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사냥 대회의 날이 밝았다. 그야말로 눈이 아플 정도로 밝고 쨍한 하늘이었다.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록허드와, 록허드의 영향을 받은 나에게 사냥 대회란 덥고 답답한 여름에 몇 없는 젖이자 꿀.
사냥개와 함께 사냥터로 지정된 구역을 누비는 황성 사냥 대회는 평소 연회 참석률이 낮았던 고위 귀족들도 자주 모습을 보이는 행사다.
주관은 황성이지만 책임자는 황태자를 제외한 황위 후계자로, 후계가 세 명밖에 없는 카발 제국에서 그 책임이 앤드류 황자에게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황후가 대신해 왔지만, 앞으로는 계속해서 앤드류 황자가 진행할 확률이 높았다.
앤드류 황자는 제 입으로 아주 당당히 자신을 반골이라 표현한 남자다. 그 사회 부적응자가 별문제 없이 행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예상외로 완벽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와아, 그럼 오늘은 네자르 전하가 아닌 저희와 다니시는 거예요?”
“언제부터 나와 영애가 저희가 된 거죠?”
“그럼 저희를 저희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매정하게 ‘엔테라 영애를 포함한 릴리와 다니시는 건가요?’라고 할 순 없잖아요.”
늘 얌전하고 조용하며 차분했던 카론이 달라졌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내 옆에서 깐족거리기 바쁜 릴리를 노려봤다. 사실 깐족거린다는 표현도 그리 알맞은 표현은 아니었다. 릴리는 그저 평소 그녀의 성격대로 카론을 대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엔테라 영애를 포함한 릴리가 아니라, 아마스라 영애를 포함한 카론이겠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살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찌 되었든 케이트 영애가 우리와 함께 사냥을 즐기기로 한 건 사실이잖아요.”
“당신과 날 우리라고 엮지 마세요, 아마스라 영애.”
매정한 카론의 말에 릴리의 얼굴이 의아함을 담았다.
“왜요?”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된 기억이 없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친구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 저를 릴리라고 부르셔요, 엔테라 영애. 저도 지금부터 영애를 카론 영애라고 부를게요!”
이건… 세상을 너무 쉽게 살아온 내게 하늘이 내리는 시련일까?
“하아.”
처음에는 나름대로 중재 역할을 하려 했으나, 그 역할마저 지친 나는 둘을 무시한 채 말에 올라탔다. 하필이면 또 우리 가문의 천막이 엔테라, 아마스라 가문과 붙어 있던 터라 누구 한 명을 떼어 낼 수도 없었다.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네. 마침 천막 아래에서 대기하다가 달려온 데이지가 내게 물통과 상비 연고를 건넸다.
“오라버니는 왜 안 보여?”
“록허드 도련님은 황태자 전하가 계신 천막으로 가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폐하께 가셨습니다.”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친황인 가문이라니. 에젤로트가 득세하는 데는 다 그만한 노력이 있었던 건가.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마흔 개에 달하는 천막의 주위는 다수의 귀족으로 붐볐다. 여식들은 여럿이 모여 웃음꽃을 피웠고, 영식들은 자신의 사냥총 혹은 사냥용 매를 자랑하기에 바빴다.
늘 느끼지만, 연회보다 사냥터처럼 격식 없는 행사에서 남녀의 정분이 더 잘 일어나는 법이다. 이런 걸 몰래 구경하는 게 또 사냥 대회의 묘미였다.
“케이트.”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데이지가 떠난 자리에 승마복을 차려입은 네자르가 말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늘의 그는 고단하다 못해 피곤해 보였던 며칠 전과 달리 안색이 퍽 괜찮았다. 얼굴에 혈색이 도니 특유의 단단하면서 까탈스러운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정말 오늘 나와 따로 다닐 생각이야?”
그럼 아니겠어? 괜한 일로 결심이 약해지지 않으려면 몸은 물론 마음 또한 멀어져야 한다. 내가 평소처럼 대하면 네자르도 평소처럼 장난치기 바쁘겠지. 나는 부러 차가운 표정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제가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요. 벌써 까먹으셨어요?”
사무적인 목소리로 존칭을 뱉자 네자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피곤함으로 물들었다.
“괜찮다면 이야기 좀 하자.”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또 누굴 설득하려고!
“흥, 됐으니까 전하는 저 말고 기사들과 다니시지요. 예쁜 귀족 여식과 눈이 맞으면 더 좋고.”
대화가 길게 이어질까 싶은 걱정에 말을 타고 멀리 도망갔다. 그를 알아 온 시간 이래 이처럼 박하게 대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것 봐, 나도 하면 하잖아?
“케이트?”
그런데 하필이면 도망친 방향이 황성근위대가 오순도순 모여 있는 천막일 건 뭐람. 나를 알아본 록허드가 애마 아나스타샤를 몰아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기사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몰렸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설마… 이 오라비를 만나러 온 거냐? 응원의 입맞춤이라도 해 주려고?”
끔찍한 소리에 몸이 절로 떨렸다.
“아니면 포옹인가?”
“꿈 깨시지.”
록허드는 사냥 대회에 참석한 타 귀족보다 훨씬 더 반짝반짝 빛이 났고, 활기찼으며, 기세등등했다. 얼마나 행복한 얼굴이었는지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록허드, 아주 신이 났구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아.”
“그러는 너는 날에 걸맞지 않게 우울해 보이는구나. 사냥이라면 없던 혈기도 돌던 게 카트리나 에젤로트 아닌가?”
실실 웃는 낯에 더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록허드의 뒤에서 차례대로 말에 오르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완장을 확인하니 록허드가 단장으로 있는 황성근위대 2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그들 중 가장 익숙한 낯의 남자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에젤로트 영애? 너무 오랜만에 다시 뵈어 절 기억하실는지 모르겠군요.”
기억하다마다. 남자는 록허드의 수많은 직장 동료 중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니까… 루이 몰젠 경? 맞죠?”
“하하. 맞습니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경처럼 멋진 기사를 잊을 리 없죠. 저야말로 저를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에요.”
루이 경의 웃음은 록허드만큼이나 행복으로 가득했다. 내가 이름을 기억해 준 게 저렇게 기분 좋은 일일까, 싶을 정도였다.
문득 오래전에 네자르가 흘리듯 던져 줬던 말이 생각났다. 얼마나 많은 여식에게 이름을 각인시키느냐가 그 기사의 명예를 결정짓는다던 말. 검술 실력도 아니고, 별게 다 명예를 결정하네. 다시 생각해도 웃긴 소리였다.
“와아,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 아닙니까, 단장? 여동생이, 무려 여동생이 사냥 대회 직전에 응원 차 찾아오다니!”
뒤따라 달려온 청년 기사가 록허드의 팔을 툭, 툭 건드리며 웃었다. 지나치게 친밀한 행동을 보니 2기사단은 위아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듯싶었다.
“뭣도 모르면서 함부로 입 여는 거 아니다, 존.”
“에이, 설마 부끄러우신 겁니까? 단장님이 부끄럼도 느끼는 인간이었다니, 오늘 처음 알았네요.”
다시 확인해도 믿기 힘들었다. 록허드 에젤로트 따위가 기사단의 단장이라니……. 제국도 드디어 멸망의 길을 걷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전쟁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던 사냥 대회가 작년부터 재개되었다고 했지요. 작년 우승자는 누구랍니까? 네자르 전하와 우리 2기사단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빈집을 털었을지 참 궁금하군요!”
흥분으로 뺨이 붉게 달아오른 청년 기사가 말했다. 누구기는. 작년 사냥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나예요.”
“……예?”
멍하니 되묻는 기사를 향해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다시 대답해 주었다.
“작년 황성 사냥 대회의 우승자가 나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제국의 내로라하는 사내들이 전쟁터로 나갔기에 빈집털이를 한 것과 마찬가지죠.”
시끌시끌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멍하게 굳은 표정이 하나같이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크흠. 누군가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 이목을 집중시킨 록허드가 특유의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모르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 에젤로트는 사냥꾼의 핏줄이 흐르는 가문…….”
“황족에 사냥꾼 출신이 어디 있어? 그거, 황족 기만이야.”
물론 나 또한 사실과 무관하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긴 했다. 우리 가문 사람들이 워낙 타고난 사냥꾼이어야지.
“……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 흠, 이제 곧 대회가 시작될 것 같군. 즐기는 것도 좋지만 대회의 안전 역시 책임져야 한다는 걸 잊지 말고, 다들 각자 자리로 이동하도록!”
록허드의 외침을 기점으로 넓게 퍼져 있던 기사들이 한곳을 향해 이동했다. 그 끝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는 앤드류 황자가 있었다.
기사의 정렬을 구경하는 사이, 여태 내 옆을 떠나지 않았던 록허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케이트.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
두서없는 소리에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뭘?”
“약혼식을 무르고 싶다면 어영부영하지 말고 제대로 무르라고.”
평소 록허드가 보였던 태도와 상반되는 말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 맨날 네자르 눈치 보기 바빴던 인간이.”
“그놈은 좀 당해 봐야 하거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막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소릴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긍정하듯, 안 하듯 어영부영 고개를 주억이고 록허드와 헤어졌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카론과 릴리가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어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울렸다.
“작년 우승자는 케이트였지요? 제 동생에게 들었어요. 굉장히 인상 깊었다던데.”
어색한 자세로 사냥총을 든 릴리가 말했다. 이런, 잘못하다간 내가 사냥당할 수도 있겠어. 나는 목숨의 위험을 감지하고 릴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맞아요. 어느 부분이 인상 깊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카론과 릴리 영애의 형제는 안 보이시네요.”
“제 동생이요? 아마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저랑 같이 있다가는 총에 맞아 죽을 것 같다고 진작에 도망갔어요.”
자랑이 참 살벌하네. 깊게 한숨을 쉰 카론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도 반쯤은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판시온 오라버니는 상단 경영 회의 문제로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날이 더워져서 운반 과정에 과일이 상해 일이 꼬인 모양이에요.”
에든도 비슷한 일을 하느라 에젤로트로 돌아오는 시기가 늦춰지고 있었다.
“바쁘시구나. 그날, 우리 가고 대화는 잘 나눴어?”
엘리제와 추하게 말다툼하는 것으로 모자라, 카론의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던 그날을 상기하니 목 근처에 다시 열이 뻗쳤다.
“나쁘지 않았어요. 제가 그동안 오라버니를 위한답시고 너무 소심하게 굴어 온 것도 있었고요…….”
작게 웃은 카론이 말끝을 흐렸고, 이어서 릴리가 총신을 닦다 말고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여자는 정말 누구인가요? 공작 부인을 입에 담는 걸 보면 이름 있는 가문의 여식인 모양이죠? 제가 사교계 일에는 까막눈이라서요.”
“오라버니의 아카데미 동기인데, 사실 그렇게 대단한 관계는 아니에요.”
타앙!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첫 번째 총소리가 들렸다. 갈채가 들리지 않는 걸 보아선 오발탄임이 분명했다.
“이제 우리도 진지한 자세로 사냥에 임하죠.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승마, 사냥으로 지는 건 안 좋아해서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수렵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그동안 쌓아 놓은 스트레스를 거리낌 없이 방출할 좋은 기회였다. 더불어 2회 연속 우승까지 노릴 수 있는!
네자르에게 지고 싶지 않았기에 함께하는 사냥 초보들의 존재도 잊고 총 한 발, 한 발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토끼와 여우는 1점, 사슴은 2점, 기타 잡식 동물은 3점, 새는 4점. 참고로 나는 훨훨 나는 새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맞히는 명사수이다.
숨을 멈추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살핀다. 기회는 한 번뿐이므로 타이밍 역시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다. 숲 옆의 광활한 초원은 시야가 넓은 만큼 바람이 잦았다. 바람에 흔들려 목을 건드는 잔머리카락에 피부가 간지럽다. 하지만 집중력이 고도로 상승하는 시점에는 간지럼도 금방 무감각해진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정확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사슴이 쓰러졌다. 전방을 주시하던 시종이 후다닥 달려가 쓰러진 사냥감의 상태를 확인하고 손을 들었다. 점수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와아, 케이트! 대체 몇 마리째죠? 이 정도면 사냥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데요?”
사냥은 진작에 포기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쁘던 릴리가 말을 탄 채 내 옆으로 뛰어왔다. 소풍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평소에 비해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백발백중이에요.”
“소문?”
나의 반문에 릴리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에젤로트의 미친 사냥개라고…….”
“흠흠.”
릴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주의를 분산시킨 카론이 릴리를 가볍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케이트가 작년에 워낙 독보적이었어서, 사냥의 여신이라는 별칭이 붙었어요.”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마, 카론. 다 들었거든? 에젤로트의 미친 사냥개라며?”
“으음, 그건…….”
짝짝짝. 카론이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서 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축하드려요, 악토르 영애!”
“첫 사냥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여우예요. 대단하시네요.”
“고마워요. 전부 몰젠 경의 가르침 덕분이었어요. 감사해요, 몰젠 경.”
두 번째 사냥감을 잡은 이후부터는 박수하지 않는다. 대회가 시작한 지 벌써 2시간가량이 훌쩍 흐른 지금, 박수를 받는 인물은 대개 한 종류였다. 사냥에 익숙하지 않아 뒤늦게 첫 사냥에 성공한 여식들. 신이 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여인들을 보니, 돌연 뻘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 너무 열심히 잡은 건가? 너무 공격적으로 사냥에 임했던 거야?
“저 여자가 악토르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캐롤라인 악토르 영애예요. 황태자 전하의 열렬한 팬으로 아주 유명하지요.”
“팬?”
짝사랑도 아니고 팬은 또 뭐야. 카론의 설명에 망원경을 들어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흑발을 높게 틀어 올린 캐롤라인 악토르는 안장 위에 앉아 있음에도 큰 신장이 눈에 띄는 미녀였다. 당당함과 우아함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백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저 잘난 여자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망원경을 내리고 카론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카론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탓이다.
“카론, 속이 안 좋기라도 해? 너,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아.”
옅게 떠오르는 카론의 웃음이 마치 시한부를 선고받은 것처럼 처량했다.
“아까 디저트를 잠깐 집어 먹었는데, 계속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체한 것 같기는 해요.”
“그걸 알면서도 계속 말을 탔다고? 너, 큰일 나고 싶어? 여기, 이쪽 좀 도와줘!”
손을 들어 도움을 청하자 저 멀리서 긴급 상황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달려왔다. 카론은 시종을 따라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천막으로 갔다. 은근히 몸이 약하단 말이야. 연약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에 옆으로 다가온 릴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으음, 엔테라에서는 시녀가 두 명밖에 안 따라왔지요? 제가 가서 함께 있어 주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이렇게 시끌시끌한 장소에서 혼자 누워 있으면 금방 우울해질 거예요.”
그렇게나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어차피 사냥은 혼자 하는 게 더 익숙했기에 재빨리 고개를 주억였다.
“고마워요.”
“힘내요, 케이트 영애. 카론 영애와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말의 머리를 튼 릴리가 급히 카론을 부축하는 시종의 옆으로 달려간다. 혼자 남게 된 나는 총과 망원경을 시종에게 건네고 장갑을 벗었다. 퍽 괜찮았던 기세가 끊겨서 그런가,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1등과는 몇 점 차이니?”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시종이 번쩍 고개를 들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예, 26점 더 높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지?”
“황태자 전하와 에젤로트 단장님, 그리고 반 공작 각하이십니다.”
“으음…….”
아무래도 내 최선은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남은 1시간 내에 26점을 따라잡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네자르는 대체 못하는 게 뭘까? 이 정도면 놀랍다 못해 경이로운 수준이다.
남은 시간 동안 사냥을 계속 즐길까, 아니면 따로 떨어져서 개인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발굽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록허드였다.
“어이, 케이트. 이렇게 좋은 날에 왜 혼자야?”
기분이 좋은지 록허드의 낯은 활짝 피어 있었다.
“카론은 아파서 잠깐 쉬러 갔어.”
“어이쿠. 성격은 판시온 단장과 똑같던데, 건강은 아니었나 보군.”
그는 실실 웃는 얼굴로 모자를 벗어 이마에 맺힌 땀을 털었다.
“우리 기사단 사이에서 네 사냥 솜씨에 대해 찬양 일색이야. 초원을 누비는 한 마리의 맹수 같다나 뭐라나.”
전혀 기분 좋은 칭찬이 아니었다. 나는 벗어 놓았던 장갑에 손가락을 다시 끼워 넣었다. 록허드의 속 긁는 소릴 듣느니 사냥을 재개하는 게 나을 테다.
“나는 왜 꼭 맹수 아니면 짐승이야? 다른 여식들은 여신이나 한 떨기 꽃이라는 별명이 붙던데.”
“어… 눈빛이 살벌해서? 기사들도 인정한다는 의미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나름대로는 위로랍시고 뱉은 소리였겠지만, 내 입장에선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말이었다.
“흥, 그 사람들한테 인정받아서 뭐 하니. 에젤로트의 미친 사냥개라는 이상한 별칭만 붙지.”
“푸하학! 뭐, 뭐라고? 에젤로트의 무슨 사냥개?”
배를 잡고 웃던 록허드가 말 아래로 떨어지려던 상체를 힘겹게 바로 했다. 얼마나 즐겁게 웃던지, 내 뒤에 서 있던 소년 시종도 끄윽 하고 힘겹게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웃고 저리 꺼져!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할래?”
당연한 소리였지만, 록허드는 내 역정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놀리면 화가 나는 것으로 끝날 텐데, 록허드가 놀려서 그런가 화에 더해 열이 뻗쳤다. 나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온 힘을 다해 록허드에게로 집어 던졌다. 내 짜증을 가득 담은 행위에 록허드가 코웃음을 쳤다.
“내 어릴 적부터 널 볼 때마다 될성부른 떡잎이다, 싶었지. 그런데 이제 보니 그냥 떡잎도 아니고 사냥꾼이 될 떡잎이었구나!”
록허드가 얄미운 목소리로 크게 떠들던 그 시점이었다.
“누가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공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처음 보는 시종이 나타나 땅 위로 떨어진 내 장갑을 주웠고, 난입한 인물이 주운 장갑을 건네받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즉시 내 표정이 불만스레 구겨졌다
“여기 있습니다, 영애.”
아무렇지 않게 우리 대화에 끼어든 인물은 다름 아닌 앤드류 황자였다. 그는 마치 대단한 선의라도 베풀듯, 장갑을 나에게 다시 건넸다.
내 시종도 충분히 주울 수 있었던 장갑인데 왜 지가 받고선 생색이람. 나는 감사 인사 없이 그로부터 장갑을 받았다.
“아, 당연히 에젤로트 영애를 말씀하신 거려나? 점수를 보니 현재 순위가 4등이시더군요. 듣던 대로 역시 대단하십니다. 에젤로트는 록허드 단장도 그렇고, 릭 교수도 그렇고. 인재가 항상 넘치는 느낌이네요.”
“과찬이십니다. 황자 전하께선 대회를 잘 즐기고 계십니까?”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지, 받아치는 록허드의 표정이 다소 어색하다. 상대가 벌레든 식물이든 친한 척하기 대가인 록허드가 불편한 티를 숨기지 못할 정도면 앤드류 황자의 성격이 확실히 까칠한 것 같기는 했다.
“나름대로 힘을 내고 있기는 한데, 두 자리 등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겠더군요.”
“첫 참가가 아니십니까? 그 정도면 아주 뛰어난 성적이지요.”
“그래도 명색이 황족인데 이런 등수에 만족할 순 없지요. 괜찮다면 에젤로트 영애께 작은 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완벽하게 장갑을 낀 상태로 다시 턱을 들었다. 록허드는 나와 앤드류의 관계를 살피는 듯했고, 앤드류는 예의 그 삐딱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는 중이었다. 내가 그에게 전해 줄 만한 조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냥은 재능이야.”
팔을 뻗어 시종이 들고 있던 내 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새를 쏠 때의 자세를 잡아 총구를 앤드류에게로 향했다. 안 그래도 서늘했던 그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왜냐하면 난 첫 참가부터 3등이었거든.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두 자릿수는 평생 못 벗어날걸? 그러니까 괜한 시간 낭비 말고 그냥 네 등수에 만족해라, 로 해 둘게.”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록허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간다. 흠, 너무 건방졌나? 총을 천천히 내리자 앤드류가 진심이 담긴 헛웃음을 뱉었다.
“감히 황족 앞에서 편히 말을 놔?”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지.
“어머, 서운하게 그런 소릴 하다니. 우리 분명 친구 하기로 했잖아? 설마 그날 밤의 일을 벌써 잊은 거야?”
새하얀 록허드의 얼굴이 이제는 뒷배경 못지않게 푸른빛으로 물들어 갔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듯, 잠시간 이마를 부여잡던 그가 빛의 속도로 말의 머리를 돌렸다.
“……아! 단원이 절 부르는 것 같군요. 안타깝지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화 재밌게 하시길.”
고삐를 잡은 록허드가 저 먼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렇게 남겨진 인물은 나와 앤드류, 그리고 재수 없이 고래 사이에 껴 버린 두 명의 시종이 다였다.
록허드가 사라지자 그나마 웃음기가 남아 있던 앤드류의 얼굴이 놀라운 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는 가소롭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주 기어오르는군, 모지리.”
“두 자릿수 주제에 지금 누구보고 모지리래? 자기 얼굴에 똥칠하면 안 부끄러워?”
“형님이 너 같은 애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안 믿긴다. 설마 형님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냐?”
“아니. 그리고 내 앞에서 네자르 이야기 하지 마.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게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온 건가, 싶었지만 잘 생각해 보니 평범한 질문에 총구를 들이민 건 다름 아닌 내 쪽이었다.
이윽고 앤드류와 나 사이에 꽤 긴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내가 아닌 그였다.
“알겠다. 앞으로 형님 이야기는 안 하도록 하지. 그러니까 사냥하는 법 알려 줘.”
“……그 말, 진심이었어?”
“그럼 가짜겠어?”
앤드류가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네자르한테 부탁해도 되잖아.”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
“나랑은 가까운 사이이고?”
앤드류의 표정은 이제 사람 하나를 칠 것처럼 살벌해져 있었다. 여기서 더 속을 쑤셨다간 그의 화가 폭발할 기세였기에 얌전히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지금부터 날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 너, 미쳤냐?”
“싫으면 네자르한테 가시든가.”
지지 않고 쏘아보자 깊은 한숨과 함께 그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선생이라는 단어가 쉬이 혀에서 떨어지지 않는 듯, 금붕어처럼 입을 열고 닫던 앤드류는 한참 만에 내 요구 조건을 들어주었다.
“알았어. 사냥 시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빨리 알려 달라고, 선생.”
“얼마든지.”
네자르와 같은 핏줄이니까 몸 쓰는 일 정도는 금방 배우겠지. 나는 의욕 넘치는 마음가짐으로 사냥감을 찾기 위해 말을 돌렸다.
앤드류의 사냥 실력이 끔찍하다 못해 충격적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채 5분도 흐르지 않아서였다.
겨우 1시간이었을 뿐인데, 끔찍하리만치 긴 시간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앤드류의 텅 빈 머리에 ‘유연한 사냥법’을 각인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진전된 부분이라고는 기껏해야 주변 환경을 면밀하게 살피는 분석력 정도가 다였다. 그것 말고는 정말, 놀랍게도, 앤드류의 사냥 실력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그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나는 핏줄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네자르의 동생이라고 해서 네자르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대회의 후반 1시간은 별다른 소득도 없이 끝나 버렸다.
“너, 앞으로 다시는 나한테 사냥법 가르쳐 달라고 하지 마!”
나의 좌절 서린 목소리를 앤드류는 차갑게 받아쳤다.
“그럴 일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 마시지. 개한테 가르침을 받아도 이보다는 낫겠군. 정말 완벽한 시간 낭비였어.”
그 말을 끝으로 앤드류는 사냥 대회를 마무리하기 위해 천막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질린 표정의 시종과 너른 초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아 물을 마셨다.
널 가르칠 개는 무슨 죄냐? 속으로 욕을 뱉고 나 역시 에젤로트의 천막으로 향했다. 공식적으로 주어진 사냥 시간이 종료되면서 수십 명의 인파가 한 번에 몰렸다.
특히나 사람이 바글바글 몰린 곳은 점수판이 놓인 공간이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남자들로 가득한 인파를 제치고 점수판 앞에 섰다. 짧은 시간 내 이미 집계가 끝난 뒤였는지, 등수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1등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2등 록허드 에젤로트, 3등 쿼트로그 반……. 4등으로 출발했던 내 등수는 9등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게 다 그 모자란 앤드류 황자 때문이야. 사냥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보람도, 황자를 잘 가르친 보람도 없으니 이번 대회는 그야말로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나는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돌아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나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네. 덩치가 아주 집채만 한 놈이더군.”
“그런 놈이 황성 안에 있었다고요?”
“종종 숲 근처에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었어. 근처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탓인가, 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더군.”
“전하께서 나서 주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모로 큰일 날 뻔했군요.”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째 주된 대화의 주제가 등수에서 많이 벗어난 느낌이었다. 몰래몰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에젤로트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록허드는 이미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의자 위로 나자빠져 있었다. 나는 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바깥이 엄청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포도알을 골라 먹으며 일어 선 록허드가 대답했다.
“일? 무슨 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시시콜콜한 일들 하나하나를 다 알지는 못해. ……아, 혹시 그건가?”
으드득. 포도의 씨앗까지 씹어 낸 그가 이어서 말했다.
“네자르가 불곰을 잡았어. 소름 돋게 커다란 놈이었지.”
……뭐라고?
“곰? 내가 아는 그 곰이 맞아? 사람 얼굴만 한 발바닥을 휘두르고 네 다리로 뛰는 짐승?”
“그래, 그 짐승. 사향노루를 따라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도중에 발견했다더군. 조금만 늦게 알아챘어도 대회가 엉망이 될 위기였지.”
불곰이면 몇 점이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그래서 네자르는?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급한 티가 역력한 질문에 록허드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안 괜찮으면 대회가 계속 진행될 수 없지. 그렇게 걱정되면 나한테 묻지 말고 직접 찾아가 보든가?”
멀쩡하다면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옴과 동시에 절로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나는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고 천막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지나고 돌이켜 보니 다소 아쉽기는 했다. 네자르와 함께했으면 사냥도 훨씬 재밌고, 곰을 잡는 모습도 구경했을 텐데.
하지만 이게 다 곧 있을 저녁 만찬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 우리 둘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여식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할 테고, 그들에게 말도 걸고, 대화도 나눠서 가까워질 터였다 나는 그 여인들 안에서 등을 밀어 줄 사람 한 명만 골라내면 됐다.
확신컨대 오늘 밤 네자르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인이 무조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정조 관념이라고는 전생에 살았던 세계에 비해 쥐뿔도 없는 나라였다. 이 나라의 여인들이 약혼자와 삐거덕거리는 황태자를 가만둘 리 없었다. 특히나 불륜을 귀부인의 미덕으로 여기는 제도 출신이라면 더더욱.
“카트리나 영애, 계십니까?”
혼자 완벽한 저녁 만찬을 만들기 위한 망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자에 몸을 일으키자, 손을 들어 나를 저지한 록허드가 먼저 일어서 천막을 열었다. 그곳에는 네자르의 보좌관, 론이 서 있었다.
“아, 록허드 경, 안에 카트리나 영애 계십니까?”
“여기 있어. 나한테는 무슨 일이에요?”
고개를 길게 빼 나의 위치를 확인한 론이 차분히 허리를 숙였다.
“여기 계셨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자르 전하께서 사냥 전리품을 보내셨습니다. 나와서 확인해 보세요.”
느낌이 안 좋다. 나는 내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늘 자부하는 편이었다. 그 감에 의해 장담하건대, 이 천막을 나가면 저녁 만찬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계획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어서요.”
그렇다고 황족의 명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록허드와 함께 천막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매우 대단했다. 소문의 주인공 ‘불곰’이 싸늘하게 식은 사체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사냥에서 얻은 가장 귀한 전리품을 나의 하나뿐인 약혼자에게 바친다. 오늘 그대의 사냥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황후가 될 자질이 충분한 여인임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곧 있을 저녁 만찬 때 즐거운 얼굴로 보았으면 한다. ……이상 네자르 전하의 전언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사냥 실력이 황후에게 요구되는 주요 자질이 된 걸까. 말을 마친 론은 시종을 시켜 곰을 옮겼다. 곰의 사체는 에젤로트에 직송될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선물하다니, 네자르답지 않은걸. 흠, 뒤늦게나마 마음먹었다 이건가? 여동생 잘 둔 덕에 귀한 고기를 먹어 보겠네.”
곰이 실려 나가도 천막 앞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하아, 네자르 때문에 내 계획이 보기 좋게 틀어졌네. 이 수많은 귀족 앞에서 보란 듯이 내게 선물했으니, 사이좋은 약혼 관계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충만했던 의지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괜찮아! 아무렴 그 많은 여자 중 한 명도 못 낚겠어?
어떻게든 될 거란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네모네 마를린. 마를린 남작가의 3남 2녀 중 차녀. 미모 나쁘지 않음, 성격 완만함, 취미 독서, 특기 미소년 수집… 뭐? 미소년 수집?”
작게 헛기침을 한 카론이 경악 가득한 내 물음에 대답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에요. 영지의 예쁘기로 소문난 소년들과 종종 차를 즐겨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옆에서 셔벗을 퍼먹던 릴리가 숨을 죽이고 웃었다. 릴리가 비웃는 수준이면 더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나는 카론의 부가 설명에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네자르를 두고 미소년과 차를 마시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여자는 기각.”
수첩의 종이를 한 장 뒤로 넘겼다. 카론이 나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은 성인 귀족 여식 명단이었다.
“이블린 블랑카. 블랑카 남작가의 1남 3녀 중 막내. 미모 뛰어남, 성격 까칠함, 취미는 로맨스 소설 읽기, 로맨스 소설 작가의 사인이 새겨진 초판본 수집.”
이 정도면 꽤 무난한 취미와 특기네.
내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웃음 지은 카론이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는지 아름다운 옆 선에 다시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이는 황성에서의 저녁 만찬. 홀은 이미 사냥 대회의 여운을 푸는 귀족들로 만석인 상태였다. 곧이어 목표물을 포착한 카론이 몸을 낮게 숙이고 속삭였다.
“반 공작의 뒤편을 보시면 여자 네 명이 모여 있어요. 그중 채도 낮은 금발의 여인이 이블린 블랑카예요.”
그녀의 말에 나와 릴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쪽으로 향했다. 흠, 저 정도면 확실히 눈에 띄는 미녀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이자, 잠자코 여인을 살피던 릴리의 미간이 구겨졌다.
“저 여자가 이블린 블랑카였어요?”
“아는 사람이야?”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에요. 재작년에 역대 최악의 졸업 점수를 달성하고 아카데미 꼴등으로 졸업했어요. 듣기로는 그 전년도도 졸업 점수 미달이었다고 하는데.”
“……뭐, 공부를 싫어할 수도 있지.”
“그런데 졸업 점수 미달이었던 이유가 글을 못 읽어서였대요. 1년 동안 문맹만 겨우 탈출하고 시험을 봤다고 하네요.”
“문맹인데 로맨스 소설 읽기가 취미라고? 그건 잘못된 소문 아니야?”
나의 반문에 조용히 서 있던 카론이 다시 헛기침했다.
“그 로맨스 소설이요, 시녀가 읽어 준다고 해요.”
아무리 그래도 문맹은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미련 없이 수첩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것으로 벌써 다섯 번째 실패였다. 제국은 넓고 여식은 많은데 왜 적당한 여자는 찾기 어려운 걸까.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많은 거 바라지 않아. 그냥 평범한 여식은 없어? 평범한 외모, 평범한 성격, 평범한 취미를 가진 그야말로 평범한 여식 말이야.”
“그런 평범한 여식에게 황태자 전하가 넘어가실까요?”
과연, 학계의 러브콜을 받는 인재답게 릴리의 대답은 매우 논리적이었다.
“영애 말에도 일리가 있어. 무려 황태자 위치에 있는 남자인데, 평범한 여자한테 넘어갈 리 없지. 차라리 성격 나쁜 미녀가……. 으음. 하지만 네자르는 여자한테 관심이 별로 없는걸. 얼굴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
“그럼 저는 어때요? 저 정도면 얼굴도, 성격도, 능력도 전부 다 괜찮지 않아요?”
눈을 커다랗게 뜬 릴리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역시 대단한 자신감이야. 한때는 록허드가 네자르의 이상형에 가깝다며 소개해 준 여인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릴리 영애는 아마 안 될 거야.”
“당신은 힘들 거예요.”
카론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함께 말을 뱉어 냈다.
“어쩜 눈도 안 마주치고 대답하시네! 사람 시무룩하게!”
말과 달리 릴리는 변함없이 행복한 얼굴로 셔벗을 퍼먹었다. 나는 넘겨 두었던 수첩에 적힌 이름을 조용히 읊었다.
“다음은… 캐롤라인 악토르.”
네자르의 팬이라던 그 여자였다.
“악토르 백작가의 외동딸이자 후계자. 미모 뛰어남, 성격 주도적이며 신중함. 취미는 황태자 전하의 소식 전해 듣기… 뭐? 소식 전해 듣기는 또 뭐야? 특기는 다개국어.”
확실히 이제껏 봐 온 여인들과 비교해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이었다. 나는 캐롤라인을 찾기 위해 홀을 살폈다. 사실 살필 필요도 없던 것이, 큰 키에 작은 얼굴이 워낙 도드라졌기에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쟝 악토르가 죽고 후계자가 된 걸로 아는데. 여태 혼인을 치르지 않은 이유가 있어?”
“약간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있어요. 데보라 부인의 살롱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자신이 사랑할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네요. 아마 원하는 남자를 아직 찾지 못한 것 아닐까요?”
가문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 캐롤라인 본인의 의지가 꽤 강한 모양이다. 나였으면 어머니의 성을 못 이기고 결국 혼인했겠지. 역시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인가?
“좋아. 나, 저 여자로 정했어.”
운명의 남자를 찾기 위해 혼인을 미뤘다니, 이는 아무리 봐도 네자르를 위해 남겨 둔 자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팬이라 불리게 될 정도로 네자르를 신경 쓸 리 없었다.
“와아, 카론 영애의 말이 맞다면 이번에는 꽤 제대로 된 후보를 잡은 것 같은데요?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잖아요.”
“없지는 않죠. 그녀는 악토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니까요.”
카론의 말에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서 캐롤라인에게 향하려던 다리가 굳었다.
“너무나 먼 가정이지만… 만약 저 여인이 전하와 혼인을 치르게 된다면 악토르 가문의 입장은 다소 곤혹스러워질 거예요. 가문을 이을 후계가 없어졌으니 먼 방계를 돌고 돌아서 쓸 만해 보이는 아이들을 데려와야겠죠. 그 순간부터 직계는 완전히 말살되는 거라구요.”
“으음. 그렇다면 악토르 영애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네요. 자신이 졸졸 쫓아다닐 정도로 좋아한 남자와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 사이에서요.”
그런 건 지금 이 순간에 중요한 고민 요소가 아니었다. 아직 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먼 미래를 걱정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일단 가 보죠.”
그러니까 일단 직진을 하고 보자.
나는 완벽한 첫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머리와 옷차림을 차분히 정리했다. 기세에서 눌리지 않으려 준비해 온 화려한 보석이 장식된 가방에 수첩을 구겨 넣었고, 장갑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내가 진중한 표정으로 몸가짐을 정리하는 모습에 셔벗 한 접시를 다 비운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카론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후후. 저, 이런 경험 처음이에요. 카론 영애와 한패가 되어서 악토르 영애 주변에 포진된 여인들을 처리하면 되는 거죠? 아아, 떨려라! 마치 공작원 같네요!”
“당신은 절대 먼저 입을 열면 안 돼요. 알겠어요? 내가 눈을 마주칠 때까지 다소곳하게 서 있기만 하세요.”
“물론이죠, 물론이죠! 카론 영애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불안을 떨치지 못했는지, 카론은 남겨 둔 샴페인을 순식간에 비웠다. 그리고 릴리를 이끌어 캐롤라인의 사교 패거리를 향해서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 눈치를 살피다가, 캐롤라인을 제외한 패거리의 시선이 카론에게로 향했을 때 재빨리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악토르 영애.”
캐롤라인은 나의 인사에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의외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옅은 미소를 띠며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에젤로트 영애, 맞으시죠?”
그래, 바로 이런 반응이지! 카론의 방해가 사라진 덕택인지 캐롤라인의 응답은 내가 꿈꿔 온 장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어서 나온 어투는 기대한 바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영애가 먼저 절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뵙기 유독 힘든 것으로 유명한데 말이죠. 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뭘까, 이 가시밭 위를 걷는 듯한 불편하고 따끔한 느낌은. 당황함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게 밝은 웃음을 지었다.
“아아, 제가 워낙 사교적이지 못해서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 같네요. 사실 그렇게 숨어서 지내는 것도 아니에요. 악토르 영애 같은 경우는… 멀리서 봐도 계속 눈에 띄셔서 꼭 인사를 한번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한 발언에 무슨 실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왜 캐롤라인의 표정은 갈수록 차갑게 가라앉는 걸까.
캐롤라인은 손에 쥐고 있던 샴페인잔을 테이블 위로 천천히 내려놓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지요. 저는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아니, 혐오하죠.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면 빙 둘러서 이야기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말하세요.”
사람은 보통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하게 된다.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명명백백한 목적이 있는 접근이었기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니 당신, 오늘 대회를 9등으로 마쳤죠?”
캐롤라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작년 우승자가 전년도 점수에 한참 못 미치는 점수로 대회를 끝마치다니……. 설마, 앤드류 전하 때문인가요?”
설마라고 말할 사람은 이쪽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냥 대회 동안 내 행적을 살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이거, 아무래도 잘못 걸린 느낌인데…….
“앤드류 전하께서 제게 사냥 수업을 받길 원하시더라고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죠.”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음에도 캐롤라인의 앞에서 말하려니 허겁지겁 변명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의 대답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즐거우셨나요?”
즐거웠겠니. 빈말이라도 즐거웠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모르는 척 되물었다.
“수업이요?”
“수업이겠어요? 곰까지 가져다 바친 네자르 전하를 버리고, 앤드류 전하와 사냥을 즐겨서 만족하셨냐고요!”
“……네?”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슬슬 답답함이 몰려오려는 시점, 캐롤라인의 등 뒤편으로 네자르의 얼굴이 보였다. 유독 큰 신장은 물론이고 워낙 화려한 외양이었기에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이상한 곳으로 가지 말고 제발 이쪽으로 와라, 제발!
내 기도가 들릴 리 없는 캐롤라인은 여전히 가시 돋친 따가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절 찾아오셨으니 이 기회에 아주 확실히 말씀드리죠,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 감히 네자르 전하를 뒤로하고 한눈팔려 하지 마세요. 그런 행동은 제가 절대 용납하지 못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소리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팬은 팬인데, 그냥 팬이 아니라 열성 팬이었구나. 성격을 얌전히 죽이려 했던 다짐이 파스슥 무너져 내리려 했다. 나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물었다.
“영애가 용납 못 하면 어쩔 건데요?”
“온몸을 바쳐 당신의 미래 혼삿길과 연애 사업을 괴롭히겠어요. 네자르 전하로 만족하지 못한 결정을 평생, 죽을 때까지 후회하도록!”
“……농담이죠?”
“농담으로 들렸다니, 아쉽네요. 전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말이죠.”
말과 달리 방긋 웃는 얼굴이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침 금붕어 똥처럼 달라붙는 인파를 뚫어 낸 네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작게 미간을 구긴 그가 방향을 틀어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를 잡아먹을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저는 한눈을 팔 생각이라서요. 그렇게 불만이면 본인이 네자르 전하의 혼인 상대가 되는 건 어때요?”
“……뭐라고요?”
화를 참기라도 하듯,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들 끓고 있었다. 눈동자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출처 모를 하얀빛으로 반짝였다. 머리에 꽃만 매달면 미친년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은데? 눈이 마주치자 등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몸의 이름은 카트리나 에젤로트. 미친 여인을 상대로 한 발짝 물러설 인물이 아니다.
“그렇게 불만이면 당신이 네자르의 마음에 들어 보라고. 여기예요, 전하!”
네자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란 캐롤라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네자르와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그는 이미 내 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그는 내 앞에 서자마자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케이트 너, 사냥 때 너무 격하게 움직이던데, 상처는…….”
그것도 내 전신을 찬찬히 훑으면서. 괜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라 네자르의 말을 서둘러 끊어 냈다.
“네자르 전하, 악토르 영애가 전하께 할 말이 있대요. 아주 중요한 말인가 봐요.”
“뭐?”
캐롤라인의 표정이 어떤지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거침없이 구겨지는 네자르의 얼굴을 보니 속이 뻥 뚫린 기분인 동시에 짜증스러운 감정이 솟았다.
“전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 가 볼게요. 나중에 다시 봬요, 전하. 그리고 악토르 영애.”
가극의 대본이라도 읽듯이 후다닥 말을 마치고 도망치듯 홀을 떠나 테라스로 나갔다. 혹시 누가 따라 들어오지는 않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멍청한 나는 그 부분에서 또 한 번 실망하고 말았지만.
그렇게 수첩을 다시 꺼내어 읽는 와중, 카론이 내가 앉은 테라스로 따라 나왔다.
“잘 끝난 것 같은데, 맞나요?”
입꼬리가 절로 추욱 처졌다. 돌아오자마자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하다니!
“모르겠어. 억지로 붙여 놓기는 했지만……. 확실한 건 캐롤라인 악토르가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는 거야.”
특히 마지막에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눈은 반쯤 미친 사람의 것이었다. 내 생에 그런 눈은 딱 두 번밖에 본 적 없었다.
함박눈이 이틀을 넘도록 펑펑 내리던 늦은 밤, 말을 타러 나가던 록허드의 눈. 논문집에 실린 물리 유체학 대가의 발표가 자신이 생각한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서재에서 일주일간 이론을 해석하던 릭의 눈.
다시 돌이켜 봐도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앞의 둘 못지않게 제정신이 아니던 캐롤라인의 눈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저 미친 여자를 네자르와 이어 줬다간 네자르가 무슨 화를 당할지 몰랐다.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상대가 황태자고 뭐고 범죄가 일어날지도 몰라. 다른 괜찮은 여자는 없을까, 카론? 응?”
어째 그녀에게 받은 수첩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물 설명의 괴리감이 더 극악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내 우울한 물음에 카론이 울상을 지었다.
“사실… 제도와 가까운 영지의 여식 중 약혼식을 치르지 않은 자가 그리 많지는 않아요. 그나마도 제가 앞쪽에 써 놓은 여인들의 소문이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편이죠. 보통 스무 살의 나이에도 혼인 예정자가 없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거든요.”
“그만한 이유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데?”
“가볍게 릴리 아마스라 양 수준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해되는 예시였다. 역시 세상은 넓고 이상한 귀족은 많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이상한 귀족 영애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상하기는커녕 평범한 축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아아, 고민돼! 어쩌지? 그냥 캐롤라인 악토르를 선택해야 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미소년 수집가, 스무 살의 문맹보다는 열혈 팬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습관처럼 얼굴에 손이 갔지만, 진한 화장 탓에 함부로 비빌 수도 없었다.
“어떡할까, 카론? 네 현명한 대안이 필요해!”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고민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내 고통 서린 외침에도 카론은 대답 없이 조용했다.
“카론? 왜 대답이…….”
카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샹들리에를 가리고 까맣게 그늘이 져 있었다. 내 시야의 높이에서 찰랑거리는 펜던트가 눈에 상당히 익숙했다. 록허드가 그리 자랑하던 승전 주역에게 내려진 황제의 훈장이었다. 나는 조금 느리게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친 검홍색 눈동자가 작게 웃음 지었다.
“중요하다는 일이 널 대신할 여자를 찾아내는 거였나 보군.”
훈장의 주인, 네자르는 연회의 빛과 어두워져 가는 저녁 하늘 사이에 녹아들듯이 서 있었다. 얼굴에 걸쳐진 옅은 미소가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흘러 버린 시간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노을 아래에 있으니 머리칼이 붉어서 마치 다른 사람 같네.”
홀리듯 그를 쳐다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예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귓등 역시 노을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
‘그러고 보니 에젤로트의 형제 중에서는 케이트 너만 백금발이네.’
코를 박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내가 과제를 끝낼 동안 졸고 있는 줄 알았던 네자르가 다소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만 백금발이라고? 이상한 소리에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에든도 백금발이야.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람?’
‘……그랬나? 소백작이 백금발이라고?’
‘나는 어머니의 외양만 닮았지만, 에든은 성격도 똑같아. 으음, 백금발보다는 은발에 더 가까운 느낌이기도 하고.’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한두 번 본 사이가 아닌데도 헷갈려 한다. 나는 만년필을 느슨하게 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자다 깨어난 김에 다시 독서를 할 심산인지, 안경을 걸치던 네자르가 입을 열었다.
‘머리색이 붉기에 내가 또 꿈이라도 꾸나 했어.’
그 말에 지금 시간대가 늦은 오후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자르가 억지로 시킨 외국어 과제에 골머리를 앓다가 2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뚫어지듯 쳐다보던 책과 책상은 어느새 창 너머 내리는 노을의 빛으로 고요한 붉은빛이었다. 내 팔과 손등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해가 지는 시간이 상당히 빨랐다.
‘내 꿈, 자주 꿔?’
책장을 넘기던 네자르가 슬쩍 눈동자를 올렸다. 대뜸 말을 걸던 때와 마찬가지인 여상한 얼굴로. 뭔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기분이라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듣기에 말이 그런 것 같아서.’
‘……종종.’
‘정말?’
나도 그런데 설마 네자르도 그럴 줄이야.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뜨자, 그가 시선을 다시 책으로 내렸다.
‘거기서는 나랑 뭐 해? 설마 꿈에서도 나한테 숙제를 내주는 건 아니지?’
‘말하는 것만 들으면 트라우마라도 되는 줄 알겠네. 다 너를 위한 거니까 너무 투정 부리지 마.’
‘내가 거기서도 투정 부리는구나! 그렇지?’
네자르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픽 웃고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을 뿐이다.
‘뭐, 그럴 때도 있고.’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럴 때도 있다는 건,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는 걸까? 아니면 보통은 그렇지만, 아닌 날도 가끔 있다는 걸까?
‘종종이 아니라 자주 꾸는구나?’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반응이 확실했다. 이마를 확 찡그린 네자르가 소리 없이 입술만 여러 번 열더니, 한참 뒤늦게 말을 잇는 것이다.
‘케이트.’
‘응.’
‘너, 가끔 쓸데없을 정도로 예리해. 그 눈치를 공부할 때나 써 봐라.’
저렇게 말하면 내가 받아칠 말이 없다. 네자르는 나보다 네 살이나 많으면서 늘 얌체처럼 대답한다니까. 입술을 삐죽 내밀자, 길게 팔을 뻗은 그가 내 입술을 도로 집어넣었다.
‘네자르는 할 말 없으면 꼭 그렇게 말하더라? 뭐만 하면 공부, 공부, 공부! 이 정도면 황립 아카데미에 가서 수석을 노릴 수 있겠어!’
‘그건 아니야, 케이트. 나는 널 수석으로 만들려고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귀족 노릇은 할 수 있게 공부를 시키는 거다.’
이해할 수 없는 설교였다. 어머니를 따라 연회장이나 다과회를 갔을 때는 귀부인이 외국어는커녕 모국어도 읽지 못해 시녀나 시종이 대신 읽어 주는 가문도 더러 있었다.
‘돈이랑 명예만 있으면 주변에서 다 해 주잖아. 귀족 노릇은 그런 거야. 돈을 거두고, 거둔 돈을 풀어서 영지를 활성화하기만 하면 돼. 유능한 보좌관을 시켜서.’
여기서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 유능한 보좌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능한’이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린 소리가 아닐 터였다.
‘배운 만큼 보인다는 소리가 있어, 케이트. 난 너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을 뿐이야.’
‘맨날 그 말이야!’
저 소릴 한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딱지가 앉겠네. 대체 무슨 말을 하다가 이 잔소리까지 듣게 된 거지?
그래, 백금발. 이 모든 사건의 경위는 내 머리가 백금색이라는 것부터였다. 왜 내 머리카락은 백금색일까? 차라리 아버지를 닮아서 록허드나 릭처럼 갈색 머리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네자르의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겠지!
***
……그런 고민을 했던 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열셋이었나, 열넷이었나?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네자르도 분명 지금과 유사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었다.
“……그 소리랑 비슷한 말, 예전에도 했었어.”
내 말에 네자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벌써 7년쯤 된 일 아닌가. 옛날에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놀란 쪽은 오히려 나였다. 마치 그가 잊지 않았다는 듯이 말했던 탓이다.
“그때는 나한테 예쁘다고 안 했는데.”
“그때와 지금은 다르니까.”
“뭐가 달라?”
눈을 얇게 뜨고 쳐다봤으나 네자르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보는 내가 다 답답해지는 모습이었다. 마음이 다르다고 왜 말을 못 하지? 이쪽의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나조차 알아볼 정도인데, 왜 본인은 묵묵부답인 거야! 어? 대체 왜! 왜!
인정할 수 없어서? 아니면 부끄러워서?
어느 쪽이든 더는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됐으니까 가세요. 제가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차갑게 거절했지만, 여전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뱉어 낸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전하가 안 가시면 제가 갈게요.”
그렇게 차가운 제도의 여식처럼 등을 돌리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네자르가 내 손목을 붙잡아 왔다.
“잠깐, 케이트!”
아니, 그가 잡은 건 손목이 아닌 나의 드레스 자락이었다. 나는 걸음이 턱 막혀 버린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당혹감과 애처로움에 물든 낯의 네자르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연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의 표정은 따로 꾸밈을 더할 필요 없이 절절함 그 자체였다.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부여잡은 네자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준비되면, 그때 말할 테니까…….”
세상에. 다른 이도 아닌 무려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다. 그가 내게 보채는 소릴 하다니, 이게 있을 수가 있는 일이야?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말하고도 무얼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무, 무슨 준비를 기다리라는 거예요? 내가 떠먹여다 줘도 못 받아먹는 주제에!”
“내가 입이 없어서 네가 떠 줘도 받아먹을 수가 없어.”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는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했다. 듣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랑 농담해요?”
네자르가 내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농담하는 게 아니야. 농담이었다면… 네가 답답하게 여기는 일이, 여기까지 이어질 일 없었겠지.”
한창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편 네자르가 테라스에 몸을 기댔다. 저 정도의 반응이라면 그의 의중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네자르는 당장의 난처함을 모면하기 위해서 속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동의할 것이었다. 깊게 숨을 삼킨 네자르가 말했다.
“케이트, 너는 내가 자꾸 정도를 걷지 못하게 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탓을 하다니! 내가 화를 버럭 내기 직전, 네자르가 말을 이었다.
“그게 불만스럽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야. 그래서 이상하고, 익숙해질 수 없고,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되지. 너도 알겠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아. 한데 너는 내가 아무 일도 못 하게 만들어. 네 탓을 하는 게 아니야. 그만큼 내가 머저리라는 의미다.”
“전하가 머저리면 나는 뭐야.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거야?”
입술을 씰룩이며 되묻자 그가 자조하듯이 작게 웃었다.
“……케이트, 나는 늘 내가 닦아 온 길만 걸어왔어. 그 길을 걸어왔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감히 평생이라 말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며 살아왔거든.”
가지런했던 그의 앞머리가 반쯤 엉망이 된 상태였다.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한 네자르는 내 팔을 잡아 자신의 옆으로 끌어왔다.
“하아,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니까 진짜 한심해 보이네. 그러니까 내 말은, 네 존재가 날 자꾸 길에서 벗어나게 하니까…….”
그의 눈이 잠시간 깊게 감겼다가 뜨인다.
“내가 느리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안 될까?”
나의 팔을 쥐고 있던 네자르의 손은 어느새 내 손등 위로 내려왔고,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 어느 순간부터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채웠다.
내 모든 감각과 인지가 그와 맞닿아 있는 피부로 향한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네자르가 이렇게 강한 힘으로 내 손을 잡은 것은.
“케이트?”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춰 왔지만, 정신이 혼란해진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생각이기에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응?”
그가 고개를 숙인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초조함이 가득했던 직전과 달리 이제는 다소 여유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기다려 주면 안 돼?”
그러나 여유는 어디까지나 네자르에게만 해당된 일이었고, 나는 기겁을 하며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모, 몰라! 저리 가!”
그리고 열이 가득 차오른 손을 빼내어 한 걸음 물러섰다. 하아, 위험했어. 하마터면 홀라당 넘어갈 뻔했네!
“내가 말했죠, 전하. 집을 나가서라도 절대 당신이랑 결혼 안 한다고! 내 말 무시하지 마세요. 난 분명히 말했어. 전하가 아무리 날 설득하려 해도 다시는 안 넘어갈 거야!”
당당한 걸음으로 테라스를 나가려던 도중, 다시 등을 돌려서 네자르를 노려봤다.
“따라오지 마!”
또 무슨 유혹을 당할지 몰랐기에 네자르만 남기고 후다닥 테라스를 벗어났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단순한 착각은 아닌 기분이었다.
“아, 어지러워…….”
나도 자존심이 있지 저 그럴싸한 말에 또 당할 수는 없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 사실일까, 하는 기대감도 부풀었으나 그 기대감이 싫어 재빨리 털어 냈다. 호수에서 느꼈던 비참함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진실 여부를 떠나서 네자르의 요구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아무래도 캐롤라인을 더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휴식이 필요했다. 우선 좀 쉬자. 쉬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머리가 맑아지면 더 좋은 수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결말이 안 좋았나 보군.”
그러나 하늘은 내가 쉴 타이밍도 주지 않았다. 물잔을 내려놓자마자 유령처럼 조용한 기색으로 찾아온 앤드류가 은근슬쩍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생에 카발 형제에게 죄라도 진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까부터 이상한 소릴 하기에 싸웠나 싶었더니, 정말이었을 줄이야.”
“너, 혹시 나 뒤쫓아 다녀?”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앤드류가 코웃음을 쳤다.
“널 본 게 아니라 형님을 본 거다.”
이 정도면 소름이 돋을 정도의 형님 바라기 아닌가? 형제애라곤 쥐뿔도 없는 에젤로트 형제들만 보다가 그를 보니 현실감이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땅을 파낼 정도로 우울한 기분이 되어 그에게 진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앤드류,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그놈의 사랑이 대체 뭐기에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설마 나한테만 이렇게 복잡하게 느껴지는 거야?
앤드류의 표정이 흡사 돌을 씹은 것과 같이 뭉개졌다. 이어서 그는 한심함이 절절 흐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추할 정도로 청승맞다는 건 알겠다.
내가 그렇게 추했니? 나는 그의 이죽거림에도 아무런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앤드류가 내게 말을 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내게 말을 걸 리 없었다.
“받아.”
떨떠름한 얼굴의 그가 내게 건넨 것은 연극 관람 티켓이었다. 그것도 평소에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티켓.
“내가 분명 시상식 때 말했던 것 같은데, 끝까지 찾아갈 생각이 없었나?”
“시상식? 나는 등수가 낮아서 참가도 안 했어. 설마 이 티켓이 내 시상 선물이야?”
“대회에 참여했으면 규율부터 정독해, 모지리야. 올해부터는 대회 지원이 많아져서 그다지 쓸모 있는 건 아니더라도 10등까지는 상품 있어. 쯧, 내가 이런 것 하나하나 신경 써 줘야 한다니…….”
그의 말에 어떤 공연의 티켓인지 자세히 살폈다. 극의 제목은 『푸카투 절벽의 비극』. 문화생활이라곤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 내게 너무나도 생소한 제목이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앤드류가 말을 덧붙였다.
“황녀인 에자렛도 겨우 구할 수 있었던 표다. 리마리아 극단의 역대 최고 작품이라 평가되는 극이지. 자리는 최상급인 로열 플래티넘. 필요 없다고 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내 눈을 쳐다보는 앤드류의 표정이 살벌했다. 황녀가 몸소 나서서 구한 건가? 직접 가지는 못해도 카론이나 릴리에게 주면 될 것 같다고 여겼기에 가방에 잘 넣어 두었다.
“음, 고마워. 잘 볼게.”
앤드류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등을 돌려 멀어졌다. 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네자르와 있던 테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도 눈에 띄지 않는 걸 봐선 이미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런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네. 나는 몸을 틀어 카론과 릴리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나는 극장 관람에 관심이 없는 관계로, 사냥 대회 상품으로 받은 표는 당연히 카론과 릴리에게 선물하려 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으니… 사냥 대회가 끝난 이후 둘의 일정이 매우 바쁘다는 것이었다.
카론은 공작 부인과 국외로 여름 피서를 떠났으며, 릴리는 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팔자 좋은 백수인 나만 에젤로트에 남게 된 것이다.
“그냥 아가씨께서 보러 가세요. 이 연극 표, 구하기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유명한 표예요.”
온종일 널브러져 있는 내 모습이 영 한심했는지, 찻잔을 치우러 온 데이지가 가볍게 던지듯 말했다.
“극장 예절 같은 거 기억 안 나.”
“아가씨도 차암! 그런 걸 언제 신경 쓰셨다고.”
찻잔을 정리한 그녀는 치마를 뒤적여 작은 봉투를 꺼냈다.
“여기 엔테라 영애의 엽서예요. 어머! 이 그림은 카모나일 해변 아닌가요? 방구석에 박혀서 우울한 하루를 보내는 우리 아가씨와 다르게 엔테라 영애는 바깥으로도 잘 놀러 다니시나 봐요!”
나는 데이지의 얼굴을 흘겨보고 카론에게서 도착한 엽서를 뒤집었다. 내용은 아주 짤막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짧은 정보가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피서를 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요. 악토르 영애가 『푸카투 절벽의 비극』 티켓을 선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에자렛 황녀로부터 받았다고 하니 아마 케이트의 티켓과 날짜가 같을 거예요. 친해지고 싶다면 가서 이야기라도 나눠 보는 게 어때요?」
친해지고 싶으냐고? 캐롤라인이 날 보자마자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 일이었다.
“데이지, 연극이 언제라고 했지? 내일? 모레?”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데이지는 아무래도 그새 내 침실을 나간 듯싶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장식대 위에 놓아둔 표를 집었다.
“날짜가… 내일 저녁?”
어차피 공연 시간이 내일이든 모레든 글피든 상관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할 일이 없을 테니까. 문제는 표가 한 장이 아닌 두 장이라는 점이었다. 카론과 릴리는 당연히 시간이 없을 테고, 네자르와는 함께 가느니 표를 버리는 게 나았다.
셋 말고 나와 기꺼이 극장에 동행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자문이었다. 백날을 고민해 봤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소공작은 내가 부탁하면 가 주려나.”
확신하지는 못해도, 판시온이라면 나와 함께 가 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뭔가 이용하는 기분이라 연락까지는 무리일 테다. 애초에 내일 당장 열리는 공연에 함께하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어머니와 함께 관람할까? 최근 모녀 사이에 함께 외출하는 일이 적기는 했으니까.
그때였다. 평소에는 내 침실에 발도 들이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오셨다.
“케이트.”
“네?”
“이 가방 좀 보렴. 어떠니?”
어머니는 내가 선 방향을 향해 핸드백을 걸치고 있는 팔을 내밀었다. 세상에나! 저 흉물은 대체 뭐야?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로 어머니가 자랑하시는 핸드백을 쳐다봤다. 저 붉은 기운이 도는 털과 뭉툭한 주둥이, 화룡점정인 새까만 코까지!
“설마 곰의 머리로 가방을 만드신 거예요?”
“그럼. 전하께서 주신 곰을 어찌 손볼까 고민이 많았단다. 본래라면 가죽을 통째로 다듬어 전시해 두었을 텐데, 이미 차고 넘치는 관계로 조금 색다르게 사용해 봤지.”
“그 색다르게가 가방이라고요? 들고 나갈 수도 없을 텐데요?”
어머니는 보기 드문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음을 지으셨다.
“들고 나갈 수 없다니? 이 어미는 내일 살롱에 가져가 귀부인들 앞에서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떨리는걸.”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만 봐도 충분하단다. 너도 하나 만들어 줄까? 곰 발바닥이 남아 있긴 해. 앞 발바닥이 유독 튼실하더구나.”
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라면 진심으로 제작을 맡기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혀 필요 없어요. 제가 양보해 드릴 테니 어머니께서 두 개 모두 가지세요.”
“그래? 언제든 필요하면 말하려무나.”
아무래도 어머니와 연극 관람을 가려고 했던 건 섣부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저 가방을 들고 번화가를 누빌 생각을 하니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끔찍한 가방은 대체 뭐냐, 케이트?”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제복을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록허드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복도를 향한 그의 시선은 끔찍한 무언가를 마주한 듯 공포에 질려 있었다.
“설마, 곰인 건가? 네자르가 네게 준 그 곰? 윽, 아침부터 엄청난 걸 봐 버렸군.”
지루한 표정으로 록허드의 옆 선을 바라보던 내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다시 출근하는 거야?”
“응.”
“나도 따라가도 돼?”
사흘간 꼼짝도 안 했더니 숨 쉬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지겨웠다. 어디든 에젤로트만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활기찬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내 우울하고 힘없는 물음에 록허드가 인상을 구겼다.
“네가? 안 될 건 없지만, 여기랑 크게 다를 바 없을 텐데. 오늘부터 훈련 재개라 예전처럼 혼자 있어야 할 거다.”
예전이라면 기사단 본부를 방문해 카론과 판시온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말하는 것일 테다.
“으음.”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때야 카론이 있고 네자르가 날 찾으러 왔었다지만, 지금은…….
맞아, 네자르!
“오, 오늘은 네자르 안 바빠?”
록허드가 얇게 뜬 눈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내 속을 다 훑는 듯한 표정이었다.
“폐하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신 탓에 최근 국정 회의가 계속 밀려 있었어. 오늘부터 네자르가 폐하를 대신해서 회의에 참석하게 될 거야. 2주를 늦췄으니 회의도 꽤 길게 진행되겠지.”
“그럼 갈래!”
네자르가 없다면 당연히 가야지! 활기차게 일어섰지만 머릿속은 꽤 복잡했다. 문득 네자르의 선물 문제로 황성을 방문했던 날, 필프론츠 후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르셨나요? 최근 황제 폐하께서 몸이 매우 편찮으신 상태입니다. 늦더라도 올해 가을 내로…….’
설마 뒤에 이으려다 그만두었던 말이 내가 생각한 그 말은 아니겠지? 그렇게 되면 네자르는…….
“가서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해.”
“좋아, 약속.”
록허드의 앞으로 재빨리 달려가 굽어 있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폈다. 그리고 억지로 손가락을 걸어 바라는 대로 약속을 해 주었다. 내 믿음직한 행동에 록허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약속은 믿을 수가 없다.”
“어쩌라는 거야?”
짧게 한숨을 쉰 록허드가 등을 돌려 복도로 향했다.
“됐으니 5분 내로 내려와.”
록허드의 말대로 멀리서 보이는 기사 훈련장의 분위기는 상당히 진지하고 빡빡했다. 아직 2기사단 단장인 록허드를 포함해 일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서른이 넘는 인원이 훈련장에 각을 잡고 대기 중이었다.
“2기사단이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마차가 기사단 본부에 도착하기까지는 이제 겨우 2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가 창문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묻자, 록허드가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성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군기가 잡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네 기사단 복귀 예정일도 이틀이 더 남은 상태 아니었어?”
내 기억으로 록허드에게 주어진 휴가는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말했듯이 황성 분위기가 안 좋아서.”
그 분위기라는 게 황제의 건강과 관련된 거겠지? 아마 그럴 거야. 록허드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정말 확실한 일이었으니까.
“괜히 온 것처럼 느껴지네. 왜 먼저 말 안 했어? 분위기가 안 좋으면 따라오지 말라고 말을 해야지.”
“상관없으니까 괜한 걱정 마라. 너 한 명 안 온다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살아나지는 않으니까.”
사냥 대회가 취소되지 않고 속행된 연유는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을 터였다.
네자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유가 다 있었다. 눈치라도 줬다면 약혼 일로 굳이 그 앞에서 난리 치지 않고 조용히 해결했을 텐데.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나에게 눈치 같은 걸 줄 리 없었다.
얼마 후 낯선 인물이 반듯한 걸음으로 내 앞에 걸어왔다.
“케이트? 이쪽은 내 수행원인 레이리 멘체터. 레이리, 이쪽은 내 동생 카트리나 에젤로트야. 예정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오늘 하루 기사단을 견학하기로 했어.”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새삼스레 록허드가 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일정이 상당히 바쁘신 것으로 압니다.”
“알아. 하지만 오늘은 카트리나와의 외출 약속이 있던 날이야. 약속까지 취소하고 기사단에 출근했는데, 이 정도는 봐 달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의 능숙한 거짓말. 하지만 나를 위한 허구였기에 가만히 입을 닫고 레이리를 응시했다. 그것도 애처로움이 가득한 촉촉한 눈방울로. 내 시선이 퍽 부담스러웠는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던 레이리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에젤로트 영애는 제가 모실 테니, 단장님은 집무실에 들렀다가 바로 훈련장으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지. 고마워.”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한 록허드가 내 어깨를 약하게 잡았다가 놓았다.
“너,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괜한 사건 일으키지 말고.”
“그런 말 하면 더 하는 거 알지?”
“하아, 이건 말 한마디를 지질 않네.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 내가 필요하면 당장 찾아오도록 해, 레이리.”
고개를 저은 록허드가 몸을 돌려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보좌관에게 날 맡긴다는 건 무슨 의미지? 단순히 내가 어딜 가든 뒤따라온다는 건가?
다소 뻘쭘한 기분으로 뒤에 서 있을 때, 레이리가 나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에젤로트 영애. 편하게 레이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기사 지망생과 본부 방문자들에게 추천하는 견학 코스가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견학 코스가 있다고? 저번에 왔을 때는 견학이고 뭐고 응접실에 틀어박혀 훈련장만 내려다봤는데? 전시 상황에 없던 기사단 본부 운영 방침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오늘 견학은 본래 예정되어 있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절 따라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걸음을 멈춘 레이리가 다시 등을 돌렸다. 예정되어 있던 사람이라고? 나와 같은 방문자인가.
“그 사람은 누구죠?”
“접니다.”
대답은 레이리가 아닌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왔다. 레이리의 표정이 하도 평온했기에 깜짝 놀란 건 나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돌아볼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이 얄밉고 노곤한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후작씩이나 되시는 분이 견학을 다 하시나요?”
“그건 또 무슨 차별인지 모르겠군요. 후작은 견학하면 안 되기라도 한답니까? 견학하면 하늘이 무너져요?”
가벼운 걸음으로 내 옆에 선 필프론츠 후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투덜투덜 입을 놀렸다.
“북벌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황성근위대에 대한 관심이 퍽 뜨거워졌습니다. 시대에 앞서가려면 대세를 잘 파악해야죠. 제가 여기서 기사단 견학을 하는 게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후작은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던 연유를 길게 늘어놨다.
내가 알기로 그는 국정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고위 귀족 중 하나였다. 지금 황성에서 회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텐데 왜 참석하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지?
“가장 먼저 소개해 드릴 곳은 황성근위대의 역사가 전시된 역사 전시관입니다.”
레이리는 둘뿐인 관람객을 이끌고 기사단 본부 1층의 가장 깊숙한 장소로 들어섰다. 마치 박물관을 견학하는 것처럼 말끔하게 전시된 내부가 퍽 다채로웠다.
“우리 황성근위대는 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사단 중 가장 역사가 길고 존재 의의가 뚜렷합니다. 시초는 건국 황제인 그라기오시스 1세의 명을 받아서 당대 후계자였던 길메리오시스 황태자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인재를…….”
놀랍게도, 레이리가 무표정으로 줄줄 읊는 내용은 이미 어릴 적에 네자르에게서 지겹도록 들은 내용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기사학부와 수학부를 복수 전공으로 두고 있던 그는 진급 시험을 준비하는 겨울 방학마다 에젤로트로 찾아왔었다. 그리고 머리에 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내게 기초 교양 수업인 역사를 가르쳤지. 얼마나 호되게 가르침을 받았으면 당시 배웠던 역사학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두 분 다 지루하신 얼굴이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보좌관이란 직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나와 필프론츠 후작의 차갑게 식어 버린 관심을 살핀 레이리는 우리를 이끌고 전시관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의 명예 졸업자 전시실처럼 초상화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역대 황성근위대 기사단장 및 총사령관분들의 성명이 기록된 곳입니다. 현 황성근위대 총사령관인 브레이트 탈리야 경과 1기사단의 단장인 쿼트로그 반 경, 2기사단의 단장인 록허드 에젤로트 경, 3기사단의 단장인 밀 베로파 경의 얼굴 역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난 레이리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초상화가 전시된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브레이트 탈리야 경이라면 외양과 더불어 이름까지 여태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북벌 전쟁이 발발하기 전, 록허드가 평기사였던 시절에 2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던 사람이니까. 내가 제대로 말을 못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넘어간 사람이기도 하지.
“탈리야 경을 아십니까?”
내가 브레이트의 초상화를 유심히 살피자, 옆으로 다가온 필프론츠 후작이 물었다.
“그냥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어요. 기사단장이 바뀐 후 어디로 가셨나 했는데, 무려 총사령관직에 오르셨네요.”
“브레이트 탈리야 경은 역대 황성근위대의 모든 단장 중에서도 손꼽히게 뛰어난 인물입니다. 본래 총사령관직은 1기사단의 기사단장이 오르는 게 관례인데, 그 관례를 부수고 실력으로 몸소 총사령관에 오르신 분이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귀가 쫑긋 솟았다. 록허드나 네자르는 나에게 기사단 내부의 깊숙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다. 고개롤 돌리자, 대수롭지 않은 표정의 후작이 말을 이었다.
“본래 엔테라 소공작과 록허드 단장 역시 1기사단에 영입되었어야 했습니다. 1기사단이 황성근위대 중에서도 일명 ‘출신 좋고 실력 좋은 엘리트 집단’이기 때문이죠. 한데 탈리야 경에게서 무슨 감명을 받았는지, 이 시대 최고의 혜성으로 불리던 두 신인 기사가 1기사단이 아닌 2기사단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선택은 제도의 엄청난 화젯거리 중 하나였죠. 살벌했던 황성근위대의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네요.”
정말 생생한지 제 양팔을 부여잡은 필프론츠 후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3기사단이 출신 좋은 떨거지 기사들을 모아 놓은 곳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1기사단과 2기사단 사이에도 차별이 있는 줄은 몰랐다. 록허드는 왜 2기사단을 택했던 걸까.
“1기사단과 2기사단은 뭐가 다른가요?”
“하나하나 따지면 끝도 없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크게 다를 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레이리 양?”
레이리의 얼굴은 본래의 딱딱한 표정에서 기분이 상한 듯 약간 틀어졌다.
“1기사단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그 말에 후작이 특유의 얄미운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보셨지요? 보통은 반응이 저렇습니다. 1기사단과 2기사단은 서로 라이벌이지만, 우선 출신이 서로 너무 상반된 감이 있습니다. 1기사단은 대체로 아카데미 성적 최상위권의 귀족 출신이고, 2기사단은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출신이 평범한 경우가 많죠. 분위기 자체도 황성근위대에서 추구하는 바와 달리 가벼운 편이고……. 말 많고 탈 많은 차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거, 완벽하게 록허드 이야기네요.”
“아니요.”
내 웃음기 어린 말에 곧장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레이리였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눈을 드물게 부드러운 눈매로 풀어냈다.
“단장님은 세간의 평과 달리 상당히 섬세하고 꼼꼼하신 편입니다. 고위 가문 출신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사람을 지위와 성별 그리고 능력으로 차별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랬기에 2기사단 전원 찬성으로 기사단장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레이리가 묘사하는 인물이 내가 아는 록허드가 맞는 걸까. 그녀의 얼굴은 개천의 용을 키운 어미처럼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만개했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이 원래 단원의 찬성으로 얻는 건가요?”
민주적이기는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요. 2기사단에만 존재하는 관습입니다. 역대 선황 폐하분들 역시 딱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셨고, 선발된 기사에게 단장 직함을 내려 주셨지요.”
다른 건 몰라도 레이리가 록허드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시선을 올려 3기사단의 역대 기사단장 초상화를 쭈욱 훑었다. 1기사단 단장의 특징이 기품에 진지함이 깃든 외양이라면, 2기사단의 단장은 덥수룩한 수염, 장난기 서린 얼굴, 야수처럼 거칠어 보이는 얼굴 등 각양각색의 외양이었다.
그리고 3기사단은……. 두 기사단과 비교해 눈에 띌 정도로 어수룩한 구석이 많아 보였다.
“레이리.”
“예.”
“3기사단은 왜 있는 건가요?”
긴 시간 떨쳐 낼 수 없었던 원초적인 궁금증 중 하나였다. 록허드에게 물으면 썩은 표정으로 혀를 차기 바빴고, 네자르 역시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전과 달리 레이리는 내 질문에 불편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미간을 구긴 채 말을 아끼다가 필프론츠 후작을 쳐다봤다. 그녀의 구조 요청에 후작은 여상한 태도로 반응했다.
“별 이유 없습니다. 하릴없는 귀족 출신 백수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죠.”
“하릴없는?”
“그러니까, 능력이 없고 모호한 지위만 있는 귀족 자제 놈들 말입니다. 그들은 대개 가문 후계자에게 떠밀리고, 다음으로 능력 있는 형제에게 떠밀려 어느 곳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자들이죠. 그중에서도 그나마 무언가 하길 바라는 귀족들이 겨우겨우 아카데미를 졸업해, 자존심을 버리고 3기사단에 입단하는 겁니다. 귀족 사회가 마냥 정체되어 있지 않길 바라는 황제 폐하의 바람이 담긴 조직이지요.”
한마디로 능력이 있되 배경이 없는 2기사단과 상반되는 기사단이란 의미였다. 필프론츠 후작의 설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레이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주변을 훑은 레이리는 입구 반대편에 위치한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마차를 타고 전 기사단의 훈련장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마침 오늘이 훈련을 재개한 첫날이라 멋진 훈련을 볼 수 있겠네요.”
레이리는 기다란 다리를 휘적휘적 저어 밖으로 나갔다. 햇볕에 반짝이는 짙은 금발과 하얀 피부가 눈에 띄게 도드라지는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당당한 전문직 여성이라. 그야말로 네자르에게 딱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
나는 개미가 기는 수준의 작은 목소리로 필프론츠 후작에게 물었다.
“레이리 양은 평민 출신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변방의 남작 가문에서 상경한 여인이라 들었습니다.”
미모와 능력에 더불어 뿌리 있는 가문 출신이라는 것까지! 나는 신이 나 커다란 목소리로 레이리에게 물었다.
“레이리 양,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돌연 걸음을 멈춘 레이리가 발갛게 익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 그런 걸 갑자기 왜 물으시죠?”
누가 봐도 애인이 있음직한 반응이었기에 잠깐이나마 활기찼던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없으면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드리려 했어요.”
“누구를요?”
“네자르 황태자 전하요.”
이제는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노골적으로 여자를 구하면 이전처럼 이것저것 따졌던 때보다 여자를 구하기가 훨씬 더 쉽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소릴 하시는군요.”
하나 레이리는 내 대답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웃음과 함께 등을 돌렸다.
“제 견학은 아무래도 여기까지일 것 같군요. 이제 곧 일하러 가야 할 시간이라서 말입니다.”
“일이요?”
필프론츠 후작이 손을 들어 마차가 두 대 준비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성의 마차와 기사단 엠블럼이 새겨진 견학 전용 마차, 그리고 놀랍게도 판시온 소공작이 서 있었다.
“그 일이 혹시 소공작과 관련된 일인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소공작도 관련된 일입니다. 곧 국정 회의에 참석해야 하거든요.”
“국정 회의는 오전 8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규정은 그렇죠. 그래서 다들 8시 이전에 도착했습니다만, 무슨 일인지 시간이 30분가량 늦춰졌습니다. 최근 들어 종종 있던 일입니다.”
“8시 30분이면 그래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나요?”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개회 전에 귀족들과 나누는 잡담이 가장 재밌어서 말이지요.”
그와 대화하는 사이에 우리는 마차 앞에 도착했다. 근 일주일 만에 만나는 판시온은 네자르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비해 상당히 퀭한 모습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단하면서 강인했던 특유의 분위기가 유하게 느껴졌다. 나와 눈을 마주친 판시온이 상냥하게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케이트 영애. 설마하니 황성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록허드 경을 찾아오셨습니까?”
“아니요. 음… 사실 아닌 게 아니지만, 오늘은 기사단을 견학하기로 했어요.”
“견학 말입니까? 제가 단장직에서 물러난 사이에 꽤 다양한 운영 방침이 생긴 것 같군요.”
곧이어 필프론츠 후작이 회의장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짧은 시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판시온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뭘 하실 예정이시죠?”
“마차를 타고 기사단을 둘러볼 예정이에요. 그렇죠, 레이리 양?”
“예.”
레이리가 대답과 함께 판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레이리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 대외용 미소를 띤 판시온이 입을 열었다.
“아, 이쪽 숙녀가 록허드 경의 보좌를 맡은 분이신가 보군요.”
“예, 저는 록허드 단장님의 보좌관인 레이리 멘체터라고 합니다. 레이리라고 불러 주세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엔테라 소공작님.”
“이제 막 록허드 경이 복귀했을 텐데 쉴 겨를도 없이 바쁘시겠습니다.”
레이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전 기사단장의 얼굴에 대고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판시온은 고개를 들어 바다처럼 맑은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무언가 마음먹은 듯, 예의 그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회의까지 시간이 꽤 남았으니 훈련장 가이드는 제가 해 드리고 싶군요. 어떠십니까, 케이트 영애? 한때 2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제가 멘체터 양보다 더 잘 알 거라 자신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였다. 아니, 어쩌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호의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동의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내 반응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판시온이 레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레이리 양?”
순간 표정에 가득했던 당혹을 순식간에 떨쳐 낸 레이리가 나를 쳐다봤다.
“그건 저보다 에젤로트 영애에게 물어보심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대답으로 마차에 올라탄 필프론츠 후작까지 더해 총 세 쌍의 눈이 나를 향하게 되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친절한 어조와 달리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 그늘진 보랏빛 눈동자가 매우 진중했다. 꽉 닫힌 입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판시온이 언제부터 나를 저런 얼굴로 쳐다봤더라?
나는 형체 없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에 판시온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후작은 안 갑니까?”
판시온의 물음에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필프론츠 후작이 대답했다.
“남정네들 땀 흘리는 모습이라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군요.”
“그럼 먼저 회의장으로 가 계시죠. 저는 뒤따라가겠습니다.”
후작의 얼굴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그는 팔을 뻗어 몸소 마차의 문을 닫기 직전, 판시온을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뭐든 정도를 넘지 않을 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현명한 당신이라면 이미 생각한 바가 있겠지만요.”
필프론츠 후작을 태운 마차는 훈련장을 돌아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레이리 역시 짧은 인사를 남기고 기사단 본부로 들어갔으며, 그 덕에 나는 판시온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단둘이라. 예전이라면 의식조차 하지 않았을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그럼 마차에 올라탈까요. 길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설명해 드릴 수 있겠군요.”
나긋한 목소리에 걸맞게 판시온은 친절한 동작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손가락 아래로 맞닿은 그의 손바닥이 뜨거운 느낌이었다.
마차의 경로는 이미 정해져 있는지, 마부는 가장 먼저 본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1기사단으로 향했다.
“소공작.”
“네.”
“당신이 1기사단의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2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나의 말에 판시온이 얼굴을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무언가 회상하는 것처럼 잘생긴 눈썹이 반쯤 굽어진다.
“세간에선 말이 많았지만, 사실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1기사단의 기사단장인 반 경과 제 성향이 맞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브레이트 경이 절 스카우트하는 데 꽤 공을 들이셔서요. 그 노력에 넘어간 거죠.”
“고위 귀족 출신은 대개 1기사단에 입단한다던데요. 후회한 적은 없나요?”
“전 후회할 선택은 애초에 하지 않습니다. 시간 활용에 비효율적이니까요.”
“정말 한 번도 한 적 없으세요?”
판시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다른 일에 관해서라면, 한 번도 없었다고 대답할 수는 없겠군요.”
그는 손가락을 들어 창의 유리창을 툭툭 건드렸다.
“이 훈련장이 1기사단 전용 훈련장입니다. 세 기사단 중 훈련 강도가 가장 높고, 성과도 확실한 편이지요. 대체로 소속된 기사단에 대한 자존심도 높은 편이라 명예를 더럽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재미없게 논다는 의밉니다.”
판시온도 재미를 따지는 사람이었구나.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아는 판시온은 보수적이고 진지하다 못해 늘 정도만을 걷는 인물이었는데.
“왜 웃으십니까?”
내가 웃었나? 낯간지러운 기분으로 팔을 들어 뺨 근처를 만졌다. 어째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비, 비웃는 건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소공작이라면 적어도…….”
적어도 다음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조금 더 신사적인 뒤 담화를 할 줄 알았다? 절대 남을 험담하지 않을 줄 알았다? 뭐, 애초에 재미없다는 소리가 험담이라 표현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음, 적어도 조금 더 그럴싸한 욕을 하실 줄 알았어요.”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판시온이 웃었다.
“다음번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멋대로 그를 재단하고 있었단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와 마주하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판시온의 ‘재미없다’는 발언보다 더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으로 눈이 크게 떠졌다. 훈련장 뒤편에서 흑발을 늘어뜨린 미인. 그 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는, 분명 네자르였다.
“이곳은 3기사단의 훈련장입니다. 적어도 예전보다 정렬하는 움직임이 빠르긴 하군요.”
판시온의 시선 역시 훈련장을 향해 있었지만, 네자르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한 듯했다. 그는 오히려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뼛속부터 기사 출신이라 그런 걸까. 아, 기분이 갑자기 우울해졌어.
“서로 다른 훈련장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기본적으로 기사단의 수준도 다르고, 여러 방면으로 골이 깊어 부딪치는 일도 잦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서로에게 편한 일이죠.”
“다 큰 어른들도 어린애들과 다를 바 없네요. 사교계도 비슷하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전 황성근위대만 명성에 맞지 않게 저열하고 멍청한 줄 알았습니다.”
마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달렸다. 내 정신이 온통 네자르에게 향해 있어서 그런 걸까? 창밖의 시야로 네자르의 모습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인이 누군가 했더니 캐롤라인 악토르였다. 멀리서 얼굴의 실루엣만 겨우 보이는 수준이었지만, 넘쳐흐르는 기품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저게 바로 내가 원하던 그림이다. 분명 그런 그림인데 말이지…….
어째서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일까. 느려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천천히 다가오겠다며! 설마 그게 다 입바른 말이었던 거야?
“판시온 소공작,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내 표정을 살피는 것처럼 세심한 시선 위로 눈꺼풀을 감았다 뜬 판시온이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은 의뭉스러웠지만, 그가 절대 거절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내일 저랑 연극 보러 가실래요? 티켓이 두 장 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소공작 외에는 아무도 없네요.”
판시온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어 등에 힘을 빼고 팔짱을 꼈다. 그가 과연 어떤 기분일지는 상상하기 어려우면서도, 어느 정도 파악 가능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건 단순한 호의입니까? 아니면…….”
“단순한 호의면 같이 안 가시나요?”
그의 표정이 살짝 무너졌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기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죠? 저랑 같이 가실 거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던데, 하물며 판시온이 내 웃음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네? 가실 거죠, 그쵸? 내일 저녁 7시 연극이에요. 그 유명한 『푸카투 절벽의 비극』 로열 플래티넘 자리이구요. 소공작만 괜찮으시다면 근처의 유명한 레스토랑 저녁 식사도 예약해 둘게요.”
한껏 흥이 오른 목소리로 그와 눈을 마주하며 줄줄 읊었다.
“혹시 달팽이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하지 않지만, 원하신다면 꼭 달팽이가 나오는 코스 요리로 예약할게요. 저는 해물을 좋아해서 랍스터나 조개가 들어간 요리를 좋아해요. 으음, 극장 근처가 워낙 제도에서도 유명한 번화가라 레스토랑이 넘쳐날 거예요.”
“달팽이 안 좋아합니다. 해물 역시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랍스터는 괜찮군요.”
알겠다는 소리는 뱉지도 않았으면서 능글맞게 내 설레발을 받아친다. 나는 소리 없이 어깨만 흔들어 작게 웃었다. 연극 표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아도 돼 기뻤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이용해 얻어 낸 답이었으니까.
“제가 직접 에젤로트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제가 예상하신 만큼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 주세요. 너무 곱게 꾸미면 사람들이 계속 쳐다봐서 부담스럽더라고요.”
판시온이 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그와 내가 떠드는 사이에 3기사단 훈련장까지 지나친 모양이었다. 록허드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건 조금 아쉽네.
이어서 마차의 문이 열리고 먼저 내린 판시온이 내게 손을 건넸다.
“그건 혹여라도 영애에게 반하지 말라는 의미입니까?”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몸을 빼지 않았다. 판시온의 얼굴과 내 얼굴의 거리는 겨우 한 뼘이었다. 그 때문에 옅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분명하게 시야를 차지했다.
“제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반한다는 감정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땅 위에 구두가 닿았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등을 바로 펴고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러니 제가 반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그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순간 판시온의 거친 손가락이 내 손을 강하게 쥐었고, 얼마 안 가 순식간에 힘을 잃은 채 떨어졌다.
“저는 제가 사람의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걸음이 마차에서 멀리 떨어질 동안 판시온은 문이 열린 마차 앞에 그대로 머물렀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의 속은 잘 모르겠습니다, 케이트.”
판시온이 나를 볼 때 어떤 기분일지, 확실히는 몰라도 미약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도 지금의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모르시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요.”
부디 아니라면 좋을 텐데.
“내일 봬요.”
기사단 본부의 마차가 떠나고, 떠난 자리에 황성 마차가 내려왔다.
나는 판시온을 뒤로하고 기사단 본부 앞에서 날 기다리는 레이리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나를 보는 표정은 처음과 달리 조금 묘했다.
왜 판시온이 굳이 시간을 들여서 나의 견학을 도왔는지 의아하겠지. 그래, 호의를 숨기지 못할수록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시온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 마음을 이용한 게 바로 나이고.
“멘체터 양.”
“네.”
“바쁠 텐데 괜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런 말씀 드리면 건방지다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에젤로트 영애는 굉장히 점잖으신 편에 속합니다. 저도 아직 익숙지 않은지라, 긴장됐던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어서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점잖은 편이라니, 역시 나는 내 스스로가 판단해 온 것보다 더 예의 있고 무례하지 않은 인물 같았다.
“이후에는 뭘 하죠?”
“으음. 본부의 식당에서 식사할 수 있습니다만, 영애에게 그리 추천해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사단의 식사라니, 견학 코스 중 가장 끌리지 않는 코스였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그리 맛보고 싶지는 않네요.”
내 말에 레이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예의상으로도 말을 덧붙이지 않는 걸 보아 확실히 무리하게 도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민폐는 여기까지만 끼치고 이만 가 볼게요. 록허드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려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야말로 영애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낯이 그야말로 영업용 웃음 그 자체였다.
록허드는 훈련 중임이 분명했기에 따로 인사를 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오전 훈련은 짧게 끝난다기에 10분 가까이 기다리기는 했지만, 끝날 겨를이 보이지 않아 금방 포기해야 했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는데 에젤로트로 돌아가면 뭘 하지? 걱정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