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그래서 이제는 결혼할 남자까지 찾아야 하는 거예요?”
나는 차마 화려하게 반짝이는 카론의 낯을 마주하며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롤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기분은 카펫 아래의 먼지를 닦아 낼 정도로 우울했지만, 혀 위를 구르는 생크림이 구름 사이를 유영하는 것만큼이나 황홀했다. 그런 내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본 카론이 새 찻잔을 집어 밀크티를 탔다. 위로 부스스 뿌려지는 시나몬 가루가 햇빛에 부서질 듯 반짝였다.
“찾으면 확실히 파혼해 주기는 하신대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심술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밀크티가 내 손에 쥐어졌다.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해. 얼마나 웃겨? 황태자와의 파혼을 위해서 다른 남자를 찾아야 한다니,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거야.”
“지나가던 개도 비웃는다니, 그럼 그 개, 저한테 꼭 데리고 오세요. 제가 아주 혼쭐을 내 줄게요!”
카론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푸흐흐 웃는 동안 잔에 담겨 있던 밀크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훔쳐 간 범인은 물론 내 입술이었다. 엔테라는 주방장의 솜씨가 워낙 좋아서 방문할 때마다 코르셋이 터질 정도로 음식을 집어 먹는 게 일상이었다.
“그럼……. 제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오라버니?”
판시온 엔테라 경을, 아니 소공작을 말하는 건가.
나는 파티의 끝물, 바글바글한 귀족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던 남자를 떠올렸다. 키가 워낙 큰 것도 한몫했지만, 특유의 우아한 이목구비와 꿀물에 초콜릿을 담근 듯 진득한 목소리로 좌중을 지배하는 능력이 아주 탁월한 인물이었다.
기사 출신답게 건장한 체격임에도 그리 부드러운 인상을 심어 주기도 힘들 것이다. 눈빛이 워낙 진중하고 깊어서 그런 걸까. 네자르와는 비슷하면서도 한참 다른 남자였다.
“설마 어떠냐고 묻는 게 혼인 상대의 의미는 아니지?”
“그 의미 맞아요.”
“너무 벽이 높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쳐다보지 않으실걸? 예의상 그렇군요, 라고만 대답하다가 아무 미련 없이 떠나실 거야.”
남자를 어떻게 찾는담. 내 한숨 어린 말에 카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와 아는 사이 아니셨나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요.”
아는 사이, 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우선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으나 마주친 건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심지어 둘 다 대화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문장 몇 마디 나눴던 게 전부였다. 이런 사이를 아는 사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그분이 내 이야기를 하신 적 있으셔?”
“제가 종종 케이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거리낌 없이 들으셨던 것 같아요. 아주아주 가끔은 추임새도 넣으시는 것 같고…….”
“뭐라고 하시는데?”
“음. 역시라든가, 그렇구나라든가.”
추임새이긴 추임새인데, 할 말이 없어서 꺼낸 소리에 더 가까워 보였다.
내가 알기로 판시온 소공작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아홉이었다. 고위 귀족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면 후계자인지 여부를 떠나서 열에 아홉은, 아니 백의 아흔아홉은 혼인한 상태여야 했다. 엔테라 공작가의 차남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스물넷의 나이까지 혼약자 한 명 없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 문득 흐릿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엔테라 소공작께서 만나시는 분이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아. 음……. 록허드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 지금은 다시 혼자가 되신 거야?”
순간, 설풍을 맞은 소나무처럼 카론의 표정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조용히 시선을 돌리고 롤 케이크를 씹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확신하기는 어렵네요. 이상한 여자가 한 명 있긴 있어요. 정확히는 있는 게 아니라 협력하는 거죠.”
협력? 연인 사이에 그런 이상한 문장이 있을 수 있나? 눈꺼풀을 내리깐 카론이 찻잔 안의 홍차를 부드럽게 휘저었다. 이렇게 보니 그녀와 판시온이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특히 진득하면서도 고혹스러운 목소리가 아주 판박이였다.
“저는… 엔테라 가문에서 차별을 받았던 시절의 카론 엔테라를 아주 귀히 여기고 있어요. 그때의 제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성장할 수 있던 건 전부 케이트 덕분이에요. 당신 덕분에 저는 힘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필요도, 누군가를 미워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죠.”
식은 찻물이 그녀의 티스푼을 따라 부드럽게 회전한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였다. 나는 카론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 얌전히 입을 닫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 여자는 미워하지 않기가 너무 힘들더군요. 가문과 케이트에게 부족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왔는데……. 아직은 더 노력해야 하나 봐요.”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카론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걸까. 타인의 가정사라 함부로 물을 수도 없었다.
“네가 노력할 게 어디 있어? 카론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상냥하고 귀여운 사람이야. 나는 지금의 네가 제일 좋아. 네자르보다도 훨씬 더!”
마지막 문장은 의도치 않게 끓는 소리로 튀어나왔다. 이제는 이름만 언급해도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남자를 데려오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물론 날 이성으로 사랑하지 않으니 쉽게 뱉은 소리일 테다. 하지만 내가 필요하다며? 그렇게 필요하면 아부라도 해야지!
새하얀 카론의 손을 부여잡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천사처럼 웃은 카론이 가볍게 손짓을 해 오후의 티 세트를 물렀다. 그리고 나를 따라 소파 등에 기대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케이트가 우리 오라버니랑 혼인하면 좋을 텐데. 그럼 매일 만나서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잖아요.”
“너는 시집 안 갈 줄 알아? 혹시 모르지, 거리가 더 멀어질 수도.”
“엄청 늦게 가면 되죠. 나이 먹으면 아이도 낳기 힘드니 시집가기도 힘들 거예요. 그럼 뻔뻔하게 엔테라에서 계속 나이 먹고, 그러다가 케이트가 아이를 낳으면 내가 대모가 되어 주고.”
“뭐? 절대 안 돼, 카론. 너처럼 우월하고 아름다운 핏줄은 계속 보존되어야 한다구. 차라리 내가 그 애의 대모가 되고 말지!”
카론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묵묵히 그 얼굴을 보던 난 그녀가 그러했듯, 목소리를 낮춰 조용하게 물었다.
“네자르가 반할 만한 여자가 어디 없을까?”
“으음, 저도 듣기만 했던 소리인데, 예전부터 네자르 전하는 여자에 관심이 없으셨다고 해요. 그런데도 케이트는 예외였던 걸 보면…….”
곰곰이 숨을 삼킨 카론의 입에서 낯선 이름이 줄줄 흘러나왔다.
“전부 헛소문일 수도 있죠. 스무 살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라. 악토르 백작가의 캐롤라인 영애와 아마스라 백작가의 릴리 영애… 또 누가 있을까요. 약혼을 치르지 않고 데뷔탕트를 치른 여식이라…….”
카론의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내 정신을 아주 먼 어둠의 세계로 인도했다. 승전 축하 파티가 이제 겨우 하루 흐른 뒤라, 전신의 노곤함이 아직 가시지 못한 탓이었다. 내가 눈을 감은 이후에도 카론의 말은 계속됐다. 동시에 나의 세상 역시 흐릿하게 지워져 갔다.
밤이었다.
나는 아주 늦은 밤에 눈을 떴다. 어디인지는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엔테라의 성임이 틀림없었으니까.
몽중 상태에 가까웠지만, 느릿하게 걸음을 이어 가까운 침실로 이동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자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엔테라에서 하루를 지내고 가는 날이 종종 있기는 했다. 아마 카론이 전서와 함께 우리 가문의 마차를 에젤로트로 돌려보냈을 테다. 다만 문제라면 너무 이른 시간에 잠든 탓인지, 정신이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손에 등불도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문을 열어 복도로 향했다. 시간은 자정이 넘은 새벽이었고 늦은 봄의 정취에서 오는 안온한 싸늘함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 상태로 슬리퍼를 질질 끈 채 1층 홀로 내려갔다. 어두운 성 안에는 오직 내 발걸음과 숨 소리만이 울렸다. 그래,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야외에서 들려오는 뭉툭한 쇳소리가 있었다.
캉, 캉!
맨 처음에는 허리 아래에서 목 바로 위까지 길게 소름이 돋았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열어 성 밖으로 나가니 산뜻한 풀의 향이 폭풍처럼 밀려와 쇳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성 뒤에 마련된 작은 야외 창고 근처였기 때문이다.
“헉, 헉…….”
“몇 번을 지적해 줘도 변하질 않는군. 앞으로 이틀간은 어깨에 힘 빼는 연습이나 해라. 그렇게 몸을 긴장시키고 움직여서는 검을 휘두르다 근육이 망가질 테니까.”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들어가거라. 소란스럽게 걷지 말고.”
“감사합니다!”
키 큰 남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소년이 검집에 검을 쑤셔 넣고 등을 돌렸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은 힘겹게 걸음을 옮겨 내가 선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숨을 참고 성벽에 기대어 어둠 속에 숨었다. 다행히 소년은 내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성안으로 사라졌다.
소년에게 검을 가르치고 있던 남자는 판시온 소공작이었다. 워낙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인지, 단 몇 마디를 듣고도 파악할 수 있었다. 소년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판시온은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하다가 담뱃불을 지폈다. 강하게 타오른 불빛에 그의 얼굴이 아주 잠깐 보였다. 윤곽만 보면 카론이라 해도 믿을 만큼 섬세하고 가녀렸다.
“저도 한번 피워 봐도 되나요?”
눈에 띄게 움찔한 등이 뒤를 돌았다. 경계 어린 눈초리로 볼 것이 분명했기에 재빨리 걸음을 옮겨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두 발자국 앞에 섰음에도 판시온은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듯,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서, 설마 날 잊은 건가?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제까지 기껏해야 대화 두 번 한 게 다였으니까. 그 사실을 인지하자 얼굴로 화르륵 열이 뻗쳤다.
“호,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하녀인가?”
본인이 말하고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 나이트가운 차림이 아무리 가벼워도 하녀처럼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요. 카트리나 에젤로트예요. 에젤로트 가문에서 온 카론의 친구요.”
내 말에 판시온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전이 의심의 눈초리였다면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어 낼 수조차 없었다.
한참 동안 어색한 공기 속에서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이윽고 한숨과 같은 긴 숨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지금 시간에 이런 식으로 날 놀라게 할 사람은 지금 영애밖에 없었어요.”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린 그가 한 발자국 뒤로 떨어져 연기를 뱉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뿌연 연기가 구름처럼 걸쳐지다 사라졌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몰라보게 자라셔서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습니다.”
조곤조곤 건네는 그의 목소리가 건조하기만 한 공기와 달리 습하고 무거웠다. 나, 설마 아직까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만큼이나 판시온의 목소리는 녹녹하고 유연했다.
그는 내 기억 속의 판시온 엔테라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의 판시온이 무쇠처럼 단단하고 격식 있는 기사였다면 눈앞의 남자는 왜인지 모를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더니.
그 긴 시간 동안의 록허드는 사포질 못 한 판자보다 더 거칠어진 느낌이었는데, 판시온은 정반대였다. 외양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예전과 그대로인 사람은 네자르밖에 없는 듯했다. 철옹성은 판시온이 아닌 네자르였던 것일까.
“네, 저야 별일 없이 잘 지냈지요. 판시온 경……. 아니, 소공작께서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내 말에 그가 상냥하게 웃었다. 늘 태양 아래에서 봐 왔던 표정을 어두운 새벽에 마주하니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냥 유하고 친절한 웃음이라 생각했건만, 흐릿한 연기에 가려진 탓인지 무언가 다소 답답했다.
“이렇게 늦은 새벽에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너무 이른 시간에 쓰러졌더니 잠이 안 와서요. 설마 저 말고도 잠을 설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괜찮다면 하나만 피워 봐도 될까요?”
새끼손가락 길이의 담배를 입에 문 판시온이 내게 하얀 담뱃대 하나를 건넸다. 신기한 기분으로 이리저리 둘러보고, 향을 맡고, 입에 물 동안 그가 투박한 형태의 라이터를 내밀었다.
“한 번도 피워 보신 적 없습니까?”
“네.”
“의외군요. 제가 불을 붙이면 깊게 빨아들이세요.”
의외라니, 무슨 의미려나. 새빨간 불꽃이 바로 앞에서 점화됐다.
다과회를 즐길 때마다 함께 자리한 여식 중 흡연을 즐기지 않는 인물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나마 기관지가 약한 카론이 담배를 멀리하는 정도였는데 그런 카론마저도 종종 승마를 즐기다 연기를 피울 때가 있었으니까.
전생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던 탓일까. 흡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던 난 이곳에서 성별, 나이 상관없이 다수가 흡연을 즐기는 모습에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마침 해가 지고 시야가 어두워져 이유 모를 자신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아니면 반쯤 비몽사몽인 상태로 판시온을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 연유가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담배 연기를 맛보았다는 점이었다.
감상은 단출했다. 매우 별로다.
“콜록, 콜록……. 제가 상상한 그대로의 느낌이네요.”
사람들은 대체 이 연기의 어느 부분에서 매력을 찾는 거지? 심지어 목구멍으로 넘긴 연기는 둘째 쳐도, 담뱃대에서 타오르는 연기가 아주 최악이었다.
판시온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내다 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죽을 맛으로 담배를 얼굴 근처에서 멀찍이 떨어뜨리고 연기를 뱉었다.
“첫 느낌이 썩 달지만은 않지요. 한데 담배는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의도치 않게 얼굴을 구기며 판시온을 쳐다봤다. 그의 담배는 이미 야외 테이블 위, 재떨이 속을 굴러 싸늘하게 식은 꽁초가 된 후였다.
“다 피우는데 저만 안 피우면 이상하잖아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그가 옅게 웃었다.
“남들 할 때 안 하면 이상한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남들과 조금 다른 행동을 하는 건 눈에 띄는 행동이 되니까요. 별로 달갑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마치 비슷한 경험을 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다소 껄끄러운 물음이었으나, 잘 대답하던 중 얼버무리는 건 우스운 것 같아 짧게 답했다.
“맞아요. 제가 그리 사회적인 사람은 못 되어서요.”
특히 늘 옆을 지켜 주던 네자르가 떠난 후 더 절실히 깨달았다. 당초에 5년이 넘도록 카론을 제외하곤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부터가 평균치 행적은 아니었으므로. 생각해 보면 타인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누는 대화도 내게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 말은 그리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군요. 제가 느끼기에는 충분히 사교적이십니다.”
“제가요? 진심이세요? 어느 방면이요?”
괜히 기쁜 마음에 고개를 홱 돌리니, 털지 못한 담배의 재가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점차 뜨거워지는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의 끝을 조금 더 멀리 밀어냈다. 판시온은 내 적극적인 물음에 당황한 듯 눈만 껌뻑이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전히 저의 의견일 뿐입니다만, 영애만큼 제게 편히 말을 건네신 분은 록허드 경과 브레이트 경 외에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그게 칭찬인가요? 사실 저도 카론을 제외하곤 이렇게 편히 대화하는 상대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어둠 속에서 판시온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때마침 멀리 걸치고만 있던 담배가 손가락 한 마디만을 남겨 두고 있었기에 미련 없이 재떨이 위로 구겨 넣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처음이라니, 믿기지 않는군요. 그들의 대화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닙니까?”
“문제라면 저에게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의식해서인지 단순한 안부 인사에도 긴장하거든요.”
물론 또래 여식을 대하는 경우에만 그러했다. 형제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남자를 대할 때는 딱히 눈을 마주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닌가? 판시온을 처음 만났을 때 쿵쿵 뛰던 가슴을 생각하면 또 다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첫인상이 그리도 강렬했던 인물은 네자르를 제외하고 판시온이 처음이었으니까. 예외로 두어도 될 듯싶었다.
“이렇게 신세 한탄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말이 술술 새어 나왔네요. 오늘 드린 말은 부디 흘려들어 주세요.”
밤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 흔한 수치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 봤자 겨우 몇 마디 오갔을 뿐이지만. 손을 들어 코 근처로 가까이 하자 그새 밴 역한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찝찝함에 살살 손을 털어도 그 진득한 냄새가 어디로 갈 리 없었다.
“쉽게 잊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원하신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긴, 밥 먹듯 찾아오는 여동생의 친우가 사회부적응자라는데 잊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테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판시온은 몸을 돌려 야외 테이블 위에 놓인 등불에 불을 붙였다. 삽시간에 밝아진 시야가 익숙하지 않아 고개를 돌릴 동안, 그가 내게 등불을 건넸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이만 침실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엔테라의 손님이었고, 손님은 주인의 부탁에 마땅히 따라 주어야 하는 위치다. 순순히 등불을 받아 내고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 안의 불씨가 터질 듯 일렁였다.
“저, 하나만 여쭈어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혹시 주변에 괜찮은 남자 없으신가요?”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나와 그 사이로 흘렀다.
“제가 그렇게 많은 건 바라지 않고……. 네자르 전하 앞에서만 당당한 남자면 충분해요.”
판시온은 내 물음의 의미를 되새기듯 느리게 침을 삼켰다.
“가진 것 없이 당당하기만 한 건 자만이며 허세입니다. 영애에게는 소개해 드리고 싶지 않은 부류군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우 타당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어긋난 즉시 다시 평온을 되찾은 눈매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 맞는 말씀이에요. ……그래도 주변에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주세요.”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런 부류인지 아닌지는 만나 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이윽고 소리 내어 웃은 판시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본 그의 표정 중 가장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
록허드는 눈을 뜨자마자 앓는 소리를 먼저 뱉었다. 뱉었다기보다는 절로 나왔단 표현이 더 알맞았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는 우선 준비된 생수 한 포트를 막힘없이 들이켰다. 몇 년간 자제하던 술을 고삐 풀린 말처럼 미친 듯이 들이켠 탓인지 입 안이 바짝 메말랐다.
당장 어제 승전 기념 파티가 마무리되던 시점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그때 즈음부터 모두가 네다리로 기어 다니기는 했지만.
그는 황성에서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격식만을 갖춘 채 곧장 네자르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침 문을 닫고 나오던 론이 록허드를 알아보고 작게 웃었다.
“두 분 다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듯한 얼굴이시군요. 귀환하신 날의 낯빛도 이렇지는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역시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던 겁니까?”
언제나 느끼지만, 이 능글맞은 황태자의 보좌관은 가볍게 건네는 말도 죄다 뼈 박힌 소리처럼 느껴졌다. 록허드는 아직도 코 근처를 맴도는 알코올 향에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간만에 생각 없이 들이부었더니 죽을 맛이기는 해. 아직도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야. 네자르는 안에 있나?”
“계십니다. 안색을 봐선 밤을 새우신 느낌이지만요. 차를 올리라 전할까요?”
“부탁하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록허드는 론을 지나쳐 네자르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오전에 걸맞게 널따란 서재형 집무실은 새하얀 햇빛으로 만선이었다. 그 한가운데 오롯이 놓인 책상에서 안경을 걸친 네자르가 소리 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은 록허드는 발걸음을 이어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다. 동시에 네자르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도 일어났군.”
이렇게 들으니 심해 바닥에 현무암을 긁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소리였다.
“밤새 황성이라도 한 바퀴 돈 거냐? 목소리가 왜 그래?”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밥 먹듯 검을 휘두르던 자신보다 더 괴물 같은 체력이었다. 하지만 록허드의 물음에도 네자르의 시선은 여전히 서적을 향해 있었다.
“록허드.”
“음.”
“펄웰츠 후작이 네게 관심을 보였어. 장녀가 올해 데뷔탕트를 치렀다지.”
“……설마 지금 나보고 남자를 상대하란 소리냐?”
그제야 네자르가 렌즈 너머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록허드를 노려봤다.
“장녀가 있다는 소리는 대체 어느 귀로 흘려들은 거야?”
“싫다.”
록허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널 돕기로 한 것도 사생활에 간섭을 받지 않는단 조건이었어. 그 후작이 없으면 안 될 만큼 네 위치가 형편없는 것도 아닐 테고.”
오히려 정복 전쟁이 끝난 후 네자르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지다 못해 견고해지기까지 했다. 더는 현 황후 태생인 앤드류 황자가 황제의 총애만을 등에 업고 날뛸 수 없다는 의미였다.
“후작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같은 소리만 반복하기에 전했을 뿐이야. 관심이 있다면 후작가에 방문해 보란 뜻이지.”
“케이트보다 어린 여자라니. 차라리 애를 기르라고 해라.”
그 말에 픽 웃은 네자르가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넌 어제 케이트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록허드는 본인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네자르를 응시했다.
어제의 케이트. 재회의 순간을 돌이켜 보면 놀라기는 놀라되, 확실히 못 알아볼 수준은 아니었다. 무심코 여전할 거라 여겼던 탓이었을까.
분명 불만스럽게 삐죽 튀어나온 표정은 그대로였는데 그 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또래 소녀에 비해 유독 통통했던 볼살은 유령의 그림자처럼 사라진 후였고, 땅콩만 했던 키가 훌쩍 자라 어머니의 어깨 위를 웃돌았다. 성숙해진 건 둘째 치고 설마 어깨를 훌러덩 벗은 채 나타날 줄이야.
숙녀인 척하는 막냇동생을 떠올리니 록허드는 돌연 기분이 떨떠름했다.
“확실히 몇 년간 못 알아볼 정도로 자라긴 했지. 이제 혼인만 치르면 딱이겠군.”
“이제 슬슬 날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폐하께선 이미 말씀하셨을 텐데.”
록허드가 네자르를 따라 혁혁한 공을 세운 뒤부터, 황제의 에젤로트를 향한 총애가 날이 갈수록 드높아지고 있었다. 더불어 대개의 황위 후계자가 스무 살 전에 혼인을 치르는 반면에, 네자르는 약혼 서약만 거행한 상태로 20대 중반이 되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록허드의 물음에도 네자르에게선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냉랭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말없이 팔짱만 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자르의 감정을 저리도 노골적으로 자극할 만한 인물은 몇 없었다. 그리고 그는 몇 없는 대단한 인물에 대해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내 록허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난 아무런 바람도 넣지 않았다는 걸 알아 둬.”
네자르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피로감이 상당히 쌓여 있는 듯했다. 록허드의 반쯤 장난기 서린 말에도 여전히 표정에 서린 한기를 풀어내지 못한 것을 보면.
“설마 아버지께서?”
“백작님이 거절하실 리 없지.”
“그럼 네 말은 케이트가 혼인식을 미루자고 요청했다는 의미일 텐데……. 설마하니 그 케이트가? 다름 아닌 너와의 혼인을?”
말하면서도 농담 따먹기를 하는 기분이었으나 네자르의 무덤덤한 얼굴을 보니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조금 완화된 듯싶었던 두통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록허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약혼 서약서를 작성하자마자 숙녀가 된다, 뭐다 난리를 쳤던 것 같은데……. 태양이 서쪽에서 뜨나 싶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해. 그사이에 순애가 식기라도 했던 건가? 뭐,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럴 만도 하지.”
마지막 문장은 명백한 실수였다. 속으로만 생각해도 될 소릴 하필이면 네자르 앞에서 지껄이다니. 록허드는 네자르의 눈총을 받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기분이 안 좋았던 거냐? 그새 마음 바꾼 케이트에게 삐치기라도 했다, 이거야?”
얼마나 몸이 노곤하면 눈 껌뻑이는 데만 수 초가 흐를 만큼 느리다.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댄 네자르가 허공에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만큼 얇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문득 궁금증이 일기는 했다. 마냥 철부지 애 같았던 케이트도 이제 엄연한 여인이 되었으며, 둘 모두 성인이 된 만큼 관계의 변화 역시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록허드가 궁금한 건 단 하나였다. 네자르에게 카트리나 에젤로트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는 타 젊은 귀족 영식처럼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남성이었으나, 동시에 황족 특유의 보수성과 요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질기고 질긴 황소고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네자르는 과연 요새를 뚫어 내고 약혼자인 케이트를 여동생이 아닌 여성으로 느낄 수 있을까? 아니, 느끼더라도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약혼 서약까지 치른 마당에 굳이 케이트의 갈대 같은 마음을 고려해 줄 필요가 있나? 폐하의 허락을 받고 곧바로 진행하면 될 것을.”
마침 오후 티 세트를 준비해 온 시녀가 테이블 위로 티포트와 다과를 차례차례 준비했다. 록허드의 공복을 염두에 두었는지 간단하게 비스킷만 차려지던 이전과 달리 포슬포슬한 빵 사이로 햄과 야채가 끼어 있었다.
즉시 티포트를 내려 옅게 홍차를 우린 네자르가 말했다.
“이미 폐하께 혼인 날짜를 연말로 미루겠다고 말씀드렸다. 부케도 날아가 버릴 거센 한겨울에 혼인을 치르게 생겼어.”
애지중지한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날짜까지 미룰 줄이야.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웃던 록허드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 애가 뭐라 말하든?”
잠깐 생각하듯 찻잔을 두고 숨을 고른 네자르가 록허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력이 없는 탓인지 표정 근육 전체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세상 떠나가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됐다. 너한테 조언을 구해서 내가 무슨 덕을 보겠다고. 여자에는 코빼기도 관심 없는 놈이 잘도 도움을 주겠다.”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이래 보여도 친남매인데, 혹시 모를 일이지. 아주 중요한 힌트를 줄 수도 있잖아?”
록허드의 말에 날카롭게 눈매를 세운 네자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넌 무시당해도 할 말 없는 놈이야.”
누가 보면 그가 아닌 네자르가 케이트의 친오라비인 줄 알 것이다. 록허드는 괜히 신경을 건드릴 말과 행동을 삼가고 맹물을 따라 마셨다.
잘 생각해 보면 북벌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케이트의 입에 오른 외간 남자가 존재하기는 했다. 심지어는 얼굴 한번 보여 달라며 평소에 안 하던 짓까지 했었지. 판시온 엔테라. 하지만 백번 양보해 케이트가 판시온 소공작에게 빠졌다고 해도, 시기상 적절하지 않았다. 5년간 제국을 벗어나 있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설마 릭 그놈이 케이트에게 또 이상한 소릴 한 건 아니겠지. 이마를 부여잡은 록허드가 네자르가 그랬듯, 소파 뒤로 몸을 크게 젖혔다. 에젤로트로 돌아가자마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
눈을 떴을 때 엔테라의 태양은 이미 중천이었다. 에젤로트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기상 시간을 미루고 미뤘겠지만, 이곳이 엔테라인 만큼 게으름을 피울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치장을 마치고 침실을 벗어났을 땐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카론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방 근처를 기웃거렸음에도 이상하게 작은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나와 나를 반겼을 여인이 안 보이니 무언가 꺼림칙했다.
멍하니 창밖의 하늘을 구경하던 차에 엔테라를 방문한 마차가 보였다. 나는 다시 침실의 문을 열고 나와 계단 앞에 섰다. 1층에서 키가 크고 세련된 인상의 여인이 카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야?”
지나가는 시녀를 붙잡고 턱짓을 하자 대답은 금방 나왔다.
“아, 저분은 엘리제 로망드 영애이십니다.”
“엘리제 로망드?”
로망드라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가문이었다. 내 의문을 눈치챈 시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판시온 님과 아카데미 동문 사이인 분입니다. 졸업 후 종종 저희 성을 찾아오시곤 하죠.”
그리 말하는 시녀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무뚝뚝한 얼굴에 기계적으로 말을 뱉는데, 그 모습이 그리 어색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둘을 응시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여자의 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말 아쉽네요. 어째 저는 영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것 같아요. 크게 바라는 것도 없이 카론 영애와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인데…….”
“저도 아쉽지만, 언젠가 또 기회가 찾아올 거라 생각해요.”
카론은 여느 때처럼 온 세상이 환해질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정작 앞에 선 엘리제는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은 듯, 두 손을 빙빙 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 카론 영애. 혹시라도 제가 불편하다거나 꺼림칙한 건 아니시죠? 자꾸 거절하시니 제가 실례를 하는 건가 해서요.”
“그럴 리가요. 오라버니의 친우분은 엔테라의 귀한 손님입니다. 전혀 실례되는 말씀이 아니에요.”
카론의 말은 조금 미묘했다. 요점은 방문이 불편하냐는 물음이었는데, 그에 대고 엔테라의 귀한 손님이라 대답하다니. 내 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카론은 엘리제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시녀들의 눈초리가 너무 따갑기에 방문을 환영받지 못하는 줄 알았지 뭐예요? 후후. 누가 보면 가문의 사생아라도 찾아온 줄 알겠어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은 엘리제가 아차, 하는 얼굴로 급히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하얀 얼굴을 곱게 일그러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영애. 제가 너무 생각 없이 말을 뱉고 말았네요. 카론 영애가 사생아란 사실을 조롱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제 마음, 이해하시죠?”
“물론이에요. 일일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쩜……. 얼굴만큼 마음도 고우셔라. 그 누구도 카론 영애가 공작가의 사생아란 사실을 믿지 못할 거예요. 저만 해도 당신처럼 완벽한 귀족 여식은 본 적이 없는걸요. 뼈와 살을 깎아서 예법을 익히셨을 텐데, 늘 느끼지만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맞는 말씀이세요.”
카론의 목소리는 딱딱하면서도 고아했다. 그에 다시 입꼬리를 올린 엘리제가 말을 이었다.
“제가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그래서… 판시온은 안에 있나요?”
“오라버니는 지금 네자르 전하의 부름을 받고 외출하신 참입니다.”
“어머, 연락하고 찾아올 걸 그랬나?”
카론의 얼굴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그리 느낄 것이다. 카론은 앞에 선 엘리제가 무슨 말을 하든 적당히 맞장구만 쳐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둘의 대화에 온 신경이 쏠린 건 엔테라의 시녀와 하녀 들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귀가 닫힌 척해도 그들이 엘리제를 지나칠 때마다 숨기지 못한 화가 천장 위로 방출됨이 느껴졌다. 그건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이기에 카론이 한 수 져 주어야 하는 거지?
카론과 처음 이야기를 주고받던 시절이 떠올라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걸음걸음마다 힘을 주기 시작했고, 여실히 울리는 구두 소리에 둘의 이목이 집중된 건 금방이었다. 의아함에 젖은 얼굴에서 입술이 채 열리기 전, 내가 먼저 선수를 쳐 카론에게 말했다.
“그만 가 봐야겠어요, 카론. 못다 한 이야기는 서신으로 나누도록 해요. 록허드 오라버니가 귀성하였으니 에젤로트를 너무 오래 비워 두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싶어서요.”
눈을 크게 뜬 카론이 곁으로 다가온 내 손을 그러쥐었다.
“벌써요? 점심은 먹고 가는 게 어때요? 곧 식사가 완성될 거예요.”
“아니에요. 오늘은 어쩐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카론만 괜찮다면 모레쯤에 서신을 한 통 보낼게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서신 기다릴게요.”
다가오는 카론을 가볍게 안고 몸을 틀어 밖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엘리제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고 지나가게 된 건,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었다.
“아.”
몰랐다는 듯 고개를 돌려 엘리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보니 카론만큼이나 고운 선에 게슴츠레 뜬 눈매가 상당히 고혹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 이 여자가 고혹적이냐, 아니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털었다.
“카론, 이분은?”
늘 그래 왔듯 카론은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엘리제 로망드 영애이십니다. 잠시 방문하셨어요.”
“로망드? 우리 제국에 그런 가문이 있었나?”
가슴을 펴고 한 발자국 걸음을 앞세워 여인의 전신을 훑었다. 내가 생각해도 한참 예의 없었는데, 당사자는 더욱 그렇게 느꼈겠지. 그러나 생각과 달리 엘리제의 얼굴은 퍽 침착했다. 그녀는 밝게 웃는 낯으로 내게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나누신 말씀으로 추측하건대,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 맞으신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엘리제 로망드라고 해요. 그리 큰 영지는 아니지만, 로망드는 제도에서 일곱 시간 내 거리에 위치한 곳이랍니다. 아카데미 1학년 기본 과정인 제국 지리 첫 수업에 반드시 언급되는 지역이지요. 또한 모든 여식이 기본 소양으로 알아 두어야 할 영지이기도 하고요. 언제 한번 꼭 찾아와 주셨으면 해요.”
누가 들어도 멍청하다는 소릴 빙 둘러 표현한 말이었다. 이름을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3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듣는 사람 기분 상하게 만드는 데 도가 튼 여자라는 것 정돈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는 카트리나 에젤로트였다. 타 귀족 가문의 여식들이라면 온갖 말솜씨와 가문의 명예를 동원해 기 싸움을 주고받았겠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머리에 든 게 적은 멍청이인 것이다.
“로망드 영애.”
“네.”
“지리 첫 수업에 언급되는 영지에서 태어나셔서 참 좋겠어요. 고귀한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내 물음에 엘리제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고귀한 가문이라뇨.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제가 감히 에젤로트 영애 앞에서 어찌 주름을 잡겠어요?”
“그럼, 알면서도 그렇게 재수 없는 어투로 절 가르치신 건가요?”
보란 듯이 여유롭던 엘리제의 표정에 아주 살짝 금이 갔다.
친구가 없으면 이런 점이 좋았다. 신경 쓸 관계가 없으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거의 유일하다 싶은 장점이었음에도,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게 그 장점이니까. 나는 카론처럼 속마음을 숨기고 그럴싸한 웃음을 걸칠 재주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웃음기 하나 내비치지 않은 차가운 낯으로 엘리제를 응시했다.
“무엇이 그리 자신만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깨는 사람 봐 가면서 펴도록 해요. 제가 이래 보여도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민감하거든요.”
이 발언이 후에 좋지 않은 파급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머나먼 일까지 계산할 머리가 되지 않으므로 지금의 내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때문에 엘리제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오지 마세요, 카론. 그럼 서신 보낼게요.”
나는 엘리제의 얇은 입술이 열리기 직전에, 카론의 어깨를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렸음에도 막상 마차에 오르려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일단 내지르기는 했는데 혹여나 카론에게 피해가 가면 어쩌지?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건만, 머릿속은 후회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경솔하면 안 돼. 뱉기 전에 한 번 생각하고,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마음을 이렇게 먹어 봤자 내일이면 또 같은 짓을 반복할 게 분명했다.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종의 배웅을 뒤로하고 마차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내부에 큰 신장의 남자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헉!”
누, 누구지? 안 그래도 발판에 구두 굽을 걸치던 중이었기에 깜짝 놀란 나는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 순간, 나만큼이나 놀란 듯 긴장으로 크게 확장된 동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무언가가 나의 몸을 강하게 붙잡았고, 아득하게 느껴졌던 뒤통수 너머의 감각이 순식간에 무던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판시온의 단단한 팔이 나의 허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마차에 앉아 있던 이는 다름 아닌 판시온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음을 방증하듯 다듬어지지 않은 숨이 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세상에,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네. 하마터면 이번 생은 스물이라는 나이에 요절할 뻔했어.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고를 동안 허리를 받치던 팔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마침 저도 황성에 가는 길이었기에 동승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하녀에게 말씀을 전하라 일렀건만, 전달받지 못하신 모양이네요.”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렇다 답하지 못했다. 치장을 받으면서도 꾸벅꾸벅 졸던 탓에 내 부주의로 놓쳤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 아니요! 카론과 작별을 하면서 제가 깜빡 잊었나 봐요. 죄송해요. 추태를 보였네요.”
눈앞의 남자와 새벽에 마주쳤던 남자는 분명 동일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제만큼 말이 술술 뱉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말간 정신으로 대할 때마다 머리에 과부하가 오는 느낌이었다.
“아닙니다. 신경 써 드리지 못한 제 탓인 것을요.”
이전부터 느껴 왔지만, 판시온은 손끝의 움직임 하나, 어조의 음률 하나가 참 교과서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찌 이리도 완벽할 수가 있지? 단순히 어른이기에 보일 수 있는 태도가 아닌, 사람 자체의 특성처럼 보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가장 완벽한 거푸집에 녹아든 쇳물이 그와 같을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 보니 홀이 다소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마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바퀴 굴러가는 소음이 귓등을 때린다. 소란이 있기는 했지. 그의 말에 진한 장미꽃 향을 풍기던 엘리제 로망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판시온이 성을 비우기 전이었음에도 카론은 그의 부재를 입에 담았었다.
그처럼 무례한 여자가 판시온의 아카데미 동기라고? 설마 고이 숨겨 놨다던 애인이 엘리제 로망드는 아니겠지.
나는 짧으면서도 긴 고민 끝에 아무 일도 없던 척,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론이 저의 식사를 챙겨 준다고 잠시 소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 외에는 별일 없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카론이 둘의 만남을 방해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다행히 판시온은 나의 말을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후 그가 소리도 없이 잠들었던 탓에 마차 내부는 침묵에 휩싸였다. 괜히 어색한 공기 속에서 대화를 이으려 버거워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렇게 수 분이 흐른 후, 나 역시 눈을 감으며 잠깐의 수면을 청했다.
***
“케이트!”
꿈인가? 슬쩍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바람에 살랑이는 풀이 뺨을 간질이고, 푸른 하늘 아래로 흰 구름 한 점 안 떠다니는 걸 보니 아직 꿈속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잔디 위에 깔아 두었던 천을 빼 몸을 덮었다. 아무리 완연한 봄이라 하여도 야외에서 잠에 들려니 공기가 서늘했다.
쿵! 쿵!
그때쯤이었다. 고요했던 땅이 쿵쿵 울리던 시점이. 소음의 간격은 짧았으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말굽 소리였다.
“그새 다 큰 줄 알았더니만, 대낮에 풀밭에 나와 뒹굴고 있어? 데이지에게 한 소리 듣고 싶은 거냐?”
강한 힘에 몸이 일으켜졌다. 누구인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기에 눈을 감은 상태로 붙잡힌 팔을 밀어냈다. 당연히 내 팔을 잡은 손은 꿈쩍도 안 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휘청거리는 몸이 안장에 올라타 있었다.
까만 몸체와 그보다 더 까만 갈기. 비록 목 근처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자잘했지만, 나는 이 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바로 록허드의 사랑스러운 애마인 아나스타샤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는데 성 한 바퀴는 돌아야지? 방까지 데려다줄 테니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고 그래? 성에 지금 나랑 어머니밖에 안 계신데! 빨리 안 내려놔?”
“이랴!”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는지, 뒷자리에 오른 록허드가 말을 끌고 초원을 내달렸다. 나는 바람이 흩날리는 머리칼을 부여잡고 정수리 위를 향해서 냅다 소리쳤다.
“나이를 먹었으면 나 좀 그만 괴롭혀, 이 말에 미친 놈아!”
“너야말로 스물이 된 주제에 아직도 입이 험하구나?”
“그럼 여기서 말이 곱게 나오겠어?”
록허드는 소리 내어 웃기만 할 뿐,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달림에도 비몽사몽인 기분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한참 록허드와 실랑이를 벌이던 난 결국 말다툼을 포기하고 승마복을 걸쳐야만 했다. 이런 부분에선 준비성이 얼마나 철저한지, 근 2년간은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던 아나스타샤의 새끼가 마구를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록허드에게 눈총을 보냈다.
“그런 걸 대체 왜 피우는 거야? 나는 텁텁하고 기분만 나쁘더라.”
꽁초를 시종에게 건넨 록허드가 내 말에 천천히 등을 폈다.
“또 누굴 따라 배운 거냐. 릭? 에든 형님?”
“엔테라 소공작.”
이름을 들은 록허드의 얼굴이 묘하게 떨떠름해졌다. 설익은 감자를 한 움큼 물어 씹으면 저런 표정일까. 승마 모자를 머리에 올리고 훌쩍 큰 흑마에 올라 가볍게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싫다며 난리를 친 것치고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어머니와 잡담이나 나눌 것이지, 꼭 귀성 다음 날에 이렇게 한바탕 치러야겠어?”
승마 장갑 안으로 손을 쑤셔 넣은 록허드가 시종을 물리고 말 위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그 시점에, 성문 근처에서 하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가씨! 엔테라에서 서신이 한 장 도착했어요!”
“서신? 카론에게서?”
내일 오전에 보내려 했는데, 설마 먼저 보냈을 줄이야. 종이를 뜯어내고 대강 내용을 훑으니 데보라 부인이 주도하는 살롱에 동행하자는 내용이었다. 서른 이하의 젊은 여식 및 귀부인만이 초대되는 살롱이라…….
아무래도 네자르와 나와의 관계를 의식한 제안 같았다. 친절하기도 하지. 음음, 역시 내게는 상냥한 카론밖에 없어!
“누가 보면 연애편지라도 받은 줄 알겠네. 카론 엔테라라면 네 또래의 그 어여쁜 아가씨 아니야? 설마 이름만 빌린 남자라든가.”
“참 나,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안 달려? 그럼 나 먼저 간다!”
서신을 호주머니에 구겨 넣자마자 말을 몰아 튀어 나갔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전신의 흔들림과 말굽 소리가 놀라우리만치 상쾌했다.
어느새 뒤쫓아 온 록허드는 보란 듯이 날 앞질러 다리와 냇가를 건넜고, 하염없이 내달리는 질주는 석양이 져 갈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허술한 체력은 벌써부터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잠깐만 쉬자. 너무 오랜만에 달렸더니 힘에 부쳐.”
미친 듯이 뛰는 록허드를 붙잡는 데만 3~4분은 소요된 기분이었다.
나는 한참 전에 지나쳤던 냇가로 돌아와 목을 축였다. 따라 내린 록허드가 숨을 고를 동안만 앉아 있으려 했으나, 몰려오는 노곤함에 몸을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휴식이 끝을 보이려 할 즈음, 내가 먼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자르에게서 혼인이 미뤄졌단 소릴 들은 거지?”
하나둘 상의의 단추를 풀던 록허드가 내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벽안은 분명 의외의 감정을 담은 채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갑자기 날 끌고 나올 이유가 없어. 너는 예전부터 나랑 네자르의 관계에 민감했잖아?”
록허드는 내 말에 흘리듯 웃음을 뱉었다. 흙길을 터벅터벅 울리는 부츠 굽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곧 내 옆자리로 다가와 엉덩이를 댔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다가도… 은근히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승마 모자를 풀어 던진 록허드에게서는 5년 전과 다르게 답지 않은 차분함이 느껴졌다.
“이봐, 케이트. 속 시원하게 말해 봐. 대체 어느 가문의 영식을 마음에 둔 거냐?”
뜬금없는 소리를 입에 담는 걸 보니, 네자르가 말을 골라서 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는 늘 그런 사람이지. 나는 부츠 위로 쏟아진 석양빛을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말 잘 꺼냈어. 마침 마음에 둘 남자가 필요해서 그런데, 주변의 괜찮은 남자 한 명만 소개해 줄래?”
주홍색 노을 속에서 부상하는 먼지가 천천히 부츠 위로 안착했다.
“맹세컨대 백방을 뒤져도 네자르보다 못할 거다.”
“나도 알아. 그래도 견줄 만한 사람 정도야 한 명쯤 있을 거 아니야.”
“그런 남자 찾기가 쉬운 줄 알아? 네가 자꾸 잊나 본데, 에젤로트는 카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가야. 네 의사는 둘째 치고 아버지가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에게 널 보내겠어? 적어도 에젤로트와 비견해 한숨 쉴 일은 없어야지.”
에젤로트에 꿀리지 않는 지위와, 명예를 가진 남자.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판시온 소공작은?”
록허드의 표정이 다시 미묘하게 굳어졌다. 아까가 덜 익은 감자를 삼켜 낸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덜 익은 파프리카를 삼킨 표정이었다.
“네자르를 걷어차고 엔테라에 간다고? 황태자의 체면을 아주 철저히 구겨 버릴 심산이군. 차라리 에젤로트의 평기사와 사랑에 빠지도록 해. 그렇담 파혼 연유 정도는 숨길 수 있을 테니까.”
마냥 홀로 상상하던 그림이 록허드와 대화를 나누자 그럴싸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의 말이 가장 타당했다. 단순히 나 좋자고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아…, 세상에서 나만큼 처량한 사람도 또 없을 거야. 하필이면 좋아하는 사람의 애인을 찾아 주는 처지라니, 그것도 겨우 스무 살에!
우울해진 기분으로 호주머니에 구겨 넣어 놨던 서신을 펼쳤다. 대충 훑었던 부분을 꼼꼼하게 읽으니 종이 한 면의 반이 생소한 여인들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릴리 아마스라, 캐롤라인 악토르…….
이 중에서 네자르의 취향을 찾아야 한단 생각에 또 한 번 가슴이 답답해졌다.
“록허드, 네자르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꿩 대신 닭이라는데, 쓸모없는 록허드의 조언조차 아주 절실한 시점이었다. 한동안 말 한마디 없이 침엽수림의 안쪽을 응시하던 그가 대답했다.
“흠, 그거 상당히 어려운 질문인데.”
고개를 돌린 록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꼼꼼하게 뜯었다. 눈꼬리, 이마, 입술, 뺨 할 것 없이 작은 틈 하나하나를 아주 면밀하게 살피는 모습이었다. 굴러가는 눈동자 속 내 뾰로통한 표정이 훤히 내다보였다.
“확실히 조금 독특한 취향 같기는 해…….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말썽꾸러기? 사고뭉치?”
옛날이었다면 진심으로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런 말장난이 통할 리 없었다.
“누가 네 머릿속의 나를 묘사하래? 내가 물은 건 네자르의 이상형이야.”
“말을 해 줘도 난리군.”
록허드는 진지하게 고민이라도 하듯 턱을 살살 쓸어내렸다. 이윽고 보랏빛으로 차갑게 식은 입술 안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릴리 아마스라.”
그에 난 인상을 구기며 카론의 서신을 다시 쥐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카론이 언급한 여식 중에서도 분명 비슷한 이름이 있었다.
“굳이 다른 사람으로 고르자면 아마스라 가문의 차녀 정도가 알맞겠네.”
***
릴리 아마스라. 재작년 황립 아카데미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아마스라 백작가의 금지옥엽. 명문 귀족가의 여식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문학을 비롯한 역사학, 철학,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예술학까지였다.
아는 것이라곤 쥐똥만큼밖에 없는 나조차 물리학과 천문학, 건축학은 여성이 발을 디딜 수 없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발 제국, 아니 이 세계에서 수학과 물리는 남성의 전유물이다. 그 때문인지 학식 좀 쌓았다, 하는 귀족 여식이라 하여도 대개가 나눗셈도 겨우 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릴리 아마스라가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했다고? 그것도 심지어 황립 아카데미에서?
“그게 가능해?”
내 물음에 록허드가 무료하게 깜빡이던 눈을 내게로 향했다.
“보통은 불가능하지. 그쪽 계통처럼 꽉 막힌 학문은 꼰대도 많아서 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 그러니까 아마스라의 여식이 물리학과 수석 졸업생이 된 건 그해 최고 이슈 중 하나였겠지. 듣기로는 내로라하는 보수파 교수들도 한눈에 반해 대학원 입학 제의가 빗발쳤다더군.”
말만 들어도 심상치 않은 여자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그런 엄청난 인재가 네자르의 이상형에 가깝다니……. 난 정말 손톱만큼도 가망이 없겠구나.
“케이트, 그래서 여기까지 나는 왜 끌고 나온 거냐?”
그리 말한 록허드의 목소리는 한 줌의 힘도 없이 축 처진 상태였다. 난 대강 훑고 있던 에젤로트 관광 책자에서 눈을 떼 그와 눈을 맞췄다. 포장도로에 들어섰는지, 덜컹거리던 마차의 소음이 차분해졌다. 늦잠을 잔 탓에 아침과 점심을 굶었더니, 배고픔과 답답함이 겹쳐 속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 혼자 밖으로 절대 안 내보내셔. 그래서 너랑 동행하겠다고 말씀드렸으니까,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가.”
록허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머니도 널 혼자 못 두시는데 나라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내 뒤 졸졸 따라다니면서 짐꾼이나 하든가. 마침 시종도 안 데리고 나왔는데 잘됐네! 앞으로 3시간은 돌아다닐 생각이거든? 중간에 1분 정도는 휴식 시간 줄 테니까, 잘 부탁해.”
“그래서 어디에 내려 주면 돼?”
하여간 꼬리 내릴 거면서 말만 번지르르하지.
“제도 핀울프 4번가.”
록허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시간가량이 더 흐른 뒤에야 제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핀울프 4번가는 제도의 최고급 호텔인 핀울프 호텔 뒤쪽의 골목이다. 인적이 뜸한 그 뒷골목에는 비교적 말끔한 외관의 골동품점이 있는데, 가문의 전 집사인 펠츠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또한 그 가게는 오늘 나의 첫 목적지이기도 했다.
얼마 안 가 마차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도착한 건가?
“영 못 미덥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황성근위대 중 휴가인 기사를 한 명 데려올 테니 그 기사와 함께…….”
록허드는 대수롭지 않게 보내 주는 척했지만, 끝까지 잔소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게 무슨 민폐야? 됐으니까 어서 가기나 해! 정 그러면 호텔에서 사람을 빌리면 되니까.”
쾅 소리가 나도록 마차 문을 닫고 땅에 내려섰다. 나는 다시 잔소리가 시작될라, 마부에게 어서 출발할 것을 권하고 재빨리 펠츠의 가게로 들어갔다.
딸랑.
“어서 오십…….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장난치지 마, 펠츠. 작년 이맘때에도 왔었잖아.”
내부는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나무의 향과 밀랍의 냄새가 났다. 암막으로 창을 가려 다소 습한 기운이 내부를 맴돌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마저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으윽. 편안하기는 해도 망가진 속이 나아지지는 않네.
늘 수많은 사람과 생동감으로 넘치는 제도에서 오직 이 골동품 가게만이 내게 안도감을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낡은 카운터 뒤편에서 조명에 의지한 채 책장을 넘기던 펠츠는 겨우 1년 만에 다시 만났을 뿐인데 주름이 두 배는 더 늘어난 듯싶었다. 나는 우선 그 앞으로 걸어가 마련된 목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록허드 도련님께서 귀성하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너무 잘 지내서 탈이야.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었는데 요새는 아주 기세등등해. 에든이 성을 비웠다고 더 난리인 거 있지!”
“하하. 5년을 전쟁터에서 버티셨는데 아무렴 얼마나 마음이 편하시겠습니까. 아가씨께서 조금만 이해해 주시지요.”
그리 말한 펠츠가 불 위로 주전자를 올렸다. 난 입술만 삐죽 내민 채 그가 늙은 몸을 움직여 날 맞이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곧 레몬 향이 나는 자그마한 마들렌과 새하얀 열이 솟는 커피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배를 곯아서 그런가,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대접해 드릴 게 이것밖에 없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늘 이것저것 준비해 놓기는 합니다만, 오늘은 또 다과가 똑 떨어졌지 뭡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난 이 마들렌으로 충분해. 펠츠는 내 취향을 알아서 맛도 없는 빵 조각을 주워 먹을 필요가 없잖아.”
작게 소리 내어 웃은 노인이 커피를 조용히 들이켰다.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 얼굴입니다.”
그에 나는 입 안으로 구겨 넣은 빵을 급히 삼켜 냈다.
“전하께 굉장히 귀한 선물을 받았어. 나는 그동안 자수 박힌 손수건 한 장 선물한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꼭 보답하기로 약속했는데, 뭐가 적절할지 모르겠네. 고민만 하다 지쳐서 오늘은 무작정 나와 봤어.”
“아가씨는 친형제분들께도 생일 선물 한번 드린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으음, 맞아. 그래서 남자한테 어떤 걸 줘야 좋아할지 전혀 모르겠더라.”
“도련님들께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특히 록허드 도련님은 네자르 전하와 아주 오랜 친우 사이잖습니까.”
펠츠의 말에 나는 아주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록허드한테 묻는 건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방법이야. 그것도 이왕이면 절대 쓰고 싶지 않은.”
어째서 최후의 방법이냐 묻는다면 할 말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건 록허드 따위가 아니었기에 적당히 말을 끊고 티스푼을 들어 마들렌을 두 동강 냈다.
네자르가 기뻐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제국 최고의 명예와 재력을 가졌고, 거대한 영토는 물론이고 목숨 바쳐 충성하는 신하들이 주변에 산처럼 쌓여 있는데……. 내가 과연 뭘 해 줄 수 있으려나.
며칠간을 고민해 왔지만, 결론은 늘 하나였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아도 그 모든 것이 네자르에게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점. 그는 내가 아는 인물 중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 지위와 배경은 물론이고 네자르라는 인물 자체에 단점이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역시 그럴싸한 브로치나 만년필을 선물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한 번씩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아가씨가 이렇게 고민하고 계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하는 즐거우실 겁니다.”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고민한 만큼 결과가 나와야지.”
딸랑. 그때였다. 내가 들어온 뒤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종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펠츠 씨, 계세요? 아직 시간이 안 되었긴 한데, 제드 할아범이 모셔 오라고 그렇게 성화를…….”
방문자는 어린 소년으로, 펠츠와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실내를 훑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소년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 줄 모르고…….”
나는 소년에게서 눈을 떼 펠츠를 쳐다봤다. 그는 늘 그렇듯 온화한 표정이었다.
“약속이 있었던 거야? 말을 하지 그랬어. 내가 괜히 붙잡고 있었네.”
“시간을 조금 늦추면 됩니다. 아가씨와 이렇게 오래간만에 뵈었는데, 늘 보는 노인네들과의 약속에 연연할 순 없지요.”
“됐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가장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말한 건 펠츠잖아.”
벗어 두었던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둘렀다. 이렇게 되면 우선 호텔로 가 마차를 빌려야 할 듯싶었다. 하나하나 계획을 세우려니 데이지를 데려오지 않은 게 후회되기는 했다.
“오늘 내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마웠어, 펠츠. 그래도 고민만으로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진 기분이네. 다음에 또 올게.”
“잠시, 아가씨!”
펠츠는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날 붙잡은 다음 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손안에 자그마한 사각 유리병이 쥐어져 있었다.
“요즘 잠은 잘 주무십니까? 이건 저와 안사람이 직접 말린 라벤더입니다. 비록 에젤로트 가문에서 취급하는 찻잎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향이 진하고 부드러워 아가씨께 드리려고 남겨 두었던 참입니다.”
유리병 안에는 바짝 말린 연보랏빛 꽃잎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고이 잠들지 못해 밤을 뒤척였던 시절이 벌써 언제 적 일이람. 꼬박꼬박 라벤더 차를 챙겨 마시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잠은 예전보다 훨씬 잘 자고 있어.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늘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으면 발걸음은 물론이고 복잡했던 머릿속마저 가벼워진다. 네자르도 이런 행복한 기분을 느끼면 좋을 텐데. 역시 어떤 선물을 할지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좋겠어.
나는 고풍스럽진 않지만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유리병을 들고서 펠츠의 골동품 가게를 벗어났다. 그사이에 빨갛게 진 노을이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내 생각과 달리 제도는 승전 기념 축제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번화가는 흥에 넘치는 사람들과 길거리 공연, 땅을 박차고 달리는 마차로 넘쳐났다. 어두운 그늘에서 그 활기찬 광경을 지켜보는데, 돌연 어지럼증과 울렁거림이 함께 찾아왔다.
아, 젠장. 또 이러네.
파티를 준비한답시고 식사를 걸렀던 날부터 빈혈이 찾아오는 주기가 매우 짧아졌다. 역시 그놈의 코르셋 하나로 몸을 고생시켜서는 안 됐다. 이게 바로 자업자득이란 거구나.
심지어 마들렌을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어지럼이 이상할 정도로 길었다. 이게 빈혈인지 두통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호텔로 들어가 편히 쉬려 했건만 호텔 자체의 부지가 너무 커 돌아가는 데만 5분은 넘게 걸릴 듯싶었다.
“자, 자, 닭꼬치가 단돈 20실링!”
“승전 기념주화 삽니다!”
머리를 쓰면 조금 괜찮아질까?
나는 펠츠로부터 라벤더 찻잎을 선물 받았을 때의 감정을 떠올렸다. 그 선물이 나를 기쁘게 만든 이유는 별거 없었다. 날 생각하는 펠츠의 마음이 여실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자르에게 줄 선물 역시…….
“30분 후! 30분 후에 분수 광장에서 승전 기념 인형극을 합니다! 많이 보러 와 주세요!”
“엄마, 나도 주스! 주스으!
“얘가? 아까도 마셨잖니. 자꾸 단 음식만 먹으면 못써요.”
네자르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 중이었더라?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머리를 뒤덮었다. 박동이 빨라질수록 불안감은 증폭되었고, 벽을 짚은 손바닥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록허드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호텔을 먼저 들러서 시종으로 부릴 사람을 빌려야만 했다.
“영애.”
속이 어지러워. 이제는 호텔까지 얼마나 긴 거리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카트리나 영애.”
설마 여기서 쓰러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쓰러지기까지 하면 더는 외출 허락을 받지 못할 테고, 외출을 못 하게 되면 답답한 성에서 더 답답한 삼 형제만 상대하며 살아야 할 테니! 상상만 해도 최악의 최악이었다.
“카트리나 영애!”
순간, 어깨를 잡아 오는 강한 힘에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고, 이어서 청명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락 없이 몸에 손을 댄 것을 용서하십시오. 괜찮으십니까? 식은땀이 이렇게나…….”
당혹스러움에 어지럼증이 서서히 진정됨을 느낀다. 남자는 다름 아닌 판시온 엔테라였다.
그의 말에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차가운 감촉이 살갗에 닿은 후에야 내 손이 그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었단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일단 이 번화가라도 벗어나야겠군요. 제가 부축을 해도 괜찮을까요?”
거절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기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판시온은 곧장 내 팔을 잡아 반쯤 굽은 내 등을 곧게 폈다. 그리고 날 번쩍 들어 품에 안고 사람으로 넘실거리는 거리를 뛰듯이 걸었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불안감도 잊고 얼굴을 번쩍 들었다.
“부, 분명 부축이라고…….”
“예?”
“부축이라고…….”
“죄송하지만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습니다. 조금 더 크게 말씀해 주십시오.”
분명히 부축이라고 했잖아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는 판시온에게 더는 뭐라 말할 기력도 없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환장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유리병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필 또 시간은 얼마나 느리게 흐르던지, 심적으로는 10분가량이 흐른 것 같았는데 이제 겨우 분수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웃음과 갈채, 음악, 춤으로 산만했던 제도의 번화가가 서서히 멀어진다. 나는 모자와 유리병 아래로 가두어 놓았던 턱을 슬쩍 틀었다. 고요하고도 상쾌한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깊게 흘렀다. 어느새 나와 판시온은 제도 끝자락의 호수 공원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었다.
몇 걸음 더 이동한 후 그가 공원 벤치에 나를 내려놨다. 나름 뻔뻔하게 살아왔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판시온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불안감이 아닌 부끄러움과 떨림으로 점철된 기묘한 감정이었다.
“고, 고, 고맙…….”
가슴이 얼마나 떨리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어렵다. 판시온은 차분히 나의 말을 기다려 주었고, 그에 한 번 더 부끄럼을 느낀 나는 급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어지럼과 울렁거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고, 고마워요. 판시온 소공작이 없었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에젤로트에 갇혀 바깥 공기를 맡지 못하게 되었겠지.
내 감사 인사에도 판시온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벤치에 앉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니, 식은땀이 반쯤 식은 내 안색을 아주 샅샅이 훑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신 거라면 의원에게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의원이란 단어에 깜짝 놀란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어머니의 귀까지 들어가면 또 무슨 면박을 받게 될지 몰랐다.
“빈혈이 조금 심해서 그랬던 거예요.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봐요! 이제 아주 머, 멀쩡하죠?”
하필이면 마지막 문장에서 목소리가 떨리다니. 그러나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에 두 팔을 올리고 판시온을 내려다봤다. 한참 동안 날 살피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영애와 만나는 날은 늘 요란스러운 기분입니다. 물론 오늘 같은 경우에는 제가 도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지만요.”
그의 말에 곰곰이 과거를 되새길 동안, 판시온이 내 옆자리에 간격을 두고 떨어져 앉았다.
“그렇지 않아요. 첫 만남이랑 두 번째 만남은 굉장히 평범했는걸요. 물론 그때는 당신이 판시온 소공작인 줄 모르고 있었지만. ……그 정도면 매우 평범하게 인상적이죠.”
분명히 당시의 나는 화병을 들고 있었다. 대체 왜 화병을 들고 있던 건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꽃을 담던 판시온의 얼굴은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부드럽고 고아했던 제비꽃 눈동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앞에 있었으니까.
신기했다. 당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남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이야.
“……인상적이었습니까?”
“당신이요? 그럼요. 그때 저는 겨우 열다섯이었고, 소공작처럼 완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기사는 처음이었거든요. 아시다시피 록허드 오라버니는 제가 막연히 상상했던 황실 기사와는 한참 동떨어진 분위기라.”
호숫가라 그런지 여름의 초입이 다가옴에도 바람이 서늘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인상적이란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조금 낯간지러운 느낌이죠. 그, 그렇다고 제가 소공작에게 반했다는 의미는 아니구요.”
괜한 말을 더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변명처럼 덧붙였다. 부러 수다스레 입을 연 것은 아니었으나 계속해서 말을 이으니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판시온은 그런 나의 속을 읽은 것처럼 조용히 눈만 맞추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저만 그렇게 느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영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호숫가로 향했다. 마치 불편한 사실이라도 뱉는 듯, 살짝 일그러진 눈가가 그림 같은 옆 선에서 훤히 보였다.
“조금 울렁거리는군요.”
설마 내가 실수를 했나.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나 역시 고개를 호숫가로 돌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소음 외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나 그와 나 사이에 나눌 대화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가 그랬기에 나 또한 입을 닫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의 은하수를 비추는 호수도 그리 나쁜 광경은 아니었다.
그 순간이었다. 황금빛으로 솟아오른 폭죽이 너른 하늘을 장식한 시점이.
퍼엉!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찔 떨렸다. 금색의 빛은 호수 표면에서도 반사되어 마치 새벽을 새고 낮이 찾아온 것처럼 주변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승전 기념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군요. 그간 일이 바빠 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폭죽이 터져 형형색색의 빛을 내뿜을 때마다 판시온의 얼굴도 어둠 속에서 환하게 반짝였다.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는 사이에 고개를 돌린 판시온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폭죽이 터졌을 때보다 더 화들짝 놀라 얼굴을 홱 돌렸다.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중대한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저, 저도 몰랐어요. 축제가 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2주 가까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축제가 목적이 아니었다면 제도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외출할 겸, 선물도 살 겸……. 말 그대로 겸사겸사요.”
폭죽이 터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조금만 작게 웅얼거려도 목소리가 전부 묻혔다. 잠시 고개를 들어 꽃보다 화려한 모양새의 빛을 보다가, 이전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소공작을 잘 만난 것 같아요.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나요?”
나의 말에 판시온의 얼굴이 고민에 빠진 듯 진중해졌다.
“어떤 관계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가족입니까?”
“누구든지요.”
“누구든이라…….”
범위가 너무 넓나. 하지만 네자르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에는 참을 수 없이 낯간지러웠다. 하나 네자르와 내가 약혼 사이인 것은 제국 만인이 알고 있을 테니, 대강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 정원에 놓인 조각상 따위는 상대로 할 수 없을 섬세함이 가늘게 뜬 그의 눈매에서 묻어 나왔다. 곧 부산스러운 폭죽 소리 틈에서 판시온이 입을 열었다.
“카트리나 영애, 저를…….”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빛이 터지는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나는 미간을 구기고 어깨를 조금 더 앞으로 당겼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폭죽 소리에 묻혀서 잘 안 들려요!”
그때, 두 뼘은 떨어져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숨소리가 닿을 만큼, 아니 내 코끝을 건드린 숨이 뺨을 타고 귓가에 머물렀다. 저 멀리 사그라들었던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코앞에서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를 보십시오.”
판시온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입가로 끌었다. 인사하듯 가볍게 손등에서 맴돌던 입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손가락 마디에 닿는다. 나는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짐을 느꼈다. 수증기보다 뜨거운 숨이 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윽고 나는 이명에 빠져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온 감각이 그가 닿은 손가락에 몰린 것처럼.
뜨거운 입술이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느린 움직임으로 내 손을 내려놓았다.
“아시겠습니까? 보통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합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