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어머나, 이 사과 머핀 좀 보세요. 어쩜, 반짝반짝 빛나는 게 마치 예술 작품 같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입 안에 넣고 삼키기에 정말 아까울 정도예요.”
“이 머핀을 만드신 요리사분을 뵐 수 있을까요?”
“저도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네요.”
그게 대체 왜 궁금한 걸까.
나는 하하 호호 사랑스럽게 웃는 여식들을 따라서 화려한 도자기 접시에 올려진 머핀을 집었다. 확실히 붉고 노란 색감으로 알록달록 꾸며져 있는데, 데코레이션은 둘째 치고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으, 심지어 냄새도 별로야. 씹으면 오래된 고무 맛이 날 것 같아.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고개를 저으며 머핀을 내려놨다.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옆자리에 앉은 카론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과찬이셔요. 얘, 마리?”
카론의 부름에 국화꽃 정원 안쪽에 자리 잡고 있던 시녀가 다가왔다.
“말씀하십시오.”
“그레드 씨를 불러올 수 있을까? 여기 영애분들이 꼭 한번 뵙고 싶다네.”
“굉장히 좋아하실 겁니다.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카론이 싱긋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녀의 전속 시녀인 마리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지자,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던 여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성함이 그레드 씨인가요? 만나 뵈면 레시피를 적어 달라고 몰래 부탁해야겠어요!”
“딱 봐도 요리사분의 대표적인 레시피 같은걸요. 과연 그레드 씨가 알려 주실까요?”
“안 알려 주시면 뭐 어때요. 이런 아름다운 음식은, 맛보는 게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오호호, 맞는 말씀이셔요!”
정말 잘 웃는구나. 함께 자리한 카론 외 세 명의 귀족 여식은 2시간 내내 지치지 않고 웃기 바빴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지는 않을까? 온종일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 지렁이가 기는 모습만 봐도 배를 붙잡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카트리나 영애는 머핀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봐요.”
화기애애했던 테이블의 분위기가 일순 고요해졌다.
좋아, 생각보다 빨리 첫 번째 고난이 찾아왔군.
나는 심호흡을 내쉬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과연 무어라고 대답해야 다과회가 순조롭게 진행될까?
‘어머, 그럴 리가요. 저도 이 머핀이 참 마음에 든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제가 한번 먹어 볼까요?’
그리고 그 후에 이 고무 냄새가 나는 빵을 삼켜야겠지. 내 미각의 안녕을 고려하면 그리 좋은 대답은 아닐 터였다.
‘아아, 맞아요. 사실 저는 이렇게 설탕이 듬뿍 올라간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보기에는 매우 좋네요! 저도 그레드 씨를 한번 만나 뵙고 싶어요.’
나쁘지 않은 답안이다. 그러나 눈치 없는 게 맞장구칠 줄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안 돼. 자존심 같은 건 다 내다 버렸다 해도, 엔테라 성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무려 카론이 나를 위해서 준비한 다과회였다. 평범한 다과회가 아닌, 드넓은 제국 사교계에서도 유독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인들을 초대한 미인 다과회!
물론 제아무리 고와 봤자 내게 있어서는 네자르의 애인 후보일 뿐이지만. 황태자의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과 가까워져야만 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성질머리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고심 끝에 내가 고른 선택지는 첫 번째였다.
“그럴 리가 있나요. 저도 이 머핀이 어엄청 마음에 들어요. 너무 알록달록해서 조금 장난감 같기는 해도. 향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걸요? 말이 나온 김에 제가 한번 먹어 볼게요!”
“잠깐, 케이트 영애? 그 머핀에는 당근이…….”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빛 설탕을 입에 담았다. 진득한 고무 냄새와 달리 혀끝에 안겨 오는 달달함이 퍽 괜찮았다. 그렇게 나름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빵을 씹으려 했을 때, 익숙하고도 괴로운 감각이 입 안으로 확 풍겼다.
“우윽.”
젠장, 이거 당근 냄새잖아? 씹기를 멈추고 급히 몸을 돌려 입 안의 음식물을 뱉어 냈다. 입천장에 닿지도 못해 보송보송한 상태 그대로의 머핀이 잔디 위로 툭, 떨어졌다.
“꺅!”
“어, 어머나.”
테이블에서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이어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카론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내게 뛰어왔다.
“여, 영애, 괜찮아요? 설마 삼켰나요?”
“아니요. 삼키기 전에 뱉어서 괜찮아요.”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아. 뭐든 잘 받아먹는 나도 입에 대지 못하는 음식이 딱 두 가지 존재하는데, 바로 파프리카와 당근이다. 전자는 취향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채소였기에 멀리했지만, 당근은 순전히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꿀꺽 삼키는 즉시 목구멍이고 얼굴이고 퉁퉁 붓는 탓에 죽어도 멀리하는 음식이었다.
“죄, 죄송해요. 사실 케이트 영애에게 드릴 머핀은 옆 접시에 따로 준비해 놓은 머핀이었어요.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멍청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카론이 울기 직전의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어쩐지 유독 접시가 나한테서만 멀리 떨어져 있다 했지.
“나는 괜찮대도. 저…, 잠깐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공교롭게도 제가 당근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몸만 추스르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급히 입가를 정리하고 뒤를 돌았다. 어쩐지 냄새가 역하다 했더니, 느낌이 좋지 않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내 말에 인상을 와락 구기고 있던 여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의 여식 중 가장 말이 적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식이었다.
“그럼요! 어서 갔다 오세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몸을 돌려 성으로 향했다. 깜짝 놀란 탓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래간만에 긴 악몽을 꿨을 때부터 재수가 없다 싶었다. 삼키지 않았지만, 혹여나 당황해서 빵 부스러기라도 꿀꺽했다면 밤새 몸이 간지러워 잠들지 못했을 텐데.
“카트리나 영애는 늘 눈에 띈단 말이에요. 가끔 일부러 저러시나 싶기도 하고…….”
구역질로 속을 게워 내러 정원을 빙 돌았을 때였다. 내가 수풀 너머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지, 두런두런한 목소리가 국화꽃 화단 너머에서 들려왔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해요. 록허드 에젤로트 경은 전쟁 영웅이 되어 귀환하실 테고, 릭 에젤로트 님은 올해 황립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로 임명되셨다는데……. 어째 카트리나 영애만 조금 동떨어진 기분이랄까요?”
“나이에 비해 철도 아직 덜 드신 것 같죠? 흐음, 그래도 가끔은 그런 면이 귀엽기는 하지만.”
“오호호! 말리아 영애는 그런 취향이셨구나?”
“어머나, 농담은. 제가 아니라 네자르 전하의 취향이겠죠.”
으드득 이가 갈렸다. 머리가 아파 왔기에 몸을 틀어 다시 정원을 빙 돌았다. 지금 당근 알레르기가 대수냐? 사람 안 보인다고 뒷말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문제는 내가 그 뒷말을 들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당황으로 쿵쿵 뛰었던 심장이 점차 차분해졌다. 부러 인연이 없었던 여식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건만, 인연이 없던 탓에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다.
모든 무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나는 테이블을 뒤집어 버릴 생각에 그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을 방향으로 뛰듯이 걸었다. 지금쯤 내 뒤 담화를 하며 좋아라 웃고 있겠지? 카론은 또 어찌할 줄 모르면서 입술만 깨물고 있을 테고!
그러나 급히 돌아온 테이블의 분위기는 생각과 조금 달랐다.
“오셨어요? 몸은 좀 어때요? 얼굴이 조금 빨간데, 설마 벌써부터 알레르기가……?”
내가 다가가자 부랴부랴 몸을 일으킨 카론이 옆에 섰다. 그 표정이 우는 아기 새를 걱정하는 어미 새의 얼굴이라, 무시하고 코뿔소처럼 돌진할 수 없었다.
요조숙녀가 되기로 결심한 지 이제 어언 5년. 여전히 본능에 몸을 맡기는 길은 가깝고, 해탈의 경지는 멀다. 그나마도 에젤로트 밖에서 사람 노릇을 하게 된 건 전부 카론이 옆에 있어 준 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삼키지 않았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거예요.”
선선한 햇빛 아래에서 카론의 은발이 펄럭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카론이 새침데기 요정 같았다면, 스무 살이 된 카론은 요정이 아니라 여신 그 자체라 해도 무방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인데 옆에 서면 괜히 자존감이 팍 죽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것도 전부 옛날 일이었다. 이제는 내 옆에서 환히 웃는 카론을 볼 때마다, 시야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늦지 않았죠? 무슨 이야기를 하시던 중인가요? 즐겁게 웃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들리던데.”
눈에 힘을 주어 노려보고 싶었지만, 싸늘한 테이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히 3분 전쯤까지는 신나게 날 욕했잖아?
“저, 저희가 그랬나요? 글쎄요……. 그런 기억이…….”
“카트리나 영애와 함께하는 자리가 워낙 즐거워서 그랬나 봐요. 그, 그렇죠?”
“마, 맞아요! 무슨 소릴 하시나 했더니,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죠?”
그걸 나한테 물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내 옆자리의 카론이 다 식은 찻물을 조용히 들이켰다. 기척 하나 없는 조용한 움직임이었을 뿐인데, 신나게 떠들기 바빴던 여인들이 카론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에도 소리가 존재한다면 카론의 근처에는 커다란 천둥이 수시로 내리꽂고 있었을 테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딱히 변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혹시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없었어요.”
대답은 카론에게서 들려왔다. 도도하게 턱을 들어 치즈 케이크를 조각낸 그녀는 마주 앉은 여식들을 향해서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것도요. 그렇죠?”
그 말에 나란히 앉은 삼인방이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맞아요!”
“오호호,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어서 그레드 씨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가 전부였어요.”
내가 들은 소리가 환청일 리는 없었지만, 저렇게 열렬히 눈치를 살피면 괜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게 하나둘 입을 닫기 시작하자 테이블은 돌연 침묵에 휩싸였다.
하아, 그때 그 머핀을 먹지 말아야 했어……. 재수가 없어도 얼마나 없으면 하필 가장 먼 접시에 있는 머핀을 먹게 됐을까. 그것도 심지어 사과 머핀인 척하는 당근 머핀을!
“저, 저기, 여러분? 아쉽지만 저는 게브앙즈 영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저녁 만찬 약속이 있어서…….”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저는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어색한 웃음이 국화 정원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두 명이 백기를 흔들자, 마지막 세 번째 여식도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파하는 분위기인 것 같으니, 저도 이만 돌아가도록 할게요.”
“다들 가시는 건가요?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쉽네요.”
카론의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올해의 네 번째 다과회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을 맞이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지? 마음 좀 다잡고 괜찮은 여인을 물색하려 할 때마다 꼭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일이 제대로 안 풀리니 기대치조차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레드가 국화꽃 정원에 도착한 건 텅 빈 테이블에 나와 카론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때였다. 시시해라. 결국 오늘도 카론과 시간을 때우다 에젤로트로 돌아가야 했다.
***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이제 막 열일곱이 된 키 작은 소시민이었고,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행복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대입 공부에 다소 걱정이 들기도 했으나 앞으로 펼쳐질 고등학교 생활만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2월 초 한창 한파가 만연하던 시기에 본 흐릿한 하늘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었다. 딱딱했던 포장도로와 시야에 가득 차던 주위 시선들. 뺨 위로 떨어지던 함박눈이 차갑기는커녕 불처럼 뜨거웠었다. 그 감각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감각이었다.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질린 얼굴로 소매를 접은 릭이 나를 노려봤다. 눈은 내 쪽을 향하고 있음에도 기다란 손가락이 종이 위를 여유롭게 누볐다. 어째 대충 휘갈기는 것 같아도 내가 열과 성의를 다해 쓰는 글씨보다 기품 있고 고아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양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런가 배가 너무 아파. 배탈이 났나 봐. 아무래도 오늘 승전 기념 파티에 못 가겠어…….”
“너, 배 아프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꾀병 부리다가 또 어머니께 한 소리 듣지 말고 방에서 나가라. 지금 네 투정 들어 줄 시간 없다.”
“세상에. 어쩜 말을 해도 그렇게 매정하게 해? 릭, 너, 요즘 너무 차가워. 최근에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잖아. 오늘도 거의 보름 만에 만난 거면서.”
“그야 할 일이 태산처럼 남아 있으니까. 케이트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아 말해 두는데, 나처럼 귀성이 잦은 교수는 매우 드문 편이야. 오죽하면 에젤로트에 애인을 숨겨 두었냐는 질문만 서너 번은 받았을 정도다.”
펜을 놓은 릭이 몸을 일으켜 내가 앉은 테이블로 건너왔다. 교수 대부분이 아카데미 근처에 저택을 마련해 생활한다는 소리야 전부터 들어왔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북적북적했던 커다란 성에 홀로 남게 되니 괜히 더 보채는 시간이 길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네자르와 록허드가 전쟁터로 나간 게 벌써 5년 전 일이었고, 이듬해 여름이 되자마자 에든이 상단 경영을 배우기 위해 제도로 떠났다.
당시의 나는 급작스레 고요해진 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릭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 생활했다. 그나마 릭도 에든이 떠난 바로 다음 해에 학위를 따기 위해서 황립 아카데미로 떠나야 했지만. 한마디로 나는 무려 수 년 동안 이 넓은 에젤로트에 어머니와 단둘이서 지내야 했다는 소리다.
이제야 말하는데, 카론을 따라 다과회에 참석하는 걸 제외하고는 끔찍할 정도로 무료한 시간이었다.
“네자르 전하 때문이냐?”
윽. 반응하지 않으려 해도 너무 오랜만에 들은 이름 탓에 발작하듯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전혀, 조금도 상관없어.”
“그게 아니면 가기 싫은 이유가 뭔데? 승전 기념 파티는 전하와 록허드 형님을 5년 만에 만나는 자리다. 특히나 황태자 전하의 약혼자인 넌 절대 빠질 수 없어.”
언제 몸을 일으켰냐는 듯 다시 테이블 위로 힘없이 엎어졌다. 릭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에젤로트 가문의 적녀이자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위치이므로 파티에 불참할 수 없었다. 록허드를 포함한 정식 기사 모두가 전쟁터를 등지고 제도로 귀환한 지 이제 겨우 나흘이었다. 그리고 내일 저녁부터 사흘 밤낮으로 진행될 승전 파티. 그래, 믿기지 않지만, 무려 5년 만의 재회였다.
“너무… 부끄러워.”
악! 나는 지글지글 익어 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가리고 테이블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5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랬다구. 그동안 날 잊었으면 어쩌지? 이제 네자르도 스물넷이잖아. 분명히 나 같은 땅꼬마한테는 감흥도 없을 거야…….”
물론 옛날부터 아무런 생각도 없었겠지. 그랬기에 내가 애인을 찾는다 만다 난리를 쳤던 것이지만, 정작 없는 애로 취급할 거라 상상하니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5년이나 흘러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만 막상 얼굴을 마주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탓일까? 벌써 심장이 두근대고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하아.”
정수리 위에서 신경질적인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너는 눈치를 기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케이트. 그런 식으로 살아가다간 주변 인물의 정신머리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의미야?”
“카론 엔테라도 그렇고……. 이왕 사람을 사귈 거면 좀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을 만나. 어디서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만 꼬셔 오지 말고.”
“참 나, 우리 카론이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애인지 알아? 카론은 길 가다가 제 발에 걸려 혼자 엎어져도 나한테 미안하다며 고개 숙일 애야!”
“그래그래, 너는 평생 그리 알고 지내라.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릭은 두 번의 삶을 경험한 나보다도 훨씬 똑똑하고 현명하다. 이쯤 되면 릭이 똑똑하다기보다는 내가 멍청하다는 소리가 더 옳은 표현 같지만, 나야 애초에 슬기로운 두 번째 인생 따위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에젤로트 가문은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명예와 재력을 가진 귀족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확실히 느끼는데, 이 잘난 집에서 태어난 나는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돼. 숨만 쉬며 조각 케이크를 집어 먹는 인생이 다소 무료하기는 해도.
“지금 나 바보라고 무시하는 거지?”
“놀랍군. 설마 그걸 알고 있을 줄이야.”
무덤덤한 목소리였기에 나 역시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 대신 하얗게 비어 있던 머릿속에는 옷장 안에 걸린 드레스가 하나둘 차근차근 떠올랐다.
데뷔탕트는 이미 2년 전에 치렀다. 다만 구두가 흔들릴 정도로 벌벌 떨었던 날이었기에 어디서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길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데뷔탕트 이후에는 카론을 따라서 작은 다과회에 대여섯 번 참석한 게 전부였다. 즉, 승전 기념 파티는 내 생의 두 번째 홀 파티란 의미였다.
“아, 안 되겠어! 가슴이 너무 떨려서 가만히 앉아 있다간 목에 쥐가 날 거야. 어머니를 졸라서 새 드레스와 목걸이라도 사러 나가든가 해야지.”
재빨리 몸을 일으켜 후다닥 릭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제대로 못 자고 새벽 내내 뒤척였는데 피부는 좀 괜찮을까? 설마 내일까지 얼굴이 푸석하지는 않겠지? 나는 반짝반짝한 대리석 복도에 뺨을 비추며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째 눈 밑으로 새까만 그늘이 한 뼘은 내려와 있는 듯했다.
오늘은 해가 지자마자 잠자리에 들어야겠어. 나는 들쑥날쑥 날뛰는 가슴을 쥐고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승전 기념 파티가 열리는 당일에도 잠 못 들고 뒤척였다. 두 눈을 멀쩡히 뜬 상태에서 창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기분이란 참 오묘하고 씁쓸했다. 망하고 말았어. 나는 눈 밑이 시꺼멓고 피부가 칙칙해진 채 네자르와 만나게 될 거야. 이렇게 못난 계집애가 약혼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껴질까.
“어휴! 자책 그만하고 어서 고개를 드셔요, 아가씨. 다른 귀족 영애들은 상대도 안 될 만큼 예쁘시대두요?”
“예쁘다니, 데이지 너야말로 두 눈 똑바로 뜨고 거울을 봐!”
팔을 뻗어 눈앞 화장대의 거울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우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새까만 인상의 여자가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긴장해서 밤을 새운 얼굴이잖아……. 분명히 록허드가 비웃을 거야. 록허드뿐이면 다행이게? 다른 사람들도 히죽히죽 웃느라 바쁠걸.”
“감히 네자르 전하의 약혼자인 아가씨 앞에서 누가 비웃어요? 그 사람들은 참 간도 크네요.”
“앞에서 비웃어야만 비웃는 거겠니.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아도 다 느껴지는 게 있어.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주먹질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지?”
풀이 죽은 내 목소리에 고개를 저은 데이지가 손에 빗을 쥐었다.
“다 괜한 걱정이에요. 아가씨는 지금 네자르 전하를 만날 생각에 불안해서 현실 도피를 하는 거라구요.”
“……그게 그렇게나 티가 나?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없지?”
릭도, 어머니도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죄다 네자르 이야기뿐이었다. 하긴, 몇 년을 내리 쫓아다니다가 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건데, 누구라도 짐작할 만했다.
“아가씨는 예전부터 영 속을 알 수 없었는데, 꼭 이런 데서는 티가 나신다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백작 부인께 무려 부채를 받아 왔으니까요.”
말과 함께 데이지가 서랍 속에서 자그마한 부채를 꺼냈다. 상아로 만들어진 하늘색의 브리제 부채는 전면의 문양 하나하나가 모두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선물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부채를 들었다. 뻑뻑한 감 하나 없이 수년을 사용한 물건처럼 부드럽게 펼쳐진다.
“표정을 숨기기 어려우시다면 이 부채를 들어 입을 가리셔요.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이 부채는 동양에서 수입해 온 아주 귀한 물건이라 자랑하기에도 좋다 하셨어요.”
“하지만 나는 부채 언어를 아직 배우지 못했는걸.”
정확히는 이제껏 관심이 없었다. 분명 교양 수업 때 배운 것 같기는 한데,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반 이상을 편 상태로 입만 가리셔야 합니다. 귀부인 앞에서야 괜찮겠지만 영식들, 특히 유부남 앞에서는 절대 부채를 펄럭이지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실 때는 가만히 왼손에 쥐고 계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데?”
“약혼자가 있다는 의미예요.”
사교계에서 귀족 여인의 부채 사용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대체로 남녀 사이의 은밀한 대화를 주도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만, 승전 기념 연회와 같이 성대한 모임에서는 부채를 어떻게 쥐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부채만 이렇게 예뻐서 뭐 해. 입고 갈 드레스는 결국 한 벌도 찾아내지 못했는걸. 덕분에 자신감만 확 떨어졌어.”
내 생각이 짧았다. 승전 기념 파티는 비단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각 계층 사람들이 먹고 즐기는 축제였다. 그러니 시내의 가장 잘나가는 의상실을 방문한다고 한들, 이미 예약 일정이 빽빽하게 잡힌 뒤라 내가 구할 수 있는 드레스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게 다 파티에 참석한 경험이 없는 탓이다. 한 달 전 어머니가 제도로 나가신다 말했을 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꾸역꾸역 따라나섰어야 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내가 영 눈엣가시였는지, 어머니는 내 드레스만 쏙 빼놓고 주문을 맡기셨다.
하필 그런 사실을 오늘 같은 날 알아차릴 게 뭐람. 어머니도 하나뿐인 딸에게 매정하시지. 엉덩이라도 걷어차서 끌고 가 주셨음 됐을 텐데!
“짜잔! 아가씨가 우울해하실 줄 알고, 백작 부인께서 이미 드레스를 준비해 주셨답니다! 부인께서는 안목이 참으로 좋으셔요. 바쁘신 와중에 이리도 고운 드레스를 구해다 주시다니!”
거울 너머로 푸른빛의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팔랑거렸다. 허리까지 조여지는 오프숄더에, 골반에서부터 풍성하게 레이어드된 레이스. 데이지가 까만 천에 품어 온 물건이 무언가 싶었는데 바로 저 드레스였다.
“이걸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셨다고? 정말로?”
“예!”
우렁차게 대답한 데이지가 내게 드레스를 안겼다. 나는 황홀한 기분으로 그녀가 건넨 드레스를 품 안에 꽈악 안았다. 어쩜 감촉까지 이리도 부드러울 수가!
어머니, 사랑해요. 이 정도면 정말 완벽한 것 같아요. 열렬하게 타오르는 자신감과 함께 이유 모를 전투 의지가 강하게 샘솟았다.
제도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풍성하면서, 소란스러웠다. 마차에 올라 시내를 지나치는 와중에도 음악과 웃음, 타닥타닥 타오르는 길거리 음식의 향이 멈추지 않고 풍겨 왔다.
그 탓에 멀미를 참아 가며 벽에 기대고 있던 내 속은 더 요란하게 흔들렸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야. 에젤로트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아주 격렬하게 일었다.
“누가 보면 초상집에 가는 줄 알겠구나.”
앞에서 얌전히 서적을 넘기던 릭이 기어코 한마디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반박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속이 고되다니. 비록 거울이 없다 하더라도 내 안색이 얼마나 망가졌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잠은 잔 거야?”
“아니. 긴장돼서 잠깐도 못 잤어.”
“전하와 면대면을 하면 아주 기절하겠군.”
시내와 이어진 황성 남문을 지나 카산드라 홀까지 도착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단순히 환하고 번잡했던 공간을 건너 으리으리하고 웅장한 성에 도달하니 멀미가 한층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손을 끌어서 비틀거리는 다리를 지탱해 준 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이봐, 케이트. 대체 뭐 하는 거야? 밤을 새우다가 배탈이 나기라도 했어?”
“차라리 단순한 배탈이었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거야……. 얼굴이 부을까 봐 어제저녁부터 굶었더니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가지가지 한다, 정말. 내 팔 잡고 기대.”
사실 이미 반쯤 기대 있는 상태였다.
“고마워, 릭. 나는 진짜 릭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끔찍한 말 좀 그만해라.”
연회 전날부터 식사를 굶는 건 대개의 여식이 늘 감수하는 일이었다. 드레스 라인이 더 하늘하늘하게 떨어져 보기에 좋기는 해도, 어떻게 이런 고통을 밥 먹듯이 버틸 수 있는 걸까?
덕분에 나에게 이 방법은 너무나 치명적인 수라는 걸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배가 좀 나오고 덜 예쁘더라도, 전날 저녁은 꼭 먹어야지.
“이러고 다니니까 연약한 온실 속 화초가 된 기분이야.”
“헛소리 말고 홀에 도착했으니까 제대로 걸어.”
그리고 릭의 말에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에젤로트 백작가의 릭 에젤로트 교수님과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30초도 겨우 흐른 것 같았건만, 어느새 도착한 거지?
나는 손에 감기는 릭의 팔을 꽉 움켜쥐고, 눈으로 어머니와 카론의 위치를 열심히 찾아서 헤맸다.
이래서 사람 많은 곳은 오기 싫었어.
“어머니 발견하면 말해 줘. 음식 집어 먹을 때 허락 맡고 먹으라 하셨어……. 여기서 더 참다간 아사하고 말 거야.”
“어머니께서는 폐하 입장 직전에 아버님과 동반 입장하신다. 지금쯤 근처 휴식실에서 아버님과 함께 계실 거야.”
그럴 수가. 나는 반쯤 울 듯한 얼굴이 되어 릭의 팔에 매달렸다.
“그럼 카론이 올 때까지만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문제 될 것 없지. 네가 버틸 수만 있다면야.”
카산드라 홀은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단층 건축물답게, 기가 죽을 정도의 호화로움과 금박에 싸인 실내 장식물로 가득했다.
대충 훑기만 해도 신문과 극장에서 접한 유명 예술가들, 상단주, 고위 귀족으로 실내가 인산인해였다. 고개를 들면 거대한 샹들리에에 눈이 멀 것 같았고, 시선을 낮추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 갑갑한 느낌은 릭의 옆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에젤로트 교수, 이쪽은 브리헴던 박사입니다. 브리헴던 박사? 이쪽이 내가 전에 말씀드렸던 그 에젤로트 교수요. 물리학과 천문학의 젊은 대가. 최근에는 역사학에도 욕심을 내고 있다 들었는데, 내 말이 맞습니까?”
“약간의 관심을 두고 있을 뿐 감히 내세울 정도는 못 됩니다.”
“하하! 유서 깊은 에젤로트 가문에서 교수 같은 천재가 나오다니, 이는 필시 에젤로트가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동감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에젤로트 교수. 저는…….”
학계의 내로라하는 박사들이 릭에게 아부를 떨 동안 나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폭신한 향의 몽블랑을 한입 베어 물었다. 잘나가는 건 이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대여섯의 중년과 노인들이 쉴 틈 없이 몰려올 줄은 몰랐다.
나는 학연과 지연이 한데 뒤섞인 공간에서 천천히 발을 뺐다. 귀족 여식이 홀 중앙에서 벗어나 벽 근처에 머무는 건 수치를 느껴야 할 행동이었으므로 혼자서 테이블 사이를 오가야 했다. 나야 주변에서 어떤 눈으로 보든 크게 상관없었지만, 어머니가 보신다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으니까.
눈에 익은 소수의 귀족 영애들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인사에 그쳤을 뿐 그 흔한 안부조차 오고 가지 않았다. 네자르의 애인을 구하기는 무슨. 5년 동안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다.
“엔테라 공작가의 칼미온 엔테라 공작님과 카론 엔테라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때였다. 여기저기 흩뿌려 있던 다수의 시선이 계단으로 향했다. 소개와 함께 등장한 인물은 키가 훤칠한 중년과 절세의 미녀였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기다란 은발에 유리 세공품처럼 투명한 피부, 거기에 나긋나긋하게 굽어지는 눈매까지. 나는 한 떨기의 작약과 같은 카론의 자태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늘 느끼지만, 감히 이 세상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미모가 아니다.
카론은 감탄을 내뱉는 인물들 사이를 유유히 헤쳐 어느새 내 앞까지 도달했다. 과장하지 않고 근처 반경 5미터 내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샴페인잔을 건네받은 카론은 언제 도도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햇살처럼 밝게 부서지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케이트! 금방 찾아서 다행이에요. 이,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파티는 처음이라 하마터면 혼자 버려질 뻔했지 뭐예요?”
곁으로 다가온 카론은 팔에 팔짱을 끼고 빠르게 걸음을 이었다. 그에 나는 멀어져 가는 엔테라 공작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공작은 벌 떼처럼 다가온 사람들에 가려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카론, 각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아버님은 상대해야 할 귀족들이 많아서 정말 바쁘세요. 시간은 충분하니 인사야 나중에 드려도 되죠. 케이트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오늘 어쩐지 안색이 안 좋아요.”
울상을 지은 카론이 팔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예전만 해도 나와 비슷한 눈높이였지만, 유전의 영향인지 훌쩍 자라 한 뼘은 더 높은 곳에 턱이 위치했다. 에젤로트도 분명 장신의 유전자를 품고 있을 텐데 왜 나만 이 모양인 거지?
“어제저녁부터 굶었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럽네. 속도 안 좋고.”
“데뷔탕트 때도 그러지 않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트는 끼니를 거르면 안 될 것 같아요. 괜찮다면 테라스로 나가서…….”
카론의 위로는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남성이 그녀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실례합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영애분들. 괜찮다면 제가 대화에 참여해도 될까요?”
이 느끼한 목소리의 주인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쉽게 알아맞힐 수 있었다. 필프론츠 오드리네 후작. 카론과의 혼인이 약속된 남자였다.
그를 알아본 카론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끌었다. 누가 봐도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대놓고 경계하든 말든, 필프론츠 후작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카론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덕분에 나만 뻘쭘한 기분으로 둘 사이에 서 있어야 했다.
이, 이럴 때 쓰려고 부채를 가져왔지! 나는 자연스레 쥐고 있던 부채를 쳐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예의상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카론은 나와 달랐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후작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두 분이서 워낙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시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이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실례라는 것을 아신다면 돌아가세요.”
“하하! 당연히 카론 영애에게 물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카트리나 영애?”
그의 부름에 나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랜만에 뵈니 기분이 참 좋군요. 저는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온 줄 알았지 뭡니까? 제 생일 기념 연회에도 초대했던 것 같은데, 답이 없으셔서 퍽 속상했었습니다.”
필프론츠 후작은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는 남자였으므로 연회의 규모 역시 매우 컸을 터였다. 데뷔탕트도 겨우 치른 내가 그런 자리에 참석할 리 만무하지. 무엇보다 나는 이 남자와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필프론츠 후작은 록허드만큼, 혹은 그보다 더 능구렁이 같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몸이 많이 안 좋았었어요. 내년에도 초대해 주신다면 꼭 응하도록 할게요.”
“아, 방금 그 말씀 꼭 지키셔야 합니다. 제가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내년에 초대장을 보낼 테니까요.”
“물론이에요.”
부채 뒤로 숨은 덕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시답지 않은 말을 할 동안 카론의 얼굴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 얼음장 같은 시선에 필프론츠 후작이 실실 웃는 얼굴로 어깨를 떨었다.
“하아,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영애가 안 계실 때의 카론 영애는 종종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고양이처럼 느껴집니다. 그거 아십니까? 저번에는 실수로 손등이 좀 닿았다고 다짜고짜 할퀴지 뭡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필프론츠 후작이 내게로 손등을 보였다. 나는 눈썹만 살짝 구부려 안타까운 척을 했다.
“손등이 닿지 않게 조심하지 그러셨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것이지요. 그래도 카론 영애가 주신 상처이니 소독약 한번 바르지 않고 아주 소중하게 대했습니다. 덕분에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지마는.”
“참 잘하셨어요!”
필프론츠 후작은 오히려 자신을 향한 카론의 따가운 눈초리를 즐기는 듯했다. 나야 이 느끼하고 능구렁이 같은 남자보다야 카론이 더 귀했기에 뱀의 혀처럼 뻗어지는 말장난을 툭, 툭 떨구어 냈다.
“조금만 더 진심을 담아 대답해 주시면 안 됩니까?”
“어머나, 참 잘하셨어요!”
내 대답에 카론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더 찰싹 붙었다. 애타는 관심을 끊임없이 표출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가 안중에도 없는 여자. 왜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를 괴롭히려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성대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등장한 인물은 금실이 수놓인 망토를 걸친 흑발의 중년이었다. 세상에서 저리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홀에 자리한 모든 참석자가 머리를 조아렸다. 시끄러웠던 파티장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나 역시 잘 닦인 대리석 바닥 위로 고개를 숙이며 둔탁한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일어나시오.”
황금 의자에 자리 잡은 황제는 근엄한 표정으로 긴 문장을 쏟아 냈다. 그러나 나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할 수 없었다. 이제 곧 등장할 네자르와 얼굴을 마주할 생각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던 탓이다.
5년이란 시간이 뭐라고 사람을 이리 벌벌 떨게 만드는 걸까?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카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케이트? 왜 그러세요? 아직도 몸이 안 좋아요?”
고개를 저으며 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홀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승전을 이끈 주역들의 등장이었다.
***
‘콜록, 콜록! ……방금 뭐라고 말씀하신 거죠? 황태자 전하의 내연녀요?’
‘방금 비웃었지? 그렇지?’
‘아뇨, 아뇨.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개구리눈이 된 카론이 입가에 가까이 하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얼마나 놀랐으면 거칠게 기침을 하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는다. 평소 점잖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가 이처럼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카론에게는 말해야 했으니까. 가족과 네자르 외에 그녀만큼 날 위해 주는 사람도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영애들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이유 정도는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솜씨가 없어 터무니없는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하나뿐인 친구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에젤로트를 떠나고 싶지 않아. 황성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무리 넓다 하여도 그처럼 무겁고 답답한 성에서 혼자 살다간 내 성격에 못 버틸 거야. 차라리 결혼도 못 한 애물단지 취급받으며 다락방에 박혀 있는 게 훨씬 낫겠지.’
‘황성이 그렇게 불편하세요?’
‘불편한 것도 불편한 건데, 무엇보다 네자르 전하가 제일 불쌍하다구. 많고 많은 여자 중에 하필 나 같은 애한테 걸려서는……. 동정심 하나 때문에 약혼까지 꿰이고 말았지.’
‘케이트처럼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영애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요? 제가 봤을 때 황태자 전하는 운이 많다 못해 넘치시는 거예요.’
손수건을 거둔 카론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하얗고 따스한 살결이 맞닿자 달콤한 생크림을 삼킨 것처럼 어깨에 힘이 쭈욱 빠졌다.
‘무려 네자르 황태자의 약혼자 자리예요. 차후 황후에 오를 여인에게 주어진 자리란 소리죠. 케이트를 향한 동정심 하나로 약혼 서약서를 작성하셨을까요?’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전하는 보기와 달리 주변 인물에 퍽 무르신 편이야. 게다가 혈육이 아님에도 나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 있으셔. 난 어릴 때부터 영악한 아이였고, 그 마음을 이용해서 전하의 발목만 잡아 왔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응.’
눈앞에서 팔랑이는 투명한 속눈썹이 마치 공작의 깃과도 같았다. 그 아래에서 은빛 강처럼 반짝이는 제비꽃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자르도, 록허드도 아닌데 그 맑은 눈동자에 속이 다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나를 보며 카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영애는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떳떳하죠. 그래도 저는 종종 당신에게서 불안감을 느꼈어요. 생각지 못한 시점에 유독 급해 보일 때도 있었고……. 다 제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던 탓이었군요. 전하의 내연녀를 찾고 싶다고요? 그게 케이트를 위한 일이라면 저도 도울게요. 아니, 오히려 잘됐을지도 몰라요!’
무엇이 잘됐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겠다는 말은 둘째 치고 활짝 웃어 주는 얼굴에 가슴이 아렸다. 정말 감동이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스스로 생각해도 수많은 귀족 여식 중에 나만큼이나 웃긴 소릴 하는 애는 본 적이 없었다. 황태자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 약혼 서약서를 받아 낸 주제에, 그럴싸한 이유도 없이 이제 와서 그만두어야겠다고? 릭과 카론이 날 비웃지 않은 게 신기했다.
아니! 사실은 비웃어도 상관없다. 나는 뉴 카트리나 에젤로트. 비록 이제는 뉴 카트리나든 아니든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나의 안온한 노후와 네자르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타인의 조롱을 무릅쓰고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게 수년간 나를 돌봐 온 네자르의 은혜를 갚는 일이었다.
‘저에게 처음 말을 거신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었군요.’
마음을 다잡는 도중 다소 씁쓸한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찡한 마음에 고여 있던 눈물을 거두니 카론이 입꼬리를 추욱 늘어뜨린 채 앉아 있었다.
‘아니! 그건…….’
마, 맞아. 그런데 차마 맞는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카, 카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생각이 좀 짧잖아. 그러다 보니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농담이었어요. 처음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인데.’
수줍게 얼굴을 붉힌 카론이 내 손을 다시 그러잡았다. 그리고 확인받고 싶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죠?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죠? 저, 저만의 착각은 아닌 거죠?’
카론의 황홀하고도 밝게 핀 웃음을 보면 그 누구도 아니라는 말을 뱉을 수 없을 테다. 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론은 방실방실 웃으며 카스텔라를 찍어 물었다.
***
그게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던 나는 옆에 선 카론을 슬쩍 훔쳐봤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눈이 마주친 그녀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활짝 열린 문 밖에서 수십의 장정이 걸어 들어왔다. 승리의 주역들을 향해서 존경과 환호가 담긴 갈채가 쏟아졌다. 나는 카론과 팔짱을 낀 채로 참석자들 사이를 헤집어 카펫 가까이 다가갔다.
선두에 네자르가 서 있었다. 내 눈이 샹들리에 빛에 멀지 않았다면, 저 검홍빛을 띠는 서늘한 눈매의 주인은 네자르가 맞았다.
“어, 어떡해!”
젠장.
감정 이입을 필요 이상으로 했던 탓일까, 떨리는 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의아함에 나를 향했던 주변 시선은 이어서 응당한 반응이라는 듯, 차례차례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짜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 혹시라도 얼굴이 팔릴까, 재빨리 손을 들어 표정을 가렸다. 록허드가 내 꼴을 봤다면 배를 뒤집고 비웃었을 테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나는 머저리 같았다.
“즐거워 보이네요, 케이트.”
“응?”
“마치 제도의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만든 생크림 케이크를 선물 받았을 때의 표정 같아요. 기쁜 티를 숨기려고 손으로 가리는 점도 똑같네요.”
아니나 다를까, 내 비명을 들은 카론이 한마디를 건넸다. 평소와 달리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그에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소리야? 방금은 날벌레가 얼굴로 날아와서 그랬어.”
“홀에서 이렇게 생기 있는 케이트의 얼굴은 처음 봐요. 분하지만 조금 지는 기분이네요.”
식사를 굶었는데 생기라고?
“아마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런 걸 거야. 평소보다 3시간 일찍 기상한 보람이 있네.”
“그런가요? 안색은 물론이고 표정도…….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한낮의 해바라기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네자르와의 재회가 기대돼도 그렇지, 다 죽어 가는 안색이 살아날 정도라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다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카트리나 에젤로트.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끄러움 따윈 모르고 살아온 여자. 내게 있어 부끄러움이란 오직 시대에 역행하는 촌스러운 차림으로 다과회에 나가는 것뿐이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가 날 그렇게 만들었지.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목을 가다듬고 등을 폈다.
“카론? 나는 이만 돌아가 볼게.”
“마침 저도 아버지를 찾았어요. 그럼 케이트, 우리 나중에 보도록 해요.”
카론과 헤어진 후 네자르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며 걸음을 이었다. 곧 나를 알아본 릭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에 내 다리는 교양이고 뭐고 반쯤 뛰고 있었다.
“케이트, 네 오라비 얼굴 봤니? 5년 사이에 아주 홀쭉해졌더구나.”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린 어머니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에 별말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네자르의 얼굴을 보느라 록허드 쪽으로는 관심도 두지 못했다.
“크흠, 남자라면 눈빛이 강렬해야 하지 않겠소. 아주 멋진 남자가 되어서 돌아온 것 같군.”
아버지의 표정은 감격과 감동 그 자체였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올려다보던 어머니가 혀를 차며 웃으셨다.
“당신은 록허드가 울면서 들어왔어도 그리 말할 사람이에요. 남자라면 한 번쯤 울어야 한다고 말했겠죠.”
“반박할 수 없군. 그래도 그 까불까불하던 놈이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오다니! 에든이 이 자리에 없는 게 참으로 안타깝구려.”
“그리 생각하면 에든과 함께 돌아오지 그랬어요?”
“당신도 알잖소, 그놈이 일 하나에 빠지면 부모 형제고 뭐고 뵈지 않는다는 걸. 당신 젊을 때와 아주 판박이야.”
뒤통수가 시끌시끌한 와중에도 황제의 축사는 계속됐다. 전쟁에서 활약한 기사들에게 작위와 영토가 하사되었으며, 특히나 명성을 날린 자들에게는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의 전리품이 주어졌다.
“록허드 에젤로트 경을 황성근위대 제2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하며, 남작 작위를 하사한다.”
드디어 록허드의 얼굴이 보였다. 세상에, 목에 저 상처는 다 뭐야? 얼굴보다도 귀 아래에서 셔츠 안쪽으로 이어진 기다란 상흔이 더 눈에 띄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록허드가 무릎 꿇은 옆모습을 응시했다. 정말 전쟁에서 돌아온 거구나. 어머니의 말대로 살이 빠지기는 했다. 괜히 북받쳐 오르려는 감정을 힘겹게 참아 냈다.
“판시온 엔테라를 엔테라 공작가의 후계자로 임명한다.”
이어서 짙은 금발의 유독 단단한 몸을 가진 남성이 무릎을 꿇었다. 살짝 훔쳐보기만 했을 뿐인데, 코끝에 짙은 국화꽃 향이 맴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록허드와 판시온이 한 공간에서 예를 취하고 있으니 귀부인들과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록허드는 몰라도 판시온의 저 근사한 옆면은 확실히 감탄이 나올 만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턱과 우수에 젖은 제비꽃색 눈동자. 언제나 느끼지만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남자였다.
“……하여 참전 기사들 모두 오늘만큼은 성대한 축제를 즐기도록 하시오!”
아, 안 돼!
기다렸다는 듯 현악 사중주가 들려왔음에도 내 두 다리와 팔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는 여유롭게 술을 홀짝이는 릭의 등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단언컨대 내 생에서 가장 빠른 움직임이었다. 어서 만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또 만나고 싶지 않은 이 복잡한 심경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내 뒤에 숨어서 뭐 하는 거야, 케이트? 록허드 형님께서 이쪽으로 오신다.”
“지, 진짜? 얼마나 가까워? 어디까지 왔어?”
“다섯 발자국. 주변을 살피는 걸 봐선 네가 어디 있는지 찾는 눈치군.”
“어때? 지금처럼 릭 뒤에 숨으면 잘 보이지 않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눈이 달린 이상 어떤 바보라도 알아차릴걸.”
록허드뿐이라면 괜찮았다. 나는 정확히 세 번 심호흡을 들이쉬고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릭의 옆에 섰다. 긴장으로 쿵쿵대던 심장이 록허드를 볼 생각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릭의 말과 달리 실제 우리 가족을 찾아온 그림자의 숫자는 한 개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록허드 말고도 근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한 명 더 존재했다. 네자르였다.
“아버지.”
록허드가 특유의 웃음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그 못지않게 큰 신장을 가진 아버지가 팔을 뻗어 품에 가득 안으셨다.
“하하! 록허드, 내 자랑스러운 아들! 전선에서 돌아온 것치고는 참으로 멀쩡한 낯이구나.”
“뭐, 사람 사는 곳이야 다 똑같으니까요. 어머니는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못 지낼 것 뭐 있니. 종종 네가 잘못되는 악몽을 꾸긴 했지만, 다 괜찮다. 이리도 건강하게 돌아왔으니까.”
크게 웃은 록허드가 어머니를 가볍게 안았다 놓았다.
“어이, 릭.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키만 컸지 다른 건 예전 그대로인 것 같군. 교수로 취임했다더니만 어째 낯짝만 더 뻔뻔해진 기분이야.”
“형님도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보면 남대륙으로 유학이라도 갔다 온 줄 알겠네요.”
“여전히 잘생겼다는 의미지?”
“커피콩처럼 까맣게 탔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어째 이제 농담도 교수처럼 하는구나.”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어떻게 하지? 어떤 표정과 어떤 목소리로 네자르를 만나야 할까?
고민과 달리 내 차례는 찾아오지 않았다. 릭을 격하게 껴안은 록허드가 나를 건너뛰고 네자르의 옆에 섰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아버지가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안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악수를 나누었을 테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전하. 이는 카발 제국 역사에 기록될 매우 뜻깊은 정벌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아주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모두 백작님이 저를 믿고 록허드를 맡겨 주신 덕이죠. 록허드가 없었다면 안심하고 등을 맡길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혼자 저 앞에 서서 펄펄 날아다닌 주제에.”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네자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케이트가 안 보이는군요. 몸이 안 좋기라도 합니까?”
일순, 주변이 텅 빈 것처럼 고요해졌다. 부모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고, 옆에 선 릭조차 코웃음 한번 치지 않았다.
하,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격렬한 움직임이었기에 코앞에 선 두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여기 있거든…요? 자꾸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마…세요!”
키가 더 컸다. 안 그래도 컸던 신장이 더 컸으니 몸이라고 그대로일 이유는 없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그것이 전부일 리 없었다. 5년 만에 만난 네자르는 다른 사람 같았다. 어깨는 물론이고 목, 팔, 허리 할 것 없이 전부 어른의 것이었다.
곧게 뻗은 콧등과 눈썹, 하관의 골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다움이 남아 있던 예전과 달리 매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열정이 느껴졌던 검홍빛의 눈동자는 이제 적기를 기다리는 거대한 태풍처럼 보였다.
네자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 등 위를 타고 올랐다.
“당신이… 아니, 네가 케이트라고?”
여유 가득했던 그의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진다. 그 찰나의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내 눈에 하나하나 박혀 들어왔다.
네자르의 물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여기에 나 말고 카트리나가 또 어디 있을까. 설마 지금 내 얼굴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닌 게 아닐 리가 없다. 그 사실이 파악되자마자 목 근처가 화로 펄펄 끓었다. 누구는 오늘의 만남을 고대하느라 잠도 설쳤는데, 누구는 내 얼굴도 못 알아봐?
심술이 나서 차마 웃는 얼굴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난 대번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꽉 닫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얼굴을 잘 확인해 보라는 의미로 턱을 들어 네자르를 노려봤다. 일그러져 있던 그의 미간이 서서히 풀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나사가 풀린 듯 넋이 빠져 가던 표정에 다시 바짝 주름이 잡혔다.
그때였다. 록허드가 뚜벅뚜벅 걸어와 두 손을 뻗어 내 뺨을 잡아당겼다.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뭐, 뭐야?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허리를 굽힌 그와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해야 했다. 록허드의 표정은 네자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게 그 말괄량이라고? 이봐, 케이트. 아무 소리라도 좋으니까 다시 말해 봐.”
“싫거든? 지금 작위 좀 받았다고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까칠하게 말하는 걸 봐선 케이트가 분명한데…….”
물건 감정이라도 하듯 내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기에 바쁘다.
전쟁터에 오래 있었던 탓인가, 예전과 달리 움직임 하나하나가 힘 조절도 되지 않고 거칠었다. 뻐근해지는 목 정도야 참을 수 있었지만, 화장이 지워지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이거 안 놔? 너는 어떻게 5년 만에 만나서 사람을 짜증 나게 해?”
바위처럼 딱딱한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힘을 다해 밀어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꿈쩍도 안 했다.
“진짜였군. 이거, 놀라서 입도 안 다물어지겠네. 이게 대체 뭐죠, 어머니? 원래 에젤로트는 대대로 여자들이 허물을 벗습니까?”
말을 마친 록허드는 내 뺨에서 손을 떼고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허리를 잡아서 번쩍 들어 올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드넓은 파티장의 전경이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졌다. 개미 떼처럼 모인 정수리가 보이자 울컥, 토기가 올라왔다.
“이렇게 보니까 조금 무거워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이건 너무 높잖아! 나는 우선 비명을 참기 위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리고 록허드의 명치를 망설임 없이 구두로 걷어찼다.
“악!”
땅에 발을 딛자마자 릭의 등 뒤로 숨었다. 저 미친놈이 미친 짓만 하는 덕에 네자르랑 대화할 타이밍은 잡지도 못했다. 정말 인생에 도움이라곤 쥐뿔도 되지 않는 놈!
“쯧쯧, 너는 꼭 케이트를 괴롭혀서 매를 버는구나, 록허드. 다 컸을 거란 생각은 역시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크흠, 그래도 오래간만에 가족 모두와 함께하는 기분이 들어 좋구려.”
록허드가 가슴을 움켜쥐고 끙끙 앓을 동안 릭이 몸을 돌려 내 어깨를 잡고는 앞으로 밀어냈다. 정확히는 아무런 앞이 아닌 네자르의 앞이었다. 의도치 않은 상황인 건 둘째 치고, 무엇보다 심신의 안정을 찾지 못했기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네자르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는 아까의 울긋불긋했던 표정과 달리 파문 없는 호수의 표면처럼 차분했다.
“네자르 전하는 케이트와 할 말이 있으실 테니 형님은 저희와 가서 무용담이나 들려주시죠.”
“무슨 소리냐? 나도 케이트랑 할 말이 많아. 많다 못해서 아주 차고 넘칠 지경이라고.”
“압니다만 케이트가 없을 테니 자중하세요.”
말릴 틈도 없이 릭이 록허드의 목덜미를 쥐고 사라졌다.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둘의 뒤를 따라나서며 작게 웃음을 흘리셨다. 그렇게 화려하고 시끄러운 파티 홀 한가운데 나와 네자르 단둘이서 남게 되었다. 끔찍하다.
혹시 지금 나, 꿈을 꾸는 거야? 꿈이 아니라면 이렇게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색하고, 민망하고, 쑥스럽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허기고 뭐고 네자르를 인지한 순간부터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불안하기는 했다. 그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는 불안감.
“가만히 있다가도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확실히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맞긴 하군.”
뜬금없는 말임과 동시에 충격적인 말이기도 했다. 나는 내심 네자르가 먼저 운을 뗐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한 몸처럼 쥐고 있던 부채를 부랴부랴 폈다. 그리고 입을 가린 채 되물었다.
“전혀 몰랐어요. 내가 이, 이상한 표정을 해? ……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방금 그 표정, 옛날에 자주 짓던 그 표정이었어. 곱게 굽어지는 입매를 본 덕일까? 긴장으로 뻣뻣하던 목덜미가 살포시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늘 하지.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존칭어 붙일 필요 없어. 그런 건 바리지도 않으니 케이트 너는 하던 대로 말해.”
“응.”
어휴, 살았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하아…, 이걸 어쩐다.”
이마를 슬슬 매만지던 시선을 틀어 천장을 향한다. 그 말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부채를 콧등까지 끌어 올리고 네자르를 열심히 뜯어봤다.
이전의 그가 하얀 피부에 몸가짐 바른, 기품이 가득한 도련님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당시와 너무나도 판이했다. 어디의 어떤 부분이 다르냐에 대해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없이 존재했기에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었다.
그 차이를 인식하자마자 풀어졌던 긴장이 되살아났다. 열아홉의 네자르는 습관처럼 괴롭혀도 늘 날 지켜 주고 돌봐 주는 존재였다. 가시 돋친 말투에도 봄기운 가득한 시선을 마주하면 평화로운 따스함이 느껴지던, 그런 존재.
그럼 지금은?
천천히 마른세수를 한 그가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눈을 마주쳤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날카로운 예리함이 붉은 눈동자 아래에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아니야. 오히려 잡아먹힐 것 같아. 나는 괜히 기세가 죽어 눈을 내리깔았다.
“낡았네.”
그 말에 힐끔 다시 얼굴을 들었다. 무얼 보고 하는 말인가 싶었더니 무덤덤한 눈빛이 내 정수리 근처를 향한 상태였다. 나는 팔을 올려 수십 가지 핀으로 곱게 틀어 올린 머리 근처를 더듬었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만져지는 얇은 머리끈.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자르에게 받았던, 은사로 수선화를 수놓은 머리 끈이다.
“아아, 이거? 색이 많이 바랬지? 대여섯 번 정도 수선했는데 내가 워낙 자수 실력이 안 좋은 탓에… 망가지기만 했어.”
안 좋기만 할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유에서 무를 창조할 수준의 끔찍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길게 말할수록 바닥이 보일 것 같아 얌전히 입을 닫고 다시 손을 거두었다. 이윽고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내쉰 네자르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좋아. 우선 그 빌어먹을 부채 좀 내려 봐, 케이트. 얼굴이 안 보이잖아.”
안 된다. 나는 아직 민얼굴로 네자르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어, 얼굴을 꼭 봐야 해?”
“방금 질문, 굉장히 이상했던 거 알지? 아니면 내가 북대륙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동안 제국의 유머가 달라지기라도 한 거야?”
친구라고는 카론밖에 없는 내가 유행하는 유머 따위 알 리 없었다.
네자르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생각이 없는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나를 내려다봤다. 그에 고집을 피우려던 나는 얼마 안 가 천천히 부채를 거두어 손에 쥐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자르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냐면, 그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네자르는 부채를 치우길 기다렸다는 듯 내 뺨, 눈썹, 코끝, 입술 모두를 샅샅이 훑었다. 그야말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저기, 네자르. 내 얼굴 좀 그만 보면 안 돼?”
“왜, 닳기라도 해?”
“아니! 부, 부끄러워서.”
사람 많은 한복판에서 둘이 마주 보고 서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네자르는 카발 제국의 단 한 명뿐인 황태자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위 시선을 빨아들이는 존재감인데, 그 공간이 승전 기념 연회로 북적이는 홀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내가 케이트임을 알아챘을 때와 아주 유사한 표정으로.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참.”
이윽고 네자르가 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얗고 부드러웠던 손바닥은 사라지고 잔 상처와 굳은살로 가득한 살갗이 보였다. 잡으라는 의미일까?
“우선 홀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 여기는 너무 어수선해서 도저히 집중되지 않…….”
네자르의 손을 마주 잡으려던 때였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움찔하던 그가 갑자기 손을 거두었다. 뭐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 샴페인잔을 든 시종이 옆으로 지나갔고 그중 둘을 집은 네자르가 하나는 자신의 왼손에 쥐고, 하나는 갈 길을 잃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잘 따라와라, 케이트. 인파에 휩쓸려서 괜히 길 잃지 말고.”
등을 돌린 네자르가 내게서 멀어진다. 동시에 이를 데 없는 서운함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방금 내 손을 거절한 거 맞지? 연유를 알 수 없는 탓에 가슴이 답답했다. 네자르는 그런 나의 속도 모르고 넓은 보폭으로 잘도 걸어갔다.
한참을 걷던 그는 중간에 몸을 돌려 내가 멀뚱히 서 있음을 확인하곤 가볍게 손짓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어릴 적부터 잘 어울려 놀던 남자 사촌과 나이가 들면서 돌연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전 삶에서도 십 대 중반 무렵에 어색함의 강도가 유독 강했다. 대개 이십 대 중후반 즈음에 사이가 완만해진다지만, 나는 열일곱이 된 해에 목숨을 잃었으므로 사촌과도 어색한 사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네자르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그때 그 사촌과의 어색함과 아주 유사했다. 차라리 나만 그리 생각하면 애써 아닌 척이라도 할 텐데, 하필 네자르도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친동생 대하듯 잘 어울려 줬으면서, 5년 만에 만났다고 습관처럼 잡아 주던 손까지 떨쳐 내다니. 그것도 심지어 벌레 쫓듯이!
하나하나 따지려니 서운하다 못해 화까지 나려 했다. 드레스와 피부 걱정에 며칠을 소비했던 내가 참 멍청하게 느껴졌다. 물론 기다렸다는 듯 투정을 하는 내가 웃기기는 했다. 약혼을 뒤집으니 뭐니 해도 난 여태 그의 배려를 당연하다는 듯 바라는 것이다.
“네자르 전하!”
물론, 내가 이같이 구구절절 짜증과 서운함을 내뿜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존재했다.
“하하!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저는 전하를 필두로 한 북벌원정대라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콜랜토 백작.”
“과찬이라니요! 전하와 제국의 업적은 이 거대한 카산드라 홀 벽에 음각되어 대대손손 알려야 할 정도인 것을요!”
이번이 몇 번째더라, 셋? 넷?
샴페인잔의 반이나 채우고 있던 음료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는 시종에게 빈 잔을 건네고 다시 새로운 잔을 잡았다.
네자르가 홀을 나가자고 말한 게 벌써 10분 전의 일이었다. 하나 날 이끌고 당당하게 나서던 기세가 무색하게, 걸음을 옮기는 족족 아귀처럼 몰린 귀족들에게 붙잡혀야 했다. 참다못해 서너 발자국 떨어져 말없이 연어 샐러드만 집어 먹었다. 배가 조금 채워지는 기분이었지만, 체하지 않기 위해 꼭꼭 씹어 넘겨야 했다.
나는 약혼자의 자격으로 그의 옆에 설 자신이 없었다. 괜히 눈치 없는 소리를 해 네자르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중간중간 내게 고개를 돌린 네자르는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모르는 척 얼굴을 돌렸지만.
“그리고 이쪽은 차녀 메디아입니다. 메디아? 전하께 인사드리려무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자르 전하. 제 이름은 메디아 콜랜토입니다. 메디아라고 불러 주셔요.”
“첫 만남에 실례를 저지를 순 없죠. 콜랜토 영애, 만나서 반갑습니다. 듣던 대로 아름다우시군요.”
입발림이란 걸 알지만 눈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자르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마주 선 여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괜찮아. 네자르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가 많아질수록 그의 여자를 찾기도 쉬워지는 거야. 그러니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하나 없었다.
“아, 다음 달 콜랜토에 제국 최대 크기의 오페라 극장이 개관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극장 개관식에 꼭…….”
“아아, 시간이 된다면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정이 바빠 확신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하하!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야 황태자 전하께서 요즘 많이 바쁘시단…….”
저 배불뚝이 대머리 백작은 눈치를 콜랜토에 두고 온 것일까?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뻔뻔하게 철판을 깐 것일 수도 있었다. 네자르가 이 파티의 인기인이라는 건 지나가는 날파리도 알 만큼 당연한 사실이다. 내 존재는 알아채지 못했다 해도, 근처에서 전전긍긍하는 귀족이 몇인데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다니. 갈채가 절로 나올 만큼 얄미운 남자였다.
“아! 사실 오늘은 메디아의 데뷔탕트입니다. 그렇지 않니, 메디아?”
“예. 제 데뷔탕트를 이렇게 의미 있는 파티에서 치를 수 있어 영광이어요.”
웅얼거리듯 말하는 여인의 눈은 네자르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시선 그 자체였다.
괘, 괜찮아. 둘이 눈이라도 맞는다면 그거야말로 최선의 결말이었다.
콜랜토 백작은 무언가 기다리는 답이라도 있는 듯, 기대 가득한 얼굴로 네자르를 쳐다봤다. 그러나 네자르는 부드럽게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고, 짧게 웃음을 털어 낸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자르 전하, 괜찮으시다면 메디아의 첫 춤 상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저 말입니까?”
종종 본능이 이성을 앞지를 때가 있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내가 그러했다. 긴 시간 고대해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여기 이 자리에 얌전히 박혀 있거나,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며 매정하게 등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고 회로가 원만히 돌아가기는커녕 딱딱하게 멈춘 상태였다.
오물거리고 있던 연어를 삼켜 내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아, 아버지도 참! 전하께선 약혼자가 계시는데…….”
여인이 입을 가리고 웃는 동안 내 걸음이 네자르 옆에 멈춰 섰다. 동시에 셋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정면에 마주한 메디아 콜랜토의 눈이 가장 커다랗게 뜨였다.
“누, 누구신…….”
나는 주제 파악 못 하는 부녀를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뭘 먹고 그렇게 무례하세요?”
메디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나는 노백작과 백작 영애의 반응을 두루 살피며 활짝 웃는 낯으로 말했다.
“얼마나 무례하고 뻔뻔한지, 하마터면 어디서 천박한 졸부가 네자르 전하께 꼬리라도 치는 줄 알았지 뭐예요?”
“어린 영애가 말이 심하군. 갑자기 찾아와서는 그 무슨 망발이요? 허허,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어른이 대화하는 자리에 겁대가리도 없이 끼어들다니! 대체 어느 가문의 여식이오?”
“저는 네자르 전하와 혼인이 약속된 사람입니다.”
턱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자, 백작이 입을 닫았다. 그들이 내 얼굴을 모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홀 파티에 참석한 횟수는 겨우 두 손가락에 꼽으므로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초면이었던 탓이다.
“약혼자를 옆에 두고 있는 남자에게 첫 춤 상대가 되어 달라고요? 그건 대체 어느 나라 교양이죠?”
메디아의 안색이 파랗게 물들었다. 제국은 열여덟부터 성인으로 인정받고, 여성 귀족은 성인이 되자마자 데뷔탕트를 치른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된 그녀에게 내 가시 돋친 어투는 충분히 당혹스러울 만했다. 낭패인 얼굴이 되어 주변을 훑던 백작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우, 우선 사과드리겠소, 영애. 내, 전하의 약혼자가 있다는 소린 들은 적이 없어…….”
몰랐을 리 없었다. 모르는 척 네자르를 이용하려던 거겠지. 흥, 뻔한 거짓말을 하기는! 나는 보란 듯이 야비한 웃음을 흘려 주었다.
“몰랐다는 소릴 아주 당당히 하시네요. 모르면 물어보셨어야죠, 백작님. 제가 네자르 전하와 약혼 서약서를 작성한 날이 벌써 5년 전이에요. 무려 5년이라구요. 그 긴 시간 동안 국외 여행이라도 갔다 오셨나 봐요?”
배불뚝이 백작은 내 앞에서 열심히 횡설수설하다가 제 딸을 데리고 사라졌다. 변명이랍시고 한 소리가 너무나 형편없어 무슨 말을 남기고 갔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어이가 없었던 난 남은 샴페인을 꿀꺽 삼키고 근처 테이블 위로 내던지듯 올려놨다. 잘한 게 맞아. 그런 가문과 여식은 네자르에게 필요 없어.
그 순간이었다. 내 정수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말을 아주 잘하던데? 조금 점잖아졌나 했더니, 그 성질머리는 어디 가지 않았구나.”
“성질머리라고? 저 늙은 백작은 지금 날 없는 사람 취급한 거야. 당연히 화가 날 만도 하지!”
몸을 돌리니 네자르는 예의 그 귀족을 대할 때처럼 온순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비단 메디아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수많은 귀족 여식이 흠뻑 빠질 만큼 근사한 표정이었다.
“그래, 케이트. 네 말이 백번 맞아. 나중에 만나면 한마디 꼭 해 줘야겠군. 덕분에 귀찮은 일은 충분히 던 것 같으니, 이참에 어서 도망치자.”
그래도 마지막 말만큼은 동화에 나올 법한 낭만적인 문장이었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네자르를 따라 카산드라 홀 바깥으로 향했다. 술과 춤이 함께하는 황성의 밤은 아름답다. 눈이 아릴 만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실내와 밤이 까맣게 내려앉은 바깥은 모든 것이 상반된 분위기였다.
성큼성큼 앞서 걷던 이전과 달리 네자르는 내 느린 걸음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분명 흐른 시간에 비례해 신장이 자랐음에도 네자르와 나의 걸음 폭 차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네자르는 길을 틀어 카산드라 홀과 빅토리아 성을 잇는 정원으로 들어섰다. 고요한 만큼 더욱 강렬한 꽃의 향기가 사방에 들어찼다.
이건 무슨 꽃이지? 아무리 살펴도 처음 보는 외양이었으나, 풍겨 나오는 향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이리 와 봐, 네자르. 내 생에 이렇게 예쁜 꽃은 처음 봐. 외래종인가? 꽃잎은 작약처럼 화려한데 향은 사향과 비슷해.”
꽃 덤불 앞에 걸음을 멈추고 잎 근처를 더 면밀하게 들여다봤다. 실내 장식에 쓰여도 될 정도로 크고 화려한 사향 장미였다.
“아아, 그건 사향 장미야. 판시온 경이 카마우드라 왕국에서 받아 온 종이지. 엔테라로 가져가지 않고 황성에 바쳤다더니, 이곳에 심어 놓았군.”
“받아 왔다고?”
네자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우드라의 왕은 자국의 신민을 위해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했어. 우리가 진격한 즉시 카마우드라가 카발 제국의 속국임을 받아들이고, 테레시아 왕녀를 공녀로 바쳤지. 그 공녀가 판시온 경에게 준 선물이 바로 이 사향 장미야.”
카마우드라 왕국이라면 나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테레시아 왕녀를 포함한 각국 네 명의 왕녀가 공녀로 바쳐졌단 소식도 이미 작년 말에 들은 소식이었다.
“테레시아 왕녀가 왜 판시온 경에게 선물을 줘? 왕녀는 이제 폐하의 사람이잖아.”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공물이지. 손을 뻗은 네자르가 가장 활짝 핀 사향 장미를 꺾었다. 꽃잎이 워낙 무거워 무게를 버텨 내지 못한 줄기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글쎄, 함부로 입에 담기에는 그리 유쾌한 이야기가 못 되는군. 확실한 건 엔테라가 아닌 이곳에 장미가 심어졌단 사실이지.”
코를 가까이 해 향을 삼킨 그가 덤불 너머로 꽃을 내던졌다.
“또 궁금한 건 없는 건가?”
하늘은 어두웠지만 네자르의 얼굴은 환했다. 새벽의 안개처럼 흐릿하게 떨어진 달빛이 그의 이마에서 빛을 냈다. 낮게 우는 심장의 떨림이 이보다 더 기분 좋게 느껴질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낯 뜨거운 기분이었고, 결국 난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록, 록허드는 왜 그리도 까매진 거래? 너무 못생겨서 정말 인상이 다 찌푸려지더라.”
“못생겨졌다고? 내 성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멋있다고 펄쩍펄쩍 뛰던데.”
“뭐어? 매일같이 네자르의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데려가라고 해. 나야 대환영이니까.”
펄쩍펄쩍 뛸 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안 그래도 말에 미쳐 밤낮으로 승마를 즐기던 록허드가 이제는 진짜 야생마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한층 단단해진 힘과 노련해진 잔머리로 날 괴롭힐 거라 생각하니 벌써 등에 소름이 일었다. 빨리 혼인식을 치러서 에젤로트 밖으로 꺼져 버렸으면 좋으련만.
내 투덜거리는 어투에 네자르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네게는 아직 내 얼굴이 쓸모 있는 모양이네. 나는 또 5년 사이에 내 매력이 한물간 줄 알았지 뭐냐.”
그리 말한 네자르는 다시 몸을 돌려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심 계속해서 손을 잡아 주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꾸 저 혼자 앞서 걸으니 보이는 건 넓고 잘난 등이 전부였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숙이고 있던 등을 펴 네자르 옆에 나란히 걸었다. 차라리 미치고 말지 손을 잡아 달라고 먼저 말을 꺼낼 자신은 없었다.
“너는 어때? 그렇게 고대하던 친구는 조금 생겼나?”
“어, 음……. 아니.”
네자르의 내연녀는커녕 내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상대는 기껏해야 카론이 전부였다.
혀를 찬 네자르가 그사이에 또 꺾어 놓은 사향 장미 한 송이를 내 머리 위에 꽂았다. 릭이었다면 이상한 짓 하지 말라며 머리를 털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네자르의 손끝이 닿은 귓등이 뜨겁게 달아오른 탓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뭘 한 거냐? 네가 데뷔탕트를 치른 지… 1년?”
“나는 올해로 스무 살이 됐어. 그러니까 사교계에 데뷔한 지 이제 2년 지났지. 1년이 아니라 무려 2년이라구.”
네자르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그는 참 한숨이 많았다. 날 그만큼이나 한심하게 여기는 걸까, 싶다가도 곧바로 마주치는 애정 가득한 눈빛에 자괴감이 흐물흐물 녹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스물의 케이트라니.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꿈꾸는 듯한 기분이군. 하룻밤 새에 10년은 훌쩍 흘러 버린 느낌이야.”
이 말도 네자르가 예전부터 종종 해 왔던 소리이다. 하도 오랜만에 듣는 한탄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와 버렸다.
여덟 살 이후, 내 생일 연회가 열리는 날이면 첫 손님은 항상 네자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잠도 덜 깬 상태의 날 허공에 들어 올리곤 했다.
‘네가 벌써 열 살이라고? 이렇게나 땅딸막한데?’
내 나이가 열둘이 되었던 해도.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열둘이라니. 하늘이 무너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열둘이 지나 열넷이 되었던 해도.
‘열넷? 농담이 심하구나. 차라리 록허드의 저 징글징글한 애마가 올해로 백 살이라고 해라.’
그리고 그가 떠나기 직전인 열다섯이 되었던 해까지. 네자르는 내가 평생 여덟 살의 카트리나로 멈춰 있길 바랐던 걸까. 이제껏 보아 온 어머니도 내게 그런 소리는 한 적 없으신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길 양옆으로 활짝 피어 있던 사향 장미 덤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나는 퍽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뒤를 돌아 주변을 훑었다. 이제는 지나쳐 버린 저 먼 길 너머로 새하얀 장미가 만발했다.
“네자르,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여기는 정원등도 없어서 어둡기만 하잖아. 이제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느릿했던 걸음이 이제는 기는 것만도 못한 수준으로 무거워졌다.
“왜, 어두운 게 무서워?”
한참 앞만 보고 걷던 네자르는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붉어야 할 그의 눈동자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밤하늘보다 더 까맣고 고요했다.
“밤마다 잘도 돌아다녔던 주제에 이상한 소릴 하는군. 네가 무서워할 만한 건 이 황성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저 휘황찬란한 카산드라 홀도, 이 귀한 사향 장미도…….”
네자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머리칼 사이로 꽂힌 장미를 건드렸다.
“얼마 안 가 전부 네 것이 될 텐데 말이지.”
살짝 어긋난 눈매와 입꼬리, 거기에 뻣뻣한 뺨까지 한데 모이니 차마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얼굴이 된다. 눈앞의 네자르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낯선 느낌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불편한 기분에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이곳이 무섭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밝은 곳으로 가고 싶은 것뿐이야. 이렇게 깜깜하면 서로의 얼굴도 못 보잖아.”
네자르는 이제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무언가 깊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한 박자 늦게 입이 열렸다.
“약혼 서약서는 아직 잘 가지고 있겠지?”
“그럼, 물론이지. 아버지 집무실 벽에 액자로 잘 걸려 있어.”
“액자?”
“내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서약서를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신다고 하셨어. 책임질 남자가 있다는 게 든든하신가 봐.”
그 말에 네자르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우스울 만도 하지. 막내딸의 약혼 서약서를 벽에 걸어 둔 에젤로트 백작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있던 네자르는 힘겹게 평온을 되찾고 내 머리에 꽂아 두었던 사향 장미를 뽑았다. 그가 뽑은 장미는 땅으로 굴러떨어진 게 아니라 내 귓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백작님 방은 이미 찼으니, 이제 네 방에도 하나 둘 순서로군. 그렇지?”
귀에 꽃을 꽂은 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등을 굽혀 시선을 맞춘 네자르가 허리춤을 뒤적였다.
“왜, 나한테 선물이라도 주게? 승전 기념 선물이야?”
“내가 누누이 말하는데, 케이트. 그런 선물은 내가 아니라 네가 준비해야 하는 거야. 물론 나야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 그 정도야 나도 알고 있어. 말뿐만이 아니라 꼭 준비할게. 그러니까 기대하는 거 포기하지 마…….”
내 말에 그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네자르의 눈짓에 나는 얌전히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그에 칭찬이라도 하는 양, 손바닥 위에 작은 유리구슬 하나가 올라왔다.
“……이건?”
자세히 보니 단순한 유리구슬이 아닌, 유리로 만들어진 문진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투명한 유리 안에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시야 안으로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은방울꽃이었다.
“이브리움 왕국의 유산. 네 말대로 승자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이브리움의 왕족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 끝에 전원 자결을 택했어.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 전부가 우리 카발 제국에 귀속되었지. 이건 우리가 얻은 수많은 전리품 중 하나야.”
“저, 전말을 들으니까 조금 무서운 기분이네. 그런 귀한 물건을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전 주인이 무려 자결한 망국의 왕족이라니, 밝은 곳에서 잘 살펴보면 빨간 핏물이 묻어 있을 것만 같았다.
“물건은 가치를 알아봐 주는 주인을 만날 때 가장 빛나는 법이니까. 뭐, 네가 문진을 쓸 날이 오기는 할까 모르겠다.”
쓰임 따위는 상관없었다. 나는 네자르에게 귀한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에 들떠 유리 문진을 양손에 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전쟁터로 떠나던 해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었다. 나는 받기만 하고, 네자르는 주기만 하고. 비록 말뿐인 약혼자라 해도, 정작 나는 그를 위해서 작은 정성 하나 표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것이다.
“저기, 네자르. 설마 정말로 선물을 준비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지금 가진 거라곤…….”
꼬, 꽃다발이라도 만들어 와야 하나? 급히 고개를 틀어 등 뒤에 풍성하게 핀 사향 장미를 찾을 때였다.
따뜻한 손이 내 뺨을 잡고 다시 정면을 향해 되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얼굴을 쥐고 있던 네자르의 손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재빨리 떨어져 나갔다.
“잠깐. 케이트, 미안한데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커다란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구부러져 있던 네자르의 등이 바르게 펴졌다. 나는 양손에 유리 문진을 든 채로 네자르를 올려다봤다.
“우선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날 기다려 줘서 고마워, 케이트.”
어디선가 바람에 살랑이는 풀잎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옅은 봄바람의 잔음도 곧 네자르의 차분하고도 고즈넉한 목소리에 저 멀리 사그라졌다.
“그러니까……. 하아, 이 한마디를 내뱉는 게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힘든 기분이군. 록허드 그 뭣 같은 놈이 겁만 주지 않았어도 별문제 없이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고맙다는 소릴 하기가 그렇게까지 힘들었단 의미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네자르의 얼굴은 내가 평생을 보아 왔던 색과 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미미한 떨림과 파란 생동감이 보였다. 내게는 늘 정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던 것과 놀랍도록 다른 모습이었다. 하다못해 파티 홀에서 날 알아보지 못해 당혹스러워했을 때도 이처럼 일그러진 이목구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케이트, 나랑 결혼해 줄래?”
그리고 그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 젠장. 드디어 말했네.”
팔을 들어 머리를 휘저은 네자르가 이어서 말했다.
“미안하다, 케이트.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이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파티장에서 시간만 허비했던 거였어. ……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새 지저귐과 강물이 흐르는 평화로운 사중주로 가득했던 내 머릿속에서 커다란 폭죽 수만 개가 일시적으로 터져 나갔다.
***
‘네자르는 언제 혼인해?’
아직도 기억난다. 말에 올라타 얌전히 갈기를 정리하던 네자르가 내 한마디에 깜짝 놀라 안장에서 떨어질 뻔했었다. 사냥한 토끼의 몸통에서 화살을 뽑아내던 록허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심성 없이 단번에 빼냈는지, 털과 가죽에 큰 상처가 나 버렸다.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
푸르륵. 나는 주둥이를 털기 바쁜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돌렸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회피한 것이었으나, 눈치 없는 록허드의 입은 아주 가벼이 열렸다.
‘며칠 전에 에든의 혼인 상대가 결정 났거든. 그것도 케이트 또래의 여자아이로.’
급히 뽑아낸 탓에 화살대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망설임 없이 부러진 화살을 내던진 록허드가 축 처진 토끼의 몸통을 안장 뒤편에 매달았다. 그 옆으로 전리품이라도 된 것처럼 서너 마리의 고깃덩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소백작의 나이가 올해로?’
네자르의 물음에 록허드가 곧바로 대답했다.
‘스물하나.’
‘늦은 편이군. 록허드 너는 아직 말이 오가는 혼인 상대가 없는 건가?’
나는 안장에서 내려와 냇가로 걸어갔다. 바위에 앉아 가죽 부츠의 끈을 푸니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부츠를 벗고 쉬는 동안 곁으로 내려온 록허드가 냇물에 손을 씻었다.
‘나는 방임된 산양이라고 보면 돼. 가문의 명예에 수치만 안기지 않는다면 남자를 첩으로 들이거나, 내가 첩으로 들어가도 크게 상관없지.’
그 말에 네자르가 인상을 구겼다.
‘남자의 첩으로 들어간다고? 애초에 명예라는 게 존재하긴 하냐?’
‘있겠어? 없다는 의미야.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문의 명예보다 개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거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나 홀로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힐끔 네자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손끝에 묻은 진흙을 털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혼인은 언제 한다는 거야?’
내게로 향한 네자르의 시선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눈꼬리만 아주 살짝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기다렸던 대답은 그가 아닌 록허드에게서 나왔다.
‘곧 하겠지. 이미 명단에 누구 이름이 올랐는지 다 소문났어. 참고로 그 안에 네 이름도 있었다, 케이트.’
생각지도 못한 말에 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정말? 네자르의 약혼자 후보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고?’
‘어디까지나 명단일 뿐이야.’
네자르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으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부담스럽기라도 한 듯이 스윽 고개를 돌렸다.
‘우리 가문이 몇 없는 황가 종친이라 명분은 가장 좋지. 폐하께서 가장 원하시는 황태자비 중 하나도 케이트일 텐데.’
‘그래 봤자 케이트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후보에서 제외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 말고도 열 명에 가까운 영애들이…….’
‘누가 싫대?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싫을 일 없어. 그러니까 나로 해, 네자르. 나랑 결혼하자!’
자리에 벌떡 일어서 부츠를 버려둔 채 맨발 상태로 초원을 달렸다. 동시에 안장에 올라 있던 네자르가 말의 등이 뚫릴 기세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에서 팔을 쭉 뻗은 그는 나를 가볍게 들어 안장 앞에 앉혔다.
‘케이트, 너 결혼이 뭔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날 결혼도 모르는 바보로 알고 있네. 아무렴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결혼은 주교 앞에서 평생의 동반자임을 맹세하고, 애를 낳아서, 자손을 잇는 거야.’
‘그 자손은 어떻게 잇는 건데?’
‘간절히 빌면 신혼 첫날밤에 황새가 침대로 날아와 아이를 내려 줘.’
‘푸하학!’
천천히 초원을 따라 올라오던 록허드가 허리를 까뒤집고 웃었다. 말은 네자르에게 하고 있는데 왜 록허드가 비웃는 거야? 난 패기 있게 고백했다는 사실도 잊고 록허드의 얄미운 얼굴을 노려봤다. 한참 동안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올라온 록허드는 자신의 애마, 아나스타샤 등에 오르며 크게 헛기침을 했다.
‘생물학 교수가 놀랄 만큼 아주 명쾌한 명답이야. 열넷이면 약혼 서약을 치르기에도 딱 알맞네. 우리 케이트 다 컸다, 다 컸어.’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전혀.’
입술을 앙다무는 사이에 말에서 내린 네자르가 천천히 냇가로 걸어갔다. 밤처럼 새까만 흑발이 청량하고도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는 바위 옆에 놓여 있던 내 가죽 부츠를 쥐고 록허드를 지나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랑 혼인해서 황태자비가 되면, 넌 평생을 황성에 박혀서 숨만 쉬어야 할걸. 이런 자유로움은 다신 경험할 수 없을 거야.’
‘그런 건 상관없어. 나, 성에서만 지내는 거 아주 익숙해. 그러니까 평생 네자르 옆에 있을래.’
‘철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신발이나 신어라. 널 아내로 맞이하느니 평생을 독신으로 살고 만다.’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거야?’
어느새 흙과 풀로 범벅이었던 발바닥이 약간의 먼지를 제외하고 말끔해진 상태였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툭툭 턴 네자르가 뒷주머니로 대강 구겨 넣고 내 발에 차근차근 신발을 신겼다. 삐죽 입술을 내밀고 있는 동안 뒤통수에서 록허드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만큼 말이랑 행동이 따로 노는 놈도 없을 거다.’
‘너는 좀 닥쳐.’
‘예, 예.’
마지막으로 부츠 끈까지 허술하게 묶은 네자르가 날 자신의 말에서 내려놨다. 땀에 젖은 흑발이 이마 아래로 떨어져 부드럽게 흔들린다. 내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마주한 그의 얼굴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잘난 눈썹이 곱게 구부러지는 형상이 그렇게 인상 깊을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네자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약혼 서약을 치르자며 떼를 쓰기 바빴다. 돌이켜 보니 귀족 영애의 체면이고 뭐고 남자 한 명에 매달리는 내가 참 대단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내게 있어 네자르는 겨우 남자 한 명이 아닌걸.
***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사이 내가 있는 곳은 어두운 밤 아래가 아닌 은은한 정원등에 둘러싸인 장미 정원의 벤치였다.
멍한 눈으로 손안의 유리 문진을 응시할 동안 네자르에게선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니, 아무런 말도 없는 게 아니라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영 속을 파악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뭔가 있어. 그렇지?”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세상에서 이렇게 열심히 고개를 저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열과 성의를 다한 변명에도 네자르의 의심 어린 눈초리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럼 빨리 대답해. 뭘 망설이는 거야?”
큰일 났다. 기쁨과 행복으로 축제 분위기가 된 심장과 달리, 머릿속은 이성과 감성이 양분되어 서로 치밀하게 대치하는 중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흥분하면 안 돼. 난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하며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건 단연코 형식적인 프러포즈다. 그와 나는 황제가 공표한 약혼 관계이며, 긴 전쟁이 끝나 카발 제국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황태자인 네자르의 혼인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므로 네자르가 내게 결혼 의사를 전달한 건 아주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하나뿐인 약혼자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네자르의 동정심이 혼인이라는 열매를 맺고 끝을 보게 된다면, 서로에게 득이 될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네자르의 성격상 정부를 두더라도 내 시선이 들지 않는 곳에 몰래 둘 테고, 그럼 난 그의 빈자리를 느끼며 외로움에 메말라 가겠지. 젠장, 상상만으로도 눈가에 눈물이 고일 만큼 비참한 미래였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혼인이 이루어져서는 안 돼! 그렇다고 해서 생크림 케이크만큼이나 달콤한 그의 프러포즈를 거절할 자신이 있던 건 아니지만.
“생각할 시간을 줘. 내가 황후라는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어.”
이렇게 된 이상 답을 조금 미루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자르는 코웃음을 치며 내 귓등에 꽂아 두었던 사향 장미를 빼 들었다.
“너는 내가 어디 시골 작은 영지의 소남작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나는 카발 제국의 황태자이며 네가 나와 약혼 서약을 치른 이상 혼인까지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다. 네가 혼인을 파기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야. 에젤로트의 삼 형제가 불의의 사고로 전부 사망해 가문의 후계를 이을 사람이 너밖에 남지 않았다거나, 다른 남자 손을 잡고 도망간다거나.”
코앞에서 흔들리는 사향 장미와 그 너머, 홀에서 흘러나오는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까마득해진 그림자 장막이 네자르의 콧등을 덮었다.
“너, 설마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외간 남자랑 손을 잡고 도망갈 거냐?”
“아니!”
“그럼 위의 형제들을 차례로 죽이고 에젤로트 백작이 될 생각이야?”
“전혀. 그럴 리가.”
“그럼 쉽겠군. 또 헛소리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너는 이제 황후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약혼이라는 게 당연히 손쉽게 취소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정도로 단호하게 혼약을 진행할 줄은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고독한 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을 즐겨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마음 놓고 프러포즈를 받아들여서 잠깐의 달콤함을 즐기는 거지.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던 네자르가 쥐고 있던 꽃송이를 바닥에 던졌다. 일자로 꽉 닫힌 입술이 그의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내가 별소리 못 하고 혼나는 아이처럼 몸을 움츠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또 그런 표정이네. 네가 종종 파악하기 어렵다는 거야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야?”
그 소리에 넘어가 고민하는 티가 여실했는지, 네자르는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내가 친절하게 물어볼 때 얌전히 대답하도록 해. 나중에 또 울고불고 매달리지 말고.”
“나, 나처럼 모자란 애와 결혼하는 건 네자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야. 그리고 딱히 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 말에 네자르는 강한 두통이 온 것처럼 이마를 부여잡고 한동안 땅만 쳐다봤다. 말하고 보니까 확실히 어린애 투정 같은 이유였다.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을 때는 당연히 네자르와 나를 위한 일이라 여겼는데, 막상 언어로 표현하려니 철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내가 널 안 좋아해서 이 결혼은 아닌 것 같다?”
다시 등을 편 네자르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봐, 케이트. 내가 분명히 결정한 모든 일에 책임감을 기르라고 했지? 개처럼 굴러서 네 곁에 돌아온 5년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큰일 날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그 책임감 때문에 지금까지 날 업고 기른 네자르다. 그랬기에 네자르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끝까지 좋아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단 사실이 조금 비참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빈말이라도 좋아한단 소리를 한 번도 안 할 수 있지? 이쯤 되니 내가 매력이 없다는 건 둘째 치고 자존심이 상했다.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뿔이 날 정도로.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지금 당장 대답 못 해. 네자르보다 더 근사한 남자는 만나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나를 좋아하는 남자는 어딘가에 있겠지.”
이제 반쯤은 오기였다. 참 나, 나를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는데, 끝까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해 줘?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내 입장이었을 뿐이고 정작 프러포즈를 거절당한 건 네자르였다. 팔짱을 낀 채 살벌한 얼굴을 유지하던 그는 곧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뺨 근처가 얼어 버린 것처럼 아주 딱딱해 보였다.
“좋아. 나 역시 자존심이 있는데 싫다는 여자랑 억지로 혼인할 순 없지. 그러니까 약혼을 파기하고 싶다면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행동으로 날 납득시키도록 해. 정당한 절차가 아니어도 인정받을 수 있게.”
혼인이 파기되는 정당한 절차는 대개 불임이나 후계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전자야 혹시 모른다 하여도 후자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정말 남자 손을 잡고 도망가기라도 하라는 건가.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데?”
“너 좋다는 남자를 내 앞으로 데려와. 도망치는 건 절대 인정 못 해. 대륙 끝까지 찾아가서 피가 마를 때까지 괴롭힐 테니까.”
분명 무덤덤한 목소리였음에도 뒷골이 싸하다 못해 따가웠다. 특히 마지막 문장을 뱉을 때는 어금니를 씹어 내는 느낌이었다. 텅 비어 있는 양어깨 위로 소름이 돋았다.
“기한은 오늘로부터 넉 달. 알아 둬, 그 이상은 못 기다린다.”
“넉 달 안에 결혼할 남자를 데려오란 거야? 너무 짧잖아!”
“감히 내 프러포즈를 거절한 주제에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말이 없었다. 내 기세가 죽자 네자르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숨기거나 빼먹지 말고 다 데려와. 어떤 놈인지 얼굴을 확인해야겠으니까.”
단순히 확인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확인하고 땅을 파서 묻어 버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괜히 겁이 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좋아! 그 정도야 별거 아니니까. 그런데 반대도 성립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만약 네자르도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그때부터 우린 완벽하게 끝인 거야.”
“마음대로 해라.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을 때 해 놓는 게 좋지.”
그리 말하는 네자르의 얼굴이 직전과 다르게 조금 후련해 보였다. 한 번도 벤치에 등을 기대지 않았던 그는 이제 몸을 풀고 벤치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틀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를 데 없이 아주 환하게 웃는 낯으로.
“네가 애인이랍시고 데려올 남자가 누굴지 참 궁금하구나.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