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제7장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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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전하, 레이리 멘체터 양과 반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론의 목소리에 쨍쨍한 볕을 등에 지고 보고서를 건성건성 넘기던 네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몇 시지?”

“오후 2시를 막 넘었습니다.”

네자르는 근 4시간 만에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고 앓는 소릴 냈다. 곧 황성근위대 신입 평기사 입단 시험이 치러질 예정이기에 확인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건강이 악화된 황제를 대신하여 맡은 업무라 확인 작업이 생각보다 상당히 더뎠다. 성격상 완벽하고 뒤탈 없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네자르에겐 고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작을 데려와.”

네자르는 쿼트로그 반과 레이리의 방문이 기사단 입단 시험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마침 적당히 일을 마무리하고 론에게 넘길 생각이었던 터라 타이밍도 괜찮았다.

썩 나쁘지 않군. 오히려 효율이 괜찮아. 이 정도 속도라면 내일 오전 중에 에젤로트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점심 식사는 하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론의 안내로 집무실에 들어선 공작, 쿼트로그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백발 아래로 날카로운 고동빛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난다.

“물론이네. 들어와 앉지.”

네자르는 가볍게 일어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늘 그렇듯 바위처럼 단단하고 무거운 손바닥이었다.

“나흘 내로 제국 모든 영지에 황성근위대 입단 시험 공고문이 전달될 예정이야. 절차 확인 또한 오늘 중으로 끝날 테니 아카데미 추천 장학생이 있다면 내일 안으로 론에게 올리시게.”

그의 말에 쿼트로그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역시 네자르 전하십니다. 이틀도 안 되어 입단 시험의 모든 절차를 확인해 주시다니요. 병상에 계신 폐하께서는 평소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기에 바빠 일주일은 거뜬히 넘기고 날인해 주셨는데 말입니다. 전하의 영민함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확신컨대, 쿼트로그는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 없는 사실을 비비 꼬아서 말할 리 없었다.

네자르는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의자 등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노인의 얼굴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군. 나이를 먹었으면 삐친 티를 내지 말고 표현을 하시게. 내가 신도 아니고 공작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달래는 어투였으나 네자르에 비해 한참 어른인 쿼트로그의 반응은 특별할 것 없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주름이 무성한 이마를 구기지도, 작게 헛기침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이 늙은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가 말인가.”

“뭐겠습니까? 당연히 켈 로망드와 관련된 일이지요!”

아아, 신문 기사를 보고 달려온 건가. 화를 참지 못한 쿼트로그가 테이블을 쾅쾅 치며 말을 이었다. 노기사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힘이었다.

“엔테라와 척을 지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아니면 로망드 남작이 엔테라 공작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하신 겁니까!”

“나는 아직 젊네, 공작.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지.”

“그렇담 어찌하여 켈 로망드를 다신 못 일어서게 망가뜨리신 겁니까? 말이 파산이지, 황성 관계자와 켈 로망드의 간부들을 전부 잡아들여 명줄을 끊어 놓지 않으셨습니까. 엔테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쉬지 않고 노성을 뱉은 쿼트로그가 휘청하며 의자 위에 쓰러졌다. 노인이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자 네자르가 숨을 삼키고 웃었다. 그 웃음을 들었는지, 활활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공작이 버럭 소리쳤다.

“뭐가 그리 재밌으십니까!”

“그럼 내가 자네처럼 겁에 질려 호들갑이라도 떨길 바라는 건가? 아아, 엔테라의 복수가 두렵다! 역시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어! 함부로 켈 로망드를 건들지 말 것을!”

카발 제국의 작위 매매 제도는 부유한 평민에 한정해 귀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다. 작위 매입은 상당한 고가에 이루어지며, 백작 위 이상 고위 귀족의 추천서 역시 필요하므로 단순히 풍족한 자금 하나만으로는 작위를 매입할 수 없었다.

특히 켈 로망드처럼 악명 높은 조직은 지지하는 귀족의 권위가 여간 대단치 않고서야 작위 매입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작위를 얻어 로망드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모두 엔테라 공작 가문의 추천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엔테라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내 자리가 속절없이 흔들려 무너지기라도 하겠어. 그렇지 않나, 공작?”

변함없이 차분한 웃음기가 서린 얼굴이었으나, 어감은 그렇지 못했다. 뼈가 박힌 말에 아차 싶었는지 흐트러져 있던 공작의 자세가 다시 절도 있게 제자리를 찾아 갔다.

“아닙니다.”

쿼트로그는 어떠한 경위로 로망드가 궁지에 몰려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할 테다. 그랬기에 네자르는 쿼트로그의 불같은 화와 우려를 너그러이 넘길 수 있었다. 눈앞의 노인은 순전히 네자르의 처지를 걱정했을 뿐이었다.

“그래,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해. 이 몸의 손에는 반과 오드리네, 에젤로트에 악토르까지 쥐어져 있는데 말이지. 흔들리고 싶다 하여 마음 놓고 흔들릴 수가 없지 않은가.”

쿼트로그는 곰곰이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그래서 다음은 엔테라 공작가인 겁니까?”

그리 말하는 쿼트로그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네자르가 엔테라를 내치려는 속셈이라 여길 분위기였다. 그럴 이유가 하등 없던 네자르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네, 공작. 애초에 이번 일은 판시온 소공작이 앞에 나선 일이었으니까.”

“소공작이 말입니까?”

어지간히 놀랐는지 쿼트로그가 온 얼굴의 주름이 팽팽히 당겨질 정도로 기겁하는 표정을 했다.

“의리가 있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설마 토사구팽할 줄은 몰랐습니다.”

토사구팽이라. 틀린 표현은 아니었기에 네자르는 굳이 판시온을 변호하지 않았다.

***

판시온이 그의 집무실로 찾아온 날은 네자르가 케이트를 에젤로트까지 안전하게 호위한 후 제도로 귀성한 날이었다.

떼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고 마차에 몸을 싣던 그 순간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한시라도 더 빨리 케이트를 곁에 데려와야 한다. 그래야 수십 번 멎기를 반복했던 그의 숨이 조금이나마 트일 것 같았다.

자신의 옆이라면 케이트가 현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는 이상 평생을 안온하게, 멋대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다. 아니, 황제의 목을 사과 따듯 따 버린다 하여도 그리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곁에만 있어 준다면.

젠장. 케이트의 양쪽 광대 위로 붉게 올라 있던 피멍이 잊히지 않았다. 비가 퍼붓던 수풀 속에서 덜덜 떨던 어깨와 파리한 안색도, 빗물과 섞여 줄줄 흐르던 눈물 역시. 네자르의 머릿속에서 이미 로망드는 수십 차례 멸문을 반복했다. 단지 어떠한 과정이 적절한가에 대해 생각하느라 다소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전하, 판시온 소공작이 방문하셨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론의 목소리가 무겁게 잠겨 가던 네자르의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나를 찾아온 판시온 엔테라, 라.

혹시나 했던 판단은 판시온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면서 현실로 바뀌었다.

‘불법 자금 유통 경로는 이미 제 수중에 들어온 지 오래입니다. 그 외에 현재 로망드 가문이 사용하는 자금은 전부 엔테라를 거쳐서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만 법적으로 잘 해결된다면 뭍 위로 올라온 로망드 가문은 물론, 지하의 켈 로망드 역시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법적으로 잘 해결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네자르의 권위에 기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말로는 엔테라를 법정에서 보호해 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틀간 케이트를 간호하느라 쪽잠도 들지 못했던 네자르다. 그는 은근히 올라오는 두통을 손등으로 짓누르며 말했다.

‘손쉽게 처리하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지. 내가 원하는 것은 로망드란 이름을 가진 자들의 씨를 제국에서 완전히 말려 버리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왜냐는 물음은 없었다. 에젤로트와 로망드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네자르는 보란 듯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군, 소공작. 내게 다른 할 말은 없는 건가?’

판시온 엔테라는 네자르가 막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무렵부터 그를 지지하던 측근이었다. 그러니 의아함을 띤 물음에는 재깍재깍 답이 나올 터였다. 한데 이번에는 유독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켈 로망드에 심어 놓은 자들이 여럿 됩니다. 그들로부터 케이트 영애가 몹쓸 일을 당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찝찝한 예감은 단 한 번도 배신하는 법이 없다. 케이트 영애, 라. 언제부터 카트리나의 애칭을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부르게 된 것일까.

네자르는 일단 머릿속을 잠식한 짜증과 심기 불편함을 접어 두기로 했다. 감정에 속절없이 휘둘리면 원하는 바를 취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뼛속 깊숙이 새겨 둔 깨달음이었다.

‘몹쓸 짓이라니, 누가 들으면 에젤로트의 여식이 납치라도 당한 줄 알겠어. 안 그런가?’

케이트의 이름이 불쾌한 이유로 다른 입에 오르내리는 건 지켜볼 수 없다. 네자르가 못을 박는 듯한 어조로 경고하자 판시온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제 표현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판시온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인물이다. 필요치 않은 것은 망설임 없이 버리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황태자인 그마저 이용하려 한 자였다. 케이트는 그러한 사실을 알까? 모르겠지. 모르니까 그런 속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켈 로망드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 예상했을 테고… 전하와 저 모두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와 군사력, 거기에 전하의 힘을 이용한다면 단기간에 끝낼 수 있을 겁니다.’

‘날 이용하겠다, 이 말이로군. 내가 상관치 않겠다고 하면 어쩔 생각이었나?’

판시온은 현명한 남자다. 끝까지 케이트의 안위를 확인하려는 질문은 하지 않으니. 그러나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는 그 모습마저도 네자르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건가?’

켈 로망드를 부수려는 연유가 순전히 케이트여서는 아니 된다, 는 의미였다. 곧 동요 없는 얼굴로 숨을 고르던 판시온이 답했다.

‘예. 쉽지는 않겠지만, 저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상대입니다.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추후 혼자서라도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네자르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금방 파악한 모양이었다.

‘고지식한 소리 하기는. 앞서 말했듯 난 놈들이 내 제국, 특히 제도를 겁 없이 활보하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생각이 없다. 감히 황위 후계자인 내게 손을 대다니, 멸문을 각오한 행동이었겠지.’

병상에 누운 황제는 겨우 이틀에 10분꼴로 눈을 뜬다. 그마저도 반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반의반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미 카발 제국은 네자르의 손아귀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황족 시해자’라는 거짓 죄를 씌우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명심해 주었으면 좋겠군, 소공작. 켈 로망드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건 나,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야. 그 외의 다른 인물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판시온의 선명한 제비꽃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카트리나 에젤로트를 위해 움직일 이유 따위 하등 없다는 소리다.’

몇 년을 전장에서 함께해 온 남자다. 헛짓 말라는 속뜻이야 진작에 알아차렸을 터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판시온의 목소리에는 진정성이 가득했지만, 그마저도 네자르는 신뢰할 수 없었다.

이처럼 케이트와 연관된 모든 일은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으나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오히려 편안해졌다. 케이트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이는 동시에 케이트만 얻어 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완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

짧은 기억을 대충 정리한 네자르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끊어 내긴 해야 했어. 단지 시기가 언제냐의 문제였지. 황제의 측근이 범죄자 따위와 협심할 수는 없잖나?”

일의 도모를 시작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훌쩍 흘렀다. 남은 수순은 말 그대로 로망드의 씨를 완벽하게 말려 버리는 것. 그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마무리될 일이었다.

네자르의 말에 쿼트로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나타냈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이윽고 그는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다행입니다. 저는 오전에 헤드라인 기사를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했지 뭡니까? 체면도 못 차리고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니 늙은이 마음이 이제야 좀 편안해지는군요.”

“할 말은 그것으로 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제 기사단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고 있을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훤하군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쿼트로그가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필프론츠라면 모든 연락망을 동원해 최대한 사태를 파악하고 찾아왔을 텐데, 성미가 불같은 쿼트로그 공작은 소식을 듣자마자 네자르에게로 달려온 듯싶었다. 참으로 그다운 행동이었다.

“전하, 레이리 멘체터 양을 모셔 올까요?”

공작이 나가기 무섭게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론이 그에게 물었다. 네자르는 순간 익숙지 않은 이름에 한동안 눈가를 찡그려야 했다. 다행히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곧장 떠올랐다.

“록허드의 보좌관이었나? 데려와.”

그가 허락을 내리자마자 얇게 열린 문틈 밖에서 큰 키의 미녀가 쭈뼛쭈뼛 들어왔다. 네자르는 뻑뻑한 눈가를 매만지며 여인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저는 록허드 단장님의 보좌관인 레이리 멘체터입니다. 레이리라 불러 주십시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영광일 것까지야. 무슨 일이지? 록허드가 어서 빨리 인장을 찍어 달라 보채기라도 했나?”

기사단장이 되었어도 일이 있으면 몸소 찾아오던 록허드다. 실제 날뛰는 로망드를 무력으로 제압할 때도 록허드가 자원하여 나간 바 있었다. 그렇다 보니 굳이 보좌관을 보낸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리는 약간의 떨림이 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단장님께서 연차 휴가를 신청하셨습니다.”

뭐라?

“……휴가?”

“예. 동생분인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의 건강이 좋지 않아, 휴식을 취할 겸 동생분의 옆자리를 지킨다 하셨습니다.”

록허드 주제에 케이트의 옆자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군. 네자르는 한숨을 목구멍 뒤로 삼키며 되물었다.

“기간은?”

“이틀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 역시 전하셨습니다.”

일부러 그런 거야. 빌어먹을 록허드는 대놓고 그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네자르는 레이리로부터 연차 휴가 신청서를 건네받았다. 개발새발로 휘갈겨진 신청서는 보기만 해도 짜증이 일 정도로 글씨가 엉망이었다.

“아! 단장님께서는 황성의 일원 중 한 명과 휴가에 동행할 예정이니 알아 두시라 말씀하셨습니다.”

황성의 일원? 기사단장 주제에 황태자에게 통보라니,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는 일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연차 휴가 신청서 비고란에 대충 휘갈겨진 글이었다.

네자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가지런한 잇새로 동행하는 인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데 그 이름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네자르는 인물의 이름 대신 록허드의 보좌관을 불렀다.

“이봐, 레이리 양.”

“예, 예?”

“설마 여기에 적힌 앤드류가 앤드류 오드리네 카발은 아니겠지?”

***

“인사해, 케이트. 널 위해 에젤로트까지 방문해 주신 앤드류 오드리네 카발 황자님이시다.”

그건 나도 보면 안다. 록허드가 며칠 에젤로트를 나가 있는 사이 잊었나 본데, 나 역시 그처럼 눈알이 두 개 달려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앤드류 황자라는 사실 정도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의미다.

“어이, 케이트? 인사하래도?”

문제는 저 건방진 황자 놈이 왜 이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앤드류의 검홍색 눈동자를 말없이 쳐다봤다. 무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이 점차 언짢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누가 모지리 아니랄까 봐, 예법은 지나가던 개나 줬나 보군.”

“네 앞에서만이야. 특별 대우이니 감사히 여기는 게 어때?”

“그런 특별 대우는 너희 집 시종에게나 하지그래. 이득이라고는 쥐뿔도 없을 것 같은데.”

“어머, 없다니. 혹시 몰라? 열과 성의를 다해서 황자 전하의 사냥 수업을 도와줄지도?”

마주하는 얼굴에 싸늘함이 내려앉는다. 나와 앤드류는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옆에서 록허드가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 기세 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그득했다.

“네가 그 모양으로 행동하니 내가 앤드류 전하를 모셔 온 거다, 이 말썽꾸러기야!”

뭐? 무슨 말인지 되새기기도 전에 위로 고개가 확 들렸다. 이어서 평소와 달리 한껏 냉랭한 얼굴을 한 록허드와 눈이 마주쳤다.

“성인이 되었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지! 케이트,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예절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마침 앤드류 전하께서 에젤로트를 방문한다 하셨기에 내가 성으로 모신 거야. 오늘내일 성에서 지내시면서 네게 사교 소양을 가르쳐 주실 테니, 도망치지 말고 잘 배워 둬라. 알겠어?”

“뭐어?”

누가 누굴 가르쳐? 아니, 애초에 내가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구는 건 앤드류 한정이었다. 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받은 대로 갚아 줄 뿐이었는데!

고개를 돌려 다시 마주친 앤드류의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소름이 돋으려는 팔을 쓸어내리자 웃는 낯 그대로의 앤드류가 손을 빼앗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들으셨겠죠, 카트리나 영애? 오늘부터 이틀간 영애의 예절 교육 선생을 맡게 된 앤드류 오드리네 카발입니다. 편하게 앤드류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열과 성의를 다해서 영애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예정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팔뿐만이 아니라 등과 허리에도 소름이 우수수 돋는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앤드류 황자를 데려와선 예절 수업을 받으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끔찍한 순간이 단순히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배우라는 록허드의 으름장과 함께 현실 도피를 바라던 사고 역시 사그라들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고, 적당히 선생 취급을 해 주면 되겠지. 앤드류와 단둘이 남게 됐을 때만 해도 그리 여기고 있었다.

“……수업한다고 하지 않았어?”

의자에 정좌로 앉아 선생의 가르침을 기다리길 수 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자 에젤로트 관광 책자에서 긴 시간 눈을 떼지 못하던 앤드류가 뒤늦게 아는 체를 했다.

“너, 설마 정말로 나한테 수업을 받고 싶은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니야.”

“그런데 뭐 하러 묻는 거냐?”

대답하기에 상당히 난해한 물음이었다. 나 역시 상관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록허드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날 가르치는 대가로 우리 성에서 숙식한다며? 설마 오라버니에게 거짓말한 거야?”

다시 책자로 시선을 옮긴 앤드류가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굴 거짓말쟁이로 알아? 나는 제국 4대 축제 중 하나인 에젤로트의 여름 축제를 즐기러 왔고, 축제를 즐기는 시간 외에 널 가르치기로 했던 것이 전부다. 록허드 경이 대뜸 일을 부풀려서 말했던 것뿐이지.”

아아, 나는 또. 가정 교사에게 배웠던 것처럼 꼼짝도 못 한 채 끌려다녀야 하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의자 위로 편히 몸을 누였다.

록허드는 왜 앤드류에게 그런 부탁을 한 거람. 심지어 앤드류는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했는데.

“혹시 몰라 말해 두는데… 네가 비록 내 앞에선 주제 파악 못 하고 건방지게 굴긴 하다만, 딱히 예절 교육이 더 필요해 보이는 수준까지는 아니야.”

“나도 알아.”

“그런데 록허드 경이 왜 그런 부탁을 내게 했는지 모르겠군.”

음,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록허드는 내가 에젤로트로 귀성한 직후 안색만 확인하고는 다시 황성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망드 가문의 파산을 알리는 기사가 뜬 후 사흘이 지나 귀성한 것을 상기하면……. 어디선가 나와 엘리제 로망드의 비화를 전해 들었겠지. 그에 대한 결론이 내 태도에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록허드는 그럴 사람이 아니므로, 남은 답은 하나였다. 단순히 과도한 걱정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일 테다.

“록허드 오라버니는 원체 종종 이상한 짓을 해. 내가 워낙 더 크게… 흠흠. 크게 사고를 쳐서 가려지는 거지.”

내 입으로 직접 말하자니 부끄러운 소리였다.

“록허드 에젤로트 경이? 믿기지 않는군. 유쾌하기는 해도 절대 알맹이 없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마 네 착각이겠지.”

“내 착각이라니! 애초에 진심으로 내게 예절 교사가 필요하다 여겼으면 널 데려오지도 않았을걸?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본인도 헷갈리니까 마침 눈앞에 있던 널 끌고 온 거라구.”

내 말이 잠들어 있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린 앤드류가 책자를 뒤덮고 테이블로 내던졌다. 딱딱한 문체의 『에젤로트 여름 축제로 초대합니다』가 적힌 책자가 바로 앞에서 나뒹굴었다.

“나는 폐하께 직접 제왕학을 배웠던 몸이다. 황실 예절이나 사교 예절 따위는 여섯 살이 되던 해 전부 터득했어. 한마디로 너 같은 철없는 귀족 여식쯤이야 가르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소리지.”

제왕학? 앤드류가?

제왕학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만이 받게 되는 특별 교육이다. 에젤로트에서는 에든이 그러했고, 오드리네에서는 필프론츠 후작이 그러했다.

‘단 한 명’만이 배울 수 있다는 관례 탓에 후계자 지위에 공석이 생기면 일이 퍽 복잡해지곤 했다. 제왕학은 가문을 이끄는 데 필요한 다양한 학문을 포괄하고 있었기에, 단기간 속성으로 깨우치기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판시온 엔테라는 기사단장직을 포기하면서까지 후계자 수업에 집중해야 했던 것이다.

“황실 후계자 수업은 황태자만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분명히 그래야 했는데, 정작 네자르는 아카데미에 입학해 기사학부를 전공으로 삼았다. 설마 네자르는 황실 제왕학을 배우지 못했던 것일까.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다시 팔을 뻗어 책자를 쥔 앤드류가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네가 어떻게…….”

“카트리나 영애.”

앤드류는 평온한 어투 그대로 내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입꼬리도 눈매도 흔들림 하나 없었으나, 나는 무심코 내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기본 사교 예법 중 하나. 개인사를 함부로 입에 담지 아니하며, 타인의 가정사 역시 함부로 묻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네자르의 역린일 수 있다는 점도.

“정 궁금하면 네가 직접 형님에게 물어봐. 내가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앤드류는 의식적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여 책자를 응시했으나, 눈동자는 한 지점에 가만히 멈춘 상태였다. 그의 입에선 아무렇지 않게 새어 나왔으나 그렇다고 내가 네자르에게 졸래졸래 찾아가 물어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됐어, 별로 안 궁금해.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데 뭘. ……그건 그렇고, 혹시 관광 일정을 짜고 있는 거야? 책자 이리 줘 봐. 에젤로트 토박이가 일정을 채워 줄 테니까.”

내 제안에 앤드류는 별말 없이 책자를 건넸다. 나는 괜히 그의 눈치를 보며 머릿속으로 열심히 추천 관광 코스를 떠올려야 했다.

네자르는 무려 자신의 과거를 치부라 표현했었다. 평생을 모르는 채 살고 말지, 함부로 뜯어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흘려들은 말로 얌전히 묻어 뒀다.

오늘은 에젤로트 여름 축제의 전야제가 열리는 날이다. 삐딱한 성격으로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으리라 추측했던 것과 달리, 도착한 후 내내 축제 책자를 살피던 앤드류는 동행인이 있다며 정오가 되자마자 시내로 나갔다. 저 반골과 어울려 줄 동행인이 존재한다고? 록허드가 섬세하다는 소리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케이트, 아무래도 내 생각이 조금 짧았던 것 같다.”

돌연 록허드가 나를 다시 부른 시점은 점심 식사가 끝난 직후였다.

나는 표정 변화 없이 연무장 구석에 앉아 그가 하는 행세를 쳐다봤다. 록허드는 전쟁터에 나갈 기세로 중무장을 한 채 내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잘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네게 예법을 배우란 소린 어불성설이었어. 그래서 방식을 조금 틀기로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다음에 록허드가 무슨 말을 꺼낼지는 뻔했다. 날 연무장으로 끌고 온 것을 보아 분명 호신을 위해 검을 단련하라고 제안할 게 분명했다.

“너는 그냥 검을 배워라. 황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기사가 되도록 해! 그게 네 몸 하나 간수하는 데 더 유용할 테니까!”

“지금 농담하는 거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록허드가 코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악! 나는 맞닿을 것 같은 코끝에 기겁하며 내뺐다.

“이 오라비의 눈을 보렴, 케이트.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지 않아?”

“얼굴, 저리 치워!”

나의 경악 어린 외침에 방글방글 웃는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는 여름 축제 기간 동안 강화된 경비 업무 수행으로 인해 텅 비어 버린 연무장을 쭈욱 훑었다.

“일단 기초 체력 단련부터 시작하자. 무려 록허드 에젤로트의 특훈이니 고맙게 여기도록.”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인 어조를 자제하지 않고 록허드의 얼굴을 노려봤다.

“누가 하기나 한데? 로망드 가문이 파산했다는 기사는 이미 읽었어. 그런데도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안 그래도 어머니 때문에 성 밖으로 나가려면 반년은 참아야 할 눈치인데!”

“케이트.”

어깨를 돌리던 록허드의 움직임이 돌연 멈추었다. 그는 짜증이 가득 서린 내 어투에 마주 언성을 높이지 않고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널 납치했던 놈들은 뒤 세계의 거물이야. 돈이 없으면 강도짓을 해서라도 빼앗고, 인신매매를 하기 위해 고아원에 불을 지르는 놈들이지. 나와 네자르가 뿌리까지 뽑기 위해 백방을 누볐지만… 글쎄. 켈 로망드의 잔당이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으리라곤 확신하지 못하겠다.”

마치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상냥한 목소리였다.

록허드는 내가 장시간 성을 나가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장난기 하나 서리지 않은 진중한 얼굴로 날 설득하려 할 리 없었다. 공교롭게 그런 점이 내 기분을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건드렸다.

“그래서 너는 고작 몇 달 칼질을 배운 걸로 내 몸을 지키란 거야? 차라리 외출할 때마다 호위 기사를 열 명씩 붙여 놓는 게 어때? 그게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을 더 높일 것 같네.”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그러기 싫어도 그래야 할 것 같으니까, 체력 단련이고 뭐고 그만둬. 그게 더 비효율적이라구.”

어째 분위기가 오전에 앤드류와 대치하던 상황처럼 기이해진다. 나는 록허드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워낙 키가 커 목덜미가 살살 뻐근해지기 시작할 즈음, 터벅터벅 다가온 걸음이 내 정수리를 툭, 툭 건드렸다. 릭이었다.

“형님은 왜 또 돌아오자마자 케이트를 괴롭힙니까? 애 괴롭히려고 휴가를 쓴 거죠?”

지원자! 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펴고 릭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눈썹을 씰룩이던 릭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릭, 너는 내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케이트를 괴롭히지 말라며 타박할 녀석이야.”

“형님이 가만히 숨만 쉬다니, 이왕 가정하실 거면 좀 말이 되는 가정을 하시죠.”

그의 말에 록허드가 거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봐도 뻔합니다. 검을 배우는 일로 다퉜겠군요.”

록허드가 선수 칠세라, 릭의 옆에 착 달라붙어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응! 나보고 갑자기 검을 배우라는 거 있지? 배우려면 진작 배웠어야지. 나같이 빼빼 마른 숙녀가 스무 살에 검술을 배운다고 퍽이나 배우겠다.”

그에 질세라 눈꺼풀을 내리뜬 록허드가 차분하게 받아쳤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단다, 케이트. 이건 네가 살기 위해 익혀야 할 일이야.”

자꾸 내 목숨을 걸고넘어지니 말대꾸에도 한계가 다가온다. 이미 겪은 바가 있었기에 살기 위해서 검을 휘둘러야 할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도 없었다.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단 건, 역시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의미일까?

상관없어. 아무리 잘못됐다 하더라도 록허드한테 지고 들어가기는 싫었다.

“형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뜸 불러서 검을 배우라 한대도 케이트가 배울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얘가 까라면 무조건 까야 하는 기사단원입니까?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요.”

그럼, 그럼. 역시 릭은 에젤로트 제일의 가방끈을 가진 만큼 말도 잘한다. 그러나 록허드는 지지 않고 건틀렛을 낀 손으로 날 손가락질했다.

“네가 뭘 잊었나 본데, 얘는 생각할 시간을 줘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싫다 대답할 녀석이야.”

“그건 맞습니다.”

“맞기는 뭐가 맞아!”

릭의 긍정에 욱한 심정으로 소리치던 때, 문득 꿈속에서 마주했던 에든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든도 예전부터 유독 내 걱정이 많았지. 생각해 보면 릭도, 록허드도, 더 나아가 네자르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날 걱정하는 데 정신력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내가 계속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없던 걱정도 생길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네. 이번에는 내가 지고 들어가는 수밖에.

“좋아. 그렇게까지 날 설득하려는데, 계속해서 거절하기만 할 수는 없지. 연습할게. 대신 스승님은 내가 고르게 해 줘.”

“누굴 스승으로…….”

나의 말에 록허드가 반색하며 입을 열자, 릭이 급히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잠깐, 형님! 잘 생각하고 대답하시죠. 이렇게 순순히 하겠다고 할 애가 아니잖습니까. 헛소릴 할 게 분명합니다.”

나는 자연스레 나오는 코웃음을 막지 않았다.

“뭐, 그래서 내 스승도 못 구해 준다는 거야? 황성근위대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내가 아는 록허드는 이렇게 도발하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부릅뜬 록허드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말해 봐. 어디서 뭘 하는 누가 필요한 거냐?”

“브레이트 탈리야 경.”

내가 기다렸다는 듯 입에 담은 인물은 황성근위대 총사령관의 이름이었다. 이왕 배운다면 역대 기사단장 출신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기사에게 배우는 게 좋겠지.

“앤드류 황자를 내 예절 수업 선생으로 데려온 사람인데, 탈리야 경은 더 쉬울 거 아니야?”

“이것 봐요, 형님. 얘는 적당히를 모른다니까.”

딱히 괴롭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듣기에는 또 달랐나 보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의 릭과 달리, 록허드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턱을 쓸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아니야, 네 말대로 브레이트 각하 정도야 앤드류 황자님에 비하면 별거 없지.”

록허드는 말하다 말고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었다.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케이트. 각하께서 허락하시면 넌 반드시 그분께 검을 배우는 거야.”

“물론이지! 약속할게.”

나를 향해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을 거리낌 없이 맞잡아 흔들었다. 뿌듯해진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은 록허드가 나란히 앉은 나와 릭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얼굴이다. 대충 감이 오는 건 우리가 피를 나눈 친남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록허드라는 인물이 원체 뻔하기 때문일까?

“좋아. 남매 셋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승마는 안 해. 아직 발바닥이 제대로 낫지 않아서 부츠 신으면 아프단 말이야.”

내 칼 같은 거절에 록허드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물론 실망했다 하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을 다문 건 아니었다.

“……카드 게임을 하자.”

“데이지, 어머니와 아버지도 나가셨니?”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찻잔과 빈 접시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다행히 식기가 쏟아져 내리는 일은 없었고, 데이지는 엎어질 뻔한 잔을 바로 세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히 열리는 입술이 평소와 다르게 축 처진 감이 있다.

“네! 방금 전에 전야제를 즐기러 나가셨어요.”

성이 유독 조용하다 싶었는데, 역시 주인이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영지의 축제이니 영주 내외가 성안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릭이랑 록허드는?”

“릭 도련님은 침실에서 휴식 중이시고, 록허드 도련님은 성이 답답하다며 잠시 외출하셨어요.”

“그럼 나는?”

계속되는 물음에 데이지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밖으로 튀어나온 입술이 들어갈 생각을 않았다. 오늘로 성안에 갇혀 지낸 지가 벌써 사흘째였다.

얼마나 운이 안 좋은지, 참을 수 없는 무료함이 찾아오는 시기에 영지의 축제가 막 시작하려 했다. 외출 허락을 못 받는 건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도 오랜 시간 소파에 앉아 밤하늘을 쳐다봤기 때문일까?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어, 음… 지루하세요? 저랑 카, 카드 게임이라도 한 판 하실래요?”

“그건 이미 질릴 대로 했어. 한 판이라도 더 했으면 참고 있던 토가 나왔을 거야.”

록허드의 카드 게임 실력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허접스럽고, 반대로 릭의 심리전은 프로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나와 록허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둘이 있는 자리에서는 다신 카드 게임 안 할 거야.

“차라도 다시 준비해 올까요?”

“아니, 됐어. 그냥 혼자 있을래. 너는 외출 안 해?”

“저는 오늘 메리튼 부인과 함께 성을 지키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필요하시면 개의치 마시고 종을 울리세요. 금방 올라올게요!”

어쩐지. 그래서 오늘따라 표정이 우울했구나.

데이지가 침실을 나가자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창 너머의 무수한 은하수로 방 안은 낮처럼 훤했지만, 인기척 하나 없이 잠잠한 성의 분위기가 안 그래도 우울한 기분을 더 가속화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나가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잘 놀 자신 있는데.”

이제 별 무리를 살피며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는 것도 질렸다. 누군가 저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나에게 밖은 안전하다고 확언해 주면 좋으련만. 똑똑. 그때였다. 마치 상상이 현실이 되기라도 한 양, 창가에서 유리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맨 처음 5초간은 공포였고, 이후는 호기심이었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촛대를 그러쥐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뭐지? 설마 로망드의 잔당이 날 죽이려고 성을 기어서 2층으로 올라온 건가?

똑똑. 한 번 더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리고, 슬금슬금 몰려오려는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창의 반을 덮고 있던 레이스 커튼을 거두었다. 그리고 유리창 너머, 테라스에 편안한 자세로 걸터앉은 남자를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창을 밀어내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의 바람이 열린 공간 너머로 불어온다. 남자의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아, 더워……. 성 한 번 오르느라 땀으로 범벅이 됐네.”

억지로 타이를 끌러 낸 남자가 셔츠의 단추를 풀고 걸어와 창에 몸을 기댄다. 나는 황당함으로 닫히지 않는 턱을 움직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자르?”

눈이 마주치자 활기로 가득한 눈이 근사하게 굽어졌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감정에 쥐고 있던 촛대를 놓치고야 말았다.

“어이, 케이트. 잘 지냈어? 그새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네.”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경쾌한 저녁 인사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땅 위로 추락할까 두려워 네자르의 팔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힘드니까 너무 당기지 마. 그냥 여기 앉아 있는 걸로 충분해.”

“미, 미쳤어? 설마 여길 올라온 거야? 맨손으로?”

손을 들어 확인하니 틀림없어 보였다. 제국 황태자의 살이 석벽에 거칠게 부딪혀 좋지 못한 꼴을 하고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아, 아니지. 왜 벽을 타고 올라온 거야? 그냥 계단으로 올라오면 안 돼?”

작게 웃은 네자르가 몸을 일으켜 침실 안으로 발을 들이민다. 급히 창을 닫으려 팔을 뻗자, 그 팔을 당겨 품에 안고는 내 머리칼에 입을 묻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굳힌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터질 듯 뛰는 고동이 네자르에게 들릴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이 내 팔을 천천히 놓았다. 네자르는 제 손에 더럽혀진 내 팔을 내려다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음. 미안, 너무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거리를 벌린 그가 나를 지나쳐 방의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사이 나는 온 힘을 다해 얼굴로 몰리려는 열을 막았다.

“요 며칠 일에 치여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네 얼굴을 보니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 느낌이야. 역시 무리를 좀 해서라도 벽을 타길 잘했어.”

네자르가 내 침실을 방문한 것은 열두 살의 겨울 무렵, 지독한 감기에 걸린 이후 처음이었다. 별일 아니었음에도 괜한 긴장감에 그의 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처음 만났던 때와 비교하면 그의 신장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훌쩍 자라 있었다.

아, 떨려!

정의하기 힘든 형태의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청을 더 크게 울렸다.

“그래서 왜 벽을 탔냐니까?”

뒤꽁무니를 쫓아가 축축해진 네자르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거칠게 오르내리던 그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됨을 느낀다. 걸음을 멈춘 네자르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캐묻지 말고 안부 인사라도 해 주는 게 어…….”

눈이 마주친 즉시 그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춘다. 나는 돌연 내려앉은 정적에 눈을 깜빡이며 네자르의 표정을 살폈다. 곧이어 그가 입매를 끌어 올리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해 주는 게 어떠냐고 말하려 했는데, 방글방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내, 내가 웃고 있었나? 아차 싶은 마음에 뺨을 손으로 가리고 정색을 했다. 아니, 정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얼굴로 향하던 그의 손이 다시 거두어졌다. 네자르는 말없이 자신의 더러운 손바닥을 들여다보곤 창밖으로 툭툭 털었다. 벽을 타고 올라온 탓인지 손바닥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의 등을 장식장 뒤편으로 밀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잠깐만 여기 뒤에 있어. 데이지를 부를 거야.”

종을 울리자 네자르가 커다란 덩치를 구겨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데이지는 기다렸다는 듯 금방 올라왔다.

“시키실 일 있으세요?”

“응. 물 묻힌 타월 좀 가져다줄래? 손이 자꾸 끈적이는 게 아무래도 아까 마셨던 찻물이 묻은 것 같아.”

데이지는 내 부탁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네, 잠시만요.”

“아, 이왕이면 따뜻한 물로 부탁해.”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던 데이지가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창문은 왜 열어 두셨어요?”

예기치 못한 말에 숨을 들이켜며 창가로 뛰어갔다. 그녀의 말마따나 활짝 열린 창문 옆으로 커튼이 펄럭이고 있었다.

“너, 너무 더워서 잠깐 열어 뒀어.”

“하긴, 오늘 밤이 좀 특출하게 덥기는 하죠.”

문이 닫히고 내 반응을 살피던 네자르가 침실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거짓말을 아주 아무렇지 않게 하네? 이거, 완전 선수인데?”

“그럼 데이지한테 이르기라도 할까? 네자르가 벽을 타고 내 방 창문으로 들어왔다고?”

내 곁으로 다가와 침대에 앉으려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만치 먼 거리에서 의자를 끌고 왔다. 나에게는 두 손으로 붙잡고 낑낑거리며 끌어야 겨우 움직이는 가죽 의자가 그의 손에는 종잇조각이 된 양 쉽게 들렸다. 가져온 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네자르가 팔짱을 꼈다.

“케이트, 나는 너와 축제를 즐기러 온 거라고. 데이지에게 말해 버리면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 아니야?”

장담하건대 이제껏 내가 네자르에 의해 놀랐던 시간을 전부 긁어모으면 1년을 꽉 채울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랑 같이, 전야제에 간다고?”

“응.”

“가도 돼?”

내 물음에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려고 내가 힘들게 성을 올라온 거잖아.”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록허드의 말처럼 켈 로망드의 잔당이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려고?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의자를 더 가까이 끌고 온 네자르가 차분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세상에서 내 옆이 가장 안전해, 케이트. 어쩌면 너의 요람인 이 에젤로트 성보다 훨씬 더.”

사기꾼의 꿀 발린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이리 믿음직한 거지?

네자르는 중대한 비밀이라도 밝히듯, 얼굴에 그늘을 씌우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랑 황성으로 갈래?”

그 덕에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황성이 왜 나와? 전야제에 갈 거라며!”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하면 될 텐데, 까다롭기는.”

능글맞게 웃는 표정이 수면에 퍼진 물감처럼 번듯한 얼굴 위로 번져 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네자르에게서 과거의 향수가 느껴졌다.

제 마음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로 호숫가에서 날 괴롭혔던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의 네자르는 훨씬 더 여유로워 보였다. 이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이거야? 그래서 뻔뻔하게 들이대는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 근육은 빳빳하게 굳고 입술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을 올라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소 침실을 나가 데이지에게서 타월을 받았다.

“나 이제 잘 거니까 방에 들어오지 마. 알았지?”

“어머, 벌써 주무시려고요? 이제 겨우 7시인걸요.”

“이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질렸어. 그냥 누워서 잠이나 자려구.”

데이지, 오늘만큼은 제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말고 그냥 내려가 줘!

“어쩜, 제가 도움이 될 수 없어 죄송스럽네요.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봬요, 아가씨.”

다시 문을 닫고 들어오니, 뭐가 그리도 당당한지 의자에서 일어난 네자르가 침실을 제 방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준 문진은 잘 가지고 있어? ……아, 여기 있군.”

장식장을 들여다보던 그가 유리 문진을 손에 쥐었다. 나는 타월을 쥔 채 침대 위로 엉덩이를 걸쳤다.

“흐음. 문진의 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온전한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장식장에 처박아 둔 거냐?”

“사용한 적은 없어도 구경은 질리게 했어. 거기 안에 박혀 있는 꽃잎 생김새도 정확히 기억해. 못 믿겠으면 그려 줄까?”

내 말이 웃기기라도 한지, 그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네자르는 제 물건을 챙기듯 유리 문진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꽂아 넣었다. 저건 왜 챙기는 거지? 내가 타월을 쥔 손으로 손짓하자 네자르가 다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건 왜 가져가고 그래. 설마 줬다 뺏는 건 아니지?”

네자르의 손을 잡아끌어 닦으려 했건만, 오히려 그는 내게서 타월을 빼앗았다.

“이유는 나중에 말해 줄 테니까 잠시만 맡겨 둬. 훔쳐 가지도, 빼앗아 가지도 않아.”

쓰윽쓰윽 닦아 내는 천 아래로 흙먼지가 묻어 나온다. 내가 해 줘도 될 텐데 굳이 가져가서 닦는 건 뭐람.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내내 네자르의 입가에선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왜 자꾸 웃는 거야?”

“네가 좋아서.”

거리낌 없이 나온 답에 빽 소리를 지르려다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왜, 부끄러워?”

숲 속의 지하 오두막에서부터 사람이 바뀐 느낌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게 이런 의미였던 걸까. 한 발자국은 무슨, 열 발자국씩 달려오는 기분이었다.

“데, 데리고 나가려면 빨리해. 자꾸 늦장 부리지 말고.”

“예, 예.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사용한 타월을 곱게 접은 네자르가 침대 아래로 얌전히 쑤셔 넣었다. 문제는 다시 등을 편 그가 걸음을 옮긴 방향이었다.

“……그쪽으로는 왜 다시 가는 거야?”

네자르가 닫힌 창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땀에 젖은 흑발이 유입된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가자며?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왔는데, 나가는 일도 확실히 해야지.”

“장난치는 거지?”

말과 다르게 내 몸은 이미 네자르의 곁에 도착한 상태였다. 여름에 걸맞게 늦은 시간에도 하늘은 흐릿한 안개 빛이었다. 저 장막 아래로 화려한 오색의 폭죽이 터질 거라 상상하니 가슴이 펄쩍펄쩍 뛰었다. 다만 그 설렘은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까마득한 풍경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지금부터는 나를 꽉 잡아, 케이트. 네가 저 아래로 떨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까.”

“내가 잘 잡을 수 있을까? 나도 나를 잘 못 믿겠어.”

“으음. 뭐, 그럴 수 있지. 일단 내게 안겨. 척추가 부서져도 너는 안전하게 데리고 내려갈게.”

여길 내려가면 부모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으로 모자라 과장되게 표현해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네자르가 안전하다면 확실하게 안전한 거겠지. 다른 이도 아니고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라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다.

“척추가 부서지느니 그냥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어서.”

겁을 집어먹은 채 네자르의 가슴팍으로 안겼다. 날 들쳐 안은 그가 다리 한쪽을 테라스 위로 걸쳤다.

“우선 눈을 감고.”

그의 말을 따라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두 손으로 입을 막아. 혹여나 겁이 나서 비명을 지를 일이 없도록.”

그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대꾸하려 해도 입을 손으로 막은 탓에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좋아. 이제 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세.”

하나, 둘, 셋…….

“읍!”

순간 덜컹, 하고 심장이 추락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나를 잡아챘고 동시에 거친 신음이 이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자, 이제 눈을 뜨시면 됩니다.”

난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내게 밀회 장면을 들킨 전적이 있는 툴드가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덜덜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나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땅을 디뎠다.

“설마… 저 위에서 날 내던진 건 아니죠?”

툴드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어어, 네! 제가 벽을 타고 올라가서 영애를 모시고 내려왔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조금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세요.”

마침 땅으로 내려온 네자르가 손을 털며 내 쪽으로 뛰어왔다.

“어때? 재밌었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소리도 다 옛말이었다. 나는 태양처럼 반짝이는 네자르의 미소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봤다.

“이런 방식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내려왔어!”

“툴드와 키올은 땅에서 바위도 뽑아낼 정도로 힘이 장사야. 3층에서 두 명이 떨어져도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걱정이고 자시고 이미 내려왔잖아? 이것 봐, 아직도 손이 덜덜 떨린단 말이야.”

어느새 날 부축하던 두 명의 호위 기사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네자르는 한동안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양팔을 벌리자 등을 돌린 그가 날 업었다.

“무게가 좀 는 것 같은데?”

“아, 정말! 그런 말은 당사자가 없을 때 하는 거라구.”

우리는 그 상태로 너른 정원의 초원을 가로질렀다. 네자르의 어깨에 코를 묻으며 전야제를 즐길 생각으로 들썩이는 기쁨을 천천히 잠재웠다.

성에서 벗어나자마자 바글바글한 사람의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 그래도 네자르의 신장이 평균 남성에 비해 한 뼘 반은 컸기에 성 앞에서 번화가까지 흐르는 인산인해를 무리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이제 내려와.”

타이르는 목소리에 아쉬운 마음으로 등에서 내려왔다. 네자르는 내 손을 이끌어 인파를 헤치고 걸었다. 그의 손 크기가 나보다 한참 커서 망정이지, 살갗만 겨우 닿아 있을 정도로 약하게 잡은 탓에 손이 빠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네자르.”

“응.”

“네자르는 왜 항상 내 손을 꽉 안 잡아?”

그의 시선이 힐긋 내게로 향했다. 무언가 답하려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닫혔다. 네자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우리가 수백, 수천 개의 등불로 장식된 번화가 광장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네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어.”

처음에는 네자르가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소 황당한 기분이 되어 대답했다.

“곰곰이 생각해 볼 정도야? 이유가 있던 거 아니었어?”

네자르가 작게 웃었다. 워낙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외양을 가졌기 때문인지 지나치는 족족 여인들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주위의 그런 반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보다는 짜증이 일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헐렁하게 열려 있던 네자르의 셔츠 단추를 윗단까지 말끔하게 잠갔다. 목 근처가 답답했는지 그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나를 내려다봤다.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거냐? 안 그래도 덥고 사람 많아서 답답한 와중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려던 말이나 계속해.”

그를 이끌고 노점상이 길게 늘어진 골목 옆에 섰다. 이번에는 대충 접어 놨던 소매를 내려 커프스를 잠갔다. 주름 하나하나 펴서 꼼꼼하게.

“별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단순히 습관인 것 같아서.”

살짝 올려다본 네자르는 목소리만큼이나 담담한 얼굴이었다. 전야제를 위해 골목골목마다 환하게 수놓아진 불빛이 그의 속눈썹 위로 넘실대며 수없이 점멸한다.

“처음 본 시절의 너는 너무 작았거든.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았지. 그래서 손을 잡고 이동할 때는 늘 손가락 끝을 살짝 걸치고만 있었는데……. 그게 불편했던 건지 너는 항상 손아귀에 힘을 강하게 주곤 했어. 기억나?”

나는 왼쪽 소매의 커프스까지 완벽하게 잠가 내며 대답했다.

“글쎄. 잘 생각해 보면 답답하긴 했던 것 같아.”

나의 대답에 네자르가 다시 소리 내 웃었다. 어째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웃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거봐, 별 이유 없지? 그냥 단순히 무의식중에 보인 행동이었던 거야.”

제 셔츠가 어떤 모양새가 됐는지는 확인도 안 하고, 얼굴을 마주한 채 방긋방긋 웃던 네자르가 벽에 기대어 있던 등을 천천히 폈다.

“이제는 슬슬 어릴 적 습관에서 탈피할 때도 됐지. 네가 오랜만에 꽤 예리한 질문을 했구나.”

내 손을 꽉 잡은 네자르가 이전과 달리 단정한 차림새로 골목을 벗어났다. 단정하게 옷을 입혀 놔도 사람 자체가 근사하다 보니 이목을 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축제에 왔으면 꼭 해야 하는 일. 무려 5년 만에 그와 함께 맞이하는 에젤로트 여름 축제였다. 에젤로트 가문의 여식인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끌려다닐 수만은 없지!

“네자르, 돈 가져왔지? 돈 줘.”

그는 왜냐는 물음도 없이 주머니에서 은화 열 닢을 꺼냈다. 열 닢은 오늘 밤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지. 다섯 닢을 다시 그의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다섯을 내 실내복 안쪽 주머니에 넣어 뒀다.

“좋아. 돈이 생겼으니 우선 닭꼬치를 사러 가자!”

축제의 백미는 역시 닭꼬치지! 네자르는 군말 없이 내가 이끄는 길로 얌전히 끌려왔다. 신이 나 7개씩이나 구입한 닭꼬치를 오물거리며 그의 입에 하나 넣어 줬다. 네자르는 마찬가지로 군말 없이 씹어 삼켰다.

“이건 호위 기사분들에게도 줘. 우리 노는 꼴을 구경만 하라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이잖아.”

“흐음.”

양념만 남은 나무 꼬챙이를 빙그르르 돌리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방금 내 요구가 민폐였던 건 아니겠지? 괜히 직업의식을 갖고 호위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들쑤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나? 다행히 네자르의 가벼운 손짓으로 끌려 나온 툴드와 키올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하하, 이것 참! 아가씨께서 저희까지 챙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본래 방침대로라면 쥐 죽은 듯 그림자처럼 졸졸 쫓아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

“너는 말이 많아, 툴드. 아가씨께서 호의를 베푸셨으니 닥치고 입에 집어넣어라.”

짜증스레 인상을 구긴 키올이 종이봉투에서 꼬치를 꺼내 툴드의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음, 역시 맛있군요! 이런 맛이라면 네 개도 혼자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가 그러니까 자꾸 배가 나오는 거다, 툴드.”

툴드를 찌릿 노려본 기사, 키올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에젤로… 아니, 아가씨.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습니다. 제 이름은 키올 베리에올이며, 아가씨께서는 편하게 키올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툴드, 인피르노와 함께 여기 계신 저희 도련님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자르 도련님이라니, 외부인을 의식해 바꾼 표현일 테지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키올… 경!”

“존칭을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키올, 툴드라고 부르세요. 아, 저, 하나만 더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다 드세요.”

반색을 한 툴드가 키올이 품에 안은 종이봉투에서 닭꼬치를 빼 갔다. 입가가 양념 범벅이 되었어도 툴드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보는 내 가슴이 다 찡해질 정도였다.

그냥 함께 다닐까? 이렇게 대놓고 동행하면 기습하려던 파렴치한도 움직임이 제한되지 않을까. 네자르와 함께하는 축제 구경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과 즐기는 축제 역시 나쁘지 않았다.

“저기, 네자르. 괜찮다면 우리 이 사람들과 같이…….”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정확히 내 눈을 향한 그의 얼굴은 단 한 가지, 확고한 의사를 표하고 있었다.

안 돼.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온 네자르의 손을 잡고선 광장을 스쳐 지나갔다. 등 뒤로 바짝 따라오던 걸음이 하나둘 줄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네자르만 남게 되었다.

“케이트, 어릴 때 기억나? 그때는 네 양손을 나와 록허드가 잡고 걸었었는데.”

네자르의 말에 텅 빈 오른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열네 살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놀러 나가고 싶다며 발버둥 치는 날 위해 록허드나 네자르가 내 손을 꼬옥 잡고 외출하곤 했다.

특히 축제 시기에는 한 명으로 그치지 않고 꼭 둘이서 함께 날 감시했다. 더위에 손바닥이 축축해져도 놓을 생각을 않으니, 짜증을 못 참고 길길이 날뛰는 일도 부기지수였다. 내가 그 시절을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지!

“그것뿐이면 다행이게? 위생 상태가 안 좋아서 건강에 나쁘다고 길거리 사탕, 꼬치, 소시지, 심지어는 주스까지 못 먹게 했잖아.”

“너는 어릴 때 식탐이 너무 많았어. 그거 다 먹었으면 살이 바짝 올라서 데굴데굴 굴러다녔을 게 뻔해.”

“뚱뚱한 나는 싫다는 거야?”

그의 어깨에 몸을 바짝 대고 이를 갈며 물었다. 기대와 달리 네자르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젓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뚱뚱한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하듯, 진지한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상해 보니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동글동글 귀여울 것 같네. 살찐 야생 토끼처럼.”

살찐 야생 토끼는 또 뭐야? 엄청 흉하고 거칠게 생겼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살이 많은 건 건강에 나빠, 케이트. 무릎 관절에 무리가 간다고.”

아무리 들어 봐도 조모, 조부가 할 법한 걱정이었다. 실없는 소리였기에 대꾸도 않고 경사진 작은 언덕을 타고 올라갔다. 어째 아무리 걸어도 사람이 줄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데. 호수로 가는 건가?”

네자르의 말대로 이전과 다르게 무겁고 후끈했던 공기가 다소 가라앉은 감이 있다. 나는 목적지가 점차 가까워짐을 느끼며 신이 나 소리쳤다.

“응. 에젤로트 여름 축제를 제대로 즐기려면 이곳의 꽃인 뱃놀이를 하러 가야 해!”

에젤로트 동쪽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동에젤로트라 불리는 호수는 제도의 호수보다 세 배는 크고 깊다. 게다가 보트 놀이를 할 수 있는 부둣가도 꽤 크고 말끔해 제국 제일의 호수 공원으로 소문이 난 장소였다.

호수 한가운데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 역시 일품이었다. 호수를 감싼 침엽수림의 그림자가 꽤 길고 넓은 터라 아카시아 나무의 꽃이 보름 정도 늦게 핀다. 그 덕에 초여름에 뱃놀이를 하면 보이는 풍경과 향이 그림처럼 그윽했다.

특히 여름 축제 시기에는 밤에도 뱃놀이가 가능했기에 유명세를 듣고 찾아온 연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보트 앞에 등불을 매달고 수면을 유영하면 마치 다른 세계에 동떨어진 듯한 착각이 일곤 한다. 물론 그런 보트가 주변에 열 척쯤 더 떠다니면 호수 위에서도 번화가에서 떠드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 역시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뛰지 마, 케이트. 넘어지잖아.”

이렇게 인기 있는 관광 코스는 자리가 금방 차는 것으로 모자라 대기 줄마저 길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힘들게 도착한 동에젤로트 부둣가는 이미 뱃놀이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안 돼! 닭꼬치는 나중에 먹고 여길 먼저 올걸!

“저기요. 몇 시간 기다려야 하나요?”

줄을 관리하던 관계자가 내 물음에 턱을 쓸었다.

“흠, 이 정도 길이면…….”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최소 1시간은 훌쩍 넘기겠지.

“적어도 2시간은 기다려야 할 거요.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예정이라 줄이 순식간에 더 길어졌지. 호수 위에서 불꽃놀이를 감상할 생각이라면 지금 포기하는 게 좋을 겝니다. 아마 불가능할 테니까.”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한껏 우울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단 포기하지 않고 대기 줄 끄트머리에 섰다. 멀리 보이는 호수에서 노란빛이 둥둥 떠다녔다.

나도 네자르랑 같이 타고 싶다.

“그렇게 뱃놀이가 하고 싶어?”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너무 철없는 애 같으려나. 네자르의 물음에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했다.

“아니. 뭐, 그렇게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닌데……. 2시간은 너무 긴 것 같아.”

기운 빠진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혀를 찬 네자르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나는 그의 손길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 위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싶은 거야? 그렇담 성 뒤편에 있는 네 작은 호수로 가는 건 어때?”

“성에 가려서 안 보일 게 분명해. 우리 그냥 광장으로 가서…….”

“꺄악!”

가까운 곳에서 여인의 비명이 들려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웅성거리기 시작한 사람들을 따라서 고개를 틀었다. 겨우 열 걸음이면 도달할 호숫가 아래로 까만 물이 사납게 튀었다. 누군가 무리하게 몸을 빼 경치를 구경하다가 물에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최악이군.”

부둣가로부터는 한참이나 먼 거리였고, 사람들을 관리하던 남자는 이미 저 앞으로 사라진 뒤였다. 주위를 살피던 네자르가 급히 앞으로 나아가며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왜 아무도 돕지 않지? 멋들어진 옷을 차려입은 여자들도, 비단 넥타이를 맨 신사들도 수군거리기만 할 뿐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케이트? 너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금방…….”

그 속에서 움직이는 건 네자르밖에 없었다. 난 어두운 호숫가로 빨려 들어가는 네자르의 등을 보며 못 박힌 듯 서 있던 발을 움직였다.

네자르는 황제가 될 남자다. 고작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축제는 우리 에젤로트 가문의 오랜 자랑 중 하나였다. 내가 아무리 막내딸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축제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건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뭐, 이유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생각이 채 결론을 맺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호수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잠깐, 케이트!”

풍덩! 열대야의 호수는 그리 차갑지 않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익숙하게 수면을 헤엄쳐 바닥으로 꺼지기 직전인 여자의 목을 잡아챘다.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던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잡고 늘어졌다.

“힘을 빼. 그리고 자꾸 내 어깨 누르지 마! 같이 죽고 싶어?”

“헉, 허억!”

패닉이 왔는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여자는 여전히 허우적거리길 반복했다. 죽음을 문턱에 둔 여자의 힘은 약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잡고 늘어지는 여자 때문에 물이 콧구멍과 목구멍 아래로 계속해서 넘어갔다.

이대로는 나도 위험해. 나는 주먹에 온 힘을 싣고 여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닥치고 가만히 있지 못해? 한 대 더 맞고 싶으면 계속 난리 치든가!”

그런데 나한테 얻어맞은 여자의 낌새가 이상하다. 미친 듯이 허우적대던 몸에서 힘이 쭉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 여보세요? 설마 기절하셨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기절한 게 맞았다. 기절한 여자를 뭍으로 끌고 가는 건 내 자력으로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여자의 몸을 더 바짝 잡아당겼다.

“어이, 어이, 거기! 내 말 들립니까? 밧줄 잡으쇼! 밧줄! 밧줄로 여자 허리를 묶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부둣가에 선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남자의 말대로 가까운 곳에 밧줄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나는 힘없이 수면에 흔들리는 여자의 허리를 힘겹게 밧줄로 묶었다.

팔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사람 여럿이 합심하여 밧줄을 끌었다. 나는 바닥난 힘을 긁어모아 뭍으로 헤엄쳐 나갔다. 그리고 두 다리로 일어설 기력도 없이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헉…….”

은하수 가득한 하늘 아래로 네자르의 까만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나를 안아 들어 품에 안았다. 발끝에서 찰랑거리던 수면의 감각이 저 멀리 사라졌다.

“이런 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한숨이 내 다리를 끌어당기던 호수의 물보다 더 짙고 무거웠다.

“음… 미안. 날 위해서 에젤로트까지 와 줬는데, 의도치 않게 쫄딱 젖어 버렸네.”

날 안은 채 풀 위로 주저앉은 네자르가 거칠게 인상을 구겼다.

“의도치 않게? 의도가 다분했던 거겠지. 네가 물속에 있던 시간 동안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겁도 없이 뛰어들다니, 제정신인 거냐?”

네자르는 화가 나도 쉬이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나는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네자르보다 수영 더 잘해.”

“너는 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힘이 빠져서 저 여자랑 같이 가라앉았으면 어쩔 뻔했어? 그때도 그런 소릴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후회되지는 않았지만, 날 걱정하는 네자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내가 그 여자를 구해 낸 건데. 칭찬 한번 없는 그의 매정함이 야속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네자르의 뒤편에서 툴드와 키올이 나타났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키올이 품 안에 쥐고 있던 물건을 네자르에게 건넸다. 괴상망측한 무늬의 기다란 외투와 새빨간 에나멜 구두였다.

“옷 가게는 이미 장사가 끝난 지 오래라, 외부 잡상인들에게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구두와 외투를 내려놓은 네자르가 제 셔츠로 내 발을 세심하게 닦았다. 말 한마디 없이 어두운 얼굴이었기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젠장. 이렇게 즐거운 날에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툴드에게 물었다.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 물에 빠졌던 여자는요?”

“방금 가까운 의원에게 실려 갔습니다. 동행으로 보였던 여인이 거듭해서 감사 인사를 전하려 했으나…….”

말을 하다 만 툴드가 힐끔 시선을 내려 네자르의 뒤통수를 훔쳐봤다.

“도련님께서 접촉을 극구 거절하셨습니다. 상태가 퍽 양호해 보였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잘하셨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턱을 들어 올린 네자르가 툴드를 노려봤다. 그 매서운 시선에 당황한 툴드가 헛기침했다.

“크흠, 물론 지양하셨어야 했던 일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함부로 몸을 던지지 마십시오.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눈앞의 네자르 전하도 생각하셔야죠.”

내 발의 물기를 닦아 낸 네자르가 조심스레 새빨간 색의 에나멜 구두를 신겼다. 이 상태 그대로 귀성할 생각인 것 같았기에, 네자르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이제 괜찮아. 더웠는데 호수 물로 샤워도 하고, 기분이 꽤 상쾌한데?”

기이한 문양의 외투를 집어 어깨에 둘렀다. 미동도 없이 날 올려다보는 네자르에게선 여전히 무겁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어휴, 정말. 대체 언제까지 삐쳐 있을 심산이지? 나는 그를 일으키기 위해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 폭죽 터지는 것만 구경하고 돌아가자. 이제는 돌발 행동 안 하고 네자르 옆에 찰싹 붙어 있을게. 응? 광장으로 가자!”

“약속해.”

하지만 네자르는 자리에서 꼼짝 않은 채 날 쳐다봤다. 그의 한마디에는 거절하기 힘든 단호함이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짓 하면,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절대 밖으로 못 나가는 거야.”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무슨 취급을 당하게 될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날 짐짝처럼 들어서 에젤로트에 영원히 가둬 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 감옥이 황성으로 옮겨 갈 터였다.

“으응. 알았어…….”

내가 들어도 힘없이 우울한 답이었다. 네자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나와 눈을 마주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네 말대로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광장에 가 볼까?”

너무 바로 괜찮아지는 거 아니야? 뭔가 네자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기분인데.

날이 더웠던 탓인지 물에 젖었다고 추위에 덜덜 떨 필요는 없었다. 괴상망측한 외투, 등불의 빛을 받아서 새빨갛게 빛나는 구두까지. 내 꼴이 번화가를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기에는 다소 우스웠으나, 네자르가 워낙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닌 탓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광장은 그 잠깐 사이 음악과 춤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활기찬 사중주에 튀어 오르는 분수대의 물마저 춤추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야제에 이런 이벤트가 있었나?”

“작년에 새로 생겼어. 음악이 바뀌면 남자가 오른쪽으로 이동해서 커플이 바뀐 채로 춤춰야 해. 우리도 가자!”

네자르를 끌고 광장에 합류했으나 곧 범상치 않은 내 차림새를 깨닫고 빛의 속도로 벗어났다. 네자르는 깜빡깜빡 눈만 뜨며 뭘 하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하하. 춤을 추기에는 내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네자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네자르가 동의하지 않은 탓에 분위기가 급격히 어색해졌다. 나는 우선 그를 이끌어 분수대에 자리를 잡았다. 한숨을 돌리며 폭죽이 터질 때까지 뭘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문득 볼록하게 나온 네자르의 바지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내 침실에서 가지고 나온 문진이었다.

“네자르, 그런데 그 문진은 왜 가져온 거야?”

“……음.”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얼굴이 아주 잠시 바짝 굳었다. 금세 여상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문진과 어디서 챙겨 온 것인지도 모를 자그마한 휴대용 칼을 꺼냈다. 그리고 칼의 뒷부분을 이용해 유리 문진의 윗부분을 툭, 건드렸다. 약한 충격이었음에도 마치 대리석 위로 추락한 듯 문진의 표면으로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한번 줬으면 영원히 내 물건인데, 왜 멋대로 물건을 부수고 난리람!

팔을 뻗어 문진을 되찾아 오려 했으나 네자르는 조각난 유리 문진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제 손바닥 위로 떨어진 꽃잎 사이를 더듬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자그마한 다이아몬드 조각들이 곱게 박힌 반지가 놓여 있었다.

“네가 언제 이걸 찾아낼까 기대했었는데… 결국 눈치채지 못할 줄이야.”

네자르는 커다랗게 조각난 문진을 분수대 위로 고이 올려놨다. 그리고 꽃잎으로 반지 사이사이를 세심히 닦아 내 혹시 존재할지 모를 유리 가루를 털어 냈다.

그러니까, 저 반지가… 설마 저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우려는 건…….

“감으로 크기를 재서 제작한 거라 네게 맞을지 모르겠다. 한번 껴 볼래?”

그러면서 내 손을 덥석 잡은 네자르가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쳐다봤다. 사방의 빛을 받아 바닷속처럼 반짝이는 모양이 참 예뻤다.

“온 김에 우리도 춤이나 출까?”

……설마 이게 끝인 거니? 어쩐지 그가 중압감을 못 참고 도망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도 위에는 거의 젖지 않았고, 외투는 그냥 벗으면…….”

내 가슴팍을 확인한 네자르가 헐렁했던 외투의 단추를 더 꼼꼼하게 잠갔다.

“절대로 벗지 마. 지금이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군. 옷차림이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그냥 다른 곳으로 가자. 아직 먹지 못한 음식이 많잖아.”

“푸흡.”

단박에 일그러진 잘생긴 이마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나 날 아껴 주는 네자르인데 굳이 무언가를 더 바랄 필요가 없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탓이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옷이 조금 이상하다고 내뺄 수는 없지.”

축제에서 추는 춤은 뻔하다. 제국 공용 민속 취급을 받는 살사와 유사한 춤이었다.

“누가 널 흉보기라도 하면 바로 말해. 내가 아주 혼쭐을 내 줄 테니까.”

장난치듯 속삭인 말이었으나 어째 무시할 수 없는 진심이 녹아 있는 것처럼 들렸다.

노래가 바뀌고, 나와 네자르는 광장에 뛰어들었다. 전과 달리 빠른 템포의 연주였기에 서로의 모양새가 웃겨 한참을 즐겁게 웃으며 춤춰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주가 끝났고, 남자들이 새로운 파트너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대거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 커플만 쏙 빼고.

“네자르, 안 가?”

새로운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네자르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춤이 익숙지 않아. 한 번만 더 도와줘.”

“……음. 그래, 뭐 한 번이야.”

말이 한 번이었지, 다음과 그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에서 다가온 남성이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밀었으나 네자르는 보란 듯이 남성을 무시하고 내 허리를 더 밀착시켰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네자르의 등을 응시하던 남자는 곧 고개를 저으며 멀어졌다. 벌써 세 번째 난장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참다못한 나는 네자르와 가까이 붙은 몸을 멀찍이 떼어 냈다.

“자꾸 그럴래? 파트너를 안 바꿀 거면 왜 참여한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란 말이야.”

네자르는 대답 대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춤추는 내내 철판을 깔고 있던 얼굴이 지금은 긴장으로 얼어 있었다.

무얼 저리 고민하는 걸까?

질문은 필요 없다.

사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다. 단지 기대에 찬 나와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하는 그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을 뿐.

“네자르.”

그와 혼인하지 않을 거라며 호언장담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더해서 애인을 만들어 준답시고 사냥 대회 저녁 만찬을 뒤지고 다녔던 순간도. 내 서운함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나, 문득 조금 더 쉬운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릴리는 좋아하면 노력해도 되는 거라고 내게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이제야 그녀의 말이 절실하게 이해됐다. 날 위하는 네자르의 마음이 이성애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어?”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아니, 바보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더 이상 우리의 감정을 무시하며 멍청하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봐, 케이트. 아무런 말이라도 해 봐.”

그러기엔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채 사라질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좋아해, 네자르. 나, 나랑 결혼해 줄래?”

꽃다발 하나 없이 텅 빈 손이 부끄러워, 약지에 걸린 반지를 뺐다. 네자르의 새끼손가락에 꾸역꾸역 끼워 넣으려 했으나 반지의 크기가 그에게 턱도 없이 작았다.

“이, 이게 안 들어가네. 그래도 새끼손가락에는 들어갈 줄 알았는데.”

차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건만, 내 귀에는 그의 차분한 숨소리와 그보다 더 차분한 사중주만 번갈아 들려왔다.

아, 젠장! 설마 거절한다는 의미인 걸까? 나는 용기 내어 고개를 쳐들었다.

“저기, 네자르. 거절이어도 좋으니까 아무 대답이라도…….”

네자르의 얼굴은 마치 수천의 폭죽이 터지는 자정의 은하수 같았다. 그만큼이나 환히 빛났고, 그만큼이나 내 심장을 설레게 했다. 그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키스해도 돼?”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부둣가를 내달렸을 때보다 더 저돌적으로 그의 입술에 돌진했다. 어디선가 환호성이 터졌다. 네자르의 웃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꽃놀이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눈앞의 네자르가 불꽃이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닫고 네자르의 목 뒤로 양팔을 둘렀다. 동시에 사방에 꽃처럼 피어 있던 등불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안개 속을 헤맨 것처럼 흐릿하고 형체가 없다. 다만 드문드문 사진처럼 남아 있는 장면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나를 또렷이 응시하던 네자르의 검붉은 눈동자와 웃음, 그 너머에서 우릴 향해 웃고 떠들던 남녀들, 쿵쿵 터질 듯 뛰던 심장까지.

네자르는 반지를 나의 약지에 다시 끼워 넣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하도 매만졌더니 닳지는 않았을까 걱정됐다.

무슨 용기로 성의 문을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당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 여태 축축함이 남아 있는 상태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네자르는 제도로 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입술을 들이대는 장면에서 툴드와 키올은 웃음을 터트렸겠지?

“악!”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상상의 나래가 물밀듯 밀려온다. 나는 엄한 베개와 침대를 쥐어뜯으며 진정될 기색이 없는 마음을 달랬다. 혼자 흥분하지 말자, 케이트. 괜히 자꾸 네자르를 떠올리지 마. 마음을 진정시켜!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

키올은 오늘따라 마음이 영 뒤숭숭했다.

“으읍, 읍! 읍!”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가? 키올은 그 원인에 대해 곰곰이 고민하며 제 턱을 툭, 툭 두들겼다.

“읍! 으으읍!”

어차피 주군이 오시기까지 기다려야 하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져 보기로 하자.

해가 지기 직전인 늦은 오후, 현명한 주군께서 며칠간 붙잡고 있던 일을 내던지고 에젤로트행을 명하실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인인 에젤로트 영애로부터 귀한 닭꼬치를 하사받았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에젤로트 영애가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하기 위해 용맹하게 뛰어들었을 때부터였나?

아니었다.

그녀의 객기 어린 행동에 주군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을 때부터?

아니었다.

영애께서 반지를 선물 받고 황홀한 웃음을 짓던 순간? 음. 오히려 그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

“으읍! 읍, 으으읍!”

위의 경우들이 아니라면 분수대 아래에서 두 분이 한 폭의 명화 같은 키스를 나누던 그때부터였던 걸까.

아니다, 아니야. 전부 다 아니었다.

키올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등불 하나만 겨우 켜진 어두운 지하의 천장은 까만 곰팡이가 다닥다닥 피어나 있었다. 그제야 키올은 가슴속이 울렁이고 뒤숭숭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읍읍! 읍! 읍! 읍!”

그 연유는 키올 본인이 아닌 주군,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에게 있었다. 더 정확히 따지자면 주군이 연인과 헤어진 후 황성에 돌아온 이후부터였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 실없는 웃음을 뱉던 주군의 모습!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부터!

콰앙.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지하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이, 키올. 전하는…….”

문짝이 날아갈 기세로 걷어찬 남성은 다름 아닌 그와 같은 황태자의 호위 기사인 툴드였다. 하여간, 저 기사의 품위도 모르는 놈. 쯧쯧 혀를 찬 키올이 제 발아래에 구속되어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전하는 이제 곧 내려오실 거다. 그 전에 이놈 목구멍 좀 틀어막아 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원.”

“으읍! 으으읍!”

그의 신경질적인 어조에 씨익 웃은 툴드가 뚜벅뚜벅 걸어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거구의 대머리가 하나, 달리기가 빠른 메뚜기가 하나. 모두 주군과 에젤로트 영애를 쥐새끼처럼 몰래몰래 쫓아다닌 놈들이었다.

툴드가 턱을 괸 채로 대머리의 재갈을 풀었다.

“으윽… 헉, 헉!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살려 주십시오!”

“이건, 식상하게 주둥이를 풀어 주자마자 살려 달래?”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살려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툴드가 지하실 구석으로 가 바닥의 흙을 긁어모았다.

“이 흙으로 목구멍을 막아 놓으면 좀 조용해지겠지.”

그 말에 기겁한 대머리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 입 닥치고 있겠……!”

끼익.

문이 다시 열린 건 그 시점이었다. 키올은 본능적으로 문을 밀어낸 인물이 주군임을 눈치챘다. 이곳에서 저만큼이나 여유로운 걸음, 느긋한 움직임을 갖는 건 네자르 황태자밖에 없었다.

“키올.”

아니나 다를까, 지하실 내부로 진입한 주군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총 몇이라고 했지?”

“죽인 놈들까지 포함하면 열이 조금 안 될 겁니다. 어림잡아 여덟 명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에젤로트에서 에젤로트 영애를 습격하려 했던 켈 로망드 잔당의 숫자다. 여덟이면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와해된 조직임에도 열 가까이 되는 수가 복수에 이를 갈고 있었다니,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인원도 적잖을 것이다.

“록허드는?”

“안 그래도 잠시 뵈었었습니다. 인적이 뜸한 골목 중심으로 조사하셨으나 큰 성과는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2기사단의 단장, 록허드 에젤로트는 휴가 중임에도 편히 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 여름 축제 기간에 맞춰 연차를 쓴 이유도 에젤로트 영애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키올은 록허드 단장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혈육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을 가만둘 수 있으랴.

“툴드, 너는 거기서 뭘 하는 거냐?”

손안의 흙을 턴 툴드가 몸을 일으켜 키올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대머리가 하도 시끄럽게 굴기에 목구멍을 막아 버리려 했습니다. 이제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요.”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는 주군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며칠간 잠을 줄여 가며 정무를 보았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나마도 에젤로트 영애가 있어서 그가 숨을 쉴 수 있는 거라고, 키올은 생각했다.

주군은 그 누구보다 본인에게 엄격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한 치의 실수도 용납지 않았으며 이는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키올이 목숨을 걸고 보장할 정도였다. 그래도 죽고 못 사는 여인의 키스 세례까지 받았으니, 차후 며칠은 그 감성에 젖어 느긋하게 일 처리를 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참 재밌는 일이었다. 겨우 사랑이란 감정 하나가 주군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럼 목숨이 붙어 있는 놈은 이 둘이 전부인 건가?”

“네. 발견한 놈들 대개가 거칠고 말이 안 통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제가 붙잡은 겁니다. 툴드 저놈은 사정없이 머리통을 깨트리기 바빠서 방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키올을 쳐다보는 툴드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뭐 하러 하냐는 눈치였다.

“좋아, 그럼…….”

나무 의자를 끌고 온 네자르가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는 한참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도 딱히 지치거나 한계에 오른 것 같은 안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군은 입꼬리 위로 올라오려는 웃음을 수시로 참아 내고 있었다. 음. 그래도 행복해 보이시니 참 다행이군.

“친구들, 이제 우리 중요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가볍게 손뼉을 친 네자르가 손짓했다. 그에 키올과 툴드가 한 놈씩 잡아 네자르의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본래 이런 일은 주군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 오직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둘 중 하나는 즉시 안전하게 귀가시켜 주도록 하지. 어디 보자, 자기 어필할 사람?”

그 말에 즉시 손을 든 쪽은 내내 우는소리를 하던 대머리였다.

“워, 워, 원하시는 정보를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켈 로망드의 주둔지가 어디 있고 나, 남은 인원이 어디서 대기하고 있는지……!”

“툴드.”

스릉, 하는 날의 울음과 함께 검이 수직으로 그어졌다. 툴드의 검은 그대로 대머리의 정수리에 박혔다. 대머리는 고장 난 시계처럼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털썩. 쓰러진 사체는 툴드가 질질 끌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경험상, 입이 가볍고 경거망동한 놈에게선 쓸모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없더군.”

그제야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던 메뚜기가 장시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키올은 그 시선에서 살기를 느끼고 네자르 옆에 바짝 서 검을 빼 들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내 입을 열 수는 없을 거다.”

방긋 웃은 네자르가 메뚜기의 말에 상냥한 어조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며, 문가로 다가간 키올이 자물쇠를 잠갔다. 하나, 둘, 셋. 차례대로 잠겨 가는 자물쇠의 쇳소리가 서늘함이 감도는 지하실을 울린다.

“흰 셔츠가 엉망이 돼 버리겠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젤로트 영애는 이런 전하의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으실까?

키올은 차마 긍정적인 답안을 상상할 수 없었다.

***

에든이 돌아왔다. 부가 설명은 필요 없었다. 창 너머로 그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헐레벌떡 침실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그렇게 뛰지 마시래두요!”

“에든이 왔는데 어떻게 안 뛰고 배겨?”

성 앞에는 이미 소백작의 귀성을 축하하는 고용인들이 열로 모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려오셨고, 이어서 록허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릭을 따라 나왔다. 그들 중 나처럼 행복감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하하! 대체 얼마 만에 장남을 보는 건지 모르겠군. 록허드를 기다릴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긴 시간이었어!”

“몇 년 만의 귀성이죠?”

릭의 물음에 아버지가 다시 껄껄 웃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참으로 긴 시간이었지!”

“정말 고대하셨던 거 맞습니까?”

“그게 아버지의 사랑법이야, 릭. 너는 아직도 그걸 모르냐?”

릭과 록허드가 시답잖은 소릴 할 동안 마차가 도착하고 에든이 하차했다. 온 대륙을 여행했다더니, 귀공자처럼 새하얀 피부는 탔고, 백금발은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또한 달라진 점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생동적인 웃음을 짓게 됐다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다 함께 나오실 필요는…….”

“오라버니!”

아버지가 기쁨을 주체 못 하고 손을 건네기 전에 내가 먼저 달려 나갔다.

“다친 곳은 없어? 몸은 건강해? 식사는 잘 챙겨 먹었어?”

작게 웃은 에든이 허리를 굽혀 내 어깨를 마주 안았다.

“하나하나 전부 대답할 순 없지만… 일단 내 몸은 문제없이 건강하단다, 케이트. 그새 아주 훌쩍 컸구나.”

늘 뻣뻣한 책과 커피 향을 풍기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에든에게선 날카로운 바람의 냄새가 났다. 날 품에서 놓은 그가 한 박자 늦게 내밀어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잘 못 지냈다! 아들 두 놈이 출가한 후 소식이 드문드문해 그간 얼마나 걱정이었는지 몰라!”

“다행히 그 둘 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군요.”

“크흐음!”

감정이 북받쳤는지, 하늘이 울릴 정도로 크게 헛기침을 한 아버지가 몸을 돌렸다. 하여간. 마음이 여려도 너무 여리시다니까. 아버지는 본인에게 집중된 시선을 흩트리기 위해 어머니의 등을 쿡, 쿡, 찔렀다. 그에 피식 웃은 어머니가 에든에게로 걸어가 팔을 벌려 안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에든. 건강하다니 이 어미는 그걸로 되었어. 헤이즐 양은 만났느냐?”

헤이즐은 에든의 약혼녀인 마르체프 가문의 여식이었다.

“아니요. 아마 모레 늦은 오후에 성에 도착할 겁니다. 제가 마르체프를 방문하겠다고 말했는데도, 극구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 애는 충분히 그럴 애지. 오늘 저녁은 가족들끼리 단란하게 식사나 하자꾸나.”

“아,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익숙한 분을 뵈어서요. 왜 이곳에 계시나 여쭤보니 성을 방문할 예정이시었다기에 동행했습니다.”

“손님이 오셨다고?”

눈을 크게 뜬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마차를 쳐다봤다. 손님? 누구지? 모두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궁금해하자, 마차로 다가간 에든이 다시 문을 열었다.

“선배님, 내리시지요.”

선배님이라니, 어째 존칭부터 범상치 않은데.

마차에서 내린 인물은 한눈에 봐도 단단한 몸을 지닌 중년의 남성이었다. 고동색의 윤기 있는 머리칼을 멋들어지게 넘긴 남자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곤 쾌활하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에젤로트 백작님, 그리고 부인!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에든과 함께 방문한 에젤로트의 손님은 다름 아닌 황성근위대의 총사령관, 브레이트 탈리야였다. 나만큼이나 놀란 아버지가 뛰듯이 달려가 브레이트를 거칠게 안았다. 누가 보면 헤어진 연인과 10년 만에 재회한 것으로 착각할 만큼 거칠고 격정적인 포옹이었다.

“자네! 이… 이 매정한 남자야! 어찌 그간 얼굴 한 번을 안 비쳐? 나는 하도 소식이 없기에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심장 마비로 죽어 버린 줄 알았네!”

“하하. 매정한 쪽은 오히려 백작님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사람을 멋대로 죽여 버리시다니, 사람 서운하게 말입니다.”

“서운한 쪽은 나겠지! 한 번은 찾아올 만하지 않았는가, 한 번은!”

예상하지 못한 손님에 이어 예상하지 못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버지와 브레이트 경이 본래 저리도 친근한 사이였던가? 그랬다면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5년 전, 기사단 본부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만 해도 브레이트 경은 내가 누구인지 건너 건너 들은 느낌이었다. 나는 애초에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어이, 형님. 어쩐지 예전보다 신수가 더 훤한 느낌입니다?”

“너야말로 5년간 전쟁터에 나가 있더니 커피콩이 되어서 왔구나. 몸은 성한 게 맞냐?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전해 듣기는 했지만, 보이는 상흔이 적잖군.”

걱정스레 이마를 구긴 에든이 록허드의 목과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진 상처를 쳐다봤다. 오른쪽은 아버지와 브레이트 경이 감격의 재회를 나누고 있지, 왼쪽은 형제끼리 여포를 풀고 있지. 양쪽에서 쉴 새 없이 떠느니 귀가 다 아팠다.

“하는 말이 아주 그냥 릭이랑 판박이네요.”

“릭? 그러고 보니 릭, 너는 내가 없는 동안 몰라보게 더 컸구나! 아카데미의 정교수가 됐다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에든의 칭찬이 버거웠는지 몰라도 릭이 답지 않게 부끄럼 타는 표정을 지었다. 우웩. 에든과 가볍게 포옹한 릭이 반가운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직 할아버지 앞에서 자랑하기에는 부끄러운 정도입니다.”

“겸손하기는. 그런데 나와 네가 판박이란 소리는 무슨 의미니?”

“아, 제가 록허드 형님이 귀환했을 때도 형님과 비슷한 말을 했거든요. 커피콩처럼 까맣게 탔다고요. 저래 봬도 많이 나아진 겁니다. 이제는 점점 본래 피부로 돌아오고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커피콩 그 자체였습니다. 머리칼과 피부를 구분할 수 없었어요.”

옆에 선 록허드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코를 찡긋거리며 릭을 밀쳤다.

“넌, 어떻게 된 놈이 내 욕 할 때만 말이 제일 기냐?”

“착각입니다.”

“이것 봐. 내가 토를 달면 또 순식간에 짧아지지.”

둘의 멍청한 만담이 뭐가 그리 웃긴지, 에든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바깥 생활이 얼마나 고됐으면 저런 바보 같은 대화에도 행복하게 웃는담.

“자자,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요! 아무래도 우리 서로 나눠야 할 대화가 많은 것 같군요. 일단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가볍게 휴식을 취하도록 하죠.”

크게 손뼉을 친 어머니가 복잡하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셨다. 그런데 브레이트 경은 무슨 일로 방문한 거지?

성안으로 밀물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따라 나 역시 실내로 들어갔다. 모두 계단을 타고 올라갔기에 나 역시 올라갔고,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기에 나 역시 내 침실로 돌아왔다.

에든을 찾아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지만, 어머니의 말대로 그에게는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했다. 목욕을 하든 침대 위에서 한 바퀴 구르든, 오랜만에 돌아온 에젤로트이니 자신만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고 싶을 테다.

좋아, 케이트. 너도 꽤 성장했구나? 옛날이었다면 에라, 모르겠다면서 찾아갔을 텐데 말이지.

이제 저녁까지 뭘 한담. 릭은 또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테고, 앤드류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축제를 즐기러 떠났다. 거기다가 카론과 릴리에게 보낼 서신도 이미 작성했는데…….

똑똑.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케이트? 잠깐 나와 봐.”

록허드의 목소리였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가 부르셨어?”

“아니. 브레이트 경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아래로 내려와. 널 보고 싶어 하신다.”

“나, 나를? 왜?”

보는 사람 불안하게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린 그가 내 어깨를 밀며 응접실로 향했다.

“왜냐니? 그분을 스승으로 모신다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너 때문에 황성에서 이곳까지 몸소 찾아오신 거잖냐. 가서 농담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 헛소리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의 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굳었다. 정말이야? 그 대단한 남자가 내게 검술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고? 걸음을 늦추며 더듬더듬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나 같은 게 총사령관에게 수업을 받아도 괜찮은 거야? 검 쥐는 법조차 모르는데? 이거, 직권 남용 아니야?”

“직권 남용이어도 넌 누릴 권리가 있으니 얌전히 따라와.”

“사실 우락부락한 카트리나를 기대하고 오신 것 아닐까? 허약한 내 몸을 보시면 실망하실 거야!”

“아무런 상관 없으니 그만 좀 짹짹거려.”

수업을 받게 된 건 나인데 정작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쪽은 록허드였다.

나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의 팔에 질질 끌려 응접실에 도착했다. 브레이트 경을 혼자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그 앞에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아버지까지 가세한 상태였다.

역시 나는 평생의 행운을 네자르에게 쏟은 죄로 불운을 몰려 받게 된 거야. 네자르와 키, 키스를 한 죄로 벌을 받게 된 거라고!

“아, 에젤로트 영애.”

날 알아본 브레이트 경이 몸을 일으키며 아는 척을 했다.

“아까 뵀을 때는 설마설마했습니다. 설마 그 작았던 소녀가 이렇게 자랐을 줄은…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애.”

아버지와 록허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리였다. 록허드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는 또 왜 저러나 몰라. 나는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브레이트 경과 악수를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브레이트 탈리야 경. 종전 후 처음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록허드 경이 워낙 뛰어난 기사인 덕에, 덩달아 목숨을 잘 부지하고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오라비를 두셨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오라비라니! 단장 노릇을 하던 브레이트 경과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헛웃음을 고이 넣어 두었다.

“아가, 듣자 하니 네가 브레이트 경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 했다더구나. 맞느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게야?”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기 무섭게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거금을 주고도 못 받는다는 총사령관의 수업을 받아 볼까?

“대단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근래에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거든요. 한데 설마 브레이트 경께서 허락해 주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제게 시간을 쏟으시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으신가 해서…….”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 말이었고, 다행히 브레이트 경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아깝지 않습니다. 말이 총사령관이지, 사실 일은 아랫사람이 다 하고 자리를 지키는 게 전부이니 말입니다.”

신빙성 있는 소리였다. 브레이트 경의 말대로 기사단장직에 오른 록허드는 한낱 평기사였던 시절보다 귀가하는 일이 드물었다. 와도 대개 자정이 가까워지는 밤이었고,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칼같이 일어나곤 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겠네.

“하아…….”

한데 내 착각이 아니라면, 아까부터 계속 긴 한숨이 들려오고 있었다.

“하아……. 이 아비는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꿈에서도 상상 못 하고 있었단다. 마음고생이 참 심했던 모양이구나, 케이트! 알아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비통한 목소리로 속마음을 뱉은 아버지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음, 아무래도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인데. 힐끔 록허드를 쳐다봤다. 난감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던 그는 커다란 목청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아하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시죠, 아버지. 케이트는 단순히 검술에 관심이 생겼을 뿐입니다. 네자르와 제 곁에 오래 있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 모양이에요. 그 외에는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록허드의 말이 사실이니, 케이트?”

근심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그 누구도 아니란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괜찮단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이 아비에게 말하렴.”

부담스러웠지만 동시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려 하네.

“백작께서 영애를 아주 귀히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이거, 혹여라도 영애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제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군요.”

브레이트 경의 어투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마침 그와 아버지의 관계가 궁금했기에 자연스레 대화 주제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런 걱정일랑 마세요. 순전히 저의 어리숙함을 걱정하시는 거니까요. ……한데, 경과 아버지는 퍽 가까운 관계로 보이네요. 친우 사이이신 건가요?”

홍차를 후루룩 넘긴 브레이트 경이 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친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에젤로트 전 백작님, 그러니까 영애의 조부님 되시는 분의 후원을 받아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백작님은 당시 저의 선배이자 형님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었죠.”

브레이트 총사령관이 평민 출신이었다니, 이는 단순히 놀라운 것으로 모자라 기함할 일에 가까웠다.

켈 로망드처럼 상상도 못 할 거금을 소유한 게 아니라면 평민은 자작 이상의 지위를 얻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켈 로망드도 엔테라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었기에 남작 작위를 얻을 수 있었다.

한데 무려 황성근위대의 총사령관이라니? 이례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대 총사령관 중에서도 매우 대단한 축에 속한다더니, 단순히 띄워 주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도 기억나는군. 경이 황성근위대 기사단장직에 올랐을 때, 그 누구보다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말이야. 총사령관직에 올랐단 소식을 들으셨다면 놀라 기절하셨을 게 분명해.”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록허드 경이 황성근위대에 입단했던 날도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성숙해진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의 모습까지 보게 되는군요. 시간이 참 야속합니다.”

“그럼 하루라도 일찍 날 찾아오지 그랬나?”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귀환 후 독한 열감기로 꽤 오래 앓았습니다. 그 탓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었죠.”

아버지와 브레이트 경의 이야기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려 5년 만의 재회라는데,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겠지. 나는 적절한 시기에 맞춰 록허드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이 정도로 이야기를 끝내면 되는 건가?

“어울리지 않게 오늘따라 순순하구나, 케이트.”

내 침실 앞까지 따라온 록허드가 얄미운 소리를 했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럼 브레이트 경에게 가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할까? 그러길 원하는 거야?”

한 수 접고 돌아갈 줄 알았으나, 록허드는 문틀에 선 자세 그대로 날 응시했다. 단전 깊숙한 곳으로부터 불편함을 자아내는, 굉장하다 못해 상당히 불쾌한 시선이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이어서 나온 록허드의 대답은 내 심장을 덜커덩 떨어뜨리다 못해 반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너, 어제 네자르한테 프러포즈했냐?”

조금만 더 긴장을 늦췄으면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록허드의 의미심장한 얼굴, 아니 웃음은 여전히 나의 눈동자를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지만,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거길 다시 졸졸 쫓아가?”

제대로 된 말도 못 하고 금붕어처럼 입술만 뻐끔뻐끔 열자, 눈을 부릅뜬 록허드가 지치지 않고 쏘아붙였다.

“어머니가 보셨다면 기함을 하다 못해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치셨을 거다. 아무리 네자르 곁이 든든하다고 해도, 거길 따라가선 수십 명이 보는 앞에서 키스를 해?”

지극히 개인사였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무작정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여간 저 얌체 같은 놈은 사람 기분 망치는 데 뭐 있다니까.

변명도 못 하고 어깨만 움츠리고 있자, 퍽 불쌍해 보였는지 작게 한숨을 쉰 록허드가 말을 이었다.

“참고로 그 사이에는 나도 있었다, 케이트.”

……뭐?

“당장 꺼져!”

쾅!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나는 록허드가 다신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쿵쿵 걸음을 옮겨 소파 위에 엎어졌다.

에젤로트로 귀성한 에든과 나의 프러포즈를 흔쾌히 받아 준 네자르. 록허드가 입술을 나불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최상이었다.

설마 어머니께 고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상상만 해도 최악의 기분이었다. 록허드가 입방정을 떤다면 그 즉시 어머니께선 기쁨의 환호를 내지르실 게 분명했다. 동시에 꼬치꼬치 캐물으실 테다.

똑똑.

어디서 했니? 언제 했니? 얼마나 오래 했니? 그 이상은 어디까지 나갔니? 그렇게 되면 성의 모든 사람이 나와 네자르가 입을 맞췄단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맹세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한 수치는 다시없을 거란 걸!

똑똑.

“……저게 정말.”

나는 그칠 줄 모르는 노크에 콧김을 내뿜으며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또 뭐야, 이 망할 족제비 같은 놈아! 내가 분명 꺼지라고 했지?”

록허드임이 분명했을 방문자는, 내가 무심코 들어 올린 시선보다 조금 더 아래에 위치했다. 까만 머리칼과 음영이 진 검홍색 눈동자. 그에 더해 보기 좋게 일그러진 눈가까지.

“나한테 말한 거냐?”

앤드류였다. 그의 등장에 잠시 주춤하다 햇볕에 그을려 붉게 달아오른 얼굴 근처를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워낙 표정 변화가 미미했기 때문에 진실 여부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너도 봤어?”

내 물음에 당황했는지, 그가 다소 뒤늦게 반응했다.

“뭐?”

“내가 분수 광장에서 네자르와 키스한 걸 봤냐고.”

없지? 없어야 할 거다. 앤드류마저 그 광경을 봤다면 나는 정말…….

앤드류의 표정이 한겨울 펜스 아래로 고인 서리처럼 차갑고 날카롭다. 그는 한심함과 짜증이 짙게 뒤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미친 거냐? 그딴 건 보지도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고, 볼 의향도 없어. 너는 꼭 입을 열면 사람 비위 상하는 소리만 해 대는군.”

전례가 없을 정도로 거친 폭언이었으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아, 다행이야. 나는 또 성에 전부 소문이 났을까 봐 겁이 나서…….”

“소문은 다름 아닌 네가 내는 것 같은데.”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묻는 동시에 머릿속 구석으로 깊게 묻어 놓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시간이 남으면 예절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었지. 그러나 눈앞의 앤드류에게선 그럼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승마복에 가죽 부츠까지 챙겨 신은 모습은 예절 수업과 한참이나 멀게 느껴졌다.

“사냥.”

“사냥?”

“선택해. 내게 가축 취급을 받으며 수업을 들을지, 아니면 너른 초원을 누비며 사냥을 할지.”

아니, 그건 답이 이미 정해진 갈림길이잖아! 나는 대뜸 왜 사냥을 하려는 거냐고 묻지도 못한 채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지금 당장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 아래에서 편히 기다려.”

“저 새는 뭐지?”

“울새.”

“그럼 저 새는?”

“촉새.”

네자르가 날 가르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카데미까지 졸업했으면서 새의 이름도 모르는 거냐 묻고 싶었으나, 없는 인내심을 긁어모아 그러려니 여기기로 했다. 황성과 아카데미에 박혀 살았으면 모를 수도 있지. 나도 그랬잖아? 마음을 편히 먹으니 더 이상 화가 일지 않았다.

“촉새는 이 산에 몇 마리나 살지?”

“알을 깐 만큼.”

“알? 알을 언제 까는데?”

“이제 막 부화할 시기야. 삐약삐약 우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지? 아기 새가 배고프다고 우는 거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앤드류가 말의 머리를 돌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말이 사냥이지, 정작 밖에 나온 뒤로 총알 한 발 사용한 적 없었다. 심지어 그의 총이 장전된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앤드류는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 줄 사람이 필요한 건가.

“축제는 잘 즐겼어? 오늘 오전에도 나갔다 왔다며.”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 위를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뭐, 나쁘지는 않더군. 제도에는 저 잘난 줄 알고 소리치며 악을 지르는 놈들투성이인데, 에젤로트에는 적어도 그런 경우 없는 놈들이 보이지 않았어.”

“닭꼬치는 먹어 봤어? 우리 축제 대표 노점 음식이 바로 닭꼬치거든.”

“그런 불결한 음식은 줘도 안 먹어.”

얘는 어쩜 네자르와 같은 소릴 해도 더 까칠하담.

“어휴. 그래, 너 참 잘났다. 제도에 저 잘난 맛으로 산다는 놈이 딱 널 가리키는 소리였네.”

코웃음을 친 앤드류가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뭐야, 아직도 물어볼 게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너, 에자렛을 본 적 있나?”

다행히도 그의 이번 질문은 조류와 지극히 관계없는 물음이었다.

“아니.”

내 대답에 가슴팍 안쪽을 뒤진 그가 조약돌보다 더 큰 크기의 펜던트를 꺼냈다.

“그건 좀 의외군. 에자렛은 꿀을 바른 것처럼 진한 금발에, 밝은 벽안을 가지고 있어.”

나는 코앞까지 내밀어진 그의 펜던트를 잡아 열었다. 바람에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 일 만큼 유약한 인상의 여인이 보인다.

“생김새 정도는 나도 알아.”

황후가 온실의 화초처럼 고이 기른다더니. 카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눈에 띄는 미모다.

“갑자기 황녀 전하의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네가 황성으로 들어가게 되면 필히 보게 될 테니까. 미리 알아 두라는 의미지.”

베풀어도 하필이면 그런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다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펜던트를 돌려줬다.

가족의 초상화가 담긴 펜던트는 대개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나 역시 열두세 살 무렵엔 가족 초상화가 담긴 펜던트를 곧장 들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스쳐 지나간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그 속에 네자르의 펜던트는 없었다.

이제 막 확인한 앤드류의 물건에도 고작 황녀의 얼굴이 담긴 게 전부이니, 현 황가가 얼마나 콩가루 집안인가에 대해선 이 이상 논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우리 어머니와는 어때. 분명 살가운 사이는 아닐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 기분이 묘해졌다. 설마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려는 의도인가. 이렇게 갑자기?

“인사를 못 드린 연회가 더 많아. 보통은 금방 돌아가시니까.”

또한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 연회의 수도 적잖았다. 내 대답에 앤드류가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께서는 이것저것 손을 대고 계신 일이 많았어. 건축 사업, 레스토랑 사업, 문화 사업까지 제도 곳곳에 어머니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지. ……전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아먹었지만.”

엄마 자랑인가 싶었는데, 저런 식으로 마무리를 하면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에자렛은 비슷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달라. 특히 어머니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몸에 밴 듯 익숙하신 분이시지. 강박증에 결벽증, 우울증, 수면 장애까지 겹쳐 옆에 서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어. 웬만하면 가까이하지 말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지내는 게 나을 거다. 형님도 그리 말씀하시겠지만.”

“너, 어디 가?”

그제야 한참 정면을 향한 채 기계처럼 움직이던 턱이 멈추었다. 오늘의 앤드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애당초 평범한 인물도 아니었지만, 지금의 그는 유독 더 위태로운 분위기였다.

앤드류가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자 숲 속엔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내가 뭘 잘못 묻기라도 한 걸까? 대화 주제를 옮기기 위해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성은 어떻게 됐어? 그 버려진 유령의 성 같던 건물 말이야. 이제는 새것처럼 깨끗해?”

이 이상으로 들어가면 숲지기의 집이 나온다. 좋지 않은 기억을 담은 장소였기에 앤드류의 앞을 가로막고 말의 머리를 돌렸다. 인상을 한껏 찌푸리던 그는 얌전히 나를 따라서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깨끗하겠지.”

꼭 남 일 대하듯이 성의 없는 어투였다.

“대답이 뭐 그러니?”

“근래에 황성에서 지낸 날이 적으니까. 잠을 자더라도 에자렛의 성에서 잤고, 아카데미 동기를 방문한 적도 많지. 반 이상은 퇴짜 맞았지만.”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성에 사는 주제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헤매다니. 예전이었다면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듣고 넘겼을 것이다. 한데 그 상대가 앤드류라고 생각하니 익숙하지 않은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네자르 때문이야?”

돌이켜 보면 유령 성에서의 밤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네자르가 보낸 자객이냐고 물었었지. 네자르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이자, 또 다른 황위 후계자인 앤드류를 긴 시간 위협해 온 걸까. 목숨을 앗아 가기 위해 자객까지 보내며.

감히 내가 무어라 입을 열 입장은 아니었다. 앤드류도 딱히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을 정리하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이, 카트리나. 우리, 내기를 하나 하자.”

뜬금없는 제안에 말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었다.

“내기? 이렇게 갑자기?”

“종목은 말 타기. 목표는 정원 앞쪽에 자리한 까만 벤치까지. 네가 이기면 방금 한 질문에 답을 주도록 하지. 대신 내가 이기면 없어.”

“……그걸로 끝이야? 너는 뭐 안 걸어?”

씨익 웃은 그는 내 말에 대답도 않고 말의 허리를 걷어차 달려 나갔다.

“이랴!”

아니, 내기라며? 야비하게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저 혼자 달려가?

나는 이를 악물고 앤드류를 따라 산 중턱을 내려갔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 위의 흙과 돌이 튀어 허공으로 흐트러진다. 하나 아무리 기를 써도, 그와 나의 격차는 산을 내려와 초원에 다다르기 전까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헉, 헉…….”

이딴 게 무슨 내기야!

먼저 도착한 앤드류는 어느새 말에서 내려 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편법을 쓴 주제에 저렇게 당당하다니.

“너희 성은 평지가 드넓어서 좋아. 관리도 잘되어 있어서 달리기에 무리도 없고.”

“그래? 그래서 록허드가 승마에 미쳤던 건가.”

그 앞에 천천히 멈춰 모자와 장갑을 벗었다.

“어젯밤에 형님이 찾아오셨다고 했나?”

“아, 응.”

“네가 정말 황후에 오를 운명이라면, 형님은 분명 오늘 저녁에도 에젤로트를 방문하실 거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소리 그 자체였다. 내가 황후에 오를 운명이라면, 이라고?

숨을 가다듬고 안장에서 내렸다.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선선한 바람에 휘날렸다.

“왜 네자르가 온다는 거야?”

그 역시 이마가 땀으로 축축했다.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한 앤드류가 여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아직 이곳에 있으니까.”

이 얼마나 자존감 높은 발언인지. 그가 이곳에 있기에, 내가 황후가 될 운명이라면 네자르가 올 것이라고?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소리였다. 그리고 앤드류의 말대로 저녁이 가까워질 즈음 세 번째 방문자가 찾아왔다. 네자르였다.

그는 최근 보았던 모습 중 가장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짙은 남색 정장에 상아색 셔츠, 그리고 황가의 화려한 사자 문양이 박힌 커프스가 손목에서 보란 듯이 번쩍였다.

승전 축하 연회에서와 달리 훨씬 차분하게 정돈된 분위기다. 당시에는 막 종전된 시기였기에 아무래도 어투와 움직임 하나하나에 거칠고 날카로운 기세가 묻어 있었다. 지금의 그는, 뭐라고 해야 할까. 직위 그대로 황태자다웠다.

“설마 이 시간에 전하께서 찾아오실 줄이야. 별안간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말만 들으면 따지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버지의 표정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반가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현재 카발 제국은 네자르가 황제 폐하를 대신해 정무를 보는 실정이니 재상인 아버지로서는 매일같이 보는 얼굴일 테다. 그런데도 그렇게 반가우신가?

“백작과 나눠야 할 이야기도 있고, 축제도 시작된 겸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시죠? 괜찮으셨으면 좋겠군요.”

싱글싱글 웃으며 나온 뻔뻔한 말에도 아버지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셨다.

“하하! 괜찮지 않다면 돌아가실 겁니까? 안 그래도 장남인 에든이 이번에 귀성하여 꽤 성대한 식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지체 말고 들어가시지요.”

“제가 시기적절하게 찾아온 것 같군요.”

아버지가 등을 돌린 그 찰나에 내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네자르가 허리에 팔을 둘러 잡았다.

“안녕, 케이트. 오늘따라 더 예쁘네.”

착각이 아니라면, 내 뺨에 분명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심지어 ‘촉’도 아니었다. ‘쪽’이었어, ‘쪽’! 나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며 타오르는 얼굴을 열심히 부채질했다.

“늦게 배운 연애가 무섭다더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날 이제 신경도 안 쓰는군.”

불만 가득한 목소리의 록허드가 바로 옆에 서서 투덜투덜 입을 놀렸다. 나는 그를 향해 한 소리 해 주었다.

“연애도 안 해 봤으면서 아는 척하기는.”

“안 하기는 누가 안 해. 이 오라비가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모르는구나.”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는 거야? 벌써 수년은 흐른 이야기야, 록허드. 추하게 과거의 영광에만 매달리지 마.”

내 공격적인 어투에 충격을 받았는지, 성으로 들어가던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애새끼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너는 업어 키운 친오라비에게 할 소리가 그런 타박밖에 없더냐?”

“날 업어 키운 게 너니? 네자르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쳐 주고 그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응접실 앞에 선 아버지가 힐끔 나의 얼굴을 보곤 네자르를 향해 물었다.

“황자 전하께서도 네자르 전하의 방문을 알고 계십니까?”

네자르의 까만 뒤통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나 따로 언질을 준 적은 없습니다.”

“앤드류 전하께서는 지금 침실에 계실 겁니다.”

사라진 록허드를 찾기 위해 주위를 훑는 도중, 계단 위에서 끼익 우는 나무판자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1층으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처럼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는 우리 집안 식구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요. 저 여기 있습니다, 형님.”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온 앤드류가 네자르 앞에 섰다. 이렇게 딱 붙어 있는 카발 형제의 모습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앤드류와 면식이 없던 시절에는 단순히 조금 더 성숙하고 말고의 차이인 줄 알았으나, 이제 와 다시 보니 둘의 인상이 확연히 달랐다.

당시에는 앤드류가 훨씬 날카롭고 냉랭한 분위기를 가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하나하나 상세히 뜯어보니 정반대인 것이 아닌가.

“에젤로트로 오실 줄 알았으면 함께 움직일 걸 그랬습니다. 전 그것도 모르고 혼자 헐레벌떡 왔지 뭡니까.”

앤드류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원래 저렇게 딱딱한 말투였나?

네자르가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작게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도 하는구나. 안 그래도 백작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너도 함께 올라오도록 해라. 록허드?”

어느새 유령처럼 돌아온 록허드가 더위를 참지 못하고 외투를 벗으며 대답했다.

“왜?”

“너도 올라와. 중요한 이야기이니 괜히 늦장 부리지 말고.”

한숨처럼 말한 네자르가 아버지를 따라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내 옆을 지나치면서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 그 내용이 무언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세 명의 남자가 올라가고, 나 혼자 1층에 덩그러니 남았다.

앤드류는 내가 황후가 될 운명이라면, 네자르가 다시 에젤로트를 찾아올 것이라 했다. 설마 중요한 이야기라는 게 그것과 관련된 걸까. 하지만 분명 혼인과 관련된 이야기일 리는 없었다. 그런 중사는 나도 함께 논의해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아가씨? 여기에 가만히 서서 뭐 하세요?”

“……아니야.”

멍한 정신은 데이지의 한마디로 맑게 트였다. 역시 뭔가 한없이 답답해. 앤드류와 사냥을 가장한 산책을 했을 때부터 이 답답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데이지.”

“네?”

“오라버니는 뭐 하시니?”

내 멍청한 표정에 걱정이 일었는지,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던 데이지가 대답했다.

“에든 도련님이요? 아마 개인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딱히 업무를 보지는 않으신 것으로 알아요.”

그녀의 말을 믿고 성큼성큼 걸어 에든의 집무실 앞에 섰다. 좋아, 안 그래도 고구마를 한 움큼 집어 먹은 듯 속이 답답하고 짜증 났는데 잘됐어. 현명한 에든이라면 시원한 답안을 내주지 않을까? 적어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사람 속 뒤집는 소릴 하는 릭보다는 더!

똑똑.

“오라버니! 나야, 케이트. 들어갈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덜컥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그는 의자에 편히 앉아 벽에 걸린 유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 어머니가 경매에서 매입해 온 명화였다.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에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제 옆자리를 툭, 툭 쳤다. 앉으라는 의미였다. 나는 군말 없이 문을 닫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림 어때? 어머니가 벼르고 벼르시다가 매입하신 작품이야.”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으냐.”

“나? 난 그림 볼 줄 몰라. 그냥…….”

실눈을 뜨고 작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내 눈에는 파란 것이 바다요, 빨간 것이 노을이었을 뿐이다.

“그냥 파랗고 빨갛네.”

내 말에 에든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나 정확해 트집 잡을 구석이 없군. 그래, 너도 이 오라비와 함께 그림을 감상하러 온 거냐?”

“아니. 조금 복잡한 고민이 있는데, 오라버니가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예전이었다면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하는 마음으로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닌 세계 최고의 미남을 손에 얻은 이상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멍청히 관망하기만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백치 황후를 옆에 뒀다는 오명만큼은 절대로 네자르에게 씌우고 싶지 않았다. 좋아,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똑똑해지는 거야!

“내가 황후가 될 운명이라면 오늘 네자르가 성에 방문할 거라는 소릴 들었어. 그런데 나는 이 말이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누가 그런 소릴 했지?”

날 바라보는 에든의 시선이 더없이 진지했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이 저녁에 가까워지는 햇빛을 받아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이걸 말해, 말아?

“앤드류 황자.”

뭐, 굳이 비밀로 부쳐 둘 필요가 있을까. 내 대답에 놀랐는지 에든이 눈을 크게 떴다.

“앤드류 황자가 말이냐? 초면에 그런 소릴 하시든?”

“으음, 그건 아니야. 그냥 어쩌다 보니 서로 아는 체하는 사이가 됐는데…….”

“그 아는 체가 어느 정도이길래?”

어느 정도냐고? 적절한 답을 내놓기에 너무나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상담하는 과정에서 대충 대답할 순 없었기에 더듬더듬 설명을 이었다.

“둘이 늦은 밤 황성에서 말을 탄 적도 있고, 사냥 대회 때는 내가 선생 노릇도 했어. 음, 또 뭐가 있더라……? 맞아. 오늘도 같이 산책 갔었어. 이번에는 내가 조류 선생이 되어 주었지. 걔는 어떻게 된 애가 울새랑 촉새도 모르더라고.”

에든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져 간다. 그야말로 고심 속 고심에 빠진 얼굴이었다. 내가 확실히 말을 좀, 묘하게 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엄청 친한 사이처럼 묘사했으니.

“의외의 일이구나. 너와 황자는 절대 가까워질 일이 없다고 봤는데…….”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재빨리 반문했다.

“어째서?”

에든은 무언가를 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민에 빠진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설마 여기서 말을 끊으려는 건 아니겠지. 이럴 땐 내가 마냥 어리지 않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 나는 어리숙한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을 덧씌웠다. 얼마 안 가 에든이 입을 열었다.

“네가 알지 모르겠다만… 본래 폐하의 총애는 전적으로 앤드류 황자를 향해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꽤 다양한 추측이 있으나 굳이 네게 말하지는 않으마. 중요한 건 폐위 위기에 처해 있던 황태자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분위기를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야.”

전혀 몰랐던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엉덩이가 벌떡 들릴 만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전하가 믿었던 주변이 별거 아니었을 수도 있죠.’

‘방금 좀 울컥했으니까 대답해 줄게. 내 아버지라고 돌려 말하면 되는 건가?’

그 말의 저의가 이것이었구나.

“폐하께서 위중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제위의 대부분이 황태자 전하에게로 넘어간 상태겠지. 그러니 이제는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거란다, 후계자의 자리를.”

잔인한 이야기다. 후계자 자리의 정리라니, 누가 들어도 앤드류와 에자렛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혹시 네자르가 치부라 여겼던 시절이, 황태자 취급을 받지 못했던 과거를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우리 집안이 확실히 화기애애한 편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음에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평소에 앤드류 전하와 관련된 소문이 돌거나, 특이한 행동을 보이시지는 않았니?”

“소문은 잘 모르겠어. 듣기에는 근래에 이곳저곳 돌아다녔다고 하더라.”

“앤드류 전하의 행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으셨겠지. 아마 꽤 답답하셨을 거다. 그러던 와중에 에젤로트로 오셨으니……. 네자르 전하는 아마 네 신변이 걱정되셨을 거야. 절벽에 몰린 상대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굳이 펜던트를 보여 주려 하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앤드류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는 눈치였다.

내 표정이 꽤 우울해 보였는지, 허리를 숙인 에든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야. 록허드가 앤드류 전하를 모셔 왔다고 들었다. 다른 이야기가 오갔을 수도 있지. 아니면 순전히 손 위에 두려는 선택일 수도 있고.”

억 소리가 날 정도로 한 번 꽉 안은 그가 품에서 나를 놓았다. 릭의 말대로 가까이에서 본 에든의 피부는 예전과 비견되지 않을 정도의 건강한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네자르 전하는 오신다더냐?”

“몰랐어? 이미 왔는걸.”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곧이어 나와 에든의 얼굴을 확인한 시녀가 밝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내 답답함의 원인은, 아무래도 앤드류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기인한 것 같았다. 물론 내가 갑작스레 그의 인생에 끼어든다고 하여 무언가 대단히 변화하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다만 조금 아쉬움이 들 뿐이었다.

이게 에젤로트에만 박혀서 느긋하고 단란하게 살아온 나의 말로인가? 혹시 네자르가 나중에 내 몇 없는 친우들까지 멀리 보내 버리려 하면 어쩌지. 그때도 가만히 앉아 지켜봐야만 하는 걸까.

“북벌 승전의 주역들과 함께 식사하게 될 줄이야. 이거, 굉장히 영광입니다.”

에든의 말에 입 속으로 포도주를 들이붓고 있던 브레이트 경이 크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소백작의 말씀이 정확하군요! 비록 이 노기사는 앞으로 황성에 박혀 젊은이들의 등골만 빼먹을 예정입니다만, 네자르 전하와 록허드 경을 생각하면 제국의 앞날이 아주 창창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전 각하의 정년퇴직 전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괴롭힐 건데요. 여생을 느긋하게 보낼 생각일랑 마시지요.”

록허드의 딴지에 브레이트가 한심한 표정이 되어 쯧쯧 혀를 찼다.

“자네는 에젤로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해. 만약 다른 출신이었다면 국물도 없었어.”

“어이, 네자르 전하. 공정하기로는 제국에서 가장 이름난 총사령관께서 인맥 하나 때문에 날 좋게 봐 주신다지 않습니까. 이거, 문제 제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자르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야제에 만났을 때보다는 안색이 훨씬 좋아 보여 마음이 놓였다.

“자꾸 딴지 걸지 말고 그러려니 여길 줄도 알아라. 네가 그렇게 꼬박꼬박 반응해 주니 총사령관께서 널 보면 못 괴롭혀 안달이잖아.”

그 말에 저녁 식탁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하. 나도 따라 웃으면 되는 거겠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느라 아까부터 광대가 심심찮게 아려 왔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다는 군대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 학연 지연으로 모자라 인맥까지 한데 모이니 재미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애피타이저로 나온 연어 샐러드를 잘게 부수어 입에 넣었다. 대각선 방향으로 멀찍이 앉은 앤드류도 나와 똑같은 걸 보니 여간 지루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트.”

무슨 기분으로 여기에 앉아 있는 거려나.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다.

“얘, 케이트!”

“아, 네.”

번쩍 정신이 들어 손에서 포크를 놓고 어머니를 쳐다봤다. 하하. 타박하는 얼굴에 대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멍하니 있니?”

“음. 별생각 안 했어요.”

“각하께서 마상 대회 구경을 가는 게 어떠냐 물으셨단다.”

그 말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브레이트 경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손에서 와인잔을 놓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에젤로트는 단 한 번도 마상 대회에 참석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록허드 경 역시 이제껏 대회 우승자의 명예보다는 영지로 돌아가 휴식하는 것을 택했었지요.”

에젤로트처럼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 마상 대회에 영지의 기사조차 출전시키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유야 뻔했다. 가문의 일원이 다들 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서 그렇지.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검술 수업을 받고 싶다면 마상 대회 구경을 가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검이 아닌 창을 휘두르는 대회이나 기본적인 뿌리는 동일하니까요.”

“그럴게요.”

망설임 없이 답하자 브레이트 경은 물론 어머니도 의외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먼저 제의했으면서 놀랄 건 또 뭐람.

“대신 앤드류 전하와 동행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지금 전하께서 저의 예절 교육을 맡아 주시고 계신데, 제가 황실 예절에 특히 더 까막눈이거든요. 이왕 배우는 거 제대로 배우고 싶네요. 검술 수업과 같이요.”

내 한마디를 기점으로 점차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공기가 얼마나 고요하게 가라앉았는지,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사이 마주친 앤드류의 시선은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의 냉랭한 어투가 생생하게 재생됐다.

‘너, 미쳤냐?’

으음. 확실히 내 생에 이보다 더 파격적인 발언은 없었던 것 같아.

“허락해 주실 거죠?”

나는 네자르를 바라보며 밝게 웃음 지었다. 마치 그 외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는 듯, 평소처럼 밝고 화사하게.

“앤드류 전하만큼 저에게 황실 예절을 잘 가르쳐 주실 분도 또 없으실 거예요.”

네자르는 나를 한없이 아이 취급하는 구석이 있다. 켈 로망드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산이라는 대문짝만 한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실릴 때까지, 내게 입을 싹 닫고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내 방식대로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앤드류가 내게 보인 호의가 거짓이 아니라면 그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이지. 네 부탁이라면 뭐든, 케이트.”

꿀 바른 초콜릿처럼 부드럽게 웃은 네자르가 내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어라라, 이렇게 쉬이 허락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나는 기분 좋게 알맞은 크기로 썬 연어를 꿀꺽 삼켰다.

“고마워요!”

네자르는 아이의 재롱이라도 보듯 사랑스러운 눈길로 날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지치지 않고 불타는 앤드류의 눈길을 무시하며 메인 디쉬로 나온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었다.

“아, 마침 황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쯤이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인 네자르가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게 아닌가.

“이제 슬슬 케이트와 저의 혼인 일정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식탁에는 잠시간 정적이 돌았다. 뭐? 나는 체면도 못 차리고 입을 떡 벌린 채 숨을 멈춰야 했다. 아니, 물론… 내가 프러포즈를 하긴 했으니까. 그래, 슬슬 결혼 일자를 잡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짝짝짝! 어디선가 갈채가 들린다 했더니, 부모님에게서였다.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신 어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네자르에게 물었다.

“케이트에게 프러포즈하신 건가요?”

“아니요. 받았습니다.”

당당히 대답하는 네자르의 음성은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정말, 하필이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돌연 당시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더 열과 힘을 다해 스테이크를 썰어야 했다.

“그게 사실이냐, 케이트?”

고개를 드니 ‘역시?’, ‘역시.’라는 미묘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릭과 록허드가 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요즘 시대에 남자만 프러포즈하는 줄 알아? 너희들이 그래서 연애를 못 하는 거야.”

눈을 부릅뜨고 응수하자 둘째와 셋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내 옆자리에 앉은 에든만 기분 좋게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음음. 역시 우리 딸답구나! 이 아비가 딱 너만 했을 때도 카샤가 먼저 결혼하자며 반지를 내밀었었지. 나 같은 답답이의 프러포즈를 언제까지 기다리겠냐며, 닥치고 받으라는 으름장을 놓았었어.”

이런 말을 하면 다소 아쉽게 여기실 수도 있지만, 놀라울 일이 전혀 없는 일화였다. 상대가 어머니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우리야 우리고, 전하께서는 또 다르시겠죠. 설마 당신처럼 소심하게 뒤로 미루다가 참지 못한 케이트가 내질렀겠어요? 전하와 당신을 같은 선상에 두지 말라구요.”

아니다. 네자르는 아버지처럼 소심하게 뒤로 미루다 입을 떼지 못한 게 맞았다. 물론 첫 번째 프러포즈는 네자르의 입에서 나왔으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는 네자르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니는 네가 세상 최고의 사내대장부인 줄 알고 계시나 봐.”

입꼬리를 올린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군.”

“괜찮아. 네자르의 체면을 위해서 내가 조용히 입 닫고 있을게.”

네자르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턱을 떨며 입 안의 물을 힘겹게 삼켰다. 곧 눈가로 닿아 오는 입술 역시 쿡쿡 웃음기를 담은 채였다. 어째 입 맞추는 간격이 점차 좁혀지는 듯한 기분이다. 정작 나는 여전히 부끄러운데!

“입 닫고 있지 않아도 좋아. 케이트 너는 평생을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돼. 내 옆에서라면.”

마지막 문장 때문인지 등 뒤로 옅게 한기가 이는 기분이었지만, 아마 착각이려니 싶었다. 나는 그와 마주 웃으며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넘겼다.

식사는 예상보다 꽤 이른 시간에 끝났다. 네자르와 아버지가 다시 바삐 집무실로 돌아갔기에 나는 또 침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리 긴 시간을 대화하는 걸까? 고민해도 나오는 답이 없었기에 얌전히 잠들 준비를 했다.

똑똑.

“……누구세요?”

갑작스러운 노크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인기척과 달리 침실 앞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닫혀 있던 문틈에 꽂혀 있었는지 얇은 종이 하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깥으로.」

서, 설마 네자르인가? 툴드가 하녀와 그랬듯이 한밤의 밀회를 나누려는 거야?

하지만 자세히 살필수록 네자르의 필체가 아님에 확신을 얻게 된다. 네자르가 아니라면, 내게 이런 쪽지를 남길 만한 인물이…….

“앤드류. 역시 앤드류밖에 없지.”

카디건을 걸치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다들 술에 취해 깊은 꿈나라로 떠난 덕인지 큰 문제 없이 나갈 수 있었다.

앤드류는 정원 초입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먹이라도 내지를 듯 흉흉한 기세였다.

“안녕? 좋은 밤이지, 앤드류.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줄래? 지금 좀 졸린 상태라.”

짐짓 여유로운 척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물론 앤드류의 반응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웠다.

“너,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냐, 라. 그냥 날 위해서인데? 어떻게 하면 이 말을 더 그럴싸하게 꾸밀 수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좋은 대처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앤드류처럼 똑똑한 남자를 구슬릴 만큼 수준 높은 언어 구사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되면 답은 직진이다.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들었지? 나는 이제 곧 황성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황태자비 수업을 받아야 하거든.”

상상만 해도 토 나오는 일이었다. 황태자비 수업이라니,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네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뭔지 알아. 에자렛 황녀가 걱정되었던 거지? 너마저 떠나면 그분 혼자 도와주는 이 한 명 없이, 황성에 고립될 테니까.”

사실 반쯤 확신할 수 없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이왕 아는 척한 김에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술술 말을 이었다.

“네가 날 도와만 준다면 나 역시 황녀 전하를 도와 드릴 거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때?”

당연한 일이었지만, 앤드류의 반응은 싸늘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제국 정세에 쥐뿔도 관심 없는 네가 어떻게 에자렛을 돕겠다는 거냐?”

북극의 빙하보다 더 냉랭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애초에 앤드류의 도움을 받으려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어머니께서는 사람을 얻으려면 더없이 진실 된 마음을 보여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거짓 하나 없이 순수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몰라. 이제 생각해 보려고.”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앤드류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랭했다.

“……괜히 시간 낭비만 한 것 같군. 세상은 네 생각만큼 가볍게 움직이지 않아, 카트리나. 내일 해가 뜨면 형님께 없던 일로 해 달라 말씀드릴 거다. 너도 그렇게 알아 둬.”

미련 없다는 듯 곧장 자리에서 일어선 앤드류가 정원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냉정하기는. 역시 어머니의 말만 너무 맹신하면 안 되는 건가? 어머니는 현명하셔서 무슨 일이든 쉬이 처리하시는데, 난 아니잖아. 그래도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벤치 등받이에 팔과 턱을 괸 채 그의 등에 대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오, 그래? 마음대로 해. 나야 너 말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고, 굳이 황녀에게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디서 어떤 꼴을 당하고, 무슨 취급을 당할지 알 게 뭐람.”

황녀가 그의 약점이기라도 한 걸까? 조롱하기 무섭게 앤드류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말조심해. 형님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한가 본데, 넌 아직 황태자비가 아니야.”

“본인 지위가 더 높다고 자위하면 기분이 더 나아지니? 곧 있으면 아무 의미도 없게 될 텐데.”

물론 에든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나는 느긋하게 벤치에서 일어나 그를 지나쳐 걸었다. 어제오늘이 너무 바빴던 탓인지 이제 겨우 10시가 되었음에도 솔솔 잠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혹여라도 나아진다면 다행이고. 우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 같으니, 난 이만 들어가 볼게. 아까 말했듯이 너무 졸려서.”

그렇게 나는 앤드류를 뒤로하고 성으로 돌아왔다.

***

그렇게 사흘이 흘러 마상 대회가 열리는 날이 도래했다. 문득문득 앤드류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나 걱정이 일기도 했지만, 감감무소식인 그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도 우스웠다. 카론과 함께 구경한다는 생각으로 며칠을 보냈으나 정작 대회 당일인 오늘. 이른 오전에 앤드류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짤막한 두 문장으로 이뤄진 아주 단출한 서신이었다.

「대회 시작 20분 전. 황성 수레국화 정원에서.」

“내 말대로 할 거면서 튕기기는.”

앤드류는 네자르와 함께 제도로 돌아간 이후 쭈욱 황성에서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에자렛 황녀를 향한 애정이 퍽 대단하긴 하구나. 마상 대회의 시작이 해가 정수리 위에 뜬 낮 2시부터이기 때문에, 나와 데이지는 점심을 먹지도 못하고 출발해야 했다.

“너무 한낮에 시작하는 거 아닌가요? 햇빛이 승패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데이지의 물음에는 호기심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그런 것도 감수하고 하는 거지. 마상 대회는 애초에 기사들이 레이디의 관심과 키스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리야. 낮이든 새벽이든 무슨 상관이겠어?”

“후후. 너무 비관적이신 거 아니에요?”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저언혀 비관적이지 않다구. 저런 쓸모없는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우리 가문 기사들이 대단한 거지.”

오늘은 특별히 내 호위 기사도 셋이나 따라왔다. 아버지는 다섯도 부족하다 소리치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섯 명씩이나 어떻게 끌고 다녀? 우리는 세 명의 호위로 적당히 합의를 봤다.

마차는 여유롭게 제도로 진입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달리지 못하고 계속 한자리에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데이지, 우리 아까부터 계속 멈춰 있는 거 아니니?”

내 말에 한참을 꾸벅꾸벅 졸던 데이지가 침을 닦으며 일어섰다.

“예, 예? 뭐라고 하셨어요?”

“됐다. 내가 확인해 볼게.”

유리창을 내리고 얼굴을 빼니, 우리 앞으로 기다란 마차 행렬이 보였다.

“세상에나. 무슨 줄이 이리도 길어?”

마침 앞쪽의 상황을 확인하고 온 호위 기사가 창문 가까이 다가와 대답했다.

“황성 보안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출입 신분 확인이 길어지고 있어, 저희 순서가 올 때까지 대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5분가량 소요될 거라 하더군요.”

황성 보안? 그런 진지하고 무거운 이유라니,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슨 문제라니? 네자르의 목을 노리는 첩자라도 들어왔대?”

“폐하의 본성에서 독이 든 식재료가 발견된 모양입니다.”

와, 그거 더 큰 문제네. 이렇게 되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애께서 오셨다고 따로 알릴까요?”

기사의 물음에 창틀로 턱을 걸치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 특별 대우를 누리는 것도 꽤 신선한 기분일 테지만…….

“됐어. 15분이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는데, 기다리자.”

하늘이 흐릿한 탓인지 날도 그리 덥지 않고. 이른 오전임에도 마차 안에 앉아 있기가 버겁지 않았다. 다시 창문을 닫고 의자에 쓰러지듯 누웠다. 날 따라온 데이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반대편 창문에 바짝 붙어 있었다.

“요즘 들어 제도의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

“아무래도 폐하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다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 아닐까요?”

그러려나. 이마를 마차 유리창에 기대고 바깥을 쳐다봤다. 긴 대기에 지쳤는지, 성벽 앞 벤치에서 누군가 독서하는 모습이 보였다. 판시온이었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나는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려 벤치를 향해 걸어갔다.

“너무 답답해서. 숨통 좀 트이고 돌아갈게.”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가는데도 판시온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려 엔테라의 소공작이니, 내 소식을 모를 리 없었을 테다. 그를 보니 목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악을 쓰던 엘리제가 떠올랐다.

‘감히 내게서 판시온을 뺏어 가려 해? 절대 안 돼! 그 남자는 절대 너처럼 건방진 년에게 못 넘겨! 비록 아버지가 날 버리셨다고 하더라도……!’

내가 납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공작.”

이윽고 판시온이 고개를 든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제 눈앞의 인물이 정말로 나인지 확인하려는 듯, 눈꺼풀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날 잘 돌아가셨나요? 감기가 된통 걸려서 제대로 연락 한번 못 드렸지 뭐예요.”

바로 옆에 앉아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다고 생각되는데, 판시온은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러셨군요. 몸은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불편하신 곳은 없나요?”

그의 얼굴이 담아내는 감정은 보는 내가 다 버거울 정도로 다채로웠다. 대체로 걱정과 죄책감을 자아내는 그림이었지만, 나는 별일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팠던 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멀쩡해요. 제가 가진 게 건강밖에 없어서요.”

부러 밝고 활기찬 척을 했으나 판시온의 낯빛이 워낙 어두운 탓에 부조화만 심해져 갈 뿐이었다.

굳이 그에게 나의 안부를 전할 필요는 없었던 걸까. 하지만 나는 판시온이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깊은 내면의 그는 죄책감 따위 연기에 그칠 뿐인 냉혈한일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리 매정하게 판단하기에는 그간 퍽 잘 지내 왔는걸.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판시온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요? 저는 그간 굉장히 잘 지냈어요. 에젤로트에 여름 축제가 열려서 전야제에도 참석했고, 하여간 잘 지냈어요.”

더하여 그에게 꼭 알리고 싶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소식도 있었고.

“아! 곧 네자르 전하와의 혼인 일정이 잡힐 것 같아요. 으음. 그런데 카론에게는 직접 알려 주고 싶으니 당분간은 비밀로 하셔야 해요. 소공작에게서 전해 들으면 많이 서운해할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판시온이 당황하거나 적어도 실망한 눈치를 숨기지 못할 줄 알았다.

“저에게 먼저 알려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하지만 판시온에겐 앞서 생각한 것과 유사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그러한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더 밝게 웃었다.

“그냥… 자랑한 거예요. 그만큼 잘 지낸다고. 혹시 너무 얄미웠나요?”

판시온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곧은 자세로 앉아 숨을 삼켰다.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으음. 그렇게 말하면 나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비록 뒤는 구리더라도, 내 앞에서만큼은 늘 솔직하고 올바른 남자 아니었던가. 나는 판시온을 매정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거 많아요. 그냥 되는대로 이야기하는 거죠. 겨우 하나 모르신다고 우울해하실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백 개, 천 개 모르는 저도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내가 말하고도 억 소리가 날 만큼 비논리적인 비유였다. 얼마나 어이없었으면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판시온의 표정이 어수룩하게 풀려 버릴 정도였으니까.

“저는… 예, 저도 썩 나쁘지 않게 지냈습니다.”

“어머, 그게 끝이에요?”

넥타이를 살짝 풀어낸 그가 무릎 위에 얹어 놨던 서적을 완전히 덮었다.

“저 역시 영애처럼 곧 약혼 일정이 잡힐 것 같습니다. 나이와 직위를 따지면 많이 늦은 편이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도, 요즘 종종 들곤 하더군요.”

그 판시온 엔테라의 약혼이라니. 켈 로망드의 파산에서 기인한 결과인 걸까.

“좋은 소식이네요. 축하드려요, 소공작.”

판시온 본인이 로망드 가문을 선택했다고 들었다. 원인이 어찌 되었든, 엔테라의 축이 하나 사라진 격이니 공작의 화가 컸을 게 분명했다. 그에 한 발자국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된 판시온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을 테다. 이를테면, 혼인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음. 생각해 놓고 보니 꽤 그럴싸한 가정인데?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작 당사자인 판시온은 전혀 감사한 표정이 아니었다.

“저는 축하 안 해 주세요?”

신기하지. 지금의 판시온은 고작 몇 주 전의 판시온보다 빛바랜 색이었다. 그를 보는 내 시선과 생각에 변화가 오기라도 한 걸까.

억지로 듣고 싶은 축언은 아니었다. 다행히 판시온의 얼굴과 읊조리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적잖은 여유가 느껴졌다.

“축하드립니다, 케이트 영애. 영애께서는 분명히 타의 귀감이 될 훌륭한 황후가 되실 겁니다.”

그렇다고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의 입에 발린 소릴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난 과장된 웃음으로 손사래 치며 그 어색함을 무마했다.

“황후요? 그건 너무 설레발 아닌가요.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벌써부터 겁이 나네요.”

“설레발 아닙니다. 그러니 영애께선 겁을 내실 필요 없습니다. 제국 어디에서도 말이지요.”

이번에는 어떠한 말로 대답해야 할까? 이전과 달리 그와의 대화 하나하나를 잇기가 벅찼다. 판시온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덜커덕. 단체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선두 마차의 입성 허락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제 차례가 왔나 보군요. 아무래도 먼저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다가온 엔테라의 시종이 내게 허리를 숙이고, 판시온에게서 책을 건네받는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필요한 말이 있기는 하려나. 이 정도면 충분한 듯싶었다. 이미 그는 나를 예전처럼 생각하지도, 대하지도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음. 나중을 기약하려 했을 뿐인데 어째 영영 안 볼 것 같은 작별 인사가 튀어나왔네.

몸을 일으킨 판시온이 내 인사에 응답하여 온화한 미소를 그렸다.

“영애께서도 안녕히 가시길.”

판시온의 차분한 금발이 점차 멀어져 간다. 나는 그의 너른 등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갔다.

흐린 날이 개이고, 쨍쨍한 햇볕이 황실 연무장을 비춘다. 나는 이날을 위해 준비해 온 챙이 긴 모자의 앞부분을 더 깊게 내렸다. 마상 대회의 본선과도 마찬가지인 초스트는 끝이 뭉툭한 창을 이용해 상대방을 말 위에서 추락시키는 경기이다.

“승자. 악토르 가문의 조르단 메첼로프 경!”

“와아아!”

대개 가문의 대표 기사로는 최고로 영예 있는 기사, 다른 말로 인기 있는 기사가 선발되기 때문에 수많은 귀부인과 여식 들을 만날 수 있는 제국 최대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사냥 대회와 달리 전시에는 중단되었다가 5년 만에 다시 열린 대회였다. 우리 에젤로트야 전통적으로 긴 시간 참여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지만, 다른 가문의 기사들은 아마 이 시기만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다음은 오드리네 후작가로군. 악토르와 함께 마상 대회의 우승을 가장 많이 거둔 가문이지.”

“함께라니요? 우리 악토르를 오드리네와 같은 선상에 두지 말아 주시죠, 앤드류 전하. 악토르의 우승이 오드리네보다 무려 셋이나 많으니까요.”

냉랭하게 쏘아붙인 캐롤라인이 제 앞으로 다가온 기사의 창에 손수건을 묶었다. 악토르의 상징이라는 회색의 제비가 곱게 수놓인 손수건이었다.

“다음 경기도 힘내요, 조르단 경.”

맡겨 두라는 듯 주먹으로 제 가슴을 탕탕! 친 기사가 대기 천막으로 돌아간다. 거칠게 부딪치는 갑주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보기만 해도 더워 미치겠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더우려나?

살벌한 얼굴로 그 장면을 주시하던 필프론츠 후작이 입을 열었다.

“악토르 소백작께서는 여전히 심성이 인색하다 못해 쩨쩨하신 것 같군요. 기본적으로 스코어가 15대 18이면 셋이라는 격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법입니다. 거기서 거기라는 의미지요.”

그에 캐롤라인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 셋이 전부 우리 악토르에게서 패배한 숫자 아닌가요? 오드리네 후작이야말로 참으로 구질구질하십니다. 패자가 패배를 인정해야 대회의 명예가 더 드높아지는 거예요.”

“지금 패자라고 했습니까? 마상 대회에는 첫 참석인 주제에 아주 못 하는 말이 없으시군! 오늘은 어느 가문이 우승하게 될지 한번 두고 봅시다!”

“두고 보긴 뭘 두고 봐요? 암만 봐도 우리 악토르가 우승할 게 뻔한데.”

피곤하다. 릴리의 불참으로 오늘 대회는 조금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필프론츠와 캐롤라인이라는 복병이 나타날 줄이야. 카론은 이미 지쳤는지 필프론츠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내 왼쪽에 앉은 카론과 그녀의 옆에 앉은 필프론츠. 그리고 내 오른쪽에 앉은 앤드류와 그의 옆에 앉은 캐롤라인. 얼마나 목소리가 크면 다른 사람들조차 우리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하아, 정작 날 꼬신 탈리야 경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너도 그 뺀질한 남자에게 당했군. 브레이트 탈리야 경은 오늘내일 휴가다.”

휴가? 나는 차마 어이없다는 투를 숨기지 못하고 앤드류에게 되물었다.

“마상 대회가 열리는 날에 총사령관이 휴가를 내도 되는 거였어?”

“못 낼 건 또 뭐야. 황성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편법을 쓴 거겠지.”

하긴. 나는 고개를 들어 텅 비어 있는 황제의 좌석을 응시했다.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비어 있는 황후의 의자. 네자르와 그의 호위 기사만이 화려한 금빛의 융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세상 지루한 표정으로.

“케이트, 이렇게 뜨거운 자리에 오래 있어도 괜찮아요? 한동안 앓았으니 더위도 쉽게 먹을 거예요. 그늘로 가서 조금 쉬는 게 어때요?”

카론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 손을 끌어 잡았다. 이런. 나는 애써 당혹감을 숨기고 그녀 옆에 앉은 필프론츠의 얼굴을 훔쳐봤다. 그는 어깨를 슬쩍 으쓱일 뿐 다시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서는 그와 캐롤라인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납치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카론. 나는 조금 고생을 해 봐야 해. 최근 너무 마음 놓고 놀아서 살이 엄청 쪘거든.”

“쪘다니요? 제 눈에는 뼈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걸요…….”

그거, 손녀를 보는 할머니의 시선 아니니?

“콩깍지는 형님이 아니라 엔테라 영애한테 씌어 있었군.”

굳이 한마디를 붙이는 앤드류를 쏘아보고, 그간 살 때문에 견뎌야 했던 곤혹을 카론에게 털어놨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닦달인지 스트레스로 머리가 다 빠져 버릴 것 같아. 이 상태로 혼인식을 치르면 역사에 돼지 같은 몰골의 황후였다고 기록이 남을 거라는 둥, 자기는 그런 황후의 친모로 남기 싫다는 둥 아주 입에 칼을 무시고…….”

“혼인? 어머나, 결국 네자르 전하와 혼인하기로 마음먹으신 거예요?”

깜짝 놀란 얼굴의 카론이 입을 가리고 되물었다.

이, 이게 아닌데.

나는 곧장 답을 못 하고 주위를 살폈다. 누가 네자르의 형제 아니랄까 봐, 무료한 얼굴의 앤드류 옆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한 캐롤라인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발뺌하면 기사의 창을 뺏어 와 날 찌를 기세였다.

“으응. 곧 전하와 혼인을 하긴 하지만…….”

“세상에. 축하해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요? 역시 제 말이 맞았죠? 전하께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숙녀를 아이라 여기실 리 만무하지요. 정말 잘됐어요.”

카론의 눈가에는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나는 극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네자르의 연인을 찾는다며 카론에게서 독신의 귀족 영애 리스트를 건네받은 지 겨우 몇 주가 흐른 상태였다. 그런데 돌연 다시 혼인하기로 했다는 내가 얼마나 줏대 없어 보일까! 물론 줏대 없는 게 사실이기는 해도.

“고, 고마워.”

이어서 어깨를 잡아끄는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매우 비장한 기세의 캐롤라인이었다.

“카트리나 영애? 매우 현명한 생각이에요. 저는 당신의 혼인을 지지해요.”

지지해서 뭘 어쩌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어깨의 손을 털어 냈으나, 공교롭게도 축하 인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짝짝짝! 그녀를 시작으로, 돌연 내 주변에서 면식만 있는 자들의 갈채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축하해요, 영애!”

“축하드려요. 제국의 경사네요.”

한두 명으로 시작된 갈채는 어느새 관람석의 반을 차지해 버렸다. 아니, 아직 날짜도 안 잡혔는데?

“무슨 일이야?”

“에젤로트 영애와 황태자 전하의 혼인 일정이 잡혔대.”

“어머나!”

내 가벼운 입 때문에 일이 너무 커져 버린 거 아니야? 어쩔 줄 모르며 머뭇거리기만 반복하자, 주위를 짧게 훑은 앤드류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멍청한 얼굴로 당황하는 티 내지 마. 앞으로 평생을 보게 될 장면이니까. 저 귀족들은 이제 네가 풀로 엮은 반지를 자랑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며 치켜세울 거다.”

아부라는 건가. 그의 충고 덕분인지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영문을 모르고 따라 박수치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 음.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후로 이름만 들어 본 귀족들이 찾아와 내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경기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캐롤라인이 버럭 화를 내자 그 숫자가 줄기는 했지만, 경기에 집중할 즈음이면 잊지 않고 찾아와 캐롤라인과 필프론츠의 화를 북돋았다.

“에젤로트 영애? 전…….”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홱 고개를 돌린 캐롤라인이 뾰족한 어조로 가로막았다.

“눈치가 없군요. 아부를 하려면 적어도 경기가 끝난 뒤에 하세요. 곧 있으면 결승전인 걸 모르시…….”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든다.

“하하. 죄송합니다, 악토르 영애. 이거, 제가 경기 관람을 방해한 모양이군요. 네자르 전하의 명을 전하러 온 터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네자르의 호위 기사인 툴드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한껏 허리를 낮춘 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에젤로트 영애,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이렇게 갑자기? 저 위 황좌의 바로 옆, 네자르는 이미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일어서 관람석에서 벗어난 나는 툴드를 뒤따라 네자르에게로 향했다. 높다란 계단을 따라 오르니 번쩍번쩍한 황금 의자 옆으로 황태자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적색 벨벳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왼쪽에 없던 의자가 새로 생긴 것을 봐선…….

“안녕, 케이트.”

역시 내 자리구나. 팔을 뻗은 네자르가 나를 잡아당겨 의자에 앉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에서 보는 네자르는 그야말로 기품 있는 공작새처럼 고고하고 화려했다. 그의 머리가 흑발이라 다행이지, 만약 나와 같은 백금발이었다면 너무 눈부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대대적인 발표라도 한 거냐? 귀족의 반이 일어서 네게 갈채를 보내던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아아. 하필 물어도 대답하기 난감한 부분을 묻다니. 황좌의 바로 옆이기 때문일까, 지금의 네자르는 어쩐지 편히 대하기가 버겁다.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카발 제국의 황태자. 다음 황위에 오를 제국의 후계자. 저 아래에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을 귀족도 있겠지.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최상의 답을 내놓았다.

“그 이유를 말하기 전에 우선 사과부터 할게, 네자르. 정말 미안해.”

네자르가 여태 놓지 않은 내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이어서 작은 한숨과 함께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이미 실망하고 있으니 여기서 더 실망할 일은 없겠지. 나는 마음 놓고 사실을 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의도치 않게 황태자와의 혼인을 발표하고 말았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의도한 게 아니야.”

“잘했어, 케이트.”

한데 네자르의 반응은 내 생각과 영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배부른 고양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손가락을 까딱여 멀찍이 서 있던 론을 불렀다.

“마침 혼인 날짜를 생각하던 중이었지. 이왕이면 가장 빠르게. 어떻게 생각해, 케이트. 여름이라도 괜찮겠어?”

여름은 덥다. 더우면 화장이 빨리 무너지지. 그 이상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기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름은 조금…….”

“나는 이왕 하는 혼인, 최대한 서둘렀으면 좋겠어. 최근 일하느라 눈도 제대로 못 붙이는데, 카트리나 에젤로트까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죽을 맛이라서.”

손가락 사이사이를 맞잡는 온기가 느껴진다. 네자르는 깍지 낀 손을 당겨 제 뺨을 가져다 댔다. 금방이라도 그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을 것 같았다.

“내가 무얼 위해 이리 열심히 사는 건지 회의감도 종종 들고 말이지.”

그 말을 론이 듣고 있을 거라 상기하니 얼굴이 붉어졌다. 동시에 몇 달을 내리 고생하는 네자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걱정 없이 탱자탱자 노는 내 삶에 회의감이 드는 건 덤이었다.

“좋아! 여름에 하자. 흐음, 여름도 나쁘지 않지. 내가 사실 가을 못지않게 여름도 엄청 좋아해.”

내 대답에 네자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론에게 명했다.

“론? 다음 달 초로 혼인식을 잡아 둬. 준비 일정 최대한 앞당겨서.”

그리고 론 역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예, 역사상 최고의 결혼식으로 만들기 위해서 결점 없이 아주 완벽한 계획을 세워 두겠습니다.”

다, 다음 달 초?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물의 결혼을 이렇게 일찍 잡는 게 어디 있어? 아무리 길게 잡아도 보름이 조금 넘게 남은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드레스 제작도 맡기지 못했는데?”

내 걱정 가득한 우려에도 네자르는 여상하기만 하다. 그는 깍지 낀 손을 천천히 내려 의자 팔걸이에 걸쳤다.

“황태자비가 될 여인의 웨딩드레스인데, 백 명이 달라붙어서라도 일정을 맞춰야지. 필요하다면 오늘 황성에서 맞추고 가면 돼. 네 드레스를 제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디자이너들이 제도에 차고 넘치니까.”

이미 네자르 머릿속의 우리는 7월 초에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리 서두르는 느낌이지? 단순하게 내 착각인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의 결혼식 준비에 보름이 소요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 아직 황실 예절조차 제대로 안 배웠잖아.”

서두르는 게 맞는다면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나 또한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네자르는 소리 없이 웃으며 깍지 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나는 텅 빈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올렸다.

“어리숙한 말을 하는구나, 케이트.”

타박하는 언사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미풍처럼 부드럽고 선선하게 들려온다.

“제대로 배우려고 앤드류와 함께 온 것 아니었나? 네 바람대로 그 아이에게 당분간 황실 예절 선생이 되어 주길 부탁하려 했는데 말이지.”

설마 여기서 앤드류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네자르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앤드류와 동행하게 해 달라 부탁한 것인지 알고 있는 걸까? 에이, 그럴 리가.

앤드류 오드리네 카발은 네자르를 제외한 제국 유일무이의 황자. 그러니 네자르가 그의 동행을 허락한 이유는 내 철없는 투정 때문일 테다. 그러고 보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네자르는 왜 나와 앤드류의 동행을 허락한 거지?

“케이트.”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마치 그의 부름이 잔머리 굴리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던 탓이다.

“내가 만족할 수준의 성과가 없다면, 그 역시 무를 수밖에 없어.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야. 제대로 마무리 지을 자신이 없다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지. 그 정도는 각오했으리라 믿는다.”

그의 언행은 나를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고를 가장한 충고를 남기는 것이냐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네자르는 단순히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래 왔듯,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역시 알고 있었던 게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말할 리 없어.

“……물론이야.”

무겁게 한숨을 내쉬자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네자르가 큭큭 소리를 참으며 웃었다.

“또 삐쳤어? 조금 뭐라 한 것 가지고 시무룩해 있기는. 넌 내게 그 어떤 요구와 부탁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원한다면 앤드류보다 더 뛰어난 황실 예절 선생을 붙여 줄 수 있어.”

그건 싫다. 네자르의 바람은 아주 명료하다.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가장 곱게 가꾸어진 인형의 집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일 테지.

종전 직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러한 삶에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게 유유자적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는 나의 것을 무력하게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비록 그것이 네자르의 악의가 아닐지라도.

“……아니야. 내가 너무 응석을 부렸던 것 같아. 내 편의를 계속 봐주려고 한 건 오히려 네자르인데. 미안해, 네자르.”

흥, 미안하기는 무슨. 두고 봐, 네자르. 난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

“그 정도야 약과지. 아무래도 너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지만.”

네자르가 뒤로 물러나 있던 론을 다시 불렀다.

“론, 케이트의 입성일을 일주일 후로 정하고, 내일 오전에 에젤로트로 서신을 보내 백작께 알려라.”

“예.”

그런데 아까부터 무언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다.

“저기, 있잖아.”

“응.”

“혼인에는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어. 이렇게 거침없이 진행해도 되는 거야?”

황태자의 혼인을 결정하는 일은 황제 대리 업무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 혼인 서약서에 폐하의 인장이 찍혀 있을 테니까.”

안심하라는 듯 경기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내게로 힐끔 돌린다. 더위를 참지 못했는지 그새 정복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내 말은 그, 에젤로트로 서약서를 보내기 전에 폐하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소리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을까?

네자르는 한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아아. 그래, 그런 의미였군. 충분히 불안할 만하지.”

마치 가장 적절한 설명을 찾는 듯, 그의 단정한 손가락이 느긋하게 턱을 쓸어내린다.

“폐하께서는 이미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허락을 내리셨어. 단순히 행정 업무뿐만이 아니라,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

그가 고민하는 동안 마상 대회 시합에서는 또 한 명의 승자가 생겼다. 브레이트 경은 검술 수업의 일환으로 날 이곳에 보냈지만, 어째 오늘의 성과는 혼인 일자가 결정됐다는 점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래, 나의 뜻이 폐하의 뜻이라 여기면 편할 거야. 어때, 쉽지?”

아니, 쉬운 걸 떠나 그건 너무 위험한 발상이잖아?

“네자르는 황제 폐하가 아닌데도?”

“어차피 곧이야.”

네자르의 대답은 가볍지 않고 진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짧은 한 문장에서 옅은 한기를 느꼈다. 곧이라는 말의 의미는…….

“전하, 곧 준결승 출전 기사가 확정됩니다.”

론의 말에 내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네자르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을 향한다.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서 그 옆에 의자를 바짝 붙였다.

“옆에서 마지막 경기 같이 보고 내려가도 돼?”

“물론이지.”

마치 세상을 달라 해도 다 줄 것처럼 망설임 하나 없는 대답이었다.

준결승과 결승은 내일 오전에 진행되기에, 첫날 경기의 마무리로 대략 2시간의 다과 파티가 진행된다. 경기장 옆에 마련된 작은 숲과 정원에 모여 앉아서 음료와 술을 마시는 귀부인들 사이의 가장 뜨거운 주제는 보나마나 마상 대회에 나선 기사일 게 뻔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기서 대체 뭘 배운 걸까. 검술학이란 참으로 난해한 학문인 듯싶었다.

“네자르는 이미 내 속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것도 아주 훤히.”

내 한숨 섞인 말에 앤드류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럼 안 들킬 거라 여긴 거냐? 몇 년을 봐 왔으면서 어째 형님에 대해 아는 구석이 하나도 없군.”

필프론츠 후작은 카론의 손을 잡고 사라졌으며, 인기 많은 캐롤라인 역시 여식들에 이끌려 멀어졌다. 젠장. 카론과 릴리를 제외하면 이제 내게는 앤드류밖에 남지 않은 건가.

나는 그와 오붓하게 다과를 즐겨야 하는 이 순간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짜증 났다.

“너는 알고 있었으면서 왜 따라온 거야?”

“내가 뭘 하는지에 대해서, 모지리 영애 너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가?”

그거 하나 좀 편히 말해 주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 떫은 얼굴로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리게 한숨을 내쉰다.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게 대체 뭐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힘이 없어.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뭘 모르는구나, 앤드류. 너보다 더 힘이 없는 게 나야. 왜냐하면 나는 엄청 멍청하거든.”

“속 편한 소리 하네.”

“너는 멍청한 게 속이 편한 것이라 생각하니? 이래서 똑똑한 애들은 재수가 없다니까.”

여섯 살 무렵에 제왕학을 깨우쳤다니, 어쩌면 릴리보다 대단한 천재 황자님일 수도.

나는 다 식어 버린 홍차를 내려놓으며 그를 흘겨봤다.

“물론 너는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앤드류, 잘 생각해 봐. 내가 진작 너라는 인물을 알았다면 이렇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로 발전하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도 않겠지.”

“정말 말 그대로 쓸데없는 고민이네.”

앤드류가 이죽거렸으나 난 기죽지 않고 계속 내 할 말을 이었다.

“카론도 마찬가지이고, 릴리도 마찬가지이고, 더 멀리 보면 판시온 소공작도 마찬가지야. 만약 내가 에젤로트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면…….”

켈 로망드가 없어질 일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엔테라는 여전히 강성했을 테고, 판시온이 원하지도 않던 약혼을 할 일도 없었을 테다. 지극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였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드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생각이든, 나는 더 이상 네 그 겁 없는 장단에 맞춰 줄 의향이 없어. 그러니 도움을 받고 싶다면 조금 더 그럴싸한 사람을 찾아.”

“싫…….”

싫다고 말하려 했으나 앤드류의 눈빛이 하도 살벌해 입이 절로 꽉 닫혔다.

“내가 불쌍하면 내 말이라도 좀 들어. 무릎 꿇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냐?”

그,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참 나, 이러려면 애초부터 거절하든가!

나는 다시 복잡해지는 이마를 부여잡고 하도 안 써 먼지가 쌓인 뇌를 최선을 다해 가동했다. 내가 네자르에게 기대지 않고 힘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사람. 부탁하면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일 사람…….

“데보라의 세피아 백작 부인은 어때?”

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이름이었다. 내내 구겨져 있던 앤드류의 얼굴이 살며시 풀릴 무렵, 햇빛에 기울어진 까만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 나타났다.

“세피아 부인이라면 사교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죠.”

가까이 걸어온 캐롤라인이 접시 위의 초콜릿을 집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끔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하고, 자기 잇속 챙기기에는 아주 발군인 여인이에요. 마침 저곳에 있군요.”

“악토르에선 남의 대화를 함부로 엿들으라 가르치던가요?”

내 가시 돋친 말투에 캐롤라인의 눈동자 안으로 새하얀 안광이 스쳐 지나간다.

“엿듣다뇨. 전 도와 드리러 온 건데요? 하도 사이가 좋아 보이시기에 몰래 사랑 놀음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더니만!”

하얀 목에 새파란 핏줄이 솟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네자르를 위한 건지 나를 괴롭히는 건지 구분이 힘들 정도다.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방금 들었던 이야기는 못 들은 일로 해 드릴게요. 대신 우리 가문의 기사가 우승하면 영애의 손수건을 창에 걸어 주세요. 어때요? 우리 조르단 경에게 더없을 영광일 거예요. 동시에 전 제국에 공표되는 거죠, 우리 악토르의 기사단이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캐롤라인도 그렇고 필프론츠 후작도 그렇고, 다들 경기에 눈이 돌아가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음, 영애가 아닌 제가 그래도 되는 거예요?”

“영애는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고, 무엇보다 가문의 기사가 출전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어요. 규칙에 위반되는 일이 아니에요. 절대로요!”

이제 캐롤라인은 내 손까지 부여잡으며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면 내가 또 마음이 약해지는데 말이지.

“좋아요.”

캐롤라인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상태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던 그녀는 내 팔을 잡아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그럼 나는 이만 내 기사에게 최고의 명예를 안겨 주기 위해 기합을 넣어 주고 올게요!”

저 정도로 마상에 열성적이라니, 역시 범인인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녀 덕분에 흔들렸던 마음이 다잡혔다는 것.

“좋아. 마음먹은 김에 지금 당장 해치워 주겠어!”

“누가 보면 전쟁터에 나가는 줄 알겠군.”

이죽거리는 앤드류를 뒤로하고 귀부인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공간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좋아. 떨지 말자, 케이트. 자연스레 세피아 부인을 부르는 거야.

“세피아 부인.”

말보다 행동이 앞서지 않게. 수준 높은 교양을 배운 숙녀처럼!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 괜찮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잠깐 저 좀 보죠. 지금 당장.”

실수라도 한 걸까. 세피아 부인을 둘러싸고 있던 여인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정작 세피아 부인은 그다지 동요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따라 나오라며 요구한 내가 더 떨고 있으면 모를까.

“잠시만 실례할게요, 여러분.”

차분하게 일어선 세피아 부인을 이끌고 정원 옆의 단풍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퍽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세피아 부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시기에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하셨나요?”

좋아, 케이트. 이제 너는 예전의 그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아니잖아. 가장 먼저 차분하게 내 할 말을 하는 거야. 우선 부인이 당황스러워하지 않도록 불러낸 목적부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세피아 부인.”

세피아 부인의 눈이 살짝 커진다. 그, 그리고 이다음은 왜 필요한지에 대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거야.

“이제 곧 황성으로 들어가게 될 텐데, 제가 사교계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여러모로 무지해요.”

잊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칭찬을 곁들여서.

“부인은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정세에 밝고, 가장 귀부인스러우면서도 현명한 분이에요.”

거짓 없이 사실에 기반을 둔 내 마음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당신이 제게 도움을 준다면 전 아주 기쁠 거예요. 앞으로 황성에서 생활하게 될 시간이 태산같이 남았는데, 서로를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친우가 생긴다면 외로움도 덜고, 불안감도 덜 수 있겠죠.”

물론 카론과 릴리처럼 막역한 사이는 될 수 없겠지. 음. 일단 이 부분은 제쳐 두자.

“아, 그러실 리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리는데… 제가 한 이야기를 이곳저곳 떠들고 다니지 않으셨으면 해요. 점점 바빠질 텐데, 귀찮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네요.”

세피아 부인이 입이 가벼운 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카론에게 여러 번 들어 온 바 있었다. 애초에 귀가 얇고 입이 가벼운 여자였으면 그 잘나가는 살롱의 주인이 될 수 없었겠지. 좋아. 마지막으로 황태자비라는 지위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내 능력을 과시하는 위협까지!

“제가 요즘 검을 배워서요. 우리 서로 불만이 쌓이면 정정당당하게 검으로 해결하죠.”

말하고 보니 상당히 뜬금없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세피아 부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무 당당한 자세로 요구한 건 아닐까. 하지만 카론은 내가 세피아 부인에게 꿀릴 것 하나 없다고 했는걸.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긴장으로 등 뒤의 땀이 말라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늘 네자르나 형제들, 카론에게 기대 왔던 나다. 혼자 마음먹고 홀로 움직이려니 부담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살롱은 이대로 두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해 주는 이야기가 워낙 다채로워서요. 게다가 헛소문이 아닐 확률도 꽤 높아요. 영애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 계속해서 운영하도록 할게요.”

도와주겠다는 의미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뜬금없이 살롱 이야기를 꺼낼 리 없었다. 세피아 부인은 일전에 내가 살롱에서 가볍게 떠들던 불평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내가 해낸 거야? 야호!

나는 씰룩거리는 입매를 꽉 부여잡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도록 하죠.”

“꽤 깊숙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이곳은 보는 눈이 많을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서신으로 나누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욕심이 크고 야망은 더 큰 여자라더니, 먹이를 흔들자마자 곧장 물어 버리는구나!

“현명한 판단이에요. 이번 주 안으로 데보라에 서신을 보낼게요.”

여상한 척 차분한 자세로 대답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나는 허리를 숙인 세피아 부인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참고 있던 웃음을 마음 편히 내뱉었다.

“큼, 크흠. 뭐야, 생각보다 별거 아니잖아? 푸흐흡. 나, 정말 알고 보니 정치의 귀재였던 거 아니야?”

으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걸음으로 정원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데 다시 돌아온 다과회는 분위기가 직전과 정반대였다. 다들 숨을 죽이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덩달아 얌전한 걸음으로 돌아온 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앤드류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향했다. 그 끝에 보이는 것은…….

“부디 저와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카론 영애?”

필프론츠 후작이 카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하긴, 카론도 이제 슬슬 결혼할 때가 되었지. 명문가의 여식은 대개 열 살 무렵 약혼 서약식을 하고, 스무 살 전에 결혼하는데 카론은…….

잠깐, 누가 누구 앞에서 뭘 한다고?

“어머머, 어머머!”

“세상에 어쩜, 로맨틱해라. 이리도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이라니요!”

“오드리네 후작이 요즘 조용하다 싶었더니, 엔테라 영애에게 목을 매고 있었나 봐요. 역시 바람둥이도 잡는 천상의 미인이라 이건가?”

“오호호, 그 말이 딱이네요!”

시끌벅적 떠드는 여인들의 머리통 사이로 카론이 보였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 오산인 것 같았다. 필프론츠 후작이 내민 화려한 장미꽃 사이에 파묻힌 그녀는 꽃만큼이나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카론의 자그마한 입술에서 백옥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좋아요.”

필프론츠 후작이 난생처음 보는, 아니, 볼 일 없을 거라 예상했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귓가에 걸려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축하해요!”

“카발 제국 최고의 미녀를 데려가다니, 이 도둑놈!”

남들이 뭐라 하든 급히 일어난 필프론츠 후작이 카론을 와락 껴안았다.

“정말 결혼하는 거야? 저 둘이서?”

“그럼 연극이겠냐.”

소란스러워진 다과회 분위기가 싫증 났는지 앤드류는 흘리듯 답하며 정원을 벗어났다.

정말 결혼하는구나. 내가 에젤로트에 처박혀 디룩디룩 살이 찔 동안 카론도 카론 나름의 사랑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필프론츠 후작 보기를 돌같이 했던 카론이 저렇게 행복한 미소를 보일 리 없었다.

뭔가 억울했다. 그냥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억울했다. 카론이 결혼한다고? 나와 무려 5년을 종일 붙어 있던 카론 엔테라가?

“내일 오드리네의 기사가 마상 대회의 승자가 되면, 그 기사에게 영애의 손수건을 받을 수 있는 영예를 주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기꺼이 제 손수건을 걸어 드릴게요.”

어우, 소름 돋아. 둘 사이의 대화를 들으면 혀를 차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설마 나랑 네자르도 남들 보기에 저리 남사스러우려나. 상상할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닐 이유가 하나 없었던 탓이다. 품에 안는 것으로도 버거워 보이는 꽃다발. 그 꽃다발 안에서 행복하게 웃던 카론. 그 웃음 하나가 이상하게도 네자르의 성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데이지.”

“예?”

“꽃다발 받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아?”

“갑자기 웬 꽃다발이래요? 당연히 기분 좋죠! 세상에 꽃 선물 받고 안 기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미 장미는 다 피고 진 시기였다. 그럴싸한 꽃다발을 만들려면 온실로 가야 할 테지만, 성을 나갔다 오면 네자르와의 저녁 식사에 늦을 게 분명했다.

“잠깐만, 잠깐 멈춰 줘.”

내 부탁에 데이지가 마차의 벽을 뚫어 버릴 기세로 두들겼다. 내가 내린 장소는 황태자의 성으로 향하는 길목의 이름 모를 정원이었다. 황족의 정원에서 함부로 꽃을 꺾으면 황족 기만죄로 태형에 처할 수 있기에 조심조심 다가갔다.

“딱, 딱 한 송이만 가져갈게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랗게 핀 국화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런데 국화를 선물해도 되는 걸까? 보통 장례식에 흰 국화를 놓던데, 이거, 꽃말이 좀 재수 없는 거 아니야?

“꽃은 갑자기 왜 꺾으셨어요? 평소에 정원은 잘 쳐다보지도 않던 분이.”

“너는 몰라도 돼.”

“후후. 몰라도 되기는요……. 전하께 선물하려는 생각이시죠?”

“아, 아니거든?”

얼마 안 가 네자르의 성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그래, 맞다. 나는 이 노란 꽃 한 송이를 네자르에게 건넬 생각이었다. 한데 막상 그의 성에 도착한 시점에는 이미 꽃의 상태가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시들해진 상태였다. 다 죽어 가는 풀때기를 네자르에게 선물하는 그림을 상상했다. 으음. 여러모로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론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론.”

“예.”

“네자르는?”

내가 올 때면 항상 가장 먼저 달려와 안아 들고 가던 그였다. 설마 네자르 없이 시종과 시녀 들만 날 맞이하고 있을 줄이야.

“귀한 장면을 보여 드리려 일부러 저만 나왔습니다. 따라오시죠.”

귀한 장면? 작게 속삭이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론의 뒤를 따라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거닐며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그의 대답은 날아갈 듯 가볍고 충만한 목소리였다.

“그야 아주 많지 않겠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하의 혼인식도 다가오고,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렸던 목표도 이제 곧 달성하기 직전입니다.”

“목표?”

씨익 웃은 론이 네자르의 집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주 조심스레 문의 손잡이를 돌린 그는 나를 집무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별것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감히 네자르 전하의 행복 외에 더 있겠습니까?”

내가 멍청하게 자리에 서 있는 동안 문이 다시 닫혔다. 괘종시계 소리가 방 안을 규칙적으로 울리고, 창 너머로 쏟아지는 하늘빛은 이제 막 분홍빛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네자르의 테이블 옆에 섰다. 론이 말한 귀한 장면은, 다름 아닌 네자르가 소파에 누워 쪽잠에 든 풍경이었다.

“……일이 정말 많나 보네. 침실도 바로 옆이면서.”

책상도, 그 옆도, 심지어는 커피 테이블 위까지 검은 글씨로 빼곡한 서류가 한가득이다. 게다가 커피 향이 짙게 풍기는 걸 보아 일을 하다가 잔이라도 쏟은 모양이었다.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죽은 듯 잠든 네자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새 살이 조금 빠졌나? 안 그래도 날이 서 있던 네자르의 턱이 더 홀쭉해진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구겨진 상아색 셔츠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셔츠의 움직임 외에 소파 위에 꼬고 있는 다리도, 살포시 감긴 눈꺼풀도 모두 미동이 없었다.

“누가 보면 죽은 줄 알겠어.”

어차피 주지도 못할 꽃, 귀에 살짝만 걸어 보면 안 되려나. 무슨 용기가 일었는지 숨죽인 상태 그대로 손을 뻗었다. 긴장했는지 손끝으로 붙잡고 있는 국화가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어, 얼굴에 떨어뜨리면 어쩌지? 분명 하루 이상 밤새우고 겨우 든 쪽잠일 터였다. 하필이면 속절없이 흔들리던 꽃줄기가 뺨을 살짝 긁어내고 떨어졌다. 역시 안 되겠어. 아쉬운 마음을 무릅쓰고 손을 거두려던 그 때.

“그렇게 끈기가 없어서 어디에 쓰겠어?”

턱, 하고 팔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까, 까, 깜짝이야!”

“죄를 짓기라도 한 거냐? 호들갑 떨기는.”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누구라도 놀랄 거야!”

“누구라도라고? 내 집무실에 허락도 없이 몰래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

얄밉게 웃은 그가 제 이마 근처로 떨어진 국화꽃을 집었다. 꽃잎과 내 얼굴을 번갈아 살피던 네자르는 검날로 바위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뭘 하려나 싶어 잔뜩 기대했는데. 그렇게 새침한 얼굴로 이런 귀여운 짓을 할 줄이야.”

시들시들해져 누렇게 상해 버린 꽃잎. 네자르가 날 붙잡지 않은 손을 들어 그 풀때기를 잡아 돌렸다.

“흐음. 국화인가……. 내 성에는 없는 꽃인데. 네가 가져온 거야?”

숨결까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내 등을 누르는 손아귀 힘은 풀어질 줄 몰랐다.

“나 주려고?”

그의 그늘진 검홍색 눈동자가 허공에 들린 꽃에서 내게로 향했다.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주억였으나 쓰읍, 혀를 찬 네자르가 짐짓 엄한 어투로 꾸짖었다.

“물으면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소리 내 대답해야지, 케이트.”

“으응.”

“시들었군. 보관하려면 제대로 말려 놔야겠어.”

뒤통수를 쓰다듬고 팔을 거둔 그가 누워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노란 국화는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볼품없어 보였다. 네자르는 그 작은 꽃을 자신의 업무 책상 위에 고이 올려 두었다. 져 가는 노을빛이 잘 스며드는 자리에.

“필프론츠 후작이 엔테라 영애에게 프러포즈를 했다더구나.”

그가 대뜸 엉망진창인 책상 근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자르의 구겨진 셔츠를 응시하며 온기가 남아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걸 어떻게 벌써 알아? 나도 보자마자 얼마 안 되어서 돌아온 건데.”

“다 아는 수가 있지. 너야 종종 잊어버리지만, 이 몸은 무려 카발의 황태자거든. 내가 모르는 일은 제국 그 어디에도 없다고.”

씨익 웃은 네자르의 손에서 한 뼘만 한 두께의 법전이 큰 소리와 함께 닫힌다. 종이 사이로 비산하는 먼지가 허공을 수놓았다. 나는 대번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사람 붙여 놨단 소리를 너무 자랑스럽게 하는 거 아니야?”

네자르가 건조하게 하하하 웃었다. 대충 손을 털고 옆으로 다가온 그에게서 오래된 서적 냄새가 풍겼다.

“음.”

별다른 말은 없었으나 소파에 기대 팔짱을 낀 네자르의 모습은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경험에 의하면 그리 느낌 좋은 익숙함은 아니다. 나는 눈치를 보며 가까이 다가가 네자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왜 그래? 나, 뭐 잘못했어? 얼굴이 꼭 옛날 꾸짖기 직전의 표정이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 땡볕에 하도 오래 있었더니 오늘 조금 피곤해. 배도 고프고.”

“더위라도 먹은 건가. 곧 식사가 완성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과자라도 줄까?”

“이상하게 입맛도 없어. 그래도 배고프니까 입에 넣어 줘.”

그가 기다란 팔을 뻗어 철로 된 비스킷 통을 연다. 색색이 고운 과자들이 들어 있었지만, 죄다 담백하기만 해 보이는 것이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버터 비스킷밖에 없어?”

내가 들어도 참 애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네자르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자꾸 애가 되는걸.

“딸기잼? 사과잼?”

“딸기잼.”

보아하니 철통 구석에 잼 발린 비스킷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나는 입 안으로 들어온 달콤한 과일잼 비스킷을 씹으며 눈을 감았다.

“네가 요즘 크고 작은 걱정이 많다는 걸 알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커다란 그의 어깨가 뻣뻣하게 흔들린다. 불편한 티를 최대한 내지 않고 소파에 기대는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무슨 의미일까. 걱정이 많아도 앤드류는 멀리하라는 소리인가.

“왜 많은지도 알아?”

답을 기다렸으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혀에 남은 비스킷 조각을 잘게 씹어 삼켰다.

“네가 나에게는 아무런 말도 털어놓지 않아서야.”

설마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되는 때가 올 줄이야. 그것도 심지어 네자르에게.

“이해해. 내가 못 미더워서 그렇다는 걸. 그런데 이해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더라.”

“네가 못 미더운 게 아니야, 케이트. 너야말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군.”

어디선가 손이 올라와 콧등을 툭, 치고 사라졌다. 내가 기댄 어깨의 손이었다.

“너는 천성이 딱한 것을 두고 못 봐. 엔테라의 여식을 유독 더 신경 썼던 것도, 에젤로트 정원에 도둑고양이가 바글바글한 것도 다 그 탓이잖냐. 기억할지 모르겠다만, 너는 어릴 때 종종 숲 속에서 다친 사슴과 여우를 끌고 와 치료해 주곤 했어. 이미 사냥당해 내장이 다 파였던 사체를 말이지. 그런 날이면 성에 썩은 고기 냄새와 날파리가 얼마나 진동을 하던지.”

어머니에게 밥 먹듯 혼쭐이 나던 시절이라 그리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천성이 딱한 것을 두고 못 본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카론과 가까이 지낸 건 그 애가 불쌍해서가 아니야. 나는 그저…….”

“정말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리고 네자르를 응시했다. 그는 소파에 편히 앉은 자세 그대로 툭, 툭 제 무릎을 두들겼다.

“널 방조한 죄로 에젤로트에서 쫓겨났던 시녀장 기억나? 한참도 더 된 오래전, 에젤로트 소백작이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 널 돌봐 주는 데이지가 시녀장의 미움을 사 늘 안쪽 살이 상처투성이였다지.”

기억난다. 내가 직접 그런 소릴 에든에게 했었으니까.

“데이지가 온 이후로 시녀장이 네 음식에 장난질하지 못했다며? 네 전속 시녀가 제 맘대로 되지 않으니 폭력으로 분풀이를 했던 모양이야. 그 애에게 연고를 주기 위해 괜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없는 상처를 만들어 왔다고 들었다. 그래야 새 연고가 생겨 데이지에게 줄 수 있으니.”

에든이 그걸 다 네자르에게 불었단 말이야?

나는 불만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정으로 나타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많은 것과 네자르가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 그리고 지나간 옛일이 다 무슨 상관이람.

“나의 사랑스러운 케이트, 얼마나 속이 깊은지, 말하는 내 마음이 다 아릴 정도야. 돌이켜 보면 네 엉뚱한 행동의 반은 그럴싸한 이유들이 있었지. 당시에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다고 여겼지만…….”

작은 한숨이 들렸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유영하다 내 손등의 어딘가로 안착했다. 정확히는 반지가 걸린 약지로.

“그래도 앤드류는 안 돼.”

이 갑작스러운 기시감은 뭘까. 착각이 아니라면, 네자르는 최근에 지금과 비슷한 소릴 했던 적이 있었다. 누구의 이름을 입에 담았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흐릿했다. 판시온? 판시온 소공작이었나?

반지와 손가락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금방이라도 녹아 버릴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니 괜한 동정심으로 그 애를 돕지 말렴. 이미 본인 스스로 어떻게 할지 정한 아이야. 네 행동은 혼동만 줄 뿐이다.”

정작 당사자인 나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랬던 건가. 나는 순전히 앤드류가 불쌍했던 거였어. 앤드류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오늘 딱 잘라 나를 거부했던 거야.

그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앤드류를 죽일 거야?”

“그럴 리가.”

네자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부정했다. 그 말에 안심이 되었지만, 가슴 한구석의 불안감은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그럼 내가 좀 이용해도 되는 거잖아. 왜 안 돼? 그 정도는 허용해 줄 수 있으면서.”

그의 표정이 뒤얽힌 실처럼 복잡하게 맞물려 간다. 무언가 말하려던 입술이 닫히고, 이어서 한 번 더 열린 입술이 꽉 다물렸다.

“하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이마를 짚으려 팔을 뻗었으나 네자르의 손에 보기 좋게 막혔다. 그는 내 손목을 당겨서 품에 안았다. 윽, 코 아파. 나는 딱딱한 가슴팍에 부딪힌 코를 매만지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왜 안 되겠어? 당연히 싫으니까지.”

매섭게 노려본 그가 양손으로 내 뺨을 잡아당겼다. 그것도 엄청 세게!

“너는 그걸 꼭 내 입으로 떠들어야 알겠냐? 응?”

머리를 박을 기세로 확 다가오는 얼굴에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꼬옥 감았다.

“그, 그야 하두 딘디하게 마라기에 나눈 대다나 이유라도 있는 주 아고…….”

“그래그래, 멍청한 내가 또 잠깐 잊고 있었다. 우리 케이트는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제대로 알아듣는다는 걸.”

입술에 무언가 가볍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서, 설마 입맞춤한 거야? 깜짝 놀라 눈을 떴지만 네자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서운 눈빛 그대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제대로 말해 주지. 지금도 앞으로도 평생 다른 남자는 안 돼. 눈치가 있으면 적당히 편들란 의미야. ……뭐, 내가 추하게 질투하는 꼴이 보고 싶다면 한 번쯤 시도해 봐도 괜찮기는 하겠군.”

“안 된다면서 괜찮다는 건 또 뭐야. 말이 앞뒤가 다르잖아?”

“요점은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거지. 이제는 알아들었어?”

내 허리를 잡아 번쩍 든 그가 차분히 바닥 위로 날 내려놓았다. 얼떨결에 앉은 자세에서 선 자세가 되어 버린 난 눈앞으로 내밀어진 네자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저녁 식사 하기 전에 산책이나 하자. 속이 답답해서 실내에 더는 못 있겠다.”

성큼성큼 나아가던 걸음의 폭이 점차 좁혀졌다. 이 넓은 성안에서 그가 나를 잃어버릴 일은 없을 텐데, 맞잡은 손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했다.

“음. 설마 답답한 게 나 때문은 아니지?”

“너 때문이야.”

“아니! 내가 앤드류랑 손을 잡았어, 데이트를 했어? 기껏해야 같이 몇 번 좀 만난 것 가지고 자꾸 이럴래?”

네자르가 내 손을 확 끌어 제 턱 아래로 가져다 댔다. 그야말로 불만스러움이 철철 넘치는 얼굴이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뚱한 얼굴로 내 손을 주물럭거리던 그가 돌연 손가락을 콱 깨문 것이다. 악! 나는 경박스럽게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고 네자르의 등을 퍽퍽 내려쳤다.

“미, 미쳤어? 미쳤냐고! 왜 남의 손가락을 깨물고 그래? 짐승이야? 심지어 엄청 아파!”

아까 볼 꼬집을 때도 그렇고, 예전에는 보석 만지듯 소중히 대했으면서!

남의 손가락을 씹어 문 주제에 네자르의 뚱한 표정은 여전했다. 그는 다시 내 손을 빼앗아 꽈악 쥐었다.

“여기에 네 것이 어딨어? 다 내 거지. 이 나라도 내 거, 성도 내 거, 네가 낀 반지도 내 거, 너도 내 거.”

만물의 법칙이라도 읊조리듯 단호하고 선명한 목소리였다. 애 같은 말을 저리도 진지하게 하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 이런 소리 들으면 행복감에 두근두근 떨려야 하는 거 아니야? 분명 부끄럽고 좋기는 한데 왜 소름이 돋는 거지.

“내가 왜 네 거야? 네가 내 거지. 잊었어? 프러포즈를 한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그러니까 네가 내 거야.”

지지 않고 반박했다. 하지만 네자르의 까칠한 분위기에는 조금도 금이 가지 않은 듯했다.

“너야말로 내가 널 업어 키웠다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면 밤송이를 까 주고, 황성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징징거리며 우는 날에는…….”

“악! 몰라, 몰라!”

사람이 어쩜 나이를 먹어도 변함없이 야비할까? 그런 식으로 어릴 적을 들먹이면 내가 어떻게 이겨? 양 귀를 틀어막은 채 정면으로 내달렸지만, 이내 따라잡은 네자르의 팔뚝 아래로 갇혀야 했다.

“어딜 나 몰라라 도망가? 잘 기억해 둬, 케이트. 너는 내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 작은 몸을 잘 간수하는 게 이로울 거야. 나도 내 치졸함의 끝을 시험해 보고 싶지 않거든.”

소리 내어 웃는 목소리가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릴 수 없었다. 나는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반쯤 그의 품에 안긴 채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어야 했다.

***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아래로 쇠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록허드는 처음에 무슨 걱정이 있는 걸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땀이 뻘뻘 흐를 정도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저렇게 그늘진 얼굴로 서 있을 수 없었으니까.

조용히 남자의 뒤에 선 록허드는 그의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드넓은 경기장 옆의 시끌벅적한 관람석.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보였다.

“죽여 버려, 조르단 경!”

거세게 양산을 흔드는 캐롤라인 악토르와.

“죽이려는 상대를 죽여!”

그 옆에서 악을 쓰는 필프론츠 후작.

그리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다. 마상 대회 결승전에서 난리 치는 저 두 가문의 모습은 북벌 전부터 유명했으니까. 다만 그들 옆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의 케이트는 백조 속의 까마귀처럼 보였다.

“죽이려는 상대를 죽이려는 상대를 죽여 버려요, 조르단 경!”

“그 죽이려는 상대를 죽이려는 상대…….”

지지 않고 외치려던 필프론츠 후작의 입이 닫힌다. 분위기를 봐선 카론 엔테라에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었다.

록허드는 자신의 하나뿐인 어린 누이의 말간 얼굴을 응시했다. 중간중간 입을 열어 앤드류 황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캐롤라인의 야단법석을 중재하는 모습이 참으로 어색했다. 케이트가 저렇게 많은 사람 틈에서 지낼 수 있는 아이였나.

북벌 전까지만 해도 타인에게 말을 걸기 어려워 버벅대던 아이였다. 그녀의 변화는 새삼스럽다면 새삼스러웠고, 어찌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다 커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정말 황태자비가 되기 일보 직전이라니. 곱게 키워 잡아먹는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

잡념을 지워 낸 록허드가 조용히 앞에 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단장.”

“무슨 일이지, 록허드.”

록허드는 인상을 팍 구기고 그 옆에 섰다. 설마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 판시온 엔테라가 저인지 알아챌 수 없었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직도 나를 단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경밖에 없으니까. 그만 부르래도 바뀔 생각을 않는군. 참 자네다워.”

머쓱하게 목덜미를 주무르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황성에서 가장 큰 신장을 자랑하는 판시온의 그늘로 들어서니 어느 정도 더위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여동생의 혼인 일정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불어 케이트의 혼인 일정도 잡혔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일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미 공표한 적이 있으니까.

약혼을 무르겠다며 그렇게 난리 치던 케이트의 모습이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선명했다. 둘이서 잘 해결하였다니 그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테다.

“후작이 꽤 고생했어. 설마 저 정도로 푹 빠질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결혼하자며 조르는 모습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참 아쉽습니다.”

“그런 걸 봐서 뭐 하나. 전혀 궁금하지 않은 광경이야.”

그리 말하는 판시온의 시선은 여전히 시끌시끌한 관객석, 정확히는 케이트를 향해 있었다. 네자르가 으름장을 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냥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 건가.

“그만 포기를 좀 하시죠.”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여자 말입니다.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나중에 고생하실 것 같아서요.”

판시온이 픽 웃었다. 밍밍한 반응을 봐선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게 분명해 보였다.

하긴, 그런 일이 있었는데 판시온 성격에 모르는 척 뺀질뺀질하게 굴 리 없었다. 그라면 네자르가 굳이 경고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물러섰을 것이다. 켈 로망드가 케이트를 건든 순간 패기 있게 호감을 드러냈던 일들도 전부 다 의미 없는 도발이 된 거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케이트를 훔쳐보실 바에야 차라리 저의 잘난 얼굴을 보는 게 어떻습니까?”

“더위라도 먹은 건가?”

“처량해서 그럽니다, 처량해서.”

록허드는 정수리 위로 느껴지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눈을 마주하던 판시온이 무뚝뚝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틀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달라졌을 거라는 소립니까?”

그 물음에 묵묵히 경기를 보던 판시온이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장담하기 힘들군.”

축 처지기만 하는 분위기를 봐선 썩 좋지 못한 대화 주제 같았다. 이거, 다른 방향으로 틀어야 하나.

얼마 안 가 심판이 승자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올해도 역시 악토르 가문의 우승이었다.

“약혼 상대가 정해졌다고 하던데요. 누굽니까?”

“잉고르.”

“잉고르? 잉고르 가문에 여식이 있던가요?”

“올해 열여섯이라더군. 일주일 내로 약혼 서약을 치르고 성인이 되자마자 혼인할 예정이다.”

스물아홉에 열여섯. 판시온이 엔테라 공작가의 후계자임을 상기하면 그리 흔한 조합이라 할 수 없었다. 고위 귀족의 자녀는 보통 열 살이 조금 지날 무렵 약혼 서약을 치르기에 신랑 신부의 나이 차가 크게 벌어지기 힘들다. 판시온 같은 경우는 귀족 사회에서도 퍽 드문 경우였다.

“이야기는 들었나?”

“이야기요? 너무 많은 걸 들어서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대관식.”

네자르의 대관식? 록허드는 뜬금없는 소리에 멍하니 턱을 들고만 있었다. 하나 판시온의 저의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마, 벌써 정해진 겁니까?”

이런 상황에 황태자의 대관식 일자가 정해지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다.

“내일 밤에 결정 날 확률이 높다더군.”

“왜 이제야 알려 주시는 겁니까?”

“자네가 어제 농땡이를 치느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이지.”

겨우 하루 불참했을 뿐인데 그런 중요한 사항이 오갔을 줄이야. 록허드는 더위에 노곤해진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지루한 얼굴로 황좌 옆에 자리한 네자르를 응시했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황성이 곧 소란스러워지겠군요.”

“소란스럽다고 표현할 필요가 있나, 그저 전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악토르의 기사가 창을 꼿꼿이 들고 자신의 레이디 앞으로 자랑스레 전진한다. 곧 기사의 창에 캐롤라인 악토르의 손수건과 케이트의 손수건이 걸렸다. 보나마나 뻔했다. 캐롤라인 영애가 부탁한 일이겠지. 현명한 여인답게 급변한 정세를 곧장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네자르가 또 한 소리 하겠군.”

혹시나 했더니, 저 멀리 보이는 네자르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귀여운 내 동생. 너는 꼭 이런 부분에서 눈치가 없구나. 록허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래서, 날짜는 정해진 거야?”

“큰일이 없다면 석 달 후 엔테라에서 결혼식을 치르게 될 것 같아요. 마침 릴리 영애의 방학도 가을에 있다고 하니, 열흘 동안 함께 엔테라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마주 웃는 카론의 얼굴이 묘했다. 혼인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 역시 곧 내 결혼식이 치러진다는 게 믿기지 않으니까.

“신기하지 않아요?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혼인 일정이 잡히다니.”

“나는 네가 필프론츠 후작의 프러포즈를 냉큼 받아들였다는 게 더 신기해. 내가 아팠던 사이 둘이서 참 좋은 일들이 많았나 봐? 응?”

카론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살다 살다 필프론츠 후작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카론을 보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다 카론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릴리가 우리 소식을 들으면 아주 까무러치겠어.”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괜찮다면 황성으로 입성하기 전에 함께 아카데미를 방문하지 않을래요? 이런 기쁜 소식은 직접 전해야 옳은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했었어.”

이틀 후에는 세피아 부인과 만나기로 했으니 아카데미는 그 이후에 찾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나흘 후는 어때? 그때 아카데미에서 만나…….”

“케이트 영애.”

그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다과가 가득한 정원 테이블 옆으로 싱글싱글 웃는 낯의 남자가 걸어왔다. 론이었다.

“아, 엔테라 영애도 계셨군요. 뒤편에 필프론츠 후작님이 우는소릴 하고 계시던데, 들으셨습니까?”

“우는소리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마상 대회에서 졌기 때문이겠지.

“마상 대회에서 우승했어야 체면이 사는데, 하필 져도 악토르에게 졌다며 울부짖고 계시더군요.”

역시는 역시였다. 론의 말에 얼굴을 구긴 카론이 손에서 찻잔을 내려놨다.

“그래요? 그 사람도 참…….”

황태자의 보좌관이 심심해서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고, 내게 볼일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가 보도록 해, 카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오전에 서신으로 보낼게.”

카론도 론이 찾아온 이유를 대강 눈치챘는지, 지체 없이 일어서며 내게 다가와 가볍게 포옹했다.

“알았어요. 우리 나중에 봐요, 케이트.”

카론이 멀어진 후 나 역시 의자에서 일어섰다. 커다란 차광막과 차가운 음료에도 불구하고 이미 목 뒤에는 땀이 가득했다.

“하려는 말이 뭐야?”

“전하께서 영애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론이 직접 날 데리고 간다고? 나는 멀리서 대기하고 있는 데이지에게 손짓했다. 뛰듯이 걸어온 데이지가 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 될 건 뭐겠어. 바로 네자르의 성으로 가면 돼?”

“아니요. 오늘은 황성이 아닙니다. 아! 데이지 양은 황성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저어기 정원 옆에 마차가 하나 대기하고 있으니, 어서 가 올라타시죠.”

그렇게 데이지는 내 옆자리에서 쫓겨났고, 나는 론의 안내를 따라서 또 다른 마차에 몸을 실었다.

“대체 어디로 가기에 그래?”

“곧 도착합니다.”

그거 하나 말해 준다고 어디 덧나나.

론의 말대로 황성을 벗어난 마차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전에 방문한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다. 야외 테라스에서 보이는 풍경이 일품인 건물의 4층 레스토랑. 제도 외곽을 따라 흐르는 큰 폭의 강물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안녕, 케이트.”

늘 손님이 길게 줄 서 있던 레스토랑은 어쩐 일인지 텅 비어 있었고, 네자르는 테라스에 기댄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들어지게 넘긴 머리와 실크 넥타이. 마치 무도회라도 나서는 것처럼 근사한 차림이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잘생겼을까. 변치 않은 미모에 감탄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황성 밖으로 부르다니.”

테라스 아래로 번잡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나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에 몸을 맡긴 채 네자르 옆에 섰다. 쉬지 않고 괴롭히던 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어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나 빠뜨렸더라고.”

“중요한 일?”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킨 그가, 짙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한다.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것 같기도 하고, 반복되는 헛기침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얇게 뜨고 네자르를 흘겨봤다. 아, 정말. 뭘 또 준비한 거야? 자꾸 웃음이 나오려 하잖아!

“그래, 속으로 수십 번은 그려 왔던 일인데…….”

저 혼자 중얼거리던 네자르는 급히 걸음을 옮겨 실내로 뛰어 들어갔다.

“푸흡.”

뭐지? 대체 뭘 준비했기에 네자르답지 않게 또 긴장하고 있담. 너무 귀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잖아!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제자리 뜀박질을 반복했다. 이윽고 테라스로 돌아온 네자르의 품 안에는.

“사랑해, 케이트. 나와 평생을 함께해 주지 않을래?”

그의 정수리도 겨우 보일 정도의 거대한 장미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였다. 전부 몇 송이일까? 백? 이백? 대답은 고사하고 일단 네자르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문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는 점이었지만.

“……너, 너무 무거워!”

크기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몸이 천천히 뒤로 기울기 시작한다. 급히 등을 받쳐 낸 팔이 내게서 꽃다발을 반쯤 빼앗아 갔다.

“잠깐, 케이트? 다시 나한테 줘 봐. 그러다가 너, 넘어지겠어.”

“이것도 문진처럼 줬다 뺏으려는 거야? 절대 안 돼. 한번 받았으면 내 거지!”

“하아. 안 뺏을 거야. 원한다면 네 침실을 가지각색의 꽃으로 한가득 채워 줄 테니 우선 놓기나 해.”

이대로 넘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그의 말대로 손을 놓았다. 내게서 다시 꽃다발을 가져간 네자르는 뚜벅뚜벅 걸어가 테라스 창가에 꽃다발을 내려놨다.

이렇게 봐도 엄청 크네. 강바람을 맞으며 내게로 되돌아오는 장신의 남성을 올려다봤다. 낯부끄러움을 숨기려는 기색이 낮게 진 구름 그림자 아래로 역력하다. 나는 다가오는 우주 최고 미남을 양팔 가득 끌어안았다. 코끝으로 덮쳐 오는 짙은 장미 향에 정신이 어질했다.

“어머니 말이 마음에 걸렸구나. 그렇지?”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대답하는 주제에 목소리는 땅거미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네자르는 왜 정도를 몰라? 맨 처음 프러포즈할 때는 문진 하나만 덜렁 던져 주더니, 그다음은 덜덜 떨면서 반지 하나도 겨우 주고. 오늘은 저 집채만 한 장미꽃이야? 뭐가 이리도 허술해.”

크흠. 네자르가 몇 번째인지 모를 헛기침을 다시 반복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행복감에 젖은 채 주절주절 입을 열었다.

“다음 고백 때는 뭘 줄 거야? 반지랑 꽃을 줬으니 이제는 뭘 주려나. 제아무리 카발의 황태자라 해도 하늘의 별은 못 따다 주겠지.”

“아주 놀리는 데 날을 잡았군. 꽃다발은 디저트와 함께 마차에 옮겨 실어 놓을 테니 에젤로트에 가서 실컷 구경해. 이왕이면 네가 좋아 죽는 생크림 딸기 케이크를 먹으면서.”

“디저트?”

“서른 개가 넘는 조각 케이크를 포장한 탓에 상자의 수가 너무 많아졌어. 뒤로 작은 마차가 하나 더 따라갈 거다. 누구 주지 말고 혼자 다 먹도록 해.”

마치 금방이라도 황성으로 돌아가 버릴 듯 훌훌 털어 버리는 소리다. 나는 사랑스러운 생크림 케이크가 가득하다는 말에도 속절없이 우울해져선 몸을 떼어 냈다.

“바빠?”

바쁘겠지. 아마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바쁠 거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테고, 심하면 세 개여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네자르는 그만큼이나 꼼꼼하고 완벽하게 일을 끝내는 인물이었다. 그리 여기니 더 보채고 싶은 어린 바람과 잡념이 물밀듯 쓸려 내려갔다.

“큰일이 없는 이상 당분간 보기 어려울 거야. 남쪽 지방에 큰 홍수도 일어나고, 이번에 워낙 큰 탈세 건도 잡혀서 여러모로 일이 복잡해.”

허리를 숙인 네자르가 내 목 근처로 얼굴을 파묻었다. 길게 삼켜지는 숨에 살갗 위로 우수수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간지럼을 참으며 가만히 서 있는데, 느릿하게 고개를 든 네자르가 웃옷을 벗어 내 맨 어깨를 덮었다.

“그냥 결혼식까지 내 성에서 먹고 잘래?”

저런 미모로 저런 말을 하면 아무리 이성적인 나라도 홀라당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럴 순 없지, 어머니께서 분명 아쉬워하실 텐데. 조용히 고개를 젓자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 건물을 나섰다. 그의 말마따나 에젤로트의 마차 뒤편에 사륜마차가 하나 더 대기하고 있었다. 덤으로 론과 함께.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케이트 영애. 전하께서 워낙 걱정이 많아, 믿음직스러운 제게 영애를 맡기지 않고선 발 뻗고 일할 수 없으시겠다더군요.”

“너는 헛소리를 참 길게도 하는군.”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내 허리를 번쩍 든 네자르의 팔이 마차 안으로 향했다. 그는 아쉬움이 흘러넘치는 표정으로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널 둘러업고 황성으로 향하기 전에 서둘러 가는 게 좋겠어.”

씁쓸한 기색을 넘어 무거운 우울함이 전달된다. 이윽고 론이 올라타면서 마차의 문이 닫혔다. 허공으로 네자르의 외로운 시선이 잔상처럼 남은 기분이었다.

만약, 네자르의 마음이 나의 마음보다 훨씬 더 비대하다면. 그렇다면 그는 나의 빈자리를 과연 무엇으로 채울까. 무늬뿐인 형제와 무늬도 남아 있지 않아 보이는 모성애가 과연 그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랜 시간을 함께한 론이? 그도 아니면 반평생을 함께한 록허드가?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입성 후에는 평생 지겹도록 함께하게 되실 텐데요.”

론의 말대로 나는 지금 네자르와의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물론 벌써부터 그가 아쉽고 그리웠지만, 그보다는 언뜻 보인 우울한 기색에서 더 눈을 떼기가 힘들었던 거다. 긴 시간을 묻어 놓았던 그의 또 다른 면을 이제야 뒤늦게 발견한 것 같았기에.

“영애가 계실 때의 전하는 마치 다른 사람 같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꾸며 낸 모습이라 여겼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꾸밈 하나 없는 진정한 모습일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꾸밈이라니,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러 번 들어 본 소리이기는 하지. 창으로 가까이 향해 있던 고개를 빼고 의자에 편히 기댔다. 이렇게나 자주 들르는 것을 보면 내가 알던 네자르가 정말 거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해?”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순전히 제 느낌일 뿐입니다.”

“론.”

나의 부름에 웃음기가 어려 있던 그의 얼굴이 가벼움을 거둬 내고 단정해진다.

이 남자는 네자르의 곁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까.

“론은 내가 네자르에게 도움이 되길 원해?”

네자르가 내게 숨기는 치부도 그는 낱낱이 알고 있겠지.

“글쎄요. 굳이 도움이 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케이트 영애는 케이트 영애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내 태생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말이구나.”

론이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이 아가씨가 적당히 넘어가려나, 하는 얼굴이었다.

“에젤로트가 아니었어도 지금과 다를 바 하나 없었을 겁니다. 록허드 경에게 여쭈어도 저와 같은 대답이 나왔을 게 분명합니다.”

“내가 누구고 무얼 해도 네자르는 상관 않는단 소리야?”

“네.”

네자르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이면서도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말하는 어조가 도움은커녕 걸림돌이 된다는 투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맞아. 론이라면 마땅히 그리 여길 사람이야. 내 막 나가는 모습을 가장 오래 보아 온 인물 중 한 명이잖아?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황태자비는 가벼운 자리가 아니야, 론. 그래서일까, 요즘 걱정이 많아. 내가 어떻게 해야 명예로운 지위에 걸맞게 책임감 있고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네자르에게 부족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영애께서는 늘 같은 자리에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네자르 전하의 짐을 덜어 낼 수 있으십니다.”

또 같은 소리다. 네자르보다 이쪽이 날 더 철없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짜증을 숨기기 위해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나도 잘 알아. 요즘은 본보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를테면 황후 폐하 같은.”

론의 반응은 지루하리만치 한결같았다. 약간의 동요도 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장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마냥 아이 같았던 영애께서 이리도 깊은 생각을 하시게 되다니. 제가 다 감개무량한 기분입니다.”

“깊은 생각? 황후 폐하를 닮고 싶다는 게 깊은 생각이야?”

“그럼요. 네자르 전하를 생각하는 그 마음 자체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마음씨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곱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은근슬쩍 황후에 대한 발언은 삼가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역시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이토록 다르다. 예전이었다면 그저 칭찬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기분이 들떠 있었겠지.

“하아, 론은 너무 능구렁이라 빙 둘러서 말하기가 피곤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앞에서는 하하 호호 웃고, 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칼을 갈 수 있는 거지? 역시 나는 글러 먹었어. 상대방의 마음을 슬쩍 떠보거나 원하는 행동으로 유도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 케이트! 그냥 너답게 행동하는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자르와 황후 폐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이왕이면 황제 폐하와의 관계도, 가능하다면 앤드류도, 괜찮다면 에자렛 황녀 역시.”

그제야 론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탐색하는 눈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나는 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너무 궁금하다는 의사를 피력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떠 노려봤다. 론의 대답은 상당히 의외였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교묘하게 말을 피할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지하게 이유를 물을 줄이야.

“……네자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치부라고 했어. 깊숙이 묻지 않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지. 나 역시 그런 것 따위 몰라도 서로에게 기댈 수 있을 거라 확신했거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나와 네자르를 지켜본 자이니, 거짓을 꾸며 내는 건 소용없을 테다.

“한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아. 서로를 잘 몰라도 그저 이해해 주면 된다고 여겼던 거지.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모르는 채로 이해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데.”

“과거를 안다고 하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알고 싶은 걸 어떡해? 론은 네자르가 내게 모든 걸 숨기고 혼자서 모든 외로움과 우울을 감수하길 원하는 거야? 그게 내가 네자르의 짐을 덜어 주는 일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저 홀로 어른인 척하는 네자르가 너무나 답답했다. 얼마나 답답하냐면 지금 당장 마차를 멈추고 달려가 그의 멱살을 거칠게 흔들고 싶을 정도였다.

“네자르 전하께서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매정하면서도 냉철한 대답에 나 역시 진지한 마음을 담아서 말했다.

“론만 입을 닫으면 돼. 그럼 아무런 문제 없을 테니까.”

이런 날 비겁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네자르에게는 네자르의 방식이 있듯이, 나에게도 나만의 방식이 있는 거잖아?

“나는 네자르를 사랑해. 론이라면 이런 내 마음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걸, 알아줄 거라 확신하고 있어. 그렇지? 내 말이 맞지?”

고민이라도 하듯 론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 역시 더는 조르지 않고 얌전히 그의 대응을 기다렸다. 이윽고 열린 그의 입에선 평생을 들어 본 적 없는 탁하면서도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기하네요. 지금 제 앞의 케이트 영애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게. ……잘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요. 열 살 무렵에 처음 만났던 꼬마 아가씨가 이리도 크게 자라셨으니. 에젤로트의 똑똑한 형제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겠군요.”

론의 얼굴은 어느새 짙은 회상에 젖어 있었다. 록허드 못지않게 가볍고 능글맞기 바빴던 그에게서 쉬이 볼 수 없던 분위기였다.

“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제가 네자르 전하를 처음 뵈었던 건 전하의 나이가 딱 열한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의 전하는… 무어라 표현해야 어울리려나. 케이트 영애와 참 비슷한 점이 많았죠. 그래요, 정말 많았어요. 특히나 다듬어지지 않고 흉흉했던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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