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에젤로트의 눈은 붉다.
그것이 열두 살의 겨울, 에젤로트를 방문한 네자르의 첫 감상이었다. 대접만 한 보름달이 천구 아래 고고하게 떠 있음에도 에젤로트의 땅에는 노란빛 한 줌 떨어지지 않았다. 발길마다 가득한 건 새하얀 눈 위에 기병의 피처럼 뿌려진 동백꽃과 시클라멘이었다.
성은 추웠으나 환했다. 네자르는 시종을 따라서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작 그를 맞이해야 할 록허드는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역시 평생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명만을 따르겠단 소리는 감언이설이었던 것 같다.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더 문제고.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종을 울려 주십시오.”
“정작 날 초대한 록허드가 안 보이는데.”
“둘째 도련님께서는 방금 막 성으로 돌아오신 참입니다. 금방 올라오실 겁니다.”
“뭘 하기에 나보다 늦어?”
“해가 진 후에 말을 타는 걸 즐기십니다.”
어이가 없는 게 딱 그다운 취미였다. 네자르는 손을 휘저어 시종을 물리고 소파로 다가갔다. 흔들리는 등불로 인해 방 안은 수십 가지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아카데미 첫해가 끝나고 마지막 달에 들어선 지 이제 막 나흘이 흘렀다. 본래 일정이라면 곧바로 황성에 돌아갔을 텐데, 며칠 내리 저를 못 데려가 안달이던 록허드 탓에 에젤로트를 먼저 방문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긴 놈이지.
네자르는 태생이 황실 후계자였기에 의도치 않게 다양한 종류의 인물을 마주하며 자랐다. 귀족의 정신머리는 대개 거기서 거기였고, 보통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늘 예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록허드는 상당히 특이한 범주에 속해 있었다.
록허드 에젤로트는 소위 말하는 검술의 천재로,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판시온 엔테라가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해에 입학한 검술계의 혜성이었다.
검술부의 내로라하는 교수들은 그의 스승이 되고 싶어 안달복달했으며 뛰어난 실력만큼 고귀한 태생이 그를 한층 더 범접 못 할 도련님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네자르는 록허드가 검으로 산을 가르든, 에젤로트의 잘난 차남이든, 시원시원한 성격의 인기남이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첫 학기가 끝나 가던 시기의 그는 이미 사춘기에서 허덕이는 또래 소년 소녀에게 지대한 싫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 납품, 호텔 납품, 시장 납품과 같이 돼지에게 주어지는 등급처럼 귀족에게도 계급이 있다. 네자르는 그 계급의 정상에서 또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게 항상 지루했다. 성군이 되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겠단 다짐은커녕 저런 바보들을 이용해 나라를 굴려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떵떵거리고 사는 놈 대부분의 성적은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서민의 발 닦개만도 못했으며, 그나마 전교 상위권을 다투는 놈들은 사회성 부족에 공감능력이 결여된 반푼이였다.
이런 식의 표현은 네자르 본인을 불만투성이의 거드름 떠는 소년처럼 보이게 하겠지만, 그 정도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네자르 역시 그러한 사실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이면 두 번째 사춘기라 불러도 무방했다.
보좌관인 론은 그가 퍽 심각한 우울증에 잠긴 것이라고 했다. 그랬기에 모든 것이 싫고 지겨워 내팽개치고 싶은 것이라 말했다. 우울증에 걸린 황태자라니, 수치스러워서 목을 다 매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실제 그가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사람 하나 구할 생각 없으십니까?’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냐?’
‘이래 보여도 나름 엄청난 용기로 말을 건 겁니다. 저는 이곳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기껏해야 가문의 기사나, 잘해 봤자 황성근위대에 입단하는 게 전부일 에젤로트의 차남, 록허드 에젤로트입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이 잘난 실력과 머리를 좀 더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서요.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셨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절 전하의 사람으로 받아 주십시오. 에젤로트의 족쇄에서 벗어나 목숨을 걸고 섬기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록허드의 눈에는 명예를 향한 열기나, 미래를 꿈꾸는 흥분 따위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네자르의 오랜 시간 죽어 있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다소 징그럽게 들릴 만한 표현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았다.
그날부터는 아카데미 생활도 종종 괜찮다고 생각됐다.
‘아마 나는 외로웠던 것이 아닐까. 고고한 척 버텨 내야 했던 황태자라는 위치가. 애처럼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랐던 거지.’
네자르는 외투를 벗어 침대 위로 던져 놓고 창가로 향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이 까마득한 땅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승마를 즐긴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인 범주의 취미는 아니었다.
“……불?”
눈과 어둠으로 까마득한 성의 정원 속, 무언가가 활활 불타오른다. 네자르는 눈을 얇게 뜨고 유리창에 이마를 밀착했다. 그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저 아래에 빨갛다 못해 하얀 불이 펄펄 끓고 있었다.
벌컥.
“아아, 날씨 정말 돌아 버리겠네. 그래도 어떻게 잘 도착했다, 네자르? 나는 마차가 전복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열린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보나마나 록허드다. 네자르는 대답 없이 창 아래를 골똘히 응시했다. 곧이어 그의 곁으로 정신 나간 친우가 다가왔다.
“뭘 그렇게 봐?”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옆에 선 록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그에 네자르는 턱짓으로 밝게 타오르는 불씨를 가리켰다.
“저거, 뭐야?”
록허드가 나란히 창에 이마를 댔다. 이어서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막냇동생. 오늘따라 조용하다 했더니, 저 짓을 준비하던 거였네.”
“저 짓?”
불 근처를 더 면밀하게 내다봤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근처에 하얀 금발 머리가 나풀거리는 것 같기는 했다.
“껴안고 자는 인형이 하도 더러워서 하녀가 몰래 세탁을 했나 봐. 저 애는 자기 물건에 손을 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 그런데 도중에 실밥이 터진 것도 모르고 세탁했는지, 걸레가 되어서 돌아왔다네?”
아끼던 인형이 망가진 것과 정원 한가운데에서 불을 지피는 게 대체 무슨 상관관계인지, 네자르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어디서 죽은 이를 화장하여 안치한단 소릴 주워들은 거지. 어차피 곧 시녀들이 내려가서 질질 끌고 올라올걸? 케이트가 저런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케이트. 여동생이 있다는 소린 듣지 못했는데, 누가 봐도 여성이 사용할 법한 이름이었다.
록허드의 말대로 머지않아 횃불 근처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제는 확실히 얼굴이 보였다. 바짝 치켜뜬 눈과 악다문 입술. 거기에 불만스럽게 툭 튀어나온 통통한 볼살까지. 얼굴은 불에 비쳐 붉은 건지, 화를 못 이겨 붉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여타 귀족 여식과는 달리 온실 속 화초로 보이지는 않았단 점이었다.
“남매라면서 남 이야기 하듯 하는 건 뭐냐.”
그 말에 소파 위로 자리 잡은 록허드가 무덤덤한 어조를 툭 던졌다.
“말만 남매지 실제로는 인사도 안 하는 사이야. 걔가 사람을 싫어하기도 하고.”
“인사도 안 한다면서 그건 어떻게 알아?”
“그럼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이를 드러내고 무는데, 그게 사람 친화적인 거겠어?”
“저런 조그만 애가 이를 드러내 봤자지.”
“물려 보고서나 말해라, 네자르. 나는 엊그제 물린 자국이 아직도 손가락에 남아 있는 기분이니까. 하여간, 너도 괜히 찾아가서 애 건들지 마. 케이트는 워낙 예민해서 작은 거에도 스트레스 잘 받으니까.”
불이 사그라들었다. 시야가 다시 어두워진 탓에 소녀가 성안으로 끌려 들어갔는지, 더 먼 바깥으로 도망쳤는지는 네자르도 알 방도가 없었다. 얼마 안 가 테이블 위로 카드를 흩뿌린 록허드가 그를 불렀다. 늦은 밤의 지루함을 카드 게임으로 달래려는 의도였지만, 정작 록허드는 블랙잭을 하는 내내 꾸벅꾸벅 졸다가 자신의 방으로 가 버렸다.
그를 밖으로 쫓아낸 네자르는 준비해 온 서적을 대충 훑다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어쩐지 불 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그 푸른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
다음 날 밤에도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네자르는 해가 지자마자 말의 엉덩이로 달라붙은 록허드를 미련 없이 보내 주었다. 눈이 날리는 깊은 밤마다 말을 모는 차남, 그리고 솜 인형에 불을 지피는 막내.
이쯤 되면 에젤로트 백작 내외가 범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법도 했지만, 막상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주한 백작과 백작 부인은 놀라우리만치 평범했다.
부인 쪽의 성정이 조금 까다롭게 느껴지기는 했어도 대개의 귀부인이 그렇듯, 상류층 예절에 민감할 뿐이다. 장남 에든 에젤로트도, 삼남 릭 에젤로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단지 그의 앞에서 보편적인 가족의 외피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다만 놀라웠던 점은 솜 인형 방화범이 그의 방문을 환영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식사가 정리된 직후 창밖에서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 불씨를 발견한 네자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다.
바람이 약한 덕에 눈이 내리붓는 와중에도 시야는 선명했다. 정원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마른 흙길. 판자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옅은 탄내. 네자르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침엽수림처럼 푸른 눈동자가 밤을 꿰뚫고 그의 뇌리로 박혔다.
“너, 누구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어투 역시. 아무리 망아지처럼 군다 한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니. 혀를 찬 네자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오라비의 친구.”
새하얀 입김이 시야를 부드럽게 휘감고 사라졌다.
“오라버니? 에든?”
에든이라면 에젤로트 가문의 장남일 터다. 사 남매면서 예시랍시고 나온 이름이 고작 에든으로 끝이라니. 아무래도 소녀는 록허드를 친남매로 취급하지 않는 듯했다.
“그쪽 말고, 록허드 에젤로트. 네가 손가락을 깨물었다던 그 피붙이 말이다.”
“그건 내 피붙이가 아니야. 단순히 같은 성에 사는 남남이지. 서로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이제 겨우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녀는 자그마한 덩치와 달리 말투가 퍽 억셌다. 네자르는 시선을 돌려 소녀가 쥐고 있는 불쏘시개를 응시했다. 오래된 서적의 내지를 무작정 뜯어 돌돌 뭉친 것 같았다. 그녀의 앞에는 소박하게 모인 나무 조각들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아 귀하신 솜 인형은 아직 불타 죽기 전인 듯했다.
“기분 나쁘게 뭘 자꾸 구경하고 있어? 저리 안 꺼져?”
소녀는 낯선 이의 관심이 영 껄끄러웠는지 적대감을 드러내기에 바빠 보였다. 이를 내보인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네자르는 눈이 녹아 물기 어린 머리칼을 탈탈 털며 불 가까이로 걸어갔다.
“뭘 모르네. 상중에 손님이 많아야 불타 죽을 운명인 네 회색 곰돌이도 기뻐할 텐데.”
얼굴의 온 근육을 이용해 표정을 일그러뜨린 소녀가 두어 발자국 뒷걸음쳤다. 이렇게 보니 자그만 뒤꿈치 뒤에 낡아 빠진 곰 인형이 누워 있었다. 곧 제물로 바쳐질 그 솜 인형인 것 같았다.
“록허드가 날 머저리로 소개한 모양인데, 이 곰 인형이 무생물이란 사실쯤은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꺼져.”
“아, 아가씨!”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젊은 여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시녀임이 분명해 보이는 타이밍이었기에 네자르를 응시하던 소녀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대충 해석해 보면 ‘너 때문에 일을 그르쳤잖아.’ 정도.
시녀는 빛을 보자마자 기겁을 하고 나왔는지 시녀 복장만 겨우 걸친 상태였다. 헉헉대는 숨에서 마른 한기가 느껴졌다.
“모르카다 부인에게 그리 혼나셔 놓고 이렇게 또…….”
“그래서 나무 없는 허허벌판에서 불을 피운 거잖아! 호들갑 떨지 말고 돌아가.”
제멋대로 구는 꼬맹이 주제에 말 하나는 따박따박 잘한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시녀를 노려본 소녀는 손안에 쥐고 있던 누런 종이를 불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 모습이 그리 우스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네자르는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가씨, 아가씨는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겨울에, 특히 이런 건조한 날에 불을 조심하셔야 해요. 만약 정원에 불씨라도 튀어 옮겨붙는 날에는…….”
“데이지, 너 자꾸 내 말 무시할래? 너도 확 발가벗겨서 이 불덩이 안에 밀어 넣어 줄까? 그래야 그 시끄러운 주둥이를 조용히 다물 거야?”
하마터면 장소 못 가리고 갈채를 날릴 뻔했다. 그야말로 네자르는 상상도 못 할 수준의 독설이었다. 확 둘러업어서 황성으로 훔쳐 갈까. 저 거친 욕설을 들려주고 싶은 인물이 그의 성에만 한정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는지, 한참을 시녀의 얼굴에 대고 내지르던 소녀가 몸을 돌려 네자르를 쳐다봤다.
“너는 뭘 자꾸 그렇게 봐? 둘 다 빨리 안 꺼져? 사람 열받게 하는 데도 정도가 있지!”
이거, 참.
네자르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생에 카트리나 에젤로트처럼 미친 계집애는 또 처음이었다.
한참 동안 발광을 떨던 소녀는 결국 제풀에 지쳐 성으로 돌아갔다. 그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시녀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소녀가 내던진 곰 인형과 불씨의 뒤처리는 결국 그녀의 몫이 되었다. 아주 제멋대로군. 불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네자르는 혀를 차며 침실로 돌아갔다.
***
그게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감기?”
한참 글자를 들여다보던 네자르가 안경을 벗었다. 그의 반문에 반쯤 누운 자세로 책장만 넘기던 록허드가 답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다 맞아 가며 그 난리를 쳤으니, 몸이 멀쩡할 수가 없지.”
지나가던 길에 개미를 밟았다는 소리로 오해할 만큼 무덤덤한 어투였다. 네자르는 아려 오는 머리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방학 과제를 푸느라 온종일 역사 서적만 뒤졌더니,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알기로 록허드는 오늘 내내 자신과 함께 있었다. 과제 풀이에 뭐 하나라도 더 주워 먹기 위해서.
“안 돼. 내가 가 봤자 난리만 더 쳐서 어디 하나 꼭 다치게 될걸. 그러니까 그 애의 몸을 생각하면 안 가는 게 훨씬 나아. 화를 못 이기면 종종 호흡 곤란에 기절까지 하거든.”
록허드도 참 웃긴 놈이다. 말은 툭툭 내뱉으면서 정작 들어 보면 걱정 비슷한 문장이 꼭 하나씩 섞여 있었다.
“그래도 동생 취급은 하나 보네. 나는 또 다치든 말든 상관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너, 나를 너무 악마로 아는 거 아니냐? 진짜 서운하다, 서운해!”
네자르는 일렁이는 불꽃 앞에 선 소녀, 카트리나 에젤로트를 떠올렸다. 구불구불하던 백금발에 덤불 가시만큼이나 따가웠던 눈초리. 뼛속까지 한기가 들 법한 시선이었기에, 짙은 청록색의 눈동자가 푸른 겨울 바다의 색처럼 보였었다. 그 정도의 적의를 띤 얼굴은 난생처음이었다. 이제 겨우 여덟 살 난 꼬맹이가 말이지.
“왜 화를 못 이기는데?”
딱히 그 터무니없는 욕설과 표정이 신경 쓰였던 건 아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버릇을 고쳐 줄 생각도 들지 않았을 뿐. 그래도 황성에 데려가 노땅들 앞에 대령해 주고 싶단 생각만큼은 진심이었다.
록허드가 휘리릭 넘기던 책을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대화의 주제가 제 여동생인 것이 다소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건 나야말로 알고 싶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면 될 텐데, 애가 워낙 몸으로 대화하려 하니…….”
말끝을 흐린 록허드가 네자르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걔 전속 시녀는 하도 일이 피곤해서 봉급도 가장 많이 준다더라.”
톡톡.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는 소리가 침실을 한가득 메운다. 이내 자신의 말에 흥미를 잃은 록허드는 다시 책을 집곤 소파에 누웠다. 가정사를 까발리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괜히 분위기만 잡쳤다.
습기 어린 수풀색의 무거운 눈동자. 활활 타오르던 불길에도 꼼짝 않던 시선.
문득 배다른 누이, 에자렛이 떠올랐다. 드넓은 황성에서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고, 다가오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던 그 하얀 얼굴이. 에자렛도 카트리나처럼 진득한 색의 벽안을 가지고 있었다. 황후의 경계로 실제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 외에 가까이 할 기회는 없었지만……. 극과 극의 성격임에도 둘은 무언가 유사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날의 늦은 오후. 한참 퍼붓던 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며칠 만에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네자르는 과제를 때려치우고 침실로 돌아가던 길에 천천히 걸음을 멈춰 섰다. 입김에 가려진 기다란 복도의 끝, 멀지 않은 방에서 누군가 문을 닫고 나왔다.
큰 신장에 조용한 걸음. 이윽고 청년의 시선도 네자르를 향했다. 저 짧은 백금발은 삼 형제 중에서 에든 에젤로트밖에 없었다. 입이라도 열 줄 알았는데 에든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꾸벅 숙이고는 네자르를 지나쳐 사라졌다.
최근 들어 느끼지만, 이 집안의 사 남매는 마치 서로 다른 배에서 태어난 것처럼 각양각색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록허드와 에든은 끝의 끝을 달리는 느낌이었고.
어느새 그의 발은 에든이 나온 방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문을 닫고 몸을 돌린 시녀가 네자르를 향해 차분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케이트 아가씨를 찾아오셨나요?”
예상치 못한 말에 네자르는 입을 닫았다. 에든 에젤로트가 나온 방이 제 누이의 방이었군. 형제들과 마냥 사이가 나쁜 줄 알았더니만, 에든은 예외였나 보다. 대답이 없자 시녀가 이어서 말했다.
“아가씨는 이제 막 잠드신 참입니다.”
이제 보니 카트리나가 곰을 불태운다며 난리 치던 때 허겁지겁 쫓아 나온 시녀였다. 그때 함께 있던 장면을 보고 네자르가 병문안을 왔을 거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고민하던 네자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살짝 잠든 얼굴만 보고 나오도록 하지. 어제 내내 걱정했거든. 록허드의 부탁이 있기도 했고.”
그 말에 시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록허드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리가 없는데…….”
물론 거짓말이었다. 봉급을 가장 많이 받는다더니, 눈치도 꽤 빨랐다. 하나 한낱 시녀가 황태자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음이다. 네자르는 멀어지는 시녀를 등지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카트리나의 침실은 다른 방에 비해 유독 창이 컸다. 마치 가두고 키우는 짐승을 위한답시고 햇살만큼은 원 없이 쬐게 해 주는 것처럼.
에든이 그랬듯, 네자르 역시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침대 앞에 섰다. 카트리나는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데이지? 어때, 에든은 갔어?”
곧이어 시체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런데 왜 다시 들어온 거야? 나 이제 몸 괜찮대도. 너, 밤새웠잖아. 빨리 가서 잠이나 자, 멍청아.”
“나는 데이지가 아니다만.”
카트리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계 초침처럼 끼익 돌아가던 눈동자가 정확히 네자르를 향했고, 이불 아래로 파묻혀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치, 침입자!”
“침입자? 보통 이런 상황에 쓰는 단어는 아니지. 이왕이면 병문안을 온 방문자라고 해 줘.”
“데, 데이지! 데이지이!”
네자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받아친다 한들, 카트리나는 침대 위를 방방 뛰며 괴성을 내지르기 바빴다. 고막 터지겠네. 몸의 상태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어. 이마를 부여잡은 네자르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다면서 그렇게 시끄럽게 굴어도 돼? 덧나기 싫으면 이불 안에 들어가서 얌전히 누워 있어. 괜히 아파서 주변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놀랍게도, 그 짧은 한마디에 카트리나가 난동을 멈추었다. 조용히 눈꺼풀을 깜빡이며 네자르를 쳐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여 이불 안으로 다리를 구겨 넣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베개에 뒤통수를 올리기까지는 겨우 30초 남짓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어제 그 망아지랑 같은 사람 맞아? 하도 어이가 없어 하얀 낯짝을 쳐다보기만 하자 카트리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록허드 친구라고 했잖아.”
“그렇지.”
“그런데 내 병문안은 왜 오는 거야?”
이중인격인가 싶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보니, 무언가 알 듯 말 듯 묘한 기분이었다. 네자르는 어제처럼 폭언을 듣거나, 심하면 주먹질까지 받아야 할 각오를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록허드의 친구는 네 병문안을 오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록허드는 내가 아플 때 찾아온 적이 별로 없어.”
“왜?”
“올 때마다 자꾸 짜증 나게 만들어서 내가 쫓아내거든.”
“어떻게 쫓아내는데?”
“소리를 지르거나 어깨를 물어. 그럼 록허드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는 거야. 엄청 세게 물면 이틀이 넘도록 날 볼 때마다 눈을 흘겨. 지가 흘겨보면 어쩔 거야? 그러게 누가 싫은 티 내며 억지로 찾아오랬나!”
록허드와 막냇동생이 네 살 차이라 했으니, 카트리나의 나이는 이제 여덟일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트리나는 여덟이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굉장히 적대적이었다. 록허드의 말을 들으면 나름대로 신경 써 주는 것 같긴 한데, 정작 카트리나는 전혀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았고.
정말 대화 자체가 뜸한 건가. 둘 사이는 교류가 적은 게 아니라 아예 없는 수준인 것 같았다.
“너는 록허드가 그렇게 싫어?”
“응. 어… 아니.”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싫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겠어. 눈이 마주치면 절로 얼굴이 구겨지는 게 싫은 건가?”
얌전해진 건 좋은데, 어째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건 또 록허드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네자르는 카트리나의 푸석한 백금발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아이를 대하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누가 너에게 그래?”
“응. 시종이랑 시녀 들은 다 그래. 타냐랑 제이슨, 모르카다 부인이랑 또…….”
순간, 네자르는 이 주제가 카트리나에게 썩 유쾌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말을 해야겠군. 그는 날뛰느라 엉망이 된 카트리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어쩐지 에자렛이 자꾸 떠올라 가만둘 수 없는 기분이다
“그렇게 바라던 곰 인형의 화장은 결국 포기해야겠네. 제대로 챙겨 오기는 했어? 어제 버려두고 가더니만.”
“곰 인형?”
카트리나는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거? 상관없어. 어차피 관심 끌려고 한 짓이라서. 봐, 이거 보여?”
치마를 훌렁 뒤집은 카트리나가 그를 향해 종아리를 내보였다. 워낙 애처럼 구는 아이였기에 네자르는 별생각 없이 카트리나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아니, 별생각이 없었다기보다는 멍하니 카트리나의 말에 따랐다는 게 더 알맞았다.
관심을 끌려고 한 행동이라니, 모자라기는커녕 아주 여우 같잖아?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빨갛게 부어오른 카트리나의 종아리를 보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래 어머니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손 한번을 안 대던 분이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너무 멋대로 굴었나 봐. 다리가 얼얼해서 열이 더 나더라.”
“네가 말한 관심이 매를 버는 건가 보구나.”
다리를 들어 올린 카트리나가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연분홍빛의 하늘이 창 너머로 흘러 내려와 백금발을 붉게 물들인다. 기다란 머리칼에 가려진 눈가가 곱게 휘어졌지만, 언뜻 보면 일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하하, 그럴 리가! 나도 아픈 건 싫어. 아파서 방에 갇히면 찾아올 사람도 없는걸.”
아, 이거였군. 카트리나를 대할 때마다 에자렛이 떠오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에자렛은 황후의 손안에서 구르는 고고한 인형으로, 이복 오라비인 네자르의 관심에 늘 허덕이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늘 실내에 머물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이라고는 친어미와 호위 기사가 전부인 황녀. 그나마도 황후는 입만 열면 아리따운 여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논하기 바빴으니,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답답하고, 우울했겠지.
그러나 네자르는 그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친절이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황후의 관심을 부채질할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러나 에젤로트에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과제에만 매달리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그렇다 하여 이런 괴팍한 날씨에 눈밭을 뛰어다니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거 없는데.”
“없으면 만들어 놔. 에젤로트에 있는 남은 나흘 동안은 하루 종일 놀아 줄 테니까.”
“왜?”
그리 묻는 카트리나는 벙찐 얼굴 그 자체였다.
“이유 같은 건 없어. 뭐, 정 싫다면 거절해도 되고.”
카트리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맨발로 침대에서 벗어난 그녀는 네자르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양손을 채 갔다. 세상에 다시없을 함박웃음을 띤 채.
“전혀 안 싫어! 너무 좋아! 나, 어머니에게 혼나길 잘한 것 같아!”
***
며칠간 살핀 결과, 카트리나 에젤로트가 성에서 사람 취급을 못 받는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 작은 악마는 몸을 가만둘 줄 몰랐다. 하루라도 방 안에 박혀 얌전히 쉬어야 하는 날이면 문을 박박 긁어서라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손톱 아래로 톱밥이 박혀 피가 줄줄 흐르게 되므로 보다 못한 시녀가 문을 열어 주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면 얌전해지는가? 그럴 리가 있나. 카트리나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을 다루는 데 매우 서툴렀다. 조금만 신경질적인 어조로 불러 세우면 주변을 부수고 다니기에 바빴다.
정원에서는 잘 가꿔진 꽃송이를 뽑고 다녔고, 마구간에서는 말을 방목시키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홀에서는 화병과 촛대 등 장식물을 깨뜨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겨우 여덟 살 난 소녀의 정신세계는 네자르가 이해하기 힘든 범주였던 것이다.
“너 때문에 애먼 하녀들만 고생하잖아. 사람의 관심을 얻고 싶다면 긍정적인 인상부터 심어 줘야 해. 네가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고 다니면 누가 널 좋게 생각하겠어?”
네자르의 타박에 카트리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얌전히 지내면 얌전히 지내는 걸로 끝이야. 예전에는 밤에 성 밖으로도 못 나가게 했어. 지금이니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아주 제멋대로다.
카트리나의 침대 위로 자리를 잡은 네자르가 그녀의 손에서 접시를 뺏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더니, 새하얀 접시 위에 알록달록한 색의 파프리카만 고이 남겨져 있었다.
“또 이러네. 편식하지 말고 다 먹어.”
보란 듯이 포크로 남은 채소를 찍어 낸 네자르가 카트리나의 입가로 들이댔다. 시녀들의 험담은 무섭지 않아도 파프리카는 무서운지, 금세 안색이 파리해졌다.
“시, 싫어.”
“남기면 나 이제 안 와. 애초에 너만 상대할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고.”
사실 남아돌다 못해 넘쳐날 지경이었다. 울상이 되어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본 네자르가 눈에 힘을 줘 노려봤다. 그에 빨갛게 부어오르던 입술이 스르륵 풀렸다. 하도 습관처럼 입술을 씹은 탓인지 윗입술 아랫입술 둘 다 피딱지투성이다.
“두 번만 더 말할 거야. 빨리 먹어.”
“싫어!”
“자, 어서.”
“싫은데 왜 억지로 먹어야 해? 이 풀때기 하나 안 먹는다고 내가 죽는 것도 아니잖아.”
“난 편식하는 사람 싫어해. 편식하고 싶으면 편식해도 상관없는 친구를 구해서 놀아. 이 정도 이유면 되겠어?”
“그게 무슨 억지야!”
소리치면서도 겨우겨우 입을 벌려 파프리카를 입에 넣었다. 씹기도 싫은지 손으로 콧구멍을 막은 카트리나는 심호흡 끝에 파프리카를 꿀떡 삼켰다. 적지도 않은 양인데 잘도 넘어간다.
“원래 황성 사람들은 다 제멋대로야?”
“아니. 제멋대로인 놈들 좀 봤으면 좋겠네. 내가 아는 사람 중 네가 가장 제멋대로야, 카트리나.”
“정말? 아닌데. 에든이 나 정도 되는 애들은 황성이나 사교계에 가면 넘친다고 했는데…….”
“단언컨대 절대 아니야. 네 오라버니는 농담도 참 살벌하게 하는구나.”
말끔하게 비워져 기름기만 남은 접시를 치웠다. 파프리카 먹이기 정도면 오늘 최대치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좋아. 오늘은 말을 잘 들었으니 밖에 데리고 나가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뭐만 하면 자꾸 조건을 붙여? 나랑 놀아 주겠다고 한 건 너잖아!”
“하나, 내 옆에서 다섯 발자국 이상 떨어지지 말기. 둘, 하지 말라는 짓 하지 말기. 셋, 아무 짓도 하지 말기.”
“그냥 숨도 쉬지 말라고 하지?”
이를 바득바득 갈던 카트리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네자르의 등을 밀어냈다.
“씻고 준비할 거야. 나가서 기다려!”
쫓겨난 네자르는 할 일 없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 실내 경마장으로 향했다. 눈이 미친 듯이 내리던 날은 고삐 풀린 말이 되어 언덕으로 뛰어가더니, 막상 햇볕이 들자 실내에서 곱게 말을 타는 건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다. 전부 록허드에 대한 생각이었다.
무료하게 관람석에 앉아 있기를 몇 분, 그를 알아본 록허드가 느릿느릿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뭐야, 갑자기? 요즘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더니만. 케이트랑 노는 게 그렇게 재밌냐?”
“너랑 노는 것보다야 보람 있고 실속 있다.”
“보람이 있을 건 또 뭔데. 가정 교사로 취직하기라도 했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지. 너는 카트리나가 뭘 하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뭐가 그리 궁금해?”
앞자리에 앉은 록허드는 땀 한 방울 없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네자르의 뼈 박힌 말에도 깔끔하게 정돈된 앞머리는 여전히 건재했다. 등을 의자에 기대고 편히 다리를 꼰 그가 네자르를 올려다봤다.
“관심이 없으면 묻겠냐? 걔가 너랑은 참 잘 어울리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뭣 좀 하려 하면 백이면 백 늑대 새끼처럼 이랑 발톱을 내미는데.”
그에 네자르는 텅 빈 경마장으로부터 시선만 굴려 록허드를 응시했다.
“네가 병신이라 그래.”
“얼씨구, 그럼 그 병신한테 조언 좀 해 주는 게 어떠냐?”
조언이라. 한동안 곰곰이 고민하던 네자르가 이윽고 백 점 만점의 백 점 답안지를 내놓았다.
“잘생길 것. 상냥할 것. 똑똑할 것.”
“흠, 농담이겠지?”
“계속 헛소리할 거면 돌아가서 말이나 타라.”
네자르의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냉정한 목소리에 록허드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좌석 위로 무너졌다.
“벌써 꺼지라고?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난 네가 아니라 네가 말 타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거야.”
고개를 저은 록허드가 몸을 일으켜 다시 경마장으로 향했다. 어쩐지 다가올 때와 달리 생각이 많아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
“세, 세상에. 이것 봐, 네자르! 토, 토끼야!”
네자르는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호들갑스럽게 손짓했던 것과 달리, 카트리나는 네자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그마한 아기 동물을 쳐다보기 바빴다.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토끼는 아닌 것 같은데. 네자르가 아는 토끼는 저 동물보다 더 짧고, 폭신했으며, 시야의 높이가 훨씬 낮았다.
“토끼는 등에 무늬가 있구나……. 책에서는 분명 귀가 기다랗고 털이 복슬복슬하다고 했는데, 얘는 조금 다르네.”
“그야 토끼가 아니라 사슴이니까.”
“……응? 토, 토끼가 아니라고? 꼬리가 이렇게나 짧은데?”
“꼬리 짧은 동물은 토끼 말고도 이 숲에 차고 넘쳐.”
카트리나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였다. 밖으로 열심히 나돈다기에 작은 동물쯤은 만나 봤을 줄 알았더니만,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그들이 거니는 곳은 에젤로트 본성 뒤편의 산등성으로, 성벽 안쪽에 있어 크기는 작아도 엄연히 산의 일부였다. 카트리나는 시녀들이 성벽 근처까지 나오는 시간을 기껏해야 십여 분 정도 허락했기에 산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탔으면 그녀는 드레스도 아닌 승마복을 차려입고 네자르를 따라 나왔다. 그렇게 여섯 살 수준의 짧은 대화가 오간 지 벌써 1시간가량 흐른 상태였다. 이쯤 되니 네자르 역시 카트리나와 비슷한 수준의 어린아이로 퇴행한 기분이었다.
“있잖아, 저 아기 사슴, 성으로 데려가면 안 돼? 이렇게 추운 겨울날 숲에서 살면 동상에 걸려 얼어 죽고 말 거야.”
그리 말한 카트리나의 손끝에는 숲 안쪽에서 펄쩍펄쩍 뛰노는 새끼 사슴이 있었다. 네자르는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의 마음으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친절하게 내주었다.
“데려가 봤자 써먹을 데도 없어. 그리고 근처에 어미 사슴이 있을 거다. 멋대로 끌고 가는 건 납치나 마찬가지지. 납치는 엄연한 범죄고.”
“나도 모르카다 부인에게 말하지 않고 나왔는데?”
“시녀장이라면 내가 말해 두었으니 괜찮아.”
오히려 그 노인은 애물단지를 떠넘기게 되어 후련한 표정이었다.
숲 뒤로 해가 넘어갈 때쯤, 새하얗게 쌓인 눈 위로 뚝뚝 빗물이 떨어졌다. 한두 방울에 그쳤던 비가 더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하자, 카트리나가 네자르의 팔을 잡고 숲의 안쪽으로 내달렸다.
“에든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저어기로 들어가면 옛날 숲지기가 사용하던 통나무집이 있댔어. 거기로 가면 비도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숲 안쪽으로 기다랗게 난 흙길의 끝에, 낡은 통나무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카트리나가 오래간만에 생산적인 일을 했군. 잘 생각해 보면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와아, 거미! 저것 봐, 네자르. 거미가 내 주먹만 해! 다리도 하나, 둘, 셋… 여덟 개!”
“알겠으니까 제발 저 털 뭉치의 생김새 좀 묘사하지 마. 등에 소름이 다 돋으니까.”
다만 문제는 이 자그마한 건물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기괴한 형상의 벌레들과 먼지로 넘쳐났다는 점이었다.
네자르는 어깨를 떨며 천장 위에 매달린 털 뭉치 거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비위 좋은 그라도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거미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카트리나가 말이 안 됐다.
“네자르.”
몸을 일으켜 집 내부를 살피던 네자르가 몸을 틀었다. 저가 먼저 부른 주제에, 카트리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홱 돌리곤 가죽 의자 위의 먼지를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까맣게 더러워졌을 손을 거두고 의자 위에 풀썩 앉았다.
“저기, 그, 어머니가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 인사를 꼭 해야 한다고 하셨거든. 나를 데리고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아무리 사위가 어둡다 해도 목소리의 형태만큼은 아주 낱낱이 보였다. 네자르는 카트리나가 앉은 방향을 힐끔 살피고 다시 등을 굽혔다. 말을 듣니, 안 듣니 해도 이럴 때 보면 이를 데 없는 착한 아이 그 자체였다.
“누가 보면 돈 받고 체험 학습 시켜 준 줄 알겠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나도 딱히 바빴던 건 아니니까.”
텅 빈 가구를 이 잡듯 뒤져 짧은 길이의 초와 부싯돌을 발견했다. 네자르는 열심히 손을 놀려 초에 불을 붙였다.
“아까는 바쁜 시간 쪼개서 어울려 주는 거라며?”
“……하여간 대충 이해해서 들어.”
나뒹굴고 있던 휘어진 촛대를 구부려 초를 꽂았다. 카트리나 옆에 얌전히 내려놓으니 축축했던 백금발이 불에 젖어 울긋불긋 물들었다. 카트리나는 일렁거리는 불꽃의 빛을 그대로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두운 실내가 이른 오전처럼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울지도, 화내지도 않고 즐거운 날은 정말 오래간만이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혼자 밖에서 노는 것보다, 꿈속에서 노는 게 더 즐거워서 매일매일 잠만 잤거든.”
“꿈?”
얇은 초 위로 손을 가져다 댄 카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꿈속에서의 나는 키가 작은 열일곱 살의 학생이었어. 꿈속의 내가 사는 세상은 사람을 태운 커다란 새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작고 까만 상자 안에서 가극 배우들이 연기를 해. 불씨가 없어도 밤이 환하고, 말이 없어도 마차가 달리고…….”
말하는 내내 카트리나의 얼굴은 꿈꾸듯 흐릿했다. 네자르는 묵묵히 벽에 기대어 앉아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곳의 나는 친구도 많아.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서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끼니도 거르고 잠만 자니까 나중에는 몸이 안 움직여지는 거 있지?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랑 데이지가 울었어. 그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다음 날부터는 아무리 애써도 그 꿈을 꾸지 못하더라.”
쏴아아. 하늘에서 폭우가 떨어졌다. 언제 그칠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세기였기에, 네자르는 슬슬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해가 지자 실내임에도 강한 한기가 들었다. 흐릿하게 퍼지던 입김이 이제는 새하얗게 어둠을 수놓았다. 그들이 의지할 빛이라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이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얼어 죽게 생겼군.”
“비가 멈출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안 멈추는 게 문제지.”
어쩐다. 어스름했던 여명도 비가 내리니 감쪽같이 사그라졌다. 고요한 숲 속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무거운 어둠과 세찬 빗소리가 전부였다.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네자르는 몸을 일으켜 카트리나 앞에 섰다.
“안 되겠어. 카트리나, 내가 성에서 마차를 끌고 올 동안 너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촛불이 꺼지지 않게 창문에서 멀리 두고, 그 옆에 앉아 있어. 실내가 건조해서 한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테니 잘 살펴야 해. 알았지?”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카트리나가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헐레벌떡 내려와 네자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그건 싫어. 여기 너무 어둡단 말이야……. 나도 그냥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 이제 막 몸이 괜찮아졌는데 다시 비를 맞았다간 못 일어날 수도 있어. 독감은 금방 재발하니 주의해야 해. 20분 안에 돌아올게.”
가볍게 머리를 토닥이며 몸을 떼어 냈다. 카트리나는 갖은 인상을 다 구기며 네자르를 올려다봤고, 긴 시간 말이 없다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얇은 목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으응. 아, 알았어.”
외투를 벗어 카트리나의 어깨를 덮었다. 어차피 젖을 텐데 한 겹을 입든 두 겹을 입든 크게 상관없을 테다. 네자르는 문을 열면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열린 문틈의 숲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습기가 충만했다.
“문 잠가 놔. 내가 아니면 절대 열지 말고.”
마주친 청록색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네자르는 폭우 속을 헤쳐 내려갔다. 빗물에 녹아내린 눈과 흙으로 길의 상태는 반쯤 엉망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마차를 몰 수는 있을 것이다. 비가 우후죽순으로 내린 덕에 발목까지 쌓여 있던 눈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한참을 달린 후에야 네자르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신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처럼 무거워, 홀로 들어서자마자 타이를 벗어 던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계단 옆에 서 있던 카트리나의 전속 시녀, 데이지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불안감으로 얼굴이 반쯤 일그러져 있었다.
“저, 전하! 함께 나가셨던 케이트 아가씨는……?”
“디마니아 숲 입구 나무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어디인지 알고 있나?”
“숲지기의 통나무집 말인가요? 예, 알고 있습니다.”
데이지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지금 그쪽으로 보낼 마차와 담요를…….”
“전하.”
그때, 네자르의 옆으로 길고 짙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턱을 들어 천장을 향했다. 네자르를 부른 자는 번듯하게 차려입은 그의 보좌관, 론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칙서를 보내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갑자기?”
어리벙벙한 반문에 론이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는 네자르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순히 에젤로트에서 잘 지내시는지 묻는 안부 인사인 것 같습니다. 하나 칙사가 몸소 이곳까지 내려왔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셔야 할 듯싶습니다.”
“최소한의 성의가 뭔데?”
“별것 있겠습니까? 적어도 서신에는 답장을 해야겠지요.”
젠장. 한숨을 삼킨 네자르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재수 없는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고, 하필 이런 순간에 칙서가 도착할 건 뭔가, 싶었다.
“그런데 꼴이 왜 그러십니까? 록허드 학생과 바깥에서 뛰놀기라도 하셨습니까?”
네자르는 론의 말을 무시하고 데이지를 향해 손짓했다. 데이지는 멀찍이 서서 대기하는 칙사의 눈치를 보다가 얌전히 다가왔다.
“내가 아니면 문을 열지 말라고 말해 뒀으니, 네가 따라가서 데려와라. 길이 질척거리니까 마부에게 조심하라 일러두고.”
“예.”
허리를 숙인 데이지가 치마를 휘날리며 멀어진다. 데리러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이야. 혼자 남겨지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리던 눈동자가 아직도 시야에 선명했다. 그래도 큰 문제없이 카트리나를 데려올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누가 아직도 밖에 있나 보군요. 록허드 학생입니까?”
“아니.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트리나? ……아! 에젤로트의 막내딸 말씀이시군요. 그새 많이 가까워지셨나 봅니다. 정 걱정되신다면 제가 모시러 갈까요?”
“됐어. 네 그 커다란 덩치를 들이대면 겁먹을 게 뻔해.”
네자르는 그대로 침실로 올라가 씻지도 않고 칙서를 뜯었다. 론의 말대로 양피지에 적힌 내용은 별것 없었다. 타월로 대충 머리칼만 털어 내며 곧바로 만년필을 들었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양피지 한 면을 채우는 데 끔찍하리만큼 긴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는 론이 헛소리를 하지, 몸은 추위에 덜덜 떨지, 글은 또 곱게 써야 하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답신을 작성하고 칙사에게 전달했다.
“그렇다면 저는 온 김에 하루 정도…….”
“너도 그냥 가라.”
“벌써 말입니까? 이 폭우 속에서 움직이라고요?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징징거리지 마. 정 그러면 1층 응접실에서 숨 좀 돌리다 가든지.”
“누가 보면 전하가 에젤로트 백작인 줄 알겠군요.”
네자르는 침실을 벗어나 홀로 향했다. 마차는 한참 전에 떠났을 테니, 지금쯤 카트리나가 도착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저, 전하……!”
굳게 닫혀 있는 성문 앞에서 데이지가 손수건을 쥔 채 울먹이고 있었다. 네자르는 숨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달려 나갔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분명 마차를 따라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게, 모르카다 부인이 지금 마, 마차가 없다고……. 에, 에든 도련님과 공작님께서 성을 비우신 탓에 가문의 마차가 모두 영지 밖에 있다면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를 에든 도련님을 기, 기다리라고…….”
횡설수설한 탓에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네자르는 천천히 숨을 뱉으며 쿵쿵 뛰는 심장을 차분히 했다.
“그래서?”
“그, 그래서 아직도 아가씨에게 마차를 보내지 모, 못…….”
데이지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네자르는 급히 고개를 돌려 홀 안에 비치된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9시 30분. 그가 성에 도착했던 시간이 8시 10분이었으니, 카트리나는 근 두 시간 동안 홀로 방치된 것이다.
순간, 네자르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하는 기분이 들었다. 두 시간이면 그 짧은 길이의 초가 다 녹아 버리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흐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네자르는 시녀장에 대한 분노도 일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무슨 일이냐, 네자르. 왜 케이트의 시녀가 네 앞에서 울고 있어?”
그때였다. 록허드가 껄렁한 걸음으로 곁에 다가온 게.
네자르와 록허드를 태운 말은 거친 빗속을 끊임없이 내달렸다. 청각은 이미 드문드문 울리는 천둥과 말굽 소리에 먹먹해진 후였다. 다행히 말의 속도는 네자르의 달리기에 비견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렇게 숲지기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는, 닫혀 있어야 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말에서 급하게 내린 네자르는 문으로 달려갔다. 그림자뿐이었지만, 분명 열린 문 옆으로 자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거세게 튀는 빗발을 맞으며 카트리나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카트리나?”
흙 위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모으고 앉은 소녀에게선 답이 없다. 거친 숨을 내쉬며 네자르가 고개를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온 록허드가 걸치고 있던 우비를 그에게 던졌다.
“빨리 감싸고 말에 태워.”
네자르는 자신과 록허드의 우비로 카트리나의 몸을 감쌌다. 분명 떨어져 내리는 빗물은 차가운데, 품에 안은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네자르는 불안감에 입술을 뜯어야만 했다.
셋은 금방 에젤로트 성에 도착했다. 데이지는 퉁퉁 부은 눈으로 네자르를 따라 계단에 올랐다. 록허드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가 아닌 카트리나였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을 즈음, 성 밖에서 의원이 도착했다. 록허드가 직접 말을 몰아 시내에서 데려온 백발의 노인이.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데이지 양, 잠시 밖으로…….”
얼마나 자주 방문했으면 의원이 시녀의 이름을 외울 정도다.
시녀와 의원이 나가자 카트리나의 침실에는 방의 주인과 네자르만이 남았다. 여태 비가 내리는 바깥과 달리, 카트리나의 방은 온기가 있었다. 의원이 다녀갔으나 무언가 한없이 무력한 기분이었다. 네자르는 머리칼이 엉망으로 뻗친 카트리나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다가 다시 거두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 전신이 흙 범벅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일가견 있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니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네자르는 몸을 깨끗이 한 즉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짧은 사이에 카트리나가 무슨 발작을 일으킬지 몰랐다. 데이지는 종일 우느라 심신이 지쳐 카트리나를 돌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다. 그렇다면 이 성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간호할 사람은, 이제 네자르밖에 남아 있지 못했다.
“개 같은 새끼들.”
해가 뜨면 시녀장부터 싹 치워 버려야겠군. 맨몸으로 쫓아낼 방법쯤이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뭐가 가장 좋을까……. 황족 시해? 그게 가장 적당하려나?
***
다음 날, 에젤로트의 시녀장 모르카다 솔라는 에젤로트 백작 성에서 해임되었다. 단순한 해임은 아니었다. 백작가의 고명딸을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건 물론 태형이 내려졌다. 오십이 훌쩍 넘은 몸으로 열 대가 넘는 태형이라니, 교수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전 시녀장 모르카나는 늦은 밤이 된 즉시 알몸인 상태로 뒷골목에 버려졌다. 이후의 일은 네자르도 알 수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에젤로트 성의 분위기는 상당 부분이 바뀌었다. 큰 충격을 받은 백작은 데이지를 제외한 모든 고용인을 해고하였으며 백작 부인은 밤마다 카트리나의 침실로 찾아가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재워 주고 나왔다.
왜 이제껏 아무도 그녀가 받은 부당한 대우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 겨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로 설명이 되는 일인가? 아무리 그래도 가족끼리 이 정도로 관심이 없을 줄이야. 에젤로트도 참 웃긴 집안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백작 내외의 변화는 알아도, 에젤로트 형제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확실히 알 방도가 없었다. 이유는 아주 명료하다. 카트리나가 네자르의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
“싫어! 몰라! 아까부터 모른다고 했잖아!”
사실 카트리나가 네자르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단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피곤한 점이 있다면…….
“뭘 몰라? 너, 새대가리야? 내가 황성에서 키우는 앵무새도 다섯 번 이상 반복한 문장은 아무렇지 않게 따라 해. 그런데 대체 왜 모르겠다는 거야?”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네 앵무새가 그렇게 똑똑하면 가서 앵무새나 가르쳐!”
바로 카트리나 에젤로트를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에 엄청난 인내심이 따른다는 점이었다.
버럭 화를 낸 카트리나는 고구마밭을 침범한 멧돼지처럼 콧김을 씨익씨익 뿜었다. 그 말간 뺨을 해탈한 얼굴로 응시하던 네자르가 결국 책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통수 너머에서 잔뜩 긴장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방금 한 말은 취소할래. 앵무새 말고 나 가르쳐 줘. 더 열심히 외울게.”
스윽 몸을 일으킨 네자르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넌 어찌 된 애가 변명도 늘 똑같냐? 내가 말했지,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4개 국어는 몰라도 3개 국어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 말 어머니한테 했더니 내 머리로는 무리라고 하셨어.”
“저 몸밖에 쓸 줄 모르는 멍청한 록허드 에젤로트도 에퀴파나어를 할 줄 알아. 너는 멍청한 록허드한테도 뒤처지고 싶어?”
네자르의 도발에 카트리나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죽고 말래!”
과격한 화법에 미간이 구겨졌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이라 지적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네자르는 답답한 내면을 평화롭게 다스린 후 저 위로 밀어 두었던 책을 다시 끌어왔다.
“마지막이야. 이번에는 제대로 외워.”
“응.”
그렇게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 이름은 카트리나 에젤로트입니다’만 지겹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져 가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카트리나의 제2 외국어 실력은 조금도 증진되지 않았다. 네자르는 며칠간 카트리나의 정체가 금붕어인지, 금붕어라면 도대체 어떠한 경로로 사람이 된 건지 고민해야만 했다. 금붕어가 아니라면 저 세 문장을 이틀 동안 반복해도 못 외울 수 없었다.
미친 듯이 경마장을 돌던 록허드는 그런 네자르의 한탄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라고 그 시도를 안 하신 줄 알아? 걔를 못 이겨서 떠나간 가정 교사만 다섯이야, 다섯.”
그리 말한 록허드는 땀으로 젖은 머리칼에 냉수를 들이부었다. 저러다 나가서 머리카락이 얼기라도 하면 또 신기하다며 난리를 칠 테다. 보지 않아도 벌써 눈에 훤했다.
생각해 보면 카트리나와 록허드는 닮은 부분이 많았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 가깝다는 점과 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점, 그리고 파프리카라면 치를 떤다는 점까지. 물론 카트리나는 여기에 끝도 모를 무식이 추가되어야 했다. 여러 의미로 참 대단한 남매였다.
“그런데 그 다섯도 너처럼 지극정성은 아니었을걸? 네가 떠나면 케이트 탈수 증세가 올 때까지 울지도 몰라.”
록허드의 말에 네자르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한 달 후에 다시 찾아오기로 약속했어.”
“한 달? 그때면 학기 시작하는 시기 아니야?”
“맞아. 에젤로트에 나흘 더 있다가 아카데미로 돌아갈 거야.”
얼굴을 볼 때마다 언제 오냐고, 다시 오라고 떼를 쓰는 카트리나 때문에 구체적인 약속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내가 아는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맞지? 다른 사람 아니지? 혹시 열 있냐?”
축축한 손바닥이 이마 위로 닿아 온다. 네자르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그의 손을 쳐 냈다. 엄살을 피우며 손등을 감싸 안은 록허드가 들으란 듯이 커다랗게 혀를 찼다.
“이거, 웃기는 놈이네. 그러다가 걔가 결혼해 달라고 하면 아주 결혼까지 해 주겠다?”
“너야말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뭐가 웃기는 소리야?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데 나중에 다 큰 케이트를 다른 놈이랑 혼인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애초에 친오라비는 난데 왜 네가 걔를 애지중지하고 난리야?”
“자꾸 헛소리하려면 저리 꺼져. 가서 말 타다가 떨어져서 코나 깨져라.”
“코 깨질 놈은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누구 말이 맞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코웃음을 친 록허드가 기어코 마지막까지 저주를 퍼부어 댔다. 네자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