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오전부터 거센 비가 내렸다. 침실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조경이 엉망이다. 분수대가 넘치는 건 물론이고 양옆으로 단아하게 정돈되어 있던 풀덤불의 풀과 가지가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새벽부터 계속 내렸으니 강이 범람했겠네.”
록허드가 있었다면 꼬드겨서 강가로 구경을 갔을 텐데. 록허드는 단장직으로 복귀한 즉시 북벌을 준비하던 시기처럼 황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려는 걸까. 느낌이 좋지만은 않다.
점심 식사 대신 밀크티만 가볍게 비운 나는 외출 준비도 안 한 김에 1층으로 느긋하게 내려갔다. 장대비가 온종일 내리니 성안도 습하고 추웠다.
나는 실내 드레스와 가운도 벗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밖에 나갔다. 한 손에는 주방 장식장 안쪽에서 꺼내 온 숙성된 닭고기와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은 낡고 작은 나무 수납장을 쥔 채였다.
성 내부보다 오히려 밖으로 나와 비를 맞는 게 더 따뜻한 느낌이었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정원 내부로 들어갈 동안, 그새 눈치를 챘는지 등 뒤에서 데이지의 부름이 들려왔다.
“아가씨!”
굳이 따라 나올 필요 없는데.
내 걸음은 정원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금방 멈추었다. 난 정원 풀숲 사이를 헤치면서 땅을 살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빗물로 넘치는 작은 접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에, 아가씨! 이러고 나오시면 감기 걸려요! 저번처럼 또 일주일 내내 끙끙 앓고 싶으세요?”
“안 걸리니까 잠깐만 이 그릇 좀 들고 있어.”
접시를 치우고 그 자리에 수납장을 옆으로 눕혔다.
“좋아. 이 정도면 빗물도 새지 않고 나름 아늑하겠어.”
“이게 뭔가요?”
“고양이 집.”
데이지에게서 그릇을 받아 내 수납장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 꼴이 웃긴지, 이미 홀딱 젖은 내 몸을 우산으로 가리기 바쁘던 데이지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저라면 이렇게 비 내리는 날 여기까지 안 올 거예요.”
“맞아. 나라도 그럴걸?”
“그런데도 굳이 이런 일을 왜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굽혔던 무릎을 펴니 가운의 밑단은 이미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모를 것까지는 뭐람. 급히 내 어깨 위로 담요를 올리는 데이지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굳이 알 필요 있어? 할 일 없이 느긋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게 내 로망이야.”
“이게 아가씨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음. 사실은, 오늘 밤에 정원 고양이가 죽는 꿈을 꿨거든. 계속해서 떠오르길래 머리도 식힐 겸 나와 본 거야.”
진흙투성이의 장화를 신은 상태로 성안에 돌아왔다. 우산을 접고 수건으로 내 머리를 터는 데이지의 손길이 시무룩했다.
“차라리 제게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그런 일을 대신 하라고 있는 게 저인데.”
“머리 식힐 겸 나갔대도.”
“아가씨, 요즘 이상한 거 아셔요? 아니, 평소에도 이상하셨지만 근래 들어선 더욱 이상하신 것 같아요.”
“너, 나 걱정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욕하는 거지?”
어깨를 움찔한 데이지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멀어졌다. 나는 젖은 몸을 이끌고 벽난로로 걸어갔다. 불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으니 차갑게 식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렇게 느릿느릿 외출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의 시침이 약속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기대했던 약속 시각은 이런 날씨가 아니었다.
“아가씨, 엔테라 소공작님께서 도착하셨어요.”
나는 문밖을 나서 에젤로트까지 나를 마중하러 온 판시온에게 밝은 웃음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 날씨가 좀 짓궂죠?”
“화창하지는 않네요. 하나 극을 관람하기에는 적격인 날씨인 것 같습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멋진 외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아주 근사했다. 마치 극에 등장하는 주연처럼.
“연극이 정말 기대돼요. 카론에게 건너들은 바로는 전체적인 줄거리가…….”
휘이이잉. 거센 비바람이 내 뺨을 치고 지나갔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머리를 세게 틀어 올렸는데, 벌써부터 잔머리들이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엉망으로 구겨졌던 표정을 힘들게 폈다.
“……줄거리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관련 있다고 했어요. 혹시 소공작은 평소에도 연극을 자주 보시나요?”
“종종 봤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바빠서 본 기억이 없지만요.”
조심스럽게 팔을 뻗은 판시온이 내 뺨 위에 붙은 머리카락을 뗐다.
“아무래도 연극이 끝난 후 저녁 식사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 정도는 예상했어요. 이미 선금을 주고 방문하지 않으면 취소해 달라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해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낭패인 얼굴을 한 판시온이 데이지로부터 우산을 건네받았다. 시종이 나와 마차의 문을 열었지만, 어째서인지 사뭇 엉킨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이 기세면 밤늦게까지 비가 올 겁니다. 제도까지 나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상관없어요. 음, 물론 드레스가 걱정이기는 하지만… 더러워지면 새로 사면 되죠!”
이게 바로 있는 자의 여유 아니겠는가. 없으면 새로 사고, 있으면 더 좋은 걸 사고. 내가 걱정 없다는 듯 방긋 웃자, 잠시간 굳어 있던 판시온도 옅게나마 따라 웃었다.
“몸이 좋지 않으면 꼭 돌아오셔야 해요, 아가씨.”
데이지는 내가 마차에 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비가 퍼부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더 예민한 반응이었기에 ‘이상한 짓을 하지, 아니 아무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걸어 약속해야만 했다.
“고용인들과 굉장히 가깝게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데이지요?”
나는 팔에 묻은 물기를 털고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마차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댔다.
“글쎄요. 오늘따라 유독 더 걱정이 많은 것 같아요. 낮에 장난을 조금 쳐서 그런가 봐요.”
“장난 말입니까?”
“별거 아니에요. 그냥, 고양이에게 밥을 주느라 비를 좀 맞았거든요.”
이후로도 적잖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껍질만 남은 채 속은 텅 빈 대화였다. 혹여 판시온 역시 그리 여길까 싶어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도 그 부분은 나만의 착각인 것 같았다. 단순히 내 심리적 문제겠지. 아마 극장에 도착하면 금방 다시 즐거워질 거야.
거센 비였기에 마차가 제도에 도착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나와 판시온은 가까스로 극장에 입장할 수 있는 시각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게, 마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양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컸다.
“문제가 있나요?”
“죄송합니다, 영애. 이는 리마리아 극단의 수치와도 마찬가지이고, 반드시 실수에 걸맞은 보상을 드리리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극장 안은 연극을 관람하지 못해 한데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자세한 경위도 설명하지 않고 사죄하기 바쁜 직원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뭐가 죄송한 일인지 말하래도요.”
“새, 새벽 사이에 내린 번개로 극장 뒤편에 불이 났습니다. 건물이 불타고 비가 스며들어서 무대가 엉망진창이 돼 도저히 공연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번개로 건물에 불이 났다고?
천재지변 그 자체였기에 진상처럼 성질도 부릴 수 없었다. 꿈을 꾸려면 제도까지 헛걸음하지 않아도 될 예지몽이나 꾸지, 재수 없게 고양이 죽는 꿈은 왜 꾼 거람.
세차게 내리는 비에 더불어 공연 취소라니. 나는 판시온에게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이 연극을 보기 위해 장장 1시간을 소요해 찾아왔는데, 보상은 어쩔 거예요?”
“보상에 관련해서는 현재 극단 내에서 회의 중입니다. 우선 로열 플래티넘 분들께는 비를 피할 수 있는 호텔 숙박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바로 방을 드리겠습니다.”
“호텔은… 됐어요.”
차라리 양해를 구하고 판시온을 엔테라로 돌려보내고 말지. 나는 보상안을 전달받을 이름과 주소를 남기고 극장을 나왔다. 당연하게도, 바깥은 여전히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꾸역꾸역 나왔다는 사실이 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은 영 운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올해의 악운을 다 덮어쓴 것처럼요.”
나는 축축하게 젖은 건물 입구의 바닥보다 더 무겁고 습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죄송해요. 차라리 에젤로트에서 차나 마실 걸 그랬죠?”
“그것도 괜찮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습니다. 물론 케이트 영애께서는 움직이는 게 피곤하시겠지만요.”
교양서적에 나올 법한 친절하고 상냥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내 죄책감이 반감되는 건 아니었기에 적어도 판시온과 1시간은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모색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것처럼 뻔하지 않고, 제도에서만 갈 수 있는 장소, 무엇보다 비가 와도 즐길 수 있는 곳. 으으음. 딱 한 곳 있기는 했다.
“소공작, 혹시 강 좋아하세요?”
말하면서도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판시온이었다면 이 제안은 분명히 거절할 거야.
“제도의 성벽을 따라서 카냐로스강이 흐르잖아요.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아주 장관일 거예요. 같이 구경하러 가실래요?”
퍼붓는 비로 폭포수처럼 콸콸 흐르는 강이라니, 정말 낭만도 상큼함도 없는 선택지였다. 그러나 판시온은 인상 한번 구기지 않고 고개를 주억였다.
“범람하는 강이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그가 긍정적인 의사를 나타냈기에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마차에 다시 올라 7분가량을 달려 제도를 감싸고 있는 성벽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 나란히 걷던 우리는 강줄기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엄청난 소음과 거센 추위를 경험해야 했다. 폭발하듯 흘러 내려오는 흙색의 강줄기. 발등 바로 앞까지 튀는 물.
심지어 카냐로스강을 응시하는 판시온의 시선이 더없이 진지하다.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으십니까?”
강 흐르는 소리가 너무 커 판시온의 목소리가 선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대답했다.
“연극 대신 강을 구경하는 게 너무 웃겨서요. 소공작이 아니었다면 백이면 백 거절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페렐바로체 요새에서 고생했던 것도 기억나고, 저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페렐바로체 요새의 협곡에는 카냐로스강의 폭보다 열 배는 큰 폭을 지닌 강이 흐른다. 그 강에 비하면 이곳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저번에 카론의 귀국 일정이 늦춰졌다고 들었어요.”
“예, 이모님이 카론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번이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라 들었는데요.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처음에 친척 방문을 반대했었어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카론이 공작 부인의 집안에서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과 달리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기는 했지만, 보통은 천대받기 일쑤였으니까.
“……엘리제의 일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신 거라면 다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많이 무신경했었지요.”
엘리제 로망드라니? 생각도 못 했던 인물이었기에 곧장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애가 엘리제로부터 어떤 폭언을 들어 왔었는지 전부 전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전부 케이트 영애 덕분이었군요. 아무래도 사과 말씀은 뒤로 미루고 감사 인사부터 다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말과 함께 판시온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니, 고마워도 그렇지 허리를 굽힐 것까지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아, 아니요! 전혀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때 저는 엄청 무례했는걸요…….”
무엇보다 카론에게서 전해 들은 엘리제 로망드의 정체가 꽤 충격적이었기에 나중에 또 마주치면 어쩌나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래, 애초에 로망드라는 성이 내게 익숙할 수 없었다. 그녀의 핏줄은 고작 10년 전에 남작 직위를 돈으로 매입하여 제도의 일원이 된 가문. 본래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켈 로망드’. 매춘, 마약, 사채 등을 포함하여 불법의 온상인 제국의 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거대한 조직이었다.
록허드가 괜한 소릴 한 것이 아니었다. 뒤 세계의 공주님이라니? 척을 지지 말라는 조언의 근거로 너무나 타당하지 않은가.
부주의했던 것으로 모자라 멍청하기까지 했지. 역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됐어. 그야말로 생각을 거치지 않고 혀만 움직인 대가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 생매장될 수도 있을 거야.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다만, 늘 올바른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던 판시온이 그녀와 가까운 사이란 건 의외였다.
“오히려 사과드려야 할 쪽은 저예요. 만약 그 여자를 멀리할 수 없던 사정이 있으셨다면… 명백히 저의 실수였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엔테라 공작가가 켈 로망드와 깊은 연관이 있다든지.
판시온은 연극 취소를 통보받았던 그 순간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물끄러미 마주하는 그의 시선 위로 짙은 금발이 요동친다. 그 금발 너머의 눈동자 속에서 어두운 빛이 일렁였다.
아, 순간 나는 그 눈동자 안에 담긴 무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판시온은 이 대화 주제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다.
“……그.”
사적인 이야기는 묻지 않는 것이 맞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비가 멈출 생각을 않네요. 아하하! 차라리 근처 레스토랑을 갈 걸 그랬나요?”
“어디여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이니까요.”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 속에서도 담백한 판시온의 목소리가 확연히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틀어 흐르는 강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낯부끄러운 소릴 담담하게 표현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나 역시 평소 하고 싶었던 질문이 가감 없이 튀어나왔다.
“소공작은 제 어디가 좋으세요?”
직후 옆에서 큰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아니었나? 당혹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여상한 표정을 깔고 판시온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다소 가라앉아 있던 그의 얼굴이 반쯤 풀어져 있었다.
“저, 저는 또래의 다른 여식들과 달리 소양도 부족하고, 목소리만 커서 어딜 가든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요. 그렇다고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답다거나 정치적 효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제게 이리도 친절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카트리나 에젤로트라는 여자는 확실히 매력이 없긴 없었다. 그에 더해 약혼자에게는 왜 고백하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기까지……. 케이트, 너 정말 가지가지 하는 애였구나!
판시온이 입을 연 건 한참이 흐른 후였다.
“사람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 건 영애 아닙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네자르를 통해서 몸소 느낀 감정이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내가 그에게 보여 온 행동이 사실은 굉장한 실례가 아니었을까? 아니, 확실히 실례였다. 그것을 알고도 나는 원하는 대로 행동해 왔다. 심지어 네자르 역시 이런 심정으로 적당히 날 상대해 주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진 채.
“고마워요.”
나는 로맨스 소설의 인기 절정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차마 ‘당신을 위해서 날 좋아하지 말라’는 소리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날 배려하고 생각해 온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판시온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훨씬 더 뒤늦게 들려왔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대답이군요.”
언뜻 작은 미소가 얼굴 위로 그려진 느낌이었지만, 말 그대로 느낌일 뿐이었다. 그는 턱을 들어 어둠이 지기 시작한 먹구름 아래를 응시했다. 차라리 공연이 취소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소문이 돌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조금이나마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상태로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성벽 아래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멍하니 강줄기를 쳐다보기를 한참, 판시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가 퍼부어선 엔테라에 도착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리겠네요.”
그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에젤로트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더 늦다가는 밤이 위험할 겁니다.”
나 또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뇨. 저는 여기까지 온 김에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갈 생각이에요.”
“방금 말씀드렸지만, 위험합니다. 호위 기사가 따라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허락은 이미 받았어요. 호텔 예약도 했고, 제도에 들르면 꼭 방문하는 가게가 있거든요. 내일 오전에 그곳을 들렀다가 돌아가려고요. 설마 이렇게 사람 많은 제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양이의 식사를 챙겨 주고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용인들은 잘 가꾸어진 정원을 뛰노는 길고양이를 매우 꺼려 했기 때문이다.
내 손을 잡아 마차 안으로 이끈 판시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대신,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럴 때의 그는 마치 남이 아닌 친오라비 같았다. 데이지도 그렇고, 오늘은 다들 하나같이 당부를 잊지 않네. 나처럼 악몽을 꾸기라도 한 걸까.
마차는 느리게 뛰어 호텔 앞에서 멈추었다. 예기치 않던 비가 몰아쳐서 그럴까? 건물 앞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바쁘실 텐데 괜히 시간을 낭비하게 해서 죄송해요.”
도어맨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 편히 등을 기대고 있던 판시온이 가볍게 웃었다.
“죄송하다는 말만 수십 번 듣는 기분이군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말이지요.”
그가 기다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깃털을 잡듯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단 오늘은 편안한 밤 보내시길.”
손등 위에 아주 잠시간 머물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나는 아주 잠시간 멀어지는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젤로트 영애 맞으십니까?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다가온 벨보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방으로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같아서요. 산책을 조금 해야겠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혼자 있으면 계속 캐롤라인과 네자르가 떠오른다. 으윽. 심지어 그 웃고 있던 얼굴을 상기하면 사람이 자꾸 폭력적으로 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산을 가져오겠습니다.”
벨보이의 우산이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로 비가 거센 날에는 우산을 쓰고 말고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데 말이지.
내가 가죽 부츠의 굽으로 흙탕물을 튀기면서까지 향한 곳은 펠츠의 골동품 가게였다. 이렇게 우중충한 날에는 그의 가게를 찾아가 따뜻한 차를 마시고 벽난로의 은은한 불꽃을 구경하는 게 최고의 휴식이었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펠츠의 가게가 닫혀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네, 진짜!”
극장으로도 모자라 펠츠의 가게까지 닫히다니! 극도의 짜증으로 우산을 던져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강인한 악력이 내 목과 얼굴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목구멍을 턱 막는 퍽퍽한 천이 입 안으로 억지로 들어찼다.
“으읍!”
뭐, 뭐야?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치자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입 닥쳐. 이 조그마한 귀 한쪽을 날려 버리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힘 빼라. 응?”
그 한마디에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공포감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비가 된 것처럼 꼼짝도 안 하는 몸으로 숨만 겨우 내쉬었고, 눈이 가려진 채 속절없이 어딘가로 끌려가야 했다.
무서워.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지? 내 삶에는 요절이라는 마가 끼기라도 한 건가?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새 나는 건조하고 고요한 실내로 들어와 있었다. 습한 곰팡이의 냄새가 나는 걸 보아 지하임이 틀림없었다. 덜덜 떠는 다리가 억지로 굽혀진다. 나는 차가운 바닥 위에 무릎이 꿇린 채 앉혔다.
“천 거둬.”
그때, 젊은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눈을 가리던 천이 벗겨졌다.
“이 계집애가 맞습니까?”
당장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맞아. 아주 정확히 데려왔어.”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가녀린 인상의 여인. 나는 상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자각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으로 뻣뻣해진 어깨에 경련이 일었다. 엘리제 로망드였다.
“안녕하세요, 에젤로트 영애.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놀랍죠? 저도 놀라워요. 제가 이렇게 숙녀답지 못한 선택을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다시 눈을 뜨자 여유로운 얼굴로 밝게 웃음 짓는 엘리제가 보였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생각했던 것만큼 당황해하는 눈치는 아니네요. 왜죠? 왜일까……. 아아, 우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요.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아. 그렇죠?”
“예.”
자문자답에 반응을 보인 건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남성의 목소리였다.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적지 않은 인기척에 갖고 있지도 않던 희망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에젤로트 영애, 그거 알아요? 나, 당신 때문에 아버지께 팽당했어.”
“으읍!”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제가 내 턱을 쥐고 흔들었다. 실내 불빛에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팽당했다고, 팽. 팽 몰라? 버린 패가 됐다고. 네가 엔테라 소공작을 자극한 탓에 그가 날 버렸어! 내가 그 남자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짜악!
여자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 내 뺨을 후려쳤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이었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건방진 눈 말이야, 응? 내가 절름발이라고 무시하던 그 눈! 아아, 그래도 공포에 물든 표정을 보니 그나마 볼 만하구나?”
짜악!
또 한 번 고개가 돌아갔다. 뇌가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고되게 아팠다.
너무 아파. 아프고 무서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뜨거운 눈물이 눈가를 적셨다. 소리 없는 비명이 정수리까지 타고 올랐다.
“너도 날 무시했지? 내 오라버니들처럼, 내 언니들처럼! 켈 로망드의 후계자 중 유일한 흠집인 날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칼을 따라 내 고개 역시 정신없이 휘둘렸다. 이러다가는 머리 가죽이 찢기고 말 거야. 코만으로 숨 쉬기가 버거웠다. 용암보다 뜨거운 열기가 온 몸을 지배했다. 불구덩이 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허억, 헉…….”
아무리 괴로워도 공포와 고통은 무감각해지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수리 위에서 엘리제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네 입장에선 그리 큰 잘못도 아니었을 거야. 나도 이해해요. 에젤로트 백작가의 여식이라면 어딜 가든 귀한 취급을 받잖아? 신분에서 주어지는 당연한 권력과 지위를 누리고 싶었겠죠. 그걸 이용하고 싶은 건 당연해. 지금의 나 역시 그러하니까.”
엘리제가 다시 내 턱을 위로 당겼다. 눈앞이 흐릿해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선을 넘으면 안 되지. 감히 내게서 판시온을 뺏어 가려 해? 절대 안 돼! 그 남자는 절대 너처럼 건방진 년에게 못 넘겨! 비록 아버지가 날 버리셨다고 하더라도……!”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거칠었던 엘리제의 숨소리가 점차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제가 못 볼 꼴을 보였죠?”
유화로 그려 낸 미술 작품처럼, 생동감 넘치는 웃음을 그려 낸 엘리제가 천천히 뒷걸음쳐 의자에 앉았다.
“나는 내 손을 더럽히는 걸 매우 싫어해요. 그러니까… 더러운 건 더러운 걸 전문으로 취급하는 우리 개들 손에! 어때? 좋죠? 영애도 이왕 죽는 거, 더 전문적인 사람들 손에 끝나는 게 좋잖아요?”
어깨와 허리를 잡아 오는 손길이 있었다. 싸늘함이 뒷덜미를 잡아채고 전신을 집어삼켰다. 여기서 끌려가면 어디서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쉬이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발버둥 쳤다.
“으읍! 읍!”
그렇다고 사내들의 손아귀를 떨쳐 내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의 반발로 머리채와 허리를 잡아끄는 손길이 더욱 억세졌다. 그들의 대응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빈틈이 없었으며, 잔인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우습기라도 했던 걸까? 입을 가리고 한참을 웃던 엘리제가 밝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카트리나! 내가 본 네 얼굴 중에 제일 예쁘구나! 부탁하건대, 그길로 내 눈앞에서 평생 사라져 주렴.”
돌부리 위를 달리기라도 하듯이 마차가 거세게 덜컹거렸다. 사지가 전부 결박당하지는 않았지만, 옆자리에 앉아 날 감시하는 덩치 큰 남자들 때문에 어깨가 덜덜 떨렸다.
손은 밧줄에 묶여 있었으나 반대로 발은 자유롭다. 마치 죽을힘을 다해 뛰어도 도망칠 수 없을 거라 비웃는 것 같았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무서웠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에젤로트에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쯧, 이렇게 귀한 태생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닌데. 괜히 똥물 튈까 겁나네.”
“푸흐흐, 거 형님, 괜한 걱정 하시기는. 대부님이 괜히 작위를 매입하신 줄 아십니까? 그래서 이 계집애가 어디 출신이랬죠?”
“이 무식한 놈! 에젤로트는 황가인 카발 가문의 방계란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여자는 황위 후계자 중 하나라고!”
나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코를 훌쩍였다. 짐마차의 끝부분에서 나무를 깎던 중년 남성이 대답했다.
“주절주절 투정이 많으슈. 그래서 아가씨의 명령에 불복종하자는 거요?”
“하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젠장, 괜히 불안하군.”
불안한 건 저들이 아니라 나다.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다 지쳐서 마차 벽에 등을 기대고 몸을 더 깊게 감싸 안았다.
덜커덩. 그때, 거친 소음과 함께 마차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깜짝 놀란 짐마차 내부의 공기가 가라앉는다. 이윽고 마부가 벽을 두들기며 크게 소리쳤다.
“어이, 강이 범람해서 다리 상태가 말이 아닌데? 내일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야?”
빗소리가 워낙 커 귀를 기울이면 자세히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나무를 깎던 중년이 마차에서 내렸고, 마부 못지않게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멍청한 새끼야, 아가씨가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이 길로 평생 사라지게 하시라잖냐!”
“크흠. 다리 위가 흙탕물로 넘치는 것 안 보여? 아무리 그래도 이 길은 좀…….”
쾅, 쾅! 남자가 벽을 크게 두들겼다. 성이 난 듯 거친 두들김이었다.
“닥치고 건너. 일 한두 번 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흠뻑 젖은 중년이 짐마차 안으로 돌아왔다.
“하여간 저 멍청한 새끼는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남자들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을 때, 그때 도망갈까? 달리는 마차 위에서 떨어지는 건 위험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 길을 따라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낫잖아. 말라붙었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탓일까,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래, 잘만 하면 도망칠 수 있을지 몰라!
나는 끌어모은 무릎에 코를 박고 주변을 살폈다. 마차의 속도는 이전에 비해서 현저히 느렸다. 차라리 빨리 달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으, 으아아악!”
그 순간, 마부의 비명이 터졌다.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마차가 전복되고 있는 것일 테다.
“존!”
“젠장, 형님! 이 여자는 어쩝니까?”
“일단 존부터 구해!”
남자들이 마차 밖으로 나간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이라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안도감이 샘솟지는 않았다. 쏴아아. 거센 강물이 펄럭이는 짐마차의 천 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물살에 마차가 점점 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안 돼.”
이대로 다리 위에서 쓸려 내려가면 흔적도 남지 않고 수장될 테다. 나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팔꿈치로 마차 벽을 기어서 밖으로 나왔다. 거센 물살에 긴장된 다리가 흔들렸다.
“읏!”
휘청하면서 묶인 손으로 강의 다리를 부여잡고 버텼다. 이윽고 물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마차가 말과 함께 결국 다리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나를 납치했던 자의 모습이 보였다. 세 명이었던 인원 중 단 한 명만이 건넜던 다리를 되돌아 성벽 앞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지? 강에 쓸려 간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기로 돌아가면 다시 붙잡힐 테니까.
결박된 손으로 다리에 붙은 비상용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제도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살이 너무 강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지기 일쑤였지만, 죽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두 다리에서 긴장을 빼지 않았다.
“흑… 이, 이대로 죽기 싫어. 절대 안 죽을 거야.”
젖은 몸을 덮쳐 오는 추위에 전신이 강하게 요동친다. 얼마나 격하게 떨리는지 시야가 다 흔들릴 정도였다.
어떤 정신으로 강을 건넜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나는 강물이 범람한 다리를 벗어나 철퍽거리는 진흙 위를 달리고 있었다.
“허억, 헉!”
저 남자에게 잡히면 죽을 게 분명하다. 나는 열이 오르는 어깨를 감싸고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흑. 흐흑.”
어느 시점부터 더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뜀박질을 멈추고 주저앉아 빗물에 눈물과 진흙으로 범벅인 맨발을 씻었다. 깨끗해진 발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팔과 손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잔가지와 풀잎을 털어 내는 손끝이 새파랗다.
추워. 춥고 어지러워.
빗소리만이 가득한 사위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뒤섞인다. 설마 따라온 건가?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숲의 안쪽으로 내달렸다.
“케이트!”
등 뒤에서 남자가 내 이름을 외쳤다. 동시에 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강한 악력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내치고 도망가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 비명 따위는 나올 리가 만무했다.
“케이트? 나야, 네자르! 진정하고 내 얼굴을 봐.”
네자르.
“발버둥 치지 마. 나는 널 해치지 않아. 그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그렇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 뺨을 그러쥔 따뜻한 손길이 위로 끌어 올린다. 눅눅한 검홍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케이트. 이제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아, 정말 네자르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걸까. 역시 네자르는 대단해. 모르는 게 없어.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가 급히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도감 그리고 안온함. 나는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천금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
타닥타닥.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나는 어렴풋이 무거운 잠에서 깨어났다. 마른 장작과 불의 냄새가 짙다. 천천히 눈을 떠 흐릿한 시야를 잡았다. 침실의 천장이 아니었다.
“……목말라.”
내 목소리는 스무 살 여인의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거칠었다.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자, 유리잔을 든 네자르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비가 내리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집.”
그런 동화 같은 묘사라니.
내가 혼신을 다해 이마를 구길 동안 네자르가 내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보니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색이 바랜 낡은 소파 위였다.
“천천히 마셔.”
네자르는 마치 갓난아이를 다루듯 내 어깨를 감싸고 입술 사이로 잔 안의 물을 흘려보냈다. 그제야 모래알로 콱 막힌 것처럼 텁텁했던 목구멍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배는 안 고파?”
“……입맛 없어.”
쓸데없이 곱기만 했던 드레스 차림에서, 꾸밈 하나 없이 멋없고 건조한 드레스로 갈아입혀진 상태다. 누가 어떠한 이유로 갈아입혔는지는 묻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기에, 잠자코 실내를 둘러봤다.
장작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바닥에 깔린 널따란 카펫, 무언가로 가득한 장식장, 테이블, 솜이불에 기다란 소파까지. 귀족 저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생활 물품과 가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숲 안에 이런 곳도 있다고?”
“만약을 대비한 지하 대피소다.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말해 주지 못해.”
피곤한 낯으로 몸을 일으킨 네자르가 유리잔 안에 남은 물을 비워 냈다. 그는 벽난로로 다가가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토막을 쑤셔 넣었다. 화르르, 하고 불길이 크게 되살아난다.
“몸은 어때? 아픈 곳은 없어?”
“으음.”
그의 물음에 답을 주기 위해 팔을 들어 어깨를 돌리고, 고개를 돌리고, 허리를 돌렸다. 나쁘지 않은데? 그러나 담요를 거두고 몸을 일으키려 한 순간은 조금 달랐다.
“아야!”
발바닥 아래에서 찌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소파 위로 엎어져야 했다. 입술을 깨물며 발바닥을 뒤집으니 생채기와 더불어 커다란 물집과 멍이 들어 있었다.
“와아. 이것 좀 봐, 네자르. 내 발 진짜 못생겼다.”
소리 없이 옆에 앉은 네자르가 내 손에서 상처투성이의 발을 빼앗아 갔다. 그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고 약상자를 열어 하얀 연고를 상처 위에 치덕치덕 발랐다. 얼마나 치덕치덕 바르던지, 조각 케이크 위에 하얀 뭉텅이의 크림이 올려진 모양새였다. 보다 못한 내가 그에게서 다시 발을 빼앗았다.
“그걸 그렇게 무식하게 바르면 어떡해?”
내 타박에 네자르가 종일 구기고 있던 인상을 더 험악하게 구겼다.
“많이 발라야 더 빨리 낫지.”
“의사가 들으면 기겁할 소릴 하네. 네자르는 전쟁터에도 나갔으면서 이런 거 하나 제대로 할 줄 몰라?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애 같다니깐.”
연고를 다시 약상자 안에 집어넣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하필이면 발바닥 상태가 엉망인 탓에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뭘 하든 이 소파 위에서 해야겠네. 한숨을 쉬고 담요를 다시 끌어서 다리 위에 얹었다. 그 와중에도 네자르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사람 무섭게 그만 노려봐.”
손으로 그의 미간 사이 주름을 하나하나 폈다. 그렇게 몇 분을 내리 매만지고 나서야 꿈쩍도 안 했던 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하아, 널 노려본 건 아니야.”
네자르가 제 이마 위에서 노는 내 손을 끌어 내렸다. 아니, 끌어 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손바닥 위로 얼굴을 기댔다. 그의 커다란 손에 둘러싸인 내 손등이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었다.
“우리, 언제 돌아가?”
“곧 툴드가 여기까지 찾아올 거야. 그때 돌아가면 돼.”
손바닥으로 닿아 오는 숨이 간지러웠다. 한데 아무리 팔을 빼려 해도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툴드라는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자르의 호위를 맡은 기사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그가 우리를 찾으러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구나.
이곳은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이다. 그 사실이 정확히 인지되자 뻣뻣했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지하라더니 벽에는 정말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폐쇄적인 공간에서 지내면 밖이 낮인지도, 밤인지도 모를 것 같았다.
“네자르는 그 숲 속에서 나를 어떻게 찾은 거야?”
내 손을 꽉 잡고 있던 그의 힘이 느슨해졌다. 손등과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네자르의 온기가 좋아 그 자리 그대로 가만히 두었다.
“나는 내가 헛것을 보는 줄 알았어. 갑자기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보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나간 건가 싶었거든.”
그가 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조금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몸을 더 가까이 했다. 네자르는 땅을 꺼트릴 기세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하면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어. 괜히 질투하는 흉한 모양새가 될까 사서 걱정한 점도 있었고, 충분히 잘 지내는 널 들쑤시게 될 것 같아서 걱정했었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람.
무표정한 얼굴로 날 응시하던 그가 팔을 뻗었다. 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치우려는 의도였겠지만, 끝끝내 닿지 못하고 다시 떨어져 나갔다.
“네가 예상했던 대로 근래 나는 너에게 사람을 붙이고 있었다. 오해하지 말아 줘, 네 사생활에 참견하고 싶어서가 아니니까. 나는 그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여겼던 거야. 지금의 엔테라 가문은 켈 로망드와 상당히 깊숙이 연관되어 있어서, 그 불똥이 네게 튈 수도 있으니까.”
뒤로 물러 두었던 고단함이 단번에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노곤한 눈가를 매만지며 네자르의 무릎 위로 머리를 누였다. 어제의 그 긴박하고 촉박했던 순간들이 다 꿈처럼 느껴졌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하지도 못 했을 행동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놀라지 않는군.”
“나도 어느 정도 추측은 했었어. 로망드 가문이 어떤 곳인지 들었거든.”
눈을 감고 즐거움에 한껏 취해 있던 엘리제 로망드를 떠올렸다. 여유가 생긴 지금에서야 그녀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뒤 세계에서 공주님 대우를 받다가 내게 굴욕을 당하니 참을 수 없었겠지. 거기에 판시온까지 껴 있는 걸 보면 일방적이었어도 꽤 열렬히 사랑한 모양이었다. 그 외의 다른 부분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담 북벌 전쟁 전부터 숨겨 둔 애인이라 소문이 돌던 인물도 엘리제 로망드였던 걸까? 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지. 개인사까지 파헤치려는 건 너무 실례잖아. 다만 공작 가문의 적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뒤 세계와 손을 잡은 건지는, 퍽 궁금했다.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네자르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답지 않게 넋이 빠진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네자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런 눈?”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을 볼 때의 얼굴이야.”
내 말에 그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것참, 너다운 묘사로군. 낯선 이가 떠드는 모습을 보는 얼굴이라는 게 대체 무슨 얼굴인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는 의미.”
타닥타닥. 네자르가 침묵하는 동안 벽난로의 불꽃 튀는 소리가 특히 커다랗게 들렸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순간. 우리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네자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게 응시했다.
찬찬히 훑자 평소와 다르게 느슨하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하얀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그것도 맨 위 두 개의 단추는 헐렁하게 푼 채로 앉아 있었다. 늘 단정하게 반쯤 넘겼던 머리칼도 마치 샤워한 후처럼 힘없이 가라앉은 상태다. 얼마 안 가 네자르가 내 눈을 피했다. 가볍게 앞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말했다.
“네가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대답을 미루기에 얼마나 대단한 이유인가 싶었더니만, 허무할 정도로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음. 놀랄 일이 아니라 새삼스러운 일이라는 표현이 알맞겠어. 적어도 나에게는.”
“어떤 면이 그렇게 새삼스러운데?”
계속 말꼬리를 붙잡고 물으려니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네자르는 귀찮은 기색 한번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인정하고 받아들였는데도, 네가 더는 열다섯의 케이트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을 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리거나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다과회는커녕 또래 여식조차 사귀지 못했던 나이다. 에젤로트 근방의 내로라하는 가정 교사들도 포기했던 내 공부를 끝까지 부여잡았던 사람도 그였고, 비상식적인 짓거리를 할 때마다 훈계를 내린 것도 그였다. 그것도 무려 대륙의 패왕, 카발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닌걸. 네자르 머릿속의 카트리나는 실제 카트리나의 성장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사실이 어느 정도 이해되면서도 답답했다.
소파에 팔을 걸친 채 눈을 가늘게 뜬 네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방금 한 말은 취소야. 그렇지 않고서야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리 무방비하게 다닐 수가 없어.”
또, 또 애 취급이네! 나는 심술이 나 네자르의 무릎 위에서 벌떡 머리를 일으켰다.
“그래? 나는 그 소리에 동의할 수 없는걸. 어때, 드레스를 벗겨 보니 생각했던 대로 애가 맞든?”
순간, 네자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건조하게 마른 흑발 아래로 멀끔한 흰자가 드러났다. 그는 드물게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장담할게, 케이트. 체온을 올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뒤늦게 인사를 건네는데, 나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네자르. 물론 그 진흙탕 속에서 날 이곳까지 데려와 준 것도.”
그를 향한 고마움은 진정 사실이었다. 나는 발을 다친 것도 잊고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악!”
물론 아픔을 상기하고 펄쩍 뛰며 다시 소파에 엎어져야 했지만.
“쯧.”
내 발을 잡아당긴 그가 고개를 숙이고 상처를 확인했다. 기껏해야 잠깐 일어선 것이 전부인데, 먼지 몇 톨 묻어 있겠지. 나는 그의 옆면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내 드레스를 벗겨 보니 어땠냐니까?”
눈가의 근육이 바짝 굳는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표정이 눈앞에 선명했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되물었다.
“응?”
별일 없음을 확인했는지, 그가 부러 거칠게 내 발을 내던졌다. 나는 뒤로 내빼려는 그에게 더 바짝 다가앉았다.
“응? 어땠어? 몸도 열다섯 살 아이 같았어?”
“……눈 감고.”
작게 쉰 목소리였다. 이마를 부여잡은 네자르가 느리게 말했다.
“맹세컨대 드레스는 눈 감고 갈아입혔어. 네 그, 몸은 절대 보지 않았으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
“그건, 손이 스치지도 않았다는 말이야? 정말? 손톱도?”
몸을 피해 소파에서 일어서려는 그를 다시 막았다. 들으라는 듯 내 귀에 크게 한숨을 내쉰 그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스쳐보면 되겠네.”
네자르의 커다란 손을 덥석 부여잡아 당겼다. 물론 실제 말대로 행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고, 그 반응을 통해 만족감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아직도 내가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그런 만족감.
“너, 정말…….”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너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게 맞았다. 내게 잡혀 끌려오던 팔이 돌연 무거워졌다. 이어서 당겨지는 건 그가 아닌 내 쪽이었다.
“엄마야!”
마차가 전복되던 그 순간처럼 시야가 확 기울어짐을 감지했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점은 더 있었다. 양손이 구속되어 있었으며, 깜짝 놀라 숨을 멈추어야 했다.
다행히 강물이 들어차거나 죽음의 위협을 느낀 건 아니었다. 다만 코앞에서 흘러내린 까만 머리칼과 기다란 속눈썹, 그 아래에서 위협적으로 빛나는 어두운 루비색 눈동자가 사고를 정지시켰다.
“이봐, 케이트. 너, 진심으로 내가 무언갈 해 주길 원하는 거야?”
내 몸을 짓누르는 그의 상체에서 뜨거운 온기가 전달된다. 나는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 채 눈만 껌뻑이다 고개를 홱 돌렸다.
화, 화장은 이미 다 지워졌겠지? 번지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푸석푸석한 민낯을 보이기에는 너무 민망한데…….
나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응. 대답을 대신해 열심히 고개를 주억였다. 뺨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그의 숨결에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아니라면 사람을 적당히 골려야지. 내가 네 모든 행동을 진심이라고 여기면 어쩌려고 그래?”
입을 꽉 닫고 있자 그가 내 팔목을 잡고 있던 손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대답해.”
“으, 응. 미안해.”
“그리고?”
“다, 다신 안 그럴게.”
마지막 문장을 뱉고 나서야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그냥 빼지 않고 될 대로 되라 돌진했어야 했나? 이렇게 허무하게 등을 보였으니 이제 비슷한 장난은 통하지도 않을 게 뻔했다.
그런 내 마음이 표정을 통해 드러났는지, 고개를 돌린 네자르가 내 얼굴을 차갑게 응시했다. 나는 찍소리도 못 하고 삐죽 나와 있던 입술을 집어넣었다. 곧이어 장식장 근처로 걸어간 그가 잔에 티포트의 물을 부었다.
“카론 엔테라까지는 관여하지 않으마. 그래도 판시온 엔테라는 안 돼.”
“왜 카론은 되고 소공작은 안 돼?”
멀리서도 그의 입술이 하얗게 메마른 게 보였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던 걸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판시온 엔테라가 차남인 건 알고 있겠지?”
“응. 전쟁 중에 전 엔테라 소공작의 장례를 치렀잖아. 나도 참석했는걸.”
“생각해 보니 그렇군.”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본 네자르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잠들 것처럼 소파 등에 깊이 누운 그는 표정 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엔테라 가문의 장남인 터너 엔테라는 태생이 허약한 몸이었어. 연회에 참석한 모습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지. 자세한 사정까지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엔테라 공작 내외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야. 다만 문제는 차남이 장남보다 더 건강하고 재능이 넘쳤다는 것.”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내 푸석푸석한 백금발이 흔들렸다.
“너도 알겠지만, 귀족 사회에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관례는 쉬이 무시할 수 없어. 그에 따라 공작 부인은 무조건 장남이 후계를 잇길 바랐으나, 공작은 아니었지. 그는 오랜 관례보다 가문의 존속을 더 중히 여겼어. 그리고 얼마 안 가 장남의 병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된 거야. 그때 즈음 켈 로망드가 작위를 매입하고 판시온 소공작이 날 찾아왔지. 가문 내 파벌 싸움을 묵인해 준다면 차후 날 지지할 것을 약속하더군.”
갈수록 네자르의 목소리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무거워진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워졌다.
“거절할 이유가 하등 없었기에 그가 바라는 대로 묵인했지. 폐하는 북벌에 눈이 먼 상태셨고, 필프론츠 후작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황후마저 입을 닫으니 엔테라 가문의 상황은 온전히 힘이 있는 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어. 사실상 후계자가 정해진 상태로 북벌 전쟁이 발발한 거야.”
머리칼을 간지럽히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후로 어떻게 됐을까?”
고개를 돌려 마주한 네자르의 얼굴은 변함없이 무덤덤했다. 나는, 뭐랄까. 그가 들려주는 뒷이야기에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판시온과 네자르의 관계가 이해득실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도, 판시온이 후계를 잇기 위해 친형제를 절벽으로 밀어낸 것도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던 탓이다.
“……그가 도와주겠다던 게, 함께 북벌 전쟁에 참여하는 거였어?”
다만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파헤친 느낌이라 기분이 매우 찝찝했다.
“그래,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내뺄 거라 생각했었지. 예상과 달리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받아들이더군.”
“왜 소공작을 데려간 거야? 단순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
혼잣말하듯 술술 뱉어 내던 이전과 달리, 네자르는 내 물음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두통이 이는지 눈가와 관자놀이 근처를 여러 번 매만진다.
“그렇게 생각해도 별문제 없어. 요점은…….”
깊게 숨을 삼킨 그가 뒤로 누인 몸을 바로 했다.
“내 요점은…….”
그래서 요점이 뭔데? 말을 질질 끄는 답답함을 못 참고 내가 먼저 선수 쳐 입을 열었다.
“판시온 소공작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니, 적당히 멀리하라고?”
내 말을 듣자마자 네자르가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다는 한마디를 하기가 그리도 어려운 걸까?
“단순히 그가 비도덕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사교계에는 소공작보다 더한 사람들로 가득해.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내가 네자르의 애인으로 고려했던 여식과 퀴몰로 남작은 미소년 수집이라는 변태적인 취미도 갖고 있었다. 방법은 다르더라도 그들의 가학적인 취향으로 죽은 미성년자 역시 한둘이 아닐 터였다. 네자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니, 굳은 게 아니라 내 눈에도 선연한 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순간, 그의 기분을 고려하지 못하고 멋대로 입을 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판시온의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뜻은 아니었으나, 그가 느끼는 바는 달랐던 걸까.
“케이트, 너는 그런 꼴이 되고서도, 내 앞에서 판시온 엔테라를 옹호하고 싶은 거냐?”
다친 건 나인데 왜 네가 화를 내고 그래?
변명과도 같은 생각이었고, 그랬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럴 의향은 아니었어.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네자르는 대답 없이 벽난로 앞으로 걸어가 마른 장작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괜히 잘 덮고 있는 담요를 더 꼼꼼하게 뒤집어썼다.
“케이트.”
“응.”
“아무리 생각해도 넌 나 없이 안 돼. 그게 맞는 것 같다.”
형형한 불빛이 네자르의 얼굴을 잡아먹을 기세로 타올랐다. 이야기가 왜 그런 쪽으로 튀냐고 말하려 해도 역시 입이 열릴 리 만무했다. 지금은 그저 그가 바라는 대로 얌전히 꾸중을 듣는 아이가 되어야 할 듯싶었다.
“그만 자. 네게 필요한 건 타박이 아니라 휴식인 것 같군.”
가볍게 손을 턴 그가 내 몸을 불쑥 들어 침대 위로 조심스레 옮겼다. 환한 장작불 곁에서 벗어나 어두운 구석으로 몰리니 발바닥의 욱신거림이 더 선명해졌다.
“툴드 경은 언제쯤 올까?”
“아직 해가 뜨려면 몇 시간은 더 남았어. 지금은 제도 근처를 수색 중일 테니, 더 기다려야 할 거야.”
침구는 계절에 맞지 않게 한겨울용으로 두툼했다. 그는 푹신한 솜이불을 내 턱 바로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모든 것이 마치 에젤로트에 돌아온 것처럼 평화롭고 안온했다. 네자르는 책장으로 걸어가 표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 냈고, 난 한참 만에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네자르.”
책의 머리말을 읽던 눈동자가 아주 잠시 나를 향했다. 어쩐지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
별일 아니라는 듯, 네자르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책을 덮고 침대맡으로 다가온 그는 팔을 뻗어 내 눈꺼풀을 부드러운 손길로 닫았다. 나는 발바닥의 상처에서 올라오는 열을 느끼며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나는 인기척이 가득한 시내의 한복판에 나와 있었다. 지금보다 시야가 훨씬 낮은 것으로 봐선 과거 어느 한순간의 시점인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서 내렸고, 광장에서 가장 화려한 외양을 지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디저트와 음료가 가득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선 달콤한 향과 맛을 마음껏 즐겼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네자르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이건 전부 꿈이겠지? 꿈이면 살이 찔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테다. 야호!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푹신한 생크림 케이크와 카스텔라를 마음껏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각은 정녕 없는 거냐, 케이트?’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밀크티를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편안한 자세로 앉은 에든이 유리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 그래. 나는 오랜만에 에든 오라버니와 시내로 산책을 나왔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여겨지는 난 에든이나 네자르와의 동행이 아니면 성 밖으로의 출입을 허락받을 수 없었다. 때문에 네자르가 학기 중일 때는 에든이 종종 나를 데리고 외출을 하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응.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집에서 가정 교육을 받는 게 좋을 거랬어. 으음… 사실 누를 끼치는 건 상관없는데, 어머니께서 분명 그리 말씀하실 테니 다니고 싶으면 반박할 구실을 찾으래.’
내 대답에 에든이 이마를 곱게 구기고 날 쳐다봤다.
‘누가?’
‘록허드가! 그리고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검술부에 지원해서 자기나 네자르 옆에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한댔어. 안 그럼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절대 안 된대. 그런데 누를 끼친다는 게 뭐야?’
에든이 들리지 않는 한숨을 아주 깊고 느릿하게 내쉬었다. 그는 가슴팍에서 행커치프를 꺼내 내 입가를 닦았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하얀 생크림이 그 끝에 살짝 묻어 나왔다.
‘피해를 준다는 의미지.’
‘뭐어? 내가 아카데미에 가면 가문에 피해를 준다는 소리야? 록허드, 이 나쁜 놈!’
쾅 소리를 내며 포크를 내려놓자 에든이 작게 웃었다.
‘네 행동이 또래의 귀족 여식치곤 퍽 파격적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구나.’
‘파격적인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눈에 띈다는 게 늘 좋은 것만도 아니야. 록허드처럼 뻔뻔한 놈이야 상관없겠지만……. 너는 그 애와 다르게 속앓이가 깊은 편이니 고생할 수도 있겠다.’
속앓이가 깊다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소리였다. 나는 케이크 위의 딸기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나랑 록허드가 똑 닮았다고 하셨어. 징글징글할 정도로.’
‘그래, 겉은 그렇지…….’
말끝을 흐린 에든이 커피를 한입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설득할 구실이 필요하다면 내가 해 주마. 요즘 시대에 가정 교육이라니, 특히 너처럼 성안에만 틀어박혀 지낸 아이들은 더더욱 나가서 활동해야 해. 적어도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싶지 않다면.’
지루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모든 일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어머니가 결정하셨는걸. 나는 하트 모양으로 잘린 초콜릿 데코를 포크로 잘근잘근 잘라 냈다.
‘네자르도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어.’
‘그래? 전하가 널 진심으로 아끼시는 모양이구나.’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날 아낀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카데미에 가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가 되라는 게 날 아끼는 거야?
삐죽삐죽 가시가 돋치는 내 속과 다르게, 에든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첫 번째 문제가 해결되면 두 번째 문제가 생기고, 두 번째 문제가 해결되면 세 번째 문제가 생기지. 전하가 널 아끼신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성인이 된 후에는 어디서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편히 지낼 수 있을 텐데……. 내가 봤을 땐 록허드 그놈이 널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이는구나.’
‘말 좀 쉽게 하면 안 돼? 오라버니랑 달리 나는 이제 겨우 제국어를 배운 바보란 말이야.’
내 말에 그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봐도 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부분에서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흠, 흠. 그래, 나도 이제 무려 글을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여식이라구.
‘다 널 걱정하기 때문이란다, 케이트. 네 그 불같은 성정이면 사람이 꼬이든 안 꼬이든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늘 전하와 내가 널 보호할 순 없는 노릇이잖느냐.’
‘어차피 오라버니는 맨날 걱정이면서.’
내 말에 그가 답지 않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에든은 우리 사 남매 중에서 가장 감정 표현이 적다. 오죽하면 고용인들 사이에선 ‘에든 도련님이 웃는 날은 뭘 해도 되는 귀한 날’이라 칭할 정도였다.
좋아, 에든이 웃는 모습을 코앞에서 봤으니까 오늘은 분명 운이 좋을 거야. 복도를 뛰다가 깨뜨린 동방의 도자기 조각을 꺼내서 어머니께 사죄를 올려야겠다.
‘맞아. 늘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미래까지 걱정하게 생겼지.’
‘……내가 어떡하면 그 걱정이 덜할까?’
록허드나 릭이면 몰라도 에든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고,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받고 싶었다. 에든만큼 날 좋아해 주고 생각해 주는 사람은 네자르 말고 없었으니까!
‘앞으로 네자르 전하를 멀리하라 말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아니.’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당장 무어라 답할 구실은 없었지만, 네자르를 멀리하라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나는 에든을 좋아하는 만큼, 혹은 그보다도 더 네자르를 엄청, 엄청 좋아하니까!
내 굳은 의지가 엿보였는지는 몰라도 에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하의 입지는 황성 내에서 상당히 좁은 편이란다. 앤드류 황자면 모를까, 하필이면 황제의 냉대를 받는 네자르 황태자 쪽이라니.’
황제 폐하의 냉대라니, 황태자는 다음 대 황위에 오를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직위다. 냉대를 받으면 그런 귀한 자리에 오를 수 없는걸. 아무래도 에든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거 말고 딴거는 안 돼?’
‘글쎄…….’
에든은 마땅한 답 없이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종업원을 불러 짧게 대화를 나누었고, 말없이 눈만 깜빡이는 내게 상냥하게 물었다.
‘이곳의 몽블랑이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구나. 하나 먹으련?’
또 먹으라고? 이미 엄청나게 배부른데……. 그래도 인기가 많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종업원이 사라지고 에든이 다시 커피잔을 쥐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몽블랑이 나오길 기다렸다.
***
이상한 꿈이네. 더불어 10년 가까이 흐른 후 되새기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들었던 말들이 지금 상기하니 전부 뼈가 박힌 소리였다.
‘네 그 불같은 성정이면 사람이 꼬이든 안 꼬이든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늘 전하와 내가 널 보호할 순 없는 노릇이잖느냐.’
에든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내가 엘리제 로망드를 도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에젤로트 침실에서 편히 누워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도 상처 하나 없이 온전했겠지. 네자르도 날 찾느라 장대비가 내리는 숲 속에서 고생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카론이 그딴 취급을 받는 건 두고 보지 못하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똑같은 선택을 하고 1년 동안 에젤로트에 콱 박혀서 지내야지. 내가 성에서 안 나오는데 저들이 어쩔 수 있겠어?
아직 잠에서 덜 깬 건지는 몰라도 욱신거렸던 발바닥의 고통이 덜했다. 나는 엉망으로 쏟아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상체를 일으켰다. 실내는 여전히 깜깜한 어둠 속에서 벽난로의 불빛에 의지한 채 고요했다. 네자르는 바람 한 점 없음에도 깃처럼 흔들리는 불빛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 밖은 환할까, 어두울까. 지하에 있으니 시간 감각이 둔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네자르, 안 잤어?”
그는 놀라지 않고 자연스레 고개를 틀었다. 이윽고 소매를 거두어 시각을 확인하는 모든 과정이 느릿하면서도 차분했다.
“네가 잠든 지 겨우 4시간 지났어. 더 누워 있는 게 어때?”
“피곤하긴 한데, 잠이 잘 안 와서.”
책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은 네자르가 몸을 일으켜 침대맡으로 걸어왔다.
“옆에 있을래?”
“응.”
내 몸을 가볍게 든 네자르가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 옆에 날 내려 두었다. 호수에서도 그렇고 잠들기 전에 장난쳤을 때도 그렇고, 가까이 들이대면 손가락 한 번을 못 대는 주제에 이럴 때는 꼭 아무렇지 않게 살을 맞댄다. 남자의 마음은 참 이해할 수 없다니까.
“……오랜만에 꿈에서 에든 오라버니가 나왔어.”
옆에 앉아서 다시 책을 집은 네자르가 대답했다. 그와 에든은 면식만 겨우 익힌 사이라 교류가 없다시피 해 나를 통해 전달되는 소식이 관계의 전부였다.
“소백작?”
“응. 오라버니가 곧 귀성할 시기라서 그런가? 얼굴을 보지 못한 지 꽤 되었거든. 멍청하게 당하고 살지 말라고 훈계하러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뒤에 덧붙인 말이 웃겼는지 책장을 넘기던 네자르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꿈에서도 혼난 거야?”
“으음. 혼난 건 아니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
“무슨 이야기?”
이거,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걸까? 에든이 너보다 앤드류가 더 괜찮대, 라고?
“에든 오라버니가 말하길, 너보다 앤드류 황자가 더 괜찮대.”
본래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다른 소릴 꺼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네자르의 반응이 궁금했다. 자존심 상해하겠지? 이상한 소리 말라며 코웃음을 칠까?
“그런가.”
둘 다 아니었다. 아니, 전자는 몰라도 최소한 후자는 해당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한 네자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부정할 수 없군.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 말은 네자르도 인정한다는 소리야? 대체 왜?”
말을 고르듯 네자르에게선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책에 쓰인 문장을 따라 천천히 유영하던 눈동자도 어느 한 지점에 멈춘 것이 보였다.
“케이트, 너는 네 치부를 전부 나한테 밝힐 자신 있어?”
인정하는 이유가 마치 그의 치부라도 되는 듯한 어투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숨기고 싶은 사실을 들켜도 덤덤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없어. 가능하다면 평생을 숨기고 살 거야, 특히나 너에게는.”
그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네자르가 이어서 말했다.
“아예 관심을 끄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을게. 다만 내게 직접 묻지는 말아 줘. 대답해 주지 못할 것 같으니까.”
단호하면서 담담한 어조였기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려 황태자의 자존심인데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나의 실언으로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성적인 감정을 제외하면 내게 늘 사실만을 말해 온 그니까.
“네자르는 참 상냥해.”
자연스레 나온 감탄이었으나 그 소릴 들은 당사자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나를 상냥하다는 단어로 표현하는 사람은 온 제국을 뒤져도 너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혼자 상상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미안해하지 말라는 의미인 거 다 알고 있어.”
더 사적인 감정 쪽으로는 단호하지 못한 게 흠이기는 해도.
“그렇게 대단한 이유일 리가 없잖아, 케이트. 단순히 쪽팔리니까 묻지 말라는 뜻이야.”
“쪽팔려? 왜? 우리가 함께 지낸 지 벌써 10년이 넘었어. 물론 반 정도는 멀리 떨어져 있긴 했어도… 나한테까지 부끄럽다 여기는 부분이 있는 거야?”
수치스럽다거나 치욕스럽다는 거면 몰라도, 쪽팔린단 비속어를 사용할 줄이야. 네자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평소 내가 사용하던 것과 다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더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왜겠어?”
아니, 물은 건 나인데 왜 다시 나한테 되묻고 그래?
네자르는 책의 표지를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점잖게 덮었다. 이윽고 무언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듯, 흔들림 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지. 너는 내가 모든 걸 솔직히 말하기를 바랐으니까. 좋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온전히 사실만을 전할게.”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는 건 그 치부를 밝힌다는 소리인 건가?
급히 고개를 젓고 거부 의사를 표현하려 했다. 내가 네자르에게 바란 솔직함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억지로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를 뱉어 내게 할 의도는…….
“내가 네 앞에서 치부를 숨기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널 좋아해서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다, 케이트.”
타닥타닥. 내가 자고 일어났어도 어김없이 타오르는 장작불이 크고 밝다. 그 밝음과 타오르는 소리 외에 지금 이 순간 네자르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네자르와는 아주 상반된 반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 말이라도 해 보라는 양 단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성을 들여 꼼꼼하고 세심하게 빚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까마득하고 답답한 분위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몇 없었다.
“집에 갈래. 에젤로트로 돌아가고 싶어.”
일부러 시선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내 할 말만을 했건만, 네자르는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소매를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괘, 괜히 진 듯한 기분이 드는데. 보통 이럴 때는 실망하거나 다른 반응을 보이라고 재촉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툴드는 언제 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뾰로통하게 나오는 목소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자르는 내가 호숫가에서 악에 받쳐 소리쳤던 대로 감정을 부인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바라던 그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와서 그래 봤자 늦었다는 의미로 냉정하게 대응하고, 내 냉담한 반응에 네자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거지. 무, 물론 눈물 콧물 부분이 조금 과장이기는 해도 요점은 그가 후회한다는 부분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턱도 없어 보였지만.
“슬슬 나가도 되겠군.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기도 하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네자르가 소파에 걸어 두었던 담요로 내 몸을 칭칭 감았다. 나는 멍청할 게 분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지금은 그쳤지만, 몇 시간 전까지 비가 내렸어. 숲이 조금 추울 거다.”
그 말과 함께 네자르에게 안긴 나의 몸이 허공으로 높이 들렸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얼굴은 내가 잠들기 전보다도 훨씬 고단해 보였다. 피부에는 생기가 돌지 않았고, 무엇보다 눈 아래가 시체처럼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나를 돌봐야 했던 탓이겠지. 네자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네자르가 이중으로 잠겨 있던 문을 밀어내고 지하 계단을 오를 동안 담요 사이로 꽉 껴 있던 팔을 힘겹게 뺐다. 아주 살짝 뺨을 건드리니, 역시 생각했던 대로 나무껍질을 만지는 것처럼 푸석하고 건조했다. 천천히 손을 거두자 그가 살짝 턱을 내려 나를 내려다봤다. 상냥한 웃음 위로 어두웠던 지하의 그림자가 걷히고 빛이 내리쬈다.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아, 이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구름에 가려 다소 흐릿한 햇빛이었음에도 눈이 부셨다. 나는 네자르에게 안긴 채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툴드 경이 마차 옆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특유의 친근한 인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누가 봐도 동네 마부 같았다.
“호위는?”
마차의 문을 당긴 네자르가 날 내부에 고이 앉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볍게 웃은 툴드가 네자르의 물음에 대답했다.
“키올과 인피르노, 그리고 저 셋만 동행합니다.”
그의 말에 마차 밖으로 고개를 쭈욱 빼고 숲 속을 훑었다. 흑마에 올라탄 키 큰 남성이 한 명, 백마에 올라탄 장발의 남성이 한 명. 그런데 꼭 산적처럼 저리 얼굴을 칭칭 가리고 있어야 해? 기사답게 풍채가 좋아 안장에 오른 모습만 봐도 위압감이 풀풀 풍겼다.
“황성은 들르지 않아. 곧바로 에젤로트에 간다.”
“예.”
네자르가 다시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갈 동안 툴드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경, 언제 온 거예요?”
곧바로 나오기에 밖에서 기다리자는 의미인 줄 알았지, 툴드가 이미 도착해 있을 줄은 몰랐다. 네자르와 마찬가지로 정면으로 마주한 툴드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음, 대략 3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그냥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그랬어요. 그렇담 이곳을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하하. 건조하게 웃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명이셨습니다. 영애께서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라 하셨죠. 아, 그리고 영애께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은 저와 저쪽의 두 친구, 그리고 에젤로트 가문을 포함해 아주 소수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불쾌하다거나, 사실과 다른 헛소문이 퍼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우려는 지하에서 지내는 내내 단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납치를 당한 황태자의 약혼녀.
불쾌하거나, 사실과 다른 헛소문.
아아, 그런 거였구나. 툴드가 하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툴드가 표면적으로 걱정하는 이는 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황태자의 명성에 누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에든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집에서 가정 교육을 받는 게 좋을 거랬어.’
나는 아무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10년이 흐른 지금도 저런 소릴 듣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탓이 아니잖아? 나는 그저 어떤 미친년에게 걸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을 뿐인데,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 이제 마차에 들어가서 푹 쉬십시오. 영애의 안정을 고려해 전하는 저와 함께 마부석에 앉으실 겁니다. 안전하고 빠르고 쾌적하게 에젤로트로 돌아갑시다!”
툴드의 말마따나 다시 올라온 네자르 역시 편한 복장에 밀짚모자를 덮어쓰고 있었다. 얼굴이 일한다는 게 바로 저런 의미구나. 툴드에게는 참 미안한 소리였지만, 똑같이 후줄근한 복장을 걸쳤음에도 누구는 현지인 같고 누구는 마부를 연기하는 가극 배우 같았다.
호위 기사 세 명과 짧게 대화를 나눈 네자르는 밀짚모자를 벗고 부채질하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빨리 달린다고 해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동안 편히 자고 있어.”
“방금 자다 일어난 거 못 봤어? 덜덜 떠는 마차 안에서 또 자라고?”
투덜거리자 픽 웃음을 지은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걱정할 필요 없겠군. 그래 봤자 텅 빈 마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잠을 자든 공상을 하든 알아서 해라.”
그렇게 마차의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퀴 굴러가는 소음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이 길로 에젤로트에 귀성하게 되면 며칠간은 꿈쩍 않고 성안에 박혀 있어야지.
내 사정을 아는 인물 중 엔테라 가문이 포함될까? 최소한 카론은 몰랐으면 했다. 엘리제 로망드와 연관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릴 게 확실했다.
“발바닥 아프다.”
확실한 건 또 있었다. 네자르가 엘리제 로망드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점.
‘너에게 나를 이용하는 것만큼 최선의 수는 없을 테니까.’
문득 언젠가 네자르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딱히 그를 이용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을 테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되어 있을 확률이 다분했으니까. 네자르는 애초에 자신의 세계가 타인의 손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흥, 꼬시다.”
다만 그 미친년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다는 건 조금 아쉬웠다.
“케이트.”
정신없이 잠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았던 눈을 뜨면서 이렇게 오래 어지럼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 하고 우는 한숨이 들려왔고 누군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큰 손이 날 안아 들자 시원한 바람이 뺨과 머리칼을 흔들고 사라졌다. 남자에게선 옅은 커피 냄새가 났다. 과일 향이 풍부하고 가벼운 산미가 느껴지는 그런 향. 나는 냄새만으로 날 안아 든 이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
“깼니? 침실로 데려다주마. 계속 자도록 해.”
네자르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왜 다들 그토록 내가 잠들길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요?”
“네 소식을 듣고 쓰러져선 여태 침대에 누워 있단다. 그래도 이리 멀쩡… 최소한 사지는 붙은 채 돌아왔으니 금방 일어설 게다.”
내 사지까지 걱정하고 계셨던 거야? 하긴, 강물이 범람하지 않았다면 네자르와 만나기는커녕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니까. 그리 여기니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을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일 침실로 찾아가 봐야겠다. 나는 오랜만에 안긴 아버지의 단단한 품 안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
“에든은 내일모레 저녁쯤 도착할 거다. 종종 서신으로 네 소식을 물어 왔었지. 널 보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깜짝 놀랄 게 분명할 게다.”
그리 말한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커피를 음미하셨다. 암막을 거두어 유리창 안으로 찬란하게 내리쬐는 오전의 햇빛이 아버지의 등 뒤로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곱게 갈린 블루베리를 떠먹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한테 오라버니의 서신 좀 보여 주시지 그랬어요? 아니면 서신을 전달할 주소라도 알려 주시든가.”
“에젤로트를 떠난 초기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에든은 근 몇 년간 제국 근방의 온 국가를 돌며 상권 조사를 하고 있단다. 우리가 서신을 보낼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제국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다니, 록허드처럼 새까맣게 타서 돌아오려나.
나는 더부룩한 속에 쥐고 있던 티스푼을 놓았다. 며칠째 가만히 앉아 음식만 삼키려니 사육당하는 돼지가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오늘로서 침실에만 갇힌 지 벌써 나흘이었다. 심신의 안정을 위한 휴식이었으나, 어제 무렵부터는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고 팔뚝의 두께가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오냐.”
대답과 함께 아버지는 신문을 넘기셨다.
“일 없으세요? 제 방에만 이리 계셔도 되는 거예요?”
에젤로트의 가주인 아버지는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면서 제국의 재상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든이 소백작에 오른 뒤에는 상단의 일 대부분을 그에게 일임하고 있었기에 현재는 재상직만 맡으신 상태였다. 그래 봤자 에젤로트에서 보기 힘든 건 똑같았다. 얼마나 바쁘시면 가주 역할을 어머니가 대신 할 정도였으니까.
내 물음에 아버지는 다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치셨다.
“오늘은 너와 함께 있기 위해 특별히 폐하의 허락을 맡고 휴가를 냈단다. 그간 개처럼 일했으니 하루쯤이야 당일 통보로 휴가를 받을 수 있어. 아암, 폐하께서도 양심이 있으시다면 허가해 주셔야지!”
말만 날 위한 휴가였지, 기쁜 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 쪽 같았다.
아버지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셨고, 그릇을 밀어낸 나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침대에 누웠다. 그때, 열린 문으로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고운 미간에 얕은 잔주름이 접힌 채로.
“애 괴롭히지 말고 이리 나와요. 당신이 그 옆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고 케이트가 즐거워할 것 같아요?”
또각또각 걸어온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에서 신문을 뺏어 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긴 아버지가 의자에 바로 앉으며 내게 물었다.
“뭐? 케이트, 네 어머니의 말이 정말 맞느냐? 이 아비가 옆에 있는 게 그리도 지루해?”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질문이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주억였다.
“재밌지는 않아요.”
“재, 재밌지는 않다고?”
아버지가 충격에 빠져 있을 동안 신문을 다시 내려놓은 어머니가 침대맡에 앉으셨다.
“발은 좀 어떠니? 어디 보자…….”
이불을 거둬 내 발을 잡아끈 어머니가 상처를 살폈다.
“어제에 비해 썩 괜찮아 보이기는 하구나.”
귀성한 다음 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난 어머니는 내 어깨를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쏟아 내셨다. 그토록 감정적인 모습은 난생처음이었기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며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나중에는 그 슬픔과 안도감이 전이되어 눈물이 찔끔 고이기까지 했었다.
“뛰기에는 부담스러운데, 걷는 데는 아무런 문제 없어요.”
“릭이 돌아온다는 서신을 보냈단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 휴가를 받았다더구나. 성안에 갈 곳이 있으면 그 애 등에 업혀서 이동하렴.”
윽. 어머니의 말에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릭의 등이요? 차라리 성안에서 말을 몰 수 있게 해 주세요. 릭은 말보다 느리고 불편하고 잔소리도 심하단 말이에요.”
“그건 안 돼. 시끄럽잖니.”
단호한 답과 함께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을 끌어 일으켰다. 아버지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축 처진 어깨로 침실을 나가셨다. 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드는 걸까.
“아버지는 내가 데리고 가도록 하마. 너는 푹 쉬련.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
부드럽게 문이 닫힌 후 나는 다시 침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어휴, 지겨워. 또 혼자야?
엘리제 로망드는 납치에 실패하고서까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든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죽음에서 탈출하게 한 건 물론이고 발바닥을 걸레 조각으로 만들지 않나, 이제는 며칠 동안 침실에 혼자 처박히게 하고 있었다.
“장식장 구경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지루했으면 카론과 주고받았던 서신을 세 번 복습해서 읽었고, 그동안 받아 온 생일 선물의 포장을 하나하나 풀어서 확인할 정도였다.
보자, 오늘은……. 네자르가 준 문진을 다시 살펴보는 것으로 하자!
나는 네 번째 칸에 고이 전시된 유리 문진을 쥐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무지개가 방 안을 은하수처럼 수놓았다. 멍하니 내부에 피어 있는 꽃잎을 감상하는데, 문득 눈에 거슬리는 동그란 줄기가 하나 보였다.
“음? 이건 뭐야. 꽃의 줄기인가? 아니면 머리카락?”
꽃잎에 가려 형체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알 게 뭐람. 나는 탐색하다 지쳐 문진을 장식장 위에 다시 올려 두었다.
“할 일도 없는데 고양이 밥이나 주러 나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 탓인지 혼잣말도 대폭 늘었다. 릭이 보면 혀를 차겠지? 오늘부턴 자제해야 할 듯싶었다.
나는 침실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와 닭 가슴살이 든 접시를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 안에 푹신한 솜을 깔았기 때문인지 그리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발에 땀이 찼다.
야옹. 환상적인 타이밍이었다. 마른 풀로 뒤덮인 쭈글쭈글한 상자 안에서 노란 개나리색의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너, 진짜 오랜만이다. 안 본 지 며칠 됐다고 살이 이렇게 쪘어? 솔직히 말해. 너, 줄무늬 있는 돼지지? 그치?”
야옹. 접시를 흔들자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내 주위를 빙그르르 돈다. 나는 접시를 내려놓으며 그 작은 뒤통수에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옹아, 꿀꿀 해 봐, 꿀꿀.”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느라 대꾸도 없다. 그렇게 고양이의 꼬리를 툭, 툭 건드리며 놀던 시점이었다.
“아가씨!”
멀지 않은 곳에서 데이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마거리트가 다 져 덤불만 남은 정원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를 발견한 데이지가 치마를 손에 쥐고 급히 뛰어왔다.
“아이참, 어딜 가셨나 했더니 여기서 또 고양이 밥을 주시고 계셨어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헐레벌떡이야?”
“캐롤라인 악토르라는 영애께서 방문하셨어요. 혹시 제가 놓친 서신이 있나 확인해 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걸 봐선 언질 없이 찾아오신 것 같아요.”
내가 잘못 들었나? 캐롤라인, 뭐?
“……누구라고?”
“캐롤라인 악토르 영애요!”
큰 키. 길게 올려 묶은 흑발. 날카롭고 도도한 인상과 더불어 화룡점정으로 범접할 수 없는 성격까지.
“걔가 여길 왜 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설마 한눈팔지 말고 곱게 혼인하라고 협박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레?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정원을 벗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귀성한 이후 방문자를 대하는 경계가 강화된 탓에 캐롤라인은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흉흉한 기세를 뿜지는 않든?”
“네? 그럴 리가요.”
나는 캐롤라인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시기에 찾아오다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사냥 대회가 끝나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 말이지.
그렇게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고개를 돌린 캐롤라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카트리나 영애?”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좀 제대로 걸을 걸 그랬나?
제자리에 멈춰 가만히 서 있자 캐롤라인이 커다란 폭의 걸음걸이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위아래로 훑던 그녀는 옆에 선 데이지에게 말했다.
“설마… 납치된 충격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기신 거니? 정녕 그런 거야?”
데이지의 표정은 그야말로 어리둥절 그 자체였다. 캐롤라인은 데이지가 무슨 소리냐 되묻기 전에 번쩍 팔을 들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으악! 이건 또 무슨 괴상망측한 행동이야?
“세상에나! 이럴 수가! 정말 미안해요, 에젤로트 영애! 내가 그때 멍청하게 굳어 있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구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행동과 더불어 뱉는 말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안 그래도 여자치고 커다란 캐롤라인을 힘겹게 밀어내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악토르 영애. 연락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온 주제에 말을 하려거든 알아듣게 해요.”
마치 자식의 첫 옹알이를 듣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펄쩍 뛴 캐롤라인이 내 이마에 손등을 올려놨다. 물론 나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그 하얀 손등을 쳐 냈다.
“머리는 괜찮으신 건가요? 제 이름을 기억하세요? 나랑 언제 만났는지 기억해요?”
“그걸 어떻게 잊어요? 나한테 네자르 전하를 두고 한눈팔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협박했잖아?”
날카로운 어투였음에도 캐롤라인은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곤 진심으로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참 다행이에요. 듣고 보니 정말 멀쩡해 보이는군요. 좋아요, 우리 올라가서 대화를 좀 나눠 볼까요? 그간 당신에게 꼭 사과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뭘 사과하고 싶었다는 건데? 캐롤라인은 나와 고용인들을 앞질러 빠르게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어색한 움직임으로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응접실이 어디죠?”
“이 문진, 정말 예쁘네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의 제품이에요. 외제품인가?”
캐롤라인이 눈을 반짝이며 장식장 유리 내부를 들여다봤다. 사냥 대회에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초원과 숲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모습과는 한참 다른 표정이었다. 저런 독특한 용도의 물건에 관심을 보이다니.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장식장을 열어 유리 문진을 캐롤라인에게 건넸다. 감탄을 뱉은 그녀는 두 손으로 문진을 받들고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음. 이브리움 왕국의 물건이었군. 어쩐지.”
“그걸 어떻게 단번에 알아요?”
“문진 안에 든 이 은방울꽃이요. 카마우드라 왕국과 이브리움 왕국에서만 나는 종이에요. 그런데 여기 아래에 작게 적힌 글이 이브리움의 언어거든요.”
그게 이브리움의 글자였어? 하도 꼬불꼬불하기에 단순한 문양인 줄 알았다. 나는 캐롤라인을 따라 고개를 빼 문진 아래에 새겨진 글자를 쳐다봤다.
“무슨 뜻인데요?”
흐음. 인상을 구긴 캐롤라인이 어렵사리 입을 연다.
“평생을… 바치다? 인생을 걸다? 그쯤 되는 것 같아요. 깊게 배우진 않은 언어라. 굉장히 멋진 문진이네요. 어디 가서 자랑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걸 대체 어디에 가서 자랑하는데? 장식장 위로 문진을 곱게 올려놓은 캐롤라인이 다시 의자로 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내 건강을 우려한 그녀의 선택으로 손님 대우는 응접실이 아닌 나의 침실에서 치러졌다. 친분도 없는 사람에게 내 침실을 보이게 되다니. 캐롤라인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거절할 수도 없었다.
“저 문진 안의 은방울꽃을 보니 테레시아 왕녀가 떠오르는군요. 카산드라 홀 근처에 왕녀가 가져온 사향 장미를 한 무더기로 심어 놨었는데,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금세 시들었다네요.”
테레시아 왕녀라. 나는 캐롤라인이 붉다 못해 까만 차가 담긴 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아주 진하게 타 쓴 향이 나는 홍차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테레시아 왕녀에 대해 아는 건… 사향 장미를 판시온 소공작에게 바쳤다는 소문이 전부예요.”
“맞아요. 전쟁이 끝난 직후 제도의 가장 큰 화제 중 하나였죠. 왕녀가 엔테라 소공작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 말이에요.”
나만 모르는 소문이었다. 판시온 엔테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카론이 숨기길 바랐을 수도 있으니까. 그 소문이 소공작의 치정과 관련된 사항이라면 더더욱 그러했을 터였다.
“사실이었어요? 소공작이 많이 난감했겠네.”
“그치가 그래도 공과 사의 구분은 철저한 편이라. 애초에 왕녀 혼자 절절했던 관계였거든요. 왕녀가 황성에 갇히고 소공작이 엔테라로 돌아가자마자 무성했던 소문도 금방 가라앉았어요.”
아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고개를 주억이며 의자에 등을 기대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런데, 뭐지? 겨우 두 번째 만났을 뿐인데 십년지기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대화는.
마침 캐롤라인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고 허리를 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 사과하고 싶었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내 직접적인 물음에 캐롤라인이 한껏 내뿜던 고아한 여유를 잃었다. 그녀는 딱딱한, 아니 진지해진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사실 당신이 납치당할 때 저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어요. 그 골목에 골동품 가게가 하나 있는데, 제가 제도를 방문할 때마다 종종 들러서 물건을 구입하거든요. 그곳을 가던 도중에 골목 끄트머리에서 당신이 끌려가는 걸 봤어요.”
놀랍기보다는 수치감이 들었다. 저항도 못 하고 질질 끌려가는 내 모습을 봤다니, 나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인데. 힐끔 시선을 들어 얼굴을 확인한 캐롤라인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너무 놀라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어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죠.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그 소리가 거센 빗소리와 마차 오가는 소릴 뚫지는 못했죠.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다가 당신과 불한당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움직였어요. 호텔로 돌아가 에젤로트에 전보를 보내려 했는데… 누군가 갑자기 저를 부르더라고요.”
캐롤라인의 찻잔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빈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티포트를 들어 물을 부었다.
“절 부른 남자는 복부에 칼이 꽂혀 있었어요. 자신이 뒤따라갈 테니, 당장 네자르 전하를 찾아가 알리라고 하더군요. 누구도 아닌 반드시 네자르 전하에게만.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걸 보면… 전하의 사람이었겠죠. 저는 그대로 황성에 달려가 사실을 전했고, 이틀이 흐른 후에 당신이 무사하다는 서신을 받았던 거 같아요. 그 서신을 읽고 나선 정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더라고요. 정말, 정말로요…….”
말을 고르는 걸까? 입술을 여러 번 움찔거리던 캐롤라인은 물만 채워진 찻잔을 내내 쳐다봤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며칠 내내 죄책감으로 잠도 오지 않았어요. 겨우겨우 잠에 들더라도 영애의 신변이 잘못되는 악몽만 반복되고……. 그간 정말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그날, 제대로 돕지 못해 미안해요. 내가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끌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왜 당신이 사과하죠?”
처음에는 캐롤라인이 사과를 하러 왔다는 말 자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냥 대회 때 거친 언사가 오가기는 했지만, 그런 자잘한 일을 사과하러 에젤로트까지 올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더 의아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에 대한 사과인가 했더니, 설마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할 줄이야.
캐롤라인은 막연하게 상상했던 이미지보다 훨씬 더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 같았다.
“당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거예요.”
진심을 담은 말이었으나 캐롤라인은 인상을 구긴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거죠. 이미 저는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제가 있고 없고의 가정은 필요치 않아요. 영애를 더 빨리 구할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문제죠.”
그래서 그 둘이 무슨 차이인데?
“영애야말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당신은 날 살린 거라고요. 이미 살린 상태에서야말로 더 빨리 구할 수 있었다, 없었다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게 왜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처했더라면 당신의 정신적 타격도 덜했을 텐데!”
단단한 벽을 앞에 둔 것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누구 말이 더 옳으냐는 문제는 제쳐 두고 어이가 없었다. 설마 생명의 은인과 은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로 말다툼을 하게 될 줄이야.
내가 아무리 장시간을 무료함에 발버둥 쳐 왔다고 해도, 이런 일로 시끄럽게 굴 생각은 없었다.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상태에서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주제를 틀었다.
“저는 당신이 뜬금없이 찾아와 사과를 한다기에 사냥 대회 만찬에서 날 협박했던 일을 사과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때 일을 왜 사과하죠? 만찬에서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요.”
캐롤라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그래, 바로 저 표정이었어. 만찬에서 내게 윽박지르던 그 미친 여자의 눈! 나는 순간 그녀가 내 생명의 은인인 것도 잊고 뾰족한 어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만 기억하나 봐요? 나한테 딴 남자와 눈이 마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잖아?”
“협박이라니, 그래도 내 충고를 잘 기억하고 있군요. 앞으로도 잘 새겨 두도록 하세요. 전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서요.”
으음. 좋아, 케이트. 아무리 어이가 없어도 급하게 굴지 말자. 곧바로 말을 뱉지 말고 한 번 생각한 후 말하는 거야.
“그렇게 네자르가 좋아서 미치겠으면 당신이 네자르를 만나세요. 괜히 엄한 사람한테 으름장 놓지 말고.”
복식 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후 캐롤라인의 헛소리를 교양 있게 받아쳤다. 관계 악화로 인한 생명의 위협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친 쪽은 오히려 내가 아닌 캐롤라인이었다.
“그런 망측한 소리 하지 마세요! 네자르 전하는 제게 스승과도 같은 분이에요. 지금은 돌아가신 오라버니와 후계를 놓고 경쟁하던 시절, 제게 조언을 아낌없이 해 주셨던 유일한 분이라고요. 제가 그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존경과 경외지, 남녀 간의 이성적인 감정 따위가 아니에요. 아무리 전하의 약혼자라 한들, 영애가 그분을 향한 제 마음을 매도할 순 없어요.”
그리 소리치는 캐롤라인의 표정은 억울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울먹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말을 하든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릭도 그렇고 네자르도 그렇고, 왜 제자랍시고 있는 애들이 죄다 이 모양 이 꼴인 건지 모르겠다.
“……그런 줄은 몰랐네요. 함부로 입을 연 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곰곰이 돌이켜도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건너며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곤란해질 만한 일은 나중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지금 여기서 캐롤라인의 발언을 받아쳐 말다툼하게 된다면 차후에 분명 곤란해질 순간이 올 터였다. 적어도 엘리제처럼 납치나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는 아니겠지만……. 아니지. 안 하리라는 법은 없잖아? 이 여자도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데!
똑똑. 그때였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와 캐롤라인과 나의 시선이 곧장 문으로 향했다. 누군가 했더니, 어머니가 대외용 미소를 지은 채 서 계셨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했더니, 악토르 가문의 여식이 방문하셨군요. 에젤로트의 음식은 어떠신가요? 영애 입에 잘 맞나요?”
어머니를 알아본 캐롤라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 타이밍이야. 지금이라면 캐롤라인과의 무의미한 신경전을 자연스레 그만둘 수 있다.
나는 침실 안으로 들어온 어머니의 옆에 나란히 서 캐롤라인을 소개했다.
“어머니, 이분이 제 생명의 은인이셔요. 제가 끌려가는 걸 발견하시고 곧장 네자르 전하께 알리셨대요. 악토르 영애가 없었다면 전 분명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뭐어? 그게 사실이니?”
버럭 소리를 친 어머니가 팔을 들어 경악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가리셨다. 그에 곤란한 듯 미묘한 웃음을 지은 캐롤라인이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뇨, 부인. 저는 오히려……,”
“이럴 수가! 우리 케이트의 은인이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메리튼 부인!”
어머니의 호들갑에 계단 아래에서 메리튼 부인이 허겁지겁 뛰어 올라왔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 당장 응접실로 그이를 불러와 줘요!”
어머니의 외침에 깜짝 놀란 캐롤라인이 메리튼 부인의 뒤를 따르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요, 저는…….”
“악토르 영애? 우리, 응접실로 내려가서 자세한 대화를 나눠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산더미예요.”
어머니의 성정상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 한들, 내 목숨의 은인인 캐롤라인을 감흥 없이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래, 캐롤라인. 굳이 에젤로트까지 찾아와서는 자꾸 헛소리하지 말고 은인이면 은인답게 최고의 대우를 받고 돌아가렴. 나는 멀어지는 캐롤라인의 얼굴에 대고 환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소리치지 말고 한발 물러서길 잘했다. 고마워, 엘리제 로망드. 네 덕에 삶의 지혜를 아주 절실히 배운 것 같구나.
“케이트.”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렸고, 그에 응답하듯 절로 눈이 떠졌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을 꾸역꾸역 읽던 도중에 스르륵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곳이 어디었더라…….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왜 이곳에서 자고 있는 거야? 네 방은?”
아, 그래. 나는 릭의 침실에서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 골라 읽다가 잠들었었다. 그럼 이 목소리의 주인은 릭일 테고, 릭이 귀성하였으니 지금 시각은 자정에 가까울 터였다.
“그래도 다행히… 몸은 성해 보이는군.”
어느새 나는 릭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은은하게 흔들리는 실내등 저 너머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몸을 일으켜서 다시 소파 위에 엎어졌다. 계속 침대에 누워 있다가는 그대로 까무룩 잠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이제야 왔어?”
단순한 투정이었으나, 어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타박처럼 들리게 했다. 아무리 바빴다고 해도 나보다 나흘이나 늦게 에젤로트로 돌아오다니. 내 입장에서는 뿔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험 일정이 빠듯해서 서신을 어제저녁에야 확인할 수 있었어. 평소처럼 별말 안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단 며칠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여름용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릭이 소파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는 느릿느릿 몸을 틀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몇 주 만에 만나는 릭은 그새 머리가 길게 자라 있었다.
“하마터면 실험 하나에 열 냈다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 뻔했군.”
단언컨대, 그의 얼굴에 그려진 표정은 평생을 함께해 온 내게도 참으로 익숙지 않은 조화였다. 릭의 눈동자에는 그간 흔히 보아 온 한심함도, 예민한 신경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감정들에 비해 훨씬 더 무겁고 진중한 의사였다.
“나는 괜찮아. 너무 괜찮아서 그동안 놀고먹기만 했더니 살이 엄청 쪘어. 그것도 겨우 나흘 만에.”
손가락 네 개를 펴 릭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오랫동안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던 릭은 뒤늦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새삼스러운 소리 하지 마. 너는 늘 놀고먹잖아.”
윽. 명치를 꼬집히는 기분이었으나 지지 않고 열심히 변명했다.
“마, 맞는 말이기는 해.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놀고먹었단 말이야. 너무 오래 자다가 지쳐서 일어날 정도였다니까? 내가 반나절 내내 이불 안에 있어도 어머니께서 아무 말도 안 하셨어.”
내 손바닥을 툭, 치고 쭈욱 밀어낸 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소파를 지나쳐 책상 쪽으로 사라지자 테이블 위에 얹혀 있던 물건이 보였다. 구깃구깃한 종이 뭉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건 뭐야?”
릭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내일 새벽에 배포될 신문.”
신문?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긴 했다. 무슨 기사가 실렸기에 전날 미리 받아서 본담. 애초에 받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거야? 방이 어두워 표제가 보이지 않아 멀찍이 고정되어 있던 실내등을 더 가까이 끌고 왔다.
그제야 신문 첫 장의 메인 뉴스가 보였다.
로망드 가문, 파산으로 귀족 작위 강제 해제. 켈 로망드, 벼랑 끝에 내몰리다.
어라?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