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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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내 이름은 카트리나 에젤로트.

카발 제국 북동쪽에 위치한 에젤로트 백작가의 막내딸이자, 제도 근방에서 천방지축으로…… 아니, 재수 없는 년으로 소문난 열다섯 살의 영애이다.

“론.”

“예, 전하.”

“서약서를 꺼내.”

예상컨대 누군가는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기겁을 할 테고 누군가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낼 것이다. 확실한 건 내 이름을 들은 자 중 그 누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부드럽게 순화해서 천방지축이지, 실제 나의 성격은 고삐 풀린 망아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인장은?”

“받아 왔습니다.”

“만년필.”

“여기 있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불리는 내 별명은 매우 다양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영애, 제멋대로인 영애에서부터 시작해 에젤로트의 망나니에 재수 없는 계집애까지. 나야 면전에서 떠들 자신이 없으니 뒤에서 욕한다고 비웃었지만, 실제 앞서 나열한 표현에는 틀린 소리가 하나 없었다. 내가 봐도 나는 정말 제멋대로에 재수 없는 망나니 그 자체였으니까.

“케이트에게도 하나 줘.”

“예, 카트리나 영애? 여기 만년필 받으시지요.”

내가 위와 같은 고해 성사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공교롭게도 못된 짓을 하다 걸려서 반성문을 쓴다거나, 과거의 악행을 돌이키며 새사람이 되려는 다짐 때문은 아니었다.

“카트리나 영애?”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나는 방금 15년 동안 잊고 지냈던 전생을 기억해 냈다. 그것도 심지어 네자르 황태자에게서 약혼 서약을 받는 도중에!

“이봐, 케이트.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응접실 맞은편에 앉은 네자르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울며불며 매달렸던 대로 약혼 서약서를 가져왔잖아. 설마 꽃다발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시위하는 건 아니겠지?”

한숨을 동반한 네자르의 목소리는 한겨울에 얼어붙은 눈길보다 차갑고 딱딱했다. 나는 그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젓고 론에게서 만년필을 건네받았다. 이제 이 양피지 하단에 사인을 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바라고 바라 왔던 네자르와의 약혼이 성사될 것이다. 무려 귀족 영애로서의 자존심을 내다 버리고 눈물 콧물 흘려 가며 박박 우겼던 그 약혼이.

“자꾸 넋 놓지 말고 빨리 사인해. 알다시피 나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네자르가 한 번 더 타박했지만, 내 양손은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일 줄 몰랐다. 전생의 나는 열일곱 살 여고생이었으나, 어떠한 경로로 목숨을 잃게 됐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전생의 내가 이 세계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실 내 전생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고생이었다는 부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쟁쟁한 귀족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나 먹고 싶은 음식, 입고 싶은 옷을 다 가지며 그야말로 하루하루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래, 진짜 문제는 다시 태어났다는 점이 아니라…….

“케이트, 빨리 사인하래도?”

약혼을 하기로 한 네자르 황태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 봐. 머리가 갑자기 어지러워서 그래.”

나는 네자르의 채근에 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사인하는 것을 늦췄다.

귀족 사회에서 특정 가문 사이의 정략혼은 만연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도 대개 가문의 후계자나 장녀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나처럼 오냐오냐 사랑받으며 자란 막내는 보통 원하는 남자를 선택해서 결혼하는 편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그 ‘원하는 남자’가 바로 카발 제국의 황태자, 네자르 오드리네 카발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 경우였을 뿐이고, 내 짝사랑 상대인 네자르는 금붕어 똥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날 탐탁지 않게 여기기 일쑤였다.

애처럼 굴지 말라며 내가 유독 싫어하는 파프리카만 억지로 먹인 일은 양반이었다. 그는 내 얄팍한 지식수준에 경기를 일으키며 억지로 소양 서적을 독파시켰고, 늦은 밤에는 유령을 가장한 채 침실로 숨어들어 와 기어코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어젯밤 사이에 또 뭘 했기에 머리가 어지러워?”

“저,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 어제는 얌전히 잠들었단 말이야.”

하나하나 떠올리려니 그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주 여실히 다가왔다. 이 양피지에 사인을 하여 훗날 네자르와 혼인을 하게 된다면, 내 앞에 끔찍한 결혼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나와는 잠자리도 들지 않을 테니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할 테고, 그럼 하나둘 첩이 늘어나 내가 설 자리는 영영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내 노년은 독거노인이 무색하게 쓸쓸하고 고독할 거야.

외로운 노년이라니! 이렇게나 끔찍할 수가. 그런 미래는 정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사인까지 내가 대신 해야 하는 거냐?”

내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자르는 계속해서 사인하기를 종용했다. 이제는 아까와 다르게 목소리가 사뭇 무겁기까지 해 더는 사인을 미룰 수 없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양피지에 가져다 댔다. 까맣게 퍼져 가는 잉크처럼 내 마음에도 곰팡이가 울긋불긋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네자르와의 약혼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 약혼은 내가 몇 달 내내 그를 찾아가고, 쫓아다녀서 겨우겨우 얻어 낸 결과물이었다. 일을 저지른 주범이 어찌 감히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해, 했어.”

나는 황제의 인이 새겨진 최고급 양피지 위에 사인을 남겼다. 그래, 결국 남기고야 말았다. 네자르의 유려한 필체 바로 옆으로 나의 초라한 글씨체가 그림처럼 새겨졌다. 하아, 나는 이제 끝났어. 앞으로 남은 평생을 괴롭힘만 당하다가 버려질 게 분명해…….

“쯧, 하려면 빨리할 것이지.”

가볍게 혀를 찬 네자르가 내게서 양피지를 빼앗아 갔다. 서약의 내용과 사인을 찬찬히 훑어 내린 그는 옆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그의 보좌관, 론이 허리를 숙이며 서약서를 받아 든다.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 머리칼과 어두운 고동빛 눈동자. 중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주름 없이 멀끔한 론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네자르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내가 어쩌다가 네자르에게 푹 빠지게 됐더라? 왜 내 손으로 땅굴을 파게 된 거였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 만남에서 바로 네자르에게 반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애정에 한창 목말라 있을 때라 가족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못 하는 짓이 없었다. 다만 그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 준 유일한 인물이 네자르였을 뿐이다. 그를 처음 만났던 시기는 그 애정에 대한 욕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 밤, 나는 세탁으로 망가진 곰 인형을 화장시키고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원에서 온몸을 꽁꽁 싸매고, 나 홀로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인 채.

얼마 안 가 타닥타닥 타오르던 뻘건 솜 인형 너머로 돌연 처음 보는 소년이 등장했다. 수년이 흐른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모닥불에 의존해 윤곽만 겨우 보이는 새하얀 얼굴은 유리 세공품처럼 섬세하고 고아했다.

‘너, 누구야?’

내 물음에 그림처럼 곱게 그려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네 오라비의 친구.’

이질적인 분위기의 소년은 마냥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낮고 고요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외양이 천사에 가까운지, 악마에 가까운지는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히려 곰돌이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 훔쳐보는 그가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어머니나 형제들이 오면 며칠 내내 나누지 않은 대화라도 하지. 나는 이를 악물고 참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즉시 신경질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기분 나쁘게 뭘 자꾸 구경하고 있어? 저리 안 꺼져?’

다시 한번 말해 두지만, 전생을 떠올리기 전까지의 나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귀족 영애였다.

이런 식으로 못되게 말하면 사라지겠지. 대개 성의 시종들은 욕설 몇 마디만 섞어 주면 겁을 먹거나 질린 표정으로 도망가곤 했다. 소년이라고 다를 바 없을 테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 소년의 반응은 조금, 아니 매우 달랐다. 그는 놀라기는커녕 잘생긴 눈썹을 한 번 까딱이더니 감흥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뭘 모르네. 상중에 손님이 많아야 불타 죽을 운명인 네 회색 곰돌이도 기뻐할 텐데.’

고, 곰돌이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나는 당황함에 더 거친 언사로 꽥꽥 소리쳤지만, 소년은 내가 무어라 욕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귓가에 들리도록 크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눈 속에서 펄쩍펄쩍 뛰며 야단법석을 피우던 난 결국 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동안 적잖은 난동을 부렸던 탓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어머니는 결국 매를 드셨다.

그렇게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이불에 숨어 외로움과 고통을 달래던 밤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소년, 네자르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는 관심을 받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난동을 부리는 내가 퍽 불쌍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악의가 없음을 내보이다가, 대뜸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인상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는데.’

‘없으면 만들어 놔. 내가 에젤로트에 있는 남은 나흘 동안은 하루 종일 놀아 줄 테니까.’

‘왜?’

내 물음에 네자르는 잠시 미간을 구겼다.

‘이유 같은 건 없어. 뭐, 정 싫다면 거절해도 되고.’

그 말에 옳다구나 거절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침실에서 일어나 방방 뛰며 네자르의 양손을 붙잡았다. 이 넓은 에젤로트 성에서 내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그렇게 행복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전혀 싫지 않아!’

이후 나는 친형제고 뭐고 오직 네자르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날부터 내 생의 가장 큰 의미는 나나 가족이 아닌 네자르가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그래, 뭐……. 다시 생각해 보니 반할 만하기는 했네.

머리를 좌우로 휘둘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네자르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는 탓에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살짝 올려야 했다. 서약서를 받아 든 론의 입가에 어째서인지 웃음이 한가득했다.

“드디어 케이트 양이 오랫동안 고대하셨던 약혼이 성사되는군요. 이 서약서는 제가 황제 폐하 앞으로 고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영애.”

그의 말에 네자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전생을 떠올린 탓에 머리는 복잡하지,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은 답답하지, 네자르는 앞에서 코웃음을 치지. 괜히 서러워진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단순히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려 했던 건데, 시야가 어두워졌던 탓일까? 의도치 않은 눈물이 뺨을 타고 찔끔찔끔 흘러내렸다.

“어이쿠, 영애! 이렇게 기쁜 날에 우시면 어쩐답니까!”

그리 말한 론의 목소리는 안타까움은커녕 기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기뻐서 우는 거 아니거든? 걱정돼서 우는 거라고!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네자르가 푹 빠질 만한 여자를 찾아서, 그가 직접 약혼을 파기하게 만드는 것. 나는 눈물을 삼키고 굳게 다짐했다. 기필코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 마성의 여자를 찾아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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