, 잿빛을 띠는 금색의 펜촉. 외양만 살펴도 쉽사리 베딜라 황후가 떠올랐다.

“황후 폐하를 뵌 적 있으신가요?”

내 물음에 먼 기억을 더듬듯, 세피아 부인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꽤 오래된 일이지요. 그 시절에는 황후 폐하의 말이 마치 황제 폐하의 명과 같아서… 바짝 굳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만 남아 있네요.”

과거의 황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한 인물이었는지는 이미 론을 통해 충분히 파악한 바 있었다.

베딜라 오드리네 카발.

네자르를 지옥 입구까지 몰아세우는 것으로 모자라, 그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자.

“부인.”

“예.”

“제가 그 여자와 황성을 나누어 가져야 할까요?”

나는 네자르가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 마땅찮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성 후 그 악마 같은 여자와 터를 나누어 살아야 하는 건 나 역시 해당되는 일이었으니까.

“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피아 부인의 얼굴에는 딱히 눈에 띌 만한 동요가 보이지는 않았다.

“저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장식대 위의 만년필을 응시했다.

“그 무엇이든 케이트 영애의 바람을 이뤄 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그 마음에 도의나 실리는 무의미하죠. 동반자라는 관계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어요?”

기다리던 답이었다. 황후와의 대치. 네자르가 나였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준비하려 했을까?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요. 황후 폐하의 성에서 아주 능숙하게 일할 수 있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고용인이요.”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과는 중간중간 서신으로 보내 드리지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리려는데, 세피아 부인이 급히 날 불러 세웠다.

“아, 케이트 영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장 킨 쿼발라우로 들어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들고 나왔다.

“마침 선물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데보라까지 절 만나러 오셨는데, 이왕이면 가장 좋은 물건으로 드리고 싶어서요.”

음. 이게 그 유명한 뇌물이라는 건가.

“고마워요.”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어야 마땅할까.

***

데보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다음 날. 데이지의 채근으로 힘겹게 눈을 뜬 나는 대뜸 침실로 침입한 록허드 때문에 몸을 굳혀야만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록허드가 노크도 없이 쳐들어왔다는 부분이 아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케이트. 기분이 좀 어때? 오늘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검술 수업 첫날이니 늦기 전에 어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라. 황성에서 브레이트 경이 기다리고 계신다.”

“……잠깐. 오늘이라고?”

쯧쯧 혀를 찬 록허드가 내게서 잔을 빼앗아 갔다.

“너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는 거냐? 이 오라비 출근이 더 늦어지기 전에 어서 준비해.”

그가 사라진 후 나는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 정말! 오늘은 좀 편히 쉬려고 했는데! 수업에 대해선 이미 진작에 말이 오갔던 일이라 투덜거릴 수도 없었다. 드레스를 입고 검을 휘두를 순 없으므로 일단 승마복을 걸치고 마차에 올랐다.

록허드는 뭐가 그리도 바쁜지 내가 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두툼한 서류를 들여다보기 바빴다.

“그래도 직책 좀 맡았다고 옛날만큼 막 살지는 않네. 역시 사람은 바빠야 한다더니.”

수 초가 지나도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지, 록허드에게선 어째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라, 대답은커녕 반응 한 번이 없어?

“돈 벌어 봤자 쓸 곳도 없으면서 일은 뭐 그리 열심히 하는지 몰라. 결혼은 언제 할래? 설마 진짜, 정말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지?”

말짱했던 그의 이마가 서서히 구겨지는 게 보인다. 나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

“록허드, 비록 우리가 원수라고 하지만, 일단은 피를 나눈 사이잖아. 다 이해해. 남자? 좋아할 수 있지. 퀴몰로 남작 소식 못 들었어? 그 남자는 예쁜 소년만 좋아한대.”

“하아, 정말 못 들어 주겠다, 케이트. 헛소리를 해도 좀 작작해야지. 옛날처럼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그 말은 즉, 내 목덜미를 들어 엉덩이를 때린단 소리였다. 난 기겁하며 소리쳤다.

“다 큰 숙녀의 볼기짝을 때린다고? 네자르한테 다 이를 거야!”

“이를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라. 최소한 얼굴은 봤다는 의미일 테니.”

혀를 차며 어울리지 않게 다시 서류로 향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찝찝했다.

“그렇게 바빠? 브레이트 탈리야 경을 만나러 가도 되는 거야?”

“그 능글맞은 노인네의 업무라곤 고작 체스와 신입 평기사들 괴롭히는 일이 전부야. 걱정할 일 하등 없어.”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브레이트 경은 판시온 소공작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한 기사에 상당히 걸맞은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네자르는 언제쯤 다시 여유로워질까?”

“정사란 수뇌가 바뀌기 전이 바뀐 후보다 훨씬 어지러운 법이야. 금방 안정을 찾을 테니 너는 평소처럼 할 일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도록 해.”

“그 수뇌가 언제 바뀌는데?”

록허드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들려왔다.

“곧.”

“허억, 허억……!”

그래, 솔직히 말해서 기대했다. 황성근위대 총사령관에게 검술 수업을 받는다기에 어떤 멋진 검으로 어떤 훈련을 받게 될까 살짝, 아주 살짝 기대하고 있었다.

“허억, 헉…….”

첫 수업에 검술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고 수직 베기 백 번, 수평 베기 백 번은 시킬 줄 알았다.

“벌써 느려지면 어떡합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이십시오. 이제 겨우 한 바퀴잖습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 바보 같은 기대이기는 했어. 베기는 무슨, 애초에 근력조차 없는 팔로 진검을 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허, 더 빨리 움직이시래도!”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뛰었다. 아니, 정정한다. 오전 두 시간 내내 뜀박질과 스트레칭을 반복했다. 보통 첫날은 근육통을 생각해서 무리하지 않는다던데, 브레이트 경에게는 그 최저선이 바로 두 시간인 듯싶었다. 참지 못하고 텅 빈 초원 한가운데 쓰러져 눕자, 편히 앉은 채 입만 움직이던 스승이 내게로 다가왔다.

“이제 반 바퀴 남았으니, 그것만 채우고 쉽시다.”

“헉, 헉… 반 바퀴는 무슨, 지금 꼼짝도 못 하겠거든요? 첫날부터 이렇게 무리시키는 게 어디 있어? 안 해요!”

“아직 두 시간도 안 됐습니다. 무리는 뭐가 무립니까?”

뭐어? 한심함이 가득 서린 어조에 버럭 성질이 튀어나왔다.

“내가 록허드나 기사학도처럼 무식하게 체력만 좋은 줄 알아요? 난 평생을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낸 귀족 여식이라구요. 바깥에서 한 시간 걷기도 고역이야!”

내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브레이트 경은 한동안 짧은 수염을 살살 매만지기만 했다. 이윽고 그는 널브러진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영애의 말도 어느 정도 타당한 것 같군요. 좋습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합시다. 여기서 억지로 더 굴리다간 한 대 맞을 것 같네요.”

역시 요즘 같은 시대에는 멍청하게 당하고 있기만 해선 안 된다.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피력해야지!

내민 손을 맞잡고 꾸역꾸역 일어서는데, 노곤함에 녹아 버릴 것 같은 내 심정과 달리 브레이트 경의 시선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흠. 그렇게 힘듭니까? 피는 못 속인다고, 이제 막 기사단에 입단했던 시절의 록허드 경이 떠오르는군요. 판시온 경… 아니, 소공작 못지않게 커다란 신장을 가졌으면서 어쩜 그리 투덜거리기에 바빴는지. 하하! 지금 생각해도 그놈처럼 제멋대로인 놈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날 보면 그 제멋대로인 놈이 떠오른다는 건가? 안 그래도 타는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 만한 망발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총사령관님이라도 할 말과 못 할 말이 있지!

“그새 또 제 욕을 하고 계셨습니까?”

엉망이 된 머리칼을 묶으며 대답하려던 때였다. 강한 손아귀가 내 팔을 쥐고 지지부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던 몸을 일으켰다. 네자르였다.

“나이를 그렇게 드시고선 왜 자꾸 남 앞에서 제 흉을 봐요?”

뒤따라 등장한 록허드의 목소리에 브레이트 경이 혀를 찼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록허드 너 이 새끼야, 여기저기 내 흉보고 다닌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반 경이 고대로 나한테 꼰질렀다!”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전 그런 적 없습니다.”

“없긴 뭘 없어? 단장직에 오르면 책임감 좀 생길 줄 알았더니 허구한 날 대련해서 어린애들 패고, 레이리 양 몰래 도망을 다니질 않나…….”

브레이트 경의 화가 잔소리로 넘어가는 와중, 네자르가 내 머리칼과 등에 묻은 풀을 떼어 냈다. 흙먼지와 잔디를 털면서도 변함없이 시큰둥한 표정을 보면 저 둘의 다툼이 일상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바쁜 거 아니야? 나 보러 와도 돼?”

눈앞에 흔들리던 머리칼이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따라 귀 뒤로 넘어간다.

“회의 가는 김에 잠깐 들른 거야. 록허드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군.”

“뭐를? 내 검술 연습?”

“그래. ……음, 점심 식사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지금 시간이 없어서.”

뒤에서 산만 한 덩치의 성인 남성 둘이 다툴 동안, 네자르는 계속해서 제 손으로 내 뺨을 조몰락거리기 바빴다. 뭐, 화장도 이미 지워졌으니까 괜찮겠지.

“업서서?”

“함께 저녁이라도 먹는 게 어떠려나, 싶네. 물론 네가 괜찮다면야.”

“우음. 나야 조치.”

“생크림 케이크 준비해 두라고 할까?”

“우음. 나쁘지 안치.”

어째 갈수록 꼬집는 힘이 강해지는 기분이라 고개를 빼지 않을 수 없었다.

“먹는 김에 하루 자고 가도 돼? 에젤로트로 돌아가기 너무 피곤해.”

텅 빈 제 손을 보는 네자르의 얼굴로 진한 서운함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이거, 가만뒀으면 해가 질 때까지 꼬집으려 했겠는데?

“마차를 부를 테니까 내 성으로 곧장 이동해. 어디 이상한 곳으로 샐 생각 말고. 툴드 괴롭히지 말고.”

“툴드 경이 그러디? 참 나,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케이트.”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네자르의 표정이 엄해졌다. 마치 숲 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하루를 보냈던 날처럼. 이럴 땐 말대꾸할 생각 말고 얌전히 주억이는 게 신상에 이로울 터였다.

“알았어. 곧장 성으로 가고 툴드 경도 괴롭히지 않을게. 나만 믿어!”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게 대답했으나 네자르의 의심 어린 눈빛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하아,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이 정도 신뢰밖에 얻지 못했다니. 오늘은 네자르의 바람대로 그의 성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야 할 듯싶었다. 더불어 툴드와도 사이좋게 지내야겠어.

“사람이 뭐 그리 쪼잔해요?”

“크흠.”

헛기침만 들어도 그의 민망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그대로 네자르에게 일러바쳤을 줄이야.

툴드가 네자르에게 떠들었을 내용이야 뻔했다. 새벽에 말을 뺏어서 황성을 떠돌아다니다가 돌아왔다고 했겠지. 그 말을 하지 않고서야 네자르가 얌전히 성에만 틀어박혀 있으라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뭘 어떻게 괴롭혔다고 그걸 그대로 일러바쳐? 늦은 새벽에 하녀랑 이러쿵저러쿵했던 일도 말했어요?”

“아, 아닙니다.”

“쪼잔한 것으로 모자라 아주 치졸하네요. 나랑 다시 보기 싫은 거죠? 그냥 꺼져 줄까요?”

황태자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의 내부. 바로 옆자리의 툴드는 죄인이 된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내가 따지는 이유는 속이 좁아서가 아니야. 다 네자르가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기 때문이라구. 서로 잘잘못을 가려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스리슬쩍 마주치는 눈동자를 더 힘주어 노려봤다. 동시에 툴드의 어색한 웃음이 마차 내부를 둥둥 크게 울렸다.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믿지는 않지만, 기분이 살짝이나마 풀렸으니 된 일이다.

“이왕 가는 길, 유령의 성을 지나쳐서 가 줘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네.”

“유령의 성이요? ……아, 아칼루체 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짧게 고개를 주억였다. 황성에 올 때마다 한 번씩 생각나고는 했는데, 굳이 방문할 연유가 없어 성의 외양이 어찌 변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새로 단장했다고 들었어요. 저번에 지나갔을 때는 반쯤 무너져 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싶어서.”

단순히 궁금했을 뿐인데 툴드는 마치 괴상망측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건물을 고쳤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그리 먼 길도 아니니 지나가 달라고 일러두기는 하겠습니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는 훈련에 지친 몸을 편안히 기대었다. 눈꺼풀을 닫으면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아 눈을 빳빳이 뜬 상태로.

황성의 부지가 아무리 넓다 해도 마차나 말을 타고 다니면 한 바퀴를 전부 도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성에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허벅지가 뚝 끊길 것 같은 근육통에 비명을 삼켜야 했다.

“으음. 확실히 고친 것 같지는 않네.”

설마 그날 이곳에서 앤드류를 본 게 꿈이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황자의 성이 이렇게 무방비로 놓일 수는 없었다.

부득불 따라오겠다는 툴드에게 위협을 가한 후 유령 성의 낡고 무거운 문을 밀었다. 텅 빈 성의 홀에는 창 너머로 떨어지는 정오의 햇살과 먼지가 허공에서 천천히 비산하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새벽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유령 성이라는 표현은 확실히 과장된 감이 있고… 관리가 덜 된 수준이 딱 알맞아 보였다.

“지겹게도 찾아오는군. 명색이 차기 황태자비면서 시간이 남아도는 건가?”

목소리의 주인은 이제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하도 뻔해서 이제 놀랄 필요도 없었다. 인기척 하나 없는 버려진 성에서, 거리낌 없이 내게 말을 걸 인물은 앤드류 오드리네 카발밖에 없었으므로.

“여기 말이야, 네게 주어질 성이라고 하지 않았어?”

앤드류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안장에 올라 있었다. 그래, 말안장.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싶었지만 역시 눈앞의 저 까만 갈기가 달린 생명체는 말이 맞다. 그는 지금 자신의 성 안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록허드도 안 할 짓을 하다니, 앤드류도 정말 갈 때까지 갔구나.

“보면 몰라? 거절했지. 어차피 금방 쓸모없어질 성, 고쳐 봤자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그럼 그동안은 어디서 지내 온 거야?”

“일전에 말한 적 있지 않나? 어디서든 지내 왔다고.”

착각이 아니라면, 아니 착각일 리 없었다. 눈앞에서 말에 올라 배회하고 있는 앤드류는 금방이라도 괴성을 내지를 듯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라면 열과 성의를 다해 그를 비꼬려 했겠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너, 제정신 맞지?”

걱정을 담아 물었으나 한동안 묵묵히 안장에 앉아 있던 그의 입에선 대뜸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이제 와 말하지만, 뭐라도 하려는 네 태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줏대 없이 휘둘리기만 하면 지금의 나처럼 영 안 좋은 꼴을 면하지 못하거든.”

무슨 일이 있었네. 확실히 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없다.

“재수 없게 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약한 척이야?”

나름대로 평소처럼 대하려 했으나 앤드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저 할 말만 줄줄 뱉었다.

“사람은 주제 파악을 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는 법이야. 내가 평생을 걸쳐 확실하게 배워 온 진리이니 너도 잘 기억해 둬라.”

“누가 보면 여든 살 할아범인 줄 알겠어? 정작 나보다 어린 주제에.”

포기하지 않고 맞받아치자 뒤늦게 그가 그다운 헛웃음을 지었다.

“겨우 한 살 차이로 생색 부리기는. ……에자렛이 걱정이군. 나에게는 자유라도 있지만, 누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헛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어머니 때문에 여태 그 끔찍한 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작게 한숨을 내쉰 앤드류가 천천히 말의 머리를 홀의 계단 쪽으로 돌렸다.

“감상에 젖어서 그런가, 이제는 별말을 다 하게 되네. 이미 젖은 감상 계속해서 땅까지 파고 들어갈 생각인데 너는 이만 나가는 게 어때?”

축객령이었다. 성의 주인이 나가라 하면 군말 없이 나가는 수밖에. 하지만 앤드류가 뱉은 헛소리들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벌려 대답했다.

“……다음에 볼 때는 제대로 된 사냥법을 가르쳐 줄게. 그때까지 미리 연습이나 해 둬.”

그는 대답 없이 말의 머리를 돌렸다. 이윽고 밤보다 어두운 분위기의 성을 벗어나니 어느새 흐릿해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툴드.”

“예.”

“네자르가 즉위하면 타 후계자들은 황성을 나가야 하는 건가요?”

무언가 가늠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툴드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건 전적으로 전하의 의지에 달린 일입니다. 보통 유력했던 후계자들은 쫓기듯 나가는 게 관례이고… 이후 생사는 불투명한 경우가 많지요.”

나에게는 툴드의 이야기가 마치 앤드류의 비참한 말로처럼 들려왔다.

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식사도 거르고 곧장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식어 버린 땀과 다닥다닥 붙은 먼지로 금방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찝찝함을 이기지 못한 몸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시간이 훌쩍 흘러 저녁이 된 후였다.

“배고파.”

넋을 빼고 목욕을 하는 사이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네자르는 귀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녀장의 배려로 가볍게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아주 가볍게였다.

시계의 시침이 저녁 7시를 넘겨도 네자르는 오지 않았다. 나는 눈치를 살피는 고용인들 틈에서 조용히 식탁 앞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어느새 저녁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안 오네. 음식이 다 식겠어.”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이럴 사람이 아니었기에 더 걱정이 일었다.

“케이트 영애, 방금 본성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네자르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럴 때 이런 식으로 오는 소식은 대개 답이 정해져 있다. 예상대로 서신에는 네자르의 용무가 매우 급하며, 함께 식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장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먹을 걸 그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서운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식탁을 엎어 버릴 만큼은 아니었다.

“최근 제때 식사를 하셨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아마 전하께서도 굉장히 아쉬워하고 계실 겁니다.”

변명은 서신에 충분히 적혀 있건만, 툴드는 마치 저가 약속을 어긴 양 열심히 네자르를 변호하기 바빴다.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눈치를 보니 영 불편했다.

“이해해요. 단지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 네자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거든.”

허기에 몸부림치던 배 속이 돌연 조용해지고, 입맛이 돌던 음식의 향도 건조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끼니는 제때 챙겨 먹는 게 좋을 텐데. 고개를 틀어 빗줄기가 굵어진 어두운 황성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다.

***

“세상에!”

반응은 예상한 그대로였으나, 설마 저렇게나 측은지심이 이는 꼴로 지내고 있었을 줄이야.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웬 길거리 부랑자가 뛰어왔다. 기름이 줄줄 흘러 산발인 적발에, 까맣게 변색한 눈매. 그리고 초점 없이 흐릿한 안광까지. 당황한 호위 기사가 내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한숨을 푹 내쉬고 그 너른 등을 밀어냈다.

“세상에, 혼인! 혼인이라니요! 죽을 때까지 홀로 살아갈 줄 알았던 케이트와 카론이 혼인이라니요!”

내게로 뛰어들어 안긴 릴리가 세상 떠나가라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부끄러워 미치겠네. 힐끔힐끔 우리를 훔쳐보며 지나가는 눈빛들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벌써 잊은 거예요? 카론과 나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었어요. 애초에 이 나이가 되어서 혼인이 정해지지 않은 여식은 손에 꼽는다구요. 당신처럼.”

“하지만 안 할 거라면서요? 다 때려치울 거라면서요! 전하의 애인을 찾으려고 카론이랑 나랑 그렇게 야단법…….”

쓸데없는 소리가 새어 나가기 전에 겁 없는 주둥이를 급히 틀어막았다.

“읍! 으읍!”

이 감당 못 할 폭탄 같으니라고.

릴리의 몸을 질질 끌고 이 거대한 아카데미 부지에서 유일하게 눈에 익은 건물로 들어갔다. 릭 에젤로트 교수의 집무실, 그러니까 릴리가 종일 학문에 매달리는 실험실이 있는 동이었다.

“악!”

이게 정말! 손가락 마디가 끊기는 고통에 릴리를 계단 아래로 내던지고 손을 털었다. 잇자국이 선명한 건 둘째 치고 인간의 것이 아닌 침 냄새가 풍겼다. 아니, 인간적으로 샤워는 제때 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깨물었으니까 아프죠. 카론은 왜 함께 안 온 거예요? 나랑 같이 중앙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제도에서 프랑쿠프트 카페의 고구마 무스 케이크를 먹기로 했으면서!”

“카론도 이곳으로 오고 있을 테니 제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게 어때요?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나눠도 충분하잖아요.”

릴리는 릭의 집무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몸은 카트리나 에젤로트. 짐승의 화를 어찌 잠재워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 이럴 때를 대비해 비장의 수를 숨겨 왔지.

“릴리, 잠깐 멈춰 봐요.”

“싫어요.”

“킨 쿼발라우.”

보란 듯이 더 빠르게 뛰던 걸음이 돌연 우뚝, 멈춘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작지만 고풍스러운 상자를 천천히 꺼냈다.

“대대로 황가에 가장 많은 만년필을 납품한 가게. 책과 만년필의 본가인 데보라에서도 최고의 한정판이라 취급받는 ‘카발 컬렉션’.”

내 비장한 목소리에 돌아선 릴리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서, 설마, 그 상자는……!”

“맞아요. 올해 마지막 남은 카발 컬렉션 만년필이에요. 릴리에게 선물해 주려고 가져왔지요.”

데보라 부인으로부터 받은 만년필이었지만, 내게는 딱히 효용이 없는 물건이었다. 릴리라면 나와 카론의 소식을 아쉽게 여기리라 생각했고, 혹시 몰라 물건을 준비해 온 게 다행이었다. 멍청하게 맨몸으로 왔다면 정말 피곤했을 거야.

“정말요? 릭 교수님이 아닌 나에게? 이 귀한 만년필을?”

나는 부러 혼돈에 빠진 얼굴에 대고 밝게 웃었다. 만년필 하나로 저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 농담이라도 아니라는 소릴 못 하겠다.

“부담 같은 건 느끼지 말고 잘 사용해 줘요. 릴리에게 꼭 주고 싶었거든요.”

어차피 나는 비싼 만년필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 이 만년필이 세계 유일한 보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후후. 저는 절대로 거절 안 해요, 케이트. 잘 쓸게요!”

토끼처럼 펄쩍펄쩍 뛰며 상자를 껴안은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상태가 좀 온전하면 모르겠는데, 저렇게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좋아하니 좀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똑똑.

“교수님, 케이트가 왔어요.”

졸기라도 하는 걸까. 집무실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쾅쾅쾅!

“교수님! 안에 계세요? 네?”

음. 아무리 마음에 드는 선물로 힘이 솟는다고 하지만, 문을 너무 강하게 두드리는 거 아닌가.

쾅쾅쾅!

“교수님!”

쾅!쾅!쾅!

“교수님! 케이트가 왔다구요!”

“잠깐, 릴리? 진정하고 우리 그냥 들어가요. 너무 흥분하지 말자구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이렇게 힘이 좋은 걸 보니 그나마 끼니는 거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간 집무실은 릭의 공간답게 차분하고, 정적이었다.

“릭?”

다만 약간의 부산스러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할 내부가 다소 엉망진창인 느낌이었다. 의자 역시 책상 뒤로 멀찍이 밀린 상태이고. 마치 일에 집중하다 급하게 뛰쳐나간 것 같았다.

“어머나, 10분 전까지만 해도 계셨는데? 잠깐 일이 생기셨나 봐요. 워낙 바쁘신 분이라서요.”

“그럼 앉아서 기다리죠, 뭐. 꽃을 가져왔는데 어디에 꽂는 게 좋을…….”

벌컥. 너무나 거리낌 없이 문이 열렸고, 그에 나는 당연히 릭이 돌아온 줄 알았다.

“카론.”

그러나 등장한 인물은 예상외로 카론이었다. 드디어 셋이 모두 모였으니 이쯤에서 나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고, 릴리는 ‘세상에, 세상에!’를 외치며 카론에게 달라붙어야 함이 정상이다.

“아! 오랜만이에요, 릴리.”

하지만 나와 릴리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카론의 표정이 석고상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던 탓이다.

“저, 케이트. 혹시 소식… 들으셨나요?”

“소식? 무슨 소식?”

내 반문을 듣자마자 카론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를 알아 온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저런 반응일까. 이유도 모르는 채 몸이 바짝 긴장됨을 느꼈다.

“애매하게 엇갈렸나 보네요. 저는 케이트가 바로 황성으로 가실 줄 알았거든요.”

문도 닫지 않고 찬찬히 걸어온 그녀는 여전히 기묘한 얼굴이었다. 듣는 즉시 황성으로 가야 하는 소식. 웬만한 일로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는 카론이 눈에 띄게 당황할 만한 소식.

“오늘 오전에 황제 폐하께서 타계하셨어요. 큰 변고가 없다면 내일 곧장 네자르 전하의 즉위식이 있을 거예요.”

바로 카발 제국 황제의 서거였다.

***

‘……또한 황후는 황성 및 제도에서 개최하는 모든 행사와 사교 모임을 통솔할 권한을 역임하며 제국 사교 문화의 발전을 위해 매달 두 번 이상의 다과 모임과 살롱 운영을… 아, 그만 읽을래! 내가 대체 왜 이런 걸 읽고 있어야 해?’

탁. 다신 읽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커다란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한데 이런 쓸모없는 짓 말라는 나의 시위에도 록허드는 여전히 저 홀로 체스를 두고 있었으며, 네자르 역시 글자로 빽빽한 전문 서적을 필사하기 바빴다. 음. 이 타이밍에 몰래 도망갈까.

거칠게 책 커버를 덮었던 일이 무색할 정도로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잠깐 볼일이 있는 척 사뿐사뿐 걸어가면…….

‘도망칠 생각 말고 어서 자리에 앉아. 다시 소리 내서 읽어.’

윽.

‘싫어, 이제 안 읽을래. 차라리 그 짜증 나는 외국어 공부를 하고 말지.’

말은 그렇게 해도 얌전히 돌아와 의자에 착석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응시하던 네자르가 그제야 다시 눈을 책으로 옮겼다.

‘나중에 고생하기 싫으면 지금 미리 읽어 놔야지. 너, 나중에 황실 교사한테 울면서 배울래? 지금처럼 찡찡거리다가 나한테 달려올 게 분명한데?’

요즘 네자르는 내가 소양 책 읽기를 거부하려 할 때마다 꼭 저런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너처럼 멍청하면 황실 교사가 회초리로 때리면서 가르칠 거라느니, 일어나서 잘 때까지 계속 수업만 진행될 거라느니, 그때 돼도 자기는 도와주지 않을 거라느니, 전부 충고를 빙자한 겁주기였다.

‘에, 에든 오라버니가 나 정도면 데뷔탕트를 잘 치를 거랬어. 그리고 아직 사교 데뷔까지 몇 년 남았잖아? 소양 수업은 그때 해도 돼.’

‘케이트.’

짧게 한숨을 쉰 네자르가 도서관 책상 위로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또 무슨 소릴 하려고? 겁먹은 채 손을 빼내려 했으나 워낙 힘이 강해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내가 분명 말했지? 네 기억력이 금붕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남들과 같은 속도로 수업을 진행해선 안 된다고.’

‘이제 금붕어 아니거든! 웬만하면 잘 기억하거든!’

‘그럼 방금 읽었던 부분 다시 말해 봐.’

‘……어.’

살롱이란 단어가 나왔던 것 같기는 한데. 생각 없이 줄줄 읊기만 했으니 다시 말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건 반칙이야.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갑작스레 물어보면 못 외…….’

‘황후는 황성 및 제도에서 개최하는 모든 행사와 사교 모임을 통솔할 권한을 역임하며 제국 사교 문화의 발전을 위해 매달 두 번 이상의 다과 모임과 살롱 운영…까지 읽었었나?’

이를 바득바득 갈며 록허드를 째려봤다. 조용히 체스나 둘 것이지 갑자기 끼어들어선 사람 불편하게 하고 난리람. 네자르가 워낙 손을 꽉 쥐고 있기에 체스 판 위를 난장판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어차피 엎어 봤자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복구시킬 테지만.

‘보통은 못 외워, 보통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둘 다 아카데미 수석 차석이잖아!’

‘성적이 좋은 건 그만큼 노력하기 때문이란다. 불평불만만 하지 말라는 소리야, 이 무지하고 어린 양아.’

뭐? 무지하고 어린 양?

뺀질거리게 말하는 록허드의 꼴이 너무 재수 없어서 화가 들끓었다. 내가 들썩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라도 했는지, 손을 놓은 네자르가 책상을 크게 돌아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그는 책을 멀찍이 밀어내고 내가 앉은 의자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또 설득하려 하네, 또!

일장 연설을 펼칠 분위기였기에 급히 선수를 쳤다.

‘싫어. 무슨 말을 해도 안 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부터 열심히 해서 내가 얻는 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응답은 그가 아닌 얄미운 록허드에게서 들려왔다.

‘어허. 그런 생각으로 네자르와 약혼하겠다 뭐다 난리 치는 거야? 우리 꼬맹이는 아직도 자세가 안 되어 있네.’

‘너는 좀 닥쳐!’

버럭 소리를 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네자르를 쳐다봤다. 신경 긁는 목소리를 듣다가 차분한 검홍빛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심신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네자르는 제국의 최고인 황제 폐하가 될 거잖아. 그렇지? 맞지?’

확신이 담긴 질문이었으나 정작 눈앞의 네자르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표정이었다.

‘음.’

뭐, 뭐야? 내가 말을 잘못했나? 이번 물음에 대한 답도 그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어때, 네자르. 될 것 같냐?’

마치 불가능을 논하는 어투였기에 고개를 홱 돌려 록허드를 노려봤다.

‘당연히 되겠지! 그래서 황태자인 거잖아!’

‘……뭐, 네자르가 카발의 황태자이긴 하지.’

‘황제가 최고면 황후는 두 번째로 최고일 거 아니야. 그럼 황후는 황제한테만 잘 보이면 돼.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구. 그냥 편하게 하면 되는 거야!’

팔에 턱을 괴고 있던 네자르가 몸을 흔들며 웃었다. 날 비웃는 건가 싶어 삐죽 입술이 나오다가도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니 바짝 약 올라 있던 신경이 사르르 녹았다.

‘그 편하다는 게 대체 어떤 건데?’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받을 필요 있어? 그냥 손 흔들어 주면 되는 거지. 귀족 다과회를 할 때 일곱 명 이상 초대 못 하는 규율도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다과회를 하든 백 명을 초대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계속 말하라는 듯, 부드럽고 차분한 눈빛이 내 심장에 주먹질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분명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뭔가 더 위험해 보였다.

그, 그냥 얌전히 공부하는 게 나을까.

며칠 내내 귀족 소양 서적을 읽는 게 지겨워 한탄을 좀 했을 뿐인데. 어차피 난 네자르 말을 제대로 거역하지도 못하잖아?

‘사회성이 아예 자취를 감춘 수준이군. 네가 그러니까 입을 열 때마다 어머니한테 혼나는 거다. 뭐? 그냥 손을 흔들어 주면 된다고? 아예 신분 제도를 없애라고 하지 그러냐.’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나는 책을 들고 뛰듯이 날아가 록허드의 체스 판 위로 휘잉 휘둘렀다. 먼지처럼 날아가 바닥에 널브러지는 검고 하얀 체스 말들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너, 내가 입 닫으랬지? 자꾸 사람 짜증 나게 할래?’

‘하아. 하나뿐인 여동생이 내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다니! 오늘도 이 오라버니는 슬픔에 베개를 눈물로 적시…….’

테이블과 소파 사이로 걸어 들어가 헛소리하기에 바쁜 주둥이를 책으로 꾸욱 눌렀다.

‘조용히 하란 말이야, 조용히!’

‘케이트, 그만 괴롭히고 다시 이리 와.’

괴롭히는 건 내가 아니라 록허드인데. 책을 재수 없는 형제의 뱃가죽 위로 집어 던지고 다시 네자르 앞에 앉았다. 주섬주섬 일어서는 록허드를 한심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그가 다시 나와 눈을 맞추었다.

‘잘 생각해 보니 네 말도 맞는 거 같아. 굳이 낡은 관습을 따를 필요는 없지.’

‘응.’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일단 지금은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 교양 수업을 진행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황위에 오르면 케이트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관례를 모두 없앨게.’

그,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데. 듣기에 좋은 소리였으나 네자르라면 분명 그리할 사람이었기에 말만으로도 부담이 앞섰다.

‘아주 참사랑꾼 납셨네, 납셨어.’

록허드의 이죽거림에도 네자르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평온하기만 하다.

‘지금 공부해야 하는 건 똑같잖아. 다 공부한 뒤에 없애 봐야 무슨 소용이야?’

결론적으로는 불평 말고 공부나 하라는 의미였다.

‘그럼 내가 뭘 해 줘야 마음이 좀 풀리겠어? 원하는 걸 말해 봐.’

원하는 것? 뭐가 있지? 꼭 이렇게 중요한 때에만 머리가 안 돌아가고 어버버거리기 바쁘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자르는 장난으로 이런 소릴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고, 고양이를 키울 수 있게 어머니를 설득해 달라고 할까? 아니면 더 이상 파프리카를 억지로 먹이지 말라고?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으로 네자르의 차분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제국은 어때.’

그리 말한 네자르는 마치 차라도 한잔 하지 않겠냐는 듯 여상한 분위기였다. 변함없이 미지근한 웃음을 걸친 얼굴과, 귀공자스럽게 말간 뺨까지. 물론 그때는 단순히 네자르의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여겼었다.

***

“……이트? 이만 일어나거라, 케이트.”

마차임이 분명한데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나를 응시하고 있던 에든이 다시 시선을 펼쳐 놓은 책으로 내렸다. 아주 잠깐 졸았던 것 같은데,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도착한 걸까.

“여긴 어디야?”

“방금 제도로 들어왔다. 곧 입성할 거야.”

그 말에 창을 내리고 바깥을 확인했다. 평소의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제도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집마다 걸린 카발의 국기가 옅은 바람에 차분하게 흔들린다. 황제의 서거를 애도하는 의미였다.

“에든.”

“그래.”

“황후를 대신해서 내가 왕관을 들어 올려도 되는 걸까?”

혹여나 중대한 자리에서 실수라도 할까 싶은 마음에 잠도 못 이뤘다.

전 황제의 상을 치른 지 이제 겨우 이틀. 오늘은 네자르의 대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카발 제국에는 국교가 없으므로 대개 황태후가 왕관을 들어 올리나, 황태후마저 타개했을 시에는 황태자비가 이를 돕는다.

하지만…….

“아직 황후께서 멀쩡히 살아 계시고, 심지어 나는 황태자비도 아니지. 이게 가능한 일이야?”

“모든 건 결국 네자르 전하의 의사에 달린 일이란다, 케이트.”

에든이 단호한 음성으로 내 불안감을 도닥였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그만큼이나 네자르 전하의 입지가 강력하다는 의미지. 역사적으로도 대관식에 황태후가 참여하지 못한 적은 종종 있었단다. 모두 황제의 친황태후가 아닌 경우였어. 그중에는 외가문의 친인척이 왕관을 드는 경우도 있었고.”

내 상황이 마냥 이상한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전하께서는 네게 퍽 대단한 힘이라도 실어 주실 모양이군.”

깊은 잠에 든 줄 알았던 릭이 길게 스트레칭을 하며 마차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설마 대관식에까지 참여시킬 줄이야. 마치 평생을 이 순간만 기다려 왔다는 듯 말이지.”

“말조심해라, 릭.”

에든의 경고에 픽 웃은 릭이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지 진담이겠습니까? 애초에 케이트가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이미 황태자비에 올라 있었을 겁니다. 얘가 헛짓거리만 안 했어도 그리 놀랄 일 없을 거란 소리지요.”

“헛짓거리라니? 저게 무슨 소리니, 케이트?”

아이참, 릭은 왜 또 쓸데없는 소릴 하고 난리야?

“그냥 좀… 사춘기였어.”

“좀이 아니었지, 좀이. 보통 사춘기가 5년을 지속하나? 저 혼자 사랑 없는 혼인은 할 수 없다느니, 전하의 마음이 동정심이라느니 별 난리를…….”

“시끄러워!”

다행히 에든은 내 수치스러운 과거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단다, 케이트. 그만큼 네 생각이 깊어졌다는 의미잖느냐.”

“하긴, 케이트가 예전만큼 일차원적인 사고에서는 많이 벗어났지요. 가끔 보면 신기하긴 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똑똑. 마차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황성 도착을 알리는 노크였다. 책 표지를 덮은 에든이 활짝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니 케이트, 너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 생각해야 한단다.”

연습이 필요할까 싶어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건만, 기껏해야 말로 몇 마디 설명해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정확하고 세밀하지도 않았다. 정말 내가 왕관을 올려 주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설명에 급한 감이 있었다.

“현재 본성에 남은 하녀와 시종 들이 대부분 신입이라 일이 느리고 실수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책을 맡은 책임자들이 굉장히 바쁜 상태입니다.”

에든과 릭, 그리고 부모님은 배정받은 응접실로 떠났지, 록허드는 황성 호위 업무를 진행하고 있지. 홀로 남은 내가 엄한 곳에서 우왕좌왕할까 걱정되었는지, 론이 몸소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특히 대관식처럼 국가적으로 큰 행사는 아무리 오래 황성에서 일한 자들이어도 준비하기 버거운 감이 있어서요. 수십 년에 고작 한 번 있는 일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큰 사건 없이 평화롭게 끝나기만 해도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본성의 고용인들이 다 나간 거야?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사람이 부족하다니.”

지나가던 하녀에게서 짧게 보고를 받은 론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자르 전하께서 전부 내쫓았습니다. 사실 제위가 바뀜과 동시에 본성을 비우는 건 연례와도 같은 일이지요. 다만 보통은 대관식 후에 일어나는데… 전하께서는 하루라도 더 빨리 비우고 싶으셨나 봅니다. 하하! 효율이고 뭐고 당신 눈에 밟히는 건 전부 치우신 거죠.”

말하는 와중에도 젊은 고용인들이 달려와 론에게서 허락과 자문을 받고 사라진다. 이제는 황제의 보좌관이 될 론이 내 옆에 있어도 되는 게 맞는 걸까. 지금 그의 행동이야말로 비효율의 극치인데?

“내가 걱정되는 거면 차라리 다른 분을 보내는 게 어때? 대관식 당일이니 툴드 경이나 키올 경은 안 되겠고… 으음. 누가 괜찮으려나?”

론과 황성의 입장을 생각해 뱉은 말임에도 그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경중이 있듯, 영애 곁을 지키는 게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겁니다. 혹시 눈에 계속 거슬리셨던 거라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느긋하게 차라도 한잔 하면서 옛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여 1층 홀을 살폈다. 황금이 번쩍이는 화려한 카발 제국의 황좌. 그 양옆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카발 제국의 국기와 수십 개의 속국 국기들이 나란히 매달려 있다.

대관식이 황제의 상 직후 이뤄지는 이유가 바로 저 속국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황좌가 오랜 시간 비워지면 언제, 어디서, 어느 집단이 반기를 들고 일어설지 모른다. 네자르에게는 영원한 이별을 슬퍼할 겨를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괜찮을 거야. 눈앞에서 계속 확인해야 실감이 나지, 어디 틀어박혀 있으면 오히려 긴장이 풀릴 테니까. 그런데 과연 네자르가 황제의 서거를 슬피 여겼을까?

“아,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점이 있어.”

“뭐든 물어보십시오.”

“내가 황후… 아니, 황태후께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해도 되는 거야?”

“네, 됩니다.”

물어본 내가 민망할 정도로 칼 같은 대답이었다.

“지금의 네자르 전하께서는 그 무엇이든 가능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안 될 일은 되게 만들고, 될 일은 불가하게 만드실 수 있으시죠. 황제란 그런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네자르 전하께서 그 긴 시간을 싸워 온 거니까요.”

분주하던 홀의 분위기가 점차 차분해져 간다. 세상 급한 안색으로 론의 해답을 갈구했던 고용인들 역시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뒤편에 마련된 괘종시계의 시침은 정확히 낮 1시를 가리켰다. 대관식 예정 시간까지는 이제 겨우 한 시간이 남은 상태.

“궁금한 건 오히려 제 쪽이군요. 케이트 영애께서는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까? 귀족 여식으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버리고, 온전히 네자르 전하의 사람이 될 준비가요.”

네자르의 사람이라 표현하니 뭔가 거창한 느낌이다. 기껏해야 약혼에서 혼인으로 나아갔을 뿐이고, 거주 지역이 에젤로트에서 제도로 바뀐 것인데 말이지. 그래도 평생의 터전이었던 에젤로트를 떠나는 순간 울컥할 것 같기는 했다.

“준비랄 게 뭐 있겠어. 조금 더 현명하고 성숙한 여인처럼 행동하면 되는 거야?”

내 물음에 론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누구도 감히 영애에게 황후 자리에 걸맞은 소양을 갖추길 강요하지 못할 겁니다. 그게 바로 권력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소리처럼 들리네.”

“아주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황태후다. 나는 그 여자가 네자르의 성에서 버젓이 숨 쉬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권력이라. 나의 권력이면 황태후의 사람들도 멋대로 부릴 수 있을까?

“이제 내려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기 에젤로트 백작 내외와 영애의 형제분들이 보이는군요.”

그의 말대로 낯익은 귀족들이 하나둘 홀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가문의 여식이 곧 황후가 될 예정이었기에 에젤로트 가문의 자리는 대관식 맨 앞줄이었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자리로 찾아갈 동안 주위 귀족들의 이야기가 퍽 시끌시끌했다.

“폐하께서 이미 오래전에 서거하셨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나 역시 들었소. 네자르 전하께서 자리를 잡으실 동안 발표를 계속 미뤄 왔다지.”

“근 일주일 내로 정무 회의만 열 번 이상 열렸다고 하더군요. 오드리네 후작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투정을 부리지 뭐예요? 혼인을 준비하기도 버거운 시간에 종일 황성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고.”

스리슬쩍 들려오는 이야기가 꽤 자극적이다. 하지만 나는 짐짓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워낙 치밀하신 분이라, 충분히 타당한 소문이라 생각되는군.”

“충분히 그럴 분이에요. 이번 대관식도 황후 폐하가 아닌 에젤로트 영애가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진정 네자르 전하의 시대가 막이 열렸구려.”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신 분이죠.”

진심으로 대단하다 여기는 것인지, 벌써 알랑거리기 시작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전에 론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이 다 허구처럼 느껴졌다. 대체 어찌 가능했을까? 나라면 전부 포기하고 황성을 뛰쳐나갔을 거야. 그 외의 다른 선택지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귀빈께서는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리에 앉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홀이 꽉 찼다. 내 대관식도 아닌데 등 뒤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색 또한 그리 좋지 못했는지, 바로 옆에 앉은 에든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괜찮니, 케이트?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하구나.”

“토할 것 같아.”

내 직접적인 표현에 에든은 놀람보다 걱정이 앞서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꽉꽉 누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걱정하지 마. 대관식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

“잠깐 일어서서 전하께 왕관을 씌워 드리는 일이 그렇게 부담스럽니?”

에든의 말에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네자르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벅찬 감정이 느껴지긴 해도 딱히 구토가 올라올 만큼 떨리는 일은 아니었다.

“그거랑은 상관없어. 그냥, 좀…….”

꿈속에서 네자르가 했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돈다.

내게 제국을 준다던 그 말. 이미 훌쩍 지난 시절의 이야기고, 네자르 역시 말끔히 잊어버렸을 확률이 높았다. 우스갯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나 그만큼이나 어이없는 우스갯소리도 또 없었지. 농담이어도 상관없었다. 진담이었다면 그 정도로 날 귀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끝이었으니까.

“편히 마음먹도록 해. 네 부모 형제들 모두 옆에 있으니.”

한데 처음으로, 그의 마음이 내가 상상했던 형태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수 있다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카발 제국이 대륙에 뿌리를 튼 지 582년이 훌쩍 흘러, 스물두 번째 연호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 시대의 막을…….”

능글맞은 필프론츠 후작도 대관식에서는 황제의 듬직한 외척이었다.

둘째 누이가 아닌 첫째 사촌을 선택한 남자. 자신의 손으로 황후를 무너뜨리고, 네자르가 황위에 오르게 된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윽고 엄숙해진 홀 저 끝에서 네자르가 성큼성큼 카펫을 밟고 걸어왔다. 카발 제국의 국기가 수놓인 붉은 망토와 새까만 머리칼이 그렇게 대비되어 보일 수 없었다.

“선황 폐하와 하늘에서 축복하고 계실 오드리네 전 황후 폐하를 대신하여 여쭙겠습니다.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카발 제국의 무궁한 영광에 평생을 바칠 수 있는가?”

“예.”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카발 제국의 영원, 평화, 명예를 수호할 수 있는가?”

“예.”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갑작스레 결정된 대관식이었기에 타국은 물론이고 속국에서조차 그 어떤 사신도 도착하지 못했다. 아마 몇 주 뒤 본성에는 축하 사절단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선물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될 테다. 그의 옆에서 다양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았다.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카발 제국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제국의 신민을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네자르가 무릎을 꿇고 앉은 반대편에는 황태후와 에자렛 황녀가 앉아 있었다. 둘 다 까만 옷에 까만 베일로 얼굴을 가렸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한데 앤드류는 어딜 간 거지?

“이로써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 카발 제국의 23대 황제가 되었음을, 나 필프론츠 오드리네의 이름을 걸고 엄숙히 선포하는 바입니다.”

내 차례가 왔다. 머리가 하얗게 비는 기분이었으나 일단 자리에서 일어서 왕관이 놓인 장식대 앞으로 걸어갔다. 수백 년을 대대로 내려온 카발의 왕관은 거대하고 무거웠으며 그만큼 황홀했다.

이렇듯 대관식 맨 윗자리에 서니 양옆으로 나란히 자리를 잡은 카발 귀족들의 정수리가 훤히 보였다. 떨릴 만도 하지만 코앞에 날 향해서 무릎을 꿇은 네자르를 인지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땅을 바라보는 시선이었기에 그와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숨 막히는 상황으로부터 재빨리 벗어나기 위해 단정한 그의 머리 위로 왕관을 올렸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양, 또는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것처럼 둘은 완벽하게 합을 이루었다.

“무궁한 영광을 누리시옵소서, 황제 폐하.”

내 단출한 한마디를 시작으로 수백 명의 귀족이 기립해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무궁한 영광을 누리시옵소서, 황제 폐하!”

사위가 해수면 아래로 침전하듯 무거워지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홀에서는 오직 창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만이 오롯이 자리한다. 옷자락이 움직이고, 코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네자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멈춰 버린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자유로이 움직였다. 마주친 눈동자는 태양 빛을 정면으로 받아 검홍색이 아닌 선명한 적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약속했던 대로…….”

이 자리의 모두가 그러하듯, 나 역시 숨을 멈추었다. 코끝이 닿지는 않을까? 지척에 다가온 네자르의 입술이 문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혀에 담았다.

“이 제국을 네게 바칠게, 카트리나. 영원한 나의 주인.”

무언가 다짐한 듯 진중하고 차분한 시선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짧은 미소와 함께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 모든 순간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이후 대관식이 완전히 마무리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림처럼 선 네자르의 위용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은 강처럼 흘렀다. 네자르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홀에서 사라진 후 귀족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론이 조심스레 내 등 뒤로 다가온 건 그들을 따라 홀을 벗어나려 할 즈음이었다.

“잠시 폐하를 만나 뵙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그 명칭의 주인이 네자르임을 인지하는 데까지 수 초가 걸렸다. 그래, 이제는 네자르가 이 제국의 주인이지. 고작 몇 시간 만에 황자에서 황위에 오른 네자르. 그런 네자르를 처음으로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긴장으로 호흡 곤란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관식이 끝난 후 방문하는 본성은 새벽의 유령 성처럼 고요하고 서늘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의 즉위를 축복하는데, 오직 이 장소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네자르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생의 숙원을 이루었으니 마냥 기쁠까? 아니면 그 역시 사람이라 채 긴장을 풀지 못했을까.

나는 휘황찬란한 황제의 침실에 멍하니 앉아 네자르를 기다렸다. 그의 상념을 유추하는 사이, 하늘 위에 걸려 있던 해가 천천히 산등성이로 떨어졌다. 긴장감도 서서히 풀려 방 안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스르륵 잠들었던 것 같다. 미약한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에는 익숙한 검홍색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자르.”

그사이 해가 지기라도 했나. 까만 어둠과 유약하게 흔들리는 등불에 네자르의 얼굴이 흐릿했다. 그래도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매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미소에서는 알 수 없는 후련함과 무거운 중압감이 느껴졌다.

“미안. 생각했던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았어. 얼굴만 아는 선조들 한 분, 한 분에게 얼마나 아양을 떨어야 했던지.”

“아양?”

“물려주신 제국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선언 말이야. 대체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몰라. 나중에는 입이 다 아리더군.”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네자르의 잘생긴 입술을 매만졌다. 늘 느끼지만 적당히 도톰하고 말라비틀어진 구석 하나 없이 예쁘다. 내 손길을 즐기기라도 하듯 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 수고 많았어. 내가 본 네자르의 모습 중에 가장 멋있었어.”

“제국까지 선물했는데 초라해 보일 순 없지.”

네자르가 짧게 웃었다. 얼굴 반쪽이 그늘져 있었으나 그마저도 예뻤다. 가지런한 눈썹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추자 루비처럼 영롱하게 일렁이던 눈동자가 짙은 속눈썹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의 입술이 겹치는 동안, 그의 따뜻한 손이 내 뺨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평소보다 더 느릿하고 집요한 입맞춤이라 숨을 고르기 힘들었다. 공기는 더없이 차분했으나 가슴께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으로 이상하리만치 간지러워지고 있었다.

“저녁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그가 다시 내 혀를 삼켰다. 네자르는 이제까지와 달리 몹시 급해 보였다. 커다란 손이 내 귀를 쓸다가 어깨를 타고 내려가 어느새 허리를 맴돌았다.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듯 상냥하면서도 느린 손길이 가슴에 닿았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 찰나의 변화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네자르가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꽤 거친 움직임이었기에 침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는 내게 낯설기만 한, 생전 본 적 없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빌어먹을. 미안해, 케이트. 나는…….”

거칠어진 목소리는 어쩐지 자책하고 있었다.

“나는… 너는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 참았어.”

바보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가 아닌 내가 말이다. 나는 네자르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듣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야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니까!

말없이 눈만 깜빡일 동안, 네자르는 드물게 힘들어하는 내색을 했다.

“오해하지 마, 케이트. 나는 이러려고 널 부른 게 아니야. 그냥,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네가 말도 안 되게 예뻐서…….”

그는 즉위식을 막 마쳤던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꽉 매인 정복 차림이었다. 위 단추가 헐렁하게 풀려 있기는 했으나 살짝 흐트러져 이마 위로 흔들리는 몇 가닥의 머리칼을 제외하면 모든 게 홀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대체 뭐지? 어릴 적 막연히 상상했던 장면과는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달랐다. 눈앞의 남자가 무섭기는커녕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두려움에 몸을 숨기기보다는 꼬옥 안아 온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하염없이 나를 응시했다. 검붉은 눈동자에 감히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수십, 수백 가지의 감정들이 짙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떤 용기가 생긴 건지 나는 겁도 없이 그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시선을 돌린 건 내가 아닌 그였다. 네자르는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젠장.”

정말로 긴 한숨이었다. 천천히 팔을 뻗은 그가 흐트러진 내 머리와 옷가지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리고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케이트. 황후가 될 내 부인에게 추한 꼴을 보일 뻔했네.”

그 낮고도 불안정한 목소리에, 울컥 울음이 차오를 뻔했다. 무서워서? 아니. 그저 네자르가 한없이 사랑스러워서였다. 이유를 모른 채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온 힘을 다해 참았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네자르가 더없이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걱정하지 마, 케이트. 괜찮아. 이제 네 허락 없이 이럴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그러고선 그 쉬운 쓰다듬음과 포옹 한 번이 없다. 내가 또 놀라지는 않을까 의식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갔다. 네자르에게 안겨 그의 허리를 꼬옥 안고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그런 약속 하지 마! 부부 사이에는 필요 없는 거란 말이야.”

네자르는 그렇게 한참이 흐른 뒤에야 나를 마주 안았다. 내 등을 토닥이는 손짓이 그 스스로에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 침묵 끝에 그가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늦었지만 저녁부터 먹을까?”

“응, 좋아.”

그날 저녁 식사를 할 때가 우리가 함께한 이래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저녁이었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어찌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네자르도 그랬을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 확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턱을 괴고 나와 눈을 맞추던 그를 상기했을 때, 적어도 거짓 웃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대관식이 치러지고 그다음 날.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친 즉시 네자르의 배웅을 받으며 에젤로트로 귀성했다. 부모님은 별말 않으셨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날 숨고 싶게 만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뻔해. 분명 우리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여기실 거야. 왜 어젯밤 귀성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마땅한 근거를 찾으셨을 거라고. 젠장, 아니라고 나서서 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아무 말도 없으신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라고 외치는 게 더 수상하잖아? 어떡하지? 종일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입을 닫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역시 괜스레 들뜬 마음에 잠들지 못했다. 네자르가 황위에 오르고, 황성을 떠나 다시 마차에 타기까지의 광경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박혀 떠나지 않았다.

‘하녀로 쓸 만한 아이들은 이미 구해 놓았습니다. 다만 영애께서 제도 입성이 예상보다 빨리 앞당겨졌으니, 근시일 내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요.’

짧고 빠르게 볼일을 마친 세피아 부인이 백작과 함께 사라졌고.

‘나라면 목소리가 덜덜 떨렸을 텐데 긴장하지 않고 나름 잘하더군요. 제도에 입성하시게 되는 다음 날 제가 작은 선물과 함께 방문하도록 할게요. 그때 봐요.’

캐롤라인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찾아온다 약속했으며.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판시온은…….

‘그런데 또 지금 이렇게 뵈니 이전보다 괜찮아 보이시는군요. 공식적인 행사를 부담스레 여기실 거라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그 말에 내가 작게 웃자 판시온 역시 오랜만에 마주하는 부드러운 웃음을 걸쳤다.

‘제가 멍청하게 미적거리지 않고 더 빨리 움직였다면, 대관식의 풍경이 조금 달랐겠지요.’

‘네?’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트니 판시온이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너무 모호했군요. 단순히 대관식을 조금 더 앞자리에서 볼 수 있었을 거란 의미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멀어지는 등을 굳이 잡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간에 이대로 쭈욱 모르는 척하는 편이 그에게도 나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 돌아와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구르는 지금. 몸이 너무 피곤하면 잠도 안 온다더니, 의도치 않게 자리를 뒤척여야 했다.

이제 겨우 9시이기는 한데…….

“데이지한테 우유나 데워 달라고 할까?”

혼인까지는 보름, 그리고 입성까지는 겨우 나흘이 남았다. 나에게는 유모가 없으므로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데이지와 제도로 갈 생각이었다.

아직 말을 해 두지는 않았으나 그녀 역시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나 같은 말괄량이 옆에서 긴 시간 버틴 것을 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으니. 참 별게 다 자랑스럽단 말이야. 누가 보면 내가 폭군인 줄 알겠어!

똑똑. 그때, 어둡고 조용했던 복도에서 누군가 내 침실의 문을 두들겼다. 이 시간에 찾아온 것도 놀라운데, 방문자는 다름 아닌 에든이었다. 등불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올려다보자 잠시 침실을 훑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는데 깨운 거라면 미안하다. 이만 갈 테니 다시 누우렴.”

“자고 있던 거 아니야. 무슨 일인데?”

잠시간 말이 없다가 내 손에서 등불을 빼앗아 든다.

“따라오너라. 중요한 일은 아니다만, 너 역시 듣는 것이 좋다 여겼기에 데리러 왔어.”

“그러니까 뭐를?”

“딱 집어 말하기 애매하구나. 굳이 표현하자면… 앞으로에 대해서.”

앞으로에 대해서라니, 내 황성 생활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후 생활?

에든을 따라 어두운 복도를 지나쳐 아버지의 집무실이 있는 공간으로 넘어갔다. 이곳까지 올 일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던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가족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인 사람은 나와 에든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셋이 전부였다.

“이리 보니 너도 참 많이 컸구나, 케이트. 키가 아주 훌쩍 자랐어.”

“새삼스레 갑자기 그런 말씀 하시기는. 저는 왜 부르셨어요?”

아버지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셨다. 나는 폐쇄된 공간에 자욱한 담배 연기를 밀어내며 의자에 앉았다. 평소와 달리 아버지의 표정이 퍽 진지했다.

“네가 제도에 입성한 직후 백작 위를 에든에게 물려줄 생각이란다. 네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나만으로 부족할 듯싶어 내린 결정이다.”

의자 등에 편히 기대어 있던 아버지는 손과 입이 허전한지 다시 담배에 손을 뻗었다.

“폐하께서 당신의 재위 동안의 재상직도 내게 맡기셨어. 아주 감사한 일이지. 에든이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나 홀로 널 돕는 것보다야 둘이 낫지 않겠느냐.”

“절 돕는다고요? 왜요? 너무 걱정 마세요. 혼자서도 잘 지낼 자신이 있어요.”

에든의 집무실에 늘 책과 커피 향이 배어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집무실에는 늘 퍽퍽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그건 아마 평소와 달리 활짝 창을 열어 놓거나, 가볍게 차를 한잔 하게 되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방 자체에 스며든 냄새였으므로.

“케이트, 오늘 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옆자리에서 등을 곧게 편 에든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목소리는 늦은 새벽 동안 잠을 못 자고 뒤척인 것처럼 무겁고 진중했다.

“이미 훌륭한 선례도 있지. 바로 선황 폐하와 오드리네 가문의 황후들 말이다. 전 오드리네 후작에게 힘이 있었다면 가문의 적자 적녀 들끼리 싸울 일도 없었을 테고, 현 오드리네 후작이 베딜라 황후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면 황위의 주인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 더불어 앤드류 전하가 그런 식으로 쫓겨날 일도 없었을 거야.”

“……앤드류가 쫓겨났나요?”

“폐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무섭고 확실하신 분이다. 그래도 혈육의 정이 남아 있으셨다면… 아마 황자 전하도 목숨은 유지하고 계실 테지.”

지금 내 앞에 냉큼 삼킬 물이 없어 아쉽다고 생각했다. 한입만 삼킨다면 조금 더 현명하게 머리를 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앤드류가 대관식 때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거구나. 그래서 그날 홀로 황성을 떠돈 것이었어.

다만 지금 와선 그 사실이 내게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네자르와 선황제를 동일 선상에 놓는 에든에게 화가 나면서도 어느 정도 그 마음이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날 걱정하는 에든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불편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말은 내 자식을 위해서 폐하의 총애를 잃지 말라는 소리지요?”

잠시간 말이 없던 아버지가 에든 못지않게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그런 복잡한 생각 말거라, 케이트. 이 아비는 너무 폐하를 믿고 폐하에게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그 말에 에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늘 말해 왔잖니. 우리는 네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단다.”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음과 함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손에 걸쳐져 있던 담배는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뒤였다.

“갑작스레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말거라. 에젤로트는 늘 네 뒤에 있을 테니까.”

이후에도 몇 마디가 오갔으나 침실로 돌아온 후 머리에 남아 있는 대화는 없었다. 밖으로라도 나가 밤바람을 맞을까 싶었지만, 몸의 노곤함은 그조차 허용하지 않았기에 느릿느릿 침실로 돌아왔다.

영원한 것은 없다.

맞는 말이었다. 나를 향한 네자르의 마음이 영원할 거란 보장을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네자르를 몰라서 그래. 그 옆에서 반평생을 보냈다면 저런 소리가 안 나오지.’

록허드가 자리에 있었다면 필히 내 귓가에 속삭였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킬 테지.

역시 결론은…….

“황태후를 쫓아내고 황성을 깨끗하게 한다.”

이제껏 그래 왔듯 최대한 네자르와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에젤로트에서 오냐오냐 사랑받고 자란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

“앞서기는 무슨! 어떻게든 되겠지.”

네자르고 황태후고 일단 잠을 좀 자는 게 시급했다. 오늘도 못 자면 벌써 이틀 동안 밤을 새우는 거였으니까.

***

시간은 이틀이 훌쩍 흘러 어느새 제도 입성 당일이 찾아왔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내가 에젤로트에서 완전히 떠나는 날이었기에 온종일 성이 분주하고 시끄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지의 곡소리가 그 난잡함의 절반은 차지하고 있었다.

“어흐흑, 어흑! 아직도 거짓말 같아요……. 케이트 아가씨가 혼인을 다 하시다니!”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호들갑 떨어. 나만 가니? 너도 나 따라서 가잖아!”

“그럼 저라도 쫓아가야죠! 아가씨 혼자 거기서 뭐 하나 제대로 하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손수건에 코를 팽 푼 데이지가 성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제가 없으면 아가씨의 편식을 누가 주방장에게 알리겠어요? 중요한 일이 있는 전날에는 잠을 못 자 일찍 뉘어야 한다는 것도, 더위에는 강하지만 추위를 잘 타 겨울에 이불 두 장은 더 올려야 한다는 것도! 흑흑, 다 제가 아니면 누가 알려 주냐구요!”

“그래그래, 너 참 대단하다, 데이지. 가서 너 혼자 다 해 먹어.”

성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온 가족이 모인 응접실로 내려가 창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태풍이라도 몰아칠 기세인지, 흐릿한 하늘 아래로 바람이 쌩하니 불어 황제의 깃발이 쉴 틈 없이 흔들렸다. 마차 셋에 가득 실린 황제의 예물과, 예물이 비어진 후 실리게 될 나의 짐.

“이제 내려가자꾸나, 케이트. 날씨가 고될 것 같으니 한시라도 더 일찍 출발해야 해. 이러다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겠어.”

내 어깨를 쥔 어머니가 엉거주춤 선 나를 질질 끌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어서 한데 모여 있던 가족들 역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정말로 에젤로트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앞서고,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구나, 케이트. 사교 활동에서 적응하기 어려워했던 네가 제도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먹고살려면 잘 지내야지 어쩌겠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어머니. 언제 어디서 황후의 친모라 말하더라도 부끄럼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잘 지낼게요.”

“네가 잘 지낸다고 내가 안 부끄러울 것 같으냐. 귀족들이 잘 봐 줘야 안 부끄러운 거지.”

“그럼 잘 보도록 만들면 될 일이죠. 험담하면 머리카락을 다 뽑아 놓을게요. 그다음부터는 겁나서라도 입을 다물지 않겠어요?”

한창 나와 어머니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셨다.

“하하! 우리 케이트, 하는 소리가 아주 젊었을 적 제 어미와 판박이야! 정말 하나도 걱정이 안 되는구나.”

“그럼 더 걱정하셔야죠, 아버지. 제 생각에는 뒷목 잡고 쓰러지실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딱딱한 어조로 한마디를 툭, 던진 릭이 나를 안았다. 그에게 안기는 건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마치 타인과 포옹을 나눈 것처럼 생소한 기분이었다.

“가서 잘 지내라, 케이트. 폐하를 너무 속 썩이지는 말고.”

“뭐야, 정말. 내가 누구한테 입양되어 가는 줄 알아?”

그다음으로 에든, 아버지, 어머니와 차례로 포옹을 했다. 한데 어머니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안길 때는 다시 몸을 떼기가 영 어려웠다. 예전에는 분명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머니가 내 어깨에 턱을 올리셔야 할 정도로 시야의 높이가 달라져 있던 탓이다. 별것도 아닌 사실에 코가 시큰해졌다.

“어머니, 사실 저, 에젤로트를 떠나기 싫어요.”

내 등을 한 번 더 꽈악 안은 어머니가 작게 웃으셨다.

“가면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게냐.”

억지로 등을 펴고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웃는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면 좋을 텐데, 울적해진 기분 탓에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입꼬리를 올릴 수 없었다.

“잘 가렴. 힘든 일 생기면 꼭 서신 보내고.”

얼마 안 가 황성의 마차가 출발했다. 느릿하게 달리던 말의 속도는 어느새 창밖 풍경이 휙휙 지나갈 정도로 빨라졌다.

성이 멀어지자마자 나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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