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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폭죽 터지는 소리는 여전했음에도 그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게 들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가족이라면 평소에 잘 살펴보면서, 가장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물건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애정을 과시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당신도 이런 걸 좋아하나요?”
순수한 궁금증이었고 그에 판시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인 관계라면 그렇겠지요.”
“소공작과 나는 연인 관계가 아니니 불쾌했겠네요.”
답하기 위해 살짝 열린 그의 입술이 느리게 닫힌다. 판시온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미온의 표정이 되어 날 뚫어져라 응시했다. 만약 내가 그를 판시온 엔테라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무너져 가는 자신의 마지막 요새를 바라보는 것처럼 얼굴 곳곳의 근육이 크게 허물어져 있었다.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과 표정에서 나온 말은 아주 많이 달라 보였다. 어쩌면 날 위해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괜한 걸 물어서 기분을 상하게 한 걸까. 웃음을 지었지만, 복잡한 심경에 썩 괜찮은 미소가 떠오르지는 않았을 테다.
“소공작은 내가 아는 남자 중에서 가장 다정해요. 당신과 대화해 본 여자들은 당신에게 빠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믿기지 않는군요.”
“정말이에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니 믿으셔도 돼요.”
손도 잡아 보게 해 주고, 흡연도 경험하게 해 주고, 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달갑지 않은 행동까지 손수 보여 주고. 아무리 생각해도 소공작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친절함이었다.
“제 눈에는 벌써 예외가 한 명 보입니다만.”
어쩌면 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친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판시온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새빨간 줄이 돌연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다행히도 이번 침묵은 길지 않았다. 곧 자리에서 일어선 판시온이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제가 꼭 모셔다 드려야 할 것 같으니,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판시온이 친절을 베푼 덕에 나는 별문제 없이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그 이후는 없었다. 나는 목욕을 마치자마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베개에 코를 묻고 잠들었다.
***
“소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바람이 불면 멀리 쓸려 갈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였으나, 카론의 귀에는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녀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자 전속 시녀 마리가 꺼 두었던 두 번째 침실 등에 불을 붙였다. 이윽고 어두운 실내에서 소리 없이 몸을 일으킨 카론이 마리를 지나쳐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몇 시니?”
“자정이 다 되어 갑니다.”
“오라버니께서 오늘은 많이 늦으신 것 같네.”
부랴부랴 외투를 챙긴 마리가 나이트가운 차림을 한 카론의 어깨를 살며시 덮었다.
판시온 소공작이 엔테라로 귀성한 후, 성인이 된 카론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가까이 붙어 있던 둘의 침실이 2층과 3층으로 나뉘게 되었다. 옮긴 쪽은 카론이 아닌 판시온이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터너 엔테라의 침실이었던 방은 이제 판시온의 차지가 되었으며, 아무도 그 변화에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판시온의 침실은 주인이 방금 전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활짝 열려 있었다. 가볍게 손짓을 한 카론은 마리를 내보내고 방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자리 잡았다.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판시온이 힐긋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확인했다.
“자정이 넘었는데 여태 안 자고 있었구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늦으셨네요.”
판시온이 작게 한숨을 내쉴 동안 다가온 시종이 그의 넥타이를 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할 말이 무엇이기에 아직도 안 잔 거냐?”
“어제 오후에 마차 전복으로 쟝 악토르 소백작이 별세하셨다는 전보가 도착했어요.”
쟝 악토르. 엔테라, 아마스라, 에젤로트 가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악토르 가문은 카발 제국에서 매우 유서 깊은 핏줄 중 하나이다. 특히 악토르의 후계자인 쟝 악토르는 인망이 좋아 친우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제국 곳곳에 뻗쳐 있는 인물이었다. 백작의 건강이 성치 않아 작위 후계를 준비하고 있다 들었는데, 하필이면 후계자가 사고사를 당하다니.
안타까운 사연에 판시온이 짧게 혀를 찼다.
“악토르 부인이 전보에 오라버니의 이름을 은근슬쩍 언급하더라고요. 제가 오라버니와 함께 악토르로 찾아오길 바라는 눈치였어요.”
판시온은 카론이 뱉은 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겼다. 물론 내포된 뜻을 파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악토르 백작에게 여식이 있나?”
“캐롤라인 악토르가 올해로 스물하나라 해요.”
악토르를 비롯한 제국 동쪽 지방의 가문은 대개 아들만이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아들이 없는 집안이 후계를 잇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을 입양하거나, 직계 여식이 있는 경우에는 혼인을 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직계 여식이 타 가문의 남성과 혼인할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해당 가문의 영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재산이 남성 측 가문에 귀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은 후자가 아닌 전자를 선택했고,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가문의 명예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꼴은 그 어떤 집안의 일원이라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악토르 부인은 캐롤라인이 공작 부인으로 불리길 원하나 봐요.”
판시온이 눈짓으로 시종을 침실 밖으로 내보냈다.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손을 털며 카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너는 내가 혼인하길 원하느냐?”
“그야 당연하죠. 오라버니께서 후사를 보셔야 엔테라 가문이 존속될 테니까요.”
“내가 동제국의 불합리한 문화와는 절대 상종하지 않는단 걸 알잖니. 내가 혼인을 하지 않는다면 엔테라의 차기 후계자는 너다, 카론.”
그 말에 카론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판시온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다가 마지막 남은 담배 하나를 건넸다. 카론은 거절하지 않고 숨을 깊게 빨아들여 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주제를 잘 알아요. 지금까지도 충분히 오라버니에게 은혜를 받아 왔어요. 이 이상의 것은 필요도,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욕심을 갖기 시작하면 조금 다르게 보일 텐데.”
“그런 말씀 마시래도요. 하여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혼인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번 기회에 악토르를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예요.”
판시온은 카론의 말에 마땅한 대답 없이 담배만 내리 피웠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그의 옆 선을 응시하던 카론 역시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은 그녀가 할 수 있는 발언 이상의 것이었다.
한참을 피곤하게 찌든 낯으로 담배만 피우던 판시온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문질렀다. 고요했던 침실에 다시 운이 띄워진 것도 그때였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엘리제가 방문했다고 들었다.”
엘리제 로망드. 반갑지 않은 이름에 카론이 일그러질 뻔한 인상을 힘겹게 바로잡았다.
“네, 맞아요.”
“문제는 없고?”
많았다. 일단 그녀를 상대하는 내내 인내심이 바닥날 뻔했다. 하지만 카론은 안 그래도 바쁜 판시온을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주억였다.
“……네,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다행이군.”
몸을 일으킨 판시온이 테이블로 다가가 준비된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후작과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대화의 주제가 그녀의 약혼자로 바뀌었다. 카론은 필프론츠가 거론되자마자 처음으로 미간을 구겼다.
“별다를 것 없어요. 그냥, 종종 저를 초대하기는 하지만…….”
“거절한다는 소리로구나.”
“그렇지요.”
카론은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한 얼굴로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물을 크게 한 번 삼킨 판시온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그 작자와 있을 때의 너는 평소와 조금 다른 사람 같아. 더 감정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느낌이지.”
“착각이세요.”
망설임 없이 곧장 나온 대답이었고, 그에 판시온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무섭도록 단호하구나.”
“하지만 그 말 외에 제가 해 드릴 말이 전혀 없는걸요.”
“나는 그가 네 다른 면모를 끌어 올리기에 서로 간 애절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맞는 말씀이지만 제 경우는 틀리네요. 그 사람은 절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거든요.”
능글맞고 속이 까만 남자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계에서 쉬이 볼 수 있다. 그러나 필프론츠 오드리네는 뱀 같은 인물 중에서도 유독 특출하게 능글맞은 남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가 상당히 피곤한 부류였다. 그런 주제에 연락은 꼬박꼬박 잊지 않고 말이지.
탁. 판시온이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얹었다. 두통이 인 듯 반대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든다면…….”
카론이 조용히 입술을 닫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직전과 달리 현무암에 긁힌 거울 파편처럼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다. 손등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표정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그것이 마냥 좋은 의미는 아니란 소리구나.”
그리 말한 판시온은 매우 고되고 피곤해 보였다. 평소와 정반대인 분위기에 카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바깥에서 무슨 일 있으셨나요?”
예정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귀성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제도에서 그녀가 모르는 일이 있었던 듯싶었다.
그러나 정작 판시온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웃음 짓다가 짧은 대화를 몇 번 더 나눈 후에 카론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카론은 잠들기 직전까지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다.
***
제도에서의 두 번째 해가 떴다. 한창 봄인 날씨에 알맞게 암막 커튼 너머로 실낱같이 떨어지는 햇빛이 밝고 환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위치가 내 눈꺼풀 위일 건 뭐람.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오전에 깨어나야 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차와 샐러드를 흡입하듯 삼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축제가 끝난 직후라 그런지 어제저녁과는 상반될 정도로 거리가 조용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마차에 올라 이동하기를 택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두 시간 내리 제도를 뛰어다녔음에도 네자르에게 줄 만한 선물은 찾지 못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제도의 이름난 보석상, 만년필 전문 취급점, 시계상을 찾아 헤맸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제도에서 가장 값비싸다는 중후한 멋의 브로치도 네자르가 걸친다고 생각하니 길거리의 중고품처럼 낡아 보였다. 시계도, 만년필도, 하다못해 꽃다발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네자르를 직접 만나서 묻든, 몰래 관찰하든 적절한 해답을 찾아오는 거야.
나는 더 이상 밖을 헤매지 않고 네자르를 만나기 위해 황성으로 들어갔다.
“어라, 카트리나 영애 아니십니까? 영애를 황성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늘은 어째 운이 좋군요.”
물론 그 과정에 필프론츠 오드리네를 만날 예정은 없었다.
“황성에는 무슨 볼일이시죠? ……아, 제가 너무 뻔한 걸 여쭈었군요. 네자르 전하를 만나 뵈러 오셨으려나.”
언제나 느끼는데, 필프론츠 후작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남자다. 그 쾌활한 성정 덕분에 단둘이 만나더라도 어색할 틈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사교성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맞아요. 후작께선 그간 잘 지내셨나요? 황성에는 무슨 일로……?”
“저야 황후 폐하를 뵈러 왔지요. 최근 심리적으로 많이 지치신 터라 위로가 필요하신 모양입니다.”
필프론츠 후작은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소릴 저 혼자 술술 내뱉었다. 지쳐서 위로가 필요하다니? 누가 들으면 후작이 황후의 정부 노릇을 하는 것으로 착각할 만한 소리였다.
그러나 오드리네 후작가는 황후의 친가였고, 필프론츠 후작은 황후와 열 살이 넘는 터울의 남매지간이다. 감히 내가 알 수 없는 어른의 사정이 둘 사이에 오갔을 터였다.
“황후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어서 쾌차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안부는 황후님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 전하시는 편이 더 좋을 듯싶군요.”
“네?”
내 반문에 허리를 숙인 필프론츠 후작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셨나요? 최근 황제 폐하께서 몸이 매우 편찮으신 상태입니다. 늦더라도 올해 가을 내로…….”
필프론츠 후작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등을 폈다. 코앞에 마주하는 눈매의 휘어짐과 입꼬리의 높이가 상당히 오묘했다.
“무엄한 말은 여기까지만 뱉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황성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으니, 아무쪼록 카트리나 영애도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곧 내게서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황제 폐하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지 않다니, 그런 중대한 사항을 내게 쉬이 알려도 되는 걸까. 역시 필프론츠 후작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는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네자르의 성은 필프론츠 후작을 만났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내 얼굴을 알아본 성의 시녀가 반가운 표정으로 응접실까지 안내했다.
“차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로즈메리, 히비스커스, 라벤더, 카모마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단게 마시고 싶어. 그냥 물에 꿀만 타 줄래?”
“예, 금방 준비해 오겠습니다.”
입이 마를 때는 쓰고 신 음료보다 달콤한 음료가 최고다. 나는 근 2주 만의 재회에 머리와 복장을 정리하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알고 지낸 세월이 몇인데, 아직도 네자르와 만날 때는 가슴이 떨리고 전투 의지가 솟구쳤다. 그가 몸소 에젤로트를 방문할 때는 그나마 덜했으나 지금처럼 내가 황성을 방문할 때는 편한 공간이 아닌 탓인지 떨림이 심했다.
내가 그를 직접 찾아온 게 이번으로 몇 번째지? 네 번째였나?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네자르는 내가 응접실에 자리 잡은 지 3분이 채 흐르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벌컥.
“케이트가 방문했다고? 그 애 성격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리가…….”
지금처럼.
마주친 시선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내 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로 끝이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는데, 그와 나 사이에는 철로 된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무겁고 밀도 높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가슴이 쿵쿵 뛰는데도 이렇게나 할 말이 없을 수가 있다니! 나는 떼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아주 힘겹게 열었다.
“자, 잘 지냈어?”
그제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네자르가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다고 내 인사에 답을 했다거나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 건 아니었다. 그는 뭉개진 표정 그대로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뒤집힌 찻잔을 집어 차를 따랐다. 뭐야? 차는 또 언제 도착한 거지?
“앉아, 케이트. 표정은 또 왜 그래? 누가 보면 호랑이 굴에 잡아먹히러 가는 줄 알겠네.”
그랬나. 네자르의 말에 더듬더듬 뺨을 매만지며 무릎을 접었다.
“내 성까지는 무슨 일이냐? 평소에는 에젤로트 밖으로 나가더라도 제도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던 네가.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선 내 어의를 빌려 쓰러 온 줄 알았더니만,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차분한 어조와 함께 옅은 금색의 물이 졸졸 흘렀다.
“또 무슨 이상한 소릴 하러 온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올 때마다 사고만 치는 애물단지인 줄 알겠네!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네자르가 나가 있는 동안 나도 나름 살벌했던 평판을 누그러뜨렸다구.”
저리 골리는 말을 들으면 얌전히 대꾸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그가 내 방향으로 내민 찻잔을 빼앗듯 집었다.
“찾아온 이유는 별거 없어. 그냥 제도까지 외출을 나온 김에 얼굴 한번 보고 갈까 한 거지.”
“외출?”
“으응. 어, 어젯밤이 승전 기념 축제 피날레였잖아. 폭죽도 구경할 겸…….”
거짓말을 지어내려니 입 안에 가시가 돋치는 기분이었다. 감 하나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네자르가 눈을 얇게 좁혔다.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등 뒤로 주르륵 흐른다.
“사실 이렇게 금방 내려올 줄 몰랐어. 몇 시간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바쁜 게 아니었나 봐?”
“바쁘지, 엄청. 최근 며칠간 무슨 정신으로 돌아다녔는지 기억도 안 나네.”
차를 탄 건 본인이면서 정작 마시는 건 나뿐이었다. 네자르는 입 한번 대지 않아 파문 없이 말끔한 차를 내려다보며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네 얼굴을 보니 그간 쌓여 있던 수면욕과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군. 이제 좀 쉴 때가 된 것 같으니 전부 내던져 버리고 여유를 즐겨야겠어. 무슨 소리인지 알겠지, 론?”
따라왔는지도 몰랐던 네자르의 보좌관, 론이 표정 변화 없이 입꼬리만 사용해 허허 웃었다.
“훌륭한 군주는 훌륭한 신하를 두어 일을 하지 않는다지만, 저는 아직 제가 훌륭한 신하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확인해 보는 것으로 하지. 미달이어도 뭐, 별거 있겠어?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밭 갈아.”
“뭘 모르시는군요. 저 같은 인재는 세상이 귀향할 틈도 주지 않습니다.”
“그럼 닥치고 내 아래에서 일이나 하든지. 애처럼 엄살 그만 피우고.”
네자르의 거친 언사에도 힘없이 웃는 소리만 내던 론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것 좀 보십시오, 카트리나 영애. 네자르 전하가 영애 앞에선 그렇게 자상해도 아랫사람 대할 때는 아주 시정잡배가 따로 없습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주먹질도 하시겠어요.”
네자르가 나한테 다정하다고? 대체 어디가? 공감이 가질 않으니 예의상 맞장구도 쳐 주지 못하겠다. 누울 기세로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고 있던 네자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록허드는 이미 나한테 한 대 맞았어. 한 번 하면 두 번은 쉽다고,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자랑까지 하시네요. 귀한 남의 집 아들 괴롭히는 게 잘한 일입니까?”
“그 새끼가 허튼소릴 해서 프러포즈도…….”
“말한 김에 한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그놈의 기사단 훈련장 좀 그만 찾아가십시오! 스트레스 해소한다고 허구한 날 숨어 들어가서 칼질을 하니 기사들 사지에 멍이 늘었답니다. 실전 연습한다고 대련 도중에 주먹질까지 하는 건 좋은데, 애초에 3기사단은 말만 상비군이지 직책 없는 귀족 도련님들이 겉치레로 들락날락하는 곳입니다. 나중에 한 소리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분명 네자르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건 이쪽인데, 심층 대화는 론과 네자르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코앞에서 본전도 못 찾고 잔소리를 듣는 네자르의 모습은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만히 내 얼굴만 뜯어보던 그는 곧이어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미치겠군……. 그래, 애초에 입을 연 내 잘못이다. 괴롭히지 말고 이제 나가 봐. 일을 넘긴단 소리는 허투루 한 말이 아니니 기억해 둬라.”
“예.”
론이 나가고서 한기가 흘렀던 응접실이 다시 잠잠해졌다. 지금이 기회다. 이럴 때 마치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무엇이 필요하냐고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거야!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핀 나는 손에서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자르.”
내 부름에 묵묵히 테이블만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바쁜 거 같은데, 혹시 뭐 피, 필요하다거나 부족한 건 없어? 내가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너.”
……내가 잘못 들었나. 체면 차릴 겨를도 없이 귀를 후비고 다시 쳐다봤다. 네자르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이목구비가 여전히 눈앞에 오롯이 존재했다.
“필요한 건 없어도 필요하지 않은 건 넘치지. 수면욕, 피로, 소화 불량, 록허드 에젤로트의 깐족거림, 론 미네르바의 잔소리, 어머니의 참견, 브레이트 탈리야의 근무 태만, 반 공작의 과도한 관심…….”
더 읊으려는 듯 작게 벌어지던 입술이 서서히 오므라들었다. 눈썹을 찡그린 채 소파에 팔을 걸친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듯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굴에 진득한 그림자가 껴 동공이 까맣게 침체되어 보였다.
“그렇군. 날 찾아온 이유가 저번에 말한 선물 때문이냐?”
헉. 이 정도면 정말 사람 속 읽는 거 아니야? 깜짝 놀라 풀어진 얼굴 근육을 찻잔을 들어서 부랴부랴 숨겼다.
“무, 무, 무슨 소리야? 선물은 당사자 모르게 준비하는 거잖아. 이건 그냥 묻는 거야. 선물이 아니라 도와주려는 거지.”
“그것 때문에 제도를 방문했던 거구나. 나쁘지 않네. 내 성까지 찾아온 걸 보면 소득이 영 실망스러웠다는 건가?”
“……응.”
이건 내가 멍청해서가 아니다. 네자르의 앞이라면 천 년 묵은 구렁이도 내면의 진심을 술술 불게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이나 네자르의 눈치는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왜 내 마음은 눈치 못 채는 걸까.
“케이트, 네가 보기에는 나한테 부족한 게 있을 것 같아?”
“아니.”
칼 같은 부정에 네자르가 픽 웃었다.
“아니, 가 아니지. 흠, 그래도 당장 받을 수 있는 구석이 있는지는 생각나질 않네.”
“그럼 없던 일로 하자.”
“기다려. 시간도 남아돌면서 뭐가 그리 급해?”
혀를 찬 네자르가 이제야 차에 손을 댔다. 반쯤 식어 표면이 잔잔하다 못해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코를 가까이 해 향을 음미하던 그는 홍차가 아닌 꿀물임을 알아채고 살짝 인상을 구겼다.
“막상 생각해 내려니 전혀 떠오르지 않는군. 나중에 내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것으로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치사하게 또 이상한 거 시키고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내가 이번에도 속아 넘어갈 줄 알아? 절대 안 돼.”
이건 네자르의 생일마다 연례행사처럼 나온 소리였다. 나는 급하지 않으니 나중으로 미루겠다는 말에 속아서 늘 후회에 몸서리치곤 했다. 커다란 곰 인형 옷을 입고 그의 성을 돌아다닌다거나, 소양 서적을 독파하게 한다거나, 미루던 춤 연습을 시킨다든가.
돌이켜 보면 반은 날 위한 선택이었지만 나머지 반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아니, 애초에 본인 소원으로 소양 서적 독파를 왜 시키는 거야?
나의 단호한 거절에 네자르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뺐다. 그리고 피로함에 처져 있던 입술을 끌어 올려 실실 웃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이상한 거 안 시킬 테니까 그냥 허락해 줘.”
“안 믿는데도?”
“내 명예와 지위와, 음……. 그 외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지. 카트리나 에젤로트를 괴롭힌다거나, 놀리려는 의도로 소원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정말?”
그가 짓는 믿음직스러운 얼굴에 결국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 번 더 씨익 웃고 꿀물을 전부 삼켜 낸 네자르는 진득한 단맛이 고역이었는지 인상을 쓰며 일어섰다.
“좋아. 그럼 이제 나가 볼까? 오늘은 일정이 몇 가지 잡혀 있으니 하루 묵고 돌아가도록 해. 아, 백작 부인께 서신 보내는 것 잊지 말고.”
분명 내 일차적인 목표는 그 일정이 무엇이기에 나까지 동행해야 하느냐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나의 몸은 이미 질주하는 마차 안에 고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귀족 여식 차림도 아닌 네자르의 보좌관이 되어서.
“저기, 네자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섣부르게 결정한 것 같아. 보좌관 노릇을 할 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누가 날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감고 있던 눈을 떠 내 어색한 몰골을 훑어본 그가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아는 사람이 릭뿐이라고 말한 건 너야, 케이트.”
“그 릭이 비웃으면?”
“내 옆에 붙어 있는 한 황제 폐하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널 못 비웃어.”
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불안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네자르나 아버지도 아니고, 보좌관을 둔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세히 몰라.”
“론을 떠올려. 론이 해 왔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되니까.”
“시시콜콜 걸고넘어지라고?”
“음, 그래.”
순식간에 피곤한 표정이 된 네자르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제도에서 황립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인 만큼 도로가 잘 포장되어 마차의 덜컹거림이 적었다.
네자르와 나는 앤드류 황자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황립 아카데미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방문하는 건 록허드와 네자르의 졸업을 축하했던 날 이후 처음이었고, 비슷한 나이대의 학생들만 바글바글할 것이라 생각하니 사뭇 가슴이 떨려 왔다.
***
‘아카데미 졸업식에 가자고? 싫어. 네자르랑 가면 이목이 엄청 쏠릴 텐데, 약혼자인 내가 따라가면 분명히 귀찮은 일이 생길걸. 안 그래도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란 말이야. 절대로 휘말리지 않을 거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떠받들어 줄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마.’
‘부담이 갖기 싫다고 안 갖게 돼? 하여간 싫어.’
가벼운 티타임이 끝난 후, 내가 그와의 동행을 극구 거절하자 잠시 고민을 하던 네자르가 차선책을 내놓았었다.
‘그럼 약혼자가 아닌 다른 인물로서 따라가면 되겠네. 론을 대신해서 네가 내 보좌 노릇 해라.’
하도 어이없는 말이었기에 그때 그 황당한 심경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농담하지 마. 네자르는 내가 그런 똑똑한 직업 종사자를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아?’
‘케이트, 너는 널 너무 과소평가하는 구석이 있어. 충분히 가능하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함께 놀러 나간다고 생각해. 내가 너한테 없는 소리 만들어 낸 적 있어? 아니면 한참 만에 만났는데 여기서 그냥 돌아가려고?’
물론 그러기야 싫지. 아주 잠깐 고민하는 티를 냈을 뿐인데, 네자르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단정한 디자인의 활동복을 내밀었다.
‘종일 네 옆에만 있을 테니까.’
그리 말하는 네자르의 얼굴에는 차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단호함과 듬직함이 있었다.
‘어때? 가겠어?’
나는 결국 늘 그래 왔듯, 항상 그랬듯이, 당연한 절차로 동의를 표했다. 경국지색에 홀린 배불뚝이 왕이 된 기분이었다.
***
이후 짧은 시간 안에 준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제도에서 황립 아카데미까지는 사륜마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단거리. 놀랍게도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카데미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니까, 네자르의 보좌관이 된 채로.
“키올 경이 전하와 동행하고, 인피르노 경이 전방을 감시하며 지킬 겁니다.”
“네.”
둘 모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전에 네자르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참전을 피하려 기사직을 포기하고 모두 귀향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카트…….”
어색한 미소를 흘리는 네자르의 호위 기사, 툴드를 위해 내가 급히 말을 이어 주었다.
“케이틀린.”
“케이틀린 양, 당신과는 제가 동행할 예정이지요.”
“그래도 되나요? 전하를 지켜야 하실 분이 저를?”
“전하는……. 물론 지켜 드려야 할 분이지만, 딱히 호위가 필요하신 분은 아닙니다.”
툴드의 말에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호위 기사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해도 되나요?”
“실제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까요. 키올이 꽉 막히고 보수적인 성격의 남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당신 옆엔 두 명이 지키고 섰을 수도 있습니다. 전하의 고집도 만만치 않으시지만, 키올은 더 만만치 않거든요.”
“그렇게나 고집이 센 분이신가요, 네자르 전하께서는?”
네자르는 권위 있는 황족답게 자기주장이 뚜렷했지만, 그렇다고 황족 특유의 황소고집을 가진 건 아니었다. 내가 끝까지 싫다고 떼를 쓸 때는 못 이기는 척 주장을 물릴 때도 더러 있었으니까. 너털웃음을 뱉은 툴드가 조용한 4층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며 대답했다.
“고집이 세다기보다는… 당신 기준에서 납득하지 못한다거나, 효율적이지 못하다 여기는 행위를 하는 걸 유독 어려워하십니다.”
“같은 말 아닌가요?”
“하하. 최대한 돌려서 표현한 거죠. 높으신 분과 함께할 때는 개인적인 감상과 의사를 자제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그가 멈춘 자리의 문을 천천히 밀었다. 동시에 나를 둘러싼 배경은 한산하고 조용했던 복도에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퍼지는 자그마한 실내로 뒤바뀌었다. 접견실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쏟아져 내린 졸업식의 환호였다.
“앤드류 전하.”
펄럭이는 적색의 벨벳 커튼 앞에 선 소년이 몸을 돌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과 벨벳 커튼을 녹인 듯 무거운 붉은빛이 나의 시선과 얽혀 들었다. 검홍색 눈동자. 네자르와 같은 명암, 그리고 채도를 가진 색임에도 한참 다른 느낌이었다.
동시에 나는 열아홉 시절의 네자르가 가졌던 그 색채와 향기, 분위기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보다 훨씬 날카롭고 야생화에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그만큼이나 둘은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적어도 외양만큼은. 덕분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소년은 명백히 제국 황족의 핏줄이었다.
“방금 네자르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전하께 모셔도 될까요?”
나의 정중한 물음에 소년, 앤드류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주 노골적인 시선으로 내 전신을 훑었다. 기분 상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꽤 절실한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누구지?”
“케이틀린 에이젤입니다.”
“론 미네르바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가 대신하여…….”
“형님은 절대 여성 보좌관을 옆에 두지 않는다. 그런데 본 적도 없는 네가 론 미네르바를 대신한다는 거냐?”
이 재수 없는 놈은 뭐지? 이유 불문한 악의를 받아 내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를 알아본 건 아닐 텐데.
5년 전까지 네자르는 이복 남매와의 교류가 매우 적었다. 그의 계모인 현 황후는 슬하에 황자와 황녀를 각각 한 명씩 두었는데, 내가 네자르의 황성을 방문한 네 번의 기회 중에서 타 황족을 만난 경험은 전무했다.
그래, 저 건방진 황자 놈이 날 알아볼 리 없어. 아니, 애초에 알아봤다고 해도 재수 없게 구는 것부터가 문제잖아?
“앤드류 전하, 케이틀린 양은 네자르 전하께 임시 고용된 보좌관이 맞습니다. 론 씨와 가까운 친척으로 네자르 전하께서 몸소 인정하신 분이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당혹스러움에 곧장 대꾸를 못 하자 뒤에 선 툴드가 중재에 나섰다. 날 경계하는 거였어? 황족들은 태생이 의심이 많고 경계가 심한 걸까.
그의 말에 앤드류가 표정 변화 없이 눈동자를 굴려 툴드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속을 읽기 힘들다. 아니, 그 반대로 쉬이 읽을 수 있는 건가?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은 분명한 적의였다.
지나가는 소리로 앤드류 황자의 나이가 올해 열아홉이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에 걸맞지 않게 매우 날카롭고 예민한 기세였다.
“……가지.”
앤드류는 나와 툴드를 앞장서 접견실을 벗어났다. 나는 그의 높은 행동력에 멍하니 눈을 껌뻑이다 황급히 따라나섰다. 앤드류와 툴드의 걸음이,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앤드류의 걸음이 상당히 빨랐기에 나는 거의 뛰듯이 걸어야만 했다. 성질도 참 급하네. 여러모로 네자르와 상반되는 형제였다.
“오랜만입니다.”
고개를 깊게 숙인 앤드류의 건너편에서 네자르가 가볍게 손짓했다.
“연회에서 봤으면서 오랜만은. 어째 2주 사이에 키가 더 자란 느낌이구나.”
네자르의 친근한 어투에도 앤드류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고 딱딱했다. 뒤통수만 보였지만 풀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만 봐도 충분히 그러할 것 같았다. 네자르 건너편에 자리를 잡은 앤드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설마 형님께서 아카데미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못 올 이유 없지. 너는 내 하나뿐인 남자 형제 아니냐. 전쟁이 끝난 시점에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신경 쓰겠어.”
누가 들으면 부모를 여읜 형제지간으로 알겠네. 앤드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정면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향했다. 나는 위축되지 않기 위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머금었다.
“저 여자는 론의 후임입니까?”
“후임이라고 하기에는 론의 나이가 너무 젊군. 대타일 뿐이야.”
“놀랍군요.”
전혀 놀라지 않은 음성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네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틀린.”
쥐고 있던 찻잔을 옆으로 옮긴 그가 내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나는 한동안 케이틀린이 나의 가명이란 사실을 잊고 넋을 빼다가 급히 답했다.
“……예, 예.”
“형제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 주었으면 좋겠어. 릭 교수와 오랜 친우 사이라 들었다. 이 건물 아래층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고 하니 오랜만에 인사나 나누도록 해.”
온종일 옆에 끼고 다닐 거란 약속을 한 지 이제 겨우 두 시간이 흘렀다. 곁을 떠나 릭에게로 가라고? 한 입으로 두말하기는. 하지만 나 역시 앤드류의 껄끄러운 존재감을 버텨 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숨통을 트는 게 훨씬 나았다.
“알겠습니다.”
“툴드, 잘 따라다녀라.”
“예.”
접견실을 벗어난 즉시 헐렁이는 포니테일을 제대로 묶으며 계단으로 향했다. 릭의 사무실이라니! 당장 달려가고 싶어 다리가 근질근질한 기분이었다.
와아아! 활짝 열린 유리창 너머로 함성이 들려왔다. 졸업식이 또 하나의 축제와도 마찬가지인 아카데미는 지칠 틈도 없이 시끌벅적했다.
“대하기 어려운 분이시죠?”
등 뒤에서 툴드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드류 전하 말씀이신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치 볼 생각도 않고 기다렸다는 듯 개인적인 감상을 읊었다.
“외양은 누가 봐도 친형제인데, 속은 극과 극이네요.”
네자르가 황제를 빼닮아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작약이라면, 앤드류는 황후를 닮아 진득하고 무거운 향을 풍기는 말린 장미 같았다.
특히 함께 있었을 때 그 차이가 유독 극명했다. 떼어 두면 확실히 형제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서 있을 땐 한 핏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불어 초면인 주제에 자꾸 나를 걸고넘어지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음, 극과 극이라고요? 케이틀린 양이 잘 모르시는 것 같아 한 말씀 드리자면, 네자르 전하도 앤드류 전하 못지않게 한 예민 하십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말이 통하느냐 통하지 않느냐지요.”
확신컨대 타인이 보는 네자르와 내가 보는 네자르는 상당히 다른 인물 같았다. 론이 말하길 네자르가 나를 대하는 모습은 매우 상냥한 축에 속한다고 했으며, 툴드는 네자르가 상당히 예민한 성격이라 묘사하고 있다.
내가 보는 네자르는 그 둘과 조금 다른 인물이었다. 물론 때때로 다정하기도 하고 예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장난스럽고 가벼우며 섬세하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하긴, 모든 사람의 기준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곧 릭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런, 문이 잠겨 있군요. 자리를 비우신 모양입니다.”
툴드의 말에 문손잡이를 다시 잡아당겼다. 고동색의 고풍스러운 목조문은 덜컹거리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음, 어쩌죠? 시간을 때울 곳이 없어졌네요.”
“괜찮으시다면 졸업 축제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제가 아카데미 출신이라 지리 하나는 빠삭합니다.”
절대 불가능했다. 젊음과 생기가 한데 모여 바글거리는 장소에 가자고? 상상만으로도 전신이 피곤했다.
“아니요. 저는 바깥보다 아카데미 도서관에 더 관심이 가네요. 오는 도중에 위층에 작은 서재가 하나 있던데…….”
“그럼 그리로 가시지요. 시간 때우기용으로 나쁘지 않군요.”
“괜찮으시겠어요? 따분할 것 같으시면 툴드 경은 축제를 구경하고 오세요. 전 서재 안에만 얌전히 있을게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린 툴드가 앞서 걸음을 옮겼다.
“제가 겉만 봐선 책과 영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황립 아카데미 검술부는 몸만 잘 쓴다고 졸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요. 책과는 나름 친숙합니다. 걱정 말고 가시죠.”
책과 나름 친숙하다고? 록허드를 떠올리면 절대 신뢰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종이를 만질 때마다 걸레를 집는 표정이 되는 록허드가 책과 친할 리 없었다.
툴드의 허구를 동반한 친절 덕에 난 인산인해를 이루는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보좌관 노릇을 해야 하니 이전처럼 요리 레시피나 읽을 순 없는 노릇이고, 책장을 뒤져 가장 그럴싸한 제목의 표지를 뽑으려 했다.
“어머, 혹시 그 책 지금 빌리시려는 건가요?”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반 뼘쯤 되어 보이는 놀라운 두께의 서적을 빼내며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리알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적발의 미녀가 서 있었다.
“아니요. 필요하세요?”
나의 대답에 여인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며칠간 아카데미 내의 모든 도서관과 서재를 뒤지며 찾던 책이라…….”
“가져가세요.”
있어 보이는 책은 이것 말고도 충분해 보이니까. 망설임 없이 책을 건넸지만, 어째 받아 드는 손의 움직임이 느릿했다.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굵게 웨이브 진 머리를 조심스레 뒤로 넘긴 여인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혹시,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 되시나요?”
하마터면 깜짝 놀라 손안의 두꺼운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는 네자르의 보좌관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저만치 밀어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어떻게…….”
“세,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그런데 그 반응이 내 생각보다 훨씬 격했다. 뭐지, 이건?
“아, 제가 너무 주책맞았죠? 죄송해요. 너무 기쁜 마음에 실례하고 말았어요. 제 이름은 릴리 아마스라입니다. 릭 교수님과 너무 닮으셔서 못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저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나요? 호, 혹시 릭 교수님이 언급하신 적은 없을까요?”
릴리 아마스라. 모를 수가 없었다. 록허드가 네자르의 이상형이라 말했던 그 여자였으니까! 나는 갑작스레 생겨난 경쟁의식을 가다듬지 않고 차갑게 대답했다.
“없어요.”
한데 이 방정맞은 여자가 네자르의 이상형이라니.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급격한 혼란을 맞이했다. 똑똑하기만 하면 어떤 성격이어도 상관없는 걸까. 갈수록 내가 가진 경쟁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무, 물론 떨어져도 내 알 바 아니지만.
본래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라면 부담감에 입도 제대로 못 여는 나인데, 혼자서 저리 시끄럽게 떠드니 불편한 구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도 지나가는 투로 릴리 아마스라를 언급하셨다거나, 뛰어난 제자라며 칭찬을 하셨다거나…….”
“아니요.”
여자, 릴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실망과 우울함으로 점철되었다. 사실에 입각해 대답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그도 아니라면 물리학과 최초 여성 수석 졸업자가 본인의 제자라는…….”
“릭 오라버니를 아세요?”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간 궁금하지도 않은 개인사를 줄줄 읊을 것 같았기에 서둘러 말을 가로막았다. 내 물음에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릴리가 입을 열었다.
“네에, 저는 교수님의 학생이었어요. 지금은 졸업한 상태이지만, 졸업생 연설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모교를 들렀답니다.”
“그럼 오라버니께 직접 찾아가지 그러셨어요. 저에게 물으셔 봤자 딱히 알려 드릴 이야기도 없는데.”
내 말이 꽤 노골적이었나 보다. 순식간에 홍당무에서 새빨간 사과로 변한 릴리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제가…….”
분명 입술을 움직이는 것 같긴 한데, 웅얼거리는 통에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죄송한데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아요. 조금만 크게 말씀해 주시…….”
내 말에 깊이 숨을 삼켜 낸 릴리가 한 박자 늦게 소리쳤다.
“제가 너무 졸졸 쫓아다녀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도망을 다니셔요!”
얼마나 커다란 외침이었는지, 코앞에 선 내 양쪽 귀가 다 얼얼해질 정도였다. 나는 힐끔 고개를 빼 의자에 앉은 툴드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다행히 그는 꾸벅꾸벅 조는 상태였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잠깐, 릭을 졸졸 쫓아다녔다고?
“대체 왜요?”
“왜냐구요? 여자가 남자를 쫓아다니는 이유가 뭐겠어요, 한눈에 반해서죠! 턱없이 젊은 나이임에도 황립 아카데미 교수직에 오를 만큼 엄청난 능력, 바다처럼 깊은 지식, 거기다가 멀끔한 외모에 신사적인 행동까지…….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 딱딱한 통나무한테 반했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한 듯싶었다. 유능하고, 잘생겼으며, 신사의 태가 나는 남자라면 네자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찝찝한 표정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릴리가 돌연 어딘가로 급히 달려 나갔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무언가 적힌 자그마한 쪽지와 함께였다.
“여기, 제가 사는 저택의 주소예요. 저는 지금 제도에서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말했기에 맞장구를 쳐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렇군요.”
“네! 그러니 에젤로트로 돌아가시면 꼬옥 제게 편지를 하셔야 해요. 아시겠죠? 그 어떤 이야기든 상관없어요. 재수 없는 사교 그룹의 뒤 담화를 하든, 황태자 전하의 욕을 하든 저만의 평생 비밀로 간직할게요. 아시겠죠? 보내 주실 거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나는 기대 가득한 릴리의 시선에 긍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본부의 서재에 들르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에젤로트 영애와 만날 기회를 잡아내다니……. 전 이제 연설을 하러 가야만 해요. 기다릴 테니 꼭 연락 주셔요. 꼭이요!”
제 할 말을 속사포로 내뱉은 릴리가 눈앞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멍청해진 기분으로 손안의 서적을 다시 책장 안에 꽂아 넣어야 했다. 등을 돌렸을 땐 두 눈을 또렷이 뜬 툴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으셨어요?”
내 물음에 답하는 툴드의 표정은 그야말로 어색, 불편의 결정체 그 자체였다.
“네.”
젠장. 이, 이건 내 탓이 아니야. 릴리가 세상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떠들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툴드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 두꺼운 서적을 집어 있어 보이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서재에 요리 레시피나 식물도감, 곤충 도감 등 그림으로 볼 만한 책이 구비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릭의 전공이나 훑어볼까 싶어 대학 물리학 책을 골라 훑었다.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곳의 물리 이론식은 매우 길고 복잡했으며 난해했다. 방정식 대수 방식이 아니었고, 약하지만 아직 마법이 살아 있는 세계라 그런지 유사하다 싶은 부분도 매우 적었다.
이래서 지위 높은 가문의 자제만이 배울 수 있다는 거구나. 제대로 배우려면 6년은커녕 10년을 갈아 넣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장학 제도가 열악한 황립 아카데미에서 10년을 배운다는 건 재산이 넘친다는 의미였으니까. 놀기에도 바쁜 10년을 갈아 넣어야 한다니. 내가 똑똑해질 방법은 정녕 없는 거군.
“……이트?”
좋아! 깔끔하게 포기야. 아무래도 얼마나 걸릴지 모를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릴리와 연락을 나누면서 네자르의 칭찬을 계속 흘리는 쪽이 나아 보였다.
……근데 그 여자는 또 릭에게 반했다며 대놓고 어필했잖아.
“케이트!”
코앞에서 들려오는 핑거스냅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책을 덮었다. 숨을 가지런히 하고 턱을 올리니, 텅 비어 있던 내 옆자리에 네자르가 앉아 있었다.
“졸았어? 표정만 보면 어디서 용이라도 무찌르고 온 것 같군.”
고개를 젓고 덮은 책을 밀어냈다.
“아니! 용은 무슨. 그런데 네자르는 왜 여기에 있어? 이렇게 벌써 와도 되는…….”
자연스레 말을 하다가 입을 닫고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서재 안에 있는 사람은 나와 네자르, 툴드가 전부였다.
“이제 나가면 돼. 볼일은 다 봤으니까.”
“졸업식은? 여기까지 왔는데 참석하지 않는 거야?”
“앤드류를 만나는 것으로 됐어. 공식 일정도 아닌데 갑작스레 참석하는 건 주최 측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툴드?”
“예.”
“키올, 인피르노와 함께 뒤쪽에서 따라와라. 거리만 적당히 유지하면서.”
“예.”
축제에 참여하지 않을 거면 굳이 보좌관 노릇을 할 필요도 없었네. 내가 읽던 책의 표지를 확인한 네자르가 인상을 구겼다. 그는 반납대로 내 팔뚝만 한 크기의 책을 가볍게 던진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별걸 다 읽는구나. 이제 가자.”
나는 비몽사몽인 기분으로 네자르의 손을 잡았다. 서재를 벗어나고, 건물을 나온 후에야 그와 내 피부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커다랗게 튀어 오르려는 심장을 차분히 진정시키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은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방문자로 인산인해였다. 학사모, 졸업 가운, 샴페인, 폭죽, 맥주, 소란스러움으로 중무장된 광장이 내가 선 땅 위에 한가득이었다. 아카데미 졸업식은 체면 차리는 귀족들의 연회가 아니었다. 그 활기찬 분위기가 생소하면서도 익숙했다. 전생에서의 감각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사람 많은 곳 처음이야? 아이도 아니고 계속 두리번거리기는.”
네자르가 내 손을 자신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렇게 보여?”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걷는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 연회나 사교 모임에도 자주 참석했을 텐데.”
“음, 그건 절대 아니야. 사교 모임은 둘째 치고 애초에 연회에 참석한 것 자체가 한 손에 꼽거든.”
네자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나는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네. 그냥,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조금 신선했나 봐.”
아무렇지 않은 척해 왔지만, 나는 사람 많은 장소가 싫다. 특히 나를 향한 시선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 등 뒤로 차갑게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전생에서 목숨을 잃던 그 순간이, 눈앞에 생생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네자르와 함께 있을 때는 사람 많은 장소가 불편하지 않았다. 승전 축하 파티 때도 느꼈지만,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안정감이 동반됐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네자르에게 의존하는 것 같았다. 썩 좋은 기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신적으로 성장, 아니 안정되어야만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당해 버렸으니까.
“네자르 선배!”
“전하,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머나, 옆에 계신 아리따운 아가씨는 누구신가요?”
“손까지 꽉 잡으시고. 지금 저희 놀리러 오신 겁니까?”
네자르는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누구는 예민하다, 누구는 폭력적이라 묘사하지만 정작 대외적으로 비춰진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성격 좋고 인망 좋고 지위는 더 좋은 24세의 젊은 남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으로 둘러싸여도, 파티에서 귀족들에게 치여 내 차례를 기다렸던 순간만큼 비위가 안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사회적 위치를 지닌 사람들이 서슴없이 네자르에게 다가오는 게 내심 뿌듯했다.
“길 막지 말고 비켜라. 너희는 너희들끼리 놀아.”
“록허드 선배는요? 같이 안 오신 겁니까? 뒤의 아가씨는 누굽니까?”
“전자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고, 후자는 그냥 물어보지 마. 가까운 시기에 한번 방문할 테니 교수님께 말해서 날짜나 잡아 놓도록 해. 그리고 지금은 제발 어디로 좀 사라져 줘.”
가벼운 한마디로 대응했을 뿐이다. 나와 네자르 주위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야단법석을 피우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급히 걸음을 옮긴 네자르가 작지만 화려한 외관을 지닌 건물로 들어서며 말했다.
“미안하다. 이 시기쯤 되면 학생들이 제정신이 아니야.”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재미있더라.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명예 졸업자 전시실.”
네자르의 손을 놓고 초상화가 전시된 벽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철학, 역사학, 천문학 등 세부 학과로 나누어진 전시실은 오직 네자르와 나만이 남아 매우 잔잔한 분위기를 풍겼다.
네자르가 무슨 전공이었더라? 검술학이랑…….
“네자르! 여기에 네 얼굴이 두 개나 있어!”
그래, 검술학과 수학. 다시 생각해도 정말 완벽하게 상반되는 조합이었다.
조용히 명예 졸업자들의 초상화를 훑던 네자르가 내게로 다가왔다.
“이거 보여 주려고 나 데려온 거구나? 록허드는 조기 졸업이니 뭐니 그렇게 자랑했으면서 코빼기도 안 보이네.”
초상화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면밀하게 살폈다. 실물보다 별로야. 확실히 별로야.
“다른 부에는 익숙한 이름의 황족이 몇 명 보이는데, 검술부에는 네자르밖에 없는 것 같아.”
“황족에게 검술은 가장 쓸모없는 학문 중 하나거든. 황태자는 본래 아카데미 입학도 반려되기 일쑤야. 다양한 계급이 섞여 있는 아카데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런데도 네자르는 어떻게 입학한 거야?”
“입학을 했다기보다 입학을 당한 거지.”
덤덤한 어조로 대답한 네자르의 표정은 짙은 회상에 젖어 있었다.
“폐하의 관심을 얻기도 이리 힘들었는데, 카트리나 에젤로트는 얼마나 더 고될까? 생각만 해도 토기가 올라오는군.”
“에이, 뭐야. 정말 나한테 자랑하려 했던 거였잖아!”
멋쩍은 얼굴의 네자르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난 모습을 보여 줘야 점수도 빨리 따지.”
혼인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혀로 축이다가 등을 폈다.
“나한테는 이미 세상에서 네자르가 최고야. 이런 거 없어도 백 점 만점에 천 점이라구.”
거짓말도, 과장도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게가 뒤바뀜이 느껴진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속도도, 입매가 굽어진 정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입술을 다물고 조용히 그의 기분을 살폈다.
“그렇군.”
그는 혀 안으로 나의 말을 샅샅이 굴리는 표정이었다. 곧 내게서 눈을 뗀 네자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매끈한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한테 내가 어떤 의미인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
“어떤 의미인데?”
진한 적색의 눈동자가 흘긋 나를 향했다. 이내 네자르는 인상을 구겼던 아주 잠깐의 순간이 마치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양 점잖게 웃어 보였다.
“어떤 의미이기는, 백 점 만점에 천 점이지.”
찝찝한 대답이었다.
“좋아. 내가 명예 졸업자에 올랐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이곳에서의 볼일은 전부 끝났어. 슬슬 배가 고파지려 하니까 성으로 돌아가자. 약혼자께서 방문하신 덕에 오늘 저녁 식사는 화려하겠군.”
가벼운 움직임으로 등을 돌린 그가 내게 걸음을 재촉했다. 서재를 나왔을 때와 달리, 네자르는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
아직 태양이 지지 않은 이른 저녁. 주인과 주인의 소중한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론은 소중한 손님이 침실로 돌아갔음을 전해 듣고 곧바로 주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하셨군요.”
다가온 시종에게 몸을 맡긴 네자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외투와 타이까지만 벗고 괜찮다는 의사를 표시해 시종을 물렀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즉시 셔츠의 단추를 막힘없이 풀었다. 평소에 비해 배는 신경질적인 움직임이었기에, 자신의 주인이 의자에 널브러질 때까지 말을 아끼던 론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앤드류 전하와 다투기라도 하셨습니까?”
서정적인 주홍빛의 하늘이 마침내 주인이 자리한 실내까지 가득 메웠다. 입을 다문 채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네자르는 몸을 일으켜 장식장을 열었다. 소리 없이 눈알만 굴리던 그가 유리잔을 집자, 잠자코 서 있던 론이 종을 울려 시종에게 술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앤드류가 반골이기는 해도 굳이 내 비위를 상하게 하지는 않아. 어머니를 닮아 아주 똑똑한 놈이지.”
잔의 반을 포도주로 채운 시종이 다시 몸을 물러 방을 벗어났다. 턱을 괸 채 테이블을 두들기던 네자르는 다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열었다. 그 덕에 정확히 반만 붉게 물들어 있던 그의 자리는 온전하게 노을빛의 차지가 되었다.
한동안 불편한 얼굴이었던 네자르는 그제야 안정을 찾고 잔을 기울였다.
“오늘 밤이면 황성으로 돌아오실 분인데, 굳이 아카데미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황성에서 어머니의 눈치를 봐 가면서까지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전하가 황후 폐하의 눈치를 볼 사람이었습니까? 제가 그동안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론의 말에 네자르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 누가 듣더라도 감정이 담기지 않은 허무한 웃음이었다.
“참 안 어울리십니다.”
“뭐가?”
“황후 폐하를 껄끄러워하신다는 사실이요.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위태로워 보였던 네자르의 제위는 승전이 공표된 순간부터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후는 그의 겁 없는 정면 돌파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였지만, 결국 제위란 황제의 총애로 이루어지는 자리.
카시어드 4세가 제 이름을 오랜 역사에 남도록 한 적자를 평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수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여자가 보이는 노골적인 적의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하겠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수백 마리의 거미가 팔등을 타고 오르는 기분이야.”
“황후 폐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서로 껄끄러운데 마음이 먼 만큼 몸도 멀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면 제위에 오르신 후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쫓아내시지요.”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머금고 있던 네자르가 크게 어깨를 움찔했다. 소리를 죽여 입술을 닦아 낸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아주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앤드류 황자님과 에자렛 황녀님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는 전하가 그분들에게 그리 마음 써 주시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 못 하겠습니다.”
“앤드류와 에자렛에게 죄가 있다면 나의 이복형제로 태어난 죄밖에 없지.”
“그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감히 천하를 지배하는 황제의 적자이며 장자인 전하의 자리를 위협하다니요.”
론이 지칠 줄 모르고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자 네자르가 질린 표정을 했다.
“가만 보면 네가 제일 악독한 것 같다.”
“전하의 배려심이 필요 이상으로 큰 것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그럴 필요가 없는 형제들에게요.”
때로는 네자르가 가진 인간적인 면모가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아닐까, 걱정이 일 정도였다.
“그런 배려심은 카트리나 영애에게만 베푸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싶습니다.”
“그건 무슨 의미냐?”
“조금 고민하시는 것 같기에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게 보인다고?”
“전하는 다른 부분에선 칼 같지만, 유독 카트리나 영애와 관련된 일에는 고민이 깊으시지요. 오래전부터 그러셨는데 혼인을 앞둔 상황에선 더욱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프러포즈도 거절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네자르의 얼굴이 독에 물든 것처럼 새파래졌다. 거절당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는 건지, 입술을 몇 번 깨물다가 결국 머리를 부여잡고 말았다.
늘 느끼지만, 카트리나의 이름이 나왔을 때 네자르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그 역시 에젤로트의 막내 여식을 오랫동안 봐 왔으나 네자르가 저리 휘둘리는 연유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파헤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미인은 맞으나,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인 네자르 황태자가 홀릴 정도인가? 아니다. 그렇다고 네자르가 제위를 잇기 위해 필수로 요구되는 배경과 지식을 가졌는가? 아니다. 둘 모두 아니라면 남은 수는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사람을 홀리는 마녀란 예측뿐이다. 하지만 평소의 행동과 사고의 수준을 보면 마녀는 턱도 없었다.
아마 둘 사이에 그가 모르는 무언의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아니라면 단순히 네자르가 돌파해야 할 운명의 적수일 수도 있고.
“그 애는 날 아빠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각고의 고민 끝에 나온 말이 저가 아빠 취급을 받는단 소리였다. 론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나이 차가 얼마라고.”
“아빠가 아니면 친오빠쯤 되겠지.”
“……그건 반박하기가 영 힘들군요. 한데 전하도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카트리나 영애가 전하의 터울 큰 여동생인 줄 알 겁니다. 정작 에자렛 황녀님은 여동생 취급도 못 받고 있는데 말이지요.”
네자르는 아마 에자렛에게 남매로서 측은함은 있어도, 그럴싸한 애정은 없을 테다. 에자렛의 친모가 황후인 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카트리나 영애가 황후로서의 자질은 부족하더라도, 전하와 정신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지금의 관계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전하가 그분께 부성애를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겨지는데요. 물론 차후 후계를 준비할 땐 조금 불편하겠지만…….”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던 네자르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빈 잔을 테이블 끄트머리로 밀어낸 그가 냉소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게 부성애라고? 그렇담 나는 지금 당장 에자렛을 황성에서 도피시켜야겠군.”
론이 꼿꼿이 세우고 있던 등의 근육을 천천히 풀었다. 어쩐지 카트리나를 향한 네자르의 진심을 긴 시간이 흐른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듣게 된 기분이었다.
그의 주인은 속을 읽기가 어렵다. 앤드류는 악의와 반감, 내면에 숨겨 두었던 진심을 은연중에 표현하기라도 하지, 네자르는 본인이 정해 둔 일정 선까지만 스스로를 나타냈으니까. 황성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네자르의 과거를 떠올린 탓일까? 가슴 한쪽이 찡했다.
“제 귀에는 전하께서 카트리나 영애에게 이성적인 마음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뜬금없이 주인의 나체를 감상하게 된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론은 황태자의 보좌관이라는 직위에 알맞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을 건네려 노력했다.
“마음이 있다면 구애를 하셔야지요. 현명하신 전하께서 자존심 때문에 숨기시는 건 아닐 테고, 남자라면 무조건 직진입니다. 돈과 명예와 잘난 외모를 양손에 쥐고 돌진하세요. 아무리 야생의 들개 같은 카트리나 영애라도 넘어가지 않고 못 배기실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헛웃음이었다. 얼굴을 가린 채 픽픽 웃음을 흘린 네자르는 론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너한테 구구절절 말한 내가 병신이지. 헛소리 말고 나가라, 슬슬 화나려고 하니까.”
***
“얘, 리나. 아가씨가 주무시고 계시는데 벽난로를 쑤시면 어떡하니!”
“아, 아차……. 죄송해요, 부인.”
“대체 얼마나 더 혼나야 정신을 차릴래? 말만 죄송하다 하지 말고 어서 치우렴!”
기운 없는 발걸음이 머리맡을 지나 점차 멀어져 간다. 몸을 일으켜야 했지만, 어쩐지 전신을 내리누르는 무거운 무게에 눈꺼풀조차 끌어 올릴 수 없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어렴풋이 눈을 뜨니 완연했던 노을의 빛이 까만 밤에 물들어 버린 뒤였다. 나는 그 상태로 다시 옅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전하, 제가…….”
“됐다. 내가 옮기지.”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안아 올렸고, 익숙한 향과 온기로 그 주인이 네자르임을 알 수 있었다.
자면 안 돼. 카드 게임을 하기로 했는데, 이 상태로 자고 일어나면 내일 이른 오전일 터였다. 네자르의 일과는 항상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일이면 작별 인사도 없이 마차에 올라야 할 수도 있었다.
“좀 자랐나 싶다가도, 그대로인 것 같고…….”
매끄러운 손등이 내 이마에 닿아 옴을 느꼈다. 차갑고 서늘한 온도에 더 깊이 몸을 기대고 뒤척였다. 지척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커다랗게 뜬 보름달의 샛노란 빛이 침대 위에 널브러진 내 얼굴을 비추었다. 이왕 재워 주고 갈 거 커튼도 쳐 주지. 다시 잠들려 눈을 감았지만,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정신이 말똥했다.
화장을 지우거나 옷을 갈아입은 상태도 아니었기에 엉망이 된 머리핀을 전부 풀어내고 침실을 나왔다. 모두가 잠든 성은 늘 그러하듯 잠잠하고 싸늘했다.
“아무도 없어?”
시계 초침 소리 외에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1층 홀까지 내려가 주변을 훑었다. 정말 아무도 없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성을 벗어났다.
이 시간대에 밖을 나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꾸 떼를 써도 오늘은 안 돼요. 내일이 황후 폐하께서 방문하시는 날이란 걸 잊었나요? 새벽부터 할 일이 태산이라구요.”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한데? 나한테 말해, 다 해 줄 테니까.”
설마 이렇게 늦은 새벽 시간에 밀회를 즐기고 있을 줄이야. 허리를 감아 오는 손길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하녀가 남자의 가슴을 밀어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하여간 말은. 어서 놔요, 가야 하니까.”
“정말? 이 으슥한 밤에 나만 두고서 간다고?”
“떼를 써도 소용없대두요. 내일은 어울려 줄 테니 이만 보내 줘요. 응?”
하녀가 어린아이 달래듯 남자의 얼굴을 이끌어 이마에 버드 키스를 했다. 곧 여인의 손목을 잡아챈 남자가 이내 고개를 숙여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배배 꼬이는 허리가 여기서도 아주 뚜렷하게 보였다. 숨어서 보는 처지임에도 떨림 하나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남자가 너무 바람둥이 같아서? 방금 막 자다 일어나서?
내가 표정 변화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둘의 스킨십은 더욱 노골적이고 뜨겁게 변해 갔다. 시간이 흐르니 내 기분도 다소 묘해졌다. 네자르를 향한 나의 마음이 다 저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거겠지? 숨이 가쁘게 서로를 만지고, 입 맞추고 그리고…….
음. 그냥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겹도록 서로를 물고 빨던 남녀의 몸도 멀찍이 떨어졌다. 뒷문을 통해서 하녀가 성으로 돌아갔고, 남자는 외롭게 남아 여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누가 저렇게 처량한가 했더니, 아카데미에서 날 호위하던 툴드 경이었다. 여자들 앞에서 말이 번지르르한 건 기사들의 특징인 걸까? 역시 판시온 같은 기사는 드문 경우였구나.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입술이 닿았던 손가락에 불이 붙은 기분이었다. 뜨겁게 피어오르던 시선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떠올리지 말자, 떠올리지 말자, 떠올리지 말자!
나는 그 낯부끄러운 기억에서 도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툴드에게로 뛰어갔다.
“여, 영애?”
그리고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을 향해 입을 열었다.
“툴드 경은 여자를 굉장히 잘 다루는 것 같아.”
“……예, 예?”
“왜 얼굴이 잘생긴 남자들은 다 잘생긴 값을 하는 걸까요? 물론 판시온 경을 제외하고.”
낭패인 표정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덮은 툴드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보셨습니까?”
“그야 한가운데서 대놓고 서로를 만져 대는데 못 볼 수가 있겠어요? 나는 또 나온 김에 구경하고 가라는 의미인 줄 알았지.”
의도치 않았으나 졸지에 툴드를 괴롭히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뭐, 한 소리 들어야 할 일이기는 하지. 감히 황태자의 성에서 사랑 놀음을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빠져나온 수준이었다. 눈치가 보이기는 했는지, 굳은 눈매로 허공을 응시하던 툴드가 곧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카트리나 영애, 제 부탁이 염치없다 느껴지시겠지만, 부디 전하께는 말씀을 올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끌고 나온 아이입니다. 벌을 받더라도 저 혼자 받고 싶습니다.”
참 절절한 사랑이네. 정수리만 보여 표정을 알 순 없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내 입꼬리는 끊임없이 움찔거리며 내려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지루함을 떨치려고 내려왔는데, 이런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으음, 맨입으로?”
내 말에 툴드가 턱을 번쩍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길 잃은 똥강아지처럼 축 처진 표정이 아주 확실히 보였다.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농담이니까.”
“농담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뭐가 좋을까. 안 그래도 네자르와 함께할 시간을 통째로 날려 버린 탓에 우울하던 시점이었다. 그럼 기회가 온 김에 우울함이나 날려 볼까.
“말을 가져올래요? 이왕이면 예민하지 않고, 몰래 훔쳐 써도 모를 만한 아이로.”
내 요청에 툴드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카트리나 영애, 성의 말은 모두 전하의 것이라 함부로…….”
“설마 네자르 전하의 말을 훔쳐 오겠단 소리는 아니지요? 경의 말을 가져오란 소리예요. 생각보다 그리 눈치가 빠르지는 않으시네요.”
툴드는 어떻게든 날 설득해 보려 손짓 발짓을 다 사용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눈을 부릅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툴드는 잘생긴 흑색 갈기를 가진 말을 끌고 나타났다.
내가 반색을 표하며 양손으로 드레스를 부여잡은 채 안장에 오르자, 앞길을 막은 툴드가 작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제발, 영애. 차라리 저를 때리십시오! 얼마든지 맞아 드릴 테니 위험한 행동은……!”
그에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가문은 사냥꾼 출신이라 밤눈이 좋거든. 지금 툴드 경의 얼굴도 아주 잘 보여. 내가 자고 있던 사이에 오른쪽 뺨 아래로 여드름이 하나 났네?”
내가 록허드도 아니고, 늦은 밤에 말을 다 타게 될 줄이야. 느낌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가볍게 툴드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그를 안심시켰다.
“금방 다녀올게요.”
“어디를 갔다 오시게요?”
“그냥 주변을 좀. 걱정되면 자지 말고 기다리든지! 이랴!”
시원한 봄 저녁의 바람이 머리칼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나는 금세 신이 나 말의 속도를 높여서 정원을 벗어났다. 달이 환한 덕에 사위가 그리 칠흑같이 어둡지 않았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내달리니 답답했던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야호!”
미친년으로 끌려갈 수 있었기에 일부러 인적이 뜸한 길을 따라 달렸다. 황성을 방문해 봤자 네자르의 성이나 황제의 성, 연회장을 중심으로 돌아다녔기에 다른 곳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드넓은 땅에 움직이는 생물이라곤 나와 말 한 마리뿐이니, 마치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어두침침한 인상의 성이 하나 눈에 띄었다. 망망대해 위의 섬처럼 홀로 고독하게 솟아오른 고성이었다.
“워, 워.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나 두고 가면 절대 안 돼. 알았지?”
버려진 건물인가. 말을 근처에 매어 놓고 성내로 들어섰다. 끼익.
텅 빈 메인 홀은 아주 크고 음산했다. 홀연히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기둥과 천장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창이 큰 덕에 달빛이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구두 굽이 바닥에 닿거나 주인 없는 장식품을 건드릴 때마다 흩날리는 먼지가 허공을 끊임없이 수놓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고즈넉하지만 낡고, 더럽네. 황성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그때, 청색의 벨벳 커튼이 파도처럼 펄럭이며 시야를 가로막았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노란 달빛 위에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양의 먼지가 쏟아져 내린다. 정신을 차리니 내 몸은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뒤통수 너머로 대리석의 시린 기운이 여실히 느껴졌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당당해. 그렇게 당당히 숨어들어서 뭘 하려 했던 거냐?”
처음에는 누구인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목 바로 아래를 날카로운 단도가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이 조금 차분해진 후에는 시야가 매우 선명해졌다.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는 조금 더 어리고 날이 선 네자르가 보였고, 두 번 깜빡였을 때는 물기 어린 금발과 새빨간 눈동자가 보였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시선이 아니었다면 과거로 돌아가 열아홉 시절의 네자르를 만난 것으로 착각했을 테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눈앞의 청년은 네자르가 아닌 앤드류였으니까.
“말을 못 하나? 아니면 죽고 싶은 건가?”
서, 설마 나를 못 알아보는 건가? 물론 그때와 달리 머리카락도 산발이고, 드레스도 반쯤 엉망이 된 상태였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저, 저, 기억나지 않으세요? 네, 네자르 전하를 보좌하던 케이틀린이에요.”
차마 ‘네자르를 보좌하던 케이틀린을 연기하던 카트리나’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난 생명 연장을 위해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목이 압박되니 목소리를 내기가 퍽 힘들었다.
“케이틀린? 오전에 아카데미로 찾아온 멍청한 여자?”
“머, 멍청한 여자라뇨? 아무리 황자님이라 하셔도 그렇지, 너무하시네요.”
앤드류는 내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스치면 살갗에 피가 흐를 정도로 냉랭한 눈빛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고 똑같은 반응이었다.
“형님이 날 살피라고 시키시더냐?”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승마를 즐기다가 잠깐 들렀을 뿐이라구요.”
“자정이 넘은 시간에 승마라고? 그것도 감히 황성에서? 지금 나보고 그 소릴 믿으라는 거야?”
나라도 믿기 힘들겠다. 그래, 언젠가는 록허드의 젠장맞을 취미 생활이 날 절벽으로 내보낼 줄 알았지.
턱 밑으로 다가오는 칼끝의 예리함이 한층 날카로워진 기분이었다.
“믿기 힘들어도 사실인걸요. 제 꼴을 보세요. 이게 어디 몰래 들어올 사람의 복장으로 보이나요?”
“복장을 보니 더 수상해.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좋은 말로 할 때 불어라. 목적이 뭐지?”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없다니까요! 일단 좀 비켜요. 지금 성년이 되셨다고 절 깔아뭉개시는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 음침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앤드류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가 멈칫한 틈을 타 내 상체를 가두고 있던 팔과 가슴팍을 저만치 밀어냈다. 엉망이 된 머리칼을 뒤로 넘긴 후 고개를 돌리니, 놀랍게도 앤드류는 다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성인이 된 지 1년이나 지났어.”
“와아, 정말요? 대단하세요! 1년이나 지나서 참 좋으시겠어요.”
매서운 기세로 대답하고 나니 나와 그 사이에는 빈 성의 썰렁한 한기만이 남았다. 음, 이제 어떡해야 하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앤드류가 여전히 내 옆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었기에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앤드류 황자와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는 마치 이 낡은 성이 자신의 앞마당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거미줄과 반쯤 찢겨 나간 커튼으로 유령의 성을 연상시키는 이 낡은 건물을.
“하긴, 그 철두철미한 형님이 너처럼 모자란 계집애를 이용할 리 없지.”
이 재수 없는 놈은 하는 말마다 나를 욕하네. 마침내 그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상체를 일으켰고, 나 역시 급히 따라 일어섰다.
“이런 화를 당할 예정이었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전하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으신 것 같네요.”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겨우 하루 사이에 이 어린놈한테 들은 비하만 수차례였다. 내가 네자르의 약혼녀인 걸 안다면 놀라서 뒤집어지겠지. 하지만 신분을 밝힌 순간 이쪽의 움직임 역시 제한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당장 한을 풀고 싶었던 난 힐끔 앤드류의 손에 들린 검의 동태를 살피며 말했다.
“여기에 전하가 앤드류 전하 말고 또 있나요? 자꾸 그렇게 경거망동하시다간 여자를 덮치는 파렴치한 황족으로 소문날걸요!”
그 소리를 들은 앤드류의 표정은 어처구니없음 그 자체였다.
“이게 미쳤나. 지금 얻다 대고 훈계질이야?”
손이 먼저 올라간다거나, 괜히 주변에 화풀이를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꼴에 네자르와 피를 나눈 형제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저 검이 언제까지 침묵하리라 보장할 순 없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아주 천천히 계단 근처로 옮겼다. 좋아, 자연스럽게 성 밖으로 도망치는 거야.
“애초에 버려진 성에 전하를 노리고 숨어들어 왔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예요. 저는 자객은커녕 약간의 모험 의식을 갖고 들어온 거라구요. 어느 누가 이 초라한 성을 황자 전하의 것이라 여기겠어요?”
미간을 과하게 찌푸린 앤드류가 팔과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따라왔다.
“뭘 모르는군. 폐하께선 내게 이 성을 하사하셨다.”
아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졸업식이 끝난 오늘부터 바로 이곳에 입성할 예정이었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이렇게 난장판인 성에요? 설마 더럽고 냄새나는 게 취향이세요?”
“자꾸 함부로 입을 나불대지 마, 후회하게 만들기 전에. 내 말은 오늘 이 성이 날 위해서 정돈된 상태여야 했다는 의미야. ……내가 모지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그를 향해 물었다.
“누가 감히 황명을 어긴 거죠? 그것도 이렇게 보란 듯이.”
“누구겠어?”
자로 잰 것처럼 가지런하면서도 삐딱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빛을 받아 형형하게 일렁이는 검홍색의 눈동자가 계단 위에 서서 나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지금 이 순간의 앤드류는 열아홉이 아닌 여든아홉처럼 보였다. 그는 속이 검어 바닥을 내려다볼 수 없는 심연 같았고, 그 어두운 내면이 무덤덤했던 내 가슴을 자극해 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앤드류 황자는 나와 조금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긴 시선의 마주침 끝에 고개를 돌린 건 내 쪽이었다.
“그분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표정과 말이 다르군.”
“……이런 타이밍에 한 번쯤 나와야 할 소리 같았어요. 저는 그분을 모시는 위치니까.”
내 말에 앤드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으음, 정말 웃은 거 맞지? 지나가던 야생 늑대가 웃는 체해도 저것보다는 인간미가 넘칠 것 같았다.
“너는 근래에 내가 본 여자애 중 가장 웃겨. 정확히 말해서 웃긴다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달까……. 내 평생 어머니보다 어이없는 여자를 보게 될 줄 몰랐는데.”
어머니라면 황후를 말하는 건가? 그리 캐묻고 싶지 않은 개인사였다.
“그렇다고 반하시면 곤란해요. 전 이미 임자가 있어서요.”
“못생긴 게 못 하는 소리가 없군.”
충격이었다. 평생을 예쁘고 곱단 소리만 듣고 살아온 내가 설마 제위에서 밀려난 황족에게 못생겼단 소릴 듣게 될 줄이야!
“전하야말로 제가 아는 황족과 다르신 것 같아요. 보통 황족이라면 조금 더 품위 있고 고결함이 느껴지며 기품이 넘치지 않나요? 마치 네자르 황태자 전하처럼요.”
어느새 그와 나는 공기가 회오리치는 성의 홀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잡초와 풀이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황족 주제에 기품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엉망이 되어 흩날리는 탓에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저는 황족이 아닌데요.”
“직계든 방계든, 한번 피가 이어진 가문은 영원한 황족이다. 그리고 난 내가 황족이건 아니건 전혀 상관 안 해. 포기하고 보니 그게 훨씬 편하더군. 아무것도 아닌 위치가 말이야.”
잡초 사이를 힘겹게 전진하던 내 걸음은 툴드에게 빌려온 흑마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맞닥뜨렸던 바람을 등지고 앤드류를 마주했다. 그의 뒤로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차례대로 고개를 숙여 가며 금빛으로 나부꼈다.
“당황스럽네요. 만난 지 겨우 만 하루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이런 속 깊은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위로를 해 드릴까요?”
“속 깊은 이야기? 이게?”
날 앞질러 걸어간 앤드류가 나무에 말을 묶어 두었던 줄을 풀어냈다. 이어서 말 위로 올라타는 움직임이 숙련된 기사처럼 그리 가벼울 수가 없었다.
“다소 까칠할 뿐, 형님 앞에서의 나는 매우 순종적인 아우야. 이는 황성 쥐구멍에 사는 쥐 새끼도 다 알 법한 이야기인 것을. 아무래도 모지리 양은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말 위에 자리 잡은 앤드류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설마 같이 타자는 소리야? 어이가 없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봤지만, 내 능력으로 그를 끌어 내리기에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안장 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 대신에 앤드류의 몸이 뒤로 조금 밀렸다.
“귀한 신분이 될 여식이 황성 소문에 어두워서야 쓰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네.”
푸르륵 울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돈 말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귀한 신분이 될 여식이라. 흔들리는 마구 위에서 그 의미를 천천히 되새겼다. 뜬금없이 내가 황족이란 소릴 한 걸 보면 확실히 정체를 들킨 것 같았다. 에젤로트는 누구나 아는 황가의 방계 가문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자비 없이 부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정도 되면 아무것도 몰라도 주변이 다 알아서 해 주지 않을까요?”
잘 안 들리는지 고개를 살짝 숙인 앤드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열 살짜리 어린애나 할 법한 대답이네. 뭐, 나도 그렇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지.”
“전하는 누굴 믿었는데요?”
“누굴 믿었든 너와 무슨 상관이야?”
꼭 말을 해도 저렇게 밉게 하지. 난 턱을 댓 발 내밀고 다시 소리쳤다.
“전하가 믿었던 주변이 별거 아니었을 수도 있죠.”
잘 찔렀는지 앤드류의 표정이 고무를 씹은 것처럼 떨떠름해졌다.
“방금 좀 울컥했으니까 대답해 줄게. 내 아버지라고 돌려 말하면 되는 건가?”
앤드류가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이 이상은 감히 내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못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어깨를 수그리고 정면을 응시했다.
이게 앤드류가 말했던, 내가 황성 소문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일까. 나는 늘 현재에 만족하며 편하게만 살아왔었고, 위기가 닥치더라도 부모님이나 친형제들이 해결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리 살면 되는 줄 알았지.
귀족 여식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소소한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 바람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네자르에게 반한 순간부터? 아니면 내가 전생을 기억해 낸 순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는 자문이었다.
앤드류와 나를 태운 말은 빠르게 달려 네자르의 성에 도착했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들킨 게 맞았네. 말에서 내리자 앤드류 역시 뒤따라 땅을 밟았다. 나는 미친년처럼 산발이 된 머리를 대충 가다듬고 그를 올려다봤다. 앤드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인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 주제에, 하는 짓은 꼭 애 같단 말이야.
“내가 누구인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잠시간 말이 없던 앤드류가 얇은 입술을 열었다.
“낮에도 말했지만, 형님은 시녀가 아닌 이상 옆에 여자를 두지 않아. 옆에 둔 여자가 너처럼 경우 없이 멍청할 리는 더더욱 없고.”
그에 나는 밝게 웃는 낯으로 맞받아쳐 주었다.
“그래? 그걸 알면서 왜 반말이야?”
안 그래도 딱딱했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남극의 빙하처럼 얼어 버렸다. 심정이 얼굴에 훤히 나타나는 게, 마치 판시온을 보는 것 같았다.
“아아, 본인이 황족이든 아니든 전혀 상관 안 해서 그런 거야? 그럼 나도 상관 안 할게. 내가 그런 거 하나는 차암 잘하거든.”
너도 좀 열받아 봐야 해. 제멋대로 사는 거야 알 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날 건드리지는 말았어야지.
아니나 다를까, 앤드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살벌해졌다. 손에 포크를 쥐고 있으면 포크라도 휘두를 법한 분위기였다.
“어이, 모지리 영애. 너, 미쳤냐?”
여기서 대화를 더 이어 봤자 내게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나는 뛰는 듯한 걸음으로 말을 이끌며 도망쳤다.
“잘 가, 앤드류! 나중에 보면 꼭 인사해 줘!”
앤드류의 존재감이 얼마나 강렬한지,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아주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도 잠들지 않은 툴드가 성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의 귀환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었는지, 가까이서 마주한 얼굴이 마치 죽다 살아난 낯이었다.
“……에젤로트 영애?”
“네. 왜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니, 아닙니다.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여서 말이죠, 하하.”
어떻게 웃어도 저리 어색하게 웃을 수가 있을까. 나는 쥐고 있던 말의 고삐를 툴드에게 돌려주었다. 그냥 얌전히 방 안에만 있을 걸, 어째 좀 문제만 일으킨 것 같기도 하고.
“저 남성분은 누굽니까? 아무리 봐도 앤드류 황자 전하 같은데요.”
“맞아요. 우리 오늘부터 친구를 하기로 했거든요.”
내 말을 들은 툴드의 얼굴은 어이가 없다 못해 반쯤 넋이 빠져 있었다.
“대체 무얼 하고 오셨기에 그 앤드류 전하와 가까워지셨다는 겁니까? 저도 나름대로 사교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영애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사교성이 높다고? 어머니가 들으시면 웃다가 졸도할 소리였다. 착각하게 놔두면 두고두고 피곤해질 것 같았기에 정정해 주기로 했다.
“네자르를 따라 했을 뿐이에요. 앤드류 전하가 나 어릴 적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그 말은 즉, 네자르 전하를 따라 하란 소립니까?”
“흐음.”
깊게 고민하는 척 턱을 쓸다가 이어서 조언을 해 주었다.
“더해서 출신이 우리 가문 수준 정도면 될 거예요. 아니면 에자렛 황녀의 약혼자가 된다든지.”
“포기하는 게 빠르겠네요.”
금방 결론을 맺은 툴드가 자신의 말을 이끌고 성 뒤편으로 사라졌다. 금방 포기할 거면서 떠보기는.
마음 같아서는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싶은데, 밤이 늦어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머리칼 사이사이에 톱밥처럼 박힌 잔풀을 정리하며 침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