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케이트, 너 밤새 뭘 하다 잠든 거냐? 네 침대에서 풀과 흙이 한 바가지로 나와 하녀들이 이른 오전부터 고생했다더구나.”
새벽에 무리를 조금 했더니 직접 말을 타고 에젤로트로 돌아갈 기력이 나지 않았다. 열 살 무렵엔 무슨 짓을 해도 지치기는커녕 늘 방방 뛰어다니기에 바빴는데 말이지.
결국 마차를 빌렸지만, 황가의 사람과 소유품을 빌리는 건 마치 빚을 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기에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네자르가 마차 안에 보란 듯이 앉아 있는 걸까.
나는 여태 잠이 깨지 않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잠이 오질 않아서 산책 좀 하다 왔어.”
내 대답에 네자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록허드나 너나 밤이 되면 잠잠하던 피가 들끓기라도 하나 보군. 어린 시절이야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은 되도록 몸가짐을 조심하는 편이 좋아. 내가 돌아온 시점이니만큼 네게도 이목이 많이 쏠려 있을 테니.”
어째 하는 말이 며칠 전 어머니께 들었던 잔소리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다. 식은 표정으로 대강 고개만 끄덕이자 네자르가 날카롭게 눈매를 세웠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잘못하다간 일장 연설을 펼칠 분위기였기에 작게 헛기침을 하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매우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괜한 걱정이야, 네자르.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나의 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늘 평온하기만 하니까.”
분명 한 줌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요 근래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마냥 평온했다고 할 수 없었다. 판시온과 앤드류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단 건, 내가 찔리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므로.
네자르는 워낙 귀신같은 남자였기에 정면에서 내 표정을 훤히 내보이려니 장기가 다 떨렸다.
“네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나와 다른 사람에겐 해당 안 될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이 그래? 설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네자르는 의심의 의 자도 보이지 않았는데 나 홀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잘못한 게 없어. 그런데 왜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꾸 숨기게 되는 거지? 5년 전까지만 해도 네자르와 나 사이에, 아니, 적어도 나는 그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 걸까.
내 뾰족한 목소리에도 고개 한번 들지 않은 채 책장을 넘긴 네자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리 인도적이지 못한 행위를 하도록 만들지 말란 소리다.”
앤드류의 언급에 의하면 내 생각만큼 인도적인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황자 자체가 그리 믿음직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네자르는 유독 예민해 보였다. 여기서 더 말꼬리를 잡다간 진짜 신경을 건드릴 것 같았다. 나는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늘 져 주는 네자르인데, 나 역시 하루쯤이야.
***
“저는 퀴몰로 남작님을 뵐 때마다 참 눈에 띄더라고요. 그 탄탄한 가슴에 한 번만 안겨 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어머, 클로디르 부인께서 아주 큰일 날 소릴 하시네. 퀴몰로 남작은 어린애들만 좋아하잖아요. 후원을 명목으로 꼭 열 살쯤 되는 소년들만 데려와선, 변성기가 오고 키가 훌쩍 자라면 없는 죄라도 만들어 내 밖으로 쫓아내지요. 아주 악독한 남자라고요!”
“세상에나……. 그게 정말인가요? 믿을 수가 없어요.”
꽃잎처럼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던 얼굴이 충격으로 굳는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지금 세피아 데보라 부인의 살롱에 와 있다. 서른 살 이하의 여식과 귀부인이 초대받는 모임답게, 데보라 부인의 살롱은 사람으로 드글드글한 파티보다 훨씬 동적이었다. 특히 이번 주제는 사교계 뒤 담화에 닳고 닳은 여인들에게도 퍽 흥미로운 주제였는지, 각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떠들던 시선이 한데로 모여들었다.
“퀴몰로 남작이 제 영지 밖으로 나오지 않아 그렇지, 땅 자체가 상당히 크고 비옥해서 거느리는 소작농만 400명 가까이예요. 대우가 퍽 좋은 편이라 시골치고는 도망치는 사람 하나 없이 잘 굴러가지요. 한데 문제는 그놈의 영주가 꼭 아들들만 데려간다는 거예요. 농사일을 도와야 하니 결혼을 하면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하는데, 눈에 띄게 못난 얼굴이 아니고서야 한 번씩은 꼭 들러서 확인하고 간다네요. 재수가 없으면 끌려가도 미움을 사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운이 좋으면 이삼 년 후에 풀려나는 거죠.”
귀족 중 태반이 떳떳하지 못한 성적 취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알아도 면전에서는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귀족들 사이의 매너였으며 이렇게 폐쇄적인 사교 모임에서만 보란 듯이 비웃는 게 가능했다.
……라고 카론에게 전해 들은 때가 3시간 전의 마차 안에서였는데, 설마 벌써 경험하게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에요. 금욕적인 얼굴에 이중적인 면모라니, 토가 나올 정도로 징그럽네요!”
그때 건너편에 자리를 잡은 귀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으음? 징그러울 정도까지야. 클로디르 부인 역시 비슷한 취향 아니신가요? 다른 점이라면 남작과 달리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에게 환장한다는 것 정도?”
누군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넓지도 않은 응접실에서 도란도란 모임을 즐기는 와중이니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충격에 빠져 있던 클로디르 백작 부인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말레 부인이 내 성까지 찾아와 어린 시종들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네. 저 혼자 고고하게 아닌 척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침을 질질 흘린 건 내가 아니라 댁네 백작님이겠죠. 가슴 좀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갔다고, 설마 온종일 유부녀의 가슴팍을 훔쳐볼 줄이야. 클로디르는 하녀랑 어린 시종들 전부 다 몸조심해야겠어요? 아, 이미 조심할 필요가 없으려나?”
클로디르 백작 부인과 말레 남작 부인 사이로 튀기는 불꽃이 매우 형형했다. 분위기가 점차 침체되기 시작하자 주위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놀라운 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같은 패턴이 반복된 지 벌써 두 시간이 흘렀다.
살롱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대중없는 거였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밀푀유를 베어 물자, 옆에 앉은 카론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로디르 부인과 말레 부인은 제국 북서쪽에서 영향력이 굉장해요. 이끄는 무리도 둘 모두 다섯 이상으로 꽤 큰 편인데, 그래서인지 만날 때마다 기 싸움을 하기 바쁘죠.”
나이 먹고 기 싸움이나 하다니, 이게 귀족 여성이 살아가는 생존 방식인 걸까. 그러면 나도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귀한 신분이 될 여식이 황성 소문에 어두워서야 쓰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네.’
하필 이럴 때 앤드류의 얄미운 소리가 떠오를 건 뭐람. 신분이 상승하는 건 확정된 일이 아니었지만, 그동안 주위에 너무 무관심했던 일은 사실이었던지라 궁금했던 사항에 대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고위 귀족만 가입할 수 있는 살롱이라며? 중간중간 아닌 사람도 보이는 것 같아. 반대로 있어야 할 몇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확실한 공통점은 모인 여자들이 하나같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모를 갖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고위 여귀족 간의 교류를 도모하는 사교 모임이지만, 실제로는 외모에 더 치중되어 있는 감이 커요. 신분이 높음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여자들의 특징을 잘 떠올려 보세요.”
잘 떠올릴 필요도 없는 게, 당장 눈앞에 아른거리는 인물이 몇 존재했던 탓이다.
“외모로 차별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수준 낮은 거 아니야?”
혹시라도 목소리가 컸을까 싶은 마음에 주변을 살피며 더 몸을 숙였다.
나야 미끼 던질 물고기가 많아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괜한 불쾌감에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길게 빼 장식된 장미의 향을 맡던 카론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게 요즘 제도 사교계에서 도는 유행이에요. 살롱의 유명도를 높이고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라면 천박한 짓도 서슴지 않죠. 데보라 부인의 살롱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모임이라고 보면 돼요. 이 모임은 제도 사교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극소수의 살롱 중 하나예요. 사교계에서 데보라 부인의 살롱에 들지 않은 여인은 미녀가 아니다, 라는 공식까지 생겨났을 정도니까요.”
“그럼 너와 나는 살롱에 초대받았으니 제국의 미녀로 인정받은 거네.”
꽃잎을 떼어 내 나와 자신의 홍차 위로 띄운 카론이 밝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셈이네요.”
그런 셈이라고? 감히 카론의 미모를 평가하려 들다니, 건방진 귀부인일세!
“곧 데보라 부인이 당신의 옆으로 건너올 거예요. 부인은 이 모임에 꽤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서, 처음 초대받은 여인이 과연 살롱에 둘 만한 인물인가 평가하기를 좋아하거든요.”
카론의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이 다분히 과시적인 살롱의 주인을 힐끔 훔쳐봤다. 부인의 옆자리에는 말 잘 듣는 개처럼 맞장구쳐 주기에 바쁜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죽어도 저 짓거리는 못 해. 아니, 안 해!
“설마 나도 부인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하는 거야?”
“어머, 그럴 리가요. 케이트는 겁먹거나 어려워할 필요 전혀 없어요. 당신은 네자르 전하의 약혼녀잖아요? 곧 제도 사교계의 실세가 될 여인이, 초대받은 살롱 주인의 비위를 맞춘다?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이건 자존심 싸움이라고요.”
누가 들으면 이미 황후가 되고도 남은 줄 알겠다. 그래도 굽실거릴 필요 없는 명분이 존재한다니 다행이었다.
애초에 이 살롱까지 행차한 이유가 네자르의 내연녀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다가가는 여식마다 나를 어려워하는 탓에 아까운 시간만 계속 흐르는 상태였다. 대체 문제가 뭘까. 열이면 열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시선을 피하니 이제는 반쯤 포기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릴리 아마스라는 이런 곳에 안 와?”
그나마 나와 사람다운 대화를 나눈 건 카론과 그 여자밖에 없었다. 내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카론이 물었다.
“그분을 아세요?”
“아카데미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 아마스라는 제도와 가까운 곳이니 당연히 살롱에 참석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아마스라 영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단어를 고르듯 차분히 숨을 정리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필요에 의한 행사가 아니라면 공식 행사나 소모임에 절대 참여하지 않아요. 귀부인들 사이에서 평이 좋은 편은 아닌데……. 실제 그녀에게는 이런 소모적인 자리가 필요 없거든요. 어찌 되었든 제국의 실세는 여성보다 남성의 전유물에 가깝고, 아마스라 영애는 콧대 높은 학자들과 귀족들 사이에서도 퍽 눈에 띄는 편이라서요. 부인들과의 교류가 없어도 이미 배경이 든든하다는 거죠.”
말을 마친 카론이 힐끔 내 건너편을 살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뭣도 모르던 시절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겠지만, 이제는 단번에 감이 왔다. 데보라 부인이 나에게로 오는 것이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하세요.”
마지막 조언을 던져 준 카론이 다른 그룹 사이로 홀연히 사라졌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하라고?
“에젤로트 영애? 옆에 앉아도 될까요?”
가족들 앞에선 절대 보인 적 없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물론이에요, 부인.”
가까이서 마주한 데보라 부인은 이제 겨우 서른임에도 불구하고 기품과 고아함이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오늘 내 살롱에 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카론 영애야 종종 차를 즐기러 온다지만, 에젤로트 영애는 워낙 만나기 힘들기로 유명하잖아요? 영애의 참석은 우리 살롱의 번성을 뜻하는 아주 기념비적인 일이 될 거예요.”
이건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띄워 주는 거 아니야? 내가 입을 가리고 어색하게 웃자, 자리에서 일어난 데보라 부인이 종을 울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러분! 이번 달에는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께서 살롱에 참여하여 주셨습니다. 귀하신 분이 우리 살롱과 함께해 주시니 문득 5년 전 이맘때쯤, 겨우 다섯으로 출발했던 과거가 떠오르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 만찬에서 나누겠지만, 우리 모두 새로운 참석자께 박수를 쳐 드리도록 해요!”
하루 간을 보러 왔을 뿐인데 졸지에 종신회원이 된 기분이다. 인맥을 만드는 건 낯짝이 뻔뻔해야 하는 일이구나. 나는 웃음을 띤 낯으로 일어나 열렬히 갈채를 보내는 여인들을 향해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초대장에 쓰인 문맥에서부터 느꼈지만, 데보라 부인은 아무래도 날 곁에 두어 제도 사교계의 실세로 오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참 신기한 것 같아. 누구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천장을 깨려 하는데, 반대로 나는 둘러싼 세계가 평온하고 온전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따라 앉았다.
“앞으로는 편하게 세피아라 부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세피아 부인. 부인 역시 앞으로는 절 편하게 카트리나라 불러 주세요.”
세피아 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의 초대를 무려 세 번이나 거절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충분히 흥미를 갖지 않으실 수 있고, 저 역시 매우 아쉬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달 초대장을 보냈지요. 이번 달에는 참여하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그야 네자르가 꼬여 넘어갈 만한 박식하고 아름다운 미녀를 찾아내기 위해서지. 나는 긴장 말고 평소처럼 말하라는 카론의 조언을 되새기며 대답했다.
“부인의 살롱이 워낙 유명하잖아요? 미인만 초대한다기에 얼마나 대단한 여자들이 모여 있을까 궁금했어요.”
내 말에 세피아 부인이 작게 웃었다.
“후후, 그래서 감상은 어떠신가요?”
응접실의 내부를 아주 느릿하게 훑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죄다 제도에서 내로라하는 미인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카론 발톱의 때 정도 될까? 너무 완벽한 경국지색의 미인과 어울려 다녔던 탓일까. 사실 기대에 미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물론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아주 좋아요. 이런 특별한 자리가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여인들끼리 모이니 더 편안하네요.”
“그런 것치고는 앉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시던데요.”
나는 세피아 부인의 대답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귀부인들과 수다 떠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날 주목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으음, 그건…….”
어디로 미끼를 던질까 고민하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여자들이 다가오질 않으니까 그렇지.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피아 부인같이 사교 활동에 능숙한 여인이라면, 나의 문제점을 지적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첫 만남에 내 치부를 술술 부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세피아 부인을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기회가 기회인 만큼 일단 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분들이 저와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으신 것 같아요. 제가 말을 걸면 꼭 네 마디 이상 진행되질 않아요. 한 세 번쯤 그리되니까 얼마나 상심이 크던지, 종일 카론 영애 옆에만 있게 되더라고요. 그렇죠, 영애?”
카론은 이미 세피아 부인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시무룩한 목소리에 잠시 눈치를 보던 카론은, 이내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안쓰러운 감정을 담아 얼굴을 구겼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이렇게 사랑스럽고 친절한 케이트 영애를……. 하아.”
이마를 부여잡으며 새어 나오는 한숨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날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역시 카론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역시 나의 사교성은 바닥을 찍는 것으로 모자라 지하까지 뚫고 내려가는 수준인 걸까. 분명 릴리 아마스라와 앤드류 황자와는 잘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요 며칠간 생겼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오, 이런! 여러분은 분명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걸 거예요. 다들 얼마나 천사 같고 상냥한 분들이신데요? 아마 타이밍이 좋지 않았겠지요.”
“그럼 부인께서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시겠어요? 아무리 고민해도 도통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어서요. 부인께서 제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 참 좋을 거예요.”
내 말에 다소 당황스러운 티를 내던 세피아 부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말씀만 하세요.”
데보라까지 왔는데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가기에는 나의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살롱이 실망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세피아 부인 자체는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베테랑이었으니까.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피아노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는 그룹에게로 다가갔다. 카론이 날 위해 준비했던 다과회에서 내 뒤 담화를 나누던 바로 그 여인들이었다.
“아,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앤드류 전하께서 이번에…….”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하세요?”
내가 끼어들자 셋이었던 인원이 자연스레 넷으로 늘어났다. 신이 나 말을 내뱉던 여자의 입이 천천히 다물린다. 정확히 내 존재를 인지하던 그 시점부터였다.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난처함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애, 앤드류 전하께서 이번에 사냥을…….”
횡설수설하던 여인은 곧 함께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에게 이끌려 응접실 밖으로 사라졌다. 왕따당하는 이 기분, 정말 익숙해지기 힘드네. 대체 뭐가 문제지? 내가 말도 걸기 힘들 만큼 너무 아름답나? 아니면 입 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기라도 한 거야?
그다음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크림 케이크를 조각내며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던 여인들은 대놓고 카론과 세피아 부인을 훔쳐보며 울상을 짓다가 마찬가지로 저 멀리 사라졌다. 나만 의자에 덩그러니 남겨 두고는.
슬슬 짜증이 났다. 네자르의 내연녀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울까? 자괴감이란 호수에 풍덩 빠진 채 세피아 부인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부인은 아주 미묘한 얼굴로 팔짱을 낀 상태였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 분명 보셨죠? 괜찮으시다면 조언을 듣고 싶어요. 저도 좋아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라……. 제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분명히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쯤 되면 제아무리 제멋대로인 나라도 고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중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답한 세피아 부인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만 서로 이해하고 어울리는 것이지요. 제 생각일 뿐이지만, 영애가 소외받는 기분을 느끼는 건 절대 착각이 아닐 거예요.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는 것 같네요.”
“다른 쪽에요?”
세피아 부인은 무엇이 그리도 심각한지, 매우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서 답을 내 달라며 채근하고 싶었지만, 미쳐 날뛰려는 본능을 억제하고 긴장으로 굳어 있던 등 근육을 이완시켰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의견이라서요. 영애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쉬이 입을 못 열겠군요. 부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길.”
“전혀 그렇지 않…….”
“아! 이제 슬슬 만찬이 준비될 시간이네요. 점심을 거르고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식사 시간을 조금 앞당겼어요. 저는 잠시 나가서 확인하고 와야겠으니 잠시 후에 뵈어요.”
도망치듯 내 말을 끊어 낸 세피아 부인이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다. 나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살롱에서 뛰쳐나왔다. 굳이 따라 나오겠다며 부랴부랴 일어선 카론을 진정시키고 무작정 성을 벗어나 번화가 끝자락의 골목길을 걸었다. 날 생각하느라 자신은 늘 뒷전이었던 카론에게 더는 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답은 하나였다.
“나…, 정말 입 냄새가 나는 걸까?”
“누구 입 냄새요?”
그때, 생각지 못한 인물이 등 뒤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악!”
나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머리통에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승마복을 걸친 채 긴 적발을 곱게 튼 여자는 다름 아닌 아카데미에서 릭의 안부만 쉴 틈 없이 묻던 여인, 릴리 아마스라였다.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늘의 저는 정말로 행운이 넘치는 것 같아요, 그쵸? 영애께서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살롱이 벌써 끝났을 리는 없는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그리고 입 냄새는 무슨 말씀이신가요?”
공교롭게도 지금의 나는 그녀의 산만함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신이 났네. 나는 멈추었던 걸음을 이으며 축 처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네요.”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괜찮으시다면 저한테 전부 쏟아부으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저 혼자만의 비밀로 해 둘게요. 이래 보여도 제 주변에는 또래의 여식이 한 명도 없거든요.”
참 자랑이다. 어릴 때 나를 보던 네자르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나는 힐끔 고개를 내려 릴리가 품에 안은 짐을 쳐다봤다.
“그 물건은 뭐예요?”
“아, 영애에게 드리려고 낮에 샀던 책이에요.”
“책? 여기서요?”
아마스라와 데보라는 말을 타도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한정판이 데보라에만 풀리기라도 한 건가.
“저, 사실은 데보라 부인의 살롱에 가던 길이었어요.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지는 못했지만요. 제가 그런 자리를 워낙 어려워해서……. 여기요, 받으세요. 물리학계의 거장인 코푸트라나 박사가 대학 수준의 물리학을 아주 쉽게 풀어낸 책이에요. 분명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건네받은 책은 생각했던 만큼 퍽 무거운 무게였다. 죽기 전까지 읽어 보긴 할까?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힘겹게 지워 내며 마주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읽지 않을 것 같지만 제 개인 책장에는 꼭 꽂아 놓을게요.”
행복한 얼굴로 방긋 웃은 릴리가 품 안쪽에 있던 고급스러운 포장의 상자를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상자는 뭔가요?”
“이거요? 이건 릭 교수님에게 드릴 선물이에요. 데보라에는 유명한 수공예 만년필 장인이 있거든요. 그분께 드릴 만년필을 하나 사느라고…….”
그리 말한 릴리의 낯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릭 에젤로트가 저렇게나 좋을까? 많고 많은 남자 중에 하필 그 뺀질이에게 빠지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영애는 릭 오라버니의 어디가 좋나요?”
“후후. 그 질문, 저번에도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던 것 같긴 한데, 관심이 없었던 터라 기억에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분은 제가 한창 졸업 논문에 허덕이고 있을 때 제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 유일한 분이에요. 전 아마 릭 교수님이 없었다면 졸업도 못 했을 거예요.”
“학계에서는 평이 좋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고, 사실 그리 좋은 편도 못 돼요. 이제 시작인 거죠.”
릴리의 얼굴에 퍼진 씁쓸한 감정이 내 가슴 안쪽까지 전달됐다.
“가장 힘들 때 도움을 받아서 그런가, 교수님의 얼굴이랑 목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결심했죠! 제가 교수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학생이 되는 그날, 직접 찾아가 고백을 하고 말 거라고!”
나는 릴리의 말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오라버니의 의사는요? 마음에 없는 상대방이 졸졸 쫓아다니는 건 당사자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이에요. 너무 본인만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내가 네자르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꼬리처럼 따라오는 자문이었다.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건 민폐다. 그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는 게 문제지만.
“역시 릭 교수님의 혈연다우셔요. 말씀 하나하나가 참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네요!”
딱히 논리적인 것 같진 않은데. 잠시 생각하듯 흐릿한 얼굴로 주변을 훑은 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교수님의 입으로 직접 ‘널 좋아하지 않는다’란 소릴 듣지 못했는걸요. 아마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요?”
아하하.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민망한 웃음이 거리를 수놓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거절의 말을 들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눈에 들려 노력해 볼 거예요. 끊임없이 티를 내고, 안달하고, 혼자 앓고. 이런 말을 영애 앞에서 하려니 너무 부끄러운데……. 저는 교수님이 정말 너무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거든요.”
노력이라고?
생소한 단어에 얼굴이 구겨졌다. 노력이라니, 구애하기 위해 노력을 해도 되는 거였어?
***
“후작.”
마차 뒤에 서서 의자 뒤쪽에 쌓아 둔 선물 상자의 수를 헤아리던 필프론츠가 판시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 뒷자리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상자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정작 그를 부른 판시온이 입술 한번 열지 않고 조용히 응시하고만 있자, 미간을 구기고 다시 상자의 수를 턱짓으로 세었다.
“열둘, 열셋… 아, 젠장. 당신 때문에 어디까지 셌는지 까먹었잖습니까? 하나, 둘, 셋…….”
처량한 손가락질을 구경하던 판시온이 다시 그를 불렀다.
“후작.”
“열넷……. 예, 예. 부르지만 말고 말씀을 하세요.”
“백날 산더미로 사 줘 봤자 카론은 쳐다도 안 볼 겁니다. 차라리 그 애의 전속 시녀가 사용할 미용 물품이나 다과 세트를 주는 게 더 유용할 텐데요.”
판시온의 말에 어이없다는 얼굴이 된 필프론츠가 선물 상자의 개수를 세는 걸 포기하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는 시종이 마차의 뒷문을 밀어 닫는 즉시 앞좌석에 올랐다. 구비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런 게 다 애정을 어필하는 겁니다. 반색을 하지 않는다 하여 시녀의 물품만 사다 준다? 그 시녀에게 넘어갈 선물도 저 스무 개가량 쌓아 놓은 상자 속에 한두 개쯤 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소공작에게 제가 도움 될 만한 조언을 하나 해 드리죠. 여자가 원하는 건 하나, 눈에 보이는 것.”
필프론츠는 자신을 따라 옆자리에 앉은 판시온에게 손가락으로 작은 원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특히 이게 많이 쓰일수록 최고입니다. 두 번째는 성의.”
필프론츠는 제 검지로 판시온의 가슴을 툭툭, 쳤다. 물론 성벽만큼 단단한 그의 몸이 뒤로 밀릴 일은 없었다.
“이 두 개가 완벽하게 전달될 때 비로소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겁니다. 보아하니 소공작은 여자를 꼬실 때 고생을 좀 하겠어요. 아니면 반대로 여자가 고생하거나.”
판시온은 한때 제도에서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리던 후작이 어쩌다 제 여동생에게 정신을 못 차리게 된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리 능글맞게 굴지만 않아도 카론 성격에 쳐다는 봐 줄 텐데. 보이는 족족 까이면서 뭐가 그리 잘났다고 훈계를 하는 건지. 판시온은 두 번째 사춘기가 찾아온 것처럼 행동하는 필프론츠가 우습기만 했다.
마차는 번화가를 크게 돌아 데보라 백작의 성으로 향했다. 멈춘 즉시 마차에서 하차한 필프론츠는 다시 뒷문을 열어 선물의 상태가 온전한지 확인했다.
“흠, 이 목걸이는 다 좋은데 리본 색이 애매하단 말이야……. 초록색으로 바꾸어 올 것을 그랬나?”
한없이 진지해진 필츠론츠의 얼굴이 마냥 어색하기만 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막 기사단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필프론츠 후작은 저런 남자가 아니었다.
“카론이 사람 한 명을 통째로 바꾸어 놨군요. 마치 다른 사람 같습니다.”
“……저 말입니까?”
“후작 말고 누가 있습니까, 여기에.”
그의 말에 리본을 풀던 필프론츠가 판시온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린다. 평소에는 쉬이 볼 수 없는 아주 실없고 멍청한 얼굴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당신도 눈치가 더럽게 없네요. 뭐, 내가 불쌍하기라도 합디까? 여자 하나에 절절매는 게.”
초여름의 바람이 불었다. 저기 먼 성에서 챙이 긴 모자를 쓴 여인이 화려한 은발을 휘날리며 가까워졌다. 판시온이 눈치를 주자 멍청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쑥한 필프론츠 후작이 자리했다.
“절절매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카론의 걸음은 빠르면서도 느렸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다소 신경질적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요.”
필프론츠는 벌써부터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선물을 정리할 때의 퍽 진지했던 얼굴과 달리, 지금은 여유로운 척 입매와 눈매에 힘을 풀었다. 차라리 긴장하는 본모습을 보이는 게 훨씬 더 자극될 텐데. 좋지 않은 쪽으로 참 지극정성이었다.
“미리 싹을 잘라 두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썩 유용해 보이지는 않아서.”
“왜요, 조금만 긴장을 늦추다가는 절절맬 것 같은 여자라도 생겼습니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판시온의 명치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긴장을 놓다간 절절매게 될 것 같은 여자? 무심코 생각난 얼굴이 있기는 했지만, 명치에도 닿지 않던 어린 소녀 시절부터 봐 온 존재였다. 그녀와 여자라는 단어는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처럼 공존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반박할 생각도, 마음도, 하물며 구석도 찾지 못한 판시온은 대답 없이 입을 닫았다.
“어째 대답이 없으시군요. 의심스럽게.”
구렁이 같은 후작이 그 틈을 못 알아챌 리 없을 터였다. 그러나 본인을 처신하기에도 바쁜 남자라 껄끄러운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곧이어 카론이 마차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평소에 비해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안 그래도 싸늘했던 그녀의 표정은 필프론츠 후작을 보자마자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왜 이상한 걸 달고 오셨어요?”
시선은 판시온을 향해 있었지만, 대답은 필프론츠에게서 나왔다.
“이상한 거라니요? 역시 듣는 약혼자의 심장을 아주 벌렁벌렁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 있으십니다.”
무시한 채 마차의 문을 활짝 연 카론은 산처럼 쌓여 있는 알록달록한 상자에 다시 한 번 인상을 구겼다.
“내가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랬죠?”
말로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뭐다 했으면서 정작 카론이 싫은 티를 내자 입도 벙긋 못 한다. 둘의 신경전이 오래 유지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한 걸음 물러서 있던 판시온이 중재에 나섰다.
“이만 올라타거라, 카론. 후작은 몸소 짐과 함께 뒷좌석에 오르기로 약속했으니 너와 내가 앞좌석에 올라타면 된다.”
그러나 카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그 이유 또한 판시온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안 돼요. 케이트가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와 함께 가는 게 아니라면 돌아가지 않겠어요.”
“카트리나 영애가?”
배회라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참 어울린다 생각되는 표현이다. 입을 닫고 있던 필프론츠도 놀랐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분도 함께 오셨습니까? 놀랍네요, 사교 모임에는 죽어도 참석하지 않으시던 분인데.”
“나가신 지 세 시간 정도 흘렀어요. 우선 나가서 찾아봐야…….”
“내가 가지.”
카론의 말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접어 두었던 장갑을 꺼냈다. 검은 가죽 장갑 안으로 손을 비집어 넣는 모습을 본 카론이 되물었다.
“오라버니가요?”
“그래, 내가 찾을 테니, 카론 너는 우선 후작과 엔테라로 돌아가거라.”
“함께 찾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힐끔 필프론츠를 쳐다본 판시온이 대답했다.
“필프론츠 후작이 널 만나러 반나절을 달려와 야단법석을 피우셨다. 마음은 이해하나 내게 맡기고 돌아가도록 해. 너도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제가 언제 야단법석을 피웠다고 그럽니까.”
판시온은 뚱한 필프론츠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후작, 동생을 부탁합니다.”
찾아 헤매는 것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탈것이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엔테라, 혹은 에젤로트로 가야 한다는 점이지.
마차에 빈자리가 없는 관계로 판시온은 카론과 필프론츠를 지나 성문 밖으로 향했다. 그의 커다란 신장과 단단한 등, 다소 빠른 걸음걸이를 지켜보던 필프론츠가 긴가민가한 표정이 되어 천천히 턱을 쓸었다.
“……흐음,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맞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취향이 워낙 확고한 탓에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찝찝한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판시온 엔테라가 추문에 휩싸이는 건 알 바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카트리나 에젤로트라면 일이 조금 피곤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뭘 그렇게 중얼거려요? 어서 타요, 나 피곤하니까.”
채근하는 목소리가 필프론츠의 등을 밀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부드러운 웃음을 만들어 내며 마차의 문을 당겼다.
“예, 예. 물론이지요. 제가 아니면 우리 아가씨를 누가 모시겠습니까.”
그래, 당장 직면한 문제는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아니었다. 쌓여 있는 선물을 카론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것이지.
***
해가 산등성이 뒤로 훌쩍 넘어간 후에야 깨달은 건데, 나는 데보라 백작 성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한 시점에는 이미 길을 밝히던 수십의 가게가 전부 문을 닫은 뒤였다.
카론이 직접 내 성으로 찾아와 함께 이동한 터라 굳이 가문의 호위 기사를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홀로 낯선 동네에 남아 있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릴리는 릭이 사랑스러운 이유에 대해서 토가 쏠리는 일장 연설을 펼치고 사라졌지, 드문드문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도 몇 골목 이동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지.
설마, 나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게 되는 걸까? 그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이었다. 분명 카론이 날 찾으러 올 거야.
길이 엇갈릴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번화가에 위치한 분수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를 배회하는 동안 수십 번은 지나쳤던 장소였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조용하네.”
밤에도 길가가 시끌벅적한 건 이 넓은 제국 안에서도 오직 제도뿐이다. 나는 밤하늘보다 훨씬 더 어둑해진 땅 위에서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다. 용기를 내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기는 했다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인신매매를 당해도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땅거미가 진 광장에 어둠보다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안 그래도 바짝 굳어 있던 몸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파, 파렴치한이 오면 릴리가 준 이 책으로 급소를 후려치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뛰어오고 있는 걸까? 어느새 나는 서적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 긴장은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파스슥 식어 버렸다.
“판시온 소공작?”
뛰어오고 있었음에도 가만히 서 있던 것처럼 숨이 평온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작게 안도의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나는 급격히 몰려오는 안도감에 체면도 잊고 뛰어갔다. 겨우 열 발자국 남은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여,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카론은 아직 성에 있나요? 저 찾으러 온 거 맞으시죠? 그쵸?”
“몸은?”
판시온이 뛰어온 내 팔을 급히 잡아당겼다. 코앞까지 내려온 그의 얼굴에 숨을 멈출 무렵, 기다란 속눈썹이 두어 번 깜빡였다.
“몸은 어떻습니까? 저번처럼 어지럽지는 않습니까?”
그의 말에 입술을 꽉 닫고 쿵쿵 뛰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먹먹한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적어도 어지럼증 때문은 아니었다.
“네. 저, 아무렇지 않아요.”
목소리도 생각했던 것만큼 떨리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아, 제가 실례를 하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숨을 크게 내쉰 판시온이 내게서 손을 뗐다.
“카론이 말하길, 영애가 시내로 나오셨다 하더군요. 늦은 밤에 그 아이만 내보낼 수 없어 제가 찾으러 왔습니다.”
나는 정말 구제 불능의 바보다. 카론을 위한답시고 혼자 기어 나왔는데, 결국은 또 카론의 도움을 받게 되는 처지였다.
문득 나의 부모 형제와 네자르가 왜 그토록 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생의 17년은 송아지 스테이크와 함께 잘근잘근 썰어서 씹어 삼키기라도 했던 걸까? 그럴 확률이 너무나 농후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날 응시하던 판시온의 얼굴은, 그리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걱정을 담고 있었다.
“일단 데보라 성으로 돌아갑시다. 그곳에서 마차와 마부를 빌려야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데보라 성으로 돌아가자니, 나는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며 판시온의 옷자락을 쥐었다.
“조,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가면 안 될까요?”
잠시간 내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판시온은 낮고 선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군요. 그럼 우리 잠깐만 걸을까요? 달이 크게 떴으니 강을 따라 천천히 성 쪽으로 향하면 그리 어둡지도 않을 겁니다.”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었으나, 지금은 세피아 부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살롱에서의 울적함이 사그라들지 않고 날 계속해서 괴롭힐 것 같았던 탓이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 영애가 소외받는 기분을 느끼는 건 절대 착각이 아닐 거예요. 문제는 당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쪽에 있는 것 같네요.’
생각해 보니 판시온도 세피아 부인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문제가 있더라도 최소한 내게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 대체 세피아 부인이 말한 문제가 뭘까?
하지만 이런 소리를 백날 들어 봤자 당사자인 내가 모르니 상황이 달라질 수 없었다.
“오늘 밤은 이상하게 춥네요. 이제 여름이 다 왔는데.”
판시온의 말대로 물에 비친 달빛 덕분인지, 강을 따라서 포장된 길이 매우 환했다. 무심코 손을 들어 팔을 쓸자 걸음을 멈춘 판시온이 외투를 벗으려 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네자르가 늘 그래 왔기 때문이다. 나는 반쯤 벗겨진 외투를 붙잡고 다시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괜찮아요. 계속 걸으니까 싸늘했던 공기도 조금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성에 도착할 때쯤엔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릴지도 몰라요.”
“춥다고 말하자마자 시원해질 수도 있습니까?”
“음, 저도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밤공기에 닿는 맨살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판시온에게 이 이상의 배려를 받을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 약혼자가 있는 몸이었으므로.
판시온은 별말 없이 내 헛소리를 받아들였다. 한없이 부드러웠던 그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된 느낌이었다.
오가는 말 없이 잠잠해지자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헛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차올랐다. 그중에서도 화룡점정은 손가락에 닿았던 미지근한 입술의 감촉이었다.
으악! 떠올라도 왜 하필 판시온이 옆에 있을 때 떠오르는 거야? 나는 터질 것 같은 열기를 분출하기 위해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고 봤다.
“파, 판시온 소공작은 첫인상과 지금이 정말 그대로인 것 같아요.”
좋아. 이 정도라면 나무랄 데 없는 합격점이다. 예전에는 생각에 과부하가 걸릴 때마다 종종 헛소리를 지껄이곤 했는데, 이제는 적어도 얼굴 붉힐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제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듣고 보니 조금 궁금하군요.”
판시온의 나긋한 목소리가 강바람을 타고 머리칼을 간질였다.
그의 첫인상이라. 나는 다소 흐릿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더듬 입으로 읊었다.
“저는 당신만큼이나 금발이 어울리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당시의 전 기사단을 처음으로 방문했었고, 계절은 지금과 같은 늦은 봄이었죠. 하얀 햇빛이 부서져 떨어지는 기다란 복도 끝에 당신이 있었어요. 마주친 눈동자는 유화의 보라색보다 투명하고, 수채화의 보라색보다는 짙었지요. 안개꽃을 내게 안겨 줄 때의 소공작은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선명했어요. 우리 사이에는 대화도 몇 없었지만… 나는 당신이 기사임을 직감했죠. 그냥, 그럴 것 같았거든요.”
말하고 보니 어째 첫인상보다는 묘사에 가까운 말이었다. 실제 지금의 판시온 엔테라도 내가 줄줄 읊은 문장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맞나요? 이상하게 판시온 엔테라라는 정물화를 그려 가는 기분이네요.”
웃는 소리가 났다. 나는 웃고 있질 않으니 판시온의 것일 게 분명했다. 나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던 걸음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서 나와 함께 걷던 판시온이 어느새 아주 살짝 더 느리게 걷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속도에 맞추었다. 덕분에 우리의 걸음걸이는 자라가 기는 수준으로 늦춰졌다.
“영애가 보는 나는 어째 실제보다 더 대단한 느낌입니다. 제가 감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만큼 멋있다는 의미예요.”
“그럼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겁니까?”
“자신감이요? 얼굴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죠. 소공작의 그 잘난 얼굴에는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없을걸요.”
빛에 비친 판시온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무례했던 걸까.
“늘 느끼지만, 영애는 참 솔직하신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시는군요.”
말끝에서 살짝 묻어 나오는 씁쓸함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솔직한 게 별로라는 의미이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못생겼으니 노력 좀 하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저는요?”
본래는 절대 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의 표정과 말이 조금씩 신경 쓰인다. 마치 네자르의 눈치를 살피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저는 어땠어요? 말해 줘요.”
내 물음에 판시온이 눈을 아주 얇게 떴다.
“당신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라 설명해야 할까요. 마치 야생에서 뛰어노는…….”
야생에서 뛰어노는? 어째 귀족 여식의 첫인상치고는 시작이 영 좋지 않았다.
“야생에서 뛰어노는 고양이?”
그리 묘사하는 판시온의 목소리는 전쟁 막사에서 작전 회의를 하는 것처럼 진중했다. 세상에, 야생에서 뛰어노는 고양이라니.
“고양이는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귀엽나요?”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던 게, 내가 들어도 자기애가 극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판시온의 눈에도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는지, 늘 부드럽고 잔잔하기만 했던 얼굴 근육이 장난스럽게 풀어졌다.
“네, 귀엽네요. 저는 당연히 본인도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당연히 좋게 봐 줘도 하이에나, 그 이상으로는 코뿔소까지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 그럴 때는 귀엽다고 대답 안 해 주셔도 돼요.”
“귀여운 사람을 귀엽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합니까?”
안 된다. 여기서 멈추어야 해. 나는 오랫동안 네자르에게 놀림당해 왔기에 이 같은 패턴에 아주 익숙한 상태였다. 이럴 때는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질 만한 소릴 뱉어 흐름을 깨야 했다.
“소공작도 귀여워요.”
“……음.”
예상대로 판시온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난처한 얼굴로 목을 긁적이던 그는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데보라 백작 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판시온의 훤칠한 옆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저기, 소공작.”
“네, 말씀하십시오.”
“소공작은 누군가를 꼬시기 위해 노력해 본 적 있어요?”
대답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이 열릴 때까지 그의 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릴리와 헤어진 이후에도 머릿속 한편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계속 맴돌던 문제였다.
작게 헛기침을 한 판시온이 매우 뒤늦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굉장히 뜬금없는 물음이군요. 요즘 그 문제로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아직 많지는 않아요.”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어 뭐라 조언해 드릴 수가 없겠네요.”
다른 남자는 몰라도 판시온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알아서 유혹하지 않을까?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 역시 절 좋아하도록 노력해도 되는 걸까요?”
“해도 됩니다.”
단호한 어투와 다르게 판시온의 표정은 퍽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할 필요가 없는 말을 억지로 끌어 올리듯이.
“저라면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하고 싶네요.”
이상하네. 그는 마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일전에 록허드로부터 숨겨 놓은 애인이 있다고 들었었는데, 그 여자를 가리키는 말일 수 있었다. 대체 누굴까?
얼마 안 가서 우리는 데보라 백작 성문 앞에 도착했다.
“제가 가서 마차를 빌리고 오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판시온의 옷자락을 다시 붙잡아야 했다. 몸가짐을 조심히 하라는 네자르의 조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뇨, 저 때문이니 제가 부인께 부탁을 드리고 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늦은 밤 그가 나를 대신해 마차를 빌린다면 모양새가 상당히 이상해질 테다. 판시온이 내 요청을 들어준 덕에 나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데보라 성으로 가 마차를 빌릴 수 있었다.
분명히 염치없는 일이었다. 부탁을 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기가 퍽 어려웠다. 하지만 세피아 부인은 ‘시내 구경이 즐거웠나 봐요.’라는 말 외에 그 어떤 물음도 없었다. 오히려 흔쾌히 나의 부탁을 수락했기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카트리나 영애.”
데보라의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세피아 부인의 부름에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괜한 참견인 것 같아 말을 삼가려 했지만, 어쩌면 당신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말해요.”
무슨 소리일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곧장 이어진 다음 말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여인들이 당신을 어려워하는 데는… 아무래도 카론 엔테라 영애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사교 활동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카론? 상상하지도 못한 이름이 급작스레 튀어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얼마나 황당한 기분이었는지, 체면 살릴 생각도 않고 되물었다.
“왜죠?”
“글쎄요. 그건 당신이 알아봐야겠죠. 제가 카론 영애와 카트리나 영애 사이의 일을 알지는 못하니.”
세피아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세요. 너무 늦으면 길이 위험할 테니까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마차에 올랐지만,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카론이 내 사교 활동을 싫어한다고? 왜?
“……잠깐, 여기서 멈춰 줘요. 동행할 사람이 있어요.”
마차가 멈추고 성문 앞에 서 있던 판시온이 탑승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곤 조용히 입술을 닫았다. 비록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어도, 그의 고요해진 분위기가 여실히 전달됐다.
티가 났던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이마를 붙잡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공작. 저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어요. 이제 우리 엔테라로 가요. 전 소공작을 모셔다 드린 후에 에젤로트로 돌아갈게요.”
“아니요. 아무래도 에젤로트로 곧바로 귀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판시온의 목소리는 정중하면서 조심스러웠다. 그를 생각하면 마땅히 거절하고 엔테라로 가는 게 옳았지만, 어쩐지 카론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잠시 주무십시오. 제가 도착하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그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잠에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세피아 부인의 말을 무작정 믿는 행위는 카론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녀는 무슨 근거로 카론을 지목한 걸까. 카론은 명실상부한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데.
하지만 부인의 말이 맞는다면? 맞는다는 가정하에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의도일 테다. 하나 평소의 카론을 생각하면 그 의도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젠장, 그냥 본인에게 물어볼까? 차라리 그게 나을까?
그렇게 제자리 사고를 반복하다가 에젤로트에 도착했다. 무슨 정신머리로 마차에서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성 앞에는 마차가 들어오는 걸 봤는지 록허드가 내려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조합이군.”
피곤한 낯의 네자르와 함께였다.
카론의 문제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환기됐다. 그래, 내게 닥친 진정한 문제는 카론이 나를 속이고 있었는가, 가 아니었다. 바람을 피우다 걸린 것처럼 어색해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느냐였다.
“안녕, 네자르. 조, 좋은 밤이지?”
“아니.”
네자르는 서릿발이 이는 무뚝뚝한 얼굴로 날 응시했다. 마차에서 내릴 때는 몰랐는데,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평소와 다르게 낯이 퍽 푸석했다.
“데보라를 구경하다가 길을 조금 헤맸어. 한데 마침 판시온 소공작이 날 찾으러 와 주셔서, 이렇게 에젤로트까지 데려다주신 거야.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소공작. 소공작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데보라에서 덜덜 떨고 있었을 거예요.”
그 누구도 나와 판시온이 동행한 데 의문을 던지지 않았지만, 내 입은 절로 이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하려 했다. 분위기는 숨 막히도록 무거웠고, 마차를 타는 내내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속도 답답했다.
“죄송합니다, 단장. 저희 막냇동생 때문에 오늘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케이트가 나이만 먹었지 아직 조금 애 같은 부분이 있죠? 하하!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저희 성에서 주무시고 가십시오. 안 그래도 카드 게임을 하는데 두 명으로는 영 재미가 없더라고요.”
분위기 띄우는 데는 발군인 록허드가 활짝 웃는 얼굴로 네자르 앞을 나섰다. 나는 살금살금 걸음을 이동해 네자르 옆에 섰다. 그의 휴지 조각처럼 구겨진 얼굴이 나를 향해서 살짝 기울어졌지만, 딱히 어떤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단장이 아니야, 록허드 경. 볼 때마다 실수를 하니 이제는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서운한 말씀 하시기는. 한번 단장은 영원한 단장, 모르십니까?”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내 걱정이 태산이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판시온은 한숨과 같은 웃음을 뱉고서 네자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전하? 근 2주 만입니다.”
픽 웃은 네자르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마주 웃은 판시온이 네자르의 손을 마주 잡았다.
“2주가 아니라 3주겠지. 어째 고민이 많은 낯이야. 엔테라에서는 잘 자리 잡아 가고 있나?”
“나쁘지 않습니다.”
“그놈의 나쁘지 않다는 대답은 전쟁이 끝나도 똑같군. 소공작은 엔테라가 망하는 꼴을 보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대답할 사람이야.”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초반의 딱딱하던 분위기와 달리, 가볍게 입이 열리기 시작한 후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다 못해 친근해졌다.
아, 그제야 나는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들은 무려 5년이란 긴 시간, 전우라는 이름으로 전장을 누비던 사이였다. 그러니 어깨동무한 채 형님, 아우 노래 부르며 술을 퍼마셔도 전혀 이상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번 일은 어머니 귀에 들어갈 각오 해라.”
판시온과 네자르가 인사를 나눌 때였다. 허허 웃고만 있던 록허드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었으나, 안타깝게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케이트의 안부까지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네. 그렇게 조심히 행동하라 말해도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군.”
네자르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판시온을 바라볼 때와 다르게 여간 살벌한 눈빛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여러 번 경험했던 상황이었다. 뭣도 모르던 시절 마음대로 밖을 나돌다 자정 즈음 성으로 기어 들어오면, 그때 나를 다그치던 네자르의 표정이 지금과 똑같았다. 어째 오늘은 조금 더 딱딱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겁에 질려 침을 꿀꺽 삼키곤 급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소공작.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할게요.”
“아닙니다. 영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니, 그리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판시온의 웃음은 늘 그렇듯 한 폭의 풍경화처럼 부드럽고 차분했다. 신사다운 반응이었으나 감히 네자르를 옆에 두고 그렇군요, 라 대답할 순 없었다. 단순하게 신사적인 화법이라기에는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하고 친절한 목소리였던 탓이다.
나는 네자르를 올려다봤다. 물끄러미 판시온의 뺨을 응시하던 그가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말은 고맙네. 그러나 소공작이 굳이 케이트에게 시간을 투자할 필요는 없어.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말이야.”
나는 네자르에게 안긴 채 홀로 들어왔고, 그대로 계단까지 올랐다. 이 늦은 시간에 판시온을 내보낼 순 없는 노릇이라 침실을 준비하는 일로 1층이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들어가.”
네자르가 밀어낸 침실의 문이 소리 없이 조용하게 열렸다. 나는 그 너머의 익숙한 풍경을 쳐다보다가, 울적한 기분으로 등을 돌렸다.
“미안해.”
“뭐가?”
뭐가, 라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차가운 그의 얼굴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윽고 땅이 꺼질 기세로 뱉어진 그의 숨은 무거우면서도 농도가 짙었다. 그는 나의 등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늦었으니 자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대로 문이 닫혔다.
당연한 말이었겠지만, 내가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장면이 영사기에 못 박혀 수십 번 재생되었다. 마차에서 내려 눈이 마주쳤을 때의 네자르와, 그의 앞에서 애인을 대하듯이 향기로운 어조로 날 위로하던 판시온.
설마 내게 마음이 있는 건가?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아, 아니, 바보는 맞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완벽한 바보는 아니다.
그동안 판시온이 내게 보인 호의는 네자르의 것과 형태가 매우 달랐다. 더 직접적이고, 훨씬 함축적이었으며,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다수의 차이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한 눈짓과 행동과 웃음이 그러했다.
애초에 내게 관심이 없었다면 이 늦은 시간에, 겨우 동생의 친우라는 이유 하나로 먼 거리를 배웅해 줄 리 없었다. 눈치 하나로 나라까지 건국할 수 있는 네자르다. 그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문득 남자를 데려오면 약혼을 파기해 준다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떠오른 네자르의 목소리에 기분이 금세 다시 지하로 내려앉았다. 애초에 판시온의 마음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내 망상일 확률이 더 높지.
더 깊게 생각하면 두통이 일 것 같았기에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행히도 몸이 노곤했던 덕에 잡념을 쉬이 잊을 수 있었다.
***
내가 눈을 뜬 건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새벽이었다.
몸은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웠으나 정신은 정반대로 또렷하고 선명했다. 종을 울려 가벼운 식사를 요구했으나, 주방 하녀들도 이제 막 식사 준비에 돌입한 시기였기에 입에 댈 수 있는 건 밀크티가 고작이었다.
나는 십여 분 만에 바닥을 보인 빈 잔을 내려다보다가, 창가로 다가가 성안의 너른 초원을 응시했다. 유리로 닿아 오는 바깥의 열기가 평소에 비해 훨씬 뜨거웠다. 이제는 초여름도 지나 완연한 여름에 들어선 것 같았다.
“더워.”
“이상하게 오늘은 오전 7시도 안 됐는데 햇빛이 강하죠? 찬물을 준비해 올까요?”
침구를 정리하던 데이지가 나를 향해 던지듯 물었다.
“아니, 오랜만에 수영이나 하고 와야겠어.”
“예?”
“호수로 갈래. 어머니께서 일어나시면 말 좀 전해 줘.”
전날 밤늦게 귀가한 사건이 있었기에,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으실 게 분명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맨발로 정원 너머 초원을 내달렸다. 뜨겁게 달구어진 땅에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디마니아 호수는 둘레가 생각보다 꽤 크다. 물을 멀리하는 삼 형제와 달리 나는 물놀이를 꽤 즐기는 편이었기에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보드부터 조각배, 낚시터까지 호수 근처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흔적이 적잖았다.
이곳에서 수영복 같은 건 필요 없다. 그저 수영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차림과, 몸을 전부 덮을 만한 타월을 준비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카트리나 선수, 입수하겠습니다.”
말만 다이빙 보드지,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 첨탑은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용도였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수면과 그 위의 부둣가를 내려다봤다.
이럴 때마다 꼭 카론이 떠오르곤 했다. 혼자 하는 놀이는 금방 싫증 나기 때문이다.
풍덩! 차가운 한기가 살갗을 뚫고 뼈를 에워싸는 느낌이었다. 나는 숨을 참고 호수의 바닥을 살피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늘 그랬듯 디마니아 호수는 별일 없이 평화로웠다.
일어났으려나? 돌아갈 때쯤에는 네자르와 판시온이 남아 있지 않았으면 했다. 그 둘 사이에서 식사하면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머리칼을 넘기고 호수 한가운데로 헤엄쳤다. 하늘을 향해 몸을 누여 햇볕의 따스함도 즐겼고, 엉덩이를 씻는 오리 가족의 여유로움도 구경했다.
모든 것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평온했다. 나무 첨탑 아래에 자리 잡은 네자르를 발견했을 때마저도.
그는 부둣가 위에서 첨탑에 몸을 기대고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양 자연스러웠기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깊게 잠수해 첨탑이 있음직한 위치에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가까이서 본 그는 책이라도 읽고 있었는지 안경을 걸친 채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꺼운 두께의 보고서가 그의 옆자리에 놓여 있다.
“혹시 나 몰래 쫓아다녀?”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안경을 걸친 네자르의 멋들어진 코가 작게 구겨졌다.
“그러지 않으면 여기까지 나올 수가 없어. 설마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지?”
“너는 걸음이 조금 시끄러워, 케이트.”
동문서답이었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부둣가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턱을 댔다.
“잊었나 본데, 내가 에젤로트를 방문할 때마다 사용하는 침실은 네 침실과 같은 층이야. 그리고 네가 가진 특유의 쿵쿵 울리는 발소리는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아들을걸.”
“내가 그렇게 시끄럽게 걸어 다녀?”
“조용한 편은 아니야. 너는 모르겠지만, 발소리가 들린 후 아주 잠깐 쉬었다가 창밖을 보면 종종 네 뒷모습이 보여. 그럴 때 너는 보통 두 가지의 일 중 하나를 하고 있지. 말을 타거나 잔디 위를 구르거나.”
팔을 뻗은 네자르가 내 코를 가볍게 쳤다.
“그런데 오늘은 멀리 달려가니 호숫가로 갔구나, 싶었지.”
이런 소릴 들을 때마다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해도 늘 네자르의 손바닥 위라는 것.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네가 내 프러포즈를 거절하기 전까지는.”
작게 웃는 그의 얼굴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근사했다.
편안한 분위기였던 탓일까, 아니면 이미 지난 일이었던 탓일까? 생각만큼 대화 주제가 껄끄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내 앞에 내보일 남자는 찾은 거야?”
판시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디까지나 지나갔을 뿐이다. 내가 대답을 생각하는 동안 네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공작은 안 돼.”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엔테라의 후계자다. 네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외치려던 입술을 닫았다. 그는 내가 결혼 전의 유희를 위해 프러포즈를 거절했다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소리를 할 수가 없지!
“지금 가볍게, 라고 했어?”
나는 홧김에 부둣가로 올라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그를 내려다봤다.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면 어쩔 거야?”
날 쳐다보는 네자르의 얼굴은 상당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상대도 하기 싫다는 건가?
나이트가운에 가까운 드레스를 걸쳤음에도 물에 젖으니 짐 가방을 하나 둘러멘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네자르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걸어가 쭈그려 앉았다.
“왜 대답 안 해?”
네자르에게선 곧장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걸치고 있던 베스트를 벗어 내 어깨와 가슴 위를 꼼꼼하게 덮었다. 그래 봤자 얇고 작은 베스트로 가려지는 부분은 얼마 안 됐다.
나는 그제야 네자르가 고개를 돌린 이유를 깨달았다. 얼굴에 세상의 모든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케이트.”
“으, 응?”
“나는 상관없지만 수영한 후 다른 남자 앞에서는 절대 물 밖으로 나오지 마.”
네자르 앞에서는 나와도 되냐 묻고 싶었으나, 딱딱하게 굳은 입술이 열릴 리 없었다. 내 얼굴로 팔을 뻗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손을 거두려 했다. 하나 다시 뻗어 뺨 위로 치덕치덕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아주 살짝 걷어 냈다. 아주 살짝. 바닥에 떨어진 깨진 유리 조각을 줍듯이.
“안 돼.”
그리고 그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판시온은 안 돼.”
“다른 사람은?”
재차 물어도 네자르는 여전히 딱딱하고 건조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안 돼.”
내리쬐던 태양이 구름 뒤로 숨었는지, 나무 첨탑의 기다란 그림자가 네자르의 얼굴을 뒤덮었다. 말라 가던 손등 위의 물기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네자르의 심술 가득한 말에 나는 불만을 나타냈다.
“저번에 나한테 했던 말 잊었어? 남자를 데려오면 파혼을 생각해 보겠다며?”
매섭게 말하자 그가 멈칫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 멈칫했을 뿐,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 취소야. 내가 너무 성급했어. 이상한 내기를 하느니 차라리 널 설득하는 게 더 빠른 길이었지.”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분위기를 봐선 우스갯소리도 아니었다. 네자르는 나와 대화할 때 단 한 번도 말을 번복하거나, 지위로 내리누르려 한 적이 없었다. 더불어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애처럼 무언가를 강요한 적도 없었다. 날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는 늘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었지.
그래서 그럴까? 지금의 네자르는 내가 알던 네자르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까칠하고 제멋대로인 앤드류처럼 보였다.
“황태자가 한 입으로 두말 뱉는 거 아니야. 그래 봤자 난 이미 소공작이랑 밤늦게 데이트까지 했는걸?”
미안해요, 판시온 소공작. 이 거짓말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바로잡을게요.
“그러니까 없는 일로 못 쳐. 나랑 했던 약속을 지켜.”
프러포즈를 거절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기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 의사를 단순한 변덕으로 여겼던 것이라 생각하니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늘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던 네자르라 더 신경질이 났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네자르의 표정은 찔린 구석 하나 없이 여상했다.
“거짓말하지 마, 케이트.”
피곤한 듯, 안경 아래의 눈꺼풀을 꾸욱 누르던 네자르가 결국 안경을 벗어 보고서 위로 내던졌다.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데보라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말은 내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판시온 성격에 여자애들 수다 떨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너, 정말 나한테 사람 붙이고 있었던 거야?”
문득 유령의 성에서 앤드류를 만났던 다음 날,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리 인도적이지 못한 행위를 하도록 만들지 말란 소리다.’
설마 그 인도적이지 못한 행위가 내게 사람을 붙인다는 의미였을 줄은 몰랐다. 대체 언제부터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던 걸까? 데보라에서부터? 늦은 밤 미친 척 황성에서 말을 탔던 날?
“그렇지? 맞지? 나한테 사람 붙였지!”
아니면, 판시온과 불꽃놀이를 구경했던 날부터인 걸까? 마지막 경우를 생각하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색되는 기분이었다. 설마 그날부터는 아니었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엄청난 수치심이 머리를 뒤덮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고 있었다. 빛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네자르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동시에 그의 두 다리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 케이……!”
풍덩! 차가운 호수의 물이 내 등을 잡아먹듯 감싸 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으로 가득 찬 새파란 시야 속에서 네자르가 나타났다. 그는 소리가 아닌 표정으로 내 멍청함을 타박했다. 이윽고 그의 강한 힘이 내 몸을 수면 위로 잡아끌었다.
“하아, 하아.”
나는 네자르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에 닿아 오는 그의 몸이 석고상처럼 단단했다. 숨이 벅찬 와중에도 그 느낌만은 생생했다.
“어이, 케이트. 제발 앞뒤 좀 보고 다녀. 너는 대체 언제쯤 어른이 될래? 애초에 어른이 될 수는 있는 거야?”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네자르의 목 울림이 나직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맞닿아 있으면 심장이 터질 듯 떨려야 하는데, 지금은 왜인지 그의 존재감이 안온하기만 했다.
“난 이미 어른이야. 네자르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네자르의 팔이 조용히 떨어져 나갔다. 나 역시 고개를 일으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한참이 흐른 후 그가 몸을 움직여 부둣가 쪽으로 나아갔다. 얇게 갈라진 수면의 파문이 내 가슴께에 부딪혀 사그라졌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
“10년을 봐 왔는데 모를 건 또 뭐야? 네자르는 정말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
가볍게 발을 휘저어서 다시 그의 앞으로 헤엄쳤다. 네자르는 인상을 구긴 채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수면에 반사된 금색의 태양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숨이 멎다 못해 과호흡이 일어날 정도로 근사한 생김새였다.
“응?”
부둣가로 올라가려는 네자르의 앞을 막았다. 한데 그는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계속해서 몸을 뒤로 뺐다.
“가까이 오지 마, 케이트.”
그 소리를 보란 듯이 무시하고 한 뼘 거리 앞으로 헤엄쳤다. 안아 달라는 의미로 두 팔을 활짝 벌리자 네자르가 기겁을 하며 부둣가 위를 단번에 올라탔다.
“왜 자꾸 도망가? 옛날에는 잘만 안아 줬잖아.”
저러고서 애 취급이라니,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가?
네자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커프스를 풀어 소매를 접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뒤로 넘겼다. 늘 깜깜하고 흐릿하기만 했던 그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까지와 달리 조금씩 윤곽이 잡혀 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날 봐도 아무렇지 않아?”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다. 아니, 그렇게 어른스럽고 믿음직했던 네자르는 어디로 가고, 자기 불리할 때마다 입을 닫는 좀생이만 남았네! 어이가 없었다.
“전하, 나랑 그냥 파혼하면 안 돼요?”
심술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네자르의 대답이 재깍 들려왔다.
“약혼을 자청한 건 너야. 벌써 잊었어?”
“전하는 나를 안 좋아하잖아요. 아니, 좋아해도 그게 남녀 사이의 감정은 아니잖아요. 나를 그냥 놔줘요. 그런 선택이 전하에게 폐가 될 거란 건 알지만, 전하는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 크게 상관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굳이 에젤로트 가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파혼쯤이야 별일도 아니면서!”
그를 따라서 부둣가에 올라섰다. 우리 둘이 선 마른 나무 위는 이미 뚝뚝 떨어지는 물로 주위가 흥건했다. 셔츠의 단추를 끌러 내던 네자르가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건 정말 단어 그대로 참담한 목소리였다.
“나도 왜 자꾸 널 붙잡으려는지 몰라. 정말 진심으로 모르겠군. ……하아, 그래도 파혼은 안 돼.”
그의 말은 내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나고, 현명하고, 이성적인 네자르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말을 하다니?
어딜 가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나도 내 감정에는 솔직하다. 아니, 솔직했기 때문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온 걸까? 순서가 어찌 되었든 본인의 감정을 가장 잘 아는 건 본인이란 것쯤이야,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고.
그런데 네자르가 모른다고? 나도 알 것 같은 네자르의 마음을, 네자르가 몰라?
“너, 진짜 싫어.”
이쯤 되면 오기를 부리는 쪽은 내가 아니라 네자르였다. 본인이 눈치채지 못하든, 눈치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든 더 이상 상관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얼굴을 향해서 손가락질했다. 마치 대단한 선전 포고라도 하듯이.
“두고 봐, 집을 나가서라도 너랑 절대! 절대로 너랑은 결혼 안 할 테니까. 뭐? 모르겠으니까 파혼은 안 돼? 지금 나랑 장난해?”
“케이트, 일단 진정해.”
그 어느 때보다 당혹스러운 얼굴의 네자르가 급히 내 어깨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강하게 내쳤다.
“진정하기는 뭘 진정해? 제 마음도 모르겠으면 싫다는 난 놔두고 너 좋다는 여자들한테나 가!”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부둣가 위를 내달렸다. 애인을 찾아야 한다며 늘 말로만 다짐했던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진짜 웃겨. 아무리 생각해도 약혼을 파기하기로 마음먹은 게 백번 잘한 결심 같았다. 저런 남자랑 결혼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 네자르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답답한 사람일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악!”
젠장. 하필 거기에 돌부리가 있을 건 뭐야?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씩씩하게 달려가던 나는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땅바닥에 코를 박았다. 등 뒤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이대로 땅 아래에 녹아들어 죽어 버리고 싶었다.
“케이트, 괜찮아? 피가…….”
조심스럽게 내 몸을 일으킨 네자르는 여전히 황당무계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덕분에 내 부끄러움은 배가 되었다.
“저, 저리 가. 앞으로 나 아는 척도 하지 마.”
“……넘어져도 무시하라고?”
“그래, 무시해!”
내가 봐도 억지인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허락할 수 없었다. 나는 아려 오는 무릎을 부여잡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뛰어나갔다. 그렇게 스무 발자국쯤 앞섰을 때였을까, 가장 중요한 사실이 떠올라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람 붙이지도 마!”
이제는 거리가 꽤 멀었기에 네자르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 참 웃긴 게, 그렇게 무시하라 소리쳤으면서 막상 따라오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자 서운함에 입가가 일그러졌다.
도대체 몇 번째 결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허언이 아니었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야.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고,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얼마나 애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도 확신할 줄 모르는 멍청이는 필요 없으니까!
말에 미친 록허드는 내가 호수에서 수영하고 올 동안 판시온을 이끌고 실내 승마장을 누볐다고 한다. 아침부터 손님을 이끌고 나가서 땀을 흘리다니, 악마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고단함을 느낀 쪽은 록허드나 판시온이 아닌 나였다. 너무 오랜만에 물가에서 논 탓인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식사 시간이 와도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식탁 분위기도 그리 좋지 못했고.
록허드와 판시온의 대화가 끊임없이 오갔지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토마토를 난도질하기 바빴다. 네자르 역시 별말 없이 조용히 접시를 비웠다. 체하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식후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집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들고 정원 옆의 벤치로 나왔다. 날이 너무나 밝아 살짝 땀이 맺히는 기분이었으나, 적어도 어두운 것보다는 훨씬 가벼운 기분이었다.
“요즘 날이 계속 화창하군요.”
엔테라로 향할 마차는 이미 성문 앞에 도착해 있었고, 작별 인사도 끝난 후였건만 판시온의 걸음은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텅 빈 머릿속에 억지로 채워 넣고 있던 소설책을 덮었다. 모자를 벗은 판시온이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가온 그에게선 풀꽃 향이 났다.
“이제 여름이니까요.”
“꽃은커녕 풀 한 포기 없이 메마른 땅에서 전쟁을 끝낸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참 그답다고 느껴졌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판시온의 웃음을 보니 기분이 가벼워짐과 동시에 울적해졌다.
네자르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론의 손에 이끌려 황성으로 돌아갔다. 그것도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못 나눈 채.
“이런 소릴 계속 듣게 해서 죄송하지만…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소공작.”
“아닙니다. 덕분에 에젤로트도 방문하고, 오랜만에 록허드 경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제도와 엔테라만 오가느라 볼 기회가 적었거든요.”
긴 휴가를 받고 에젤로트에 틀어박혀 날 괴롭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록허드와 달리, 판시온은 공작가 후계를 준비하느라 퍽 바쁜 눈치였다.
나 때문에 하루를 버린 거나 마찬가지네. 미안함에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오늘 일정이 있으셨던 것 아니에요? 괜히 시간만 쓰시게 만든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나온 김에 오늘 하루 쉬면 됩니다. 애초에 데보라로 간 것도 바람 쐬기 위해서였으니까요.”
판시온 엔테라라는 남자는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이리도 친절한 걸까? 친절한 것으로도 모자라 다정하고, 상냥하며, 어른스럽기까지 했다. 네자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남자에게 푹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이나 근사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소공작.”
“네.”
“소공작은 아직 혼인 예정이 없으신 건가요?”
판시온이 다소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답은 곧장 나왔다.
“공교롭게도 아직 없습니다.”
“늦게 하는 이유라도 있으세요? 릭도 지금 하루에 한 번씩 부모님의 채근을 받고 있는데, 소공작께서는 이야기가 더 자주 나오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록허드는 이미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었기에 혼인의 ‘혼’ 자도 나올 일이 없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참 대단한 인물이지.
벤치에 팔을 걸친 채로 책의 표지를 훑던 판시온이 말했다.
“저도 하루걸러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만 지금은 딱히 혼인 생각이 없어서요. 뒤늦게 후계 수업을 받는 것으로도 상당히 바쁩니다.”
결혼할 겨를도 없이 바쁜 판시온을 에젤로트에 끌고 오다니! 어째 대화하면 할수록 더 짙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상냥한 미소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소공작. 소공작만 괜찮다면 나중에 이름 한 번만 빌릴 수 있을까요?”
판시온은 상관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되물었다.
“어디에 말입니까?”
“제 약혼을 파기하는 데요.”
이번에는 반응이 조금 달랐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던 그는 내가 뱉은 말의 의미를 되새기듯, 입을 닫고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나였어도 어이없을 거야. 파혼하는 데 이름을 빌려 달라고? 뜬금없는 건 둘째 치고 무례하다고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역시 머릿속의 생각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다. 나는 경솔했던 발언을 후회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음…, 아니에요.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세요. 너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던 것 같아요.”
며칠 동안 사이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다니. 판시온이 역정을 내더라도 할 말 없었다.
“아니요. 실컷 빌리십시오.”
그러나 판시온의 대답은 내 예상과 아주 상반된 것이었다.
“미리 말씀해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소문이 들려오든 그러려니 하고 있겠습니다.”
고맙다기보다 어리벙벙했다. 특히 그가 뱉은 마지막 문장은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판시온의 성격상 허튼소리를 하진 않는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진심이세요?”
“진심입니다.”
“저한테 너무 잘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소공작에게는 민폐를 끼친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망상에 불과했던 예상이 점차 확신에 가까워짐을 느낀다. 지금처럼 따스한 무언가가 충만한 시선으로, 내 눈을 오롯이 마주할 때 유독 더 그랬다. 사실 이미 반 이상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네자르가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일까? 보는 내 가슴께가 다 간질간질하고, 부끄러워지는, 이…….
“잘해 드리면 안 됩니까?”
이 설렘의 전이.
나는 판시온의 말에 작게 웃곤 고개를 돌렸다. 차마 저 얼굴에 대고 안 된다는 소리를 뱉지는 못할 것 같았다.
***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 이상하다.
록허드는 그에게 적잖은 문제가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도 아니었고 당장 어제부터 무언가 핀트가 어긋나 있는 상태였다.
정확한 시기는 어제저녁, 집 나간 야생 고라니가 귀성한 이후부터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홀로 귀성했어야 할 고라니가 옆에 무언가를 이끌고 왔을 때부터였다.
록허드는 마차에서 판시온이 내리자마자 살벌하게 변하던 네자르의 얼굴을 여태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쉬이 보지 못했던 그 눈빛이 정확히 판시온을 향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때 전우였던 사내인데 말이지. 케이트를 향한 서운함이 그 정도로 컸던 걸까. 그럴 만했다. 근래에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곤 잠깐의 시간도 뺄 수 없는 네자르였다. 그 바쁜 일정을 쪼개고 쪼개서 케이트를 보러 왔건만, 정작 당사자의 옆에는…….
“쯧, 그러게 여유 부리지 말고 빨리 잡아챘어야지.”
고개를 저은 록허드가 훈련장 옆에 조경한 나무 그늘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그늘에 또 다른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곤 화들짝 놀라야 했다.
“씨발.”
록허드의 심경이 그대로 녹아든 간결한 욕설에 무표정으로 서 있던 론이 반응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말이지요.”
유령처럼 등장한 것도 모자라,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벌렁거리는 심장을 쥔 채 숨을 헐떡이던 록허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하께서 저렇게 바보처럼 행동하실 수 없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네자르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하긴, 긴 시간을 네자르만 쫓아다니며 살아온 론이 자신의 황태자 외의 다른 주제를 입에 담을 리 없었다. 동의하는 바였지만,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다가는 한 소리 들을 게 뻔한 일이었다. 론 자신은 기세등등하게 한 소리 내뱉는 주제에, 타인이 네자르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꼭 죽일 듯 노려보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아니, 지금은 왜 또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록허드는 갑자기 드는 욱한 심정에 입을 열었다.
“이봐, 론.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봐?”
“가서 무슨 일이냐고 빨리 물어봐 주십시오.”
기겁을 한 록허드가 어깨를 떨었다.
“미쳤어? 또 신경질 부릴 게 뻔한데 장작 넣으라고?”
“그럼 전하를 며칠 동안 저 상태 그대로 두실 겁니까?”
알 바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있는 록허드의 입장에선 상당히 피곤할 일이었으나, 적당히 눈치를 보고 피신하면 될 테니까.
“저 상태로요?”
물론 지금 같은 네자르의 상태가 익숙한 건 아니었다. 예민함이 극한에 달해 옆에서 숨도 겨우 쉬던 순간은 있어도 지금처럼 멍청한 네자르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계속?”
“아, 젠장……. 그래, 간다, 가!”
록허드가 이를 갈며 그늘을 벗어났다. 목표는 신입 기사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네자르 황태자. 네자르를 상대하고 있는 저 어린 기사의 땀은 운동으로 인한 땀이 아닌 긴장으로 인한 식은땀일 터였다.
3기사단을 계속 괴롭히기에는 눈치가 보였는지, 2기사단을 방문한 네자르는 여느 때처럼 대련이라는 이름의 화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이제 슬슬 중재에 나서야 하기는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 가던 참이었으니까.
“어이, 네자르.”
땀에 젖은 흑발이 멈칫한다. 마주한 얼굴은 눈 아래가 검게 식어 있었다. 최근 무리한다 싶었더니,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해 보였다.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속을 쑤시는 소릴 하기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불가능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돌려 말해 줄 구석도 없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위를 쟁탈할 능력은 있으면서, 왜 여자 하나는 마음대로 못 하는 걸까. 그것도 상대는 심지어 본인에게 푹 빠진 카트리나 에젤로트인데.
“무슨 싸움?”
네자르의 반문은 짜증과 귀찮음이 반반 섞여 있었다.
“네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주제에 괜히 상관도 없는 놈들 괴롭히지 말라는 거다.”
“맞습니다. 지금의 전하는 전하답지 않습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론이 록허드의 조언을 거들었다. 이마를 쓸어 올린 네자르가 직전까지 휘두르고 있던 검을 론에게 건넸다. 감정을 표현할 기운도 없었는지, 눈썹만 살짝 구겼을 뿐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주어 넣어서 말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이미 짜증 내고 있으면서 인심 쓰는 척하기는.
“제가 맞혀 볼까요? 어젯밤 네자르 전하께서는 친히 시간을 내어 에젤로트로 가셨지만, 아마 케이트 양에게 바람을 맞았을 겁니다.”
이쯤 되면 론 미네르바는 제3의 눈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도 네자르의 신체 어딘가에. 그렇지 않고서야 네자르의 상황을 저렇게 속속들이 알 수 없었다.
“전하의 반응이 평소보다 더 격렬한 것을 보아, 단순히 바람을 맞은 것으로 끝나지 않은 것 같군요. 흐음, 케이트 양이 남자라도 데리고 왔습니까? 변변찮은 인물은 아닐 테고… 전하가 긴장할 정도의 인물은 몇 없지요. 아마스라 소백작? 아니면 엔테라 소공작입니까?”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예측력이었다. 록허드가 속으로 박수를 칠 동안 눈치를 살피던 신입 기사가 줄행랑을 쳤다. 네자르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론의 얼굴을 노려봤다.
“지금 내 기분이 바닥을 찍는 이유가, 케이트를 여자로서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길게 표현할 필요 있습니까? 간단하게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 될 일을.”
이렇게 보면 론도 낯부끄러운 말을 참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단 말이야. 기세등등한 대답에 네자르가 숨을 가다듬던 등을 펴고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케이트를 사랑해서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되물음에 론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만 보면 사랑은 네자르가 아닌 론이 하는 것 같았다.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네자르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의 속은 그리도 잘 읽으면서, 정작 자신의 마음은 답답하리만치 알아채지 못하는 그가.
이윽고 나온 목소리는 이가 빠진 검날처럼 기세가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돌아 버리겠군. 그 사랑이란 게 원래 이렇게 개 같은 거였어?”
짙은 고통과 한숨이 서린 목소리였다. 친우의 안타까운 모습을 가만히 볼 수는 없는지라, 록허드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기로 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거야. 판시온 단장… 아니, 소공작 못 봤냐? 평소에는 칼같이 선을 지키던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잖아. 케이트가 넘어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안 그래도 살벌했던 네자르의 얼굴이 이제는 위험 수준까지 도달할 기세였다. 그에 더불어 옆에 서 있던 론마저 죽일 듯한 시선으로 록허드의 오른쪽 뺨을 씹어 먹으려 하고 있었다.
하아. 진짜 피곤하다, 너희.
“괜찮습니다, 전하. 연애할 줄 모른다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우면 되지요. 제가 저번에 해 드렸던 말 잊지 않으셨죠? 우선 들이대십시오. 여자들은 애정을 갈구하는 남자에게 약합니다.”
조언이랍시고 나온 론의 말에 록허드가 기겁을 하며 맞받아쳤다.
“절대 안 돼. 애정을 갈구하라고? 그런 건 동정심이나 모성애를 자극할 뿐이지, 이성 간의 성적인 사랑을 자극하는 게 아니야.”
“성적인 사랑이라뇨? 표현이 너무 저급하신 거 아닙니까?”
론의 시선이 다시 모닥불에 달궈진 육포처럼 뜨끈뜨끈해졌다. 그러나 록허드 역시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럼 애를 낳아서 황가의 명맥을 이어야 하는데 성적인 사랑이어야지! 둘이 평생 손만 잡고 지금처럼 경건한 관계로 살 거야?”
록허드 나름대로 최대한 설득하려는 와중이었다. 돌연 손만 잡고 평생을 사는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너 설마 결혼은 케이트랑, 자식은 다른 여자랑 낳을 생각이냐? 아니겠지?”
의도하지 않았으나 눈가에 절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황가의 후계자를 다른 곳에서 보게 된다면, 케이트는 이름만 황후일 뿐 황성에서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케이트가 프러포즈를 거절했던 게 이 때문이었나?
지금까지 케이트에게 보인 네자르의 태도를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가정도 아니었다.
“어이, 네자르. 네 욕심 때문에 케이트를 황성에 묶어 놓을 생각이면 그냥 보내 줘. 걔가 평생 너만 바라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케이트를 향한 네자르의 집착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순전히 가까운 동생을 대한다기에는 너무 손안에 가두려고만 했고, 이성으로 여긴다고 하기에는 보편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애지중지했다.
그게 단순히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면 크게 상관없었다. 알아채도록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
하나 만약 그 반대라면…….
“너도 알겠지만, 걔는 어릴 때 부모님의 관심이 고파서 불까지 질렀던 애야. 그럼 나중은? 걔가 네 관심을 얻으려고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냐?”
만약 케이트의 목줄이 황성에 묶이게 된다면, 록허드는 에젤로트로 네자르를 끌고 왔던 그날을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테다.
“록허드 경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이든 차후든, 에젤로트 가문을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덩치에 알맞게 겁내지 말고 표현하십시오. 남자라면 직진!”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록허드는 자신의 구구절절한 조언에 초를 치는 론을 매섭게 노려봤다.
“직진은 무슨. 너, 케이트와 자식을 볼 생각이 아니면 절대 결혼식 치르지 마. 나는 결사반대야. 절대 안 돼! 뭔갈 하려면 애를 낳겠다는 기세로 하라고!”
화를 참지 못한 록허드는 결국 네자르의 어깨에 손까지 올렸다. 그는 답답한 친우의 몸을 뒤흔들며 확신을 받아 내기 위해 반복해서 물었다.
“지금 여기서 결정해라, 네자르. 아니, 결정이 아니라 맹세해. 케이트와 결혼해서 반드시 애를 낳을 수 있다고!”
“그런 경박한 표현 좀 자제하십시오!”
제 주인을 타박하는 록허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론이 황급히 록허드의 손목을 잡아챘다. 몸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덩치 큰 론이 합류하자 듬직한 남성 셋이서 찰싹 붙어 있는 꼴이 됐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론! 경박해도 사실은 사실이야.”
“경이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 겁니다. 연애 경험도 없는 주제에 전하를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갈수록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주변의 기사들마저 하나둘 이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네자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까 제발 닥쳐.”
록허드와 론이 입술을 닫았다. 그에 네자르는 기다렸다는 듯 제 몸 위에 얹혀 있던 팔을 내쳤다.
“그래서, 요점은 구애하고 애를 낳는다. 맞지?”
맞는 소리이기는 한데, 요약하니 마치 짐승과도 다름없는 결론이 나왔다. 네자르 역시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랑이란 건 개 같아.”
***
나는 네자르를 좋아한다. 아마 이 지독한 첫사랑은 평생 날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혼인을 포기하고 약혼자를 찾는 연유는 간단했다.
“그 바보와 결혼하기 싫어.”
산더미처럼 올려진 시험지로 릭이 손을 뻗는다. 그는 매우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계처럼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정직한 움직임인지, 멀리 앉은 이곳에서도 시험 성적이 보였다.
손목이 꺾이는 정도로 보아 저 학생의 성적은 D+. 보충 수업에서 D+면 낙제다. 릭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또 한 명의 학생을 낙제시키고 있었다.
저게 천직이라는 걸까?
아무래도 릭과는 이야기가 안 통할 것 같았기에, 건너편 의자에 앉은 인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 영애, 영애 주변에 외로운 남자, 아니 여자 없을까요?”
하나 릴리의 상태는 릭보다 더 심각했다. 그녀는 황홀함이 가득한 얼굴로 릭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자 단위로 분석하고 있었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록허드는 아마 남자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로 릴리와 나를 비슷하다 표현했던 것일 테다. 분했지만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릴리 영애,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떡하죠, 케이트 영애? 교수님의 만년필을 잡는 각도가 너무 예술이에요. 손가락이 움직이는 속도만 보면 만년필과 혼연일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아, 릭 교수님은 어쩜 시험을 채점하는 모습조차도 저리 아름다우실까?”
우웩. 그녀의 찬양을 더 듣다간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릴리는 찬사를 더 잇지 않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 외로운 여자라고 하셨나요?”
“……네.”
“저에게는 동성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야말로 외로운 여자를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케이트 영애와 있으니 또래 숙녀들과 수다를 떠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정말 환상적이지 않아요? 여자들끼리 숨어서 좋아하는 남자 이야기를 하다니! 전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 놀이인 줄 몰랐지 뭐예요?”
릭의 면전에서 릭의 이야기를 하는 행위를, 과연 숨어서 수다 떠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릴리는 도움이 안 된다. 릭을 방문하는 김에 그녀가 생각나 불러내기는 했지만, 정말 여자 친구 하나 없는 구석까지 나와 똑같았다.
역시 록허드의 조언 따위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어. 이런 여자가 네자르의 이상형이라면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인물을 찾는 게 나았다. 애초에 친구도 없고 다른 남자에게 빠진 여자를 꼬실 수 없을 테니까!
“친구라면 카론 엔테라나 찾아가지, 여기까지는 또 왜 온 거냐?”
릭이 시선을 시험지에 고정한 채 물었다. 그 물음 덕분에 나는 여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상태에서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꽃보다 아름다운 카론의 미소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싸웠군.”
그 날카로운 지적에 머릿속의 카론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아, 아닌데?”
“하긴, 너희도 이제 한 번쯤은 싸울 때가 됐지. 다투지 않고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게 신기했던 거다.”
“싸운 게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불편해하는 거야.”
깊이 생각할수록 세피아 부인의 말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된다. 나를 피하던 여식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모두 카론을 어려워했다는 점이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왜요?”
릴리가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아주 잠깐 고민에 빠졌다. 굳이 남에게 설명할 일은 아니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굳이 숨길 이유도 없어 보였다.
“카론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진짜인지 내 착각인지 모르겠어요.”
“그럼 물어보면 되죠.”
남이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인 걸까. 숨 막히도록 일차원적인 생각과 속을 읽을 수 없으리만치 환한 표정.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머릿속을 텅 비어 버리게 만든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열 번도 더 물어봤어요.”
“그럼 이제는 직접 실천하면 되겠네요!”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릴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로 실천할 것만 같은 기세였기에 눈이 마주치자 덜컥 겁이 났다. 어서 엔테라로 떠나자고 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무, 물어봐서 진짜라고 하면요?”
“그럼 뺨을 때리세요. 아, 혹시 때리는 게 거북하시다면 제가 대신 때려 드릴게요! 과제 풀이로 오랜 시간 단련돼서 팔 힘 하나는 좋아요.”
가볍게 눈을 찡긋한 릴리가 자랑하듯 팔에 힘을 주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반투명한 드레스 천 아래로 보이는 윤곽이 분명 선명하고 딱딱했다.
저 강인한 팔로 카론을 후려칠 거라 생각하니 턱 아래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불안감을 쥐뿔도 알지 못할 릴리는 신이 나서 주저리주저리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엔테라로 가죠! 영애 덕분에 릭 교수님 얼굴도 봤으니 이번에는 엔테라 영애의 얼굴을 보러 나가요!”
릴리는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끼어들 틈도 없이 릭의 앞으로 날아간 그녀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작별을 고했다.
“그럼 교수님, 나중에 또 찾아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니, 잠깐만요.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힐끔 턱을 올려 나와 릴리를 번갈아 보던 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 둘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은 눈치였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엔테라로 떠날 위기에 처한 나는 어버버거리며 릴리를 따라 일어섰다.
“마음은 알지만, 릴리 영애.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아요. 말도 없이 찾아가는 건 예의도 아닐뿐더러, 만나서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생각해 놓지도 않았고…….”
“때로는 혼자 떠안는 고민이 감정의 골을 더 깊게 만들기도 해요.”
다가온 릴리가 내 옆자리에 조용히 섰다. 나를 향한 시선은 그녀답지 않게 차분했다. 마치 카론이 내게 말할 때처럼.
“오해라면 풀릴 테고, 오해가 아니었다면 끝이 나겠죠. 전 영애가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자, 생각할 시간은 마차에서도 충분해요. 제가 도와 드릴 테니 더 늦기 전에 가자구요!”
마치 전쟁터로 떠나듯 진지한 표정으로 중무장한 릴리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음에도 뿌리치지 못했다. 다소 부끄러운 소리였지만, 그녀의 말에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릴리 아마스라의 행동력은 정말 놀라웠다.
아카데미에서 엔테라로 향하는 길이 마냥 짧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걱정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 둘은 이미 엔테라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한데 우리를 맞이하는 시종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릴리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 뿐, 응접실로 안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론과 나의 친분을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시종도 충분히 눈에 익은 인물이었기에 나는 카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시종과 나의 분위기가 좋지 않자,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릴리가 걸음을 한 발자국 물렀다. 마침 성안에서 카론의 전속 시녀가 나왔다. 나는 손짓으로 그녀를 부르며 한 번 더 대답을 종용했다.
“내가 방문했다고 카론에게 알릴 수조차 없는 거야?”
망설이던 시녀는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숨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엘리제 로망드 영애께서 찾아오신 터라,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 수 없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엘리제 로망드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카론에게 건방지게 굴던 판시온의 아카데미 동기였다.
“그 여자가 방문한 거랑 내가 못 들어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가씨께서… 웬만하면 그분과 함께 있는 모습을 영애께 보이지 말라 하셔서요.”
“왜?”
시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상황 파악이 되지 못한 릴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부채질만 반복했다.
“왜?”
다시 물어도 시녀는 안절부절못하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말이 나온 건 릴리 쪽에서였다.
“케이트 영애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아닐까요? 부끄럽다거나, 몰래 모의를 꾸미고 있다거나. 한데 시녀의 반응을 보니 후자는 아닌 것 같네요.”
후자가 아니면 남은 건 전자밖에 없었다. 나는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며 카론을 당혹케 했던 엘리제 로망드를 떠올렸다.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던 어투와 화법, 타인을 내려다보는 시선.
내가 분명 경고했는데, 그 계집애가 지치지도 않고 다시 찾아와 카론을 괴롭힌다고?
나는 시녀의 얼굴에 대고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날 카론에게로 안내해!”
시녀의 얼굴은 당황, 복잡함, 안도의 다양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나는 릴리를 이끌고 개선장군과 같은 걸음으로 성안에 들어섰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시녀가 나를 안내한 장소는 홀 옆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이었다.
“제가 공작 부인이 되면, 이 응접실을 작은 공연장으로 쓰고 싶어요.”
얼굴에 얼마나 두꺼운 철판을 깔았으면 첫 문장부터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뭐? 공작 부인이 되면, 이라고?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응접실의 창가를 훑던 엘리제가 팔을 뻗어 레이스 커튼을 집었다. 더러운 물건을 잡듯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 커튼은 조금 낡았네요. 엔테라 공작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아요. 흐음. 디자인도 촌스럽고.”
“그 커튼은 30년 전에 할머니께서 손수 제작하신 물건이에요. 낡았다는 이유로 바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할머니? 그분께서 할머니라 불러도 된다고 허락하셨나요? 카론 영애가 엔테라로 오기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아는데.”
카론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엘리제를 응시했다. 그렇게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상태로 짧지만 긴 시간이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쪽은 특유의 요염한 미소를 띤 엘리제였다.
“하긴,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 있겠어요. 아무리 사생아라 하더라도 지금의 카론 영애는 어엿한 엔테라 가문의 일원이잖아요?”
커튼을 놓은 엘리제가 더러운 먼지를 떨구듯, 천이 닿은 손을 툭툭 털어 냈다.
“앞으로 영애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세요. 엔테라 공작 부인께선 워낙 차가우신 분이라, 영애의 도움 없이는 가문에 녹아들기가 다소 버거울 것 같아서요. 사생아라는 신분으로 엔테라에서 인정받게 된 그 사교 능력 하나는 저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이성은 거기서 뚝 끊겼다. 분명 진실을 알기 위해 방문한 엔테라였는데 정작 내 화를 돋우는 건 예상치 못한 불청객, 엘리제 로망드였다.
헛웃음을 뱉은 릴리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저 재수 없는 여자는 누구예요? 공작 부인? 소공작에게 약혼녀가 있었나요? 아니, 애초에 약혼녀가 있다고 한들 감히 엔테라 영애에게 저리 지껄여도 되는 건가요?”
그 밝은 릴리조차 펄펄 끓는 목소리로 화를 낸다는 건,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미 결론이 나왔다는 소리였다.
“어머,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두 여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 순간만큼은 내 뒤에 릴리가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턱을 바짝 들어 올리고 카론의 옆으로 걸어갔다. 카론은 더없이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디서 천박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예전의 그 쥐새끼가 다시 찾아왔네. 카론? 내가 성안에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두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아, 역시 마음씨가 너무 여려도 문제라니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까스로 진정하고 내뱉은 소리였건만, 엘리제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어디서 온 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네요. 불순한 것들이 함부로 발을 디밀지 못하게 저택을 아주 말끔하게 청소하는 일이요.”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여자였다.
“해야 할 일이라니,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영애가 판시온 소공작의 약혼녀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꼭 미래를 약속한 사이여야만 하나요?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 법이죠.”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나는 급격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카론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 괴상망측한 여자와 수십 번 대화해야 했을 카론의 비애를 생각하니, 가라앉았던 열이 다시 뻗쳤다.
“카론? 내 생각에는 이 미친 여자를 어서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 같아.”
하나 공작 부인에 미친 엘리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신과 다르면 거친 말도 서슴없이 내뱉죠. 그게 본인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인지도 모르고.”
미친 척 머리채를 잡아야 하는 걸까. 결국 그 방법만이 남은 거야?
“소란스럽구나, 카론. 무슨 일이기에…….”
그때,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얼굴이 보이기 직전부터 알 수 있었다.
“케이트 영애?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머리를 부여잡은 엘리제가 소파 위로 쓰러지듯 앉았다.
“아아.”
복잡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판시온이 엘리제에게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엘리제를 걱정스레 응시했다.
“엘리제? 괜찮아?”
“응.”
새하얀 얼굴로 처연한 표정을 짓는 엘리제는 보는 이의 가슴을 다 저리게 만들 정도로 안타까운 동정심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내가 연회에 참석한 횟수도 적고, 복장도 이렇다 보니 에젤로트 영애께서 날 엔테라의 시녀로 아신 모양이야. 잠시 고성이 오가서…….”
판시온을 향하던 힘 빠진 목소리가 이번에는 내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후후. 제가 다리를 조금 절기는 해도 어디 가서 무시당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엘리제가 다리를 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금 처음 알았으며, 애초에 다리를 저는 시녀나 시종은 저택에 고용될 수 없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일을 제대로 할 리 만무했으니까.
“영애께서는 제가 응접실에서 편히 쉬고 있는 모양새가 조금 아니꼬우셨나 봐요. 이해해요. 저처럼 초라한…….”
“자기가 공작 부인이라던데요?”
이제는 엘리제가 무슨 난리를 치든 관심을 끄기로 했다. 카론에게서 저 미친년을 떼어 내느니, 저 미친년에게서 카론을 떼어 내는 게 더 효율적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덕이었다.
“그쵸, 릴리 영애?”
웃음기 싹 빠진 표정으로 릴리를 돌아봤다. 내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따라왔을 뿐인데,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게 된 릴리는 생각보다 초연한 얼굴이었다.
“판시온 소공작과 약혼 서약을 치르신 사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는데요. 소공작께선 너무 바빠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으시다고 하셨어요.”
나의 대답을 들은 릴리의 표정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본인을 미래의 공작 부인이라고 표현하신 건가요? 그러니까, 로… 로…….”
“로망드.”
더듬는 릴리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로망드 영애?”
과장 어린 목소리였지만, 내숭 100단의 엘리제는 아주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뿐, 평온한 어투로 받아쳤다.
“저는 단순히 엔테라를 방문한 김에 공작 부인을 뵙고 싶다 말씀드린 건데, 아무래도 무언가 착오가…….”
말은 분명 엘리제가 하고 있는데, 판시온의 눈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내가 무엇을 위해 판시온 앞에서 이리 추한 모습으로 떠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카론이 감수해야 했던 처우를 떠올리곤 다시 엘리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거 아세요, 소공작? 카론과 로망드 영애의 대화에는 사생아라는 단어만 다섯 번은 나와요. 로망드 영애는 카론이 퍽 부러운가 봐요. 사생아 주제에 사교계에서는 기세등등해서 그런가?”
일일이 세어 봤으나 사생아가 다섯 번까지 나오지는 않았었다. 다만 고자질의 기본은 과장해서 전달하는 것이었으므로 두 배로 뻥튀기하여 말한 것뿐이었다.
동시에 판시온의 얼굴로 차가운 그늘이 졌다. 오랜 친우라던 엘리제가 아니라, 내 말을 믿어 주는 걸까? 분위기가 급격히 식어 버린 것을 알아차렸는지, 엘리제가 다시 한번 처연한 표정을 얼굴 위로 깔았다.
“정말 무섭네요, 에젤로트 영애. 제가 그렇게 마음에 차지 않으세요? 어떻게 사람 한 명을 몰아서…….”
“무언가를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나는 로망드 영애가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는 쥐똥만큼도 관심 없어요. 내가 굳이 당신을 알아야 하나요? 그리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데, 내 귀한 시간까지 허비해 가며 괴롭힐 필요가 어디에 있죠? 주제를 파악하세요, 미래의 엔테라 공작 부인.”
이제야 엘리제가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파랗게 달아오를 지경이 됐다. 주제 파악하라는 말이 그렇게나 약 올리는 소리였을까. 나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인걸.
카론의 성격과 엘리제의 태도만 봐도, 판시온을 포함한 셋의 관계가 어떨지 눈에 훤했다. 엘리제의 무례한 발언에도 카론은 판시온을 생각하며 계속 입을 닫았을 테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엘리제가 계속해서 카론을 괴롭혀 왔겠지. 어디서 기인한 심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아, 그 소문의 정체는 궁금하네요. 소공작에게 숨겨 둔 애인이 있다던데, 혹시 저 여자인가요? 그렇다면 미래의 공작 부인이라는 별칭이 이해되네요.”
무례한 물음이었으나 판시온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누구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들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숨겨 둔 애인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우리 카론을 괴롭히는 거라고요? 그것도 사생아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입에 담으면서!”
“제, 제가 언제 사생아라고……!”
질기도록 뻔뻔함을 유지하던 엘리제의 표정에 기다란 금이 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엘리제가 소리 내어 웃든, 질질 눈물을 흘리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경박한 엘리제에게 화를 내리붓는 게 아니라, 카론의 진심을 듣는 것이었으니까.
“저는 원래 저 못된 계집애랑 얼굴을 마주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카론한테 날 고립시키려 했던 게 사실이냐고 따지러 온 거란 말이에요!”
“어머, 생각해 보니 그랬죠? 너무 재밌는 일이 일어나서 깜빡 잊고 있었어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뒤에 선 릴리가 밝게 웃으며 박수쳤다. 엘리제는 더 이상 내 안중에 없었으므로, 이왕 운을 뗀 김에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어떻게, 어떤 말을 뱉을지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 봤자 정작 혀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움직였지만.
판시온에게서 고개를 돌려 카론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카론, 데보라 부인에게 들었어. 그동안 내가 다른 여식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방해해 왔다며? 그간 겁이 나서 묻지 못하고 있었어. 대답해 줘, 데보라 부인의 말이 사실이니?”
응접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이의 표정이 어떨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 시야 안에는 오직 흔들리는 눈동자의 카론만이 오롯이 존재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 심장 소리가 점차 빨라져 갔다. 침이 마르고, 긴장감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요새처럼 꽉 닫혀 있던 카론의 입이 열렸다.
“맞아요.”
“……맞다고?”
세피아 부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정말 날 괴롭혔던 게 맞단 말이야?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한다는 표현이 바로 이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뭍으로 올라와 펄쩍펄쩍 뛰고 있는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막상 긍정의 답을 들으니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심 부정해 주길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친우로 여겨 왔던 긴 시간을 의미 없게 만들지 않기를 바란 모양이다.
정말, 나는…….
“진심이야? 농담이지, 카론? 그치? 날 싫어하는 게 아니지?”
“케, 케이트.”
시야가 흐릿해짐과 동시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고 숨을 끄윽 삼키며 뻗어진 카론의 팔을 붙잡았다.
“데보라 부인의 말은 사실이에요. 하,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케이트를 업신여긴 것은 아니에요. 저는 그냥…….”
백지처럼 창백해진 카론의 낯이 유령처럼 느껴졌다. 내 손을 맞잡은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냥,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만든다는 게 너무 싫어서… 지, 질투가 나서 그런 거예요. 울지 마세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아무리 싫어도 그러면 안 됐던 건데…….”
울지는 않았으나, 우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케이트. 그리고 울지 마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카론의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하다면서 왜 우는 거야? 울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인데!
하지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우습게도 안도감이었다. 카론의 말이 변명일 수도 있었으나, 아니라고 부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건 정말 말로 형용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카론의 말이 진심이라 신뢰하고 있는 걸까?
“이럴 때는 화해의 증표로 서로 마주 안아야 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싸웠다고 말하기도 우습지만!”
뭐? 정말이야?
나는 릴리의 말에 내 신장보다 한 뼘은 더 큰 카론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숨을 헉, 하고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쩔 줄 몰라 하던 카론 역시 얼마 안 가 내 등을 마주 안았다.
“저기, 정말 미안해요. 잘못된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괜찮으니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사실 지금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거든.”
“네?”
내 말이 우스웠는지, 카론이 한 박자 늦게 어깨를 흔들고 웃었다. 넌 이게 재밌어? 하긴, 카론에게는 재밌을 만도 했다. 질투 때문에 내가 친구 사귀는 일도 방해한 애인데, 이런 일로 부끄러워할 리 있나!
짝짝짝.
“와아, 뭔가 잘 해결된 것 같네요! 마치 한 편의 가극을 본 듯한 기분이었어요. 역시 우정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가 봐요!”
“그렇군요.”
릴리의 호들갑에 판시온이 흐트러짐 없이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라, 로망드 영애가 안 보이네요. 어디로 가셨나요?”
“방금 전에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돌아갔습니다. 엘리제는 그곳에서 물리 치료를 받고 있거든요.”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화로 인한 열이 아니었다. 무려 수치와 쪽팔림으로 인한 열이었다.
나는 황급히 카론을 밀어내고 판시온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어느새 엘리제가 앉아 있던 소파 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심지어 한 손에는 물이 담긴 잔을 든 채로!
“죄,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카론과의 일은 둘이서 조용히 해결했어야 했는데…….”
경을 치기는커녕, 판시온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걸쳐졌다.
“아닙니다. 오히려 죄송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영애가 아닌 저일 텐데요.”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시를 읊듯 말했다. 지금까지 시끌시끌했던 분위기가 허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분위기의 전환이었다.
“소공작이요?”
“예.”
판시온과 엘리제는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닌 걸까? 마차를 타고 엔테라를 떠났다지만, 이렇듯 아무런 언급도 없다니.
고심에 빠진 듯 판시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조용해지자 릴리도, 카론도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시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트 영애,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자리에서 일어선 판시온이 카론의 옆에 나란히 섰다. 선명하면서도 옅은 제비꽃색의 눈동자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다. 이렇게 보니 타인에 비해서 정적인 표정도, 차분한 성격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친남매라 여겨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 이거였구나. 이게 바로 내가 판시온 소공작을 편히 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는 카론과 닮은 구석이 매우 많았다. 웃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도, 형상도 비슷했다. 아무래도 카론은 엔테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자신의 이복 오라비인 판시온을 따라 하게 된 것 같았다.
“카론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저에게 중요한 건 누가 공작 부인이 되느냐가 아닌, 엔테라 공작가라서 말입니다.”
설마 내게서 사람을 떼어 놓으려 했던 행동도, 무의식중에 그를 닮아 간 거려나.
나는 판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간에 대화를 나눈다는데, 내가 감히 끼어들 구석은 없을 테다. 그래도 분명한 소득이 있는 방문이었다. 적어도 카론과의 오해는 풀었으니까.
“저, 케이트.”
릴리와 다시 성을 나서 마차에 오를 때였다. 우물쭈물 어색한 얼굴로 다가온 카론이 내 소매를 붙들었다.
“엔테라까지 찾아와 주셨는데, 오늘 저는 부끄러운 모습만 보인 것 같아요.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그만 사과해, 카론. 네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얼굴이었기에 팔을 뻗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카론은 이윽고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여기요.”
“이게 뭐야?”
수첩을 펼쳐 가볍게 훑으니 처음 보는, 혹은 낯익은 이름들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일전에 카론과 주고받았던 서신에서 본 이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약혼식을 치르지 않은 여식들의 목록이에요. 직접 눈으로 보고 소문으로 들은 특징도 짧게나마 정리해 두었어요. 케이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
“와아, 물론이야! 엄청, 엄청 도움 돼!”
역시 카론 네가 최고야!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카론을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던 카론은 이윽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직 멋대로 속단하긴 일렀지만, 이것만 있으면 혹시 모른다. 자기 마음도 모르는 멍청한 네자르와 파혼할 가능성이 올라가는 거야. 이번에는 정말로, 진심으로, 말뿐만이 아니라!
“릴리 아마스라 양과 많이 가까워지신 모양이에요.”
뒤이어 나온 카론의 목소리는 어쩐지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는 느낌이었다.
“응.”
“성격이 잘 맞나요?”
“……아마도?”
때마침 마차에 먼저 올라 있던 릴리가 바깥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얼굴 위에는 특유의 환한 웃음이 가득한 채였다.
“어머? 저한테는 질투하시면 안 돼요. 제가 아니었으면 엔테라 영애는 케이트 영애와 화해할 수 없었을 거라구요!”
“흐음.”
팔짱을 낀 채 릴리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카론이 가볍게 웃음을 걸쳤다. 사이좋게 마주 웃던 둘은 곧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공기가 조금 서늘한 것 같기도 하고.
“이틀 후 앤드류 황자 저하께서 개최하신 사냥 대회가 열리잖아요? 황성의 몇 없는 친선 대회인 만큼, 많은 여식이 참가할 거예요. 그날이 가장 중요하니 잘 살피고 노리세요!”
카론은 내가 마차에 오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녀 덕에 잠잠했던 투지가 솟구친 나는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카론. 꼭 성공해 낼게! 나는 더 이상 옛날의 허술했던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아니거든.”
밝게 웃는 카론의 등 뒤로 주홍빛 노을이 져 갔다. 흐릿한 하늘 아래로 얇은 실처럼 퍼진 구름이 그림처럼 황홀했다.
옆에 앉은 릴리가 괴상망측한 이론 공식으로 가득한 서적을 펼쳤고, 곧이어 마차가 출발했다. 다그닥거리는 말굽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릴리를 제도에 내려 준 후, 마차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달려서 에젤로트에 도착했다. 나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어두컴컴해야 할 2층의 복도 끝으로 나지막이 빛이 내려 무언가 했더니, 서재에 불이 켜진 상태였다.
아버지의 서재는 3층에 마련되어 있으니 저 서재를 사용할 사람은 가문의 일원 중 겨우 릭 정도가 전부였다. 릭은 아카데미에 있는데, 누구지?
나는 열린 서재의 문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누군가 했더니 록허드가 문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다름 아닌 록허드 에젤로트가.
“록허드? 너, 설마 그 나이에 몽유병이 생긴 거야?”
맙소사. 종이와는 서먹한 사이다 못해 남남인 록허드가 서류를 넘긴다고? 이런 충격적인 광경이 다 있을 수가! 나는 한쪽 눈썹을 까딱하고 다시 서류에 코를 박는 인물에게로 다가갔다.
“저, 전쟁터에서 얼마나 고생했으면 몽유병이 다 생겨? 게다가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짓을 다 하다니…….”
“케이트, 너는 이렇게 늦은 시간 귀성하고선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록허드의 말은 아주 또렷하고 맑았다. 몽유병이 아니었구나? 그건 그거대로 충격이지만.
“그럼 무슨 말을 해? 내가 미성년도 아니고,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입을 삐죽 내밀고 건너편 의자에 앉아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얼마 안 가 록허드가 읽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금박을 입힌 표제가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45회 황성근위대 제2 기사단 신입 평기사 입단 절차?”
“곧 근위대 입단 시험이야. 가서 쪽팔림을 면하려면 한 번 정도는 읽어 줘야 하거든.”
“네 방에서 읽지 않고?”
피곤한 듯, 록허드가 눈가를 매만졌다.
“영 집중이 안 돼서. 방에서도 읽고, 식탁에서도 읽고, 성벽에서도 읽고.”
성벽은 또 뭐람. 하긴, 대충 훑어도 절차치고는 서류가 만만찮은 양이기는 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그렇게 바빴던 거야?”
록허드가 팔짱을 낀 채 물었고,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곧장 대답했다.
“엔테라에 갔어. 카론이랑 싸워서… 아니, 음. 싸움 비슷한 걸 해서 화해하러 갔거든.”
과정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도. 마침 엘리제의 얄미운 얼굴이 떠오른 김에 그에게 물었다.
“록허드, 너 엘리제 로망드라는 여자 알아?”
같은 기사학부 출신이니 안면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름을 들은 록허드가 이마를 구겼다.
“……그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엔테라에서 몇 번 만났어. 그런데 가만 보니 카론에게 하는 짓이 영 못마땅해서.”
어째서인지 록허드는 얼굴을 굳힌 채 긴 시간 입을 다물었다. 저 반응은 무슨 의미이려나?
이어서 다시 서류를 펼친 그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소문이 무성하기는 했지. 그리 신경 쓸 건 못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툰다거나 척을 질 일은 만들지 마. 엮이면 피곤한 인물이니까.”
그 척, 이미 졌는데?
말하면 또 싸움이나 하고 다닌다고 잔소리할라, 대강 고개를 주억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어. 나는 서재의 문을 조용히 닫고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