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2/19)

제1장

전생을 기억했다고 해서 내 정체성이 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카트리나 에젤로트였고, 접시 위에 올라오는 파프리카를 혐오했으며, 늦은 밤마다 혼자 잠드는 것을 무서워했다. 소양 교육 시간마다 책의 끝부분이 낙서로 가득해지는 일도 여전했고 그런 날 대하는 가정 교사의 태도도,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온 시녀의 태도도 야생 살쾡이를 다루듯 한결같았다.

그 와중에 바뀐 점이 있다면 마냥 애처럼 굴기만 했던 행동거지가 조금은 성숙해졌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인성의 발전이 이뤄진 걸까? 소파 옆에 우두커니 선 시녀를 쳐다봐도 폭력적 욕구가 끓거나 혀가 간질간질하지 않았다. 이제껏 얼마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아왔는가에 대해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변화였다.

내가 얌전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작 성의 하루하루는 매우 평온해졌다. 고용인들의 안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다던 내 방 주위의 분위기도 매그놀리아 향처럼 고아하게 변했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성안의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특히 한집에서 남처럼 생활하는 남자 형제들은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평소보다 네 배는 더 시끄럽게 굴었다.

“케이트, 너 드디어 뭘 잘못 먹은 거냐?”

“릭, 어머니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라.”

에든의 일침에 얄미운 릭 에젤로트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흥, 어제부터 나만 골리더니 꼬시다. 에든의 눈을 피해 몰래 혀를 내밀자, 고기 씹듯 샐러드를 씹어 대던 릭의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나는 한 번 더 혀를 내밀어 주었다.

“케이트.”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에든이 엄한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첫째로 태어났다는 의무감 때문인지 몰라도, 에든은 아버지가 성을 비울 때면 평소보다 더 엄해지곤 했다.

이틀 전의 나였다면 식사 시간이고 뭐고 ‘왜 나한테만 이래라저래라야! 아버지도 아니면서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고 소리쳤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롭게 태어난 뉴 카트리나였으므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머리 빈 여자애 노릇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의미로 에든을 향해서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영애답게 싱긋 웃어 보였다.

“미안, 오라버니. 릭이 자꾸 놀려서 그랬어. 이제부터는 조용히 식사만 할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송아지 스테이크를 살살 썰어 입 안에 집어넣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잠깐 마주친 에든의 표정이 찍소리를 하기 전의 릭만큼이나 떨떠름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분 동안은 말없이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이 계속됐다. 가정 교사도 울고 갈 완벽한 예법으로 식사를 이어 갈 때 즈음, 내 바로 건너편 자리에서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차남 록허드 에젤로트였다.

“이봐, 말괄량이. 대체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거야? 너 때문에 목구멍이 막혀서 고기가 안 넘어가잖아. 네자르가 사람처럼 굴지 않으면 약혼을 파기한다던?”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어.”

록허드가 입을 열자 릭이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

“너는 네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 얼마나 고역인지 모를 거다. 네자르가 찾아온 날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머리라도 찧은 거냐? 너 하나 때문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었나 밤새도록 고민해야 했다고.”

구구절절한 사연에 나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냅킨으로 얌전히 입을 닦았다.

“다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러는 거야? 예전처럼 조용히 하라며 포크로 손등을 찔러 줘야 마음이 좀 놓이겠어?”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긴 아는군. 나는 얼굴만 똑 닮은 도플갱어가 숨어들어 와 카트리나 에젤로트 노릇을 하는 줄 알았지.”

이래서 사람은 평소 이미지가 중요한 거다. 식사 시간에 소리치지 않고 얌전히 칼질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이틀 내내 똑같은 말만 반복해서 들어야 하다니. 답답해진 나는 테이블 위에 준비된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래, 그렇게 짐승처럼 물을 삼켜야 케이트지.”

나는 물 좀 편하게 마셨다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릭을 노려봤다.

“아까부터 자꾸 속 긁을래? 짐승답게 네 얼굴로 확 뱉어 줄까?”

릭은 내 경고를 맞받아치기는커녕, 한숨 덜었다는 얼굴로 편안히 웃고 있었다. 한 번 더 거친 말을 뱉으면 아주 식탁 너머로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을 기세였다.

“내가 분명 식사하는데 눈앞에서 웃지 말랬지? 네 웃는 얼굴만 보면 속이 다 뒤집힐 것 같다니까?”

“좋아. 바로 그거야, 케이트. 그게 바로 네 본모습이라고! 아버님이 기함하시기 전에 되지도 않는 요조숙녀 흉내는 집어치우는 게 나아.”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번 더 물을 삼켰다.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겨우 이틀 만에 원상 복귀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용인들이 내가 베푸는 친절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피만 나눈 원수들이 눈앞에서 깐죽대는 건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전자가 내 마음을 뿌듯하게 만든다면 후자는 아무 이유 없이 피가 뜨거워진달까. 어떻게 릭은 입을 여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열받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전생의 기억이 돌아와도 형제에 대한 참을성은 여전히 바닥을 치는 것 같다.

“그만.”

그때, 가만히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손에서 포크를 내려놓으셨다.

“릭, 그리고 록허드.”

“예.”

“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달리 록허드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겨우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케이트가 뒤늦게라도 숙녀가 될 마음을 먹었으면 오라버니가 된 도리로서 도와줘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이 어미 눈에 너희는 어째 케이트의 행동을 비웃으며 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내 말이 틀렸니?”

“아닙니다.”

“아니라니, 그럼 맞다는 소리니?”

릭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내 지척까지 들렸다. 어휴, 꼬시다. 나는 헛기침을 뱉는 척하며 냅킨으로 올라가려는 광대를 가렸다.

“아, 아닙니다.”

“너희 둘은 당분간 케이트 옆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특히 릭! 자꾸 케이트를 자극하면 내게 혼쭐이 날 줄 알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어머니는 곧장 시선을 돌려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셨다. 그것도 15년 평생을 본 적 없는 아주 인자한 표정을 띠시면서.

“그러니 케이트, 너는 걱정 말고 열심히 예법을 익히렴. 이 어미가 교사에게도 미리 언질을 주어 네 수업 시간을 주마다 세 시간씩 늘리기로 했단다. 이번에 시험 점수를 잘 받으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사 주마.”

나는 그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업 시간이 세 시간이나 늘어난 건 가슴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원하는 건 뭐든 사 주겠다는 말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내게 필요한 게 드레스나 목걸이 같은 사치품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던 탓이다. 오히려 바닥에 질질 끌리는 풍성한 스타일의 레이스 드레스나 크기가 개구리 눈알만 한 보석 목걸이는 이미 내 방에 차고 넘치는 물건이었다.

예전에는 목과 귀가 무거울수록 마음이 뿌듯하고 걸음걸이가 당당해졌는데, 전생을 기억해 냈기 때문일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날 평가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직접 말하기에 굉장히 서글픈 일이지만… 내가 갖고 싶은 건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데이지,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

“……네, 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정원 테이블에 다과를 올리던 시녀, 데이지가 눈을 번쩍 떴다. 내 질문이 얼마나 충격적이면 손까지 벌벌 떠는 걸까.

“너는 나를 오랫동안 봐 와서 알 거 아니야? 내가 왜 친구가 없는지.”

“그…….”

데이지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그게…….”

“하아, 데이지. 괜찮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 재수가 없으니까 친구도 없는 거라고.”

자조적인 목소리에 데이지가 티포트를 잡다 말고 울먹이는 얼굴로 어깨를 잡아 왔다. 개망나니처럼 굴어도 유일하게 내 곁에서 나를 신경 써 주던 그녀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내가 왕따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래, 나는 친구가 없다.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다과회에서 또래의 다른 영애들이 오순도순 모여 웃음꽃을 피울 때마다 나는 혼자 어머니 옆에 앉아 케이크를 야금야금 분해해 먹곤 했다. 그래도 외롭다고 느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럴 만했던 것이, 성에서는 남자 형제들과 싸우기에 바빴고, 바깥에서는 네자르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전생을 기억해 내면서 뉴 카트리나로 다시 태어나게 된 나는 네자르에게 애인을 안겨 줘야 하는 일생일대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남자 형제들과 진흙을 튀기며 노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했고, 네자르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서도 안 됐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안락하고 화목한 나의 노후 생활을 위해서였다.

“데이지,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요? 우선 대화가 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친해질 기회도 생기니까요.”

“예전의 나는 말도 안 통했다는 거야?”

“으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케이트 아가씨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죠. 그, 그래도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순조롭게 친구를 만드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젠장, 기분이 상하기는 해도 데이지의 말이 맞았다. 그러니 네자르가 반할 만한 영애를 꼬시려면 지금부터라도 조숙한 숙녀가 되어야 했다. 새끼손가락을 든 상태로 차를 마시며, 웃을 때는 입을 가리고, 말을 할 때마다 싱긋 웃어 주는 생크림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여성이!

“또 무슨 간계를 꾸미고 있기에 혼자 실실 웃고 있어?”

그때 돌연 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의 표지를 조용히 덮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느 영애들처럼 정원 테이블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려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릭이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나를 찾아온 것이다.

“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냐?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해? 소양 수업의 교과서도 겨우 읽는 주제에.”

릭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퍽 진지했다. 얼마나 웃음기가 없으면 욕설을 뱉으려던 내 입술을 굳어 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로 얹어 놓았다.

“별일 없어. 앞으로를 위해서 조금 얌전히 행동하는 것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혹시 네가 성격을 뜯어고치는 게 네자르 전하와 약혼하는 조건이기라도 한 거야?”

약혼하는 조건이 아니라 약혼을 깰 수 있는 조건이다.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지만, 내 대답이 거짓처럼 느껴졌는지 릭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케이트, 너는 그렇게 황태자 전하가 좋냐?”

“네자르 때문이 아니래도? 뒤늦게 사춘기가 지난 걸 수도 있지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해?”

사실 내가 전생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야, 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소릴 듣고 누가 날 정상인 취급하겠어?

나는 릭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물러서지 않고 턱을 치켜들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릭은 이윽고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만 괴롭힐 테니까 눈에 힘 좀 풀어. ……대신 무슨 일 있으면 혼자 앓지 말고 꼭 나나 록허드 형님한테 말해라. 괜히 또 멀쩡한 물건 부수지 말고.”

릭은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등을 돌려 정원 안으로 사라졌다. 폭넓은 걸음걸이 때문인지, 릭의 인기척은 마가렛 향 가득한 정원 너머로 금방 사라졌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일까. 나는 릭의 온기가 남은 정수리를 손으로 툭, 털었다.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주제에 애처럼 취급할 건 뭐람.

다시 책의 표지를 펴고 찻잔을 기울일 동안에 멀찍이 서 있던 시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표정이 아침 햇살처럼 밝겐 편 것으로 봐선 좋은 소식이 도착한 것 같았다.

“아가씨! 네자르 전하께서 방문하셨어요.”

역시 설레발은 함부로 치는 게 아니다. 나는 기계처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에 도착한 네자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진정해, 케이트. 지금의 너는 예전과 다르잖아. 이제 얌전히 괴롭힘을 당해 줄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러나 다부진 마음과 달리, 눈치도 없는 두 다리는 주춤주춤 움직였다.

네자르는 늘 그랬듯 응접실 내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지,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천천히 표지를 덮었다. 탁하면서 낮은 채도의 검홍색 눈동자가 안경 렌즈 너머에서 날 응시한다. 겨우 이틀 만에 다시 본 얼굴임에도 항상 새롭다 느껴질 만큼 조화롭고 화려한 이목구비였다.

잠시간 말없이 날 쳐다보던 그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뻣뻣한 눈매도, 다물린 입매도 그답지 않게 매우 스산했다. 안 좋은 일이 있기라도 했나? 나는 쭈뼛쭈뼛 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안녕, 네자르. 식사는 했어?”

인사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지? 네자르는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내 탓인가 싶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문 근처에서만 빙글빙글 맴돌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아, 그냥. 이 근처가 좀 시원한 것 같아서…….”

“점심 잘못 먹었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와서 앉아.”

나는 말 잘 듣는 개가 되어 네자르의 앞자리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얼굴을 마주한 즉시 식사 자리에서처럼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예전의 카트리나를 흉내 냈다. 한마디로 시끄럽게 굴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야, 네자르? 원래는 이렇게 자주 안 찾아오잖아! 아, 내가 보고 싶어서 왔구나! 그치? 맞지?”

이틀 전으로 돌아갔을 뿐인데 뭐 이리 진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네자르를 쳐다봤지만, 그의 표정은 마치 못 볼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더욱 싸늘해졌다. 나는 얌전히 눈에서 힘을 뺐다.

“케이트, 너 방금까지 책을 읽고 있었다며?”

“책?”

그의 물음에 릭을 만나기 직전까지 차를 마시던 순간을 떠올렸다.

“응,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읽었다기보다는… 읽으려고 펴 놨었지.”

“갑자기 왜?”

순간 급격한 고민에 휩싸였다. 별것 아닌 질문처럼 보였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의 네자르는 별것 아닌 주제로 말을 트는 인물이 아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네 애인을 찾기 위해서 숙녀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독서를 시작한 거라고?

네자르의 자존심을 백방 상하게 할 대답이었다. 나는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최상의 답을 뽑아냈다.

“여자 친구가 갖고 싶어서.”

응접실의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동시에 네자르는 내 얼굴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폈다. 정말 말 그대로 살펴서 봤다. 얼마나 끈질긴 시선이었는지, 뺨이 다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기 전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네자르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을 향해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지금 여자 친구가 갖고 싶다고 한 거야?”

“으, 응. 매일 친형제들이랑만 노니까 여자애들이랑은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다과회 예법과 관련된 교양서적을 좀 읽었어.”

“무슨 심경의 변화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친구고 뭐고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 세상이 무너져도 나만 있으면 된다며?”

나에게도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분명 남아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소름 돋을 정도로 방정맞은 소리였다. 세상에는 네자르 말고도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게……. 잘 생각해 보니까 적어도 친구 한두 명은 필요한 것 같더라고. 네자르랑 오라버니들이 없으면 난 항상 혼자잖아? 그거, 엄청 비참한 기분이야.”

그래, 이게 맞았다. 내가 느껴 온 감정은 외로움이 아니라 비참함이었다. 돌이켜 보면 늘 아닌 척, 괜찮은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미움받는 내 위치가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다. 그 감정을 숨기고 싶어서 더 열심히 네자르에게 매달린 거였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내 진실한 감정을 인정하게 되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리고 시원했다. 역시 뉴 카트리나가 되길 백번 잘했어!

그러나 시원한 건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내 나름대로 오랫동안 묵혀 둔 진심을 고백했음에도, 네자르의 시선은 여전히 끈질기고 서늘했다.

“그래서 안 하던 자수를 연습하고, 소문난 의상실이 어디인지 찾아가고, 잘생긴 귀족 영식의 이름을 외우는 건가? 그런 게 정말 네가 바라는 여자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돼?”

순간 머릿속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록허드에게서. 요즘 만날 때마다 네 이야기를 하는 탓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야.”

록허드와 네자르는 열아홉 살의 동갑내기 친우이다. 록허드는 일찍이 가문의 후계자가 에든으로 낙점된 직후 네자르의 검이 되겠다며 황립 아카데미로 떠났었다. 그날이 바로 시발점이었다.

네자르를 향한 나의 열렬한 짝사랑은 록허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첫해, 친우랍시고 데려온 미소년에게 반하면서 시작됐다. 물론 그 사랑이 긴 시간 동안 지속되어 약혼 서약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문제는 내가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다. 록허드가 내 숨기고 싶은 개인사를 네자르에게 낱낱이 보고한다는 점이었지!

“록허드 그 망할 새끼가 정말!”

쾅!

본능적으로 주먹을 말아 쥐어 테이블을 쳤다. 그러나 이내 곧 어깨를 굳히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흠, 흠. 그런 소리를 계속 듣게 만들어서 미안해. 앞으로 록허드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킬게.”

관심도 없는 이성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는 건 꽤 고역인 일이다. 록허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네자르의 표정이야 뻔했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졸렸겠지. 팔짱을 낀 채 턱을 쓸던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질문의 답은?”

“……질문? 무슨 질문?”

“잘생긴 귀족 영식의 이름을 외우는 행위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 데 필요하냐고.”

안 그래도 짙고 텐션 낮은 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진득하게 들려왔다. 장난을 치면 쳤지, 이렇게 대놓고 기분 안 좋은 티를 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라도 우울한 기분을 풀어 줘야겠다 싶은 마음에, 평소의 배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여자들은 대화할 때 공감대가 필요해. 남자들도 모이면 여자 이야기를 하잖아? 여자들도 모이면 남자 이야기에 열을 낸다고. 그러니까 반드시, 꼭 외워서 가야 해.”

“흐음.”

활기차게 말하기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네자르는 무언가 깊이 고민하듯 몸을 더 뒤로 젖혔다. 얇게 뜬 눈이 날 위아래로 훑는다. 내가 짓고 있는 입꼬리의 모양이라든가, 눈썹의 각도를 더 세밀하게 살피겠다는 듯.

“좋아.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약혼자가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지. 오늘만 특별히 연습 상대가 되어 줄 테니 지금까지 외운 이름 중에 하나만 말해 봐.”

전혀 반갑지 않은 배려였다.

“고맙지만, 정말 괜찮아.”

“말해.”

민망할 정도로 단호한 요구였기에 당장 기억나는 이름을 내뱉었다.

“음…, 판시온 엔테라.”

판시온 엔테라는 황성근위대 2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라고 데이지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겨우 스물 중반의 나이로 황성근위대 부기사단장에 오른 검술의 귀재. 영애들은 물론이고 귀부인들 또한 눈에 불을 켜고 호시탐탐 노리는 능력 있는 미혼남이라 했었지. 물론 나는 본 적이 없었지만.

“판시온 엔테라, 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네자르가 대뜸 나를 향해 물었다.

“케이트 영애, 영애는 판시온 경의 어느 부분에 반한 거지?”

설마 도와주겠다던 의미가 상황극이었어? 그런 것치고는 네자르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다. 제국의 그 어떤 귀족 여식도 저런 식의 강압적인 어투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했다니, 애초에 판시온 엔테라의 얼굴도 본 적 없는데?

심지어 서늘하기만 했던 그의 시선은 이제 내 뺨을 물어뜯을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바짝 쪼그라들어서 대답했다.

“저기, 저는 반한 적 없는데요.”

너무 단호하게 부정했나? 당황한 나는 급히 뒷말을 이었다. 최대한 그럴싸한 말들을 지어내서.

“하지만 굉장히 잘…….”

잘생겼나? 인기가 많다니 당연히 잘생겼겠지.

“생기시고 기사답게 몸도 다부지…….”

다부질 거야. 그래도 명색이 부기사단장인데.

“셔서 뵐 때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요. 네자르 영애는 어떤 분에게 시선을 자주 빼앗기시나요?”

찻잔은 새끼손가락을 든 상태로 쥐고, 웃을 때는 입을 가리면서. 숙녀답게 행동 하나하나에 세심히 신경 쓴 나는 네자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날 위해서 상황극까지 해 주는데,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야 의심도 안 할 테니까.

그러나 어째서인지 네자르는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씰룩거렸던 표정도 이젠 찬물을 뒤집어쓴 듯 고요했다.

나, 뭔가 잘못한 것 같지?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잘못한 것 같아.

확신컨대, 네자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제아무리 고민해도 근원을 알 수 없었던 탓에 조용히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네자르가 말문을 텄다.

“케이트, 너는 네 말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어.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지? 느낌이 안 좋다. 나는 지금 네자르가 하는 말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자르는 소파 등에 턱을 괴고 한 번 더 숨을 뱉었다. 금방 구워 낸 카스텔라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던 목소리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퍽퍽해져 있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은 누릴 수 있는 권리만큼 져야 할 의무도 많아. 황태자인 내가 다른 어떤 영애도 아닌 너를 약혼자로 선택한 건…….”

그가 돌연 하던 말을 멈추었다. 턱을 괴던 손으로 잠시 이마를 쓸던 네자르는 천천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고는 이내 나를 향해서 물었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열여섯?”

“열다섯이야.”

“하아, 끔찍하게 어리군. 내가 열다섯 살짜리를 데리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세 번째 한숨이었다. 나는 차마 그의 그림자가 인 얼굴에 대고 ‘그래도 정신은 열다섯이 아니라 열일곱이야.’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누가 듣더라도 정상적으로 들리지는 않을 테니까.

“너는 내가 몇 살인지는 알고 있냐?”

“당연하지. 네자르는 내가 숫자도 못 세는 바보인 줄 알아? 올해로 열아홉이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대답하자 네자르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침침했던 분위기가 살짝 가벼워진 것 같았다. 덕분에 바짝 긴장되어 있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다. 내가 왜 약혼자 앞에서 온종일 움츠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억울함에 입술을 꽉 다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래서 먼저 좋아하고, 많이 좋아하고, 계속 좋아하면 지는 거다.

머릿속으로 네자르를 데려왔던 열두 살의 록허드를 주먹질했다. 이게 다 그 재수 없는 둘째 놈 때문이야. 그놈이 네자르의 검이 되겠다, 뭐다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기고 들어갈 이유가 하나 없잖아!

“……좋아.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 말한 네자르가 가볍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였기에 달리듯 뛰어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왜 또 오라고 하는 건지, 참.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헛기침하는 척, 양손을 올리고 양쪽 광대를 꾹 눌렀다.

“필요한 게 여자 친구라고 했지?”

채도가 낮고 어두운 적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에 슬쩍 몸을 빼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곧은 콧등이 가까이 내려오자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혹여라도 들릴까 싶어 엉덩이를 한참 뒤로 뺐다. 움직이지 말라는 듯 팔을 잡아당긴 네자르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튕겨 냈다.

“남자들 이름 외우는 것처럼 괜히 혼자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내가 에자렛을 소개해 줄 테니 그 애와 어울리도록 해.”

뭐? 설마 황녀를 말하는 건가?

네자르에게는 두 명의 이복동생이 있었다. 현 황후 태생인 황녀 에자렛과 막내 황자 앤드류. 많고 많은 여자 중에 그의 이복동생을 소개받으라니…….

황법상 카발 제국은 6촌 내 혼인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에자렛과 운 좋게 친해져 봤자, 약혼을 파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리고 격정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아, 아니, 싫은 게 아니라 괜찮아.”

“왜? 에자렛은 너보다 겨우 한 살 많아. 너와 달리 차분하고 여유로워서 둘이 잘 어울릴 수 있을 텐데,”

“차분하고 여유롭다고? 보통 성격이 반대면 더 부딪치는 거 아니야?”

“그건 완전히 극과 극일 때고. 그 애랑 너는 비슷한 점도 꽤 있어. 쓸데없는 일에 열을 쏟는다거나, 종종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지금 나 욕하는 거 맞지?

내가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하자, 팔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긴 네자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사람들에게 박혀 있는 카트리나 에젤로트의 이미지가 그리 쉽게 바뀔 수는 없어. 널 7년 동안 봐 온 나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그럼 어떻게 해?”

“자존심까지 버려 가며 여자들 비위 맞춰 줄 게 아니라면 깔끔하게 포기해.”

매정한 말을 뱉어 낸 네자르는 케이크 위에 얹어진 생크림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해. 내가 여자 친구를 필요로 하는 데는 약혼 취소라는 분명한 목적이 존재한다. 물론 상세한 이유야 말할 자신이 없었지만, 그냥 포기하라니?

서운한 감정이 목 언저리로 울컥 올라왔다. 얼굴을 구기며 네자르의 몸을 멀찍이 밀어냈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그리고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꼭 여자 친구 만들 거야. 에자렛 황녀 말고!”

어쩐지 별거 아닌 일에 혼자 열을 내는 기분이었다. 대놓고 코웃음을 친 네자르가 손을 뻗어 내 양쪽 뺨을 쭈욱 늘어뜨렸다. 아까의 예민하고 우울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평소처럼 짓궂은 표정으로.

“이 네자르 전하가 몸소 소개해 준다는데 퇴짜를 놓다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내일도 찾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대답 잘 생각해 놔. 아까도 말했듯 이상한 놈들 이름만 외우고 있지 말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는 응접실 내에 나만 덩그러니 남겨 두고서 사라졌다. 아마도 록허드를 만나러 가는 것일 테다. 그를 따라 나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일도 찾아오겠다는 말이 귓가에 남아 잔상처럼 퍼져 갔다.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원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찾아온 늦은 밤. 나는 침대에 들어가기까지 다과회 예법 서적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오래간만에 빼곡한 글씨를 내려다보니 속이 다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은 느낌에 끈질기게 훑어보던 책의 표지를 덮었다.

“데이지.”

“네.”

침대맡에 앉아 내 머리칼을 열심히 빗질하던 데이지가 대답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변해 버린 내 모습에 당황 가득했던 목소리가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자애들 말이야. 진짜 남자 이야기 하면 친해지는 거 맞아?”

“사람마다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를 비롯한 하녀들은 보통 연애 이야기나, 남자 이야기로 가까워져요. 그게 가장 재밌거든요.”

“우리 성에 이야기할 남자가 있나……. 대체 누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오늘 낮에 열심히 외웠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은 오직 판시온 엔테라밖에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채 이름과 소문만 전해 들어서 그런 걸까? 잠들 때가 되자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내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린 데이지는 빗을 거두고 일어섰다.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왔다.

“대개 우리 가문 기사님들 이야기가 주류예요. 에젤로트는 황성과 가까워서 그런지, 황성근위대 이야기도 종종 나오구요. 황성근위대 같은 경우는 저희 중에서도 실제 만나 본 애들이 별로 없어요. 그냥 알음알음 퍼져 가는 거죠.”

이래서 소문이 무서운 거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해 떠들고 다닌다니, 상상만으로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것도 단순히 남 일로 치부할 것은 아닌 게, 이제 겨우 열다섯인 내 악명도 밖에서는 꽤 시끌시끌하다고 록허드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앞날이 참 깜깜하다, 깜깜해.

나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고 있을지 감히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한숨을 푹 내쉬고 여름용 얇은 이불 천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화장대를 정리하고 걸어온 데이지가 내 턱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난 그녀의 얼굴에 대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말이야, 네가 말해 준 기사 중에 아는 인물이 하나도 없어. 모르는데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내 말에 고민하듯 천장을 올려다보던 데이지가 입을 열었다.

“록허드 도련님께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같은 황성근위대 기사이니 훈련장에 구경을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뭐어? 그녀의 제안에 난 기겁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록허드에게 부탁하느니 나 홀로 미친 척 황성을 찾아가는 게 더 나았다.

“걔한테 부탁하라고? 너도 남 얘기라고 막 하는구나? 차라리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지…….”

작게 웃은 데이지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과 소리 내어 닫히는 문. 나는 창 쪽으로 몸을 틀며 머리를 쥐어 잡았다.

여자들과 친해지려면 남자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남자를 모른다. 여자들에게는 황성근위대가 인기가 많다. 록허드는 황성근위대다. 아무리 생각해도 록허드를 찾아가는 게 최선의 수였다. 이건 마치 구멍을 찾으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 같았다.

“됐어. 그냥 의상실로 운을 떼자. 아니면 자수를 놓자고 해도 되고…….”

***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막상 해가 뜨니 다리가 록허드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고용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한 이른 오전부터 록허드의 방 주위를 왔다 갔다 맴돌았다. 결국 오고야 말았어. 관 뚜껑을 닫을 때까지 록허드에게 부탁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었다.

똑똑.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록허드의 방문을 두들겼다. 개 앞에서 허리를 숙여도 이보다는 덜 굴욕적일 것 같았다.

얼마 안 가서 문이 열리고, 제복을 차려입은 록허드가 걸어 나왔다. 시선을 내려 눈을 마주친 그는 퍽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곧 언제 놀랐냐는 듯 환한 미소를 얼굴에 그려 냈다. 정확히 말해서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얄미운 웃음이.

“내 귀여운 말괄량이가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오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록허드의 목소리는 버터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것처럼 느끼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내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확신컨대 근래에 마주한 얼굴 중에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웃음이 가장 징그러운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등을 지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바람에서 그쳤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록허드의 방까지 온 게 아니었으니까. 눈치를 보다가 막혀 있던 말문을 힘겹게 열었다.

“오, 오늘 언제 출근해?”

“지금 당장.”

큰일이다. 30분의 여유는 있을 줄 알고 외출 준비를 하기는커녕 가벼운 실내복 차림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내 당혹스러운 얼굴을 읽었는지, 문틀에 기대고 있던 록허드가 턱을 들어 올렸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쭈욱 훑었다.

“문제 있어? 할 말이 있다면 어서 해, 케이트. 말했던 것처럼 이 오라비는 지금 당장 황성으로 가야 하니까.”

황성이 위치한 카발 제국의 제도는 에젤로트 영지에서 겨우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황성근위대는 명목상 황성 내외에서 관장하고 있는 일이 많았고, 그 일원인 록허드도 나흘에 한 번 정도나 에젤로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즉, 오늘 말을 꺼내지 못한다면 나흘 후에나 록허드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황성에 데려가 줘.”

마음이 급해진 탓에 앞뒤 설명도 없이 말만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정작 동행을 요청받은 록허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등을 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돌리면서 방문의 손잡이를 쥐어 잡았다.

“좋아. 10분 줄 테니 준비해서 아래로 내려와. 그 이상은 못 기다리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어라. 그렇게 쉽게 허락해도 되는 거야? 내가 발을 떼지 못하자 록허드가 내 어깨를 잡아 멀찍이 밀어냈다.

“내 말 못 들었어? 10분이라잖아. 빨리 네 방으로 가서 준비해. 설마 그 꼴로 가려는 건 아니겠지?”

“왜인지는 안 물어보는 거야?”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걱정 마. 자아…, 어서 준비하래도? 아예 그냥 내가 데려다줄까?”

내 허리를 잡아 번쩍 든 록허드가 자신의 어깨 위로 얹었다. 시야가 허공 위로 높이 뜬 것으로 모자라,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니 아침으로 먹은 소고기 수프가 올라올 것 같았다.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록허드의 등을 주먹 쥔 손으로 강하게 쳤다. 그러니까, 내 딴에는 분명 강하게였다. 록허드는 그 어떤 타격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빨리 내려놔. 내가 자꾸 애 취급하지 말랬지?”

“어제는 숙녀니 뭐니 난리를 치더니만, 오늘은 또 원래의 말괄량이로 돌아왔네? 단순히 변덕이었던 거냐?”

“변덕 아니거든? 나 정말 얌전해질 거니까 내려놓으라구!”

그가 웃자 배가 걸쳐진 어깨도 덩달아 흔들렸다. 사지를 버둥거리며 별 난리를 쳐도 록허드는 꿋꿋하게 걸음을 이었다. 어떻게 꼭 하지 말라는 행동만 이렇게 성심성의껏 하지? 나는 신경질을 죽이고 화가 가득한 숨만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록허드가 또다시 웃었고, 그렇게 한 층을 내려가고 나서야 날 복도에 내려놓았다.

“네자르는 오전 업무를 봐야 해서 늦은 오후에나 볼 수 있을 거다. 기다리기 지루할 테니 어제 내리 보던 두꺼운 교양서적이라도 들고 가. 정원 구경하는 것도 십 분이면 지겨워질 테니까.”

네자르? 내 방의 문을 열며 록허드를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나는 네자르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닌데?”

내 말에 록허드의 표정도 덩달아 구겨졌다.

“아니라고? 그럼 왜 따라가려는 거야?”

“너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거 구경하려고. 데이지! 외출 준비해야 하니까 빨리 와!”

“구경?”

그가 이마를 찡그린 채 팔짱을 낄 동안 저 멀리에서 데이지가 바삐 뛰어왔다. 그녀의 품 안에는 금방 세탁된 연초록색의 드레스가 안겨 있었다. 바로 나가야 한다고 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저걸로 입혀 달라고 해야겠다.

나는 데이지를 재빨리 안으로 들여보내고 문틈만 살짝 열어 놓은 채 말했다.

“데려가 줄 거지? 응? 그럴 거지?”

간절한 목소리로 채근하자 록허드가 구기고 있던 표정을 풀고 천천히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은 여전했다.

“갑자기 구경은 왜 하려는 건데? 평소에는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관심도 없던 애가.”

말이 끝나자마자 굳게 닫히는 일자 입술이 그의 미심쩍어하는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에 문의 틈을 실 한 가닥처럼 더 얇고 좁게 만들었다. 거절하기 전에 재빨리 닫아 버려야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하여튼 곧 내려갈 테니까 먼저 가지 말고 아래에서 기다려야 해!”

그렇게 문을 쾅 닫아 버리고 등을 돌리기 직전, 다시 한번 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태 팔짱을 끼고 내 문을 노려보던 록허드에게 신신당부했다.

“꼭 기다려!”

다행히 록허드는 나를 두고 먼저 성을 뜨지 않았다.

늦은 건 아닐까 걱정되었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을 보아 딱히 문제가 생길 정도로 시간이 늦춰진 건 아닌 듯했다. 내심 가슴을 졸이며 열심히 로비로 내려간 보람이 있었다.

록허드는 마차에 오른 후에도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몇십 분 내리 내 뺨을 쳐다봤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지만, 그것도 열 번 가까이 뱉고 난 후에는 지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록허드, 제발 내 얼굴 좀 그만 쳐다봐. 너 때문에 뺨에 구멍이 뚫리겠어.”

록허드는 성에서 보였던 미심쩍은 눈빛을 여전히 유지하며 말했다.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말하면 네가 알아? 아니, 물론 알겠지만……. 그리고 만나는 게 아니라 몰래 훔쳐보고 오는 거야.”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더 가관으로 구겨졌다. 마치 애인의 숨겨 둔 정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혼돈과 경악이 그림 같은 얼굴 안에 뭉쳐 모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마차를 에젤로트로 다시 돌려야겠어.”

그리 말한 록허드는 허리를 숙인 채 일어나 마차의 벽을 두드렸다. 아니, 두드리기 전에 내가 급히 그의 손을 잡아챘다.

“아, 알았어. 말할 테니까 마차 돌리지 마! ……하아. 파, 판시온 엔테라 경을 만나야 해서 그래.”

겁에 질린 나는 목표물의 이름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에이 씨, 진짜! 짜증을 참지 못하고 잡고 있던 록허드의 손을 안쪽으로 내던졌다.

“우리 부단장을 네가 왜 만나는데?”

“그냥 얼굴 좀 익히려고 그러지……. 다른 귀족 여식들은 다 판시온 경의 얼굴을 아는데, 나만 모른단 말이야.”

“알아서 어디에 쓰려고?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두는데, 판시온 경은 이미 숨겨 놓은 애인이 있어. 무엇보다 너랑은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니 헛생각은 접어 둬라.”

상냥한 록허드는 내가 궁금해하지 않았던 세부 사항까지 하나하나 알려 줬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조금 우스운 소리였다. 제국에서 하급 귀족의 어린 딸이 늙은 졸부에게 시집가거나, 자식 없는 홀아비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유서 깊은 가문의 막내딸이 그런 처지가 될 일은 없겠지만.

“얼굴도 모르는데 헛생각은 어떻게 품으란 거야?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 둬. 친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어.”

고개를 저은 록허드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오히려 이게 또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황성에 도착한 후에는 꽤 긴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나는 록허드의 등 뒤에 숨어서 걷는 내내 주위를 면밀하게 살폈다. 혹시 네자르와 만나지는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그 모습을 눈치챘는지, 에든을 닮아서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록허드가 팔을 뻗어 날 옆으로 끌고 왔다. 휴, 다행이다. 나는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붙어 록허드를 졸졸 쫓아다녔다.

“본래 근위대의 일정은 지정된 날짜 외에 전부 비공개다. 그런데 이미 널 데려와 버렸으니, 황성 구경만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작게 한숨을 쉰 록허드는 날 이끌고 고풍스럽게 건축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어디지? 다른 성이었다면 인기척이 느껴졌을 텐데, 이곳은 어째서인지 사람 한 명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지금은 오전 훈련 시간이라 기사들 모두가 훈련장으로 나가 있을 거야. 오늘만 특별히 단장님의 허락을 받아 볼 테니까 판시온 경을 만나러 왔다는 이상한 소린 집어넣고 말 잘 꾸며 봐.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겠지?”

“거짓말을 하라는 거잖아? 걱정하지 마. 내 전공이니까.”

“쯧, 자랑이다.”

다른 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한 록허드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아니, 적어도 어떤 거짓말을 할지 생각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시장에 내보이는 상품처럼 끌려갔다.

“단장, 계십니까? 저 왔습니다.”

동시에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걸친 아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단장이라 불린 남자는 록허드의 당당한 첫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한편에 내던졌다.

“록허드, 너 이 새끼야. 내가 한 번 더 지각하면 머리를 다 밀어 버린댔지? 얼마나 정신이 빠졌으면 40분이나 늦어?”

“오늘은 늦은 이유가 다 있습니다. 제가 평소처럼 농땡이를 피우다 늦은 게 아니지 말입니다.”

“변명은 필요 없으니까 당장 이리 와서 대가리 대. 눈썹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밀어 주마.”

그때였다. 뒤에 선 내 어깨를 잡아챈 록허드가 나를 자신의 앞으로 끌고 나왔다. 이게, 지금 날 방패로 쓰려는 거야? 40분이면 날 기다렸던 시간을 고려해도 한참이나 긴 시간인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내가 퍽 당황스러웠는지, 소매를 걷고 일어서려던 남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록허드가 슬쩍 내 등을 쳤고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저는 에젤로트 백작가의 카트리나입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더라? 15년 동안 머리가 굳어 있었더니 정석적인 예법이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난 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을 흔들며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혹시 판시온 엔테라 경을 저한테 주실 수 있으세요?”

순간, 기사단장의 집무실이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제, 젠장. 나는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멍청하게 헛소리를 내뱉어 버린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아하하! 제,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네요. 다,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빌려 달라는 의미였어요.”

“……잠깐만. 너, 일단 내 뒤로 와.”

록허드가 급한 손길로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나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가 당기는 그대로 끌려갔다. 나만큼이나 당황했을, 혹은 나보다 더 당황한 기사단장이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단장. 카트리나가 말을 배운 지 얼마 안 돼 아직 상황에 적절한 문장을 구사할 줄 모릅니다.”

“……말을 배운 지 얼마 안 됐다고?”

기사단장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내 눈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불신과 꺼림칙함으로 가득했다.

록허드 이 멍청이가! 그렇게 말하면 저 아저씨가 믿겠어? 내 나이는 올해 열다섯이고, 정신적인 성숙도를 따지면 열일곱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키가 좀 작기는 해도 어디 가서 모자라다는 소릴 들을 만한 처지는 아니란 의미다. 무, 물론 제멋대로 살아온 습관이 남아 있어서 지금처럼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말을 배웠다는 소리는 너무 멀리 간 대처가 아닌가?

“예, 훈련장을 구경하고 싶다며 하도 조르길래, 차마 울며불며 난리 치는 애를 두고 올 수 없어 데려왔습니다.”

“흐음…, 카트리나 에젤로트 양이라면 나도 조금 건너 들은 바 있지.”

내 예상과 달리 기사단장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나 끔찍한 소문이 돌고 있으면 록허드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는 걸까. 긴장으로 쿵쿵대던 가슴이 금세 떨떠름한 기분으로 식어 버렸다. 거침없이 살아온 보람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아무리 규율에 엄격한 기사단이라 해도, 관심을 보이시는 숙녀분을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리에서 일어선 기사단장이 나와 록허드가 선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록허드를 옆으로 밀어내고 내 앞에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물에 반사된 것처럼 옅은 색의 벽안이 나를 보고 웃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젤로트 영애. 저는 황성근위대 2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브레이트 탈리야라고 합니다. 감히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씨익 웃는 입가가 매서웠던 첫인상과 달리 부드럽고 상냥했다. 누가 봐도 한참이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물론이에요. 카트리나라고 불러 주세요, 경.”

브레이트는 내게로 공손히 손을 내밀었고,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 위로 슬며시 손끝을 올렸다. 따뜻한 입술이 피부에 닿아 왔다.

“보기와 달리 훈련 직관은 매우 위험해서 영애께서는 바로 아래층인 2층으로 내려가 구경하셔야 합니다. 응접실 안쪽 창가에서도 훈련장이 훤히 보이므로 답답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기사 중에서 가장 큰 신장을 가진 자가 판시온 엔테라 경임을 꼭 기억해 두시고요.”

“그래도 될까요? 민폐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올게요. 저, 시간 많아서 괜찮아요.”

사실 안 괜찮다. 3시간이나 걸려서 황성을 방문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브레이트는 예의상 뱉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기사라서 그런 걸까? 마흔이 넘은 남자임에도 표정 하나하나에서 뜨거운 활기가 느껴졌다.

“아닙니다. 그런 걱정 마십시오. 카트리나 양처럼 귀여운 숙녀라면 기사단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도대체 나에 관한 어떤 소문을 들었기에 이리도 친절한 거야? 이제는 슬슬 걱정이 들었다. 알고 봤더니 망나니가 아니라 좀 모자란 열다섯 살로 소문이 난 걸까.

브레이트는 기사단장의 집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응접실로 날 안내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곰의 앞발처럼 커다란 손으로 록허드의 목덜미를 잡아챘고, 둘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 훈련장으로 떠났다.

난 삽시간에 홀로 남은 상태로 창밖을 내다봤다. 브레이트의 말대로 기사단의 멀끔한 훈련장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인물은 따로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가림막으로 구분된 옆자리에 내 또래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게 슬금슬금 다가가 소녀를 몰래 훔쳐봤다. 인어의 비늘처럼 오색으로 빛나는 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찰랑거렸다. 비록 머리칼에 얼굴이 가려 자세한 외양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 굉장한 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난 작게 헛기침을 하고 소녀 옆에 섰다. 내 키보다 한 뼘이 더 큰 소녀는 창가에 몸을 기대 훈련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녕.”

아마 이 순간을 위해 평생 치 용기를 다 소모한 듯싶었다. 나는 소녀의 귀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흠칫, 어깨를 떤 소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에 젖은 짙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역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눈이 마주치자 청초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누, 누구신가요?”

그 말에 나는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민망할 정도로 과장된 반응이었던 탓이다.

“너야말로 누구야? 여기에 나 말고 다른 애가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색이 바랜 드레스와 없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단출한 액세서리.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은 천사 같은 얼굴에 비해 다소 남루해 보였다. 좋게 봐 줘도 귀족은 아닌 것 같고, 이 성에서 일하는 어린 하녀겠지.

소녀가 깜빡이며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 보라색 눈동자에 당황과 공포가 가득했다.

……공포라고? 나한테 왜 공포를 느끼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와도 되는 곳인 줄 알았어요.”

하녀가 나보다 더 성에 어두울 수 있나? 귀족이라 하기에는 필요 이상의 저자세였고, 하녀라고 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아무렴 어때. 여자아이와 대화하는 게 너무 오래간만의 일이라 그런지 브레이트 앞에 섰을 때보다 더 가슴이 떨렸다.

“아마 들어와도 될걸.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애초에 이곳은 내 방도 아니었다. 나는 내심 떨리는 기분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카트리나 에젤로트야. 너는?”

“저, 저요? 영애께서 저 같은 아이의 이름을 들으셔도 될지…….”

벌컥.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응접실에 들어선 세 번째 인물은 까탈스러운 인상 위로 주름이 가득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실내를 크게 훑던 여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마지막 시선은 내 옆에 엉거주춤하게 선 소녀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귀가 아플 정도로 날이 선 외침이었다. 여인은 구두 소리를 크게 내며 가까이 걸어왔다. 경박하면서도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잖습니까? 제가 혼자 멋대로 돌아다니지 마시라고 했지요?”

“미, 미안해. 기사단의 훈련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도련님이 친히 초대를 해 주셨으면 얌전히 기다릴 생각을 하셔야지, 아가씨는 정말 제멋대로에 예의범절도 모르시는군요.”

말끝을 흐린 소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보이는 표정에 공포가 한층 짙어져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말 안 듣는 아이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구시면 저도 부인께 좋은 말을 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저,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얌전히 제자리에만 앉아 있을게. 정말이야.”

하녀가 아니라 공작 가문의 여식이었던 걸까.

방관자가 된 기분으로 여인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수증기가 한가득인 관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찼다.

“하아, 내가 답답해서 정말! 이래서 출신 모를 것들의 핏줄은……. 됐으니 이리로 오세요.”

힐끔, 나의 눈치를 살핀 여인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거칠게 손을 뻗은 그녀는 소녀의 팔을 잡아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출신 모를 것들의 핏줄. 단 한 문장일 뿐이었지만, 대강의 상황 파악이 가능한 표현이었다. 소녀는 아마 공작가의 사생아일 것이다. 초라한 행색은 가문 내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였고, 늙은 시녀마저 함부로 대하는 걸 보니 고용인에게도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얼굴, 가냘픈 목선,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 좋아.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모범적인 소녀의 상 그 자체야. 완벽해!

소녀는 네자르의 신붓감이 되기에 손톱만큼의 부족함도 없는 자태였다. 신분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사랑 앞에 사생아인 게 대수일까?

나는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얘, 너 이름이 뭐냐니까?”

시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소녀는 내게로 고개를 틀었다. 도축되는 소처럼 끌려감에도 수치심 하나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이윽고 덜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카, 카론 엔테라예요. 멋대로 방에 들어와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에젤로트 영애. 다음에 뵐 때는 꼭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뵐 때라는 건, 다음에 만나자는 소리인가? 되묻기도 전에 소녀의 그림자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 다름 아닌 카론 엔테라가!

“이건 또 보자는 거잖아. 그치? 그런 거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다음 만남까지 약속할 사이라면 가까운 친우와 다름없었다. 세기의 미녀가 될 소녀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친구가 되다니…….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들뜬 기분으로 응접실을 날아다녔다. 그 순간만큼은 판시온 경이고 뭐고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텅 빈 화병을 팔 안에 꼬옥 안았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대로 빙글빙글 돌다가 응접실을 벗어났던 것 같다.

복도를 가득 메우는 밀색의 가을 햇살. 창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따스한 기운. 그 사이사이로 부상하는 새하얀 먼지.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금발은 사자 갈기처럼 짙었고, 눈동자는 선명한 보라색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도 품 안에 가득한 안개꽃이 흔들렸다.

내가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할 동안 우리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이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서늘하지만 상냥한 목소리였다.

“화병에 꽂을 안개꽃을 준비해 오길 잘했군요.”

안고 있던 화병으로 남자의 안개꽃이 떨어진다. 내 턱 아래로 그윽한 꽃향기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나는 그 깊이 있는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누구일까. 이름을 묻기도 전에 남자는 등을 돌려 멀어졌다.

***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야외 훈련장. 록허드는 강하게 저리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훈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짧은 시간 잡혀 있었을 뿐인데 골절이 생긴 것처럼 뻐근하고 아렸다.

젠장, 오늘 밤은 당직인데 고생 좀 하겠군. 록허드가 설렁설렁 훈련장 중심으로 걸어갔을 때는 이미 일정의 끝물인 듯 시끄럽고 부산스러웠다. 그중 록허드를 알아본 기사가 땀이 뻘뻘 흐르는 얼굴을 들고 씨익 웃었다.

“네놈은 어떻게 된 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늦냐? 그러다 단장님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될 수가 있다는 걸 알아 둬.”

“눈치 없는 놈. 이미 정리되어 가는 과정인 거 안 보여?”

그리 말한 록허드는 다시 한번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고생하겠는데?

“눈치가 없는 건 너지, 인마. 네자르 전하께서 널 기다리다 지쳐 우리를 상대하시던 참이다.”

“네자르?”

어제저녁, 서류 검수로 오전 내내 시간이 없을 거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네자르는 자신이 정해 놓은 일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인물이 아니었다. 설마 벌써 일을 끝낸 건가?

자신과 같은 평기사, 루이의 말에 록허드가 훈련장을 살폈다. 점심 내기로 가볍게 대련을 하는 기사, 바닥에 쓰러져 가쁘게 숨을 들이켜는 기사, 수통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기사 등 다들 각양각색으로 오전 훈련의 끝물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그 안에 네자르는 없었다.

“안 보이는군. 그새 성으로 가 버렸나?”

그의 말에 루이가 고개를 저었다.

“가시기는 했지, 철없는 귀족 아가씨 상대하러. 한두 명이 훈련장 근처에서 계속 전하를 훔쳐보더라. 나가라고만 오십 번은 외친 것 같은데 말이지.”

“……여자를 상대하러 갔다고? 네자르가?”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은 치를 떨도록 싫어하는 게 딱 두 가지 있었다. 첫째, 득이 되지 않는 인물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 둘째, 말귀가 통하지 않는 머저리를 상대하는 것.

안타깝게도 네자르를 쫓아다니는 다수의 귀족 여식이나 영식 중에는 이 둘에 하나라도 속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보통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은 사람 하나를 졸졸 따라다닐 여유가 없는 자들이었고, 말귀가 통하는 사람은 애초에 쫓아다니지도 않았으니까.

“훈련에 방해가 되어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시더군. 적당히 상대해 주고 멀리 내보내시려는 거겠지. 하하! 몇 놈들은 웃통까지 벗어 던지며 어필하기에 바쁘던데?”

“내 말은 그런 인간적인 배려를 하는 것부터가 이상하다는 거야. 하아…, 어제까지는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예민하더니만.”

네자르는 예민하다. 특히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 이틀 잠에 못 들었을 때는 그 예민함이 배가 됐다. 그는 요 며칠간 황성의 인력을 재배치한다는 이유로 밤을 새워야 했고, 덕분에 최근 황태자 성의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우울하고 어두웠다. 날이 서 있을 때의 네자르는 보름 동안 굶은 설범과 비슷했다. 제 구역으로 허락 없이 들어온 침입자에게,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는 설범.

그런 시기가 오면 상대하는 록허드도 심신이 빨리 지쳤다. 네자르 본인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예민함이 극한에 다다를 때면 하던 일을 전부 내팽개치고 황성에서 벗어나곤 했다.

그렇게 너덜너덜한 상태로 마차에 올랐을 때 네자르가 향하는 장소는 대개 한곳이었다. 에젤로트 백작가 1층에 마련된 작고 아담한 응접실. 그는 보란 듯이 에젤로트 성의 정문으로 들어가 곧장 응접실로 향하고는 했다. 꼭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아, 마침 오시는군.”

루이의 말에 록허드가 몸을 틀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벼운 차림을 한 네자르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식 기사와 비견될 만큼 탄탄한 근육의 움직임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늘 그렇듯 곧고 당당한 걸음이 훈련장을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온다.

록허드는 그를 이렇게 한 발자국 멀찍이 서서 바라볼 때마다 기이한 경외심을 느꼈다. 네자르는 마치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 빚어진 고고하고 단단한 도자기 그릇 같았다. 밤을 꼬박 새우고도 기사들과 대등하게 훈련하는 걸 보면, 태풍이 몰아쳐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도자기였다. 성격이 조금 더럽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씨익 웃는 네자르가 록허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게으름에 찌든 귀족 나리께서 오셨군.”

그에 록허드는 떨떠름한 얼굴로 네자르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네자르의 성격은 조금이 아니라 매우 더러웠다.

“브레이트 경은 왜 아직도 널 내보내지 않는 거냐? 약점이라도 잡았어?”

“잊었나 본데, 단장님은 겨우 금화 몇 닢에 좌지우지될 남자가 아니야.”

“이건 윤리 의식이 아닌 기사단 군기의 문제지. 그렇지 않나, 루이 경?”

“백번 옳은 말씀이십니다.”

작게 웃은 네자르가 숨을 깊게 내쉬고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가까이서 보니 평소보다 민낯이 창백한 게, 몸이 좋은 상태는 아닌 듯싶었다. 루이가 식수를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록허드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붙이든가. 그렇게 다 죽어 가는 안색으로 몸을 움직이는 이유가 뭐냐?”

록허드의 말에 힐긋 시선을 돌린 네자르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털었다. 결 좋은 흑발이 눈앞에서 물결처럼 요동쳤다.

“너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봐. 애초에 알아보는 것부터가 신기하지.”

“어이, 황태자 전하.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설마 체력 좋은 걸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네자르는 그럴싸한 대답 없이 머리를 털었다. 평소처럼 한마디 건넸을 뿐인데, 조금 지쳐 보일 뿐이었던 그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식어 버렸다. 그에 록허드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자르가 읊조리듯 말했다.

“어제저녁, 황제 폐하께서 북벌을 입에 담으셨다.”

역시 좋지 않았어. 그것도 상당히.

북벌이란 소리에 록허드가 팔을 내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던 것 같기도 했다.

“최근 국경 지대에서 이브라암 남작이 행방불명된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시려는 것 같더군.”

북벌 전쟁. 제국의 북쪽에는 작은 도시 수준 크기의 왕국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지만 카발 제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그 따개비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왔다. 그들은 북벌 전쟁을 위해 타국의 눈초리를 받아 가면서 군사력을 꾸준히 강화해 오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전쟁이 발발한단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록허드를 비롯한 황성근위대도 이미 몇 년 전부터 전술 및 실전 훈련을 강화해 왔던 탓이다. 다만 그것이 네자르가 무리해서까지 기사단을 방문할 이유로는 보이지 않았다.

“너…, 설마 출정할 생각은 아니겠지?”

제국의 후계자가 전쟁터로 나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고, 록허드를 또렷이 응시하는 네자르의 얼굴은 이미 무언가를 결정한 듯 확고하고 초연해 보였다.

록허드는 입을 닫았다. 마침 저 멀리 나가 있던 루이가 네자르에게 수통과 수건을 건넸다.

“이제 곧 훈련이 마무리될 분위기입니다.”

어깨를 두들기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네자르가 고개를 주억였다.

“나도 이만 가 봐야겠군. 한데 오늘은 어쩐지 판시온 엔테라 경이 안 보이는 것 같아. 아니면 내가 못 찾은 건가?”

물에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네자르의 시선이 훈련장을 다시 훑는다. 케이트도 그렇고, 오늘따라 어째 판시온 엔테라를 찾는 인물이 많았다.

“아, 판시온 경은 잠깐 본부로 들어갔습니다. 제 기억에는 여동생이 찾아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응접실을 장식할 꽃을 준비해 오신 걸 보면 아마 2층에 계실 겁니다. 여동생분과는 그곳에서 만나실 예정인가 봅니다.”

루이가 판시온 경의 부재 연유를 열심히 설명할 동안, 열기로 붉게 올라와 있던 네자르의 얼굴 위로 까만 그림자가 졌다. 물을 입에 머금고 뱉어 내던 네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록허드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서 몸을 돌렸다. 어느새 땀내 나는 남성들 사이에 유독 말끔해 보이는 남자가 끼어들어 있었다.

“절 부르셨습니까?”

판시온 엔테라였다. 잠시 눈을 크게 떠 판시온을 위아래로 훑은 네자르가 말했다.

“가족을 만난다더니 금방 도착했군. 여동생과 만난 것 맞나?”

“예, 성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기에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판시온의 곁에선 선선한 꽃향기가 풍겼다. 담백하고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진 그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차례대로 루이와 록허드의 눈을 쳐다본 판시온은 마지막으로 다시 네자르를 응시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이 급한가?”

“곧 전체 기사단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록허드 경, 자네도 회의에 참석해야 하네.”

뜬금없는 부름이었다. 록허드는 기사단 내에서도 장신에 속하는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판시온을 올려다봤다.

“저 말입니까? 기사단 회의는 부기사단장부터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브레이트 단장님께서는 방금 황성근위대 2기사단 단장 직위에서 물러나셨다. 대신 북벌 원정대의 총책임자를 맡게 되셨지. 오늘부로 2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은 록허드, 자네다.”

“……예?”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었다. 아무리 록허드가 전도유망한 기사라 해도 그렇지, 수십 명의 하늘 같은 선배를 제치고 부기사단장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마 브레이트 그 늙은이가 이런 식으로 날 묶어 두려는 건가?

판시온은 말을 마친 즉시 등을 돌려 황성근위기사단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머릿속을 정리한 록허드가 마른세수를 하며 루이와 네자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북벌이란 소리에 루이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네자르의 표정은 한겨울의 얼어 버린 호수처럼 평온했다. 록허드는 미리 언급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괘씸하게 느껴졌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군. ……네자르, 미안한데 만난 김에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기각.”

칼 같은 거절에도 록허드는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었다. 그를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 뻔뻔함으로 중무장하는 것이 필수다.

“괜찮으면 돌아가기 전에 2기사단 본부로 가 줘. 케이트가 2층 응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순간 틀에 부은 밀랍을 덮어쓴 듯, 한결같던 네자르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주 잠시의 일이었음에도 록허드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네자르의 유일한 취약점이 바로 자신의 누이였으므로.

“케이트라고? 그 애가 여기에는 왜 와 있어?”

“그건…….”

차마 네자르의 면상에 대고 판시온 엔테라 경을 보고 싶어 하더라, 라고 답할 수 없었다. 그건 애먼 불똥이 자신에게 튈 수도 있는 멍청한 대처였다. 록허드는 짐짓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을 끈질기게 쳐다보는 검홍색 눈동자가 가을의 햇볕보다 따가웠다.

“별 이유 있겠냐. 내가 훈련하는 모습이 궁금했나 보지. 보다시피 나는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관계로 챙겨 주지 못할 것 같다. 너는 그래도 명색이 약혼자잖아? 부탁한다.”

답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돌려 판시온의 뒤를 쫓았다. 케이트에게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충고를 꼭 남겨야겠다고 다짐하며.

***

하마터면 첫눈에 반할 뻔했어.

오직 그 감상이 응접실로 돌아온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품에 안고 있던 화병과 그 위에 공작 깃처럼 펼쳐진 안개꽃을 내려다봤다.

키가 큰 남자였다. 기사임이 분명했는데, 분위기는 마치 신전의 사제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다. 그처럼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잔상같이 남는 사람은 네자르 이후 처음이었다. 전생을 기억해 낸 여파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걸까. 그런 것치곤 여전히 네자르의 외양만큼이나 살 떨리게 느껴지는 존재감은 없었다.

테이블 위에 화병을 내려놓고 다시 창가로 향했다.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어느새 훈련장은 모래바람만 남겨진 채 텅텅 비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설마 록허드의 일정이 전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없이? 나만 덩그러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 근처로 걸어갔다. 하루바삐 여자아이를 꼬시기 위해선 다과회 예절 스킬을 익혀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타이밍이 늦어 판시온 경을 만나지 못한 이상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물론 훈련이 공개되는 시기에 맞춰서!

나는 무겁고, 거대하고, 두꺼운 양 문을 밀어냈다. 온몸을 사용해서 열과 성의를 다해 밀어내는데, 느릿하게 밀리던 나무문이 어느 순간 훅 밀려났다. 그렇게 중심을 잃은 내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 따뜻한 무언가가 급히 내 팔을 잡아 왔다. 나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 품에 떨어져 옷 위로 코를 박아야 했다. 태양에 젖은 흙과 땀 냄새가 확 덮쳐 왔다.

“아…, 죄송합니다.”

하필 록허드가 있는 기사단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나는 2기사단 단원일 것 같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떼어 내려고 해도 강한 힘이 날 꽈악 끌어안았다.

“저기요, 이것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내가 왜 누군지도 모를 남정네한테 안겨 있어야 하는 거야?

“저기요.”

조르고 졸라 성립된 약혼이라 해도 내게는 젊고, 유능하고, 잘생긴 약혼자가 있었다. 비록 내 처지가 그 약혼자의 애인을 찾아 헤매는 기묘한 상황이라 해도! 애인을 이용해 약혼을 파기시켜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나에게는 네자르밖에 없는데!

“사람 말이 안 들리세요? 제가 어려 보여도 약혼자가 있는 몸이거든요? 그쪽이 함부로 손을 댈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대처가 꽤 쓸 만하네.”

아는 목소리였다. 남자의 품에 박혀 있던 고개를 확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기다란 속눈썹 사이에 까맣게 그늘진 눈동자가 보였다. 귀공자처럼 새하얀 뺨이 열에 올라 불그스름한 모습도, 굴곡 하나 없이 곧은 콧대도, 짧고 단단한 턱도,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전부 네자르의 것이었다.

넋을 빼고 올려다보기만 하자 그의 입술이 작게 호선을 그렸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빠졌어. 네 약혼자가 나라는 사실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따라 해 봐. 제 약혼자는 네자르 황태자입니다. 그러니까 치대지 말고 썩 꺼지세요.”

그의 차림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늘 목 아래까지 꼼꼼히 잠겨 있던 셔츠의 단추와 손목을 덮고 있던 소매의 커프스가 제 모습을 잃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시선 바로 위에 보이는 쇄골이 내 정신을 혼돈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아, 안 돼. 이런 건 정신 건강에 안 좋아. 함부로 보는 게 아니야.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봤자 여전히 네자르의 가슴팍 안이었지만.

“해 보래도?”

“싫어. 치대지 말고 썩 꺼지라니, 넌 네 약혼녀가 싸가지 없다고 소문나면 좋겠어?”

“이미 네 악평은 퍼질 대로 퍼져 있어. 여기서 더 퍼져 봤자 본래 인상에는 기별도 안 갈걸.”

그리 말한 네자르는 날 안은 팔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동시에 사교계에 유영하고 있을 나에 대한 가지각색의 소문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행이야. 악평이라면 적어도 모자란 애라고 소문이 돌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네자르의 몸을 다시 밀어냈다. 그러나 제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몸은 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진짜 짜증 나! 나는 결국 숨만 헐떡이며 가만히 팔을 떨어뜨렸다. 목 아래서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작게 떨렸다.

“네자르.”

“응.”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나는 말한 기억이 없는데…….”

“다 아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나한테 아무 말 없이 움직일 생각은 하지도 마. 이상한 짓은 더더욱.”

이상한 짓이라니? 나는 네자르의 말에 펄쩍 뛰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찔렸던 탓이다.

“이, 이상한 짓 안 했거든? 나는 그냥 록허드가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거야. 참 나, 누가 보면 몰래 음모라도 꾸미는 줄 알겠네!”

“록허드가 아니라 판시온 엔테라를 만나러 온 거겠지. 하루 종일 릭과 록허드를 욕하기 바빴던 네가 잘도 쫓아서 오겠다.”

혀 차는 소리가 팔 아래로 묻힌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열기가 뜨거웠던 그의 셔츠와 살갗이 조금씩 식기 시작했다. 커프스가 셔츠에 스치는 소음, 네자르의 어깨 옆으로 떨어지는 노란 햇빛, 여전히 크고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턱 아래로 가득했던 안개꽃의 향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후였다. 나의 세상은 다시 그의 냄새로 가득 찼다. 문득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확실히 만나기는 만났나 보군. 하지 말라 해도 끝까지 해내려는 끈기 하나만은 칭찬해 주지.”

돌연 몸을 가두던 팔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왜 마음이 변했나 싶어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네자르의 눈은 이미 내게서 떨어져 응접실 안쪽을 향해 있었고, 그에 나는 네자르의 시선이 머문 풍경을 찾아 헤맸다. 사실 헤맬 필요도 없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화병에 꽂힌 안개꽃이었으므로.

딱딱하기만 한 응접실에서 유일하게 생생함이 가득했던 탓일까? 네자르의 눈은 안개꽃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제안은 생각해 봤어?”

말과 함께 꽃에서 시선을 뗀 네자르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제안이라면 황녀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릴 가리키는 것일 테다. 내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인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았다.

“아니, 억지로 만들어지는 친구는 필요 없어. 그건 친구가 아니잖아.”

내가 생각해도 참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거절이었다. 그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네자르가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리 보니 바람에 흐트러진 흑발도 차분하게 뒤로 넘긴 것만큼 잘 어울렸다. 모래바람에 더럽혀진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네자르는 황태자가 아니라 마치 검을 휘두르는 기사 같았다.

내게로 손을 뻗으려던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셔츠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내 이마에는 닦아 낸 손바닥이 아닌 손등을 가져다 댔다. 이 무슨 바보 같은 행동이야? 그럴 거면 차라리 손등을 닦든가.

“케이트, 너 정말 어디 아픈 거냐? 왜 자꾸 답지 않은 소릴 해? 예전에는 무슨 일만 있어도 도와 달라고 투정 부렸으면서.”

“나도 이제 열다섯 살이야. 어린아이가 아니라구.”

내 진지한 대답에 그가 픽 웃었다.

“그럼 내 다리에 매달려 약혼 서약서를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던 꼬마 아가씨는 대체 어디의 누구지?”

네자르의 손이 내 이마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벌을 서는 아이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손을 거두고, 나와 눈을 마주치는 일련의 과정이 맞춤 정장처럼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래서 조금 겁이 났다. 내가 부린 투정이 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이리도 자주 입에 담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없던 일로 할까?”

목소리가 조금 떨려서 나왔지만, 아닌 척 재빠르게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네자르, 그렇게나 내가 눈에 차지 않으면 그냥…….”

네자르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내게 턱짓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해도 돼. 나는 괜찮아.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난다 해도 다 받아들일게.”

약혼이 무산된다면 나는 여자 친구를 만들고, 영식의 이름을 외우거나, 자수를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되지만…….

말과 달리 내 입꼬리는 무거운 바위가 매달린 것처럼 아래로 축 처지기 바빴다. 네자르는 이미 내 우울한 심정을 충분히 파악한 것 같았다. 진한 눈매를 얇게 떠 다그치듯 말했다.

“내가 분명 어제도 말했다만, 너는 네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해.”

그리고 이번에는 내 한쪽 손을 당겨 와 잡았다. 방금 전 셔츠로 닦은 그 손이었다.

“케이트, 방금 한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어?”

책임질 수 있냐고? 진짜 파기해도 되냐는 물음인가?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진짜 약혼이 없던 일로 되는 거야? 나야 대환영이었다. 네자르와 결혼하지 않으면 아이도 가질 수 있고, 노년을 쓸쓸히 보낼 일도 없고, 당장에 모든 장점이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그 밖에 좋은 일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으니,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일 심산이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는데!

어느새 내 양 뺨을 강하게 쥔 네자르의 손이 위아래로 흔들어지길 방해하고 있었다. 아니, 물어봤으면서 정작 고개를 못 끄덕이게 하는 건 뭐야?

“좋아. 못 진다고 고백했으니, 하해와 같은 마음을 지닌 네자르 전하께서 없던 일로 해 주지. 다음에 또 그런 말을 하면 아주 혼날 줄 알아라. 알았어?”

“그런 게 어디 있어!”

“됐으니까 빨리 고개 끄덕여.”

서늘해진 표정에 급히 고개를 주억였다. 네자르가 손에 힘을 뺀 덕에 아주 순조롭게 목이 움직였다. 진짜 어이없어. 누가 황태자 아니랄까 봐 아주 제멋대로였다.

무릎을 굽힌 상태로 시선을 맞추던 네자르는 곧 내 손을 당겨 잡았다. 이전과 달리 다섯 손가락 모두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우리는 사람 없이 고요한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네자르는 내 손을 꽉 잡지 않는다. 날이 춥던, 덥던 언제나 그랬다. 가끔은 잡는 게 아니라 걸쳐 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손바닥이나 검지를 꽈악 쥐더라도, 그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늘 나만 네자르의 손을 잡았다.

유리창 바깥의 하늘은 높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새파랬고, 건물 바로 옆에 자라난 단풍나무는 어느새 꼭대기부터 조금씩 붉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완연한 가을임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저건 꼭 네자르의 눈동자 같네. 불긋한 단풍나무의 끝자락에서 시선을 못 뗄 동안에 네자르가 높낮이 없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5년쯤 흐르면 네 정수리가 내 어깨에는 닿아 있을까?”

그 말에 턱을 들어 네자르를 쳐다봤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탓에 눈이 맞닿지는 않았지만, 그가 날 의식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잘난 옆 선에 두고 있던 눈길을 서서히 내렸다. 검술 훈련을 취미로 둔 남자답게 셔츠 너머로 부드러운 근육의 움직임이 보였다. 문제는 턱을 살짝 올리는 게 아니라, 아주 보란 듯이 올려야만 보인다는 점이었다. 내 시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부위라곤 기껏해야 네자르의 딱딱한 가슴과 명치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 나 놀려? 그동안 네자르 너도 계속 클 거 아니야. 나 같은 난쟁이 똥자루는 평생이 지나도 네 어깨에 못 닿을걸.”

직접 말하려니 다소 우울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전생에서도 내 신장은 주위 사람들에 비해 항상 작았다. 그래도 아버님과 형제들의 키를 생각하면 한 가닥의 희망이 존재했다. 맞아, 키는 유전이잖아. 난 더 클 수 있어!

“그건 갑자기 왜?”

네자르는 키가 크고 어른스러운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그럴 만했다. 그는 열아홉 살이고,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땅딸막한 내 나이는 이제 겨우 열다섯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내 또래의 여자 친구를 사귀어 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잖아? 갑작스럽게 등장한 난관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괜찮아. 길게 보면 돼. 열아홉이 되기까지 이제 겨우 4년……. 아니, 4년이나 남았어? 나는 오늘부터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 느려 터진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흐를 테니까.

“내 케이트가 앞으로 훌쩍 클 거라 생각하니 조금 아쉽고 그러네.”

그의 표현에 나는 질색을 하며 어깨를 떨었다.

“어휴, 그놈의 ‘내 케이트’는 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소리야? 록허드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 이름 앞에 자꾸 소유격 좀 붙이지 마.”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걸음을 멈춘 네자르가 날 경악이 서린 눈으로 쳐다봤다.

“네가 소유격이라는 단어도 안다고? 대체 언제 책을 펴 본 거야?”

이제껏 나를 어느 수준으로 생각해 왔는지 아주 잘 파악되는 문장이었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잡고 있던 네자르의 손을 내던졌다.

“알거든? 하여간 함부로 붙이지 마.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거야.”

“함부로는 뭐가 함부로야? 네가 여덟 살 무렵부터 내 뒤를 얼마나 따라다녔는지 알기나 해? 넘어져서 다치면 내가 업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면 산딸기를 따 주고, 떠날 때쯤 되면 가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니 황성에 돌아가지 못한 날도…….”

“으아악! 몰라, 몰라! 그만해!”

낱낱이 공개되는 흑역사에 귀를 틀어막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패기 좋게 홀을 건너 성 밖까지 달려갔지만, 록허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목적지 없는 질주를 멈추어야 했다.

등을 돌리자 하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네자르가 보였다. 재킷과 베스트 없이 너덜너덜한 셔츠만 걸친 탓에, 잘나가는 양아치가 뒷골목을 누비는 그림 같았다. 심지어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은 록허드의 비열함과 판박이 그 자체였다. 친하면 서로 닮는다더니, 둘이 딱 그 꼴이었다.

“알겠어? 케이트 넌 내가 반을 키운 거야. 그런데도 어디서 은혜를 모르고 함부로 소유격을 붙이라 마라냐?”

기사단 본부 앞마당의 정원은 꽃송이 하나 없이 너른 풀밭과 다듬어진 나무로 가득했다. 내가 초록빛 만발한 이파리의 향을 맡는 동안 네자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뭇잎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서 살랑거렸다.

“혼자 뛰어다니다가 또 길 잃지 말고. 어서 손잡아.”

뚱한 얼굴로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네자르의 말처럼 제멋대로 돌아다니다 미로 같은 정원 속에서 길을 잃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네자르를 기다리던 그때 그 순간으로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나, 네자르의 성이면 몰라도 이 길은 잘 몰라.”

“네 집.”

“바쁘다고 들었는데 나 데려다줘도 돼?”

내 물음에 네자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없는 시간 힘들게 내서 데려다주는 거야. 그러니까 감사히 여겨라.”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누가 보면 제발 같이 가 달라며 손발을 싹싹 빈 줄 알겠네.

“그냥 나 혼자 가면 안 돼?”

“응.”

더는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 앞을 봤다. 네자르가 나의 작은 보폭에 맞춰 준 덕에 숨을 헐떡일 일은 없었다.

에젤로트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해가 머리 위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식사를 거른 탓에 배를 곯아 성안으로 뛰듯이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네자르는 에젤로트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 없었는지, 식사하고 가라는 말에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는 내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마차에 몸을 실어 다시 에젤로트를 떠났다. 난 점점 멀어져 점이 되어 가는 황성 마차를 응시하다 조용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충만함과 동시에 짙은 허무함이 머릿속을 덮쳐 순식간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욕조에 발을 넣기 전까지, 그에게서 묻어 온 흙먼지 냄새가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급격하게 가라앉는 어투로 데이지를 불렀다.

“데이지, 좋아하는 사람을 덜 생각하는 방법은 없을까?”

가림막 너머에서 침실을 정리하던 데이지가 대답했다.

“덜 생각하는 방법이요? 으음, 몸이 멀리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멀리 떨어지라고? 얼마나 멀리?”

“적어도 마차로 이틀 이상은 걸려야 하지 않을까요?”

마차로 이틀 이상이라니, 제도와 에젤로트를 열 번 이상 오가도 될 거리였다. 나는 데이지가 제시한 방책에 실망하며 턱을 수면 바로 아래까지 담갔다.

“다른 건?”

“다른 거라, 글쎄요.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을 쉬이 잊기란 힘들어요. 그래서 다들 고생하는 게 아닐까요?”

그럼 그냥 잊힐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는 거잖아. 지금의 내게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욕조에 머리를 기댔다. 역시 먼저 좋아하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였다.

***

며칠 후.

오전부터 퍼부은 비에 신발 아래 카펫마저 눅눅한 느낌이다. 나는 내 방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신을 집어 들었다. 구김 없이 말끔한 봉투에 박힌 인장은 거친 깃털을 가진 독수리였다.

“이건 뭐야?”

내 물음에 차를 내오던 데이지가 대답했다.

“아, 그 편지는 아가씨께 도착한 것이에요. 엔테라 가문의 카론이란 분이 보내셨던데, 아는 분이신가요?”

“카론 엔테라?”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곧장 인장을 떼어 편지 봉투를 열었다. 개인적인 연유로 서신이 도착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받았던 첫 번째 서신은 열셋 무렵, 귀족 자제라면 누구나 받게 된다는 황립 아카데미 입학 권유서였다. 그 외에는 카트리나 에젤로트를 수신자로 한 서신 따위, 단 한 번도 도착한 적 없었다. 나의 개별적인 사교 생활은 줄곧 암담했으니까.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께…….”

차분히 서신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동시에 카론 엔테라라는 인물이 록허드를 따라갔을 때 만났던 소녀라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단순히 얼굴 고운 사생아라 여기고 있었는데, 카론의 필체는 에든만큼이나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운 단어가 없었고, 알아보기도 매우 쉬웠다.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이것저것 끌어다 쓴 귀족들 특유의 허세 가득한 문장이 아니었다. 으음. 아무래도 소양 수업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무어라 쓰여 있나요? 아가씨께 제대로 된 편지가 도착한 건 처음이라 제가 다 떨리네요.”

마지막 한 줄의 마침표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편지지를 접었다. 뭔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날 초대했어.”

“세상에! 정말이세요? 엔테라 공작가의 다과회예요? 아가씨를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보다 데이지가 더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다. 아니, 꿈을 꾸는 수준이 아니라 그 안에서 헤엄을 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엔테라 각하께 따님도 있으셨나……. 저는 아드님만 두 분이 계시는 줄 알았어요.”

“네 말이 맞아. 카론은 공작 부인의 친자식이 아니야. 이 편지도 다과회의 초대장이 아니라, 단순히 나 혼자만 초대한 거고.”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지가 오늘로 벌써 사흘째. 갈고닦아 온 사교 예절을 펼칠 무대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그 무대가 비록 협소한 접대실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작은 계단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야 하는 법. 카론과의 일대일 다과회를 시작으로 뉴 카트리나의 활기찬 미래를 그려 나가는 거야!

“음음, 좋아. 역시 그날 이름을 알려 주길 잘했어.”

“백작 부인께서 노하지 않으실까요?”

“어머님이?”

“그렇지 않아도 늘 아가씨의 사교 활동을 걱정하시던 분인데,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 한들 사생아라면…….”

데이지의 말간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그에 나는 머릿속으로 ‘사생아의 초대장을 받았다.’라고 어머니에게 알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노력해도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의 초대를 받았다는 점부터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던 탓이다.

“글쎄, 이런 일로 노하실 분은 아니셔.”

아마도. 마음 한구석은 아니라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당일 오전에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그때는 몰래 나가야지 어쩌겠어?

***

여자 친구 사귀기 대작전을 실행할 첫날이 밝았다. 이틀 내내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가슴 떨리도록 고대해 온 순간이었다. 서신을 받고서 엔테라를 방문하기로 한 오늘까지, 내 머릿속에는 카론과 마주 앉아 하하 호호 웃는 그림이 수십 번 재생되었다.

“록허드는 오늘도 안 들어왔어?”

“둘째 도련님께서는 늦은 새벽 중에 귀가하셨습니다. 오늘은 푹 쉬실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록허드가 나흘 만에 돌아온 점을 고려했을 때, 판시온 역시 엔테라로 귀가했을 확률이 높았다.

좋아. 그렇다면 오늘의 목표는 카론과 평범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동시에 엔테라 성에 있을 판시온 경을 훔쳐보기야. 다른 건 필요 없고 얼굴만 확인하면 돼. 아니, 조금 더 신경 써서 몸까지만. 이제는 필요가 아니라 오기에 가까웠다. 오늘은 반드시 판시온 경을 보고야 말 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록허드를 쫓아갔던 그날의 행동이 참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정작 록허드는 요 며칠간 일에 치여 성에 돌아오지 못했어도.

긴장돼서 머리가 어떤 모양으로 말려 가는지, 옷은 또 나에게 얼마나 어울리는지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데이지가 만져 준 그대로 어머니의 방을 향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엔테라 공작가의 카론 엔테라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그래서, 케이트 네 말은 엔테라 성에 지금 그 꼴로 간다는 거니?”

놀랍게도 어머니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난 범위였다. 나는 눈을 깜빡깜빡 뜨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드레스 차림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팔을 들어 이마와 정수리 근처를 더듬었다.

“괜찮은데요? 데이지도 요정처럼 어여쁘다 했는걸요.”

“데이지 그 애가 귀부인의 사교 활동을 도와 봤니, 뭘 했니. 모시는 아가씨가 친구 하나 없는 방구석 화초인데 요즘 유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겠어? 지금 네 꼴은 7년 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이야. 요즘 애들은 머리 위에 하나라도 더 올리려 하는데, 네 머리 장식은 고작해야 나비 모양 사파이어와 금장식이 전부구나.”

명치가 다 아릴 정도로 뼈아픈 악평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어머니의 말에 틀린 소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미안해, 데이지. 친구 없는 아가씨를 모시게 해서……. 내가 참 죄가 많구나.

“그래도……. 뭐, 썩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게다. 카론 엔테라라는 아이가 바깥 아이라고 했니?”

바깥 아이라면 사생아를 뜻하는 걸까.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면 굳이 있는 것 없는 것 다 걸치고 갈 필요는 없지. 좋은 처우를 받고 있지 않다면 지금 네 모습이 더 나을 것 같구나. 됐다. 괜히 뭘 해 보려다 더 망치지 말고 그냥 그 상태로 가려무나. 돌아오면 드레스와 보석부터 맞춰야겠어.”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졌다. 뛸 듯이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얼떨떨했다. 마치 가도 무시당할 거란 어투로 말씀하시다가, 돌연 그냥 가라고 말을 바꾸시니 정말 가도 되는 게 맞는 건지 헷갈렸다. 그렇다고 안 가면 또 언제 기회가 올까. 나는 공손히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예의는 바라지도 않으니 지금처럼만 굴어라. 또 사고 쳐서 돌아오지 말고.”

방문을 닫자마자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성을 벗어났다. 마음 같아선 날아가고 싶었지만, 혹여나 머리와 드레스가 망가질까 함부로 뛸 수가 없었다. 데이지는 마차에 올라타는 내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양손을 그러쥐었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세상에, 우리 아가씨가 친구를 만나러 나가시다니……. 제가 지금 꿈을 꾸나요?”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 너 때문에 지금 엄청 쪽팔려.”

하지만 내 옆에서 7년 가까이 버텨 온 데이지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철면피 계의 일인자였다. 그러므로 내 싫은 소리가 그녀의 귀에 제대로 들렸을 리 만무했다.

“아가씨의 귀가를 대비해서 따뜻한 스콘을 구워 놓을게요. 아, 아니지……. 맛있는 디저트 많이 드시고 오셔서 스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마셔요! 차갑게 식혀 놓을 테니 들어와서 드실 생각 마세요!”

누가 보면 먼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줄 알겠네. 나는 신경질적으로 마차의 벽을 쾅쾅 쳤다. 데이지의 주책맞은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간 옛날 성질머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제발 마차 좀 출발시켜 줘!”

엔테라 공작가는 에젤로트 백작가와 함께 제국의 동부를 책임지는 가문이다. 유서가 깊은 만큼 보수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별에 상관없이 무조건 첫째가 후계자로 결정되는 대개의 귀족 가문과 다르게 오직 장남만 가주가 될 수 있었다.

엔테라 공작가의 특징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엔테라의 성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는데, 바로 엔테라의 성이 황성에 비견될 만큼 고풍스럽단 점이었다.

“죄송합니다, 에젤로트 영애. 카론 아가씨께서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더불어 방금 하나 더 깨달았다. 엔테라 공작가와 카론, 둘 중 하나에 분명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직도 준비를 못 했다고?”

기분이 상한 티를 여실히 내며 턱을 들어 올렸다. 일부러 신경 써서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도착했건만,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마부를 채근했던 내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제는 왜 늦느냐는 거지. 네자르가 그랬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 숙인 시녀를 훑어 내렸다. 카론이 늦장을 부린 건지 고용인의 괴롭힘인지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 같은데 말이야.

“뭐…, 어쩔 수 없지. 어디서 기다리면 될까?”

“지금 당장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답에 고개를 저었다. 날도 좋은데 굳이 실내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성 앞의 정원을 구경하고 싶어. 괜찮아?”

걸어오면서 맡은 국화꽃의 향이 아직도 코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보통의 성은 여름이나 봄에 맞춰 정원을 가꾸기 마련인데, 이곳은 에젤로트와 마찬가지로 가을에 가장 향이 짙은 것 같았다.

다행히 시녀는 내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둘 준비되는 다과를 뒤로하고 단조로운 풍경의 국화꽃 정원 속으로 발을 디뎠다. 차로만 맡았던 그윽함을 몸소 느끼니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사박.

그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시녀인가 싶었지만, 급하지 않고 무게감 있는 소리가 적어도 성의 고용인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들었으니 상대방 역시 내 인기척을 느꼈을 테다. 그리 생각하면서 정원의 바깥을 서성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선 자리로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자가.

“……안개꽃?”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내 가슴 아래를 내려다봤다. 화병에 담겨 있던 안개꽃을 찾으려 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맨몸인 상태로 나왔으니 무언가 쥐고 있을 리 만무했다. 내 손과 가슴팍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황성에서 뵈었던 분이로군요. 누구십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네자르보다 더 낮고 어두워 마치 늦은 새벽의 지하를 기는 듯했다. 나는 멍하니 남자의 농익은 보랏빛 눈동자를 쳐다봤다. 겨우 네 걸음 앞에 서 있었기에 눈매 아래에 그려진 까만 점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저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판시온 엔테라라는 사실을. 눈앞에 판시온 경이 있다니! 몰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며칠 전에 마주한 얼굴임에도 처음 만난 듯 생경했다. 부드럽고 단정한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형. 짙지도, 옅지도 않은 피부. 길고 딱딱한 눈매에 단단한 몸집까지.

이리 보니 카론과 닮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제비꽃 같은 눈동자라든지, 여름 햇볕 같은 부드러운 냄새라든지. 외모는 조금 다를지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매우 유사했다. 역시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다 있었어. 판시온은 록허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진정한 기사 그 자체였다.

“저는 카, 카론 엔테라 영애의…….”

“아, 기억났습니다. 카론이 초대했다던 에젤로트 가문의 영애가 바로 당신이었군요.”

바로 그거예요! 당장 손뼉을 치며 외치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입을 열 때마다 더듬더듬 말이 떨렸다.

“마, 맞아요.”

덕분에 모자란 애처럼 목소리가 저 멀리 튀어 버렸다. 젠장. 나는 부끄러움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럼 황성에 계셨던 것도 록허드 경 때문이었나 봅니다.”

판시온은 본인보다 한참 어려 보일 나에게도 꾸준히 존칭을 사용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올곧은 남자가 존재했다니? 내 주변의 남자라곤 늘 제멋대로에, 놀리기 바쁘고, 애 같은 사람뿐이었는데.

나는 차분히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네, 록허드 오라버니가 훈련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찾아갔었어요. 며칠 고민하다 결정한 건데, 하필 훈련 일정이 비공개인 날이었죠.”

판시온이 작게 웃었다. 누가 봐도 형식적인 웃음이었다.

“그는 제국의 수많은 기사 중에서도 유독 특출한 기사입니다. 그러니 영애께서는 록허드 경을 자랑스럽게 여기셔도 됩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한 번쯤 록허드 경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금방 알게 되실 테니까요.”

록허드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내가 록허드를 자랑스럽게 여길 일은 죽어도 없을 것이다. 그건 릭과 에든도 마찬가지였다. 음, 에든은 다를 수도 있고.

차마 꼭 잡아 보겠다고 대답하지 못한 난 마땅한 대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대화가 어색하게 끝나지 않도록 말을 잇고, 이성적이면서도 숙녀다운 대답을.

“그렇군요. 한데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록허드 오라버니가 안 계시네요. ……저, 괜찮다면 경의 손을 대신 잡아 봐도 될까요?”

유리창에 금이 가는 것처럼 판시온의 표정이 살짝 어긋났다. 그는 헛것이라도 들은 양 풀어진 얼굴로 날 응시하다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제 손은 상처도 많고 굳은살도 박여 있어 보기 흉할 텐데요.”

그리 말하는 판시온의 기색은 무언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이번에도 의사 전달에 실패한 건가? 하나 그는 기사의 손에 박힌 무수한 훈련의 흔적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록허드의 이름을 언급하며 꼭 손을 잡아 보라던 말도, 단순히 할 말이 없어 내뱉은 소리 같지는 않았다.

나는 단지 그 자랑스러운 심정의 근원을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멍청하면 입부터 조심해야 한다더니…….

“제가 너무 주제넘었나요? 불편하시다면 거절해 주세요. 억지로 응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래도 내 실수였던 것 같다. 이상하지, 록허드는 이런 식으로도 곧잘 대화를 이끌어 갔던 것 같은데.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보던 판시온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불편할 리 없지요.”

그가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왔고, 그 덕에 우리 사이의 간격은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가까이서 올려다본 판시온은 네자르보다도 훨씬 컸다. 덕분에 내가 땅딸막한 열다섯이라는 현실이 확연히 다가왔다. 이게 바로 열 살 차이의 까마득한 간격인가?

다소 어색한 얼굴로 내 앞에 선 그는 조용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검을 단련하는 기사의 손바닥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심하게 뭉개져 있었다. 판시온의 말마따나 작은 생채기와 굳은살이 있는 건 물론이요, 엄지손가락 아랫마디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비틀어져 있었다.

“여기, 안 아파요?”

엄지의 마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의 물음에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달싹였다.

“안 아픕니다. 7년도 더 된 상처라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불편하지 않아요?”

“불편했다면 기사직은 진작 포기했겠지요.”

아주 잠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색했던 직전과 달리, 지금은 처음 만나 안개꽃을 안겨 주었던 그 순간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판시온의 손가락을 천천히 잡았다. 마냥 거칠지는 않았지만,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살결이 손바닥 아래로 여실히 전달됐다.

와, 손 엄청 크다. 나는 나머지 한쪽 팔도 뻗어 판시온의 손을 세세하게 살피려 했다. 늘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한 것만 보아 온 내게 그의 손 모양은 퍽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적어도 판시온이 손을 내빼기 전까지는.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손아귀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두 눈을 크게 뜬 판시온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불쾌하셨어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내빼는데? 나는 얌전히 팔을 거두고 그의 눈을 쳐다봤다. 스쳐 부는 바람에 짙은 금발이 흔들흔들 움직였다.

“진짜로 만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물어보는 게 나았을까요? 진짜로 만져도 돼요?”

대답이 없었다. 이거, 거절하는 의사 표시인가?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불편했는지, 스윽 눈을 돌린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또 내뺄까 싶은 마음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만질 거예요. 알았죠? 지금 나한테 손을 준 건 괜찮다는 의미죠?”

“……하아. 예, 실컷 만지십시오.”

허락과 동시에 판시온의 너른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아예 국화꽃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 어째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섬세한 면이 있어 보였다. 아니면 단순히 내 요구가 싫은 걸 수도 있고. 판시온의 반응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의 약지를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죄송해요, 경. 다시 고개 돌리셔도 돼요.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무래도 이 방법은 그른 것 같다. 역시 록허드 같은 놈들을 본보기로 삼으면 안 됐어. 에이 씨, 내내 소양 서적만 파고들었던 과거의 나를 걷어차고 싶었다. 두껍기만 한 책에 귀족 영식을 대하는 법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반성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자, 판시온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의미로 고개를 돌렸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조금…….”

말끝을 흐리던 판시온은 잠시 입을 닫고 주위를 훑었다.

“카론의 목소리로군요.”

그의 말에 어깨를 펴고 청각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다급한 구두 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간 말이 없던 판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영애의 답신을 받은 이후로는 표정이 많이 밝아졌었습니다. 겨우 이틀뿐이지만요.”

“카론이요?”

고개를 주억인 그가 느리게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모습이 선명했다.

“예, 저와 형님은 각자의 일로 바빠 카론을 잘 챙겨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 하지만, 워낙 심성이 착한 탓에 속으로만 앓지는 않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영애가 와 주셔서 참 다행입니다.”

기사단 본부에서 목격한 시녀의 태도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다, 라.

카론이 생각하는 친절의 벽이 그 정도로 낮은 건 아닐 테고,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판시온에게 알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일까. 공작 부인의 눈치가 보여서?

“카, 카트리나 영애? 어디 계세요?”

이제 구두 소리는 먼 곳이 아닌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펜스가 정수리 위 높이 올라와 있는 탓에 나와 판시온을 발견하지 못하는 듯했다. 시선을 돌려 판시온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영애.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짧게 고개를 숙인 판시온은 노란 꽃잎이 만발한 정원 안으로 사라졌다.

“영애께서 정원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소릴 들어서……. 괜찮으시다면 실내가 아니라 정원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카론의 표정은 첫사랑을 앞에 둔 소녀의 수줍음 그 자체였다. 덕분에 기대 만발한 얼굴을 마주한 내 기분은 기묘해졌다. 또래의 여자아이가 날 기다려 왔다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에 혹시라도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 정원은 공작 부인께서 매우 아끼시는 정원이에요. 판시온 오라버니가 말씀하시길, 직접 설계하신 것으로 모자라 몇 년간 꾸준히 관리해 오셨대요.”

새하얀 레이스로 장식된 정원 테이블이 샛노란 꽃잎과 상당히 잘 어울렸다. 그런데 정작 날 초대한 카론의 드레스는 그 레이스 천의 질보다 한참 떨어져 보였다. 명색이 공작가의 여식인데, 외부인을 만나는 자리에 저런 옷을 입히다니.

설마 지금 나까지 무시하는 거야? 갈고닦아 온 자존심이 어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카트리나 영애도 오라버니가 계시다고 들었어요. 어떤 분들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테이블로 다가온 시녀가 티포트를 잡았다. 새하얀 바탕에 푸른색 넝쿨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난 내 찻잔으로 졸졸 흘러내리는 다홍 물을 감흥 없이 내려다봤다.

“물론이죠. 첫째 오라버니는 에든 에젤로트, 둘째 오라버니는 록허드 에젤로트, 셋째 오라버니는 릭 에젤로트예요. 성격은 셋 다 판이한데……. 사실 에든 오라버니와는 나이 차이가 커서 교류가 적은 편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애매하네요.”

시녀가 들고 있는 티포트의 색이 변했다. 이번에는 새하얀 바탕에 초록색 넝쿨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시녀는 카론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잔에 티포트를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다홍의 찻물이 졸졸 흘러나왔다.

“록허드 오라버니와 릭 오라버니는 성격이 비슷해요. 둘 다 장난도 많고 짜증 나는 성격인데, 록허드 오라버니 쪽이 조금 더 능글맞은 편이에요. 릭 오라버니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차분하고 독서를 좋아하죠. 결론적으로 셋 모두 저와 성격이 크게 달라요. 저는 오라버니들에 비해서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거든요. 마치 조숙한 아가씨처럼.”

정확히는 그러길 바라고 있지만.

내 말에 카론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나 소리로만 들렸을 뿐이고, 내 눈은 여전히 시녀가 따르는 티포트에 향해 있었다.

이윽고 시녀는 치즈 머핀과 딸기 무스 케이크로 가득한 접시를 들어 테이블로 옮겨 왔다. 그다음은 차가 담긴 찻잔이었다. 파란 넝쿨 티포트로 부은 차는 나에게, 초록 넝쿨 티포트로 부은 차는 카론에게.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이건 너무 뻔하고 추한 괴롭힘이잖아.

“잠깐.”

카론의 손이 찻잔으로 향하던 때였다. 나는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의 잔을 가져왔다.

“이상하게 이 차의 색이 더 고와 보여서요. 정말 루비처럼 예쁜 붉은색이네요. 괜찮다면 제가 마셔도 될까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눈을 쳐다보던 카론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옆에 선 시녀의 사정은 조금 달라 보였다. 힐끔 눈동자만 돌려 쳐다보자,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손을 뻗으려 했다.

“여, 영애, 잠시……!”

코끝으로 느껴지는 온도가 딱 적당했다. 시녀의 말을 무시한 채 차를 한입 머금었다. 고혹한 홍차의 향과 맛, 그리고 그 끝에 몰아치는 역겨운 기운. 나는 한 입도 삼키지 못하고 차를 입 밖에 내뱉었다. 숨을 내쉬니 썩은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어 더 고역이었다.

“콜록, 콜록!”

“여, 영애?”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등 뒤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카론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갑자기 무슨……?”

왜겠어? 네 주제 파악 못 하는 시녀가 썩은 물로 차를 우려서지! 나는 세모눈이 되어 테이블 위의 찻잔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뻔뻔한 낯짝의 시녀를 향해서 그대로 차를 내던졌다. 뉴 카트리나 따위 알 게 뭐야? 지금 내가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데! 허공으로 떠오른 빨간 액체가 그대로 여인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꺄, 꺄악!”

비명은 단조로우면서 짧았다. 나는 즉시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던 냅킨을 집어서 입을 닦아 냈다. 아직도 역겨운 향과 맛이 남아 숨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감히 내 앞에 이딴 차를 내놔? 너, 제정신이야?”

말과 함께 다른 찻잔도 시녀에게 들이부었다. 옆에 서 있던 카론이 당황하며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낼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티포트를 들고 왔다. 코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어져 있던 시녀가 눈물을 쏟기 직전의 표정이 되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걸까.

나는 시녀의 정수리 위로 티포트 안의 홍차를 부었다. 찻물의 색은 시녀의 머리칼만큼 붉었고, 온도는 미약한 수증기가 오를 만큼 따스했다.

“황태자의 약혼녀인 나를 기만했으니, 이는 곧 네자르 전하를 기만한 것과 같다. 네가 감히 무슨 자신감으로 이딴 짓을 했는지 궁금하구나. 발로 걷어차이기 싫으면 지금 당장 시녀장이나 집사를 데려와!”

부랴부랴 땅을 긴 시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흐르던 눈물도 쏙 들어간 모습이었다. 이런 식으로 금방 허리를 숙일 거면서 내가 앉은 테이블에 썩은 물이 담긴 차를 내왔다고? 시녀는 입술과 눈꺼풀을 벌벌 떨며 내 드레스를 잡았다.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짜증만 샘솟았다.

“저, 저, 정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테니 시녀장님께만은 고하지 말아 주셔요!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손이 흙탕물 범벅임을 눈치챘는지, 허겁지겁 몸을 떼어 양손으로 싹싹 빈다.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과 이마 위로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 무엇보다 엎어져 눈물을 짜고 있는 모습이 참 가관이었다. 그 추한 모습에 동정심이 일었던 걸까? 가만히 지켜보던 카론이 내게 말했다.

“카, 카트리나 영애, 혹시 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제가 금방 새것으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셔요.”

“지금 마음에 들지 않았냐고 물었어요?”

난 비어 버린 잔에 초록색 넝쿨이 그려진 티포트를 기울였다. 전부 시녀에게 부어 버린 탓에 겨우 서너 방울 남아 있었지만, 카론에게 건네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드셔 보세요. 아니, 드시지 말고 혀에만 묻히세요.”

카론은 금세 축 처진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내가 쥐여 준 찻잔을 조용히 쳐다봤지만, 잔에 입을 대거나 차를 맛보려 하지 않았다. 찻잔 바닥을 겨우 채우는 양의 썩은 물을 응시하던 카론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광대에 걸려 움찔거렸다.

“아니요. 맛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찻잔은 결국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꽉 다물린 입술이 서너 걸음 떨어진 내게도 명확히 보였다. 안 그래도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부풀었다. 내가 그녀였다면 지금 어떤 심정에서 허우적대고 있을까. 미안한 마음이 먼저일까, 수치심이 먼저일까?

“죄송, 죄송합니다, 카트리나 영애. 이게 다 저의 불찰…….”

“불찰이라고요? 그럴 리가 없죠. 사과하지 마시고 제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보세요. 유서 깊은 가문의 여식이라면, 시녀의 잘잘못 정도는 바로잡아 줘야 하지 않겠어요?”

손을 뻗어 땅을 파고들 기세로 떨어진 턱을 바로잡아 주었다. 이미 카론의 눈은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낸 것처럼 발갛게 부은 뒤였다. 아는 사이가 된 지 이제 겨우 일주일 무렵이 지났다. 카론이 만약 기사단 본부에서 날 만나지 못했다면, 이 불합리한 대우를 언제까지 버텨야 했을까.

고개가 들렸음에도 카론의 시선은 여전히 정원 근처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난 그녀를 가만히 놔둔 채 멍한 얼굴로 엎어진 시녀에게 다가갔다. 카론의 천사 같은 외양을 봐도 화가 안 가라앉는데, 재수 없는 면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가슴속에서 열이 끓어올라 왔다.

짜악!

“악!”

감정을 듬뿍 담아 시녀의 뺨을 내려쳤다. 옆에 선 카론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옆으로 넘어간 시녀의 머리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놨다.

“어디서 비명을 질러? 당장 입 닫지 못해?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면 시녀장을 부를 거야. 알겠어?”

내 경고가 잘 먹혀들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시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카론처럼 피가 흐를 만큼 강하게 깨문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날 수도 있겠지만.

짜악!

“이건 감히 내게 건방지게 군 죄.”

짜악!

“이건 감히 황태자 전하를 기만한 죄.”

짜악!

“이건 감히 카론을…….”

“무슨 일입니까!”

“……업신여긴 죄.”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던 탓이다. 나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시녀는 양손으로 뺨을 가리며 벌벌 떨었다. 초라한 외양과 왜소한 덩치에 동정심이 들 법도 했지만, 불쌍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섯 번째 뺨따귀를 갈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이제껏 얼마나 악독하게 카론을 괴롭혀 왔을지, 상상하기도 벅찼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늙은 여인이 국화꽃 정원 한가운데로 뛰어왔다. 다른 시녀들과 구분되는 흑색 레이스의 칼라가 그녀의 위치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여인은 엔테라 성의 시녀장일 것이다.

뺨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컸나? 하긴, 온 감정을 끌어 올려 때리는데 소리가 작았을 리 없지. 나는 뒤늦게 나타난 시녀에게 현재 상황을 아주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저 미친 시녀가 날 암살하려 했어.”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정확히 엎어진 시녀에게로 향했다. 썩은 물로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으니, 암살은 암살이지. 발작하듯 몸을 일으킨 시녀가 이번에는 내가 아닌 시녀장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끔하게 반짝이는 가죽 구두에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아, 아, 아니어요. 저, 전 그런 적 없습니다! 맹세코 그런 적이 어, 없습니다, 시녀장님!”

“네 말은 지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니?”

내 말에 시녀가 땅에 코를 박았다. 나와는 시선을 마주치기도, 얼굴을 보여 주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가 거짓말인지 모르겠네. 이 썩은 물을 넘기느라 식도가 막혀서 죽을 뻔했는데, 그게 암살이 아니면 뭐라는 거야?”

테이블 위의 찻잔을 흔들며 말하자 땅에 코를 박은 시녀가 이번에는 어깨를 떨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라고 호통치고 싶었지만, 뒤에서 당황하고 있을 카론을 위해 눈을 감고 한 번 참아 냈다.

좋아. 방금은 좀 조숙한 숙녀 같았어.

대신 바닥을 겨우 적시는 수준의 썩은 물이 담긴 찻잔을 시녀장에게 내밀었다.

“마셔.”

과연 베테랑답게, 시녀장은 부가 설명을 듣지도 않고 곧장 찻잔을 받아 갔다. 가까이 마주친 눈은 이미 무언가 눈치챈 분위기였다. 영문을 몰라 일그러진 눈매가 아닌, 무언가를 각오한 눈매였단 의미다.

곧이어 시녀장이 몇 방울 남은 액체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입술이 닫히자마자 표정이 거칠게 구겨진 건 당연지사였다. 힘겹게 목울대를 넘긴 여인은 두 손으로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무슨 말을 하려나? 나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차분히 시녀장의 대책을 기다렸다. 한동안 조용하던 그녀는 얼마 안 가 텁텁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카트리나 영애. 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라 식수를 착각하여…….”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철없는 귀족 여식이나 할 법한 대사지만, 골똘히 머릿속을 뒤져도 이 말을 대신할 문장이 없었다. 변명을 해도 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구식의 변명을 하다니……. 이쯤 되면 공작 부인이 고의로 카론을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성의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거나.

내 물음에 시녀장이 침을 아주 길게 삼켰다.

“카트리나 에젤로트 영애이십니다.”

“내가 네자르 황태자 전하의 하나뿐인 약혼자인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예.”

알고서 그랬다니 더 충격적인 소리였다. 모르는 이가 봤으면 나를 촌구석의 이름뿐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런 저급한 변명도 무리 없이 통했을 테니까.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 유명한 에젤로트 백작가의 여식인걸.

시녀장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열과 성의를 다해서 팔을 휘둘렀더니 어깨가 조금 뻐근했다.

“하아. 나처럼 허약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숙녀에게 암살이라니……. 카론 영애, 당신은 알고 계셨나요? 저 미친 계집애가 날 죽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아니, 아니요. 그, 그럴 리가요.”

카론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모자라 양손까지 사용해 열심히 아니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난 그녀를 마주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도저히 못 참겠어요, 카론 영애. 이런 곳에 있다가는 두려움으로 심장이 멈춰서 쓰러질 거예요!”

“괘, 괜찮으세요? 영애, 제가 따뜻한 차를…….”

“아니요. 지금 당장 네자르 전하께 가 봐야겠어요.”

저 수많은 시녀를 놔두고 왜 네가 차를 가져와? 나는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내가 한 대 후려칠 거라 생각했는지, 몰래 고개를 들고 쳐다보던 시녀가 다시 얼굴을 땅에 박았다.

“전하를 만나서 오늘 경험한 이 끔찍한 일을 털어놔야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네요.”

“카트리나 영애,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아이는 저희가 매질을 해서라도…….”

이제야 마음이 급해진 시녀장이 내게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팔을 뻗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닥치고 마차나 준비해.”

기세등등했던 시녀장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내 단호한 표정과 어투에 더 이상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그 눈치를 초반에 보이지 그랬어?

나의 첫 엔테라 방문은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 됐다. 화를 숨지기 못할수록 뒤따라오는 시녀장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네자르 전하에게 카론 영애의 이야기를 잠깐 했던 적이 있어요. 한번 만나고 싶어 하시더군요.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영애와 함께 가고 싶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에젤로트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기 직전, 시녀장 못지않게 안색이 어두운 카론에게 물었다.

“저, 저를요?”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기껏 엔테라까지 왔는데, 제대로 된 이야기 한번 못 하니 영 아쉬워서요.”

카론의 아랫입술에는 붉은 피딱지가 올라와 있었다. 정원에서 분을 못 이겨 낸 그 상처였다. 새벽이슬처럼 고운 얼굴로 주위를 훔쳐보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시녀장의 눈치를 살필 때는 더.

“괜찮죠? 괜찮으면 어서 올라오세요.”

혹시라도 거절할까 싶은 마음에 마차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카론은 내가 마차에 오르길 한 번 더 권하자 빠르게 맞은편 자리로 올라탔다. 이윽고 바퀴 구르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창 너머로 엔테라의 성이 멀어져 간다. 작게 헛기침을 한 나는 카론에게도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거짓말이에요.”

“……예?”

“네자르 전하를 만나러 간다던 말이요. 그거, 거짓말이라구요.”

말하면서도 기분이 착잡했다. 내가 아무리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이 날뛴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서 네자르에게 곧이곧대로 이르러 갈 정도로 엉망인 건 아니었다.

오직 하고 싶은 대로만 움직였던 과거에도 네자르의 지위와 힘을 빌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명료했다. 내가 그의 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카트리나 영애. 전 황태자 전하 때문에 따라 나온 게 아닌걸요.”

카론의 분위기는 내가 찻잔을 내던진 때에 비해 훨씬 차분했다. 정작 우울해진 쪽은 나였고.

“내 말은 네자르에게 고한다는 소리도 거짓말이었단 의미예요. 어떻게 보면 홧김에 영애를 데리고 나왔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참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아! 젠장. 조숙한 숙녀는 무슨, 하는 꼴이 예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하여도 나는 지금과 똑같은 행동을 할 테다. 아무리 순수한 목적이 아닌 만남이라지만, 그런 경우 없는 성에 카론을 혼자 두고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처신할지는…… 지금부터 생각해 보지, 뭐.

“영애는 마치 와, 왕자님 같으세요.”

바닥으로 기울어져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카론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표정을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많은 요소가 부족해 보였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 첫째 오라버니요, 사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첫째 오라버니? 엔테라 공작가의 소공작이라면 터너 엔테라를 가리키는 것일 테다. 내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빼 관심을 보이자, 카론이 이어서 말했다.

“꽤 오래된 병이래요. 건강이 호전되질 않자 2년 전부터는 남쪽으로 내려가 요양을 하고 계세요. 공작 부인께서 그곳으로 따라간 지가 이제 3주이고……. 제가 엔테라에 도착한 지는 이제 겨우 2주 반 정도가 흘렀네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내 말에 그녀가 다시 웃었다. 끼니를 거른 것처럼 힘없이 축 처진 웃음이었다.

“공작님은 판시온 오라버니에게 굉장히 큰 기대를 걸고 계세요. 공작 부인께서 내려가신 후부터는 더욱 그러시죠. 그래서 그럴까요, 이미 고용인들 사이에선 후계자가 바뀔 거란 이야기가 분분해요. 판시온 오라버니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지만……. 그래서 더 엔테라에 돌아오시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요즘에는 황성에서 지내시는 시간이 더 길어요. 그때 즈음이었죠, 시녀장의 태도도 바뀐 게.”

엔테라 가문의 후계자가 몸이 매우 약하다는 소문은 더러 들었다. 요양을 갔다는 소리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지만, 공작 부인까지 따라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건 대개 상태가 많이 위험함을 의미했으니까.

“제가 말렌 부인이었어도 카론 엔테라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예요. 집안이 어지러운 시기에 사생아랍시고 들어온 아이가, 공작 부인의 부재를 대신하고 있다니…….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판시온 경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나요?”

“판시온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예요. 충분히 힘들어하고 계시는데 여기서 더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지 않아요.”

이제 카론은 입꼬리조차 들어 올리지 못했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지막으로 사람을 다독이거나 위로한 게 벌써, 아니 최소 15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카트리나로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네자르를 제외하고. 그는 내 세상의 중심이었으니까.

“음, 그러니까…….”

괜찮아요? 아니야, 이 말은 너무 형식적이야. 이제 괜찮을 거예요는? 이것도 아니야. 데리고 나온 주제에 이건 너무 무책임한 소리잖아!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원활한 사교 활동을 위해 드높은 벽을 넘으려 할 동안, 앞에 앉은 카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딱지가 져 있던 살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 그래도 영애 덕분에 숨통이 트였어요. 이렇게 시녀 없이 성을 나온 것도 처음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 진심이에요.”

진심인 건 좋은데 턱 아래로 줄줄 흐른 피가 드레스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혹여나 드레스가 더러워질까, 준비해 두었던 손수건을 카론에게 건넸다.

“닦아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수건을 받아 든 카론이 자신의 뺨 근처를 톡, 톡 두들겼다. 닦아도 보통 입 근처를 닦지 않나? 애꿎은 뺨은 왜 건드리는 걸까.

“거기 말고 턱.”

“앗, 네!”

카론이 부랴부랴 제 입술 근처를 닦아 냈다. 그제야 흡혈귀처럼 기이했던 외양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런 애를 네자르의 정부로 만들겠다고? 나도 참 생각이 짧았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라는 게 지금까지의 내 상황이야. 어떻게 생각해?”

내 간절한 물음에 릭의 얼굴이 조상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그의 어깨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오늘 막 세탁한 옷인지 포근한 햇살의 냄새가 났다.

“응? 어떻게 생각하냐구.”

탁. 신경질적으로 책의 표지를 덮은 릭이 테이블 위로 물건을 내던졌다.

“애가 좀 달라졌다 싶었더니, 영 이상한 방향으로 달라졌군.”

에젤로트로 돌아온 지 이제 막 15분 정도가 흐른 상태였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 내내 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태풍에 휘말려 엉망이 된 초원이었다. 자존심이 깎이는 것을 무릅쓰고 록허드에게 부탁한다면, 기분은 조금 상하더라도 그를 통해서 판시온에게 카론의 상황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타당한 행동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카론은 자의로 입을 닫길 선택했다. 그러니 내가 끼어드는 건 친하지도 않은 상대의 오지랖,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에이 씨, 몰라! 오지랖이든 아니든 알 게 뭐야? 아무리 그래도 카론이 불청객 취급을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이, 일단 이리로 와 봐.”

몸을 일으켜 릭의 팔을 잡아끌었으나, 릭은 귀찮고 짜증스러운 표정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미쳤냐? 나보고 그 카론인지 뭐시기 앞에 가서 뭘 어쩌라는 건데?”

“뭘 어쩌라는 게 아니야. 내가 록허드에게 가서 자문할 동안 카론이 심심하지 않게 같이 있어 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별거 아니잖아?”

“뭐가 해 줄 수 있지야? 빨리 저리로 안 떨어져?”

거칠게 팔을 휘두르는 릭의 몸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나도 나중에 네 부탁 하나 들어줄게. 정말로! 진짜로! 맹세할게, 응?”

“이게, 날이 갈수록 정신머리가…….”

달칵.

그때였다. 가볍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릭밖에 없었던 서재 안으로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카트리나 영애?”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어야 할 카론이었다. 이윽고 보폭 좁은 발걸음과 함께 긴 은발을 가진 미소녀가 걸어 들어왔다.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아, 여기 계셨군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기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 싶…….”

카론은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릭에게 향해 있었고, 이때다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릭을 소개했다.

“이, 이쪽은 우리 셋째 오라버니 릭 에젤로트예요. 아까 정원에서 말했던 이름 기억하시죠?”

옆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어, 릭. 한 박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릭이 카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엔테라 영애. 에젤로트 가문의 릭 에젤로트라고 합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저, 저, 저는…….”

말을 멈춘 카론이 아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와 처음 만난 그날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저, 저는 엔테라 가문의 카론 엔테라여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게는 그런 식으로 딱딱한 인사를 건네실 필요 없습니다. 모자란 동생과 어울려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우웩. 조용히 웃는 상으로 답하는 릭은 교양 있는 신사처럼 말끔하고 친절했다. 공식 석상에서 늘 보이는 모습임에도 두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속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예전에야 겉과 속이 다르다며 코앞에서 대놓고 비웃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릭의 철판 깔기 능력은 나 역시 따라서 배워야 할 숙녀의 필수 덕목이었으니까.

“누가 모자라다는 거야? 웃기는 소리 하네. 카론 영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다 웃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릭은 이제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억울했다. 나한테는 늘 서재에서 책을 가져와라, 책을 가져다 놔라, 시녀 좀 불러와라, 편히 시키는 주제에 미소녀와 어울려 달라는 부탁이 뭐가 어렵다고!

카론에게 다시 양해를 구하고 서재를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시녀들이 밝은 낯으로 홀 근처를 서성이는 걸 보아 네자르가 방문한 모양이었다. 록허드의 방으로 찾아갈 필요가 없어 보여 1층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었을 때는, 내가 예상한 구도와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인물은 문 가까운 자리에 앉은 록허드였다.

“얼씨구, 이게 누구야? 우리 에젤로트의 천방지축 강아지가 오셨군.”

그다음은 놀랍게도 네자르가 아닌 판시온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입술만 버벅거리다 뒤늦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의 중이실 줄은 몰랐어요.”

판시온 경이 왜 여기에 있지? 나보다 먼저 와 있을 정도면 국화꽃 정원에서 헤어지자마자 마차에 올랐다는 의미였다. 내가 알기로 그가 에젤로트 성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평일도 아닌 휴일에.

얌전히 문을 닫으려고 등을 돌렸을 때 응접실 안쪽에서 네자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으니 들어와, 케이트. 어차피 끝내려던 참이었으니까. 판시온 경?”

“예, 그럼 황성에서 뵙겠습니다, 전하.”

“그러지. 휴일에도 수고 많았네.”

판시온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막 자다 깬 움직임처럼 무겁고 둔한 행동이었다.

최근 들어 유독 회의가 잦은 듯한 느낌이 든다. 단순히 느낌만은 아닌 것이, 요 며칠간 록허드와 더불어 네자르도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허리를 편 판시온은 찻잔을 들어서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제 막 훈련을 마친 것처럼 성의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리로 와, 케이트.”

그 못지않게 추욱 처진 몸으로 소파에 기댄 네자르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응접실을 감싸고 돌았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향하려던 나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아뇨. 저… 제가 볼일이 있는 분은 판시온 경인데요.”

안 그래도 고요했던 실내에 북극의 눈보라라도 몰아친 듯 공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왜 말만 하면 주변이 싸늘해질까. 그것도 꼭 네자르와 함께 있는 장소에서만.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래? 그렇다면 따로 나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하면 되겠군.”

온화한 웃음이었지만, 동시에 목 뒤쪽 아래에 짜릿함이 전달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경험상 이럴 때 네자르의 심리 상황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을 했거나, 내가 잘못을 하기 직전이거나. 진실이 어느 쪽이든 간에 문제는 내 잘못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답이 어느 쪽이어도 대처할 수 없지.

보통 최고의 처신은 네자르가 무슨 말을 하든 열심히 고개를 주억여 주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의 눈치를 살필 때가 아니었다. 나의 소중한 첫 번째 친구가 가정에서 방치를 당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아니요. 개인적인 일이라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아요. 판시온 경? 괜찮으시면 저한테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세요?”

판시온의 눈길이 잠시 네자르를 향했다. 그러나 곧 일으킨 몸을 내가 선 방향으로 옮기며 대답했다.

“예, 잠시라면야.”

“아아, 그럼 나도 이만 일어나야겠다. 전하는 계속 여기 계실 거죠? 하하! 말씀하지 않으셔도 다 압니다. 한동안 여기에 계속 계실 거란 사실을.”

빠르게 일어서 옷매무새를 다듬은 록허드가 판시온을 앞질러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네자르의 표정은 무덤덤함 그 자체였다. 슬쩍 꺾인 고개에 시선이 마주쳤지만, 잘 다듬어진 눈썹을 한 번 치켜세울 뿐, 금방 눈을 돌렸다.

네자르의 속은 7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도 파헤치기가 어렵다.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딱히 속 좁은 성정도 아니면서 조금만 서운해도 꼭 저렇게 티를 냈다. 열다섯 소녀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저쪽 아니야?

“쯧, 늘 필요할 때만 눈치가 없어. 내가 왜 널 대신해서 네자르의 기분을 신경 써야 하는 거냐, 이 멍청아.”

록허드가 옆을 지나치며 내 이마를 툭, 건드렸다. 한마디 해 주려 했지만 금세 다가온 판시온을 신경 쓰느라 열만 내야 했다.

나는 평소와 달리 거듭 무리한 고집을 부리지 않는 네자르에 겁을 먹고 응접실을 나왔다. 서운함을 백방으로 발산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 수준이라면, 지금처럼 고요할 때는 아주 숨통이 답답했다. 역시 누군가를 가슴 깊이 품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다. 뭘 하든 신경 쓰이는 게 피곤하기만 하거든.

“따로 장소를 이동할까요?”

국화꽃 정원에서 만난 시점이 겨우 네 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제 막 네 시간이 흘렀음에도 판시온의 얼굴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무슨 일이기에 휴일에도 따로 회의를 하는 걸까.

“아뇨,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적어도 해가 질 때까지는 엔테라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지친 낯과 달리 그의 미소는 매우 부드러웠다. 나는 그 간질간질한 시선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열심히 눈을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론도 저를 따라 이곳에 왔어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판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요. 굳이 에젤로트로 함께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 그야 댁네 시녀들이 애를 괴롭히니까 그렇지!

“네, 이곳에서 카론 영애가 이틀간 자고 갔으면 해서요. 겨우 하루뿐인 만남이 아쉬워서 제가 영애를 초대했어요. 괜찮으시다면 판시온 경에게 허락을 받고 싶어요.”

아우, 이게 아닌데. 내가 말하려던 건 겨우 카론이 에젤로트에 왔어요, 며칠 더 함께 있고 싶은데 외박을 허락해 주세요, 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 달리 입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당사자인 카론이 판시온에게 알리는 걸 꺼려 했으니까.

“그 아이만 괜찮다고 한다면 저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정말 그 이유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판시온의 표정은 변함없이 평온했다. 막 지어낸 말이 그렇게 티가 났던 것일까. 역시 남의 눈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닌 듯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카론이 겪고 있는 상황은 엄연히 말해 가정 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묵인하는 것 자체가 그리 옳은 판단은 아닐 테다.

“아뇨. 사실 제가 말씀드리려 한 건 조금 다른 이야기였어요.”

한 번만 참자.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을 때, 그때 말하면 되겠지.

“그래도 허락해 주셨으니까 이틀 동안 카론 영애와 에젤로트에서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시녀들이 잘 신경 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젤로트의 고용인은 어디와 달리 무례하지 않거든요.”

물론 직접 알리지 않겠다는 의미였지, 간접적인 표현을 자제하겠단 소리는 아니었다. 내 말의 저의를 알아들었을까? 판시온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내게서 등을 돌렸다. 짙은 금발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나 역시 몸을 돌려 응접실의 문을 밀었다. 네자르의 애인을 찾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쩌다 남의 가정사까지 참견하게 됐는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말 했어?”

네자르는 내가 곁에 몸을 누이자마자 곧장 입을 열었다. 그의 묵묵한 시선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널따란 지도를 향해 있었다.

“음.”

나는 그의 물음에 입술을 혀로 축였다. 네자르가 보고 있는 지도는 내가 알고 있던 지도의 형상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화살표와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걸 봐선 물류의 이동 경로를 나타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화로운 가정과 얕은 우정의 상관관계?”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있잖아, 네자르는 친구의 자존심과 안위 중에 뭐가 더 중요해?”

조용히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네자르는 나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마주친 눈가가 며칠 내리 밤을 새운 것처럼 까맣게 죽어 있었다.

“설마 그 친구가 판시온 경은 아니겠지?”

“판시온 경이든, 아니든.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냥 친구 말이야. 네자르는 뭐가 더 중요해?”

응접실 안은 늦은 오후의 주홍빛으로 충만했음에도 차가웠고, 내 이마로 떨어진 네자르의 숨은 아주 오랜 시간 가열된 수증기처럼 뜨거웠다.

“그 친구의 안정을 걱정하면 자존심이라도 건들게 되는 모양이군.”

“비슷한 거 같아.”

“그럼 안위를 걱정하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하면 되지.”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그게 안 된대도?”

“안 돼도 되게 해.”

맞은편으로 손을 뻗은 네자르가 지도 위를 구르던 찻잔을 바르게 세웠다. 그러고는 있는지도 몰랐던 티포트를 끌고 와 잔에 콸콸 쏟아부었다. 따스한 기운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걸 봐선 방치된 지 오래된 찻물 같았다.

“결국 상대방만 모르면 되는 거잖아? 그럼 너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아니, 이런 건 애초에 조언이 아니잖아? 그냥 단순하게 야비한 것처럼 보이는데?

“어쩐지 방금 많이 해 본 듯한 말투였어. 대체 사람을 속이는 데 얼마나 익숙한 거야?”

“전혀 안 그래. 착각이겠지.”

“안 그러기는……. 네자르는 사람을 자주 속여? 속이고 나서는 끝까지 숨기고?”

내 물음에 네자르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보름 내리 굳은 보리 빵처럼 물기 없이 퍽퍽한 목소리였다.

“그런 건 약자나 하는 행동이란다, 케이트.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고 주위 인식에 따라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는 약자. 그러니 너도 복잡한 일이 생기면 머리 굴리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게 고하는 게 나을 거야. 너에게 나를 이용하는 것만큼 최선의 수는 없을 테니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소파와 맞닿아 있는 등으로 식은땀이 크게 번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네자르의 말은 마치 내 속을 다 읽어 내고 뱉어 낸 것 같았다. 괜히 시선을 마주하기가 버거워져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떨림과는 별개로 낯부끄러운 느낌을 주는 네자르의 한마디가 얼굴 위로 열을 당겨 왔다.

“내가 약혼자라서 그렇게 신경 써 주는 거야?”

차를 마시던 네자르가 도르륵 눈동자만 굴려 날 쳐다봤다. 본래에도 까맣게 그늘이 져 어두웠던 적안이 지금은 완전히 밤하늘처럼 칙칙했다.

아, 그래. 무엇이 그리도 이상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네자르는 오늘 나와의 대화 내내 얼굴 근육을 제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헛웃음을 뱉기는 했지만 아주 잠깐 광대를 당긴 척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내가 맨 처음 응접실에 나타난 시점부터 꾸준히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찻잔을 입술에서 떼어 냈다.

“응.”

“지, 진짜?”

“응. 진짜.”

그 말에 충격을 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부정 한 번을 안 할 수가 있는 거지?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럴 때는 맞아도 예의상 아니라 대답해 주는 거야! 네자르는 황태자면서 그런 것도 몰라?”

네자르가 짧게 웃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주 짧았을 뿐이고, 곧이어 네자르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떨어졌다. 이전과 달리 차갑고 시린 숨이었다. 고단함에 젖어 입을 열기도 피곤해하는 모습에 나는 주춤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댔다. 내 앞에서만큼은 힘에 부쳐도 티를 내려 하지 않았었는데. 오늘의 네자르는 한계치 근처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카론 엔테라를 만나러 나갔었다며?”

그 소리는 또 어디서 들은 거람.

“황성에 갔었을 때 우연히 만났거든. 카론 영애가 날 초대했어. 그것도 직접. 편지까지 써서. 엄청나지 않아?”

말하면서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사이겠지?

“여자들끼리 가까워지려면 남자 이야기가 필수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설마 엔테라의 여식과 판시온 경의 이야기를 나눈 거냐?”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며 산다고 해도, 여동생 앞에서 오빠 이야기를 할 만큼의 악마는 아니었다. 물론 엔테라 남매가 친남매는 아니므로 나와 친형제들 사이처럼 괴성이 오가지는 않겠지만, 그랬기에 더욱 입에 담을 수 없기도 했다. 애초에 형제 이야기라는 건 욕이 아니고서야 의미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에젤로트에서 이틀간 함께 지내기로 했어. 괜찮다면 네자르도 함께 만나러 가는 게 어때?”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였다. 경국지색의 카론 엔테라와 황위 후계자인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 둘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나누고 있는 이 시점에 운명적인 첫 만남이 시작된다면…….

그런데 네자르가 미녀라고 쉬이 마음을 내줄까? 이성으로 똘똘 뭉친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네자르와 카론이 눈 맞는다는 가정 자체가 그리 있음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판시온 경과 나눠야 한다던 이야기가 바로 그거였군.”

언제나 느끼지만, 네자르는 성정이 매우 꼼꼼하다. 그는 내가 스쳐 뱉었던 말 한마디, 보인 행동 하나하나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고 있었다. 속을 전부 간파당하는 기분도 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일 테다.

“안 만나 봐? 카론 영애는 이제껏 내가 봐 온 여식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구. 네자르도 만나면 한눈에 반할걸?”

“마치 본인이 한눈에 반했다는 듯한 어투 같네.”

역시 네자르는 카론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네자르의 시선은 여전히 내가 아닌 테이블 위의 지도를 향해 있다. 나는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더 열정적인 목소리로 떠들었다.

“장담컨대 내가 남자였다면 분명히 반했을 거야. 카론 영애는 마치 숲 속에 내려온 요정 같아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종종 현실을 느끼지 못하거든.”

이, 이건 조금 심했나?

어느 정도 과장이 있기는 했어도 반 이상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비록 거적때기를 걸치고 있어서 미모가 반감된 감이 있었지만, 치장만 제대로 하면 무도회에서 모든 시선을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상대는 무려 네자르. 여자를 돌같이 대하는 데 익숙한 강철 심장의 주인이었다.

으으, 정말 답답해 죽겠네. 앞으로 가야 할 길만 삼만 리야.

“됐어. 그 현실성 없는 외모는 케이트 너나 실컷 봐라. 나는 이제 곧 돌아가 봐야 하니까.”

팔을 뻗어 머리를 토닥인 네자르가 앓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무릎을 편 후에도 천장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네자르.”

“왜?”

이름을 부르면 대체로 시선을 마주해 왔던 그가 지금은 고민에 깊이 빠진 듯, 허공 어딘가를 막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진득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아. 혹시 무슨 일 있어?”

어깨를 크게 한 번 돌린 네자르가 잠시의 공백 후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웃는 낯은 아니었다.

“전혀. 이제 들어가자. 방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거짓말쟁이. 나를 아직도 여덟 살 난 꼬맹이로 알고 있네.

“……괜찮아. 카론 영애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거절했음에도 그는 내 손을 잡고 기어코 서재까지 걸어갔다. 걷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네자르는 조용했고,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입을 열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안 좋은 감은 늘 들어맞기 마련이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네자르의 모습은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

바퀴 소리가 멈추었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촉각이었다. 판시온은 규칙적으로 흔들렸던 소리와 세계가 정적을 이뤘음을 깨닫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직 달빛만이 내려앉은 어두운 유리창 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숨과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던 그는 이윽고 활짝 열려 있는 마차 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반나절 만에 돌아온 엔테라 성에는 수많은 인기척이 났다. 판시온은 온 감각을 열어 제 옆에 몸을 숙이는 고용인들의 눈동자와 숨의 온도, 물러서는 보폭 등 모든 것을 파악했다. 엔테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적어도 판시온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목욕을 준비할까요?”

“아니. 게헤렌을 대기시켜 놔. 나는 카론의 방으로 간다.”

시종이 깊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섰다. 판시온은 숨통을 조이고 있던 타이를 느릿하게 끌어 내리며 계단을 올랐다. 늦은 밤의 저택은 오직 일렁이는 등불 외에 모든 것이 고요했다. 평소와 달리 왼쪽 모퉁이로 걸음을 옮긴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종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막 열댓 살이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은 가장 안쪽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카론에게 주어진 방.

너른 발코니로 노란 보름달의 환한 빛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타이를 완전히 풀어낸 판시온은 문틀에 기대어 그 평온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방은 크지 않았으나 마치 20년도 더 되는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낡고 오랜 가구들이 즐비했다. 잘 관리되어 고풍과 시간의 멋이 남아 있는 구조물들은 아니었다. 단순히 오래된 가구였을 뿐이다.

“누가 이 방으로 정했지?”

“말렌 부인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으셨나?”

“아가씨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이미 말렌 부인께 위임하셨습니다.”

“전속 시녀는?”

“세실리 아놀타로, 말렌 부인의 추천을 받아 3년 전에 고용된 스물둘의 여성입니다.”

몸을 돌렸다. 이어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판시온은 카펫으로 떨어진 달빛 위를 걸어 반대편 모퉁이를 돌았다. 그의 방문 앞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엔테라 성의 총괄 집사, 게헤렌이었다.

판시온은 노인을 향해 가벼운 시선을 던진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게헤렌이 방 내부의 불을 켰다. 타오르는 불씨에 차갑게 식은 실내 온기가 서서히 물러섰다.

“말렌은?”

닫힌 문 앞에 선 게헤렌이 곧장 대답했다.

“이번 주 내로 퇴직하는 시녀가 둘이라, 결원을 채우기 위해서 인력을 구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노인은 직전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딱딱해진 어투로 말했다.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리자면, 도련님께서 예상하고 계시는 바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판시온이 쥐고 있던 타이를 의자 위로 내던졌다. 무슨 심리인지 게헤렌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입을 닫고 셔츠의 커프스를 풀었다. 본래는 모두 시종이 거들어야 할 일이었지만, 터너 엔테라가 성을 비운 후부터 판시온은 자신의 몸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주의를 둔 상태였다. 마치 성내 모든 인물이 자신의 적이라도 된 것처럼.

오직 숨소리만 울리는 방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그의 기다란 손가락과 흔들리는 셔츠의 단추뿐이었다.

“터너 도련님의 명이셨습니다.”

그제야 판시온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게헤렌을 향했다. 한 줌의 감정도 없이 오직 일렁이는 등불만을 비추는 눈동자였다.

“왜 내게 보고하지 않았지?”

“그것 역시 터너 도련님의 명이셨습니다.”

“그런 주제에 지금은 아주 술술 부는군.”

몸을 일으켜 진열대로 다가간 판시온이 맨 위 칸에서 적포도주를 꺼냈다. 불빛에 일렁이는 까만색의 포도주가 크게 몸을 일으킨 파도처럼 보였다.

“우리 사랑스러운 형님께서 저택을 아주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 가셨어. 안 그런가, 게헤렌?”

게헤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송구스럽다는 의미로 짧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전부였다.

“형님의 상태는 좀 호전됐나?”

“의원이 남긴 말에 따르면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년…….”

판시온에게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손안의 잔을 부드럽게 흔들던 그가 이어서 천천히 술을 삼켰다. 딱히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판시온의 입은 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다시 열렸다.

“일주일 안에 황실에서 북벌 전쟁이 선포될 거다. 출정 예정일은 넉넉하게 잡아도 최대 2주 후일 테고, 이미 나와 네자르 황태자의 출정은 결정됐어.”

게헤렌이 가슴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북벌이라면 제국의 전력을 사용하더라도 최소 5년의 시간이 걸릴 대업. 5년이면 이미 엔테라의 후계자 자리는 텅 빈 후이다.

“우선 카론의 방을 내 옆으로 옮겨라. 말렌의 주제넘은 행동을 계속 모르는 척할 순 없겠군.”

“출정을 한 번만 더 고려해 주십시오. 도련님이 가시면 엔테라의 명맥을 이을 후계자가 없습니다.”

“후계자? 카론 역시 엔테라의 후계자라면 후계자 아닌가. 제국 동부의 관례를 따지면 정통성이야 다소 떨어진다 하여도……. 아쉬우면 빠른 시일 내에 어머니를 설득하도록 해.”

판시온의 손에서 추락한 포도주잔이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형님의 죽음은 곧이야.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법이지. 존경스러운 어머니께서 하루라도 더 빨리 둘째 아들의 간계를 알아차리셔야 할 텐데.”

***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뭐냐?”

순간, 예기치 못한 물음에 사고 활동이 멈췄다. 나는 천천히 눈알을 굴려 서재 내부를 살폈다. 설마 여기에 나와 릭 말고 다른 인물이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책장 넘기는 소음만 가득한 공간에는 우리 둘만이 전부였다. 나는 손톱으로 책상을 툭툭 두들기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후룩.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리가 건너편에 앉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릭은 슬쩍 시선을 들어서 나와 눈을 마주치곤 다시 고개를 내렸다. 손바닥 한 뼘만 한 두께의 서적이 그의 턱 아래에서 훌렁훌렁 넘어갔다. 모래알처럼 촘촘히 적혀 있는 글씨에 보고 있는 내 속이 다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혹시 내가 지금 책을 읽고 있다고 놀리는 거야?”

예전이었으면 눈길은커녕 같은 공간에도 두지 않았을 물건이다. 하나 숙녀에게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바로 문학의 습득. 나는 장장 20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은유법투성이의 장문 시를 읽고 있었다. 예술을 즐기는 일은 너무나 험난하고 먼 고난이었다.

“네가 대뜸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내 말은, 약혼을 무를 필요가 있냐는 거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얌전히 입을 닫았다. 릭은 내가 약혼을 파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나는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너도 알 거 아니야, 네자르와 나는 의남매면 몰라도 연인 사이로 맺어지긴 힘들다는 걸.”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케이트. 좋아 죽겠다며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맺어지기 힘드니 없던 일로 하겠다고? 애같이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네가 뭘 깜빡 잊었나 본데, 나 애 맞아.”

정확히는 애 같은 어른.

종종 전생의 내가 기나긴 꿈 속의 허상처럼 느껴진다. 나는 사실 정신과 육체 모두 평범한 열다섯이고, 순전히 기나긴 꿈을 꾼 영향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거지.

실제 살아온 세계가 뒤바뀌었다는 것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신빙성 있는 가정이었다. 다만 나의 전생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하는 건, 안개처럼 흐릿해야 할 과거의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17년을 살아온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생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카트리나 에젤로트라는 인물은 그저 이제 막 철이 들려는 열다섯의 어린 소녀일 뿐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자르가 내 투정을 들어주리라곤 생각 못 했어. 약혼 서약 말이야. 물론 내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웃기기는 했다. 네자르의 앞에서 나는 애처럼 구는 게 습관이 된 카트리나 에젤로트였지만, 정작 그를 판단하는 건 전생의 나였으니까.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끝을 흐리자 릭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케이트, 네가 지금처럼 안정을 갖게 된 건 전하 덕이 커. 전하 역시 그리 여기고 계실 테고.”

“지금 나보고 몸 바쳐 은혜라도 갚으라는 거야? 그거야말로 네자르를 귀찮게 하는 거라구.”

네자르를 향한 나의 감정은 가족애보다 깊고 이성애보다 뜨겁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인 욕구를 동반하는 건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와 내가 입 맞추는 그림은 상상도 되지 않을뿐더러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 괴상하고 기이한 기분이었으니까.

으음, 이건 단지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

“네자르가 날 내치지 못하는 건 순전히 동정심과 의무감 때문이야. 불쌍한 아이에게 가장 비싼 초콜릿을 던져 주는 심정이랄까.”

만약 그 동정심과 의무감이 시간이 흘러 점차 퇴색되고, 흐려진다면……. 나는 그 안정감의 공백을 참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 물러야 했다. 약혼이라는 관계로 묶이는 건 서로에게 크나큰 해가 될 수밖에 없는 길이다. 백작가의 막내딸인 나 따위보다 황태자인 네자르에게 있어 더더욱.

아, 젠장! 그냥 열다섯의 멍청한 꼬맹이로 남아 있었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거야말로 편견처럼 보이는구나. 네가 전하의 속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모를 건 뭐야? 네가 내 입장이 되는 상상이라도 해 봐.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게 있을 테니까.”

릭은 이제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날 쳐다봤다. 단출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얼굴이었다.

“너는 쪼그맣던 시절부터 유독 잡생각이 많았어.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다만 길이 많으면 잘못 빠져들 수도 있다는 소릴 해 주고 싶은 거다.”

나는 불만스레 입술을 내밀었다. 릭의 말이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이미 빠진 거 안 보여? 이게 다 반은 너희들 책임이야. 어린애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백이면 백 이상한 길로 빠져들기 마련이라고. 마치 나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릴 적 흑백의 기억이 가슴 아래에서 스멀스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소리 없이 고요한 순간들뿐이었다. 말이 뛰노는 널따란 초원과 그 위에 우두커니 앉은 나. 당시의 나는 늘 혼자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신경 써 주고 있잖아?”

릭의 말에 절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애정 어린 관심이란 늘 좋은 양분이었음에도 불쑥 오랜 서운함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과거는 이미 다 흘러가 버렸는데.”

***

제국 북벌 원정대의 출정식을 하루 앞둔 낮이었다. 록허드와 네자르가 선발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단 소식은 이미 7일 전에 들은 바 있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식음을 전폐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하루, 이틀, 사흘이 어영부영 흘렀다.

록허드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7일간 단 한 번도 귀가를 하지 않았다. 나는 록허드의 마지막 얼굴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마다 그의 방문을 두들겼다. 그래 봤자 늘 비어 있었음에도.

그런 록허드가 에젤로트로 돌아온 날이 바로 출정식을 앞둔 전날, 그러니까 오늘이었다.

“록허드?”

귀성한 록허드는 혼자가 아니라, 곁에 네자르가 함께였다.

“표정이 그게 뭐야? 내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어? 살짝만 건드려도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흐르겠는데?”

록허드는 내 허리를 잡아 들어 올리고는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차마 어디에 입술을 대냐며 주먹질을 할 수 없었다. 그럴 틈도 없이 록허드는 어머니에게로 가 버렸다. 네자르와 나를 덩그러니 남기고서.

나는 근 2주간 만나지 못했던 네자르를 마주하며 기이한 공포심을 느꼈다. 막연히 상상만 하던 전쟁터에, 눈앞의 이 남자가 나간다고 인지하자 지독한 현실감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전쟁터는 사람이 죽는 곳이잖아. 만약 네자르가 죽게 된다면 나는…….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수십 번 그려 낼 동안, 당사자인 네자르는 일전에 보았던 안색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록허드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상아 분수대에 앉아 카론의 서신을 읽고 있었기에, 네자르를 끌고 분수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손안의 편지지를 꾸깃꾸깃하게 접다가 그에게 건넸다. 날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선이 편지지로 향했다.

“이것 봐, 네자르. 어제저녁에 카론에게 받은 편지야.”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카론의 편지를 펼쳤다.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서 파악해야 했던 나와 달리 그는 단숨에 글을 훑어 내렸다.

“누구와 달리 문장이 깔끔하구나. 서체도 부드럽고.”

그의 말마따나 카론의 글은 날이 갈수록 유려해지고 있었다. 종종 즐겨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걸 봐서는 소양 선생에게 문장 교정을 받는 듯했다.

“이제 둘이서 서신을 주고받는 게 일상이야. 덕분에 나도 한동안 놓고 있던 글을 다시 배워서 좋은 것 같아. 릭이 조금 불친절하기는 해도 선생질은 잘하거든.”

“릭이?”

“록허드는 바빠서 요즘 얼굴도 못 봤고, 에든은 집무실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아. 최근 나랑 어울려 주는 건 기껏해야 릭이 전부야.”

그나마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내 표현력과 맞춤법을 지적하기 바빴다. 유일하게 기다리는 카론의 편지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 전부이니 하루하루가 지루해 죽을 맛이었다. 아니, 하루의 반은 숨만 쉬느라 따분했고 나머지 반은 네자르와 록허드 걱정에 우울했다. 어서 데뷔탕트를 치러야 나도 에젤로트를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네자르, 이제 내일이면 출정식이잖아. 여기서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편지를 읽는 얼굴이 평소처럼 무뚝뚝하다. 이윽고 그는 편지지를 다시 접어 내게 건넸다.

“약혼녀에게도 할애 못 한다면 그건 시간이 아니라 업보지.”

편지지를 건네받자마자 네자르가 손가락으로 내 콧등을 튕겼다. 솔직히 좀 아팠는데, 그의 얼굴에 대고 짜증은 내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 같아선 열 번은 더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 지금 죽으러 가는 사람 상대하는 기분이야.”

“아주 악담을 퍼붓는구나, 케이트. 웃는 얼굴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에.”

그 소리에 세세한 얼굴 근육을 모두 사용해서 활짝 웃는 인상을 만들었다. 내 모습이 어지간히도 웃겼는지, 근 보름 만에 네자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세한 헛웃음에 불과했지만 웃음은 웃음이었으니까.

“그래, 케이트. 내가 돌아오면…….”

말을 멈춘 네자르가 돌연 인상을 찡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슬며시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이었다.

“돌아오는 것 자체가 너무 까마득하게 먼 일인 것 같군. 지금 말해 봐야 별 의미도 없겠어.”

무슨 말을 하려 했냐고 보채지 않았다. 그가 몸을 틀어 분수대의 금붕어를 눈으로 좇을 동안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오늘 헤어지면 향후 몇 년간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향, 분위기, 감촉으로만 네자르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서신 같은 건 아예 못 보내는 거야?”

“우리 상황이 새어 나갈 수도 있으니까. 여러모로 힘들어.”

너무 단호해서 아쉬운 마음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나 아직 스물도 안 됐는데, 과부 만들 건 아니지?”

“서약서를 살펴보면 혼전 사망 시 서약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항목이 있어. 그러니까 괜한 걱정 마.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론에게 물어봐도 되고.”

준비라도 한 듯 줄줄 나오는 문장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그 말로 걱정이 더 심해졌거든? 그럴 때는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거야. 네자르는 황태자면서 그런 것도 몰라?”

“요즘은 어떤 말을 해도 지적받는 기분인데. 내가 그렇게 형편없나?”

세상의 그 누가 제국의 황태자에게 형편없다는 소릴 할 수 있을까?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형편없지 않다. 단순히 내 투정이 늘어난 것이었다.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네자르는 곧 베스트의 안쪽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열심히 팔목을 휘젓던 그는 한참 만에야 무언가를 꺼내 나의 손바닥 위로 얹어 놓았다. 얇고 붉은 천 위에 은사로 수선화를 수놓은 머리 끈이었다.

“이런 건 원래 남아 있는 쪽이 주는 건데 말이야…….”

이걸 꺼내느라 그렇게 한참 걸린 거야? 아니면 내게 보여 주는 게 부끄럽기라도 했던 걸까.

“전 세계를 돌아도 나만 한 약혼자는 또 없을 거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순간, 울컥하고 코끝이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바닥 위에 얹힌 머리끈 위의 수선화를 쓰다듬었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뱉느라 목에 콱 힘을 주고선.

“고, 고마워, 네자르. 잘 간직할게. 일주일에 한 번씩 깨끗하게 빨아서 햇볕에 말리고, 망가지면 수선도 하고, 하여간 온종일 끼고 있을게.”

내 말에 네자르가 고개를 돌리고 박장대소를 했다. 어깨가 다 떨릴 정도로 몸을 흔든 그는 장하다는 식으로 내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는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 네자르 몰래 눈가를 꾹 눌렀다.

“그래그래. 말은 참 잘한다니까.”

출정식이 예정되어 있던 다음 날. 나는 배탈이 났다는 핑계로 방 안에 틀어박혀 온종일 누워 있기만 했다. 언제 재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엉엉 우는 추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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