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레오니에, 졸업과제(1)
레오니에 보레오티.
이름은 하나이나, 수식하는 단어는 너무도 많았다. 검은 맹수, 무자비, 걸리면 즉사 등등. 이 중에서 레오니에가 가장 좋아하는 수식언은 ‘최흉(最凶)’이었다.
역대 최강의 보레오티라 불리는 아버지를 뛰어넘어, 역대 가장 흉포한 보레오티가 될 그의 딸. 천하의 펠리오마저 선한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레오니에의 활약은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유명했다.
그리고 지금.
제국은 어느 때보다 레오니에의 행보에 집중했다.
“보…, 보레오티.”
소파에 앉은 벨레아니의 두 발이 대롱대롱 떠 있었다. 조막만 한 두 손에는 반쯤 접힌 신문이 있었다.
“보레오티 영애!”
“그럼 다음 글자는?”
옆에서 지켜보던 펠리오가 물었다.
“조, 어어, 졸업!”
씩씩하게 대답한 벨레아니가 펠리오를 올려다봤다. 펠리오가 커다란 손으로 둘째의 머리를 헝클어질 때까지 쓰다듬었다. 아빠의 애정 어린 행동에 벨레아니가 자지러지듯 웃었다.
“근데 졸업이 뭐야?”
“공부를 다 마쳤다는 뜻이지.”
“오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벨레아니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보레오티 영애가 졸업한대!”
“그래.”
펠리오가 벨레아니를 빤히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벨레아니도 아빠 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아가 맹수는 거실로 들어온 바리아에게로 달려갔다.
“둘이 나 빼고 뭐 하고 놀았어요?”
바리아가 벨레아니를 안은 채 펠리오 옆에 앉았다.
“아빠랑 공부했어! 논 거 아냐.”
벨레아니가 신문을 높이 들어 엄마 얼굴 바로 앞에 가져갔다.
“아주 잘 읽더군요.”
펠리오의 증언에 아가 맹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있잖아. 보레오티 영애가 졸업이래!”
“정말? 엄청난 일이구나.”
바리아가 퍽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니, 벨레아니도 엄마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졸업이면 뭐 해?”
아가 맹수는 이제 글을 읽을 줄 알지만, 아직 제대로 된 뜻은 모르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야.”
“오오…….”
대신 명석한 두뇌로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그럼 보레오티 영애가 집에 오는 거야? 레아는 만날 집에서 먹고 놀고 자는데?”
“제 언니 어릴 때랑 똑같이 말하네.”
펠리오는 벨레아니가 자랄 때마다, 그리운 기시감과 그 시절의 육아 고충이 동시에 떠올랐다.
“보레오티 공작 영애는 또 한 명 있잖아.”
바리아가 누구일지 물었다.
“없는데?”
“그럼 언니는?”
“언니야는 공작!”
“공작은 아직 나다.”
“아빠가 공작이었어?”
벨레아니가 입을 쩍 벌렸다.
“아빠도 레아처럼 먹고 놀고 자는 줄 알았는데!”
“큭!”
바리아가 웃음이 터지려는 입술을 서둘러 꾹 다물었다.
“큰놈 없어서 허파 멀쩡한 줄 알았더니, 작은놈이 이어서 내 허파를 접어 버리네.”
딸내미 둘이서 불효하기도 드물다며 펠리오가 자조했다.
“그럼 언니야는 뭐야?”
“네 언니도 보레오티 영애.”
“그렇구나. 그럼…….”
신문 기사를 다시 더듬더듬 읽던 벨레아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야가 졸업인 거야? 집에 와?”
“드디어 이해했군.”
“와! 와아!”
기쁨에 겨운 벨레아니가 거실을 마구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바리아가 펠리오에게 물었다.
“슬슬 북부로 올라갈 때지요?”
“갈 때가 되긴 되었군요.”
펠리오가 창밖을 바라봤다. 가을에 접어든 수도는 여전히 잎이 푸르렀지만, 바람의 찬기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있으면 북부엔 겨울을 알리는 폭설이 내릴 시기였다.
“우리 북부 가?”
한참 뛰놀던 벨레아니가 물었다. 잠깐 좀 달렸다고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다.
“언니야는 나중에 오는 거지?”
“어머, 이젠 언니랑 같이 갈 거라고 안 울어?”
“엄마도 차암.”
벨레아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레아는 이제 아가가 아니야. 떼쓸 나이는 지났지.”
나를 뭐로 보고! 애늙은이 흉내 내는 둘째 덕분에 부모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정작 떼쓸 나이 지난 당사자께선 이유 모를 비장함이 흘러넘쳤다.
“레아에겐 중대한 사명이 있어.”
“사명?”
“엄마랑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알면 다쳐. 살벌한 경고를 끝으로, 벨레아니는 거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제 레오 만나러 갔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펠리오가 물었다.
“레아가 이상한 말 배워 올 때면, 그 원흉이 레오던데.”
“당신도 만만치 않거든요?”
바리아가 객관적으로 볼 때, 벨레아니의 어휘력 상승 원인은 레오니에 아니면 펠리오였다.
“애먼 레오 탓하지 말자고요.”
“그럼 기사단인가…….”
“그렇다면 기사단 단장인 당신 잘못이지.”
“…….”
둘째의 언어 발달에 집중하느라, 펠리오와 바리아는 벨레아니가 말한 ‘중대한 사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선 안 되었다.
* * *
몇 달 전.
수도에 레스토랑 하나가 개업했다. 레스토랑은 각 지역의 식재료를 이용하여 색다른 요리를 선보였다. 미식가들은 이 레스토랑이 제국의 식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며 크게 호평했다. 다만 레스토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벨레아니가 중대한 사명을 하사받기 며칠 전.
비밀스러운 회동이 소문난 레스토랑에서 열렸다.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 그들 중 절반이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었으며, 상석에 앉은 회동의 주체자 역시 아카데미 교복을 입었다.
“카텔.”
상석에 앉은 이가 이름을 불렀다.
“보고서는?”
검은 머리를 반으로 내려 묶은 레오니에가 팔걸이에 올린 팔에 한쪽 고개를 괴었다. 심드렁히 지은 표정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을 관조하는 것처럼 지루하면서도 어딘가 여유로워 보였다.
레오니에의 옆에 있던 카텔이 챙겨 온 봉투를 건네었다.
“…….”
보고서를 살피던 레오니에의 손이 잠시 멈췄다.
“모조품이 기승을 부린다고?”
“남부에서 시작된 피해가 며칠 전부터는 동부와 서부에서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흐음.”
레오니에가 숨을 짧게 내뱉었다. 무미건조한 한숨 한 번에 다른 이들은 자세를 고쳐 앉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바닥에 찬 땀을 허벅지에 몰래 닦아야 했다.
“…이번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개발 중이던 기술은 어떻게 되어 가지?”
“북부 광산에서 나는 광석 중 형광성 물질을 발견하여 도료로 제작했습니다.”
“내부 동력 장치를 드러내는 쪽은?”
“허락만 하신다면 언제든 제작 가능합니다.”
“그럼 그쪽부터 시작해.”
새로운 신상 홍보를 시작하는 동시에, 피해자들과 접촉해 어디서 모조품을 구매했는지 추적하라 지시했다.
“만약 모조품인 걸 알고도 샀다면…….”
자비와 가차 없이.
레오니에가 일부러 맺지 않은 끝말에 담긴 뜻이었다.
“모조품 생산한 놈은 생포해 둬.”
나중에 북부 지하 감옥에서 따로 면담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레오니에는 그런 식으로 보고서를 볼 때마다 지시 사항을 내렸다. 회동에 모인 이들은 전부 레오니에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될 사람들이었다.
“식사는 어떠셨나요?”
회동에 참석한 다른 이가 물었다.
“아주 좋아.”
레오니에가 차려진 음식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제야 긴장하고 있었던 이가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말이지.”
“그런 말씀 마세요. 주인님께서 주신 요리법이 얼마나 창의적이었는데요. 요리할 때마다 정말 즐거웠답니다.”
“내 사람들은 입에 침 발린 소리를 잘하네.”
비꼬는 듯한 농과 달리, 레오니에의 속내는 무척이나 기쁜 채였다. 그리고 사실 무척 안도했다.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는데…….’
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레오니에는 문득 이전 생에서 먹었던 음식, 특히 매운 음식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제국에는 매운맛을 내는 향신료나 식재료가 흔치 않았고, 이를 구하기 위해 레오니에는 개인 상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이국의 매운 향신료를 사들이고, 각 지역에서 전생의 음식을 만들 때 쓸 만한 식재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련해진 날들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만들어 보니 생각보다 주변 반응이 좋았다.
‘이거로 사업 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진짜로 레스토랑을 냈다. 요리법을 만들어 특허를 내고, 사람을 구해 자신의 요리법을 연구시키고 개발하게 했다. 그게 바로 지금 회동이 열리는 레스토랑, ‘지구’였다.
“레스토랑의 주인이란 사실은 어제 밝히실 건가요?”
“아직은 없어.”
아카데미 재학 중에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마저 알려지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게 뻔했다.
‘이 가게가 내 것이란 걸 알았을 때의 아빠 얼굴이 궁금하네.’
레오니에가 얼마 전 받은 보고에는 보레오티 가족도 이 식당을 예약했다고 한다. 레오니에는 기꺼이 제 가족들을 위해 가장 좋은 방과 가장 좋은 식사를 대접하게 했다.
‘엄마랑 레아는 당연히 놀랄 거고.’
그 모습이 선해 웃음이 절로 났다.
‘으음, 하지만 아빠는 알지도.’
눈치 좋은 펠리오라면 이미 알지도 모른다.
‘그런 거면 짜증 나지만…’
승부욕 자극으론 충분했다.
식사는 만족스럽고, 레스토랑이며 시계 브랜드며 모든 것이 성과를 보였다.
“…남은 건 하나로군.”
레오니에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올해 아카데미를 졸업한다.”
물론 아직 졸업까지 몇 달이나 남았음에도, 제국은 그에 상당히 관심을 보였다. 신문에도 언급될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대들도 알겠지만.”
레오니에가 덤덤히 말했다.
“난 나름 괜찮은 성과를 내었다고 생각해.”
그 말에 모두 동의했다.
“이대로라면 수석 졸업은 당연할 테지만…….”
“남은 것은 졸업 과제뿐이시군요.”
레오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는 확실한 게 좋아.”
어린 시절의 일들이 레오니에를 완벽주의자로 만들었다. 생물학적 부친에게 유일하게 배운 교훈이었다. 후환을 남겨서는 아니 되었다. 찝찝한 것 없이 개운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졸업 과제는 공동으로 할 거다.”
레오니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과제 주제가 발표됐다.
“바로 결혼식이다.”
“…네?”
카텔이 느리게 반응하다가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임신하셨어요?”
“아니.”
레오니에가 조금 더 확실하게 과제 주제를 설명했다.
“우리 부모님 결혼식.”
졸업 과제 주제는 ‘보레오티 공작 부부의 결혼식으로 파생될 경제적 파급 효과’였다.
* * *
졸업을 앞둔 레오니에는 어느새 열아홉이 되었다. 그리고 펠리오와 바리아의 결혼 생활은, 닷새 합방을 결혼식 대신으로 쳤던 날부터 계산하면 6년이 훌쩍 넘었다.
마침 벨레아니도 다섯 살이 되었다. 인간다운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나이였다. 그러하니 이제 그동안 미룬 결혼식을 해도 될 때였다.
“어휴, 저는 진짜 놀랐습니다.”
회동을 마친 후, 카텔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 기어코 주인님이 기사님과 속도위반이라도 저지르신 줄 알았어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 주세요.”
“넌 어째 울 엄마처럼 잔소리하니.”
“주인님 배 속에 또 다른 주인님이 계시다간 저희 모두가 끝이에요.”
펠리오에게 살해당하기 딱 좋았다.
“아아, 알았다고.”
잔소리가 듣기 귀찮아진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막았다. 그제야 카텔도 한숨과 함께 잔소리를 멈췄다. 그러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겨우 떠올렸다.
“왜 하필 결혼식인가요?”
저만 놀란 게 아니었다. 카텔은 이를 같이 듣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아직 선명했다. 다들 무슨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발톱 깎는 것을 본 것처럼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귀족이 아직도 결혼식을 안 하고 산다는 게 말이 되니?”
“뭐, 그거야…….”
카텔이 수긍했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보레오티 공작 부부는 결혼식이 귀찮다는 이유로 여전히 식을 올리지 않은 채로 지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당시에는 여러 말들이 나왔었다.
귀족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조금만 이상해도 온갖 추측을 퍼트리며 상대를 깎아내리는 음습한 곳. 그래서 카텔은 이왕 음습한 곳에서 살아갈 거면 가장 강한 주인에게 묻혀 살고 싶어 레오니에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럼 효도 차원?”
부모님을 향한 레오니에의 효심은 무척 유명했다.
“아니.”
레오니에가 비웃었다.
“내가 결혼하려고.”
카텔은 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냉큼 눈꺼풀을 꾹 내렸다. 안 그러면 너무 놀라서 눈알이 데구루루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어차피 결혼하실 거잖아요.”
“장담 못 해.”
레오니에가 혀를 짧게 쳤다.
‘넌 이 아빠랑 엄마가 결혼식도 안 했는데 결혼하려고?’
레오니에는 설마 펠리오한테서 저런 멍청한 핑계로 결혼 허락을 취소당할 줄 몰랐다. 당시 옆에 있던 바리아의 ‘내 남편이 저렇게 유치하고 귀여웠다니’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표정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래서 아주 그 핑계 다시는 못 대게 하려고.”
“하긴, 대귀족의 결혼은 준비할 것도 많으니까요.”
“마침 아빠랑 엄마의 합방, 아니, 합의된 결혼기념일이 겨울에 있거든. 그때 후딱 치워 버리련다.”
제 결혼을 방해하는 핑계는 다 치울 작정이었다.
“기사님은 정말 든든하시겠어요.”
과연 그 기사님은 저와 결혼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불효하는 레오니에의 진심을 알고 있을까.
“…….”
무조건 알지. 카텔이 몇 번 만났었던 스칸디아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러니 준비하자고.”
“에휴.”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졸업 과제였다. 하지만 그만큼 성취감이 클 것 같아서, 카텔은 구미가 당겼다.
“무엇부터 할까요?”
“이제부터 계획해야지.”
“그래도 준비해 두신 게 있죠?”
“물론.”
레오니에는 계획의 시작을 짧게 언급했다.
“일단 레아 데려와.”
* * *
“언니야!”
다음 날.
레오니에는 아카데미에 놀러 온 벨레아니를 맞이했다.
“어이구, 이 언니가 한번 안아 보자!”
“얍!”
기운찬 외침과 함께 품에 안긴 벨레아니는 볼 때마다 묵직해졌다. 그러나 레오니에는 한 팔로 가뿐히 안아 동생의 말랑한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만해.”
해 줄 만큼 해 줬다고 생각한 벨레아니가 레오니에의 입술을 손으로 밀어냈다.
“언니야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리광이야.”
“그치만 레아 볼이 말랑해서 좋은걸?”
“으휴.”
벨레아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야는 만날 사람을 이리 부르고 난리야.”
이젠 레오니에가 보기에도 벨레아니의 언변은 저를 빼닮은 것 같았다.
“네 아빠가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겠구나.”
레오니에는 흐뭇했다.
“안녕하십니까, 큰 아가씨.”
벨레아니와 함께 아카데미에 온 어린 기사가 예를 갖췄다.
“드디어 정식 기사가 되었군.”
레오니에가 알은체를 했다.
“그대의 누나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멜레스 레비페스 경의 동생인 포레 레비페스입니다.”
멜레스와 똑같은 잿빛 머리를 한 사내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누님에게 폐가 되지 않게끔 노력하겠습니다.”
멜레스는 현재 차기 부기사단장으로 선출되어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기대하지.”
그 말을 끝으로, 레오니에는 벨레아니와 함께 아카데미 정원을 산책했다.
“언니야 아까 엄청 멋있었어.”
벨레아니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 언니의 모습이 얼마나 근사하던지, 어린 마음에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거기다 지나가던 학생마다 레오니에를 알아보고는 공손히 인사까지 했다. 벨레아니는 그럴 때마다 제 언니가 엄청난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멋진 거야?”
“그거야 이 언니는 공작이 될 거니까.”
“공작!”
“차기 보레오티 공작이 바로 이 언니란다.”
“와아, 대단하다!”
벨레아니가 환호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인적이 드물어지고.
“…벨레아니 보레오티.”
레오니에가 진지한 어조로 여동생을 불렀다. 땅에 내려진 벨레아니는 다소곳한 자세로 레오니에를 올려다봤다. 마침 햇빛이 레오니에의 뒤를 비춰 후광을 만들었다.
“그대에게 중대한 임무를 내린다.”
그 덕에 벨레아니의 마음도 어느새 경건해졌다.
“중대한 임무?”
레오니에가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였다.
“그대에게 화동을 부탁하고 싶다.”
“공작님!”
벨레아니가 손을 들었다.
“화동이 뭐예요?”
“화동은 멋지고 예쁜 거다.”
“그럼 할래!”
“하지만 이것은 아빠랑 엄마에겐 비밀이다.”
“왜?”
“중대한 임무거든.”
멋진 사람은 비밀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며, 레오니에가 벨레아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킬 수 있겠나?”
“응! 아니, 네!”
“…….”
그러나 레오니에는 쉬이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도 그럴 것이. 요 입 싼 여동생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진짜 아빠랑 엄마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
“어휴, 걱정 마!”
벨레아니가 자신 있게 가슴을 팡팡 두들겼다.
“아니, 걱정이 엄청 돼…….”
네 전적을 생각해 봐. 이 맹랑한 것이 저와 스칸디아의 밀회를 펠리오에게 일러바친 전적만 해도, 얼추 떠오르는 것이 벌써 열 손가락이었다. 여동생을 바라보는 레오니에의 눈이 불신으로 가늘어졌다.
“…만약에 레아 네가 이 비밀을 부모님한테 말하면.”
여동생을 사랑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했다. 그래서 레오니에는 보험을 들고자, 무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앞으로 잘생긴 오빠들 그림 안 그려 줄 거야.”
“안 돼!”
“그리고 천사와 사냥꾼 동화책을 잘 때마다 읽으라고 유모한테 명할 거야.”
“으아아앙!”
벨레아니가 자지러졌다. 그제야 흡족해진 레오니에는 다음 계획을 구상했다.
* * *
“정말 졸업 과제로 결혼식을 하실 건가요?”
“왜? 네 장례식으로 바꿔 줄까?”
“영애는 농담도 잘하시네요.”
“내가 농담하는 거 봤니?”
레오니에와 테르는 졸업 과제를 논할 겸 도서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나저나 저도 같이해도 되나요?”
테르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일단은 파르두스잖아요.”
“선황 치세였다면 못했지.”
보레오티와 파르두스의 표면적 관계를 생각한다면, 각 가문의 자제가 모여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 황제는 북부, 특히 보레오티와 우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물며 두 가문이 사돈 관계가 될 예정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안 친한 게 문제고.”
레오니에가 테르와 척을 지는 모습을 보이면 지금의 정세가 다 가짜라고 의심받기 딱 좋았다.
“황제 폐하께 감사해야겠군요.”
테르가 교과서에 끼워 둔 종이를 내밀었다.
“조사한 자료입니다.”
최근 인기 있는 결혼 관련 유행 보고서였다.
“다 고만고만하군.”
보고서를 훑던 레오니에의 눈이 지루함을 담은 채로 가늘어졌다.
“대부분 신부를 아름답게 꾸미는 쪽이고…….”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울 엄마는 원래 주인공이라서 상관없는 부분이네.”
“보레오티의 실세시군요.”
“뭐…….”
대충 둘러대던 레오니에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신부가 친정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장신구로 꾸미는 게 유행이야?”
이런, 레오니에가 안타까워했다.
“울 아빠랑 내가 에르바누 몰락시켰는데.”
이런, 이번엔 테르가 슬퍼했다. 둘 다 진심이라곤 일절 없었다.
“몰수한 자산은 없습니까?”
테르가 아는 펠리오라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만일을 대비해 에르바누 재산과 귀중품을 보관해 뒀을지도 모른다.
“…….”
그리고 레오니에도 같은 생각이었다.
“가져와.”
조사해 봐, 알아봐.
이런 게 아니었다.
“전부.”
레오니에는 무조건 테르가 이를 알아내어 에르바누의 장신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테르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기쁜 마음으로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뻐하진 말고.”
어째 저건 자랄수록 제 할아버지를 닮아 가는 건지. 레오니에가 파르두스 전 후작을 떠올렸다. 이젠 작위를 물려주고 정계서 물러난 능글맞은 영감은 여전히 아니꼬운 존재였다.
“네 할아버지는 잘 지내시니?”
“무척 정정하시죠.”
“이런.”
레오니에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퍽 아쉬운 소식이었다.
여기에도 진심은 썩 없었다.
* * *
“…재미난 과제를 하시는군요.”
스칸디아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 역시 저를 위해서라고 감히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되지요.”
레오니에가 손가락으로 스칸디아의 코끝을 톡톡 두들겼다.
“피곤하시진 않고요?”
커다란 손이 나비처럼 장난치는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곧 두 손은 깍지를 끼며 굳게 잡혔다.
“피곤해.”
레오니에가 맞잡은 스칸디아의 손등에 입술을 쪽 맞췄다.
“그리고 이제 가야 해요.”
“…….”
“그리 삐치지 말고.”
“매번 느끼는 거지만, 섭섭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레오니에의 허리에 굵직한 팔이 둘렸다. 그대로 다시 침대로 쓰러지니, 심통 난 아이처럼 삐친 스칸디아가 불쑥 나타났다. 레오니에가 피식했다.
“이리 귀여우니까, 어서 과제를 해야죠.”
그래야 얼른 결혼하지. 레오니에가 손을 뻗자,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던 스칸디아의 불퉁한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행복해진 강아지가 냉큼 주인의 입술을 삼켰다. 커다란 손이 주인의 살갗 위를 더듬어 열기를 올리니, 곧 만족스럽다 못해 애가 닳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아랫배가 뭉근해지는 순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레오니에와 스칸디아는 아직 선을 넘지 않았다. 스칸디아는 작년에 성인이 되었지만, 레오니에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두 사람의 사귐에는 분명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둘은 이를 철저히 지켰다.
양쪽 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결코 그 선을 넘지 말자고. 그러니 그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는 재미나게 즐기자고.
“이제 곧이군요.”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옷을 손수 정돈해 주며 말했다.
소매 단추를 잠그는 손가락은 그 두꺼운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섬세하게 움직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나 졸업하면 울겠네.”
레오니에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팔을 흔들었다. 덩달아 소매를 정리해 주던 스칸디아의 팔도 따라 흔들거렸다.
이어 두 사람은 밀회의 장소에서 벗어났다. 밀회 장소는 항상 바뀌었고, 찾기 어려운 곳만 속속들이 골라냈다. 으슥한 골목을 몇 번인가 이리저리 꺾고 돌아 나오니 이내 확 트인 광장이 나왔다. 복작거리는 인파 속에 둘은 자연히 섞여 들었다.
레오니에는 그제야 머리를 감추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반으로 내려 묶은 검은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결혼식이라…….”
스칸디아가 꿈처럼 중얼거렸다.
“확실히 대귀족이 결혼식을 안 하는 건 좀 이상하죠.”
결혼식으로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건 으레 있는 일이고, 귀족들은 이를 통해 가문의 위세를 판단한다.
‘보레오티는 예외겠지만.’
안 한다고 해도 그들의 위용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데도 기어오르는 것들이 있으니까, 대귀족들은 기를 죽이는 목적으로 항상 가문과 관련된 행사를 보란 듯이 크게 열었다. 그러니 이번 대 보레오티는 상당히 독특했다.
“엄마가 좀 싫어했거든요.”
레오니에가 답했다. 친정인 에르바누가 결혼을 통해 괜한 짓을 할 것만 같아 걱정되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랑 내가 엄마 친정을 멸문시켰죠.”
“잘하셨습니다.”
스칸디아가 칭찬했다.
“가족임에도 가족이 아닌 것들은 존재하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말끝을 흐린 스칸디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는, 도와드릴 게 없습니까?”
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결혼식인데, 사위가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스칸디아는 저도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하겠다고 말했다.
“저야 고맙지만…….”
레오니에가 물었다.
“안 바쁘겠어요?”
스칸디아는 최근 인수인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레오니에의 졸업과 함께 북부로 아예 이주할 계획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두 분의 결혼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겁니다.”
“우리 뿜뿜이…!”
감동한 맹수가 든든한 팔뚝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레오니에는 기쁜 마음으로 스칸디아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움직이는 데 제약이 있거든요.”
“유명인이니까요.”
스칸디아가 레오니에의 귀밑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레오니에가 준비하는 부모님의 결혼식은 비밀이었다. 그런데 레오니에는 이미 제국의 유명인이었다. 졸업도 전에 졸업 이후의 행보를 예측하는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였다. 만일 전면에 나서 움직이면 부모님께 들킬 게 뻔했다.
“그럼 전 무얼 하면 될까요?”
“으음…….”
레오니에가 생각해 두고 있던 것을 말했다.
“사실 서부에서 자란 꽃을 조달하고 싶어요.”
북부에도 꽃은 피지만, 겨울에는 구하기 힘들었다. 바리아가 임신했을 때 펠리오가 저택 내에 만든 실내 정원과 정원에 설치한 유리온실이 있긴 했다. 하나 그걸 쓴다는 건, 부모님께 제 계획을 자진해서 밝히는 꼴이었다.
“공작 부인께선 남부 출신이지 않습니까.”
스칸디아가 물었다.
“남부의 꽃이 화려하기로 유명한데, 그것들을 안 쓰시고?”
“으음, 그치만 엄마랑은 안 어울리지 않나요?”
남부의 화려함보다는, 서부의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이 바리아에게 잘 어울렸다.
“꽃 조달은 우피랑 같이 해 주세요. 우피가 자기 상단을 통해 알아본다고 했거든요.”
“리네 백작 영애 말이군요.”
“하지만 우피가 제 가문 상단을 이용했다가는, 백작 아저씨가 알아 버릴 텐데…….”
말끝을 흐린 레오니에가 스칸디아를 힐끔 올려봤다. 뜻을 알아차린 스칸디아가 빙그레 웃었다.
“들키지 않게끔 제가 도우면 되겠군요.”
* * *
레오니에는 제 유명세 때문에 쉬이 움직이기 힘들었다.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아카데미 안팎으로 레오니에의 손발이 되어 대신 움직였다.
“선배님! 이거 확인 부탁드립니다.”
“보레오티 영애, 명하신 것을 찾아왔습니다.”
“기사 오빠 덕분에 꽃을 구하긴 했는데, 그 오빠는 그런 비정상적인 경로는 어찌 안 거래요?”
“레오니에 님, 이대로 진행할까요?”
그러나 계획을 진두지휘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오롯이 레오니에의 몫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오늘은 카텔이 테온 남작과 함께 보레오티 저택에 방문했다.
“공작 부인, 그간 잘 지내셨나요? 작은 아가씨도 안녕하세요?”
“카텔 안녕!”
벨레아니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니? 레오 심부름?”
“주인님께서 가족분들께 옷 선물을 해 드리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공부하느라 바쁜 애가 참…….”
뭐 하러 이런 것까지 챙기냐고 타박하는 말투치곤, 바리아의 얼굴엔 기쁨의 홍조가 선명했다.
“그럼 치수를 재겠습니다.”
테온 남작은 함께 온 직원들과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레오는 잘 지내니?”
“주인님은 언제 어디서건 항상 빛나는 존재시랍니다.”
“카텔은 꼭 인세레아처럼 말하네.”
바리아가 키득거렸다.
“저와 루코스 자작 부인은 영혼의 동반자랍니다. 보레오티 영애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요.”
“울 언니는 멋져!”
벨레아니가 크게 외쳤다.
“그럼, 네 언니는 멋지지.”
“레아도 멋지지?”
“작은 아가씨도 엄청 멋있죠.”
카텔이 양손 엄지를 내밀며 치켜세웠다. 벨레아니가 턱을 높이 들었다.
“아, 여보.”
바리아가 마침 나타난 펠리오를 불렀다.
“레오가 우리 옷 선물해 주고 싶다면서 사람들을 보냈어요. 당신도 이리 와서 치수 재요.”
“바쁜 와중에 뭔 짓인지.”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펠리오의 몸은 이미 치수를 얌전히 재고 있었다.
“아빠는 얼마나 커?”
치수를 다 잰 벨레아니가 줄자를 들고 와서는 펠리오의 긴 다리에 척 가져다 대며 놀았다. 그리고 종국엔 펠리오의 어깨까지 등반해 목마를 탔다. 펠리오는 그 와중에도 묵묵히 치수를 쟀다.
“보레오티 영애는 제 영감의 원천이시죠.”
치수 재기를 마친 테온 남작의 떨리는 목소리엔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다.
“그분만큼 유행을 선두하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빈말 따위가 아니었다.
테온 남작에게 레오니에는 은인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꽃피울 기회를 만들어 줬다. 타고난 실력에 레오니에가 이따금 툭툭 던져 주는 기발한 발상들을 빠르게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창조했다.
“밖에서 그런 말은 자중하게.”
레오가 거만해질 수 있다며 펠리오가 걱정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단 걸 알 수 있었다.
“좋으면서 아닌 척은.”
바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호호 웃었다.
“딸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이라 이해하십시오.”
“그럼 난 딸을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으로 선물을 기쁘게 받을래요.”
“레아도 기쁘게 받을래!”
벨레아니의 우렁찬 외침에 어른들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레오는 졸업 과제로 뭘 할까요?”
바리아가 벨레아니의 삐뚤어진 신발을 고쳐 신겼다.
“리오 당신은 뭐 했어요?”
“저는 투자였습니다.”
동부 마탑에서 진행하던 마도구 개발 사업에 투자해 큰 이득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거 아카데미에서 경제학 강의 들을 때 배웠어요.”
그게 당신 과제였구나, 바리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펠리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낮춰 바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그런 와중에 목마 탄 벨레아니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쪽 팔로 단단히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주인님은 부모님 닮으셨네.’
사랑하는 이에겐 한없이 다정한 게 똑같구나.
카텔은 화목한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감상했다.
“그리고 디저트 사업에도.”
“디저트요?”
“단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달지 않은 것 좀 유행시켜 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되었죠.”
“당신도 잘 안 되는 게 있군요.”
“사람은 사람인지라.”
하지만 결국 후원한 디저트 사업에서 몇 년 후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레오니에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 맛 사탕, 벨레아니가 환장하는 캐러멜 푸딩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리아 그대는 뭘 했나요?”
“저는 평범했어요.”
딱히 자랑할 건 아니라며 바리아가 수줍어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라…….”
손가락까지 배 언저리 앞에 모아 꼬물거리기까지 했다.
“시대별 특징과 함께 당대 만행했던 고문 기술의 유례 및 발달 과정을 조사했어요.”
“…….”
“근데 의외로 평이 좋아서 책으로도 나왔어요.”
당시 스승이었던 아르데아가 좋게 평가한 덕분이라며, 여기 저택 서재에도 있다고 바리아가 은근슬쩍 자랑했다.
“아빠.”
벨레아니가 펠리오의 머리칼을 꾹꾹 잡아당겼다.
“꼬문이 뭐야?”
“꼬문이 아니라 고문.”
“그게 뭔데?”
“우리 집 여자들이 늘 아빠한테 하는 거.”
“아빠한테 하는 거…….”
우웅, 벨레아니가 입술까지 삐죽이며 고민했다.
“뽀뽀?”
“아직은 살 만하군.”
펠리오가 벨레아니의 다리를 토닥거렸다. 하지만 둘째도 곧 제 엄마와 언니처럼 될 거란 미래가, 펠리오는 아주 조금 안타까웠다.
“…주인님께선.”
카텔이 잠시 혼미했던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바리아의 충격적인 졸업 과제 주제에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북부 축제로 발생하는 경제적 파급 효과를 주제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카텔이 밑밥을 뿌렸다. 만약 부모님들이 저의 졸업 과제에 호기심을 보이면, 이리 말해 두라고 레오니에가 명했었다.
“어쩐지 관련 서류가 계속 올라온다더니.”
펠리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대한다고 전하게.”
“네, 공작님.”
카텔이 깍듯이 답했다.
* * *
“근데 진짜 축제를 여시나요?”
“울 부모님 결혼식 말고?”
끄덕끄덕, 플로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레오니에는 이 결혼식을 단순히 저의 결혼 방해물 제거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할 각오였다.
“과제 주제가 결혼식으로 파생될 경제적 파급 효과잖아.”
“네.”
“결혼식은 말 그대로 경제를 파생할 뿐이지.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돈을 벌 만한 짓은 따로 생각해 둬야 해.”
“하긴…….”
결혼식은 돈을 소비하는 행사이지, 버는 행사는 아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레오니에가 고민했다.
“북부는 돈 벌 기회를 못 살리는 것 같아.”
[다음 권에 계속.]